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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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나폴레옹3세

나폴레옹3세 외교가 어떻게 프랑스의 악몽이 되었나?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나폴레옹 3 세의 죽음, 1873 년>

[외교사][19 세기 유럽]

<나폴레옹 3 세와 그의 시대-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

19 세기 유럽 외교사는 4 개의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빈 체제(1815-1853 년) 빈 체제의 붕괴(1853 년-1871 년) 비스마르크 체제(1871 년-1894 년) 그리고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및 제 1 차세계대전(1894 년-1914 년)

1815 년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체제가 성립한 이후 40 년간 유럽 강대국간의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1853 년 러시아와 영국,프랑스,사르데냐,오스만 제국이 충돌한 크림전쟁이 발발하면서 빈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전쟁에서 빈체제의 두 주축이었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가 패전을 통해 유럽무대에서 잠시 사라지게 되면서 빈체제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크림전쟁에 대한 나폴레옹 3 세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크림전쟁에 임하면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 세는 주요 목표로 다음을 제시했다 : 기존 국제 질서의 붕괴, 그리고 국제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결성된 동맹의 분열.

1856 년 3 월, 최종 평화협상 과정에서, 나폴레옹 3 세는 휘하 각료들에게, 나폴레옹 전쟁이후에 탄생한 빈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이 유럽협조체제와 함께 우리에게 위협이 되며,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강탈해 갔다. 전쟁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두 세력을 분리시켜, 프랑스가 해외에서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가지게 만드는데 있다."

Page 2: 나폴레옹3세

크림 전쟁 결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양국이 약화되었고, 이같은 힘의 공백 사태를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빈 체제의 균열에서 각각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 노력했다. 

크림 전쟁 이후 대략 20 년동안 빈 체제가 붕괴되면서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1859 년 - 오스트리아에 대한 피에몬테와 프랑스의 전쟁, 폴란드 봉기 1863 년, 덴마크 전쟁 1864 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 1866 년, 보불전쟁 1870 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871 년 이후 비스마르크 체제가 탄생하면서 제 1 차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43 년동안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은 없었다. 

그 중에서 1871 년-1894 년 동안의 시기는 비스마르크 체제라 분류한다. 

1871 년-1894 년의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Bismarck’s system of alliances 는 독일 통일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통일을 위해, 일련을 전쟁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일단 통일 달성되자, 유럽 최고의 평화 옹호자가 되었다. 이는 독일 통일의 성과가 다른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이를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중개자 honest broker"가 되고자 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동맹관계를 구축했다.이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였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최대 목표는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과 유사한, 악몽과 같은 反독일 포위 동맹 "Nightmare Coalition" 의 결성을 막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9 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동맹 결성 the Dual Alliance between Germany and Austria-Hungary 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동맹에 이탈리아를 추가시켜서, 1882 년의 3 국동맹 the Triple Alliance 을 결성했다. 영국과는 1887 년의 지중해협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를 포함한 지중해에서의 현상유지에 합의했다. 이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동맹 결성 가능성이 높았던 러시아와 1887 년 재보장 조약 reinsurance treaty 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하에서 프랑스가 동맹국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하지만 1890 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독일의 빌헬름 2 세가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연장을 거부하면서, 러시아가 프랑스 고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은 유럽에서 고립 중이던 프랑스와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이탈한 러시아가 체결한 1894 년 1월의 노불동맹이었다. 노불동맹의 탄생과 함께, 비스마르크 체제는 붕괴했고, 유럽은 프랑스-러시아 동맹 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 국동맹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이같은 대립구도하에서 발생한 것은 제 1차세계대전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나폴레옹 3 세의 집권>

나폴레옹 3 세의 통치기는 역사상 빈 체제의 붕괴기라 분류하는 1853 년-1871 년과 대략 일치한다. 황제는 프랑스에 커다란 치욕을 안겨준 1815 년에 탄생한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다시 한번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실추된 프랑스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자!”가 그 구호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3 세의 외교는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커녕, 프랑스를 점점 고립시켰고, 프랑스를 재앙으로 몰아갔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년 4 월 20 일 ~ 1873 년 1 월 9일)는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자 두 번째 프랑스 황제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세습군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로 1848 년에 2 월 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1848 년 12 월) 쿠데타(1851 년)를 통해 제 2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852 년)

그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했고, 아마도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자산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또한 숙명적인 정치 유산이었고, 영광과 제국의 새 시대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나폴레옹 3 세는 대외정책에서 3 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Page 3: 나폴레옹3세

1.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영국은 그의 삼촌,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공의 주된 걸림돌이었다.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영국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해서, 그의 대외정책의 성공을 용이하게 하려했다.

2. 그는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려 했다. 민족주의의 잠재적인 힘은 그의 삼촌도 인정했지만, 보나파르트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실패했다. 나폴레옹 3 세는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독립을 원하는 민족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려 했고, 이들 민족들을 지원하여,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프랑스의 정치적,도덕적 주도하에, 유럽을 재편하려 했다.

3. 민족들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탄생한 국제질서를 파괴하려 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패권을 부활에 방해되는 주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이탈리아 전쟁>

크림 전쟁 직후 빈 체제의 균열 조짐이 재확인된 것은 1859 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였다.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고립,약화를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카부르는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한 기회로 보았다. 1815 년의 빈체제 하에서 오스트리아는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은 바 있었다. 오스트리아 약화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호기였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하는 비밀단체에서 활동했던 나폴레옹 3 세는 프랑스가 유럽 각지의 억압받는 민족들의 민족주의를 지원, 이들을 주도하여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만큼, 프랑스의 이탈리아 민족주의 지원은 논리적 수순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 개입을 통해 실제로 얻을 것은 거의 없었다.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이탈리아에 프랑스의 전통적인 침공로상에 놓인 지역에 더 강한 국가가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이는 개입 목표의 모호함에 대한 비난과 함께, 굴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이든 실패이든, 이탈리아에서의 프랑스군의 존재는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개입이 유럽 외교관들을 놀라게 만들동안,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전쟁을 예상하며, 이 전쟁으로 독일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지위가 약화될 것이라 기대했다.

나폴레옹 3 세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과 힘을 합쳐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는 전쟁에 돌입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였다. 하지만 1859 년 6 월 솔페리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이탈리아가 프랑스 세력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이 무력 개입을 위협했고, 이에 당황한 프랑스가 이탈리아측과의 사전 협의없이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 카부르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 평화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에 넘기는데 동의했지만,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령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쟁의 개입의 대가로 프랑스가 니스와 사부아를 양도받자,이는 영국에게 나폴레옹 1 세 시절의 프랑스 패권주의 부활 신호로 인식되었고, 영국의 반감을 고조시켰다.

<폴란드 봉기>

또한 나폴레옹 3 세는 러시아에 대항한 1863 년 폴란드 봉기에 대한 공개적인 동정을 표시했고, 이것이 러시아를 격분시켰다. 반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를 비난하고, 러시아의 진압을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호감을 샀다. 이렇게 폴란드 봉기에서 나폴레옹 3 세는 러시아의 반감을 얻었고,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의 호감을 얻었던 것이 이후의 국제관계에서 결정적이었다.  폴란드 위기 동안의 프로이센이 보여준 일관된 러시아 지지에 대한 고마움이 독일 통일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프로이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러시아의 친-프로이센 노선은 나폴레옹 3 세에게 치명적인 것이 될 것이었다.

<독일 통일전쟁>

나폴레옹 3 세 외교정책의 다음 무대이자 최종 실패가 결정된 것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독일 통일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은 덴마크와의 1864 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통해서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의 패권을 확립해나갔다. 

Page 4: 나폴레옹3세

나폴레옹 3 세는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라인강 너머의 독일을 분열된 상태로 두는 것은 17 세기 리슐리외 이래의 프랑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리고 독일의 분열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우위는 빈 체제가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의 빈체제 파괴를 백안시했던 나폴레옹 3 세의 독일정책의 결과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통일이었다. 이는 프랑스에게 라인강 동쪽으로부터의 안보,군사상의 위험을 제공했고, 프랑스는 1870 년 보불전쟁,1914 년 제 1 차세계대전,1940 년 제 2 차세계대전에서 분열된 독일의 상실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독일통일 과정에서의 나폴레옹 3 세의 관심사는 강한 독일 탄생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중립의 대가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1865 년 10 월의 비아리츠 회담에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에게 프랑스의 영토확장을 지지한다고 약속하면서, 프랑스의 불개입을 약속받았고, 뿐만아니라 프랑스의 영토확장에 대해 우려하던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 전쟁에서의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받으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묘수를 실행했던 것이다.

<보불전쟁>

1870 년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보불전쟁이 발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였다. 나폴레옹 3 세의 프랑스는 계속된 대외정책의 실정으로 외교적 고립상태에 있었다. 영국은 이탈리아와 벨기에,룩셈부르크에서의 프랑스의 팽창주의를 의심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폴레옹 3 세가 1863 년 폴란드 봉기를 동정하자 분노했다. 러시아도 분명 독일의 분열에 의해서 동유럽 진출이라는 이익을 볼수 있었지만, 보불전쟁에서는 나폴레옹 3 세의 실정과 비스마르크의 친러정책 때문에, 불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는 프로이센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덕분에 프로이센은 양면전쟁의 위험없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집중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보불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866 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로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노리던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가 무력을 동원 불개입을 압박했던 것이다. 1870 년 7 월 14 일, 러시아가 비스마르크에게,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선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위해서 그리고 독일이 한 개의 전선에서만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갈리치아에 30 만 대군을 파병할 것이라 약속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덴마크에게도 중립을 지키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 약속했다.  

<나폴레옹 3 세의 유산>

나폴레옹 3 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프랑스 패배 결과로 탄생한 빈체제를 파괴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독일에 대한 빈체제의 원칙, 즉 독일 연방 구성으로 인한 분열된 독일의 지속과 독일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원칙이 리슐리외 이래의 프랑스의 독일 정책, 즉 분열된 독일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연방은 방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연방 해체의 결과는 리슐리외적인 분열된 독일이 아니라, 통일 독일이었다. 통일 독일은 프랑스를 인구수로 압도했고, 그 산업 능력은 곧 프랑스를 초월하게 될 것이었다.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나폴레옹 3 세는 방어적인 독일연방을 없애고, 통일 독일이라는 공격적 위협을 지정학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리고 나폴레옹 3 세의 외교적 실정의 결과로 확정된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 구도는 1894 년 1 월의 노불동맹 탄생 이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에게 외교적 멍에가 되었다. 

나폴레옹 3 세의 외교는 프랑스의 직접적 국익과 무관한 영광의 실현을 위한 이상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이탈리아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빈 체제의 몰락에 따른 유럽 국가 세력관계의 재편과정에서 프랑스의 장기적인 국가전략과는 무관한 니스,사부아,벨기에,룩셈부르크 같은 영토획득에 관심을 가지면서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외교전략도, 외교정책의 일관성도 없었고, 그 결과 아무 생각없이 단기적 이익을 취하려 노력하다가 장기적 이익에 치명타를 가하는 소탐대실의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특히, 벨기에,룩셈부르크를 차지하기 위해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라는 프랑스의 동쪽 국경 안보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는 점이 특히 뼈아픈 실책이었다.

Page 5: 나폴레옹3세

결국 나폴레옹 3 세는 빈체제를 파괴하기를 원했지만, 그 결과로 탄생한 비스마르크 체제는 프랑스 안보를 오랫동안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악몽은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될 정도로 끈질긴 것이었다.

"나폴레옹3세의 대외정책 기조는?" 수정 | 삭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 년 4 월 20 일 ~ 1873 년 1 월 9 일)는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자 두 번째 프랑스 황제이다. 프랑스의 마지막 세습군주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1 세의 조카이자 의붓외손자로

1848 년에 2 월 혁명 이후 수립된 새로운 공화국에서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쿠데타를 통해 제 2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자체가 중요했고, 아마도 루이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자산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또한 숙명적인 정치 유산이었고, 영광과 제국의 새 시대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높였다.

역사가 노먼 리치에 따르면, 나폴레옹 3 세는 이같은 대중적 기대를 충족시키려 노력했고, 프랑스를 다시금 유럽의 지배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나폴레옹 3 세는 대외정책에서 3 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영국은 그의 삼촌,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공의 주된 걸림돌이었다. 그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영국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해서, 그의 대외정책의 성공을 용이하게 하려했다.

Page 6: 나폴레옹3세

2. 그는 자신의 대의를 위해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려 했다. 민족주의의 잠재적인 힘은 그의 삼촌도 인정했지만,

보나파르트는 이것을 이용하는데 실패했다. 나폴레옹 3 세는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독립을 원하는 민족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려 했고, 이들 민족들을 지원하여,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프랑스의 정치적,도덕적 주도하에, 유럽을 재편하려 했다.

3. 민족들과의 긴밀한 유대 속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탄생한 국제질서를 파괴하려 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패권을 부활에 방해되는 주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당시 러시아가 빈체제라는 국제질서의 주된 보호자였기 때문에, 나폴레옹 3 세의 대외정책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그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프랑스에 대한 공포를 압도할 정도로 유럽 국가들에서

강력했다는 점이고, 나폴레옹 3 세는 곧 자신이 反 러시아 정책을 추진하는데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같은 대외정책적 맥락에서 보면, 나폴레옹 3 세와 히틀러는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3 세에게 빈체제가

걸림돌이었다면, 히틀러에게는 베르사유체제가 주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조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탄생한 국제체제의 파괴를 대외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크림전쟁에서 프랑스의 목표는?" 수정 | 삭제

" 크림 전쟁이 오스트리아에게 재앙이었던 이유는 ?"

크림전쟁에 임하면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 세는 주요 목표로 다음을 제시했다 : 기존 국제 질서의 붕괴, 그리고 국제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결성된 동맹의 분열.

1856 년 3 월, 최종 평화협상 과정에서, 나폴레옹 3 세는 휘하 각료들에게, 나폴레옹 전쟁이후에 탄생한 빈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맹이 유럽협조체제와 함께 우리에게 위협이 되며, 우리의 행동의 자유를 강탈해 갔다. 전쟁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두 세력을 분리시켜, 프랑스가 해외에서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가지게 만드는데 있다."

"크림 전쟁이 오스트리아에게 재앙이었던 이유는?" 수정 | 삭제

메테르니히 ,100 년의 유럽 평화를 설계하다 !

Page 7: 나폴레옹3세

백과사전에 따르면, 크림 전쟁은 1854 년 3 월 28 일부터 1856 년 3 월 30 일까지 지속된 러시아 제국과 영국,프랑스,사르데냐

왕국,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만큼이나, 크림 전쟁은 직접 교전국이 아니었던 오스트리아에게도 '재앙'이었다고

한다.

 

크림 전쟁의 발발에 대해 가장 당황한 것은 바로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도 중시했지만,

러시아의 발칸 반도로의 진출이 오스트리아의 슬라브계 주민들의 동요를 부추길 것을 우려했다. 그들이 또한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만약 발칸에서 러시아 편을 든다면, 이것이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영토 침공의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

보았다.

우선,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신임 외무장관, 부올 백작 Count Karl Ferdinand von Buol 은

자국의 복지부동에 대해 안절부절했고,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을 매우 위험한 것이라 보았다.

영불연합군이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짜르에 대해 최후통첩하면서, 러시아가 몰바디아와

왈라키아로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크림전쟁의 종결에 결정적이었다. 적어도 러시아 지도자들에게만은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가 니콜라이 1 세를 배신했고, 나폴레옹 전쟁 이래의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끝장냈던 것이다.

이같은 오스트리아-러시아 관계의 악화는 메테르니히가 고안한 빈 체제에 타격을 가했고, 이것 때문에 얼마후에 치명상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일단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유했던 가치의 동맹을 파괴하자, 러시아도 자신의 지정학적 이해에 따라

Page 8: 나폴레옹3세

행동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발칸 반도의 장래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충돌할 운명이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약화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빈체제가 50 년동안 제 기능을 한 이유는 3 대 동유럽 강대국들인 프로이센,러시아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혁명적 혼란과

프랑스의 유럽 지배를 막기로 뭉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지위에

타격을 가하기를 원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와의 동맹에 나섰고,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려했던 영국편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가 자국의 국익만을 추구함을 통해, 신성동맹의 동맹국인 러시아,프로이센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프로이센은 이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물러나도록 압박했고, 발칸에서의 러시아와의 적대감 증가가 제 1 차세계대전과 이에

따른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크림 전쟁 종결 후 5 년만에,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카부르는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을 도발, 이탈리아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는 장정에 돌입했다. 이는 프랑스의 동맹과 러시아의 묵인으로 지원을 받았고,이는 과거에 이탈리아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지원이었다. 또다시 5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독일 패권을 둘러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켰다. 다시한번, 러시아가 이를 묵인했고, 프랑스도 어쩔수 없이 이를 묵인했다.

만약 메테르니히 시절이었다면, 유럽 협조체제 The Concert of Europe 가 작동하면서, 이같은 변동이 통제,억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림 전쟁으로 빈체제가 결정적 타격을 받으면서, 유럽 외교는 협조가 아니라 힘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이후 50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하지만,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군비 경쟁이 심화되었다.   

-출처 , 키신저, 외교, 93-95쪽.

"크림전쟁에서 프랑스가 웃었지만..." 수정 | 삭제

" 크림 전쟁이 오스트리아에게 재앙이었던 이유는 ?"

"크림전쟁의 결과는?"

크림전쟁 Crimean War 이란,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벌인

전쟁(1853. 10~1856. 2)이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크림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확립된 유럽협조체제의 붕괴였다. 이후 유럽대륙에서의 세력관계가

요동을 치게 되었다. 패배하고 굴욕을 당한 러시아는 1856 년의 파리조약에 기반한 유럽의 신질서에 도전하게 되고, 수정주의

국가가 되었다. 물론 패전으로 인해 러시아는 향후 20 년 동안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고, 국내 문제 안정에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남동 유럽으로의 팽창 저지라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목표는 단지 짧은 기간동안만 관철되었을

뿐이었다. 러시아는 차근차근히 파리조약의 멍에를 극복해나갔다. 1870 년, 보불전쟁 동안, 러시아는 파리 조약의 흑해 관련

조항을 무효로 만들었다. 1877 년, 러시아는 터키와 전쟁을 다시 벌였다. 1877 년, 러시아는 파리 조약을 통해 빼앗긴

베사라비아 Bessarabia  땅의 대부분을 다시 되찾았다.

명예롭지 못한 전쟁을 통해 환멸을 느끼고, 파리조약이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에 불만을 품은 영국은 이후

국내문제에 치중하게 되었고, 유럽 문제에 대한 개입을 대체로 자제하게 되었다.

Page 9: 나폴레옹3세

오스트리아는 고립되었다. 크림전쟁 동안, 교전 양측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내심 기대했다 :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1815 년

빈조약의 반 프랑스 원칙을 지지해 줄 것이라 기대했고, 1848 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적,외교적 지원에 대한

답례를 기대했다. 반면에,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사활적 이익이 존재하는, 남동 유럽으로의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노력의 필요성을 오스트리아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중립은 모든 교전국들을

적대세력으로 만들었고, 특히 오스트리아의 대 러시아 최후통첩은 이후의 양국관계에 치명상을 가하게 될 것이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1879 년까지 강대국들 중에서 어떤 동맹국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크림전쟁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은 국가인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군은 세바스토폴 전투에서 가장 인상적인

승리를 달성했다 ; 프랑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고안된 1815 년의 국제체제와 그것에 프랑스에게 가했던 제한들이 사라졌다 ;

프랑스가 명목상으로 유럽 지배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러시아를 대체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처지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프랑스 패권의 부활을 경계의 시선으로 주시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3 세와 폴란드의 접촉에 대해 경계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과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에

분개했다.

이렇게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만큼, 유럽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지만, 나폴레옹 3 세 본인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야심찬 대외 정책을 추진해 나갔고, 유럽의 각종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면서, 대륙에서의 프랑스 패권 회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자주 돈키호테식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주도하기를 원했던, 민족주의 운동을 힘을

프랑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 결국, 그는 프랑스의 국경에서 두 개의 신흥 민족 국가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중 한나라, 독일의 탄생은 나폴레옹 3 세의 제 2 제정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독일은 이후 유럽 대륙의 패권을

추구하게 될 것이었다.

결국, 크림전쟁을 통해, 남동 유럽으로의 러시아 팽창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유럽은 러시아가 사라지자, 그

위협세력의 공백을 프랑스가 대신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즉 러시아의 위협이 프랑스의 위협으로 대체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제 2 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라는 위험이 제거되자마자, 러시아라는 전통적인 위험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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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3세의 비아리츠 회담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독일 통일][비스마르크][나폴레옹 3 세]

Page 10: 나폴레옹3세

                               <비아리츠의 왕실 별장에서 담소 중인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 세>

1864 년 10 월, 1865 년 10 월

프랑스 비아리츠의 휴양시설에서

독일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우호적인 중립을 얻고자했다. 

나폴레옹 3 세에게 제안된 것은 프로이센이 프랑스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대상으로 영토 확장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상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3 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고, 이 경우 프랑스가 중재자로 나설수 있다고 기대했다. 

비아리츠 회담 이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가 1866 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개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였다. 

Page 11: 나폴레옹3세

프랑스 비아리츠의 유제니 왕실별장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 세가 회담한 곳이다.

나폴레옹 3 세가 황후 유제니를 위해서 건설한 왕실 별장이다. 현재는 오텔 뒤 팔레다. 

Hotel du Palais

주소- 1 Avenue de L'Imperatrice, 64200 Biarritz, France

황후 1 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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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3세의 차이는?"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Page 12: 나폴레옹3세

<나폴레옹 3 세와 비스마르크>

[독일통일][보불전쟁][비스마르크][나폴레옹 3 세]

다음은 나폴레옹 3 세와 비스마르크에 대한 헨리 키신저의 평가이다. 

현대 유럽 국가체제 초기에 활동한 2 명의 혁명가들이 현대의 많은 딜레마들을 보여주었다. 주저하는 혁명가였던 나폴레옹은 정책을 대중의 입맛에 맞게 추진하는 것을 대표했다. 반면 보수주의 혁명가, 비스마르크는 정책을 힘에 대한 분석과 결합시킨 경향을 대표했다.

나폴레옹은 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결과 앞에서 주저했다. 젊은 시절을 20 세기에 저항이라 부르는 것을 하면서 소일했던 그는 사상의 형성과 그 결과간의 간극을 결코 좁히지 못했다. 그 목적과 정통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여론에 의존했다. 나폴레옹은 현대 정치인 양식으로 외교 정책을 수행했다. 마치 텔레비전 9 시 뉴스에서의 반응으로 정책의 성공을 확인하는 정치인들 처럼 말이다. 그들처럼, 나폴레옹은 순수한 전술의 포로였고, 단기 목표와 즉각적인 결과에만 집중했고,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외교정책이 마법사의 마술인 것처럼 혼동했다. 하지만 결국, 지도자가 다르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선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대중은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지도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장기적인 경향 보다는 위기의 징후들만을 본다. 지도자의 역할은 사태의 추이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무엇인가를 실천한다는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에 실패한다면, 위기는 심화되고,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지도자가 사태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기이한 현대적 현상의 집행자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Page 13: 나폴레옹3세

그는 대중이 원하는 것만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는 확신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저의 사실을 훌륭하게 분석했고, 프로에센의 기회를 읽었다. 그는 이 작업을 매우 뛰어나게 해냈고, 그가 만든 독일은 2 번의 세계대전 패전, 2 번의 외세의 점령, 2 세대 동안의 분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실패한 것은 독일 사회에 모든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남기면서 불행한 운명을 맞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비극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야심을 가졌다는 것이었다면, 비스마르크의 비극은 그의 능력이 그가 만든 정책들을 흡수할 사회의 능력을 초월했다는 데 있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게 남긴 유산이 전략적 마비였다면,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남긴 유산은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함이었다.      

-출처

키신저,외교,135-136쪽

나폴레옹3세가 덴마크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이유?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Page 14: 나폴레옹3세

덴마크 전쟁은 1864 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상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인 것이다.  프랑스의 관점에서 보면, 덴마크 전쟁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힘을 모아 덴마크를 공격, 결국 두 공국을 넘겨받은 것으로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1815 년 빈 조약의 관련 규정,즉 슐레스비히는 독일연방이 아니지만 홀슈타인은 연방 구성원이라는 규정에 대한 위반이었다.  빈 조약에 따라 영국,프랑스는 이 전쟁에 외교적으로 개입, 전쟁 이전 상태로의 복원을 주장할 수 있었다.

분쟁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서 영국이 프랑스에 공동 개입을 제안하자 나폴레옹 3 세는 보상을 요구했다. 소 라인 little rhine 을 요구했다., 대라인 great rhine 이 라인란트 전체를 의미했다면, 소라인은 자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긴장이 고조되자, 나폴레옹의 모순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통일을 두려워했지만 독일 민족주의에 동정적이었고 이 풀수없는 딜레마를 해결하기를 주저했다. 그는 프로이센을 가장 순수한 독일의 민족 국가라 간주했고, 1860 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프로이센은 독일민족,종교개혁,자유주의적 헌법의 화신이다. 이 나라는 가장 큰 진정한 독일 군주국이고, 다른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 보다 더 높은 양심의 자유, 계몽주의,더 많은 정치적 권리가 주어졌다.”

프로이센의 독특한 지위에 대한 나폴레옹의 인정은 프로이센의 최종 승리를 위한 열쇠였다. 결국 프로이센에 대한 나폴레옹의 공공연한 존경이 프랑스가 덴마크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알리바이 중 하나가 되었다.

-이상의 나폴레옹 3 세의 모순적 외교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국가이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최초로 국익이 최우선임을 실천한 것은 바로 30 년전쟁 시절의 프랑스 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 Cardinal Richelieu 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톨릭 추기경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 세력의 증가를 막기위해, 개신교편에 가담했다. 리슐리외의 국가이성에 따르면, 국가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익이 법,도덕,종교 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7 세기 유럽에서,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신교를 억압하고, 구교를 바탕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전유럽을 통일하려 했다. 이에 대해 구교의 추기경이었던 리슐리외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이에 반대했다. 만약 신성로마제국 주도로 독일이 통일되면, 통일 독일이 프랑스를 압박할 것이고, 따라서 프랑스의 안보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 그는 계산했다.이렇게 리슐리외는 프랑스 국익의 관점에서 독일 통일 저지를 위해 노력했고, 그의 이같은 노력 덕분에,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패배전까지 유럽 제 1 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당시의 국제정세"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란, 1864 년에 덴마크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영유권을 두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을 말한다. 전쟁 결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 세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내주었다.

전쟁 당시의 국제정세는 다음과 같았다. 나폴레옹 3 세의 신뢰성과 그의 의도에 대한 유럽의 의혹이 증폭하고 있었고, 폴란드

봉기에 대한 프랑스의 동정 때문에 프랑스-러시아 화해 가능성이 끝장났고,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고립상태였고,

영국은 미국의 남북전쟁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프랑스는 멕시코 원정 중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주요 열강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대해서 공동개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의

첫번째 외교적 승리이자,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의 첫걸음이 되었던 1864 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의 국제적 배경이 되었다.

 

Page 15: 나폴레옹3세

아돌프 티에르가 나폴레옹3세 외교에 반대한 이유는?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아돌프 티에르>

[프랑스][제 2 제정][나폴레옹 3 세][아돌프 티에르]

나폴레옹 3 세 외교정책의 최종 실패가 결정된 것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독일 통일전쟁이었다. 프로이센은 덴마크와의 1864 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통해서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의 패권을 확립해나갔다. 

나폴레옹 3 세는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라인강 너머의 독일을 분열된 상태로 두는 것은 17 세기 리슐리외 이래의 프랑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리고 독일의 분열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우위는 빈 체제가

Page 16: 나폴레옹3세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의 빈체제 파괴를 백안시했던 나폴레옹 3 세의 독일정책의 결과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통일이었다. 이는 프랑스에게 라인강 동쪽으로부터의 안보,군사상의 위험을 제공했고, 프랑스는 1870 년 보불전쟁,1914 년 제 1 차세계대전,1940 년 제 2 차세계대전에서 분열된 독일의 상실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독일통일 과정에서의 나폴레옹 3 세의 관심사는 강한 독일 탄생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중립의 대가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1865 년 10 월의 비아리츠 회담에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에게 프랑스의 영토확장을 지지한다고 약속하면서, 프랑스의 불개입을 약속받았고, 뿐만아니라 프랑스의 영토확장에 대해 우려하던 영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 전쟁에서의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받으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영국 관계를 악화시키는 묘수를 실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나폴레옹의 외교정책에 대한 아돌프 티에르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는 나폴레옹 3 세 통치기간 동안 그의 정책을 완강히 반대했고, 보불전쟁 이후 제2 제정이 붕괴된 이후, 제 2 대 프랑스 대통령 (1871-1873)이 되었다. 

티에르는 독일통일 전쟁에서의 중립을 대가로 프랑스가 얻게될 보상이 프랑스의 기본적 이해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66 년 5 월 3 일의 멋진 연설에서, 아돌프 티에르는 프로이센이 독일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라 정확히 예상했다.

"우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 세의 부활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전에는 그는 빈에서 거주했지만, 이제는 베를린에 거주할 것이며 우리 국경에 더 가까워졌으며, 국경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여러분들은 프랑스의 이해라는 대의로 이 정책에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왜냐하면 프랑스에게 이 혁명이 프랑스를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지난 2 세기 동안 이 대단한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는데, 이제 프랑스는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그것이 재탄생하는 것을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나폴레옹의 모호한 생각대신에, 티에르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반대하는 명확한 정책을 채택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 연방 국가들의 독립 옹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바로 옛 리슐리외의 원칙이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는 독일 통일에 저항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우선 독일 연방 국가들의 독립을 위해서다. 둘째, 프랑스 자신의 독립을 위해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의 균형을 위해서이고, 이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모든 사회의 이해다."

나폴레옹3세의 독일 정책의 전략적 오판은?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19 세기 외교사][프랑스][제 2 제정][나폴레옹 3 세]

다음은 헨리 키신저의 지적이다.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하는 혼란속에서, 프랑스는 2 개의 전략적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리슐리외의 정책을 지속추진하면서, 중부 유럽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둘 수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나폴레옹이 민족-자결주의 지지라는 자신의 혁명적 확신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독일내에서만은 그랬다. 나폴레옹 3 세는 독일연방내부의 기존 통치자들을 지지해야만 했고, 그들은 중부 유럽에서의 분열을 유지하기를 갈망했다. 

아니면, 나폴레옹은 자신의 숙부가 그랬던 것처럼, 공화주의적 십자군 지도자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프랑스가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확보, 유럽에서의 정치적 지도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할수 있었다.

Page 17: 나폴레옹3세

프랑스에게는 불운하게도, 나폴레옹은 두 전략을 동시에 추진했다. 민족 자결주의의 지지자인 그는 이것이 중부 유럽에서의 프랑스 지위에 야기할 수도 있는 지정학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폴란드 봉기를 지원했지만, 그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때 머뭇거렸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모욕이라는 관점에서 빈 체제에 반대했지만, 빈체제가 한편으로 프랑스 안보를 위한 최선의 것이라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때는 이미 늦었다. 

빈회의 결과로 탄생한 독일연방은 심각한 외부적 위험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단위로 행동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그 소속 국가들이 공격적 목적으로 힘을 모으는 행위는 확실히 금지되었고, 공격적 전략에 합의할 수도 없었다. 독일연방이 존재한 반세기동안 이 주제는 결코 제기된 적 조차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빈체제가 건재하는 한 프랑스의 라인강 국경은 안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책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독일연방 붕괴 이후 1 세기 동안 프랑스의 라인강 국경은 안전한 것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안보의 핵심적 요소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 발발, 이 전쟁으로 독일연방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나폴레옹 3 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주로 프랑스에 대항해서 조직된 독일 연방이 해체된 것을 보고 대체로 만족한다고 고백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합스부르크는 보다 분별있게 대답했다. "독일연방은 순수한 방어적 동기에서 구성되었고, 반세기 존재할 동안에 이웃국에 대해서 위협 원인이 된 적이 결코 없었다" 

결국, 독일연방에 대한 대안은 리슐리외적인 분열된 독일이 아니라, 통일 독일이었다. 통일 독일은 프랑스를 인구수로 압도했고, 그 산업 능력은 곧 프랑스를 초월하게 될 것이었다.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나폴레옹 3 세는 방어적인 독일연방을 없앴고, 이를 통일된 독일이라는 프랑스 안보에 대한 잠정적인 공격적 위협으로 대체시켰다.

-출처

키신저,외교, 108-109쪽

프로이센의 압승 이후 당황한 나폴레옹3세의 대응은?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독일통일][나폴레옹 3 세]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앞두고 나폴레옹 3 세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 기대했고,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전망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이 초반에 압승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3 세는 자신의 조국을 탈출이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된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뒤늦게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실책으로 이미 오스트리아는 지나치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는 군사작전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냈고, 중립을 통해 독일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세력을 회복하는데 관심을 잃게 되었고, 빈과 부다페스트에 기반한 이중왕국을 중심으로 제국을 재편하려 했고, 발칸반도에 집중하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영국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에 대한 프랑스의 계획 때문에 프랑스 지원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폴란드 봉기때 나폴레옹이 보여준 행동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게 더욱더 재앙적인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은 나폴레옹의 실책에 따라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될수록, 이 실수를 단한번의 위대한 행보로 만회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도박 판돈이 더욱 커졌다. 그는 마치 한명의 도박꾼처럼, 그동안의 판에서 잃은 것은 한번의 배팅으로 단번에 만회할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Page 18: 나폴레옹3세

외교 도박사 나폴레옹 3 세에게 마지막 올인은 보불전쟁이었고, 이 마지막 도박에서 그는 대박을 원했지만, 결과는 쪽박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이 도박빚을 갚는데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하게 되었다.

나폴레옹3세의 외교적 고립은 자업자득!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19 세기 외교사][프랑스][나폴레옹 3 세][비스마르크]

19 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정세에서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격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정치가 다음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 세계가 5 대 열강간의 불안정한 균형에 의존하는 한, 3 개국이 가담한 진영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해라!" "All politics reduces itself to this formula: try to be one of three, as long as the world is governed by the unstable equilibrium of five great powers."

그렇다면,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나폴레옹 3 세는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을까?

다음은 헨리 키신저의 지적이다.

황제의 정책은 주로 기이했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지배적이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족으로, 그는 프랑스의 국가이성이 무엇이든 간에,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에서 편안함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1858 년 나폴레옹은 피에몬테 외교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생생한 혐오감을 느낀다." 혁명 계획에 대한 그의 애호는 1859 년에 이탈리아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만든다. 나폴레옹은 유럽 국경을 다시그리기 위한 유럽회의를 반복적으로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쟁 이후 니스와 사부아를 병합하면서 영국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고립을 완성시키는 의미에서, 나폴레옹은 1863 년의 폴란드 봉기를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가능성을 희생시켰다. 민족자결주의라는 기치아래 유럽외교를 혼란상태로 몰아간 나폴레옹은 어느순간 갑자기 스스로 고립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대부분 원인이 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고, 그 결과, 독일 민족이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를 끝장내는 것을 실현하게 되었다.

-키신저,외교, 110쪽

- 1870 년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외교적 고립상태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러시아는 무력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아주기까지 했다.

나폴레옹 3 세의 외교적 실정의 결과로 확정된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 구도는 1894 년 1 월의 노불동맹 탄생 이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에게 외교적 멍에가 되었다. 

"사도바 전투 이후 비스마르크를 자제하게 만든 것은?" 수정 | 삭제

"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통일하지 않았다 ?"

Page 19: 나폴레옹3세

[독일][독일 통일][비스마르크][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1866 년][사도바 전투]

비스마르크가 사도바 전투 이후 회군을 결심한 이유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중 1866 년 7 월 3 일의 사도바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1866 년에 오스트리아에게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영토의 축소도 배상금의 지불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비스마르크가 다가오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우호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age 20: 나폴레옹3세

실제로 사도바 전투 이후,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과 군부는 승리에 도취되어 빈으로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판단은 달랐다. 오스트리아를 불구로 만들어 그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장치 프로이센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계산했다. 그리고 빈으로 진격한다면 반드시 나폴레옹 3 세가 개입할 것이고, 이 경우 프로이센에 우호적인 국가들도 도리어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 판단했다. 기록에 따르면, 단기적인 승리에 도취해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값싼 전리품을 주장하는 군부에 대해서, 독일제국의 통일의 날을 위한 장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병사들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심지어 거실에 들어가 울었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왕과 군부가 결국 비스마르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비스마르크의 위대한 결정이라 평가받는다.

하지만 역사가 씨먼에 따르면, 비스마르크의 회군 결정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오스트리아라는 장기적인 전략적 고려에서 였기 보다는 프랑스의 즉각적인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황후 유제니가 나폴레옹 3 세가 1859 년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했을때 프로이센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 동원령 선포! 이탈리아 전쟁시,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의 결정적인 승리 직후, 프로이센이 군사 개입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프랑스는 결국 오스트리아와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었다. 이번에는 프랑스 차례라는 것이었다. 사도바 이후,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 세의 의도를 확신할수 없었고, 결국 사도바에서 멈추기로 결심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프랑스의 무력 개입이 초래할 수도 있는 군사적,외교적 위험에 대한 대응 차원이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이전에,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 세는 비아리츠 회담에서,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대상으로 영토 확장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상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약속했다.

프로이센의 승리가 확정되자, 나폴레옹 3 세는 독일주재 프랑스대사 베네데티에게 훈령, 전쟁에서의 프랑스 중립에 대한 보답으로, 프랑스가 장차 벨기에를 획득하는데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게 만드는 것을 확정지으라고 명령했다. 8 월에, 비스마르크와 베네데티는 회담을 통해서 이른바 베네데티 초안을 만들었다 (1866 년 8 월) 이 초안에 따르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프랑스의 벨기에 점령을 돕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초안을 공식화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결국이 초안은 공식 조약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베네데테가 수기로 작성한 초안을 간직했고, 1870 년 보불전쟁 직전에 영국의 더 타임스지에 흘렸다. 이 초안 공개로 영국 여론이 프로이센에 동정적으로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1 년 5 월 2 일, 제국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서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심지어 1866 년 8 월 6 일, 나는 프랑스 대사가 훈령을 받고 내게로 와서, 간결하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마인츠를 양도하지 않으면, 즉각적인 선전포고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프랑스측의 답변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 "좋아요. 그럼 전쟁입니다!" 대사는 이 대답을 가지고 파리로 갔다. 몇일 뒤, 파리의 그 분은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고, 나는 나폴레옹 황제가 이 대답을 불쾌하게 찢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프랑스 대중은 프로이센의 승리에 대해 분노했고, 사도바에 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1870 년 보불전쟁 Franco-Prussian War 의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

Seaman,  From Vienna to Versailles. Contributors: L. C.B. Seaman - Author. Publisher: Routledge. Place of publication: London. Publication year: 1988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비스마르크가 폴란드 민족주의를 경멸한 이유는?"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Page 21: 나폴레옹3세

<나폴레옹 3 세와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와 폴란드 민족주의"

1863 년 1 월,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의 탄압에 맞서 독립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불과 한달전에,

남북전쟁의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Battle of Fredericksburg 에서, 북군이 참패하여 남군의 사기가 높아진 상황이었고,

나폴레옹 3 세의 프랑스군대는 멕시코 시티로 진격 중이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의 반란으로 인해, 폴란드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자유를 위한 폴란드인의 투쟁은 유럽 도처에서의 자유주의자들과

'反'러시아주의자들의 동정을 받았고, 그들은 자국 정부에게 폴란드인을 돕기위해서 개입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이 봉기는 폴란드 영토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프로이센의 지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알벤슬레벤 Gustav von Albensleben 을 러시아로 급파했다. 이것은 공동의 적인 폴란드의 위협에 대해서 러시아와 군사적인

공조체제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벤슬레벤은 러시아 짜르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고 한다 : "현재의 봉기 혹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사한 봉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양국 정부가 공동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폴란드 반란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입장은 공동의 적에게 위협당하는 2 개의 동맹국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폴란드 봉기에 대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공조에 대해서,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폴란드 민족주의에 열광하고, 이를

Page 22: 나폴레옹3세

찬양하면서, 비스마르크의 비도적적인 대외정책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지벨 (Heinrich von Sybel,1817-1895)은 "

절대왕정 러시아의 앞잡이"라면서 비스마르를 다음과 같이 규탄했다 : "비스마르크는 도덕적 기운이 팽배하는 전 유럽에서

엄청난 인간사냥으로 간주되는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를 돕는 공범자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과의 보조를 맞추는데

전념했다. 그에게 러시아는 반드시 회유해야할 대상이었고, 중유럽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반면, 폴란드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매우 억압적이었다. 폴란드는 1772 년,1793 년,1795 년에 세 차례에 걸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3 국에게 분할 지배되었고, 이 상태가 19 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만약 3 국간의 공조가 붕괴된다면, 폴란드의 독립 가능성이 있었고, 그리고 만약 폴란드가 독립한다면, 프로이센을 영구적으로

위협하는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가 폴란드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시한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프로이센인의 한 사람으로, 그는 폴란드의 일부인 동부

프로이센의 상실에 대해서 원초적인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독립 폴란드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1861 년 4 월 14

일, 비스마르크는 그의 여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 "우리가 존속하려면 폴란드인은 뿌리채 뽑아버려야만 한다."

이렇게 폴란드의 독립 염원은 1863 년의 마지막 봉기에서 좌절되었다. 같은 해, 2 월 8 일, 알벤슬레벤 협정 (the Alvensleben

Convnetion)을 체결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폴란드 봉기에 맞서서 앞으로도 계속 공동대처하기로 합의했다.

1863 년의 알벤슬레벤 협정은 1939 년의 나치 독일과 소련간의 독소불가침 조약과 유사한, 폴란드 문제에 대한 독일과

러시아간의 공동이해관계를 보여준다. 1863 년의 협정에서 양국은 각국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폴란드 반란군을 추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고, 이렇게 체포한 반란가담자를 러시아 군사 법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알벤스레벤 협정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1863 년 3 월 8 일, 런던의 그의 특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 "알벤스레벤 협정을 통해, 우리는 고르차코프의 외무장관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짜르가 특별 명령을

내리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이번 사태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이번 협정은 짜르 내각의 반-폴란드, 반-프랑스 세력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고, 폴란드 봉기의 진압에 대해서 이전에 주저하던 러시아가 봉기를 진압하기로 하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던 알벤스레벤 협정이 심각한 외교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유럽에서의 민족의 자유에 대한

옹호자의 대표격이었전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는 폴란드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었고, 프랑스 여론도

이를 감정적으로 지지했다. 이렇게, 협정에 대해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나폴레옹 3 세의 프랑스가 항의했고, 폴란드 민족

봉기에 대한 동정을 표시했고, 특히 나폴레옹 3 세는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총리직 경질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폴란드

민족 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열강의 간섭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장기적으로 볼때, 알벤슬레벤 협정은 러시아-프로이센 관계를 발전시켰지만, 폴란드 봉기에 대한 나폴레옹 3 세의 공개적인

동정 때문에, 프랑스-러시아 관계는 악화되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이 협정이 이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과

Page 23: 나폴레옹3세

보불전쟁에서의 러시아 중립의 조건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 짜르도 이후 다음을 인정했다. 폴란드 위기 동안의

프로이센이 보여준 일관된 러시아 지지에 대한 고마움이 독일 통일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프로이센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폴란드 위기에서 다른 유럽 열강이 보여준 反-러시아, 親-폴란드 반란에 대한 반감이 이후

러시아의 대 프로이센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반감은 특히 프랑스의 나폴레옹 3 세에게 치명적이었고, 이는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와 제 2 제정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참고- 강미현, 비스마르크 평전

Norman Rich, Great Power Diplomacy: 1814-1914, McGraw-Hill Companies,1991

러시아가 보불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사전에 따르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또는 보불전쟁(普佛戰爭)은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프랑스와 독일간의 전쟁이다.

(1870 년 7 월 19 일 – 1871 년 5 월 10 일)

러시아의 불개입 결정에 대해서, 역사가 마이크 웰스 Mike Wells 의 <러시아와 1870-1871 년의 보불전쟁 Russia and the

Franco-Prussian War of 1870-71>이라는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비스마르크 외교와 전쟁>

역사가 팀 블레닝은 러시아의 불개입이 독일역사에서 결정적이었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만약 러시아가

비스마르크가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와 각각 1864 년과 1866 년에 싸운 전쟁에 개입했다면, 그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불개입 덕분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패배시켰고, 프로이센은 외국의 간섭없이, 1867 년에

북부 독일 연방 North German Confederation 을 만들 수 있었다. 프로이센의 강력한 이웃국가들인 프랑스와 러시아는

중유럽에 새로운 강대국이 탄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중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나폴레옹 3 세는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그에게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얼마후, 스페인 왕위에 호엔쫄레른 왕가 사람이 오르는 문제가 발생, 이것이 프랑스에게 포위에

대한 공포를 자극했고, 나폴레옹 3 세와 프랑스국민에게 위협으로 제기되었다.

한편, 북부 독일 연방에 포함되지 않는, 남부 독일의 독립 국가들이 점점 프로이센에게 적대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1869 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적대감과 남부 독일을 북부 독일 연방에 편입시키기 위한 갈등이 전쟁으로 귀결될

것으로 보였다.

<1870 년의 보불전쟁>

프로이센이 보불전쟁을 대비하면서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쟁의 장기화였다고 한다.

Page 24: 나폴레옹3세

프로이센 군 지도부는 단기전만을 계획했다 ; 하지만 유럽은 장기전을 기대했고, 프랑스를 주요 군사 강국으로 간주했다.

전쟁의 장기화는 1866 년 프로이센에 대한 패배에 대해서 복수에 불타는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었다. 또한

프로이센의 패배는 1864 년 전쟁에서 영토를 빼앗긴, 덴마크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었다. 독일내에서도 하노버 같은 프로이센

적대세력이 있었다. 북부 독일 연방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만약 프로이센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한다면, 완전히

해체될 것으로 보였다.

이같은 지리적,군사적 입장에서, 프로이센 승리의 유일한 조건이란 바로 외부 강대국들이 프랑스 편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이같은 관점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프랑스와의 전쟁이 길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불개입이

매우 중요했다. 장기전 국면에서, 러시아는 주요 교전국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북부 독일 연방과 프랑스간의

다가오는 전쟁에서의 유럽 주요 강대국들의 가능한 반응에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비스마르크의 전략>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오랫동안의 반목관계를 고려할 때, 영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탈리아는 지난

1866 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로이센의 승리를 통해, 베네치아를 획득한 바 있었고, 이번에는 로마를 장악하고 있는

프랑스의 패배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원했다. 러시아는 비스마르크가 폴란드 반란 진압을 위해 협조한 1863 년 이래,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발칸에서 대립 때문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맞서서 협력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오스트리아 협력 가능성?>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 가능성이었다. 모든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이 1866 년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비스마르크의 관대한 프라하 조약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개입 위험이 낮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869

년과 1870 년에 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셉은 1869 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프랑스의 대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며, 프랑스군의 승리를 도울 것이다." 오스트리아 총리 바스트 Beusst 는

프랑스측에 가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알브레흐트 대공이 합동 군사작전 토론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고, 1870 년에 르 브랭

Le Brun 장군이 빈을 방문했다. 만약 전쟁이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의 개입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개입 가능성을 줄여주었던 것은 바로 러시아의 외교적 결정 덕분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양면전 war on two

fronts 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1871 년 7 월이 프로이센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이 이같은 가능성을 낮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에는 다른 장애물들도 있었다. 우선, 오스트리아 군사력이 1859 년,1866 년의 패배로

심각하게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이중 왕국에서의 헝가리의 영향력이 독일에서의 더이상의 군사적 모험에 반대하고

있었다. 셋째, 오스트리아 제국내의 독일어 사용자들의 민족주의가 프랑스 편으로의 개입에 반대했다.

<중요한 결정, 1870 년 7 월>

19 세기 유럽 외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들 중 하나가 내려진 것은 바로 1870 년 7 월이었다. 러시아가 비스마르크에게 7 월

14 일 (공교롭게도 프랑스혁명 기념일이다!),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선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위해서 그리고

Page 25: 나폴레옹3세

독일이 한 개의 전선에서만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갈리치아에 30 만 대군을 파병할 것이라

약속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덴마크에게도 중립을 지키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 약속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같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7 월 18 일에 오스트리아

왕실 회의가 열렸다. 중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목소리가 높았고, 전쟁장관은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대비가 부족함을 강조했다 :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의 대규모 침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연구자인 맥카트니는 빈에서의 이 회의를 주요 분수령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중립을 선언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프로이센의 승리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는 자신이 독일 문제에 주요 참여 국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자인했고, 자신의 장래 이익이 발칸 반도에 있음을 예고했다. 1866 년의 치욕에 대한 복수가 불가능해 지게

되자, 독일과의 동맹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고, 이는 1879 년에 실현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총리 바스트는 프랑스에게,

프랑스가 승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중립도 끝날 것이며, 오스트리아는 아마도 프랑스편에 가담할 것이라 약속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중립 때문에, 프랑스의 승리 가능성은 낮았다.

이같이 중요한 변화에 러시아 외교가 기여한 바가 많았고, 매우 중요했다. 사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 세의 입장은 곧

급변했다. 세당에서의 프로이센의 승리와 나폴레옹 3 세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러시아 정부가 세력 균형 유지를 위해서

프랑스의 완전한 패배를 막기위해서 노력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이후의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의 초석이

되었다. 하지만, 이같은 프로이센의 재빠른 승리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보불전쟁에서의 러시아 외교의 입장을

주도한 것은 1870 년 7 월 14 일의 결정이었다.

1863 년, 비스마르크가 폴란드 반란에서 러시아를 지원했던 것이 보불전쟁에서 중요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프랑스를 고립시켰고, 프로이센군 참모총장 몰트케가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했다.

<러시아 외교정책의 결과>

러시아 정책의 결과는 막대한 것이었고, 짜르 알렉산드르 2 세와 외무장관 고르차코프 Gorchakov 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러시아가 즉각적으로 프로이센으로부터 반대급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크림 전쟁 패배로 인한, 흑해로의 러시아 전함 진입금지 규정같은 러시아에 대한 제한을 없애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같은

러시아의 요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렸다. 프랑스는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오스트리아는 이에 무관심했고, 영국만이

개입할 수 있었지만, 글래드스턴 정부는 크림 전쟁을 재연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프로이센의 환심을 샀던, 러시아는 보불전쟁의 결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고, 그것은 바로 크림 전쟁 패배 이후, 러시아에게 부과되었던 각종 제한 조치들의 철폐였다.

<장기적인 결과>

1878 년, 불가리아에서 학살을 당하고 있는, 발칸반도의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터키와 전쟁을 벌인 러시아는

불가리아를 거대한 의존국가로 만들어서, 이 지역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지지가 절실했다. 하지만, 이

문제 논의를 위한 베를린 회담이 열리기 전에, 러시아는 자신의 목표를 축소해야 했고, 더 작은 불가리아 건설로 만족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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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지원하기 보다는 열강 사이를 중재하기를 원했고,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받아들일 만한 타협을

원했다.

이같은 베를린 회의의 결과, 러시아와 독일이 소원해졌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가까워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1870 년

보불전쟁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으로, 베를린 회의에서의 독일의 지지를 원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제공한 것은 지지가

아니라 중재였던 것이다.

아무튼, 러시아의 지원이 없었다면, 독일 제 2 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8 년 베를린

회의에서의 "정직한 중개자" 비스마르크는 그의 조국이 1870 년의 중요한 순간에 러시아 외교에게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을 잊은

것으로 보였다.

1870 년, 7 월 14 일과 7 월 18 일, 각각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내렸던 보불전쟁 관련 결정은 이후의 외교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지원했다면, 독일과의 동맹이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가 1870

년에 중요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1878 년에 프로이센의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는 일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잊혀진 전환점>

명백하게, 1870 년 러시아의 프로이센 지원 결정은 비스마르크 외교의 빛나는 업적이었다. 하지만, 외교에서 공짜란 없는

법이다 : 비스마르크의 성공은 어떻게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화나게 만들지 않으면서, 러시아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을까라는

큰 숙제를 남겼다. 1870 년 7 월의 결정이 1878 년 프로이센의 중립적인 중재 노력에 대한, 러시아 실망의 배경이 되었고,

독일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이같은 대 독일 불신이 비스마르크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심화되었다. 러시아의 이같은 점증하는

불만이 결국 로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으로 귀결되었고, 심지어 1890 년 신임 카이저 빌헬름 2 세가 비스마르크를

경질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의 접근을 막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3세의 대외정책과 그 유산? 수정 | 삭제

비스마르크 , "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

[프랑스][제 2 제정][나폴레옹 3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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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3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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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기의 유럽>1789 년 프랑스혁명 직후 시작된 유럽의 혼란이 1803 년-1815 년까지의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심화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815 년의 빈 체제이다.빈체제- 평화와 질서 그리고 유럽에서의 현상유지가 강조된 체제. 전쟁이 혁명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했다. -메테르니히의 원칙 - 안정을 위해서, 정통성있는 유럽의 왕실국가들이 보존되어야하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운동은 탄압받아야 하고, 국가간의 관계는 통치자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유럽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는 강대국간의 협조가 필요했고,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협력이 중요했다. 

루이 나폴레옹 1808-1873 년-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그는 젊은시절에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대항하는 비밀단체에서 활동했다. 1848 년 12 월 직선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1851 년 12 월 2 일 쿠데타를 통해 독재권력을 확립,  1852 년에 황제임을 선언했다. -그의 별명은 튈리리궁의 스핑크스였다- 그 속을 알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1852 년, 나폴레옹은 “제정은 평화다”라 선언했다.

제 2 제정 (1852-1870)이렇게 프랑스 제 2 제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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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 세는 발칸,이탈리아,독일에서의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보다 프랑스에 유리한 방향으로 1815 년 빈 조약을 갱신하려 했다. 

영러갈등을 이용,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1854-1856 년의 크림전쟁에 가담, 새로운 힘있는 지위를 획득했다. 크림전쟁을 종결지은 1856 년 파리조약에서 황제는 중재자를 자처했다. 

1858 년 나폴레옹은 플롱비에르에서 사르디니아의 카부르와 회동, 이탈리아 문제 해법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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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년 이탈리아 전쟁. 나폴레옹 3 세는 오스트리아와의 재빠른 타협을 도모했다. 취리히 조약으로 프랑스는 롬바르디아를 넘겨받아 피에드몬테에게 주고, 1860 년 튜린조약으로 니스와 사부아를 얻는다. 나폴레옹은 이후 이탈리아에서 철수했지만, 1870 년까지 로마에 프랑스군을 주둔시키면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나폴레옹의 교황령 국가 보호정책은 프랑스 국내의 가톨릭 여론을 고려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와의 우호를 위협하게 만들었다. 

1863 년 폴란드 봉기. 나폴레옹 3 세는 러시아에 대항한 1863 년 폴란드 봉기에 대한 공개적인 동정을 표시했고, 이것이 러시아를 격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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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년 프랑스 비아리츠의 휴양시설에서, 독일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우호적인 중립을 얻고자했다. 나폴레옹 3 세에게 제안된 것은 프로이센이 프랑스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대상으로 영토 확장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상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중 7 월 3 일의 사도바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프로이센으로부터 룩셈부르크도 어떠한 보상도 얻어내지 못했다. 

나폴레옹 3 세는 자신의 조국을 탈출이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된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뒤늦게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실책으로 이미 오스트리아는 지나치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는 군사작전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냈고, 중립을 통해 독일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세력을 회복하는데 관심을 잃게 되었고, 빈과 부다페스트에 기반한 이중왕국을 중심으로 제국을 재편하려 했고, 발칸반도에 집중하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영국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에 대한 프랑스의 계획 때문에 프랑스 지원에 대한 흥미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폴란드 봉기때 나폴레옹이 보여준 행동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게 더욱더 재앙적인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은 나폴레옹의 실책에 따라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될수록, 이 실수를 단한번의 위대한 행보로 만회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도박 판돈이 더욱 커졌다. 그는 마치 한명의 도박꾼처럼, 그동안의 판에서 잃은 것은 한번의 배팅으로 단번에 만회할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외교 도박사 나폴레옹 3 세에게 마지막 올인은 보불전쟁이었고, 이 마지막 도박에서 그는 대박을 원했지만, 결과는 쪽박이었다. 

<나폴레옹의 외교적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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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직전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9 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정세에서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격언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정치가 다음의 원칙으로 귀결된다 : 세계가 5 대 열강간의 불안정한 균형에 의존하는 한, 3 개국이 가담한 진영의 일원이 되도록 노력해라!" "All politics reduces itself to this formula: try to be one of three, as long as the world is governed by the unstable equilibrium of five great powers."

그렇다면,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나폴레옹 3 세는 어떤 행보를 보여주었을까?

다음은 헨리 키신저의 지적이다.

황제의 정책은 주로 기이했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지배적이었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일족으로, 그는 프랑스의 국가이성이 무엇이든 간에,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에서 편안함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1858 년 나폴레옹은 피에몬테 외교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생생한 혐오감을 느낀다." 혁명 계획에 대한 그의 애호는 1859 년에 이탈리아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게 만든다. 나폴레옹은 유럽 국경을 다시그리기 위한 유럽회의를 반복적으로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쟁 이후 니스와 사부아를 병합하면서 영국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고립을 완성시키는 의미에서, 나폴레옹은 1863 년의 폴란드 봉기를 지지하면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가능성을 희생시켰다. 민족자결주의라는 기치아래 유럽외교를 혼란상태로 몰아간 나폴레옹은 어느순간 갑자기 스스로 고립되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대부분 원인이 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갔고, 그 결과, 독일 민족이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를 끝장내는 것을 실현하게 되었다.

-키신저,외교, 110쪽

1870 년-1871 년 보불전쟁. 형식적으로 프랑스-프로이센 양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툼한 것으로 보이지만,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에게 보불전쟁이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전쟁이었다.

보불전쟁 이전에 비스마르크는 이미 외교전에서 유리한 상황이었다. 전쟁 직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벨기에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를 공개해서 영국의 중립을 보장받았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폴레옹 3 세가 1863 년 폴란드 봉기를 동정하자 분노했다. 러시아도 분명 독일의 분열에 의해서 동유럽 진출이라는 이익을 볼수 있었지만, 보불전쟁에서는 나폴레옹 3 세의 실정과 비스마르크의 친러정책 때문에, 불개입 결정을 내렸고 이는 프로이센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덕분에 프로이센은 양면전쟁의 위험없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전력을 집중할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보불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866 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로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노리던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가 무력을 동원 불개입을 압박했던 것이다. 1870 년 7 월 14 일, 러시아가 비스마르크에게, 오스트리아가 동원령을 선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위해서 그리고 독일이 한 개의 전선에서만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갈리치아에 30 만 대군을 파병할 것이라 약속했다. 뿐만아니라, 러시아는 덴마크에게도 중립을 지키라고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 약속했다. 

이탈리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스군대가 로마를 점령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이탈리아 통일의 걸림돌인 상황이었다.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킬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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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당 전투 이후의 나폴레옹 3 세와 비스마르크>

1870 년 9 월 1 일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결정적으로 패배. 나폴레옹 3 세가 포로가 되었다.

1871 년 5 월 18 일 프랑크푸르트 조약- 1.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2 .배상금 지불이 완료될때까지 프로이센군이 주둔한다. 3.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프로이센에 할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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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년 1 월 9 일 나폴레옹 3 세 사망

<나폴레옹 3 세의 전략적 유산- 독일문제>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하는 혼란속에서, 프랑스는 2 개의 전략적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리슐리외의 정책을 지속추진하면서, 중부 유럽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둘 수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나폴레옹이 민족-자결주의 지지라는 자신의 혁명적 확신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독일내에서만은 그랬다. 나폴레옹 3 세는 독일연방내부의 기존 통치자들을 지지해야만 했고, 그들은 중부 유럽에서의 분열을 유지하기를 갈망했다. 

아니면, 나폴레옹은 자신의 숙부가 그랬던 것처럼, 공화주의적 십자군 지도자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프랑스가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확보, 유럽에서의 정치적 지도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할수 있었다.

프랑스에게는 불운하게도, 나폴레옹은 두 전략을 동시에 추진했다. 민족 자결주의의 지지자인 그는 이것이 중부 유럽에서의 프랑스 지위에 야기할 수도 있는 지정학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폴란드 봉기를 지원했지만, 그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때 머뭇거렸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모욕이라는 관점에서 빈 체제에 반대했지만, 빈체제가 한편으로 프랑스 안보를 위한 최선의 것이라는 것을 그가 깨달았을때는 이미 늦었다. 

빈회의 결과로 탄생한 독일연방은 심각한 외부적 위험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진 단위로 행동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그 소속 국가들이 공격적 목적으로 힘을 모으는 행위는 확실히 금지되었고, 공격적 전략에 합의할 수도 없었다. 독일연방이 존재한 반세기동안 이 주제는 결코 제기된 적 조차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빈체제가 건재하는 한 프랑스의 라인강 국경은 안전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책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독일연방 붕괴 이후 1 세기 동안 프랑스의 라인강 국경은 안전한 것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안보의 핵심적 요소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866 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이 발발, 이 전쟁으로 독일연방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나폴레옹 3 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주로 프랑스에 대항해서 조직된 독일 연방이 해체된 것을 보고 대체로 만족한다고 고백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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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합스부르크는 보다 분별있게 대답했다. "독일연방은 순수한 방어적 동기에서 구성되었고, 반세기 존재할 동안에 이웃국에 대해서 위협 원인이 된 적이 결코 없었다" 

결국, 독일연방에 대한 대안은 리슐리외적인 분열된 독일이 아니라, 통일 독일이었다. 통일 독일은 프랑스를 인구수로 압도했고, 그 산업 능력은 곧 프랑스를 초월하게 될 것이었다. 빈체제를 파괴하면서 나폴레옹 3 세는 방어적인 독일연방을 없앴고, 이를 통일된 독일이라는 프랑스 안보에 대한 잠정적인 공격적 위협으로 대체시켰다.

<보불전쟁 이후의 유럽-비스마르크 동맹체제-프랑스가 포위되다!>

1871 년-1894 년의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Bismarck’s system of alliances 는 독일 통일의 성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통일을 위해, 일련을 전쟁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일단 통일 달성되자, 유럽 최고의 평화 옹호자가 되었다.

이는 독일 통일의 성과가 다른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이를 위해서,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중개자 honest

broker"가 되고자 했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의 강대국들과 복잡한 동맹관계를 구축했다.이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였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의 최대 목표는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노불동맹 FRANCO-RUSSIAN ALLIANCE

과 유사한, 악몽과 같은 反독일 포위 동맹 "Nightmare Coalition" 의 결성을 막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9 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동맹 결성 the Dual Alliance between Germany and Austria-Hungary 으로 시작했다. 그는 이

동맹에 이탈리아를 추가시켜서, 1882 년의 3 국동맹 the Triple Alliance 을 결성했다. 영국과는 1887 년의 지중해협정을 통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를 포함한 지중해에서의 현상유지에 합의했다. 이 지중해 협정은 프랑스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동맹 결성 가능성이 높았던 러시아와 1887 년 재보장 조약 reinsurance

treaty 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 동맹체제 하에서 프랑스가 동맹국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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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의 경고... 수정 | 삭제

“순간의 무드에 맞추고 전체 전략과 무관한” 정치지도자의 행동을 경계하라고,

키신저는 그의 책 <외교>에서 경고했다.

즉, 나폴레옹 3 세 처럼, 외교적인 업적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다 국가의 망국을 초래한 정치인의 외교 포퓰리즘을

경계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키신저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같은 사건을 어떤 시각에서 볼까? ^^

19 세기 후반의 유럽사에서 나폴레옹 3 세의 라이벌은 바로 비스마르크 였다.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 세의 차이는 무엇이었나?

비스마르크도 나폴레옹 3 세 만큼이나 도발적인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도발은 충동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었다. 

그의 모든 대외정책은 전략적·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는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전략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아마도, 비스마르크가 현재의 한국의 대외정세에 대해서 조언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한국이 일본과 북한을 동시에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