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공무국외연수 보고서 - daegu · 2018. 6. 20. · 2016. 9.19.(월) ~ 9.22.(목)...

23
2016. 9.19.(월) ~ 9.22.(목) 중국(연변, 백두산) 2016 공무국외연수 보고서 【 백두산 천지 앞에서 】 대구광역시의회 (교 육 위 원 회)

Upload: others

Post on 19-Aug-2020

9 views

Category:

Documents


0 download

TRANSCRIPT

  • 2016. 9.19.(월) ~ 9.22.(목)

    중국(연변, 백두산)

    2016 공무국외연수 보고서

    【 백두산 천지 앞에서 】

    대 구 광 역 시 의 회 (교 육 위 원 회)

  • 목 차

    Ⅰ. 연수 개요 ······················································ 1

    Ⅱ. 연수 내용 ······················································ 4

    1. 연길공항 및 두만간(중구 도문시 북한 겹경지) ················ 4

    2. 연변대학교 ···································································· 7

    3. 백두산 등정 ································································ 10

    4. 용정(대성)중학교 및 윤동주 생가 ····························· 14

    5. 연변 조선족자치주 박물관 ········································· 18

    Ⅲ. 연수 평가 ···················································· 20

  • - 1 -

    Ⅰ 연수 개요

    1. 개 요

    여행목적 ․중국 연변 및 백두산 방문을 통한 통일․안보교육 강화방안 모색

    여행동기

    및 배경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패권 경쟁이 심각한 가운데, 과거 일본의

    식민지로서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현 정세에 위기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음

    ․이에 과거 일제시대 국외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연변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고, 그 후손들의

    삶을 조명해 봄으로써, 광복의 의미와 분단된 우리나라의 현실을

    되새기고, 독립운동의 가치가 세대를 넘어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학생 통일․안보교육 강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함

    여행기간 2016. 9.19.(월) ~ 9.22.(목) / 3박 4일

    여 행 국 중국(연변, 백두산)

    여 행 자

    소 속 성 명 직 위

    계 8명

    교 육 위 원 회

    배 창 규 위 원 장

    배 재 훈 부위원장

    최 재 훈 의 원

    윤 석 준 〃

    문화복지위원회강 신 혁 부위원장

    도 재 준 의 원

    교육전문위원실김 동 찬 교육팀장

    박 성 철 직 원

  • - 2 -

    2. 방문국(지역) 정보

    연수 국가(지역)

    중 국

    ∘수도 : 베이징

    ∘인구 : 136,748만명(2014년 기준, 세계 1위)

    ∘면적 : 약 963만㎢(세계 3위, 한반도의 약 44배)

    ∘GDP 10조 3,601억달러, 1인당 GDP 7,494달러(2014년 기준)

    연 변

    조선족

    자치구

    ∘위치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급시 : 옌볜조선족자치주[Yanbian Korean, 延边朝鲜]

    ∘면적 : 43,509㎢(6시 2현, 옌지, 투먼, 둔화, 룽징, 훈춘, 허룽, 안투, 황칭)

    ∘인구 : 229만명

  • - 3 -

    3. 연수 일정

    일 자 시 간 장 소 세 부 일 정

    제1일차(9.19.월)

    05:00

    05:20

    06:40

    09:00

    10:40

    대 구

    김 해

    연 길

    도 문

    연 길

    ․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집결 ․ 이동(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 김해공항 정류소) ․ 김해공항 정류소 도착 ․ 김해공항 출발 → 중국 연변 향발(에어부산) ․ 중국 연길 도착 ․ 이동(연길 → 도문) ․ 두만강(도문시 북한 접경지) ․ 이동(도문 → 연길) ․ 연변대학교 방문

    제2일차(9.20.화)

    전일 백두산 ․ 백두산 등정(천지 및 장백폭포)

    제3일차(9.21.수)

    전일

    연 길

    용 정

    연 길

    ․ 이동(연길 → 용정) ․ 용정(대성)중학교 및 윤동주 생가 방문 ․ 이동(용정 → 연길) ․ 연변박물관 방문 ․ 연길시 관계 공무원 및 지역 학교장 간담회 (사드 배치 문제 등으로 인한 교육국 방문 취소)

    제4일차(9.22.목)

    11:10

    15:00

    16:05

    17:30

    연 길

    김 해

    대 구

    ․ 연길공항 출발 → 김해공항 향발(에어부산) ․ 김해공항 도착 ․ 이동(김해공항정류소 →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도착

  • - 4 -

    Ⅱ 연수 내용

    1. 연길공항 및 두만강(중국 도문시 북한 접경지)

    연변지역과 백두산 여행에 앞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면,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렸으며,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자치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주도(州都)는 옌지시(延吉市)이며,

    옌지(延吉) · 투먼(圖們) · 둔화(敦化) · 허룽(和龍) · 룽징(龍井) · 훈춘(琿春)의

    6개 시와 왕칭(汪淸) · 안투(安圖) 2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11개 민

    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이 41%를 차지하며, 나머지

    는 한족(漢族) ·만주족(滿州族) · 후이족(回族)의 순이라고 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이나 변화가 잦고, 강수량은 산지가 많기 때문에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고 태풍이나 장마 등의 피해가 거의 없는 기후라고 하

    며, 연평균기온 2∼6℃, 1월 평균기온 -14.1℃, 7월 평균기온 21.6℃,

    연평균강수량은 500∼700mm이다. 농업은 주로 곡저평지(谷底平地)에

    서 이루어지며, 쌀·콩·조 등의 곡물을 생산하며, 특히 벼농사는 한국

    인이 이주한 뒤에 발달하였으며, 90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또 잎담배는 지린성 생산량의 5분의 4를 생산하며, 그밖에 특산물인

    인삼과 과일도 많이 난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땅이라서 우리 보다 추운 기후라는 예상을 가지고 출

    발하게 되었는데, 연변에 도착해서 느낀 기후는 거의 우리나라와 차

  • - 5 -

    기내에서 본 연길 공항

    이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당일 대구에서 오전 5시 20분 첫 버스를

    이용하여 김해공항에 도착, 김해공항을 출발한지 2시간 30여 분 만에

    연길공항에 도착하였다. 한반도를

    바로 가로지른다면, 절반의 시간만

    소요해도 도착할 거리를 서해를 통

    해 멀리 돌아서 가야만 한다는 것

    에 대해 남북분단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즈음, 비행기는

    연길공항의 활주로로 서서히 내려

    가고 있었다. 연길공항에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한글과 한자(漢字)로

    된 연길(延吉)이라는 공항표시였으며, 대부분의 광고물들이 한글과 한

    자를 병기하고 있어,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공항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참고로 중국의 자치구에서는 민족 고유의

    문자가 있을 경우 고유문자와 한자를 병기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공항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오니, 여행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가이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이드는 연변 조선족으로 우리 한국

    의 억양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

    다. 우리가 중국 연변에 있는 한인들을 조선족, 한인 등 어떠한 명칭

    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를 물어보니, 자신들은 조선족이라고 불

    리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말해준다.

    중국에서 북한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 중 한 곳인 도문시로

    향했다. 도문시에 도착하여 보게 된 두만강은 “두만강 푸른물에 ~~ ”

  • - 6 -

    로 시작하는 노래가사처럼 푸른 강물이 아니었다. 지난 8월말 있었

    던 태풍과 폭우로 큰 홍수 피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강물은 토사

    등으로 황토빛이었고, 북한의 함경도 북부지역은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두만강 넘어 보이는 북한지역은 함경북

    도 남양시(온성군 남양면)이며, 태풍과 홍수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 곳이라고 하며, 두만강 넘어 보이는 북한 지역에는 수해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보수용 기계장비도 없이 사람들이 직접

    흙을 나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며, 홍수의 피해인지, 북한 건물에

    는 유리가 없는 창문만이 보였다. 곧 겨울이 다가올 것인데, 이러한

    모습으로 겨울 보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니,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떠나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최근 언론보도를 보

    니, 북한은 한국을 제외하고 여러 나라에 수해복구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적극

    검토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도문시를 떠나왔다.

    중국 도문시의 두만강 두만강에서 본 북한

  • - 7 -

    연변대학 전경 설명

    2. 연변대학교

    연변대학교는 1949년 조선민족 교육의 기치아래, 한반도 외에 세

    워진 유일한 조선민족 종합대학이며, 1996년 중국 211프로젝트 중점

    건설대학교로 선정되었고, 현재 서

    부대개발 및 교육부 중점 건설대

    학교로 선정되었다. 연변대학교는

    현재 21개의 학원(단과대학), 73개

    학부, 149개의 석사과정, 15개 정

    부 박사과정이 개설되어 있고, 현

    재 학생부 18,000 여명, 석-박사생

    3,700 여명 등 재학생 24,000 여명과 교직원 2,338명, 부교수이상 교

    수진 786명이 학술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연변대학교 사무처 남철(南哲) 과장(우리나라 비서실 국장급, 조선족)과

    연변대학교에 대한 역사와 대학의 특성 등에 대해 질의와 설명시간

    을 가졌다.

    ☞ 조선민족대학이라고 설명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인지?

    - 1949년 대학을 설립할 시에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교

    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현물(쌀, 가재도구 등) 기부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초대 총장 주덕해 등이 문리학․이공학․의학․

    농학부 4개 학부로 출범한 것임

    - 중국에서 조선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교육하는 유일한 대학임

  • - 8 -

    ☞ 연변대학의 변천 과정은 어떠한지?

    - 1996년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1983),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1988)을 합병하여 새로운 대학이 되었으

    며, 같은 해 10월, 연변지구의 중외합작운영기구인 연변과학

    기술대학을 합병하여, 조선족을 위주로 한족과 여러 민족의 교

    원 및 간부 양성을 위주로 하는 종합대학이 된 것임

    ☞ 연변대학의 특징과 자랑거리는 무엇인지?

    - 도시 인구가 적은 소규모 도시에서 중국 100대 대학에 진입하였

    으며, 길림성 내에서도 대학 순위 3위를 차지할 정도의 명문대

    학이며, 60여 년 간 13만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어 중국의 각

    계 각층과 세계 여러 나라에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세계 여러

    곳의 조선족사회 주류로 거듭나고 있음

    ☞ 연변대학의 조선족 학생에 대한 우대정책이 있는지?

    - 연변대학은 길림성과 그 외 성으로 구분하여 학생을 모집하며,

    길림성 내 학생 중 일정 비율을 조선족 학생으로 모집하고, 입

    시에서 일정 비율의 가산점을 부여하는 등의 우대정책을 실시

    하고 있음

    - 연변대학의 조선족 입학생이 매년 축소되고 있는데, 이는 가능

    한 점수에서는 외지 대학 진학과 해외유학 등으로 외부로 조

    선족 학생이 유출되고 있는 것임. 이에 졸업 후 취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연변대학에 대한 조선족 학생들의 지

    명도와 인지도를 높여 입학생을 증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

  • - 9 -

    ☞ 한국도 대학 졸업생의 취업이 사회 문제인데, 연변대학의 취업률

    확대를 위한 정책은 무엇인지?

    - 연변대학의 조선족 대학생들의 취업은 조선어와 중국어 이중

    언어에 의한 언어적 우세 등으로 한국, 대만 등의 외자기업들

    의 수요가 높아 취업률이 높으며, 대학과 기업이 인력 수급을

    위한 다양한 채널을 가동하는 등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높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음

    연변대학교 기념품 증정

  • - 10 -

    3. 백두산 등정

    당초 일정에는 금일에 용정중학교(옛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시인 생

    가를 방문하고 3일째 일정에 백두산을 등정할 계획이었으나, 백두산

    등정 시 백두산에 대한 설명 등을 위해 초빙한 백두산 관련 최고의

    전문가이신 연변대학교 지리학과 이광(李光)교수의 강의일정 등으로

    인해 일정이 변경되어 2일째 되는 날 백두산을 등정하게 되었다.

    연길시의 숙소에서 백두산까지는 차량으로 4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아침 7시에 출발 11시가 넘어 도착하였으며, 비포장도로는 아니지만

    콘크리트로 된 도로의 관리가 다소 미흡하여 차량의 진동이 심해 상

    당히 힘든 여정이었었다. 가는 도중 백두산과 장백산맥, 장백폭포 등에

    대해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는데, 그 주요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백두산 관광객 현황 : 2015년도 백두산 관광객은 200만명 정도

    이며, 이중 중국 내국인이 90%이며, 나머지 10%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은 한국인이며, 일본인과 러시아인이며, 매년 관광객 수가

    100만명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며, 1년 관광수입이 거

    의 1,000억원에 달한다고 함

    ▹백두산 명칭 등 :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접하는 지역

    으로 산에 대한 명칭을 북한과 중국이 협의하여, 백두산이 있는

    산맥 전체는 장백산맥으로 하고, 천지가 있는 산봉우리 등은 백

    두산으로 지칭하기로 하였으며, 1960년대 백두산 천지의 60%는

    북한, 40%는 중국의 소유로 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함

  • - 11 -

    ▹백두산 화산활동 : 휴화산인 백두산의 화산활동에 대해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있었던 백두산의 화

    산활동은 1702년이었으며, 이후로 현재까지는 화산활동이 없는

    상태이며, 백두산에 설치한 지진관측소의 관측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지진활동이 많아지고 있으며, 백두산의 지하온천의 최고수

    온이 82℃에서 88℃로 6℃정도 상승하였다고 한다. 또한 지각운

    동이 과거 보다 소규모로 증가되는 등 백두산의 분화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졌으나, 정확한 시기 등은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함

    ▹백두산의 식물생태 : 백두산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식물의

    생태가 달라진다고 하며, 해발 800m ~ 1,500m에는 활엽수와 침

    엽수 모두 있으나, 1,500m ~ 1,700m에는 침엽수인 소나무만 있

    고, 1,700m ~ 2,000m에는 백자작나무만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00m ~ 2,500m에는 나무는 없고 자그마한 관목만 살아가며,

    2,500m 이상부터는 식물은 전혀 없이 돌과 바위만 존재한다고 함

    ▹백두산에 대한 기타 기록 : 백두산 천지에 대한 기네스북 기록

    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화산호수(천지 수면 해발 2,189m)이며,

    수심이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산호수(최고수심 373m, 평균수심

    214m)로 등재되었으며, 저수용량이 가장 많은 화산호수(20억㎥)로

    현재 기네스북에 신청된 상태이며, 참고로 중국에서는 저수용량이

    1억㎥가 넘는 호수를 대형호수로 지칭함

  • - 12 -

    백두산 천지 안내도

    백두산에서 본 만주

    백두산은 1년 중 절반은 눈이 온다고 하며, 빠르면 8월 말부터 눈이

    오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9월말에 백두산을 찾았는데, 벌써

    몇 번 눈이 왔었다고 한다. 또한

    백두산 천지는 구름과 안개 등이

    많아 “백번 올라서 두 번 볼 수

    있다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부른

    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두산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코스가 있으

    며, 우리가 오른 곳은 북파라고 하

    는 곳으로 천금봉(해발 2,620m)이며, 차량으로 천지 바로 아래까지 이

    동하게 되어 편리했으며, 천지 관람 후 장백폭포도 관람할 수 있는

    코스였다.

    백두산 천지 아래까지 승합차를 이용해 올라오는 동안 소나무 등

    의 침엽수가 주로 보이다가 어느 순간 바람에 의해 누워있는 자작나

    무가 잠시 보였으나, 정상에 다가

    오자 관목도 없는 산의 풍경이 나

    타났다. 백두산 정상에 서니, 다소

    황량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었

    으나,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의 벌

    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부터 불

    리던 만주벌판이다. 2,000m가 넘는

    고지대여서 그런지 강한 바람과 낮은 기온으로 다소 쌀쌀하다고 느

  • - 13 -

    껴지는 기후로, 우리나라의 늦가을 같은 느낌이었다. 가이드로 동행

    한 이광 교수가 “백두산 등정 날을 정말 잘 잡은 것 같다. 이 정도

    로 천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날이 백두산에서도 며칠 되지 않는

    다”고 말할 정도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보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

    다. 사진으로만 보던 천지를 직접 눈으로 보니, 왜 민족의 영산이라

    고 불리우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엄숙하면서 장엄한 느낌이 가슴에

    서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것도 잠시,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중국 측에서 장백산

    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자원화 되면서 중국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중

    국의 동북공정의 일환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따라서 우

    리 민족의 정신적 중심지인 백두산에 대한 관심과 정책은 남북이 분

    단된 상황을 벗어나, 남북한이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는

    등 우리의 백두산이 장백산이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남겨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백두산 천지 백두산 장백폭포

  • - 14 -

    용정(대성)중학교 방문

    4. 용정(대성)중학교 및 윤동주 생가

    일정 3일째 날, 원래 계획에는 백두산 등정이 계획되었으나, 백두

    산 관련 전문가인 연변대 교수님의 일정 변경과 최근 우리나라와 중

    국과의 군사적 관계 등으로 인해 교육국 방문이 취소되어, 용정중학

    교를 방문을 시작으로 여정의 마지막날 일정을 시작했다.

    중국 길림성 용정 대성중학교 옛터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延

    邊)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 있었던 학교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무대인 룽징(용정)에 있는

    학교이다.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출신 학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윤

    동주 시인이 다닐 때에는 '대성중

    학교'라는 이름이었으나, 현재는 '

    용정중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로서 윤동주를 비롯

    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학교 건물은

    신관과 구관에는 윤동주의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하여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룽징과 주변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 15 -

    용정(대성)중학교 역사전시장

    용정을 중심으로 연변의 교육은 반일항일의 애국인사들을 양성하는

    조선민족교육의 요람이었으며, 그중에서 대성중학교는 6개 학교가

    통합하는 등 대표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정문 오른편에 대성학교

    옛터 팻말과 6개소 연합기념비가

    있고 왼쪽에는 윤동주시비가 있다.

    1910년대 후반기 개산툰 정동, 달

    라자 명동, 와룡동 창동, 소영자

    광성 등지 학교가 간도조선인의

    최초의 4대중학교라 한다면 1920년대의 용정은 은진(1920년 2월), 영신

    (1921년 5월), 대성(1921년 7월), 동흥(1921년 10월) 등의 중학교에서 용정

    은 일약 일제시대 우리민족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배움에 뜻을

    두고 반일 독립의 큰 뜻을 둔 겨레의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조선반도

    와 러시아 연해주, 동북의 남만과 북만에서 용정으로 구름처럼 밀려

    들었다. 그 중심에는 대성, 동흥 중학교가 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

    조선족의 이름난 저항시인 윤동주, 청년문사인 송몽규가 있는가 하

    면 항일무장투쟁시기 동남만성위 조직부장 리동광, 동북항일련군 제

    1군 제1사 참모장 리민환, 왕청 현위 제1일서기 김훈, 훈춘현위 제4

    임서기와 제5임서기인 오빈, 요하중 심현위 서기 박진우, 동북항일동

    맹군 제4군 당위서기 겸 조직부장 박봉남, 항일련군 제7군 제3사 정

    치부 주임 리일평, 항일련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김근, 북만성

    위서기이며 항일련군 제3로군 지도자인 김책 등이 있다. 전임 조선

    총리 리종옥, 전임 한국총리 정일권 등도 6개소 출신들이었다.

  • - 16 -

    윤동주 시인 교실 복원

    용정중학교의 전신인 대성중학교의 옛 사옥은 역사전시장으로 남아

    있고, 입구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2층 전시관

    에는 용정중학교의 역사와 보재 이

    상설 선생 등 연변 등에서 일제시

    대에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들의 전

    시관과 윤동주 시인의 친우들과 함

    께 찍은 사진과 수업을 듣던 교실

    이 복원되어 있기도 하다. 전시관

    을 나오면서 방명록에 기재하고,

    연변의 항일운동과 교육정신을 기리는 역사관의 운영 위한 기부함에

    소액의 기부를 하고, 윤동주 시인의 생가로 이동하였다.

    ☞ 윤동주 시인 약력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생으로,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

    업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

    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

    다. 사후에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으며, 서시, 별

    헤는 밤, 지화상 등이 수록되었다.

    시인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명동(明東)은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 - 17 -

    윤동주 시인 생가

    윤동주 시인 생가

    이 곳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라고 한다. 이전에 이 땅의 이

    름은 '부걸라재(비둘기 바위)'였으나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이라

    는 의미로 ‘명동촌’이라 이름 지었

    다고 한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인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

    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

    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북간도 이주 역사

    로 볼 때 윤동주 집안은 거의 초

    창기라고 볼 수 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

    를 일구어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

    로 자수성가했다. 그리고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명동 한인촌

  • - 18 -

    연변조선족자치주 박물관 전경

    의 식구가 되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

    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마을이었다. 북간도 최

    초의 신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이 이상설 열사의 헤이그 특파로 문을

    닫게 되자, 뒤를 이어 명동촌에서 '명동서숙'이 문을 열었다. 명동서

    숙에서 출발한 명동학교는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자

    리잡았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여

    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고 한다.

    5. 연변 조선족자치주 박물관

    윤동주 시인의 생가까지 방문하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당초 계획

    에는 없었던 연변 조선족자치주 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연변 조

    선족자치주 박물관에는 혁명기념

    관과 민속박물관이 함께 있으며,

    이곳에는 우리 조상들의 선사시대

    부터 근대까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나, 가장 중요

    한 고구려, 고려 시대에 대한 유물

    과 역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선사시대 기록과 조선말 조선인이 만주지역에 이주하여 살아왔던 것은

    기록이 되어 있으나, 고구려에 대한 역사는 단 한마디도 기록되어

  • - 19 -

    박물관 내 조선족민속전시장

    있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펼치고 있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생각이

    되며, 또한 최근 중국의 교육에서는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 우리민

    족의 웅비를 나타낸 고구려와 발

    해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

    다. 특히 한․중 간에 동북공정 등

    첨예한 대립을 펼치고 있는 고구

    려 역사에 대해 조선족 학교의 교

    육과정에서 제외돼 고구려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마저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이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부분은 대학교에 있는 역사

    학 전공 교수들과 학생 그리고 백두산과 연변 지역 등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만이 알고 있는데 그치고 있는 실

    정이라고 한다. 조선족의 고구려를 포함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올바

    른 인식이 가능하도록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

    된다.

  • - 20 -

    Ⅲ 연수 평가

    막연히 각종 자료들로만 보던 백두산 천지를 직접 경험한 것이

    이번 연수의 가장 큰 감동 중 하나였다. 어두운 시기 조국의 독

    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얼이 스며있는 곳에서 그분들

    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아울러, 우리 학생들에게도 백두산 천지의 감동과

    항일 독립운동의 얼과 흔적이 남은 지역에 대한 체험 기회를

    부여한다면, 독립운동에 대한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 우리의 산하를 타국을 통해 봐야만 하는 분단의 비애도

    함께 느낀다면 통일에 대한 필요성과 사명감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번 연수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 중 하나는 언론들

    을 통해 보기만 했던,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한 부분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 박물관에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였으며,

    조선족에게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는 것을 배울 기회조차 없

    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왜곡된 역사의식을 지

    닌 조선족 동포와 우리와의 역사의식에 대한 괴리감은 민족적

    연대감마저 훼손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역사 등

    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국제사회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알

    려질 수 있도록 정부 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도 지속적으로 노

    력하여야 할 것이다.

  • - 21 -

    마지막으로, 중국 내 조선족에 대한 문화와 정서에 대한 연대감

    을 확인하고, 오랜 기간 관계가 없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인

    식 등에 대한 해소와 상호 이해의 폭을 넓이기 위해 도서 지원,

    인적 교류, 기관 간 상호교류 등 다양한 교류 방안을 적극 강구

    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교육청의 국제교류협력을 지원하기 위

    해 제정된 관련 조례를 적극 활용하여 연변 조선족자치주와의

    적극적인 교류협력 관계를 추진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