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 특징 의의 · 2018-01-19 · 33 도시민속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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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민속학 에서 바라본 달동네 특징 의의 부산의 달동네를 중심으로 유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Yu Seung-HunCurator of Busan modern history museum 1. 머리말 2. 우리나라의 도시사와 달동네의 탄생 3. 도시민속학의 동향과 달동네의 도시민속 4. 도시민속학에서 본 달동네의 의의 5. 맺음말 논문투고일 : 2009. 9.29 심사완료일 : 2009.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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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부산의 달동네를 중심으로-

    유 승 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Yu Seung-Hun|Curator of Busan modern history museum

    1. 머리말

    2. 우리나라의 도시사와 달동네의 탄생

    3. 도시민속학의 동향과 달동네의 도시민속

    4. 도시민속학에서 본 달동네의 의의

    5. 맺음말

    논문투고일 : 2009. 9.29

    심사완료일 : 2009.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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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부산의 달동네를 중심으로-

    유 승 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1. 머리말

    대도시에서 자라난 세대들은 달동네에 대한 기억을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금천구 시흥동도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호암산․관악산의 산비탈을 둘러싸고 판잣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국이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숨쉬기조차 힘든 몇 평의 판잣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호암산 약수터에서 물을 길러 날라야 했다. 달동네에 사는 또래의 친구들

    은 그곳에 산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워하여 하루 빨리 달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의 도시민 가운데 달동네에 대한 직․간접적 경험과 기억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달동네는 개인들에게는 일상적 경험을, 사회적으로는 집단적 문화를 낳게 하였다. 달동네를 경험했던

    중․장년층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이른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회상되고 있다. 그런데 달동네에 대한

    추억은 ‘개인적 기억’만이 아닌 집단적으로 경험했던 ‘문화적 공유’ 속에서 표출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억은 개인적 또는 생리학적․심리적 차원의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역사적인 것이다.1) 달동네

    에 대한 추억 역시 ‘개인적인 기억’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역사적인 기억’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집단적 기억이 되어 버린 달동네의 생활문화는 도시문화 가운데 주요한 영역이 되었고, 도시민속학에

    서도 다루어야할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달동네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도 아니며, 하루 빨리

    개발의 메스(mes)를 가해야하는 도시화의 상처도 아니다.2) 시각을 달리하면 달동네는 타지에서 온 이주

    민들의 ‘도시 정착의 흔적’이자 도시가 만들어낸 ‘기층민의 생활문화 터전’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도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인구가 급속도로 과밀화되었다. 도시로 밀려든 수많은 민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산과 변두리에서 임시로 정착하는 일이었다. 점차 판자촌과 같은 가건물이 군락과

    1) 윤택림․함한희, 2006, ꡔ새로운 역사쓰기를 위한 구술사연구방법론ꡕ, 아르케, 67쪽.

    2) 지금까지 정부의 달동네 정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달동네를 단순한 주거공간으로서 바라보면.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노후화된 불량주택의 집산지

    가 된다. 결국, 외국의 슬럼가와 같이 달동네를 도시의 곪은 상처로 여겨 시급히 해체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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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마을을 이루면서 도시의 주변부는 빈민촌 벨트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였을 때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적 공간이 되었다. 또한 달동네는 수없이 많은 이주민들의 출입

    속에서 하나의 생활문화를 형성하고 배출시키는 문화적 출구가 되었다.

    아직까지 몇 건의 도시민속지의 보고 외에는 도시민속학적 관점에서 달동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대도시의 달동네가 도시서민의 삶이 잉태되고, 근대의 생활문화가 생산되는

    곳으로서 도시민속학의 주요한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달동네에 관한 연구를 진작시키기

    위한 시론으로서 달동네 연구의 실험적인 탐색을 하였다. 본고에서 달동네 연구의 함의와 향후 전망을

    논의해봄으로써 도시민속학적 연구 과제가 구체적으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나라의 도시민속학이

    ‘근․현대에 생성된 도시민속’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3)

    2. 우리나라의 도시사와 달동네의 탄생

    가. 달동네의 개념

    달동네는 우리나라의 급속한 산업화와 기형적 도시화로 인하여 형성된 빈민촌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대도시로 무작정 상경한 빈민들은 대도시 변두리의 산비탈, 산등성이에 판잣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4)

    이러한 빈민촌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토막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제강점기 서울로 몰려온

    이농민들은 도시 외곽에 토막을 짓고 살았다. 토막(土幕)은 흙으로 벽을 적당히 만든 후 얼기설기 지붕을

    얹은 일종의 간이주택이었다.5)

    도시화 과정에서 빈민촌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왔다. 해방과 한국전쟁 후의 판자촌과 하꼬방,

    1960~1970년대의 달동네․산동네, 1980년대의 벌집․닭장․비닐하우스 등이 우리나라 빈민촌의 대명사

    들이다.6) 그런데 우리나라 빈민촌의 최고 대명사는 1960~70년대를 풍미한 ‘달동네’일 것이다. 왜냐하면

    달동네는 판자촌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가다가 산업화 시기에는 서민들이 도시로 몰려듦에 따라 가장

    번창한 빈민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서 그 유래는 ‘달나라 천막촌’에서 비롯되었

    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중반 사이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정부가 정한 지역에서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생겨났다.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3) 1970년대부터 시와 소설 같은 문학 장르에서는 달동네를 주목해왔고, 1980년대 이후에는 드라마와 영화 등 영상매체까지 달동네 주민들의 삶을 다루기 시작

    했다. 그런데 도시민속학 분야에서 달동네에 관한 연구 논문이 여태까지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도시민속학에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던 탓도 있겠지만 도시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마을 및 근대적 생활문화에 대하여 주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2006, ꡔ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상설전시 도록ꡕ, 24쪽.

    5) 전남일 외, 2008, ꡔ한국주거의 사회사ꡕ, 돌베개, 125쪽.

    6) ‘하성규, 1999, ꡔ주택정책론ꡕ, 박영사, 45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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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영화 ‘1번가의 기적’의 세트장이 들어섰던 부산의 물만골 달동네

    쓰이는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 방영 이후

    이다.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달동네’는 불량노

    후주택이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7) 또한 달

    동네는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같은 의미

    로서 ‘하늘동네’, ‘산동네’가 있다. 하늘동네와 산동네는

    지리적 특징이 강조된 반면 달동네에는 이외에도 민중들

    의 삶과 애환이 잘 담겨 있다. 전국적․대중적으로 사용되

    고 있는 개념도 달동네이다.8)

    달동네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적으로 도심의 산악과 변

    두리 지역에 위치한 산동네라는 점이다. 이 산동네는 내륙의 산촌과 같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라 산업화․도시화로 인하여 외지로부터 이주한 서민들에 의하여 급속하게 만들어진 도시마을이다.9)

    둘째는 근대화 과정에서 달동네는 우리나라의 빈민촌을 상징하는 생활공간이 되었다. 산비탈의 판자촌과

    가파른 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옥상의 주차장과 간이 물탱크, 공동 화장실 등 달동네만의 근대적

    생활양식이 형성되었다. 셋째는 달동네 주민들은 부두,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 및 야채, 과일장수

    등의 행상으로서 불안전한 생업체계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달동네는 사회적으로

    ‘가난과 소외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이곳의 빈민들은 적지 않은 차별과 무시를 받았다.10)

    나. 달동네 탄생의 근대사적 배경

    먼저 달동네에 대한 통시적인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11) 도시민속은 그 나라의 도시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니와 달동네는 우리나라 특유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었기에 역사적 고찰이 필요한 것이

    다.12)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도시화는 매우 급속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도시가 내적 변화를 거치면서

    7)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앞의 책, 24쪽.

    8) 부산발전연구원에서 펴낸 ꡔ부산의 산동네ꡕ(2008)에서는 부산 달동네의 독특한 지리적․역사적 상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산동네’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필

    자는 달동네라는 용어가 이미 전국적․대중적으로 보급된 개념이거니와 지리적 상황뿐만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애환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본

    고에서는 ‘달동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9) 박재환 외, 2008, ꡔ부산의 산동네ꡕ, 부산발전연구원, 16쪽.

    10) 일례로, 예전의 일이지만 남녀가 선보는 자리에서 부산의 달동네인 물만골에 산다고 하면 상대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고 한다. (위의 책, 58쪽.)

    물만골에서 직접 촬영한 ‘1번가의 기적’이란 영화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달동네의 아이들이 놀림을 받거나 빈민가에 산다는

    사실을 연인에게 감추기 위하여 엉뚱한 곳에서 하차한다. 달동네 주민에 대한 차별 행위는 문화적 구별 짓기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달동네를 ‘빈곤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달동네의 빈민과, 자신의 삶을 달동네의 생활문화와 구별 짓기 위한 문화적 행위이다.

    11) 독일의 뮌헨학파가 강조했듯이 민속은 "역사를 초월한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역사와 역사적 움직임을 통해 생성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이정재,

    2005, 「독일의 도시민속학 연구 경향」, ꡔ한국민속학ꡕ 41, 한국민속학회, 150쪽) 일본의 도시민속학계에서도 미야타(宮田登)가 도시에서 발생․형성된 민속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역사적 접근과 공시적 접근을 함께 들었다.(박계홍, 1971, 「일본의 도시민속학」, ꡔ한국민속학ꡕ 16, 민속학회, 112쪽.) 이와모토(岩本通彌)

    역시 민속의 변천을 탐색하는 역사적 관심과 도시사회 내지 도시문화와 관련시켜 고찰하는 현재적 관심의 경우를 같이 지적하였다(위의 글, 106쪽).

    12) 달동네의 도시민속은 현재와 과거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통시적인 고찰과 분석이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시노하라(篠原徹)는 ‘관계성의 민속학’

    이란 관점에서 공시적으로 현재에 현상(現象)하는 측면을 ‘민속’이라고 하고, 민속이 전달하는 통시적 측면을 ‘전승’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와 전대(前代)는

    시대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며, 현재와 전대의 관계성을 해석하는 것이 민속학의 주요한 테마로 여겼다(篠原 徹, 2003, 「越境する民俗の現代的 意味」,

    ꡔ越境ꡕ, 朝倉書店,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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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부산 아미동 달동네 전경

    서서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 변수에 의하여 순식간에

    팽창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근․현대 시기 우리나라가 겪어

    왔던 역사적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달동네의 형

    성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 요컨대, 해방 후 동포의 귀환과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귀환동포와 피난민들로 인하여 대도

    시는 감당할 수 없는 급속한 인구유입을 맞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이다. 해방 후 일본과 만주 지방 등

    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로 부산은 한 차례 급속한 팽창을 이루

    었다. 그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으며,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도시의

    팽창을 가져왔다. 1․4 후퇴 이후 부산거리에 몰려온 피난민들로 몸살을 앓았으며 당시 언론들은 그

    숫자를 70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휴전 직후 이런 판잣집이 중구 관내에만 1만 5천여 채, 시내 전체로는

    4만여 채가 있었다고 추산된다.13)

    항구도시인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지역에 몰려든 전재민(戰災民)과 피난민들은 중구 일대가 아니

    면 주로 동구의 만석동 일대와 수도국산 일대에 몰려들었다. 그 외의 일부 피난민들은 남구의 학익동

    일대와 남동구 소래포구 일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무작정 내려온 피난민들의 새로운 삶의 보금자

    리는 변두리의 달동네나 해안가의 저지대 습지 외에 달리 없었다.14) 수도 서울에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인왕산․안산․남산을 비롯한 도심부 인근산은 달동네로 변하였다. 특히 인왕산과 안산 산기슭, 현저동

    일대, 낙산 일대, 답십리 일대 등 폭이 조금 넓은 도로의 옆이나 공지에는 곳곳에 토막과 판자촌이 형성되

    었다.15)

    이처럼 해방과 한국전쟁이란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대도시는 집중적인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이주민

    들은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도시의 산비탈과 변두리에서 임시로 판잣집을 짓고 연명하였다. 이들은 무작

    정 피난 온 도시에서 석기 시대의 사람보다 못한 환경을 맞게 되었다. 피난민에 의하여 형성된 달동네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더욱 불거진다. 앞서 말한 원인이 정치적․민족적 사건이었다면 이번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궤를 맞춘 경제적 성장이 그 배경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산업화 시기를 맞았다.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

    획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산업화․도시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실시됨

    에 따라 ‘이촌향도(離村向都)’라는 대규모의 이농현상이 벌어졌다. 산업시설이 들어선 도시로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몰려든 것이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상경한 시골의 농민들은 마땅한 거주공간

    13) 40여 개소의 수용소로 들어온 피난민과 부산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은 방이라도 얻고 끼니라도 때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피난을 온 40여만 명은 엄동

    설한에 떨면서 임시로 산중턱을 개간하여 지은 판잣집에서 살게 되었다. 깡통을 펴서 엮어 만든 양철판이나 콜타르를 바른 미군 야전용 식량박스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이었다(부경역사연구소, 2003, ꡔ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ꡕ, 선인, 292~294쪽).

    14) 이희완 외, 2009, ꡔ인천 배다리 시간, 장소, 사람들ꡕ, 작가들, 63쪽.

    15) 전남일 외, 앞의 책,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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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을 확보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거나 달셋방을 얻었다. 이도 못하면 산비탈의

    달동네를 찾아가 판잣집을 짓고 도시생활을 시작하였다.

    다음은 도시계획에 따라 또 다른 달동네가 형성되는 경우이다. 도시를 정비하면서 달동네의 판잣집들

    을 철거하였고 이에 따라 강제적으로 이주를 당한 주민들은 다시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정부는

    1955년 이후 64년까지 도시환경개선 및 미관의 회복이라는 명목으로 강제철거를 단행하고 공공주택을

    건설하여 철거민을 도심외곽으로 이주시켰다. 강제로 쫓겨난 주민들은 시 변두리 지역에 새로운 판잣집을

    세우거나 시내의 다른 지역에서 불법으로 임시거처를 마련하는 등 악순환의 연속을 가져와 오히려 불량주

    거지를 도시외곽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6) 결국, ‘도시 미관의 저해’라는 딱지가 붙여져

    이루어진 ‘강제적인 이주’는 이름만 다른 또 하나의 달동네를 탄생시킨 것이다.17)

    지금까지 설명한 달동네 형성의 근대사적 배경은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해방 후 동포의

    귀환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의 유입이었다. 역사적․정치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도시에 급격히

    인구가 증가되었고, 이들은 도심의 산등성이와 비탈을 개간하여 판잣집을 지었다. 둘째, 자본주의적 근대

    화 과정에서 촌락민들의 이주로 인하여 달동네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

    한 농민들은 남의 집에 살거나 달동네로 찾아들었다. 셋째, 철거에 따라 도심의 변두리에 새로운 달동네가

    생기는 경우이다. 달동네를 없애려다가 오히려 또 다른 달동네가 생겨났고 이것은 불량주택단지가 확산되

    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달동네는 점차 도시로 모여든 빈민들의 삶터가 되었고, 점차

    대도시의 독특한 서민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다. 부산지역 달동네의 형성과 특징

    부산은 우리나라 근대도시형성사에 있어 다양하고 독특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도시주거 및

    도시주거지의 형태에 있어서도 다른 도시들과 비교될 수 있는 독특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지니며 발전

    했다.18) 해방과 한국전쟁은 부산을 인구수용의 한계를 넘어 비대한 도시로 만들었다.19) 난민들을 분산

    수용하거나 철거하여 외지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달동네가 형성되었고,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부산 특유의 산복도로가 만들어졌다. 부산 달동네의 도시사적 배경으로 첫째는 해방에서 한국전쟁기

    까지 귀환동포임시수용지구와 고지불량주택지구를, 둘째는 1955~1981년까지 도시정책에 따른 이주지구

    인 강제철거이주지구와 집단이주개발지구를 들 수 있다.20)

    16) 위의 책, 112쪽.

    17) 본래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개발과 철거를 하겠다는 도시 정책은 악순환에 불과하였다. 도심에서 주변부로 쫓겨난 철거민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달동네를 다시 만드는 것 외에 따로 없었다.

    18) 권영민․조성기, 2000, 「부산시 도시성장과정에서 본 주거지 특성에 관한 연구」, ꡔ대한건축학회논문집ꡕ 16권(10호), 대한건축학회, 109쪽.

    19) 부산은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에는 평야가 협소하고 산악지형이 많아서 주거공간으로 적합한 지역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일제시기 일본인들의 이주, 해

    방 후 동포들의 귀환, 한국전쟁 시 난민들의 유입, 일자리를 얻기 위한 농민들의 이주 등으로 주거 공간이 더욱 부족해져 결국은 산을 개발하여 마을을 만들

    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원도심권의 산세를 둘러보면 낮은 산 중턱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이것은 모두 부산의 주거공간과 현대사가 충돌하여 만들

    어진 모습이다(유승훈, 2008, 「도시민속」, ꡔ콘텐츠 부산-지역사와 도시민속을 활용한 브랜드화ꡕ, 부산학연구센터.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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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대표적 달동네 사례(출전: ꡔ부산의 산동네ꡕ)

    달동네명 위치 형성원인 특징

    물만골 연제구 연산동․한국전쟁․초량동 부두지구 철거민 대량 이주

    ․철거 투쟁 및 물만골공동체 구성(1990년대)

    꽃마을 서구 서대신동 ․한국전쟁 ․꽃재배로 생활

    수정동 동구 수정동 ․해방과 한국전쟁

    안창마을 동구 범일동 ․한국전쟁․통일교의 성지․오리불고기집으로 성업

    태극마을 사하구 감천동 ․한국전쟁시 태극도 신자들의 집단 거주 ․태극도 신앙촌

    영도의 산동네 영도구 신선동․봉래동 ․해방과 한국전쟁

    돌산마을 남구 문현동 ․철거민들이 이주(1980년대) ․공동묘지를 개간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부산 산동네의 특징을 정리한 ꡔ부산의 산동네ꡕ 에서는 ‘산동네’를 기존의 ‘산마을’이나 ‘산촌’과 달리

    도시화와 산업화가 낳은 도시 이주민들의 독특한 생활공간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부산은 한국의

    산업화와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속에서 탄생한 부산의 산동네는 근대 도시

    서민들의 원초적 생활공간이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21) 이 책에서는 수많은 부산의 산동네 가운데 물만골,

    꽃마을, 수정동, 안창마을, 태극마을, 영도의 산동네, 돌산마을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관한 개요를

    정리해보면 과 같다.

    에서 보이듯이 부산의 달동네가 형성되는 주요한 원인은 해방과 한국전쟁이다. 부산으로 무작정

    이주해온 타향인들이 살았던 곳은 부산 원도심권의 주변부로서 화장터, 공동 무덤, 심지어 가축의 움막도

    있었다. 위 책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러한 달동네 형성의 역사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곳은 서구의 아미동과

    남구의 우암동 달동네이다.

    아미동은 일제시기에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인데 귀환동포와 피난민들에 의하여 점차 달동네

    로 변하였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에서 입국한 이상묵씨는 1952년부터

    부산의 아미동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산은 귀환동포들과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와 거리에

    서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부산시 당국에서는 이주민들을 청학동, 대신동, 아미동 등으로

    20) 부산시 도시주거지의 유형은 5가지, 즉 초기시가지형성지구(개항이전), 외국인전관거류지구(1876년 개항~1945), 해방 후 6․25동란기의 피난촌지구

    (1946~1954), 정책이주개발지구(1955~1981), 일반아파트밀집지구(1982년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귀환동포임시수용지구는 연고가 없는 귀환동포들을

    일본인들이 쓰던 시설물에 분산․수용하거나 도심근처 고지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으면서 형성된 곳이다. 고지대불량주택지구는 한국전쟁에 의한 난민의

    집중으로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도심부와 항만시설에 가까운 고지대를 중심으로 밀집주거지를 형성한 지구이다. 부산시의 대표

    적 산복지구인 망양로를 끼고 있는 도심의 고지대와 도심주변의 해안을 끼고 있는 고지대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강제철거이주지구는 한국전쟁 이후 시내 전역

    의 판잣집 일부에 대하여 강제철거를 단행하고 철거민들과 구 역전 화재민․수재민들의 구호주택의 공급을 위해 공공주택을 건설하여 이들을 도심외곽으로

    이주시키면서 만들어졌다. 집단이주개발지구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한 대규모 정책적 주택공급지구이다. 특히 반송지구는 부산시의 정책이주지 중 규모면

    에서 가장 크며 가장 많은 철거민들(6,809세대)을 수용한 지역이다(권영미․조성기, 앞의 글, 113~116쪽).

    21) 박재환 외, 앞의 책,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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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아미동의 축대 사이에 박혀있는 묘비

    분산 배치시켰으며, 여러 세대가 함께 살 수 있는 큰 텐트를 나누

    어주었다고 한다.22)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사람 사는 것

    이 아니라 사람 사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주민들은 아미동의 공동묘지를 개간하여 주거지로 사

    용하게 되었다.

    지금도 아미동의 골목계단과 담벼락의 축대에서는 묘지명이 적

    힌 비석이 섞여 있다. 아미동 주민들의 증언대로 아미동에서 집을

    짓기 위하여 땅을 파면 단지처럼 생긴 장골기와 비석, 그리고 인골이 무수히 출토되었다.23) 아미동 사람

    들은 죽은 자의 무덤을 개척하여 그 위에 집을 짓고 살았으니 그들의 주거문화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은 것이다.

    우암동의 달동네도 삶의 바닥을 넘어 탄생한 곳이다. 우암동(牛巖洞)의 명칭은 이곳 포구에 소와 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한 것이다.24) 일제 강점기에는 우역(牛疫) 검사를 위한 소막이 있었으며,

    주로 소들을 키우던 곳이었다.25) 8․15 해방이후 귀환동포들이 우암동에 정착하였을 때 이곳에는 변변

    치 않은 초가집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부산시는 소막에서 기르고 있던 돼지와 닭을 치우고 이곳을 개조

    하여 귀환동포들을 살게 하였다. 소막의 기둥을 중심으로 하고 가족 수를 참작하여 배당하였으며, 가구

    와 가구 사이에는 가마니와 판자로 막아 구분하였다고 한다. 다시 한국전쟁이 터지고 1․4후퇴 때 거제

    도의 피난민들까지 우암동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소 화장터와 개울 주변에 움막을 지어 살았는데 피난민

    들이 증가하자 공동묘지 위에까지 집을 짓게 되었다. 나무나 판자, 가마니, 골판지, 루핑(roofing) 등을

    재료로 만든 집으로서 바람만 간신히 막을 정도의 임시거처였다. 볏짚으로 초막을 지어 생활하는 사람들

    도 있었다.

    이처럼 부산 지역 달동네는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당장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문화적 특징들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유별난 근․현대사로 말미암아 부산 달동네의

    도시 민속은 전시대의 민속 문화를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였다. 부산의 도시민속은 단절과 해체, 복원과

    변용이라는 혼종의 양상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우리나라의 대도시가 겪었던 일반적 특징이라

    거론될 수도 있겠지만 부산의 도시민속은 어느 도시보다 짧은 시간에 갑작스럽게 거치는 ‘압축적 혼종’이

    란 점에서 유별난 것이다.

    22) 2009년 6월 22일 현지 조사, 이상묵(남, 74세, 부산시 서구 아미동 거주).

    23) 목포에서 결혼 한 뒤 19살에 첫애를 낳자마자 화물선을 타고 아미동으로 왔다는 한 할머니는 이 지역에 정착한 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해주었다.

    “우리가 처음 오니까 피난민들이 많이 살았거든. 2천막, 3천막 그랬거든. 피난민들이 와서 천막치고. 여기는 일본인 사람들의 공동묘지야. 이러한 단지가 나

    왔어. 하수구를 파면 단지에서 뼈가 말갛게 나왔고, 연탄아궁이를 팔려면 이빨이 수북이 나와서 천마산에 묻고 그랬어. 구들 놓으려면 연탄구멍을 파야하니

    까 뼈가 나왔고 단지도 나왔어. 어떤 사람들은 단지를 고물장수한테 팔아먹었다나? 거기다 무엇을 담으니까 귀신이 나왔다나?”【2009년 7월 23일 현지 조

    사, 성명 미상(여, 72세, 부산시 서구 아미동 거주)】할머니가 나왔다고 강조하는 단지는 화장 이후에 인골을 담는 장골기(牆骨器)이다. 지금도 아미초등학교

    에서는 화장집골시설(火葬集骨施設)과 장골기가 출토되고 있다(부산박물관, 2009, ꡔ아미초등학교 증축부지 내 유적ꡕ, 6~8쪽).

    24) 조선시대 한․일 양국의 외교 관련 서적에서 우암포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으며, 적어도 조선 숙종 조 이전 이곳에 마을이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부산광

    역시사편찬위원회, 1997, ꡔ부산지명총람ꡕ 제3권(남구․북구․해운대구편), 62쪽].

    25) 우암동 달동네의 마을사에 대해서는 “부산남구민속회, 2001, ꡔ남구의 민속과 문화ꡕ, 450~478쪽”을 참조.

  • 40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또 한 가지, 부산 달동네 도시민속의 특징으로 북한의 피난민들에 의한 생활문화의 접변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가히 서로 다른 민속의 충돌에 의한 ‘잡종(hibrid)의 탄생’이라 일컬을

    만하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달동네에서 정착하면서 부산의 당대 환경에 맞는 새로운 도시민속을

    창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식생활 문화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상술한 우암동, 피난민의 주거지에서

    북한 냉면의 변용인 밀면이 탄생하였다. 북한에서 냉면집을 운영했던 피난민이 미군의 구호식품이 밀가루

    를 전분과 결합시켜 새로운 음식문화를 창출한 것이다.26) 이처럼 부산의 달동네는 근대사의 획기적 사건

    으로 이주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문화변동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3. 도시민속학의 동향과 달동네의 도시민속

    가. 도시민속학의 동향과 도시 마을지의 작성

    도시민속학의 출발과 발전은 민속학이 현재학적 과제에 복무하고자 했던 사실과 밀접히 관련된다.

    한국민속학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현대사회의 도시민속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제기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민속학의 연구과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도시민속학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

    다.27) 2000년대에는 한국민속학의 주요한 분야로서 도시민속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각종 학술대회에

    서 기획주제로 발표되고, 그러한 성과들이 집약되어 학술지의 기획논문으로 출간되었다.28)

    지금까지 도시민속학의 연구를 보면 대체로 도시민속을 ‘도시화 과정에서 지속되거나 변용되는 전통문

    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도시에서 전통문화의 지속과 변용에 관한 연구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도시 마을에서 공동체 신앙이 변모되는 양상에 연구가 집중되어 특정한 분야의

    쏠림현상이 두드러진 것도 도시민속학 연구동향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런데 도시민속은 ‘도시화 속 전통

    문화의 지속․변용’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생성된 근․현대 민속’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도시민속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두 가지 연구 성과들이 양 날개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29)

    현재의 도시민속학에서 시급한 과제는 도시개발로 인하여 사라지는 도시 마을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

    하고, 종합적인 도시민속지를 작성하는 것이다.30)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과 서울

    26) 부산밀면의 탄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의 냉면을 당시의 구호식품이었던 밀가루와 결합하여 새로운 밀면으로 만들었다는 요지에는 큰

    이견이 없다.

    27) 박환영, 2008, 「한국도시민속학 연구동향」, ꡔ민속학연구ꡕ 23호, 국립민속박물관, 212~214쪽.

    28) 2005년 한국민속학회의 기획논문인 ‘도시공간 위의 민속문화양상’, 2007년 실천민속학회의 특집논문인 ‘도시속의 민속’,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의 도시민

    속학 기획논문 등이다.

    29) 현재 도시에서 새로 형성된 근․현대 민속을 겨냥한 연구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한국 민속학의 연구가 세시, 의례, 놀이, 신앙, 물질 등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민속학의 연구도 다양한 영역에서 접근이 되어야 질적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도시민속학의 연구경향은

    민간 신앙과 세시풍속, 평생의례 등 전통적인 민속이 도시에서 지속과 변용되는 현상을 천착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시에서 새로 나타난 근․현대의

    생활문화를 발굴하려는 노력과 도시 생성의 민속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게 부족하였다.

    30) 달동네는 우리나라의 도시에서 곧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지난 2005년 정부는 전국의 달동네와 판자촌 451개 구역을 선정하여 2010년까지 주거환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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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역사박물관에서는 재개발 지역의 도시마을을 조사하여 도시마을지를 펴내고 있다.31) 이로써 대규모 개발

    이 예정된 서울 지역 도시마을의 역사․문화 및 도시민들의 생활과 풍습 등에 대하여 최소한의 기록

    보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민속지의 발간 사업은 급속한 개발로 사라져 가는 무형자원을 기록

    하고자 하는 구제(salvage) 민속학적 대응이면서 더불어 민속학의 현재학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서울의 뉴타운(new town) 개발 대상지는 도시화의 과정에서 많은 변모가 이루어졌지만 대개가 예전의

    달동네 지역이었다. 임재해는 달동네에 대한 도시민속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환기시킨 바 있

    다.32) 즉 도시민속학의 새로운 대상으로서 ‘도시민중의 민속’을 제시하였고, ‘달동네의 빈민층 민속’을

    현대 민속학의 새 지평을 열 수 있는 도시민속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는 도시민중을 중심으로 한 도시민속

    의 조사연구를 강조하면서, “도시 안에 존재하는 달동네 빈민층이나 노점상들, 접대부들 가운데 특정

    민중집단을 집중적인 대상으로 삼아 오랜 기간 민속을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라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것은 달동네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계층과 집단에 대한 장기간의 조사와 이를 토대로 한 연구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도시민중의 민속이 제대로 밝혀지기 위해서는 먼저 달동네 도시민들의

    삶과 생애사 조사가 기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형호는 개인생애사를 통하여 도시민속학 연구방법을

    새롭게 모색해보았다. 그는 민속학이 현상과 집단성에 매몰되어 개인의 삶에서 오는 행동과 인식의 차이

    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용산 지역 6인의 생애사를 통하여 도시화 과정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전통적 삶의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갔는가를 탐구하였다.33)

    정형호의 문제인식처럼 그 동안 민속학이 사람들의 삶과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를 지향하면서도 전승집

    단의 문화를 전반적으로 보여주는데 치중해왔으므로 개인의 삶을 미시적으로 다루는 연구는 취약했다.

    개인의 삶과 집단의 문화가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개인의 연대기적 삶을 통하여 집단의 역사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지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민속학에서 개인 생애사 연구는

    기존 민속학 연구의 문제점에 대한 자기 반성 및 성찰의 표현일 것이다.

    달동네 도시민속지의 전망은 구조적․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과 구체적 삶을 미시적으로

    밝히는데 있다. 지금까지 사소하게 여긴 근대적 일상을 중요하게 봐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크로

    개선하기로 발표하였다(「서울신문」 2005년 12월 13일). 주거환경의 개선 혹은 뉴타운 정책으로 인하여 얼마 남지 않은 달동네가 역사 속에서 퇴장당할 처지

    에 놓여 있다. 서울시에서도 도심이나 인근지역의 무질서하게 형성된 기성시가지를 대상으로 신시가지형 타운을 조성하는 방식인 뉴타운 정책을 내놓고 있

    다. 이 정책의 대상 지역은 은평구 진관내․외동 구파발 일원을 비롯하여 33개에 이른다(서울역사박물관, 2008, ꡔ보광동사람들, 보광동ꡕ, 12~13쪽). 따라서

    최소한의 기록보존 차원에서 재개발지역에 대한 도시민속지를 작성해야 하며, 이에 관한 연구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31) 두 기관에서 발행한 도시민속지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아현동 도시민속조사보고서에서는 조사항목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었다.

    조사지 개관과 조사지 형성에서 들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세시풍속, 종교와 신앙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의식주

    와 생활재를 바탕으로 하는 ‘사물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국립민속박물관, 2008, ꡔ아현동 사람들 이야기ꡕ, 262~263쪽). 서울역사박물관의 뉴타운 민속

    지에서는 시간과 공간, 사람을 핵심주제로 삼았고, 이 아래 중심 주제를 두었다. 시간의 중심주제는 지역의 연혁이며, 공간의 중심주제는 ‘지역의 역사, 지역

    의 생태환경과 문화유적, 지역의 지명과 경관변화, 도시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의미, 삶의 공간․집과 주거생활’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중심주제는 ‘대상지

    역의 생업활동, 사람들의 조직과 활동, 평생의례, 전통신앙, 놀이와 세시풍속, 구비전승과 개인생애사’이다. 민속지의 구성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즉 ‘시간

    과 공간을 축으로 본 보광동’, ‘보광동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 ‘보광동 사람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다’이다(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책, 14~15쪽).

    32) 임재해, 2007, 「도시속의 민속문화 전승양상과 도시민속학의 새 지평」, ꡔ실천민속학ꡕ 9, 실천민속학회, 44~45쪽.

    33) 정형호, 2007, 「개인생애사를 통한 도시민속학의 접근 방법의 모색」, ꡔ실천민속학연구ꡕ 9, 실천민속학회, 53~54쪽.

  • 42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macro)한 망원경이 아닌 마이크로(micro)한 현미경의 눈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서 달동네의 도시민

    속지는 도시마을지로서 달동네의 역사․문화에 대한 조사와 아울러 개인생애사로서 달동네 주민의 삶에

    대한 조사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 달동네 도시민속의 갈래와 속성

    주지하다시피, 민속은 민간의 일상문화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민속의 기반이 촌락 문화였으므로 민속의 전승공간을 농․어촌에 한정시키는 태도는 매우 편협한 사고이

    다. 민속의 전승자이자 담지체인 서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살고 있는 곳이 도시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민속학자는 농촌과 함께 도시를 연구해야 마땅한 일이 되었다. 이 때 서민들의 일상적 생활문화를 민속으

    로 바라본다면 굳이 시골과 도시 혹은 전통과 현대를 구분할 필요가 없이 일상공간에서는 어디서나 민속

    이 전승된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도시민속은 다양한 갈래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성립된다. 임재해는 도시민속을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즉 그는 도시야말로 새로운 민속문화를 만들어내는 도가니라 하면서 도시민

    속의 유형을 “하나는 도시지역의 전통적인 토박이 민속이고, 둘은 도시지역에 새로 편입된 신도시지역의

    전통 민속이며, 셋은 도시에 이주해 온 시민들이 전승하는 민속이다. 넷은 시골지역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전승되는 민속이며, 다섯은 새로 형성되어 전승되는 현대 민속”으로 분류하였다.34)

    이에 반하여 우찌다(內田忠賢)는 도시민속을 “도시화의 민속”과 “도시독자의 민속”으로 비교적 간략히

    구분하였다.35) 도시화의 민속은 촌락에서 도시로 변화하는 지역에서의 민속 변화이며, 도시독자의 민속

    은 도시를 기원으로 하여 새로 생성된 문화이다. 도시화의 민속은 다분히 전통적 민속의 변용에 초점이

    있는 것이며, 도시독자의 민속은 도시 민속의 기원과 발생에 주목한 것이다.36)

    도시화의 과정에서 탄생한 달동네의 문화에는 수많은 근․현대의 도시 민속이 존재하고 있다. 두 학자

    의 견해를 참조하여 달동네의 도시민속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즉 도시화되기 이전

    ‘지역에서 전승되던 민속’, 외부의 영향에 의하여 혹은 이주민들에 의하여 ‘유입된 민속’, 도시에서 ‘생성

    된 현대 민속’이다. ‘지역에서 전승된 도시민속’은 도시화 이전에 토박이들이 문화주체로서 전승해오던

    민속이 달동네 주변에서 전래된 것이다. 이주민들에 의하여 ‘유입된 도시 민속’은 타 지역의 민속이 주민

    34) 임재해, 앞의 글, 29쪽. 임재해의 5가지 유형 가운데는 서로 중복되는 것들이 있다. 우찌다의 유형은 촌락과 도시의 지역적 구분에 치중한 나머지 도심 안에

    서 전통 문화의 지속과 변용 문제를 포함시키지 못하였다. 한편, 임재해가 정리한 도시민속의 유형에 대해서 김정하는 “그러나 그처럼 도시문화가 독립적으

    로 형성된다고 보기 어렵고, 실제로 문화는 근대기의 역동적 사회문화의 흐름 속에서 구분 없이 서로 입체적으로 뒤섞이는 것 겹치고 연결되기 때문이다”라

    는 지적을 하였다. 김정하의 주장대로 “도시민속은 명사적(city)이지 않고 형용사적(urban)특성을 가지므로 유형을 구분하기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변동과 맞

    물려 형성되는 과정 자체” 라는 견해도 일리가 있겠지만(김정하, 2009, 「지역민속 연구의 방법론적 모색」, ꡔ지역민속학ꡕ 창간호, 지역민속학회, 87쪽) 실제적

    인 도시민속지에 근거하여 현대 민속의 실증적 유형들을 밝히는 작업도 필요하다.

    35) 內田忠賢, 2003, 「都市民俗生活誌の可能性」, ꡔ國立歷史民俗博物館報告ꡕ 103, 國立歷史民俗博物, 351~352쪽.

    36) 우찌다의 분류를 조금 바꾸어보면 “도시의 민속”과 “도시적 민속”으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도시의 민속”에서는 도시 지역에서 계승되었던 토박이 민속,

    도시화에 따른 민속의 지속과 변용 등이 논의될 수 있겠고, “도시적 민속”은 근․현대 이후로 도시민들에 의하여 새롭게 탄생한 도시적 생활문화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 43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들의 이동과 함께 흘러들어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시에서 ‘생성된 현대 민속’은 근․현대 도시화 과정

    에서 새롭게 출현한 민속이다.

    달동네는 도심지역에서 탄생한 생활공간이므로 둘째와 셋째 도시민속의 성격을 짙게 갖고 있다.37)

    기왕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비거주 공간이므로 전승되는 전통문화가 부족하지만 달동네에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주변 지역의 전승 문화가 교류하면서 융합되는 현상도 벌어졌다. 그러므로 달동네

    에서 생성된 도시민속은 ‘혼종과 복합’의 도시문화라고 종합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달동네의 도시민

    속은 한국 전쟁 시 피난민에게 나눠준 꿀꿀이죽과 같은 것이다. 꿀꿀이죽은 전쟁의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음식 쓰레기를 수거하여 판 잡탕음식이었다. 속된 말인 ‘잡탕’은 바로 ‘복합

    의 상징’이자 ‘혼종의 기표’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민속을 누대의 시간적 흐름을 거쳐서 형성된 생활문화이며, 민족이란 전승집단

    에 의하여 전해지는 문화적 총체로 여겼다. 읍치, 마을, 가족 등에 의하여 전래되는 민속은 그 집단 내부에

    서 하나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계승되는 전통적 문화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으로

    도시민속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집단 내부에서의 유기

    적 관계 및 상호 네트워크의 힘은 크게 약화되고 있다. 도시사회에서는 인적 이동이 빈번해지며, 문화적

    유동성이 커진데다가 공동체적 단결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고 있다. 게다가 자본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이에 따라 도시민속이 크게 변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도시를 기반으로 한 도시민속에는 일상성,

    개방성, 다양성, 유동성, 이질성 등 현대문화적 속성들이 침투하게 되었다.38)

    물론, 도시 민속은 전통적인 ‘민속의 지속과 변용’의 문제를 포괄하므로 종래의 민속 개념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시민의 삶은 유동적이고 빠르고 불안정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도시민의

    삶의 토대 위에 형성되는 도시민속은 이러한 속성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도시민속은

    하나의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과정 혹은 맥락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도시의 생활문화는 매일 변화무쌍(變化無雙)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다. 그러므로 도시 민속은

    다원주의적 시선에서 접근하여 하나의 문화적 과정으로 인지하고, 이를 둘러싼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김태곤과 장철수는 모두 민속을 ‘일상의 생활문화’로 보았다. 김태곤은 민속을 민간층의 생활일체를

    지칭하는 ‘민간층의 문화현상’으로 개념을 지었고, 민속학은 “민간인의 입장에 서서 민간인의 생활문화를

    37) 달동네의 전승문화는 농민들의 이주과정으로 전통적인 민속문화에서 현재의 도시문화에 이르기까지 달동네가 겪어온 근․현대의 과정에서 그 특징을 응축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통시적으로 달동네의 생성시기가 근대 이후이므로 달동네의 도시민속은 20세기 이후의 문화적 특징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욱이

    달동네는 도시에서 생성된 마을의 하나이므로 공간적․지역적으로 도시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달동네의 도시민속은 전통적 민속과 현대적 도시문화가

    중층적으로 복합되어 있으면서도 근․현대 시기 도시의 생활문화를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고 본다.

    38) 우리나라의 도시화는 전 세계적인 동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화의 일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는 모두 우리나라가 자본주의로 변모하

    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며, 도시민속 역시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민속은 두레, 품앗이 등 공동체의 속성을 가졌던 촌락의 민속과 달리

    개인의 자유와 편의가 강조되거니와 자본의 힘에 의하여 재편되고 있다. 현대사회의 일생의례는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혼례와 상례, 돌잔치, 칠순 잔치 등

    은 자본주의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례가 전문적으로 치러지는 장례식장의 성장, 이벤트 행사로 변모하는 각종 잔치는 자본의 힘과 전통문화가

    상호 결합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 44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연구하는 민간의 학문”이라 정의하였다. 김태곤이 말하는 민간은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즉 그는 민속학

    개념에서의 민간을 현대 문명과 동떨어지게 보는 것을 비판하면서 “벽지가 아닌 도시나 현대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대다수층인 민간”이라 정의하였다. 따라서 민간의 일상생활이란 촌락과 전통의

    일상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일상까지 포함하는 것이다.39) 장철수 역시 민속을 일상생활 내지

    생활문화로서 보았으며, 민속학은 일상생활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방법과 조사내용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0) 이러한 정의를 도시민속학에 적용시켜보면, 도시민속은 도시에 거주하는 도시민들의 생활

    문화이며, 도시민속학은 궁극적으로 도시인의 총체적인 생활양식을 밝히는 학문이 된다.41)

    그러므로 달동네의 도시민속은 ‘달동네 주민들의 총체적인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것이다. 의식주, 생

    업, 신앙, 여가와 놀이, 평생의례, 세시풍속 등 달동네에 전승되는 문화적 요소들이 이 안에 포함될 수

    있겠다. 그러나 전통 민속의 기반인 농민문화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부산의 아미동 달동네에서는 5개의 마을제당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마을신앙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42) 최근 개인에 의하여 지어진 제당이 대부분이고, 제의 범위가 행정적 편의에 따라 통․반

    으로 분할되거나, 절의 보살에 의하여 제의와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도시에서 새로이 만들어

    진 마을신앙의 기능과 속성에 주목한 김종대에 의하면 이러한 제당들은 “전통적인 전승력을 지닌 제의가

    아니라 새롭게 도시에서 만들어진 집단신앙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43)

    4. 도시민속학에서 본 달동네의 의의

    가. 도시로의 이주(移住)와 경계문화의 지점

    달동네의 마을 형성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향자(離鄕者)들, 즉 고향을 떠나온 자들이 도시에서

    개척한 마을이며, 이러한 토대에서 도시민속이 새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시화는 도시민속

    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다. 이 도시화는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 혹은 ‘도시가 되어가는 현상’

    이라 할 수 있다. 도시화는 지리적․사회적 변화 외에도 문화적 변화를 가져온다. 즉 도시화는 공간․사

    회․문화 등의 차원에서 여러 가지 도시적 변화를 야기하는데, 도시민속학에서는 도시화로 인하여 생성된

    도시적 생활문화가 주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박계홍은 “사회구조로서의 농촌이 급속히 소멸되고 점점 도시화가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 대하여 도시

    39) 김태곤, 1984, ꡔ한국민속학원론ꡕ, 시인사, 57~59쪽.

    40) 장철수, 2000, ꡔ한국민속학의 체계적 접근ꡕ, 민속원, 57~60쪽.

    41) 김태곤이 현재학으로서의 민속학을 강조하고, 현대민속학의 사회적 의미를 제시한 점에 대해서는 남근우의 글(남근우, 2003, 「민속의 근대, 탈근대의 민

    속학」, ꡔ한국민속학ꡕ 38, 한국민속학회, 204~211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42)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ꡔ부산의 당제ꡕ, 61~71쪽.

    43) 김종대, 2009, 「도시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마을신앙의 기능과 속성」, ꡔ한국민속학ꡕ 49, 한국민속학회, 209쪽.

  • 45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화의 테마도 민속학의 커다란 과제”44)라고 하여 도시민속학의 주요한 과제로서 “도시화” 문제를 대두시

    켰다. 도시화는 학문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하나의 압축된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용의하지 않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도시화란 인구의 도시집중과 그에 따라 인간 삶터가 공간,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도시적으로 변화해가는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회학에서는 도시화의 주요한 내용

    을 인구의 도시화, 지역적 도시화, 행태적 도시화로 보고 있다.45) 이 도시화는 하나의 완전한 현상으로

    파악될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의 진행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6)

    그런데 도시화는 촌락에서 도시로 혹은 고향에서 타향으로의 이주를 일으키는 요인이다. 도시민속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주’는 도시화와 도시민속의 매개 고리가 되는 주요한 개념이다. 가령, 이주는 지역

    민들의 공간적․지리적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활문화와 삶이 이동하는 ‘문화변동’과

    결부되어 있다. 독일민속학계는 이미 다양한 로마단체들의 동․서부 유럽에서의 민족이동과 독일인들의

    외국으로의 이주를 문화변동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47) 사람들이 움직이면 삶과 문화가 이동하며 그에

    따른 문화적 변동과 복합 등이 필수적으로 수반되고, 새로운 문화적 토양이 싹트게 된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의 이동이 잦은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화변동이 갖는 의미가 점차 커지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촌락에서 도시로의 인구 동태(動態)는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라 농민층이 분해되어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변해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민속학․인류학은 이러한 대규모의 이촌 과정에서 촌락과 도시의 문화적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본의 도시민속학의 경우, 초창기 논의

    의 쟁점은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야나기다(柳田國男)는 도시의 독자적인 문화생

    성을 주목하지 않고 촌락의 민속이 도시로 옮겨져 와서 형성되었다는 도비연속체론(都鄙連續體論)을 주

    장하였다.48) 이 시각에 의하자면 도시문화는 농촌문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며,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생겨난 다양한 문화적 관습이 인정되기 어려운 것이다.49)

    도비연속체론은 문화의 원형질을 촌락에 두고 도시문화를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탐구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 견해는 일본 도시화의 특징으로서 촌락인 무라(村)가 도시인 마찌(町)로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에 주목한 나머지 문화 흐름의 방향도 이와 동일시해버렸다. 촌락과 도시의 문화는 물리적 장애

    없이 연속되어 있지만 개별적인 특수성이 존재한다. 도시문화는 그 나름대로의 복잡한 체계와 특성 속에

    서 변화한다.50) 바꾸어 말하자면, 도시와 촌락은 관계성이 있지만 독자성도 있다는 것이다.

    44) 박계홍, 2004, ꡔ증보 한국민속학개론ꡕ, 형설출판사, 446~447쪽.

    45) 임정덕․황영우, 2000, ꡔ부산도시론ꡕ, 부산발전연구원, 41~52쪽. 행태적 도시화는 도시문화라는 행태가 확산되는 과정으로, 도시적인 생활양식의 변화로서

    설명될 수 있다(위의 책, 49쪽).

    46) 위의 책, 43쪽.

    47) 이정재, 2005, 「독일의 도시민속학 연구 경향」, ꡔ한국민속학ꡕ 41, 한국민속학회, 169~170쪽.

    48) 소위 도비연속체론은 “도시에는 독자의 핵심이 없고, 촌의 민속이 도시로 옮겨져 원형으로서의 민속이 도시에서 변화하고 그 위에 변화한 형이 다시 촌으로

    되돌아가 거기서 촌이 도시화한다는 것”이다(박계홍, 앞의 글, 102~103쪽).

    49) 한편, 쿠라이시(倉石忠彦)의 지적대로 도비연속체론은 촌락과 도시의 생활공간이 별도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적으로 문화적으로 항상 교류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倉石忠彦, 1997, ꡔ民俗都市の人びとꡕ, 吉川弘文館, 26쪽.) 그의 말처럼 촌락과 도시는 높은 성벽과 같이 문화적 경계를 구분하는 물리적 장애

    가 없으며, 도시는 촌락과의 관계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쿠라이시가 야나기다의 도비연속체론을 지지한 것은 아니며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하였다.

  • 46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이처럼, 야나기다의 도비연속체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담론을

    통하여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도시민속학적 시선으로 달동네를 바라보면 촌락문화와 도시문화의

    연결점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촌락에서 상경한 이주민들이 각자의 촌락문화를 도시 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리며 혹은 이미 존재했던 도시의 문화와 어떻게 복합되는 지는 도시민속학의 핵심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산시 서구의 아미동 달동네에서 전승되었던 ‘아미 농악’은 촌락과 도시의 문화적 연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미농악을 주도했던 대성사(大成寺)의 고(故) 김한순 주지는 강원도에서 살다가 지리산을 거쳐

    아미동으로 이주해온 인물이다. 그의 형제들이 고향에서 모두 꽹과리와 북을 칠 정도로 집안 전체가

    풍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이후 그를 비롯한 아미동 이주민들은 인근 대신동 지역의

    토박이들과 함께 풍물패를 결성하고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까지 걸립을 나섰다고 한다. 이것이

    1980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부산농악의 기원이 되었다.51) 이처럼 부산농악은 원래 대신동

    토박이들에게서 전래되었던 부산의 풍물뿐만 아니라 타지의 촌락에서 전승되었던 풍물들이 복합되어 새

    로운 아미동의 풍물굿으로 탄생한 것이다.52)

    한편, 아미동 달동네는 문화가 연계되는 지점이자,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못한 불안정한 문화의 경계였

    다. 구한말 이래로 이곳은 일본인의 공동묘지이자 화장장이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전승되는

    일본귀신전설을 조사한 김정하는 아미동을 “일본인에게는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였고, 이주민에

    게는 농촌에서 도시로 들어서는 경계였으며, 피난민에게는 타향과 고향의 경계였다”고 하였다.53) 부산의

    아미동을 헤매고 있는 일본 귀신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모노에

    게다를 신은 일본 귀신은 일본으로 귀환하지도 못하고 일본인에게 회자되지 못하며, 타국의 아미동 주민

    들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땅에서 떠도는 일본 귀신 전설은 아미동이 일본과 조선, 농촌과

    도시, 타향과 고향의 경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경계지점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달동네는 도시에서 생성된 마을이지만 완전한

    도시도 그렇다고 과거의 촌락도 아닌 불안정하며 과도기적 속성을 갖고 있다. 달동네 주민들은 촌락에서

    도시로, 고향에서 타지로 이주해왔는데, 도시 문화로 편입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거듭해왔다. 그들

    은 천막과 판자로 지어진 간이주택에서 생활을 해왔으며, 안정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도시의 주변부에

    서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도시 개발 및 철거 정책에 따라 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하는

    도시 속의 유목민적 운명을 지녔다.

    이러한 까닭에, 달동네 생활문화는 도시에서 발생한 민속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속과 다른 독특한

    50) 다른 맥락이지만 일본의 대표적 도시민속학자인 미야타(宮田登)도 도시로 변화한 마을에서 촌락의 원형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宮田登,

    2006, ꡔ都市の民俗學ꡕ, 吉川弘文館, 24쪽).

    51) 2009년 6월 22일 현지 조사, 김귀엽(여, 68세, 구덕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52) 달동네에서 생성되는 민속은 고향에서 타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의 연계의 문화이다. 이러한 연계는 민속의 소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상술한대로

    복합과 혼종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부산의 아미농악은 부산의 전통적인 문화도 아니며, 강원도․전라도의 전승문화도 아닌 복합과 변용의 민속인 것이다.

    53) 김정하, 2008, 「부산의 일본귀신전설에 대한 도시민속학적 고찰」, ꡔ동북아문화연구ꡕ 17, 동북아시아문화학회,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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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특징을 지녀왔다. 도시의 주변부에서 완전히 도시적 삶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경계의 문화를

    싹틔웠던 것이다. 경계의 문화에서는 종래의 문화가 약화․해체되며 동시에 새로운 문화가 재구축되어

    간다. 달동네에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계기를 매개로 고향을 떠나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달동네 주민들은 고향의 생활문화를 그대로 이어오지 못하고 한 번의 해체를 경험하지

    만 이웃들과 함께 또 다른 도시문화를 구축하게 되었다.

    나. 달동네의 ‘가난’과 근대의 생활문화

    달동네 사람들의 생활을 장악한 것은 바로 ‘가난’이었다. 이 ‘지독한 가난’은 달동네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경제적 배경이었다. 달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빈민층(貧民層)으로서 의식주 등 기초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그렇다면 ‘가난’이란 정의는 무엇일까? 20세기 초반 일본의

    윤리적 마르크스주의자인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는 ‘가난’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첫 번째 의미의 가난은 ‘경제상의 불평등’으로서 단지 부자에 비해 가난하다는 것이며, 두 번째

    의미의 가난은 ‘경제상의 의존’으로서 구휼을 받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 의미의 가난은‘경제상의 결핍’으

    로서 생활필수품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54)

    그가 정의한 가난은 경제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격차와 빈곤문제가 심화되고 있던 바, 가와카미는 최초로 가난의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가난은 경제적 문제이며 동시에 문화적 문제이다. 도시에서의 가난한 삶과 생활방식은 나름대로의

    문화적 관습과 행동양식으로 표출된다. 도시민속학의 관점에서 보면 판잣집의 주거생활을 비롯한 의식주,

    빈민들의 생업체계, 골목과 계단 등 산동네의 공간구조, 어린이들의 골목 놀이, 공동 식수와 화장실 이용

    등은 바로 달동네의 일상문화이며, 달동네 주민들의 생활양식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사회학․인류학에서는 ‘가난’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즉 빈민층의

    가난은 ‘빈곤’이라는 학문적 개념을 탄생시켰고, 지금까지도 도시사회학․인류학에서는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위 ‘빈곤의 문화’는 1960~1970년대 사회학 및 인류학계에서는 치열한 논의가 진행

    되었다. 이 개념은 멕시코의 빈민촌을 조사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소수의 원시종족 대신에 신흥개발국가의 고통 받는 다수의 인류를 조명하면서

    인류학의 현대적 사명을 일깨워주었다.55)

    오스카 루이스에 의하자면 “빈곤”은 당시의 인류학자들처럼 당연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계급간의 불화,

    54)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지음․송태욱 옮김, 2009, ꡔ빈곤론(貧乏物語ꡕ, 꾸리에, 31~43쪽.

    55) 그는 “많은 미국인들이 이러한 인류학자들의 덕분으로 고작 5백 명에 불과한 뉴기니의 어느 외딴 부족이 지닌 문화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언젠가는 국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인도, 멕시코 등 저개발국가의 수백만에 달하는 부락민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흥개발국가의 도시화 및 빈곤계층에 대한 관심을 촉구시켰다(오스카 루이스 지음․한성간 옮김, 1979, ꡔ가난이 낳은

    모든 것-다섯 가족 이야기-ꡕ, 홍성사, 12쪽).

  • 48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사회적인 문제들,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색다른 문제이다. 그는 빈곤이 하위문화를 창조하는 활성적

    인 요소가 되었고, 빈민 문화는 그 자체의 양식과 사회적․심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지역적인

    경계선, 도․농간의 경계선, 심지어 국가 간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것이라 주장하였다.56) 하지만 그가

    ‘빈곤의 문화’를 일정한 생활양식이며, 가족 관계를 통해서 세대 전승하는 것으로 파악함에 따라 뜻하지

    않게 자본주의 빈곤의 재생산구조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든 빈곤의 문화적 특징인 “아버

    지의 부재, 수다스러움, 약한 자기 정체성, 성역할의 혼돈, 무절제한 감정 폭발, 미래에 대한 설계가 없는

    근시안적인 생활태도, 운명론에의 심취, 남성우월주의, 건강치 못한 행위”57) 등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어

    서 도시 빈곤층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화시킨다는 우려를 낳았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빈곤의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재개발지역이나 철거민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해졌다. 즉, 무허가정착지 주민들의 생활양식 및 주변성, 또는 생활실태 및 고용구조를 밝히는 사회학

    및 인류학 논문들이 나온 것이다.58) 그 가운데 사당동의 재개발지역에서 약 2년 6개월간 상주하면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펴낸 조은․조옥라의 ꡔ도시빈민의 삶과 공간ꡕ 은 우리나라 최초

    로 달동네 철거지역에 대한 ‘정밀 조사보고서’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연구는 불량주거지 재개발 사업

    이 도시빈민층이 대부분인 이들 지역주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도시빈민의 재생산이나 도시공간

    의 재구조화와 어떻게 연관되는 가를 밝히고자 하였다.59)

    위 연구는 서울의 재개발지역과 사회경제적 구조가 갖는 관련성을 해명하며, 도시 빈민의 재생산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인류학적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빈곤층의 문화를

    해명하기 보다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관심을 반영하여 사회구조와 사회관계를 구명해보고자 하였다. 하지

    만 도시민속학에서는 ‘왜 빈곤한가’가 보다는 ‘어떻게 빈곤한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도시민속학은 불평

    등한 사회구조보다는 도시민들의 일상적 삶과 생활문화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부언하자면 도시민속학

    에서는 빈곤층의 문화를 생활문화의 하나로서 접근해야 하며, 사회 구조의 거시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미시적인 시각으로 설명해주어야 한다.

    도시 민속학은 달동네가 밀집된 주거지로서의 지리적 공간 혹은 빈민 계층에 의한 사회적 모순이 팽배

    한 사회적 영역으로서 뿐만 아니라 도시화가 배태한 기층민의 생활문화의 영역으로 주지시키고 있다.

    도시민속학이 관심을 표명한 대상은 사실 달동네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를 통하여 형성된 주민들의 생활문

    화이다. 도시기층민의 생활문화 혹은 생활사 차원에서 달동네를 접근하게 되면 판잣집과 좁은 골목, 누추

    한 동네가게, 불편한 공동수도, 보잘 것 없는 각종 생활재, 달동네 사람들의 궁핍한 삶 등 달동네 풍경의

    모든 것들이 주목할 만한 도시민속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편, 궁핍한 생활문화는 빈민들의 생업체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동네의 주민들은 대개가 불안정

    56) 위의 책, 13쪽.

    57) 서영민, 1995, 「빈곤의 문화에 대하여」, ꡔ도시와 빈곤ꡕ, 한국도시연구소, 16~17쪽.

    58) 조은․조옥라, 2007, ꡔ도시빈민의 삶과 공간-사당동 재개발지역의 현장연구-ꡕ, 서울대학교출판부, 4쪽.

    59) 위의 책, 3쪽.

  • 49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한 고용체계 속에서 임시적인 일자리를 갖고 있다. 건설현장의 잡부, 중소공장의 노동자, 과일장사, 야채

    장사, 가내 부업 등 불안정하고 불리한 위치에 있다. 게다가 이들의 빈곤은 출구가 없이 가중화․일상화되

    고 아랫세대로 전승되었다. 자녀세대의 직업 역시 건설노동자, 식당웨이터, 다방종업원, 가게점원, 파출부,

    술집 접대부 등이다.60) 달동네의 빈민들은 가난한 생활을 이겨나가기 위하여 도시의 하층부로 뻗어나갔

    고, 이러한 생활이 대물림되면서 도시의 대표적인 서민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달동네의 일상적 생활문화는 빈곤층의 삶 속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우리가 지나쳐온 근대적 생활문화

    와 도시민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도국산달동네에서 평생을 살았던 고(故) 이광환씨(1926~

    2000)의 일기를 보면 달동네 주민의 생애가 도시민의 근대적 일상문화와 직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61)

    일례로 수도단수(물난리), 구두땜질, 회충약 복용, 변전소 공터 텃밭 배추공사, 월동용 나무구입, 가족계획

    운동, 양계장 신설, 변소치우기, 쥐잡기, 미용하기, TV 편성표 등 이광환 일기에 적혀 있는 달동네 생활의

    이모저모는 도시화․근대화 과정 속에서 도시민이 겪어온 일상적 생활문화와 다름없다.

    달동네의 가난한 일상문화에 대한 일례로서 주거와 공동 화장실을 들 수 있다. 달동네의 주거는 간이형

    의 천막에서 판잣집으로, 다시 슬레이트집으로 변모한다. 한국전쟁 시 피난 온 난민들은 점차 간이형의

    천막에서 벗어나 판잣집을 짓기 시작한다. 지붕은 당시에 판잣집에서 유행처럼 사용되었던 재료인 루핑을

    썼다. 루핑은 섬유 제품에 아스팔트 가공을 한 물막이 천으로서 달동네에서 이것을 많이 사용하였다.

    판잣집에 들어가는 목재는 부잣집을 뜯는 경우, 그곳에 찾아가서 목재를 얻기도 하였으며, 없을 경우에는

    목재를 거래하는 상점에 가서 구입을 하였다. 이러한 판잣집은 이후 슬레이트와 블록을 자재로 사용한

    집으로 대체되었지만 가난한 주거문화를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비좁고 가난한 주거문화는 전통적

    민속 즉 가정신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부산 아미동 달동네의 여성주민들과 면담을 해보면 거의 가정신

    을 모시지 않았고, 가정신앙 의례도 행하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시로 지어진 비좁은 집에서 화장실을 설치하지 못하므로 공동화장실을 만들어 이용하였다.

    ꡔ부산사람, 부산이야기ꡕ 를 보면 달동네에 살아본 시민들이 떠올리는 옛 추억거리로서 공동화장실이 많았

    다.62) 좁은 판잣집의 내부에 화장실과 수도시설을 구비할 수 없으므로 공동화장실을 마련하여 주민들이

    같이 이용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현재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집밖에서 이웃들에게

    생리적․원초적 욕구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큰 상처였다. 이에 따른 지명도 생겨났다. 인천의 괭이부리마

    을로 대변되는 만석동 달동네에는 ‘똥마당’이라는 곳이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 세대수가 늘고 판잣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동화장실을 설치하였다. 이 똥마당은 동네 한복판에 여러 개의 공동화장실

    60) 위의 책, 65쪽.

    61)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2007, 「특별전시 이광환 일기 팜플렛」.

    62) 아래 지문은 평범한 부산 시민이 쓴 ‘달동네 공동화장실의 애환’이라는 수기이다.“부산의 달동네는 대부분 6.25 때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을 때 산 중턱을 중

    심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임시수도로 전쟁을 수행하는 중심지로 팔도의 사람들이 피난으로 모여들어 각자 삶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피난민들의 판자집

    난립으로 도시미관은 망쳐버렸고, 그 판자집에 사는 사람들도 인간의 자연 생리현상인 배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산허리에 다닥다닥 붙어서 판자집이 서고

    방 하나에 가족들이 비비고 들어서는 상황에 위생시설이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연히 일정한 공터에 공동화장실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김상

    학, 1997, 「달동네 공동화장실의 애환」, ꡔ부산사람, 부산이야기ꡕ, 부산발전연구원, 150~151쪽).

  • 50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

    이 있었던 사실과 후미진 곳에서 아무데나 용변을 보는 일이 많다는 뜻의 속어이다.63)

    6. 맺음말

    지금까지 도시민속학에서 바라본 달동네의 특징과 의의에 관하여 논의해보았다. 이 글은 대도시의

    달동네를 도시민속학의 주요한 대상으로 보고, 이에 관한 연구를 진작시키기 위한 시론으로서 달동네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도시민속학적 연구의 함의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먼저, 달동네의 탄생의 근대사적 배경과 부산지역 달동네의 사례를 검토하여 보았다. 달동네는 해방

    후 동포의 귀환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의 유입으로 도심지의 산비탈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후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이촌(離村)의 과정에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 도심정비정책으로

    달동네를 철거하였지만 도시 외곽 지역에 또 다른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부산의 달동네는 특히 피난민들

    에 의하여 형성되면서 생활문화의 접변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달동네에

    정착하면서 부산의 당대환경에 맞는 새로운 도시민속을 창출하였다.

    다음은 도시민속학의 동향과 달동네의 도시민속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지금까지 도시민속학의 연구를

    보면 대체로 도시민속을 ‘도시화 과정에서 지속되거나 변용되는 전통문화’라는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앞으로는 도시민속이 ‘도시화 속 전통문화의 지속․변용’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생성된 근․현대 민속’

    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후자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도시민속학

    에서 시급한 과제는 도시개발로 인하여 사라지는 도시 마을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고, 종합적인 도시

    민속지를 작성하는 것이다. 달동네의 도시민속지는 도시마을지로서 달동네의 역사․문화에 대한 조사와

    아울러 개인생애사로서 달동네 주민의 삶에 대한 조사가 병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달동네가 지니고 있는 도시민속학적 연구의 의의를 논의하였다. 첫째, 달동네는 도시화

    과정에서 발화된 도시민들의 일상과 근대적 생활문화가 편성되는 공간이었다. 둘째, 달동네는 민중들의

    이향(離鄕)에 따른 문화변동의 일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촌락과 도시를 잇는 가교이자 도시주변부의 경계

    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셋째, 달동네의 일상적 생활문화의 배경에는 ‘가난’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대표적

    인 도시 서민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달동네의 일상적 삶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생활양식과도 밀접

    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아직까지 달동네의 일상문화에 대한 연구는 미답(未踏)의 영역이다. 이 글 역시 달동네의 도시민속에

    대한 시론적 탐색으로서 일상적 생활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고 성격을 규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제들에 대해서는 차후의 연구를 통하여 밝히고자 한다.

    63) 인천광역시 동구청, 2008, ꡔ추억속의 동구이야기, 아! 옛날이여ꡕ,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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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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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연구 제25호|31~54쪽|2009.12

    Abstract

    The Characteristic and Significance of Daldongne in Urban Folklore studies-focused on Daldongne of Busan-

    Yu Seung-Hun

    Curator of Busan modern history museum

    The highest pronoun of our country poor village is Daldongne that overwhelmed in 1960's

    ~1970's. Daldongne was poor village formed because of the malformed urbanization and the

    fast industrialization of our country. Daldongne is located to high hillside the derivation was

    originated from at 'moon tent village' as meaning that looked well the moon.

    I think the important subject of Urban Folklore studies as the places where Daldongne of a

    big city was produced modern life culture and substratum culture of a big city. I searched for

    essay to stir up study about Daldongne.

    First of all I tried to review modern history background of the birth of Daldongne and an

    instance of Busan area Daldongne. Daldongne came into being by influx of a refugee by the

    Korean War and return of brothers after liberation. Specially, the Daldongne of Busan was

    formed by refugees, Acculturation was performed extensively.

    Following I described about city folklore of Daldongne and a tendency of Urban Folklore

    studies. Until now we generally studied citizen folklore as tradition culture that persisted and

    changed in urbanization processes. From now on, the modern folklore which were generated in

    modern cities had to be studied. An urgent assignment in Urban Folklore studies executes field

    work regarding a city village disappearing because of the city development and it needed to

    write the overall ethnography.

    Finally, I discussed a meaning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