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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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시 관광추진과 일본은 강대국의 위협속에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말기부터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나가사키는 이를 지탱해 왔습니다. 일본의 쇄국 시대에 외국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던 ‘데지마’가 있었던 나가사키는 외국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해왔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원점이 이곳에 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근대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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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시 관광추진과(우) 850-8685 나가사키시 사쿠라마치 2-22

TEL 095-829-1314

나가사키시 관광추진과

일본은 강대국의 위협속에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말기부터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나가사키는 이를 지탱해 왔습니다.일본의 쇄국 시대에 외국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던 ‘데지마’가 있었던 나가사키는 외국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해왔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원점이 이곳에 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의 근대화 유산

Page 2: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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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감을 느낀 각 번(藩)의 지사(志士)들은 난학서 (蘭學書:

네덜란드를 통해 들여온 유럽의 학술, 문화, 기술 등에 관한

서적)를 기반으로 서양 과학에 도전하였습니다. 가고시마

(鹿児島)나 하기(萩)에서는 산업화에 필수적인 철을 만들기

위한 반사로(反射爐)를 만드는 등, 각지에서 근대화를 향한

다양한 시행착오가 계속되었습니다. 1853년에 서양 함선의

내항(구로후네 내항) 이후, 에도 막부(중앙정부)는 해안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서양식 군함의 수입을 결정하고,

1855년에는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傳習所)를 설립하여 훗날 활약하게되는 많은 지사(志士)를

양성하였습니다.

1861년에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장 ‘나가사키 제철소’가

완공되었고, 수년 전에만 해도 사포로 나사산을 깎던

기술자들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나사 절삭기나 공작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로서

서양의 과학을 습득하여,

일본 중공업의 기반을

쌓았습니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한 소식은

일본에도 빠르게 전해져,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바다를 자유롭게 달리는 증기선과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는 대포를 가졌으며, 대국인 청나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일본은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편 전쟁 이후에 쓰인 청나라 학자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중국과 서양의 지도, 역사, 서양의 기술

등을 해설한 책)’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의 각 번(藩: 에도

시대 각 지역 영주였던 다이묘가 지배한 영지)에도 강한

위기감과 개혁의 움직임이 한층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에도 시대 말기에 활약한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가쓰 가이슈(勝海舟),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와 같은 지사(志士)

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시대를 기점으로 일본의

근대화가 급격히 가속화되었습니다.

생사 및 차의 수출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던 글로버는,

사쓰마번(薩摩藩)이 주문한 선박을 알선한 것을 계기로

죠슈번(長州藩) 등 서남 지역의 세력에 함선과 무기의 밀무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글로버와 번사(藩士) 사이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고, 글로버는 세계의 산업 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번사들을 자국인 영국으로 밀항시켰습니다.

1863년에는 죠슈의 번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엔도

긴스케(遠藤勤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로 구성된

5명(죠슈 파이브)을 요코하마에서 런던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1865년에는 사쓰마 번사인 고다이 도모아츠

(五代友厚),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모리 아리노리

(森有礼) 등 사쓰마 스튜던트라고 불리던 19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도항을 도왔습니다. 이들은 세계를 선도하는 영국의

산업을 직접 배우고, 그 뛰어난 기술을 손에 넣어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메이지(明治) 시대의 일본 근대화를

이끄는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난학서(蘭學書) 등 책에 힘을 빌려 산업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던 무사들에게 강력한 지원군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1859년의 개항과 동시에 나가사키에 온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역상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입니다.

글로버는 21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타고난 상인으로서의 재능

덕분에 23세의 나이에 글로버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현재 구

글로버 주택으로 구라바엔에 남아 있는 목조 서양식 주택은

그의 거주지로 1863년에

지어졌습니다. 선박의 왕래와 바로

앞에 건설된 나가사키 제철소를 볼

수 있는 이곳에는 많은 외국인이

방문하였고, 산업화를 지향하는

무사들에게도 최신기술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글로버 주택에 전시된 포대(砲臺)(1860년대, 나가사키 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일본은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서양의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받아들여, 약 5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놀라운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어냈습니다.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극동 함대 4척의 입항이었습니다.바람이 필요 없는 증기선을 본 무사들은 곧바로 제철, 제강, 조선, 석탄 산업과 같은 중공업의 근대화에 착수하였습니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 인재를 육성하고, 빠르게 외국의 최신기술을 도입하였던 나가사키는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그리고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산업을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무사들이 남긴 훌륭한 자산을 방문하여 격동의 시대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AR(증강현실)을 사용하는 방법Google Play 및 App Store에서 AR 앱

‘COCOAR’을 다운로드하여 실행한 다음  마크가

있는 사진을 불러옵니다. 이 마크가 있는 사진만 열람 가능합니다.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근대화의 원동력이 되다.

흔들리는 에도 말기. 그럼에도 꾸준히 진행되었던 서양 기술의 도입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傳習所) 옛터<죠슈 파이브>

뒷줄 왼쪽부터 엔도 긴스케(遠藤勤助),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앞 왼쪽부터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영국의 기술을 일본에 도입한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

젊은 날의 토마스 글로버 보드 인 앨범(나가사키 대학 부속 도서관 소장)

번사들의 런던행근대화를 가속시킨 인재육성*번사(藩士, 번에 소속된 무사)

일본은 왜 근대화가 필요했을까? 나가사키 제철소 풍경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Page 3: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조슈 파이브라 불리며 런던에서 유학한 인재들은 메이지

정부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산업 발전과

새로운 국가 만들기에 진력하였습니다. 이노우에 가오루

증기선의 보급으로 석탄 수요가 높아지자 글로버의 지휘하에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을 사용한 근대적 탄광인 ‘타카시마

탄갱’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뛰어난 기술은 나가사키의

하시마 탄갱(군함섬)과 구마모토의 미이케 탄광에도

전해지며, 근대적인 탄갱이 연이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철강산업에서는 1901년에 관영 야하타(八幡) 제철소에서

서양에 필적하는 규모의 고로가 가동을 시작하면서 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업에서는 1884년에 나가사키 제철소를 미쓰비시가

경영하게 되면서 나가사키 조선소로 개명하였습니다. 꾸준히

발전한 조선은 다양한 기계를 사용하는 종합 산업으로

그 기술은 탄광 기계나 농기구에도 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898년에 미쓰비시 합자회사(合資會社) 미쓰비시

조선소는 일본 최초로 5,000톤이 넘는 대형화객선(貨客船)

‘히타치마루’를 건조하였습니다. 이 선박은 보험의 대상이

되는 선박을 검사하는 영국 로이드 선급협회에 의해 처음으로

선급이 부여되었습니다.

3 4

1850 1855 1860 1865 1870 1875 1880 1890 1895 1900 1905 1910 191518851845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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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는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쓰마번(薩摩藩)의 무사들과

함께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을 세워 선박을 수리하는 시설을 만들었으며, 영국에서 직접

기계류를 수입하는 큰 투자도 했습니다. 또한, 사쓰마번이

목표로 하던 근대적인 방적 공장 건설에 영국에서 기술자를

초빙하는 등, 기술의 도입에도 관여하였습니다. 타카시마 탄갱

개발에서는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고용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를 동력으로 하는 권양기를 사용한 효율적인 대규모

채탄에 성공하였습니다. 즉 시행착오를 겪고 있던 상태에서

영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을 직접 도입시킨 글로버의

활약은 일본 근대화를 가속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井上馨)는 초대 외무대신에 취임하였으며, 야마오 요조

(山尾庸三)는 메이지 정부의 공부경(工部卿)에,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는 철도청 장관으로서 철도 사업을 발전시켰

습니다. 엔도 긴스케(遠藤謹助)는 글로버가 도움을 준

조폐국에 근무하며 조폐 국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일본을

지키고 새로운 일본의 건국에 이바지한 훌륭한 인재를 육성한

것은 글로버였습니다. 일본의 빠른 근대화는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처음 증기선이 건조된 지 불과 50년 만에 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 대국이 되었습니다.

하시마 (군칸지마)하시마 (군칸지마)

무사의 나라에서 산업 국가로기적적인 전환의 이정표

불과 반세기 만에 국가를 변혁시켜 산업국가로의 기초를 쌓은 것은 세계역사상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도 매우 드물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그 중요한 역사를 따라가 봅시다.

가에이(嘉永) 안세이(安政) 분큐(文久)만엔(万延)

겐지(元治)

게이오(慶応)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메이

지 시

대 일

본의

산업

혁명

유산

에도 시대 : 하기 성하마을(萩城下町)

구 집성관(반사로 옛터)세키요시 수로

하기 반사로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옛터

쇼카손주쿠(사설 학당)오이타야마 다타라제철 유적

니라야마 반사로하시노 철광산 및 용광로 옛터미에쓰 해군소 옛터데라야마 숯가마 옛터

구 글로버 주택

구 집성관(기계 공장)

구 집성관(구 가고시마 방적소 기사관)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타카시마 탄갱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규슈 및 야마구치와 관련 지역’에 해당하는 기간

구 미스미니시항하시마 탄갱

미이케 탄광 전용 철도선로 부설 옛터

미이케 탄광 미야노하라 갱구 목형장(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관영 야하타 제철소 구 본사무소

관영 야하타 제철소 구 단야(鍛冶) 공장관영 야하타 제철소 수선 공장

미이케 탄광 만다 갱센쇼카쿠(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제3 드라이독(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미이케 항구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온가가와 강 수원지 펌프실

일본

역사 미국 선박・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James Biddle)이 우라가(浦賀)에 입항하여 통상을 요구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에도(江戸)에 포술 양성소를 설립

서양 함선(구로후네)의 내항페리(M.C.Perry)가 우라가(浦賀)에 군함 5척과 함께 내항하여 국서를 전달

미일(美日) 친화 조약 체결시모다(下田), 하코다테(函館) 개항

나가사키에 해군 전습소를 설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대로(大老: 에도 시대 장군을 보좌했던 최고 직명)에 취임

미일(美日)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안세이 대옥(大獄)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참살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암살

사쓰에이(薩英: 사쓰마번과 영국) 전쟁 발발

가츠 가이슈(勝海舟),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등이 간린마루(咸臨丸)를 타고 미국으로 출항

제1차 조슈 정벌

대정봉환(大政奉還) 및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대호령(大号令)을 공표5개조의 서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도사(土佐) 상회를 설립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암살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

고료카쿠(五稜郭) 함락

판적봉환(版籍奉還)

폐도령(廃刀令: 대례복 착용자와 군인, 경관 외는 칼 차는 것을 금지)

대만 출병

태양력을 채용

내무경(内務卿)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암살

클라크(Clark)가 삿포로 농업학교 교장으로 취임

세이난(西南) 전쟁

우에노역 개업

로쿠메이칸(鹿鳴館) 개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1회 제국의회 소집

영일(英日) 통상항해조약 조인

청일(淸日) 전쟁 발발

아테네 올림픽 개최(제1회 하계 올림픽 대회)

영일(英日) 동맹 체결

러일(露日) 전쟁, 포츠머스 조약으로 강화

철도국유법 시행

세계

역사

아편 전쟁청나라가 영국에 패배남경조약 조인

프랑스 2월 혁명 발발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영국 런던에서 개최

크림 전쟁 발발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 지배 반항 운동 ‘인도 대반란’ 발발

미국 남북전쟁 발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독일 통일, 독일 제국 성립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

남미 태평양전쟁 발발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

프랑스와 베트남 조약 체결. 인도차이나 반도의 일부가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에 속하게 되어 식민지 지배가 시작

아테네 올림픽 개최(제1회 하계 올림픽 대회) 러시아 제국의 피의 일요일 사건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다이쇼 시대(1912년~1926년)

영국의 과학 기술과 외국인 기술자의 도입

런던 유학생들의 활약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상위 랭크에 오른 일본의 산업

글로버(倉場) 사진집 타카시마 탄갱~오쓰루 씨(글로버의 아내)(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일본에서 처음으로 로이드의 선급을 받은 히타치마루

관영 야하타 제철소 구 본사무소

Page 4: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메이지 유신 이후 산업 근대화에 따라

높아지는 철강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1901년에 만들어진 관영 야하타 제철소는

강철을 생산하는 일본 최초의 선강(銑鋼)

일관 제철소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10년에는 일본 강재(鋼材)

생산량의 90% 이상을 조달하는 등,

일본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하기(조슈)번(藩)은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직접 철제

대포를만들기 위한 반사로와, 군함을

만들기 위한 조선소 등 귀중한 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미이케 탄광에서는 채탄 기술의

근대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탄광 전용

철도와 미이케 항구를 건설하는 등,

사회 인프라 정비까지 하였습니다.

오시마 다카토(大島高任)는

대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선철을

제조하기 위해, 선철의 원료인

양질의 철광석을 채굴할 수

있었던 가마이시(釜石)에 고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모리오카번(盛岡藩)도

본격적으로 제철업을 시작하게

되어, 오시마 등의 지휘로 1858년

부터 고로 3기가 건설되었고,

이는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고로 옛터로

남아있습니다.

1853년의 페리 내항의 영향을 받아

바쿠후(幕府) 직영 반사로인 니라야마

반사로의 축조가 결정되었습니다.

반사로는 사가번(藩) 등의 기술을

지원받아 1857년에 완성하였으며,

실제로 가동하여 대포를 주조했습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높이

15.7m의 실용 반사로입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대포 주조와 조선을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을 부흥시켰습니다.

이것이 집성관 사업입니다. 대포

주조를 위한 반사로(反射炉)와

서양식 기계 공장 등 수많은

공장을 건설하였습니다.

서양식 해군의 창설과 정비를

추진하고 있었던 사가번(藩)은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무사들을

해군 전습생으로 참가시켜 1858년

에는 ‘오후나테 케이코쇼

(미에쓰 해군소의 전신)’를

설립하였습니다. 선박 수리를 위해

드라이 독 등의 시설을 만들었고,

18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용

증기선인 ‘료후마루(凌風丸)’를

건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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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알 수 있는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규슈 및 야마구치와 관련 지역-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을 증명하는 시설은 규슈 및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8개의 현(県)에 있으며, 나가사키시에는 하시마 탄갱과 구 글로버 주택 등 8개의 자산이 있습니다.

야하타 지역

●관영 야하타 제철소(구 본사무소, 수선 공장, 구 단야 공장)

●온가가와 강 수원지 펌프실

관영 야하타 제철소 구 본사무소(비공개)사진 제공 : 신닛테쓰스미킨㈜ 야하타 제철소

사가 지역●미에쓰 해군소 옛터

미에쓰 해군소 터※발굴 조사 후 다시 묻어, 지하에 보존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 지역 <8가지 자산>

구 글로버 주택 (P7)

고스게 수선장 옛터 (P9)

타카시마 탄갱 (P10)

하시마 탄갱 (P11)<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구 목형장 (P13)

제3 드라이독 (P14)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P14)

센쇼카쿠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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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7~16페이지를 참조

하기 지역●하기 반사로●에비스가하나 조선소 옛터●오이타야마 다타라제철 유적●하기 성하마을(萩城下町)●쇼카손주쿠(사설 학당)

하기 반사로하기 반사로하기 반사로하기 반사로

가고시마 지역●구 슈세칸●데라야마 숯가마 옛터●세키요시 수로

구 집성관 반사로 옛터

미이케 지역●미이케 탄광 및 미이케 항구●구 미스미니시 항구

미이케 탄광 만다(万田)갱

가마이시 지역●하시노 고로 옛터 및 관련 유적

하시노 고로 옛터

니라야마 지역●니라야마 반사로

니라야마 반사로

조선제철 및 제강석탄 산업

야마구치현

후쿠오카현

사가현

나가사키현

오이타현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

시즈오카현

이와테현

Page 5: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1859년, 중국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온 글로버는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베테랑 외국인 상인들과 경쟁하며 처음에는 주로

생사나 차의 수출에 관여하였지만, 일본의 정치적 혼란에

주목하여 무기나 선박 등을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나가사키는 새로운 일본을 꿈꾸는 사람들 열기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목조건축

‘구 글로버 주택’

글로버와 지사(志士)의 교류

조선과 채탄, 제차(製茶)  의 무역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글로버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랜 쇄국이

끝나고, 나가사키와 요코하마, 하코다테 항구가 개방되자,

나가사키에는 여러 나라의 기업가들이 오우라 주변에 주거를

마련하고, 무역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 상인 중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글로버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주거지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미나미야마테 3번지의 광대한 부지에 목조

서양식 주택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이곳을 거주 거점으로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메이지 시대 중순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이 갖추게 되었습니다. 오우라 천주당 등의 건축을

맡았던 고야마 히이데(小山秀)가 건축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구 글로버 주택은 1863년에 건설이 이루어진 것이 확인되어,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목조건축으로 본채와

부속 건물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글로버는 조선을 비롯한 탄광, 철도, 수산, 조폐, 맥주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일본의 철도가 개통되기 7년 전인 1865년에는 오우라

해안에서 증기기관차의 시범 주행을 하였고, 1868년에는

타카시마 탄갱을 개발하였고,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을

건설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타카시마 홋케이정갱은 영국의 최신 기계를 도입하여 일본

최초의 증기기관에 의한 채탄법을 도입한 근대적 탄갱으로,

사가번(佐賀藩)과 토마스 글로버가 공동 출자하여 채굴을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분야에서는 선박의 고장이 끊이지 않던 시대적 상황에

가득했으며, 외국인 기업가였던 글로버는 기업인의 역할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글로버는 바쿠후(幕府) 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이었던 사쓰마

(薩摩)와 조슈(長州), 도사(土佐)와 교류하며 외국 정보를

배우고자 하는 일본의 젊은 지사(志士)들의 외국 유학 및

도항을 지원하였습니다. 조슈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쓰마의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등 수많은 젊은이의

해외 유학을 지원하였으며,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와도 거래를 하며,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숨겨진 주역이라고도 불립니다.

착안하여, 사쓰마번(薩摩藩)과 함께 주판 독이라 불리던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을 세웠습니다. 또한,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는 권양기를 도입하고,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제차(製茶) 사업에서는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외국인

기업가 링거에게 인계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재무를 담당하는 대장성(大蔵省)

조폐국의 기계 수입에 관여하는 등 메이지 정부와도 교류가

글로버는 미쓰비시의 창시자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郎)가 1881년에 타카시마 탄광을 매수한 뒤에도 소장으로서 탄광 경영에 참가하였습니다. 또한, 1885년 이후에는 미쓰비시 재벌의 고문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와사키에게 경영 위기에 빠진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맥주 양조 및 판매 회사)의 재건 계획에 참가할 것을 권해 기린 맥주(현재의 기린 홀딩스)의 기초를 쌓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1908년에 그의 공적을 기려 외국인에게는 처음으로 훈장(勲二等旭日重光章)을 수여하였습니다. 1911년에 도쿄의 자택에서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글로버는 가족과 함께 사카모토 국제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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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구 글로버 주택

※구 글로버 주택 내부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있었지만, 무기가 팔리지 않고, 자금 회수가 지체되면서

글로버 상사는 1870년에 파산하였습니다. 하지만 글로버는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며 미쓰비시의 경영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하였습니다.

구 글로버 주택은 전쟁 중 소유가 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

나가사키 조선소로 옮겨졌지만, 1957년에 조선소 창업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가사키시에 기증되었습니다. 현재는

나가사키시의 관광 시설 ‘구라바엔’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삶을 마감한 영국인 글로버■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의 글로버

글로버 저택의 온실 사진. 저택의 애칭인 ‘IPPONMATSU’의 유래가 된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위엄 있는 자태의 이 소나무는 병들어 1905년에 없어졌다.

글로버 저택 앞뜰에서 찍은글로버와 그 가족들. (1902년경)

나가사키시 미나미야마테마치 산쥬마쓰 및 잇폰마쓰(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글로버(倉場) 가족 사진2(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글로버의 묘는 나가사키시의 사카모토 국제 묘지에 있으며, 아내 쓰루와 아들 구라바 도미사부로(倉場富三郎) 부부와 함께 잠들어 있다.

훈장(勲二等旭日重光章)을 단 글로버토마스 글로버의 사진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정보> ◎나가사키시 미나미야마테마치 8-1 ☎095-822-8223(구라바엔) ◎입장료 : 어른 610엔, 고등학생 300엔, 초·중학생 180엔<오시는 길>1. JR 나가사키역에서 ‘쇼카쿠지시타(1계통)’ 행 노면전차에 승차 2. ‘쓰키마치덴테이’에 하차한 뒤, ‘이시바시덴테이(5계통)’ 행 전차로 환승 3. ‘오우라 텐슈도시타 덴테이’ 또는 ‘이시바시덴테이’에 하차 후 도보(약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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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선업의 원점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소로반(주판) 독’

에도 시대 말기, 나가사키의 외국계 상사를 통해 매입한 서양

선박은 대부분이 중고 선박으로, 고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나가사키에는 선박의 수리나 정비가 가능한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선주와 선원들은 선박의

수리하는 시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사쓰마의 번사(무사)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와

고마쓰 다테와키(小松帯刀)등과 함께 1866년에 고스게에

수선장(修船場) 건설 계획을 세웠습니다. 건설지였던

고스게우라는 현재의 나가사키 항구의 입구 근처로, 좁은

후미가 육지로 파고든 형태의 지형으로 배를 끌어오거나

견인하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에 영국으로부터

기술자를 초빙하여, 육상에서 바다까지 174m의 레일을 깔고,

선가(船架)를 이용하여 배를 견인하는 ‘슬립 독’ 시설을 갖춘

수선장이 건설되었습니다.

1869년에 완성된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은 서양식 근대

독으로, 권양기 건물은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입니다. 만조 시에 배를 미끄럼대에 올리면 건물 내에

설치된 권양기와 보일러형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견인하여 배

밑바닥을 수리 및 정비하였습니다. 수리가 끝나면 배를 끌어

올릴 때와는 반대로 미끄럼을 태우듯 바다에 내보내는 형태의

시설이었습니다.

고스게의 독이나 권양기 건물은 일본의 근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일 뿐만 아니라,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공장 건축 유적으로서 일본 근대 산업 여명기를

대표하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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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석탄 산업의 기반을 쌓은

타카시마 탄갱

타카시마 탄광과 홋케이정갱 옛터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도입된 곳으로, 현재도 수직 갱도를

비롯하여 주변에 증기 기관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이

양호하게 남아 있는, 근대적 탄광 기술 초기의 모습을 전하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나가사키 반도의 서쪽 해안에 있는 타카시마에서는 18세기

무렵부터 채탄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이 개항한 이후

나가사키는 석탄 운반이나 서양 선박의 석탄 보급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외국 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높아지자

사가번(佐賀藩)과 글로버 상회는 1868년에 타카시마 탄갱

개발의 공동 경영을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초빙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에 의한 수직 갱도를 만들었습

니다. 1869년에는 깊이 43m에서 채탄하게 되었고, 이곳을

홋케이정갱(北渓井坑)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홋케이정갱은

갱 외부에 증기기관을 설치해 권양기로 석탄 상자를 올리고

내려, 석탄을 지상으로 운반하였습니다. 또한, 증기 펌프를

설치하여 배수하였고, 풍차를 갱 외부에 설치하여 환기 장치로

사용하였습니다.

서양의 최신 기술과 기계를 도입하고, 일본에서 최초로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해저 탄전에서 채굴하는 근대적 탄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타카시마 탄갱은 한때 하루에 300톤의 석탄 생산량을 기록할

정도로 번성했으나, 1876년에 해수의 침수로 인해 폐쇄되었습

니다. 하지만 타카시마 탄갱의 혁신적인 석탄 생산 기술은 그

후에 지쿠호 탄광과 미이케 탄광으로 전해져, 일본의 탄갱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조업 중인 홋케이정갱 (나가사키시 타카시마 석탄 자료관)

현재 타카시마에는 당시의 수직 갱도의 입구가 몇 개 남아

있으며, 그중 홋케이정갱 옛터는 2014년에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섬 안에는 탄갱을 개발한

글로버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타카시마의 전성기는 1950년대 무렵으로, 기록에 따르면 1968년에는 타카시마의 인구가 18,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인구가 약 1,000명 정도인 마을입니다만, ‘타카시마 도비시마 이소즈리(갯바위 낚시)공원’과 해수 온천 시설인 ‘이야시노유’, 타카시마 해수욕장 등 풍부한 자연을 활용한 관광에 주력하여, 1998년에는 연간 4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였습니다.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건축인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에 사용된 벽돌은 두께가 얇고, ‘곤약 벽돌’이라고도 불립니다. 당시의 기술로는 소성 온도를 높일 수 없어 얇고 편평한 크기밖에 만들 수 없었다는 등 이 벽돌을 사용하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주)

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외국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서

글로버와 사쓰마 번사가 만든 수선장

고스게 수선장에서 수리 중인 도카이마루(東海丸)1877년 (미쓰비시 중공업(주) 나가사키 조선소 소장)

‘곤약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

<정보>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고스게마치 5  ☎095-828-4601(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총무 그룹) ◎입장료 : 없음 ◎주차장 : 없음<오시는 길> 1. JR 나가사키역에서 나가사키 버스 ‘노모 반도 방면(도마치 경유)’에 승차(15분) 2. 고스게마치 버스정류장 하차 후 도보 5분

타카시마 탄갱(타카시마 홋케이정갱)

일본 최초의 증기기관을 사용한 근대 탄갱

탄광 마을에서 관광 마을로 바뀌고 있는 타카시마

타카시마 해수욕장

조업 중인 홋케이정갱 (나가사키시 타카시마 석탄 자료관)

<정보>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타카시마마치 99-1 ☎095-896-3110(나가사키시 타카시마 행정 센터) ◎입장료 : 없음<오시는 길> ◎타카시마항 터미널에서 도보 25분◎버스: 타카시마항 터미널 버스 정류장에서 승차하여 혼마치 버스정류장 하차 후 도보 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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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는 나가사키항구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해상에 있는 면적 6.5ha 정도의 작은 섬입니다. 탄갱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인 에도시대 말기까지는 ‘이소호리’라 부르며

노출된 석탄을 채굴하였고, 당시에는 소규모로 이루어져

어민들의 부업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석탄 채굴은 1875년에 갱의 주인이었던 후카호리

일가가 아마쿠사의 고야마 히이데(小山秀)에게 하청하면서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집합주택이

남아 있는 역사적 주거 터

하시마 탄갱은 미쓰비시 기업이 본격적인 근대 탄갱으로

개발을 추진한 해저 탄광입니다.

높은 호안으로 둘러싸여 있고 굴뚝으로 연기를 내뿜는 외관이

군함 ‘도사’를 닮아서 ‘군칸지마(군함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독특한

외관과 분위기는 일본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유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어, 영화 촬영지로

활용되거나 군함섬 관광

크루즈가 운영되는 등 관광

부분에서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시마 탄갱은 탄갱 개발과 더불어 증가하는 직원들을 위한

주택 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져, 1916년에는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습니다. 전성기에는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는 당시의 도쿄도와

비교하면 9배나 높은 인구밀도였습니다.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1890년에 이르러서는 타카시마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가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시마(군함섬)는 본격적인 근대 탄갱으로서

개발을 추진하였고, 제2 수직 갱도와 제3 수직 갱도를 완성한

1897년에는 하시마 탄갱의 생산량이 타카시마 탄갱을 웃돌

만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시마는 해저에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지하 깊숙이 거대하고

복잡한 갱도를 만들어, 채굴 작업은 지하 약 1,000m에

이르렀습니다.

채굴된 석탄은 품질이 뛰어나 주로 야하타 제철소에 제철용

원료탄으로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회사의

선박인 ‘유가오마루(夕顔丸)’가 취항하였고, 증류수기 설치에

따른 식수 공급을 개시하고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섬 내의

거주 환경이 정비되었습니다. 또한, 탄광의 발전과 더불어 섬

주위를 단계적으로 매립하였습니다.

하시마는 원래 남북 약 320m, 동서 약 120m의 작은

육지였지만, 6회의 매립 공사로 1931년에는 남북 480m,

동서 160m의 면적으로 약 3배 넓어졌습니다.

섬의 반 이상은 탄광이 차지하고 그 나머지 토지에 사원

기숙사와 학교, 병원 등을 세웠기 때문에 건물의 간격이 매우

좁아 섬 주민 모두가 가족처럼 살았습니다. 초중학교나 병원,

상점 등이 섬 안에 있어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파칭코 홀 등의 오락시설도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석탄 섬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시마는 50년대

후반부터 에너지 혁명의 영향으로 석탄의 수요가 줄게 되면서

1974년 폐광되었고, 같은 해 4월에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하시마는 양질의 제철용 원료탄을 산출한 해저 탄광 섬으로

일본의 근대 공업을 지탱해 온 탄갱이었습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섬 내에 견학 통로 및 견학 장소를

정비한 하시마는, 2009년 4월부터 일반인이 상륙하여 섬

내의 일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2014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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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2

군함섬의 유래가 된 전함 ‘도사(土佐)’는 1921년에 건조되었으나 다음 해에 이루어진 워싱턴 군축조약에 의해 폐함 처분되었습니다. 스모와 해군을 좋아했던 나가사키의 유명한 기생 ‘아게하치(愛八)’는 도사의 처분을 크게 슬퍼하며, 처분을 위해 출항하기 전에 열린 해군과의 저녁연회에서 도사를 불쌍히 여기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선보였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나가사키 출신의 극작가 나가미 도쿠타로(永見徳太郎)가 1934년 3월호의 ‘문화 공론’에 ‘군축 비화 전함 도사의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면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하시마 탄갱(군함섬)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일본 근대화 유적의 상징으로

인기 있는 ‘군함섬(군칸지마)’

군함섬 상륙 투어의 모습

※군함섬에 상륙하였을 때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양질의 석탄을 생산하여

시대의 선두에 선 근대화 탄갱

연기를 내뿜는 하시마 1901년[출처: 하시마(군함섬) 타카시마쵸 교육위원회]

석탄 저장소에 저장한 정탄을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해 석탄 운반선에 싣고 있는 모습. 하시마는 1974년에 폐광이 될 때까지 일본의 에너지 수요를 지탱해 온 탄갱이었습니다.

(나가사키유학4) 나가사키 문헌사 발간

군함 ‘도사(土佐)’와 나가사키의 기녀 ‘아게하치(愛八)’의 이야기

소설 ‘나가사키 부라부라부시’의 주인공 아게하치(나가사키유학10) 나가사키 문헌사 발간

‘문화 공론’ 1934년 3월호(나가사키유학10) 나가사키 문헌사 발간 전함 ‘도사’

<오시는 길> 군함섬 상륙 투어의 코스, 운항 일정, 요금, 예약 및 문의처는 각 선박 회사에 따라 다릅니다. 18페이지를 참조하시고 문의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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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번(土佐藩)의 가난한 낭인(도사번의 신분 중 하나)

집안의 장남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오너가 된

이와사키 야타로.

그는 21세 때 학업으로 출세하고자 에도(江戸)에서

유학했지만, 부친이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에 귀향하였습니다.

부친을 폭행한 사람이 촌장이라는 것을 알고 항소하였지만,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 다른 죄수로부터

주판이나 장사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경영자가 되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1867년에 도사번의 상회의 중직에 발탁되었고, 그 후 폐쇄

예정이었던 도사번의 가이세이칸(開成館)을 이어받아, 쓰쿠모

상회라는 이름으로 1869년부터 해운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이와사키 야타로가 경영하는 개인 기업이

되면서 쓰쿠모 상회라는 이름에서 미쓰비시 상회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해운업에 종사하던 이와사키 야타로는 조선업에 많은 투자를

하여 서양의 신기술을 빠르게 도입하였습니다. 신기술을

활용하여 선박 건조뿐만 아니라 선박의 중요 부품과 발전소

원동기가 되는 왕복 증기 기관, 증기 원동기, 보일러 등 다양한

대형 기계도 제조하였습니다.

목형장이란 녹인 쇠붙이를 넣어서 물건을 만드는 틀을 만들기

위해 사전에 나무로 모형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곳입니다. ‘구

목형장’은 1898년에 주물 공장에 병설된 목형장으로 건설된

곳으로, 나가사키 조선소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이곳에서는 서양의 기술과 일본의 전통 목공 기술을 융합하여

제품을 생산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지붕을 지탱하는 트러스의 구조가 2층 벽돌 건물로

매우 특징적이며, 1890년대에 건조된 현존하는 목형장으로는

일본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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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드라이독은 뒤쪽의 벼랑을 깎아 바다를 메우는 등 5년에

걸친 어려운 공사 끝에 완성된 것입니다. 미쓰비시 합자회사

미쓰비시 조선소였던 1905년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독이었습

니다.

일본의 산업 형성기에 나가사키 조선소는 바쿠후(幕府)에서

메이지 정부, 미쓰비시로 주인이 바뀌면서 뒤의 벼랑을 깎아

전면의 바다를 메워 공장을 확장하였습니다. 조선소의 주요

설비인 드라이독은 제1 드라이독을 1879년, 제2 드라이독을

1896년, 제3 드라이독을 1905년에 준공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선박의 수리나 건조에 사용되었지만, 1963년에 제1

드라이독을, 1972년에 제2 드라이독을 폐기하였고, 메이지

‘구 목형장’은 근대화에 공헌한 나가사키 조선소의 업적을 남기고자 1985년에 사료관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사료관에는 나가사키 조선소가 되기 전인 나가사키 용철소가 건설되기 시작한 185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약 900점의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공작 기계와 해저 조사용 다이빙 벨, 일본 최초의 국산 증기 원동기 기술의 진보를 말해주는 물건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6,7,8

6시대에 만든 선거 중에서 현재도 가동되고 있는 것은 제3

드라이독뿐입니다.

선거를 만들 때 설치된 영국 지멘스사의 전동기로 구동하는

배수펌프는 100년 후인 지금도 가동 중이며, 드라이독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항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은 150톤의 리프트 능력을 갖춘 전동 모터로 구동하는

것으로, 일본에 최초로 설치된 해머헤드형 전동 크레인입니다.

이 크레인은 영국

애플비사가 제조한

것으로, 1909년에

영국 마더웰사가

나가사키 조선소

아쿠노우라 안벽에

설치하였습니다.

해체되어 이곳으로

운반된 크레인은

마더웰사가 파견한 영국인 기술자 가드너 로저의 감독하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는 크레인 설치 공사의 감독과 기술 지도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무렵 동양 최대의 민간 조선소였던 나가사키 조선소는,

1908년에 세계 최고 클래스의 호화 여객선 ‘덴요마루(天洋丸)’

를 건조하고, 국산 제1호 육상용 및 선박용 원동기도 완성했습

니다.

공습이나 원폭의 피해를 받지 않은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은

1961년에 기계공장 확장으로 크레인 주변을 매립하면서

미즈노우라 안벽으로 이전되었습니다. 현재도 대형 제품을

출하할 때나 기계공장에서 제조한 증기 원동기와 대형 선박용

프로펠러의 선적용 등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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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쇼카쿠는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가사키 조선소 내 본관

사옥의 바다 쪽에 있으며, 제3 드라이독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중턱에 있는 목조 서양식 건물입니다. 1903년에 나가사키

조선소 소장이었던 쇼다 헤이고로(荘田平五郎)의 저택용으로

지어졌으며, 190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다음 해에 이곳에

머물게 된 군함 치요다(千代田)의 함장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東伏見宮依仁) 친왕이 ‘풍광이 경승을 이루고 있다’

는 뜻으로 센쇼카쿠라 명명하였습니다. 설계자 소네 다쓰조

(曾禰達蔵)는 고부(工部)대학(현 도쿄 대학 건축학과)에서

영국인 건축가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er)의 가르침을

받은 제1기생으로, 서양 근대 건축을 배운 일본 건축계의

선구적인 존재입니다. 조시아 콘도르는 당시 토마스

글로버와의 인연으로 미쓰비시 고문으로서 설계를 지도하던 중

8조선소 소장이었던 쇼다 헤이고로의 의뢰를 받자 미쓰비시에

소네 다쓰조를 소개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1890년에 미쓰

비시에 입사한 소네 다쓰조는 미쓰비시 마루노우치 건축소에

소속되어 센쇼카쿠의 인테리어 및 디자인 전반을 맡았습니다.

센쇼카쿠는 2층으로 구성된 서양식 목조 건물로(지하는 벽돌

건물) 2층에는 침실과 홀 등이 있으며, 1층에는 식당과 서재,

응접실이, 지하에는 주방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정원의 잔디

광장과 수목은 미쓰비시가 창건 당시의 상태를 유지 및 보존

하기 위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구 목형장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사료관 내부의 일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미쓰비시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郎)

나가사키 조선소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구 목형장(木型場)’

옆에 있는 주물 공장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한 레일도 남아 있다

사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목형장’

<정보>견학하시려면 사전에 예약이 필요합니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아쿠노우라마치 1-1 ☎095-828-4134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가사키 조선소 사료관)    ◎입장료 : 어른(고등학생 이상) 800엔, 초・중학생 400엔<오시는 길> ◎개인: JR 나가사키역에서 자료관전용 셔틀버스를 이용(버스는 평일에 5편, 휴일은 6편 운영합니다.) ◎단체: 자료관에 문의하여 주십시오.

나가사키의 산업혁명 유산 비공개 산업혁명 유산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관련 시설

제3 드라이독1905년에 준공한 동양 최대의 독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일본의 조선 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든, 당시의 귀중한 자산

센쇼카쿠(占勝閣)일본인이 설계한 서양식 근대 건축물

미쓰비시 중공업(주)

미쓰비시 중공업(주)

미쓰비시 중공업(주)

미쓰비시 중공업(주)

미쓰비시 중공업(주)

(나가사키유학8) 나가사키 문헌사 발간(나가사키유학8) 나가사키 문헌사 발간

Page 9: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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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후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 기대되는 가운데, 출항

전부터 볼 수 있는 산업 유산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미쓰비시

나가카시 조선소에 있는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입니다.

이 크레인은 투어 선박의 출항지와 나가사키 미즈베노모리공원

등 항만 지역의 정면에 보이며, 나가사키가 자랑하는 유산 중

하나로, 완공 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가동되고 있습니다.

해발 65m 의 메가미오하시 대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새하얀 ‘가미노시마

성당’과 마리아상이, 이오지마에서는

‘성 미카엘 성당’이 보이며, 그곳에는

지금도 나가사키 사람들의 기도가 이어

져 오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보이는 교

회군은 모두 바닷가 절벽에 서서 아름

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이오지마에서 오른쪽을 보면 나가사키

조선소의 고야기(香焼) 공장이 보입니다.

시기에 따라서는 건조 중인 유조선이나

호화 여객선도 볼 수 있어, 나가사키의 기간산업이 조선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오지마 옆에 있는 타카시마에는

글로버가 영국에서 도입한 최신식

증기 기관으로 채탄한 탄갱 옛터가

남아있습니다.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타카시마 석탄자료관’도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출항하자마자 바로 왼쪽 언덕에 보이는 것은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상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가 세운 서양식 주택

‘구 글로버 주택’입니다. 녹색의 수풀 사이로 보이는 세련된

서양식 주택의 모습은 매우 이국적입니다. 구 글로버 주택이

있는 구라바엔과 바다를 사이에 둔 반대쪽에는 미쓰비시 중공

(주)나가사키 조선소 공장이 있습니다. 집을 지은 1863년에

는 미쓰비시가 세워지기 전으로 나가사키 제철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글로버는 메이지 시대에 미쓰비시의 고문으로도

활약했었고,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도 영국에서 도입된 것

입니다. 이렇듯 나가사키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글로버는 빼놓

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좀 더 가면 왼쪽에 배를 수리하는 공장인 ‘고스게 수선장

(小菅修船場) 옛터’가 보입니다. 이곳도 글로버가 사쓰마번

(藩)과 함께 만든 회사에서 세운 공장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깊은 후미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슬립 독은 지금도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하늘색의 건물은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로, 그 아담한 모습도

매력적입니다. 주위에는 지금도 조선 회사가 줄지어 있고,

공장지대 위 산기슭에는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처럼

경사지가 많은 나가사키 특유의 지형이나 풍경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타카시마를 지나면

드디어 군함섬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약

40분이라는 크루즈

위에서의 짧은 시간에

100년 전의 유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산업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군함섬에 가면 메이지(明治) 시대에 만들어진 호안과 다이쇼

(大正) 시대에 지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등, 쇼와

(昭和) 시대로 이어지는 나가사키 탄갱의 역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군함섬에서 채탄 된 석탄을 기반으로 제철과 조선

산업이 발전되었으며, 그 과정이 나가사키를 둘러싼 해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나가사키의 역사. 그리고 나가사키로

부터 발전한 일본의 산업화. 바다에서 보았던 산업유산이

자연스럽게 나가사키의 풍경에 녹아든 모습에서 이러한

역사와 유산이 얼마나 친근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메가미오하시 대교

제3 드라이독

(비공개) (비공개) (비공개)

센쇼카쿠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이나사야마 산

바다에서 바라본 나가사키의 “Industrial Heritage”

산업 유산을 보면서군함섬으로 가자바다를 메우고 육지를 넓히며 나가사키가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습니다.

17세기에는 데지마가 완성되면서 네덜란드와의 무역이 시작되었고, 에도시대 말기부터 문호가 개방되자 미국과 영국 등 서양인들이 나가사키에 오게 되었습니다 .

메이지 시대에는 바닷가에 서양식 주택들이 들어섰으며, 산업화를 목표로 공장지대가 완성되었습니다.

투어 선박을 타고 바다에서 시작된 항구 도시 나가사키의 중층적인 역사를 바라보며, 산업유산 중 하나인 ‘하시마(군함섬)’로 가봅시다.

글로버의 다양한 위업을

엿볼 수 있는 해안가!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선상에서 본 구 글로버 주택

선상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센쇼카쿠

메가미오하시 대교를 지나

이오지마와 타카시마로

탄광으로 번영한 섬

‘하시마(군함섬)’이 보인다!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가미노시마 성당

배에서 바라본 타카시마

멀리 떨어진 나가사키 항구

조용히 떠 있는 군함섬

메가미오하시 대교

구 글로버 주택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Page 10: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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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雄JCT波佐見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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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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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나가사키역에서 ‘쇼카쿠지시타(1계통)’ 방향으로 가는 노면전차에 승차하여, ‘쓰키마치’ 정류장에서 하차한 뒤, ‘이시바시(5계통)’방향 전차로 환승하십시오. ‘오우라 텐슈도시타’ 또는 ‘이시바시’에서 하차하여, 도보(약 8분).JR 나가사키역에서 나가사키 버스 ‘노모 반도 방면(도마치 경유)’을 타고(소요시간 약15분) 고스게마치 버스정류장 하차 후 도보 5분타카시마항 터미널에서 도보 25분<버스>타카시마항 터미널 버스 정류장에서 승차하여 혼마치 버스정류장 하차 후 도보 1분

개인: JR 나가사키역에서 자료관전용 셔틀버스를 이용   (버스는 평일에 5편, 휴일은 6편 운영합니다.)단체: 자료관에 문의하여 주십시오. 문의: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가사키 조선소 자료관 Tel. 090-828-4134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1600년에 네덜란드의 선박 De Liefde호가 오이타(大分)현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항해사는 윌리엄 애덤스로 후에 미우라 안진(三浦按針)). 네덜란드는 이후 1609년에 바쿠후(幕府)로부터 무역 허가를 받아 히라도(平戸)에 상관을 개설하였고, 1641년에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겨졌습니다. 그 후 데지마는 일본이 개국한 1859년까지 218년간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거듭되는 항만 공사로 인하여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데지마는, 현재 나가사키시에 의해 복원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2000년에는 ‘헤틀 주택’과 ‘취사실 건물’, ‘제1번선 선장 건물’, ‘제1 창고’, ‘제2 창고’를 비롯한 건물 5동의 복원이 완성되었습니다. 2006년 봄에는 수문과 카피탄 주택, 제3 창고, 배례필자 네덜란드인 주택까지 5동의 공사가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6년도에는 건물 6동의 복원을 완료할 예정입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 에도 시대 말기의 지사(志士)들에 의해 결성된 일본 최초의 무역 상사인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기 있었던 곳에 세워진 기념관. 당시의 모습에 가까운 형태로 복원된 건물 안에는 료마나 가메야마샤추와 관련된 인물에 관한 자료와 에도 시대 말기의 나가사키에 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으며, 료마가 활약하였던 나가사키가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한 역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볼트는 독일 출신의 의사 겸 박물학자로, 1823년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로 일본에 왔습니다. 지볼트는 부교쇼(나가사키를 통치하는 관공서)로부터 허가를 받아 학습소 겸 진료소인 나루타키주쿠(鳴滝塾)를 열어, 일본인에게 서양 근대 의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의 자연과 문화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종합적으로 조사하여 유럽에 소개하고, 일본에 서양 근대 의학을 전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지볼트. 기념관에서는 이러한 지볼트의 성장 과정과 일본에서의 활동 및 공적, 그 자손, 현창(顯彰) 활동 등에 관하여 전시 및 소개하고 있습니다.

‘해외 교류 역사’를 테마로 한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에는 48,000점의 귀중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있습니다. 또한, ‘나가사키 부교쇼 다테야마야쿠쇼(나가사키를 통치하는 관공서)’의 일부도 복원 정비되어있습니다.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에서는 재미있고,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 등 나가사키와 서양의 관계부터 무역 등, 폭넓은 내용을 견학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고딕 양식의 성당입니다. 일본이 문호개방을 시작하자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고, 1864년에는 오우라 천주당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865년 3월에는 스기모토 유리(杉本ユリ) 등 약 15명의 잠복 신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을 방문하여 신부에게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였고, 이 사건은 신도발견이라 불리며 전세계에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nagasakikanko

산업 유산과함께 추천하는 나가사키의 관광 명소

데지마나가사키가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외국과의 교류 창구였던 데지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가사키 데지마 지도(나가사키 대학 소장)

당란관(唐蘭館) 그림첩(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현재 복원 중인 데지마

나가사키시 가메야마샤추 기념관

초상 사진(사카모토 료마)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나가사키시 이라바야시 2-7-24 ☎095-823-3400 ■입장료 : 일반 300엔, 고등학생 200엔, 초・중학생 150엔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나가사키시 다테야마 1-1-1  ☎095-818-8366■상설전 입장료 :  일반 600엔, 초중고생 300엔

■나가사키시 데지마마치 6-1 ☎095-821-7200■입장료 : 어른 510엔, 고등학생 200엔, 초・중학생 100엔

지볼트(Siebold) 기념관

■나가사키시 나루타키마치 2-7-40 ☎095-823-0707 ■입장료 : 일반 100엔, 초・중학생 50엔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시 미나미야마테 5-3 ☎095-823-2628■입장료 :  어른 300엔, 중고생 250엔, 초등학생 200엔

산업 유산 후보로 오시는 길산업 유산 후보 유적으로 오시는 길 ※⑥제3 드라이독 ⑦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⑧센쇼카쿠는 비공개

①구 글로버 주택

② 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③타카시마 탄광

④하시마 탄광 (군함섬)

하시마 탄광에 가실 때에는 군함섬 상륙 투어를 이용하여 주십시오. 자세한 것은 아래로 문의해 주십시오.●야마사 해운(주) ◎http://www.gunkan-jima.net/ ◎Tel. 095-822-5002●군칸지마 크루즈 ◎http://www.gunkanjima-cruise.jp/ ◎Tel. 095-827-2470●군칸지마 컨시어지 ◎http://www.gunkanjima-concierge.com/ ◎Tel. 095-895-9300●(주)시만 상회 ◎http://www.gunkanjima-tour.jp/ ◎Tel. 095-818-1105●바바 히로노리 ◎http://gunkanjima65.yu-yake.com/ ◎Tel. 090-8225-8107

⑤구 목형장 ※사전 예약제

노면전차 경로 나가사키 료마노미치

화장실(휠체어 전용 없음)화장실(휠체어 전용 및 오스토메이트 있음)

화장실(휠체어 전용 있음)

※화장실 표시 협력 ‘나가사키 우먼즈 워크 랠리’ 실행위원회

공공교통기관 환승 주차장

파크 앤드 라이드 주차장평화 공원 주변에 주차한 뒤, 나가사키시 중심부까지는 버스나 전차 등의 교통기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주차장입니다.교통 체증을 신경 쓰지 않고 관광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승용차는 1회 610엔(2시간 이내일 경우, 주차시간에 따라 요금부과) 시영 평화공원 주차장(7:00~20:00) 나가사키시 오카마치 8-13 ☎ 095-848-2210 현영 야구장 주차장(7:30~22:00)※주소 및 연락처는 마쓰야마마치 주차장과 같음

시영 마쓰야마마치 주차장(7:30~22:00) 나가사키시 마쓰야마마치 2-3 ☎ 095-842-1444

나가사키의 최신 관광 정보를 발신 중!!

나가사키시 관광 정보

하우스텐보스

오시마

가와타나

사이카이

우레시노

히가시소노기

오무라

이사하야

나가사키 스스키즈카나가사키

나가사키역

이오지마

③타카시마 탄광

④하시마 탄광(군함섬)

노면전차 노선도

나가사키의 노면전차는 균일요금으로 어른 1명당 120엔입니다.

노면전차의 1일 승차권은 종합관광안내소(JR 나가사키역 구내)와 시내 주요 숙박 시설 등에서 판매합니다.※전차 내에서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문의]

나가사키 전기궤도(주)☎095-845-4111

운임 : 어른 120엔, 어린이 60엔(전 구간 균일요금)

●1일 승차권 : 어른 500엔, 어린이 250엔계통 색 구분 구간(경유)

아카사코-(오하토)-쇼카쿠지시타

아카사코-(사쿠라마치)-호타루자야

쇼카쿠지시타-(니시하마노마치)-호타루자야

이시바시-(니시하마노마치)-호타루자야

※쓰키마치에서 갈아탈 경우, 환승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카사코 방향으로 가는 전차만 쇼와마치도리에 정차합니다.

모바일 판 HPhttp://www.naga-den.com/navinet/

오우라 국제묘지

(구) 0나가사키 영국영사관

①구 글로버 주택②고스게 수선장(小菅修船場) 옛터

⑤구 목형장⑥제3 드라이독

⑦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⑧센쇼카쿠(占勝閣)

Page 11: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시 관광추진과(우) 850-8685 나가사키시 사쿠라마치 2-22

TEL 095-829-1314

나가사키시 관광추진과

일본은 강대국의 위협속에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에도 시대(1603년~1868년) 말기부터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나가사키는 이를 지탱해 왔습니다.일본의 쇄국 시대에 외국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던 ‘데지마’가 있었던 나가사키는 외국의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서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해왔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원점이 이곳에 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도(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 소장)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일본의 산업혁명과

나가사키의 근대화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