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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시간은 강물과 같다. 골짜기로 역류하지 못하듯, 과거로 회귀하지 못한다. 영원히 물러나지 않을 듯한 동장군도 순리에 따라 서서히 퇴장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남녘에서부터 밀려 오는 봄기운이 차지한다. 전라북도 산골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기다리던 봄을 맞이하는 통로 다. 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춘기(春氣)를 쫓아 섬진강 하류인 곡성과 구례, 하동으로 향했다. 밤사이 피어나는 꽃처럼, 그곳은 어느새 봄이었다. 사진 이진욱 기자 · 박상현 기자 섬진강의 시나브로 찾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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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Special - img.yonhapnews.co.kr · 오산 사성암(四聖庵)은 구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바위가 많아 소금강에 비유되기도 하는 오산은

Special

시간은 강물과 같다. 골짜기로 역류하지 못하듯, 과거로 회귀하지 못한다. 영원히 물러나지

않을 듯한 동장군도 순리에 따라 서서히 퇴장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남녘에서부터 밀려

오는 봄기운이 차지한다. 전라북도 산골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기다리던 봄을 맞이하는 통로

다. 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춘기(春氣)를 쫓아 섬진강 하류인 곡성과 구례, 하동으로 향했다.

밤사이 피어나는 꽃처럼, 그곳은 어느새 봄이었다.

사진 이진욱 기자 · 글 박상현 기자

섬진강의 시나브로 찾아온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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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은 섬진강 봄놀이의 출발점으로 제격이다. 추억

을 떠올리게 하는 증기기관차에 오르면 강가에 스민 온기

를 체감할 수 있다.

첫째 굽이, 곡성

새봄으로 떠나는 기차

남도 안에서도 바닷가와 산골은 기후나 경관이 천양지차다. 곡성(谷

城)은 노령산맥의 줄기에 위치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촌이다. 1월

평균기온도 바다에 면한 여수나 완도보다 2~3도 낮다. 그래도 서울

보다는 겨울이 짧고 온난하다.

임실과 진안에서 솟아나 굽이치며 흐르던 물은 남원을 관통하는 요천

과 합쳐져 어엿한 ‘강(江)’의 면모를 띤다. 곡성은 섬진강의 두물머리

이자 구례와 하동, 광양으로 이동하는 기나긴 여정의 중간 기점이다.

곡성에서 섬진강변은 고도가 가장 낮고 따뜻한 지점이다. 볼거리 또

한 이곳에 몰려 있다.

기차 여행은 곡성에서 봄을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새로운

역사(驛舍)가 세워지고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순간에 기능을 상

실한 기차역과 선로는 옛것을 간직한 명소가 됐다. 근대문화유산으

로 등록된 예전의 곡성역은 ‘섬진강 기차마을’로 변신했다. 대합실은

물론 플랫폼과 주변 모습이 수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정감과

향수가 느껴진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품종의 장미를 보유하고 있다

는 장미공원과도 연결된다.

섬진강 기차마을에서는 요란한 경적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증기기관

차가 운행된다. 증기기관차는 1899년 국내에 도입된 뒤 20세기 중

반까지 승객과 화물을 수송했다. 세 량으로 구성된 기차마을의 기관

차는 평균 시속 30㎞ 안팎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목적지는 옛 곡성

역에서 약 10㎞ 떨어진 가정역으로, 느린 속도 덕분에 철길 아래로 펼

쳐지는 섬진강의 경치가 더욱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페달을 밟아 전진하는 레일바이크는 침곡역과 기차마을에서 탈 수 있

다. 옛 곡성역과 가정역의 중간쯤에 위치한 침곡역에서 레일바이크에

탑승하면 속도를 조절하며 춘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기차마을 레일바

이크의 경로는 주변을 순환하도록 설계돼 있다.

곡성 증기기관차에는 칸마다 ‘심청호’,

‘기차마을호’, ‘섬진강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모두 곡성을 대표하는

인물과 장소이다. 기관차는 도로보다

높은 철로 위를 덜컹덜컹 달린다.

섬진강 기차마을에서는 고풍스러운 역사에서 증기기관차에 탑

승할 수 있다. 또 열차를 개조한 펜션에서 묵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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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는 곡성보다 산이 높고, 골이 깊다. 험준한 지리산과 백운산

에 포위된 평지 사이로 섬진강이 흐른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택

리지(擇里志)’에는 “구례 남쪽의 구만촌(九灣村)은 거룻배를 이용

해 생선과 소금 등을 얻을 수 있어서 가장 살 만한 곳”이라고 기

록돼 있다. ‘구만촌’은 구례 시가지에서 4㎞ 남짓 되는 오늘날의

구례구(求禮口)로 짐작되는 마을이다. 조운이 가능했을 정도로

섬진강은 구례에서 더욱 폭이 넓어진다.

오산 사성암(四聖庵)은 구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바위가 많아 소금강에 비유되기도 하는 오산은 최고 높이가

530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꼭대기에 다다르면 섬진강과 구례

읍, 지리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 아래 첩첩한 봉우리가 끝

없이 이어지고, 강물은 대지에 굵직한 획을 긋는다.

정상부에 세워진 사성암은 544년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

져 있다. 이후 원효, 도선, 진각 등 명망 있는 승려들이 이곳에서

수행해 ‘사성암’이라고 불린다. 바위 중턱에 자리한 암자를 올려다

보면 기다란 나무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경이감이 들 만

큼, 모양새가 사뭇 위태롭다. 벼랑 끝에 선 심정과 간절한 마음으

로 기도와 참선을 하려는 사람들이 사성암을 방문하는 이유다. 작

은 암자지만, 소망이 적힌 기와의 양도 상당히 많다.

사성암에는 불당 외에도 암벽에 음각된 고려시대 불상인 마애여

래입상과 수령이 800년에 달하는 귀목나무, 소원을 성취시켜 준

다는 바위가 있다. 모두 영험함이 느껴지는 대상이다.

오산에 발을 디디면 귓가를 맴도는

소리가 없어 적요하고, 머릿속의 잡념이 사라져

정신이 명징해진다. 잠시나마 속세의 번민을

잊고 삶에 초연해진다.

지난겨울 하얀 눈(雪)을 이고 있던 백목련 나뭇가지 끝에 눈이 텄다.

유난히 양지 바른 고택 마당에서 조우한 풍경이다. 단단하고 자그마

한 눈에는 다가올 봄이 숨어 있었다.

둘째 굽이, 구례

따스하고 소박한 고장

사성암은 독야청청하는 선비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 지난해 불어

닥친 강력한 태풍에도 암자는 온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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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는 길쭉한 행랑채와 ‘T’자형의 사랑채, ‘ㄷ’자형의 안채로 구성된다. 각각의 공간은

담으로 구획돼 있으나, 좁은 문을 통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양반 가옥답게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독특한 쌀독이 비치돼 있다.

‘누구든지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구제와 공생의 개념이 담겨 있다.

운조루의 안주인이 생각해 낸 흥미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셈이다.

하루 먼저 봄을 만나고 싶다면 구례 운조루로

가야 한다.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햇빛이 깃들

어 포근하다. 고택 주위를 거닐며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햇살을 머금은 고가, 운조루

봄은 식물이 먼저 감지한다. 삼한사온이 계속되다 기온이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릴 즈음, 월동(越冬)을 끝내고

영춘(迎春)을 시작한다. 달력도 온도계도 없지만, 공기와 바람만으로 때를 파악한다. 간혹 철모르는 꽃봉오리

가 한두 개 먼저 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시기에 군무를 하듯 일제히 꽃잎을 벌린다.

전통 가옥인 운조루(雲鳥樓)는 옛날에 금가락지가 떨어졌다는 명당자리에 지어졌다. 섬진강이 멀지 않은 지리

산의 끝자락에 터를 잡았는데, 주춧돌을 세울 때 커다란 돌거북이 출토됐다고 전해온다. 남향이어서 마당에는

종일 햇빛이 비치고, 주변을 돌아보면 지세가 평탄해 편안한 기분이 든다.

운조루는 한낮에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금세 노곤해질 만큼 따스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수목은 봄을 빨

리 준비한다. 담장 밖은 메마른 가지만이 무성한데, 안쪽에선 꽃잎을 밀어 올리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특히 안마

당에 있는 소담스러운 목련이 개화를 서두른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글자를 따온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시

대 영조 때 낙안군수를 지냈던 류이

주가 은퇴한 뒤 기거할 곳으로 건축

했다. 당시의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

으로, 지금도 사람이 살아가는 살림

집이다. 규모가 줄었어도 기품과 위

세는 여전하다.

지리산의 물을 끌어다 조성한 연못

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서면 큰사랑

채와 마주한다. 오랜 세월과 손때의

흔적 때문에 군데군데 낡았지만, 오

히려 새집보다 매력적이다. 마당에서

는 투호와 널뛰기 같은 민속놀이를

경험할 수 있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도 많다. 안채는 생

활공간이라 둘러보기 조심스럽지만,

눈길을 끄는 흥미로운 부분이 적지

않다. 이층집처럼 다락방이 설치돼

있고, 벽에는 민화가 걸려 있다. 거북

을 닮은 맷돌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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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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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따뜻함이 무르익을수록, 섬진강변 항아리에 담긴 매실도 조금씩 숙성된다.

겨우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한 해 농사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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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가 많다는 뜻의 ‘다사(多沙)’. 하동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다사촌’이라고 불렸다. 통일

신라시대에 ‘하동’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지명에는 ‘다사’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재미있

는 사실은 섬진강의 옛 이름 또한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섬진강의 하동 유역은 고운 모래로 유명했다.

여기저기에서 골재 채취가 진행되고, 지형이 바뀌면서 섬진강의 은모래는 크게 줄었다.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 곳이 하동송림 앞이다. 여느 바다 해변처럼 모래톱이 넓은 이곳에는

새들이 날아들고, 다양한 담수생물이 서식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그윽하고,

아늑하다. 곡성과 구례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정경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하동송림은 반짝이는 강물을 배경으로 삼림욕을 하기에 좋은 곳이

다. 수령 200~300년의 낙락장송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땅에는 솔가지와 솔방울이

널려 있고, 햇빛이 통과되지 못할 정도로 잎이 무성하다. 솔숲의 싱그럽고 맑은 공기는 피

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심신을 정화시킨다.

하동의 섬진강에는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

가 걸려 있다. 벚꽃으로 이름난 화개면부터 광양제철소 건너편의 금성면까지 도로가 이어

져 있다. 차도는 물론 자전거와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목재 데크도 곳곳에 정비돼 있다.

특히 재첩마을 인근에서는 갈대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을 수 있다. 바싹 마른 갈대들은

강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하동(河東)은 ‘큰물의 동쪽’이라는 의미이다.

큰물은 곧 섬진강이다. 지리산과 남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하동은 지형의 높낮이차가 크다.

북쪽에는 고산준령이, 남쪽에는 리아스식 해안이 있다.

또한 고찰과 문화재도 많은 편이다.

하동은 남해와 섬진강을 모두 품고 있는 곳이다. 곡성과 구례보다 날씨가 더

온화하고, 섬진강의 물결도 잔잔하다. 바다가 몰고 온 봄바람은 살랑거리며

만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셋째 굽이, 하동

물줄기 따라 불어오는 춘풍

고로쇠 수액은 경칩을 전후해 추출

한다. 봄철에만 마실 수 있는 음료로

당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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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는 차나무가 많아 꽃이 없어도 황량하지 않다.

찻잎에는 은은한 광택이 있어 더욱 볼만하다. 차는 강우량이 많고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는데, 하동의 차는

품질과 맛에서 첫손에 꼽힌다. 화개에서는 식용유와 식초에까지

녹차를 넣은 건강식도 맛볼 수 있다.

3월부터 섬진강 하류에는 꽃들이 지천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에서는 매화가, 하동에서는 벚

꽃과 배꽃이 핀다. 연한 빛깔의 꽃잎들이 강물 위로 흩날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이

른 봄에 길을 나서 꽃구경을 못하더라도, 상춘(賞春)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인파가 적어

여유를 부리며 다닐 수 있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악양은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의 드넓은 평야 지대로 풍요롭고 정겨운 곳이

다. 흥미롭게도 들판 위에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인 ‘부부송’, 바위에 걸터앉은 형상의 ‘문암송’,

11그루가 하나의 나무를 이루는 듯한 ‘십일천송’ 등 기이한 소나무가 많다. 또한 구례 운조루 같

은 전통 가옥인 조씨 고가도 세워져 있다.

악양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석지기 최치수와 그의 무남독녀 서

희가 머물렀던 ‘최참판댁’은 2001년 준공됐지만,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것처럼 여겨진다.

소설의 내용을 토대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별당, 사당이 지어졌다. 솟을대문 너머로 보이는 경

치가 무척 수려하다. 이곳에는 최참판댁 외에도 박경리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평사리 문학

관과 장터, 초가집이 조성돼 있다.

악양과 북쪽의 화개에서는 푸른 차(茶) 덕분에 입춘이 지나면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화개는

우리나라에서 차를 처음 재배한 지역으로 비탈을 따라 차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엄동설한을 견뎌

낸 찻잎은 벚꽃이 질 무렵인 곡우부터 수확을 시작한다. 왕에게 진상했다는 하동의 녹차에는 섬

진강과 지리산의 봄기운이 응축돼 있다.

이병주 문학관은 하동에서 사천으로 넘어가는

경전선 철로 인근에 자리한다. 하동 출신의 작

가인 이병주는 40대에 등단해 우리 민족의 역사

를 소재로 한 소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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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를 유유히 흐르던 섬진강은 하동과 광양을 지나 망망한 남해에 합수된다.

하동 금오산에 서면 강해(江海)와 산수(山水)가 빚는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굴곡진 육지와 수많은 섬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먼바다로 나아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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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

물의

빛깔

을 보

면 초

록은 동색이 아니다.

무심코 대하던 식탁에 어느 날 신선한 나물이 오르면 비로소 봄이

왔다는 신호다. 최근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채소가 많지만,

자연에서 자란 나물은 맛과 향이 더욱 진하다. 섬진강 주위에 솟은

산에서는 봄볕을 자양분 삼아 나물이 우후죽순 뻗어 나온다.

노지에서 채취하는 대표적인 봄나물은 냉이와 달래이다. 구수한 된

장찌개에 넣어도, 매콤하게 무쳐서 먹어도 특유의 쌉싸래함과 알싸

함이 가시지 않는다. 참나물과 취나물은 아삭아삭 씹히는 맛으로

생기를 전하고, 봄동은 제법 달콤해서 구미를 당긴다. 흔한 나물인

쑥과 씀바귀도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이처럼 다채로운 나물은 시골 오일장에서 만날 수 있다.

섬진강변에는 평판이 괜찮은 장터가 많은데, 그중 구례

오일장이 가장 북적거린다. 청정한 지리산에서 따온 각종

나물과 약재를 직접 살펴보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는 다른 넉넉한 인심과 흥겨운 분위기도

경험할 수 있다. 오일장은 구례 이외에 곡성과 하동에서

도 열린다.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언제나 길손을 맞

이하는 하동 화개장터로 향하면 된다.

추위가 물러가면 섬진강에는 진객이 나타난다. 압도적인

크기의 강굴이다. 설이 지나고 벚꽃이 필 때까지 먹을 수

있어서 ‘벚굴’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껍데기가 어른 손바닥

보다 큰 강굴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역(汽水域)에

서만 생장한다. 또한 양식이 불가능해 모두 자연산이다.

강굴은 날것으로 즐기기도 하지만, 굽거나 익히면 풍미가

살아난다. 숟가락보다 큰 강굴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하다 보면 바다의 향기와 함께 포만감이 밀려든다.

묵은 김치를 곁들이면 물리지 않는다.

손톱만 한 조개인 재첩은 강굴의 철이 끝날

즈음 돌아온다. 하동에서는 ‘갱조개’라고도

하며, 섬진강의 고운 모래 위에서 살아간다.

산란기인 한여름을 제외하고 봄과 가을에 잡

는데, 살이 오르는 봄 재첩의 맛이 더 뛰어나다.

살집은 보잘것없이 작지만 재첩의 맛은 진하다.

특히 껍데기째 끊인 재첩국은 시원하고 감칠맛이 있어

서 해장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숙회나 덮밥, 전으로

먹어도 재첩의 강한 향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Y

싹이 움트고, 온기가 충만해지는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에서는 나물이 돋고, 강에서는 싱싱

하고 특별한 먹을거리가 생겨난다.

섬진강의 별미

봄은 입이 먼저 느낀다

시각뿐만 아니라 미각과

후각도 만족해야 진정 행복한 여행이다.

섬진강에는 깨끗한 토양과 맑은 물이 기른

식자재가 풍부하다. 원기를 채워주는

봄나물과 강굴, 재첩은 거창한 요리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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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매화

조선 초기의 문신인 강희안은 원예에 관한 책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서 꽃과 나무를 벼슬처럼 9품으로 나눈다면 매화는 1품이라고 했다. 매

화는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 선비정신을 상징하기도 했다. 광양 다압

면에는 대로변은 물론이고 산등성이까지 매실나무가 빽빽한 매화마을

이 있다. 3월 초부터 하얀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해 3월 말에 절정을 이

룬다. 청매실농원에서는 매화와 섬진강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구례 산수유꽃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볼품없지만, 무리를 이

루면 아름다운 꽃이다. 개화 시기가 매화보

다는 늦고, 벚꽃보다는 빠르다. 만개하면 마

치 산야에 샛노란 눈이 내린 것처럼 화사하다.

산수유꽃은 전국 어디에서나 피지만, 구례 산

동면이 유명하다. 산동면은 국내에서 처음으

로 산수유가 재배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동, 구례 벚꽃

꽃놀이 가운데 으뜸은 단연 벚꽃이다. 가

장 화려하고, 매혹적이다. 하동 화개장터

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 벚꽃길은

최고의 벚꽃 명소이다. 연인이 손을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고 해서 ‘혼례길’이라

고도 불린다. 구례에서는 사성암 아래 섬

진강 길을 따라 벚꽃 터널이 만들어진다.

구례 야생화 압화전시관

지리산이 인접한 구례는 야생화로 이름난 곳이

다. 야생화를 눌러 만드는 압화(押花)는 구례

의 특산물인 꽃을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고

안됐다. 화려한 꽃뿐만 아니라 식물의 열매와

뿌리, 줄기가 모두 압화의 소재가 되고, 천연

소재를 사용해 염색한다. 구례는 1999년부터

국내 유일의 압화 대전을 열고 있으며, 올해도

4월 26일에 시상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하동 차문화센터

차밭이 많은 화개면에 자리한 박물관으로 2008년 개장했다. 전시관에는 한국 차의 역사가 통

일신라시대부터 설명돼 있고, 차와 관련된 유물이 진열돼 있다. 또한 하동 차의 재배 조건과 특

징도 알아볼 수 있다. 체험관에서는 차를 덖고 만드는 방법과 전통 다례를 배울 수 있다. 차를

수확하는 시기에는 제다(製茶) 과정 전부를 체험할 수도 있다. 판매장에서는 하동에서 재배된

다양한 차와 다기 등을 구입할 수 있다.

하동공원

하동 시가지와 섬진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

한 공원이다. 지대가 높아서 읍내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시가 적힌 비석이 놓여 있

다. 특히 섬진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은 전망대와

섬호정이다. 섬호정은 수령이 부임할 때 영접문으로

사용하던 정자로 1870년 옮겨지었다.

고로쇠축제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인 고로쇠 약수가 많이 나오길 기원하는 행

사이다. 하동과 광양에서 열리며, 전통 의식과 제례가 거행된다. 고로쇠

약수는 각종 성인병, 관절염, 신경통, 위장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차문화축제

차를 소재로 한 이색 체험이 가능한 축제이다. 섬진강변 백사장에서 방

석을 깔고 앉아 달빛 아래서 차를 마시는 ‘달빛차회’, 궁중 차문화를 체

험하고 100여 가지의 차와 다식을 시식하는 ‘차인한마당’ 등의 프로그

램이 마련된다.

세계장미축제

곡성 기차마을에 조성된 장미공원에서 봄날의 마지막 축제가 개최된다.

형형색색의 장미가 만발한 꽃밭에서 음악회와 공연이 펼쳐진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장미공원에서는 6월 내내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된다.

I n F o r m a t I o n

곡성 도림사(道林寺)

구례 화엄사의 말사로 동악산 남쪽 기슭에 자

리 잡고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했고, 9세기 후

반 도선국사가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절의 명

칭은 도인들이 숲처럼 모여든다는 의미에서 지

어졌다. 계단을 올라가 경내에 들어서면 보광

전, 응진전, 명부전 등이 마당을 에워싸고 있

다. 사찰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계곡은

넓고 깊다. 인근에는 오토캠핑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캐러밴과 오두막집, 야영장 등의 시설이

있다.

섬진강 하류에는 강변을 따라 도로가 조성돼 있어서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다. 곡성에서 구례까지는 17번 국도, 구례에서 하동까지는

19번 국도, 구례에서 광양까지는 861번 지방도로가 놓여 있다. 또한 전라선 열차를 타면 전주, 임실, 남원을 거쳐 곡성과 구례까지 갈 수

있다. 순천과 여수에서도 기차로 이동할 수 있다. 섬진강 주변에는 상춘객을 유혹하는 ‘천상의 화원’이 많다. 꽃이 유

독 일찍 피어나는 편이어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

가볼 만한 곳

함께 들르면 좋은 축제꽃으로 물드는 봄날의 섬진강

곡성, 구례, 하동, 광양의 봄 축제

축 제 명 칭 개 최 시 기 장 소

하동 고로쇠축제 3월 초순 하동군 청암면 청학동

백운산 고로쇠약수제 3월중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약수제단

광양 국제매화문화축제 3.23 ~ 3.31 광양시 전역

산수유꽃축제 3.29 ~ 3.31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온천 관광지 일원

섬진강변 벚꽃축제 4.6 ~ 4.7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죽연~동해마을)

화계장터 벚꽃축제 4월중 하동군 화개면 일원

하동 야생차문화축제 5월중 하동군 화개면, 악양면 일원

곡성 세계장미축제 5월중 곡성군 섬진강 기차마을 장미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