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이씨의 입향과 세거 전통마을의 전형, · 산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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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기록인 2013 SUMMER + Vol.23 59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인 1440년대 중반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하여 개척한 성산이씨(星山李氏) 동성마을이다. 행정 이름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이다. ‘한개’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우리말로 한자로는 ‘대포(大浦)’라고 쓴다. 더러는 ‘한계’ 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큰 나루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예전에 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이동하던 나룻배가 마을 앞 백천까지 이르 러, 각 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마을 모습은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작은 하천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주산인 영취산 줄기에서 나온 좌청룡·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 사이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한개마을은 오 랜 세월 그 원형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 때문에 2007년 중요민속 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세간에서는 ‘옛 골목길이 아름다운 마을’, ‘전통마을의 전형’으로 일컬어진다. 마을 안에는 75여 채의 가옥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외곽으 로는 주로 일반가옥이, 마을의 중심부와 뒷산 쪽에는 오래된 와 가(瓦家)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가옥 가운데 10점이 지방지정 문화재이다. 교리댁(校理宅)·북비고택(北扉古宅)·한주종택(寒 洲宗宅)·월곡댁(月谷宅)·진사댁(進士宅)·도동댁(道東宅)·하 회댁(河回宅)·극와고택(極窩古宅)·첨경재(瞻敬齋)·삼봉서당 (三峯書堂)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교리댁은 1760년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집이다. 한개마을은 입향조 이후 걸출한 유학자가 많이 나왔다. 대표 적인 인물로는 북비공으로 알려진 돈재 이석문, 응와 이원조, 한 주 이진상, 그리고 대계 이승희를 비롯한 6명의 독립운동가 등 이 있다. 한계마을의 기록은 주로 이들이 생산하고, 이들을 기리 는 것들이 많다. <월봉 이정현 유허비>·<돈재 이공 신도비>·< 정헌공 응와 이선생 신도비>를 비롯한, 『응와집』·『한주집』·『대 계집』·『응와 이원조 영정』 등은 동산문화재이자 중요한 기록 자료이다. 성산이씨의 입향과 세거 선행연구나 마을에서 생산한 자료에 따르면 한개마을 입향조 는 성산이씨 15세 이우(李友)이다. 그의 시조는 후삼국시대의 이능일(李能一)이다. 이우가 한개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세종 때이다. 『성주이씨세보』에는 그의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 다. 이와 더불어 정확한 입향시기 또한 알 수 없지만, 입향 당시 노모 성산여씨와 세 아들, 즉 유구(悠久)·영구(榮久)·양(陽)을 동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우의 세 아들 가운데 한개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셋째 이 양의 후손들이다. 이양은 1489(성종20)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 가 된 경력이 있다.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손형(遜亨)·시 형(始亨)·겸형(謙亨)·승형(升亨)·복형(復亨)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한개마을에서 지금까지 삶을 이어온 것은 차남 이시형 의 후손이다. 이시형의 아들은 발(勃), 손자는 성범(成範), 증손은 약(若), 현손은 정현(廷賢)이다. 마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데는 이정현(1587~1612) 의 역할이 컸다. 그는 성산이씨 시조로부터 21세손이자, 입향조 이우의 6대손이다. 호를 월봉(月峯)으로 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정자(弘文正字)를 역임하였다. 비록 26세에 요절하였으나, 그의 대과급제 경력은 한개마을 성산이씨 문호의 확장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월봉 이정현 유허비>는 이를 입증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정현의 외아들 한포(寒浦) 이수성(李壽星)은 부인 성산여씨에 게서 4남 5녀를, 순천박씨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 지금의 한개 마을을 구성하는 4개의 파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장남 달천 (達天)의 후손이 백파, 둘째 달우(達宇)의 후손이 중파, 셋째 달한 (達漢)의 후손이 숙파, 넷째 달운(達雲)이 후손이 계파를 이루고 있 다. 한개마을은 중심부와 동녘·서녘·아랫막으로 형성되어 있는 데, 대체로 마을의 중심부와 서녘에는 백파와 숙파의 자손들이 세 거하고 있고, 동녘에서 아랫막으로는 계파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중파의 자손은 겨우 한 집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뒤 한개마을 성산이씨는 지역을 넘어 명문사족으로 성장하였 다. 그 배경에는 꾸준한 과거 입격이 하나의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 다. 모두 9명의 대과급제자와 24명의 소과급제자가 나왔다. 또한 학 문적 기풍도 한 몫을 하였다. 이들은 선비정신의 근본을 입지(立志) 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예와 의를 존중하고 불의(不義)를 용납하 지 않았다. 뿐만 아리나 덕(德)을 재(才)보다 우위에 두고 학문을 중 시하고 처신을 신중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한개양반으로 통하였으 며, 성산이씨라는 관향보다는 한개이씨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글.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 성주 한개마을 골목 기획연재 |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01 성주이씨세보(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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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 기록인 2013 SUMMER + Vol.23 59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인 1440년대 중반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하여 개척한 성산이씨(星山李氏) 동성마을이다.

    행정 이름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이다. ‘한개’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우리말로 한자로는 ‘대포(大浦)’라고 쓴다. 더러는 ‘한계’

    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큰 나루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예전에

    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이동하던 나룻배가 마을 앞 백천까지 이르

    러, 각 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마을 모습은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작은 하천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이다. 주산인 영취산 줄기에서 나온 좌청룡·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 사이에 고즈넉이 들어앉은 한개마을은 오

    랜 세월 그 원형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 때문에 2007년 중요민속

    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세간에서는 ‘옛 골목길이 아름다운

    마을’, ‘전통마을의 전형’으로 일컬어진다.

    마을 안에는 75여 채의 가옥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외곽으

    로는 주로 일반가옥이, 마을의 중심부와 뒷산 쪽에는 오래된 와

    가(瓦家)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가옥 가운데 10점이 지방지정

    문화재이다. 교리댁(校理宅)·북비고택(北扉古宅)·한주종택(寒

    洲宗宅)·월곡댁(月谷宅)·진사댁(進士宅)·도동댁(道東宅)·하

    회댁(河回宅)·극와고택(極窩古宅)·첨경재(瞻敬齋)·삼봉서당

    (三峯書堂)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교리댁은 1760년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집이다.

    한개마을은 입향조 이후 걸출한 유학자가 많이 나왔다. 대표

    적인 인물로는 북비공으로 알려진 돈재 이석문, 응와 이원조, 한

    주 이진상, 그리고 대계 이승희를 비롯한 6명의 독립운동가 등

    이 있다. 한계마을의 기록은 주로 이들이 생산하고, 이들을 기리

    는 것들이 많다. ··<

    정헌공 응와 이선생 신도비>를 비롯한, 『응와집』·『한주집』·『대

    계집』·『응와 이원조 영정』 등은 동산문화재이자 중요한 기록

    자료이다.

    성산이씨의 입향과 세거

    선행연구나 마을에서 생산한 자료에 따르면 한개마을 입향조

    는 성산이씨 15세 이우(李友)이다. 그의 시조는 후삼국시대의

    이능일(李能一)이다. 이우가 한개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세종

    때이다. 『성주이씨세보』에는 그의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

    다. 이와 더불어 정확한 입향시기 또한 알 수 없지만, 입향 당시

    노모 성산여씨와 세 아들, 즉 유구(悠久)·영구(榮久)·양(陽)을

    동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우의 세 아들 가운데 한개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셋째 이

    양의 후손들이다. 이양은 1489(성종20)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

    가 된 경력이 있다.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손형(遜亨)·시

    형(始亨)·겸형(謙亨)·승형(升亨)·복형(復亨)이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한개마을에서 지금까지 삶을 이어온 것은 차남 이시형

    의 후손이다. 이시형의 아들은 발(勃), 손자는 성범(成範), 증손은

    약(若), 현손은 정현(廷賢)이다.

    마을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데는 이정현(1587~1612)

    의 역할이 컸다. 그는 성산이씨 시조로부터 21세손이자, 입향조

    이우의 6대손이다. 호를 월봉(月峯)으로 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정자(弘文正字)를 역임하였다. 비록 26세에

    요절하였으나, 그의 대과급제 경력은 한개마을 성산이씨 문호의

    확장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는 이를 입증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정현의 외아들 한포(寒浦) 이수성(李壽星)은 부인 성산여씨에

    게서 4남 5녀를, 순천박씨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다. 지금의 한개

    마을을 구성하는 4개의 파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장남 달천

    (達天)의 후손이 백파, 둘째 달우(達宇)의 후손이 중파, 셋째 달한

    (達漢)의 후손이 숙파, 넷째 달운(達雲)이 후손이 계파를 이루고 있

    다. 한개마을은 중심부와 동녘·서녘·아랫막으로 형성되어 있는

    데, 대체로 마을의 중심부와 서녘에는 백파와 숙파의 자손들이 세

    거하고 있고, 동녘에서 아랫막으로는 계파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중파의 자손은 겨우 한 집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뒤 한개마을 성산이씨는 지역을 넘어 명문사족으로 성장하였

    다. 그 배경에는 꾸준한 과거 입격이 하나의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

    다. 모두 9명의 대과급제자와 24명의 소과급제자가 나왔다. 또한 학

    문적 기풍도 한 몫을 하였다. 이들은 선비정신의 근본을 입지(立志)

    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예와 의를 존중하고 불의(不義)를 용납하

    지 않았다. 뿐만 아리나 덕(德)을 재(才)보다 우위에 두고 학문을 중

    시하고 처신을 신중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한개양반으로 통하였으

    며, 성산이씨라는 관향보다는 한개이씨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글.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 성주 한개마을 골목

    기획연재 | 전통마을의 전형, 한개마을

    01 성주이씨세보(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2004)

  • 60 기록인 2013 SUMMER + Vol.23 61기획연재

    라계록(耽羅啓錄)』(1책)·『탐영관보록(耽營關報錄)』(1책)·『탐라지

    초본(耽羅誌草本)』(4책)·『영주만록(瀛州漫錄)』(2책)·『영여록(瀛餘

    錄』(1책)은 제주의 행정·지리·인정·세태·풍물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어 소중한 기록물이다.

    한주학파의 종장 한주 이진상과 그 기록

    19세기에 들어와 한개마을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한주종가를 빼

    놓을 수 없다. 한주종가는 ‘조선 유학의 마지막 봉우리’로 일컬어지

    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과 독립운동가 한계 이

    승희가 살던 집이다. 이진상은 그의 고택에 걸려있는 ‘주리세가(主

    理世家)’의 편액이 말하고 있듯이 조선후기 주리론(主理論)의 정점

    에 서 있는 성리학자이다. 이항로·기정진과 함께 ‘근세유학삼대가

    (近世儒學三大家)’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진상의 8대조 이정현은 이황과 조식의 저명한 제자 정구(鄭逑)

    의 문인이었으며, 조부들과 숙부는 퇴계의 학통선상에 있던 정종

    로(鄭宗魯)의 문인이었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유학의 학통이 면면

    히 흐르고 있었다. 그는 7세에 『사략(史略)』을 읽는 것으로 학업을

    시작하여 13세에는 여러 경전에 통하고, 제자백가의 책을 두루 읽

    어 학자로서는 소양을 고루 갖추기 시작했다.

    17세에 이르자 숙부 이원조는 그에게 성리의 학문에 종사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숙부의 가르침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全)』에 몰두

    하던 이진상은 18세부터 저술을 시작하였다. 27세부터 7년 동안

    북비고택 사람들과 그 기록들

    한개마을의 명성에 기여한 인물로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

    과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둘은 모두

    북비고택 사람이다. 북비는 돈재 이석문(1713~1773)을 이르

    는 말이다. 북비공(北扉公)으로 세상에 더 알려진 그는 1739년

    (영조1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50세가 되던 1962년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조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희생시키려 하자, 그는 왕명을 어기고 그

    부당함을 간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의 노여움을 산 그는 끝내 낙

    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후 출입문을 북쪽으로 옮기고 사도세자

    를 추모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북비(北扉)’라 불렀다.

    뒷날 영조가 세자의 일을 후회하며, 그에게 훈련원주부를 내렸으

    나, 나아가지 않았다.

    는 바로 이러한 그의 충

    절을 기려, 1909년 유림들의 발의와 문중의 호응으로 세운 것

    이다. 위치는 그가 거처했던 북비고택 바로 건너편에 자리 잡

    고 있다. 비문은 독립운동가 곽종석(郭鍾錫)이 지었다.

    북비의 후손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는 한개

    마을의 명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마을입구로 들어오기 전 가

    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인데, 이

    는 이원조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북비고택으

    로 들어가려면 솟을 대문 하나가 나온다. 현재 그 솟을 대문 위

    로 ‘응와세가(凝窩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람들은 이 집

    을 ‘대감댁’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공조판서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원조는 퇴계의 학통선상에 있던 정종로(鄭宗魯)에게 수학

    하였으며, 1809년 18세라는 매우 이른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

    다. 19세부터 시작된 그의 벼슬은 사간원정언·대사간·좌승

    지·병조참판·결성현감·강릉부사·제주목사·자산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다, 76세 공조판서로 끝이 났다. 그는 다

    섯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며 많은 업적을 쌓아 훌륭한 행정가

    로 알려져 있다. 또한 1,700여 수의 한시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

    을 남겼는데, 『호우만고(毫宇漫稿)』·『성경』·『응와잡록』·『정무

    기사(丁戊記事)』·『국조잡록』·『난보기략(爛報記略)』·『포천지

    (布川誌)』·『포천도지(布川圖誌)』·『무이도지(武夷圖誌)』·『탐라

    록』·『탐라지초본』·『탐영관보록』·『탐영계록』 등이 다. 이들 기

    록들은 1896년 간행된 『응와록』 안에 담겨 있다.

    북비고택 사람들이 생산한 기록과 소장 자료들은 현재 한국

    국학진흥원에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자료는 이원조

    의 영정과 응와선생문집 목판, 응와선생 문집필사본(정고본)인

    『호우만고(毫宇漫稿)』(27책)를 비롯하여 고문서, 서화류, 현판

    류 등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자료 가운데 『응와선생영정』은 어첩(御

    帖)을 보관하던 누각, 즉 영수각(靈壽閣)에서 그린 것으로, 필체

    가 섬세하고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가 제주목사를 지낼 때 기록한

    『탐라제군사명기(耽羅諸軍司命旗)』·『탐라록(耽羅錄』(3책)·『탐

    04 응와고택 표지석 05 정헌공 응와 이선생 신도비

    과거에 뜻을 두고 응시하여 몇 차례 급제한 경력을 제외하

    면, 그는 일생은 오롯이 학자적 삶이었다. 그 결과 그는 목

    판문집 42권 22책을 포함하여 85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을 남겼다.

    그 가운데 44세에 저술한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자신의

    성리설을 종합하여 61세에 쓴 『리학종요(理學綜要)』는 그의

    성리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심즉리설』은 퇴계의 심합이기

    설(心合理氣說)을 주리적 측면에서 더욱 강화한 것이다. 그

    는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리)라는 것이 ‘마음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다(心合理氣)’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리를 위주로 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있으나 리는 주재(主宰)요, 기는 자구(資具)이므로 마음

    의 주재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 마음은 곧 리(理)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퇴계의 주리론을 계승하여 리의 절대성을 극대

    화한 이론이다. 그러나 뒷날 이진상은 이 때문에 영남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상황에 처하였다. 1895년 발간된 『한주문

    집』은 반송되거나, 심지어 소각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이진상의 성리설은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한편

    으로는 직전·재전 제자로 이어지면서 한주학파(寒洲學派)

    를 형성하였다. 곽종석·이승희 등 한주의 후예들이 스승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는 가운데 한주학파는 더욱 선명

    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문인록에 기록된 사람은 모두

    137명에 이른다.

    02 북비고택 출입문 03 돈재 이공 신도비

  •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 또한 세계 각국 정부

    에도 편지를 보내, 국제법으로 일본을 단죄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러나 이러한 독립외교활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나라 사정은 갈

    수록 어려워졌다. 결국 이승희는 1908년 62세에 러시아 블라디보

    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 이승희는 『만국대동의원사의(萬國大同議院私議)』를 지

    어, 국제연맹의 성격을 지닌 ‘만국대동의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하였

    다. 그가 주장하는 ‘대동(大同)’은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대동의 이념

    이었다. 그는 천하가 혼란한 것은 바로 ‘종족주의’, ‘국가주의’ 때문

    이라고 비판하며, 대신 ‘사해동포사상’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종족·지역·국가의 구별이 없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사회

    를 건설하기 위한 ‘중화대동회(中華大同會)’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

    였던 것이다.

    1909년 만주 북부 밀산부 봉밀산으로 이주한 이승희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1913년 한흥

    동 건설 작업이 여의치 않게 되자, 봉천성 안동현으로 옮겨왔다. 여

    기에서 그는 공교회운동을 추진하였다. 1909년 이후 그가 외국에서

    전개한 한인자치촌 건설과 공교회운동은 한마디로 유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통한 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08년 이미 ‘만국대동의원’을 설립을 제안했던 이승희는 전쟁 자

    체를 거부하는 서양의 반전평화운동에 주목하였다. 그는 제1차 세

    계대전에서 ‘의전(義戰; 의로운 전쟁)’은 없으며, 참전국가 모두 자

    멸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희는 한국이 전쟁에 참여하여 독립

    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실리적 관점보다는 ‘전쟁’ 자체를 부

    기록인 2013 SUMMER + Vol.23 63

    06 한주종택 전경(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07 한주정사(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이진상은 일생 학문에 몰입하였지만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

    이었다. 1866년 49세에 『묘충록(畝忠錄)』을 지어 국정개혁론을

    펼쳤으며, 1871년에는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는 상소 운동의 장

    의(掌議)를 맡아 저항하기도 했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화도

    침범에 즈음하여 거의를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1880년 부

    산에 있던 일본영사관을 찾아가 이웃 나라와의 상호교린은 신

    의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화륜선을 타보고 탄식하

    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는 서양세력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

    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교적인 입장을 철저히 견지하여,

    1882년 영남만인소 부소수(副疏首)로 참여하는 등 서양의 침략

    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의 문인들 역시 한말 변혁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현실문

    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 이승희·곽종석·장석영 등은 신

    학문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여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승희·김

    창숙·남형우·김상덕 등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항일독립운

    동으로 나아갔다.

    이진상의 수많은 저작들과 더불어 한주종가에서 생산·소장

    하던 자료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기탁·관리하고 있다.

    『성주이씨세보책판』, 『한주선생문집책판』, 『리학종요책판(理學

    綜要冊版)』을 비롯한 목판류가 6종 1,343점, 그 밖에 고서류가

    558종 2,304점에 이른다.

    유교의 재해석, 반전평화를 지향한 이승희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한주 이진상의 아들로,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한계(漢溪)이다. 그는 5살 때부터 아버

    지로부터 가학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아버지의 문하인 후산(后

    山) 허유(許愈)·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우하면서 학

    문을 닦았다. 그는 주로 아버지 이진상의 학설을 심화·발전시

    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나라가 어지럽고 국권이 무너지자

    이를 극복하는데 앞장섰다.

    이른 나이인 21살(1867년)에 상소를 올려, 성학(聖學)·호적

    (戶籍)·전제(田制)·선거(選擧)·제병(制兵) 다섯 개 부문의 개

    혁안을 제시하였다. 1881년에는 조선의 외교방략을 제시한 『조

    선책략(朝鮮策略)』이 들어오자 영남만인소에 직접 나섰으며,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그는 『조선책

    략』의 방책과는 달리,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이 연합하여 일본을

    앞세운 서양세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를 대륙과 해양세력의 대립구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서울로 가서 을사오적 참수

    및 을사늑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1907년 국

    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와 경남지역 국

    채보상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무렵 이승희의 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를 활용한 국권회복운동이

    었다. 그는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 개항이후 1907년까지

    08 한주선생문집 책판(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2004)

    62 기획연재

    인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살생하지 않는 인

    의(仁義)와 대도(大道)가 실현된 대동 평화의 세계였다. 즉

    국제사회에서 ’인의(仁義)의 교‘가 실현된다면 국가 간의 전

    쟁이 없는 대동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이

    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구체적 활동이 공교회 운동이

    었다.

    이후 이승희는 박은식과 편지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언론기관 설립과 국사 교육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서구

    의 자유이론과 공화제·입헌제에 대응한 새로운 정치 이

    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또 요동의 덕흥보에 다시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인의 속임수에 실

    패하였다. 이렇게 민족을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이

    승희는 1916년 2월 27일 새벽 70세를 일기로 이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계 이승희도 일생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국사편찬위

    원회는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여, 1976~1982년 『한계

    유고』로 엮어 발간하였다. 모두 9권이다.

    09 이승희 어록비(천안 독립기념관)

    필자 소개

    안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동대학

    교 강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백하 김대락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