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학교의 만남, 순천만 흑두루미 학교는 무지개 속으로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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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지역과 학교의 만남, 순천만 흑두루미 학교 이장규(순천왕운초 교사) 흑두루미학교, 순천인안초 이야기 순천만에 찾아오는 수많은 철새 중의 으뜸은 흑두루미, 혹한의 동토인 시 베리아에서 태어나 갖은 고난을 헤치고 자라야만 비로소 이곳 순천만까지 날아 올 수 있다. 먹이를 찾고 맹수의 발톱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 무리들 끼리 협력은 필수,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도전해 오 는 많은 난관들을 이겨내면 따뜻한 순천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시의 외곽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순천인안초가 처한 현실은 막 태어난 어린 흑두루미와 흡사했다. 자연의 너른 품이 흑두루미를 건강하게 키웠듯 이 순천만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작은 학교의 학생들도 튼튼하게 성장했 다. 서로의 격려 속에서 도전하며 배우고, 마침내 창공을 날아 희망이 보이 는 무지개 속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흑두루미 ‘두리 1) ’는 학생과 교사, 학부 모 등 교육공동체 모두의 이름이다. 순천인안초는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흑두루미 학교]로서 전남 혁신학교의 철학을 공유하며 ‘행복 한 삶을 꿈꾸는’ 터전이 되고 싶다. 흑두루미를 잘 자라게 할 ‘소통’과 ‘협 력’을 바탕으로 생태감수성 가득한 [‘두리’들의 학교]를 꿈꾼다. ■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를 문 닫게 할 수는 없다! 2011년 전교생 23명이었던 순천인안초등 학교는 폐교가 되는 듯 했다. 계속 줄어드 는 학생 수로 급기야 4학급 복식이 되고 보니 학부모들 역시 그것이 낫다고 결정했 . 그해 새로 부임한 교사들은 가까운 거 리에 정원 같은 순천만을 둔 아름다운 학 교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다행스럽게 인근의 송산초가 작은 학교의 1) 순천만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 [고향으로]의 주인공 흑두루미. 실제로 부상·포획되어 8년여 우리에서 지내다 순천사람들의 노력으로 고향인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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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지역과 학교의 만남, 순천만 흑두루미 학교는 무지개 속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흑두루미 ‘두리1)’는 학생과 교사, 학부 모 등 교육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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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학교의 만남, 순천만 흑두루미 학교

이장규(순천왕운초 교사)

흑두루미학교, 순천인안초 이야기순천만에 찾아오는 수많은 철새 중의 으뜸은 흑두루미, 혹한의 동토인 시

베리아에서 태어나 갖은 고난을 헤치고 자라야만 비로소 이곳 순천만까지 날아 올 수 있다. 먹이를 찾고 맹수의 발톱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 무리들끼리 협력은 필수,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도전해 오는 많은 난관들을 이겨내면 따뜻한 순천만이 눈앞에 펼쳐진다.

도시의 외곽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순천인안초가 처한 현실은 막 태어난 어린 흑두루미와 흡사했다. 자연의 너른 품이 흑두루미를 건강하게 키웠듯이 순천만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작은 학교의 학생들도 튼튼하게 성장했다. 서로의 격려 속에서 도전하며 배우고, 마침내 창공을 날아 희망이 보이는 무지개 속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흑두루미 ‘두리1)’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 등 교육공동체 모두의 이름이다. 순천인안초는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흑두루미 학교]로서 전남 혁신학교의 철학을 공유하며 ‘행복한 삶을 꿈꾸는’ 터전이 되고 싶다. 흑두루미를 잘 자라게 할 ‘소통’과 ‘협력’을 바탕으로 생태감수성 가득한 [‘두리’들의 학교]를 꿈꾼다.

■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를 문 닫게 할 수는 없다!2011년 전교생 23명이었던 순천인안초등

학교는 폐교가 되는 듯 했다. 계속 줄어드는 학생 수로 급기야 4학급 복식이 되고 보니 학부모들 역시 그것이 낫다고 결정했다. 그해 새로 부임한 교사들은 가까운 거리에 정원 같은 순천만을 둔 아름다운 학교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다행스럽게 인근의 송산초가 작은 학교의

1) 순천만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 [고향으로]의 주인공 흑두루미. 실제로 부상·포획되어 8년여 우리에서 지내다 순천사람들의 노력으로 고향인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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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고, 순천지역의 여러 교사들이 새로운 학교에 대한 관심으로 모여 공부하고 있어 함께 방법을 고민할 수 있었다. ‘작은 학교로 오세요.’라는 소박한 현수막을 걸었더니 거짓말처럼 학교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교사들의 “보잘것없는 시설이지만 아이들과 눈 맞추며 순천만에서 배우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믿고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다음해 초에 45명,

6학급이 되었고 어느덧 104명의 근사한 학교로 성장했다. 교실이 없어서 비닐하우스를 지어 공부했지만 지금은 동화 같은 도서관과 멋진 체육관이 들어섰다. 오고 싶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입학추첨을 하고 전입 대기자를 두어야 하는 행복한 고민까지 하게 됐다. 시작은 오직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가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작은 바람에서였다.

■ 서로 힘을 모으면 두려울 게 없다무엇이 쇠락하던 학교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첫 번째는 단연 교사들의 열정과 자긍심이었다. 새로운 학교의 교육과정을 배우기 위해 연구회에서 공부를 하고, 교직원들과 수업방식, 학교 혁신에 대한 책도 나눠 읽었으며, 학교에 맞는 교육과정을 짜고 수업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

다. ‘작은학교 교육연대 전국워크숍’이나 ‘전국 참교육실천대회’에 참여해 다른 학교와 지역의 좋은 사례를 배우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가진 교사들의 집단 지성이 모이면 불가능할 것은 없어보였다. 물론,

모든 교사들은 잘 가르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학교가 이런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학교가 교사들에게 집단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다면 모든 학교가 교사의 열정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순천인안초는 교사들의 협의와 결정을 완벽하게 보장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학교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에 대한 구성원들의 다른 생각이었다. 그럴 때마다 교사들은 깨우친 한 두 사람의 빠른 발걸음보다 구성원 모두의 합의를 통한 더딘 전진을 선택해왔다. ‘아무리 좋은 내용과 방법일지라도 구성원들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당장 시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은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순천인안초의 자랑이다.

■ 순천만에 기댄 교육과정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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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판박이 교육과정은 작은 학교에 어울리지 않았다. 학교와 지역에 뿌리를 둔 특색 있는 교육과정이 필요했다. 천혜의 순천만을 둘러싼 사람과 자연이 교육과정에 들어와야 한다. 순천과 순천만을 상징하는 ‘생태’를 키워드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흑두루

미 프로젝트’다. 순천만에 날아드는 흑두루미가 편히 쉴 수 있는 논과 갯벌을 만들기 위해 유기농 농사를 짓고, 순천만의 생태를 체험으로 알아가는 장기 프로젝트(연간 50시간 이상)는 인안을 대표하는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그 속에는 농부, 생태해설가, 공무원 등 수많은 지역 사람들이 함께했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교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아이들의 감사 편지를 전달하고 다음해의 더 나은 프로젝트를 다짐했다. 모두가 순천만 지킴이를 키운다는 자부심은 가장 튼튼한 지역적 기반이 됐다.

■ 지역공동체가 함께 아이들을 살핀다폐교 직전의 학교에 필요한 것들을 지역

이 함께 고민했다. 학교는 순천만이 특화된 생태교육과정을 만들었고, 교육과정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순천시(순천만생태학습관)에 요청했다. 순천만습지 무료입장, 2층 버스 탑승 지원, 생태해설사 학년별 매칭, 유기농 논 대여, 논농사 도우미 등 생태학습에 필수적인 지원책을 순천시와 시

민단체(에코센타)가 흔쾌히 수용해 주었다. 아울러 전학생들의 주소 이전, 전입절차 간소화 등을 위해 동사무소와 동창회가 나섰고, 혁신학교 지정과 학구 조정은 교육청의 몫이 되었다. 모두의 지혜와 힘이 모아지자 학교는 놀랄 만큼 빠르게 달라졌다.

■ 수업에 전념하도록 지원하자2012년 혁신학교 지정과 함께 학교의 비전을 공유할 교장선생님을 초빙했

다. 교장선생님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교직원, 학생, 학부모와 소통하며 열린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어느 해 학예회에서 교장선생님은 싸이 복장으로 무대에 깜짝 출연해 3학년 아이들의 ‘강남스타일’을 멋지게 빛내주었다.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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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합리적인 의견을 짓누르지 않으며, 모든 교직원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애써 가르치려는 긴 훈화 대신 유쾌하게 아이들을 격려하고 짧게 핵심을 상기시킨다. 작은 학교가 놓치기 쉬운 핵심역량을 세우고 끊임없는 격려로 교직원의 자발성을 이끌어낸 것도 교장선생님의 역할이었다. 104명 규모에 맞는 학교의 하드웨어를 구축하고 동

창회, 지역사회 등과 인안교육을 공유하는데 열정적이다. 수업하는 교사가 아이들의 학습과 생활지도에 전념하도록 모든 시스템을 구성하고자 노력했다. 교감선생님은 교무행정팀장을 맡아 일체의 업무를 전담한다. 전남교육청의 ‘교원업무경감’을 뛰어넘는 전면적인 재구조화다. 학교의 주요 행사가 있으면 모든 직원은 선생님이 된다. 지리산 도전활동 때는 안전지킴이로, 벼 베기 때는 숙련된 조교로 인안교육에 한 축을 담당한다.

■ 순천만 지킴이 학교를 꿈꾼다아이들이 설계해 조성한 생태연못과 너른

훈련장을 갖춘 동물사육장은 아이들이 등교해 첫 번째로 들르는 곳이다. 연못 속 물고기를 살피고 간밤에 닭과 토끼, 기니피그가 무사했는지를 보고서야 교실로 들어간다. 순천만에 날아든 흑두루미의 개체수를 세는 ‘흑두루미 모니터단’이 2013년 출발했다. 지금은 어른들 틈에 끼어 개체수 세

는 방법을 익히는 단계지만 곧 아이들이 센 흑두루미 개체수가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순천만 자락에 위치한 순천인안초의 교육가족들은 학교가 단순히 23명의 학생을 104명으로 늘린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 지구의 정원이라 불리는 순천만을 오래도록 지켜가는 환경파수꾼들의 학교가 되기를 희망한다. 희망은 이제 시작이다. 혁신학교 지정과 함께 취약한 기반을 세우기 위한 초기의 예산과 행정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한 예산이 없어도 지속 가능한 교육과정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몇 년 전 대기업에서 환경교육을 후원하겠다고 제안한 거액의 보조금을 거절한 바 있다. 순천인안 교육과정 운영을 저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안의 자부심은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에서 나오지 않는다. 교실이 부족해도 비닐하우스에서 순천인안초의 가족들은 행복했다. 흑두루미 생태학교를 우리 힘으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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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가고 있다는 ‘주인의식’이 순천인안초의 힘이다. 도심의 대규모 학교에서 학습과 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이 인안 품에서 밝아졌다고 모두들 이야기한다. 학교와 선생님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순천만 생태학습을 통해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배운다.

■ 순천인안 공동체의 다짐 ‘두리의 약속’소통 : 긴 여정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리

들 간의 원활한 소통이 핵심이다. 맨 앞 우두머리부터 맨 끝에 따라오는 뒤쳐진 무리들까지 한 마리의 낙오도 없이 목표를 공유하며 끊임없이 소통할 때 기나긴 여정은 아름다운 비행이 된다.

도전 : 직면한 수많은 도전을 이겨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자연을 알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힘을 키워 내는 능력은 예부터 이어진 전통의 기반위에 가능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

집중 : 궁극의 목표를 위해 지원하며 집중해야 한다. 비행에 집중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의 마련, 모두가 존재 이유를 행복하게 찾는 집중이다.

어울림 : 몇몇이 아닌 전체 무리의 집단적 협력이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다. 칼바람과 혹한, 굶주림을 이길 가장 좋은 방법은 배려와 협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