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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訓民正音諺解, 釋譜詳節, 月印釋譜의 서문들을 중심으로 * 송 태 효 ** 1. 언해 서문들의 번역인문학적 의의 1.1. 번역과 인문학 1.2. 언해 서문 연구의 의의 2. 초기 언해의 번역사적 위치 2.1. 언해 제작의 시대적 요청 2.2. 수용과 낯섦의 중도로서의 언해 3. 언문과 언해의 번역적 특성. 3.1. 문자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문 3.1. 번역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해 4. 결론 : 번역으로서의 언해의 현대성 <Abstract> Song, TaI-Hyo. (2012). Translative humanscientific Research on the Early Eonhae Texts. Interpreting and Translation Studies 16(2), 투 고 일 : 2012.04.13 심 사 일 : 2012.04.17~04.29 심사완료일 : 201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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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訓民正音諺解, 釋譜詳節, 月印釋譜의 서문들을 중심으로*

    송 태 효**

    차 례

    1. 언해 서문들의 번역인문학적 의의

    1.1. 번역과 인문학

    1.2. 언해 서문 연구의 의의

    2. 초기 언해의 번역사적 위치

    2.1. 언해 제작의 시대적 요청

    2.2. 수용과 낯섦의 중도로서의 언해

    3. 언문과 언해의 번역적 특성.

    3.1. 문자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문

    3.1. 번역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해

    4. 결론 : 번역으로서의 언해의 현대성

    Song, TaI-Hyo. (2012). Translative humanscientific Research on the Early Eonhae

    Texts. Interpreting and Translation Studies 16(2),

    Without a doubt, the history of humanities is the history of

    translation. Throughout the history of humankind, translation has

    been the most important source of intellectual knowledge, and thus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재원(교육인적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과제번호 : KRF-2008-321-A00145).

    ** 숙명여자대학교

    투 고 일 : 2012.04.13심 사 일 : 2012.04.17~04.29심사완료일 : 2012.04.30

  • 2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establishment of the general rules in traductology is the basis of the

    humanities. Translation of Sanskrit texts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Classical Chinese, and Korean

    alphabet became the best epistémé of the time through the

    translation of the Classical Chinese, the Mongolian, and the Tibetan

    texts. The mode and contents of the early Eonhae texts, such as

    Hunminjeongeum-Eonhae(訓民正音諺解), Sukbosangjul-Seo(釋譜詳節

    序), and Wolinsukbo-Seo(月印釋譜序), are products of the best efforts

    of the intellectual community at the time, and became the paragon

    of style and écriture in Korean through the following four

    translations steps: Classical Chinese — Gugyeol — translation of the

    words — Eonhae. Especially the prefaces of the Eonhae texts have

    significant meaning in the history of translation.

    King Sejo’s Wolinsukbo-Seo shows his great appreciation on

    humanscientific study, and it is among the best theories of

    translation in the world. Moreover, the translators of the Eonhae

    texts did not solely relied on dynamical reception or literary

    translation. They used both methods and therefore the Eonhae texts

    became the paragon of translation, which combines various modern

    theories of translation in the West. We must recognize the

    significance of the history of translation in Korea through the study

    of the translational methodology of hyeobju and gugyul in the early

    Eonhae Texts.

    주 제 어 : 훈민정음언해, 석보상절서, 월인석보서, 나이다, 역동적 수용, 베르만, 문

    자번역

    Key Words : Hunminjeongum-Eonhae, Sukbosangjul-Seo, Wolinsukbo-Seo,

    Nida, dynamical reception, Berman, traduction-of-the-Letter

    1. 언해 서문들의 번역인문학적 의의

    1.1. 번역과 인문학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다 산채로 화형당한 자연철학자 브루노의 “모든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3

    학문은 번역으로부터 유래한다”(Berman, 1984 재인용)는 명제가 시사하듯,

    번역은 그 범주를 막론하고 단순한 전달 기능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존재론적 사유에서 비롯하는 번역의 본질적 기능을 상기시키는 이 명제의

    과장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학문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번역이 보편적

    학문의 토대 혹은 시원으로 작용해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번역의 의의를 서구 학문의 역사에 국한시키기도 어렵다. 칼리프 왕조의 알 아민

    (AL Amin)이 건립한 지혜의 학교(Bayt Hikma)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

    텔레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저술들이 십자군전쟁에서 승리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발견

    되고 라틴어로 중역되어 역사의 어둠에서 깨어났듯이, BC 5세기를 전후해서 마가

    다어로 설해진 붓다의 법문 역시 대부분 빨리 및 티베트어, 한문으로 전승되어 왔으

    니,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학문 탐구의 조건으로서의 번역의 학문적 기능에 관한

    브루노의 명제는 진정 현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문학과 종교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번역을 통해 전승되어 왔다. 번역

    을 떠나 학문의 역사를 생각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번역의 편재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명사를 상정할 수도 없다. 현대 학문은 대부분 지역성을 초월하여 타국의 낯섦을

    통해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번역자들의 희생어린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번역 노력에 의거하여 유럽 문화의 양대 축을 이루는 그리스 문화 및 기독교

    정신이 휴머니즘 사상으로 전승되고, 이후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훌륭한 동양어 고전

    번역과 더불어 서양 각국의 수준 높은 그리스학, 기독교신학이 자신의 고유한 인문

    학적 변별성을 확립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 및 중국의 철학, 종교, 역사, 언어, 신화 등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

    고 늘 서양 고전학도들의 각별한 관심을 끌어 왔으며, 특히 바라문교, 불교 및 유교

    에 관한 유명한 저술과 번역서들이 라센(Lassen), 뷔르누프(Burnouff)와 그라네

    (Granet) 등 훌륭한 동양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번역 출간되면서 서양 철학 논의 자

    체가 동양학 이해의 노력 속에 진행되어 왔다는 역설적 현상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특히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쿠쟁(Cousin), 마스페로(Maspéro), 레뮈자

    (Rémusat) 등 19세기 탐구자들의 논의의 중심에는 늘 인도와 중국 사상에 대한

    이해가 자리매김하고 있을 정도로 서구 사유 영역에서 동양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

    통찰 동기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의 대부분이 명확히 드러나

    지 않는 당대의 번역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4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1.2 언해 서문 연구의 의의

    동양의 인문학 역시 산스크리트 경전 번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중국의 격의

    불교의 예에서 보듯이 각국의 문자는 번역을 통해 그 의미가 심화되고 확장되어 왔

    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삼국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문과 문화는

    이두, 향찰 , 구결처럼 한자를 이용한 작문 및 번역과 더불어 진행되어 왔다. 특히

    우리 역사상 최대의 문화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는 인도, 티베트, 몽

    골, 중국 및 우리 주변국애 관한 음운 연구를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이 훈민정음을

    적용한 번역으로서 언해는 동시대 지식인 공동체의 산물로서 이두와 구결 등의 기존

    표기법의 한계를 넘어 독자적인 국어 표기법과 번역 문체 확립의 가능성에 길을 열

    어 주었다.

    조선 초기 언해 발간의 의의는 현재의 우리 번역의 인문학적 상황과 관련하여 시

    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문법과 어법은 외국어 수용과 번역

    과 무관하지 않은데, 우리만의 독자적인 표현 이외에도 일본근대소설 번역, 중국어

    및 영어 성서 번역 등 번역 문체의 영향을 받아 왔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재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 표현 역시 정음을 문장화한 독자적 번역으로의 언해와 무

    관하지 않다. 오늘날 통용되는 ‘학이편’의 현대어 번역 “공자 가라사대 배우

    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번역은 언해 문장인 “ㅣ 갈샤

    시로 습면 또한 깃브디 아니 랴”의 언해본 문장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

    다. 당시의 국역이나 현재의 국역 문장 역시 대체로 언해본의 문체를 따르고 있다.

    어려운 한자는 글자새김으로 처리하며 한자와 정음을 병용한 언해는 이미 한문이라

    는 출발언어의 낯섦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도착언어 표현문자로서의 정음에 의거햐

    여 협주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합리적 번역체계를 통해 현대어에 손색없는 문장

    표현을 확립한 것이다.

    특히 를 직접 저술한 수양대군의 의 경우, 그 문헌의 내

    용, 풍부한 어휘와 자연스러운 어법, 원칙에 의거한 음운 및 표기법으로 인해 중세

    국어 및 한자음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에 관한 연구자들의 역

    주, 해제, 역사적 의의 등에 관한 풍부한 연구 성과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번역학 관점에서 이에 관한 번역비평 및 번역글쓰기와 관련한 번역인문학적1)

    탐구는 그리 활발히 이루어지 않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기존 연구들을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5

    토대로 언해에 담긴 번역 의식을 연구하여 선조들의 말과 글의 공동의 장소로서의

    번역글쓰기 및 번역론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 번역인문학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는 작

    업이 될 것이다. 고대인도 승려들의 범한 번역 그리고 18세기 이후 꾸준히 진행되

    어 온 서양 철학자들, 가톨릭 신부, 그리스학자들의 불교 번역 역사의 한 복판에 위

    치한 불경 언해의 의의를 살피는 것은, 아름다운 정음 표기로 이루어 낸 근대식 우

    리 문체의 출발점을 확인하고, 번역으로서의 우리 학문의 전통을 탐구하고 계승하

    며, 그것이 현재 우리 번역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

    을 것이다. 어려운 창제 과정의 결실로서의 훈민정음언해 서문 및 ‘석보상절서’, ‘월

    인석보서’에 나타난 역자의 번역의도를 서구 번역학의 관점에서 살피는 것은 훈민정

    음의 창제 동기와 그 가치를 재확인하는 의미도 지닌다 하겠다.

    2. 초기 언해의 번역사적 위치

    2.1. 언해 제작의 시대적 요청

    서양 인문학의 유입과 함께 시작한 우리 번역도 이제 상당한 연륜을 지니게 되었

    다. 또한 그 양과 종류만큼 깊이와 체계를 가늠할 수 있는 번역학 자체에 대한 논의

    도 이제 보편성을 담보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독립된 영역으로서의 번역 연구를 꾸

    준히 전개해 온 서구의 인문학으로서의 번역학을 연구의 토대로 삼는 것 못지않게

    전통의 흐름 속에 이어져 온 우리 번역론 탐구도 그만큼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

    다. 기본 표기법과 결별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와 특성을 갖춘 훈민정음 창제 이전

    이미 이두와 구결로 전승되어 온 우리 번역사도 서구 번역사와 비교해서 결코 뒤지

    지 않을 만큼 인문학적 특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자, 데와나가리

    (devanagari), 몽골 파사파(八思巴Basib)문자, 티베트문자, 가나문자, 그리고 사

    문자로서 여진 문자, 거란 문자 등 외국 언어와 문자들이 모두 훈민정음 창제의 기

    원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 다양한 언어들에 관한 선조들의 연구

    와 이해 수준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특히 파사파 문자와 그 기원을 이루는 데와

    나가리, 그 이전의 실담(悉曇, Siddhaṃ) 다라니 사경 및 제작의 예는 이미 우리 선

  • 6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조들이 당시 유럽인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서양 언어의 시원으로서의 인도

    고전 문자를 해독하고 번역할 만큼 높은 수준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2)

    예를 들어 초기 언해본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월인석보서’는 “西天ㄷ 字앳 經이

    노피 사햇거든 사미 오히려 讀誦 어려 너기거니와 우리나랏 말로 옮겨 써

    펴면 드 사미 다 시러 키 울월리니”(月印釋譜序: 23)라고 명시하며 그 시대의

    범어 경전의 보편성과 이에 관한 우리글로의 번역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80년 정도의 긴 기간 동안 직간접적으로 몽골 지배를 겪어온 우리 선조들의 티벳

    과 몽골의 문자 및 그 모체가 되는 데와나가리에 관한 높은 이해력, 중국 및 주변 국

    가들의 한이문에 관한 탁월한 인지도는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 이는 중국운서를 풀이한 서적을 발간한 주변 국가가 조선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3)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종 25년(1443) 언문 28자의 창

    제로 이를 적용한 집현전 학사들의 (1444), (1445)가 간

    행된다. 창제 이후 약 3년 이상의 기간이 지나 에 훈민정음언해가 수록되

    고 이를 수정 보완한 현존 최고본으로서의 훈민정음언해가 실린 (145

    9)4)도 간행된다. 세종 30년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는 과 의 합본으로 여기에는 세 가지 언해가 실려 있는데 세종의

    훈민정음서문,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서문 및 월인석보서문이 그것들이다. 번역에 관

    한 담론으로서 이 서문 언해들은 당시 번역자들의 번역 의식을 담고 있어 언해본의

    역사적 의의를 살필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언문 28자의 조합과 언해의 관계는 음절과 문장의 관계와 유사하다. 문자로서의

    언문 자모들이 서로 조합된 정음 어휘가 문장으로 확대된 것이 언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석보상절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우리글 번역이자 한자와 정음

    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번역 문장이기도 하다. ‘석보상절서’의 글자새김과 훈민정음서

    문 언해의 글자새김 내용을 상호 연관성 속에 탐구하여, 세종과 수양대군의 번역관

    및 번역어로서의 정음의 위치와 언해 작업 사이의 연관관계를 살피면, 조선 초기 왕

    족 및 지식인들의 언어학적 성찰 속에 담긴 번역가로서 그 유례가 드문 계몽전제군

    주 세종과 그를 보좌한 수양대군의 개혁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일부 관료들의 상소

    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강행한 음운론의 대가 세종은 한자로만 이루어진 기

    존의 문자 체계에만 의존하는 학문 체계에 안주할 수 없었다. 새로운 왕조의 의지를

    담은 새로운 문자에 의한 백성과의 새로운 정신의 소통을 위해 오랜 타민족의 음운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7

    에 관한 연구 끝에 자유롭고 과학적인 문자 표기법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 문자로 다양한 언해본을 출간한 번역가 수양대군의 위상을 번역인문학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서구 번역이론의 역사의 그늘에 가린 우리 고유의 왕실과 집현전

    학자들의 번역의 전통과 우리 번역사의 의미를 부각시켜 서구 번역론 위주의 번역학

    계에 우리 번역의 독자적 위치를 부여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2.2. 수용과 낯섦의 중도로서의 언해

    언해는 원문의 어려운 한자를 글자새김으로 처리하고 한자와 정음을 병용하여(석

    보상절의 경우는 예외) 번역하는 이중적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용이함

    을 목적으로 창제된 정음이지만 언문만을 사용하지 않고, 번역이 어려운 일부 한자

    는 그대로 남겨둔 채 정음을 제한적으로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출발언어로서의 한

    자의 낯섦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도착언어로서의 정음에 의거한 풀이를 협주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이러한 언해 형식은, 서양 번역계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번역 형식이다. 역동적 수용과 원문의 충실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매우 합리적인 선

    택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형식의 이중성은 서구 번역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데, 서구의 번역학계는 이와 관련하여 역동적 수용과 충실성이라는 두 경향을 이원

    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서양 번역론은 번역의 의사소통적 기능을 강조하는 성경번역가 유진 나이다

    (Eugine Albert Nida)의 역동적 수용론 그리고 ‘낯섦’을 ‘낯섦’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번역비평가 앙트완 베르만의 존재론적 번역비평으로서의 문자번역론

    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ty)의

    번역 분야 책임자였던 나이다의 가장 저명한 저술(Nida, 1964)은 20년 이상의 성

    찰의 산물이다. 표면적 상응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을 번역으로 간주하는 비교주의자

    들에 반하여 번역 과정을 분석, 옮김, 재구성이라는 3단계로 해체하고, 형태상의 등

    가에 반하여 역학적 등가의 개념을 제시하는 나이다는, 번역의 형태보다 의미를 우

    선시 한다. 형태적 요소들이 문화 현상 즉 원본의 기조를 이루는 사회 언어학적 망

    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과 실천은 의사소통 가능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찰스 테

    버와의 공저(Nida & Taber, 1974)를 출간한 이래 나이다는, ‘목표언어(target

  • 8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language)’라는 표현을 버리고 ‘수용언어(receptor language)’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저자-번역자라는 전통적 대응 관계 외에 제3의 파트너, 즉 번역의 최종 수용자로서

    의 독자의 개념을 번역 행위 속에 도입하였다. 혹자들이 ‘행동주의적’이라고 규정하

    기도 하였던 독자들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개념은 이를테면 사보리(Savory), 마르

    고(Margot), 캐리(Carry) 같은 학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견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르만의 번역론은 저자 입장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인다. 번

    역은 수용자로서의 독자와의 소통을 떠나 원문이 지니고 있는 불가해한 낯섦을 그대

    로 전달한다. 후기 하이데거의 해석학, 벤야민의 문학 비평에 의거한 번역 경험과

    번역에 대한 성찰을 번역학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베르만의 번역론은, 이러한 시학적

    관찰, 존재론적 사유, 해석학적 방법론의 실제성을 토대로 번역비평을 위한 인식 전

    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자국의 언어 공간에 ‘낯섦’으로서의 ‘낯섦’을 열어 드러내

    보이고 표명하는, ‘소통의 소통’으로서의 번역, 경험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한 번역 자

    체에 대한 성찰로서의 번역학, 작품 스스로를 전달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지속시키

    기 위해 필요한 존재론적 번역비평. 이 셋이 서로 상보적으로 이루어가는 그의 번역

    비평 정신은 철저한 ‘문자번역(traduction-de-la-lettre, 어떤 의미에서 직역)’에

    의거하여 문자를 거주지로 상정한다.

    ‘낯섦’을 반기는 불편함을 감내하지 못하는, 정신적 안이함에 안주하려는 ‘동질

    화’(homogénéisation)의 번역과는 달리, ‘낯섦의 시련’을 감수하기를 자청하여 이

    를 자신의 번역 분석에 도입한 베르만은 자민족 중심의 번역을 지양하고 이국적 요

    소를 느낌과 의미 그대로 살리는 ‘문자번역’을 중심으로 (1984)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제목 은 베르만의 번역

    비평의 토대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에 의거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

    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유에 근거한 문자번역론의 중심에는 문자의

    충실성에 대 윤리적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번역 행위의 윤리적 목표는, 그 목표가 ‘낯섦’을 자신의 몸으로서의 유형성 안에 반

    길 번역 행위의 윤리적 목표는, 그 목표가 ‘낯섦’을 자신의 몸으로서의 유형성 안에

    반길 것을 제안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작품의 문자(letter)에 전념할 수밖에 없

    다. 목표의 형태가 충실성이라고는 해도, 이 충실성이라는 것은 ―모든 영역을 통틀

    어― 문자에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계약에 ‘충실함’은 약정을 존중한다는

    것이지, 계약 ‘정신’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 ‘정신’에 충실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9

    함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Berman, 1999: 77).

    언해는 이러한 나이다의 소통중심의 이론과 베르만의 문자번역론 사이의 중도적

    모델로서 언해의 존재론적 의의를 상정해볼 수 있는 번역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매

    한 백성에게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이 나이다

    의 의사소통으로서의 번역의 이상적 전범과 나아가 서양 번역학자들 역시 그 이해에

    오랜 시간을 투자한 베르만의 문자번역론의 구체적 취지를 담고 있는 번역 형태(원

    문-구결-글자새김-언해)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에 구결을 달고 설

    명이 필요한 한자에 새김을 더하고 최종적으로 정음으로 이루어진 완성된 번역문을

    열거하는 언해 번역 체계는 철저히 문자의 독립성을 포용하면서 문자들 간의 의미

    연계를 이루어낸 공동작업이다.5) 그런데 이러한 번역 작업은 베르만이 이상적으로

    여기던 번역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직역에 가까운 문자 하나하나의 번역에 근거하

    면서도 번역의 사전적 정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저자와 번역자간의 공동의 공간

    (‘언어-내-존재가 울려 퍼지는 삶터’)(Berman, 1999: 9)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번역이 용이하지 않은 한자는 낯섦 그대로 한자로 남겨두고 글자새김만을 추

    가하는 언문에 의거한 번역으로서의 언해 역시 이미 그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번역 형태는 단지 의사소통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천ㆍ지ㆍ인, 음양오행 이론 이외에도 우리가 미처 예견할 수 없는 정음 창제의

    인식론적 동기들을 유추하게 한다. 개별 중국 한자의 발음 및 우리 뜻을 새기게 될

    , 과는 달리, 구결과 글자새김을 배경으로 정음과 한자를

    병용한 수양대군의 언해는 세종이 친히 창제한 낯선 문자를 문장으로까지 확장시켜

    훈민정음창제의 궁극적 목적에 한층 더 다가갔다.

    언해는 베르만이 요구하는 번역의 윤리적 목표에 부합하기라도 하듯 문자에 충실

    하면서도 엄격한 번역 자세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실은 언해가 같은 왕

    족이 주도한 불전 혹은 경전 번역에 활용되었다는 번역의 종교적 동기에서 유래할

    것이다. 대중공사에 의한 엄격한 경전 번역 전통은 산스크리트 경전이 중앙아시아,

    티벳,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축적된 동양의 번역 전통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아시아

    대륙에 전해진 산스크리트- 한역 경전의 마지막 귀착지로서 조선에서만 이루어진

    자국어 번역으로서의 언해는 이전의 아시아 국가의 번역 연구를 모두 수용하여 그

    결과를 적용한 진화적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유교국가의 정신을 살린 유교 경서 번

  • 10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역과 실담어 작문에도 능했던 조선의 왕족과 지식인의 번역관은 결코 의미전달만을

    목적으로 하는 번역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있다. 베르만은 언어학적 엄밀성에 근거하

    여 최초의 번역이라 명명할 수 있는 번역으로 키케로(BCE 106-43)의 철학적ㆍ수

    사학적 번역을, 그리고 이상향에 가까운 문자번역의 실례로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인 횔덜린의 그리스 고전 번역을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번역 역시 이

    에 못지않게 그가 주장하는 낯섦의 수용이나 문자번역론에 가까운 번역이 실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BCE 8—94년경 다수의 군중이 결집한 빨리어 경전을 발음, 어

    휘, 의미, 문장, 문체를 고려하여 재창조한 산스크리트어 불전, 4세기 전후 산스크

    리트 경전들의 티벳어, 위구르어, 소그드(Sogud)어, 탕구트(Tangut)어, 한어 번

    역의 경우 그 기준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언해는

    이들보다 약 10세기나 지나서 이루어진 번역이지만 횔덜린의 시대에 앞서는 15세

    기 중엽의 작품을 고려할 때 그 번역사적 현대성은 진정 서구인들의 번역사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로 평가할 수 있다.

    3. 언문과 언해의 번역적 특성

    3.1. 문자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문

    풍부한 어휘와 자연스러운 어법, 원칙에 의거한 음운 표기법 등의 언해의 특성은

    철저히 소리 나는 대로 문자를 표기하는 언문의 특성에서 유래하며, 언문의 특성은

    곧 훈민정음 창제 정신인 과학적인 음운 연구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창제

    의 의의와 언어학적 특성을 간파하고 훈민정음해례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데구트

    (Desgouttes)는 훈민정음이 서양 언어학자들에게 주는 이미지를 하나의 모험으로

    간주하며 언문 창제를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창제 방법의 독창성과 힘은 그 예외적인 모험에 따른다. 실제로 세종과 집현전 학자

    들로서는 합성 문자인 한자와 몽골과 산스크리트의 분절 문자 사이의 극한 대립적

    체계를 단번에 무마하고 해석해낸 언어학이론을 개발해야 했다. 이 이론은 진정 로

    망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학파의 음성학자들이 (500년이 지나서야!) 강조하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11

    게 된 이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구조음성학 이론과 음소를

    형성하는 독특한 특징 이외에도 이 이론은 음성 분절의 생성에 관한 견해와 이제까

    지 문자소가 일치하는 유일한 표기 체계를 제안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언어사에서

    의 하나의 일화를 넘어 하나의 사건으로 도래한 것이다(Desgouttes, 2000: 21).

    데구트의 표현처럼 언어학적 사건으로서의 언문 창제는 중국어와 몽골어의 서지

    학적ㆍ음운학적인 유산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를 근거로 이루어진, 문자 표기에 관한

    인식론적 전환과도 다름없는 혁신적인 성과물이었다. 유교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 초

    기만 해도 거의 8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직간접으로 고려를 통치한 몽골의

    언어와 문자 영향은 35년간의 일본 통치하의 언어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지속력을 지니고 있어 쉽게 일상으로부터 단절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두와 구

    결, 한이문과 더불어 몽골 문자까지 익숙해진 상황에서 건립된 조선 왕조는 그 자주

    성을 상징하는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확립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 , 등에 사용된 각필구결이 훈민정음 자모 형태와 유사성

    을 가늠케 하는(이승재, 2001: 89-110) 상황에서 조선은 “천년이 넘는 역사 속에

    서 오랜 시간을 뚫고, 아시아 변방의 잊혀진 작은 국가가 서서히 중국 한자표기라는

    어마어마한 장애를 극복하며(동시에 이에 힘입어) 효율적인 글쓰기를 이루는데 필

    수적인 도구를 보유하기에 이른”(Desgouttes, 2000: 22) 것이다.

    훈민정음언해의 글자새김 형식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월인석보서’에서는 ‘나랏

    말미 귁에 달라’에 표현되어 있는 ‘중국’을 ‘황제 계신 나라이니 우리나랏 상담

    (常談)에 강남6)이라 하느니라’로 새기고 있다. 또한 박승빈본(박승빈, 1932: 1)에

    는 ‘中’에 관해 ‘뒹은 가온대라’고 새기고 있어 정음 표기가 강남 발음을 기준으로 하

    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레드야드(Ledyard)는 중국을 ‘Middle Kingdom’으

    로 번역하여(레드야드, 1998: 277) 강남이 어느 지역을 명시하는지 나아가 그 지

    역 발음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한자 ‘中’의 발음이 현재의 우리

    발음과는 달랐으리라는 점이다. 실제로 훈민정음에서 예를 든 당시의 중국 발음은

    당시 흔민정음 예의의 우리 발음과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어 역주본을 출간한 데구

    트는 다음 어금닛소리항의 언해 원문을 예로 들고 뒤에 우리 한자 발음과 중국 발음

    을 추가하여 두 발음을 비교하고 있다.

  • 12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표 1. 정음 로마자 표기 (Desgouttes, 2000: 21)]

    우리발음 중국발음ㄱ· :엄쏘·리·니 君군ㄷ字· ·처 ·펴·아·나 소·리 ·

    ·니[kun, jūn]

    ··쓰·면 虯字· ·처 ·펴·아·나 소·리 ··

    니·라.[g'ju, qiú]

    ㅋ· :엄쏘·리·니 快·쾡ᅙ字· ·처 ·펴·아·나 소·리 ··니·라.

    [k'wæ, kuài]

    ㆁ· :엄쏘·리·니 業·字· ·처 ·펴·아·나 소·리 ·

    ·니·라.[əp, yè]

    위에서 보듯 언해의 한자 발음 표기는 중국 발음 표기와 차이를 보인다. 마치 중

    세 유럽의 라틴어를 쓰는 귀족과 프랑스어를 쓰는 백성의 관계처럼 한문만 쓰는 지

    식인층과 문맹인 백성간의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에서 탄생한 언문 28자는 우리나라

    식 한자 발음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언문이 우리 문장 표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수 년 후의 일이니, 어쨌든 같은 의미의 한자를 중국인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

    이 발음하는 대로 기록할 문자 창제의 필요성에 의해 정음이 창제된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母 二十八字”7)라는 신

    숙주의 언급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정인지는 해례에서 “夫

    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8) 라고 말하며 정음창제의

    의의를 진정한 조선의 건국으로 규정하며 그 창제 정신을 승화시키고 있다.

    세종에게는 우리 문자 창제가 국가의 존재 이유 즉 국시였다. 중국 주변 동북아국

    가들은 나름대로 독자적 표현 수단으로서의 문자를 지니고 있었으나 유독 조선만은

    자신의 말소리를 나타내는 문자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자 창제

    의 의지를 조선 왕조에 와서야 품게 된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설총이 이두를 체계

    화한 이후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승되어온 다양한 차자법과 구결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강신항이 “역관들과 역학자들이 저술하고 편집한 역관교재가 당시

    외국어 교육과 수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 한국어의 음운연구

    에도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강신항, 2006, 김남희 2012, 3 재인용)고 밝히고

    있듯이 조선에 이르러 음운 연구는 아시아 다른 국가보다 상당히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특히 세종은 스스로 역학을 위한 운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장기간 각별

    한 노력을 기울였다. 운학 연구자로서 세종의 업적은 소리의 보편성과 개별성, 영원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13

    성과 순간성을 동시에 포착하는 문자를 개발한 데 있다. 그에 의해 중국 한자의 범

    아시아적 공간적 보편성과 우리 문자의 공간적 개별성, 문자로서의 의미의 영구성과

    발음으로서의 순간성을 동시에 포착하는, 합성문자(음절문자) 겸 음소문자로서의

    문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표음문자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언문의 특성은 그 낱소리들이 지닌 각각의 음가가 아무런 독자성을 지니지 않으

    며, 가나처럼 독립 단위로서의 독자적 음가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

    모의 좌우상하 조합에 의해서만 문자가 하나의 음절로서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낱개의 자음과 모음은 어떤 독자적 의미도 없으며 그 자유로운 조합에 의해 음가와

    의미가 성립된다. 따라서 세종 25년(1443) 계해 명 正統 8년 12월30일 경술일의

    두 번째 기사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언문 창제

    의 특성은 비록 간단하고 요약적인 글자일지라도 그 전환이 무궁하다는 데 있다. 더

    욱 흥미로운 것은 문자가 곧 발음기호로서 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당시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를 사용하던 표기법 체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즉 문장에는

    어휘 자체를 표기하지 않고 어휘들의 조합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된 발음을 표기한

    다. 예를 들어 ‘國 나라히라 之 입겨지라 語는 말미라”에서 之는 입겾(또는 입

    겿)이지만 ’입겨지라”로 표기하는 경우가 그러한데 이러한 표기는 역시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의 데와나가리 표기법가 일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렇게 창제 500년 후 야콥슨과 프라하 학파 음성학자들이 강조하게 될 이론을

    현실화한 훈민정음 창제자들, 이들은 이미 구조음성학 이론과 음소를 형성하는 그

    독특한 특징, 음성 분절의 생성 및 문자소가 일치하는 유일한 표기 체계를 개발하여

    문자의 역사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내었다.

    3.2. 역학의 인식론적 전환으로서의 언해

    이렇게 새로운 글쓰기에 필수적인 도구로 개발된 언문은 이두와 구결의 전통에

    의거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글쓰기 체계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정음에

    의거한 언해 글쓰기 체계는 출발언어를 도착언어로 옮기되 기존 문자가 아닌 전혀

    새로운 자국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중적 낯섦을 수용해야 하는 독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아울러 언문은 문자로서 백성을 계몽하기 위한 의사소통까지

    배려한다는 점에서 나이다가 의미한 민족 사이에 이루어지는 언어간 번역

  • 14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traduction interlinguale)으로서의 의사소통에 머무르지 않는 언어내 번역

    (traduction intralinguale)으로서의 의사소통까지 배려한 복합적 상황의 산물이

    다. 그리하여 언해는 신분의 경계를 넘어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 공동체로서의 독

    자성 그리고 그 구성원으로서의 백성과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을 포용하는 공동의 공

    간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다.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에

    머물지 않듯, 번역을 구성한 어휘 또한 외국어의 의미 전달에 그치지 않고 번역자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번역의 기능은 원전 텍스트 속에서 정작 텍스트의

    시원으로서의 저자 혹은 역자의 말의 형태나 느낌 자체에 관한 논의와 아울러 그 논

    리적 의미 분석에도 관심을 표명하기에,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가 공유해야 할 본원

    적 특성 탐구를 간과하고 자의적 해석에 주력할 수도 있다. 출발 텍스트의 문체, 문

    채, 형태, 느낌, 동기 등을 고려한 번역이라면 필히 모국어 혹은 일상어의 사용에 있

    어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빚어내는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문법이나 수사에 대

    한 지식도 중요하겠지만, 일상어 혹은 언어 자체에 대한 예지, 성찰 태도, 사용 태도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전 번역인 언해본은 출발언어의 이러한 특성에 대한 경험과 성찰을 전제로 하

    여 출발 텍스트의 이국성을 배려하는 동시에 도착언어의 친밀성을 담아내고 있다.

    언어 자체의 감수성을 헤아림 없이, 사전 문법에만 의지하여 출발어의 텍스트의 의

    미를 전달하는 경향을 보이는 오늘날의 상업적 번역 텍스트와 달리 세종과 수양대군

    은 자신들이 이미 독파한 경서들에 자신들의 에피스테메를 담은 정음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을 위한 번역을 실행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 프랑스어 최고 문서 스트라스부르 서약(842) 성립과정을 들

    수 있다. 이 문서가 당시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주체인 자국민을 고려한 번역

    물이라는 사실은 우리 언어학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836년 무렵 통

    속 라틴 설교가 인가되면서 북부 프랑스어가 점점 지위를 강화해 간 상황에서 샤를

    마뉴의 두 손자 간에 맺은 군사협정을 북부 로망스어로 옮긴 이 문서의 탄생 배경이

    말소리와 문자의 차이 극복 노력에 있듯, 훈민정음 역시 한자와 소리가 다른 ‘나말

    ’을 사용하는 백성이 문자를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이다. 현대 프랑스어는 이

    번역 서약문에서 유래한 어휘들을 중심으로 발전된 표현이다. 의 다음 문

    장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15

    […] 近間애 追薦 因 이 저긔 여러 經에 여 내야 各別히 그를

    라 일훔지허 로 釋譜詳節이라 고 마 次第 혜여 론 바 브터 世尊

    ㅅ 道일우샨 이 그려 일우고 正音으로 곧 因야 더 飜譯야 사기

    노니 […] (권1, 석보상절서 4ㄱ~6)

    수양대군이 언해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한자 어휘 ‘飜譯’은 인도 산스크리트 경

    전의 한역을 지칭하여 사용하여 오던 표현으로서 번역가(翻譯家), 역사(譯師), 역경

    가(譯經家), 고역(故譯), 구역(舊譯), 신역(新譯), 역주(譯註), 참역(參譯), 윤문

    (潤文) 등의 파생어를 낳았다. 우리의 경우 번역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바로

    ‘석보상절서’이며 ‘정음으로 인야 飜譯야 사기노니’라는 구절의 ‘번역’이 우리나

    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어휘 ‘번역’임을 알 수 있다.9)

    나아가 언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한역 방법을 따르면서도, 세부적인 면에서는 조

    선만의 특수한 번역 상황에 부응하는 이중적인 구조를 보인다. 원래 동서양을 막론

    하고 번역은 집단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서구의 집단 번역은 중세의

    톨레도 학파10) 이후 서구 번역의 전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천년에 걸쳐 진

    행된 중국의 역경은 그야말로 집단번역의 수준을 넘어 핵심적인 국책사업의 수준에

    서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동양의 한문 경전 시스템의 전형

    인 집단번역은 10단계를 거친다. 불경언해 문헌들을 보면 9단계를 거치는 데 그 첫

    단계는 한문에 구결을 정하는 일로서 를 저술한 수양대군의 작업이 돋

    보인다. 실례로 능엄경언해 권10 끝부분 어제 발문의 협주를 통해 조선 초기 언해 과정을 알 수 있다.

    上이 입겨 샤 慧覺尊者 마와시 貞嬪 韓氏 等이 唱準야 工曹參判 臣

    韓繼禧 前 尙州牧事 臣 金守溫 飜譯고 議政府 檢詳 臣 朴楗 臣 尹弼商 世子文學

    臣 盧思愼 吏曹佐郞 臣 鄭孝常은 相考고 永順君 臣 溥 例一定고 司贍寺尹 臣

    曺變安 監察 臣 趙祉 國韻 쓰고 慧覺尊者 信眉 入選 思智 學悅 學祖 飜譯 正

    온 後에 御覽야 一定커시 典言 豆大 御前에 飜譯 닑오니라.11)

    중인으로서의 역관 신분이 암시하듯 학문적 차원에서 그리 높지 않게 평가되어

    온 역학이 세종 11년(1429)부터 중시되기 시작하였다고 박종국이 밝히고 있듯이

    (박종국, 1996: 93), 위 협주 내용에 등장하는 명단으로 미루어 이제 번역은 왕실

    의 국책사업으로서 학문의 영역에 등극하게 된다. 바그다드의 서 칼리프 왕조가 건

  • 16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립한 ‘지혜의 학교’에서조차 왕족이 실제 번역의 주체가 된 적이 없는 만큼 조선의

    번역으로서 언해가 신왕조의 정책 실현에 중요한 변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언해가

    어떤 의도에서 실현되었건 조선왕조는 그 시대의 학문적 자세와의 역사적 단절을 통

    해 영원한 한국학의 연구대상으로 남게 될 국책으로서의 번역인문학 전통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4. 결론 : 번역으로서의 언해의 현대성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음 창제 후 우리 문헌 가운데 이 ‘번역’이란 표현이 처음

    쓰인 것은 ‘석보상절서’이다. ‘사마다 수 아라 三寶애 나가 븓긧고 라노라’고

    밝히고 있듯이 수양대군은 백성의 교화라는 번역의 의도와 그 수혜 대상을 명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월인석보서’의 ‘브터 世尊ㅅ 道일우샨 이 그려 일우

    고’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번역의 의도로서 중생 교화를 강조하였다. 세종이 1443년

    친제한 언문 28자는 언문창제의 출발점이요 1447년 언해는 언문 창제의 귀결점이

    자 앞으로 간행될 언해본들의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이 번역 작업이 동시대

    의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힌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번역사적 관

    점에서 바라본다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는 사제들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도 목숨을 걸고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대중들의 성경 강독에 기여한 르네상스

    시기 휴머니스트들의 번역 정신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또한 수양대군은 ‘월인석보서’에 ‘글 론 들 子細히 써 後人 사 알의

    거시라’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번역 의도를 후세에 전하려는 투철한 의지를 밝히

    고 있다. 즉 자신의 시대에만 가능한 번역을 남기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이러

    한 번역 의식은 자기 시대에만 포착 가능한 시대정신 내지 종교적 특성을 전하고 있

    다는 의미에서 서구 인문학자들이 중시하는 언어학적 현대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서

    양 번역자들의 비평적 서문과 견주어 그 인식론적 차원에서 전혀 열등하지 않다. 즉

    전통적인 방법으로 다시 불전을 만들지만 같은 내용을 담은 중국 승려 우(祐)와 도

    선(道宣)의 출간 목적과는 다른 이유에서 불전을 편역하고 있음을 명시하

    고, 번역의 상황과 한계를 미리 설정하여 놓음으로써 다음 시대의 번역에 거는 기대

    마저 상정하는, 초역으로서의 언해 출간자의 한계성과 이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17

    1443년 제정된 언문 28자, 1446년에 풀이한 , 1447년 완성된 (1448년 간행), 1447년 언해한 수양대군의 , 이에 응답하여 부

    친 세종이 정음으로 짓고 한자로 협주한 , 1445년의 에 이어 정음 창제과정의 집대성으로서의 가 간행되면서 언문에서 언

    해로의 일련의 창제과정이 일단락되었다. 백성을 위한 소리글자 언문을 창제하여

    ‘원문-구결-글자새김-언해’의 편집단계를 거쳐 이루어진 언해본 서문들이 지니는 번

    역인문학적 현대성은, 서구 번역사 탐구 위주의 서구 번역학계에 우리 번역사의 인

    문학적 보편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12) 흥미로운 것은

    과 상당부분 일치를 보이는 을 수양대군이 첫 언해 대상으

    로 삼았듯이, 19세기 최고의 프랑스 인도불교학자 뷔르누프가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한 빨리어 경전도 이라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의 언해 이후 약 4세

    기가 흐른 뒤 번역된 빨리-프랑스어 경전이 이라는 사실은 수양대군과

    뷔르누프 두 역자 모두 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은 이후 다시 상세히 언해되었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번역 출간된

    경전으로 자리매김 한다. 가치 있는 번역 대상 작품을 선정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인문학자로서, 및 의 정음 주음 관장자로서 수양대

    군의 , 그 번역 수단으로서의 세종의 훈민정음은 번역 인식론적 관점에서

    결코 외국의 번역에 뒤지지 않는 학문적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역동적 수

    용이론 혹은 문자번역론이라는 어느 한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는, 두 방법론을 동시

    에 아우르는 번역론의 결과물로서 언해는 다양한 서양번역이론과의 접목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조선 초기 언해본들은 실록에 실리지 않는 사소한 일상의 언어로부터 출발하여

    고전번역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 사소한 일상의 언어 속에서 그 너머로 지속

    될 수 있는 보편적 언어의 성격을 묻고 있다. 번역이 그러하듯 언해 역시 단순한 전

    달 수단이 아니다. 언해는 현대인으로서 우리를 그 시대 역사의 깊이 속으로 들어서

    게 한다. 초기 언해본들은 협주방식, 구결 등의 번역 연구 태도를 전범으로 삼아 우

    리 번역의 세계사적 위치를 확인하고 그 의의를 선양하여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번역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 18 통번역학연구 제16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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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번역 자체가 하나의 인문학적 소산이지만, 의사소통 수단 이상의 독자성을 지닌 보편적 에피스

    테메 즉 정확한 사유체계에 근거한 존재론적 탐구를 지칭하는 용어로 번역인문학을 상정해 본다.2) 서양인들에게 인도 문자와 자국어의 연관성이 알려진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다. 산스크리트

    가 그리스어, 라틴어와 관련성을 지니며, 게르만어 및 켈트어와 어원을 함께 하고 있다는 1786년윌리엄 존스의 선언은 엄청난 지적 충격이었다. 이와 함께 동구어, 아르메니아어, 페르샤어, 토카라어, 심지어 고대 히타이트어 등의 언어들이 서로 연관된 하나의 광범위한 어군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언어학자들은 이 역사언어학적 원칙을 다른 어족들, 예를 들어 셈어, 차이나-티벳어, 폴리네시아어, 우랄 알타이어에도 적용시키게 된다(Nida, 1996)

    3)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후 다양한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해 세종 29년(1447) 동국정운을 완성한다.그 후 다시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표시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엮은 한자의 운(韻)에 관한 홍무정운의 음을 정음으로 표현하고자 저술하게 된 것이 으로서 단종 3년(1455)에 16권

    8책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조정과 유교계의 언해사업에서는 전혀 실용되지않아, 한자음 개신이란 정음 창제의 동기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훈민정음언해(예의)와 정음불경 내지 불경언해 등은 모두 동국정음식 한자 주음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사재동, 2010:

    148-149)4) 는 수양대군5년(1459) 경에 先考와 先妣 그리고 왕세자로 책정되어 죽은 桃源君의 靈駕

    遷度를 위해 편찬 간행되었다. 수양대군 시절 소헌왕후의 추천을 위해 편찬한 (1447),이에 세종이 악장체로 답한 (1447)을 저본으로 硏精添削 및 夾註細文하여 간행한불전이자 동시에 찬불가로 초기 언해본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5) 漢韓혼용이라는 시각에서 언해의 낯섦을 부정할 수도 있으나 언해본 한자는 언문 글자새김의 과정을나열한 뒤의 최종 번역 결과물이기에, 대다수 문맹인 백성들 관점에서는 언해에 사용된 한자나 언

    문이나 모두 낯선 문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6) 속어로 강남을 의미한 한다고 언해본 글자새김은 밝히고 있다. 즉 강남의 발음과 다르다는 것인데,

    중국 역사학자 풍샌량(馮賢亮)은 강남에 관해 이렇게 밝힌다. "강남은 지역으로 말하면 근세기 동안 중국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을 가리켜 왔다. 그러나 강남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와 사용법은 자고로 통일된 적이 없었다."(풍샌량, 2002 ; http://research.ncnu.edu.tw/proj4/Site/

    course11.html)7) “여러 나라가 모두 나라 말소리로 나라말을 기록하는데도 홀로 우리나라만이 글자가 없어 임금께서

    친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니”(번역 필지). 保閑齋集卷十一附錄行狀(姜希孟選), 卷一白八 樂考 十九 訓民正音.

    8) “대저 동방에 나라가 생긴 지 오래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문물을 열고 큰일을 이룩할 거룩한 예지는 바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노라”(번역 필자)

    9) 조선왕조실록 태종 1년(1401) 기사에 이 어휘가 사용되었다. : “故鳩麻羅什得師於姚秦, 翻譯其書, 騁其邪說, 凡有喪事, 皆令供佛飯僧, 그러므로 구마라습(鳩麻羅什)이 요진(姚秦)에서 스승노릇을 하여 그 글을 번역하여서 그 간사한 말을

    퍼뜨리어, 무릇 상사(喪事)가 있으면 모두 불공을 드리고 중들을 먹이게 하여”10) 톨레도 대주교 돈 레이문도(Don Raymundo)가 세운 아랍-영어 번역 학교(1126-1151). 그는 아

    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이해 아랍 철학자들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라틴 번역에 착수한다. 유럽인들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11) ; 1. 상[수양대군], 한문에 토를 닮. 2. 혜각존자(신미), 토를 단 문장을 확인. 3. 정빈 한씨 등, 토를 단 문장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교정. 4. 한계희․김수온, 토를 단 문장을

  • 초기 언해본의 번역인문학적 탐구 21

    들으며 번역하여 문장을 적음. 5. 박 건․윤필상ㆍ노사신․정효상, 번역된 문장을 상고(相考). 6.영순군 부, 例를 정함. 7. 조변안․조 지, 문장에 쓰인 한자에 國韻)(동국정운 한자음) 적음. 8. 신미․사지․학열․학조, 잘못된 번역을 고침. 9. 上이 보시고 난 후, 曺氏 두대가 번역된 문장 소리

    내어 읽음.12) 언문은 훈민정음 28자, 언해는 한문을 한자와 언문으로 풀이한 번역, 언서는 정음으로 된 문서를

    뜻한다. 한자와 언문은 모두 표현 문자로서 그 관계는 언어간 그리고 방언간의 다양한 관계 유형을지칭하는 diglossia(二重言語制) 혹은 hieroglossia(聖語制) 관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