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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사회(법사회학) Max Weber, Wirtschaft und Recht (Rechtssoziologie, 1956) 저자 (Authors) 막스 베버, 최식 막스 베버, Choi, Sik 출처 (Source) 동아법학 , (71), 2016.5, 173-398 (226 pages) DONG-A LAW REVIEW , (71), 2016.5, 173-398 (226 pages) 발행처 (Publisher) 동아대학교 법학연구소 Institute for the Study of Law Dong-A University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6683407 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Accessed) 저작권 안내 DBpia에서 제공되는 모든 저작물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으며, 누리미디어는 각 저작물의 내용을 보증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자료를 원저작자와의 협의 없이 무단게재 할 경우, 저작권법 및 관련법령에 따라 민, 형사상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Information The copyright of all works provided by DBpia belongs to the original author(s). Nurimedia is not responsible for contents of each work. Nor does it guarantee the contents. You might take civil and criminal liabilities according to copyright and other relevant laws if you publish the contents without consultation with the original author(s). 동국대학교 210.94.201.*** 2016/09/13 14:0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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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사회(법사회학)

Max Weber, Wirtschaft und Recht (Rechtssoziologie, 1956)

저자

(Authors)

막스 베버, 최식

막스 베버, Choi, Sik

출처

(Source)

동아법학 , (71), 2016.5, 173-398 (226 pages)

DONG-A LAW REVIEW , (71), 2016.5, 173-398 (226 pages)

발행처

(Publisher)

동아대학교 법학연구소

Institute for the Study of Law Dong-A University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6683407

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Accessed)

저작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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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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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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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each work. Nor does it guarantee the contents.

You might take civil and criminal liabilities according to copyright and other relevant laws if you publish the contents

without consultation with the original author(s).

동국대학교210.94.201.***2016/09/13 14:02 (KST)

Page 2: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번 역]

법과 사회(법사회학)

역자 서문

일러두기

제1장 사실적 법영역의 구분

제1절 공법과 사법

제2절 청구권수여의 법과 규칙

제3절 통치와 행정

제4절 형법과 민법

제5절 불법행위와 범죄

제6절 명령권

제7절 권력의 제한과 권력의 분립

제8절 법과 소송

제9절 합리적 법적 사고의 범주

제2장 객관적 법적 사고의 범주

제1절 신규범의 성립의 문제 관습법

제2절 법발전의 사실적 요소, 이해관계자의 행위와 법강제

제3절 원시적 계쟁조정의 비합리적 성격

제4절 카리스마적인 법창조와 법발견

제5절 재판집회의 법발견(Dinggenossenschaftliche Rechtsfindung)

제6절 법창조의 담당자로서의 법명망가

《 차 례 》

* 최식(崔栻) 교수는 1909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28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여 1933년 법학

과를 졸업했다(5회). 건국대의 전신인 정치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60년부터 성균관대학 교수로서

재직하다가 1974년 정년퇴직한 후 작고하였다. 저서로는 『민법총칙』(1960), 『신물권법』(1959), 『부당노동

행위』(1963) 등이 있으며, 이 역서는 역자가 정치대학 재직 중이던 1959년 박영사에서 발간한 것이다. 법

사회학의 고전인 이 책은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현재의 학생들을 위해서 모두 한글로 바꾸고 표현

도 일부 수정하였다. 주석과 문헌목록은 편자가 붙인 것이다. [편집자 - 김효전]

막스 베버 지음/최 식 옮김*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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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4 17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3장 권리의 설정의 형태들

제1절 법적 명제들의 논리적 카테고리 자유권과 수권규정

제2절 계약자유

제3절 신분계약과 목적계약, 목적계약의 법사적 유래

제4절 계약자유의 다양한 의미와 그 한계

제5절 계약자유, 자치 및 단체의 법인격

제6절 법공동체의 내부에서의 자유와 강제

제4장 법적 사고의 형태들과 법명망가

제1절 경험적 법학과 합리적 법학 - 변호사훈련과 대학교수 -

제2절 신정적 법교육

제3절 법서

제4절 로마의 법률가와 로마법의 형식적 성격

제5장 법의 형식적 합리화와 실질적 합리화

제1절 법형식주의의 의의와 일반적 조건

제2절 법의 실질적 합리화, 신법

제3절 인도법

제4절 중국법

제5절 이슬람법

제6절 페르시아법

제7절 유태법

제8절 교회법

제6장 법의 형식적 성격에의 영향에서의 임페리움과 가산적 군주의 권력, 법전편찬

제1절 임페리움

제2절 가산적 군주의 법의 신분적 구조와 가산적 구조

제3절 법전편찬의 추진력

제4절 로마법의 계수와 근대적 법논리의 발전

제5절 가산적 법전편찬

제7장 혁명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 자연법

제1절 프랑스 민법의 특색

제2절 실정법의 규범적 규준으로서의 자연법

제3절 근대 자연법의 기원

제4절 자연법과 자유권

제5절 형식적 자연법의 실질적 자연법에의 변화

제6절 자연법적 이데올로기의 계급관계

제7절 자연법의 실용적 의미와 그 해체

제8절 법실증주의와 법조계급

제8장 근대법의 형식적 성질

제1절 근대법에서의 법전문화

제2절 근대법의 발전에서의 반형식적 경향

제3절 현대의 앵글로색슨법

제4절 비전문가 재판과 근대 법조계급의 신분적 경향

* * *

주석

막스 베버에 관한 한국 문헌

《 역자 서문 》

오늘날 대학의 법학부는 관리양성소라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서의 법률학은 재

판관의 법 이외의 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재판관의 사용에 제공되는,

즉 이른바 실용법학은 재판관이 주어진 일반적인 조문으로부터 개개의 소송사건

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하는 답을 꺼내야 되기 때문에 일층 많은 판결을 그로부

터 연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일반적인 내용을 갖춘 법규를 재판관

의 손에 넣어주어야 되고, 일반적인 법규를 구체적인 경우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재판관에게 지시해 주는 것이라야 되었다. 따라서 실용법학은 추상적 그리고 연역

적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은현실과의 어떠한 접촉도 없는 핏기가 없는 것이다.

실용법학은 사실의 고찰, 경험의 집적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통

찰을 갖게 하려는 귀납적 방법이 지배하는 모든 진정한 과학과 이 점에서 예리하

게 대립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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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4 17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3장 권리의 설정의 형태들

제1절 법적 명제들의 논리적 카테고리 자유권과 수권규정

제2절 계약자유

제3절 신분계약과 목적계약, 목적계약의 법사적 유래

제4절 계약자유의 다양한 의미와 그 한계

제5절 계약자유, 자치 및 단체의 법인격

제6절 법공동체의 내부에서의 자유와 강제

제4장 법적 사고의 형태들과 법명망가

제1절 경험적 법학과 합리적 법학 - 변호사훈련과 대학교수 -

제2절 신정적 법교육

제3절 법서

제4절 로마의 법률가와 로마법의 형식적 성격

제5장 법의 형식적 합리화와 실질적 합리화

제1절 법형식주의의 의의와 일반적 조건

제2절 법의 실질적 합리화, 신법

제3절 인도법

제4절 중국법

제5절 이슬람법

제6절 페르시아법

제7절 유태법

제8절 교회법

제6장 법의 형식적 성격에의 영향에서의 임페리움과 가산적 군주의 권력, 법전편찬

제1절 임페리움

제2절 가산적 군주의 법의 신분적 구조와 가산적 구조

제3절 법전편찬의 추진력

제4절 로마법의 계수와 근대적 법논리의 발전

제5절 가산적 법전편찬

제7장 혁명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 자연법

제1절 프랑스 민법의 특색

제2절 실정법의 규범적 규준으로서의 자연법

제3절 근대 자연법의 기원

제4절 자연법과 자유권

제5절 형식적 자연법의 실질적 자연법에의 변화

제6절 자연법적 이데올로기의 계급관계

제7절 자연법의 실용적 의미와 그 해체

제8절 법실증주의와 법조계급

제8장 근대법의 형식적 성질

제1절 근대법에서의 법전문화

제2절 근대법의 발전에서의 반형식적 경향

제3절 현대의 앵글로색슨법

제4절 비전문가 재판과 근대 법조계급의 신분적 경향

* * *

주석

막스 베버에 관한 한국 문헌

《 역자 서문 》

오늘날 대학의 법학부는 관리양성소라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서의 법률학은 재

판관의 법 이외의 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재판관의 사용에 제공되는,

즉 이른바 실용법학은 재판관이 주어진 일반적인 조문으로부터 개개의 소송사건

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 하는 답을 꺼내야 되기 때문에 일층 많은 판결을 그로부

터 연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일반적인 내용을 갖춘 법규를 재판관

의 손에 넣어주어야 되고, 일반적인 법규를 구체적인 경우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재판관에게 지시해 주는 것이라야 되었다. 따라서 실용법학은 추상적 그리고 연역

적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은현실과의 어떠한 접촉도 없는 핏기가 없는 것이다.

실용법학은 사실의 고찰, 경험의 집적에 의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우리들의 통

찰을 갖게 하려는 귀납적 방법이 지배하는 모든 진정한 과학과 이 점에서 예리하

게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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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6 1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제는 이러한 실용법학으로부터 독립하며 실용적 목적이 아니고 순수한 인식

에 봉사하고, 언어가 아니고 사실을 취급하는 법에 대한 독립의 과학이 성립해야

할 시기도 온 것이 아닐까.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자극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서 이 번역

서의 공간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이 책은 적절하게도 야스퍼스에 의해서 「중세의 대가람의 건조물과 같은 인상」

이라고 평언된 막스 베버의 대저 「경제와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논문의 번역이다.

즉 그의 제2부, 제7장 「경제와 법」(법사회학)을 역출한 것이다.

법의 역사적 발전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법사상의 발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임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단계에서의 민족들의 개성적인 문화를 이해하려

는 경우에는 그 근거로서 법사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법

사상의 발전은 단지 법의 학설사의 전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배권력의

관심으로서 나타나는 법사상을 인식한다는 방법, 즉 법사상과 지배구조와의 필연

적인 관련을 인식한다는 방법에 의해서 파악될 수도 있다. 이렇게 법사상을 지배

권력의 관심의 표현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법사상 및 법사상의 발전에 대한

객관적 사회과학적 인식이다. 이것은 바로 베버의 이른바 몰가치적 판단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비배권력의 관심의 표현으로서의 법사상의 발전을 법의 합리화의 과

정으로서 파악하고 이것을 근거로 법의역사적 발전에 관함 웅대한 구상(세계법사

의 구상)을 재판의 역사, 권리의 역사, 법전편찬의 역사 등 개별적 법사의 서술에

서 간접적으로 규지시키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원문의 난삽, 인예(引例)의 풍부 및 저자 독자의 용

어예 등의 곤란에 진땀을 흘린 것은 좋으나 역자의 어학력의 부족, 천학 등에 기인

하여 불완전한 결과로 되었고, 독자도 읽기에 곤란한 점도 있을까 하는데 그런 중

에서도 여러분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면 다행일까 한다. 그리고 상

품가치도 많지 않을 이 책의 출판을 쾌히 승낙하신 박영사 안원옥(安洹玉)씨의 학

문적 이해에 절대의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1959년 8월 24일 돈암동 일우에서

역자 식

《 범 례 》

1. 본서는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 수록된 Wirtschaft und

Recht (Rechtssoziologie)를 번역한 것이며, 번역의 저본으로서는 Johannes

Winckelmann이 엄밀한 교정을 붙인 제4판(1956년)을 사용하였다.

2. 역문 중 ( ) 형 괄호는 원문에서 괄호가 있는 부분이다.

3. 역문 중 「 」 형 괄호는 원문에서 “ ”가 붙여진 부분이다.

4. 역문에서 방점 ○을 붙인 것은 원문에서 게슈페르트로 되어 있는 것이다.

5. 역문 중의 - - 은 원문에서 사용된 부분과 역자가 번역의 필요상 붙인 것도

있다.

6. 번역시에 주로 참고한 서적은 다음의 것이다.

(1) 石尾芳久譯, 『法社會學』, 法律文化社, 1957.

(2) M. Rheinstein, Max Weber on Law in Economy and Socie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 * *

[387]

제1장 사실적 법영역의 구분

제1절 「공법」과 「사법」

현재의 법이론과 법실무가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구별의 하나는 「공법」과 「사법」

의 구별이다. 그러나 그 구별의 한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다.

1. 사회학적 구별에 따라서 공법은 단순히 법질서에 의해서 규정되는 의미이며,

따라서 국가기구에 관련되는 행위에 관한 규범의 총체라고 정의된다. 즉 법규에 의

하거나 또는 합의적으로 유효한 국가기구 자체의 당면한 목적의 존립·확장·직접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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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6 1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제는 이러한 실용법학으로부터 독립하며 실용적 목적이 아니고 순수한 인식

에 봉사하고, 언어가 아니고 사실을 취급하는 법에 대한 독립의 과학이 성립해야

할 시기도 온 것이 아닐까.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자극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서 이 번역

서의 공간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이 책은 적절하게도 야스퍼스에 의해서 「중세의 대가람의 건조물과 같은 인상」

이라고 평언된 막스 베버의 대저 「경제와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논문의 번역이다.

즉 그의 제2부, 제7장 「경제와 법」(법사회학)을 역출한 것이다.

법의 역사적 발전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법사상의 발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임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단계에서의 민족들의 개성적인 문화를 이해하려

는 경우에는 그 근거로서 법사상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법

사상의 발전은 단지 법의 학설사의 전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배권력의

관심으로서 나타나는 법사상을 인식한다는 방법, 즉 법사상과 지배구조와의 필연

적인 관련을 인식한다는 방법에 의해서 파악될 수도 있다. 이렇게 법사상을 지배

권력의 관심의 표현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법사상 및 법사상의 발전에 대한

객관적 사회과학적 인식이다. 이것은 바로 베버의 이른바 몰가치적 판단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비배권력의 관심의 표현으로서의 법사상의 발전을 법의 합리화의 과

정으로서 파악하고 이것을 근거로 법의역사적 발전에 관함 웅대한 구상(세계법사

의 구상)을 재판의 역사, 권리의 역사, 법전편찬의 역사 등 개별적 법사의 서술에

서 간접적으로 규지시키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원문의 난삽, 인예(引例)의 풍부 및 저자 독자의 용

어예 등의 곤란에 진땀을 흘린 것은 좋으나 역자의 어학력의 부족, 천학 등에 기인

하여 불완전한 결과로 되었고, 독자도 읽기에 곤란한 점도 있을까 하는데 그런 중

에서도 여러분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면 다행일까 한다. 그리고 상

품가치도 많지 않을 이 책의 출판을 쾌히 승낙하신 박영사 안원옥(安洹玉)씨의 학

문적 이해에 절대의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1959년 8월 24일 돈암동 일우에서

역자 식

《 범 례 》

1. 본서는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에 수록된 Wirtschaft und

Recht (Rechtssoziologie)를 번역한 것이며, 번역의 저본으로서는 Johannes

Winckelmann이 엄밀한 교정을 붙인 제4판(1956년)을 사용하였다.

2. 역문 중 ( ) 형 괄호는 원문에서 괄호가 있는 부분이다.

3. 역문 중 「 」 형 괄호는 원문에서 “ ”가 붙여진 부분이다.

4. 역문에서 방점 ○을 붙인 것은 원문에서 게슈페르트로 되어 있는 것이다.

5. 역문 중의 - - 은 원문에서 사용된 부분과 역자가 번역의 필요상 붙인 것도

있다.

6. 번역시에 주로 참고한 서적은 다음의 것이다.

(1) 石尾芳久譯, 『法社會學』, 法律文化社, 1957.

(2) M. Rheinstein, Max Weber on Law in Economy and Socie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 * *

[387]

제1장 사실적 법영역의 구분

제1절 「공법」과 「사법」

현재의 법이론과 법실무가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구별의 하나는 「공법」과 「사법」

의 구별이다. 그러나 그 구별의 한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다.

1. 사회학적 구별에 따라서 공법은 단순히 법질서에 의해서 규정되는 의미이며,

따라서 국가기구에 관련되는 행위에 관한 규범의 총체라고 정의된다. 즉 법규에 의

하거나 또는 합의적으로 유효한 국가기구 자체의 당면한 목적의 존립·확장·직접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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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8 1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현에 봉사하는 행위에 관한 규범의 총체로서 정의된다. 사법은 법질서가 규정하는

의미에 따라 국가기구에 관련되지 않고, 단지 국가기구가 규범을 통해서 질서하는

데 그치는 행위에 대한 규범의 총체로 본다. 이러한 사회학적 구별은 그 비형식적

인 성격상 기술적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거의 모든 공사법 구별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

2. 이 구별은 종종 다른 구별과 얽히게 된다. 즉 「공법」을 규칙(Reglement)

의 총체, 즉 정당한 법적 의미에서 국가기관에의 명령만을 포함하고, 개인의 기

득의 권리의 근거가 되지 않는 규범의 총체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이 규범의 총체를 개인의 기득의 권리에 근거를 주는 「청구권의 규정 화」

(Anspruchsnormierungen)와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치는 제일

먼저 정당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법적 규정도 예를 들면 대통령 선

거의 규범 같은 것은 개인의 주관적 권리이며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공」권, 예를

들면 선거권 같은 것에 기초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러한 공권은 오

늘날에는 법적인 의미에서는 물론 소유권과 같은 의미에서 기득권으로 확정될 수

는 없다.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입법자 자신에 대해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법자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공

권은 법적 의미에 의하면 실제로는 개인이 일정한 한정된 목적을 위해서 국가기구

의 기관으로서 행위하는 전체적인 권한으로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공권은 그것이 권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는 규칙의 단순한 반사로서 생

각될 것이지, 객관적인 청구권의 규범의 결과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또

한 그때그때의 법질서 안에 존재하는 상기 1에서 말한 의미에서 사법적 청구권의

전부가 「기득의」 권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제든지 인정해온 소유권 내용까지라

도, 이것을 법질서의 「반사」라고 볼 수 있으며, 권리가 「기득의」 권리인가의 여부 문

제는 실제로는 그 침해에 대해서 손해배상청구권이 발생하느냐 않느냐 라는 문제

에 귀착하는데 불과할 때가 많다. 따라서 아마 법적 의미에서의 공법 전부가 규칙

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전체 규칙이 공법에만 속한다고 주

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치권이 군주의 세습적인 기득권으로서 인정되는 경우의

법질서, 또 반대로 [388] 일정한 시민권이 「기득」의 사권과 동일한 의미에서 불가박

탈의 것이라고 인정되는 (예를 들면, 자연법에 의해서) 경우의 법질서에서는 그것

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3. 끝으로 공사법의 구별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법적 의미에서

「동등」이라고 인정되는 다수의 당사자 - 그들의 권리범위를 정한다는 것이며, 입법

자의 활동이든 재판관의 활동이든 관계 당사자 자신의 (법률행위에 의한) 활동이

든 간에, 그들의 활동의 법적으로 「정당한」 의미이다 - 가 거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법적 사건 전부는 「사법」 사건으로서 이것을 법적 의미에서의 우월적 권력담당자가

권위적인 명령권력으로써 규범의 법적 의미에서 그에게 「종속하는」 사람들에 대립

하여 나타나는 공법 사건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구의 기관 전부가 반드

시 명령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며 공법상으로 규율된 국가기관의 행위가 반드시 명

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또 개인의 국가기관 간의 관계, 즉 같은 정도의 우

월적 권력의 담당자 간의 관계의 규제가 「공」법 고유의 내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나아가 권력담당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직접적으로 성

립하는 관계뿐만 아니라, 권력에 복종하는 자의 행위로서 한 사람 또는 다수인의

권력담당자를 설정하고 콘트롤하는 데에 봉사하는 것도 「공법적」으로 규제된 행위

의 영역에 첨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방법은 더 나가면 분명히 처음

에 지적한 구별방법의 제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이 구별의 방법도 권위적

인 명령권력의 전부 그리고 이것의 권력복종자에 대한 관계의 전부를 공법적인 것

으로서 취급하지는 않는다. 고용주의 명령권력은 그것이 형식적으로 「평등자」 간의

「법률행위」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공법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 가

부의 명령권력도 사법적 권력으로서 취급된다. 왜냐하면 분명히 국가기구만이 적

법한 권력의 원천으로서 확인되며, 따라서 법질서가 정하는 의미에 의해서 국가기

구의 유지와 국가기구에 의해서 말하자면 자기의 전영(專營) 하에 두게 된 이익의

실현에 관계되는 행위만이 「공」법적으로 관계있는 것으로서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이

다. 그런데 어떠한 이익이 국가기구 자신에 의해서 승인된 것으로 인정되느냐는 것

은 주지하듯이, 현재에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어떤 이익의 영역에 관해서

제정법이 의식적으로 개인의 사적 청구권 그리고 국가기구의 명령권력 기타의 기능

을 동일한 사업관계에 대해서 경합적으로 병존하도록 규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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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78 1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현에 봉사하는 행위에 관한 규범의 총체로서 정의된다. 사법은 법질서가 규정하는

의미에 따라 국가기구에 관련되지 않고, 단지 국가기구가 규범을 통해서 질서하는

데 그치는 행위에 대한 규범의 총체로 본다. 이러한 사회학적 구별은 그 비형식적

인 성격상 기술적으로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의 방법은

궁극적으로 거의 모든 공사법 구별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

2. 이 구별은 종종 다른 구별과 얽히게 된다. 즉 「공법」을 규칙(Reglement)

의 총체, 즉 정당한 법적 의미에서 국가기관에의 명령만을 포함하고, 개인의 기

득의 권리의 근거가 되지 않는 규범의 총체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이 규범의 총체를 개인의 기득의 권리에 근거를 주는 「청구권의 규정 화」

(Anspruchsnormierungen)와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치는 제일

먼저 정당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법적 규정도 예를 들면 대통령 선

거의 규범 같은 것은 개인의 주관적 권리이며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공」권, 예를

들면 선거권 같은 것에 기초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러한 공권은 오

늘날에는 법적인 의미에서는 물론 소유권과 같은 의미에서 기득권으로 확정될 수

는 없다.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입법자 자신에 대해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법자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공

권은 법적 의미에 의하면 실제로는 개인이 일정한 한정된 목적을 위해서 국가기구

의 기관으로서 행위하는 전체적인 권한으로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공권은 그것이 권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는 규칙의 단순한 반사로서 생

각될 것이지, 객관적인 청구권의 규범의 결과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또

한 그때그때의 법질서 안에 존재하는 상기 1에서 말한 의미에서 사법적 청구권의

전부가 「기득의」 권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제든지 인정해온 소유권 내용까지라

도, 이것을 법질서의 「반사」라고 볼 수 있으며, 권리가 「기득의」 권리인가의 여부 문

제는 실제로는 그 침해에 대해서 손해배상청구권이 발생하느냐 않느냐 라는 문제

에 귀착하는데 불과할 때가 많다. 따라서 아마 법적 의미에서의 공법 전부가 규칙

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전체 규칙이 공법에만 속한다고 주

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통치권이 군주의 세습적인 기득권으로서 인정되는 경우의

법질서, 또 반대로 [388] 일정한 시민권이 「기득」의 사권과 동일한 의미에서 불가박

탈의 것이라고 인정되는 (예를 들면, 자연법에 의해서) 경우의 법질서에서는 그것

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3. 끝으로 공사법의 구별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법적 의미에서

「동등」이라고 인정되는 다수의 당사자 - 그들의 권리범위를 정한다는 것이며, 입법

자의 활동이든 재판관의 활동이든 관계 당사자 자신의 (법률행위에 의한) 활동이

든 간에, 그들의 활동의 법적으로 「정당한」 의미이다 - 가 거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법적 사건 전부는 「사법」 사건으로서 이것을 법적 의미에서의 우월적 권력담당자가

권위적인 명령권력으로써 규범의 법적 의미에서 그에게 「종속하는」 사람들에 대립

하여 나타나는 공법 사건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구의 기관 전부가 반드

시 명령권력을 갖는 것은 아니며 공법상으로 규율된 국가기관의 행위가 반드시 명

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또 개인의 국가기관 간의 관계, 즉 같은 정도의 우

월적 권력의 담당자 간의 관계의 규제가 「공」법 고유의 내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나아가 권력담당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직접적으로 성

립하는 관계뿐만 아니라, 권력에 복종하는 자의 행위로서 한 사람 또는 다수인의

권력담당자를 설정하고 콘트롤하는 데에 봉사하는 것도 「공법적」으로 규제된 행위

의 영역에 첨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방법은 더 나가면 분명히 처음

에 지적한 구별방법의 제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이 구별의 방법도 권위적

인 명령권력의 전부 그리고 이것의 권력복종자에 대한 관계의 전부를 공법적인 것

으로서 취급하지는 않는다. 고용주의 명령권력은 그것이 형식적으로 「평등자」 간의

「법률행위」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공법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 가

부의 명령권력도 사법적 권력으로서 취급된다. 왜냐하면 분명히 국가기구만이 적

법한 권력의 원천으로서 확인되며, 따라서 법질서가 정하는 의미에 의해서 국가기

구의 유지와 국가기구에 의해서 말하자면 자기의 전영(專營) 하에 두게 된 이익의

실현에 관계되는 행위만이 「공」법적으로 관계있는 것으로서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이

다. 그런데 어떠한 이익이 국가기구 자신에 의해서 승인된 것으로 인정되느냐는 것

은 주지하듯이, 현재에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어떤 이익의 영역에 관해서

제정법이 의식적으로 개인의 사적 청구권 그리고 국가기구의 명령권력 기타의 기능

을 동일한 사업관계에 대해서 경합적으로 병존하도록 규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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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0 1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공법과 사법의 분야의 한계는 반드시 명백하다고는 할 수

없다, 과거에는 이 구별은 오늘날에서보다 더 분명치 않았다. 이 구별의 가능성조

차 없었던 일도 있었다. 즉 어떠한 권리나 어떠한 권한도, 특히 모든 명령권력까지

도 다 같이 개인의 특권(원수에 있어서는 대개 「대권」(Prärogative)이라고 불린다)

이라는 성격을 띠는 때가 그러하였다. 이때에는 일정한 사건에 대해서 법을 선언하

고, 사람을 병역에 소집하고 기타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권능은 예컨대 일정

한 토지를 이용하는 권능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기득의」 권리이고, 경우에 따라서

는 양도 또는 상속이라는 법률행위의 대상이 된다. 그때에는 정치적 권력은 법적

으로는 기구적 구조를 갖지 않고, 명령권력을 갖는 자들과 그것을 갖는다고 칭하

는 자들의 구체적인 이익사회 형식과 타협으로 표현된다. 이 경우에는 정치적 명령

권력은 가부·「지주」·노예의 주인의 명령권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가산

제」(Patrimonialismus)의 상태이다. 권리가 이러한 구조를 가지는 데에서는 - 그

리고 그것은 결코 최후의 귀결까지 철저하게 실현된 일은 없었다 - 법적으로 본다

면, 우리의 「공」권에 해당하는 것은 전부가 사법적 청구권과 꼭 같이 구체적 권력

자의 권리의 대상인 것이다.

제2절 「청구권수여의 법」과 「규칙」

그러나 법의 형성은 [상술한 가산적 법과] 아주 반대의 성격을 취할 수 있어 현

재 사권이 인정되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상술한 「사」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즉 청구권을 수여하는 법의 성질을 가진 규범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바꾸어 말하면 일반적으로 타당한 전체 규범의 전체가 법적으로 「규칙」

의 성질을 가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즉 그러므로 전체 사적 이익은 보장된 청구권

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 규칙의 효력의 반사로서 보호의 샨스(Chance)를 가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 이 상태도 결코 전면적으로

행해진 일은 없다 - 권리는 전부가 행정의 목적, 즉 「통치」(Regierung) 안에 해소

된다.

제3절 「통치」와 「행정」

「행정」은 결코 공법만의 개념은 아니다. 사적 가계나 영업경영과 같은 사적 행정

도 있고, 국가의 기관이나 국가로부터 수권되는 따라서 타율적인 다른 공적 기구

의 기관에 의해서 행해지는 공적 행정도 있다. 그런데 「공적」 행정 중에는 가장 넓

은 의미에서 다음 세 가지의 종류가 포함된다. 즉 법제도·법발견 그리고 공적 기구

의 활동 중에서 앞의 두 가지를 공제한 나머지 - 이것을 여기서 「통치」라고 부르려

한다 - 가 그것이다. 「통치」는 법규범에 구속되고 또 기득의 권리에 의해서 제한될

수 있다, 통치는 이러한 구속 또는 제한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법창조나 법발견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치에 대한 이러한 구속은 바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적극적으로는 통치에 고유한 권한의 합법적 근거이다. 즉 근대적 통치는 법적

인 「권한」으로 그 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권한은 법률적으로는 결국은 언제나 국가

기구의 「헌법」규범에 의한 수권에 기초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행정법이나 기득의

권리에 의한 위의 제한은, (2) 소극적으로는 그의 자유로운 활동을 재래시키며, 통

치는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러나 통치의 특징적인 고유의 본

질은 적극적으로는 전적으로 현행법이 현행법으로서 타당하며, 기득권은 이 기초

위에 성립한다는 이유만으로서 현행법의 존중과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할 뿐만 아니

라 정치적·도덕적·공리적인 기타 어떠한 성질의 것이라도 좋은데 위의 목적 이외

의 실질적인 목적의 실현도, 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개인이나 개인의 이

익은 「통치」에 대해서는 법적 의미에 의하면 원칙으로 객체이며 법주체는 아니다.

물론 바로 근대국가에 있어서는 법의 발견과(「통치」의 의미에서의) 「행정」이 형식상

서로 근사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법의 내부에서 오늘날의 법관은, 혹은 법규에 의

해서 혹은 법의 이론에 의해서, 도덕·형평·합목적성과 같은 실질적 원칙에 따라서

재판하는 것이 기대되는 일이 적지 않다. 동시에 개인은 원리상, 행정의 객체에 불

과하나 오늘날의 국가조직은 개인에게 적어도 형식상 법발견에서와 같은 「행정」에

대한 개인의 이익옹호의 수단을 부여한다. 즉 「행정재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모든 보장에도 불구하고, 사법과 「통치」라는 전술한 궁극의 대립을 제거할 수

는 없다. 다른 한 편 「통치」가 개개의 사건을 자유로이 처분하지 않고 유형적 사건

의 처리방법에 관한 일반규칙을 설정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통치」는 법창조에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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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0 1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공법과 사법의 분야의 한계는 반드시 명백하다고는 할 수

없다, 과거에는 이 구별은 오늘날에서보다 더 분명치 않았다. 이 구별의 가능성조

차 없었던 일도 있었다. 즉 어떠한 권리나 어떠한 권한도, 특히 모든 명령권력까지

도 다 같이 개인의 특권(원수에 있어서는 대개 「대권」(Prärogative)이라고 불린다)

이라는 성격을 띠는 때가 그러하였다. 이때에는 일정한 사건에 대해서 법을 선언하

고, 사람을 병역에 소집하고 기타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권능은 예컨대 일정

한 토지를 이용하는 권능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기득의」 권리이고, 경우에 따라서

는 양도 또는 상속이라는 법률행위의 대상이 된다. 그때에는 정치적 권력은 법적

으로는 기구적 구조를 갖지 않고, 명령권력을 갖는 자들과 그것을 갖는다고 칭하

는 자들의 구체적인 이익사회 형식과 타협으로 표현된다. 이 경우에는 정치적 명령

권력은 가부·「지주」·노예의 주인의 명령권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가산

제」(Patrimonialismus)의 상태이다. 권리가 이러한 구조를 가지는 데에서는 - 그

리고 그것은 결코 최후의 귀결까지 철저하게 실현된 일은 없었다 - 법적으로 본다

면, 우리의 「공」권에 해당하는 것은 전부가 사법적 청구권과 꼭 같이 구체적 권력

자의 권리의 대상인 것이다.

제2절 「청구권수여의 법」과 「규칙」

그러나 법의 형성은 [상술한 가산적 법과] 아주 반대의 성격을 취할 수 있어 현

재 사권이 인정되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상술한 「사」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즉 청구권을 수여하는 법의 성질을 가진 규범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바꾸어 말하면 일반적으로 타당한 전체 규범의 전체가 법적으로 「규칙」

의 성질을 가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즉 그러므로 전체 사적 이익은 보장된 청구권

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 규칙의 효력의 반사로서 보호의 샨스(Chance)를 가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 이 상태도 결코 전면적으로

행해진 일은 없다 - 권리는 전부가 행정의 목적, 즉 「통치」(Regierung) 안에 해소

된다.

제3절 「통치」와 「행정」

「행정」은 결코 공법만의 개념은 아니다. 사적 가계나 영업경영과 같은 사적 행정

도 있고, 국가의 기관이나 국가로부터 수권되는 따라서 타율적인 다른 공적 기구

의 기관에 의해서 행해지는 공적 행정도 있다. 그런데 「공적」 행정 중에는 가장 넓

은 의미에서 다음 세 가지의 종류가 포함된다. 즉 법제도·법발견 그리고 공적 기구

의 활동 중에서 앞의 두 가지를 공제한 나머지 - 이것을 여기서 「통치」라고 부르려

한다 - 가 그것이다. 「통치」는 법규범에 구속되고 또 기득의 권리에 의해서 제한될

수 있다, 통치는 이러한 구속 또는 제한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법창조나 법발견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치에 대한 이러한 구속은 바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적극적으로는 통치에 고유한 권한의 합법적 근거이다. 즉 근대적 통치는 법적

인 「권한」으로 그 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권한은 법률적으로는 결국은 언제나 국가

기구의 「헌법」규범에 의한 수권에 기초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행정법이나 기득의

권리에 의한 위의 제한은, (2) 소극적으로는 그의 자유로운 활동을 재래시키며, 통

치는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러나 통치의 특징적인 고유의 본

질은 적극적으로는 전적으로 현행법이 현행법으로서 타당하며, 기득권은 이 기초

위에 성립한다는 이유만으로서 현행법의 존중과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할 뿐만 아니

라 정치적·도덕적·공리적인 기타 어떠한 성질의 것이라도 좋은데 위의 목적 이외

의 실질적인 목적의 실현도, 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개인이나 개인의 이

익은 「통치」에 대해서는 법적 의미에 의하면 원칙으로 객체이며 법주체는 아니다.

물론 바로 근대국가에 있어서는 법의 발견과(「통치」의 의미에서의) 「행정」이 형식상

서로 근사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법의 내부에서 오늘날의 법관은, 혹은 법규에 의

해서 혹은 법의 이론에 의해서, 도덕·형평·합목적성과 같은 실질적 원칙에 따라서

재판하는 것이 기대되는 일이 적지 않다. 동시에 개인은 원리상, 행정의 객체에 불

과하나 오늘날의 국가조직은 개인에게 적어도 형식상 법발견에서와 같은 「행정」에

대한 개인의 이익옹호의 수단을 부여한다. 즉 「행정재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모든 보장에도 불구하고, 사법과 「통치」라는 전술한 궁극의 대립을 제거할 수

는 없다. 다른 한 편 「통치」가 개개의 사건을 자유로이 처분하지 않고 유형적 사건

의 처리방법에 관한 일반규칙을 설정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통치」는 법창조에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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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2 1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근한다. 그리고 또 이것은, 「통치」가 자신은 이러한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도 「통치」가 이

러한 구속을 규범적인 것으로서 인정할 것이 기대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보통

의 경우 「자의」로서 적어도 습률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니까.

모든 「행정」의 원시적인 담당자는 가(家)지배였다. 가지배는 원시적으로는 무제약

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는 가장에 대한 권력종속자의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

지 않고, 가장이 가종속자에 대해서 취하는 행위의 객관적 규범도, 결국은 가장의

종교적 제한을 타율적으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편 가장이 가공동체의

내부에서 원칙적으로 전연 무제한의 행정을 하고, 다른 한 편 근족 간에서는 이와

병행하여 속죄계약과 증거계약을 기초로 하는 중재절차가 행하여진다는 양자의 병

존상태에서도 원시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 한해서만 「청구」, 따라서 권리가 처리되

고 결정이 내려진다. 여기에서만 확고한 형식·기한·증거규칙, 요컨대 「법률적」 절차

의 시원이 존재한다 - 그 이유는 냐중에 관찰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장의 권력범위 내에서의 가장의 처리에는 「법률적」 절차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

다. 저 중재절차가 법발견의 원시적 형태인 것처럼 가장의 처분은 「통치」의 원시적

형태이다. 양자는 영역에 있어서도 구별된다. 고대 로마의 사법(司法)도 가의 입구

에서 무조건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가지배의 권리가, 그의 원시

적 범위를 넘어서 일종의 정치적 권력 - 즉 가산군주제(Patrimonialfürstentum)

- 로 이식되었는가, 또 그럼으로써 법발견에 이식되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러한 사태가 언제나 존재하는 데에서는 법창조·법발견 그리고 통치와의 사이의 한

계는 타파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사태가 일어난다. 하나는 법발견이 형

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도 「행정」의 성격을 띠며, 또 그것은 행정처럼 확정적 형식도

제한도 없고 합목적적 견지와 형평의 관점에 따라 군주의 신하에 대한 단독의 결정

과 명령에 의해서 집행된다. 이 상태가 완전히 일어나는 것은 단지 한계상태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상태에 가까운 것으로서는 「규문」소송과 「직권주의」가 적용

되는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두 번째)는 「행정」이 소송절차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부분적

으로는 현재도 아직 그러하다. 영국의 의회는 「사법률안」(private bills), 즉 순수한

행정행위(특허 등)를 원칙적으로 「법률안」과 동일하게 토의한다. 그리고 사법률안과

법률안의 무차별성이 고대 의회의 절차에 특유한 것이며, 의회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의회는 원시적으로는 재판관청으로서 성립하였고, 프랑

스에서는 전적으로 그러하였다. 이렇게 한계가 말소된 것은 정치적 사정에 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행정사항인 예산이 영국의 모범에 따라 또 정치

적 이유라는 것도 첨가되어 「법률」로서 취급되고 있다.

다른 한 편 단체기관의 기관으로서의 행위가 개인 간의 합의와 동일한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는 「행정」과 「사법」의 대립이 해소된다. 즉 단체기관 그것이 그의 의

무에 의하여 단체의 재산 및 개인의 재산에 관한 급부와 반대급부에 관하여 개인

들과 - 단체의 성원이건 다른 사람들이건 간에 - 「협정」(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가 그것이다. 그 경우에 이러한 관계는 왕왕 「사법」의 규범으로부터 이탈되어 내용

적으로나 보장방법에서도 이와는 달리 규율된다. 즉 「행정」의 규범 아래 들어가기

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사자 각 제개인의 청구권은 전적으로 강제가능성에 의

하여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권리」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또 행정과 사법과의

구분은 그러한 한에서는 기술적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구분은 그러한 것으로

서 실제적으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도 있다. 만약 (고대) 로마의 「사법」에 관하

여 보통의 선서절차에 의하여 「법률」을 기초로 하여 추구되는 청구만을 권리라 하

고, 정무관의 특별한 소송절차에 의하여 성취되는 권리를 권리로서 취급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로마법의 전체 구조를 아주 오인하는 것이 된다. 후자의 권리에는 때

로는 실제적으로 압도적인 경제적 의의가 귀속되었던 것이다.

제4절 「형법」과 「민법」

가장의 원시적인 권력처럼 마술사나 예언자의 권위, 그리고 그 원천이 구체적인

계시인 한 사제자의 권력도 권리와 객관적 규범에 의한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어 있

다. 거기에 관하여 일부는 기술하였으나 일부를 더 말하기로 한다. 마술적 신앙은

그러나 「민법」에 대립하여 「형법」의 원시적 기원의 하나이다. 형법과 민법에 관한

현재 우리들에게 숙지되어 있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객관적 규범에 대한 위반을

속죄하는 경우 형사사법상에서는 질서된 절차의 보장 아래 용의자에 대한 국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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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2 1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근한다. 그리고 또 이것은, 「통치」가 자신은 이러한 규칙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도 「통치」가 이

러한 구속을 규범적인 것으로서 인정할 것이 기대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보통

의 경우 「자의」로서 적어도 습률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니까.

모든 「행정」의 원시적인 담당자는 가(家)지배였다. 가지배는 원시적으로는 무제약

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는 가장에 대한 권력종속자의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

지 않고, 가장이 가종속자에 대해서 취하는 행위의 객관적 규범도, 결국은 가장의

종교적 제한을 타율적으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편 가장이 가공동체의

내부에서 원칙적으로 전연 무제한의 행정을 하고, 다른 한 편 근족 간에서는 이와

병행하여 속죄계약과 증거계약을 기초로 하는 중재절차가 행하여진다는 양자의 병

존상태에서도 원시적인 것이다. 이 경우에 한해서만 「청구」, 따라서 권리가 처리되

고 결정이 내려진다. 여기에서만 확고한 형식·기한·증거규칙, 요컨대 「법률적」 절차

의 시원이 존재한다 - 그 이유는 냐중에 관찰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장의 권력범위 내에서의 가장의 처리에는 「법률적」 절차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

다. 저 중재절차가 법발견의 원시적 형태인 것처럼 가장의 처분은 「통치」의 원시적

형태이다. 양자는 영역에 있어서도 구별된다. 고대 로마의 사법(司法)도 가의 입구

에서 무조건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가지배의 권리가, 그의 원시

적 범위를 넘어서 일종의 정치적 권력 - 즉 가산군주제(Patrimonialfürstentum)

- 로 이식되었는가, 또 그럼으로써 법발견에 이식되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러한 사태가 언제나 존재하는 데에서는 법창조·법발견 그리고 통치와의 사이의 한

계는 타파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사태가 일어난다. 하나는 법발견이 형

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도 「행정」의 성격을 띠며, 또 그것은 행정처럼 확정적 형식도

제한도 없고 합목적적 견지와 형평의 관점에 따라 군주의 신하에 대한 단독의 결정

과 명령에 의해서 집행된다. 이 상태가 완전히 일어나는 것은 단지 한계상태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상태에 가까운 것으로서는 「규문」소송과 「직권주의」가 적용

되는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두 번째)는 「행정」이 소송절차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부분적

으로는 현재도 아직 그러하다. 영국의 의회는 「사법률안」(private bills), 즉 순수한

행정행위(특허 등)를 원칙적으로 「법률안」과 동일하게 토의한다. 그리고 사법률안과

법률안의 무차별성이 고대 의회의 절차에 특유한 것이며, 의회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의회는 원시적으로는 재판관청으로서 성립하였고, 프랑

스에서는 전적으로 그러하였다. 이렇게 한계가 말소된 것은 정치적 사정에 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행정사항인 예산이 영국의 모범에 따라 또 정치

적 이유라는 것도 첨가되어 「법률」로서 취급되고 있다.

다른 한 편 단체기관의 기관으로서의 행위가 개인 간의 합의와 동일한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는 「행정」과 「사법」의 대립이 해소된다. 즉 단체기관 그것이 그의 의

무에 의하여 단체의 재산 및 개인의 재산에 관한 급부와 반대급부에 관하여 개인

들과 - 단체의 성원이건 다른 사람들이건 간에 - 「협정」(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가 그것이다. 그 경우에 이러한 관계는 왕왕 「사법」의 규범으로부터 이탈되어 내용

적으로나 보장방법에서도 이와는 달리 규율된다. 즉 「행정」의 규범 아래 들어가기

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사자 각 제개인의 청구권은 전적으로 강제가능성에 의

하여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권리」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또 행정과 사법과의

구분은 그러한 한에서는 기술적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구분은 그러한 것으로

서 실제적으로는 중요한 의의를 가질 수도 있다. 만약 (고대) 로마의 「사법」에 관하

여 보통의 선서절차에 의하여 「법률」을 기초로 하여 추구되는 청구만을 권리라 하

고, 정무관의 특별한 소송절차에 의하여 성취되는 권리를 권리로서 취급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로마법의 전체 구조를 아주 오인하는 것이 된다. 후자의 권리에는 때

로는 실제적으로 압도적인 경제적 의의가 귀속되었던 것이다.

제4절 「형법」과 「민법」

가장의 원시적인 권력처럼 마술사나 예언자의 권위, 그리고 그 원천이 구체적인

계시인 한 사제자의 권력도 권리와 객관적 규범에 의한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어 있

다. 거기에 관하여 일부는 기술하였으나 일부를 더 말하기로 한다. 마술적 신앙은

그러나 「민법」에 대립하여 「형법」의 원시적 기원의 하나이다. 형법과 민법에 관한

현재 우리들에게 숙지되어 있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객관적 규범에 대한 위반을

속죄하는 경우 형사사법상에서는 질서된 절차의 보장 아래 용의자에 대한 국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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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4 18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구의 기관 측에서 형벌이 과해져서 윤리적이건 공리적이건 간에 여하튼 공적 이익

이 배려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사적 청구권의 배려는 언제나 피해자에게 맡겨진

다. 배려의 결과로서는 형벌이 아니고 법에 의하여 보장된 상태의 회복이다. 이러

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반드시 분명히 하지는 않는다. 원시적인 사법에서는 이러한

구별을 모른다. 우리는 그 밖의 점에서는 매우 발달된 법상태 속에 깊이 들어가 보

더라도 원시적으로는 모든 소송의 범죄로부터의 소(Klage ex delicto)이며, 「의무」

와 「계약」은 원시적으로는 법에 있어서 전연 미지의 것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중국법과 같은 것은 근대에도 전체 법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요소로 되

었던 이 사실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 근족의 성원이나 재산의 불가침성의 요

구가 다른 근족의 성원에 의하여 침해되었을 경우 원칙적으로 복수나 속죄가 요구

된다. 그리고 복수나 속죄를 달성하는 데에는 피해자가 그의 근족의 원조 아래 비

로소 할 수 있었다. 근족간의 속죄절차는 최초 복수를 요구하는 침해와 단지 원상

회복의 의무 있는 위법과의 구별을 몰랐다. 또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발단에

불과하였다. 여기서는 현대의 개념에 의하면 「민법적」 청구의 추구와 「형벌」을 요구

하는 고발의 제기가 행하여진 불법에 대한 「속죄」라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포괄되

고 미분리의 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태는 실은 원시적인 법과 법적 강제라는 두 개

의 특유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1) 「책임」에 대한 고려, 따라서 「동기」에 의

해서 규정되는 책임의 정도의 고려가 결여된 것에 기인한다. 복수를 갈망하는 자

는 주관적인 동기를 묻지 않고 오히려 복수갈망을 환기시킨 타인의 행위가 감정을

지배한 객관적 결과가 문제인 것이다. 복수갈망의 분노는, 예기하지 않았는데 침해

한 생명 없는 자연객체나 예기하지 않았는데 침해한 동물에 대해서도 또는 무의식

이건 부주의건 고의이건 간에 침해를 한 인간에 대해서도, 전연 꼭 같이 향하여진

다(예를 들면 본래의 의미의 로마법의 동물에 의한 손해소권[actio de pauperie]

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물이 그렇게 했어야만 되었는데 그와 달리 행동했다!라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그 경우에는 복수를 위하여 가해동물이 위부[委付, noxae

datio]가 된다). 따라서 전체 불법은 속죄의무 있는 「범죄」이며 또한 속죄의무 있는

「불법」 이외의 것은 이미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2) 「판결」, 「집행」의 「법적 효과」의

양식이 - 아마 뒤에 말하겠지만 - 이상의 미분리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작

용한다. 왜냐하면 토지에 관한 분쟁이건, 살인에 관한 분쟁이건, 어떤 것이 문제

가 되더라도 위의 법적 효과의 양식은 같기 때문이다. 「직무상의 근거로부터」 판결

을 집행한다는 방식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이미 상당히 확고 정연한 속죄절차가

있는 곳에서도 왕왕 그러하였다. 판결이 신탁이나 주술적 수단에 의해서 행해지거

나, 선서한 후에 마술력 또는 신력을 부름으로써 판결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사람

들은 유해한 주술에 대한 공포에 의하여 보장된 판결이 권위를 가지고 통용할 것

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판결을 위반하는 것은 중대한 모독을 의미하였기 때문이

다. 그 속죄절차가 - 일정한 그리고 곧 후술할 군사적 발전에 의해서 - 재판집회

민단체(Dinggenoβenschaft) 앞에서 소송의 형식을 취하고, 촌락동공체가 판결

의 성립시에 「입회인」으로서 관여한 곳에서는 - 유사시대의 게르만의 경우가 그렇

다 - 협력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즉 재판집회민은 한번 내려

진 판결, 그리고 비난의 여지가 없는 또 비난하더라도 아무런 효과도 없을 판결을

집행하는데 대하여 아무 방해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승소한

당사자도 이러한 소극적 태도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었다. 승소한 당사자와

그의 근족은 그들에게 유익한 판결이 패소 당사자에 의하여 즉시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력구제에 의하여 그의 준수를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게르만에

서는 로마에서처럼 그의 자력구제는 보통 - 물건에 관한 분쟁이건 살인에 관한 분

쟁이건 -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속죄금 또는 소송당사자 쌍방이 협정한 속죄금의

지불 시까지 패소당사자의 인격을 인질로 한다는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군주나 정무관의 명령권이 평화에의 정치적 관념에서 집행을 방해하는 자에 간

섭하고 또 패소당사자의 저항을 법적 제재, 특히 평화상실로써 위하하게 되어 비

로소 처분집행을 행한 관직적 기구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전부, 「민

사적」 절차와 「형사적」 절차의 구별이 결여되고 있다. 이러한 민사와 형사의 원시적

인 완전한 무차별성은 특수적인 법적 명예층의 영향 아래 고대의 속죄재판으로부

터의 발전의 연속성의 요소를 장기간 보존하고, 또 「관료제화하는」 것이 가장 적은

법에서 나타난다. 즉 로마법이나 영국법에서 이러한 무차별성은 구체적인 물을 회

복하기 위한 원물집성(Realexekution)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토지에 관

한 소유권 회복의 소의 경우에는 단죄는 원칙으로 예컨대 화폐로써 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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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기관 측에서 형벌이 과해져서 윤리적이건 공리적이건 간에 여하튼 공적 이익

이 배려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사적 청구권의 배려는 언제나 피해자에게 맡겨진

다. 배려의 결과로서는 형벌이 아니고 법에 의하여 보장된 상태의 회복이다. 이러

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반드시 분명히 하지는 않는다. 원시적인 사법에서는 이러한

구별을 모른다. 우리는 그 밖의 점에서는 매우 발달된 법상태 속에 깊이 들어가 보

더라도 원시적으로는 모든 소송의 범죄로부터의 소(Klage ex delicto)이며, 「의무」

와 「계약」은 원시적으로는 법에 있어서 전연 미지의 것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중국법과 같은 것은 근대에도 전체 법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요소로 되

었던 이 사실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 근족의 성원이나 재산의 불가침성의 요

구가 다른 근족의 성원에 의하여 침해되었을 경우 원칙적으로 복수나 속죄가 요구

된다. 그리고 복수나 속죄를 달성하는 데에는 피해자가 그의 근족의 원조 아래 비

로소 할 수 있었다. 근족간의 속죄절차는 최초 복수를 요구하는 침해와 단지 원상

회복의 의무 있는 위법과의 구별을 몰랐다. 또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발단에

불과하였다. 여기서는 현대의 개념에 의하면 「민법적」 청구의 추구와 「형벌」을 요구

하는 고발의 제기가 행하여진 불법에 대한 「속죄」라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포괄되

고 미분리의 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태는 실은 원시적인 법과 법적 강제라는 두 개

의 특유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1) 「책임」에 대한 고려, 따라서 「동기」에 의

해서 규정되는 책임의 정도의 고려가 결여된 것에 기인한다. 복수를 갈망하는 자

는 주관적인 동기를 묻지 않고 오히려 복수갈망을 환기시킨 타인의 행위가 감정을

지배한 객관적 결과가 문제인 것이다. 복수갈망의 분노는, 예기하지 않았는데 침해

한 생명 없는 자연객체나 예기하지 않았는데 침해한 동물에 대해서도 또는 무의식

이건 부주의건 고의이건 간에 침해를 한 인간에 대해서도, 전연 꼭 같이 향하여진

다(예를 들면 본래의 의미의 로마법의 동물에 의한 손해소권[actio de pauperie]

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물이 그렇게 했어야만 되었는데 그와 달리 행동했다!라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그 경우에는 복수를 위하여 가해동물이 위부[委付, noxae

datio]가 된다). 따라서 전체 불법은 속죄의무 있는 「범죄」이며 또한 속죄의무 있는

「불법」 이외의 것은 이미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2) 「판결」, 「집행」의 「법적 효과」의

양식이 - 아마 뒤에 말하겠지만 - 이상의 미분리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작

용한다. 왜냐하면 토지에 관한 분쟁이건, 살인에 관한 분쟁이건, 어떤 것이 문제

가 되더라도 위의 법적 효과의 양식은 같기 때문이다. 「직무상의 근거로부터」 판결

을 집행한다는 방식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이미 상당히 확고 정연한 속죄절차가

있는 곳에서도 왕왕 그러하였다. 판결이 신탁이나 주술적 수단에 의해서 행해지거

나, 선서한 후에 마술력 또는 신력을 부름으로써 판결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사람

들은 유해한 주술에 대한 공포에 의하여 보장된 판결이 권위를 가지고 통용할 것

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판결을 위반하는 것은 중대한 모독을 의미하였기 때문이

다. 그 속죄절차가 - 일정한 그리고 곧 후술할 군사적 발전에 의해서 - 재판집회

민단체(Dinggenoβenschaft) 앞에서 소송의 형식을 취하고, 촌락동공체가 판결

의 성립시에 「입회인」으로서 관여한 곳에서는 - 유사시대의 게르만의 경우가 그렇

다 - 협력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즉 재판집회민은 한번 내려

진 판결, 그리고 비난의 여지가 없는 또 비난하더라도 아무런 효과도 없을 판결을

집행하는데 대하여 아무 방해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나 승소한

당사자도 이러한 소극적 태도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었다. 승소한 당사자와

그의 근족은 그들에게 유익한 판결이 패소 당사자에 의하여 즉시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력구제에 의하여 그의 준수를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게르만에

서는 로마에서처럼 그의 자력구제는 보통 - 물건에 관한 분쟁이건 살인에 관한 분

쟁이건 - 판결에 의하여 확정된 속죄금 또는 소송당사자 쌍방이 협정한 속죄금의

지불 시까지 패소당사자의 인격을 인질로 한다는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군주나 정무관의 명령권이 평화에의 정치적 관념에서 집행을 방해하는 자에 간

섭하고 또 패소당사자의 저항을 법적 제재, 특히 평화상실로써 위하하게 되어 비

로소 처분집행을 행한 관직적 기구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전부, 「민

사적」 절차와 「형사적」 절차의 구별이 결여되고 있다. 이러한 민사와 형사의 원시적

인 완전한 무차별성은 특수적인 법적 명예층의 영향 아래 고대의 속죄재판으로부

터의 발전의 연속성의 요소를 장기간 보존하고, 또 「관료제화하는」 것이 가장 적은

법에서 나타난다. 즉 로마법이나 영국법에서 이러한 무차별성은 구체적인 물을 회

복하기 위한 원물집성(Realexekution)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토지에 관

한 소유권 회복의 소의 경우에는 단죄는 원칙으로 예컨대 화폐로써 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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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6 1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것은 만사를 화폐로써 평가하도록 가르친 진보된 시장발전의 결과는 결코 아니

고, 오히려 그것은 불법행위, 불법의 점유까지도 속죄를, 단지 속죄만을 요구하고,

개인은 인격으로서 그것을 보장해야 된다는 원시적 원리의 귀결인 것이다. 원물집

행은 대륙에서는 중세 초에 군주의 명령권이 급속히 상승하는 힘에 조응하여 비교

적 빨리 나타났다. 이에 반하여 영국의 소송법이 토지에 관해서 원물집행을 가능

케 하기 위해서 최근까지 어떠한 특유의 의제를 수용했나 하는 것은 고지되어 있

는 바이다. 로마에서는 직권활동이 일반적으로 축소화되었으나 그것은 아마 뒤에

알 수 있듯이 명예층 지배의 결과이다 - 이것이 원물집행에 가름하게 금전급부집

행(Geldkondemnation)이 존속한 이유이다,

제5절 「불법행위」와 「범죄」

본래, 소송은 객관적으로 위법이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피소추자 측에 위

반행위(Frevel)가 있을 것을 언제나 조건으로 했다는 같은 사정이 실체법에도 대

단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 「채무」는 예외 없이 범죄의 채무였다. 채권계약은 뒤

에 우리가 관찰하듯이, 시초에는 완전히 범죄적인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에서

는 중세에서도 아직 형식적·강제적인 범죄가 결부되고 있었다. 채무가 본래 「상속

인」 자신에 승계되지 않았다는 것도 「상속법」의 관념이 결여되었다는 것과 함께 상

술한 바와 같은 점에 그 이유가 있다. 계약상의 채무에 대한 상속인의 책임은 뒤에

알려지듯이, 처음에는 위법에 대한 근족단체의 공동채무에 의하여, 나중에는 가

단체나 권력종속자 또는 권력보유자에 의한 공동책임을 인정한다는 방법으로 구

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로 다양하였다. 또 현대의 상거래에 있어 필수

적인 원리인 「한트-바레-한트」(Hand wahre Hand) - 즉 물의 선의적 취득의 소

유권의 추급에 대한 보호 - 와 같은 법명제도 본래 다음의 원칙, 즉 절도나 고매

자(故買者)에 대해서 위법행위를 이유로 해서(exdeicto)만 소송이 성립한다는 원

칙에서 산출된다. 그 후에 계약적 소송의 발전과 「물적」 소권, 「인적」 소권의 구별

의 준별에 따라서 각기의 법체계에서 매우 다양한 운명이 경험되었다. 이리하여 고

대 로마법은 영국법 또는 중국법에 비하여 상당히 합리적으로 발전한 인도법과 같

이 소유물반환청구권(Vindikation)을 위하여 선의취득자의 보호를 제거하였으나,

영국법과 인도법에서는 공개시장에서의 매주를 위하여 거래의 안전이라는 점에서

다시 합리적으로 부활하였다. 이렇게 위의 법명제는 독일법에는 타당하는데 로마

법과 영국법에서는 타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 거래관계를 아주 각종각양의 실

체법에도 적응시킬 수 있다는 것의 하나의 예이며, 또 법발전의 광범한 자기법제성

(Eigengesetzlichkeit)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프랑크 법률예문집에서

의 부동산소유에 관한 소(Grundstückklage)의 「너는 불법으로 점유한다」(malo

ordinetenes)가 있다. 이것도 당해 소송을 위하여 필요한 불법행위의 요건이다 -

이 해석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명확치 않으나 - 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쌍면적인 로

마의 소유물반환소송과 그리스의 대물소송(Diadikasie)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구

성을 가진 게르만의 부동산 점유의 소(Grundbesitzklagen)와 다음의 결론을 추

론시킨다. 즉 본래 레쿠르스의 소(Rekursklagen)가 문제로 되었던 이 경우에는

바꾸어 말하면 당인이 토지지배에 의하여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가진 성원(「귀리테스」는 성원을 의미하고 구레로스는 성원의 지분을 의미한다)인가

의 여부가 문제로 된 이 경우에는 특별한 법리가 지배했었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원래 직권에 의한 판결의 집행이 없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와 같이 원

시적으로는 「직권에 근거하는」 위법행위의 소추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가지배의 내부에서 징계는 모두 가장의 권력에 의해서 행하여졌고, 씨족간

의 분쟁은 씨족의 장로가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전부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이

유·양식·정도도 지배자의 자유재량에 있는 것이므로 「형법」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

지 않았다. 형법은 가의 외부에 원시적인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개인의 행위

가 인접단체, 씨족 당해 단체 또는 그 개인이 속하는 정치단체를 그들의 성원 전체

에 대하여 위험을 주는 경우에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특히 도움이 된 것은 다

른 종류의 행위, 종교범죄와 군사범죄였다. 최초는 마술적 규범, 예컨대 터부규범

이 침해되어, 그 결과 유해한 주술의 형식으로 마술력 있는 자의 분노, 무언가 신

비적인 것 또는 신들의 분노가 침해자 자신에도 미치게 된다는 데에서 형법이 발

전하였다. 다음에 그 성원들은 마술자 또는 제사에게 사주되어 추방(평화상실)이

나 사적 제재(추대인의 투석형에 그러하였다)나 속죄수단으로 이러한 규범침해에

응하였다. 이러한 종교범죄에 관한 절차는 씨족상호간의 「복수」에 대하여 「단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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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6 1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것은 만사를 화폐로써 평가하도록 가르친 진보된 시장발전의 결과는 결코 아니

고, 오히려 그것은 불법행위, 불법의 점유까지도 속죄를, 단지 속죄만을 요구하고,

개인은 인격으로서 그것을 보장해야 된다는 원시적 원리의 귀결인 것이다. 원물집

행은 대륙에서는 중세 초에 군주의 명령권이 급속히 상승하는 힘에 조응하여 비교

적 빨리 나타났다. 이에 반하여 영국의 소송법이 토지에 관해서 원물집행을 가능

케 하기 위해서 최근까지 어떠한 특유의 의제를 수용했나 하는 것은 고지되어 있

는 바이다. 로마에서는 직권활동이 일반적으로 축소화되었으나 그것은 아마 뒤에

알 수 있듯이 명예층 지배의 결과이다 - 이것이 원물집행에 가름하게 금전급부집

행(Geldkondemnation)이 존속한 이유이다,

제5절 「불법행위」와 「범죄」

본래, 소송은 객관적으로 위법이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피소추자 측에 위

반행위(Frevel)가 있을 것을 언제나 조건으로 했다는 같은 사정이 실체법에도 대

단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 「채무」는 예외 없이 범죄의 채무였다. 채권계약은 뒤

에 우리가 관찰하듯이, 시초에는 완전히 범죄적인 것으로 구성되었으며, 영국에서

는 중세에서도 아직 형식적·강제적인 범죄가 결부되고 있었다. 채무가 본래 「상속

인」 자신에 승계되지 않았다는 것도 「상속법」의 관념이 결여되었다는 것과 함께 상

술한 바와 같은 점에 그 이유가 있다. 계약상의 채무에 대한 상속인의 책임은 뒤에

알려지듯이, 처음에는 위법에 대한 근족단체의 공동채무에 의하여, 나중에는 가

단체나 권력종속자 또는 권력보유자에 의한 공동책임을 인정한다는 방법으로 구

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로 다양하였다. 또 현대의 상거래에 있어 필수

적인 원리인 「한트-바레-한트」(Hand wahre Hand) - 즉 물의 선의적 취득의 소

유권의 추급에 대한 보호 - 와 같은 법명제도 본래 다음의 원칙, 즉 절도나 고매

자(故買者)에 대해서 위법행위를 이유로 해서(exdeicto)만 소송이 성립한다는 원

칙에서 산출된다. 그 후에 계약적 소송의 발전과 「물적」 소권, 「인적」 소권의 구별

의 준별에 따라서 각기의 법체계에서 매우 다양한 운명이 경험되었다. 이리하여 고

대 로마법은 영국법 또는 중국법에 비하여 상당히 합리적으로 발전한 인도법과 같

이 소유물반환청구권(Vindikation)을 위하여 선의취득자의 보호를 제거하였으나,

영국법과 인도법에서는 공개시장에서의 매주를 위하여 거래의 안전이라는 점에서

다시 합리적으로 부활하였다. 이렇게 위의 법명제는 독일법에는 타당하는데 로마

법과 영국법에서는 타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 거래관계를 아주 각종각양의 실

체법에도 적응시킬 수 있다는 것의 하나의 예이며, 또 법발전의 광범한 자기법제성

(Eigengesetzlichkeit)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프랑크 법률예문집에서

의 부동산소유에 관한 소(Grundstückklage)의 「너는 불법으로 점유한다」(malo

ordinetenes)가 있다. 이것도 당해 소송을 위하여 필요한 불법행위의 요건이다 -

이 해석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명확치 않으나 - 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쌍면적인 로

마의 소유물반환소송과 그리스의 대물소송(Diadikasie)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구

성을 가진 게르만의 부동산 점유의 소(Grundbesitzklagen)와 다음의 결론을 추

론시킨다. 즉 본래 레쿠르스의 소(Rekursklagen)가 문제로 되었던 이 경우에는

바꾸어 말하면 당인이 토지지배에 의하여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가진 성원(「귀리테스」는 성원을 의미하고 구레로스는 성원의 지분을 의미한다)인가

의 여부가 문제로 된 이 경우에는 특별한 법리가 지배했었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원래 직권에 의한 판결의 집행이 없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와 같이 원

시적으로는 「직권에 근거하는」 위법행위의 소추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가지배의 내부에서 징계는 모두 가장의 권력에 의해서 행하여졌고, 씨족간

의 분쟁은 씨족의 장로가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전부를 통하여 볼 수 있는 이

유·양식·정도도 지배자의 자유재량에 있는 것이므로 「형법」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

지 않았다. 형법은 가의 외부에 원시적인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개인의 행위

가 인접단체, 씨족 당해 단체 또는 그 개인이 속하는 정치단체를 그들의 성원 전체

에 대하여 위험을 주는 경우에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특히 도움이 된 것은 다

른 종류의 행위, 종교범죄와 군사범죄였다. 최초는 마술적 규범, 예컨대 터부규범

이 침해되어, 그 결과 유해한 주술의 형식으로 마술력 있는 자의 분노, 무언가 신

비적인 것 또는 신들의 분노가 침해자 자신에도 미치게 된다는 데에서 형법이 발

전하였다. 다음에 그 성원들은 마술자 또는 제사에게 사주되어 추방(평화상실)이

나 사적 제재(추대인의 투석형에 그러하였다)나 속죄수단으로 이러한 규범침해에

응하였다. 이러한 종교범죄에 관한 절차는 씨족상호간의 「복수」에 대하여 「단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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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88 18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부의 형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종교범죄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단체 내부

의 형벌」의 주요 원천이다. 「단체 내부의 형벌」의 제2의 주요 원천이 된 것은 정치

적 따라서 원시적으로는 군사적 범죄이고, 이것이 기원으로 되고 있다. 즉 배반에

의하여 방위단체의 안전을 위험하게 한 자, 또는 전투훈련이 생긴 후에는 군기위반

또는 비겁에 의해서 그것을 위험하게 한 자는 장군과 군대에 의해서 형벌에 처해졌

다. 그러한 응보는 대개 아주 간단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 행하여졌다.

제6절 「명령권」

특히 복수로부터 「형사절차」에로 이르는 것이 직접적인 길이며, 여기서 절차는

확고한 형식과 규칙에 구속되게 된다 - 우리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다음에 보

기로 하자. 범죄에 대해서 가부가 내리는 제재, 범죄에 대한 종교적 제재, 군사적

제재는 우선 형식이나 규칙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가부의

권력 아래서는 대개 이 미지의 상태가 계속된다. 물론 가부의 권력도 다른 권력들,

즉 씨족적 권력, 종교적 권력, 군사적 권력의 간섭에 의하여 때로는 제약되는 일은

있으나 그의 지배영역 내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 외에는 거의 법 규칙에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하여 가외부의 원시적 권력들, 거기에는 가지배적 성질을 가

진 권력이 가외부의 관계에 이행한 경우의(즉 「가산군주적인」) 권력도 포함되어 있

으나 요컨대 가내부적이 아닌 이상 전 권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점차 규칙에

구속되어 갔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권력들을 우리는 「명령권」이라는 공동의 이

름으로 총괄하기로 한다. 그러나 명령권을 구속하는 규칙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

가 하는 것, 다시 말하면 명령권의 당사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어떠한 범위의

규칙을 정하였는가, 또는 그 당사자가 복종에도 사실상의 제한이 있다는 것을 고

려하여 어떤 범위의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또는 담당자가 다른 권력

들에 의한 정립에 근거하여 어떤 범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지배에

관한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잠시 도외시하기로 한다. 형벌을 과하는 권력, 특히

위반자를 직접적 권력에 의하여 굴복시키는 권력이 명령권의 기본적 요소를 이룬

다는 것은 현대에서보다 과거에 더욱 현저하였다. 이러한 가벌권이 명령권보유자에

종속하는 「기관」에 향할 경우도 있고(징계권[Disziplinargewalt]) 또는 「신민」에게

향하는 것도 있다(형벌권[Bussgewalt]). 이러한 점에서 공 「법」은 직접 형법과 접

촉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종류의 규칙이 사실상 구속력을 가지고 타당하는 규범

들의 복합체로서 확정되게 될 때에 여하튼 「공법」이 성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맹아

적이라 할지라도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또 「종교법」과 같이 학문적 고찰의 특별

의 대상으로서 성립한다.

제7절 「권력의 제한」과 「권력의 분립」

이상의 규범들은 당해 명령권의 제한을 의미하나 다른 한 편 전체 제약이 「규범

적」성격을 가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의 종류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의 제한, 둘은 권력의 분립. 하나는 (1) 구체적 명령권이 종

교적 효력이 있는 전통이나 법규에 의하여 명령종속자들의 권리에 접할 경우이다.

여기서는 권력보유자는 단지 일정한 종류의 명령의 권능만을, 또는 일정한 예외를

수반하기는 하나 일단의 명령을 내릴 권능을 단지 일정한 전제 아래서만 가진다.

따라서 이 경우에서만 어느 명령권도 합법이고 또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제한이 「법적」 제한인가 「습률적」 제한인가 또는 「관습에 의한」 제한인가 라는 문제

는 이 제한의 준수가 어떤 불안전한 강제수단이라 할지라도 여하튼 강제기관에 의

하여 보장되는가 또는 습률에 의한 비난만이 그것을 보장하는가, 또는 끝으로 합

의적 제한이 전연 없는가 라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른 것은 (2) 명령권이 다른

명령권, 즉 그것과 동등인 또는 어떤 점에서는 그것보다 상위의 명령권에 접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후자가 통용함으로써 전자가 제한되게 된다.

이 권력제한과 권력분립의 양자는 동시에 생길 수도 있다. 또한 「권한」에 따라서

구성된 근대적 국가기구의 특징은 바로 이 연계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즉 근대적

국가기구는 일정한 명령권들 - 권력분립의 일반적 규칙에 따라서 외면적으로 모

두 서로 한계되고 있는 동시에 전체로서도 권력제한이 정해져 있는 결과, 자기의

명령하는 권력의 합법상의 내면적 한계도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명령권들 - 을 전제

로 하는 것이므로, 근대적 국가기구의 본질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선발된 이들

명령권의 담당자의 기구적 결합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즉 권력제한과 권력

분립은 근대적 국가기구의 특징적 형식과는 전연 다른 구조를 취할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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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형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종교범죄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단체 내부

의 형벌」의 주요 원천이다. 「단체 내부의 형벌」의 제2의 주요 원천이 된 것은 정치

적 따라서 원시적으로는 군사적 범죄이고, 이것이 기원으로 되고 있다. 즉 배반에

의하여 방위단체의 안전을 위험하게 한 자, 또는 전투훈련이 생긴 후에는 군기위반

또는 비겁에 의해서 그것을 위험하게 한 자는 장군과 군대에 의해서 형벌에 처해졌

다. 그러한 응보는 대개 아주 간단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 행하여졌다.

제6절 「명령권」

특히 복수로부터 「형사절차」에로 이르는 것이 직접적인 길이며, 여기서 절차는

확고한 형식과 규칙에 구속되게 된다 - 우리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다음에 보

기로 하자. 범죄에 대해서 가부가 내리는 제재, 범죄에 대한 종교적 제재, 군사적

제재는 우선 형식이나 규칙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가부의

권력 아래서는 대개 이 미지의 상태가 계속된다. 물론 가부의 권력도 다른 권력들,

즉 씨족적 권력, 종교적 권력, 군사적 권력의 간섭에 의하여 때로는 제약되는 일은

있으나 그의 지배영역 내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 외에는 거의 법 규칙에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하여 가외부의 원시적 권력들, 거기에는 가지배적 성질을 가

진 권력이 가외부의 관계에 이행한 경우의(즉 「가산군주적인」) 권력도 포함되어 있

으나 요컨대 가내부적이 아닌 이상 전 권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점차 규칙에

구속되어 갔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권력들을 우리는 「명령권」이라는 공동의 이

름으로 총괄하기로 한다. 그러나 명령권을 구속하는 규칙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

가 하는 것, 다시 말하면 명령권의 당사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어떠한 범위의

규칙을 정하였는가, 또는 그 당사자가 복종에도 사실상의 제한이 있다는 것을 고

려하여 어떤 범위의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또는 담당자가 다른 권력

들에 의한 정립에 근거하여 어떤 범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지배에

관한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잠시 도외시하기로 한다. 형벌을 과하는 권력, 특히

위반자를 직접적 권력에 의하여 굴복시키는 권력이 명령권의 기본적 요소를 이룬

다는 것은 현대에서보다 과거에 더욱 현저하였다. 이러한 가벌권이 명령권보유자에

종속하는 「기관」에 향할 경우도 있고(징계권[Disziplinargewalt]) 또는 「신민」에게

향하는 것도 있다(형벌권[Bussgewalt]). 이러한 점에서 공 「법」은 직접 형법과 접

촉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종류의 규칙이 사실상 구속력을 가지고 타당하는 규범

들의 복합체로서 확정되게 될 때에 여하튼 「공법」이 성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맹아

적이라 할지라도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또 「종교법」과 같이 학문적 고찰의 특별

의 대상으로서 성립한다.

제7절 「권력의 제한」과 「권력의 분립」

이상의 규범들은 당해 명령권의 제한을 의미하나 다른 한 편 전체 제약이 「규범

적」성격을 가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제한의 종류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의 제한, 둘은 권력의 분립. 하나는 (1) 구체적 명령권이 종

교적 효력이 있는 전통이나 법규에 의하여 명령종속자들의 권리에 접할 경우이다.

여기서는 권력보유자는 단지 일정한 종류의 명령의 권능만을, 또는 일정한 예외를

수반하기는 하나 일단의 명령을 내릴 권능을 단지 일정한 전제 아래서만 가진다.

따라서 이 경우에서만 어느 명령권도 합법이고 또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제한이 「법적」 제한인가 「습률적」 제한인가 또는 「관습에 의한」 제한인가 라는 문제

는 이 제한의 준수가 어떤 불안전한 강제수단이라 할지라도 여하튼 강제기관에 의

하여 보장되는가 또는 습률에 의한 비난만이 그것을 보장하는가, 또는 끝으로 합

의적 제한이 전연 없는가 라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른 것은 (2) 명령권이 다른

명령권, 즉 그것과 동등인 또는 어떤 점에서는 그것보다 상위의 명령권에 접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후자가 통용함으로써 전자가 제한되게 된다.

이 권력제한과 권력분립의 양자는 동시에 생길 수도 있다. 또한 「권한」에 따라서

구성된 근대적 국가기구의 특징은 바로 이 연계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즉 근대적

국가기구는 일정한 명령권들 - 권력분립의 일반적 규칙에 따라서 외면적으로 모

두 서로 한계되고 있는 동시에 전체로서도 권력제한이 정해져 있는 결과, 자기의

명령하는 권력의 합법상의 내면적 한계도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명령권들 - 을 전제

로 하는 것이므로, 근대적 국가기구의 본질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선발된 이들

명령권의 담당자의 기구적 결합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즉 권력제한과 권력

분립은 근대적 국가기구의 특징적 형식과는 전연 다른 구조를 취할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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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0 1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것은 특히 권력분립에서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의 「동등, 또는 상위의 권력」(par

majorve potestas)의 개입권(Interzessionsrecht)에서, 가산적·신분적·봉건적

정치형태에서 권력분립이 절대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것에 관해서는 뒤에

상술할 것이다. 권력분립이 처음으로 「공법」의 관념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 몽테

스키외의 명제는 올바로 이해한다면, 확실히 일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그것은

그가 영국에서 발견했다고 믿은 권력분립에만 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른

한 편, 어떤 종류의 권력분립이라도 반드시 공법의 사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합

리적인 국가기구의 특징적인 권력분립이 이러한 사상의 최초인 창조자로 되는 것

이다. 공법에 관한 학문적 교설은 단지 서양에서만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만 정치적 단체가 전적으로 합리적으로 구성된 권한 및 권력분립을 수반하는 기구

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합리적 권력분립이 존재했던 고대에 있어서는 국법은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잘 알려졌다. 즉 명령권에 관하여 개별로 로마의 관료가 설

한 교설은 실은 학문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체의 학설은 본질적으

로 국가철학이지 국법은 아니었다. 중세에서는 권력분립은 권리(특권 내지 봉건적

청구권)의 경합으로서만 알려졌다. 따라서 국법은 분리적으로 취급한다는 일은 없

었다. 국법에 대응하여 존재했던 것은 「봉건법」과 「가인법」안에 포함되어 있다. 약

간의 요소의 결합, 즉 사실의 세계에서는 권력제한과 권력분립을 점차 기구적 구

조에 결부해 가는 등족국가(Ständestaat)에서의 특권자들의 공적 단체에의 결합,

이론의 세계에서는 로마의 단체개념, 자연법, 끝으로 프랑스의 학설, 이것들이 비

로소 근대 공법의 결정적인 법적 관념을 만들었다. 우리는 공법의 발전에 관하여

우리에게 연계되는 한에서 지배를 설명할 때에 말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상에서는

주로 현재 「사법」과 「민사소송법」에 맡겨진 경제적으로 주요한 영역에서 법 창조와

법 발전이 어떻게 행하여지고 있는가를 논하기로 한다.

제8절 「법」과 「소송」

현재의 우리의 법학적 사고의 관례에 따르면, 법에 관한 공적 단체들의 활동은

「법 창조」와 「법발견」의 두 가지로 나뉜다. 후자에는 또 순기술적인 것으로서 「집

행」이 결부된다, 현재는 일반적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 「법창조」라고 생각된다. 법

률가의 언어로서 말하면, 각기가 하나의 (또는 약간의) 합리적인 「법명제」의 성격

을 가지는 일반 규범의 정립에 관해서이다. 또 우리가 「법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것

은, 즉 위와 같이 정립된 규범들 및 - 법학적 사고의 활동에 의해서 위의 규범들

로부터 추론되는 - 개개의 「법적 명제들」을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여 그것들

을 위의 규범들, 법적 명제들 아래 「포섭하는」(subsumieren) 경우인 것이다. 물론

법사의 전시대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사법이 사건마다 결정하는 자유로

운 「행정」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법의 창조, 즉 「법규범」의 창조와 법 발견, 즉 개개

의 사건에 법규범을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구별되지 않는 상태였다. 여기에는 법

규범도 없고 법규범의 「적용」에 의한 권리도 없다. 또 객관적 법이 주관적 「특권」

으로서 타당하고, 따라서 객관적 법규범의 「적용」이라는 것이 주체적인 권리청구

의 기초로서 관념되지 않는 곳에서도 사정은 같다. 그러나 그 밖에라도 일반적 법

규범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고, 따라서 이것을 규범 아래 포섭한다는 것이 행해

지지 않은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또 그러한 한에서 사정은 같다. 이것은 비합리적

인 법발견이 행해진 모든 경우에 나타났다. 비합리적인 법발견은 이미 보았듯이 법

발견의 일반적인 원시적 양식을 나타내며, 또 뒤에 보듯이 로마법의 적용범위를 논

외로 하면 그것은 과거의 전부를 혹은 완전히 혹은 적어도 그 단서에서 지배하여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 (법발견에 의하여 적용될) 법규범과 법발견 그것을 위한

규범과의 구별도 그것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실체법과 소송법과의 구별처럼, 반

드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소송심리에 명령권이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상태 아

래서 소송절차가 성립한 곳, 예컨대 초기 로마법에서 또는 기술적으로는 전연 다르

나 영국법에서도 실체적 권리청구는 소송상의 소권범형(Klageschema), 즉 로마

의 「소권」(actio), 영국의 「영장」(writ)의 이용을 구하는 권리와 동일한 것이라고 생

각하더라도 거의 과오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초기 로마의 분류는 소송법

과 사법을 현재와 같이 나누지 않는다. 또 법의 발견이 비합리적인 증명의 방법,

즉 선서나 선서보조 이것들의 마술적 의미에 기초하거나 또는 신판에 기초하는 데

에서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형식적 이유에서 이지만 현재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소

송법상의 문제와 실체법상의 문제가 적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혼효되는 일이 있

다. 이 경우에 이 마술적인 의미심장한 행위에 대한 권리나 의무는 실제적 권리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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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0 1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것은 특히 권력분립에서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의 「동등, 또는 상위의 권력」(par

majorve potestas)의 개입권(Interzessionsrecht)에서, 가산적·신분적·봉건적

정치형태에서 권력분립이 절대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것에 관해서는 뒤에

상술할 것이다. 권력분립이 처음으로 「공법」의 관념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 몽테

스키외의 명제는 올바로 이해한다면, 확실히 일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그것은

그가 영국에서 발견했다고 믿은 권력분립에만 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른

한 편, 어떤 종류의 권력분립이라도 반드시 공법의 사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합

리적인 국가기구의 특징적인 권력분립이 이러한 사상의 최초인 창조자로 되는 것

이다. 공법에 관한 학문적 교설은 단지 서양에서만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만 정치적 단체가 전적으로 합리적으로 구성된 권한 및 권력분립을 수반하는 기구

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합리적 권력분립이 존재했던 고대에 있어서는 국법은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잘 알려졌다. 즉 명령권에 관하여 개별로 로마의 관료가 설

한 교설은 실은 학문적인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체의 학설은 본질적으

로 국가철학이지 국법은 아니었다. 중세에서는 권력분립은 권리(특권 내지 봉건적

청구권)의 경합으로서만 알려졌다. 따라서 국법은 분리적으로 취급한다는 일은 없

었다. 국법에 대응하여 존재했던 것은 「봉건법」과 「가인법」안에 포함되어 있다. 약

간의 요소의 결합, 즉 사실의 세계에서는 권력제한과 권력분립을 점차 기구적 구

조에 결부해 가는 등족국가(Ständestaat)에서의 특권자들의 공적 단체에의 결합,

이론의 세계에서는 로마의 단체개념, 자연법, 끝으로 프랑스의 학설, 이것들이 비

로소 근대 공법의 결정적인 법적 관념을 만들었다. 우리는 공법의 발전에 관하여

우리에게 연계되는 한에서 지배를 설명할 때에 말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상에서는

주로 현재 「사법」과 「민사소송법」에 맡겨진 경제적으로 주요한 영역에서 법 창조와

법 발전이 어떻게 행하여지고 있는가를 논하기로 한다.

제8절 「법」과 「소송」

현재의 우리의 법학적 사고의 관례에 따르면, 법에 관한 공적 단체들의 활동은

「법 창조」와 「법발견」의 두 가지로 나뉜다. 후자에는 또 순기술적인 것으로서 「집

행」이 결부된다, 현재는 일반적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 「법창조」라고 생각된다. 법

률가의 언어로서 말하면, 각기가 하나의 (또는 약간의) 합리적인 「법명제」의 성격

을 가지는 일반 규범의 정립에 관해서이다. 또 우리가 「법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것

은, 즉 위와 같이 정립된 규범들 및 - 법학적 사고의 활동에 의해서 위의 규범들

로부터 추론되는 - 개개의 「법적 명제들」을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여 그것들

을 위의 규범들, 법적 명제들 아래 「포섭하는」(subsumieren) 경우인 것이다. 물론

법사의 전시대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사법이 사건마다 결정하는 자유로

운 「행정」인 곳에서는 어디서나 법의 창조, 즉 「법규범」의 창조와 법 발견, 즉 개개

의 사건에 법규범을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구별되지 않는 상태였다. 여기에는 법

규범도 없고 법규범의 「적용」에 의한 권리도 없다. 또 객관적 법이 주관적 「특권」

으로서 타당하고, 따라서 객관적 법규범의 「적용」이라는 것이 주체적인 권리청구

의 기초로서 관념되지 않는 곳에서도 사정은 같다. 그러나 그 밖에라도 일반적 법

규범을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고, 따라서 이것을 규범 아래 포섭한다는 것이 행해

지지 않은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또 그러한 한에서 사정은 같다. 이것은 비합리적

인 법발견이 행해진 모든 경우에 나타났다. 비합리적인 법발견은 이미 보았듯이 법

발견의 일반적인 원시적 양식을 나타내며, 또 뒤에 보듯이 로마법의 적용범위를 논

외로 하면 그것은 과거의 전부를 혹은 완전히 혹은 적어도 그 단서에서 지배하여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 (법발견에 의하여 적용될) 법규범과 법발견 그것을 위한

규범과의 구별도 그것은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실체법과 소송법과의 구별처럼, 반

드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소송심리에 명령권이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상태 아

래서 소송절차가 성립한 곳, 예컨대 초기 로마법에서 또는 기술적으로는 전연 다르

나 영국법에서도 실체적 권리청구는 소송상의 소권범형(Klageschema), 즉 로마

의 「소권」(actio), 영국의 「영장」(writ)의 이용을 구하는 권리와 동일한 것이라고 생

각하더라도 거의 과오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초기 로마의 분류는 소송법

과 사법을 현재와 같이 나누지 않는다. 또 법의 발견이 비합리적인 증명의 방법,

즉 선서나 선서보조 이것들의 마술적 의미에 기초하거나 또는 신판에 기초하는 데

에서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형식적 이유에서 이지만 현재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소

송법상의 문제와 실체법상의 문제가 적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혼효되는 일이 있

다. 이 경우에 이 마술적인 의미심장한 행위에 대한 권리나 의무는 실제적 권리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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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2 19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구의 일부로서 또는 실체적 권리 청구와 동일한 것으로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

가 더 용이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절차에 대한 규범과 실체적

법규범과의 구별은 소송법서(Richtsteige)의 법서(Rechtsbücher)로부터의 분리라

는 데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초기 로마법 체계에서의 분류와는 다르지만 그

방식에서는 대체로 그것과 같이 분명하게 관철되어 있다.

제9절 합리적·법적 사고의 범주

기술한 바와 같이, 현재 우리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 법 영역에 관한 개

개의 기본적 개념을 구별하는 방법은 고도로 법기술적인 요소에 의존하며 또 부

분적으로는 정치단체의 구조양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간접적으

로만 경제적으로 제약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제적 요소도 들어갈 수 있으나 그것

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한다. 즉 시장의 공동체화와 자유계약을 기초로 하는 합

리화의 결과, 따라서 법창조나 법발견에 의하여 해결될 이해투쟁의 증대하는 복잡

화의 결과, 법 그 자체의 전문적 합리화와 정치단체의 기구적 성격이 최강도로 진

전한 경우에 한하여 경제적 요소가 들어가서 역할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시

논할 것이다. 기타의 모든 순경제적 영향은 구체적으로 제약하는데 불과하고, 일

반적 법규에 까지 미치지 않는다. 다른 한 편, 우리가 그것을 다시 보게 될 것이지

만, 내부적 법기술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에 제약된 법의 특징이 경제의 형성에 강

하게 반작용을 한다. 이하에서 법, 법창조, 법발견의 일반적·형식적 성격에 영향

을 주는 상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을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종류의 성

질 중에서 법의 합리성, 물론 그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법(현재

의 「사 법」)의 합리성의 정도와 양식이 특히 문제로 된다. 법은 법적 사고의 전개가

어떤 합리화의 방향을 취하는가에 따라서 매우 여러 가지의 의미로서 「합리적」일

수 있다. 먼저 법은 (일견하여) 가장 진보적인 사고방법인 일반화(generalisieren)

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일 수 있다. 여기에 일반화라 함은 개개의 사건의 재판의 기

준이 되는 근거를 하나 또는 수개의 「원칙」에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원

칙들이 「법적 명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환원을 하는 데에는 보통 이에 선행하여

또는 이와 동시에 사실을 법적 판단에서 짐작하는 최후의 부분까지 분석하는 것

이 조건이 된다. 또 이와는 반대로 법적 명제들을 차례차례로 정화하는 것도 사실

에 관한 중요한 개개의 징표(Merkmal)를 또 다시 한정하도록 반작용한다. 즉 이

정화는 카주이스틱(Kasuistik)에 기초하여 카주이스틱 측에 서서 이것을 해 나간

다. 그러나 발전한 카주이스틱이 전부 논리적으로 고도로 정화된 「법적 명제들」의

전개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이러한 전개와 보조를 맞추어 간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유추」의 영역에서의 단순한 나열적·직관적 결합을 기초로 한 경우에

도 아주 포괄적인 법적 카주이스틱이 존재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법적

명제들」을 개개의 사건으로부터 분석적으로 취득한다는 것과 함께 「법관계」와 「법

적 제도」의 「법적 구성」이라는 종합적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내

용은 유형적인 경과를 취하는 사회적 작위나 합의에 근거하는 행위에 관하여 법적

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하면 이들 중요한 부분이 그 자신 논리적으

로 모순 없는 양식으로 법적으로 정서되어 갈까, 바꾸어 말하면 「법관계」에 포함된

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 사고방법은 앞의 것과 아주 긴밀한

관련이 있지만 분석을 통한 정화는 아주 고도로 진행하면서 법적으로 중요한 생활

관계의 구성적 파악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분석 쪽은 아주 진

전하지 않는데 또 때로는 순수한 분석에 대한 제한을 위해서라도, 「법관계」의 종합

이 실제상 상대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일도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의 모순은 실은

분석으로부터 언제나 일층 광범한 논리적 과제, 즉 「체계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계화는 물론 원리적으로는 종합적인 「구성」의 작업과 일치하지만

또한 종종 이것과 긴장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체계화는 어떠한 형식의 것이건 후

세의 소산이다. 원시적인 「법」은 이러한 체계화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사고관습

에 따르면, 이 체계화가 의미하는 것은 분석으로 얻은 모든 법적 명제들을 이처럼

관계시킨다는 점에 있다. 즉 법적 명제들이 상호 논리적으로 명확한 그 자신 논리

적으로 모순이 없는 규칙의 체계, 특히 원칙적으로 흠결 없는 체계를 구성하도록

그들을 관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체계 아래서는 생각할 수 있는 한

의 모든 사실을 당연히 그 규범들의 어느 하나 안에 논리적으로 포섭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면 안 되고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그 사실의 질서는 본질적인 보장을 결여

한 것이 된다. 현재에도 모든 법이 이러한 요구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며 (예컨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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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2 19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구의 일부로서 또는 실체적 권리 청구와 동일한 것으로서 나타난다. 후자의 경우

가 더 용이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절차에 대한 규범과 실체적

법규범과의 구별은 소송법서(Richtsteige)의 법서(Rechtsbücher)로부터의 분리라

는 데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초기 로마법 체계에서의 분류와는 다르지만 그

방식에서는 대체로 그것과 같이 분명하게 관철되어 있다.

제9절 합리적·법적 사고의 범주

기술한 바와 같이, 현재 우리들에게 자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 법 영역에 관한 개

개의 기본적 개념을 구별하는 방법은 고도로 법기술적인 요소에 의존하며 또 부

분적으로는 정치단체의 구조양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간접적으

로만 경제적으로 제약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제적 요소도 들어갈 수 있으나 그것

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한한다. 즉 시장의 공동체화와 자유계약을 기초로 하는 합

리화의 결과, 따라서 법창조나 법발견에 의하여 해결될 이해투쟁의 증대하는 복잡

화의 결과, 법 그 자체의 전문적 합리화와 정치단체의 기구적 성격이 최강도로 진

전한 경우에 한하여 경제적 요소가 들어가서 역할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시

논할 것이다. 기타의 모든 순경제적 영향은 구체적으로 제약하는데 불과하고, 일

반적 법규에 까지 미치지 않는다. 다른 한 편, 우리가 그것을 다시 보게 될 것이지

만, 내부적 법기술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에 제약된 법의 특징이 경제의 형성에 강

하게 반작용을 한다. 이하에서 법, 법창조, 법발견의 일반적·형식적 성격에 영향

을 주는 상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을 고찰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종류의 성

질 중에서 법의 합리성, 물론 그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법(현재

의 「사 법」)의 합리성의 정도와 양식이 특히 문제로 된다. 법은 법적 사고의 전개가

어떤 합리화의 방향을 취하는가에 따라서 매우 여러 가지의 의미로서 「합리적」일

수 있다. 먼저 법은 (일견하여) 가장 진보적인 사고방법인 일반화(generalisieren)

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일 수 있다. 여기에 일반화라 함은 개개의 사건의 재판의 기

준이 되는 근거를 하나 또는 수개의 「원칙」에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원

칙들이 「법적 명제들」인 것이다. 이러한 환원을 하는 데에는 보통 이에 선행하여

또는 이와 동시에 사실을 법적 판단에서 짐작하는 최후의 부분까지 분석하는 것

이 조건이 된다. 또 이와는 반대로 법적 명제들을 차례차례로 정화하는 것도 사실

에 관한 중요한 개개의 징표(Merkmal)를 또 다시 한정하도록 반작용한다. 즉 이

정화는 카주이스틱(Kasuistik)에 기초하여 카주이스틱 측에 서서 이것을 해 나간

다. 그러나 발전한 카주이스틱이 전부 논리적으로 고도로 정화된 「법적 명제들」의

전개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이러한 전개와 보조를 맞추어 간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유추」의 영역에서의 단순한 나열적·직관적 결합을 기초로 한 경우에

도 아주 포괄적인 법적 카주이스틱이 존재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법적

명제들」을 개개의 사건으로부터 분석적으로 취득한다는 것과 함께 「법관계」와 「법

적 제도」의 「법적 구성」이라는 종합적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내

용은 유형적인 경과를 취하는 사회적 작위나 합의에 근거하는 행위에 관하여 법적

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하면 이들 중요한 부분이 그 자신 논리적으

로 모순 없는 양식으로 법적으로 정서되어 갈까, 바꾸어 말하면 「법관계」에 포함된

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 사고방법은 앞의 것과 아주 긴밀한

관련이 있지만 분석을 통한 정화는 아주 고도로 진행하면서 법적으로 중요한 생활

관계의 구성적 파악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분석 쪽은 아주 진

전하지 않는데 또 때로는 순수한 분석에 대한 제한을 위해서라도, 「법관계」의 종합

이 실제상 상대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일도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의 모순은 실은

분석으로부터 언제나 일층 광범한 논리적 과제, 즉 「체계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체계화는 물론 원리적으로는 종합적인 「구성」의 작업과 일치하지만

또한 종종 이것과 긴장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체계화는 어떠한 형식의 것이건 후

세의 소산이다. 원시적인 「법」은 이러한 체계화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사고관습

에 따르면, 이 체계화가 의미하는 것은 분석으로 얻은 모든 법적 명제들을 이처럼

관계시킨다는 점에 있다. 즉 법적 명제들이 상호 논리적으로 명확한 그 자신 논리

적으로 모순이 없는 규칙의 체계, 특히 원칙적으로 흠결 없는 체계를 구성하도록

그들을 관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체계 아래서는 생각할 수 있는 한

의 모든 사실을 당연히 그 규범들의 어느 하나 안에 논리적으로 포섭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면 안 되고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그 사실의 질서는 본질적인 보장을 결여

한 것이 된다. 현재에도 모든 법이 이러한 요구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며 (예컨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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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4 19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국법은 그렇지 않다) 과거의 법도 이러한 요구를 가지는 것은 아주 적다는 것이 원

칙이었다. 과거의 법으로서 이러한 요구를 가지는 데에서도 체계의 논리적 정화는

전연 발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극히 많았다. 그러나 보통은 체계화는 주로 법의 소

재에 질서를 주는 외부적 형식이었으니까, 법적 명제들을 분석적으로 만드는 양식

에도 또는 법관계의 구성에 대해서도 거의 영향을 미치는 바가 없었다. (로마법에

서 발전한) 특수·근대적인 체계화만이 법적으로 중요한 태도에 관해서도 또한 법

적 명제들에 관해서도 그 「논리적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법 관계나 카주이스

틱 그것은 먼저 「직관적」인 징표에서 성립한다는 사정도 있고 하여 반대로 이러한

사고방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지만 말이다.

법실무는 사건에서 각종의 법기술상의 수단을 가지고 작업한다. 왜냐하면 이상

의 모든 대립물과 결합해서 가느냐 또는 교차해서 가느냐에 따라서 법기술상의 수

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가장 간단한 사례를 들기로 한다.

법창조와 법발견은 합리적이거나 또는 비합리적이거나의 어느 것 일 수 있다. 법

창조와 법발견을 규제함에 있어서 이성적인 수단 이외의 것이 사용된다면, 예컨

대 신판이나 신판의 대용물을 이용한다면 그 경우에 양자는 형식적으로는 비합

리적이다. 다른 한편 개개의 사건의 완전히 구체적인 평가로서 일반적 규범이 아니

라 윤리적·감정적·정치적인 근거가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경우에는 양자는 실질적으

로 비합리적이다. 「합리적」 법창조와 법발견은 형식적으로 합리적이거나 실질적으

로 합리적이거나의 어느 하나일 것이다. 형식적인 법 전체는 형식적으로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리고 법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명확한 일반적 사

실의 징표만이 실체법상 그리고 소송상 존중된다는 한에서만 그리하다. 이러한 형

식주의는 또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법적으로 관련되는 징표가 감각적이

고 구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외부적 징표를 준수한다는 것, 즉 일정한 언어

로써 말하고, 서명을 하고 특정한 의의 있는 상징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법형식주

의의 가장 엄격한 성격을 의미한다. 법적으로 관련되는 징표가 윤리적인 의미해석

에 의하여 전개되고, 또 거기에 따라서 엄격하게 추상적인 규칙의 형태로서 고정된

법 개념이 구성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합리성에 있어서는 외부적 징

표의 명백성이 약화되기 때문에 직관적 형식주의는 쇠약해진다. 그러나 이로써 실

질적 합리성에 대한 대립은 강화될 뿐이다. 왜냐하면 후자, 즉 실질적 합리성은 추

상적 의미해석에 의한 논리적 일반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규범이 법문제의 결정

에 대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실질적 합리성이 의거하

는 규범은 외부적 징표의 형식주의나 논리적 추상의 형식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규범, 즉 윤리적 명령 또는 공리적 또는 기타의 합목적적 규칙이나 정치

적 원리이다. 그러나 법이 형식적 성격을 갖출 경우에 한하여 법을 현대적 의미에

서 특수 전문적, 법학적으로 정화해 갈 수가 있다. 또 감각적 징표의 절대적 형식

주의가 충분하면 그러한 한에서 부화는 카주이스틱에 제약된다. 해석에 의한 추상

만이 특수한 체계적 과제를 가능케 한다. 즉 유효한 것으로서 승인된 개개의 법규

를 논리의 수단으로 총괄하고 합리화하여 그 자신 모순 없는 추상적인 법적 명제

들의 관계로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법의 형성에 관여한 힘들이 어떻

게 하여 법의 형식적 성질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기로 하자. 현재의 법학

적 작업은, 적어도 그 형식면에 관한 작업은 보통법의 법학을 창조자로 하면서 방

법론적으로 논리적인 합리성의 고조의 최고도에까지 도달하였으나 그의 출발점으

로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청이다. 즉 (1) 구체적인 법적 판단은 전부, 구체적인 「사

정」에 대한 추상적인 법명제의 「적용」일 것, (2) 전체 구체적 사정에 대해서는 법의

논리를 수단으로 하여 현행의 추상적 법적 명제들로부터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3) 따라서 현행의 객관적인 법은 「흠결 없는」법적 명제들의 체계를 이루든

가 또는 잠재적으로 이러한 체계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법의 통용이라는 목적에 관해서는 이러한 체계로서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4) 법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은 법적으로도 중요하

지 않다는 것, - 사람들의 사회활동은 법적 명제들의 「적용」 또는 「실현」이거나, 이

와는 반대로 법적 명제들에 대한 「위반」중의 하나로서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귀결은 - 명확하지는 않지만 - 특히 슈타믈러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상은 빠짐없이 「법적으로 정서된다」는 것도, 실은 법체계의 「무흠결성」에

일치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법적 사고의 이러한 요청은 일시 도외시하고, 법의 기능에 관해서 중요

한 법의 일반적인 몇 가지의 형식적인 성질을 검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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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4 19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국법은 그렇지 않다) 과거의 법도 이러한 요구를 가지는 것은 아주 적다는 것이 원

칙이었다. 과거의 법으로서 이러한 요구를 가지는 데에서도 체계의 논리적 정화는

전연 발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극히 많았다. 그러나 보통은 체계화는 주로 법의 소

재에 질서를 주는 외부적 형식이었으니까, 법적 명제들을 분석적으로 만드는 양식

에도 또는 법관계의 구성에 대해서도 거의 영향을 미치는 바가 없었다. (로마법에

서 발전한) 특수·근대적인 체계화만이 법적으로 중요한 태도에 관해서도 또한 법

적 명제들에 관해서도 그 「논리적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법 관계나 카주이스

틱 그것은 먼저 「직관적」인 징표에서 성립한다는 사정도 있고 하여 반대로 이러한

사고방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지만 말이다.

법실무는 사건에서 각종의 법기술상의 수단을 가지고 작업한다. 왜냐하면 이상

의 모든 대립물과 결합해서 가느냐 또는 교차해서 가느냐에 따라서 법기술상의 수

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가장 간단한 사례를 들기로 한다.

법창조와 법발견은 합리적이거나 또는 비합리적이거나의 어느 것 일 수 있다. 법

창조와 법발견을 규제함에 있어서 이성적인 수단 이외의 것이 사용된다면, 예컨

대 신판이나 신판의 대용물을 이용한다면 그 경우에 양자는 형식적으로는 비합

리적이다. 다른 한편 개개의 사건의 완전히 구체적인 평가로서 일반적 규범이 아니

라 윤리적·감정적·정치적인 근거가 결정의 기준이 되는 경우에는 양자는 실질적으

로 비합리적이다. 「합리적」 법창조와 법발견은 형식적으로 합리적이거나 실질적으

로 합리적이거나의 어느 하나일 것이다. 형식적인 법 전체는 형식적으로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리고 법이 형식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명확한 일반적 사

실의 징표만이 실체법상 그리고 소송상 존중된다는 한에서만 그리하다. 이러한 형

식주의는 또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법적으로 관련되는 징표가 감각적이

고 구체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외부적 징표를 준수한다는 것, 즉 일정한 언어

로써 말하고, 서명을 하고 특정한 의의 있는 상징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법형식주

의의 가장 엄격한 성격을 의미한다. 법적으로 관련되는 징표가 윤리적인 의미해석

에 의하여 전개되고, 또 거기에 따라서 엄격하게 추상적인 규칙의 형태로서 고정된

법 개념이 구성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합리성에 있어서는 외부적 징

표의 명백성이 약화되기 때문에 직관적 형식주의는 쇠약해진다. 그러나 이로써 실

질적 합리성에 대한 대립은 강화될 뿐이다. 왜냐하면 후자, 즉 실질적 합리성은 추

상적 의미해석에 의한 논리적 일반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규범이 법문제의 결정

에 대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실질적 합리성이 의거하

는 규범은 외부적 징표의 형식주의나 논리적 추상의 형식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규범, 즉 윤리적 명령 또는 공리적 또는 기타의 합목적적 규칙이나 정치

적 원리이다. 그러나 법이 형식적 성격을 갖출 경우에 한하여 법을 현대적 의미에

서 특수 전문적, 법학적으로 정화해 갈 수가 있다. 또 감각적 징표의 절대적 형식

주의가 충분하면 그러한 한에서 부화는 카주이스틱에 제약된다. 해석에 의한 추상

만이 특수한 체계적 과제를 가능케 한다. 즉 유효한 것으로서 승인된 개개의 법규

를 논리의 수단으로 총괄하고 합리화하여 그 자신 모순 없는 추상적인 법적 명제

들의 관계로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법의 형성에 관여한 힘들이 어떻

게 하여 법의 형식적 성질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기로 하자. 현재의 법학

적 작업은, 적어도 그 형식면에 관한 작업은 보통법의 법학을 창조자로 하면서 방

법론적으로 논리적인 합리성의 고조의 최고도에까지 도달하였으나 그의 출발점으

로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청이다. 즉 (1) 구체적인 법적 판단은 전부, 구체적인 「사

정」에 대한 추상적인 법명제의 「적용」일 것, (2) 전체 구체적 사정에 대해서는 법의

논리를 수단으로 하여 현행의 추상적 법적 명제들로부터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3) 따라서 현행의 객관적인 법은 「흠결 없는」법적 명제들의 체계를 이루든

가 또는 잠재적으로 이러한 체계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법의 통용이라는 목적에 관해서는 이러한 체계로서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4) 법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은 법적으로도 중요하

지 않다는 것, - 사람들의 사회활동은 법적 명제들의 「적용」 또는 「실현」이거나, 이

와는 반대로 법적 명제들에 대한 「위반」중의 하나로서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귀결은 - 명확하지는 않지만 - 특히 슈타믈러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상은 빠짐없이 「법적으로 정서된다」는 것도, 실은 법체계의 「무흠결성」에

일치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법적 사고의 이러한 요청은 일시 도외시하고, 법의 기능에 관해서 중요

한 법의 일반적인 몇 가지의 형식적인 성질을 검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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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6 19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2장 객관적 법의 형식의 성격

제1절 새로운 규범의 성립 문제 - 「관습법」

새로운 법규칙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오늘날에는 보통 제정법에 의해서 성립한

다. 즉 단체의 관습헌법 또는 흠정헌법이 합법적인 것으로서 인정하는 형식으로

인위적인 규칙정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이러한 현상이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은 자명하다. 그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원시 시대와 아주 다른 사정 아래서도 그

것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다. 영국의 코먼로는 규칙정립에 의하여 성립한 법인

「제정법」에 직접 대립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정립에 의하지 않는 법은 보통 「관

습법」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관습법은 비교적 아주 근대적인 개념이다. 즉 로마법

에서는 후기에 이르러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보통법 법학의 소산이다. (1) 사실상

의 공통의 관행, (2) 그 합법성에 대한 공통의 확신, (3) 합리성의 조건들 - 독일

의 보통법학은 관습법의 타당성을 이 조건들에 보통 결부시킨다 - 은 전적으로

이론적 사고의 소산이다. 관습법에 관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정의 전

체도 역시 ㅡ 법학적 구성이라고 생각된다. 일체의 비제정법을 구속력 있는 선례

법에 제한하지 않은 이상 법학적 구성을 위해서는 치텔만(Zitelmann) 또는 기이

르케(Gierke)가 그것에다 준 순화된 형식에서의 관습법의 개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법률학의 영역에서의 법사회학자들 람베르(Lambert), 에얼리

히(Ehrlich)의 관습법의 개념에 관한 격렬한 투쟁도 내 생각으로는 전혀 근거 없

는 것이며 법률학적 고찰방법과 사회학적 고찰방법의 혼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다. 「관습법」의 타당성 근거에 관한 종래의 법률적 구성이, 정립되지 않고, 창조된

법의 경험적 「타당성」의 사실상의 성립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타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루는 문제와는 전연 별개의 것이다. 그러한 종래

의 생각은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가리키는 바가 없다. 이러한 종래의 법률적 개

념은 과거에는, 특히 「입법」이 완전히 또는 거의 결여된 시대에 있어서의 법의 사실

적 발전에 관한 견해로서는 소용없는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물

론 이러한 법률적 개념은 후기 로마 및 중세의 사람들이 또한 대륙 및 영국의 사람

들이 법원인 「관습」(consuetudo)의 의의와 전제에 관해서 말한 바에 유래한다. 그

러나 거기서는 오히려 보편적인 타당을 요구하는 합리적인 법과 현재 존재하는 지

역적(국민적) 법의 조정이라는 전형적인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즉 영국에서는 코먼

로라는 국법(lex terrae)과 지역법의 조정의 문제, 유럽 대륙에서는 계수된 로마법

과 국민적 법의 조정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러한 보편적 법에 대항하는 특수한 법

만이 법률가에 의하여 정의된 관습법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것은 법

의 효력에 관해서 보편적인 법만이 합법적인 것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전제에 구

속된 것 외에는 아니다. 그런데 물론 「제정법」이 아닌 영국의 코먼로를 보통의 「관

습법」이라는 정의로서 한정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 이슬람의

idschma는 바로 「신성」한 법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전체의 묵시적인

합의」(tacitus consensus omnium)라고 정의되고 있다 하더라도 「관습법」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제2절 법발전의 사실적 요소, 이해관계자의 행위와 법적 강제

법규범이라는 관념의 싹은 - 기술한 바와 같이1) - 순이론적으로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인 「버릇」(Eingestelltheit)에 근거하

여 최초에는 단순히 사실상의 행위의 관습이 생겨서 이 관습이 (1) 「구속력 있는」

것으로서 느낀다는 것, (2) 그리고 이 관습이 초개인적으로 확대되어 있는 것을 아

는데 따라 그 관습은 「요해에 근거한 것」으로서 높여져서 타인들도 의미를 이해

하고 여기에 대응하는 행위를 하리라는 반의식적인 또는 완전히 의식적인 「기대」

에 의해서 뒷받침하게 된다는 것, 이렇게 되면 (3) 이 사람들은 또 관습을 「습률」

(Konventionen)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인 강제기관에 의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이리하여 그것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순이론적으로도 여기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성화된 움직임 없는 많은 「관습」 안에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

은 어떻게 해서인가라고. 왜냐하면 이러한 관습은 「구속력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자신 안에서부터는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없다고 생각되

기 때문이다. 역사법학파는 일반적 경향으로서는 「민족정신」의 진화라는 것을 인

1) S.187 ff., 195/96; s. unten S. 581/82, 584, Wissenschaftslehre 3, S. 378 (편자).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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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6 19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2장 객관적 법의 형식의 성격

제1절 새로운 규범의 성립 문제 - 「관습법」

새로운 법규칙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오늘날에는 보통 제정법에 의해서 성립한

다. 즉 단체의 관습헌법 또는 흠정헌법이 합법적인 것으로서 인정하는 형식으로

인위적인 규칙정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이러한 현상이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은 자명하다. 그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원시 시대와 아주 다른 사정 아래서도 그

것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다. 영국의 코먼로는 규칙정립에 의하여 성립한 법인

「제정법」에 직접 대립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정립에 의하지 않는 법은 보통 「관

습법」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관습법은 비교적 아주 근대적인 개념이다. 즉 로마법

에서는 후기에 이르러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보통법 법학의 소산이다. (1) 사실상

의 공통의 관행, (2) 그 합법성에 대한 공통의 확신, (3) 합리성의 조건들 - 독일

의 보통법학은 관습법의 타당성을 이 조건들에 보통 결부시킨다 - 은 전적으로

이론적 사고의 소산이다. 관습법에 관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정의 전

체도 역시 ㅡ 법학적 구성이라고 생각된다. 일체의 비제정법을 구속력 있는 선례

법에 제한하지 않은 이상 법학적 구성을 위해서는 치텔만(Zitelmann) 또는 기이

르케(Gierke)가 그것에다 준 순화된 형식에서의 관습법의 개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법률학의 영역에서의 법사회학자들 람베르(Lambert), 에얼리

히(Ehrlich)의 관습법의 개념에 관한 격렬한 투쟁도 내 생각으로는 전혀 근거 없

는 것이며 법률학적 고찰방법과 사회학적 고찰방법의 혼동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다. 「관습법」의 타당성 근거에 관한 종래의 법률적 구성이, 정립되지 않고, 창조된

법의 경험적 「타당성」의 사실상의 성립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타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루는 문제와는 전연 별개의 것이다. 그러한 종래

의 생각은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가리키는 바가 없다. 이러한 종래의 법률적 개

념은 과거에는, 특히 「입법」이 완전히 또는 거의 결여된 시대에 있어서의 법의 사실

적 발전에 관한 견해로서는 소용없는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물

론 이러한 법률적 개념은 후기 로마 및 중세의 사람들이 또한 대륙 및 영국의 사람

들이 법원인 「관습」(consuetudo)의 의의와 전제에 관해서 말한 바에 유래한다. 그

러나 거기서는 오히려 보편적인 타당을 요구하는 합리적인 법과 현재 존재하는 지

역적(국민적) 법의 조정이라는 전형적인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즉 영국에서는 코먼

로라는 국법(lex terrae)과 지역법의 조정의 문제, 유럽 대륙에서는 계수된 로마법

과 국민적 법의 조정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러한 보편적 법에 대항하는 특수한 법

만이 법률가에 의하여 정의된 관습법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것은 법

의 효력에 관해서 보편적인 법만이 합법적인 것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전제에 구

속된 것 외에는 아니다. 그런데 물론 「제정법」이 아닌 영국의 코먼로를 보통의 「관

습법」이라는 정의로서 한정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 이슬람의

idschma는 바로 「신성」한 법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전체의 묵시적인

합의」(tacitus consensus omnium)라고 정의되고 있다 하더라도 「관습법」과는 아

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제2절 법발전의 사실적 요소, 이해관계자의 행위와 법적 강제

법규범이라는 관념의 싹은 - 기술한 바와 같이1) - 순이론적으로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인 「버릇」(Eingestelltheit)에 근거하

여 최초에는 단순히 사실상의 행위의 관습이 생겨서 이 관습이 (1) 「구속력 있는」

것으로서 느낀다는 것, (2) 그리고 이 관습이 초개인적으로 확대되어 있는 것을 아

는데 따라 그 관습은 「요해에 근거한 것」으로서 높여져서 타인들도 의미를 이해

하고 여기에 대응하는 행위를 하리라는 반의식적인 또는 완전히 의식적인 「기대」

에 의해서 뒷받침하게 된다는 것, 이렇게 되면 (3) 이 사람들은 또 관습을 「습률」

(Konventionen)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인 강제기관에 의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이리하여 그것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순이론적으로도 여기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성화된 움직임 없는 많은 「관습」 안에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

은 어떻게 해서인가라고. 왜냐하면 이러한 관습은 「구속력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자신 안에서부터는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 없다고 생각되

기 때문이다. 역사법학파는 일반적 경향으로서는 「민족정신」의 진화라는 것을 인

1) S.187 ff., 195/96; s. unten S. 581/82, 584, Wissenschaftslehre 3, S. 378 (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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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8 19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정하여 그 경우에는 진화의 담당자로서 초개인적인 유기적 전체를 가정하였다. 예

컨대 칼 크니스(Karl Knies)도 이 견해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이 견해로서는 학

문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론 경험적으로 타당한 행위의 규칙, 또 행위를

위한 법규칙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즉 당사자에 의하여 새로 생긴 것으로서 느끼

지 않는다는 식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

루어지고 있다. 이 무의식적인 성립은, 특히 부지불식중에 의의가 변화한다는 식으

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실제로는 새로운 사실인데도 법적 판단에서 아무것도 새로

운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는 신념을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실제는 새로

운 법이면서 그것이 변함없이 그렇게 타당하고 적용되어 왔다는 생각 아래에서 예

전의 또는 새로운 사실에 통용된다는 식으로 무의식적인 행위규칙의 성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사태와 함께 두 개의 것, 바꾸어 말하면 사실과 사

실에 적용되는 법이 다 같이 - 다양한 의미와 정도에서 - 「새로운」 것으로서 평가

되는 사례의 광범위한 일군이 예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은 어디에

서 유래하였는가. 그것은 종래에 경험적으로 타당하였던 합의의 변화를 결과시키

는 외부적인 생활조건의 변화에 의하여 성립하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외부조건의 변화라는 것만으로써는 합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충

분하지도 않고 ㅡ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종류의 행

위가 작용하여 이것이 현재 타당하는 법의 의미변화나 새로운 법의 창조를 가져

온다는 경우이다. 그런데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이 행위에 관계하여 결과적으로

법을 변경하게 된다. 첫째로는 구체적인 공동사회행위의 개개의 이해관계가 그것이

다. 개개의 이해관계자는 「새로운」 외면적인 조건들 아래서 그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 또 이것과 꼭 같이 예전의 조건들 아래서의 그의 이익을 새로운 조건들 아

래서 보다 더 잘 보존하기 위하여 그의 행위를, 특히 그의 공동 사회적 행위를 변

경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새로운 합의가 성립하고 또는 내용적으로 새로운 의미내

용을 가지는 합리적인 결합관계가 성립하고, 그것은 다시, 자기 측에서 전적으로

사실적인 새로운 관습을 성립시킨다. 물론 이러한 개인에 의한 행위의 변경이 없

더라도 생활조건들의 변화에 의하여 공동사회 행위에의 전체 상태에 변경을 가져

올 수 있음은 확실하다. 첫째로, 기존의 각종의 행동의 양식에서 조건이 달라지는

당해 이해관계자의 경제적 또는 사회적 샨스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공동사회적 행

위의 양식을 표현하는 행동이 단순히 「선택」으로 살아남아 공동재산으로 되는 일

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건 하에서 이처럼 「적합한」 다른 행동의 양식은 불

이익을 받을 것이지만 여하튼 그 경우에는 - 이론적으로 극단에까지 간다면 - 어

떤 개인도 그의 행위를 변경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적어도 이와 비슷한

것은 그의 습속을 강하게 고집하는 인종적 또는 종교적 단체 사이에서의 선택 과

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일반적으로 말하면, 공동사회적 행

위 또는 개인의 결합관계의 새로운 내용이 개인의 「발명」에 의하여 창조되어 그 후

모방, 선택에 의하여 보급되는 일이 대단히 많다. 경제가 새로운 방향을 취하는 원

인으로서 이 후자의 경우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 아

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에서라 할지라도 생활양식이 합리화 된 전체 단계에서였다.

그런데 상술한 그러한 합의는 그것이 법적 강제에 의하여 적어도 정치단체의 법적

강제에 의하여 보장되는 샨스를 가지는가의 여부가 문제로 되는 시초에는 전연 그

런 일이 없다. 이들 합의를 하는 이해관계자들은 아주 빈번히 정치단체의 법적 강

제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든가 또는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 종종 각

당사자는 사정에 따라 다른 당사자의 사적 이익으로 또는 다른 당사자의 충성으

로 또는 이 둘과 그것과 함께 습률에 의한 압박으로 충분한 보장이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이다. 어떠한 강제기관이 존립하기 이전에 그뿐 아니라 씨족구성원의 복수의

무에 의하여 규율되는 보장마저 없었을 때에는 일반적인 습률에 따라서 「권리 있

다」고 인정되는 자가 침해자에 대한 구제자를 발견할 샨스를 가진다는 방법으로

실제로 어떤 규범의 「법적」인 보장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보장이 바라게 된

다고 생각될 때에는 마술적인 입주(立呪)선서가 이해관계자를 위하여 다른 일체의

보장 그리고 기존의 법적 강제에 의한 보장까지도 대신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

히 분화된 사정 아래서도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계약적 질서 또는 경제적 사상의 대부분은 이러한 방법으로 적

어도 국가에 의한 법적 강제의 샨스를 고려하지 않고 실현되었으며 중요한 부분은

강제의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고 실현되었다. 남슬라브의 「자드루가」(Zádruga,

Hauskommunion, 가협[家協]단체)와 같은 제도는 법강제를 결여한 것의 논증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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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198 19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정하여 그 경우에는 진화의 담당자로서 초개인적인 유기적 전체를 가정하였다. 예

컨대 칼 크니스(Karl Knies)도 이 견해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이 견해로서는 학

문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론 경험적으로 타당한 행위의 규칙, 또 행위를

위한 법규칙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즉 당사자에 의하여 새로 생긴 것으로서 느끼

지 않는다는 식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이

루어지고 있다. 이 무의식적인 성립은, 특히 부지불식중에 의의가 변화한다는 식으

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실제로는 새로운 사실인데도 법적 판단에서 아무것도 새로

운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는 신념을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실제는 새로

운 법이면서 그것이 변함없이 그렇게 타당하고 적용되어 왔다는 생각 아래에서 예

전의 또는 새로운 사실에 통용된다는 식으로 무의식적인 행위규칙의 성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사태와 함께 두 개의 것, 바꾸어 말하면 사실과 사

실에 적용되는 법이 다 같이 - 다양한 의미와 정도에서 - 「새로운」 것으로서 평가

되는 사례의 광범위한 일군이 예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것은 어디에

서 유래하였는가. 그것은 종래에 경험적으로 타당하였던 합의의 변화를 결과시키

는 외부적인 생활조건의 변화에 의하여 성립하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외부조건의 변화라는 것만으로써는 합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충

분하지도 않고 ㅡ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새로운 종류의 행

위가 작용하여 이것이 현재 타당하는 법의 의미변화나 새로운 법의 창조를 가져

온다는 경우이다. 그런데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이 행위에 관계하여 결과적으로

법을 변경하게 된다. 첫째로는 구체적인 공동사회행위의 개개의 이해관계가 그것이

다. 개개의 이해관계자는 「새로운」 외면적인 조건들 아래서 그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 또 이것과 꼭 같이 예전의 조건들 아래서의 그의 이익을 새로운 조건들 아

래서 보다 더 잘 보존하기 위하여 그의 행위를, 특히 그의 공동 사회적 행위를 변

경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새로운 합의가 성립하고 또는 내용적으로 새로운 의미내

용을 가지는 합리적인 결합관계가 성립하고, 그것은 다시, 자기 측에서 전적으로

사실적인 새로운 관습을 성립시킨다. 물론 이러한 개인에 의한 행위의 변경이 없

더라도 생활조건들의 변화에 의하여 공동사회 행위에의 전체 상태에 변경을 가져

올 수 있음은 확실하다. 첫째로, 기존의 각종의 행동의 양식에서 조건이 달라지는

당해 이해관계자의 경제적 또는 사회적 샨스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공동사회적 행

위의 양식을 표현하는 행동이 단순히 「선택」으로 살아남아 공동재산으로 되는 일

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건 하에서 이처럼 「적합한」 다른 행동의 양식은 불

이익을 받을 것이지만 여하튼 그 경우에는 - 이론적으로 극단에까지 간다면 - 어

떤 개인도 그의 행위를 변경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적어도 이와 비슷한

것은 그의 습속을 강하게 고집하는 인종적 또는 종교적 단체 사이에서의 선택 과

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일반적으로 말하면, 공동사회적 행

위 또는 개인의 결합관계의 새로운 내용이 개인의 「발명」에 의하여 창조되어 그 후

모방, 선택에 의하여 보급되는 일이 대단히 많다. 경제가 새로운 방향을 취하는 원

인으로서 이 후자의 경우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 아

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에서라 할지라도 생활양식이 합리화 된 전체 단계에서였다.

그런데 상술한 그러한 합의는 그것이 법적 강제에 의하여 적어도 정치단체의 법적

강제에 의하여 보장되는 샨스를 가지는가의 여부가 문제로 되는 시초에는 전연 그

런 일이 없다. 이들 합의를 하는 이해관계자들은 아주 빈번히 정치단체의 법적 강

제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든가 또는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 종종 각

당사자는 사정에 따라 다른 당사자의 사적 이익으로 또는 다른 당사자의 충성으

로 또는 이 둘과 그것과 함께 습률에 의한 압박으로 충분한 보장이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이다. 어떠한 강제기관이 존립하기 이전에 그뿐 아니라 씨족구성원의 복수의

무에 의하여 규율되는 보장마저 없었을 때에는 일반적인 습률에 따라서 「권리 있

다」고 인정되는 자가 침해자에 대한 구제자를 발견할 샨스를 가진다는 방법으로

실제로 어떤 규범의 「법적」인 보장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보장이 바라게 된

다고 생각될 때에는 마술적인 입주(立呪)선서가 이해관계자를 위하여 다른 일체의

보장 그리고 기존의 법적 강제에 의한 보장까지도 대신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

히 분화된 사정 아래서도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계약적 질서 또는 경제적 사상의 대부분은 이러한 방법으로 적

어도 국가에 의한 법적 강제의 샨스를 고려하지 않고 실현되었으며 중요한 부분은

강제의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고 실현되었다. 남슬라브의 「자드루가」(Zádruga,

Hauskommunion, 가협[家協]단체)와 같은 제도는 법강제를 결여한 것의 논증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29: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200 20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에 이용되는 것이 보통인데, 실제로는 물론 국가에 의한 법의 보장을 결여하고 있

을 뿐이지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었을 시대에는 마을 권력에 의한 극히 유력한

강제보장 하에 있었던 것은 의문이 없다. 한번 습숙된 이러한 합의적 행위의 형식

은 국가에 의한 법강제를 전연 고려하지 않고 수 백 년을 계속하여 존재하였다. 자

드루가는 오스트리아의 재판법규에도 인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수많은

규범들과 직접 모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의 실제의 행위를 지배하였

다. 그렇다고 이러한 예를 일반화하여 이것이 보통의 경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먼

저 그의 추종자들에게 대해서 각기 다 같이 종교적으로 정통한 것으로서 인정되

는 몇 개의 법체계가 완전히 평등한 자격이 인정된 경우에라도, 그리고 그의 어느

것에 추종하는가가 자유로 되어 있을 경우에도 그들 법체계 중의 어떤 하나가 종

교적 구속력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법강제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뭐

라고 하더라도 경쟁전에서의 샨스에 대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

은 국가와 경제가 전통에 따라서 제약되어 있는 곳에서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

슬람의 네 개의 정통적인 법학파는 공적으로는 다 같이 용서된 것으로 인정되었

고 그들의 사이에서는 바로 프랑크 제국에서의 부족법과 같이 개인에 대한 법의

적용에서는 속인법주의의 원칙이 타당하다. 그리고 또 예를 들면 카이로대학에서

는 이상의 4 학파의 전부가 옹호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중의 하나인 하니

후아 학파의 제도(Hanafitentum)는 오스만의 살단이 개인적으로 법의 신조로서

인정한 바이며, 따라서 세속의 관청, 법원에서 그것이 강제의 보장을 받고 있는 것

이 사실이었다. 실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전에는 하니후아 학파의 제도처럼 특권

을 가지고 있었던 말리크학파의 그것(Malikitentum)도 지금은 강제의 보장을 상

실하여 서서히 고사하는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이외의 두 법학분파라 할지라도 그

들의 존재를 방해하는 것이 전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하면 강제의 보장

외에는 그런 것이 전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위의 사례 때문에 서서히 고사

하도록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해관계자들이 정치적인 법강제의 샨스에 무

관심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유한 「거래」생활, 즉 재화거래시장에서의 계약에 관

해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역에서는 각종 형태의 결합관계를 새로

형성하는 경우에도 전적으로 규칙적인 형성이 이루어지며, 또 과거에도 그러하였

기 때문에 정치권력으로서의 재판소에 의한 법강제의 샨스는 극히 적확하게 계산

하게 되어 「목적계약」의 체결도 이에 적합하도록 행해진다. 특히 새로운 계약의 범

형(範型)까지도 이 샨스를 염두에 두고 고안하게 된다. 따라서 개개의 법의 이해관

계자들의 활동이 - 오히려 원칙적으로 그들에 대한 직업적 고문들의 활동이 - 현

행법의 의미를 변경시켜가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나, 이 경우에도 의미변화의 방향

은 법발견에 관한 기대에 전혀 의식적 그리고 합리적으로 적응되어 가는 것이다.

본래 「직업적인」합리적으로 작업하는 법조인들의 가장 오랜 활동의 양식은 바로 이

러한 종류의 활동 (로마의 「카베레」[cavere])에 있는 것이다. 강제기관이 예측가능

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발전하는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는 기술적 전제이며 「예

방법학자들」(Kautelarjuristen)의 발명능력에 대한 원동력의 하나이다. 예방법학

자는 사적 이니시아티브에 의한 법의 새로운 형성의 독립적인 요소로서 언제나 도

처에서 그리고 로마법과 영국법에서는 가장 발전적으로 또 가장 통제적인 힘을 가

지고 활약하는 것이 발견된다.

다른 한 편, 법강제의 샨스 그것은 일정한 형태의 합의 및 합리적인 합의의 확

대라는 사실에 의하여 도처에서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환경 아래서는 특수한 사례는 강제기관에 의한 보장을 발견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한번 보편적으로 확대된 관행

(Gepflogenheiten)이나 합의가 강제기관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무시되는 것은, 일

정한 형식적인 근거나 권위적인 권력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경우

이다. 또는 법적 강제의 기관이 인종적 또는 정치적으로 다른 지배자의 권력에 의

해서 피지배자에게 강압된다는 이유에서이거나, 또는 법적 강제의 기관이 직업적·

사실적인 특수화에 의해서 - 이것은 특히 광범한 사회적 분화라는 조건 아래서

인정될 수 있다 - 사적 거래생활로부터 유리하여 있다는 이유에서든지, 여하튼 법

강제의 기관이 피지배자에 이질적으로 대립할 때에 그러하다. 합의에 관해서 생각

된 의미가 의문스러운 적도 있으며 합의 확대가 아직 불안정한 혁신일 수도 있다.

그때에는 「재판관」-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여기서 법강제기관이라고 부르려고 한

다 - 은 제2의 독립심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별도로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재판

관은 사실상 요해적으로 또는 합의적으로 타당하고 기존의 질서들에 그의 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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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0 20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에 이용되는 것이 보통인데, 실제로는 물론 국가에 의한 법의 보장을 결여하고 있

을 뿐이지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었을 시대에는 마을 권력에 의한 극히 유력한

강제보장 하에 있었던 것은 의문이 없다. 한번 습숙된 이러한 합의적 행위의 형식

은 국가에 의한 법강제를 전연 고려하지 않고 수 백 년을 계속하여 존재하였다. 자

드루가는 오스트리아의 재판법규에도 인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수많은

규범들과 직접 모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의 실제의 행위를 지배하였

다. 그렇다고 이러한 예를 일반화하여 이것이 보통의 경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먼

저 그의 추종자들에게 대해서 각기 다 같이 종교적으로 정통한 것으로서 인정되

는 몇 개의 법체계가 완전히 평등한 자격이 인정된 경우에라도, 그리고 그의 어느

것에 추종하는가가 자유로 되어 있을 경우에도 그들 법체계 중의 어떤 하나가 종

교적 구속력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법강제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뭐

라고 하더라도 경쟁전에서의 샨스에 대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

은 국가와 경제가 전통에 따라서 제약되어 있는 곳에서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

슬람의 네 개의 정통적인 법학파는 공적으로는 다 같이 용서된 것으로 인정되었

고 그들의 사이에서는 바로 프랑크 제국에서의 부족법과 같이 개인에 대한 법의

적용에서는 속인법주의의 원칙이 타당하다. 그리고 또 예를 들면 카이로대학에서

는 이상의 4 학파의 전부가 옹호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중의 하나인 하니

후아 학파의 제도(Hanafitentum)는 오스만의 살단이 개인적으로 법의 신조로서

인정한 바이며, 따라서 세속의 관청, 법원에서 그것이 강제의 보장을 받고 있는 것

이 사실이었다. 실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전에는 하니후아 학파의 제도처럼 특권

을 가지고 있었던 말리크학파의 그것(Malikitentum)도 지금은 강제의 보장을 상

실하여 서서히 고사하는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이외의 두 법학분파라 할지라도 그

들의 존재를 방해하는 것이 전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밀히 말하면 강제의 보장

외에는 그런 것이 전연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위의 사례 때문에 서서히 고사

하도록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해관계자들이 정치적인 법강제의 샨스에 무

관심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유한 「거래」생활, 즉 재화거래시장에서의 계약에 관

해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역에서는 각종 형태의 결합관계를 새로

형성하는 경우에도 전적으로 규칙적인 형성이 이루어지며, 또 과거에도 그러하였

기 때문에 정치권력으로서의 재판소에 의한 법강제의 샨스는 극히 적확하게 계산

하게 되어 「목적계약」의 체결도 이에 적합하도록 행해진다. 특히 새로운 계약의 범

형(範型)까지도 이 샨스를 염두에 두고 고안하게 된다. 따라서 개개의 법의 이해관

계자들의 활동이 - 오히려 원칙적으로 그들에 대한 직업적 고문들의 활동이 - 현

행법의 의미를 변경시켜가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나, 이 경우에도 의미변화의 방향

은 법발견에 관한 기대에 전혀 의식적 그리고 합리적으로 적응되어 가는 것이다.

본래 「직업적인」합리적으로 작업하는 법조인들의 가장 오랜 활동의 양식은 바로 이

러한 종류의 활동 (로마의 「카베레」[cavere])에 있는 것이다. 강제기관이 예측가능

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발전하는 시장경제의 조건들 아래서는 기술적 전제이며 「예

방법학자들」(Kautelarjuristen)의 발명능력에 대한 원동력의 하나이다. 예방법학

자는 사적 이니시아티브에 의한 법의 새로운 형성의 독립적인 요소로서 언제나 도

처에서 그리고 로마법과 영국법에서는 가장 발전적으로 또 가장 통제적인 힘을 가

지고 활약하는 것이 발견된다.

다른 한 편, 법강제의 샨스 그것은 일정한 형태의 합의 및 합리적인 합의의 확

대라는 사실에 의하여 도처에서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환경 아래서는 특수한 사례는 강제기관에 의한 보장을 발견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한번 보편적으로 확대된 관행

(Gepflogenheiten)이나 합의가 강제기관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무시되는 것은, 일

정한 형식적인 근거나 권위적인 권력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그것을 강요하는 경우

이다. 또는 법적 강제의 기관이 인종적 또는 정치적으로 다른 지배자의 권력에 의

해서 피지배자에게 강압된다는 이유에서이거나, 또는 법적 강제의 기관이 직업적·

사실적인 특수화에 의해서 - 이것은 특히 광범한 사회적 분화라는 조건 아래서

인정될 수 있다 - 사적 거래생활로부터 유리하여 있다는 이유에서든지, 여하튼 법

강제의 기관이 피지배자에 이질적으로 대립할 때에 그러하다. 합의에 관해서 생각

된 의미가 의문스러운 적도 있으며 합의 확대가 아직 불안정한 혁신일 수도 있다.

그때에는 「재판관」-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여기서 법강제기관이라고 부르려고 한

다 - 은 제2의 독립심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별도로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재판

관은 사실상 요해적으로 또는 합의적으로 타당하고 기존의 질서들에 그의 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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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2 20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찍는데 그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한번 내려진 재판이 개별적 사건을 넘

어서 시종일관하여 작용하는 결과를 가짐으로써 법으로서 [40] 살아남는 케이스

를 선택하는 데에 종종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재판관의」 재판의 전거가 되

는 것은 최초에는 전혀 형성되지 않거나 또는 어떤 형식적인 선결 문제에 대해서만

재판관이 구체적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 어떠한 종류의 일반규범 - 「재판규범」-

을 통해서 형성되거나의 어느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사정은 반

대이다. 즉 재판관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서 한층 더 구체적인 이유들에서 강제의

보장을 나타냄으로써 사정에 따라서는 일반적 규범의 경제적 효력을 「객관적 법」

으로써 창조한다. 왜냐하면 재판관의 격률은 이 개별적 사건을 넘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제3절 원시적 계쟁조정의 비합리적 성격

상술한 바는 결코 원시적인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법계시라

는 마술적 수단에 의하여 하는 원시적 재판에는 전연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형식

법학적으로 합리화되어 있지 아니한 전체 법발견에서는, 즉 법발견이 신판의 단계

를 이미 극복한 곳에서는 개개의 사건의 비합리성이 먼저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

다. 일반적인 「법규범」은 개개의 사건에 적용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구체적 재판의

규준은 그것이 일반으로 행하여지고 의식되는 한 그 규준이 한번 「승인」되자 장래

의 「승인」에 대하여도 표준적인 것으로 된다는 규범으로서 타당한 것도 아니다. 마

호메트는 코란의 장 가운데에서 이전에 준 제시를 그의 신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반복하여 철회하였고, 또 여호와도 그의 결단을 「후회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법적 재판에 관한 것에도 일어났다. 여호와의 신탁은 여자의 상속권을 정서

하였다(민수기 제27절). 그러나 관계인의 항의를 만나자 이러한 신탁은 정정되었다

(제36절). 여기서는 일반적 규칙에 관한 판결까지도 불안정이다. 또 개개의 사건이

추첨(유태에서는 우림[urim]과 둠민[thummim] - 빛과 진리 - 에 의한 신탁), 결

투 그 밖의 신판의 「규칙성」이라는 것은 규칙적용의 의미에서도 규칙창조의 의미에

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전문가 재판관의 법선언의 발전과정은 전혀 곤란한 것

이었는데 블라디미르스키 부다노프스(Wladimirskij Budanows)의 연구가 가리

키는 바와 같이, 이러한 판결이 개개의 사건을 초월한 「규범」을 의미한다는 관념에

로의 발전은 아직도 늦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이 그것이 「비전문가」가 하는 일

이면 그럴수록 점점 더 「개인의 명망」과 아주 구체적인 사건의 상태를 고려하여 내

려지지 「않는다」라고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규범에로의 안정성과 고정

화는 재판이 어떠한 토론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재판을 위한 합리적인 근거가 탐

구되거나 또는 전제로 되자 즉시로, 바꾸어 말하면 무릇 원시적인 순전히 비합리

적인 신화의 성격이 약화함으로써 전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들이 뒤에 관찰하듯이, 문제를 「정식」의 방식에 따라서 제기할 필요가 있는 조

기의 증거법의 마술적 성격이 아직도 어떤 범위 내에서 작용한다는 것은 확실하

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당연한 사리가 작용한다. 왜냐하면 일정한 원칙을 의식적

으로 명확하게 재판규범으로서 사용한 재판관에 있어서는 다른 같은 사건에서 이

전의 사건에서는 강제보장을 선택하면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편견이라는 혐의

로서 비난을 받지 않고서는 매우 곤란하고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에 후

속하는 재판관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 일반적으로 전통이 공고하게 생활을 지배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일정한 원칙에 의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경우에는 무

릇 재판은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든지 간에 항상적인 바른 전통의 유출로서 나타난

다. 즉 전통의 표현으로서 또는 전통의 구성요소로서 나타난다. 이리하여 적어도

지속적인 효력을 요구하는 형식이 생기는 까닭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규범

만이 적용되어야 된다는 주관적인 신념은 사실상 예언자 시대에서 생긴 일체의 법

발견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시원적인 것이며 결코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법규범을 형성하는 최초의 근원은 정형적인 것으로 된 특정한 요해, 특히 정형적

인 것으로 된 목적합리적인 합의 - 이것은 개개인이 법적으로 훈련된 「변호사」의

협력 아래 각기의 개인의 이해관계 영역을 서로 한계지움으로써 개개인의 행동을

통하여 점차로 의식적으로 창조된다 - 이며, 그리고 「재판관」의 「선례」이다. 예컨대

영국의 코먼로도 실은 그의 태반은 이렇게 하여 성립하였다. 변호사와 재판관으로

서 법적 경험을 쌓고 법적으로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은 「직업적으로」 법규범의 형

성이라는 목적에 봉사하였고, 그 범위도 점차 증가해 갔다. 이 광범위한 범위의 엑

스퍼트들이 협력한 결과 위와 같이 하여 성립하는 일단의 법은 「법조법」이라는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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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2 20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찍는데 그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한번 내려진 재판이 개별적 사건을 넘

어서 시종일관하여 작용하는 결과를 가짐으로써 법으로서 [40] 살아남는 케이스

를 선택하는 데에 종종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재판관의」 재판의 전거가 되

는 것은 최초에는 전혀 형성되지 않거나 또는 어떤 형식적인 선결 문제에 대해서만

재판관이 구체적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 어떠한 종류의 일반규범 - 「재판규범」-

을 통해서 형성되거나의 어느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사정은 반

대이다. 즉 재판관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서 한층 더 구체적인 이유들에서 강제의

보장을 나타냄으로써 사정에 따라서는 일반적 규범의 경제적 효력을 「객관적 법」

으로써 창조한다. 왜냐하면 재판관의 격률은 이 개별적 사건을 넘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제3절 원시적 계쟁조정의 비합리적 성격

상술한 바는 결코 원시적인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법계시라

는 마술적 수단에 의하여 하는 원시적 재판에는 전연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형식

법학적으로 합리화되어 있지 아니한 전체 법발견에서는, 즉 법발견이 신판의 단계

를 이미 극복한 곳에서는 개개의 사건의 비합리성이 먼저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

다. 일반적인 「법규범」은 개개의 사건에 적용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구체적 재판의

규준은 그것이 일반으로 행하여지고 의식되는 한 그 규준이 한번 「승인」되자 장래

의 「승인」에 대하여도 표준적인 것으로 된다는 규범으로서 타당한 것도 아니다. 마

호메트는 코란의 장 가운데에서 이전에 준 제시를 그의 신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반복하여 철회하였고, 또 여호와도 그의 결단을 「후회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법적 재판에 관한 것에도 일어났다. 여호와의 신탁은 여자의 상속권을 정서

하였다(민수기 제27절). 그러나 관계인의 항의를 만나자 이러한 신탁은 정정되었다

(제36절). 여기서는 일반적 규칙에 관한 판결까지도 불안정이다. 또 개개의 사건이

추첨(유태에서는 우림[urim]과 둠민[thummim] - 빛과 진리 - 에 의한 신탁), 결

투 그 밖의 신판의 「규칙성」이라는 것은 규칙적용의 의미에서도 규칙창조의 의미에

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전문가 재판관의 법선언의 발전과정은 전혀 곤란한 것

이었는데 블라디미르스키 부다노프스(Wladimirskij Budanows)의 연구가 가리

키는 바와 같이, 이러한 판결이 개개의 사건을 초월한 「규범」을 의미한다는 관념에

로의 발전은 아직도 늦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이 그것이 「비전문가」가 하는 일

이면 그럴수록 점점 더 「개인의 명망」과 아주 구체적인 사건의 상태를 고려하여 내

려지지 「않는다」라고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규범에로의 안정성과 고정

화는 재판이 어떠한 토론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재판을 위한 합리적인 근거가 탐

구되거나 또는 전제로 되자 즉시로, 바꾸어 말하면 무릇 원시적인 순전히 비합리

적인 신화의 성격이 약화함으로써 전적으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들이 뒤에 관찰하듯이, 문제를 「정식」의 방식에 따라서 제기할 필요가 있는 조

기의 증거법의 마술적 성격이 아직도 어떤 범위 내에서 작용한다는 것은 확실하

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당연한 사리가 작용한다. 왜냐하면 일정한 원칙을 의식적

으로 명확하게 재판규범으로서 사용한 재판관에 있어서는 다른 같은 사건에서 이

전의 사건에서는 강제보장을 선택하면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편견이라는 혐의

로서 비난을 받지 않고서는 매우 곤란하고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에 후

속하는 재판관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 일반적으로 전통이 공고하게 생활을 지배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일정한 원칙에 의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경우에는 무

릇 재판은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든지 간에 항상적인 바른 전통의 유출로서 나타난

다. 즉 전통의 표현으로서 또는 전통의 구성요소로서 나타난다. 이리하여 적어도

지속적인 효력을 요구하는 형식이 생기는 까닭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규범

만이 적용되어야 된다는 주관적인 신념은 사실상 예언자 시대에서 생긴 일체의 법

발견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시원적인 것이며 결코 「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법규범을 형성하는 최초의 근원은 정형적인 것으로 된 특정한 요해, 특히 정형적

인 것으로 된 목적합리적인 합의 - 이것은 개개인이 법적으로 훈련된 「변호사」의

협력 아래 각기의 개인의 이해관계 영역을 서로 한계지움으로써 개개인의 행동을

통하여 점차로 의식적으로 창조된다 - 이며, 그리고 「재판관」의 「선례」이다. 예컨대

영국의 코먼로도 실은 그의 태반은 이렇게 하여 성립하였다. 변호사와 재판관으로

서 법적 경험을 쌓고 법적으로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은 「직업적으로」 법규범의 형

성이라는 목적에 봉사하였고, 그 범위도 점차 증가해 갔다. 이 광범위한 범위의 엑

스퍼트들이 협력한 결과 위와 같이 하여 성립하는 일단의 법은 「법조법」이라는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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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4 20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인이 찍히게 된다. 그렇다고 법의 형성에 있어서 전연 「감정적인」결정요소 ㅡ 즉 이

른바 「형평감정」이 협력할 여지가 전연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관찰에 의

하면 외부의 또는 내부의 이해상태에 관한 확고한 것(Pragma)이 법감정에 대하여

방향이라도 가리키지 않는 한, 「법감정」의 움직임이 극도로 불[42]안정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다. 법감정은 급격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 법감정에 속하는 보편

적인 것으로서는 아주 적은 극히 일반적인 내용 없는 격률이 있는데 불과하다는

것, 이에 대하여 바로 「민족적인」 법발견의 특수성은 이미 주지한 바이나 결코 「감

정적」인 원천의 작용이 다르다는 것에서 추론될 수 없다는 것, 이들은 오늘날에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감정」은 원래 극히 정서적인 것이어서 안정적인 것이

되려는 규범을 지지하는 데에는 거의 소용되지 않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법발견의

각종각양의 원천의 하나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로 될 수 있는 것은 오히

려 다음의 점뿐이다. 즉 계약의 고안과 법발견에 종시(終始)하는 법실무가들(「변호

사」와 「재판관」)의 「법조법」에 대해서 「민중에 고유한」, 바꾸어 말하면 법의 이해관

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관념이 어느 정도까지 자기를 관철할 수 있나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뒤에 보는 바와 같이, 법발견은 어떻게 하여 행하여

지는가 라는 모습에 따라서 다른 식으로 해결 될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법규칙은 어떻게 하여 형성되는가 하면, 그것은 상술한 각종의 요소들의

영향 그리고 (대개는) 그것들의 공동작용에 의해서이다. 즉 공동사회적 행위가 법

의 이해관계자에 의하여 먼저 시초에는 법강제의 샨스는 고려에 넣지 않고 새로이

방향 지워진 다는 것(neuorientierung) - 그리고 법발견이 이 공동 사회적 행위

로 하여금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게 한다 - 에 의해서, 또한 법발견과 강제기관이

움직이기는 샨스에 따라 방향 지워진 직업적 고문단(변호사)의 활동(법의 고안)에

의해서, 또 법발견(재판관) 판결(선결례)의 귀결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이 밖에 법규

칙을 자주적으로 수여하는 것(법창조)에 의해서도 새로운 법규칙이 형성된다. 이것

이 시초에는 우리가 오늘날 보통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식으로 행하여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법」인 성질을 가지는 행위규칙, 즉 「법

강제」에 의하여 보장되는 행위규칙을 규범으로서 의도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사

상은 원래 어디에서도 전연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법

적 재판에는 시초에는 「규범」 일반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법적 재판은 결코 오

늘날 우리가 판결에서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확고한 규칙의 「적용」으

로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위에 대해서 「타당하고」 분쟁해결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지는 규범이라는 관념이 있는 곳에서도 시초에는 이들 규범은 오히려

인간의 정립에 의하여 생긴 것, 또는 인간이 정립하는 것이 가능한 대상이라고는

하여튼 생각되어 있지 않다. 이들 규범이 「정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일

정한 관행 자체가 절대로 신성시되고 있다는 사정에 의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관

행에 배반할 때에는 사악한 마술이나 무언가 신비적인 것의 불온이나 신들의 분노

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규범은 「전통」으로서 적어도 이론상 변경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 규범은 관행에 일치하여 인식되고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

으면 안 되나 이들 규범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 규범을 해석하는 것은

규범을 가장 장시일간 알고 있는 사람들, 따라서 육체적으로 가장 연장자들, 즉 씨

족의 장로 또는 - 그리고 빈번히 - 마술자 및 제사의 수중에 귀속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마술적인 힘들의 전문 지식에 의해서 일정한 규칙, 즉 초감각적인 힘들과

교류하기 위한 기술규칙을 알고 있으며 또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대하여 타당하고 분쟁해결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지는

규범은 다른 한 편 또한 수여되는(oktroyiert) 새로운 규칙으로서 의식적으로 성

립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계시라는, 이것에 대하여 전

적으로 가능한 다음의 둘 중의 어떤 방법에 의해서만 행해지는데 불과하다. 그 중

의 하나는 구체적인 개별적 사건에 있어서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 라는 단순한 개개

의 재판의 계시의 방법에 의해서이고, 이것은 원래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장래

에 모든 유사한 사건에서 어떤 것이 행하여져야 할 것인가라는 일반적 규범의 계

시의 방법에 의해서이다. 이들의 카리스마적인 형식을 취한 법의 계시는 전통의 안

정성을 변혁하는 원시적인 요소이고 무릇 법 「제정」의 어머니이다. 카리스마적 자

격자가 새로운 규범들을 시사하는 것은 실제로 또는 적어도 외관상은 구체적인 원

인에 전연 매개됨이 없이 따라서 사실상 종종 이러한 일이 나타난다. 그러나 경제

적인 또는 그 밖의 생활조건들이 변함에 따라서 이제까지 정서되지 않았던 문제에

관하여 새로운 규범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생각할 수 있는 각종각색의 마술적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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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4 20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인이 찍히게 된다. 그렇다고 법의 형성에 있어서 전연 「감정적인」결정요소 ㅡ 즉 이

른바 「형평감정」이 협력할 여지가 전연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관찰에 의

하면 외부의 또는 내부의 이해상태에 관한 확고한 것(Pragma)이 법감정에 대하여

방향이라도 가리키지 않는 한, 「법감정」의 움직임이 극도로 불[42]안정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다. 법감정은 급격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 법감정에 속하는 보편

적인 것으로서는 아주 적은 극히 일반적인 내용 없는 격률이 있는데 불과하다는

것, 이에 대하여 바로 「민족적인」 법발견의 특수성은 이미 주지한 바이나 결코 「감

정적」인 원천의 작용이 다르다는 것에서 추론될 수 없다는 것, 이들은 오늘날에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감정」은 원래 극히 정서적인 것이어서 안정적인 것이

되려는 규범을 지지하는 데에는 거의 소용되지 않고, 오히려 비합리적인 법발견의

각종각양의 원천의 하나가 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로 될 수 있는 것은 오히

려 다음의 점뿐이다. 즉 계약의 고안과 법발견에 종시(終始)하는 법실무가들(「변호

사」와 「재판관」)의 「법조법」에 대해서 「민중에 고유한」, 바꾸어 말하면 법의 이해관

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관념이 어느 정도까지 자기를 관철할 수 있나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뒤에 보는 바와 같이, 법발견은 어떻게 하여 행하여

지는가 라는 모습에 따라서 다른 식으로 해결 될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법규칙은 어떻게 하여 형성되는가 하면, 그것은 상술한 각종의 요소들의

영향 그리고 (대개는) 그것들의 공동작용에 의해서이다. 즉 공동사회적 행위가 법

의 이해관계자에 의하여 먼저 시초에는 법강제의 샨스는 고려에 넣지 않고 새로이

방향 지워진 다는 것(neuorientierung) - 그리고 법발견이 이 공동 사회적 행위

로 하여금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게 한다 - 에 의해서, 또한 법발견과 강제기관이

움직이기는 샨스에 따라 방향 지워진 직업적 고문단(변호사)의 활동(법의 고안)에

의해서, 또 법발견(재판관) 판결(선결례)의 귀결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이 밖에 법규

칙을 자주적으로 수여하는 것(법창조)에 의해서도 새로운 법규칙이 형성된다. 이것

이 시초에는 우리가 오늘날 보통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식으로 행하여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법」인 성질을 가지는 행위규칙, 즉 「법

강제」에 의하여 보장되는 행위규칙을 규범으로서 의도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사

상은 원래 어디에서도 전연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법

적 재판에는 시초에는 「규범」 일반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법적 재판은 결코 오

늘날 우리가 판결에서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확고한 규칙의 「적용」으

로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행위에 대해서 「타당하고」 분쟁해결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지는 규범이라는 관념이 있는 곳에서도 시초에는 이들 규범은 오히려

인간의 정립에 의하여 생긴 것, 또는 인간이 정립하는 것이 가능한 대상이라고는

하여튼 생각되어 있지 않다. 이들 규범이 「정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일

정한 관행 자체가 절대로 신성시되고 있다는 사정에 의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관

행에 배반할 때에는 사악한 마술이나 무언가 신비적인 것의 불온이나 신들의 분노

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규범은 「전통」으로서 적어도 이론상 변경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 규범은 관행에 일치하여 인식되고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

으면 안 되나 이들 규범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들 규범을 해석하는 것은

규범을 가장 장시일간 알고 있는 사람들, 따라서 육체적으로 가장 연장자들, 즉 씨

족의 장로 또는 - 그리고 빈번히 - 마술자 및 제사의 수중에 귀속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마술적인 힘들의 전문 지식에 의해서 일정한 규칙, 즉 초감각적인 힘들과

교류하기 위한 기술규칙을 알고 있으며 또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대하여 타당하고 분쟁해결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지는

규범은 다른 한 편 또한 수여되는(oktroyiert) 새로운 규칙으로서 의식적으로 성

립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카리스마적 계시라는, 이것에 대하여 전

적으로 가능한 다음의 둘 중의 어떤 방법에 의해서만 행해지는데 불과하다. 그 중

의 하나는 구체적인 개별적 사건에 있어서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 라는 단순한 개개

의 재판의 계시의 방법에 의해서이고, 이것은 원래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장래

에 모든 유사한 사건에서 어떤 것이 행하여져야 할 것인가라는 일반적 규범의 계

시의 방법에 의해서이다. 이들의 카리스마적인 형식을 취한 법의 계시는 전통의 안

정성을 변혁하는 원시적인 요소이고 무릇 법 「제정」의 어머니이다. 카리스마적 자

격자가 새로운 규범들을 시사하는 것은 실제로 또는 적어도 외관상은 구체적인 원

인에 전연 매개됨이 없이 따라서 사실상 종종 이러한 일이 나타난다. 그러나 경제

적인 또는 그 밖의 생활조건들이 변함에 따라서 이제까지 정서되지 않았던 문제에

관하여 새로운 규범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생각할 수 있는 각종각색의 마술적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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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6 20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써서 기술적으로 새로운 규범을 얻는다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원시적 방법

으로 새로 생긴 상태에 질서를 적합시키도록 하는 담당자는 보통의 경우에는 마술

자, 신탁을 수여하는 신의 제사 또는 예언자이다. 옛 전통의 해석은 새로운 질서의

카리스마적 계시에로 추이하는데 그것은 당연히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장로 또는

제사의 법적 지식이 소용없게 될 때에는 옛 전통의 해석에 대해서도 꼭 같은 방법

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방법은 사실확인을 다투는 경우에 있

어서 거기에 대한 소송절차에서도 불가결한 것이다.

제4절 카리스마적인 법창조와 법발견

자,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러한 방법에 의한 법고안·법발

견·법창조가 법의 형식적 성질에 대하여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다.

분쟁의 조정 그리고 새 규범의 창조의 어떤 경우에도 기술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에서는 그 결과로서 모든 원시적인 소송에 특유한 엄격한 형식적 성격

이 생긴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 옳게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만 바로 마술적 방법이

정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 위에 정사(正邪)에 관한 어떤 임의의 문제를 다룸에 있

어서도 그것을 어떤 임의의 마술적 방법에 맡겨도 좋다는 것은 아니고, 법률문제

의 성질에 따라서 특수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먼저 원시적인 사법(司法), 그것

도 확고한 규칙을 가지게 된 것인데, 그러한 사법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원칙, 즉 어

떠한 소송행위를 기초지우는 의식적인 방식을 당사자가 말할 때에 아주 조금이라

도 틀리게 하면 그 결과는 해당되는 법적 수단, 때로는 소송 전체까지도 상실하게

된다는 원칙은 위의 사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로마의 법률소송(logis

actio)에도 초기 중세법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소송은 이미 본 바와 같이, 가장 오

랜 「법률행위」이다(왜냐하면 그것은 계약·구매계약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

라서 로마나 중세 초기에서는 의식적인 형식으로서 하는 엄격한 법의 사적 법률행

위 중에 이것에 일치하는 원리가 존재한다. 그 원리라는 것은 사적 법률행위가 (마

술적으로) 효과 있는 방식과 조금이라도 틀리게 행하여졌을 때에는 무효라는 것이

다. 그러나 특히 소송에서의 법의 형식성의 발단이 되는 것은 형식적으로 제한된

증거법이다.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소송상의 「증명」을 그것이 규제하는 것인가 하

면, 전연 그렇지 않다. 「사실」이 그것으로 「진실」 또는 「오류」라고 표시할 수 있는 증

거방법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어떠한 당사자가 어떠한 형식으로 그

의 권리에 관한 문제를 마술적 권력에게 제출하면 좋은가 제출할 수 있나 또 제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요언하면, 절차의 형식적 성격 그것에 재판방

법의 전적인 비합리적 성격이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결에 구체화되는 「객관

적 법」까지도 아주 엄격한 전통의 규범들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한 전연 유

동적이고 유연하다. 구체적인 재판에 기초를 주는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요소를 여

기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예컨대 신 또는 마술적인 증거방법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

라 카리스마적 성질을 가지는 현자의 판결이나 좀 더 뒤에는 전통에 밝은 연로자,

씨족의 장로, 선정된 중재재판관 그때에만 선정되는 법의 지시자(법판고자[法判告

者, Gesetzessprecher]) 또는 정치적 지배자에 의해서 임명된 재판관 등의 판결이

결정하는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위의 판결은 언제나 말하기를 언

제나 그렇게 하여왔다 라든지, 신은 이번에 또는 지금도 장래에도 이러한 경우에

는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었다 라든지 그 중의 어느 것일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것이 영국 왕 헨리 2세가 행한 주지의 개혁, 즉 민사소송법에 있어서

의 배심의 기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아주 같다. 왕의 영장(writ)으로 당사자의 출소

를 보장하는 「부동산침탈점유회복소송」(assisa novae disciplinae)은 옛 마술적,

비합리적인 증거방법이 선서보조, 그리고 특히 결투에 의한 토지점유소송의 재판

을 12인의 선서한 이웃 사람들에 대한 점유상태에 관한 질문으로서 대치하는 것

을 의미한다. 당사자는 그 후에는 일어날 수 있는 전체 분쟁에서 아시자(aassisa)

그리고 예전의 비합리적 절차를 꺼내놓는 대신에 12인의 선서인의 선언에 복종한

다는 뜻을 자발적으로 (사실상은 얼마 안가서 강제적으로) 약속하고, 이리하여 배

심이 생겼다. 따라서 배심은 어느 정도 신탁을 기다리는 것에 가름하여 등장한 것

인데 신탁처럼 거의 그 재판의 합리적 근거를 가리키지 않는다. 지휘하는 재판관과

배심 사이에서 절차의 처리가 분담되어 있으나 배심원들이 그때에 「사실문제」를,

재판관이 「법률문제」를 처리한다는 통속적 견해는 분명히 과오를 범하고 있다. 법

의 실무가 배심(특히 민사에서의)에 관해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이렇다. 즉 배심

은 어떤 구체적 법률문제까지도 재판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다른 사건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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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6 20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써서 기술적으로 새로운 규범을 얻는다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원시적 방법

으로 새로 생긴 상태에 질서를 적합시키도록 하는 담당자는 보통의 경우에는 마술

자, 신탁을 수여하는 신의 제사 또는 예언자이다. 옛 전통의 해석은 새로운 질서의

카리스마적 계시에로 추이하는데 그것은 당연히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장로 또는

제사의 법적 지식이 소용없게 될 때에는 옛 전통의 해석에 대해서도 꼭 같은 방법

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방법은 사실확인을 다투는 경우에 있

어서 거기에 대한 소송절차에서도 불가결한 것이다.

제4절 카리스마적인 법창조와 법발견

자,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러한 방법에 의한 법고안·법발

견·법창조가 법의 형식적 성질에 대하여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다.

분쟁의 조정 그리고 새 규범의 창조의 어떤 경우에도 기술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에서는 그 결과로서 모든 원시적인 소송에 특유한 엄격한 형식적 성격

이 생긴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 옳게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만 바로 마술적 방법이

정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 위에 정사(正邪)에 관한 어떤 임의의 문제를 다룸에 있

어서도 그것을 어떤 임의의 마술적 방법에 맡겨도 좋다는 것은 아니고, 법률문제

의 성질에 따라서 특수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먼저 원시적인 사법(司法), 그것

도 확고한 규칙을 가지게 된 것인데, 그러한 사법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원칙, 즉 어

떠한 소송행위를 기초지우는 의식적인 방식을 당사자가 말할 때에 아주 조금이라

도 틀리게 하면 그 결과는 해당되는 법적 수단, 때로는 소송 전체까지도 상실하게

된다는 원칙은 위의 사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원칙은 로마의 법률소송(logis

actio)에도 초기 중세법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소송은 이미 본 바와 같이, 가장 오

랜 「법률행위」이다(왜냐하면 그것은 계약·구매계약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

라서 로마나 중세 초기에서는 의식적인 형식으로서 하는 엄격한 법의 사적 법률행

위 중에 이것에 일치하는 원리가 존재한다. 그 원리라는 것은 사적 법률행위가 (마

술적으로) 효과 있는 방식과 조금이라도 틀리게 행하여졌을 때에는 무효라는 것이

다. 그러나 특히 소송에서의 법의 형식성의 발단이 되는 것은 형식적으로 제한된

증거법이다.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소송상의 「증명」을 그것이 규제하는 것인가 하

면, 전연 그렇지 않다. 「사실」이 그것으로 「진실」 또는 「오류」라고 표시할 수 있는 증

거방법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어떠한 당사자가 어떠한 형식으로 그

의 권리에 관한 문제를 마술적 권력에게 제출하면 좋은가 제출할 수 있나 또 제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요언하면, 절차의 형식적 성격 그것에 재판방

법의 전적인 비합리적 성격이 대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결에 구체화되는 「객관

적 법」까지도 아주 엄격한 전통의 규범들이 일반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한 전연 유

동적이고 유연하다. 구체적인 재판에 기초를 주는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요소를 여

기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예컨대 신 또는 마술적인 증거방법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

라 카리스마적 성질을 가지는 현자의 판결이나 좀 더 뒤에는 전통에 밝은 연로자,

씨족의 장로, 선정된 중재재판관 그때에만 선정되는 법의 지시자(법판고자[法判告

者, Gesetzessprecher]) 또는 정치적 지배자에 의해서 임명된 재판관 등의 판결이

결정하는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위의 판결은 언제나 말하기를 언

제나 그렇게 하여왔다 라든지, 신은 이번에 또는 지금도 장래에도 이러한 경우에

는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었다 라든지 그 중의 어느 것일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것이 영국 왕 헨리 2세가 행한 주지의 개혁, 즉 민사소송법에 있어서

의 배심의 기원의 문제에 관해서도 아주 같다. 왕의 영장(writ)으로 당사자의 출소

를 보장하는 「부동산침탈점유회복소송」(assisa novae disciplinae)은 옛 마술적,

비합리적인 증거방법이 선서보조, 그리고 특히 결투에 의한 토지점유소송의 재판

을 12인의 선서한 이웃 사람들에 대한 점유상태에 관한 질문으로서 대치하는 것

을 의미한다. 당사자는 그 후에는 일어날 수 있는 전체 분쟁에서 아시자(aassisa)

그리고 예전의 비합리적 절차를 꺼내놓는 대신에 12인의 선서인의 선언에 복종한

다는 뜻을 자발적으로 (사실상은 얼마 안가서 강제적으로) 약속하고, 이리하여 배

심이 생겼다. 따라서 배심은 어느 정도 신탁을 기다리는 것에 가름하여 등장한 것

인데 신탁처럼 거의 그 재판의 합리적 근거를 가리키지 않는다. 지휘하는 재판관과

배심 사이에서 절차의 처리가 분담되어 있으나 배심원들이 그때에 「사실문제」를,

재판관이 「법률문제」를 처리한다는 통속적 견해는 분명히 과오를 범하고 있다. 법

의 실무가 배심(특히 민사에서의)에 관해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이렇다. 즉 배심

은 어떤 구체적 법률문제까지도 재판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다른 사건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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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8 20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장래의 판결을 구속하는 「선결례」를 성립시키기에는 이르지 않는다. 따라서 법

률문제에 대한 배심의 평결은 비합리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영국법에서 실제상 오

랫동안 행해지고 있던 많은 규칙이 아주 서서히 발전하여 나중에는 법적으로 「타

당한」 규범이라는 품위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민사배심의 이러한 의의에 기초하

는 것이다. 즉 재판관이 사실문제라고 분별할 수 없을 상태로서 존재하는 평결의

부분을 이러한 익명(匿名)상태(Inkognito)로부터 꺼내서 판결의 원리로 함으로써

그 부분이 현행법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현행 상법의 대부분은 맨스필드

경의 재판관으로서의 활동에 의하여 선결례로서 방식화되고, 또 그럼으로써 법명

제의 품위를 가지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 그 이전에는 당해 법률문제를 사실문제

와 동시에 해결하는 - 배심의 구체적인 「법감정」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배심이

경험을 쌓는 실업가를 포함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사리에 맞는 적절한 처리가 되

었다지만 말이다. 로마의 법생활[46]에서도 회답권을 가지는 법조의 창조적 활동

은 바로, 이 점에 즉 민사배심원의 평결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법률사건의 분할이 법에 정통한 독립된 기관에 의해서 법정 밖에서 행하여졌고 배

심원의 일을 회답권자에게로 옮긴다는 경향은 「감정」의 격률로부터 합리적인 법명

제에로의 이용을 촉진한 것에 대비하여, 영국의 절차에서는 재판장의 일을 배심에

게로 옮긴다는 경향은 로마와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고, 또 종종 반대

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재판방법의, 따라서 또 「현행법」 그것

의 시원적인 비합리성이 배심이란 형식의 특징으로 되었고 영국의 소송에서는 오

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러나 유형적인 규칙에 따라서 판정되는 「사실」이

사인의 거래의 실제와 「재판관」의 선결례들이 공동으로 작용하여 발전하여 온 한,

유형적인 규칙은 근대의 법사고에 의해서 준비된 「법명제」가 가지는 합리적 성격

을 구비하지는 않는다.

그 경우에 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법의 논리로부터 귀결되는 의미내용에 따라

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메르크말에 따라서 전적으로 직관적으로, 그리

고 항상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만 각각 구분된다. 즉 사건 때마다 어떤 문제를 신에

게 또는 카리스마적 법정에 제출하면 좋은가, 또 묻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리고 이해관계자 중의 어느 당사자에게 당해 증명수단을 이용 할 권리나 의무가

속하는가 하는 견지이다. 그러니까 원시적인 법강제는 그것이 엄격히 형식적으로

또 시종일관하여 발전해 온 데서는 「조건부증명판결」에로 도달하는 것이며, 이것은

대체로 오늘날에는 당사자선서에 의해서 판결되는 경우에 필적한다. 양 당사자 중

의 어느 한쪽에게 일정한 증명을 하는 것이 의무(와 권리)로서 소속되고, 그 법률

효과로서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사건의 승패가 결부된다. 로마에서의 법무관의

방식서 소송도 영국의 배심을 수반하는 영장소송처럼 그 양분된 절차 때문에 (양

분이 다른 점에서 기술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위의 기본적인 현상에 결부한다.

어떠한 문제를 마술적 법정에 제출해야 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기술적인 「법개

념」 형성의 첫 걸음이 내놓여졌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실문제와 법률문제도 구별

되지 않고 객관적 규범도 그 규범이 보장하는 개인의 「청구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또 의무의 이행의 청구도 위법행위에 의한 복수의 요구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 왜냐하면 소송에 이유를 주는 것은 원래 전부 위법행위였으니까 - 공권과 사권

의 구별도 법창조와 법적용의 구별도 존재하지 않고 그 위에 언제나 전에 말한 바

가 있지만 - 개개의 이해관계인에게 「청구권」을 제시하는 규범의 의미로서의 「법」

도 그 「반사」로서 개인에게 일정한 샨스를 허용하는 순전히 기술적 지령의 의미로

서의 「행정」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상의 구별의 전부가 말하자면 「잠

재적으로」 또 맹아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또 그렇게 있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강제수단의 각종의 종류 때로는 강제기관의 차이가 우

리들이 보는 바로서는 일정한 극히 다양한 고도의 정도에 이르기까지 상술한 구별

중의 약간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 이미 본 바와 같이 - 어떤 구성원

의 행위 때문에 마술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공동사회가 종교적 린치

사법(司法)을 하는 경우와 민족 간의 속죄절차를 비교해 보면 그 관계는 한정된 의

미에서는 「직권에 의한」 형사적 징벌과 사적 권리추구라는 현재의 구별과 대응한

다.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족 간의 분쟁을 처리하는 엄격히 형식적인 속

죄절차가 「유효」한 법에 관한 평결에만 한정하려는 정서된 「사법」의 선구자인데 대

하여 형식적인 제약과 원칙에 구속되지 않는 가부(家父)의 분쟁조정은 전체 「행정」

의 원시적인 자리인 것을 배웠다. 또한 그의 기능에 있어서 극히 특수화 된 따라서

무제한인 가부의 권력과는 다른 권력, 즉 「임페리움」이 생기는 경우에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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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08 20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장래의 판결을 구속하는 「선결례」를 성립시키기에는 이르지 않는다. 따라서 법

률문제에 대한 배심의 평결은 비합리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영국법에서 실제상 오

랫동안 행해지고 있던 많은 규칙이 아주 서서히 발전하여 나중에는 법적으로 「타

당한」 규범이라는 품위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민사배심의 이러한 의의에 기초하

는 것이다. 즉 재판관이 사실문제라고 분별할 수 없을 상태로서 존재하는 평결의

부분을 이러한 익명(匿名)상태(Inkognito)로부터 꺼내서 판결의 원리로 함으로써

그 부분이 현행법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현행 상법의 대부분은 맨스필드

경의 재판관으로서의 활동에 의하여 선결례로서 방식화되고, 또 그럼으로써 법명

제의 품위를 가지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 그 이전에는 당해 법률문제를 사실문제

와 동시에 해결하는 - 배심의 구체적인 「법감정」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배심이

경험을 쌓는 실업가를 포함하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사리에 맞는 적절한 처리가 되

었다지만 말이다. 로마의 법생활[46]에서도 회답권을 가지는 법조의 창조적 활동

은 바로, 이 점에 즉 민사배심원의 평결에 의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법률사건의 분할이 법에 정통한 독립된 기관에 의해서 법정 밖에서 행하여졌고 배

심원의 일을 회답권자에게로 옮긴다는 경향은 「감정」의 격률로부터 합리적인 법명

제에로의 이용을 촉진한 것에 대비하여, 영국의 절차에서는 재판장의 일을 배심에

게로 옮긴다는 경향은 로마와는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고, 또 종종 반대

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차이는 있지만 요컨대 재판방법의, 따라서 또 「현행법」 그것

의 시원적인 비합리성이 배심이란 형식의 특징으로 되었고 영국의 소송에서는 오

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러나 유형적인 규칙에 따라서 판정되는 「사실」이

사인의 거래의 실제와 「재판관」의 선결례들이 공동으로 작용하여 발전하여 온 한,

유형적인 규칙은 근대의 법사고에 의해서 준비된 「법명제」가 가지는 합리적 성격

을 구비하지는 않는다.

그 경우에 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법의 논리로부터 귀결되는 의미내용에 따라

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메르크말에 따라서 전적으로 직관적으로, 그리

고 항상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만 각각 구분된다. 즉 사건 때마다 어떤 문제를 신에

게 또는 카리스마적 법정에 제출하면 좋은가, 또 묻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리고 이해관계자 중의 어느 당사자에게 당해 증명수단을 이용 할 권리나 의무가

속하는가 하는 견지이다. 그러니까 원시적인 법강제는 그것이 엄격히 형식적으로

또 시종일관하여 발전해 온 데서는 「조건부증명판결」에로 도달하는 것이며, 이것은

대체로 오늘날에는 당사자선서에 의해서 판결되는 경우에 필적한다. 양 당사자 중

의 어느 한쪽에게 일정한 증명을 하는 것이 의무(와 권리)로서 소속되고, 그 법률

효과로서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사건의 승패가 결부된다. 로마에서의 법무관의

방식서 소송도 영국의 배심을 수반하는 영장소송처럼 그 양분된 절차 때문에 (양

분이 다른 점에서 기술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위의 기본적인 현상에 결부한다.

어떠한 문제를 마술적 법정에 제출해야 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기술적인 「법개

념」 형성의 첫 걸음이 내놓여졌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실문제와 법률문제도 구별

되지 않고 객관적 규범도 그 규범이 보장하는 개인의 「청구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또 의무의 이행의 청구도 위법행위에 의한 복수의 요구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 왜냐하면 소송에 이유를 주는 것은 원래 전부 위법행위였으니까 - 공권과 사권

의 구별도 법창조와 법적용의 구별도 존재하지 않고 그 위에 언제나 전에 말한 바

가 있지만 - 개개의 이해관계인에게 「청구권」을 제시하는 규범의 의미로서의 「법」

도 그 「반사」로서 개인에게 일정한 샨스를 허용하는 순전히 기술적 지령의 의미로

서의 「행정」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상의 구별의 전부가 말하자면 「잠

재적으로」 또 맹아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또 그렇게 있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강제수단의 각종의 종류 때로는 강제기관의 차이가 우

리들이 보는 바로서는 일정한 극히 다양한 고도의 정도에 이르기까지 상술한 구별

중의 약간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 이미 본 바와 같이 - 어떤 구성원

의 행위 때문에 마술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공동사회가 종교적 린치

사법(司法)을 하는 경우와 민족 간의 속죄절차를 비교해 보면 그 관계는 한정된 의

미에서는 「직권에 의한」 형사적 징벌과 사적 권리추구라는 현재의 구별과 대응한

다.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우리는 민족 간의 분쟁을 처리하는 엄격히 형식적인 속

죄절차가 「유효」한 법에 관한 평결에만 한정하려는 정서된 「사법」의 선구자인데 대

하여 형식적인 제약과 원칙에 구속되지 않는 가부(家父)의 분쟁조정은 전체 「행정」

의 원시적인 자리인 것을 배웠다. 또한 그의 기능에 있어서 극히 특수화 된 따라서

무제한인 가부의 권력과는 다른 권력, 즉 「임페리움」이 생기는 경우에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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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0 21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원칙적으로 「정통한」명령과 이것을 「정통화하는」 규범의 구별이 관념된 것처럼 생

각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전통 또는 구체적인 카

리스마적 자질은 바로 그 경우에는 개개의 명령에 비인격적인 정통성이나 인격적

인 정통성의 어느 것을 주고, 따라서 또 그 명령이 「정통화」에 제한을 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구별해서 이해되지 않았다. 즉 임페리

움은 임페리움 담당자의 구체적·법적 「자질」로서 관찰되었으나 비인격적인 「권한」

으로서는 관찰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당한 명령, 정당한 청구권과 이 양자를 정당

화 하는 규범의 구별도 실제로 분명치 않다. 불가변의 전통의 영역과 임페리움의

영역의 한계도 마찬가지로 전연 불안정하다. 임페리움의 담[449]당자가 가령 「정당」

하게 지배하는 것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특별한 계시의 가능성을 얻지 않고서는 그

는 어떠한 중요한 결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5절 재판집회의 법발견(dinggenossenschaftliche Rechtsfindung)

「전통」의 내부에서라도 실제상 적용되게 된 법이 현실로 그대로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고정된 경험적인 기술적 규칙을 사용하는 특별한 훈련을 받은[48]

담당자의 - 당초에는 보통 마술자나 제사들이었으나 - 의 계층이 아직 전통을 자

기의 수중물로 하지 못하는 한 전통은 사회생활의 넓은 범위에 걸쳐 비교적 불안

정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법으로서 「적용」되어온 것이 「법」으로서 타당하다. 아프

리카의 「팔라버」(Palaver)의 결정은 몇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현행법으로서 취급

되었고, 문칭거(Munzinger)도 북동 아프리카의 재판(「부타스」[buthas])에 관하

여 같은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선례법은 「관습법」을 새로 형성하는 가장 오랜 형

식이다. 물론 시초에는 이러한 법형성도 이미 서술했듯이, 본래 마술적인 질문에

관한 본질적으로 확증된 기술적 규칙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마술자가 그의 중요성

을 상실하게 되어 비로소 전통은 예컨대 중세에 있어서 종종 띠고 있던 성격을 얻

게 된다. 즉 그러한 성격 아래서는 당사자는 법으로서 타당한 관행의 존재를 「사

실」과 꼭 같이 「증명」의 대상으로 할 수가 있게 된다. 새로운 명령의 카리스마적 계

시에서 출발하여 임페리움을 통과하여 합의 또는 수권에 근거하는 「정립」의 절차

로서 하는 법창조에로 라는 것이 발전의 가장 직접적인 순서이다. 왜냐하면 다음

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합의의 담당자는 시초에는 씨족의 수장이나 지방의 수

령이다. 어떤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촌락이나 씨족과 병립하여 더 포괄적

인 정치단체나 합의적 단체가 존재하여 보다 광범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경우에

는 언제나 이 단체의 사건은 위의 권력자들이 임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만나서 이

것을 규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권력자들이 한 협의는 보통 순전히 기술적이며 경제

적인 성질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들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단순한 「행정」이나 단순

한 사적 협정에 해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협정은 그 이상으로 전연 다른

영역에까지 미칠 때가 있다 권력자들의 회합은 특히 그의 공동의 선언에다 성스러

운 전통을 해석하는 고도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경향을 가질 때가 있고 경우에 따

라서는 예컨대 씨족외 혼인의 규범과 같이 엄격하게 마술적으로 보장 된 규범에

관해서라도 감히 해석으로 간섭하려고 한다. 이것은 시초는 원칙으로 카리스마적

으로 자격이 부여된 마술자나 현자가 법열에서 또는 꿈에서 감득한 새로운 규칙의

계시를 회합에 제시하고 구성원들은 카리스마적 자격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 계시

를 가지고 가서 준수하고 그의 단체에 전한다는 식으로 행하여졌다는 것은 물론

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지시와 법의 선언에 의한 전통의 해석과 규칙의 새로운 계

시의 한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마술자의 위신도 변하기 쉬우니까 - 예컨대 오스트

레일리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 법의 정립의 세속화가 진전되고 계시는 사

실상 배제되거나 또는 합의를 사후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서만 이용되는데 불과

한 것으로 되고, 이리하여 마지막에는 원래 계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법창

조를 광범위하게 걸쳐서 회합에 참가한 권력자들의 단순한 합의에 맡긴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에서도 법의 「정립」이라는 관념이 완전히 발달하

고 있는 것까지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나 명예층이 자

기들의 사이에서 합의 된 새로운 법을 인민들에게 강압하려 하여도 실패하는 일이

있다. 몬라드(Monrad)가 기니아 해안에서 본 바에 의하면, 명예층의 합의는 - 중

세의 신분형태에서는 종종 그러하였던 것과 꼭 같이 - 경제적 약자에 대해서는 상

금(償金)[의 제재]에 의하여 실현되지만 부자나 유력자는 자발적으로 위의 합의에

찬동하지 않는 한 사실상 전연 합의에 구속되지 않는다고는 한다. 다른 한 편 아

한타(Ahanta)나 다호메이 니그로(Dahomeyneger)는 혹은 주기적으로 혹은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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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0 21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원칙적으로 「정통한」명령과 이것을 「정통화하는」 규범의 구별이 관념된 것처럼 생

각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전통 또는 구체적인 카

리스마적 자질은 바로 그 경우에는 개개의 명령에 비인격적인 정통성이나 인격적

인 정통성의 어느 것을 주고, 따라서 또 그 명령이 「정통화」에 제한을 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구별해서 이해되지 않았다. 즉 임페리

움은 임페리움 담당자의 구체적·법적 「자질」로서 관찰되었으나 비인격적인 「권한」

으로서는 관찰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당한 명령, 정당한 청구권과 이 양자를 정당

화 하는 규범의 구별도 실제로 분명치 않다. 불가변의 전통의 영역과 임페리움의

영역의 한계도 마찬가지로 전연 불안정하다. 임페리움의 담[449]당자가 가령 「정당」

하게 지배하는 것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특별한 계시의 가능성을 얻지 않고서는 그

는 어떠한 중요한 결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5절 재판집회의 법발견(dinggenossenschaftliche Rechtsfindung)

「전통」의 내부에서라도 실제상 적용되게 된 법이 현실로 그대로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고정된 경험적인 기술적 규칙을 사용하는 특별한 훈련을 받은[48]

담당자의 - 당초에는 보통 마술자나 제사들이었으나 - 의 계층이 아직 전통을 자

기의 수중물로 하지 못하는 한 전통은 사회생활의 넓은 범위에 걸쳐 비교적 불안

정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법으로서 「적용」되어온 것이 「법」으로서 타당하다. 아프

리카의 「팔라버」(Palaver)의 결정은 몇 세대를 거쳐 전승되어 현행법으로서 취급

되었고, 문칭거(Munzinger)도 북동 아프리카의 재판(「부타스」[buthas])에 관하

여 같은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선례법은 「관습법」을 새로 형성하는 가장 오랜 형

식이다. 물론 시초에는 이러한 법형성도 이미 서술했듯이, 본래 마술적인 질문에

관한 본질적으로 확증된 기술적 규칙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마술자가 그의 중요성

을 상실하게 되어 비로소 전통은 예컨대 중세에 있어서 종종 띠고 있던 성격을 얻

게 된다. 즉 그러한 성격 아래서는 당사자는 법으로서 타당한 관행의 존재를 「사

실」과 꼭 같이 「증명」의 대상으로 할 수가 있게 된다. 새로운 명령의 카리스마적 계

시에서 출발하여 임페리움을 통과하여 합의 또는 수권에 근거하는 「정립」의 절차

로서 하는 법창조에로 라는 것이 발전의 가장 직접적인 순서이다. 왜냐하면 다음

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합의의 담당자는 시초에는 씨족의 수장이나 지방의 수

령이다. 어떤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촌락이나 씨족과 병립하여 더 포괄적

인 정치단체나 합의적 단체가 존재하여 보다 광범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경우에

는 언제나 이 단체의 사건은 위의 권력자들이 임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만나서 이

것을 규제하는 것이 보통이다. 권력자들이 한 협의는 보통 순전히 기술적이며 경제

적인 성질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들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단순한 「행정」이나 단순

한 사적 협정에 해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협정은 그 이상으로 전연 다른

영역에까지 미칠 때가 있다 권력자들의 회합은 특히 그의 공동의 선언에다 성스러

운 전통을 해석하는 고도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경향을 가질 때가 있고 경우에 따

라서는 예컨대 씨족외 혼인의 규범과 같이 엄격하게 마술적으로 보장 된 규범에

관해서라도 감히 해석으로 간섭하려고 한다. 이것은 시초는 원칙으로 카리스마적

으로 자격이 부여된 마술자나 현자가 법열에서 또는 꿈에서 감득한 새로운 규칙의

계시를 회합에 제시하고 구성원들은 카리스마적 자격을 인정하는 까닭에 이 계시

를 가지고 가서 준수하고 그의 단체에 전한다는 식으로 행하여졌다는 것은 물론

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지시와 법의 선언에 의한 전통의 해석과 규칙의 새로운 계

시의 한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마술자의 위신도 변하기 쉬우니까 - 예컨대 오스트

레일리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 법의 정립의 세속화가 진전되고 계시는 사

실상 배제되거나 또는 합의를 사후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서만 이용되는데 불과

한 것으로 되고, 이리하여 마지막에는 원래 계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법창

조를 광범위하게 걸쳐서 회합에 참가한 권력자들의 단순한 합의에 맡긴다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에서도 법의 「정립」이라는 관념이 완전히 발달하

고 있는 것까지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나 명예층이 자

기들의 사이에서 합의 된 새로운 법을 인민들에게 강압하려 하여도 실패하는 일이

있다. 몬라드(Monrad)가 기니아 해안에서 본 바에 의하면, 명예층의 합의는 - 중

세의 신분형태에서는 종종 그러하였던 것과 꼭 같이 - 경제적 약자에 대해서는 상

금(償金)[의 제재]에 의하여 실현되지만 부자나 유력자는 자발적으로 위의 합의에

찬동하지 않는 한 사실상 전연 합의에 구속되지 않는다고는 한다. 다른 한 편 아

한타(Ahanta)나 다호메이 니그로(Dahomeyneger)는 혹은 주기적으로 혹은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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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2 21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로 종전의 정립규칙을 개정하며 또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

나 이러한 상태는 이미 원시적인 것이 아니다. 법의 정립을 보통 전연 볼 수 없거나

혹은 사실상 그것이 존재할 때에도 법발견과 법창조가 분리되지 아니한 당연한 결

과로서 재판관이 「적용할」규칙 으로서의 「제정법」이라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아직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재판은 단지 선례로서의 권위만을 가지는데 불과하다. 기

존의 법의 해석으로부터 법의 새로운 형성에 이른다. 이러한 중간단계의 타이프를

가리키는 것에 예컨대 게르만의 「바이스툼」(Weistum)이 있다. 이것은 구체적 또

는 추상적인 법률문제에 관한 권력자들의 재판인데 그들의 권한은 개인적 카리스

마나 연령이나 지식이나 그의 혈통의 명예자격이나, 끝으로는 그의 관직에 기초한

다. 이 바이스툼도 역시 비겔만의 「법판고자」(Gesetzessprecher)의 경우처럼, 시

초에는 법과 권리, 법정립과 판결, 공법과 사법 혹은 그 뿐만 아니라 「행정명령」과

규범적인 규칙까지도 구별하고 있지 않다. 영국 의회의 결의도 역시 거의 현대 초

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아시자(Assisa)는 그 명

칭이 말하듯이, 플랜태제네트(Plantagenet) 왕조 시대 그리고 실로 17세기에 이르

기까지는 기타의 판결과 같은 성격을 가질 뿐이었다. 왕 자신은 그 자신의 아시자

에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않았다. 의회는 여러 가지에 수단으로 이것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의사록과 각종의 기록의 작성은 왕이 인증을 준 의회의 결의에 선례로서

의 권위를 주는 목적에 소용되었다. 그 결과 의결은 현재까지 기존의 법의 단순한

수정이라는 성격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대에서의

대륙의 제정법이 법전화하는 성질을 가지는 것과는 반대이다. 대륙의 제정법의 법

전화하는 성질이라는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의 대상에 관하여 종전

의 법을 배제하여 아주 새로운 규정을 하려는 것이다. 신법이 구법을 개폐한다는

원칙은 따라서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아직 완전히 관철되지 않고 있다.

영국에 있어서는 퓨리턴과 후에는 휘그당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촉진된 실질적

인 제정법 개념은 로마법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로마법 자체에 있어서는 위의 개

념의 근원은 관직법 안에, 따라서 원래 군사적으로 제약된 정무관의 임페리움 안

에 존재한다. 즉 의결법(Lex-negota)은 정무관의 포고이기는 했으나 병원(兵員)

인 시민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시민에 대하여 그리고 시민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가

지게 되고, 따라서 또 정무관직의 승계자도 이것을 파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현

재의 재정법 개념의 기원은 따라서 로마의 규율이었고 로마의 방위단체의 특성이

었다. 중세의 대륙에서는 카로링거 왕조에서 그의 발단을 볼 수 있었으나 제정법이

라는 로마적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러나 중세 전기의 특히 영국에서의 기술한 정도의 정립된 법

을 수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정법의 개념의 단계라도 결코 그리 일찍부터 실현된 것

은 아니다. 법창조와 법발견의 카리스마적 시기는 이미 누차 보았듯이, 오히려 순

수하게 합리적인 법정립과 법적용의 시대에서의 다수의 제도 안에 들어가 있으며

현대에서도 일반적으로 완전히 제거되어 있지 않다. 블랙스톤(Blackstone)도 영국

의 재판관을 일종의 살아있는 신탁이라고 부르며, 사실 적어도 영국의 재판이 코

먼로의 육(肉)이 되는데 불가결한 특별의 형식으로서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은 의

미에서는 고대법에서의 신탁의 역할에 필적한다. 즉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것

이 이제는 항구적인 규칙으로 되었다」(was voher ungewiß war ist nun eine

dauernde Regel geworden)라는 의미에서 이다. 재판이 분명히 「조리에 맞지 않

는다」거나 「신의 명령에 반한다」는 경우에만 재판은 그의 카리스마적 성격을 상실

하며 따라서 거기에 위배하여도 위해를 입지 않는다. 진정한 신탁이 영국의 판례

와 구별되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이유의 결여이다. 그러나 신탁의 이러한 성질

은 배심의 평결에도 공통된다. 물론 연혁적으로 배심원 그 자체는 카리스마적인 법

예언자의 법적 승계 같은 것은 아니고 아주 반대로 오히려 재판집회의 재판의 비합

리적인 증[51]거방법에 가름하여 (특히 고유상태에 관하여) 근린자의 증언으로써

하는 것이며, 국왕의 재판소에서는 따라서 군주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

다. 이에 대하여 카리스마적인 법의 판고의 현실적인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게르만의 참심원(Schöffen)이 재판관에 대해서 가지는 지위 안에도, 또한 북구의

법에서의 법판고자 제도 안에도 존재한다. 보통 재판관(Gerichtsherr)이나 그의

대리자는 재판소에서 단지 지휘를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그치며, 판결의 성립에

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 왜냐하면 판결을 만드는 것은 카리스마적 법판고자이

며 뒤에는 참심원, 즉 판결에 의하여 법을 창조해야 할 단체 안에서 임명된 참심원

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기술한 바와 같이, 중세 서양에서의 게노센샤프트적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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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2 21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로 종전의 정립규칙을 개정하며 또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

나 이러한 상태는 이미 원시적인 것이 아니다. 법의 정립을 보통 전연 볼 수 없거나

혹은 사실상 그것이 존재할 때에도 법발견과 법창조가 분리되지 아니한 당연한 결

과로서 재판관이 「적용할」규칙 으로서의 「제정법」이라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아직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재판은 단지 선례로서의 권위만을 가지는데 불과하다. 기

존의 법의 해석으로부터 법의 새로운 형성에 이른다. 이러한 중간단계의 타이프를

가리키는 것에 예컨대 게르만의 「바이스툼」(Weistum)이 있다. 이것은 구체적 또

는 추상적인 법률문제에 관한 권력자들의 재판인데 그들의 권한은 개인적 카리스

마나 연령이나 지식이나 그의 혈통의 명예자격이나, 끝으로는 그의 관직에 기초한

다. 이 바이스툼도 역시 비겔만의 「법판고자」(Gesetzessprecher)의 경우처럼, 시

초에는 법과 권리, 법정립과 판결, 공법과 사법 혹은 그 뿐만 아니라 「행정명령」과

규범적인 규칙까지도 구별하고 있지 않다. 영국 의회의 결의도 역시 거의 현대 초

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아시자(Assisa)는 그 명

칭이 말하듯이, 플랜태제네트(Plantagenet) 왕조 시대 그리고 실로 17세기에 이르

기까지는 기타의 판결과 같은 성격을 가질 뿐이었다. 왕 자신은 그 자신의 아시자

에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않았다. 의회는 여러 가지에 수단으로 이것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의사록과 각종의 기록의 작성은 왕이 인증을 준 의회의 결의에 선례로서

의 권위를 주는 목적에 소용되었다. 그 결과 의결은 현재까지 기존의 법의 단순한

수정이라는 성격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대에서의

대륙의 제정법이 법전화하는 성질을 가지는 것과는 반대이다. 대륙의 제정법의 법

전화하는 성질이라는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그의 대상에 관하여 종전

의 법을 배제하여 아주 새로운 규정을 하려는 것이다. 신법이 구법을 개폐한다는

원칙은 따라서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아직 완전히 관철되지 않고 있다.

영국에 있어서는 퓨리턴과 후에는 휘그당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촉진된 실질적

인 제정법 개념은 로마법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로마법 자체에 있어서는 위의 개

념의 근원은 관직법 안에, 따라서 원래 군사적으로 제약된 정무관의 임페리움 안

에 존재한다. 즉 의결법(Lex-negota)은 정무관의 포고이기는 했으나 병원(兵員)

인 시민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시민에 대하여 그리고 시민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가

지게 되고, 따라서 또 정무관직의 승계자도 이것을 파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현

재의 재정법 개념의 기원은 따라서 로마의 규율이었고 로마의 방위단체의 특성이

었다. 중세의 대륙에서는 카로링거 왕조에서 그의 발단을 볼 수 있었으나 제정법이

라는 로마적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러나 중세 전기의 특히 영국에서의 기술한 정도의 정립된 법

을 수정하는 것으로서의 제정법의 개념의 단계라도 결코 그리 일찍부터 실현된 것

은 아니다. 법창조와 법발견의 카리스마적 시기는 이미 누차 보았듯이, 오히려 순

수하게 합리적인 법정립과 법적용의 시대에서의 다수의 제도 안에 들어가 있으며

현대에서도 일반적으로 완전히 제거되어 있지 않다. 블랙스톤(Blackstone)도 영국

의 재판관을 일종의 살아있는 신탁이라고 부르며, 사실 적어도 영국의 재판이 코

먼로의 육(肉)이 되는데 불가결한 특별의 형식으로서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은 의

미에서는 고대법에서의 신탁의 역할에 필적한다. 즉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것

이 이제는 항구적인 규칙으로 되었다」(was voher ungewiß war ist nun eine

dauernde Regel geworden)라는 의미에서 이다. 재판이 분명히 「조리에 맞지 않

는다」거나 「신의 명령에 반한다」는 경우에만 재판은 그의 카리스마적 성격을 상실

하며 따라서 거기에 위배하여도 위해를 입지 않는다. 진정한 신탁이 영국의 판례

와 구별되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이유의 결여이다. 그러나 신탁의 이러한 성질

은 배심의 평결에도 공통된다. 물론 연혁적으로 배심원 그 자체는 카리스마적인 법

예언자의 법적 승계 같은 것은 아니고 아주 반대로 오히려 재판집회의 재판의 비합

리적인 증[51]거방법에 가름하여 (특히 고유상태에 관하여) 근린자의 증언으로써

하는 것이며, 국왕의 재판소에서는 따라서 군주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산출된 것이

다. 이에 대하여 카리스마적인 법의 판고의 현실적인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게르만의 참심원(Schöffen)이 재판관에 대해서 가지는 지위 안에도, 또한 북구의

법에서의 법판고자 제도 안에도 존재한다. 보통 재판관(Gerichtsherr)이나 그의

대리자는 재판소에서 단지 지휘를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그치며, 판결의 성립에

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 왜냐하면 판결을 만드는 것은 카리스마적 법판고자이

며 뒤에는 참심원, 즉 판결에 의하여 법을 창조해야 할 단체 안에서 임명된 참심원

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기술한 바와 같이, 중세 서양에서의 게노센샤프트적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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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4 21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리고 계층적인 자치의 발전을 비상히 촉진시킨 주목할 만한 원칙이다. 이 비상히

철저하게 유지된 원칙은 사실 한편으로는 기술한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이 원칙은 카리스마적 법발견의 성질에 기인한다. 재판관은 직권으로

재판소를 소집하고 이것을 구성하지만 법발견의 영역에는 개입하는 것이 전혀 불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카리스마적 법사고에 의하면 재판관의 직에 있다 하더라도

명지(明智), 즉 법의 지식의 카리스마까지 부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당사자가 복수보다는 재판상의 보호를 선택하고 일정한 방식, 즉 소송계약의 이행

때문에 의무를 가지게 하고 또 동시에 신이나 그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자격을 가

지게 된 현자에 대하여 정당하게 또한 유효하게 질문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드는

방식을 준수하도록 시킨다면, 그의 사명을 다 한 것이 된다. 이렇게 법에 통효한

자는 시초에는 전적으로 마술적으로 자격을 가지게 된 자이고, 개개의 경우에만

그의 카리스마적 권유 때문에 호출된데 불과하였으나 후에는 - 아일랜드에서의

브레혼(Brehons)이나 갈리아에서의 드루이덴(Druiden)과 같이- 제사이거나 또는

북게르만에서의 법판고자나 프랑크에서의 상설적인 판결발견인(Rachimburgen)처

럼 선거에 의하여 권위자로 인정된 법명예층이든지의 어느 것이었다. 카리스마적

법판고자는 후에는 정기의 선거에 의하여 마침내는 사실상의 지명에 의해서도 그

의 권한이 부여된 관리로 되고 또 상설적인 판결발견인에 가름한 것은 왕에 의해

서 특권이 부여된 법명예층으로서의 참심원이었다. 그러나 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은 관헌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자격이 부여된 자에 한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북구의 법판고자는 그의 카리스마적 지위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에서의 참심원과 꼭 같이 관헌의 권력에 대항하여 정치적으로도 종종 매

우 유력하게 재판소공동체를 위해서 대변하는 자가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특히 그

러하였다. 법판고자는 독일에서의 참심원처럼 언제나 명가 출신이고, 특히 참심원

의 직은 자연 고귀한 카리스마적으로 어떤 가계가 결부되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법판고자는 결코 재판관이 아니었으며, 이것은 10세기 이후에 관해서는 증명할 수

가 있다. 법판고자는 집행에는 하등 관여하지 않고 당초에는 일반적으로 강제권

도 전연 가지지지 못하고, 노르웨이에서 한정된 강제권을 가지게 된 것도 후의 일

이다. 법적 사건에 관한 한 강제라는 것이 인정되는 범위에서의 강제는 오히려 정

치적인 관리가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 판고자는 개개의 사건마다 초청된 법발견자

로부터 전이하여 상설적인 관리로 되었으나 타당하는 법을 예측할 수 있을 것, 따

라서 그의 규칙성을 구하는 합리적 요구가 생기는데 따라 매년 1회 그가 법발견

을 하는데 규준으로 하는 모든 규범을 공동체의 집합에 미리 선언하여 공동체에

게 이것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콘트롤 할 의무가 인정되게 되었다. 여

러 가지로 상이점은 있다 하더라도 법무관의 고시를 매년 공고한다는 제도와 이

것과의 근사성이 지적되는 것은 정당하다. 후임의 법판고자는 전임자의 법의 교시

(lögsaga)에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법판고자 각자는 자신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새로운 법을 창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창조에 즈음하여 법판고자는

부족공동체의 제안이나 결의를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

던 것은 아니고, 이러한 결의는 법의 교시 안에 채택되지 않는 한, 결코 법을 창조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법은 단지 계시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리하

여 이상의 특이한 원칙과 그 귀결인 법창조, 법의 제시의 성립양식은 아주 명백하

다. 같은 제도는 튜링겐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게르만법, 특히 프리스란

트(derâsega)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살리카 법전의 서문에서 말하는 편자를

이러한 법예언자라고 생각한다[452]는 것, 또 프랑크 왕정시대의 부족법전 부가칙

령(Capitula legibus addenda)의 성립의 모습은 법예언자의 제도의 국가화와 관

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근거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제6절 법창조의 담당자로서의 「법명망가」

같은 발전은 거의 어디에서나 그 흔적이 발견된다. 계쟁사건의 재판은 원래 신탁

을 받음으로써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다른 점에서는 극도로 합리화된 정치적·사회

적 상태아래서도 대량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이집트(암몬의 신탁)나 바빌론이 그러

하다. 이러한 재판은 확실히 그리스의 신탁의 권력지위의 원시적 지주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의 법매개재자(Rechtsmittler)도 같은 기능을 하였다. 법의 예언이 지배

하였던 것은 아마 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제사의 권력의 대부분은 어디

에서도 신탁의 수여자나 신판의 절차의 주재자로서의 그 기능에 근거하였으며, 그

때문에 제사의 권력은 점차 평화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속죄나 마침내는 소의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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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계층적인 자치의 발전을 비상히 촉진시킨 주목할 만한 원칙이다. 이 비상히

철저하게 유지된 원칙은 사실 한편으로는 기술한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이 원칙은 카리스마적 법발견의 성질에 기인한다. 재판관은 직권으로

재판소를 소집하고 이것을 구성하지만 법발견의 영역에는 개입하는 것이 전혀 불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카리스마적 법사고에 의하면 재판관의 직에 있다 하더라도

명지(明智), 즉 법의 지식의 카리스마까지 부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당사자가 복수보다는 재판상의 보호를 선택하고 일정한 방식, 즉 소송계약의 이행

때문에 의무를 가지게 하고 또 동시에 신이나 그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자격을 가

지게 된 현자에 대하여 정당하게 또한 유효하게 질문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만드는

방식을 준수하도록 시킨다면, 그의 사명을 다 한 것이 된다. 이렇게 법에 통효한

자는 시초에는 전적으로 마술적으로 자격을 가지게 된 자이고, 개개의 경우에만

그의 카리스마적 권유 때문에 호출된데 불과하였으나 후에는 - 아일랜드에서의

브레혼(Brehons)이나 갈리아에서의 드루이덴(Druiden)과 같이- 제사이거나 또는

북게르만에서의 법판고자나 프랑크에서의 상설적인 판결발견인(Rachimburgen)처

럼 선거에 의하여 권위자로 인정된 법명예층이든지의 어느 것이었다. 카리스마적

법판고자는 후에는 정기의 선거에 의하여 마침내는 사실상의 지명에 의해서도 그

의 권한이 부여된 관리로 되고 또 상설적인 판결발견인에 가름한 것은 왕에 의해

서 특권이 부여된 법명예층으로서의 참심원이었다. 그러나 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은 관헌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자격이 부여된 자에 한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북구의 법판고자는 그의 카리스마적 지위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에서의 참심원과 꼭 같이 관헌의 권력에 대항하여 정치적으로도 종종 매

우 유력하게 재판소공동체를 위해서 대변하는 자가 되었다. 스웨덴에서는 특히 그

러하였다. 법판고자는 독일에서의 참심원처럼 언제나 명가 출신이고, 특히 참심원

의 직은 자연 고귀한 카리스마적으로 어떤 가계가 결부되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법판고자는 결코 재판관이 아니었으며, 이것은 10세기 이후에 관해서는 증명할 수

가 있다. 법판고자는 집행에는 하등 관여하지 않고 당초에는 일반적으로 강제권

도 전연 가지지지 못하고, 노르웨이에서 한정된 강제권을 가지게 된 것도 후의 일

이다. 법적 사건에 관한 한 강제라는 것이 인정되는 범위에서의 강제는 오히려 정

치적인 관리가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 판고자는 개개의 사건마다 초청된 법발견자

로부터 전이하여 상설적인 관리로 되었으나 타당하는 법을 예측할 수 있을 것, 따

라서 그의 규칙성을 구하는 합리적 요구가 생기는데 따라 매년 1회 그가 법발견

을 하는데 규준으로 하는 모든 규범을 공동체의 집합에 미리 선언하여 공동체에

게 이것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콘트롤 할 의무가 인정되게 되었다. 여

러 가지로 상이점은 있다 하더라도 법무관의 고시를 매년 공고한다는 제도와 이

것과의 근사성이 지적되는 것은 정당하다. 후임의 법판고자는 전임자의 법의 교시

(lögsaga)에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법판고자 각자는 자신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새로운 법을 창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창조에 즈음하여 법판고자는

부족공동체의 제안이나 결의를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

던 것은 아니고, 이러한 결의는 법의 교시 안에 채택되지 않는 한, 결코 법을 창조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법은 단지 계시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리하

여 이상의 특이한 원칙과 그 귀결인 법창조, 법의 제시의 성립양식은 아주 명백하

다. 같은 제도는 튜링겐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게르만법, 특히 프리스란

트(derâsega)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살리카 법전의 서문에서 말하는 편자를

이러한 법예언자라고 생각한다[452]는 것, 또 프랑크 왕정시대의 부족법전 부가칙

령(Capitula legibus addenda)의 성립의 모습은 법예언자의 제도의 국가화와 관

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근거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제6절 법창조의 담당자로서의 「법명망가」

같은 발전은 거의 어디에서나 그 흔적이 발견된다. 계쟁사건의 재판은 원래 신탁

을 받음으로써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다른 점에서는 극도로 합리화된 정치적·사회

적 상태아래서도 대량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이집트(암몬의 신탁)나 바빌론이 그러

하다. 이러한 재판은 확실히 그리스의 신탁의 권력지위의 원시적 지주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의 법매개재자(Rechtsmittler)도 같은 기능을 하였다. 법의 예언이 지배

하였던 것은 아마 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일 것이다. 제사의 권력의 대부분은 어디

에서도 신탁의 수여자나 신판의 절차의 주재자로서의 그 기능에 근거하였으며, 그

때문에 제사의 권력은 점차 평화가 이루어짐에 따라서 속죄나 마침내는 소의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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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점점 복수에 가름하게 된 결과 자주 대단히 강대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합리적 증거방법은 수장의 소송절차(Hauptlingsprozedur)를 통하여 비교적 일

찍부터 그 의의를 상당히 상실하였으나 주물제사들(Fetischpriester)의 권력 -그

것은 종종 무서운 것이었다 - 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유물, 즉 주물적 제사

들이 주재하는 것이 허용되는 종교적인 마술소송이나 여기에 따르는 신판에 근거

하여 존속하고 있다. 이 마술적 소송에 의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이 혐오하는 자

또는 그들에게 승리할 줄을 아는 자가 혐오하는 자의 생명과 재산을 마술소송의

제기에 의해서 박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세속적인 재판도 경우에 따라서

는 옛 카리스마적인 법발견의 중요한 특색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의 티스모

테텐(Thesmotheten)도 역시, 원래 카리스마적인 법예언의 제도에 규율이 부여되

어 선거된 일단의 관리에게로 전이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정당

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재판에 대한 신관(Pontifices)의 관여는 다른 법예

언의 제도에 유사한 방법으로 규율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느 제도까지 행하여졌

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형식적인 소송지휘와 법의 판고(判告)와의 분리의 원

칙은 물론 게르만의 판결발견과는 기술적으로 상당히 다른 방법이 취하여진 로마

에서도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법무관과 안찰관(按察官)의 고시에 관한 한 그

것이 법의 교시(Lögsaga)에 유사하다는 것은 시초에 그 관리가 이것으로 구속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나중에는 관리 자신까지도 구속할 힘이 인정하게 된 데

에서부터라도 알 수가 있다. 법무관이 그의 고시에 구속된다는 원칙은 제정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국적으로 법에서 실현되었고, 원래 비전적인 기술론에 근거하는

신관(神官)의 법의 판고도 법무관의 소송지휘도 따라서 당초에는 비합리적인 성격

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이러한 전통이 있었던 까

닭에 법전편찬과 법의 공포를 구하는 평민들의 요구는 신관과 법무관의 양자에게

로 향한 것이다.

[54] 법발견과 법강제의 분리는 종종 독일의 재판의 특질이고, 게노센샤프트의

강력한 지위의 연원이라 하지만 그 자체, 결코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참

심원단은 옛 카리스마적인 법예언 제도에 가름하여 나타난 것이다. 게르만의 발전

에 특이한 것은 오히려 이 원칙의 유지와 그의 기술적 구성의 태도로서 이것은 다

른 약간의 중요한 특수성과 관련하고 있다. 특히 「입회인」이 상당히 장기간 중요성

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입회인은 법명망가에 속하지 않은 법협동체의

구성원이 법발견에 관여하는 것인데 그의 형식은 판결자가 발견한 법의 선언을 법

협동체 구성원이 갈채에 의해서 승인하는 것이 불가결한 것으로 되며, 또 원칙적

으로 각 구성원이 판결비난(Urteilsschelte)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 있다. 전

자, 즉 갈채에 의한 입회인의 관여는 게르만의 법영역 이외에서도 볼 수 있다. 호

머가 아킬레스의 방패에 묘사한 소송경과의 서술은 그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으

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외에서도 (이스라엘에서는 예레미야의 소송),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특수한 것은 판결비난이다. 그러나 협동체 자유민이 규율에 의하여 판결

에 이러한 관여를 하는 것을 무엇인가 원시적인 것이 라고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특별한 그것도 군사적 발전에 의하여 산출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타당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사유를 세속화 시키는 힘들, 특히 마술적

으로 보장된 전통에서 이것을 해방시키는 힘들 중에서 전쟁이 가져오는 변혁이 가

장 강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정복하고 있는 장군의 명령권은 물론 중요사항에 관해서는 전부, 그 군대의 자

유로운 동의에 따라서 행사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에서 말하면, 대단히 포

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평시이면 공시된 규범에 의해서만 규제되는 관계

의 질서도 사리상, 비상시에는 종종이 명령권이 미치게 되고, 단지 협정된 또는 수

여된 규칙에 의해서만 새로이 창조될 수 있게 된다. 영장(領將)과 군대는 포로, 전

리품 특히 점령지를 처분하며 그리고 그 결과 개개인의 권리 또는 사정에 따라서는

현행의 규칙을 새로이 창조했다. 다른 한 편 영장은 또 규율의 위반에 대한 그리고

내부적 평화파괴에 대한 공통의 안전이라는 이익을 위하여 평화시에 있어서의 「재

판관」보다, 대단히 커다란 전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렇게 하여 명령권

의 권위는 전통의 희생에서 증대한다. 그리고 전쟁이 결과시키는 현존하는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들의 변혁이 관행(das Gewohnte) 그 자체가 전적으로 영원히 타

당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킨다. 각기 상이한 발전

단계에서이지만 이미 타당한 법을 또는 새로 제정된 법을 체계적으로 확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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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6 21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가 점점 복수에 가름하게 된 결과 자주 대단히 강대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합리적 증거방법은 수장의 소송절차(Hauptlingsprozedur)를 통하여 비교적 일

찍부터 그 의의를 상당히 상실하였으나 주물제사들(Fetischpriester)의 권력 -그

것은 종종 무서운 것이었다 - 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유물, 즉 주물적 제사

들이 주재하는 것이 허용되는 종교적인 마술소송이나 여기에 따르는 신판에 근거

하여 존속하고 있다. 이 마술적 소송에 의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이 혐오하는 자

또는 그들에게 승리할 줄을 아는 자가 혐오하는 자의 생명과 재산을 마술소송의

제기에 의해서 박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세속적인 재판도 경우에 따라서

는 옛 카리스마적인 법발견의 중요한 특색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아테네의 티스모

테텐(Thesmotheten)도 역시, 원래 카리스마적인 법예언의 제도에 규율이 부여되

어 선거된 일단의 관리에게로 전이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정당

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재판에 대한 신관(Pontifices)의 관여는 다른 법예

언의 제도에 유사한 방법으로 규율되고 있었으나 그것이 어느 제도까지 행하여졌

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형식적인 소송지휘와 법의 판고(判告)와의 분리의 원

칙은 물론 게르만의 판결발견과는 기술적으로 상당히 다른 방법이 취하여진 로마

에서도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법무관과 안찰관(按察官)의 고시에 관한 한 그

것이 법의 교시(Lögsaga)에 유사하다는 것은 시초에 그 관리가 이것으로 구속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나중에는 관리 자신까지도 구속할 힘이 인정하게 된 데

에서부터라도 알 수가 있다. 법무관이 그의 고시에 구속된다는 원칙은 제정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국적으로 법에서 실현되었고, 원래 비전적인 기술론에 근거하는

신관(神官)의 법의 판고도 법무관의 소송지휘도 따라서 당초에는 비합리적인 성격

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 이러한 전통이 있었던 까

닭에 법전편찬과 법의 공포를 구하는 평민들의 요구는 신관과 법무관의 양자에게

로 향한 것이다.

[54] 법발견과 법강제의 분리는 종종 독일의 재판의 특질이고, 게노센샤프트의

강력한 지위의 연원이라 하지만 그 자체, 결코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참

심원단은 옛 카리스마적인 법예언 제도에 가름하여 나타난 것이다. 게르만의 발전

에 특이한 것은 오히려 이 원칙의 유지와 그의 기술적 구성의 태도로서 이것은 다

른 약간의 중요한 특수성과 관련하고 있다. 특히 「입회인」이 상당히 장기간 중요성

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입회인은 법명망가에 속하지 않은 법협동체의

구성원이 법발견에 관여하는 것인데 그의 형식은 판결자가 발견한 법의 선언을 법

협동체 구성원이 갈채에 의해서 승인하는 것이 불가결한 것으로 되며, 또 원칙적

으로 각 구성원이 판결비난(Urteilsschelte)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에 있다. 전

자, 즉 갈채에 의한 입회인의 관여는 게르만의 법영역 이외에서도 볼 수 있다. 호

머가 아킬레스의 방패에 묘사한 소송경과의 서술은 그에 관한 것을 말하는 것으

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외에서도 (이스라엘에서는 예레미야의 소송),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특수한 것은 판결비난이다. 그러나 협동체 자유민이 규율에 의하여 판결

에 이러한 관여를 하는 것을 무엇인가 원시적인 것이 라고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특별한 그것도 군사적 발전에 의하여 산출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타당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사유를 세속화 시키는 힘들, 특히 마술적

으로 보장된 전통에서 이것을 해방시키는 힘들 중에서 전쟁이 가져오는 변혁이 가

장 강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정복하고 있는 장군의 명령권은 물론 중요사항에 관해서는 전부, 그 군대의 자

유로운 동의에 따라서 행사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내용에서 말하면, 대단히 포

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평시이면 공시된 규범에 의해서만 규제되는 관계

의 질서도 사리상, 비상시에는 종종이 명령권이 미치게 되고, 단지 협정된 또는 수

여된 규칙에 의해서만 새로이 창조될 수 있게 된다. 영장(領將)과 군대는 포로, 전

리품 특히 점령지를 처분하며 그리고 그 결과 개개인의 권리 또는 사정에 따라서는

현행의 규칙을 새로이 창조했다. 다른 한 편 영장은 또 규율의 위반에 대한 그리고

내부적 평화파괴에 대한 공통의 안전이라는 이익을 위하여 평화시에 있어서의 「재

판관」보다, 대단히 커다란 전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렇게 하여 명령권

의 권위는 전통의 희생에서 증대한다. 그리고 전쟁이 결과시키는 현존하는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들의 변혁이 관행(das Gewohnte) 그 자체가 전적으로 영원히 타

당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킨다. 각기 상이한 발전

단계에서이지만 이미 타당한 법을 또는 새로 제정된 법을 체계적으로 확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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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18 21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바로 전쟁의 확대와의 관여에 있어서 특히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경우에 법발견과 법창조는 내부 및 외부의 적에 대한 안전이라는 불가피한 필

요에 영향되어서 보다 합리적으로 형성되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소송

절차의 각종의 가능한 담당자도 역시 상호 새로운 관계를 획득한다. 전쟁 및 전쟁

의 준비에 근거하여 성립한 방위단체 그 자체도 그 구성원간의 분쟁의 해결에 대

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며, 따라서 또 법의 발전에 대해서도 결정적 영향을 갖

는다. 그 경우에 장로들의 세력이나 일정한 범위에서는 마술의 세력까지도 약화시

키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으로는 영장의 명령권, 다른 한 편으로는 신성한 전통의

세속적 또는 종교적 보호자, 그리고 끝으로 전통에는 그리 구속되지 않고 존립하

면서 그 자신으로서도 이 규칙의 지배에 관여하려는 요구 그것들을 여하튼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의해서 매우 다양한 결과가 생긴다. 그때에는 군사적 조직의 모습이

언제나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게르만의 개개의 가우(Gau)의 재판집회 그리

고 정치단체인 커다란 란트단체(Landgemeinschaft)는 방위능력이 있는, 그리고

그 때문에 부동산을 소유하는데 참여한 성원이 소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로마의

국민은 원래, 전술적 구성에 집합하여 참가한 부동산 소유자로서 이루어진 군대이

다. 민족이동이라는 대변혁의 시기에 게르만의 정치단체인 란트 단체는 새로운 법

의 창조에 참가하는 자격을 얻은 것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모든 제정법은 왕법이라

고 하는 좀(Sohm)의 생각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규칙의 이러한 종

류의 정립에는 명령권의 담당자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카리스마적

법판고자의 권력은 보다 더 장기간 정주하고 있는 민중 사이에 그대로 존재하였

고, 이에 대하여 전쟁을 하면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된 민중(특

히 프랑크인과 랑고발드인) 사이에는 법의 정립과 판결에의 악티브한 결정적 관여

를 요구하고, 실현하라는 방위단체의 권력감정이 증대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 편, 중세 초기의 유럽에서는 예증하면 기독교교회는 사교의 권력적 지

위에 의하여 재판과 법의 정립에 군주가 간섭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교회의 이익

과 윤리상의 이익으로부터 교회 자신이 직접 그러한 간섭을 자극한 일도 종종 있

었다. 프랑크 국왕의 칙명은 준신정적인 순회재판소의 발전과 평행하고 있다. 러시

아에서는 기독교가 도입된 직후의 루스카야 프라우다(Russkaja Prawda)의 제2

판에서, 초판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법발견과 법정립에의 군주의 간섭이 기

재되고, 그리고 즉시 또 아주 포괄적인 새로운 군주가 제정한 실체법이 발전하였

다. 여하튼 서양에서는 명령권의 경향은 방위단체 내부에서의 카리스마적 또한 게

노센샤프트적 재판의 확고한 구조와 충돌하였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국민은 중갑

장비병 규율의 발전과 더불어 명령권의 담당자가 국민에게 제안한 것을 단지 승인

하거나 거부하는 것만이 가능하였다. 더구나 명령권의 담당자가 국민에게 제안하

는 것은 법의 정립 외에는 중죄사건의 상소의 경우에 있어서의 판결뿐이었다. 게르

만의 재판민단체에 있어서는 유효한 판결을 하는 데에는 「입회인」의 찬부가 필요했

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국민에 있어서는 정무관이 한 중형판결의 은혜적 파기를

구하는 청원만을 일단 할 수 있었음에 불과하다. 게르만의 재판민집회에서는 전

체 구성원에게 판결을 비난할 권리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바로 군사규율이 대개 미

발동이었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이것과 대응하여 법발견의 카리스마는 카

리스마의 직업적 담당자에게 전유되지 않고 오히려 개개의 사건에서 재판집회민의

각자가 판결 안에 반대제안을 하여 그의 보다 우수한 지식을 주장하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 경우에 결정은 원초적으로는 두 개의 제안의 주장자 간의 신판에 의

해서만 내릴 수가 있었다. 부자(負者, Unterliegenden)에 대해서 형벌이 부과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왜냐하면 거짓 판단은 권리를 보호하는 신에 대한 범죄였기 때

문이다. 실체상 재판민집회의 찬성 또는 반대도 역시 항상 중요하였다(이러한 의

미에서 판결집회의 소리는 「신의 소리」이다). 또한 소송지휘의 권한이 전적으로 정

무관에게 인정되었다는 것, 관리의 서로 경합하는 종류의 배타적인 발의권(국민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agere cum populo])이 인정된 것은 마치 로마인의 엄격한 규

율에 조응하는 것이다. 요컨대 게르만의 경우처럼 법발견과 법강제가 분리되는 것

도, 재판에서의 「권력분배」의 또 하나의 형식이고, 로마의 경우처럼 상호 개입권이

부여된 여러 종류의 정무관이 경합하고, 정무관과 심판인 사이에서 소송의 분배

가 행하여지는 것도, 재판에서의 권력분배의 다른 하나의 형식이다. 그러나 재판

에서의 권력분배는, 특히 정무관 즉 법명망가, 방위단체, 재판민단체의 협력의 필

요성 - 그리고 이 필요성은 게르만과 로마에서는 기술하였듯이 각각 다른 모양으

로 질서되어 있었으나 - 에 의해서도 보장되어 있다. 법과 법발견이 형식적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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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로 전쟁의 확대와의 관여에 있어서 특히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경우에 법발견과 법창조는 내부 및 외부의 적에 대한 안전이라는 불가피한 필

요에 영향되어서 보다 합리적으로 형성되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소송

절차의 각종의 가능한 담당자도 역시 상호 새로운 관계를 획득한다. 전쟁 및 전쟁

의 준비에 근거하여 성립한 방위단체 그 자체도 그 구성원간의 분쟁의 해결에 대

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며, 따라서 또 법의 발전에 대해서도 결정적 영향을 갖

는다. 그 경우에 장로들의 세력이나 일정한 범위에서는 마술의 세력까지도 약화시

키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으로는 영장의 명령권, 다른 한 편으로는 신성한 전통의

세속적 또는 종교적 보호자, 그리고 끝으로 전통에는 그리 구속되지 않고 존립하

면서 그 자신으로서도 이 규칙의 지배에 관여하려는 요구 그것들을 여하튼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의해서 매우 다양한 결과가 생긴다. 그때에는 군사적 조직의 모습이

언제나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게르만의 개개의 가우(Gau)의 재판집회 그리

고 정치단체인 커다란 란트단체(Landgemeinschaft)는 방위능력이 있는, 그리고

그 때문에 부동산을 소유하는데 참여한 성원이 소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로마의

국민은 원래, 전술적 구성에 집합하여 참가한 부동산 소유자로서 이루어진 군대이

다. 민족이동이라는 대변혁의 시기에 게르만의 정치단체인 란트 단체는 새로운 법

의 창조에 참가하는 자격을 얻은 것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모든 제정법은 왕법이라

고 하는 좀(Sohm)의 생각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규칙의 이러한 종

류의 정립에는 명령권의 담당자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카리스마적

법판고자의 권력은 보다 더 장기간 정주하고 있는 민중 사이에 그대로 존재하였

고, 이에 대하여 전쟁을 하면서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된 민중(특

히 프랑크인과 랑고발드인) 사이에는 법의 정립과 판결에의 악티브한 결정적 관여

를 요구하고, 실현하라는 방위단체의 권력감정이 증대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 편, 중세 초기의 유럽에서는 예증하면 기독교교회는 사교의 권력적 지

위에 의하여 재판과 법의 정립에 군주가 간섭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교회의 이익

과 윤리상의 이익으로부터 교회 자신이 직접 그러한 간섭을 자극한 일도 종종 있

었다. 프랑크 국왕의 칙명은 준신정적인 순회재판소의 발전과 평행하고 있다. 러시

아에서는 기독교가 도입된 직후의 루스카야 프라우다(Russkaja Prawda)의 제2

판에서, 초판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법발견과 법정립에의 군주의 간섭이 기

재되고, 그리고 즉시 또 아주 포괄적인 새로운 군주가 제정한 실체법이 발전하였

다. 여하튼 서양에서는 명령권의 경향은 방위단체 내부에서의 카리스마적 또한 게

노센샤프트적 재판의 확고한 구조와 충돌하였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국민은 중갑

장비병 규율의 발전과 더불어 명령권의 담당자가 국민에게 제안한 것을 단지 승인

하거나 거부하는 것만이 가능하였다. 더구나 명령권의 담당자가 국민에게 제안하

는 것은 법의 정립 외에는 중죄사건의 상소의 경우에 있어서의 판결뿐이었다. 게르

만의 재판민단체에 있어서는 유효한 판결을 하는 데에는 「입회인」의 찬부가 필요했

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국민에 있어서는 정무관이 한 중형판결의 은혜적 파기를

구하는 청원만을 일단 할 수 있었음에 불과하다. 게르만의 재판민집회에서는 전

체 구성원에게 판결을 비난할 권리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바로 군사규율이 대개 미

발동이었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이것과 대응하여 법발견의 카리스마는 카

리스마의 직업적 담당자에게 전유되지 않고 오히려 개개의 사건에서 재판집회민의

각자가 판결 안에 반대제안을 하여 그의 보다 우수한 지식을 주장하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 경우에 결정은 원초적으로는 두 개의 제안의 주장자 간의 신판에 의

해서만 내릴 수가 있었다. 부자(負者, Unterliegenden)에 대해서 형벌이 부과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왜냐하면 거짓 판단은 권리를 보호하는 신에 대한 범죄였기 때

문이다. 실체상 재판민집회의 찬성 또는 반대도 역시 항상 중요하였다(이러한 의

미에서 판결집회의 소리는 「신의 소리」이다). 또한 소송지휘의 권한이 전적으로 정

무관에게 인정되었다는 것, 관리의 서로 경합하는 종류의 배타적인 발의권(국민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agere cum populo])이 인정된 것은 마치 로마인의 엄격한 규

율에 조응하는 것이다. 요컨대 게르만의 경우처럼 법발견과 법강제가 분리되는 것

도, 재판에서의 「권력분배」의 또 하나의 형식이고, 로마의 경우처럼 상호 개입권이

부여된 여러 종류의 정무관이 경합하고, 정무관과 심판인 사이에서 소송의 분배

가 행하여지는 것도, 재판에서의 권력분배의 다른 하나의 형식이다. 그러나 재판

에서의 권력분배는, 특히 정무관 즉 법명망가, 방위단체, 재판민단체의 협력의 필

요성 - 그리고 이 필요성은 게르만과 로마에서는 기술하였듯이 각각 다른 모양으

로 질서되어 있었으나 - 에 의해서도 보장되어 있다. 법과 법발견이 형식적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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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0 22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보유한 것은 위의 사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관직적」권력들이 즉

군주와 그의 관료의 명령권이나 또는 법의 관직상의 보유자로서의 제사의 권력이

그 자신의 전능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법의 지식의 독립한 카리스마적 담당자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재판민단체의 관여를 또는 재판민단체의 대표자의 관여를 전적

으로 제거하는 것에 성공한 데에서는 법형성은 일찍부터 신정적·가산적 성격을 띤

다. 우리는 이것이 법의 형식성에 대해서 어떤 귀결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곧 뒤

에서 배울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그리스의 민주정치에서처럼 정치적으로 전능하

게 된 재판민단체가 전부의 정무관적 카리스마적 법발견의 담당자를 자신이 압제

하여 그 대신에 자신을 법제정의, 특히 법발견의 유일하고 최고의 담당자로서 위치

시킨 곳에서는 뒤에 말하듯이, 발전은 위와는 다른 경과를 취했다. 그러나 법형성

에 대한 형식상의 결과로부터 말한다면, 이것과 비슷한 발전의 경과를 취했다. 우

리는 - 특히 게르만의 방위단체에서, 그리고 이미 대단히 합리적으로 수정된 의미

에서, 로마의 방위단체에서도 실현된 - 다음의 상태를 「딩게노센샤프트적」인 법발

견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이 상태라는 것은 법동료단체가 법발견에 관여하는 것인

데 그러나 법발견을 전권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법지식의 카리스마적 혹은

관직적 담당자에 의한 판결제안만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상태, 따라서 특

히 판결비난과 같은 특별한 수단에 의해서 이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태의 것이

다. 법발견에 대한 법동료단체의 원조 같은 것은 딩게노센샤프트적인 법발견의 존

재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법동료단체의 원조는 예를 들면 토고의

토인 사이에서도 루스카야 프라우다의 그리스트 기원전의 최초의 편집의 시대에

있어서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도 같이 아주 광범위하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이 두 경우에는 게르만의 참심인단에 상당하는 소수의 판결발견인(러시아인

사이에서는 12인)의 일단도 존재하였다. 토고 토인에 있어서는 판결발견인의 일단

을 구성한 것은 씨족의 장로, 혹은 또 지역적 집단의 장로이다. 그리고 이것이 많

은 경우에 판결발견인단의 발전의 시초였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군주의 관여는 루

스가야 프라우다에는 -기술하였듯이 - 아직 전연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런데 토

고 토인들 사이에서는 군주는 사회자이고 그리고 판결은 군주와 장로들과의 공동

의 - 여기서는 확실히 비밀의 - 협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판결발

견인이 카리스마적 성격을 보유하는 상태 아래서 원칙적으로 같은 권한을 가지는

「입회인」이 판결발견에 협력한다는 것은 두 개의 경우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비

슷한 것이 아프리카 기타의 곳에도 때때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재판민단체가 존

재하는 곳에는 한편으로는 법과 법발견의 형식적인 성격이 광범위하게 유지된다.

왜냐하면 법발견은 법에 통효한 자의 계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법

이 그 사람들에 타당하는, 그 사람들에 「봉사」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법이 지배

하려는 그 사람들의 편애나 정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법에 통

효한 자의 지식은 다른 모든 진정한 카리스마처럼, 확신의 힘에 의해서 강제 아래

자신을 「확증하지」아니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필연성에 의하여 간접으로 법동료

의 「공평감정」이나 일상경험이 영속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경우도 역시

모든 법이 형식상 「법조법」이다. 왜냐하면 특별한 지식 없이는 법은 합리적 규칙인

형태를 취하지 못할 것이니까. 동시에 또 전법이 실질상 「민중법」이다.

우리는 「딩게노센샤프트적」 사법의 시대에 -그 위에 딩그게노센샤프트적 사법은

카리스마적 권력자와 재판민단체 그리고 방위단체의 승인 사이에는 결코 보편적으

로 확대된 것은 아니지만 - 법격언이 생겼다 하더라도 대과 없을 것이다. 법격언에

서 볼 수 있는 보통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통속적인 근거와 형식적인 법규범을 집

중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신뢰를 맡긴 경우에는 너는 그 신뢰를 찾

아야 된다」. 또는 간단하게 「손은 손을 지켜 라」라는 것과 같은 명제를 세움으로써

이다. 한편으로는 법격언은 재판민단체의 관여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통속성과 비

전문가가 가지는 비교적 깊은 법지식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격언의 정식

화는 때때로 반복되는 재판의 원리에 관해서 훈련을 받은 자로서 또는 딜레탄트적

으로 숙고한 두뇌가 행한 것이고 때때로 특히 법예언자의 산물인 것은 확실하다.

법격언은 「표어」의 형식을 가진 단언적 「법명제」이다.

이에 반하여 판결의 의식적인 법원칙의 총체로서의 형식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발전한 「법」은 수습을 받은 법전문가의 결정적인 협력 없이는 결코 성립하지 않으

며, 또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전문가의 카테고리에 관해서는 기술한 바이

다. 관직상 재판의 담당자로 된 자를 포함하여 「법명망가」를 구성하는 것은 법선

언자, 라힘부르겐(Rachimburgen), 심판인, 때로는 제사, 법발견에 관계한 「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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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50: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220 22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보유한 것은 위의 사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관직적」권력들이 즉

군주와 그의 관료의 명령권이나 또는 법의 관직상의 보유자로서의 제사의 권력이

그 자신의 전능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법의 지식의 독립한 카리스마적 담당자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재판민단체의 관여를 또는 재판민단체의 대표자의 관여를 전적

으로 제거하는 것에 성공한 데에서는 법형성은 일찍부터 신정적·가산적 성격을 띤

다. 우리는 이것이 법의 형식성에 대해서 어떤 귀결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곧 뒤

에서 배울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그리스의 민주정치에서처럼 정치적으로 전능하

게 된 재판민단체가 전부의 정무관적 카리스마적 법발견의 담당자를 자신이 압제

하여 그 대신에 자신을 법제정의, 특히 법발견의 유일하고 최고의 담당자로서 위치

시킨 곳에서는 뒤에 말하듯이, 발전은 위와는 다른 경과를 취했다. 그러나 법형성

에 대한 형식상의 결과로부터 말한다면, 이것과 비슷한 발전의 경과를 취했다. 우

리는 - 특히 게르만의 방위단체에서, 그리고 이미 대단히 합리적으로 수정된 의미

에서, 로마의 방위단체에서도 실현된 - 다음의 상태를 「딩게노센샤프트적」인 법발

견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이 상태라는 것은 법동료단체가 법발견에 관여하는 것인

데 그러나 법발견을 전권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법지식의 카리스마적 혹은

관직적 담당자에 의한 판결제안만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상태, 따라서 특

히 판결비난과 같은 특별한 수단에 의해서 이것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태의 것이

다. 법발견에 대한 법동료단체의 원조 같은 것은 딩게노센샤프트적인 법발견의 존

재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법동료단체의 원조는 예를 들면 토고의

토인 사이에서도 루스카야 프라우다의 그리스트 기원전의 최초의 편집의 시대에

있어서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도 같이 아주 광범위하게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

위에 이 두 경우에는 게르만의 참심인단에 상당하는 소수의 판결발견인(러시아인

사이에서는 12인)의 일단도 존재하였다. 토고 토인에 있어서는 판결발견인의 일단

을 구성한 것은 씨족의 장로, 혹은 또 지역적 집단의 장로이다. 그리고 이것이 많

은 경우에 판결발견인단의 발전의 시초였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군주의 관여는 루

스가야 프라우다에는 -기술하였듯이 - 아직 전연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런데 토

고 토인들 사이에서는 군주는 사회자이고 그리고 판결은 군주와 장로들과의 공동

의 - 여기서는 확실히 비밀의 - 협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의 판결발

견인이 카리스마적 성격을 보유하는 상태 아래서 원칙적으로 같은 권한을 가지는

「입회인」이 판결발견에 협력한다는 것은 두 개의 경우에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비

슷한 것이 아프리카 기타의 곳에도 때때로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재판민단체가 존

재하는 곳에는 한편으로는 법과 법발견의 형식적인 성격이 광범위하게 유지된다.

왜냐하면 법발견은 법에 통효한 자의 계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법

이 그 사람들에 타당하는, 그 사람들에 「봉사」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법이 지배

하려는 그 사람들의 편애나 정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법에 통

효한 자의 지식은 다른 모든 진정한 카리스마처럼, 확신의 힘에 의해서 강제 아래

자신을 「확증하지」아니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필연성에 의하여 간접으로 법동료

의 「공평감정」이나 일상경험이 영속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경우도 역시

모든 법이 형식상 「법조법」이다. 왜냐하면 특별한 지식 없이는 법은 합리적 규칙인

형태를 취하지 못할 것이니까. 동시에 또 전법이 실질상 「민중법」이다.

우리는 「딩게노센샤프트적」 사법의 시대에 -그 위에 딩그게노센샤프트적 사법은

카리스마적 권력자와 재판민단체 그리고 방위단체의 승인 사이에는 결코 보편적으

로 확대된 것은 아니지만 - 법격언이 생겼다 하더라도 대과 없을 것이다. 법격언에

서 볼 수 있는 보통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통속적인 근거와 형식적인 법규범을 집

중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신뢰를 맡긴 경우에는 너는 그 신뢰를 찾

아야 된다」. 또는 간단하게 「손은 손을 지켜 라」라는 것과 같은 명제를 세움으로써

이다. 한편으로는 법격언은 재판민단체의 관여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통속성과 비

전문가가 가지는 비교적 깊은 법지식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격언의 정식

화는 때때로 반복되는 재판의 원리에 관해서 훈련을 받은 자로서 또는 딜레탄트적

으로 숙고한 두뇌가 행한 것이고 때때로 특히 법예언자의 산물인 것은 확실하다.

법격언은 「표어」의 형식을 가진 단언적 「법명제」이다.

이에 반하여 판결의 의식적인 법원칙의 총체로서의 형식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발전한 「법」은 수습을 받은 법전문가의 결정적인 협력 없이는 결코 성립하지 않으

며, 또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전문가의 카테고리에 관해서는 기술한 바이

다. 관직상 재판의 담당자로 된 자를 포함하여 「법명망가」를 구성하는 것은 법선

언자, 라힘부르겐(Rachimburgen), 심판인, 때로는 제사, 법발견에 관계한 「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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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2 22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무가」층이다. 재판이 경험을 종국적으로는 또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증대함에

따라서 법이해관계자의 사적 대변인과 변호사가 「권리의 안출」에 의해서 자주 법의

형성에 대해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는 법실무가의 또 하나의 카테고리로서 그들

에게 가입한다. 이러한 종류의 법실무가의 발전의 조건들에 관해서는 뒤에 더 말

하기로 하겠다. 법률학적 전문지식의 증대가 직업적 변호사를 창조한 것이다. 그런

데 이렇게 더욱더 법실무가의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게 된 것은 따라서 또

법이 합리화하게 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재화의 거래, 그리고 이에 종사하는 법이

해관계자의 의의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그의 해결에는 전문

적인, 즉 합리적 훈련이 불가결한 요건으로 된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

리가 여기서 특히 문제로 삼는 것은 법의 합리화의 진로와 운명, 따라서 법이 오늘

날에 가지는 특수 「법률학적」성질의 발전에 대한 진로와 운명에 관해서이다. 법은

여러 종류의 방식으로 합리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의 「법률

학적」 성질의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합리화된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

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성질이 어떤 방향에서 발전하는가는 이른바

「법률학 내부의」 관계들에 의해서, 바꾸어 말하면 법형성의 모습에 직업적으로 영

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어떤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의 특성에 의해서 직접

조건지위져 있고, 그리고 일층 더 경제적 및 사회적 일반적 조건들에 의해서 간접

으로 조건지워져 있다. 법의 교시의, 즉 여기서는 법실무가의 교육의 모습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제3장 권리 설정의 형태들

제1절 「법적 명제들」의 논리적 카테고리, 「자유권」과 「수권규정」

법형성의 담당자였던 다른 모든 단체가 하나의 국가적 강제기구 안에 녹아 들어

가 이제는 이 기구가 「정통적인」법 전체의 원천일 것을 주장한다는 사태는 법의 형

식적인 존재양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은 또 그 형식적 존재양식에서

법은 이해관계자의 이익에, 특히 경제적 견지의 이익에 대해서도 봉사하게 되는 것

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S. 192 f.) 구체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은, 즉 「객관적인」법

에 의해서 「주체적인 권리」가 부여된 개인을 위해서 일정한 기대가 상실되지 않도

록 그의 샨스의 증가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 더 나아가서 개개의 법의

이해관계자의 이러한 권리가 창조된다는 것은 위의 샨스가 증가하는 통상의 경우

외에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고찰할 때에는 이 통상의 경

우가 서서히 바뀌어 가면 법적으로 보장된 샨스는 단지 어떤 「규칙」(Reglement)

의 「반사」라는 형식으로서만 이해관계인 개인에게 부여되고 있음에 불과하며, 요컨

대 어떠한 「주체적 권리」라도 개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실상 물에 대해서 또는 사람에 대해서 지배력을 가지

고 있는 자는 법의 보장에 의하여 위의 지배력이 영속하기 위한 특수한 보장을 입

수한다. 즉 어떤 것에 관해서 약속을 받은 자는 협정이 다시 이행되기 위한 특수한

보장을 법의 보장으로 입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법과 경제와의 가장 기본

적인 관계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아니다. 오

히려 법은 여하튼 강제의 작용이 있어야만 일정한 경제적 관계들의 성립, 즉 경제

상의 지배력의 질서나 합의에 의한 경제상의 기대의 질서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도

록 작용하는 일도 있다 – 사회학적으로 표현하면, 경험적으로 타당한 질서를 통

하여 행해지는 경제기능의 활동은 이렇게 형성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객관적 법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합리적으로 창조된 경우

이다. 또 이것은 물론 아주 특수한 「법」의 상태를 전제로 하며, 우선 이들 전제들

의 약간을 설명하기로 한다.

법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근대법은 「법적 명제들」로서 성립하고 있다. 바꾸어 말

하면 일정한 사태는 일정한 법적 효과를 야기해야만 된다는 내용을 가진 추상적

규범들로서 성립하고 있다. 「법적 명제들」의 구분에 관하여 말하면, 전체 질서에

있는 것처럼 「명령적」· 「금지적」· 「허용적」인 법적 명제들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숙지된 구별이고 타인에게 어떤 행위를 명하고, 또는 금지하고 또는 허용하는 개인

의 권리들도 이러한 종류의 법적 명제들에서 생겨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상과

같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제한된 타인의 행위에 대한 힘에는 다음의 기대가 일치

한다. 즉 (1) 타인이 어떤 일정한 것을 행할 것이다. 또는 (2) 타인이 어떤 일정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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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권력—계약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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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층이다. 재판이 경험을 종국적으로는 또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증대함에

따라서 법이해관계자의 사적 대변인과 변호사가 「권리의 안출」에 의해서 자주 법의

형성에 대해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는 법실무가의 또 하나의 카테고리로서 그들

에게 가입한다. 이러한 종류의 법실무가의 발전의 조건들에 관해서는 뒤에 더 말

하기로 하겠다. 법률학적 전문지식의 증대가 직업적 변호사를 창조한 것이다. 그런

데 이렇게 더욱더 법실무가의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게 된 것은 따라서 또

법이 합리화하게 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재화의 거래, 그리고 이에 종사하는 법이

해관계자의 의의가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그의 해결에는 전문

적인, 즉 합리적 훈련이 불가결한 요건으로 된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

리가 여기서 특히 문제로 삼는 것은 법의 합리화의 진로와 운명, 따라서 법이 오늘

날에 가지는 특수 「법률학적」성질의 발전에 대한 진로와 운명에 관해서이다. 법은

여러 종류의 방식으로 합리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의 「법률

학적」 성질의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합리화된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

해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성질이 어떤 방향에서 발전하는가는 이른바

「법률학 내부의」 관계들에 의해서, 바꾸어 말하면 법형성의 모습에 직업적으로 영

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어떤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의 특성에 의해서 직접

조건지위져 있고, 그리고 일층 더 경제적 및 사회적 일반적 조건들에 의해서 간접

으로 조건지워져 있다. 법의 교시의, 즉 여기서는 법실무가의 교육의 모습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제3장 권리 설정의 형태들

제1절 「법적 명제들」의 논리적 카테고리, 「자유권」과 「수권규정」

법형성의 담당자였던 다른 모든 단체가 하나의 국가적 강제기구 안에 녹아 들어

가 이제는 이 기구가 「정통적인」법 전체의 원천일 것을 주장한다는 사태는 법의 형

식적인 존재양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은 또 그 형식적 존재양식에서

법은 이해관계자의 이익에, 특히 경제적 견지의 이익에 대해서도 봉사하게 되는 것

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S. 192 f.) 구체적인 권리가 있다는 것은, 즉 「객관적인」법

에 의해서 「주체적인 권리」가 부여된 개인을 위해서 일정한 기대가 상실되지 않도

록 그의 샨스의 증가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또 더 나아가서 개개의 법의

이해관계자의 이러한 권리가 창조된다는 것은 위의 샨스가 증가하는 통상의 경우

외에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학적으로 고찰할 때에는 이 통상의 경

우가 서서히 바뀌어 가면 법적으로 보장된 샨스는 단지 어떤 「규칙」(Reglement)

의 「반사」라는 형식으로서만 이해관계인 개인에게 부여되고 있음에 불과하며, 요컨

대 어떠한 「주체적 권리」라도 개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실상 물에 대해서 또는 사람에 대해서 지배력을 가지

고 있는 자는 법의 보장에 의하여 위의 지배력이 영속하기 위한 특수한 보장을 입

수한다. 즉 어떤 것에 관해서 약속을 받은 자는 협정이 다시 이행되기 위한 특수한

보장을 법의 보장으로 입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법과 경제와의 가장 기본

적인 관계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아니다. 오

히려 법은 여하튼 강제의 작용이 있어야만 일정한 경제적 관계들의 성립, 즉 경제

상의 지배력의 질서나 합의에 의한 경제상의 기대의 질서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도

록 작용하는 일도 있다 – 사회학적으로 표현하면, 경험적으로 타당한 질서를 통

하여 행해지는 경제기능의 활동은 이렇게 형성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객관적 법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합리적으로 창조된 경우

이다. 또 이것은 물론 아주 특수한 「법」의 상태를 전제로 하며, 우선 이들 전제들

의 약간을 설명하기로 한다.

법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근대법은 「법적 명제들」로서 성립하고 있다. 바꾸어 말

하면 일정한 사태는 일정한 법적 효과를 야기해야만 된다는 내용을 가진 추상적

규범들로서 성립하고 있다. 「법적 명제들」의 구분에 관하여 말하면, 전체 질서에

있는 것처럼 「명령적」· 「금지적」· 「허용적」인 법적 명제들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숙지된 구별이고 타인에게 어떤 행위를 명하고, 또는 금지하고 또는 허용하는 개인

의 권리들도 이러한 종류의 법적 명제들에서 생겨난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상과

같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제한된 타인의 행위에 대한 힘에는 다음의 기대가 일치

한다. 즉 (1) 타인이 어떤 일정한 것을 행할 것이다. 또는 (2) 타인이 어떤 일정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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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4 22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단념할 것이라는 것 – 이들은 청구권의 두 형태이다 – 또는 (3) 제3자에게 방

해 당하지 않고, 당자가 자신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고, 또는 마음대로 단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권능의 부여」인데 여하튼 그러한 기대이다. 모든 권리는 권리에

관한 당해 법명제가 없으면, 아마 전연 무력하게 되어버릴 사람이 있을 때에도 그

의 명제가 현재 존재한다는 것에 의해서 개개의 경우에 그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이러한 사정에서도 확실히 무릇 권리는 공동사회 행위의 범위

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상태를 가져오게 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유형의 법적 명제들

은 개인의 지배영역에 어떤 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에 관계한다. 법적

으로 보장된 규율 중에서 그 마지막에 열거한 기대의 종류, 「권능의 부여」는 그 범

위와 성질에서도 오늘날에는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말하여 경제질서의 발전에 특

히 중요하다. 그런데 권능의 부여에 관하여는 두 가지가 생각된다. 하나는 이른바

「자유권」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3자가 어떤 일정한 종류의 방해를 할 경우에 특

히 국가기관이 법적으로 허용된 용태(거주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소유권으로

소유하는 물을 자유로 처분하는 것 등)의 범위 내에서 어떤 방해를 할 경우에 이

것으로부터의 단적인 보장이다. 그러나 또 권능을 주는 법적 명제들이 일정한 한

계 내에서 개인 상호간의 관계를 법률행위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규제하도록, 그들

의 임의에 맡기는 일도 있다. 이것이 제2의 경우이다. 이러한 임의가 법질서에 의해

서 허용되는 한에서 그의 범위에 「계약자유」의 원리가 미친다. 계약자유가 어느 정

도인가, 바꾸어 말하면 법률행위의 내용이 어느 정도 강제권력에 의해서 「효력 있

는」 것으로서 보장되었는가, 따라서 또 이렇게 법률행위로서 처분하는 「권능을 주

는」 법적 명제들이 법질서 전체 중에서 어느 정도의 의의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시장의 확대라는 기능여하에 달려있다. 자급자족

경제가 유력해지고 교환이 없는 곳에서는 자연, 법은 명령과 금지의 명제에 의하

여 이상의 경우보다는 한층 더 강하게 기능한다. 예컨대 법은 개인이 그 안에 탄생

되고 또 거기에 즉응하도록 교육되고, 또는 순경제적 현상 이외의 사건에 의하여

개인이 거기에 놓여 있는 그러한 상태는 법적 관계들의 하나의 복합태로서 외부로

부터 한정되고, 이렇게 하여 「생득의」 자유의 영역, 내지는 경제외적인 계약들에 의

하여 한정된 자유의 영역을 개인에게 주도록 기능하는 것이다. 「자유」라 함은 법적

의미에서는 현실적 및 잠재적인 권리들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없는 공동

체에서는 물론이지만, 원칙적으로 개인이 체결하는 「법률행위」에가 아니고 명령적

및 금지적인 법의 명제들에 직접으로 기초한 권리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질서가 지배하는 데에서는 교환은 「법률행위」, 즉 각종의 법적 청구권의 취득·

양도·포기·이행 이외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적 청구권은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서 증대하며 다양해 간다. 그렇다고 그 경우에 계약의 자유는 어떠한 법질서 아래

서도 무제한의 자유는 아니다. 즉 합의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의 현실을 위

하여 법강제의 보장을 사용하였다는 의미에서 무제한한 자유는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가 어떤 계약내용에서는 인정되고, 어떤 계약내용에서는 인정되지 않느냐 라

는 점이 바로 개개의 법질서를 특징지우는 [62]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서는 경제구조에 따른 것이지만 아주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결정적 영향을 준다.

그러나 시장의 확대가 진전됨에 따라서 그 중에서도 먼저 그리고 특히 결정적 영

향을 주는 것이 시장의 이해관계자들이다. 현재, 법이 권능부여의 명제들에 의해

서 규율하는 법률행위의 양식에 대해서 그들이 현저한 영향을 주는 것도 이 때문

이다.

제2절 「계약의 자유」

광범위한 「계약자유」는 오늘날에는 보통의 상태로 되어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상태는 결코 항상 존재해 온 것은 아니다. 또 계약자유가 존재한 경우에도 그것이

오늘날에 특히 지배력을 가진 영역에서 언제나 발전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오

늘날에는 계약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이전에 비하면, 매우 적

은 여지 밖에 없는 영역에서 실은 아주 본질적인 부분이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 발전단계에 들어가서 간단한 스케치를 해보기로 하자. 근대의 법생활, 특히 사

법에 관한 법생활이 이전의 그것에 비하여 어떠한 데에 가장 본질적·사실적인 특

징을 갖추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법률행위, 특히 계약의 의의가 대단히 높여져서

강행법적으로 보장된 청구권의 원천으로 되어있다는 점에 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법의 영역에 대해서는 특징적이어서 그 범위 안에서는 현대에서의 사회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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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yun Kim
Do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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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4 22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을 단념할 것이라는 것 – 이들은 청구권의 두 형태이다 – 또는 (3) 제3자에게 방

해 당하지 않고, 당자가 자신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고, 또는 마음대로 단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권능의 부여」인데 여하튼 그러한 기대이다. 모든 권리는 권리에

관한 당해 법명제가 없으면, 아마 전연 무력하게 되어버릴 사람이 있을 때에도 그

의 명제가 현재 존재한다는 것에 의해서 개개의 경우에 그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이러한 사정에서도 확실히 무릇 권리는 공동사회 행위의 범위

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상태를 가져오게 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유형의 법적 명제들

은 개인의 지배영역에 어떤 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에 관계한다. 법적

으로 보장된 규율 중에서 그 마지막에 열거한 기대의 종류, 「권능의 부여」는 그 범

위와 성질에서도 오늘날에는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말하여 경제질서의 발전에 특

히 중요하다. 그런데 권능의 부여에 관하여는 두 가지가 생각된다. 하나는 이른바

「자유권」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3자가 어떤 일정한 종류의 방해를 할 경우에 특

히 국가기관이 법적으로 허용된 용태(거주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소유권으로

소유하는 물을 자유로 처분하는 것 등)의 범위 내에서 어떤 방해를 할 경우에 이

것으로부터의 단적인 보장이다. 그러나 또 권능을 주는 법적 명제들이 일정한 한

계 내에서 개인 상호간의 관계를 법률행위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규제하도록, 그들

의 임의에 맡기는 일도 있다. 이것이 제2의 경우이다. 이러한 임의가 법질서에 의해

서 허용되는 한에서 그의 범위에 「계약자유」의 원리가 미친다. 계약자유가 어느 정

도인가, 바꾸어 말하면 법률행위의 내용이 어느 정도 강제권력에 의해서 「효력 있

는」 것으로서 보장되었는가, 따라서 또 이렇게 법률행위로서 처분하는 「권능을 주

는」 법적 명제들이 법질서 전체 중에서 어느 정도의 의의를 가지는가 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시장의 확대라는 기능여하에 달려있다. 자급자족

경제가 유력해지고 교환이 없는 곳에서는 자연, 법은 명령과 금지의 명제에 의하

여 이상의 경우보다는 한층 더 강하게 기능한다. 예컨대 법은 개인이 그 안에 탄생

되고 또 거기에 즉응하도록 교육되고, 또는 순경제적 현상 이외의 사건에 의하여

개인이 거기에 놓여 있는 그러한 상태는 법적 관계들의 하나의 복합태로서 외부로

부터 한정되고, 이렇게 하여 「생득의」 자유의 영역, 내지는 경제외적인 계약들에 의

하여 한정된 자유의 영역을 개인에게 주도록 기능하는 것이다. 「자유」라 함은 법적

의미에서는 현실적 및 잠재적인 권리들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없는 공동

체에서는 물론이지만, 원칙적으로 개인이 체결하는 「법률행위」에가 아니고 명령적

및 금지적인 법의 명제들에 직접으로 기초한 권리들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질서가 지배하는 데에서는 교환은 「법률행위」, 즉 각종의 법적 청구권의 취득·

양도·포기·이행 이외의 것은 아니다. 이러한 법적 청구권은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서 증대하며 다양해 간다. 그렇다고 그 경우에 계약의 자유는 어떠한 법질서 아래

서도 무제한의 자유는 아니다. 즉 합의의 내용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의 현실을 위

하여 법강제의 보장을 사용하였다는 의미에서 무제한한 자유는 아니다. 오히려 이

사태가 어떤 계약내용에서는 인정되고, 어떤 계약내용에서는 인정되지 않느냐 라

는 점이 바로 개개의 법질서를 특징지우는 [62]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

서는 경제구조에 따른 것이지만 아주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결정적 영향을 준다.

그러나 시장의 확대가 진전됨에 따라서 그 중에서도 먼저 그리고 특히 결정적 영

향을 주는 것이 시장의 이해관계자들이다. 현재, 법이 권능부여의 명제들에 의해

서 규율하는 법률행위의 양식에 대해서 그들이 현저한 영향을 주는 것도 이 때문

이다.

제2절 「계약의 자유」

광범위한 「계약자유」는 오늘날에는 보통의 상태로 되어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상태는 결코 항상 존재해 온 것은 아니다. 또 계약자유가 존재한 경우에도 그것이

오늘날에 특히 지배력을 가진 영역에서 언제나 발전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오

늘날에는 계약자유가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이전에 비하면, 매우 적

은 여지 밖에 없는 영역에서 실은 아주 본질적인 부분이 발전해 온 것이다. 우리는

그 발전단계에 들어가서 간단한 스케치를 해보기로 하자. 근대의 법생활, 특히 사

법에 관한 법생활이 이전의 그것에 비하여 어떠한 데에 가장 본질적·사실적인 특

징을 갖추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법률행위, 특히 계약의 의의가 대단히 높여져서

강행법적으로 보장된 청구권의 원천으로 되어있다는 점에 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법의 영역에 대해서는 특징적이어서 그 범위 안에서는 현대에서의 사회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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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6 22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형성하는 양식을 주로 바로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되어있다. 법적으로

보면 개인의 정당한 경제적 지위, 즉 법적인 의미에서 정당하게 취득된 개인의 권

리들과 개인의 정당한 의무의 총체는, 오늘날 한편으로는 친족법상의 관계들을 기

초로 하여 개인에 돌아가는 상속재산의 귀속으로써 정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자가 체결하거나 또는 그의 이름으로 체결하는 계약에 의해서 -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 취득된다. 그런데 상속권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종류의 권리의 정

해진 양식은 현대의 사회에서는 실은 구래의 적법한 권리를 취득하는 근거, 즉 이

전에는 -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는 특히 - 완전히 또는 거의 지배적이었던 적법한

권리를 가지는 근거 양식의 가장 중요한 잔재 외에는 아니다. 왜냐하면 상속권에

관해서는 적어도 비중으로부터 말하면, 개인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사실이 중요하

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사실에는 그 자신의 법적 행동은

원칙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이 그러한 행위를 위하여 광범

하게 처음부터 일정한 기초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즉 개인이 어떤 사람들의 벌(閥)

에 소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그러한 사람들의 벌(閥)

은 가족구성원으로 되는 「출생」에 의해서 예컨대, 법이 그에게 귀속시키는 자연적

관계들에 의하여 기초를 얻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 질서의 내부에서도 또 경제적

으로도 그것은 당자에게 붙어있는 사회적 「자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

하면 그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해 또는 정리된 질서에 근거하여

사법상 본래부터 무엇인가 「이다」라는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속권

에 관해서는 개인이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행위에 의해서 자기를 위하여 고의로 어

떤 사법상의 「관계」를 창조하였는가 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속과 계약의 대립은 분명히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속청구권도 계약(상

속계약)에 의하여 설정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며, 또한 유언에 의한 상속의 경우에

는 법률적으로는 근친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고, 유언자의 일방적 처분이 취

득의 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속계약은 오늘날에는 그렇게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용되는 보통의 (많은 입법례에 의하면 - 그리고 오

스트리아의 그것도 그러하나 - 유일한) 경우는 부부간의 상속계약이다. 그것은 대

개 혼약자들이 혼인을 할 때에 그들의 재산법상의 관계들을 규제하는 것과 동시에

체결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가족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다. 오늘날

에는 어떤 유언이라도 그 중의 대부분은 - 예의적 의무로서 느껴지는 인자(仁慈)

와 더불어 - 각종의 조건을 수반하는 경제적 수요에 대해서 가족적 구성원의 이익

들을 조정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유언은 앵글로색슨 법역

(法域) 이외에서는 다시 최근 친자의 유류분(遺留分)의 권리에 의해서 매우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어떤 종류의 고대의 입법이나 근대의 입법에서는 유언의 자

유가 광범위하게 볼 수 있고, 가족관계의 영역에서는 계약에 의한 협정은 과거에

는 오늘날보다 아주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인데 그들의 의의, 그들이 왜 소멸하였

는가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오늘날 가족법과 상속

법의 영역에서는 개개의 경우에서 내용상 자유로 당사자의 의향에 따라서 형성되

는 법률행위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한정된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계약에 의한 협

정의 지위는 양적인 면에서 말하면, 공법적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결코

적지 않다. 왜냐하면 관리의 임명은 전부, 계약의 효과로서 생기며 헌법에 의한 행

정의 아주 중요한 많은 현상, 특히 예산안의 확정과 같은 현상은 국가기구의 많은

독립한 기관들, 즉 그 중의 어느 것도 법률상 당연히 다른 것을 강제하지 못할[64]

관계에 있는 기관들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협정을 전제로 한다. 형식상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사실상은 이러한 협정을 전제로 하는 일이 매우 많다. 그

러나 법학적으로 볼 때, 관리의 임용계약은 현재에는 임의적인 사법상의 계약의 의

미에서처럼 법적으로 확정된 관리의 의무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니고, 관

리가 권력적 복종관계에 복종한다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예

산을 사실상 자유로이 협정한다는 경우에도 이 협정은 보통 「계약」으로서 취급되

지 않고, 협정 일반도 법적으로 중요한 현상으로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 법학적인 동기에 의하는 바도 상당히 있기는 하나 - 「주권」이 현대 기구

의 중요한 속성으로서 인정되고 현대의 국가기구가 또 「단일체」로서 생각되는데 그

기관들의 행위들은 의무행위로서 생각된다는 사정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공법적

인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국제법이 본질적으로 자유계약이 행하여지는 장소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언제나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정치

적인 단체들의 사실적 관계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 먼저 예를 계속하면- 현재 것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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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6 22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형성하는 양식을 주로 바로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되어있다. 법적으로

보면 개인의 정당한 경제적 지위, 즉 법적인 의미에서 정당하게 취득된 개인의 권

리들과 개인의 정당한 의무의 총체는, 오늘날 한편으로는 친족법상의 관계들을 기

초로 하여 개인에 돌아가는 상속재산의 귀속으로써 정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당자가 체결하거나 또는 그의 이름으로 체결하는 계약에 의해서 -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 취득된다. 그런데 상속권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종류의 권리의 정

해진 양식은 현대의 사회에서는 실은 구래의 적법한 권리를 취득하는 근거, 즉 이

전에는 -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는 특히 - 완전히 또는 거의 지배적이었던 적법한

권리를 가지는 근거 양식의 가장 중요한 잔재 외에는 아니다. 왜냐하면 상속권에

관해서는 적어도 비중으로부터 말하면, 개인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사실이 중요하

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사실에는 그 자신의 법적 행동은

원칙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이 그러한 행위를 위하여 광범

하게 처음부터 일정한 기초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즉 개인이 어떤 사람들의 벌(閥)

에 소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그러한 사람들의 벌(閥)

은 가족구성원으로 되는 「출생」에 의해서 예컨대, 법이 그에게 귀속시키는 자연적

관계들에 의하여 기초를 얻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 질서의 내부에서도 또 경제적

으로도 그것은 당자에게 붙어있는 사회적 「자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

하면 그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해 또는 정리된 질서에 근거하여

사법상 본래부터 무엇인가 「이다」라는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속권

에 관해서는 개인이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행위에 의해서 자기를 위하여 고의로 어

떤 사법상의 「관계」를 창조하였는가 하는 것은 개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속과 계약의 대립은 분명히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속청구권도 계약(상

속계약)에 의하여 설정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며, 또한 유언에 의한 상속의 경우에

는 법률적으로는 근친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고, 유언자의 일방적 처분이 취

득의 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속계약은 오늘날에는 그렇게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용되는 보통의 (많은 입법례에 의하면 - 그리고 오

스트리아의 그것도 그러하나 - 유일한) 경우는 부부간의 상속계약이다. 그것은 대

개 혼약자들이 혼인을 할 때에 그들의 재산법상의 관계들을 규제하는 것과 동시에

체결되는 것으로서, 따라서 가족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다. 오늘날

에는 어떤 유언이라도 그 중의 대부분은 - 예의적 의무로서 느껴지는 인자(仁慈)

와 더불어 - 각종의 조건을 수반하는 경제적 수요에 대해서 가족적 구성원의 이익

들을 조정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유언은 앵글로색슨 법역

(法域) 이외에서는 다시 최근 친자의 유류분(遺留分)의 권리에 의해서 매우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어떤 종류의 고대의 입법이나 근대의 입법에서는 유언의 자

유가 광범위하게 볼 수 있고, 가족관계의 영역에서는 계약에 의한 협정은 과거에

는 오늘날보다 아주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인데 그들의 의의, 그들이 왜 소멸하였

는가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오늘날 가족법과 상속

법의 영역에서는 개개의 경우에서 내용상 자유로 당사자의 의향에 따라서 형성되

는 법률행위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한정된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계약에 의한 협

정의 지위는 양적인 면에서 말하면, 공법적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오늘날에도 결코

적지 않다. 왜냐하면 관리의 임명은 전부, 계약의 효과로서 생기며 헌법에 의한 행

정의 아주 중요한 많은 현상, 특히 예산안의 확정과 같은 현상은 국가기구의 많은

독립한 기관들, 즉 그 중의 어느 것도 법률상 당연히 다른 것을 강제하지 못할[64]

관계에 있는 기관들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협정을 전제로 한다. 형식상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사실상은 이러한 협정을 전제로 하는 일이 매우 많다. 그

러나 법학적으로 볼 때, 관리의 임용계약은 현재에는 임의적인 사법상의 계약의 의

미에서처럼 법적으로 확정된 관리의 의무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니고, 관

리가 권력적 복종관계에 복종한다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예

산을 사실상 자유로이 협정한다는 경우에도 이 협정은 보통 「계약」으로서 취급되

지 않고, 협정 일반도 법적으로 중요한 현상으로서 취급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 법학적인 동기에 의하는 바도 상당히 있기는 하나 - 「주권」이 현대 기구

의 중요한 속성으로서 인정되고 현대의 국가기구가 또 「단일체」로서 생각되는데 그

기관들의 행위들은 의무행위로서 생각된다는 사정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공법적

인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국제법이 본질적으로 자유계약이 행하여지는 장소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언제나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정치

적인 단체들의 사실적 관계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 먼저 예를 계속하면- 현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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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28 22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보다 과거의 관리의 임용계약이 본질적인 점에서 훨씬 원인이 되는 자유계약에 대

응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것은 - 뒤에 말할 생각인데 - 본질적으

로는 훨씬, 전적으로 개인적인 가족적 성질을 띤, 군주의 권력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정치활동, 예컨대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준비한다는 행위,

그리고 또 기타 수많은 정치활동까지도 신분적인 정치형태 아래서는 바로 군주들

과 신분과의 계약일 따름이었다. 그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권리, 즉 정치단체의

성원으로서의 특권과 대권에 의해서 서로 연계하고 있는 세력들 간의 계약, 요컨대

군주들과 신분들이 체결하는 계약이다. 또 이상의 계약은 법적으로도 계약으로서

생각 되었던 것이다. 렌 제도의 망의 눈(Lehensnexus)은 그 속 깊은 본질에 의하

면 이 계약 위에 세워진 것이다. 「만인(蠻人)법전」(leges barbarorum)이 내포하고

있듯이, 현행법의 확정에 - 종종 「협약」(Pactus)이라는 언어가 사용될 경우, 바로

이러한 것도 아주 신중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에서는 관직상의 권력자

와 재판집회민과의 자유로운 협정에 의하여 비로소 실제로, 「새로운」법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약관념의 예로서 끝으로 들고 싶은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시원

적 단체이다. 법형태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종종 내부적으로는 더 독립적

인 여러 그룹(이로코이족 사이에서의 「숙」[宿, Häusern])간의 자유로운 협정에 근

거하고 있다. 「남자의 가」(Männerhauser)도 처음에는 자유로운 사회적 결합형태

이다. 단지 이들은 처음부터 영속하도록 만들어진 점에서 형식상은 완전히 자유로

운 협정에 근거하고는 있으나 모험을 목적으로 하는 기회적인 시원적 결합형태와

는 다른 것이다. 그것에 못지않게 자유로운 협정은 고유한 법발견의 영역에서는 시

원적인 것이고 바로 모든 것의 단서인 것이다. 심판 내지 신판에는 자발적으로 복

종한다는 중재계약, 즉 씨족간의 속죄계약에서 생긴 이 중재계약은 전체 소송법의

원천일 뿐만이 아니다. 곧 뒤에 설명하듯이, 사법상의 계약의 가장 오랜 유형도 아

주 넓은 의미에서는 역시 소송계약에서 유래한다. 또 소송절차의 중요한 기술상의

진보도 대개는 형식상 적어도 소송당사자의 자유로운 협정의 소산이며, 관헌(런던시

장, 내지 법무관)이 절차에 간섭을 가한다는 것도 실은 당사자들이 모종의 협정을

체결하여 소송의 진행을 가능케 하도록, 그들에게 강제를 한다는 아주 특징적인 방

법으로 광범하게 행하여졌다. 요컨대 그것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법강제」로서 행

하여졌던 것이다. - 덧붙여 말하면 위의 법강제는 여하튼, 그리고 특히 「수봉강제」

(Leihezwang)로서 정치적 (봉건)법의 영역에서도 현저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제3절 「신분계약」과 「목적계약」, 목적계약의 법사적 유래

따라서 법의 발전의 보다 초기의 또는 가장 오랜 시기와 단계에서도 자유로운 합

의가 청구권과 의무를 발생시키는 법적 기초라는 의미에서의 「계약」의 의의가 광범

하게 유포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로운 합의의 의미가 소멸하거나 또

는 아주 후퇴한 분야들, 예컨대 공법·소송법·친족법·상속법에서 바로 그러하였

다. 이에 대하여 친족법과 상속법은 기원을 달리한 경제적인 재화획득 - 이것은

오늘날에는 계약을 기초로 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에 대한 계약의 의미

는 과거로 소급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화획득의 분야에서의 계약의

현대적 의의는 먼저 첫째로 시장 조직(Marktvergesellschaftung)과 화폐사용이

강력하게 증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사법상의 계약 일반의 의의가 증대한 법적 측

면은 시장공동체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공동체에 의하여 계획된 계약

은 이전에 공법이나 친족법의 분야에서 오늘날보다도 훨씬 커다란 역할을 한 시원

적 계약과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로운 합의의 일반적 성

격이 이렇게 현저하게 변화한 것에 대응하여 이러한 시원적인 계약들의 형태를 「신

분」계약(“Status” Kontrakte)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편 재화거래, 즉 시장공동체

에 특수한 계약들의 형태를 「목적」계약(“Zweck” Kontrakte)이라고 부르기로 한

다. 양자의 구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예컨대 정치적 내지 기타의 인적 단

체들, 계속적·일시적 또는 친족적 관계들을 창조하는 이러한 시원적 계약의 전부

는 법상에서의 사람의 자질의 전부,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일반적인 법상의 지위

와 사회적 지위를 변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또 이러한 변경을 발생

시키기 위하여 이들 계약은 원래 예외 없이 직접으로 마술적인 행위이거나 실제 어

떤 마술적인 의미 있는 행위거나의 어느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흔적은 오랫동안

행위의 상징적인 표현 안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특히 위에서 예시적

으로 말한) 계약의 대다수는 「의형제 계약」이다. 이것에 의해서 어떤 자는 즉석에

서 타자의 자·부·처·형제·주인·노예·씨족동료·전사 동료·보호자·예속민·종사·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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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과거의 관리의 임용계약이 본질적인 점에서 훨씬 원인이 되는 자유계약에 대

응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것은 - 뒤에 말할 생각인데 - 본질적으

로는 훨씬, 전적으로 개인적인 가족적 성질을 띤, 군주의 권력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의 정치활동, 예컨대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준비한다는 행위,

그리고 또 기타 수많은 정치활동까지도 신분적인 정치형태 아래서는 바로 군주들

과 신분과의 계약일 따름이었다. 그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권리, 즉 정치단체의

성원으로서의 특권과 대권에 의해서 서로 연계하고 있는 세력들 간의 계약, 요컨대

군주들과 신분들이 체결하는 계약이다. 또 이상의 계약은 법적으로도 계약으로서

생각 되었던 것이다. 렌 제도의 망의 눈(Lehensnexus)은 그 속 깊은 본질에 의하

면 이 계약 위에 세워진 것이다. 「만인(蠻人)법전」(leges barbarorum)이 내포하고

있듯이, 현행법의 확정에 - 종종 「협약」(Pactus)이라는 언어가 사용될 경우, 바로

이러한 것도 아주 신중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에서는 관직상의 권력자

와 재판집회민과의 자유로운 협정에 의하여 비로소 실제로, 「새로운」법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약관념의 예로서 끝으로 들고 싶은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시원

적 단체이다. 법형태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종종 내부적으로는 더 독립적

인 여러 그룹(이로코이족 사이에서의 「숙」[宿, Häusern])간의 자유로운 협정에 근

거하고 있다. 「남자의 가」(Männerhauser)도 처음에는 자유로운 사회적 결합형태

이다. 단지 이들은 처음부터 영속하도록 만들어진 점에서 형식상은 완전히 자유로

운 협정에 근거하고는 있으나 모험을 목적으로 하는 기회적인 시원적 결합형태와

는 다른 것이다. 그것에 못지않게 자유로운 협정은 고유한 법발견의 영역에서는 시

원적인 것이고 바로 모든 것의 단서인 것이다. 심판 내지 신판에는 자발적으로 복

종한다는 중재계약, 즉 씨족간의 속죄계약에서 생긴 이 중재계약은 전체 소송법의

원천일 뿐만이 아니다. 곧 뒤에 설명하듯이, 사법상의 계약의 가장 오랜 유형도 아

주 넓은 의미에서는 역시 소송계약에서 유래한다. 또 소송절차의 중요한 기술상의

진보도 대개는 형식상 적어도 소송당사자의 자유로운 협정의 소산이며, 관헌(런던시

장, 내지 법무관)이 절차에 간섭을 가한다는 것도 실은 당사자들이 모종의 협정을

체결하여 소송의 진행을 가능케 하도록, 그들에게 강제를 한다는 아주 특징적인 방

법으로 광범하게 행하여졌다. 요컨대 그것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법강제」로서 행

하여졌던 것이다. - 덧붙여 말하면 위의 법강제는 여하튼, 그리고 특히 「수봉강제」

(Leihezwang)로서 정치적 (봉건)법의 영역에서도 현저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제3절 「신분계약」과 「목적계약」, 목적계약의 법사적 유래

따라서 법의 발전의 보다 초기의 또는 가장 오랜 시기와 단계에서도 자유로운 합

의가 청구권과 의무를 발생시키는 법적 기초라는 의미에서의 「계약」의 의의가 광범

하게 유포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로운 합의의 의미가 소멸하거나 또

는 아주 후퇴한 분야들, 예컨대 공법·소송법·친족법·상속법에서 바로 그러하였

다. 이에 대하여 친족법과 상속법은 기원을 달리한 경제적인 재화획득 - 이것은

오늘날에는 계약을 기초로 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에 대한 계약의 의미

는 과거로 소급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화획득의 분야에서의 계약의

현대적 의의는 먼저 첫째로 시장 조직(Marktvergesellschaftung)과 화폐사용이

강력하게 증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사법상의 계약 일반의 의의가 증대한 법적 측

면은 시장공동체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공동체에 의하여 계획된 계약

은 이전에 공법이나 친족법의 분야에서 오늘날보다도 훨씬 커다란 역할을 한 시원

적 계약과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로운 합의의 일반적 성

격이 이렇게 현저하게 변화한 것에 대응하여 이러한 시원적인 계약들의 형태를 「신

분」계약(“Status” Kontrakte)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편 재화거래, 즉 시장공동체

에 특수한 계약들의 형태를 「목적」계약(“Zweck” Kontrakte)이라고 부르기로 한

다. 양자의 구별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예컨대 정치적 내지 기타의 인적 단

체들, 계속적·일시적 또는 친족적 관계들을 창조하는 이러한 시원적 계약의 전부

는 법상에서의 사람의 자질의 전부,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일반적인 법상의 지위

와 사회적 지위를 변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그리고 또 이러한 변경을 발생

시키기 위하여 이들 계약은 원래 예외 없이 직접으로 마술적인 행위이거나 실제 어

떤 마술적인 의미 있는 행위거나의 어느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의 흔적은 오랫동안

행위의 상징적인 표현 안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특히 위에서 예시적

으로 말한) 계약의 대다수는 「의형제 계약」이다. 이것에 의해서 어떤 자는 즉석에

서 타자의 자·부·처·형제·주인·노예·씨족동료·전사 동료·보호자·예속민·종사·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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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0 23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봉신·신민·친구·가장 넓은 표현을 한다면 「동료」(Genosse)가 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가 「의형제로 된다」는 것은 구체적 목적에 대해서 유익한 일정한 결부

가 상호간에 행하여진다는 것이거나 기대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단

지 - 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 일정한 방법으로서 할 때에 의

의 있게 되는 새로운 행동의 전체가 즉석에서 상호간에 기대된다는 것만이 아니

고, 사람들이 자질상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 왜냐하면 그

렇지 않다면 상술과 같은 새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전연 불가능한 것이니까. - 의

형제로 되는 데에는 관계자는 다른 「영혼」을 자신 안에 끌어드리지 않으면 안 된

다. 이것을 위해서는 피 또는 타액을 섞어서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은 비교

적 뒤의 상징적인 동작인데 - 거나, 혹은 가치적으로는 동등한 다른 마술적 수단

에 의하여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내는 애니미즘적인 처치가 행하여져야 한다. 그러

나 관계자가 현실로 그들의 행동 전체를 의형제 관계의 의미에 적합하도록 상호가

형성하는 것을 보장하는 다른 것은, 마술적 색채가 강한 사고에 있어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 신의 관념이 애니미즘에 가름하여 점차 지배하는데

따라서 사태가 따르는 것으로 - 관계자의 전부는 적어도 전원을 공통으로 보호하

여 의형제관계에 위반하는 행위의 경우에는 위하적으로 되는 「초감각적인」 하나의

힘의 지배 아래 놓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사악한 마술에 조건부로 자기를

맡기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본래 마술적인 선서의 힘은 자기저주와 신의 분노를 초

래하는 성격을 취한다. 따라서 선서는 후에 이르기까지도 의형제계약의 가장 보편

적인 형식들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러한 계약의 형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서는 기술적으로 또한 「목적」계약을 위한 보증수단으로서도

봉사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이며 - 이것은 전술한 참으로 마술적인 의형제가 되

는 형식들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 여기서 목적계약이라 함은 구체적인 대개는 경

제적인 급부 또는 결과의 초래만을 목적으로 하는데 불과하고, 관여자의 「신분」에

관계하지 않는 합의, 즉 - 예컨대 교환 같은 - 「동료」라는 새로운 자질을 발생시키

는 것이 아닌 합의이다. 그러나 선서가 목적계약의 형식이기도 하다는 것은 시원적

인 것은 아니다.

순수한 목적계약의 모든 원형인 교환은 원래 어떤 경제적 또는 정치적 공동

체의 동료동지 사이에서 하나의 형태로까지 정서된 대개 비경제적인 분야에서만

의 대량현상으로서, 바꾸어 말하면 서로가 동료로서의 또는 비동료로서의 특이

한 양면적 지위에서 서로 대하고 있는 족외혼 씨족들 간의 가녀교환(嫁女交換,

Frauentausch)으로서 정서된 대량현상이다. 이 교환은 족외혼의 경우에 동시에

또한 「의형제로 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극단적으로 여자는

물건으로서 나타나는데 불과한 것이 보통이라 하더라도 보통 마술에 의하여 신분

의 변경이 촉구된다는 사상을 결여한 것은 아주 드문 것이기 때문이다. 규제된 족

외혼의 생성에 의하여 연합하고 있는 족외혼 씨족들에 대하여 상호간에 상술한

특이한 이면적 지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 정처와의 혼인은 무방식이고 이에 대하

여 정처 외의 여자와 부부생활에 들어가는 데에는 일정한 형식으로 행해지는 일이

때로는 있다는 현상 - 이것은 대단히 논의되고 있는 것인데 - 을 해명하리라고 생

각된다. 즉 원래 족외혼 이전에는 교환은 의형제로 되는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정처의 지위는 원초적인 확실히 족외혼 이전의 것이니까, 족외혼으로 되어도

단속하여 정처의 지위에 앉은 데에는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보다 더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안정된 정처의 경제적

지위에 대하여 정처 외의 여자에게 계약에 의한, 특히 경제적인 보장을 할 필요가

일정한 계약형식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교환은 언제나 자기 가문

의 비구성원과의 교환일 뿐만 아니라 또 주로 알지 못하는 자, 씨족 외의 자 그리

고 의형제도 아닌 자, 즉 비동료와의 전혀 외부적인 교환이기도 하다. 바로 그 때

문에 경제적 교환은 전에 말한 「무언」교환의 형식에서는 전체 마술적인 형식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환에 대한 종교상의 보호가, 규제된 형식에서 일반적으

로 가능하게 된 것은 원래, 그 수단으로서는 적어도 직접으로 「신분」계약[68]만을

보장하는데 적합하였던 마술 외에 신(神) 관념이 나타난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이

다. 경제적 교환은 또 의형제로 되는 특수한 행위 또는 그것과 가치적으로 같은 행

위에 의하여 신분 계약의 보장 아래 놓여진다는 것도 생겼다. 그러나 일반으로는

토지지배가 문제인 경우에만 이런 것이 행해진 것이며, 토지지배의 특수한 지위에

관해서는 곧 설명할 것이다. 보통은 교환에 대하여 -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법적

보장이 없었고, 일반으로 생래적인 또는 인위적인 한 총괄적인 형제관계로부터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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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0 23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봉신·신민·친구·가장 넓은 표현을 한다면 「동료」(Genosse)가 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가 「의형제로 된다」는 것은 구체적 목적에 대해서 유익한 일정한 결부

가 상호간에 행하여진다는 것이거나 기대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단

지 - 우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 일정한 방법으로서 할 때에 의

의 있게 되는 새로운 행동의 전체가 즉석에서 상호간에 기대된다는 것만이 아니

고, 사람들이 자질상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 왜냐하면 그

렇지 않다면 상술과 같은 새로운 행동을 하는 것은 전연 불가능한 것이니까. - 의

형제로 되는 데에는 관계자는 다른 「영혼」을 자신 안에 끌어드리지 않으면 안 된

다. 이것을 위해서는 피 또는 타액을 섞어서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은 비교

적 뒤의 상징적인 동작인데 - 거나, 혹은 가치적으로는 동등한 다른 마술적 수단

에 의하여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내는 애니미즘적인 처치가 행하여져야 한다. 그러

나 관계자가 현실로 그들의 행동 전체를 의형제 관계의 의미에 적합하도록 상호가

형성하는 것을 보장하는 다른 것은, 마술적 색채가 강한 사고에 있어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 - 신의 관념이 애니미즘에 가름하여 점차 지배하는데

따라서 사태가 따르는 것으로 - 관계자의 전부는 적어도 전원을 공통으로 보호하

여 의형제관계에 위반하는 행위의 경우에는 위하적으로 되는 「초감각적인」 하나의

힘의 지배 아래 놓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사악한 마술에 조건부로 자기를

맡기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본래 마술적인 선서의 힘은 자기저주와 신의 분노를 초

래하는 성격을 취한다. 따라서 선서는 후에 이르기까지도 의형제계약의 가장 보편

적인 형식들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러한 계약의 형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서는 기술적으로 또한 「목적」계약을 위한 보증수단으로서도

봉사하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이며 - 이것은 전술한 참으로 마술적인 의형제가 되

는 형식들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 여기서 목적계약이라 함은 구체적인 대개는 경

제적인 급부 또는 결과의 초래만을 목적으로 하는데 불과하고, 관여자의 「신분」에

관계하지 않는 합의, 즉 - 예컨대 교환 같은 - 「동료」라는 새로운 자질을 발생시키

는 것이 아닌 합의이다. 그러나 선서가 목적계약의 형식이기도 하다는 것은 시원적

인 것은 아니다.

순수한 목적계약의 모든 원형인 교환은 원래 어떤 경제적 또는 정치적 공동

체의 동료동지 사이에서 하나의 형태로까지 정서된 대개 비경제적인 분야에서만

의 대량현상으로서, 바꾸어 말하면 서로가 동료로서의 또는 비동료로서의 특이

한 양면적 지위에서 서로 대하고 있는 족외혼 씨족들 간의 가녀교환(嫁女交換,

Frauentausch)으로서 정서된 대량현상이다. 이 교환은 족외혼의 경우에 동시에

또한 「의형제로 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극단적으로 여자는

물건으로서 나타나는데 불과한 것이 보통이라 하더라도 보통 마술에 의하여 신분

의 변경이 촉구된다는 사상을 결여한 것은 아주 드문 것이기 때문이다. 규제된 족

외혼의 생성에 의하여 연합하고 있는 족외혼 씨족들에 대하여 상호간에 상술한

특이한 이면적 지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 정처와의 혼인은 무방식이고 이에 대하

여 정처 외의 여자와 부부생활에 들어가는 데에는 일정한 형식으로 행해지는 일이

때로는 있다는 현상 - 이것은 대단히 논의되고 있는 것인데 - 을 해명하리라고 생

각된다. 즉 원래 족외혼 이전에는 교환은 의형제로 되는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정처의 지위는 원초적인 확실히 족외혼 이전의 것이니까, 족외혼으로 되어도

단속하여 정처의 지위에 앉은 데에는 형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보다 더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안정된 정처의 경제적

지위에 대하여 정처 외의 여자에게 계약에 의한, 특히 경제적인 보장을 할 필요가

일정한 계약형식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교환은 언제나 자기 가문

의 비구성원과의 교환일 뿐만 아니라 또 주로 알지 못하는 자, 씨족 외의 자 그리

고 의형제도 아닌 자, 즉 비동료와의 전혀 외부적인 교환이기도 하다. 바로 그 때

문에 경제적 교환은 전에 말한 「무언」교환의 형식에서는 전체 마술적인 형식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환에 대한 종교상의 보호가, 규제된 형식에서 일반적으

로 가능하게 된 것은 원래, 그 수단으로서는 적어도 직접으로 「신분」계약[68]만을

보장하는데 적합하였던 마술 외에 신(神) 관념이 나타난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이

다. 경제적 교환은 또 의형제로 되는 특수한 행위 또는 그것과 가치적으로 같은 행

위에 의하여 신분 계약의 보장 아래 놓여진다는 것도 생겼다. 그러나 일반으로는

토지지배가 문제인 경우에만 이런 것이 행해진 것이며, 토지지배의 특수한 지위에

관해서는 곧 설명할 것이다. 보통은 교환에 대하여 -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법적

보장이 없었고, 일반으로 생래적인 또는 인위적인 한 총괄적인 형제관계로부터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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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2 23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과하지 않은 의무를 교환에 의하여 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은 전혀 없었다. 이

러한 것들이 교환의 성격을 조건지웠던 것으로 교환은 최초에는 언제나 그리고 전

적으로 교환의 목적인 재화의 점유를 서로 즉석에서 인도한다는 효과를 취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유는 도적에 대한 복수의 청구 그리고 속죄의 청구에 의하여 보

호되었다. 이리하여 교환이 향수하는 법적 보호도 결코 - 채권채무관계에 근거하

는 보호는 아니고 점유에 근거하는 보호이다. 왜냐하면 보다 후의 담보의무 - 그것

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게 되는 것인데 - 에 관해서는 원래(무권리자인 매주에 대한

도소권[盜訴權]의 형식으로) 간접적으로만 매주가 보호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환에 대하여 진실로 법적인 형식상 특징적인 구성을 하게 되는 것은 일정한

재화가 특히 금속의 금전적 기능이 발전하여 그리하여 매매가 발생한 때에 시작된

다. 이것은 카르타적(chartal) 화폐 더구나 최초의 국정화폐가 나타나서 비로소 생

기는 것은 아니라, 특히 로마법도 가리키고 있듯이, 일찍이 계량적인 지불수단을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두 개의 시원적인 고대 로마 시민법의 법률행위 형

식의 하나는 동형행위(銅衡行爲[Geschäfte per aes et libram])이다. 로마의 도시

발전에 근거하여 현실매매의 이러한 형식은 거의 전 종류의 법률행위 - 그것이 가

족법상 및 상속법상의 내용의 것인가 본래 교환적인 내용의 것인가에 불구하고 -

그 자신을 위해서 바로 보편적인 기능을 독점하였다. 바로 여기서 전체 인격을 포

섭하는 단체 내에 사람을 정서하여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동질화하는 것을 항상

목적으로 하고 특수한 감정성에 근거하는 총괄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져오는 여러

종류의 의형제계약 또는 다른 신분계약에, 다음과 같은 합의인 금전계약이 대립하

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과 기능에서 볼 때 특수한 양적으로 한정된 일정한 합의이

며, 또 본질과 기능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는 성질소외적인(qualitätsfremde) 추

상적이고 보통은 순경제적으로 조건지워진 합의이고 이것은 강제계약의 원형이다.

금전계약은 이러한 비윤리적인 강제계약으로써 법적인 행위로부터의[69] 마술적

또는 종교적 성격을 배제하는 수단에 적합하며 이리하여 법의 세속화 수단으로서

적합하였다(로마의 종교적인 결혼의식[confarreatio]에 대한 매매결혼[coemptio]

이라는 형식으로서의 법률상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금전계약은 법의 세속

화의 유일하고 적절한 수단은 아니었으나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또 금전

계약은 원래 적어도 행위 자체 이상으로 장래에 향하여 계속하는 성격의 요소는

조금도 포함하지 않는 특수한 현금거래로서 극히 보수적인 성질을 가졌었다. 왜냐

하면 금전계약도 단지 상대방에 의하여 담보된 점유만을, 즉 재화를 정당한 방법

으로 취득했다는 것의 보장만을 줄 뿐이지 원래 일정한 결속을 이행하는 것에 대

해서는 아무런 보장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에 의하여 법적 구속이 생긴다

는 사상은 시원적인 법에는 전연 알려지지 않았다. 시원적인 법에서는 여러 종류의

급부의무와 청구권은 전적으로 위법행위에 근거하는 청구(Forderung ex delicto)

라는 단지 하나의 형식으로서만 존재했음에 불과하였다. 거기서는 피해자의 청구

는 속죄절차와 그에 관한 관례와 실무에 의해 일정한 비율이 정해졌다. 심판인에

의하여 확정된 속죄채무가 가장 오랜 진실한 채무였으며 이 채무로부터 다른 전체

채무관계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의미에서는 반대로 법적 구속력을 수

반하는 관계의 청구만이 재래 재판상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의 전부이었다. 그래

서 상이한 씨족에 속하는 자들 사이에서의 분쟁만이 취급되는 한에서는 물의 인

도를 위하여 구비되는 형식적 소송절차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무릇 소는 반드

시 피고가 속죄해야 할 위법을 대인적으로 원고에 가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였

다. 따라서 어떠한 계약의 소도 물추급(物追及)의 소도 존재할 수 없었을 뿐만 아

니라 또 어떠한 신분상의 소도 존재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단체 내부의 일로서 단

체들에 관계가 있었던 것은 어떤 자가 어떤 가단(家團, Hausverband), 어떤 씨족,

어떤 정치단체에 산입되는 것이 정당한가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관

해서 사정이 변했다. 왜냐하면 형제가 형제를, 씨족동료가 동일한 씨족의 동료를,

길드 동료가 동일한 길드 동료를, 보호자가 그의 예속민을, 예속민이 그의 보호자

를, 심판인 앞에 출두하도록 요구하지 못하며, 또 상대방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

을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들 동지 사이에서 혈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체 종

류의 형제의 관계 또는 근본규범에 속하며, 또한 그들 사이의 범죄에 복수하는 것

은 무엇인가 신비적인 것 그리고 신 또는 제사의 추방권·가지배권·단체의 사적 제

재의 일이었으나, 그러나 정치단체가 방위단체로 구성되어 이제는 방위능력과 정

치상의 권리가 단체[70]에 의해서 완전히 가치 있다고 인정된 혼인으로부터 출생과

관련하여 나타난 - 따라서 비자유인과 불완전한 자유인은 어떠한 방위권도 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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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2 23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과하지 않은 의무를 교환에 의하여 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은 전혀 없었다. 이

러한 것들이 교환의 성격을 조건지웠던 것으로 교환은 최초에는 언제나 그리고 전

적으로 교환의 목적인 재화의 점유를 서로 즉석에서 인도한다는 효과를 취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유는 도적에 대한 복수의 청구 그리고 속죄의 청구에 의하여 보

호되었다. 이리하여 교환이 향수하는 법적 보호도 결코 - 채권채무관계에 근거하

는 보호는 아니고 점유에 근거하는 보호이다. 왜냐하면 보다 후의 담보의무 - 그것

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게 되는 것인데 - 에 관해서는 원래(무권리자인 매주에 대한

도소권[盜訴權]의 형식으로) 간접적으로만 매주가 보호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환에 대하여 진실로 법적인 형식상 특징적인 구성을 하게 되는 것은 일정한

재화가 특히 금속의 금전적 기능이 발전하여 그리하여 매매가 발생한 때에 시작된

다. 이것은 카르타적(chartal) 화폐 더구나 최초의 국정화폐가 나타나서 비로소 생

기는 것은 아니라, 특히 로마법도 가리키고 있듯이, 일찍이 계량적인 지불수단을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두 개의 시원적인 고대 로마 시민법의 법률행위 형

식의 하나는 동형행위(銅衡行爲[Geschäfte per aes et libram])이다. 로마의 도시

발전에 근거하여 현실매매의 이러한 형식은 거의 전 종류의 법률행위 - 그것이 가

족법상 및 상속법상의 내용의 것인가 본래 교환적인 내용의 것인가에 불구하고 -

그 자신을 위해서 바로 보편적인 기능을 독점하였다. 바로 여기서 전체 인격을 포

섭하는 단체 내에 사람을 정서하여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동질화하는 것을 항상

목적으로 하고 특수한 감정성에 근거하는 총괄적인 권리와 의무를 가져오는 여러

종류의 의형제계약 또는 다른 신분계약에, 다음과 같은 합의인 금전계약이 대립하

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과 기능에서 볼 때 특수한 양적으로 한정된 일정한 합의이

며, 또 본질과 기능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는 성질소외적인(qualitätsfremde) 추

상적이고 보통은 순경제적으로 조건지워진 합의이고 이것은 강제계약의 원형이다.

금전계약은 이러한 비윤리적인 강제계약으로써 법적인 행위로부터의[69] 마술적

또는 종교적 성격을 배제하는 수단에 적합하며 이리하여 법의 세속화 수단으로서

적합하였다(로마의 종교적인 결혼의식[confarreatio]에 대한 매매결혼[coemptio]

이라는 형식으로서의 법률상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이러한 금전계약은 법의 세속

화의 유일하고 적절한 수단은 아니었으나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또 금전

계약은 원래 적어도 행위 자체 이상으로 장래에 향하여 계속하는 성격의 요소는

조금도 포함하지 않는 특수한 현금거래로서 극히 보수적인 성질을 가졌었다. 왜냐

하면 금전계약도 단지 상대방에 의하여 담보된 점유만을, 즉 재화를 정당한 방법

으로 취득했다는 것의 보장만을 줄 뿐이지 원래 일정한 결속을 이행하는 것에 대

해서는 아무런 보장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에 의하여 법적 구속이 생긴다

는 사상은 시원적인 법에는 전연 알려지지 않았다. 시원적인 법에서는 여러 종류의

급부의무와 청구권은 전적으로 위법행위에 근거하는 청구(Forderung ex delicto)

라는 단지 하나의 형식으로서만 존재했음에 불과하였다. 거기서는 피해자의 청구

는 속죄절차와 그에 관한 관례와 실무에 의해 일정한 비율이 정해졌다. 심판인에

의하여 확정된 속죄채무가 가장 오랜 진실한 채무였으며 이 채무로부터 다른 전체

채무관계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의미에서는 반대로 법적 구속력을 수

반하는 관계의 청구만이 재래 재판상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의 전부이었다. 그래

서 상이한 씨족에 속하는 자들 사이에서의 분쟁만이 취급되는 한에서는 물의 인

도를 위하여 구비되는 형식적 소송절차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무릇 소는 반드

시 피고가 속죄해야 할 위법을 대인적으로 원고에 가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였

다. 따라서 어떠한 계약의 소도 물추급(物追及)의 소도 존재할 수 없었을 뿐만 아

니라 또 어떠한 신분상의 소도 존재할 수 없었다. 전적으로 단체 내부의 일로서 단

체들에 관계가 있었던 것은 어떤 자가 어떤 가단(家團, Hausverband), 어떤 씨족,

어떤 정치단체에 산입되는 것이 정당한가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관

해서 사정이 변했다. 왜냐하면 형제가 형제를, 씨족동료가 동일한 씨족의 동료를,

길드 동료가 동일한 길드 동료를, 보호자가 그의 예속민을, 예속민이 그의 보호자

를, 심판인 앞에 출두하도록 요구하지 못하며, 또 상대방에 대하여 불리한 증언

을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그들 동지 사이에서 혈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체 종

류의 형제의 관계 또는 근본규범에 속하며, 또한 그들 사이의 범죄에 복수하는 것

은 무엇인가 신비적인 것 그리고 신 또는 제사의 추방권·가지배권·단체의 사적 제

재의 일이었으나, 그러나 정치단체가 방위단체로 구성되어 이제는 방위능력과 정

치상의 권리가 단체[70]에 의해서 완전히 가치 있다고 인정된 혼인으로부터 출생과

관련하여 나타난 - 따라서 비자유인과 불완전한 자유인은 어떠한 방위권도 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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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4 23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노획물 분여권도 없었을 것이다 - 경우에는 사람의 신분의 분쟁의 확인을 허용

하는 법적 구제수단이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토지지

배에 관계한 소가 발생하는 것은 이러한 신분에 관한 법적 구제절차와 긴밀한 관

계에 있다. 일정한 넓이의 이용할 수 있는 토지를 뜻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이 토

지부족이 일어나는데 따라서 점점 모든 단체 - 가공동체와 마찬가지로 - 정치단

체 - 의 토대가 되었다. 그래서 완전한 자격에 근거하여 단체에 참가하는 것이 토

지지배에 대한 할당을 요구하는 권리를 주고, 반대로 토지지배자만이 완전한 단체

원이었다. 따라서 토지지배에 관한 단체 상호간의 분쟁은 언제나 물추급적인 효과

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승소한 단체가 분쟁지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개인점취(Individualappropriation)가 증대함에 따라서 단체는 원고가 아니라 개

개의 성원이 다른 성원에 대하여 원고이고 성원 쌍방이 모두 자기가 성원이 권리에

의하여 토지를 지배한다는 것을 증거로 했다. 성원인 권리에 근거하여 토지를 요

구한다는 것에 관한 소송에서는 분쟁자의 일방만이 그의 전 정치사회적인 존재의

기초가 승인되어서 계쟁 목적물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자

가 성원이 아니면 비성원 또는 자유인이 아니면 비자유인일 수밖에 없듯이, 계쟁자

쌍방 중의 한 사람만이 성원으로서 토지보유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기 때

문이다. 특히 고대의 폴리스(Polis)와 같은 군사단체에서 로마의 토지(Fundus) 또

는 그리스의 토지(Kleros)에 관한 분쟁은 반드시 쌍면계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

면 안 되었으며, 그 소송에서는 일방이 위법행위자로서 이른바 피해자에게 소구되

어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패소를 면하기 위해서는 쌍방

이 다 권리자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성원인 권리 그것이 문

제로 되자마자 위법행위의 소의 형식을 이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가 도취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토지의 성질이라는 자연적인 이

유에서만은 결코 아니고 어떤 자의 성원으로서의 자질이 도취 당한다는 것은 있

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분문제 또는 토지지배가 취급되는 경

우에는 일면적인 위법행위의 소 외에 쌍면적인 소가 나타나서 원고 측의 소에 대하

여 피고의 반소가 의무로 되어있는 그리스의 대물소송(Disdikasie)과 로마의 소유

물회수소법(Vindicatio)이 이러한 소였다. 여기서 신분상의 분쟁 - 배당지의 권리

에[71] 관한 분쟁은 이에 속하였다 - 에 물적 청구권과 인적 청구권의 구별의 근거

가 있었다. 이러한 구별은 발전의 소산으로서 고대의 인적 단체들, 특히 토지보유

에 대한 씨족의 엄격한 지배의 붕괴와 더불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대체

로 마르크 게노센샤프트와 배당지에 관한 권리와의 발전단계 내지는 여기에 상응

하는 물지배 단체의 시기에 있어서의 발전 단계에서 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런데 시원적인 법적 사고는 이러한 물적 청구권, 인적 청구권이라는 대립 대신에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근본적인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1) 자기는 X

가에서 출생하고 또는 훈육되었다는 것에 의하여 - 혼인 양자연조, 의형제관계,

무장능력의 부여 내지는 성년식에 의해서 Y단체의 성원이고 그것에 의하여 자기를

위하여 재화 Z의 이용을 요구할 이유가 있다는 사태이고, 다음에 (2) Y단체의 성

원인 X가 자기, 즉 A에게 또는 자기의 단체 B의 성원에게 C라는 손해를 주었다(아

라비아의 법격언은 A의 피가 흘렀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씨족 전체의 피가 흘렀

다고 한다). 이러한 침해에 대해서는 X와 X의 단체의 성원들이 자기들, 즉 A의 단

체의 성원들에게 속죄의 의무를 진다는 사태이다. 토지의 개인점유가 진행함에 따

라서 제1의 사실로부터 전체 제3자에 대한 물적 청구권(특히 상속재산회복소권 및

소유물반환소권)이 발전하였다. 제2의 사실로부터는 특정인에 대한 인적 청구권이

발전하였다. 그 특정인이 권리자에게 그리고 그에게만 급부의무를 이행하도록 요

구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의 급부의무는 어떠한 특히 약속에 의해서도 질 수 있

는 의무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래의 사실의 명확성과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발전한

단계가 씨족단체 상호간과 씨족단체 내부의 이원성에 의하여 교착되어진다. 우리

들이 이미 본 바와 같이, 씨족의 성원 간에는 어떠한 복수도 따라서 또 어떤 법적

분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씨족 장로에 의한 해결과 그 해결에 배반하

는 경우에 보이 코트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는 절차의 마술적인 법형식성의 전부

가 결여되어있다. 즉 씨족 내부의 분쟁해결은 행정사무였다. 청구가 법발견과 법발

견에 연결되는 강제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법적 절차와 법은 동일한 정

치단체에 속하는 상이한 씨족단체 간 또한 이러한 상이한 씨족에 속하는 자 사이

에서만 존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씨족이 가공동체, 지방단체 그리고 정치단체의

상호 영속을 위하여 붕괴했을 경우에는 이제는 정치단체의 법적 절차가 씨족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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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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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4 23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노획물 분여권도 없었을 것이다 - 경우에는 사람의 신분의 분쟁의 확인을 허용

하는 법적 구제수단이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토지지

배에 관계한 소가 발생하는 것은 이러한 신분에 관한 법적 구제절차와 긴밀한 관

계에 있다. 일정한 넓이의 이용할 수 있는 토지를 뜻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이 토

지부족이 일어나는데 따라서 점점 모든 단체 - 가공동체와 마찬가지로 - 정치단

체 - 의 토대가 되었다. 그래서 완전한 자격에 근거하여 단체에 참가하는 것이 토

지지배에 대한 할당을 요구하는 권리를 주고, 반대로 토지지배자만이 완전한 단체

원이었다. 따라서 토지지배에 관한 단체 상호간의 분쟁은 언제나 물추급적인 효과

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승소한 단체가 분쟁지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개인점취(Individualappropriation)가 증대함에 따라서 단체는 원고가 아니라 개

개의 성원이 다른 성원에 대하여 원고이고 성원 쌍방이 모두 자기가 성원이 권리에

의하여 토지를 지배한다는 것을 증거로 했다. 성원인 권리에 근거하여 토지를 요

구한다는 것에 관한 소송에서는 분쟁자의 일방만이 그의 전 정치사회적인 존재의

기초가 승인되어서 계쟁 목적물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자

가 성원이 아니면 비성원 또는 자유인이 아니면 비자유인일 수밖에 없듯이, 계쟁자

쌍방 중의 한 사람만이 성원으로서 토지보유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기 때

문이다. 특히 고대의 폴리스(Polis)와 같은 군사단체에서 로마의 토지(Fundus) 또

는 그리스의 토지(Kleros)에 관한 분쟁은 반드시 쌍면계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

면 안 되었으며, 그 소송에서는 일방이 위법행위자로서 이른바 피해자에게 소구되

어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패소를 면하기 위해서는 쌍방

이 다 권리자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성원인 권리 그것이 문

제로 되자마자 위법행위의 소의 형식을 이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가 도취

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토지의 성질이라는 자연적인 이

유에서만은 결코 아니고 어떤 자의 성원으로서의 자질이 도취 당한다는 것은 있

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분문제 또는 토지지배가 취급되는 경

우에는 일면적인 위법행위의 소 외에 쌍면적인 소가 나타나서 원고 측의 소에 대하

여 피고의 반소가 의무로 되어있는 그리스의 대물소송(Disdikasie)과 로마의 소유

물회수소법(Vindicatio)이 이러한 소였다. 여기서 신분상의 분쟁 - 배당지의 권리

에[71] 관한 분쟁은 이에 속하였다 - 에 물적 청구권과 인적 청구권의 구별의 근거

가 있었다. 이러한 구별은 발전의 소산으로서 고대의 인적 단체들, 특히 토지보유

에 대한 씨족의 엄격한 지배의 붕괴와 더불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대체

로 마르크 게노센샤프트와 배당지에 관한 권리와의 발전단계 내지는 여기에 상응

하는 물지배 단체의 시기에 있어서의 발전 단계에서 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런데 시원적인 법적 사고는 이러한 물적 청구권, 인적 청구권이라는 대립 대신에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근본적인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1) 자기는 X

가에서 출생하고 또는 훈육되었다는 것에 의하여 - 혼인 양자연조, 의형제관계,

무장능력의 부여 내지는 성년식에 의해서 Y단체의 성원이고 그것에 의하여 자기를

위하여 재화 Z의 이용을 요구할 이유가 있다는 사태이고, 다음에 (2) Y단체의 성

원인 X가 자기, 즉 A에게 또는 자기의 단체 B의 성원에게 C라는 손해를 주었다(아

라비아의 법격언은 A의 피가 흘렀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씨족 전체의 피가 흘렀

다고 한다). 이러한 침해에 대해서는 X와 X의 단체의 성원들이 자기들, 즉 A의 단

체의 성원들에게 속죄의 의무를 진다는 사태이다. 토지의 개인점유가 진행함에 따

라서 제1의 사실로부터 전체 제3자에 대한 물적 청구권(특히 상속재산회복소권 및

소유물반환소권)이 발전하였다. 제2의 사실로부터는 특정인에 대한 인적 청구권이

발전하였다. 그 특정인이 권리자에게 그리고 그에게만 급부의무를 이행하도록 요

구되지 않으면 안 되며, 그의 급부의무는 어떠한 특히 약속에 의해서도 질 수 있

는 의무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래의 사실의 명확성과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발전한

단계가 씨족단체 상호간과 씨족단체 내부의 이원성에 의하여 교착되어진다. 우리

들이 이미 본 바와 같이, 씨족의 성원 간에는 어떠한 복수도 따라서 또 어떤 법적

분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씨족 장로에 의한 해결과 그 해결에 배반하

는 경우에 보이 코트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는 절차의 마술적인 법형식성의 전부

가 결여되어있다. 즉 씨족 내부의 분쟁해결은 행정사무였다. 청구가 법발견과 법발

견에 연결되는 강제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법적 절차와 법은 동일한 정

치단체에 속하는 상이한 씨족단체 간 또한 이러한 상이한 씨족에 속하는 자 사이

에서만 존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씨족이 가공동체, 지방단체 그리고 정치단체의

상호 영속을 위하여 붕괴했을 경우에는 이제는 정치단체의 법적 절차가 씨족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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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6 23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원 간의 관계, 끝으로는 가구성원 간의 관계에 까지도 어떤 정도 까지 관여하였는

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될 것이다. 이러한 관여가 있[72]는 한 이제는 개개인의 개인

적인 토지청구는 심판인 앞에서 성원 자신 간에 이루어지는 소송의 대상으로도 되

었다. 그 소송은 최초의 전술한 쌍면적인 소유물반환소송의 형식으로서 행하여졌

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치권력은 가부장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가능하였고 이

리하여 다소간에 일반적으로 분쟁해결의 방법은 원래 씨족 내부의 분쟁해결에 대

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행정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또 그 경우에는

이러한 유형의 정치단체의 소송절차에도 전해지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로

써 물적·인적이라는 두 개의 범주의 청구권을 구별하는 낡은 견해의 명확한 정형

도 새로운 견해의 명확한 정형도 종종 애매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우리는 양 청구

권을 기술적으로 한계지우는 것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위법행

위에 대한 대인책임으로부터 계약에 의한 법적 구속이 발전하여 왔는가, 그리고 어

떻게 해서 소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위법행위상의 유책으로부터 계약에 의하여

책임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돌아가자. 이를 매개하는 것은 속죄채무의

책임(Sühneschuldhaftung)이며, 이것은 소송절차에서 확립된 것 또는 거기서 승

인된 것이었다.

강제가능한 계약책임의 승인이 경제적으로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장 초

기의 전형적인 경우들의 하나는 소비대차 채무이다. 바로 이 채무의 경우에 전적으

로 대인 책임이었던 원초적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서서히 나타났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원래 소비대차는 전형적으로는 무이자인 것이 보통인 곤궁구조로서

단지 형제들 간에서만 행하여졌다. 이리하여 그 때문에 소비대차는 형제들 간, 즉

씨족성원이나 길드 성원들 간과 같이 보호자, 예속민 간의 관계 또는 다른 은혜관

계에 의해서 결부된 자들 간에는 전연 소송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형제적

단체 외에서 한 소비대차는 그것이 나타났을 때에는 그 자체로 법적으로 이자가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대인책임의 지배 아래에서는 기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만된 채권자는 그의 속행을 강제하는 수단으로서 단지 마술적인 절차

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 절차는 어떤 부분은 우리에게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되는 형식을 취하고, 그 잔재는 장기간 유지되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채권자는

자살함으로써 채무자를 협박하고, 그의 자살은 어떤 경우에는 채무자를 연달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기대하여 자살을 하였다. 인도에서는 채권자는 채무자의

문전에 엎어져 거기서 굶어죽거나 또는 목매어 죽었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그 이유

는 채권자의 이러한 행위로 채무자에 대한 씨족[73]의 복수의무의 기초가 마련되

었다는 것, 또한 채권자가 바라문(Brahmane)인 경우는 채무자는 바라문 살해자

로서 심판인의 간섭을 받았다는 것에 구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신의에 현저하게

반한 경우의 12표법의 부정, 그리고 그 후에 생긴 신의의 중대한 피해의 경우의 파

렴치는 아마 신의성실에 반한 경우에 법적 강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신에

나타나게 된 사회적 보이콧의 잔영이었다.

통일적인 채권법의 발전은 위법행위의 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예컨

대 씨족성원 또는 가성원 중의 한 사람이 계약한 경우에 각기의 성원 전부가 연대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 이 발전하여온 것은 원래 위

법행위에 대한 씨족의 책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제소

가능한 채권채무관계는 그 후 대개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 발전하였다. 여기서 경

제생활에 화폐가 나타나게 된 것이 종종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구속행위

(Nexum) - 「구리와 저울에 의해서」(Per aes et libram) 채무를 발생시키는 계약

그리고 문답계약(stipulatio) - 상징적인 질물교부에 의해서 채무를 발생시키는 계

약 - 이라는 로마 시민법에서의 시원적인 이러한 계약적 형식은 동시에 두 개의 금

전계약이었다. 왜 화폐의 출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문답계약

에 대해서도 적어도 그것이 나에게는 확실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

자는 계약법 이전의 법상태와의 연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구두로 또

단지 당사자 자신에 의해서만 하는 것이 가능한 엄격히 형식적인 행위였으며 동일

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문답계약에 관해서는 미타이스(Mitteis)에 찬성하여 게르

만법에서도 잘 알려진 법발전으로부터의 유추에 근거하여 다음의 것을 인정할 수

가 있다. 그것은 문답계약이 소송절차에서 유래하며 소송절차 외에서는 원래 적은

역할을, 그것도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합의(Nebenvereinbarung)(이자 기타)의 목

적을 위하여 하였음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왜 문답계약이 소송절차에

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면 확실히 소송의 기초인 속죄계약은 적대자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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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6 23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원 간의 관계, 끝으로는 가구성원 간의 관계에 까지도 어떤 정도 까지 관여하였는

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될 것이다. 이러한 관여가 있[72]는 한 이제는 개개인의 개인

적인 토지청구는 심판인 앞에서 성원 자신 간에 이루어지는 소송의 대상으로도 되

었다. 그 소송은 최초의 전술한 쌍면적인 소유물반환소송의 형식으로서 행하여졌

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치권력은 가부장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가능하였고 이

리하여 다소간에 일반적으로 분쟁해결의 방법은 원래 씨족 내부의 분쟁해결에 대

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행정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또 그 경우에는

이러한 유형의 정치단체의 소송절차에도 전해지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로

써 물적·인적이라는 두 개의 범주의 청구권을 구별하는 낡은 견해의 명확한 정형

도 새로운 견해의 명확한 정형도 종종 애매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우리는 양 청구

권을 기술적으로 한계지우는 것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위법행

위에 대한 대인책임으로부터 계약에 의한 법적 구속이 발전하여 왔는가, 그리고 어

떻게 해서 소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위법행위상의 유책으로부터 계약에 의하여

책임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돌아가자. 이를 매개하는 것은 속죄채무의

책임(Sühneschuldhaftung)이며, 이것은 소송절차에서 확립된 것 또는 거기서 승

인된 것이었다.

강제가능한 계약책임의 승인이 경제적으로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장 초

기의 전형적인 경우들의 하나는 소비대차 채무이다. 바로 이 채무의 경우에 전적으

로 대인 책임이었던 원초적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서서히 나타났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원래 소비대차는 전형적으로는 무이자인 것이 보통인 곤궁구조로서

단지 형제들 간에서만 행하여졌다. 이리하여 그 때문에 소비대차는 형제들 간, 즉

씨족성원이나 길드 성원들 간과 같이 보호자, 예속민 간의 관계 또는 다른 은혜관

계에 의해서 결부된 자들 간에는 전연 소송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형제적

단체 외에서 한 소비대차는 그것이 나타났을 때에는 그 자체로 법적으로 이자가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그것은 대인책임의 지배 아래에서는 기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만된 채권자는 그의 속행을 강제하는 수단으로서 단지 마술적인 절차

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 절차는 어떤 부분은 우리에게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되는 형식을 취하고, 그 잔재는 장기간 유지되었다. 예컨대 중국에서 채권자는

자살함으로써 채무자를 협박하고, 그의 자살은 어떤 경우에는 채무자를 연달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을 기대하여 자살을 하였다. 인도에서는 채권자는 채무자의

문전에 엎어져 거기서 굶어죽거나 또는 목매어 죽었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그 이유

는 채권자의 이러한 행위로 채무자에 대한 씨족[73]의 복수의무의 기초가 마련되

었다는 것, 또한 채권자가 바라문(Brahmane)인 경우는 채무자는 바라문 살해자

로서 심판인의 간섭을 받았다는 것에 구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신의에 현저하게

반한 경우의 12표법의 부정, 그리고 그 후에 생긴 신의의 중대한 피해의 경우의 파

렴치는 아마 신의성실에 반한 경우에 법적 강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신에

나타나게 된 사회적 보이콧의 잔영이었다.

통일적인 채권법의 발전은 위법행위의 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예컨

대 씨족성원 또는 가성원 중의 한 사람이 계약한 경우에 각기의 성원 전부가 연대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 이 발전하여온 것은 원래 위

법행위에 대한 씨족의 책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제소

가능한 채권채무관계는 그 후 대개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 발전하였다. 여기서 경

제생활에 화폐가 나타나게 된 것이 종종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구속행위

(Nexum) - 「구리와 저울에 의해서」(Per aes et libram) 채무를 발생시키는 계약

그리고 문답계약(stipulatio) - 상징적인 질물교부에 의해서 채무를 발생시키는 계

약 - 이라는 로마 시민법에서의 시원적인 이러한 계약적 형식은 동시에 두 개의 금

전계약이었다. 왜 화폐의 출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문답계약

에 대해서도 적어도 그것이 나에게는 확실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

자는 계약법 이전의 법상태와의 연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구두로 또

단지 당사자 자신에 의해서만 하는 것이 가능한 엄격히 형식적인 행위였으며 동일

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문답계약에 관해서는 미타이스(Mitteis)에 찬성하여 게르

만법에서도 잘 알려진 법발전으로부터의 유추에 근거하여 다음의 것을 인정할 수

가 있다. 그것은 문답계약이 소송절차에서 유래하며 소송절차 외에서는 원래 적은

역할을, 그것도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합의(Nebenvereinbarung)(이자 기타)의 목

적을 위하여 하였음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왜 문답계약이 소송절차에

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면 확실히 소송의 기초인 속죄계약은 적대자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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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8 23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계약으로서 의형제계약은 아니고 이리하여 쟁점, 특히 증명될 사항이 엄밀히 방식

에 맞을 것을 요구하는 한에서 이미 또 교환과 더불어 강제가능한 계약에 이르는

도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송절차가 취하는 형식이 고정되면 될수록 소송

절차 자체가 계약 의하여 법적인 의무들을 창조하는 법률행위들을 발전시키는 점

점 더 많은 원인을 주었다. 특히 이에 속한 것은 소송의 일방 당사자가 그의 상대

방 대해서 하는 담보의 공여(Sicherheitsleistung)이다. 많은 법에서 자력구조를

예방하려 했던[74] 소송절차는 자력구제의 행위로서 개시되었다. 즉 원고는 피고를

법정에 까지 끌고 가서 심판인이 유책으로 하는 경우에는 속죄를 회피 안하겠다는

담보를 피고가 공여한 후에만 그를 방면하는데 불과하다. 이 경우에 자력구제는

언제나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서 향하여진다. 왜냐하면 소는 시초에는 확실히 피

고가 객관적으로 위법행위를 했다는 주장뿐만 아니고 그와 전적으로 동일시된 것

이었는데 피고가 자기의 신체로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위반행위를 원고에 대해서

했다고 하는 주장에 기초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피고 자신이 판결 시

까지 방해를 받지 않고 있기 위해서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담보는 보증인 또

는 질에 의해서 하였다. 여기서 이들 두 법제도는 소송절차에서 강제 가능한 법률

행위로서 나타난다. 그 후 제3자 보증에 가름하여 피고 자신이 판결의 이행을 약

속하는 것이 허용되고 거기에 관해서는 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되고 있었다.

즉 피고가 자기 자신의 보증인이고 그것은 자유노동계약의 가장 오랜 법적 형식이

어디서든지 가부 또는 주인에 의한 보통의 매각에 가름하여 나타난 기한부 노예상

태에로 자기 자신을 매각하는 것이었다는 것과 같다는 사고방법이다. 이리하여 책

임을 발생시키는 순전히 계약에 근거하는 가장 오랜 채권채무 관계는 소송적 과정

을 소송 외의 법생활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게르만법에서도 질물 내지 인질을 제

공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법형식성에서도 채무를 계약하기 위한 가장

오랜 수단이었다. 그러나 법적 사고에 대해서는 게르만법·로마법의 어느 것에서도

자기보증을 파생시킨 보증은 씨족이나 가의 성원의 인적 연대책임에 의탁하였음은

의문이 없다. 그리고 장래의 의무에 대해서 담보를 공여하는 제2의 형식인 질은 로

마법에서도 독일법에서도 시초 대인책임의 소에 의하여 추구되거나 집행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압류질(genommenes Pfand) 집행질(Exekutionspfand)이거나 또

약정질(Pfandbestellung)의 어느 것이었으며, 따라서 오늘날 질권과 구별되어 보

존하는 청구권에 대한 담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약정질은 재화에 관한 소유의

양도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질물에 대한 채권자의 소유는 이 양도에 근거하

는 것이었다. 그리고 채권자의 이러한 소유는 피담보채무가 지불되지 않은 동안은

적법하였으나 그것이 즉시에 지불된 경우에는 위법이고 이리하여 후자의 경우에

는 그의 위법의 소유가 전체 채무자에 대한 위반행위를 발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약정질의 내용이 이러하였다는 것은 법적 사고에서 숙지된 소원인(訴原因)의 가장

오랜 범형, 즉 사람에 대한 사실적 침해 내지 사람의 점유에 대한 사실적 침해가

[75] 어느 것이나 다 같이 상대적으로는 법적 강제수단을 결여하였다는 것에 적합

한 것이었다. 끝으로 채무노예에도 조건부로 자기 매각하는 법률행위도 아주 보편

적으로 보급되고 있었으나 그 법률행위는 혹은 직접 집행가능한 방법에 의하여 혹

은 소송절차에서 유래하는 인질의 제공에 의하였다. 여기서는 채무자 자신의 신체

가 채권자의 질물이고 채무가 지불되지 않는 경우에는 결정적으로 채권자의 적법

한 소유로 귀속했다.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채무책임은 이러한 책임이 결부되어

있던 복수에 대한 책임 및 속죄에 대한 책임처럼 원래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관한 인적 책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신체에 관한, 그

리고 이것에만 관한 채무자의 책임이었다. 원래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집행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채무자가 지불치 않을 경우에는 채권자는 그의 신체 만에 의뢰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예컨대 채권자는 채무자를 살해하고 인질로써 감금하고 채무

노예로서 보유하고 노예로써 매각하였고, 채권자가 다수인 경우에는 12표법이 채권

자의 임의에 맡긴 것처럼 채무자를 부분으로 절단해도 좋았다. 또는 채권자는 채무

자의 집 안에 정주하고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향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정박자[定

泊者]). 이것은 이미 재산책임에의 이행이었다. 그러나 재산책임 자체는 극히 서서히

나타났던 것으로 지불불능의 결과로써 대인책임은 로마에서는 계급투쟁의 과정에

서 비로소 소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에 겨우 소멸하였다. 순전히 법적 구속

력을 수반하는 가장 오랜 계약, 즉 구속행위, 문답계약, 게르만인의 질약(wadiatio)

은 여하튼 즉석에 대인책임을 지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장래에 약속된 재산급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급부가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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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38 23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계약으로서 의형제계약은 아니고 이리하여 쟁점, 특히 증명될 사항이 엄밀히 방식

에 맞을 것을 요구하는 한에서 이미 또 교환과 더불어 강제가능한 계약에 이르는

도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송절차가 취하는 형식이 고정되면 될수록 소송

절차 자체가 계약 의하여 법적인 의무들을 창조하는 법률행위들을 발전시키는 점

점 더 많은 원인을 주었다. 특히 이에 속한 것은 소송의 일방 당사자가 그의 상대

방 대해서 하는 담보의 공여(Sicherheitsleistung)이다. 많은 법에서 자력구조를

예방하려 했던[74] 소송절차는 자력구제의 행위로서 개시되었다. 즉 원고는 피고를

법정에 까지 끌고 가서 심판인이 유책으로 하는 경우에는 속죄를 회피 안하겠다는

담보를 피고가 공여한 후에만 그를 방면하는데 불과하다. 이 경우에 자력구제는

언제나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서 향하여진다. 왜냐하면 소는 시초에는 확실히 피

고가 객관적으로 위법행위를 했다는 주장뿐만 아니고 그와 전적으로 동일시된 것

이었는데 피고가 자기의 신체로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위반행위를 원고에 대해서

했다고 하는 주장에 기초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피고 자신이 판결 시

까지 방해를 받지 않고 있기 위해서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담보는 보증인 또

는 질에 의해서 하였다. 여기서 이들 두 법제도는 소송절차에서 강제 가능한 법률

행위로서 나타난다. 그 후 제3자 보증에 가름하여 피고 자신이 판결의 이행을 약

속하는 것이 허용되고 거기에 관해서는 법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되고 있었다.

즉 피고가 자기 자신의 보증인이고 그것은 자유노동계약의 가장 오랜 법적 형식이

어디서든지 가부 또는 주인에 의한 보통의 매각에 가름하여 나타난 기한부 노예상

태에로 자기 자신을 매각하는 것이었다는 것과 같다는 사고방법이다. 이리하여 책

임을 발생시키는 순전히 계약에 근거하는 가장 오랜 채권채무 관계는 소송적 과정

을 소송 외의 법생활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게르만법에서도 질물 내지 인질을 제

공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법형식성에서도 채무를 계약하기 위한 가장

오랜 수단이었다. 그러나 법적 사고에 대해서는 게르만법·로마법의 어느 것에서도

자기보증을 파생시킨 보증은 씨족이나 가의 성원의 인적 연대책임에 의탁하였음은

의문이 없다. 그리고 장래의 의무에 대해서 담보를 공여하는 제2의 형식인 질은 로

마법에서도 독일법에서도 시초 대인책임의 소에 의하여 추구되거나 집행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압류질(genommenes Pfand) 집행질(Exekutionspfand)이거나 또

약정질(Pfandbestellung)의 어느 것이었으며, 따라서 오늘날 질권과 구별되어 보

존하는 청구권에 대한 담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약정질은 재화에 관한 소유의

양도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질물에 대한 채권자의 소유는 이 양도에 근거하

는 것이었다. 그리고 채권자의 이러한 소유는 피담보채무가 지불되지 않은 동안은

적법하였으나 그것이 즉시에 지불된 경우에는 위법이고 이리하여 후자의 경우에

는 그의 위법의 소유가 전체 채무자에 대한 위반행위를 발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약정질의 내용이 이러하였다는 것은 법적 사고에서 숙지된 소원인(訴原因)의 가장

오랜 범형, 즉 사람에 대한 사실적 침해 내지 사람의 점유에 대한 사실적 침해가

[75] 어느 것이나 다 같이 상대적으로는 법적 강제수단을 결여하였다는 것에 적합

한 것이었다. 끝으로 채무노예에도 조건부로 자기 매각하는 법률행위도 아주 보편

적으로 보급되고 있었으나 그 법률행위는 혹은 직접 집행가능한 방법에 의하여 혹

은 소송절차에서 유래하는 인질의 제공에 의하였다. 여기서는 채무자 자신의 신체

가 채권자의 질물이고 채무가 지불되지 않는 경우에는 결정적으로 채권자의 적법

한 소유로 귀속했다.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채무책임은 이러한 책임이 결부되어

있던 복수에 대한 책임 및 속죄에 대한 책임처럼 원래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관한 인적 책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신체에 관한, 그

리고 이것에만 관한 채무자의 책임이었다. 원래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집행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채무자가 지불치 않을 경우에는 채권자는 그의 신체 만에 의뢰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예컨대 채권자는 채무자를 살해하고 인질로써 감금하고 채무

노예로서 보유하고 노예로써 매각하였고, 채권자가 다수인 경우에는 12표법이 채권

자의 임의에 맡긴 것처럼 채무자를 부분으로 절단해도 좋았다. 또는 채권자는 채무

자의 집 안에 정주하고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향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정박자[定

泊者]). 이것은 이미 재산책임에의 이행이었다. 그러나 재산책임 자체는 극히 서서히

나타났던 것으로 지불불능의 결과로써 대인책임은 로마에서는 계급투쟁의 과정에

서 비로소 소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에 겨우 소멸하였다. 순전히 법적 구속

력을 수반하는 가장 오랜 계약, 즉 구속행위, 문답계약, 게르만인의 질약(wadiatio)

은 여하튼 즉석에 대인책임을 지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장래에 약속된 재산급부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급부가 이행되지 않았을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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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0 24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는 다시 채무자의 신체 자체에 반환을 청구하는 것만이 결과로서 발생하였다.

모든 원초적인 계약은 점유교환계약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계약에 의한 채무책

임의 오랜 형식, 특히 어디서든지 특히 엄격하게 형식적인 금전채무책임을 의미

한 전체 법률행위도 언제나 법형식에 맞는 점유이전과 상대적으로 결부되어 있었

다. 이들 상징적인 형식의 다수가 마술적인 관념에 근거하고 있었음은 의문이 있

다. 그러나 계속하여 결정적이었던 것은 다음의 것이었다. 그것은 법적 사고에 대

하여 시초로 중요한 것으로서 알려진 것은, 결코 채무약속이라는 성격을 가진 눈

에 보이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위반행위뿐이었다. 그래서 신, 생명, 신체 또

는 눈에 보이는 점유상태에 대한 침해가 계속하여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법

[76]적으로 중요한 것인 계약은 보통 눈에 보이는 재화에 관한 점유처분을 내용으

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가능하여야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계약은 발전과정에서 아주 다양한 내용을 포괄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제일 먼저 이러한 형식을 입힐 수 있는 거래로서는 현금거래의 전부만이 법적으

로 유효하였거나 또는 여하튼 약속의 의미변경을 배제하는 부분급부로서의 착수

금이 교부되는 한에서 그 거래는 법적으로 유효한데 불과하였다. 이상으로부터 매

우 많은 법에 있어서의 원시적인 원리, 즉 유상의 강제할 수 있는 계약만이 계속

적으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아

주 후일까지 작용한 결과, 영국의 약인(Consideration) 이론은 중세의 종말(15세

기 공식으로는 헨리 8세 이후)에서도 아직 상술한 원리의 요구와 결부되어 있다.

즉 물적 대가(realer Entgelt)(consideration) - 그것이 가령 명목적 대가에 불과

하더라도 – 가 현실로 지불된 경우에는 계약은 법적으로 엄금되지 않는 거의 전

부의 내용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약속은 만약 기술의 전제가 없다면 적응

해야 할 아무런 법형식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유효하였다. 악취행위(握取行爲,

Manzipationsgeschäfte)에 관한 12표법의 명제는 그런 의미에서 논란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상 아마 원리적으로는 상술과 같은 형식적인 조건 아래 발전능력은 분

명히 한정된, 실질적인 처분의 자유보장 - 그것이 본질적으로 상당히 원시적인 것

이라는 물론이다 - 이었다.

한편 법형식에 맞는 금전거래로부터 다른 한 편 소송절차상의 보장에서 유래하

는 범형의 발전과 함께 또한 법생활의 요구는 강제가능한 계약이라는 제3의 계약

정형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에 봉사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법에 의한 보장, 즉 강제

를 창조하는 것, 즉 위법행위에 근거하는 소로부터 계약에 새로운 소를 인위적으

로 발전시키는데 봉사하였다 이것은 중세 전성기의 영국법처럼 기술적으로 고도

로 발전하였던 법에서도 일어났다. 법이 경제적으로 합리화되는 것이 속죄의 책임

은 복수를 돈으로써 면한다는 것이(원시적인 견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보

상 있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성립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계약의

불이행은 속죄의 의무 있는 가해와 같은 것으로서 특징지우는 것이 가능하였다.

13세기 이후 영국의 변호사 실무와 국왕재판소의 판결은 계약 - 그 수는 점점 증

대하여 가는데 - 의 불이행을 하나의 불법침해(trespass)로서 구성하였고 이것에

의하여 (특히 인수영장[writ of assumpsit]의 수단에 의해서) 계약에 법적 보호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물론 기[77]술적으로 전연 다른 방법이기는 하였으나 법무관에

의한 로마인의 법실무가 먼저 불법행위 소권을 반대하는 것에 의하여 다음의 악의

의 개념(Dolusbegriff)에 의하여 법적 보호를 그의 원시적인 영역을 넘어서 확대

한 것과 같았다.

제소가능한 어떤 내용이라도 가질 수 있는 계약상의 청구권이 창조되어도 발전

된 전적으로 상업적인 거래가 요구하는 법상태에는 오랫동안 도달하지 못했다. 특

히 모든 합리적인 경영은 대리인들 - 그들은 개별적인 경우를 위하여도 계속적으

로도 선임되었다 - 에 의하여 계약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권리를 취득하고 의무

를 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필요로 하였다. 또 이것 이상으로 발전한 거래가 요

구한 것은 채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양수인에 대하여 법적으로 보

증된, 즉 양도인의 자격심사를 하지 않더라도 좋은 적법한 양도가능성이다. 그러

나 근대 자본가에 있어서 불가결한 오늘날의 법제도가 어떻게 하여 발전하여 왔

는가 하는 것은 다른 부분에서 상설할 것이다(A. 라이스트[A. Leist]가 『사회경제

학개요』 제4장에서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전의 과거의 상태를 간단히 생각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법률행위에 있어서의 직접 대리는 고대법 중에서는 그리스법에

서 숙지되어 있었는데 로마법에서는 채권채무관계의 창조에 관하여 거의 불가능이

었다. 시민법상의 소가 형식주의적인 것과 관련하고 있던 이러한 법상태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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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0 24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는 다시 채무자의 신체 자체에 반환을 청구하는 것만이 결과로서 발생하였다.

모든 원초적인 계약은 점유교환계약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계약에 의한 채무책

임의 오랜 형식, 특히 어디서든지 특히 엄격하게 형식적인 금전채무책임을 의미

한 전체 법률행위도 언제나 법형식에 맞는 점유이전과 상대적으로 결부되어 있었

다. 이들 상징적인 형식의 다수가 마술적인 관념에 근거하고 있었음은 의문이 있

다. 그러나 계속하여 결정적이었던 것은 다음의 것이었다. 그것은 법적 사고에 대

하여 시초로 중요한 것으로서 알려진 것은, 결코 채무약속이라는 성격을 가진 눈

에 보이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위반행위뿐이었다. 그래서 신, 생명, 신체 또

는 눈에 보이는 점유상태에 대한 침해가 계속하여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법

[76]적으로 중요한 것인 계약은 보통 눈에 보이는 재화에 관한 점유처분을 내용으

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가능하여야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계약은 발전과정에서 아주 다양한 내용을 포괄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제일 먼저 이러한 형식을 입힐 수 있는 거래로서는 현금거래의 전부만이 법적으

로 유효하였거나 또는 여하튼 약속의 의미변경을 배제하는 부분급부로서의 착수

금이 교부되는 한에서 그 거래는 법적으로 유효한데 불과하였다. 이상으로부터 매

우 많은 법에 있어서의 원시적인 원리, 즉 유상의 강제할 수 있는 계약만이 계속

적으로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아

주 후일까지 작용한 결과, 영국의 약인(Consideration) 이론은 중세의 종말(15세

기 공식으로는 헨리 8세 이후)에서도 아직 상술한 원리의 요구와 결부되어 있다.

즉 물적 대가(realer Entgelt)(consideration) - 그것이 가령 명목적 대가에 불과

하더라도 – 가 현실로 지불된 경우에는 계약은 법적으로 엄금되지 않는 거의 전

부의 내용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약속은 만약 기술의 전제가 없다면 적응

해야 할 아무런 법형식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유효하였다. 악취행위(握取行爲,

Manzipationsgeschäfte)에 관한 12표법의 명제는 그런 의미에서 논란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상 아마 원리적으로는 상술과 같은 형식적인 조건 아래 발전능력은 분

명히 한정된, 실질적인 처분의 자유보장 - 그것이 본질적으로 상당히 원시적인 것

이라는 물론이다 - 이었다.

한편 법형식에 맞는 금전거래로부터 다른 한 편 소송절차상의 보장에서 유래하

는 범형의 발전과 함께 또한 법생활의 요구는 강제가능한 계약이라는 제3의 계약

정형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에 봉사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법에 의한 보장, 즉 강제

를 창조하는 것, 즉 위법행위에 근거하는 소로부터 계약에 새로운 소를 인위적으

로 발전시키는데 봉사하였다 이것은 중세 전성기의 영국법처럼 기술적으로 고도

로 발전하였던 법에서도 일어났다. 법이 경제적으로 합리화되는 것이 속죄의 책임

은 복수를 돈으로써 면한다는 것이(원시적인 견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보

상 있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성립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계약의

불이행은 속죄의 의무 있는 가해와 같은 것으로서 특징지우는 것이 가능하였다.

13세기 이후 영국의 변호사 실무와 국왕재판소의 판결은 계약 - 그 수는 점점 증

대하여 가는데 - 의 불이행을 하나의 불법침해(trespass)로서 구성하였고 이것에

의하여 (특히 인수영장[writ of assumpsit]의 수단에 의해서) 계약에 법적 보호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물론 기[77]술적으로 전연 다른 방법이기는 하였으나 법무관에

의한 로마인의 법실무가 먼저 불법행위 소권을 반대하는 것에 의하여 다음의 악의

의 개념(Dolusbegriff)에 의하여 법적 보호를 그의 원시적인 영역을 넘어서 확대

한 것과 같았다.

제소가능한 어떤 내용이라도 가질 수 있는 계약상의 청구권이 창조되어도 발전

된 전적으로 상업적인 거래가 요구하는 법상태에는 오랫동안 도달하지 못했다. 특

히 모든 합리적인 경영은 대리인들 - 그들은 개별적인 경우를 위하여도 계속적으

로도 선임되었다 - 에 의하여 계약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권리를 취득하고 의무

를 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필요로 하였다. 또 이것 이상으로 발전한 거래가 요

구한 것은 채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양수인에 대하여 법적으로 보

증된, 즉 양도인의 자격심사를 하지 않더라도 좋은 적법한 양도가능성이다. 그러

나 근대 자본가에 있어서 불가결한 오늘날의 법제도가 어떻게 하여 발전하여 왔

는가 하는 것은 다른 부분에서 상설할 것이다(A. 라이스트[A. Leist]가 『사회경제

학개요』 제4장에서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전의 과거의 상태를 간단히 생각하는

데 불과할 것이다. 법률행위에 있어서의 직접 대리는 고대법 중에서는 그리스법에

서 숙지되어 있었는데 로마법에서는 채권채무관계의 창조에 관하여 거의 불가능이

었다. 시민법상의 소가 형식주의적인 것과 관련하고 있던 이러한 법상태가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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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2 24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진실한 자본주의적인 경영들 내에서 노예를 이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것

을 이용한, 경우에는 실제로 대리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채무라는 관련

의 엄격히 정책적인 성격의 결과 고대 로마법도 게르만법도 채권양도를 알지 못하

였다. 로마법은 나중에야 비로소 간접대리를 매개로하여 채권양도에 가름하는 것

을 창조하여 결국 양도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양도법이 진실로 경업적인 거

래를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은 보다 후의 칙법(勅法)의 실질윤리적인 경향으로 다

시 방해되었다. 그래서 사실 근대 초까지 보통의 거래의 객체이었던 채권 또는 제3

자에게 자기가 가지는 청구권을 송부하는 목적에 직접 소용되었던 채권만을 위해

서 청구권양도의 가능성이 실제상 충분히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

구에 응하기 위해서 채권의 상거래화가 지시증권 또는 무기명 채권에 의해서 창조

되었고 이러한 증권은 청구권들, 특히 금전적인 청구권들의 양도에 대해서도 상품

이 기업들의 지분에 관한 지배권의 양도에 대해서도 봉사한다. 이러한 증권은 로마

법에서는 전연 알려지지 않았다. 또 골드슈미트(Goldschmidt)가 인정하듯이, 그

리스의 증권과 콜러(Kohler)가 믿은 [78] 함무라비 시대에 까지 소급하는 바빌로니

아의 증권 - 그것은 지참인에게 지불되는 증권이다 - 이 진정한 무기명 증권이었

는가의 진위에 관해서는 오늘날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 증서는 사

실상 제3자에 대한 지불과 제3자에 의한 지불을 가능케 한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그것은 공식적인 로마법이 단지 간접적으로만 이러한 지불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법과 같다. 고전기의 로마법은 권리변동을 진정으로 문서의 표시에 의하여 발생시

키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다만 사람들이 문서계약(Literalkontrakt), 즉 금

전출납부 기입(Bankiersbuchung)을 이러한 것으로써 부르지 않으려면 그렇다는

것이다 동방지역에서 가장 오랜 시대로부터 발전한 증서기술이 그리스법과 후기 로

마법에서는 아마 시초에는 본질적으로 국고의 징세목적에 봉사한 기록에 관한 국

가의 강제를 통하여 일층 발전하여 그 결과 일정한 행위의 성립에는 문서의 표시

에 의하여 하는 것을 의무화하여 유가증권에 유사한 문서를 발생시켰다. 그리스와

그리스적인 도시들에서는 증서 기술은 공시의 이익을 위하여 로마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개의 제도, 즉 재판소 서기와 공증인에 의하여 관장되었으나 그 공증

인 제도는 로마제국의 동부로부터 서부에 계수되었다. 그러나 서방 지역에서는 7세

기 이후에 비로소 후기 로마시대의 증서제도가 상술한 후기 로마의 증서실무를 일

층 발전시키고 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마 동방, 특히 시리아의 상인이 강

대하게 이주하여 왔다는 것에 의해서였다. 그 후에 증서는 권리담당자로서, 즉 지

시채권 및 무기명증권으로서 대단히 급속하게 발전한 것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우

리가 고전고대기와 비교하면 거래빈도가 극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있어서 급격히 발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법적 기술은 다른 경우에 종

종 발생하듯이, 여기서도 각자의 길을 걸을 것처럼 생각된다. 이 경우에는 분명히

다음의 것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즉 통일법이 없어진 후 이제는 거래중심지의 이해

관계인 그리고 기술적으로만 훈련된 공증인이 그 발전을 결정했다는 것, 일반적으

로 공증제도가 고대 시대 거래법의 전통의 유일한 담당자로서 남아서 창조적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사하였듯이, 여기에서 또 게르만법의 비합리적

사고형태도 증서제도 및 그 자체의 발전을 조성하였다. 증서는 민중 일반의 견해에

의하면 일종의 주물(Festish)로 생각되어 시초에는 그것을 증인 앞에서 정형식에

맞추어서 인도하는 것이 특수한 법적 효과를 야기했다. 그것은 게르만법의 투창

(Gerwurf)과 나무 조각의 투입(Vestuka) 또는 후자에 [79] 해당하는 바빌로니아

법의 Bukannu와 같은 원래 반마술적인 다른 상징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다. 그러

나 원래 상징적인 인도행위는 당사자에 의하여 결코 미리 기재된 증서의 인도로서

가 아니고 기재되어 있지 아니한 양피지의 인도로써 행하여 졌고 그 후에 비로소

일정한 문신이 거기에 기재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의 법적 상징성과 공증인 실무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이탈리아법은 이미 중세 초기에 증서의 표시에 의하여 권리변

동을 발생시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조성했으나, 이에 반하여 영국법은 이것을 오

랫동안 알지 못하고 거기에서는 봉인이 결정적인 설권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

가증권의 근대 상법의 정형이 발전한 것은 대부분 중세의 경과에서 혹은 상업적인

혹은 행정적인 필요의 결과 아라비아와의 협력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생각

건대 고대 시대 로마의 거래는 우리에게 오늘날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중요

한 기술적 수단을 갖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었으며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이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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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2 24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진실한 자본주의적인 경영들 내에서 노예를 이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것

을 이용한, 경우에는 실제로 대리가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채무라는 관련

의 엄격히 정책적인 성격의 결과 고대 로마법도 게르만법도 채권양도를 알지 못하

였다. 로마법은 나중에야 비로소 간접대리를 매개로하여 채권양도에 가름하는 것

을 창조하여 결국 양도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양도법이 진실로 경업적인 거

래를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은 보다 후의 칙법(勅法)의 실질윤리적인 경향으로 다

시 방해되었다. 그래서 사실 근대 초까지 보통의 거래의 객체이었던 채권 또는 제3

자에게 자기가 가지는 청구권을 송부하는 목적에 직접 소용되었던 채권만을 위해

서 청구권양도의 가능성이 실제상 충분히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

구에 응하기 위해서 채권의 상거래화가 지시증권 또는 무기명 채권에 의해서 창조

되었고 이러한 증권은 청구권들, 특히 금전적인 청구권들의 양도에 대해서도 상품

이 기업들의 지분에 관한 지배권의 양도에 대해서도 봉사한다. 이러한 증권은 로마

법에서는 전연 알려지지 않았다. 또 골드슈미트(Goldschmidt)가 인정하듯이, 그

리스의 증권과 콜러(Kohler)가 믿은 [78] 함무라비 시대에 까지 소급하는 바빌로니

아의 증권 - 그것은 지참인에게 지불되는 증권이다 - 이 진정한 무기명 증권이었

는가의 진위에 관해서는 오늘날에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 증서는 사

실상 제3자에 대한 지불과 제3자에 의한 지불을 가능케 한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그것은 공식적인 로마법이 단지 간접적으로만 이러한 지불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법과 같다. 고전기의 로마법은 권리변동을 진정으로 문서의 표시에 의하여 발생시

키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다만 사람들이 문서계약(Literalkontrakt), 즉 금

전출납부 기입(Bankiersbuchung)을 이러한 것으로써 부르지 않으려면 그렇다는

것이다 동방지역에서 가장 오랜 시대로부터 발전한 증서기술이 그리스법과 후기 로

마법에서는 아마 시초에는 본질적으로 국고의 징세목적에 봉사한 기록에 관한 국

가의 강제를 통하여 일층 발전하여 그 결과 일정한 행위의 성립에는 문서의 표시

에 의하여 하는 것을 의무화하여 유가증권에 유사한 문서를 발생시켰다. 그리스와

그리스적인 도시들에서는 증서 기술은 공시의 이익을 위하여 로마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개의 제도, 즉 재판소 서기와 공증인에 의하여 관장되었으나 그 공증

인 제도는 로마제국의 동부로부터 서부에 계수되었다. 그러나 서방 지역에서는 7세

기 이후에 비로소 후기 로마시대의 증서제도가 상술한 후기 로마의 증서실무를 일

층 발전시키고 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마 동방, 특히 시리아의 상인이 강

대하게 이주하여 왔다는 것에 의해서였다. 그 후에 증서는 권리담당자로서, 즉 지

시채권 및 무기명증권으로서 대단히 급속하게 발전한 것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우

리가 고전고대기와 비교하면 거래빈도가 극히 제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있어서 급격히 발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법적 기술은 다른 경우에 종

종 발생하듯이, 여기서도 각자의 길을 걸을 것처럼 생각된다. 이 경우에는 분명히

다음의 것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즉 통일법이 없어진 후 이제는 거래중심지의 이해

관계인 그리고 기술적으로만 훈련된 공증인이 그 발전을 결정했다는 것, 일반적으

로 공증제도가 고대 시대 거래법의 전통의 유일한 담당자로서 남아서 창조적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사하였듯이, 여기에서 또 게르만법의 비합리적

사고형태도 증서제도 및 그 자체의 발전을 조성하였다. 증서는 민중 일반의 견해에

의하면 일종의 주물(Festish)로 생각되어 시초에는 그것을 증인 앞에서 정형식에

맞추어서 인도하는 것이 특수한 법적 효과를 야기했다. 그것은 게르만법의 투창

(Gerwurf)과 나무 조각의 투입(Vestuka) 또는 후자에 [79] 해당하는 바빌로니아

법의 Bukannu와 같은 원래 반마술적인 다른 상징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다. 그러

나 원래 상징적인 인도행위는 당사자에 의하여 결코 미리 기재된 증서의 인도로서

가 아니고 기재되어 있지 아니한 양피지의 인도로써 행하여 졌고 그 후에 비로소

일정한 문신이 거기에 기재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의 법적 상징성과 공증인 실무가

함께 작용함으로써 이탈리아법은 이미 중세 초기에 증서의 표시에 의하여 권리변

동을 발생시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조성했으나, 이에 반하여 영국법은 이것을 오

랫동안 알지 못하고 거기에서는 봉인이 결정적인 설권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

가증권의 근대 상법의 정형이 발전한 것은 대부분 중세의 경과에서 혹은 상업적인

혹은 행정적인 필요의 결과 아라비아와의 협력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생각

건대 고대 시대 로마의 거래는 우리에게 오늘날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중요

한 기술적 수단을 갖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었으며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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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4 24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4절 「계약자유」의 다양한 의미와 그 한계

끝으로 오늘날 원칙적으로 성립한 상태, 즉 계약자유의 제한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약에서 정하는 내용이 어떤 것이건 그것이 당사자 간에서 법을 창조한다는

상태 그리고 계약시에 특별한 방식이 요구되는 것은 단지 법이 합목적적인 이유,

특히 권리들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기 위하여 따라서 법적 안정성을 위하여 강

행적으로 규정하는 경우에만 한한다 라는 상태에 도달한 것은 어디서나 매우 나

중의 일이었다. 로마에서는 법이 점차 국제화됨에 따라서 근대에서는 보통법의 학

설과 상업상의 요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계약이 이렇게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입법은 보통 특별한 제한에 저촉되지 않으면 어떤 사

항을 합의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써는 만족하지

않고, 각종의 특수한 수권규정에 의해서 당사자가 별단의 합의를 하지 않을 때에

는 법정의 효과가 생긴다는 식으로 합의의 개개의 전형을 규정하고 있다(임의법).

이것에 대하여 첫째로 또한 일반적으로 근거를 주고 있는 것은 순수한 합목적성의

견지이다. 즉 당사자는 일반적으로 중요성을 가질지도 모르는 점을 전부 실제로 명

시적으로 정하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또 음미를 마친, 특히 숙지의 전형에 의거

할 수 있는 것은 편의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는 견지이다. 이것 없이는 근대의 법적

거래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수권[80] 규범과 계약자유의 의미는 결코 이

것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는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즉 수권규범에 의한 질서는 – 여기서는 이것을 문제로 삼는데 - 어떤 경우에

는 필연적으로 상호의 개인적 자유의 영역의 단순한 제한이라는 범위를 원칙적으

로 넘어서 확대한다. 왜냐하면 허용된 법률행위에는 보통 그 자체 안에 당해 행

위에 참가하지 아니한 제3자도 구속하는 기능이 당사자들을 위하여 포괄되어 있

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또 어떠한 의미에서 2자 간의 법률행위의 거의 전부는 법

적으로 보장된 처분력의 자유처분에 관한 배분의 모습을 변하게 함으로써 무수

한 제3자에 대한 관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 영향은 언제나 아주 다양한 모습

으로 생긴다. 법률행위는 그것이 체결되는 당사자 간에서만 권리와 의무를 창조하

는 한 일반적으로 순전히 외적인 사실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

면 이 경우에는 사실상 약속된 것이 이행되는 샨스만이 법적으로 보증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 보통 그러한 것처럼 한편으로부터 다른 한편에 소유를

법률행위적으로 양도하는 것이 문제로 되는 한 제3자들의 이해는 종래에도 그들

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했던 객체의 종래와는 다른 소유자들이 이제는 그들이 인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

다. 실제로는 제3자들의 이해에 대한 무관계성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새로운 채무를 부담하는 자에 대한 전체 채권자의 이해는 채무자의 증대하는

부담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또한 토지 매매시의 근린자의 이해는 예컨대 새로

운 소유자가 그때까지의 소유자와는 반대로 토지사용 방법에 있어서 경제적일 수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에 의하여 허용되고

보증된 권리의 사실상의 가능한 반사작용이다. 법질서는 결코 제3자의 이해를 언

제나 무시하지는 않으며, 예컨대 「보다 유력한 자」에의 채권의 양도의 금지는 후기

로마법에서 실증된다. 그런데 제3자의 이익이 계약자유의 이용에 의하여 이와 다

른 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떤

자가 계약에 의하여 「노예신분」에 자기를 매각하고 또는 여자가 혼인계약에 의하

여 「부권」에 복종하는 경우라든가 토지가 「세습재산」으로 되고, 또는 여러 사람이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경우인데 - 이러한 경우에는 이로써 제3자에게 주는 영향

은 순사실적으로는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 정도에서 아주 다양하며, 또한 앞에

든 예에서 보다 적은 일이 많은데, 언제나 그와[81]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생

긴다. 왜냐하면 전자와는 반대로 이 경우에는 그때까지 일정한 사람들 및 재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타당하던 법적 거래에 관한 규칙, 예컨대 계약의 유효성에 관

한 규칙이나 재산객체에 대한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관한 규칙은 계약자의 자유로

운 의사에 법적 효력과 강제의 보장이 인정되는 범위에서는 이러한 합의의 결과 계

약자를 위하여 아주 새롭고 또한 다른 종류의 각각 제3자의 청구권과 샨스까지도

구속하는 특수 규범이 이것에 대신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장래의 모든 노예계약,

처의 계약, 세습재산주로 된 재산보유자의 계약 - 과거의 계약도 역시 종종 그러

하다 - 그리고 새로운 회사를 대표하는 자가 체결하는 일정한 계약은 그 후에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타당하던 규정에 따라 적용할 수 있었던 법명제와는 전연 다

른 법명제, 즉 특별법에 복종한다. 그 경우에 법은 표현하는 법학적 기술이 제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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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4 24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4절 「계약자유」의 다양한 의미와 그 한계

끝으로 오늘날 원칙적으로 성립한 상태, 즉 계약자유의 제한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약에서 정하는 내용이 어떤 것이건 그것이 당사자 간에서 법을 창조한다는

상태 그리고 계약시에 특별한 방식이 요구되는 것은 단지 법이 합목적적인 이유,

특히 권리들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기 위하여 따라서 법적 안정성을 위하여 강

행적으로 규정하는 경우에만 한한다 라는 상태에 도달한 것은 어디서나 매우 나

중의 일이었다. 로마에서는 법이 점차 국제화됨에 따라서 근대에서는 보통법의 학

설과 상업상의 요구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계약이 이렇게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입법은 보통 특별한 제한에 저촉되지 않으면 어떤 사

항을 합의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써는 만족하지

않고, 각종의 특수한 수권규정에 의해서 당사자가 별단의 합의를 하지 않을 때에

는 법정의 효과가 생긴다는 식으로 합의의 개개의 전형을 규정하고 있다(임의법).

이것에 대하여 첫째로 또한 일반적으로 근거를 주고 있는 것은 순수한 합목적성의

견지이다. 즉 당사자는 일반적으로 중요성을 가질지도 모르는 점을 전부 실제로 명

시적으로 정하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또 음미를 마친, 특히 숙지의 전형에 의거

할 수 있는 것은 편의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는 견지이다. 이것 없이는 근대의 법적

거래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수권[80] 규범과 계약자유의 의미는 결코 이

것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는 더 근본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즉 수권규범에 의한 질서는 – 여기서는 이것을 문제로 삼는데 - 어떤 경우에

는 필연적으로 상호의 개인적 자유의 영역의 단순한 제한이라는 범위를 원칙적으

로 넘어서 확대한다. 왜냐하면 허용된 법률행위에는 보통 그 자체 안에 당해 행

위에 참가하지 아니한 제3자도 구속하는 기능이 당사자들을 위하여 포괄되어 있

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또 어떠한 의미에서 2자 간의 법률행위의 거의 전부는 법

적으로 보장된 처분력의 자유처분에 관한 배분의 모습을 변하게 함으로써 무수

한 제3자에 대한 관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그 영향은 언제나 아주 다양한 모습

으로 생긴다. 법률행위는 그것이 체결되는 당사자 간에서만 권리와 의무를 창조하

는 한 일반적으로 순전히 외적인 사실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

면 이 경우에는 사실상 약속된 것이 이행되는 샨스만이 법적으로 보증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 보통 그러한 것처럼 한편으로부터 다른 한편에 소유를

법률행위적으로 양도하는 것이 문제로 되는 한 제3자들의 이해는 종래에도 그들

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했던 객체의 종래와는 다른 소유자들이 이제는 그들이 인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일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

다. 실제로는 제3자들의 이해에 대한 무관계성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새로운 채무를 부담하는 자에 대한 전체 채권자의 이해는 채무자의 증대하는

부담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며, 또한 토지 매매시의 근린자의 이해는 예컨대 새로

운 소유자가 그때까지의 소유자와는 반대로 토지사용 방법에 있어서 경제적일 수

있는가의 여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법에 의하여 허용되고

보증된 권리의 사실상의 가능한 반사작용이다. 법질서는 결코 제3자의 이해를 언

제나 무시하지는 않으며, 예컨대 「보다 유력한 자」에의 채권의 양도의 금지는 후기

로마법에서 실증된다. 그런데 제3자의 이익이 계약자유의 이용에 의하여 이와 다

른 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떤

자가 계약에 의하여 「노예신분」에 자기를 매각하고 또는 여자가 혼인계약에 의하

여 「부권」에 복종하는 경우라든가 토지가 「세습재산」으로 되고, 또는 여러 사람이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경우인데 - 이러한 경우에는 이로써 제3자에게 주는 영향

은 순사실적으로는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 정도에서 아주 다양하며, 또한 앞에

든 예에서 보다 적은 일이 많은데, 언제나 그와[81]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생

긴다. 왜냐하면 전자와는 반대로 이 경우에는 그때까지 일정한 사람들 및 재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타당하던 법적 거래에 관한 규칙, 예컨대 계약의 유효성에 관

한 규칙이나 재산객체에 대한 채권자의 강제집행에 관한 규칙은 계약자의 자유로

운 의사에 법적 효력과 강제의 보장이 인정되는 범위에서는 이러한 합의의 결과 계

약자를 위하여 아주 새롭고 또한 다른 종류의 각각 제3자의 청구권과 샨스까지도

구속하는 특수 규범이 이것에 대신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장래의 모든 노예계약,

처의 계약, 세습재산주로 된 재산보유자의 계약 - 과거의 계약도 역시 종종 그러

하다 - 그리고 새로운 회사를 대표하는 자가 체결하는 일정한 계약은 그 후에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타당하던 규정에 따라 적용할 수 있었던 법명제와는 전연 다

른 법명제, 즉 특별법에 복종한다. 그 경우에 법은 표현하는 법학적 기술이 제3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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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6 24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의 이해에의 영향과 특별법의 의미를 불분명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예컨대 주

식회사가 법률상 명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자본」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주식회

사가 이 자본을 일정한 제한 아래 주주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감소할 수 있다는 것

은 실제상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 즉 법률상 이러한 종류의 목적단체를 합의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소유에 근거하는 재화나 채권으로부터 「채무」를 제하고 남는 일

정한 나머지가 채권자나 후에 이 단체에 가입하는 주주를 위해서 항구적으로 존

재한다는 것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배당해야할 「이익」을 계상할 때

에 이사나 기타 여기에 관여하는 주주는 형사상의 법적 효과의 위협에 의하여 그

들의 위의 선언에 구속되어 그의 구속의 내용으로써 이익의 배당이 허용되는 것은

그 당시 위의 「자본」으로써 선언된 액이 적절한 평가나 기장의 규칙을 적용할 때에

(물적 재화나 채권이) 여전히 존재할 때에만 한한다. 그러나 일정한 제한 아래 그

때그때에 관여하는 주주가 위의 선언을 철회하고 따라서 채권자나 후에 개입하는

주주에 대해서 이것에 대응하는 보장도 감소시키는 것, 즉 당초에 선언한 액수에

해당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익을 배당할 수가 있다. 「주식회사」

를 설립하는 가능성은 이러한 권능을 수여하는 특별규칙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인

데 그것이 주주의 현원에 속하지 않는 제3자, 즉 채권자 또는 그 후의 주식취득자

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모습은 질적으로 아주 특수한 것임은 분명하다. 또 노예는

그의 신분으로 되자 동시에 제3자에 대한 계약능력의 제한을 받으며, 또한 예컨대

여성이 처가 되면 동시에 일반저당권이 생기고 여러 법에 의하면 처가 남편의 재

산상에 이것을 취득하고, 그 이전에 발생한 질권으로 담보된 의무에 우선하는 일

[82]까지도 있는데, 이러한 제한 또는 일반저당에 관해서도 물론 같이 말할 수 있

다. 다음으로 제3자의 법 상태에 주는 이러한 종류의 영향이 거의 전체 법률행위

의 결과로서 어느 정도로서 관련인의 범위를 넘어서 생길 수 있는 「반사작용」 이상

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영향은 이것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 타당할 법의 규칙에 반하는 것이니까. 이 대립하는 둘은 유동적으로 이행

함으로서 결부하고 있으나 어느 정도에서 그러한가에 관해서는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여하튼 「계약자유」는 계약체결자의 내부관계를 넘어서 미치는 효력이

단지 반대적일 뿐만 아니라 특수한 특별법에 의하여 생기는 것과 같은 법률행위를

유효하게 또 제3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규정 - 그러한 규정은 비교적 적은데 -에

의한 제한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권능을 준다는 의미에서 단지 구체적 행위를 임의

로 하는가의 여부를 승인한다는 의미만의 「자유권」을 주는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다른 한 편 법은 합의에 관여하지 않는 자의 이해에 직접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

는 것처럼 보이며, 적어도 그 합의가 없을 경우에 행해지는 법에 대한 아무런 특별

규칙도 포괄하지 않는 합의 또는 제3자에게 이익만을 주고 아무런 손해를 가하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는 합의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일도 있다. 계약의 자유

에 이러한 제한이 가해지는 이유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즉 고전기의 로마법에서

는 특별법의 형식으로 직접 제3자의 이익에 영향을 주고 변칙적인 법을 구성하는

형식의 유한책임(주식회사와 이에 유사한 것)이나, 합명회사의 특별규범(연대책임

과 고유재산)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컨대 단지 반사적으로 제3자

에게 작용을 하는 데에 불과한 영구정기금의 설정의 가능성, 즉 예컨대 정기금매

매나 영차권관계도 인정하지 않았다(영차권관계에 관해서는 적어도 사인에게는 그

러하였다. - 소작지 제도는 당초에는 도시만이 이것을 설정할 수 있고, 후에 이르

러 비로소 사인인 지주에게도 그 설정이 인정되었다). 또 고전기 로마법에서는 무

기명증권이나 지시증권은 알지 못했고 당초에는 제3자에게 채권을 양도하는 것까

지도 허용되지 않았다. 또 특수근대적인 법에서도 예컨대 노예에 유사한 인적 관

계에 복종하는 것, 따라서 특별법을 포함하는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컨대 독일에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로마법과 아주 동일하게 토지에 대

하여 영구정기금의 부담을 설정하는 것까지도 전부 허용하지 않았다(현재에는 일

정한 요건 아래 허용한다). 특수근대적인 법에서는 또 특별법에 의해서도 반사적

으로도 제[83]3자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 없으며, 고대 시대에는 전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다수의 계약이 「양속위반」이라고 하여 무효인 합의의 각인이 찍

힌다. 특히 예컨대 고대 이집트에서는 성적 관계에 관해서는 거의 완전한 계약자유

가 행하여 졌었는데 이 성적 관계에 관한 개별적인 합의가 현재 그것만이 허용되

는 적법한 혼인을 위하여 배제되게 되었고, 다른 가족법적인 약정들, 즉 부권(父權)

이나 부권(夫權)에 관해서 고대 시대에 숙지되었던 대개의 합의도 위와 같다.

그런데 계약자유의 한계가 이렇게 때에 따라 다르다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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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6 24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의 이해에의 영향과 특별법의 의미를 불분명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예컨대 주

식회사가 법률상 명확하게 표시할 수 있는 「자본」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주식회

사가 이 자본을 일정한 제한 아래 주주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감소할 수 있다는 것

은 실제상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 즉 법률상 이러한 종류의 목적단체를 합의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소유에 근거하는 재화나 채권으로부터 「채무」를 제하고 남는 일

정한 나머지가 채권자나 후에 이 단체에 가입하는 주주를 위해서 항구적으로 존

재한다는 것을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배당해야할 「이익」을 계상할 때

에 이사나 기타 여기에 관여하는 주주는 형사상의 법적 효과의 위협에 의하여 그

들의 위의 선언에 구속되어 그의 구속의 내용으로써 이익의 배당이 허용되는 것은

그 당시 위의 「자본」으로써 선언된 액이 적절한 평가나 기장의 규칙을 적용할 때에

(물적 재화나 채권이) 여전히 존재할 때에만 한한다. 그러나 일정한 제한 아래 그

때그때에 관여하는 주주가 위의 선언을 철회하고 따라서 채권자나 후에 개입하는

주주에 대해서 이것에 대응하는 보장도 감소시키는 것, 즉 당초에 선언한 액수에

해당하는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익을 배당할 수가 있다. 「주식회사」

를 설립하는 가능성은 이러한 권능을 수여하는 특별규칙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인

데 그것이 주주의 현원에 속하지 않는 제3자, 즉 채권자 또는 그 후의 주식취득자

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모습은 질적으로 아주 특수한 것임은 분명하다. 또 노예는

그의 신분으로 되자 동시에 제3자에 대한 계약능력의 제한을 받으며, 또한 예컨대

여성이 처가 되면 동시에 일반저당권이 생기고 여러 법에 의하면 처가 남편의 재

산상에 이것을 취득하고, 그 이전에 발생한 질권으로 담보된 의무에 우선하는 일

[82]까지도 있는데, 이러한 제한 또는 일반저당에 관해서도 물론 같이 말할 수 있

다. 다음으로 제3자의 법 상태에 주는 이러한 종류의 영향이 거의 전체 법률행위

의 결과로서 어느 정도로서 관련인의 범위를 넘어서 생길 수 있는 「반사작용」 이상

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영향은 이것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 타당할 법의 규칙에 반하는 것이니까. 이 대립하는 둘은 유동적으로 이행

함으로서 결부하고 있으나 어느 정도에서 그러한가에 관해서는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기로 한다. 여하튼 「계약자유」는 계약체결자의 내부관계를 넘어서 미치는 효력이

단지 반대적일 뿐만 아니라 특수한 특별법에 의하여 생기는 것과 같은 법률행위를

유효하게 또 제3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규정 - 그러한 규정은 비교적 적은데 -에

의한 제한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권능을 준다는 의미에서 단지 구체적 행위를 임의

로 하는가의 여부를 승인한다는 의미만의 「자유권」을 주는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다른 한 편 법은 합의에 관여하지 않는 자의 이해에 직접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

는 것처럼 보이며, 적어도 그 합의가 없을 경우에 행해지는 법에 대한 아무런 특별

규칙도 포괄하지 않는 합의 또는 제3자에게 이익만을 주고 아무런 손해를 가하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는 합의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일도 있다. 계약의 자유

에 이러한 제한이 가해지는 이유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즉 고전기의 로마법에서

는 특별법의 형식으로 직접 제3자의 이익에 영향을 주고 변칙적인 법을 구성하는

형식의 유한책임(주식회사와 이에 유사한 것)이나, 합명회사의 특별규범(연대책임

과 고유재산)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컨대 단지 반사적으로 제3자

에게 작용을 하는 데에 불과한 영구정기금의 설정의 가능성, 즉 예컨대 정기금매

매나 영차권관계도 인정하지 않았다(영차권관계에 관해서는 적어도 사인에게는 그

러하였다. - 소작지 제도는 당초에는 도시만이 이것을 설정할 수 있고, 후에 이르

러 비로소 사인인 지주에게도 그 설정이 인정되었다). 또 고전기 로마법에서는 무

기명증권이나 지시증권은 알지 못했고 당초에는 제3자에게 채권을 양도하는 것까

지도 허용되지 않았다. 또 특수근대적인 법에서도 예컨대 노예에 유사한 인적 관

계에 복종하는 것, 따라서 특별법을 포함하는 계약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컨대 독일에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로마법과 아주 동일하게 토지에 대

하여 영구정기금의 부담을 설정하는 것까지도 전부 허용하지 않았다(현재에는 일

정한 요건 아래 허용한다). 특수근대적인 법에서는 또 특별법에 의해서도 반사적

으로도 제[83]3자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 없으며, 고대 시대에는 전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다수의 계약이 「양속위반」이라고 하여 무효인 합의의 각인이 찍

힌다. 특히 예컨대 고대 이집트에서는 성적 관계에 관해서는 거의 완전한 계약자유

가 행하여 졌었는데 이 성적 관계에 관한 개별적인 합의가 현재 그것만이 허용되

는 적법한 혼인을 위하여 배제되게 되었고, 다른 가족법적인 약정들, 즉 부권(父權)

이나 부권(夫權)에 관해서 고대 시대에 숙지되었던 대개의 합의도 위와 같다.

그런데 계약자유의 한계가 이렇게 때에 따라 다르다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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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8 24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일정한 수권을 결여한 이유는 혹은 그 제도를 법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그 시대의

거래기술상 아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구할 수 있다. 고대 시

대의 로마법, 더 신중하게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로마법에 무기명증권, 지시증권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위의 이유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외

형상 동종의 증서가 고대기 그것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미 미지의 것은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자본주의인 이익사회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 관

해서도 같다. 이것에 대응하는 것은 고대기의 국가자본주의적인 결합들에서 발견

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고대 자본주의가 주요점에 있어서 국가에 의하여 생명

을 보존했던 것에 의한다. 그러나 과거에 어떤 법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

를 전적으로 경제적인 필요가 없었다는 데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법이 그 보장을

주어야할 합리적이고 법기술적인 거래상의 범형은 오히려 공업기술상의 조처와 꼭

마찬가지로 이것을 현실로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먼저 이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법질서의 특수한 법기술적 개성이나 법질서

가 사용하는 사고형식의 모습은 특정한 법제도가 그 안에서 발명될 샨스에 대해

서 보통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경제적인 사정은 단순히

자동적으로 새로운 법형식을 자신이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 단지 어떤 법기술적 발

명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보급하는데 대한 샨스를 포괄하는데 불과하다. 현

대의 특히 특수자본주의적인 법제도 중의 대단히 많은 것이 중세에 기원을 가지고

로마법에 그의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 그런데 실제로는 로마법 쪽이 논리적

인 점에서 중세법보다 본래 훨씬 강력하게 합리화되어 있었다 - 에는 약간의 경제

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기는 하나 동시에 다양한 순수한 법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서양 중세법의 사고형식, 즉 서양 중세법이 예컨대 증서를 순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증거방법으로서 생각하[84]지 않고 이것을 전적으로 직관적으로 (시초는 마술적으

로) 권리를 각지할 수 있는 「담당자」(Träger)로 생각했다는 것 - 이것은 일종의 법

학적인 「애니미즘」이다 - 이라든지 또 법적 분권주의의 결과로서 생긴 것인데 어떤

범위의 협동체라도 그 구성원에 관해서 대외적으로 연대책임을 지는 방향이라든

지, 또한 전체 분야에서 특별재단을 분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 이 양자는

일정한 정치적 조건에 근거해서만 설명되는데 - 들이 그것인데 이러한 논리적이고

국가기구적인 법발전의 이러한 정체성에 의해서만 아주 윤리적이고 기술적·정책

적으로 합리화되었던 로마법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 보다 광범위하게 실제로 유용

한 법기술적 범형들이 상거래상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일반적

으로 볼 수 있는 바인데 - 특히 중세의 상거래법상의 제도처럼 - 생성 중의 근대

자본주의에 특히 적합하였던 저 특별한 형태들은 일반적으로 다수의 전적으로 구

체적인 일정한 범위의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따르는 특별법을 정책적인 이유에 근거

하여 산출하는 사회를 기초로 하는 것이 대략적으로 보다 용이하게 발전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다음과 같은 사정도 이와 함께 힘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아직 논리적으로 합리화되지 아니한 서양 중세법은 법률가가 자신이 준비한 개

념으로 「구성할 수」 없고, 따라서 「사고할 수」 없는 것은 법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

다는 법의 특수 「과학적」 취급원리를 아직 몰랐던 것이다. 사실 법합리주의는 사정

에 따라서는 법의 부당한 형식들의 「빈혈」을 의미하고 있다 - 오늘날 이러한 견해

가 자칫하면 너무 과장되는데-. 또한 예컨대 대개의 근대법에 특유한 친족사건에

있어서의 계약자유의 배제와 제한 또 계약에 의하여 노예로 되는 것의 금지 같은

계약자유에 대한 다른 제한들은 주로 윤리적 또는 정책적인 이익과 관념에 의하는

것이다.

성적인 계약자유는 결코 원시적인 것은 아니다. 도구의 이용에 있어 가장 미

개한 또 사회적 및 경제적으로 가장 적은 정도로만 복잡화한 종족은 사실상 일

생 계속하는 동일 가족 내에서의 다부다처의 생활을 영위한다. 족내혼(族內婚,

Endogamie)을 피한다는 것은 분명히 가장 좁은 범위에서 가공동체의 내부에 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은 공동의 양육에 의한 성행동의 상대적인 저하와 관련한다.

자기의 자매를 상대방의 자매와 교환한다는 것은 최고의 성적 계약이라 할 수 있

는데 그 후에 이 교환으로부터 여자들이 속하는 씨족이 하는 여자와 농산물과의

교환 그리고 끝으로 통상의 혼인형태인 가녀(嫁女)매매가 발전하였으며, 가녀매매

는 예컨대 인도에서는 로마에서 그러했[85]던 것처럼 귀족의 혼인체결인 약탈혼이

나 종교혼과 함께 특히 평민의 혼인체결방식인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약탈혼과

종교혼은 사회적인 단체형성으로부터 생겨난 두 개의 산물인 것이다. 즉, 약탈혼

은 군사적인 남자만으로의 집단형성에 의하여 젊은 남자가 가공동체로부터 빠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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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48 24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일정한 수권을 결여한 이유는 혹은 그 제도를 법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그 시대의

거래기술상 아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구할 수 있다. 고대 시

대의 로마법, 더 신중하게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로마법에 무기명증권, 지시증권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위의 이유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외

형상 동종의 증서가 고대기 그것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미 미지의 것은 아

니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자본주의인 이익사회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에 관

해서도 같다. 이것에 대응하는 것은 고대기의 국가자본주의적인 결합들에서 발견

할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고대 자본주의가 주요점에 있어서 국가에 의하여 생명

을 보존했던 것에 의한다. 그러나 과거에 어떤 법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

를 전적으로 경제적인 필요가 없었다는 데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법이 그 보장을

주어야할 합리적이고 법기술적인 거래상의 범형은 오히려 공업기술상의 조처와 꼭

마찬가지로 이것을 현실로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먼저 이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법질서의 특수한 법기술적 개성이나 법질서

가 사용하는 사고형식의 모습은 특정한 법제도가 그 안에서 발명될 샨스에 대해

서 보통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경제적인 사정은 단순히

자동적으로 새로운 법형식을 자신이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 단지 어떤 법기술적 발

명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보급하는데 대한 샨스를 포괄하는데 불과하다. 현

대의 특히 특수자본주의적인 법제도 중의 대단히 많은 것이 중세에 기원을 가지고

로마법에 그의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 - 그런데 실제로는 로마법 쪽이 논리적

인 점에서 중세법보다 본래 훨씬 강력하게 합리화되어 있었다 - 에는 약간의 경제

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기는 하나 동시에 다양한 순수한 법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서양 중세법의 사고형식, 즉 서양 중세법이 예컨대 증서를 순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증거방법으로서 생각하[84]지 않고 이것을 전적으로 직관적으로 (시초는 마술적으

로) 권리를 각지할 수 있는 「담당자」(Träger)로 생각했다는 것 - 이것은 일종의 법

학적인 「애니미즘」이다 - 이라든지 또 법적 분권주의의 결과로서 생긴 것인데 어떤

범위의 협동체라도 그 구성원에 관해서 대외적으로 연대책임을 지는 방향이라든

지, 또한 전체 분야에서 특별재단을 분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 이 양자는

일정한 정치적 조건에 근거해서만 설명되는데 - 들이 그것인데 이러한 논리적이고

국가기구적인 법발전의 이러한 정체성에 의해서만 아주 윤리적이고 기술적·정책

적으로 합리화되었던 로마법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 보다 광범위하게 실제로 유용

한 법기술적 범형들이 상거래상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일반적

으로 볼 수 있는 바인데 - 특히 중세의 상거래법상의 제도처럼 - 생성 중의 근대

자본주의에 특히 적합하였던 저 특별한 형태들은 일반적으로 다수의 전적으로 구

체적인 일정한 범위의 이해관계인의 이익에 따르는 특별법을 정책적인 이유에 근거

하여 산출하는 사회를 기초로 하는 것이 대략적으로 보다 용이하게 발전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히 다음과 같은 사정도 이와 함께 힘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아직 논리적으로 합리화되지 아니한 서양 중세법은 법률가가 자신이 준비한 개

념으로 「구성할 수」 없고, 따라서 「사고할 수」 없는 것은 법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

다는 법의 특수 「과학적」 취급원리를 아직 몰랐던 것이다. 사실 법합리주의는 사정

에 따라서는 법의 부당한 형식들의 「빈혈」을 의미하고 있다 - 오늘날 이러한 견해

가 자칫하면 너무 과장되는데-. 또한 예컨대 대개의 근대법에 특유한 친족사건에

있어서의 계약자유의 배제와 제한 또 계약에 의하여 노예로 되는 것의 금지 같은

계약자유에 대한 다른 제한들은 주로 윤리적 또는 정책적인 이익과 관념에 의하는

것이다.

성적인 계약자유는 결코 원시적인 것은 아니다. 도구의 이용에 있어 가장 미

개한 또 사회적 및 경제적으로 가장 적은 정도로만 복잡화한 종족은 사실상 일

생 계속하는 동일 가족 내에서의 다부다처의 생활을 영위한다. 족내혼(族內婚,

Endogamie)을 피한다는 것은 분명히 가장 좁은 범위에서 가공동체의 내부에 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은 공동의 양육에 의한 성행동의 상대적인 저하와 관련한다.

자기의 자매를 상대방의 자매와 교환한다는 것은 최고의 성적 계약이라 할 수 있

는데 그 후에 이 교환으로부터 여자들이 속하는 씨족이 하는 여자와 농산물과의

교환 그리고 끝으로 통상의 혼인형태인 가녀(嫁女)매매가 발전하였으며, 가녀매매

는 예컨대 인도에서는 로마에서 그러했[85]던 것처럼 귀족의 혼인체결인 약탈혼이

나 종교혼과 함께 특히 평민의 혼인체결방식인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약탈혼과

종교혼은 사회적인 단체형성으로부터 생겨난 두 개의 산물인 것이다. 즉, 약탈혼

은 군사적인 남자만으로의 집단형성에 의하여 젊은 남자가 가공동체로부터 빠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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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9: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250 25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오고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모자집단(Muttergruppe)으로서 일단으로 된 결과이

다. 남자의 집(Männehaus)에서는 가녀의 약탈은 가녀를 손에 넣는 영웅적인 방법

으로 되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남자가 외부로부터 가녀를 매수하는 것은 이와 병

행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이 외부로부터의 가녀의 약탈과 결부하여 여자 교환의 협

정을 만들어 동시에 아마 족외혼(Exogamie)을 성립시키는 동기로 될 것이다. 족

외혼은 일정한 종류의 아미즘적인 관념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졌던 곳에서는, 특히

원초적으로는 그의 종족(Phratrien)이 동시에 수렵단체였으며 이제는 종교적인 양

식을 수반하는 마술적인 예배공동체로 된 부족들에서는 토템적인 규율에 복종하

였다. 종족이 그렇게까지 발전하지 않고 또는 종족이 멸망하면 할수록 그 만큼 많

이 가부장적인 혼인이 전면화하고 수장 명망가에 속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일부

다처로서 나타났는데, 그 때에 가장은 가내자 전부에 대하여 종종 전적으로 자유

로운 지배를 하고 가내자를 마음대로 또는 전적으로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또는

씨족이 여전히 강력한 곳에서는 교환거래를 통하여 씨족의 구성원에게 그 수확의

일부를 급부함으로써 이것을 이용했다. 이러한 수장의 지배에 대하여 제한을 가

하는 것은 시초에는 가녀의 씨족이었다. 즉 유력한 생가는 그의 딸들을 노동가축

으로서 자유로운 처분에 복종시키기 위하여 판다는 것은 하지 않고 딸들의 일신

의 보장과 또 그들의 아이들에 대하여 다른 부녀나 여노예들의 아이들에게 우월

하는 지위가 주어질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그의 딸들을 외부에 주었다. 이 때문에

생가는 딸을 출가시킬 때에는 가자(嫁資)를 이들에게 주었고 여기에 정처와 가출

자, 즉 정식혼인의 메르크말이 성립한 것이다. 가자와 처의 항구적인, 부양 그가 받

을 과부부조금 그리고 위약금에 관한 서면계약 및 그의 아이들의 법적 지위에 관

한 협정이 다른 성적인 결합 전체에 대해서 완전한 가치가 있는 혼인인 것의 특징

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성적인 자유계약도 이제는 아주 다양한 형식과 정

도로서 전개하게 되었다. 봉사혼, 시험혼이나 일시적인 향락혼이 나타나 양가집

의 자녀들까지도 가부장제적인 부권에 복종하려는 것을 피하려 하고, 또 그것으로

부터 이탈하려고 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온갖 형식의 본래의 매음(Prostitution),

즉 의연하게 혼인에 특수적인 것인 경제적 항구부양과는 반대로 구체적인 대가를

얻고 에로틱한 서비스를 하는 것도 행하여졌다. 이성간 및 동성의 매음은 이에 대

하여 보수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 때로부터였다. 그 반면에 이러한 보수를 얻는 것

을 파렴치로 하지 않았던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출자를 만들려는 군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정식 혼인을 특별히 윤리적 및 정치적으로 존

중함으로써 매음을 파렴치로 하는 경향은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이로써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혼인과 매음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서 특히 귀족에 있어서

는 내연(Konkubinat)이 있었으나 이것은 여노예 또는 첩과의 또는 그리스의 유녀

(Hetären), 인도의 무기(Bajaderen) 그리고 이에 유사한 혼인으로 속박을 받지 않

는 여자들과의 계속적인 성적 관계이며, 예식을 거치지 않고, 또는 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로이」 부부생활에 들어가는 성적 관계이다. 이러한 부부생활에서

생긴 아이들의 지위는 정처 아이들의 독점권에 의하여 방해당하지 않는 범위에서

대개는 부의 임의에 맡겨졌다.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엄격한 제한을 둔 것은 시민단

체이다. 그것은 고대기의 민주제에 의하여 특히 강력하게 실현된 정치적·경제적인

시민우선권을 남녀시민의 자제들을 위하여 보류한 것이다. 또 예언자의 종교도 다

른 데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 성적인 계약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고대 이집트

에서 성적인 계약자유가 인정된 것은 국민에게 정치상의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에 의하는데, 이와 반대로 고대 로마법은 혼인 및 일정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내

연을 제외한 전체 성적 관계를 오욕원인(causae turpes)으로서 배척하고 있다. 내

연은 소수의 법에 의하여 준혼으로서 인정되었으나 서양에서는 마지막 라테란회의

(Laterankonzil[1516])에 의해서, 또 그 후 종교개혁에 의해서 마침내 폐기되었다.

이에 대한 부의 자유로운 처분권은 먼저 주로 종교법적으로 그 후 군사적 및 정책

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마지막에는 윤리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점차로 제한이 가해

져 결국에는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어떠한 의미에서의 성적인 계약자유에로의 귀환은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훨씬

가능성이 적다. 많은 여성은 가장 성적 매력이 많은 여성들의 경제적 샨스를 다른

여성들의 불이익으로서 강력하게 증가시키는 - 그것은 이집트의 문헌에서 추론

할 수 있는데 - 남자를 둘러싼 성적 경쟁의 자유에 대해서 항의할 것이다. 또 모

든 전통적인 윤리적 힘들, 특히 교회도 거기에 반대할 것이다. 물론 적법한 혼인 내

에서도 부부재산제에서의 경제적으로 아주 자유롭고 보장된 처의 지위와 결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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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0: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250 25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오고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모자집단(Muttergruppe)으로서 일단으로 된 결과이

다. 남자의 집(Männehaus)에서는 가녀의 약탈은 가녀를 손에 넣는 영웅적인 방법

으로 되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남자가 외부로부터 가녀를 매수하는 것은 이와 병

행하여 이루어졌고 그것이 외부로부터의 가녀의 약탈과 결부하여 여자 교환의 협

정을 만들어 동시에 아마 족외혼(Exogamie)을 성립시키는 동기로 될 것이다. 족

외혼은 일정한 종류의 아미즘적인 관념이 일반적으로 행하여졌던 곳에서는, 특히

원초적으로는 그의 종족(Phratrien)이 동시에 수렵단체였으며 이제는 종교적인 양

식을 수반하는 마술적인 예배공동체로 된 부족들에서는 토템적인 규율에 복종하

였다. 종족이 그렇게까지 발전하지 않고 또는 종족이 멸망하면 할수록 그 만큼 많

이 가부장적인 혼인이 전면화하고 수장 명망가에 속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일부

다처로서 나타났는데, 그 때에 가장은 가내자 전부에 대하여 종종 전적으로 자유

로운 지배를 하고 가내자를 마음대로 또는 전적으로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또는

씨족이 여전히 강력한 곳에서는 교환거래를 통하여 씨족의 구성원에게 그 수확의

일부를 급부함으로써 이것을 이용했다. 이러한 수장의 지배에 대하여 제한을 가

하는 것은 시초에는 가녀의 씨족이었다. 즉 유력한 생가는 그의 딸들을 노동가축

으로서 자유로운 처분에 복종시키기 위하여 판다는 것은 하지 않고 딸들의 일신

의 보장과 또 그들의 아이들에 대하여 다른 부녀나 여노예들의 아이들에게 우월

하는 지위가 주어질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그의 딸들을 외부에 주었다. 이 때문에

생가는 딸을 출가시킬 때에는 가자(嫁資)를 이들에게 주었고 여기에 정처와 가출

자, 즉 정식혼인의 메르크말이 성립한 것이다. 가자와 처의 항구적인, 부양 그가 받

을 과부부조금 그리고 위약금에 관한 서면계약 및 그의 아이들의 법적 지위에 관

한 협정이 다른 성적인 결합 전체에 대해서 완전한 가치가 있는 혼인인 것의 특징

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성적인 자유계약도 이제는 아주 다양한 형식과 정

도로서 전개하게 되었다. 봉사혼, 시험혼이나 일시적인 향락혼이 나타나 양가집

의 자녀들까지도 가부장제적인 부권에 복종하려는 것을 피하려 하고, 또 그것으로

부터 이탈하려고 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온갖 형식의 본래의 매음(Prostitution),

즉 의연하게 혼인에 특수적인 것인 경제적 항구부양과는 반대로 구체적인 대가를

얻고 에로틱한 서비스를 하는 것도 행하여졌다. 이성간 및 동성의 매음은 이에 대

하여 보수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 때로부터였다. 그 반면에 이러한 보수를 얻는 것

을 파렴치로 하지 않았던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출자를 만들려는 군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정식 혼인을 특별히 윤리적 및 정치적으로 존

중함으로써 매음을 파렴치로 하는 경향은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이로써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혼인과 매음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서 특히 귀족에 있어서

는 내연(Konkubinat)이 있었으나 이것은 여노예 또는 첩과의 또는 그리스의 유녀

(Hetären), 인도의 무기(Bajaderen) 그리고 이에 유사한 혼인으로 속박을 받지 않

는 여자들과의 계속적인 성적 관계이며, 예식을 거치지 않고, 또는 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로이」 부부생활에 들어가는 성적 관계이다. 이러한 부부생활에서

생긴 아이들의 지위는 정처 아이들의 독점권에 의하여 방해당하지 않는 범위에서

대개는 부의 임의에 맡겨졌다.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엄격한 제한을 둔 것은 시민단

체이다. 그것은 고대기의 민주제에 의하여 특히 강력하게 실현된 정치적·경제적인

시민우선권을 남녀시민의 자제들을 위하여 보류한 것이다. 또 예언자의 종교도 다

른 데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 성적인 계약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고대 이집트

에서 성적인 계약자유가 인정된 것은 국민에게 정치상의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에 의하는데, 이와 반대로 고대 로마법은 혼인 및 일정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내

연을 제외한 전체 성적 관계를 오욕원인(causae turpes)으로서 배척하고 있다. 내

연은 소수의 법에 의하여 준혼으로서 인정되었으나 서양에서는 마지막 라테란회의

(Laterankonzil[1516])에 의해서, 또 그 후 종교개혁에 의해서 마침내 폐기되었다.

이에 대한 부의 자유로운 처분권은 먼저 주로 종교법적으로 그 후 군사적 및 정책

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마지막에는 윤리적인 이유에 근거하여 점차로 제한이 가해

져 결국에는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어떠한 의미에서의 성적인 계약자유에로의 귀환은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훨씬

가능성이 적다. 많은 여성은 가장 성적 매력이 많은 여성들의 경제적 샨스를 다른

여성들의 불이익으로서 강력하게 증가시키는 - 그것은 이집트의 문헌에서 추론

할 수 있는데 - 남자를 둘러싼 성적 경쟁의 자유에 대해서 항의할 것이다. 또 모

든 전통적인 윤리적 힘들, 특히 교회도 거기에 반대할 것이다. 물론 적법한 혼인 내

에서도 부부재산제에서의 경제적으로 아주 자유롭고 보장된 처의 지위와 결합하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81: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252 25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여 이혼이 완전히 자유롭고 또한 아주 쉽다는 것에 의하여 성적인 계약자유와 유

사한 상태가 오게 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이혼의 자유 또는 용이성은 정도

의 차이는 있지만 후기 로마법·회교의 법·유태법·근대 미국법 또한 일시적으로

는 합리주의적인 자연법의 계약이론 그리고 인구정책적 고려에 의해서 영향을 받

은 18세기의 입법들에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다종다양하였다.

다만 로마와 미국에서만 이혼이 법적으로 자유인 것과 일치하여 실제상으로도 때

때로 성행된데 불과하다. 이혼의 자유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여러 가지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로마의 여성처럼 미국의 여성도 가정과 사회 내에서의 고정

적인 세력 있는 사회적 지위를 기초로 하여 경제적 자유 및 이혼의 자유를 획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다수의 이탈리아의 여성은 전통에 구속되

어 있기 때문에 아주 최근[제1차 대전 이전-편자]까지도 이혼의 자유는 이들 여

성의 경제적 부양, 특히 고령을 위한 이러한 부양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 이것

은 말하자면 상당히 연로한 노동자를 실직의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것이다. 이로

써 그 위에 또 아마도 남성을 둘러싼 성적 매력의 경쟁이 격화한다는 불안으로부

터도 기피되었다. 또 남성과 여성에 있어서 혼인이 권위에 근거하여 형식으로 구

속되고, 특히 형식적으로는 해소할 수가 없다는 것을 편호하는 것은 자기의 성생

활의 경향이 방탕한 것과 병행하거나, 또는 바로 이와는 반대로 특히 남성 측에서

의 이러한 편호는 정력감퇴 혹은 편의주의를 원인으로 처에게 일시적인 부정을 허

용하는 것과 병행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인 것이 보통이다. 또 부르주아적인 여론

에서의 이혼의 자유를 거부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대개 자녀의 교육의 샨스를 실

제로 위태롭게 하는 것 또는 그렇게 추측하는 것, 그와 함께 특히 남성 측의 권위

적 본능이며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해방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단순한 성적 허영

(Geschlechtseitelkeit) 또는 가정 내에서의 입장에 대한 고려이다. 또 정치적 및

신정적 권력의 구성적 지배에 관한 이해가 바로 계약사회 내에서의 생활합리화의

결과 증대한 다음과 같은 관념에 의하여 강화되어 이혼의 자유를 거부하는 요소

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가정의 형식적인 단결이 바로 대개는 상당히 애매하게가 아

니고는 관념할 수 없는 어떤 비합리적인 가치의 원천일 수 있거나 초개인적 결합 -

이것을 갈망하는 약한 개개인의 그것 - 의 지지물일 수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리

하여 이혼의 자유에 반대하는 이들 전부의 상당히 이질적인 이유들이 최근의 세

대(제1차 세계대전 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이혼의 자유에 대한 적대시 또한 부분

적이나 부부간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적대시까지도 가져왔다.

경제적인, 보통은 가족 내부에서의 처분, 즉 유언분야에서의 처분의 자유도 근

대에서 이러한 자유를 제거하고 또는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을 경험하였다.

여기서는 종의(終意)처분 성립의 형식적인 법제사에 관해서는 추구하지 않는다. 유

언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실질적으로 자유였다는 것은 역사상 단 두 번 증

명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공화제 시대의 로마와 영국법이다. 양자의 경우에서, 즉

강력하게 확대된 민족이며 또 다 같이 토지를 소유하는 명망가층에 의하여 통치

된 민족에서 이다. 그리고 오늘날 실제로 유언의 자유가 적용되고 있는 토지구역

은 경제적 샨스의 가장 혜택이 있는 영역, 즉 미국이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유언

의 자유는 상속으로부터 폐제된 상속인에게 정복지에서 생계를 할 수 있는 샨스

를 기대시킨 확장정책, 그것은 전쟁을 수단으로 했는데 더불어 생장하여 식민시

대가 종말에 가까웠을 시대에 유언에 관한 그리스법에서 계수된 비공식적인 실무

(Inoffiziositätspraxis)에 의해서 소멸하였다. 영국법에서는 유언의 자유는 대가

족의 재산보전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유언의 자유와 바로 대립하는

제도, 즉 토지투자, 장자상속, 가족이 승계하는 부동산처분도 다른 방법으로서 이

러한 재산보전에 봉사할 수가 있었다. 근대의 민주적인 입법들에서는 고도의 유류

분에 의해서 유언의 자유를 제거 내지 제한하는 것, 또한 프랑스 법전에서 진정한

분할강제에 까지 높여진 부동산 단독상속의 저지는 특히 정책적으로 조건이 지워

진 것이었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프랑스법전에 관해서 말하면 나폴레옹은 새로운

귀족정치의 담당자로서 봉토를 창설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그의 법전의 채택이 사회적인 권력분배의 방법을 정부의 수중에 장악하는 것이라

고 단언한 것은 이 후자의 제도에 연관된 것이다.

형식상 노예에 유사한 관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까지도 금지함으로써 노

예제도가 억압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특히 노예의

노동이 생계비용의 고가 때문에 이윤을 낳지 못하는 영역에로 경제적으로 세계

를 지배하는 중점이 이행한 것이다. 또 그와 함께 해고와 실업의 샨스로서 위협하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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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2 25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여 이혼이 완전히 자유롭고 또한 아주 쉽다는 것에 의하여 성적인 계약자유와 유

사한 상태가 오게 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이혼의 자유 또는 용이성은 정도

의 차이는 있지만 후기 로마법·회교의 법·유태법·근대 미국법 또한 일시적으로

는 합리주의적인 자연법의 계약이론 그리고 인구정책적 고려에 의해서 영향을 받

은 18세기의 입법들에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매우 다종다양하였다.

다만 로마와 미국에서만 이혼이 법적으로 자유인 것과 일치하여 실제상으로도 때

때로 성행된데 불과하다. 이혼의 자유에 대한 여성의 태도는 여러 가지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로마의 여성처럼 미국의 여성도 가정과 사회 내에서의 고정

적인 세력 있는 사회적 지위를 기초로 하여 경제적 자유 및 이혼의 자유를 획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다수의 이탈리아의 여성은 전통에 구속되

어 있기 때문에 아주 최근[제1차 대전 이전-편자]까지도 이혼의 자유는 이들 여

성의 경제적 부양, 특히 고령을 위한 이러한 부양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 이것

은 말하자면 상당히 연로한 노동자를 실직의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것이다. 이로

써 그 위에 또 아마도 남성을 둘러싼 성적 매력의 경쟁이 격화한다는 불안으로부

터도 기피되었다. 또 남성과 여성에 있어서 혼인이 권위에 근거하여 형식으로 구

속되고, 특히 형식적으로는 해소할 수가 없다는 것을 편호하는 것은 자기의 성생

활의 경향이 방탕한 것과 병행하거나, 또는 바로 이와는 반대로 특히 남성 측에서

의 이러한 편호는 정력감퇴 혹은 편의주의를 원인으로 처에게 일시적인 부정을 허

용하는 것과 병행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인 것이 보통이다. 또 부르주아적인 여론

에서의 이혼의 자유를 거부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대개 자녀의 교육의 샨스를 실

제로 위태롭게 하는 것 또는 그렇게 추측하는 것, 그와 함께 특히 남성 측의 권위

적 본능이며 그리고 여성의 경제적 해방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단순한 성적 허영

(Geschlechtseitelkeit) 또는 가정 내에서의 입장에 대한 고려이다. 또 정치적 및

신정적 권력의 구성적 지배에 관한 이해가 바로 계약사회 내에서의 생활합리화의

결과 증대한 다음과 같은 관념에 의하여 강화되어 이혼의 자유를 거부하는 요소

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가정의 형식적인 단결이 바로 대개는 상당히 애매하게가 아

니고는 관념할 수 없는 어떤 비합리적인 가치의 원천일 수 있거나 초개인적 결합 -

이것을 갈망하는 약한 개개인의 그것 - 의 지지물일 수가 있다는 관념이다. 이리

하여 이혼의 자유에 반대하는 이들 전부의 상당히 이질적인 이유들이 최근의 세

대(제1차 세계대전 전)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이혼의 자유에 대한 적대시 또한 부분

적이나 부부간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적대시까지도 가져왔다.

경제적인, 보통은 가족 내부에서의 처분, 즉 유언분야에서의 처분의 자유도 근

대에서 이러한 자유를 제거하고 또는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을 경험하였다.

여기서는 종의(終意)처분 성립의 형식적인 법제사에 관해서는 추구하지 않는다. 유

언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실질적으로 자유였다는 것은 역사상 단 두 번 증

명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공화제 시대의 로마와 영국법이다. 양자의 경우에서, 즉

강력하게 확대된 민족이며 또 다 같이 토지를 소유하는 명망가층에 의하여 통치

된 민족에서 이다. 그리고 오늘날 실제로 유언의 자유가 적용되고 있는 토지구역

은 경제적 샨스의 가장 혜택이 있는 영역, 즉 미국이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유언

의 자유는 상속으로부터 폐제된 상속인에게 정복지에서 생계를 할 수 있는 샨스

를 기대시킨 확장정책, 그것은 전쟁을 수단으로 했는데 더불어 생장하여 식민시

대가 종말에 가까웠을 시대에 유언에 관한 그리스법에서 계수된 비공식적인 실무

(Inoffiziositätspraxis)에 의해서 소멸하였다. 영국법에서는 유언의 자유는 대가

족의 재산보전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유언의 자유와 바로 대립하는

제도, 즉 토지투자, 장자상속, 가족이 승계하는 부동산처분도 다른 방법으로서 이

러한 재산보전에 봉사할 수가 있었다. 근대의 민주적인 입법들에서는 고도의 유류

분에 의해서 유언의 자유를 제거 내지 제한하는 것, 또한 프랑스 법전에서 진정한

분할강제에 까지 높여진 부동산 단독상속의 저지는 특히 정책적으로 조건이 지워

진 것이었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프랑스법전에 관해서 말하면 나폴레옹은 새로운

귀족정치의 담당자로서 봉토를 창설할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그의 법전의 채택이 사회적인 권력분배의 방법을 정부의 수중에 장악하는 것이라

고 단언한 것은 이 후자의 제도에 연관된 것이다.

형식상 노예에 유사한 관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까지도 금지함으로써 노

예제도가 억압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특히 노예의

노동이 생계비용의 고가 때문에 이윤을 낳지 못하는 영역에로 경제적으로 세계

를 지배하는 중점이 이행한 것이다. 또 그와 함께 해고와 실업의 샨스로서 위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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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4 25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는 임금제가 가리키는 간접적 노동 강제가 노동급부의 질에 있어서는 직접 강제

와 대비하여 효과적인 동시에 노예재산의 커다란 위험을 회피하고 종속자로부터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서 생각되면서 발전한 것이다. 노예제도의 격퇴에 대하

여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회는 고대기에 있어서 매우 적은 예인데 스토아학파보다

도 더 적은 역할을 하였을 뿐이며, 중세와 근세에 있어서 보다 커다란 역할을 하

였으나 그 당시에도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대의 자본주의적 노예

제도는 로마제국의 대외적 관계에 평화가 옴에 따라서 위축하여 이러한 평화의 초

래가 서방에 대하여 노예수입의 원천으로서 남겨놓은 것은 주로 소아매매 만이었

다. 미국의 남부 여러 주의 자본주의적 노예제도는 자유로운 토지가 없어지고 노

예수입의 저지가 노예가격을 독점적으로 폭등시킨 후에 사멸의 운명을 선고 받았

다. 이러한 노예제도의 제거가 남북전쟁으로 의한 것보다 이전에 이루어진 것은 북

부 여러 주에 의해서 농민에 의한 민주정치(Farmerdemokratie) 그리고 부르주아

에 의한 금권정치(bürgerliche Plutokratie)와 남부에서의 공장주인에 의한 귀족

정치(Pflanazeristokratie)와의 전적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서 촉

진되었다. 유럽에서는 중세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남부 지역에서는 완전히 소멸하

지 않았던 노예제도가 공업 내에서 침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노동조직, 특히 쭌

프트에 의한 노동이 전적으로 경제적으로 진화했다는 것에 의하여 가져오게 되었

다. 농업 내부에서는 수출을 위한 산업의 발전이 근세의 경과에 있어서도 또 한 번

소령지영주(Gutsherrn)에 종속하는 노동자의 인격의 비자유를 강화시키게 되었

으나 그것은 다른 경우와 같이 농업에서도 근대의 생산기술의 발전이 비자유노동

은 이윤을 낳지 않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했을 때까지의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

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최후로 인격의 비자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에 대

하여 어디서든지 결정적이었다. 동방 국가들의 가부장제적 노예제도, 즉 동아시아

와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는 근소한 정도로 밖에 보급하지 않았던 제도로서 특

수한 고대 역사적 지위에 있는 것은 아프리카의 노예거래가 저지된 결과 사멸상태

로 된다. 이집트에서는 이미 고대에서도 중세 후기에서도 노예제도가 가지고 있었

던 고도의 군사적 의의가 그의 용병군대의 전쟁기술에 의하여 폐퇴된 후에는 노

예제의 경제적 의의 그것은 고래로 아주 커다란 것은 아니었다 해도 급속으로 후

퇴한다. 동방의 국가들에서는 노예제도가 카르타고와 공화제 후기 로마의 소령(所

領)경제에 있어서의 농장노예제(Plantagensklaverei)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결

코 아니다. 그리스와 그리스적인 영역에서처럼 거기서는 노예제도는 혹은 가내노예

제(Haussklaverei)이거나 혹은 기업노동자 내에서 행하여진 이익을 수반하는 자

본투하의 하나의 형태를 의미하며, 후자는 아테네에서처럼 바빌로니아와 페르시

아에서도 그러하다. 현재에도 아직 아프리카의[90] 오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아주

동일하게 동방의 국가들에서는 종종 이 가부장제적 노예제는 그 법형식이 추측하

는 것보다 일층 더 자유노동관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스노우크 후그로네(Snouck-

Hurgronje)가 메카에서 인정하였듯이, 노예가 주인의 인품에 동의하는 일 없이

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일은 예외였다는 것, 그리고 노예가 주인에게 불만을 품은

때는 보통 주인에 의하여 전매되었다는 것은 주인이 가내노예 자신의 자발성에 강

하게 의존한 결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동방국가들에서는 보편적으로 타당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예는 자기가

불만족하는 주인을 강제하여 다른 자기가 좋아하는 주인에게 가해자 위부(委附)

(noxae datio)의 방법으로 끌어내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도 보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동방적·신정적 교권정치 내지 가산적 지배의 성질,

그리고 모든 종속관계의 가부장적 측면을 윤리적으로 형성하려는 이러한 지배의

경향은, 적어도 동방 국가들에서는 노예를 주인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습률로써

보장하는 것을 창조하며, 그 결과 후기 로마의 노예제도처럼 주인이 무제한으로

착취하는 것은 사실상 배제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고대 시대의 유태법에서 이러한

경향의 싹을 발견하며 이러한 태도에 대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것은 바로 고대의

대인집행과 채무노예가 자기 자신의 부족 성원에게까지도 노예로 화할 샨스를 부

여하였다는 사정이었다.

끝으로 표준적인 바로 「부르주아적인」 계층의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가 계약자

유의 일정한 한계의 근거이다. 예컨대 프로이센 토지해방법(Ablösungsgesetz) 이

후의 프로이센과 공화정 시대의 로마법에 있어서 무릇 봉건적 제도와 토지의 영구

적 부담을 사인을 위하여 인정하는 전체 제도를 배제한 것이 그것이다. 즉 양 경우

에 있어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와 그와 결합한 경제적간염이 작용한 것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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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4 25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는 임금제가 가리키는 간접적 노동 강제가 노동급부의 질에 있어서는 직접 강제

와 대비하여 효과적인 동시에 노예재산의 커다란 위험을 회피하고 종속자로부터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서 생각되면서 발전한 것이다. 노예제도의 격퇴에 대하

여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회는 고대기에 있어서 매우 적은 예인데 스토아학파보다

도 더 적은 역할을 하였을 뿐이며, 중세와 근세에 있어서 보다 커다란 역할을 하

였으나 그 당시에도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대의 자본주의적 노예

제도는 로마제국의 대외적 관계에 평화가 옴에 따라서 위축하여 이러한 평화의 초

래가 서방에 대하여 노예수입의 원천으로서 남겨놓은 것은 주로 소아매매 만이었

다. 미국의 남부 여러 주의 자본주의적 노예제도는 자유로운 토지가 없어지고 노

예수입의 저지가 노예가격을 독점적으로 폭등시킨 후에 사멸의 운명을 선고 받았

다. 이러한 노예제도의 제거가 남북전쟁으로 의한 것보다 이전에 이루어진 것은 북

부 여러 주에 의해서 농민에 의한 민주정치(Farmerdemokratie) 그리고 부르주아

에 의한 금권정치(bürgerliche Plutokratie)와 남부에서의 공장주인에 의한 귀족

정치(Pflanazeristokratie)와의 전적으로 정치적 및 사회적 적대관계에 의해서 촉

진되었다. 유럽에서는 중세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남부 지역에서는 완전히 소멸하

지 않았던 노예제도가 공업 내에서 침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노동조직, 특히 쭌

프트에 의한 노동이 전적으로 경제적으로 진화했다는 것에 의하여 가져오게 되었

다. 농업 내부에서는 수출을 위한 산업의 발전이 근세의 경과에 있어서도 또 한 번

소령지영주(Gutsherrn)에 종속하는 노동자의 인격의 비자유를 강화시키게 되었

으나 그것은 다른 경우와 같이 농업에서도 근대의 생산기술의 발전이 비자유노동

은 이윤을 낳지 않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했을 때까지의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

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최후로 인격의 비자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에 대

하여 어디서든지 결정적이었다. 동방 국가들의 가부장제적 노예제도, 즉 동아시아

와 인도에서는 상대적으로는 근소한 정도로 밖에 보급하지 않았던 제도로서 특

수한 고대 역사적 지위에 있는 것은 아프리카의 노예거래가 저지된 결과 사멸상태

로 된다. 이집트에서는 이미 고대에서도 중세 후기에서도 노예제도가 가지고 있었

던 고도의 군사적 의의가 그의 용병군대의 전쟁기술에 의하여 폐퇴된 후에는 노

예제의 경제적 의의 그것은 고래로 아주 커다란 것은 아니었다 해도 급속으로 후

퇴한다. 동방의 국가들에서는 노예제도가 카르타고와 공화제 후기 로마의 소령(所

領)경제에 있어서의 농장노예제(Plantagensklaverei)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은 결

코 아니다. 그리스와 그리스적인 영역에서처럼 거기서는 노예제도는 혹은 가내노예

제(Haussklaverei)이거나 혹은 기업노동자 내에서 행하여진 이익을 수반하는 자

본투하의 하나의 형태를 의미하며, 후자는 아테네에서처럼 바빌로니아와 페르시

아에서도 그러하다. 현재에도 아직 아프리카의[90] 오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아주

동일하게 동방의 국가들에서는 종종 이 가부장제적 노예제는 그 법형식이 추측하

는 것보다 일층 더 자유노동관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스노우크 후그로네(Snouck-

Hurgronje)가 메카에서 인정하였듯이, 노예가 주인의 인품에 동의하는 일 없이

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일은 예외였다는 것, 그리고 노예가 주인에게 불만을 품은

때는 보통 주인에 의하여 전매되었다는 것은 주인이 가내노예 자신의 자발성에 강

하게 의존한 결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동방국가들에서는 보편적으로 타당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노예는 자기가

불만족하는 주인을 강제하여 다른 자기가 좋아하는 주인에게 가해자 위부(委附)

(noxae datio)의 방법으로 끌어내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도 보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동방적·신정적 교권정치 내지 가산적 지배의 성질,

그리고 모든 종속관계의 가부장적 측면을 윤리적으로 형성하려는 이러한 지배의

경향은, 적어도 동방 국가들에서는 노예를 주인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습률로써

보장하는 것을 창조하며, 그 결과 후기 로마의 노예제도처럼 주인이 무제한으로

착취하는 것은 사실상 배제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고대 시대의 유태법에서 이러한

경향의 싹을 발견하며 이러한 태도에 대한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것은 바로 고대의

대인집행과 채무노예가 자기 자신의 부족 성원에게까지도 노예로 화할 샨스를 부

여하였다는 사정이었다.

끝으로 표준적인 바로 「부르주아적인」 계층의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가 계약자

유의 일정한 한계의 근거이다. 예컨대 프로이센 토지해방법(Ablösungsgesetz) 이

후의 프로이센과 공화정 시대의 로마법에 있어서 무릇 봉건적 제도와 토지의 영구

적 부담을 사인을 위하여 인정하는 전체 제도를 배제한 것이 그것이다. 즉 양 경우

에 있어서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와 그와 결합한 경제적간염이 작용한 것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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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6 25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냐하면 공화정 시대에 있어서 영차권(永借權)을 단지 공적 단체에 속하는 토지상

에서의 「소작지」(ager vectigalis)로 밖에는 알지 못한 로마의 입법은 토지를 법적

으로 동산화하는 것 및 그룬트헤르샤프트적인 구속의 생성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토지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시민의 이해의 소산이었으므로, 그리고 이것은 독일에

있어서 오늘날 사실상 「지대농장」이 국유의 식민지 또는 국가에 의하여 특권이 부

여된 식민지에 제한되고 있는 것과 같다.

로마법처럼 합리화된 오늘날의 근대법에도 이러한 모든 동기의 상호작용에서 나

오는 계약의 자유를 규제하는 모습에 도달하고 있다. 그것은 보통 기술적으로는

법이 기피하고 있는 종류의 합의에 특별한 금지법에 의하여 반대한다는 방법에 의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법이 기피하는 이러한 합의에 대하여 어떠한 계약범형(로마

에서는 아무런 소권)도 주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 또 법이 계약범형의 법률효과

에서 규정하는 법률요건을 계약범형의 규범은 법에 의하여 시인되지 않는 종류의

합의와 논리적으로 결부되지 않는다고 정함으로서 향하여 지고 있다. 다른 한 편,

주식회사의 설립과 같이 특별법에 근거하여 제3자의 이해에 관계하는 법적 처분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법이 투여하는 기술적 형식은 거기에 대응하는 다음과 같은 계

약범형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인의 전부의 합의가 법적으로 유효하

기 위해서는 이것은 이러한 법적 처분의 경우에는 법적 강제에 의하여 제3자 전체

에 대해서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합의는 다른

이유에 관하여 무효로 되지 않는 한 제3자를 구속하지 않는 경우에도 합의상호간

의 관계에서는 법률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 강행적으로 준거하지 않으면 안 될

계약범형이다. 합의에 관하여 일정한 계약범형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법이 규정하

는 인격과 무관계한 요건을 충족함으로써 제3자에 대한 효과에 관해서 특별법상

의 제한의 이익을 얻는 것을 이해관계인에게 맡기는 이러한 근대의 형태는 과거에

있어서 특별법이 일반법 규칙과 대립하여 인정되었던 것과 같은 모습과 현저히 다

르다. 이 근대 형태는 기구적으로 조직된 근대 정치단체에 의하여 법의 창조가 공

적으로 공립된 것과 결부되어 있는 법의 통일화 및 합리화의 소산이다.

과거에는 보통, 특별법은 「자유의사에 근거하는」(gewillkürten) 법이라는 형태

로서, 즉 전통에 의하여 또는 「신분적인」 합의적 공동체 내지 이익사회적 「자유결

사」의 합의에 근거하는 법적 규칙의 적립에 의하여 생겼다. 즉 자치적으로 정립된

질서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자유의사」(바로 상술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사에 근거

하는 지방특별법)이 「란트법」(보충적 보통법)을 「깨트린다」(란트법에 우선한다)라는

원칙은 거의 보편적으로 타당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의 모든 서양 이외의 영

역에서 부분적으로는 유럽에서까지도, 예컨대 러시아의 농민부락에 대해서 아직

타당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정치기구는 거의 도처에서 다음의 것을 요구하고 또

대개는 관철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 특별법은 정치기구가 승인함으로써 효력을 가

질 수 있을 뿐이며 그래서 또 승인에 의한 이러한 효력의 보존이 정치기구에 의해

서 허용되는 한도에서만 효력을 가지는데 불과하다[92]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기구

가, 정치기구에 의하여 일정한 전권이 부여된 타율적 단체라는 각인을 「지방단체」

에 찍는 방법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양 경우에 있어서의 이러한 상태가 시

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정한 지역 안에 내지는 일정한 인적 범위 안에서

타당하였던 전체 법의 체계는 대부분 다종다양으로 서로 독립하고 있던 합의적 공

동체 내지 이익사회적 자유결사에 의한 자치의 찬탈에 의하여 창조되어 계속적으

로 형성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단체 상호간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요로 하는 조정은

상호의 타협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정치적 내지 교회의 우월적 권력에 의하여 수

여되었거나 어느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미 본장의 처음에서 다른 것과

함께 검토한 현상에 돌아가기로 하자.

제5절 계약자유, 자치 그리고 단체의 법인격

목적계약,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계약자유 그리고 정치단체의 기구적 성격이 승

리하기 이전의 시기에서는 합의적 공동체 또는 이익사회 관계의 전부 - 그것은 특

별질서의 담당자였으며 여기서는 이러한 단체의 이러한 성질에 대응하여 「법공동

체」라고 부르겠다 - 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것의 사람의 집합이었다. 그 하나는

객관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즉 출생 또는 정치적·인종적·종교적 종속성, 생활태

도, 직업의 종류에 의하여 조건지워진 그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명확한 의형제결

합에 의하여 성립된 그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현대의 소송절차에 해당

하는 「법적 절차」(Rechtsgang)는 일반적으로는 여러 가지 단체(씨족) 상호간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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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6 25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냐하면 공화정 시대에 있어서 영차권(永借權)을 단지 공적 단체에 속하는 토지상

에서의 「소작지」(ager vectigalis)로 밖에는 알지 못한 로마의 입법은 토지를 법적

으로 동산화하는 것 및 그룬트헤르샤프트적인 구속의 생성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토지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시민의 이해의 소산이었으므로, 그리고 이것은 독일에

있어서 오늘날 사실상 「지대농장」이 국유의 식민지 또는 국가에 의하여 특권이 부

여된 식민지에 제한되고 있는 것과 같다.

로마법처럼 합리화된 오늘날의 근대법에도 이러한 모든 동기의 상호작용에서 나

오는 계약의 자유를 규제하는 모습에 도달하고 있다. 그것은 보통 기술적으로는

법이 기피하고 있는 종류의 합의에 특별한 금지법에 의하여 반대한다는 방법에 의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법이 기피하는 이러한 합의에 대하여 어떠한 계약범형(로마

에서는 아무런 소권)도 주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 또 법이 계약범형의 법률효과

에서 규정하는 법률요건을 계약범형의 규범은 법에 의하여 시인되지 않는 종류의

합의와 논리적으로 결부되지 않는다고 정함으로서 향하여 지고 있다. 다른 한 편,

주식회사의 설립과 같이 특별법에 근거하여 제3자의 이해에 관계하는 법적 처분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법이 투여하는 기술적 형식은 거기에 대응하는 다음과 같은 계

약범형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인의 전부의 합의가 법적으로 유효하

기 위해서는 이것은 이러한 법적 처분의 경우에는 법적 강제에 의하여 제3자 전체

에 대해서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합의는 다른

이유에 관하여 무효로 되지 않는 한 제3자를 구속하지 않는 경우에도 합의상호간

의 관계에서는 법률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 강행적으로 준거하지 않으면 안 될

계약범형이다. 합의에 관하여 일정한 계약범형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법이 규정하

는 인격과 무관계한 요건을 충족함으로써 제3자에 대한 효과에 관해서 특별법상

의 제한의 이익을 얻는 것을 이해관계인에게 맡기는 이러한 근대의 형태는 과거에

있어서 특별법이 일반법 규칙과 대립하여 인정되었던 것과 같은 모습과 현저히 다

르다. 이 근대 형태는 기구적으로 조직된 근대 정치단체에 의하여 법의 창조가 공

적으로 공립된 것과 결부되어 있는 법의 통일화 및 합리화의 소산이다.

과거에는 보통, 특별법은 「자유의사에 근거하는」(gewillkürten) 법이라는 형태

로서, 즉 전통에 의하여 또는 「신분적인」 합의적 공동체 내지 이익사회적 「자유결

사」의 합의에 근거하는 법적 규칙의 적립에 의하여 생겼다. 즉 자치적으로 정립된

질서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자유의사」(바로 상술한 의미에서의 자유의사에 근거

하는 지방특별법)이 「란트법」(보충적 보통법)을 「깨트린다」(란트법에 우선한다)라는

원칙은 거의 보편적으로 타당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의 모든 서양 이외의 영

역에서 부분적으로는 유럽에서까지도, 예컨대 러시아의 농민부락에 대해서 아직

타당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정치기구는 거의 도처에서 다음의 것을 요구하고 또

대개는 관철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 특별법은 정치기구가 승인함으로써 효력을 가

질 수 있을 뿐이며 그래서 또 승인에 의한 이러한 효력의 보존이 정치기구에 의해

서 허용되는 한도에서만 효력을 가지는데 불과하다[92]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기구

가, 정치기구에 의하여 일정한 전권이 부여된 타율적 단체라는 각인을 「지방단체」

에 찍는 방법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양 경우에 있어서의 이러한 상태가 시

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정한 지역 안에 내지는 일정한 인적 범위 안에서

타당하였던 전체 법의 체계는 대부분 다종다양으로 서로 독립하고 있던 합의적 공

동체 내지 이익사회적 자유결사에 의한 자치의 찬탈에 의하여 창조되어 계속적으

로 형성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단체 상호간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요로 하는 조정은

상호의 타협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정치적 내지 교회의 우월적 권력에 의하여 수

여되었거나 어느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미 본장의 처음에서 다른 것과

함께 검토한 현상에 돌아가기로 하자.

제5절 계약자유, 자치 그리고 단체의 법인격

목적계약,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계약자유 그리고 정치단체의 기구적 성격이 승

리하기 이전의 시기에서는 합의적 공동체 또는 이익사회 관계의 전부 - 그것은 특

별질서의 담당자였으며 여기서는 이러한 단체의 이러한 성질에 대응하여 「법공동

체」라고 부르겠다 - 는 다음의 둘 중의 어느 것의 사람의 집합이었다. 그 하나는

객관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즉 출생 또는 정치적·인종적·종교적 종속성, 생활태

도, 직업의 종류에 의하여 조건지워진 그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명확한 의형제결

합에 의하여 성립된 그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현대의 소송절차에 해당

하는 「법적 절차」(Rechtsgang)는 일반적으로는 여러 가지 단체(씨족) 상호간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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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8 25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고 여러 단체에 속하는 자 사이의 속죄절차의 형식으로서만 존재 하는 데에 불과

했다는 것이 시원적인 상태였다. 단체 내부에서는 바꾸어 말하면, 동일한 단체의

구성원들 간에서는 가부장제적인 분쟁해결이 지배하였다. 따라서 단체의 법이원

성, 즉 - 정치권력을 강화한 후의 시점에서 말하면 단체 간의 「자율적으로」적립된

법과 동일한 단체의 구성원 간의 분쟁해결에 타당한 규범의 이원성이 어떠한 법사

의 시초에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또 이렇게 명백하고 단일한 사실을 불명

료하게 한 다음과 같은 사정도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발전단계에서 이미 개인 종종 다수의 인적 단체들에 속하며 단지 하나의 단체에

만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에 복종하

는 것은 제일 처음에는 엄격히 인적인 자질이고 또 다른 데에서 찬탈하거나 또는

수여함으로써 취득한 「특권」이며, 이리하여 이들 인적 자질과 특권에 관여하는 사

람들이 독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관여자들은 특별법의 적용을 구함으로써 「법적

동료」(Rechtsgenossen)로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 로마국, 프랑크왕국, 회교 국

가들처럼 정치상 공통의 지고권에 의하여 통합된 단체들에 있어서 통일된 정치권

력의 법을 발견하는 법정에 의하여 적용될 법은 인종적·종교적 내지 하급의 정치

적 부분단체 (법적 또는 정치적 자치도시 또는 부족)에 따라서 다른 법이었다. 예

컨대 로마법이라 하더라도 로마국에서 먼저 최초에는 로마 시민의 법이었다. 그래

서 한편으로는 국가에 속하고 국가의 지배 아래 있는 비시민과의 거래에서 로마법

은 적용되지 않는다. 또 회교 국가들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회교도가 아닌 자 그리

고 같은 상태에 있으면서 오소독스한 4법학파(Vier orthodoxe Rechtsschulen)

에 속하는 자는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서 생활한다. 물론 그들이 자기 자신의 법

정이 아니고 회교의 심판인에게 제소할 때에는 이러한 심판인은 회교법 이외의 법

을 알 의무를 결코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회교법에 따라서 재판한다. 비회교도

들은 바로 「신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이한 속인법에 종속하는 자

상호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그러한 경우를 어떠한 방법으로 규제하더라도 실익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일정한 공통의 법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거래빈도의 증대에 따라서 급속으로 높아져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

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의 경우에는 다음의 3중의 어느 것의 상태가 생긴다. 그 하

나는 로마법에서처럼 단체 성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데 불과한 각 개별적 단체의

시민법 하에 만민법이 생긴다. 그 둘은 영국에서처럼 정치적 내지 신정적인 지배자

가 자기의 재판소만을 구속하는 「관직법」(Amtrecht)을 자기의 명령권(Imperium)

으로 수여한다. 그 셋은 새로운, 대개는 지역적인 정치단체가 여러 속인법들의 내

용을 상호 융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랜 이탈리아의 도시법들은 시민들

이 랑고바르드법에 따라서 생활할 것을 선언한 것을 잘 알고는 있었으나 그러나 랑

고바르드법에 의하여 생활하고 그 법의 보충을 로마법으로써 한다는 것(또는 그

와는 반대로)을 「신조」로서 인정한 것은 키비타스(Civitas), 즉 시민의 총체라는 것

이 고대의 법사상과 다른 특징적인 점이다. 이에 대하여 중세의 명령권에 종속하

는 자들은 그들이 생활의 준거라고 「인정하는」(동의하는) 부족법에 따라서 어디서

든지 판결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개인은 이러한 법의

신조를 몸에 붙이고 돌아다닌다. 그 경우에 법은 - 노르만 정복 후 곧 국왕재판소

의 영국법이 그렇게 된 것과 같은[94] 「토지의 법」(Lex terrae)이 아니라 인적 단

체의 특권에 근거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이 속인법주의 원리가 전적으로 예

외 없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오늘날 그 반대가 전연 일관하여 행하여지

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한 편 명령권에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도 자유의

사에 근거하는 결사는 자신에 의하여 정립된 법에 대하여 재삼재사 속인주의원리

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물론 그 성과는 다종다양하였다. 그러나 여하튼 그 결과로

서는 다수의 「법공동체」가 존재하게 되었고 여러 법공동체의 자치는 교차하고, 정

치단체 - 그것이 일반적으로 이미 단일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한 - 법공동체의 하

나임에 불과하다. 특별법에 복종하는 법적 동료는 그의 자질에 의해서 일정한 개

체, 예컨대 일정한 종류의 토지(장원대여농장[Hofleihegüter], 봉토[Lehen])를 독

점했으나 우리들에게 숙지되어있는 이해의 영향 아래, 그리고 특히 개인이 동시에

점차 많은 단체에 속하게 됨에 따라서 외부에 대한 공동체의 인적 폐쇄성이 포기

된 때에 이제는 반대로 특정한 객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특별법에 관여하는 자격

에 관해서 결정적으로 된다는 것처럼 특별법은 특정한 객체를 지배하는 것에 결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이러한 특별법과 특정한 객체의 결부가 특별법에

복종하는 관계에 들어가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형태에로의 이행단계이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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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58 25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고 여러 단체에 속하는 자 사이의 속죄절차의 형식으로서만 존재 하는 데에 불과

했다는 것이 시원적인 상태였다. 단체 내부에서는 바꾸어 말하면, 동일한 단체의

구성원들 간에서는 가부장제적인 분쟁해결이 지배하였다. 따라서 단체의 법이원

성, 즉 - 정치권력을 강화한 후의 시점에서 말하면 단체 간의 「자율적으로」적립된

법과 동일한 단체의 구성원 간의 분쟁해결에 타당한 규범의 이원성이 어떠한 법사

의 시초에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또 이렇게 명백하고 단일한 사실을 불명

료하게 한 다음과 같은 사정도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발전단계에서 이미 개인 종종 다수의 인적 단체들에 속하며 단지 하나의 단체에

만 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에 복종하

는 것은 제일 처음에는 엄격히 인적인 자질이고 또 다른 데에서 찬탈하거나 또는

수여함으로써 취득한 「특권」이며, 이리하여 이들 인적 자질과 특권에 관여하는 사

람들이 독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관여자들은 특별법의 적용을 구함으로써 「법적

동료」(Rechtsgenossen)로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 로마국, 프랑크왕국, 회교 국

가들처럼 정치상 공통의 지고권에 의하여 통합된 단체들에 있어서 통일된 정치권

력의 법을 발견하는 법정에 의하여 적용될 법은 인종적·종교적 내지 하급의 정치

적 부분단체 (법적 또는 정치적 자치도시 또는 부족)에 따라서 다른 법이었다. 예

컨대 로마법이라 하더라도 로마국에서 먼저 최초에는 로마 시민의 법이었다. 그래

서 한편으로는 국가에 속하고 국가의 지배 아래 있는 비시민과의 거래에서 로마법

은 적용되지 않는다. 또 회교 국가들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회교도가 아닌 자 그리

고 같은 상태에 있으면서 오소독스한 4법학파(Vier orthodoxe Rechtsschulen)

에 속하는 자는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서 생활한다. 물론 그들이 자기 자신의 법

정이 아니고 회교의 심판인에게 제소할 때에는 이러한 심판인은 회교법 이외의 법

을 알 의무를 결코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회교법에 따라서 재판한다. 비회교도

들은 바로 「신민」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이한 속인법에 종속하는 자

상호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그러한 경우를 어떠한 방법으로 규제하더라도 실익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일정한 공통의 법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거래빈도의 증대에 따라서 급속으로 높아져서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

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의 경우에는 다음의 3중의 어느 것의 상태가 생긴다. 그 하

나는 로마법에서처럼 단체 성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데 불과한 각 개별적 단체의

시민법 하에 만민법이 생긴다. 그 둘은 영국에서처럼 정치적 내지 신정적인 지배자

가 자기의 재판소만을 구속하는 「관직법」(Amtrecht)을 자기의 명령권(Imperium)

으로 수여한다. 그 셋은 새로운, 대개는 지역적인 정치단체가 여러 속인법들의 내

용을 상호 융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랜 이탈리아의 도시법들은 시민들

이 랑고바르드법에 따라서 생활할 것을 선언한 것을 잘 알고는 있었으나 그러나 랑

고바르드법에 의하여 생활하고 그 법의 보충을 로마법으로써 한다는 것(또는 그

와는 반대로)을 「신조」로서 인정한 것은 키비타스(Civitas), 즉 시민의 총체라는 것

이 고대의 법사상과 다른 특징적인 점이다. 이에 대하여 중세의 명령권에 종속하

는 자들은 그들이 생활의 준거라고 「인정하는」(동의하는) 부족법에 따라서 어디서

든지 판결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개인은 이러한 법의

신조를 몸에 붙이고 돌아다닌다. 그 경우에 법은 - 노르만 정복 후 곧 국왕재판소

의 영국법이 그렇게 된 것과 같은[94] 「토지의 법」(Lex terrae)이 아니라 인적 단

체의 특권에 근거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이 속인법주의 원리가 전적으로 예

외 없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오늘날 그 반대가 전연 일관하여 행하여지

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한 편 명령권에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라도 자유의

사에 근거하는 결사는 자신에 의하여 정립된 법에 대하여 재삼재사 속인주의원리

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물론 그 성과는 다종다양하였다. 그러나 여하튼 그 결과로

서는 다수의 「법공동체」가 존재하게 되었고 여러 법공동체의 자치는 교차하고, 정

치단체 - 그것이 일반적으로 이미 단일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한 - 법공동체의 하

나임에 불과하다. 특별법에 복종하는 법적 동료는 그의 자질에 의해서 일정한 개

체, 예컨대 일정한 종류의 토지(장원대여농장[Hofleihegüter], 봉토[Lehen])를 독

점했으나 우리들에게 숙지되어있는 이해의 영향 아래, 그리고 특히 개인이 동시에

점차 많은 단체에 속하게 됨에 따라서 외부에 대한 공동체의 인적 폐쇄성이 포기

된 때에 이제는 반대로 특정한 객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특별법에 관여하는 자격

에 관해서 결정적으로 된다는 것처럼 특별법은 특정한 객체를 지배하는 것에 결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이러한 특별법과 특정한 객체의 결부가 특별법에

복종하는 관계에 들어가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형태에로의 이행단계이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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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0 26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나 여하튼 그것은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는 이행단계임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상

술한 오늘날 이전의 모든 종류의 특별법은 어떤 인적 단체에 속한 사람 그 자신의

직접의 법적으로 특권을 가지는 지속적 성격이거나 또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

적 단체에의 소속성을 매개하는 일정한 객체의 법적인 특권을 가지는 지속적 성질

이거나 그 어느 것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오늘날

의 법에서도 물 또는 사람의 전적으로 기술적 또는 경제적인 일정한 성질이 특별하

게 규정되는 원인일 수 있다. 예컨대 「공장」, 「농지」 또는 「변호사」, 「약제사」 일정한

「영업자」에 대해서와 같다. 그리고 어떤 시대의 법에서도 그 전체에 걸쳐 기술적 사

실과 경제적 사실에 결부된 이러한 특별 규범도 발견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

나 여기서 사고되고 있는 특별법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즉 여기서 사고되고 있

는 형의 특별법이 사람과 물에 대해서 타당한 것을 기초지운 것은 경제적 또는 기

술적인 성질이 아니라 사람의 신분적 자질, 바꾸어 말하면 출생, 생활 태도, 또는

어떤 단체에 종속함으로써 결정되는 인적 자질(「귀족」, 「기사」 또는 「길드원(員)」과

물(「가인영」[家人領, Dienstlehen], 「기사농장」)에 대한 일정한 사회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 그것도 간접적으로 이러한 사회관계에 의한 결정의 방법에 의하여 일

정한 신분관계에 의하는 것과 동일하게 조건지워진 물의 성질이었다. 따라서 인 및

물이 법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인적

자질 그리고 개개의 물적 관계의 개별적인 성질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한

계상황에서는 「특권」은 개개인 또는 개개물의 특권이기 까지도 있을 수 있었고 종

종 그러하였다. 이 경우에는 「주체적」권리와 「객관적」규범이 실제상 동일에 근거한

것이고, 개개의 특권자는 자기의 주관적 권리로서 자기에 속하는 객관적인 규정에

의하여 다루어질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신분의 일정한 범위의 인 또

는 신분에 한하여 중요한 일정한 범위의 물이 특별법의 담당자였을 경우에라도 법

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가 다음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명한 것이었다. 그

것은 관여자에 대하여 특별법의 규정이 적용되는 것은 법적 이해관계인의 인적인

주관적 권리라는 견해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타당하는」 규범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발전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즉, 전체 「법」은

개개인, 개개물 또는 이들 개별적인 복합체의 특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 국가 「기구」 그 자체라는 법적 개념이 근본적으로 대립하

였다. 양자는 어떤 때에는 특히 고대 로마와 근대 세계에서의 「부르주아」층이 대두

하는 초기에서는 대단히 현저한 대립을 나타낸 결과 「특권」에 관한 법이 나타날 가

능성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로마에서는 민회결의에 의하여 특권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18세기의 혁명기는 전체 사단자치 그리고 법의 특수화를 부정하는

입법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근대법

이 수많은 법의 특수성을 새로이 창조한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여 창조하였

는가 하는 것을 나중에 볼 것이다. 그러나 근대법의 그것은 주로 예전의 신분적 특

권과는 다른 기초에 입각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형식적인 「법 앞의 평등」(Rechtsgleichheit)을 기초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기구 내에 개개인 및 법적 사실의 전부를 정서한다는 것이 증

대한 것은 합리화하는 두 개의 커다란 힘의 결과이다. 즉, 한편으로는 시장확대의

결과이고 다른 한 편 합리에 근거하는 공동체의 기관행위가 관료화한 결과이다.

상술한 전적으로 개별적인 자유의사에 의한 법의 성립 - 그것은 독점이란 점에서

범위가 한정된 인적 단체의 자력 또는 수여된 특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그 주된

것은 신분적인 자유결사의 자치인데 - 이 합리화하는 두 개의 힘에 의하여 다음

의 두 종류에 의하여 가름된다. 즉 하나는 「사단」의 형식상은[96] 누구나 다 들어

갈 수 있으나 법규칙에 의해서 좁게 한정된 자치이고 이러한 사단은 임의의 사람들

에 의해서 창설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자유의사에 근거하는 법을 몰주체적

인 사적인 일정한 종류의 법률행위에 의하여 정립하는 권리를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범형적으로 수여한다는 제작에 의하는 것이다. 법의 자율적인 창조의 기술적 형식

을 이렇게 변경시킨 결정적인 추진력은 정치적으로는 강화도상에 있는 정치적 국

가기구의 지배자와 관료가 권력의 집중을 욕구했었다는 것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물론 전적으로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강도로 - 시장에서 세력 있는 이

해관계인 - 즉 재산 그 자체( 「계급지위」)에 의하여 시장에서의 형식적으로는 「자

유로운」가격, 그 밖의 경쟁에서 경제상 특권을 가지는 자 -의 이해이었다. 왜냐하

면 예컨대 법 앞의 형식적인 평등에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수권」, 즉 「사

람의 자질을 묻지 않고 누구나」(Jedermann ohne Ansehen der Person)가 예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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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0 26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나 여하튼 그것은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는 이행단계임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상

술한 오늘날 이전의 모든 종류의 특별법은 어떤 인적 단체에 속한 사람 그 자신의

직접의 법적으로 특권을 가지는 지속적 성격이거나 또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

적 단체에의 소속성을 매개하는 일정한 객체의 법적인 특권을 가지는 지속적 성질

이거나 그 어느 것에 근거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오늘날

의 법에서도 물 또는 사람의 전적으로 기술적 또는 경제적인 일정한 성질이 특별하

게 규정되는 원인일 수 있다. 예컨대 「공장」, 「농지」 또는 「변호사」, 「약제사」 일정한

「영업자」에 대해서와 같다. 그리고 어떤 시대의 법에서도 그 전체에 걸쳐 기술적 사

실과 경제적 사실에 결부된 이러한 특별 규범도 발견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

나 여기서 사고되고 있는 특별법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즉 여기서 사고되고 있

는 형의 특별법이 사람과 물에 대해서 타당한 것을 기초지운 것은 경제적 또는 기

술적인 성질이 아니라 사람의 신분적 자질, 바꾸어 말하면 출생, 생활 태도, 또는

어떤 단체에 종속함으로써 결정되는 인적 자질(「귀족」, 「기사」 또는 「길드원(員)」과

물(「가인영」[家人領, Dienstlehen], 「기사농장」)에 대한 일정한 사회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 그것도 간접적으로 이러한 사회관계에 의한 결정의 방법에 의하여 일

정한 신분관계에 의하는 것과 동일하게 조건지워진 물의 성질이었다. 따라서 인 및

물이 법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인적

자질 그리고 개개의 물적 관계의 개별적인 성질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한

계상황에서는 「특권」은 개개인 또는 개개물의 특권이기 까지도 있을 수 있었고 종

종 그러하였다. 이 경우에는 「주체적」권리와 「객관적」규범이 실제상 동일에 근거한

것이고, 개개의 특권자는 자기의 주관적 권리로서 자기에 속하는 객관적인 규정에

의하여 다루어질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신분의 일정한 범위의 인 또

는 신분에 한하여 중요한 일정한 범위의 물이 특별법의 담당자였을 경우에라도 법

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가 다음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명한 것이었다. 그

것은 관여자에 대하여 특별법의 규정이 적용되는 것은 법적 이해관계인의 인적인

주관적 권리라는 견해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타당하는」 규범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발전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즉, 전체 「법」은

개개인, 개개물 또는 이들 개별적인 복합체의 특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 국가 「기구」 그 자체라는 법적 개념이 근본적으로 대립하

였다. 양자는 어떤 때에는 특히 고대 로마와 근대 세계에서의 「부르주아」층이 대두

하는 초기에서는 대단히 현저한 대립을 나타낸 결과 「특권」에 관한 법이 나타날 가

능성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로마에서는 민회결의에 의하여 특권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18세기의 혁명기는 전체 사단자치 그리고 법의 특수화를 부정하는

입법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근대법

이 수많은 법의 특수성을 새로이 창조한 것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여 창조하였

는가 하는 것을 나중에 볼 것이다. 그러나 근대법의 그것은 주로 예전의 신분적 특

권과는 다른 기초에 입각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형식적인 「법 앞의 평등」(Rechtsgleichheit)을 기초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기구 내에 개개인 및 법적 사실의 전부를 정서한다는 것이 증

대한 것은 합리화하는 두 개의 커다란 힘의 결과이다. 즉, 한편으로는 시장확대의

결과이고 다른 한 편 합리에 근거하는 공동체의 기관행위가 관료화한 결과이다.

상술한 전적으로 개별적인 자유의사에 의한 법의 성립 - 그것은 독점이란 점에서

범위가 한정된 인적 단체의 자력 또는 수여된 특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그 주된

것은 신분적인 자유결사의 자치인데 - 이 합리화하는 두 개의 힘에 의하여 다음

의 두 종류에 의하여 가름된다. 즉 하나는 「사단」의 형식상은[96] 누구나 다 들어

갈 수 있으나 법규칙에 의해서 좁게 한정된 자치이고 이러한 사단은 임의의 사람들

에 의해서 창설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자유의사에 근거하는 법을 몰주체적

인 사적인 일정한 종류의 법률행위에 의하여 정립하는 권리를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범형적으로 수여한다는 제작에 의하는 것이다. 법의 자율적인 창조의 기술적 형식

을 이렇게 변경시킨 결정적인 추진력은 정치적으로는 강화도상에 있는 정치적 국

가기구의 지배자와 관료가 권력의 집중을 욕구했었다는 것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물론 전적으로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강도로 - 시장에서 세력 있는 이

해관계인 - 즉 재산 그 자체( 「계급지위」)에 의하여 시장에서의 형식적으로는 「자

유로운」가격, 그 밖의 경쟁에서 경제상 특권을 가지는 자 -의 이해이었다. 왜냐하

면 예컨대 법 앞의 형식적인 평등에 일치하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수권」, 즉 「사

람의 자질을 묻지 않고 누구나」(Jedermann ohne Ansehen der Person)가 예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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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2 26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대 주식회사를 설립하거나 또는 세습재산을 설정하여도 좋다는 수권은 실제는 유

산계급 자신의 일종의 사실적인 「자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히 유산계급

자신이 전적으로 이것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무정형의 자치는 단지 비유적인 의미에서만 자치라는 이름값을 할

만하다. 왜냐하면 아주 정확히 말하면 자치의 개념은 여러 징표 - 가령 변화하

는 것이라 할지라도 - 에 따라서 그때그때 여하튼 한계지우는 것이 가능한 일정

한 인적 단체가 존재하는 것에 결부하고 있어 이 일정한 인적 단체가 요해에 의

해서 또는 합의에 근거하는 규칙의 정립에 의해서 인적 단체에 의해서 원칙적으

로 그 인적 단체의 독립한 의사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특별법에 복종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이 일정한 인적 단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 즉 그것이 사단·

주식회사·지방단체·분신·동업조합·노동공동체(Gewerkschaft) 내지 봉신국가

(Vasallenstaat)이나 어떠냐는 자치의 개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개

념은 정치단체가 법의 제정을 독점하기 시작한 것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

은 법이 정치단체 자신의 기관과는 별개의 기관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을 정치단체

가 허용하거나 또는 직접으로 보장한다는 사상을 항상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요해 내지 정립된 질서의 힘에 의해서 일정한 인적 단체가 가지게 되는 자치

는 계약자유 그것과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양자의 한계는 다음의 경우에 있다. 즉

규범개념의 한계가 존재하는 경우, 즉 관여자의 요해 또는 합리적인 합의에 의하

여 타당한 질서가 이미 일정한 인적 단체에 가해지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규칙으로

서 이해되지 않고 상호의 권리의 창설로서 이해되는 경우 - 업무협정, 이익분배,

내부 및 외부관계의 법적 지위에 관한 이점주간의 합의가 그렇다 - 에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권리와 법의 개념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다. 또 이론적으로도 성문화된 법에 대한 우리들의 보통의 사고관습으로부

터 보아서 다음과 같은 한에서지만 양자 간에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여기

서 우리들에게 전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법영역에서는 성문화된 규칙이 보통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은 결의에 의해서라는 경우에 자치가 행해지고, 다른 한 편 구체

적인 개개인 간의 합의가 규칙의 역할을 할 때에도 우리들에게 대해서 계약의 자

유에 의해서 규제되는 특수한 경우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구별은 또 우

리가 뒤에서 보듯이, 과거에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거기서는 이것만

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 규범과 주관적 청구권의 구별이 불완전하게만

발전하였던 한, 또한 법이 단체에 종속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인적 자질에 근

거한다고 생각된 한, 관여자의 신분적 자질을 기초로 하는 단체 내지 일정한 인적

단체 안에서 타당한 규칙과 강제될 수 있는 계약에 의하여 따라서 그러한 계약을

체결하는 직접 관여자의 행위에 대하여 준칙인 규칙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했음에

불과하였다. 확실히 무릇 특별법은 원래 신분적 책임에 의하여 한정된 일정한 범

위의 사람의 법이었다. 이것은 이미 간단히 말했듯이, 개개의 인적 단체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점취(占取)된 재산이 점점 분화하고, 또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됨에 따

라서 변화하고 그리고 아주 강하게 변화한 결과 결국은 그 반대의 원칙이 타당하

였다. 그것은 특별법은 그의 완전히 사회적 내지 경제적인 특수 관계에 대해서 언

제나 타당한 법이라는 원칙이다. 이미 중세는 이 견해에 가까웠던 것이었으며, 그

것은 호이슬러(Heusler)의 견해 - 그러나 국법의 부정이라는 점에서는 너무 지나

친 것이기는 하나 - 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렌법은 렌관계에 타당한 법

이었다. 봉신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결코 그러한 국가의 법은 아니었

다. 또 장원법은 그룬트헤르의 장원관계에, 가인법(家人法[Dienstrecht])은 가인령

(領)에, 상거래법은 상인의 재화 그리고 상인의 거래에, 수공업자들의 법은 그들의

거래와 수공업의 경영에 타당한 법이었다. 그러나 봉신, 상인, 가인(Ministeriale),

종속농민(Grundholde), 예속민(Eigenhörige)은 이들의 특별법에 종속한 외에 동

시에 상술한 신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러 관계 이외에서는 [98] 전적으로 란

트법에 복종하였다. 하나의 인간이 자유로운 토지와 그룬트헤르 토지 양쪽을 가

질 수 있으며 그 때 이 인간은 한쪽의 토지에 대하여 장원법에, 다른 한 쪽의 토지

에 대하여 란트법에 복종하였다. 마찬가지로 비상인은 콤멘다(Commenda)의 형

식으로 또는 해사대차로서 금전을 주었을 경우에, 이것에 대하여 또 이것에 대해

서만 단지 상거래법에 복종하였다. 그래도 신분에 전연 관계없는 이처럼 순수하

게 사물적인 취급방법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특별법이 타당하

는 상술한 거의 모든 관계들은 어떠한 신분적인 결과, 즉 사람의 전체 법적인 지위

(Gesamtrechtsstellung)에 관계되는 결과를 가졌으며, 그리하여 예컨대 장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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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주식회사를 설립하거나 또는 세습재산을 설정하여도 좋다는 수권은 실제는 유

산계급 자신의 일종의 사실적인 「자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히 유산계급

자신이 전적으로 이것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무정형의 자치는 단지 비유적인 의미에서만 자치라는 이름값을 할

만하다. 왜냐하면 아주 정확히 말하면 자치의 개념은 여러 징표 - 가령 변화하

는 것이라 할지라도 - 에 따라서 그때그때 여하튼 한계지우는 것이 가능한 일정

한 인적 단체가 존재하는 것에 결부하고 있어 이 일정한 인적 단체가 요해에 의

해서 또는 합의에 근거하는 규칙의 정립에 의해서 인적 단체에 의해서 원칙적으

로 그 인적 단체의 독립한 의사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특별법에 복종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이 일정한 인적 단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 즉 그것이 사단·

주식회사·지방단체·분신·동업조합·노동공동체(Gewerkschaft) 내지 봉신국가

(Vasallenstaat)이나 어떠냐는 자치의 개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개

념은 정치단체가 법의 제정을 독점하기 시작한 것의 소산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

은 법이 정치단체 자신의 기관과는 별개의 기관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을 정치단체

가 허용하거나 또는 직접으로 보장한다는 사상을 항상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요해 내지 정립된 질서의 힘에 의해서 일정한 인적 단체가 가지게 되는 자치

는 계약자유 그것과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양자의 한계는 다음의 경우에 있다. 즉

규범개념의 한계가 존재하는 경우, 즉 관여자의 요해 또는 합리적인 합의에 의하

여 타당한 질서가 이미 일정한 인적 단체에 가해지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규칙으로

서 이해되지 않고 상호의 권리의 창설로서 이해되는 경우 - 업무협정, 이익분배,

내부 및 외부관계의 법적 지위에 관한 이점주간의 합의가 그렇다 - 에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권리와 법의 개념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다. 또 이론적으로도 성문화된 법에 대한 우리들의 보통의 사고관습으로부

터 보아서 다음과 같은 한에서지만 양자 간에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여기

서 우리들에게 전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법영역에서는 성문화된 규칙이 보통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은 결의에 의해서라는 경우에 자치가 행해지고, 다른 한 편 구체

적인 개개인 간의 합의가 규칙의 역할을 할 때에도 우리들에게 대해서 계약의 자

유에 의해서 규제되는 특수한 경우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구별은 또 우

리가 뒤에서 보듯이, 과거에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거기서는 이것만

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객관적 규범과 주관적 청구권의 구별이 불완전하게만

발전하였던 한, 또한 법이 단체에 종속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인적 자질에 근

거한다고 생각된 한, 관여자의 신분적 자질을 기초로 하는 단체 내지 일정한 인적

단체 안에서 타당한 규칙과 강제될 수 있는 계약에 의하여 따라서 그러한 계약을

체결하는 직접 관여자의 행위에 대하여 준칙인 규칙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했음에

불과하였다. 확실히 무릇 특별법은 원래 신분적 책임에 의하여 한정된 일정한 범

위의 사람의 법이었다. 이것은 이미 간단히 말했듯이, 개개의 인적 단체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점취(占取)된 재산이 점점 분화하고, 또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됨에 따

라서 변화하고 그리고 아주 강하게 변화한 결과 결국은 그 반대의 원칙이 타당하

였다. 그것은 특별법은 그의 완전히 사회적 내지 경제적인 특수 관계에 대해서 언

제나 타당한 법이라는 원칙이다. 이미 중세는 이 견해에 가까웠던 것이었으며, 그

것은 호이슬러(Heusler)의 견해 - 그러나 국법의 부정이라는 점에서는 너무 지나

친 것이기는 하나 - 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렌법은 렌관계에 타당한 법

이었다. 봉신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결코 그러한 국가의 법은 아니었

다. 또 장원법은 그룬트헤르의 장원관계에, 가인법(家人法[Dienstrecht])은 가인령

(領)에, 상거래법은 상인의 재화 그리고 상인의 거래에, 수공업자들의 법은 그들의

거래와 수공업의 경영에 타당한 법이었다. 그러나 봉신, 상인, 가인(Ministeriale),

종속농민(Grundholde), 예속민(Eigenhörige)은 이들의 특별법에 종속한 외에 동

시에 상술한 신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러 관계 이외에서는 [98] 전적으로 란

트법에 복종하였다. 하나의 인간이 자유로운 토지와 그룬트헤르 토지 양쪽을 가

질 수 있으며 그 때 이 인간은 한쪽의 토지에 대하여 장원법에, 다른 한 쪽의 토지

에 대하여 란트법에 복종하였다. 마찬가지로 비상인은 콤멘다(Commenda)의 형

식으로 또는 해사대차로서 금전을 주었을 경우에, 이것에 대하여 또 이것에 대해

서만 단지 상거래법에 복종하였다. 그래도 신분에 전연 관계없는 이처럼 순수하

게 사물적인 취급방법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특별법이 타당하

는 상술한 거의 모든 관계들은 어떠한 신분적인 결과, 즉 사람의 전체 법적인 지위

(Gesamtrechtsstellung)에 관계되는 결과를 가졌으며, 그리하여 예컨대 장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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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4 26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상의 토지와 가인법상의 토지의 보유는 대개 그러하였다. 특별법이 적용되는 관계

들 중의 다수는 서로 동일한 사람에게서 결합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며, 이러한 신

분적인 구속성을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일정한 법동료단체의 외부로 향한

폐쇄성에로의 경향이 항상 반복하여 반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경향

중 어느 것이 강하였는가는, 전적으로 개개의 경우에서의 구체적인 이해상황에 의

해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호이슬러까지도 도시법에 관하여 그것이 시민의 신분

법이며 도시의 토지보유 그리고 그 밖의 신분에서는 관계없는 관계에 대한 법이 아

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도시는 그 완전히 사적인 법인으

로 되었다. 물론 특별법을 일정한 객체 및 사실에 대한 법으로서 취급하려는 경향

이 전체적으로 우세하였다는 것은, 또 이로써 특별법을 사물에 관한 특수한 법명

제로서 란트법, 즉 국법내에 정서하는 것이 아주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적

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가 행하여졌나 하는 것은 주로 정치적 사정에

의존했다. 이러한 정서가 완전히 관철되지 않은 한 란트법 및 란트법상의 재판소

와 가지각색의 특별법과 그들을 위하여 존립하고 있는 특별재판소와의 관계에 관

한 문제는 개개의 경우에 매우 다종다양하게 규제되었다. 란트법상에서는 토지에

대한 게베레(Gewere)의 소지자는 장원영주이고 예속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봉토

의 경우에는 그 관계가 그렇게 간단히 규제되지는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며, 예컨

대 작센슈피겔(Sachsenspiegel)에서는 어떤 범위에서는 원본과 주석 사이에 논쟁

되었다. 로마법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로마 시민법(ius civile)은 다음의 한도에서 로마 시민의 법이었다. 즉 시민이 아

니거나 계약에 근거하는 승인에 의하여 시민과 동등한 지위에 서지 않는 자거나

의 어느 자이든지 다 로마의 재판소에 당사자로서 출정하거나 시민법상의 특수

한 법률행위를 체결하거나 혹은 시민법의 명제에 따라서 판결되거나 하는 것이 불

가능하였다는 한도에서다. 어떠한 로마의 법률(lex)도 시민의 범위 밖에서는 유효

하지 않았다. 로마의 법률을 시민이 아닌 자에게 관계시킬 수 없다는 명제는 정치

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명제가 지배 아래 있으면

서 동시에 법에 동화되지 않는 영역 전체에 대하여 관리와 원로원의 절대적 권력

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사실 고래로부터 로마 시민은 결코 시민법에

만 따라서 판결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시민법을 적용하는 재판소에만 자기의 재판

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사(有史) 시대에는 시민법은 어떤 자들을 단

지 시민, 즉 이 특수한 신분단체의 구성원이라는 그의 자격에 있어서만 법적으

로 고찰의 대상으로 하는 특별법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여

러 법권(法圈[Rechtskreis]) - 그들의 법권에 관여하는 자는 시민에만 한정하지

않았고 또 모든 시민도 아니었다 - 이 존재하였으며, 그러한 법권의 법은 혹은 신

분단체의 법으로서 혹은 사물에 관한 특별법으로서 나타난다. 먼저 첫째로 이에

속하는 것은 행정법상 규정된 법률사실의 전부로서 그것은 매우 다수이며 실제

상 중요하였다. 시민법상의 토지소유권은 그락쿠스(Gracchus) 시대까지는 정식

의 지정에 의하여 이러한 소유권의 대상으로 되어있던 일부의 토지 외에는 존재

하지 않았다. 공유지(ager publicus) 상의 점유의 지위들은 시민뿐만 아니라 단체

원(Bundesgenossen)도 거기에 관여하였으므로 시민법에 의하여 규제되지도 않

고 시민법상 소송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락쿠스 시대에 시민 전부가 이들의 지배

관계를 시민의 법률(lex)에 의해서 규제하려는 모양이 보였을 때 곧 시민단체 간

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단체원의 요구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점유의 지

위는 시민법에서는 알지 못했던 규칙에 따라서 처리하는 정무관의 특별한 소송절

차(Kognition)에만 복종하였다. 왜냐하면 시민법은 예컨대 영차권도 물적 부담

도 부역지도 몰랐으나 지방공유지의 행정법에는 이들 전부가 충분히 잘 알려져 있

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인 간의 거래에 있어서 국가의 재산관리법은 시민

법에 알려지지 않았던 제도들을 알고 그들의 제도는 법적으로는 시민법의 제도에

일치하는 경우에도 다른 명칭이 붙여졌다(문답계약에 의한 보증인에는 프라에스

[Praes], 행정법상의 저당에는 프라에디움[Praedium]). 여기서 전연 신분에 관계

가 없는 이 특별법의 담당자는 행정관리의 권한이었다. 거기서는 특별법의 법적 동

료단체는 존재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법적 이해관계인에 의해서 구성되었다.[100]

또 시민과 외인 사이에 법을 선언하는 법무관의 관할권이 특별법의 범위를 구성

하였다. 법무관은 시민법을 적용해도 좋았으나 그것은 시민의 법률(lex)의 힘에 의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권의 힘에 의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원천에서 유래하

는 다른 타당근거의 법, 즉 만민법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결코 법무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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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4 26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상의 토지와 가인법상의 토지의 보유는 대개 그러하였다. 특별법이 적용되는 관계

들 중의 다수는 서로 동일한 사람에게서 결합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며, 이러한 신

분적인 구속성을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일정한 법동료단체의 외부로 향한

폐쇄성에로의 경향이 항상 반복하여 반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경향

중 어느 것이 강하였는가는, 전적으로 개개의 경우에서의 구체적인 이해상황에 의

해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호이슬러까지도 도시법에 관하여 그것이 시민의 신분

법이며 도시의 토지보유 그리고 그 밖의 신분에서는 관계없는 관계에 대한 법이 아

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도시는 그 완전히 사적인 법인으

로 되었다. 물론 특별법을 일정한 객체 및 사실에 대한 법으로서 취급하려는 경향

이 전체적으로 우세하였다는 것은, 또 이로써 특별법을 사물에 관한 특수한 법명

제로서 란트법, 즉 국법내에 정서하는 것이 아주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적

으로 정당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가 행하여졌나 하는 것은 주로 정치적 사정에

의존했다. 이러한 정서가 완전히 관철되지 않은 한 란트법 및 란트법상의 재판소

와 가지각색의 특별법과 그들을 위하여 존립하고 있는 특별재판소와의 관계에 관

한 문제는 개개의 경우에 매우 다종다양하게 규제되었다. 란트법상에서는 토지에

대한 게베레(Gewere)의 소지자는 장원영주이고 예속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봉토

의 경우에는 그 관계가 그렇게 간단히 규제되지는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며, 예컨

대 작센슈피겔(Sachsenspiegel)에서는 어떤 범위에서는 원본과 주석 사이에 논쟁

되었다. 로마법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로마 시민법(ius civile)은 다음의 한도에서 로마 시민의 법이었다. 즉 시민이 아

니거나 계약에 근거하는 승인에 의하여 시민과 동등한 지위에 서지 않는 자거나

의 어느 자이든지 다 로마의 재판소에 당사자로서 출정하거나 시민법상의 특수

한 법률행위를 체결하거나 혹은 시민법의 명제에 따라서 판결되거나 하는 것이 불

가능하였다는 한도에서다. 어떠한 로마의 법률(lex)도 시민의 범위 밖에서는 유효

하지 않았다. 로마의 법률을 시민이 아닌 자에게 관계시킬 수 없다는 명제는 정치

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명제가 지배 아래 있으면

서 동시에 법에 동화되지 않는 영역 전체에 대하여 관리와 원로원의 절대적 권력

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사실 고래로부터 로마 시민은 결코 시민법에

만 따라서 판결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시민법을 적용하는 재판소에만 자기의 재판

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사(有史) 시대에는 시민법은 어떤 자들을 단

지 시민, 즉 이 특수한 신분단체의 구성원이라는 그의 자격에 있어서만 법적으

로 고찰의 대상으로 하는 특별법이라고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여

러 법권(法圈[Rechtskreis]) - 그들의 법권에 관여하는 자는 시민에만 한정하지

않았고 또 모든 시민도 아니었다 - 이 존재하였으며, 그러한 법권의 법은 혹은 신

분단체의 법으로서 혹은 사물에 관한 특별법으로서 나타난다. 먼저 첫째로 이에

속하는 것은 행정법상 규정된 법률사실의 전부로서 그것은 매우 다수이며 실제

상 중요하였다. 시민법상의 토지소유권은 그락쿠스(Gracchus) 시대까지는 정식

의 지정에 의하여 이러한 소유권의 대상으로 되어있던 일부의 토지 외에는 존재

하지 않았다. 공유지(ager publicus) 상의 점유의 지위들은 시민뿐만 아니라 단체

원(Bundesgenossen)도 거기에 관여하였으므로 시민법에 의하여 규제되지도 않

고 시민법상 소송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락쿠스 시대에 시민 전부가 이들의 지배

관계를 시민의 법률(lex)에 의해서 규제하려는 모양이 보였을 때 곧 시민단체 간

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단체원의 요구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점유의 지

위는 시민법에서는 알지 못했던 규칙에 따라서 처리하는 정무관의 특별한 소송절

차(Kognition)에만 복종하였다. 왜냐하면 시민법은 예컨대 영차권도 물적 부담

도 부역지도 몰랐으나 지방공유지의 행정법에는 이들 전부가 충분히 잘 알려져 있

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인 간의 거래에 있어서 국가의 재산관리법은 시민

법에 알려지지 않았던 제도들을 알고 그들의 제도는 법적으로는 시민법의 제도에

일치하는 경우에도 다른 명칭이 붙여졌다(문답계약에 의한 보증인에는 프라에스

[Praes], 행정법상의 저당에는 프라에디움[Praedium]). 여기서 전연 신분에 관계

가 없는 이 특별법의 담당자는 행정관리의 권한이었다. 거기서는 특별법의 법적 동

료단체는 존재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법적 이해관계인에 의해서 구성되었다.[100]

또 시민과 외인 사이에 법을 선언하는 법무관의 관할권이 특별법의 범위를 구성

하였다. 법무관은 시민법을 적용해도 좋았으나 그것은 시민의 법률(lex)의 힘에 의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권의 힘에 의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원천에서 유래하

는 다른 타당근거의 법, 즉 만민법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결코 법무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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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6 26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라는 관직 제도와 함께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아마 최초는 선서에 의하여 종

교적으로만 보호된데 불과하다고 추측되는 시장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이전

부터 규준으로 되어있던 국제적인 거래법이었다. 또 보호자와 예속민과의 사실상

의 렌트법적인 관계 - 이것은 초기에 있어서 실제상 가장 중요한 관계인데 - 이는

민사소송의 어떤 대상으로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게베레에 관한 독일법과 똑같

이 로마법에서는 시민법과 렌법과의 영역이 포세시오(possessio)(용가점유[容假占

有, praecarium])에서 서로 접촉하였다. 시민법은 다른 점에서도 그의 관계를 인

정하고 형벌규정은 그의 관계에 주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자체는 시민법

상 규제되지 않았다. 다른 한 편 상인과 특정한 영업자에게만 타당한 일정한 법제

도, 즉 선주소송(actio exercitoria), 인수계약(receptum), 은행업자(Argentarii)

의 특별법이 만민법의 내부에서 독자적인 특별법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후의 법발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개념이 거래법에도 보호관계법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성의(誠意, fides)의 개념이다. 성의의 개념을 한편으로는 충

성관계에 근거하여 생긴 제반의무를, 다른 한 편으로는 신의성실(fides bona)로서

순수한 거래상의 신의성실과 공정을 독특한 방법으로 그의 내용을 하고 있었다.

시민법에서는 성의의 개념은 원칙적으로 전연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초부터 엄격히 그러하였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12표법은 일정한 사기적

인 행위를 한 자를 증명부적격(improbus intestabilisque)으로 한다는 것을 규정

하고 있었다. 또 다수의 제정법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파렴치(infamia)의 벌이 규

정되었다. 그의 사생활상의 효과로서 일반적으로 증언이 인정되지 않으며, 즉 자신

이 증언을 하는 것도 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입증하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이것은

실제상은 널리 거래상 보이콧 되고 유언에 의한 상속재산취득이 제한된다는 것 외

에는 아니었다. 그 밖에 일정한 소가 법무관에 의해서 거부된다는 것도 그 효과의

하나이다. 성의의 원리는 그 비형식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보호관계의 영역에서도

또 거래행위의 영역에서도 결코 막연한 감각적 소산은 아니었다. 엄격히 구성된 일

련의 계약의 현저한 특색이 우리들이 계수한 로마거래법의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되

고 있는데 이들 계약은 전부 성의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온 것이다. 신탁

(fiducia)과 같은 고대의 제도도 제정시대로 된 후의 신탁유증(fideicommissum)

도 다 전적으로 성의를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신탁유증이 행하여지게 된 것은 (비

시민 내지 수정이 금지된 사람들에게의 유증에 있어서) 시민법상의 소권이 인정되

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고, 또 신탁의 이행은 시초는 습률상의 규칙에 의하여 보장

된 데에 불과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으로부터 성의가 원래 시민법의 보완물에 불

과하고 따라서 시민법보다 새로운 것이었다는 것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보호관계

라는 법제도는 시민법이라는 개념 자체와 같을 정도로 옛 부터 존재하는 것인데

시민법 밖에 존재하였다. 즉 시민법이 타당한 모든 사법의 총체였던 일은 결코 없

었다. 그러나 성의가 제정법상의 관계들을 규정하는 통일적 원리는 결코 아니었다

는 것은 물론이다. 성의에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의무로 되어있는 것은 오히려 구체

적인 관계 자체의 성질에 의하여 다르며, 이러한 성질에 의해서 다른 경우에서도

성의의 침해가 있었을 경우에는 다 같이 정해진 효과를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

리고 이것은 먼저 당연히 시민적 질서의 내부에서 그러하였다. 파렴치는 일정한 특

수한 행위의 결과였으며, 성의에 대한 모든 위반의 결과는 아니었다. 위법인 용태

에 대한 각종의 반응이 있고, 예컨대 감찰관이 하는 처벌, 임관후보자 중으로부

터 채용할 때에 집정관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 등도 각각 파렴치의 경우와도 성실

의 원리와도 같지 않으며, 또한 확고한 것도 아닌 특별한 요건에 따라서 행하여진

것이고 결코 순수하게 성의 자체의 침해에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호관계

상의 여러 의무의 위반에 대해서는 원래 가재판소(Hausgericht)에서 가부(家父)

가 제재를 가했다. 그 후 그러한 의무는 종교상 내지 습률상의 것으로 되고 결국

에는 피해방자인 순상업상의 예속민의 경우에는 시민법상의 보호까지도 받게 되

었다. 거래상의 성의가 원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우리는 모른다. 성의 계약

(bonae fidei-Kontrake)은 나중에는 법무관에 의하여 보호된 만민법의 다른 제

도처럼 법무관이 그의 직권에 의하여 소의 범형을 통하여 이것을 승인했던 것이나

그 이전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는지 우리들은 모른다. 아마 개별적으

로 또는 일반적으로 서약된 중재계약이 이루어지고 그의 위반은 후에는 선서에 의

한 화해계약의 파기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파렴치로 되었을 것이다. 만민

법의 제도[102]에 대하여 소권의 범형을 창설하는 것은 결코 시민권과의 구별을 배

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법은 여전히 시민의 순수한 계급법이었다. 때로는 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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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관직 제도와 함께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아마 최초는 선서에 의하여 종

교적으로만 보호된데 불과하다고 추측되는 시장의 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이전

부터 규준으로 되어있던 국제적인 거래법이었다. 또 보호자와 예속민과의 사실상

의 렌트법적인 관계 - 이것은 초기에 있어서 실제상 가장 중요한 관계인데 - 이는

민사소송의 어떤 대상으로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게베레에 관한 독일법과 똑같

이 로마법에서는 시민법과 렌법과의 영역이 포세시오(possessio)(용가점유[容假占

有, praecarium])에서 서로 접촉하였다. 시민법은 다른 점에서도 그의 관계를 인

정하고 형벌규정은 그의 관계에 주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자체는 시민법

상 규제되지 않았다. 다른 한 편 상인과 특정한 영업자에게만 타당한 일정한 법제

도, 즉 선주소송(actio exercitoria), 인수계약(receptum), 은행업자(Argentarii)

의 특별법이 만민법의 내부에서 독자적인 특별법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후의 법발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개념이 거래법에도 보호관계법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성의(誠意, fides)의 개념이다. 성의의 개념을 한편으로는 충

성관계에 근거하여 생긴 제반의무를, 다른 한 편으로는 신의성실(fides bona)로서

순수한 거래상의 신의성실과 공정을 독특한 방법으로 그의 내용을 하고 있었다.

시민법에서는 성의의 개념은 원칙적으로 전연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초부터 엄격히 그러하였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12표법은 일정한 사기적

인 행위를 한 자를 증명부적격(improbus intestabilisque)으로 한다는 것을 규정

하고 있었다. 또 다수의 제정법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파렴치(infamia)의 벌이 규

정되었다. 그의 사생활상의 효과로서 일반적으로 증언이 인정되지 않으며, 즉 자신

이 증언을 하는 것도 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입증하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이것은

실제상은 널리 거래상 보이콧 되고 유언에 의한 상속재산취득이 제한된다는 것 외

에는 아니었다. 그 밖에 일정한 소가 법무관에 의해서 거부된다는 것도 그 효과의

하나이다. 성의의 원리는 그 비형식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보호관계의 영역에서도

또 거래행위의 영역에서도 결코 막연한 감각적 소산은 아니었다. 엄격히 구성된 일

련의 계약의 현저한 특색이 우리들이 계수한 로마거래법의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되

고 있는데 이들 계약은 전부 성의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온 것이다. 신탁

(fiducia)과 같은 고대의 제도도 제정시대로 된 후의 신탁유증(fideicommissum)

도 다 전적으로 성의를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신탁유증이 행하여지게 된 것은 (비

시민 내지 수정이 금지된 사람들에게의 유증에 있어서) 시민법상의 소권이 인정되

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고, 또 신탁의 이행은 시초는 습률상의 규칙에 의하여 보장

된 데에 불과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으로부터 성의가 원래 시민법의 보완물에 불

과하고 따라서 시민법보다 새로운 것이었다는 것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보호관계

라는 법제도는 시민법이라는 개념 자체와 같을 정도로 옛 부터 존재하는 것인데

시민법 밖에 존재하였다. 즉 시민법이 타당한 모든 사법의 총체였던 일은 결코 없

었다. 그러나 성의가 제정법상의 관계들을 규정하는 통일적 원리는 결코 아니었다

는 것은 물론이다. 성의에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의무로 되어있는 것은 오히려 구체

적인 관계 자체의 성질에 의하여 다르며, 이러한 성질에 의해서 다른 경우에서도

성의의 침해가 있었을 경우에는 다 같이 정해진 효과를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

리고 이것은 먼저 당연히 시민적 질서의 내부에서 그러하였다. 파렴치는 일정한 특

수한 행위의 결과였으며, 성의에 대한 모든 위반의 결과는 아니었다. 위법인 용태

에 대한 각종의 반응이 있고, 예컨대 감찰관이 하는 처벌, 임관후보자 중으로부

터 채용할 때에 집정관이 이것을 거부하는 것 등도 각각 파렴치의 경우와도 성실

의 원리와도 같지 않으며, 또한 확고한 것도 아닌 특별한 요건에 따라서 행하여진

것이고 결코 순수하게 성의 자체의 침해에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호관계

상의 여러 의무의 위반에 대해서는 원래 가재판소(Hausgericht)에서 가부(家父)

가 제재를 가했다. 그 후 그러한 의무는 종교상 내지 습률상의 것으로 되고 결국

에는 피해방자인 순상업상의 예속민의 경우에는 시민법상의 보호까지도 받게 되

었다. 거래상의 성의가 원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우리는 모른다. 성의 계약

(bonae fidei-Kontrake)은 나중에는 법무관에 의하여 보호된 만민법의 다른 제

도처럼 법무관이 그의 직권에 의하여 소의 범형을 통하여 이것을 승인했던 것이나

그 이전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는지 우리들은 모른다. 아마 개별적으

로 또는 일반적으로 서약된 중재계약이 이루어지고 그의 위반은 후에는 선서에 의

한 화해계약의 파기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파렴치로 되었을 것이다. 만민

법의 제도[102]에 대하여 소권의 범형을 창설하는 것은 결코 시민권과의 구별을 배

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법은 여전히 시민의 순수한 계급법이었다. 때로는 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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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8 26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관은 만약 로마시민이었으면(si civis Romanus esset)이라는 형식으로 비시민에

대한 소권 범행에 시민법을 계수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은연중에 만민법(ius

gentium)으로 된 제도도 있었다. 제정시대에 비로소 신민의 다른 특권과 더불어

시민법과 만민법과의 구별은 전적으로 소멸하였다.

성의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은 봉쇄적 신분단체를 결코 형

성하지 않았다. 예농민 - 다른데서 설명하듯이, 몸젠(Mommsen)이 이것을 평민

의 단체와 동일시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 는 신분단체는 아니었고, 물론 신분에

무관계한 성의계약이나 만민법에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러

하였다. 끝으로 법무관법은 그 자체로서는 만민법과 동일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며, 만민법의 계수는 결코 법무관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널리 법조가 만민법의 법원칙을 시민법에게 도입함으로써도 이루어졌다. 또

본래의 신분인 노예·자유인·기사·원로원 의원으로 될 수 있는 가계 등은 공화정

시대에서도 제정시대에서처럼 본래의 자치의 담당자로 될 수 있을만한 단체조직을

가지지 않았다. 공화정시대에서는 정치적·경찰적 이유들에서 항상 반복하여 사적

단체에 대해서 엄격한 간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억압의 시기와 관용의 시기

가 교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정시대에는 사적 단체 그 자체가 탐탁하지 않았

음은 당연하다.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유력한 자의 집단에 왕정은 통제를 받지

않는 각종의 단체들에게 정치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정 시대와

제정시대의 로마법은 실제로 자치를 현대적 의미에서의 사단법 내지 법인법으로서

알고 있었음에 불과하다. 법인이나 사단이 허가되거나 특허가 주어지거나에 의하

여 성립한 범위에서는 자치도 인정되었다. 어느 정도로 법인이나 사단이 존립했었

는가는 인적 단체들의 권리능력이라는 다른 문제를 일반적으로 논할 시기에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로 한다.

국가기구가 법의 창조를 독점하기 위해서 속인법의 시기의 자율적인 인적 단체

들이 일반적으로 받은 변화와 합병은 법률상 이러한 단체들을 권리의 담당자로서

취급하는 형식의 변화 속에 나타난다. 법기술상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언제나 이

러한 취급을 아니할 수 없다. 즉 한편으로는 독점적으로 전유된 목적재산이 존재

하고, 그것이 전적으로 법적 동료 자신을 위해서 이기는 하나 여하튼 공통의 이용

을 위해서만 처분된다는 경우이거나, 또는 다른 한 편 이러한 목적재산에 관해서

법률행위적인 행위가 경제적으로 필요로 되는 경우, 따라서 자치적인 인적 단체들

이 정치기구 안에서 규정된 법발견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적용될 공통의 법에 복종

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 한 또 그 범위에서 문제는 간단한 방법으로 처

리될 수 있다. 즉 어떤 단체의 구성원이 다른 단체의 구성원에게 그의 단체의 구

성원동료가 한 행위에 따라서 단체기관 행위에 대해서도 연대책임을 부담시킨다는

방법이다. 혈수와 함께 보편적 현상으로서 복구, 즉 어떤 법동료의 신체와 재산을

당해 개인과 다른 전부의 개인의 의무에 대하여 구속하는 것이 행하여 진 것은 그

때문이다. 중세에서는 복구, 상호적으로 법정에서 제소를 인정하고 복구를 회피하

는 것, 또 상호적인 법률상의 공조에 관한 협정 등은 도시들 간에 있어서 부단한

상의(商議)의 대상이 되었다. 또 혈수와 같이 시원적인 것은 화해이다. 그런데 누가

화해를 체결하고 외부에 대해서 법동료를 대리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

되는가는 전적으로 법동료가 누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사실상 보통으로 하나에

관해서 국외자가 경험한 바에 따라서 정해진다. 그 경우에는 시초는 중세 초기의

법에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즉, 촌락동료, 길드동료, 마르크동료, 기타 어

떤 집단에 관해서 보더라도 그 결의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은 모두 단체의 대외

적 행동이 결의를 통하여 얻어진 의사의 일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또 특수한 법

적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여서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의

하여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의의 필요성과 그의 구속력은 단체법의

특징적인 발전요소였다는 호이슬러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결의

와 계약 사이의 구별은 객관적 규범의 개념과 주관적인 청구권 일반의 개념의 구

별처럼 여전히 유동적이었음은 의문이 없다. 결의에 의하여 정립된 것은 종종 협정

(Pactus)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항상 구별의 싹은 존재하였다. 그것도 그 싹이 되

었던 것은 바로 일반적으로 시원적인 관념, 즉 결의가 거기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동의한 사람만을 구속한다는 관념, 결국 전원일치가 필요하다는 관념에 의해서이

고 이것은 외관상 마치 결의가 위의 관념에 따른다면 계약으로서만 존립할 수 있

다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위의 관념은 오히려 타당한 무릇 법이 계시로서의 성

격을 가졌었다는 것에 의하는 것이었다. 계시로서의 법이라는 생각에 따르면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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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68 26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관은 만약 로마시민이었으면(si civis Romanus esset)이라는 형식으로 비시민에

대한 소권 범행에 시민법을 계수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은연중에 만민법(ius

gentium)으로 된 제도도 있었다. 제정시대에 비로소 신민의 다른 특권과 더불어

시민법과 만민법과의 구별은 전적으로 소멸하였다.

성의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은 봉쇄적 신분단체를 결코 형

성하지 않았다. 예농민 - 다른데서 설명하듯이, 몸젠(Mommsen)이 이것을 평민

의 단체와 동일시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 는 신분단체는 아니었고, 물론 신분에

무관계한 성의계약이나 만민법에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러

하였다. 끝으로 법무관법은 그 자체로서는 만민법과 동일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며, 만민법의 계수는 결코 법무관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널리 법조가 만민법의 법원칙을 시민법에게 도입함으로써도 이루어졌다. 또

본래의 신분인 노예·자유인·기사·원로원 의원으로 될 수 있는 가계 등은 공화정

시대에서도 제정시대에서처럼 본래의 자치의 담당자로 될 수 있을만한 단체조직을

가지지 않았다. 공화정시대에서는 정치적·경찰적 이유들에서 항상 반복하여 사적

단체에 대해서 엄격한 간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억압의 시기와 관용의 시기

가 교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정시대에는 사적 단체 그 자체가 탐탁하지 않았

음은 당연하다. 민주정은 사회경제적으로 유력한 자의 집단에 왕정은 통제를 받지

않는 각종의 단체들에게 정치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정 시대와

제정시대의 로마법은 실제로 자치를 현대적 의미에서의 사단법 내지 법인법으로서

알고 있었음에 불과하다. 법인이나 사단이 허가되거나 특허가 주어지거나에 의하

여 성립한 범위에서는 자치도 인정되었다. 어느 정도로 법인이나 사단이 존립했었

는가는 인적 단체들의 권리능력이라는 다른 문제를 일반적으로 논할 시기에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로 한다.

국가기구가 법의 창조를 독점하기 위해서 속인법의 시기의 자율적인 인적 단체

들이 일반적으로 받은 변화와 합병은 법률상 이러한 단체들을 권리의 담당자로서

취급하는 형식의 변화 속에 나타난다. 법기술상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언제나 이

러한 취급을 아니할 수 없다. 즉 한편으로는 독점적으로 전유된 목적재산이 존재

하고, 그것이 전적으로 법적 동료 자신을 위해서 이기는 하나 여하튼 공통의 이용

을 위해서만 처분된다는 경우이거나, 또는 다른 한 편 이러한 목적재산에 관해서

법률행위적인 행위가 경제적으로 필요로 되는 경우, 따라서 자치적인 인적 단체들

이 정치기구 안에서 규정된 법발견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적용될 공통의 법에 복종

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 한 또 그 범위에서 문제는 간단한 방법으로 처

리될 수 있다. 즉 어떤 단체의 구성원이 다른 단체의 구성원에게 그의 단체의 구

성원동료가 한 행위에 따라서 단체기관 행위에 대해서도 연대책임을 부담시킨다는

방법이다. 혈수와 함께 보편적 현상으로서 복구, 즉 어떤 법동료의 신체와 재산을

당해 개인과 다른 전부의 개인의 의무에 대하여 구속하는 것이 행하여 진 것은 그

때문이다. 중세에서는 복구, 상호적으로 법정에서 제소를 인정하고 복구를 회피하

는 것, 또 상호적인 법률상의 공조에 관한 협정 등은 도시들 간에 있어서 부단한

상의(商議)의 대상이 되었다. 또 혈수와 같이 시원적인 것은 화해이다. 그런데 누가

화해를 체결하고 외부에 대해서 법동료를 대리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

되는가는 전적으로 법동료가 누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사실상 보통으로 하나에

관해서 국외자가 경험한 바에 따라서 정해진다. 그 경우에는 시초는 중세 초기의

법에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즉, 촌락동료, 길드동료, 마르크동료, 기타 어

떤 집단에 관해서 보더라도 그 결의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은 모두 단체의 대외

적 행동이 결의를 통하여 얻어진 의사의 일치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또 특수한 법

적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여서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의

하여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의의 필요성과 그의 구속력은 단체법의

특징적인 발전요소였다는 호이슬러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결의

와 계약 사이의 구별은 객관적 규범의 개념과 주관적인 청구권 일반의 개념의 구

별처럼 여전히 유동적이었음은 의문이 없다. 결의에 의하여 정립된 것은 종종 협정

(Pactus)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항상 구별의 싹은 존재하였다. 그것도 그 싹이 되

었던 것은 바로 일반적으로 시원적인 관념, 즉 결의가 거기에 관여하고 또 그것에

동의한 사람만을 구속한다는 관념, 결국 전원일치가 필요하다는 관념에 의해서이

고 이것은 외관상 마치 결의가 위의 관념에 따른다면 계약으로서만 존립할 수 있

다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위의 관념은 오히려 타당한 무릇 법이 계시로서의 성

격을 가졌었다는 것에 의하는 것이었다. 계시로서의 법이라는 생각에 따르면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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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0 27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법은 단 하나가 아니면 안 되었다. 정당한 법을 발견하기 위한 마술적·카리스마

적 법정이 소멸했을 때에 다수자가 만든 법이 정당하며, 따라서 소수자는 다수자

에 의하여 증명된 법에 가담할 의무를 진다는 관념이 생길 가능성이 생긴 것이고,

또 현재에 그러한 관념이 생겼다. 그러나 소수자가 다수자의 법에 따르는 데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철저한 수단에 의한 강제가 가해졌고 소수자가 따르게 되기 이전

에는 역시 다수자의 결의는 아직 법이 아니고 누구든지 그 결의에 의하여 구속되

지 않았고 이것이 전술한 관념방식의 실제적인 의미였다. 이에 반하여 누구라도 임

의의 계약을 타인과 체결하는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인정된 것은 물론이다. 따라

서 이들의 사고 형식에 있어서는 법의 창조로서의 정립과 권리의 창조인 계약과의

구별이 매우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의 관념에 언

제나 의뢰하였다. 의결은 또 보충개념으로서 그것을 실시하는 기관을 필요로 했

다. 그 경우 기관설정의 방법, 즉 개개의 경우에 선임하는가 기관의 직무를 세습으

로 하는 가는 아주 여러 가지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의 단체 간 또는

단체 내부에서의 분화의 과정 및 전유의 과정이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개인이 동시

에 여러 가지의 단체에 속하고, 다른 한 편 법동료 자체의 내부관계에서도 단체기

관의 처분권의 정도도 개인의 처분권의 점점 더 합리성을 가한 확고한 규칙에 복

종하게 되었을 때에 한편으로 개인의 목적계약이 증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에 대한 단체동료 전체의 목적계약이 증가하여 - 이것은 교환경제발전의 결과이

다 - 각 구성원 및 각 단체기관의 각 행위의 효과를 분명하게 정해 둘 필요가 생

겼을 때에 곧 단체 지위의 문제와 계약거래나 소송에 있어서의 단체기관의 자격의

문제가 어떤 정도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법기술

적으로 해석한 것이 법인 개념이라는 착상이다. 법학적으로 볼 때 이 법인이라는

명칭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법 개념은 언제나 법적인 것이기 때문

이다. 태아는 성인 시민과 같이 주체적 권리의무의 담당자로서 취급되나 노예는 그

렇지 않다고 한다면 태아와 노예는 일정한 효과를 실현하기 위한 법기술적 수단이

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인격은 언제나 무엇인가 법적 의미에서의 「물건」(Sachen)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처럼 인위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계획대로 선택된 법적 메르크

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나 단체들과 이익사회 관계들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는 매우 많은 선택의 범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단체의 법적 지위가 하나의 문

제로 되었다.

단체가 법인격을 가진다는 생각을 가장 전반적으로 관철시키면 독립하여 구성

된 단체의 법영역으로부터 구성원법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하게 된다. 즉 규칙에 의

하여 정해진 일정한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단독으로 단체에 의무를 지게하고 권리

를 부여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데, 이러한 법률관계는 개인의 인격과 재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개인의 계약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법적으로는 전연 다른

단체재산에 귀속시킨다. 그와 같이 구성원 자체가 (단체 내규에 따라서) 요구를 하

고 또는 단체에 급부해야할 것은 단체재산과 법적으로는 전연 별개의 사유재산에

속하는 청구권 내지 의무이다. 개개의 구성원 자체는 단체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없으며 단체에 의무를 지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은 법적으로는 기관만이 그리

고 단체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이것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권한을 가지

는 구성원이 확정된 규칙에 의하여 소집되어 결의를 하는 집회만이 규칙에 근거하

여 구속력 있는 결의를 하는 권능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나 가질 수 있다

는 것이다. 법인격 개념은 이로부터 더 일층 확장되어 규칙으로 특정되어 있기는

하나 단체에까지 결합하지는 아니한 다수인이 그 수익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에 관한 처분에다 기초를 주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가 있으며(재단·목적재산), 이

개념으로 위의 다수인의 이익을 법거래상 독립하여 대표하는 자격이 부여되어 규

칙으로 정한 한 사람의 담당자를 법이 인정하게 된다.

법인격을 가지는 단체는 법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

는 순수한 사법상의 권리승계에 의하거나 일정한 법인체(Körperschaft)의 결의에

의해서만 확대할 수 있는 확정된 범위의 사람들이 권한 있는 유일한 구성원으로서

취급되며, 또 단체의 관리가 법적으로는 사람들의 위임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구성

이고 이것이 사단법인이다. 혹은 또 원리적으로는 재단이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도

구성될 수 있다. 즉 법적으로는 단체의 이름으로서 행하는 단체기관만이 존재하나

구성원은 대략 사원이 되도록 의무 지워지고, 따라서 새로운 구성원의 가입은 기

존의 구성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기관의 자유의사나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이루

어지며 이러한 단순한 구성원, 예컨대 학교의 생도 같은 것 자신은 원칙으로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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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법은 단 하나가 아니면 안 되었다. 정당한 법을 발견하기 위한 마술적·카리스마

적 법정이 소멸했을 때에 다수자가 만든 법이 정당하며, 따라서 소수자는 다수자

에 의하여 증명된 법에 가담할 의무를 진다는 관념이 생길 가능성이 생긴 것이고,

또 현재에 그러한 관념이 생겼다. 그러나 소수자가 다수자의 법에 따르는 데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철저한 수단에 의한 강제가 가해졌고 소수자가 따르게 되기 이전

에는 역시 다수자의 결의는 아직 법이 아니고 누구든지 그 결의에 의하여 구속되

지 않았고 이것이 전술한 관념방식의 실제적인 의미였다. 이에 반하여 누구라도 임

의의 계약을 타인과 체결하는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인정된 것은 물론이다. 따라

서 이들의 사고 형식에 있어서는 법의 창조로서의 정립과 권리의 창조인 계약과의

구별이 매우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의 관념에 언

제나 의뢰하였다. 의결은 또 보충개념으로서 그것을 실시하는 기관을 필요로 했

다. 그 경우 기관설정의 방법, 즉 개개의 경우에 선임하는가 기관의 직무를 세습으

로 하는 가는 아주 여러 가지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의 단체 간 또는

단체 내부에서의 분화의 과정 및 전유의 과정이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개인이 동시

에 여러 가지의 단체에 속하고, 다른 한 편 법동료 자체의 내부관계에서도 단체기

관의 처분권의 정도도 개인의 처분권의 점점 더 합리성을 가한 확고한 규칙에 복

종하게 되었을 때에 한편으로 개인의 목적계약이 증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에 대한 단체동료 전체의 목적계약이 증가하여 - 이것은 교환경제발전의 결과이

다 - 각 구성원 및 각 단체기관의 각 행위의 효과를 분명하게 정해 둘 필요가 생

겼을 때에 곧 단체 지위의 문제와 계약거래나 소송에 있어서의 단체기관의 자격의

문제가 어떤 정도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법기술

적으로 해석한 것이 법인 개념이라는 착상이다. 법학적으로 볼 때 이 법인이라는

명칭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법 개념은 언제나 법적인 것이기 때문

이다. 태아는 성인 시민과 같이 주체적 권리의무의 담당자로서 취급되나 노예는 그

렇지 않다고 한다면 태아와 노예는 일정한 효과를 실현하기 위한 법기술적 수단이

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인격은 언제나 무엇인가 법적 의미에서의 「물건」(Sachen)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처럼 인위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계획대로 선택된 법적 메르크

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나 단체들과 이익사회 관계들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는 매우 많은 선택의 범위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단체의 법적 지위가 하나의 문

제로 되었다.

단체가 법인격을 가진다는 생각을 가장 전반적으로 관철시키면 독립하여 구성

된 단체의 법영역으로부터 구성원법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하게 된다. 즉 규칙에 의

하여 정해진 일정한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단독으로 단체에 의무를 지게하고 권리

를 부여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데, 이러한 법률관계는 개인의 인격과 재산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개인의 계약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법적으로는 전연 다른

단체재산에 귀속시킨다. 그와 같이 구성원 자체가 (단체 내규에 따라서) 요구를 하

고 또는 단체에 급부해야할 것은 단체재산과 법적으로는 전연 별개의 사유재산에

속하는 청구권 내지 의무이다. 개개의 구성원 자체는 단체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없으며 단체에 의무를 지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은 법적으로는 기관만이 그리

고 단체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이것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권한을 가지

는 구성원이 확정된 규칙에 의하여 소집되어 결의를 하는 집회만이 규칙에 근거하

여 구속력 있는 결의를 하는 권능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나 가질 수 있다

는 것이다. 법인격 개념은 이로부터 더 일층 확장되어 규칙으로 특정되어 있기는

하나 단체에까지 결합하지는 아니한 다수인이 그 수익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에 관한 처분에다 기초를 주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가 있으며(재단·목적재산), 이

개념으로 위의 다수인의 이익을 법거래상 독립하여 대표하는 자격이 부여되어 규

칙으로 정한 한 사람의 담당자를 법이 인정하게 된다.

법인격을 가지는 단체는 법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

는 순수한 사법상의 권리승계에 의하거나 일정한 법인체(Körperschaft)의 결의에

의해서만 확대할 수 있는 확정된 범위의 사람들이 권한 있는 유일한 구성원으로서

취급되며, 또 단체의 관리가 법적으로는 사람들의 위임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구성

이고 이것이 사단법인이다. 혹은 또 원리적으로는 재단이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도

구성될 수 있다. 즉 법적으로는 단체의 이름으로서 행하는 단체기관만이 존재하나

구성원은 대략 사원이 되도록 의무 지워지고, 따라서 새로운 구성원의 가입은 기

존의 구성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기관의 자유의사나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이루

어지며 이러한 단순한 구성원, 예컨대 학교의 생도 같은 것 자신은 원칙으로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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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2 27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리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구성이며, 이것이 법적 의미에서의 기구

(사회정책적인 기구의 개념과는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이다.

기구가 변화하여 한편으로는 재단이 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단이 되는 경우,

그 변화는 법학적으로도 유동적이다. [106] 기구가 자주적(Autokephal)이냐 타주

적(Hetrtokephal)이냐 하는 것은 기이르케가 생각한 것처럼 결정적인 것은 아니

다. 교회는 기구이지만 자주적일 수 있다.

법기술적으로 보면 단체가 단체의 명의로 계약을 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재산

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법인격 개념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법인격은

개개의 상업조합과 같이 그 사물적인 본질상 적게 제한된 수의 관여자로서 이루어

지며, 때로는 시기적으로도 한정되어 있는 이익사회에 대해서는 부적당하다. 이 경

우에는 개인의 권리영역을 전체의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신용상 좋

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신용가치가 인정되는 것은 분리된 재산의 존재에 근거하

는 것이기는 하나 먼저 제1차적으로는 전체의 채무에 대하여 관여자의 전부가 책

임을 진다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을 만드는

것도 반드시 합목적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단체들과 이익사회

관계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적어도 과거에 있어서 대부분의 법이 어떤 정도로 그

의 싹을 인정했던 합수제(合手制[Gesamthand])의 원리가 자본주의적인 신용상

의 이해에 관해서 바로 적합한 형식이며, 그 합수제 원리라는 것은 혹은 관여자의

전원만이 공통된 법적 행위에 의하여 전원을 대표하는 자격을 가지거나, 또는 약

간의 개인 또는 한 사람의 개인도 전원의 이름으로서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

지는가의 어느 것이며, 그리고 전원이 그의 일신 및 그의 재산으로서 책임에 임한

다는 것을 말한다. 합수제 원리는 가공동체의 연대책임에서 유래하며, 그의 특수

한 성격은 계속된 상속공동체 안에서 전체 재산이 관여자 개인의 재산으로부터

전체 책임이 개인 책임으로부터 각각 법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한 때에 얻어진 것이

며, 그 분리의 과정은 기술하였듯이 형제단체(Brüderlichkeit)가 상업상 해체한 결

과인 것이다. 자유의사에 의한 많은 협동체에 있어서는 가공동체의 형제단체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내부적 외부적 관계들이 혹은 원래 존재했었던 것이었고 혹은 법

기술상의 합목적적인 원리들에 근거하여 채택된 것이었는데 합수제 원리는 상속

공동체로부터 다시 이들의 협동체의 기반으로서 확대되었다. 기술하였듯이 오늘날

의 합명회사법은 바로 자본주의영업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가공동체적 관계를 합

리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합자회사의 여러 종류의 형식은 합수제 원리와 보편적으

로 유포된 콤멘다(Commenda) 그리고 소키에타스 마리스(societas maris)와 결

합한 것이다. 독일의 유한책임회사는 주식회사가 보다 소규모이며 가족적인 기업,

특히 공동상속인의 기업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적합하지 않고, 그 중에 근대의 공

시강제란 점에서 불편하기 때문에 이것에 가름하여 합리적으로 새로 발명된 것이

다. 상인과 선주 그리고 선원 간의 형제적 결사(스페인법에서의 아게르마나멘트

[agermanament])는 본질상 항해공동기업에는 본연적인 것이었다. 상인의 형제적

관계는 선박업에서의 가공동체에 근거하는 영업의 성립과 전적으로 대응하여 합

수적 이익사회 관계에로 발전하였으나, 다른 한편 모험대차와 해상투하(Seewurf)

에 관한 원칙에 의해서 항해상의 이해관계인의 순수하게 즉물적인 위험공동체로

되어갔다. 이들 전부의 경우에 전형적인 것은 거래관계에 의한 신분계약의 배제이

었으나 그때에 전체를 독립의 권리주체로 한다는 법기술적으로 합목적적인 취급

과 공통으로 보유하는 재산의 분리는 유지되었다. 다른 한 편, 사단의 설립의 경우

이면 기술상 필요하였을 기관기구를 형식적으로 관료화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행

해지지 않았다. 합리적으로 개조된 합수제 관계가 중세 이래의 서양의 법체계에서

처럼 특수하게 발전한 것은 다른 어떠한 법체계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은

합수제 관계가 위와 같은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로마법상 합수제를 볼 수 없음

은 - 고대의 국제적 거래법의 많은 특수한 제도는 그리스, 예컨대 로드의 거래법

에 의거하고 있는데 그리스의 거래법의 발전은 충분이 알려져 있지 않다 - 일부

는 법기술적으로 국가적인 시민법의 특질에 기초하는 이유에 의하는 것이며, 또 뒤

에 말하겠지만 경제적인 이유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 기술한 바와

같은 많은 형태를 갖지 않고도 해 나가는 것이 비교적 쉬웠던 것은 고대 자본주의

의 특성과 관련한다. 고대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노예자본인 동시에 국가에 뿌리

를 둔 우수하게 정치적인 자본주의였다. 노예는 수익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그 계

약에 의하여 가부는 무제한의 권리를 얻었고, 또 유한의 책임을 졌었고 노예의 특

수재산(Peculium)은 특별한 재산이라는 방식으로 유한적으로 취급되었는데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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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2 27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리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구성이며, 이것이 법적 의미에서의 기구

(사회정책적인 기구의 개념과는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이다.

기구가 변화하여 한편으로는 재단이 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단이 되는 경우,

그 변화는 법학적으로도 유동적이다. [106] 기구가 자주적(Autokephal)이냐 타주

적(Hetrtokephal)이냐 하는 것은 기이르케가 생각한 것처럼 결정적인 것은 아니

다. 교회는 기구이지만 자주적일 수 있다.

법기술적으로 보면 단체가 단체의 명의로 계약을 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재산

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법인격 개념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다. 법인격은

개개의 상업조합과 같이 그 사물적인 본질상 적게 제한된 수의 관여자로서 이루어

지며, 때로는 시기적으로도 한정되어 있는 이익사회에 대해서는 부적당하다. 이 경

우에는 개인의 권리영역을 전체의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신용상 좋

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신용가치가 인정되는 것은 분리된 재산의 존재에 근거하

는 것이기는 하나 먼저 제1차적으로는 전체의 채무에 대하여 관여자의 전부가 책

임을 진다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체를 대표하는 기관을 만드는

것도 반드시 합목적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단체들과 이익사회

관계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적어도 과거에 있어서 대부분의 법이 어떤 정도로 그

의 싹을 인정했던 합수제(合手制[Gesamthand])의 원리가 자본주의적인 신용상

의 이해에 관해서 바로 적합한 형식이며, 그 합수제 원리라는 것은 혹은 관여자의

전원만이 공통된 법적 행위에 의하여 전원을 대표하는 자격을 가지거나, 또는 약

간의 개인 또는 한 사람의 개인도 전원의 이름으로서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

지는가의 어느 것이며, 그리고 전원이 그의 일신 및 그의 재산으로서 책임에 임한

다는 것을 말한다. 합수제 원리는 가공동체의 연대책임에서 유래하며, 그의 특수

한 성격은 계속된 상속공동체 안에서 전체 재산이 관여자 개인의 재산으로부터

전체 책임이 개인 책임으로부터 각각 법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한 때에 얻어진 것이

며, 그 분리의 과정은 기술하였듯이 형제단체(Brüderlichkeit)가 상업상 해체한 결

과인 것이다. 자유의사에 의한 많은 협동체에 있어서는 가공동체의 형제단체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내부적 외부적 관계들이 혹은 원래 존재했었던 것이었고 혹은 법

기술상의 합목적적인 원리들에 근거하여 채택된 것이었는데 합수제 원리는 상속

공동체로부터 다시 이들의 협동체의 기반으로서 확대되었다. 기술하였듯이 오늘날

의 합명회사법은 바로 자본주의영업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가공동체적 관계를 합

리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합자회사의 여러 종류의 형식은 합수제 원리와 보편적으

로 유포된 콤멘다(Commenda) 그리고 소키에타스 마리스(societas maris)와 결

합한 것이다. 독일의 유한책임회사는 주식회사가 보다 소규모이며 가족적인 기업,

특히 공동상속인의 기업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적합하지 않고, 그 중에 근대의 공

시강제란 점에서 불편하기 때문에 이것에 가름하여 합리적으로 새로 발명된 것이

다. 상인과 선주 그리고 선원 간의 형제적 결사(스페인법에서의 아게르마나멘트

[agermanament])는 본질상 항해공동기업에는 본연적인 것이었다. 상인의 형제적

관계는 선박업에서의 가공동체에 근거하는 영업의 성립과 전적으로 대응하여 합

수적 이익사회 관계에로 발전하였으나, 다른 한편 모험대차와 해상투하(Seewurf)

에 관한 원칙에 의해서 항해상의 이해관계인의 순수하게 즉물적인 위험공동체로

되어갔다. 이들 전부의 경우에 전형적인 것은 거래관계에 의한 신분계약의 배제이

었으나 그때에 전체를 독립의 권리주체로 한다는 법기술적으로 합목적적인 취급

과 공통으로 보유하는 재산의 분리는 유지되었다. 다른 한 편, 사단의 설립의 경우

이면 기술상 필요하였을 기관기구를 형식적으로 관료화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행

해지지 않았다. 합리적으로 개조된 합수제 관계가 중세 이래의 서양의 법체계에서

처럼 특수하게 발전한 것은 다른 어떠한 법체계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은

합수제 관계가 위와 같은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로마법상 합수제를 볼 수 없음

은 - 고대의 국제적 거래법의 많은 특수한 제도는 그리스, 예컨대 로드의 거래법

에 의거하고 있는데 그리스의 거래법의 발전은 충분이 알려져 있지 않다 - 일부

는 법기술적으로 국가적인 시민법의 특질에 기초하는 이유에 의하는 것이며, 또 뒤

에 말하겠지만 경제적인 이유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 기술한 바와

같은 많은 형태를 갖지 않고도 해 나가는 것이 비교적 쉬웠던 것은 고대 자본주의

의 특성과 관련한다. 고대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노예자본인 동시에 국가에 뿌리

를 둔 우수하게 정치적인 자본주의였다. 노예는 수익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그 계

약에 의하여 가부는 무제한의 권리를 얻었고, 또 유한의 책임을 졌었고 노예의 특

수재산(Peculium)은 특별한 재산이라는 방식으로 유한적으로 취급되었는데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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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4 27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노예의 이용이 오늘날 여러 가지 형식의 유한책임으로 실현된 효과의 적어도 일

부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점에 관해서는 그 밖에 다음

의 사실도 존재한다. 즉 위의 제한은 조합법에서 합수제가 전연 인정되지 않고 연

대적인 권리의 설정, 연대적인 의무의 부담이 허용되는 것은 특수한 공동연대계약

(Korrealsponsionen)에 근거하는 경우에 한했던 것과 결부하여 항상적인 금융수

요를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산업적인 계속적 경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 이것은

로마의 경제조직의 특징이다 - 을 가리키는 법률적 징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108]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정치에 연결되었다는 의미는 사적 거래에 대해서 흠결되

어 있던 법률제도가 국가적 임차인(세금·광산·소금에 관한 임차인)인 조세청부조

합원(socii vectigalium publicorum)에 대해서는 제정 초기에 이미 사법상으로도

인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국가적 임차인의 조합의 법

적·경제적 구조는 한 사람 또는 다수의 유력한 기업가가 발행자에 대하여 자본조

달을 인수하고, 다른 기업가가 공동으로 이에 협력한다는 오늘날 유가증권의 발행

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은행이 통례로 하는 형식을 단순한 합자회사 관계와 결합시

킨 것이었다. 공적 지위의 이용에 관한(de loco publico fruendo) 특시명령 그리고

다른 법원(法源)에 나타난 조합의 관리자인 조합원(청부인[manceps])은 당해 조합

을 구성하는 것이며, 조합에 관여하는 자(affines)는 단순한 유한책임사원이었으며,

사실상의 법적 지위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도 근대의 그것과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한편 국가기구 자체도 민사법에서의 법인으로서 이것을 취급할 것인가의

여부의 문제는 일부는 법기술적인 것, 일부는 정치적인 것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국가를 법인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실제로 먼저 다음의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국

가적 지배의 기관들에 속하는 법영역이 나뉘어서 그들 기관들이 개인으로서 가지

는 여러 권리의무를 수반하는 개인적 법영역과, 그의 재산법상의 관계들이 하나의

특별한 복합체인 기구재산에 귀속시켜지는 공법적 영역으로 되었다는 것이고, 그

리고 또 국가기관이 직무를 행하는 영역도 역시, 자연 지배적인 관계들의 영역과

사법상의 관계들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며, 이러한 후자의, 전적으로 재산

법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사적 거래의 법의 일반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다음에

국가에게 이러한 인격을 인정하는 결과로서 보통 국가는 일반 소송에 있어서 사인

과 대등한 상대방 소송당사자로서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제소하고 또는 청구를

받을 자격이 인정된다. 법적으로 보면, 법인격의 문제는 이 후자의 문제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로마국(populus Romanus)이 예컨대 유언에 근거

하는 사법상의 취득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의문이 없으나 소송능력은 가지지 않았

기 때문이다. 또 기구적, 따라서 국가적·정치적인 조직이 전부 독립의 법인격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취득능력이라는 의미에서는 보통 의문이 없는 것이며,

그들이 보통 소송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법인격과 소송의

허용성이 인정되더라도 국가기구의 계약에 대해서 사적 계약에서와는 전연 다른

원칙이 적용되는 일이 있다. 물론 이것은 많은 경우에 로마에서처럼 통상재판소를

배제하고, 국가와의 계약에서 생긴 분쟁을 행정관이 재판한다는 것과 결부된 것

이 보통이다. 소송당사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보통 법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많은

합수적 이익사회관계(Gesamthand Vergesellschaftungen)에 대해서도 인정되

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인격의 문제는 법사적으로는 많은 경우,

소송신탁(Prozeßstandschaft)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하여 생긴다. 이것은 특히

공공단체에 관해서 타당하다. 정치권력이 신하에 대한 지배자의 입장으로서 사인

과 교섭할 수가 없고, 자유로운 계약에 의하여 따라서 특히 정치권력에 대하여 자

본가의 신용원조나 기업조직이 필요하며, 또 경합하는 다수의 정치단체들 사이에

서 자본이 자유로이 이전하기 위하여 정치권력이 라이투르기슈한(leiturgisch) 강

제를 가할 수 없을 때 이러한 자본가와의 거래에 의하여 사인의 급부를 구할 수밖

에 없을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하였고, 또 정치권력이 라이투르기슈한 강제수단의

적용을 할 수 없고, 또는 이것을 원치 않은 자유로운 수공업자 및 노동자와의 거래

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이들 전부의 경우에서 상술한 모든 문제가 동시에 생겼

다. 국가의 법인격과 통상재판소의 관할권의 문제가 동시에 긍정될 경우에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인의 이익 보장이 점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이 두

요청 중의 하나가 인정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 보장이 감소하게 되는 것은 아니

다. 왜냐하면 계약상의 의무 이행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왕을 제소하는 것은 고래로부터 가능하였으나 이

것은 14세기에 플로렌스의 은행가가 거액의 부채의 지불을 거절당하였을 때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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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4 27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한 노예의 이용이 오늘날 여러 가지 형식의 유한책임으로 실현된 효과의 적어도 일

부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점에 관해서는 그 밖에 다음

의 사실도 존재한다. 즉 위의 제한은 조합법에서 합수제가 전연 인정되지 않고 연

대적인 권리의 설정, 연대적인 의무의 부담이 허용되는 것은 특수한 공동연대계약

(Korrealsponsionen)에 근거하는 경우에 한했던 것과 결부하여 항상적인 금융수

요를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산업적인 계속적 경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 이것은

로마의 경제조직의 특징이다 - 을 가리키는 법률적 징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108]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정치에 연결되었다는 의미는 사적 거래에 대해서 흠결되

어 있던 법률제도가 국가적 임차인(세금·광산·소금에 관한 임차인)인 조세청부조

합원(socii vectigalium publicorum)에 대해서는 제정 초기에 이미 사법상으로도

인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국가적 임차인의 조합의 법

적·경제적 구조는 한 사람 또는 다수의 유력한 기업가가 발행자에 대하여 자본조

달을 인수하고, 다른 기업가가 공동으로 이에 협력한다는 오늘날 유가증권의 발행

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은행이 통례로 하는 형식을 단순한 합자회사 관계와 결합시

킨 것이었다. 공적 지위의 이용에 관한(de loco publico fruendo) 특시명령 그리고

다른 법원(法源)에 나타난 조합의 관리자인 조합원(청부인[manceps])은 당해 조합

을 구성하는 것이며, 조합에 관여하는 자(affines)는 단순한 유한책임사원이었으며,

사실상의 법적 지위는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도 근대의 그것과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한편 국가기구 자체도 민사법에서의 법인으로서 이것을 취급할 것인가의

여부의 문제는 일부는 법기술적인 것, 일부는 정치적인 것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국가를 법인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실제로 먼저 다음의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국

가적 지배의 기관들에 속하는 법영역이 나뉘어서 그들 기관들이 개인으로서 가지

는 여러 권리의무를 수반하는 개인적 법영역과, 그의 재산법상의 관계들이 하나의

특별한 복합체인 기구재산에 귀속시켜지는 공법적 영역으로 되었다는 것이고, 그

리고 또 국가기관이 직무를 행하는 영역도 역시, 자연 지배적인 관계들의 영역과

사법상의 관계들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며, 이러한 후자의, 전적으로 재산

법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사적 거래의 법의 일반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다음에

국가에게 이러한 인격을 인정하는 결과로서 보통 국가는 일반 소송에 있어서 사인

과 대등한 상대방 소송당사자로서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제소하고 또는 청구를

받을 자격이 인정된다. 법적으로 보면, 법인격의 문제는 이 후자의 문제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로마국(populus Romanus)이 예컨대 유언에 근거

하는 사법상의 취득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의문이 없으나 소송능력은 가지지 않았

기 때문이다. 또 기구적, 따라서 국가적·정치적인 조직이 전부 독립의 법인격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인 취득능력이라는 의미에서는 보통 의문이 없는 것이며,

그들이 보통 소송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법인격과 소송의

허용성이 인정되더라도 국가기구의 계약에 대해서 사적 계약에서와는 전연 다른

원칙이 적용되는 일이 있다. 물론 이것은 많은 경우에 로마에서처럼 통상재판소를

배제하고, 국가와의 계약에서 생긴 분쟁을 행정관이 재판한다는 것과 결부된 것

이 보통이다. 소송당사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은 보통 법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많은

합수적 이익사회관계(Gesamthand Vergesellschaftungen)에 대해서도 인정되

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인격의 문제는 법사적으로는 많은 경우,

소송신탁(Prozeßstandschaft)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하여 생긴다. 이것은 특히

공공단체에 관해서 타당하다. 정치권력이 신하에 대한 지배자의 입장으로서 사인

과 교섭할 수가 없고, 자유로운 계약에 의하여 따라서 특히 정치권력에 대하여 자

본가의 신용원조나 기업조직이 필요하며, 또 경합하는 다수의 정치단체들 사이에

서 자본이 자유로이 이전하기 위하여 정치권력이 라이투르기슈한(leiturgisch) 강

제를 가할 수 없을 때 이러한 자본가와의 거래에 의하여 사인의 급부를 구할 수밖

에 없을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하였고, 또 정치권력이 라이투르기슈한 강제수단의

적용을 할 수 없고, 또는 이것을 원치 않은 자유로운 수공업자 및 노동자와의 거래

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이들 전부의 경우에서 상술한 모든 문제가 동시에 생겼

다. 국가의 법인격과 통상재판소의 관할권의 문제가 동시에 긍정될 경우에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인의 이익 보장이 점증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이 두

요청 중의 하나가 인정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이 보장이 감소하게 되는 것은 아니

다. 왜냐하면 계약상의 의무 이행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국왕을 제소하는 것은 고래로부터 가능하였으나 이

것은 14세기에 플로렌스의 은행가가 거액의 부채의 지불을 거절당하였을 때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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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6 2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것을 보호하는 수단을 주지는 않았다. 로마의 국고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소송상

의 강제수단이 없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국고에 대한 채권자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위험은 바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에 생겼으나 채권자 등은 질

에 의한 담보를 제공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담보를 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프랑스의 국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강제적으로 소송의 방법에 호소한다는 것은 혁

명 후에도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신용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없었다. 국

고를 상대로 하는 소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근대의 주권개념의 발전

에 따라서 원칙적으로 국가를 각종의 단체들과는 별개의 존재로 했다는 것의 부

분적 현상으로서 생겼다. 프랑스에서는 그러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도 역

시 그의 주권의식과 관련된 것인데 「온갖 간계」를 통하여[110] 「고집센 귀족들」이 제

실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싫어하도록 시켰다. 다른 한 편 소송을 허용하는 것은

정치조직의 계층적인 구조상 행정에 관한 모든 불복이 여러 가지의 특권과 기득

권 사이의 경계의 분쟁으로서 권리투쟁의 형태를 취하고 군주가 주권자로서가 아

니라, 명확하게 한계지어진 대권의 소유자로서 다른 특권자와 병립하는 한 사람의

특권자로서 정치단체 안에 나타날 경우, 그리고 그 범위에서는 당연하였다. 영국에

서도 신성 로마제국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법기술적인

사정들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로마에서 호구총감(Zensor)이 개인의 국고에 대

한 현재의 사고의 관습에 따른다면 사법상의 모든 청구권 그리고 반대로 국고로

부터 개인에 대한 이러한 청구권에 대한 재판의 기관으로 된 것이 그것이다. 그러

나 호구총감은 국유재산과의 관계에 기인하는 법률문제가 취급되고 있는 경우에

는 사인 간의 분쟁해결을 위한 관할재판소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국유농지(ager

publicus)상에 온갖 점유상태 및 국유지의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인과 징세청부

인(publicani) 사이에, 또는 그들과 그 속민 사이의 모든 분쟁을 고급의 심판인에

의한 심판에 의하는 것이 금지되어 단순한 행정법적인 직권심리절차로 옮겨졌었는

데 이것은 확실히 실질상 거대한 국가자본주의적 이익에 대해서는 마이너스의 특

권이 아니고 플러스의 특권이었다. 심판인에 의한 절차가 인정되지 아니한, 그리고

국가의 관리가 재판관 겸 당사자대리인인 자격을 가진다는 것은 계속하여 행해지

고 그 결과 황실의 관리에 속하는 국고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단기간의 정

체를 거친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이후 점차로 국유재산의 성격을 갖추어서 황제

의 개인적 자산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면서부터는 국고에 대해서도 미치게 된 것이

다. 이것이 전적으로 빠짐없이 행하여진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며, 용어적으로도

(manceps, praes라는 종전의 행정법적인 용어가 없어지고, 시민법상의 용어가 이

에 가름함으로써) 또한 국고가 소송능력을 가진다는 원칙이란 점에서도 그 구별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황제의 자산의 지위를 가산적으로 보는 생각과 기구적으로 보

는 생각 사이에 변동이 있었다는 것은 관리기술상의 고려나 제실의 순경제적인 이

익과 함께 황제의 재단의 각종의 변용과 구분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었고, 이 재

단의 전부가 이론상 소송능력있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 실제로 사인으로서의 황

제와 관리로서의 황제의 구별은 결국 아마 초기의 황제들 아래서만 완전히 행하여

졌음에 불과하다. 마지막에는 황제의 총자산은 제실 소령(所領)으로 생각되고, 그

리고 그러므로 제위에 오를 때에 그의 사유물을 자녀에게 양도하는 것만이 남았

다. 몰수에 의한 취득이나 황제에 대해서 유언의 유효성을 인정시키기 위하여 행하

여진 다수의 유증의 취급은 순수히 사법적 해석으로부터도 순수히 국법적인 해석

으로부터의 견지에서도 명확히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세의 신분적 제후의 지위에 관해서 말하면, 정치적 목적에 제공되는 제후의

재산과 사적 목적에 제공되는 제후의 재산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은 신분계층의 구

조 -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더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 에 비추어 자연 분명하다.

이러한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기술하였듯이, 영국왕과 독일 제후를 상대로

소송할 가능성이 인정되게 되었다. 주권의 요청에 의하여 국가가 그 고유한 기관의

재판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전연 반대의 결과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법기술이 제후의 정치상의 이익에 대한 상당히 유력한 저항으

로 되었다. 독일에서는 계수된 로마의 국고개념이 국가를 제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는 것을 법적으로 구성하는 수단으로서 이바지하였고, 따라서 물론 그 전통적·신

분적인 해석의 결과로서이기는 하지만 사법상의 분쟁에 그치지 않고, 널리 본래의

행정소송에 대해서도 최초의 기초를 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국고개념은 본래 고대에서 이미 기구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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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6 2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것을 보호하는 수단을 주지는 않았다. 로마의 국고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소송상

의 강제수단이 없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국고에 대한 채권자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위험은 바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에 생겼으나 채권자 등은 질

에 의한 담보를 제공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 담보를 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프랑스의 국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강제적으로 소송의 방법에 호소한다는 것은 혁

명 후에도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의 신용을 위태롭게 하는 일은 없었다. 국

고를 상대로 하는 소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근대의 주권개념의 발전

에 따라서 원칙적으로 국가를 각종의 단체들과는 별개의 존재로 했다는 것의 부

분적 현상으로서 생겼다. 프랑스에서는 그러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도 역

시 그의 주권의식과 관련된 것인데 「온갖 간계」를 통하여[110] 「고집센 귀족들」이 제

실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싫어하도록 시켰다. 다른 한 편 소송을 허용하는 것은

정치조직의 계층적인 구조상 행정에 관한 모든 불복이 여러 가지의 특권과 기득

권 사이의 경계의 분쟁으로서 권리투쟁의 형태를 취하고 군주가 주권자로서가 아

니라, 명확하게 한계지어진 대권의 소유자로서 다른 특권자와 병립하는 한 사람의

특권자로서 정치단체 안에 나타날 경우, 그리고 그 범위에서는 당연하였다. 영국에

서도 신성 로마제국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법기술적인

사정들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로마에서 호구총감(Zensor)이 개인의 국고에 대

한 현재의 사고의 관습에 따른다면 사법상의 모든 청구권 그리고 반대로 국고로

부터 개인에 대한 이러한 청구권에 대한 재판의 기관으로 된 것이 그것이다. 그러

나 호구총감은 국유재산과의 관계에 기인하는 법률문제가 취급되고 있는 경우에

는 사인 간의 분쟁해결을 위한 관할재판소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국유농지(ager

publicus)상에 온갖 점유상태 및 국유지의 자본주의적인 이해관계인과 징세청부

인(publicani) 사이에, 또는 그들과 그 속민 사이의 모든 분쟁을 고급의 심판인에

의한 심판에 의하는 것이 금지되어 단순한 행정법적인 직권심리절차로 옮겨졌었는

데 이것은 확실히 실질상 거대한 국가자본주의적 이익에 대해서는 마이너스의 특

권이 아니고 플러스의 특권이었다. 심판인에 의한 절차가 인정되지 아니한, 그리고

국가의 관리가 재판관 겸 당사자대리인인 자격을 가진다는 것은 계속하여 행해지

고 그 결과 황실의 관리에 속하는 국고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단기간의 정

체를 거친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이후 점차로 국유재산의 성격을 갖추어서 황제

의 개인적 자산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면서부터는 국고에 대해서도 미치게 된 것이

다. 이것이 전적으로 빠짐없이 행하여진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며, 용어적으로도

(manceps, praes라는 종전의 행정법적인 용어가 없어지고, 시민법상의 용어가 이

에 가름함으로써) 또한 국고가 소송능력을 가진다는 원칙이란 점에서도 그 구별은

여전히 존속하였다. 황제의 자산의 지위를 가산적으로 보는 생각과 기구적으로 보

는 생각 사이에 변동이 있었다는 것은 관리기술상의 고려나 제실의 순경제적인 이

익과 함께 황제의 재단의 각종의 변용과 구분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되었고, 이 재

단의 전부가 이론상 소송능력있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 실제로 사인으로서의 황

제와 관리로서의 황제의 구별은 결국 아마 초기의 황제들 아래서만 완전히 행하여

졌음에 불과하다. 마지막에는 황제의 총자산은 제실 소령(所領)으로 생각되고, 그

리고 그러므로 제위에 오를 때에 그의 사유물을 자녀에게 양도하는 것만이 남았

다. 몰수에 의한 취득이나 황제에 대해서 유언의 유효성을 인정시키기 위하여 행하

여진 다수의 유증의 취급은 순수히 사법적 해석으로부터도 순수히 국법적인 해석

으로부터의 견지에서도 명확히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세의 신분적 제후의 지위에 관해서 말하면, 정치적 목적에 제공되는 제후의

재산과 사적 목적에 제공되는 제후의 재산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은 신분계층의 구

조 -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더 상세히 논하기로 한다 - 에 비추어 자연 분명하다.

이러한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기술하였듯이, 영국왕과 독일 제후를 상대로

소송할 가능성이 인정되게 되었다. 주권의 요청에 의하여 국가가 그 고유한 기관의

재판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전연 반대의 결과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법기술이 제후의 정치상의 이익에 대한 상당히 유력한 저항으

로 되었다. 독일에서는 계수된 로마의 국고개념이 국가를 제소하는 것이 가능하다

는 것을 법적으로 구성하는 수단으로서 이바지하였고, 따라서 물론 그 전통적·신

분적인 해석의 결과로서이기는 하지만 사법상의 분쟁에 그치지 않고, 널리 본래의

행정소송에 대해서도 최초의 기초를 주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국고개념은 본래 고대에서 이미 기구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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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8 2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고전기의 법률가는 이를 착상하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사법에

서의 기존의 범주에서 이러한 착상은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대법의 의미

에서의 부담(Auflage)의 발전은 볼 수 있었으나 그것은 기구의 개념의 대용으로

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그 위에 재단법인의 개념의 구상은 로마법에는 전연

알려지지 않고 그 때문에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사단법인으로서 구성한다는 수단만으로서 그 이용은 비문에 의해서 증명

할 수가 있다. 재단법인 개념의 구상은 사실의 성질상 및 순기술상 거의 어디에서

든지 종교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래로 많은 기부는 죽은 자의 공양을

위하여 또는 종교상의 공덕이 되는 자선사업을 위하여 행하여졌다. 기부를 법적으

로 구성함에 있어서 이익을 가진 것은 주로 기부의 취지에 맞는 행위의 관행이 맡

겨진 제사층이었다. 따라서 제사층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충분한 독립을 얻었으

며, 그 결과 종교법이 발전한 곳에서만 재단법인에 관한 법이 성립했던 것이다. 이

집트에서처럼 옛 시대로부터 재단법인이 존재한 [112] 것은 그 때문이다. 순수하게

세속적인 재단법인, 특히 가족재단법인은 그것이 봉지양도의 형식 혹은 기타 이에

유사한 형식을 이용하고, 따라서 특권이 부여된 가족이 제후에 의존하게 되는 경

우가 아니면 법기술적으로, 그리고 또 의심의 여지없이 법률정책적인 이유에서 거

의 어디에서든지 인정되지 않았었다. 폴리스 내부에서 세속적 재단법인이 존재하

지 않았음은 이러한 이유에 의한다. 후기 로마법은 신탁유증에 의하여 세속의 재

단법인에로의 한정된 단초를 발전시켰으나 그 후 비잔틴법에서 비로소 종교규범을

기술적 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서 사정이 변해 갔다. 비잔틴에서는 자기의 가족을

위하여 영구의 지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족이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지대

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유보하여 승원(僧院)을 설립하는 형식이 사용되었

고,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앞으로 논술할 것이다. 이러한 양식의 재단법인은 비잔틴

으로부터 이슬람의 와쿠프(Wakuf)에로 이행하였으나 이슬람에서는 와쿠프는 전

적으로 특별한 경제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최초는 성자가 법기술적으로 기부재산의 소유자로서 취급되었고, 중세에서의 세속

적인 재단법인의 개념은 카논법이 그것을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준비한 데에서부

터 그 발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기구개념(Anstaltsbegriff)의 구상은 순수하게 법학적으로 고찰한다면 근대의

이론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사물의 성질상 기구개념도 역시 교회에서 기원

을 가지며, 후기 로마교회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후기 로마의 교회법에서는 한편

으로는 종교적 권위의 담당자를 카리스마적으로 생각하는 견해와, 다른 한 편 교

구의 순수하게 자발적인 조직이 사교의 직무관료제를 위하여 종국적으로 소멸하

고, 사교가 이제는 교회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의 법기술적인 자격을 얻으려

고 힘쓰게 된 후에는 기구개념은 어떠한 양식으로서 성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대법에는 교회의 기구개념은 전연 알려지지 않았었고, 폴리스가 예배를 세속화한

후에도 사원재산은 법적으로 폴리스의 소유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기

술은 그의 사단의 개념으로 기독교회를 도와 왔고 중세 초기에서는 교회재산이 교

구 고유의 재산으로 인정되지 않은 범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성자가

소유권자이고 교회 임원이 성자의 대리인이라는 견해로서 기독교회를 도와 왔었

다. 그러나 카논법은, 특히 사교서임 투쟁에 있어서 사유교회법에 대해서 선전을

포고한 후에 봉쇄적인 교회사단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교회사단법은 교회가

가지는 사회학적으로 필연적인 지배적 및 기구적인 구조의 결과, 사단의 법인법과

신분적 단체들의 법인법과 다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중세의 세속적 사단법인 개념

을 형성하는데 있어 그 측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기구적인 근대의 국

가행정이 가지는 본질적으로 행정기술상의 필요에 의해서 학교·구빈시설·국영은

행·보험시설·저축은행 등의 공적 경영체가 법기술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은 사원도 사원권도 없고, 단지 타율적이고 또 타주적인 기관만을 가졌음으로 사

단법인으로서 구성할 수는 없었고, 이러한 경영체가 아주 많이 생겨난 결과 기구

라는 독립된 법개념이 고안되었다.

발전한 로마법에서의 합리적 사단법인 개념은 제정시대의 산물이며, 더구나 정

치적 자치단체법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국가에 대비하는 것으로서의 정치적 자

치단체가 다수 생겨난 것은 동맹전쟁(Bundesgenossenkrieg) 이후의 일이며, 그

전쟁을 그때까지 주권을 가졌던 도시를 한꺼번에 로마 시민단체에 가입시켰으나

그 사단으로서의 독립성은 이것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최초의 황제

의 법률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규율되었다. 자치단체는 로마 시민단체에 병합된 결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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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78 2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고전기의 법률가는 이를 착상하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사법에

서의 기존의 범주에서 이러한 착상은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대법의 의미

에서의 부담(Auflage)의 발전은 볼 수 있었으나 그것은 기구의 개념의 대용으로

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그 위에 재단법인의 개념의 구상은 로마법에는 전연

알려지지 않고 그 때문에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사단법인으로서 구성한다는 수단만으로서 그 이용은 비문에 의해서 증명

할 수가 있다. 재단법인 개념의 구상은 사실의 성질상 및 순기술상 거의 어디에서

든지 종교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래로 많은 기부는 죽은 자의 공양을

위하여 또는 종교상의 공덕이 되는 자선사업을 위하여 행하여졌다. 기부를 법적으

로 구성함에 있어서 이익을 가진 것은 주로 기부의 취지에 맞는 행위의 관행이 맡

겨진 제사층이었다. 따라서 제사층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충분한 독립을 얻었으

며, 그 결과 종교법이 발전한 곳에서만 재단법인에 관한 법이 성립했던 것이다. 이

집트에서처럼 옛 시대로부터 재단법인이 존재한 [112] 것은 그 때문이다. 순수하게

세속적인 재단법인, 특히 가족재단법인은 그것이 봉지양도의 형식 혹은 기타 이에

유사한 형식을 이용하고, 따라서 특권이 부여된 가족이 제후에 의존하게 되는 경

우가 아니면 법기술적으로, 그리고 또 의심의 여지없이 법률정책적인 이유에서 거

의 어디에서든지 인정되지 않았었다. 폴리스 내부에서 세속적 재단법인이 존재하

지 않았음은 이러한 이유에 의한다. 후기 로마법은 신탁유증에 의하여 세속의 재

단법인에로의 한정된 단초를 발전시켰으나 그 후 비잔틴법에서 비로소 종교규범을

기술적 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서 사정이 변해 갔다. 비잔틴에서는 자기의 가족을

위하여 영구의 지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족이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지대

를 징수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유보하여 승원(僧院)을 설립하는 형식이 사용되었

고,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앞으로 논술할 것이다. 이러한 양식의 재단법인은 비잔틴

으로부터 이슬람의 와쿠프(Wakuf)에로 이행하였으나 이슬람에서는 와쿠프는 전

적으로 특별한 경제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최초는 성자가 법기술적으로 기부재산의 소유자로서 취급되었고, 중세에서의 세속

적인 재단법인의 개념은 카논법이 그것을 교회의 목적을 위해서 준비한 데에서부

터 그 발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기구개념(Anstaltsbegriff)의 구상은 순수하게 법학적으로 고찰한다면 근대의

이론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사물의 성질상 기구개념도 역시 교회에서 기원

을 가지며, 후기 로마교회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후기 로마의 교회법에서는 한편

으로는 종교적 권위의 담당자를 카리스마적으로 생각하는 견해와, 다른 한 편 교

구의 순수하게 자발적인 조직이 사교의 직무관료제를 위하여 종국적으로 소멸하

고, 사교가 이제는 교회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의 법기술적인 자격을 얻으려

고 힘쓰게 된 후에는 기구개념은 어떠한 양식으로서 성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대법에는 교회의 기구개념은 전연 알려지지 않았었고, 폴리스가 예배를 세속화한

후에도 사원재산은 법적으로 폴리스의 소유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기

술은 그의 사단의 개념으로 기독교회를 도와 왔고 중세 초기에서는 교회재산이 교

구 고유의 재산으로 인정되지 않은 범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성자가

소유권자이고 교회 임원이 성자의 대리인이라는 견해로서 기독교회를 도와 왔었

다. 그러나 카논법은, 특히 사교서임 투쟁에 있어서 사유교회법에 대해서 선전을

포고한 후에 봉쇄적인 교회사단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교회사단법은 교회가

가지는 사회학적으로 필연적인 지배적 및 기구적인 구조의 결과, 사단의 법인법과

신분적 단체들의 법인법과 다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중세의 세속적 사단법인 개념

을 형성하는데 있어 그 측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 후 기구적인 근대의 국

가행정이 가지는 본질적으로 행정기술상의 필요에 의해서 학교·구빈시설·국영은

행·보험시설·저축은행 등의 공적 경영체가 법기술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은 사원도 사원권도 없고, 단지 타율적이고 또 타주적인 기관만을 가졌음으로 사

단법인으로서 구성할 수는 없었고, 이러한 경영체가 아주 많이 생겨난 결과 기구

라는 독립된 법개념이 고안되었다.

발전한 로마법에서의 합리적 사단법인 개념은 제정시대의 산물이며, 더구나 정

치적 자치단체법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국가에 대비하는 것으로서의 정치적 자

치단체가 다수 생겨난 것은 동맹전쟁(Bundesgenossenkrieg) 이후의 일이며, 그

전쟁을 그때까지 주권을 가졌던 도시를 한꺼번에 로마 시민단체에 가입시켰으나

그 사단으로서의 독립성은 이것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최초의 황제

의 법률에 의하여 종국적으로 규율되었다. 자치단체는 로마 시민단체에 병합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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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0 2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과 정치적 기구의 성격을 상실하였다. 즉 2세기에는 이미 도시는 사인으로 생각된

다(Civitates privatorum loco habentur)라는 것이 말해지고, 미타이스가 자치

단체의 재산을 말하는데 공유재산(commune)이라는 말이 공공재산(publicum)이

라는 말에 가름하여 이제는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

치단체의 쟁송은 혹은 행정상의 것이었고(예컨대 영역에 대한 소송[Controversia

de territorio]), 혹은 계약으로부터 생긴 사적인 것이었으나, 후자의 경우에 대해

서 통상의 소송절차가 적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리하여 전형적인 양식의 도시

관료제가 제국 전체에 보급되었다. 실제로 도시관료제의 칭호가 제정시대의 사적

사단법인에 있어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사단법인의 개념을 원래, 본래

정치적인 자치단체기구의 예에 따라서 관료화되었고, 자치단체기구에서는 자치단

체의 재산과 개개인의 재산을 절대적으로 구별하는 것 그리고 법인의 채권은 개개

의 구성원의 채권이 아니다(qucd universitati debetur, singulis non debetur)

라는 명제가 자명한 것으로서 인정되었으나, 이러한 사단법인 개념의 관료화의 기

원은 아마 위의 사적 사단법인이라고 해도 틀림없다. 동시에 율리아누스의 왕정에

있어서는 물론 사단의 설립을 분명히 정치적 이유로부터 인가의 강제에 복종하였

다. 그러나 인가에 의해서만 완전한 법인격이 취득되었는지 또는 어떤 정도의 법인

격이 취득되었는지 하는 것은 확실치 않은 것 같이 생각[114]된다. 나중 시대에 이

르러 인가와 완전한 법인격이 일치한 것이다. 확실치는 않다 하더라도 아마 완전

한 사단으로서의 체(體)를 갖는다(corpus collgegii habere)는 표현은 완전한 권

리능력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론에 있어서 유형적으로 사용된 말은 우니베르시타

스(universitas)이었다. 사적 사단법인의 내부관계는 원칙적으로 전적으로 행정적

인 특별소송절차에 복종하였다고 하는 미타이스의 납득할 수 있는 견해가 정당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제정시대의 전체 법률상태에 일관하여 볼 수 있는 사단법인제

도의 상술한 관료화의 하나의 특징적인 부분현상이며,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상태

를 세속화하는 저 예의 하나일 것이며, 이 세속화는 제정시대의 전체 발전을 특징

지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화정 시대에는 분명히 사정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12표법이 솔론의 법률을 모범으로 하여 현재의 사단법인의 자치를 인정했다는 것

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중에 나

온 금지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동의 금고는 당연한 것으로서 생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법상의 소송의 법기술상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시도 역시

사법상의 소송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확실히 제정시대가 되어서부터이다. 사원

권에 관한 사원 자체 간에 생긴 분쟁에 대해서는 소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의 이

유는 분명히 다음의 점에 있다. 즉 그 당시 사적 사단법인은 일부는 종교법 일부는

행정법에 의하여 신관 또는 정무관의 특별소송절차에 복종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또 노예 및 거류외국인에 대하여 단체에의 가입은 허용했으나 시민의 정치

적 쭌프트에의 가입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대의 폴리스의 신분적 관계들과 관련하

고 있다.

그리스의 종족단체(Phratrien), 훨씬 이전의 자유의사로 설립된 단체들, 대부

분의 영속적 이익사회 관계 그리고 토템 단체에 도달하기까지의 법제도처럼 주지

의 가장 오랜 로마의 사단은 예외 없이 형제적 관계(sodalicia, sodalitates)였으

며, 그 자체 예배공동체였다. 동포는 어떤 충성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자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동포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판

덱텐법에서도 아직 형사상의 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의 흔적이 남아

있고, 민사법에 대해서는 형제적 관계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소극적 효과에 있어

서, 즉 제한으로서 고려된 것이다. 길드나 직업단체가 로마의 공화정 전기에 존재

했던 것은 확실하나 이들은 같은 이유에서 예배 콜레기움(cooegia cultorum)으

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중국과 중세에서의 동종의 단체처럼 그들은 그 후에 로

마에서는 콜레기움의 승인에 의해서 국가가 적법하게 인정한 특정한 그들의 신의

보호 아래 있는 의형제적 동료였던 것이다. 예컨대 아주 고대의 상인 콜레기움에

서의 머큐리는 이러한 신이었다. 게르만의 길드나 형제적 관계에 근거하는 다른 전

체 단체처럼 위의 로마의 길드 기타의 직업단체에 시원적인 것이었던 긴급시나 종

교적 의식시의 상호부조의무가 나중에 합리화되어 구호자금이나 매장자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콜레기움의 많은 것이 그 후 제정시대에 있어서 위의 자금

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콜레기움들은 시민의 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종교

상의 조직이 단순한 형식 이상의 것일 경우에는 그의 재산은 아마 종교적으로 보

호되었을 것이며, 구성원들 간의 분쟁은 중재인에 의해서 해결되고 외부와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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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0 2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과 정치적 기구의 성격을 상실하였다. 즉 2세기에는 이미 도시는 사인으로 생각된

다(Civitates privatorum loco habentur)라는 것이 말해지고, 미타이스가 자치

단체의 재산을 말하는데 공유재산(commune)이라는 말이 공공재산(publicum)이

라는 말에 가름하여 이제는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하다. 자

치단체의 쟁송은 혹은 행정상의 것이었고(예컨대 영역에 대한 소송[Controversia

de territorio]), 혹은 계약으로부터 생긴 사적인 것이었으나, 후자의 경우에 대해

서 통상의 소송절차가 적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리하여 전형적인 양식의 도시

관료제가 제국 전체에 보급되었다. 실제로 도시관료제의 칭호가 제정시대의 사적

사단법인에 있어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사단법인의 개념을 원래, 본래

정치적인 자치단체기구의 예에 따라서 관료화되었고, 자치단체기구에서는 자치단

체의 재산과 개개인의 재산을 절대적으로 구별하는 것 그리고 법인의 채권은 개개

의 구성원의 채권이 아니다(qucd universitati debetur, singulis non debetur)

라는 명제가 자명한 것으로서 인정되었으나, 이러한 사단법인 개념의 관료화의 기

원은 아마 위의 사적 사단법인이라고 해도 틀림없다. 동시에 율리아누스의 왕정에

있어서는 물론 사단의 설립을 분명히 정치적 이유로부터 인가의 강제에 복종하였

다. 그러나 인가에 의해서만 완전한 법인격이 취득되었는지 또는 어떤 정도의 법인

격이 취득되었는지 하는 것은 확실치 않은 것 같이 생각[114]된다. 나중 시대에 이

르러 인가와 완전한 법인격이 일치한 것이다. 확실치는 않다 하더라도 아마 완전

한 사단으로서의 체(體)를 갖는다(corpus collgegii habere)는 표현은 완전한 권

리능력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론에 있어서 유형적으로 사용된 말은 우니베르시타

스(universitas)이었다. 사적 사단법인의 내부관계는 원칙적으로 전적으로 행정적

인 특별소송절차에 복종하였다고 하는 미타이스의 납득할 수 있는 견해가 정당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제정시대의 전체 법률상태에 일관하여 볼 수 있는 사단법인제

도의 상술한 관료화의 하나의 특징적인 부분현상이며,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상태

를 세속화하는 저 예의 하나일 것이며, 이 세속화는 제정시대의 전체 발전을 특징

지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화정 시대에는 분명히 사정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12표법이 솔론의 법률을 모범으로 하여 현재의 사단법인의 자치를 인정했다는 것

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중에 나

온 금지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동의 금고는 당연한 것으로서 생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법상의 소송의 법기술상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시도 역시

사법상의 소송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확실히 제정시대가 되어서부터이다. 사원

권에 관한 사원 자체 간에 생긴 분쟁에 대해서는 소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의 이

유는 분명히 다음의 점에 있다. 즉 그 당시 사적 사단법인은 일부는 종교법 일부는

행정법에 의하여 신관 또는 정무관의 특별소송절차에 복종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또 노예 및 거류외국인에 대하여 단체에의 가입은 허용했으나 시민의 정치

적 쭌프트에의 가입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대의 폴리스의 신분적 관계들과 관련하

고 있다.

그리스의 종족단체(Phratrien), 훨씬 이전의 자유의사로 설립된 단체들, 대부

분의 영속적 이익사회 관계 그리고 토템 단체에 도달하기까지의 법제도처럼 주지

의 가장 오랜 로마의 사단은 예외 없이 형제적 관계(sodalicia, sodalitates)였으

며, 그 자체 예배공동체였다. 동포는 어떤 충성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자에 대해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동포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판

덱텐법에서도 아직 형사상의 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의 흔적이 남아

있고, 민사법에 대해서는 형제적 관계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소극적 효과에 있어

서, 즉 제한으로서 고려된 것이다. 길드나 직업단체가 로마의 공화정 전기에 존재

했던 것은 확실하나 이들은 같은 이유에서 예배 콜레기움(cooegia cultorum)으

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중국과 중세에서의 동종의 단체처럼 그들은 그 후에 로

마에서는 콜레기움의 승인에 의해서 국가가 적법하게 인정한 특정한 그들의 신의

보호 아래 있는 의형제적 동료였던 것이다. 예컨대 아주 고대의 상인 콜레기움에

서의 머큐리는 이러한 신이었다. 게르만의 길드나 형제적 관계에 근거하는 다른 전

체 단체처럼 위의 로마의 길드 기타의 직업단체에 시원적인 것이었던 긴급시나 종

교적 의식시의 상호부조의무가 나중에 합리화되어 구호자금이나 매장자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콜레기움의 많은 것이 그 후 제정시대에 있어서 위의 자금

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콜레기움들은 시민의 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종교

상의 조직이 단순한 형식 이상의 것일 경우에는 그의 재산은 아마 종교적으로 보

호되었을 것이며, 구성원들 간의 분쟁은 중재인에 의해서 해결되고 외부와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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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2 2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은 아마 정무관에 의한 특별 소송절차에 의해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정무관의 개

입은 국가봉사의무(Munera)에서 의미를 가지는 범위의 직업단체에 대해서는 자

명한 것이었다. 제정시대에서 강제로 하지 않아도 관료화가 실현한 것은 이것으로

부터 설명할 수가 있다. 특히 법원(法源)으로부터는 그의 존속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 농경자단체의 관계들의 규정도 역시 통상 심리절차에 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동목장(ager compascuus)은 공용지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농학자들이 말하

는 중재(arbitra)는 상린관계와 같은 분쟁에 있어서의 국가에 의하여 어떠한 모양

으로서 규율되고는 있었으나 그러나 자치적인 분쟁해결의 잔존이었다. 자치도시가

사단법에 대한 영향을 점차로 증가하여온 형태로서 한번 성립한 후에는 제정기에

도 또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던 사단법인이 가지는 법의 평등이 분명히 제정시대에

서 실현되었다. 게노센샤프트적인 구성원의 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의 잔존은 그

때에 소멸하고, 단지 로마제국법의 외부에서 그리스의 작은 도시에서의 수공업자

단체(Handwerkerphylen)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상 열거

한 예는 바로 다음의 것을 가리킨다. 즉 고대의 시민법상 영소작권 및 분할소유권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 호구조사표에서는 최고의 권리로서 사유하고 있는 토

지(ager optimo jure privatus)만이 조사의 대상으로 되었으나 이에 관해서는 영

소작권과 분할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 그로부터 이들 제도 그 자체의 부존

재를 결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제국법으로부터 단체의 다른 구성형

식의 부존재를 결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대륙법은 게르만의 게노센샤프트의 형태들, 카논법 그리고 법의 실무가

로마의 법소재를 계수한 형태의 삼중의 영향을 받았다. 게르만의 게노센샤프트의

형태들의 풍부성과 그의 발전과정은 기이르케의 대저에 의해서 역사상 아주 최근

에 비로소 분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전체에 결처 상세한 것은 다루지 않는

다. 그 상세한 것은 개개의 경제분야에 관련하여 특히 농업사와 기업형태의 발전

사에서 말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의 형식상의 원리들 - 이

것이 지금 전적으로 우리에게 관계가 있는 것이다 - 를 설명하는 약간의 기술로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한 합수적 관계들로부터 순수하게 정치적인 지방단

체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가로부터 도시단체(Stadtgemeinde)에 이르기까지 일련

의 조직체가 거의 간극 없이 이행해서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법기술적으로는 형식

적인 소송능력 및 재산능력을 가지는 점에서 공통이라고 할지라도 이에 대하여 전

체 대 개인 간의 관계들의 모습은 가장 다종다양인 형태들에 규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는 대체로 개인은 전체 재산에 관한 지분의 소유자로서 인정되는가의

여부, 반대로 이 지분 - 그것은 바로 재산의 전체 복합체에 대한 지분만을 의미하

는데 불과하고 그 개개의 구성분자에 관한 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 이 유가증

권의 형태로 양도가능한 개인의 자유로운 사적 소유인가의 여부, 또는 반대로 개

개의 객체가 지분권자의 구분소유로서 보유되어 있는 물건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의 여부도 어떤 범위까지 전체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그의 내용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또는 반대로 어느 범위까지 전체 구성원이 외부관계에서 전체를

대표하고, 내부관계에서 전체를 관리하는가의 여부,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재산 내

지 자신의 노동으로 분담하는 것이 의무지어지는가의 여부가 구성원의 자격은 개

방적인 것을 원칙으로 하고 단지 결의의 힘에 의해서만 이것을 취득하는 것이 가

능한가의 여부라는 것 - 이러한 점들은 매우 다종다양하게 규제되어 있었다. 그

런데 이 조직체의 관리는 정치단체도 역시 가지고 있었던 형태에, 매우 다종다양

하지만 강도를 접근하고, 그것이 종종 아주 광범위하게 생긴 결과 이 조직체 자신

의 강제권의 내부관계와 외부관계는 단지 강제수단의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 또는

그의 강제권이 정치단체에 대하여서는 타율이라는 것에 의해서만 정치단체 자신

의 권력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한 편으로는 전체는 어떤 타인처럼 인적

인 권리와 의무의 담당자로서도 취급되었다. 예컨대 전체는 성명권·신분권·발명권

을 갖는 것이 가능하였고, 위법행위능력자이었다. 즉 일정한 위법사실 특히 전체의

기관의 작위·부작위는 법적으로 사인의 경우처럼 전체에 귀책되고 전체에 의해서

배상되었다. 특히 위법행위능력이란 점은 거의 예외 없이 그중에도 영국에서는 몇

시대동안, 즉 전체의 인격이 주로 의무공동체로서 나타나서 채무불이행의 경우에

는 왕에 의해서 형벌이 부과되는 의무자로서 등장했을 정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수인을 전체로서 취급하는 제도는 우리가 뒤에 정치단체들에 관하여 배울 종류

전체의 단체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의 단체형태라 함은 예컨대 관여자

의 이름으로 하는 직접적 내지 대표적인, 바꾸어 말하면 관여자의 권리가 평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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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2 2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은 아마 정무관에 의한 특별 소송절차에 의해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정무관의 개

입은 국가봉사의무(Munera)에서 의미를 가지는 범위의 직업단체에 대해서는 자

명한 것이었다. 제정시대에서 강제로 하지 않아도 관료화가 실현한 것은 이것으로

부터 설명할 수가 있다. 특히 법원(法源)으로부터는 그의 존속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 농경자단체의 관계들의 규정도 역시 통상 심리절차에 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동목장(ager compascuus)은 공용지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농학자들이 말하

는 중재(arbitra)는 상린관계와 같은 분쟁에 있어서의 국가에 의하여 어떠한 모양

으로서 규율되고는 있었으나 그러나 자치적인 분쟁해결의 잔존이었다. 자치도시가

사단법에 대한 영향을 점차로 증가하여온 형태로서 한번 성립한 후에는 제정기에

도 또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던 사단법인이 가지는 법의 평등이 분명히 제정시대에

서 실현되었다. 게노센샤프트적인 구성원의 권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의 잔존은 그

때에 소멸하고, 단지 로마제국법의 외부에서 그리스의 작은 도시에서의 수공업자

단체(Handwerkerphylen)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상 열거

한 예는 바로 다음의 것을 가리킨다. 즉 고대의 시민법상 영소작권 및 분할소유권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 호구조사표에서는 최고의 권리로서 사유하고 있는 토

지(ager optimo jure privatus)만이 조사의 대상으로 되었으나 이에 관해서는 영

소작권과 분할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 그로부터 이들 제도 그 자체의 부존

재를 결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제국법으로부터 단체의 다른 구성형

식의 부존재를 결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대륙법은 게르만의 게노센샤프트의 형태들, 카논법 그리고 법의 실무가

로마의 법소재를 계수한 형태의 삼중의 영향을 받았다. 게르만의 게노센샤프트의

형태들의 풍부성과 그의 발전과정은 기이르케의 대저에 의해서 역사상 아주 최근

에 비로소 분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전체에 결처 상세한 것은 다루지 않는

다. 그 상세한 것은 개개의 경제분야에 관련하여 특히 농업사와 기업형태의 발전

사에서 말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의 형식상의 원리들 - 이

것이 지금 전적으로 우리에게 관계가 있는 것이다 - 를 설명하는 약간의 기술로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한 합수적 관계들로부터 순수하게 정치적인 지방단

체에 이르기까지 중세의 가로부터 도시단체(Stadtgemeinde)에 이르기까지 일련

의 조직체가 거의 간극 없이 이행해서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법기술적으로는 형식

적인 소송능력 및 재산능력을 가지는 점에서 공통이라고 할지라도 이에 대하여 전

체 대 개인 간의 관계들의 모습은 가장 다종다양인 형태들에 규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거기서는 대체로 개인은 전체 재산에 관한 지분의 소유자로서 인정되는가의

여부, 반대로 이 지분 - 그것은 바로 재산의 전체 복합체에 대한 지분만을 의미하

는데 불과하고 그 개개의 구성분자에 관한 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 이 유가증

권의 형태로 양도가능한 개인의 자유로운 사적 소유인가의 여부, 또는 반대로 개

개의 객체가 지분권자의 구분소유로서 보유되어 있는 물건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의 여부도 어떤 범위까지 전체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그의 내용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또는 반대로 어느 범위까지 전체 구성원이 외부관계에서 전체를

대표하고, 내부관계에서 전체를 관리하는가의 여부,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재산 내

지 자신의 노동으로 분담하는 것이 의무지어지는가의 여부가 구성원의 자격은 개

방적인 것을 원칙으로 하고 단지 결의의 힘에 의해서만 이것을 취득하는 것이 가

능한가의 여부라는 것 - 이러한 점들은 매우 다종다양하게 규제되어 있었다. 그

런데 이 조직체의 관리는 정치단체도 역시 가지고 있었던 형태에, 매우 다종다양

하지만 강도를 접근하고, 그것이 종종 아주 광범위하게 생긴 결과 이 조직체 자신

의 강제권의 내부관계와 외부관계는 단지 강제수단의 모습을 달리한다는 것, 또는

그의 강제권이 정치단체에 대하여서는 타율이라는 것에 의해서만 정치단체 자신

의 권력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한 편으로는 전체는 어떤 타인처럼 인적

인 권리와 의무의 담당자로서도 취급되었다. 예컨대 전체는 성명권·신분권·발명권

을 갖는 것이 가능하였고, 위법행위능력자이었다. 즉 일정한 위법사실 특히 전체의

기관의 작위·부작위는 법적으로 사인의 경우처럼 전체에 귀책되고 전체에 의해서

배상되었다. 특히 위법행위능력이란 점은 거의 예외 없이 그중에도 영국에서는 몇

시대동안, 즉 전체의 인격이 주로 의무공동체로서 나타나서 채무불이행의 경우에

는 왕에 의해서 형벌이 부과되는 의무자로서 등장했을 정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수인을 전체로서 취급하는 제도는 우리가 뒤에 정치단체들에 관하여 배울 종류

전체의 단체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의 단체형태라 함은 예컨대 관여자

의 이름으로 하는 직접적 내지 대표적인, 바꾸어 말하면 관여자의 권리가 평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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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4 28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가 불평등한가에 근거하는 관리 - 그것은 순번제의 또는 선거로 선출된 임원이 하

는 것인데 - 또는 규범 내지 전통에 의해서 제약되었지만 그밖의 점에서는 일 개

인 내지 매우 제한된 일단의 권리의 담당자들의 전제적인 군권(君權) - 그것은 정

기적인 선거 내지 기타의 선출에 의해서 또는 상속권에 의해서 또는 특정한 재산

객체를 소유하는 것에 까지도 결부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양도할 수 있는 법적 권

원(Rechtstitel)의 힘에 의해서 취득되었다 - 과 같은 형태이다. 그리고 전체의 기

관의 구조는 이것을 명확히 제한된 권리들로서 된 대권, 한 묶음의 구체적인 특권

들 - 즉 개개의 지배권한을 권리로서 사용해야 할 월권을 불허하는 특권들을 한

묶음으로 한 것 - 인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서 또는 객관적인 규범에 의해서 제한

되고는 있으나 그 범위 내에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지 자유인 통치권인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서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 이 통치권도 사단적으로 혹은 기구

적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구조의 내용은 엄격히 단체목적에 적합한 제

약을 받은 것도 있었고 혹은 비교적 자유롭게 변동하는 것도 있었다. 자치의 범위

는 그의 구조에 응하였다. 예컨대 자치가 바로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권리의 취

득 및 급부의무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배분되는 것도 있었으나 이것

은 영국에 있어서의 많은 라이투르기슈한 단체들이 그러하였다. 또는 정립된 자율

적인 법이 단지 탄력적인 규범들 - 그것은 인습적인 또는 수여에 근거하여 정립된

또는 다른 타율적인 규범인데 - 에 의해서만 제한되면서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

도 있었다.

이들 양자택일 중의 어느 것이 취하여졌나 하는 것은 먼저 제일 개개의 단체의

구체적 목적, 특히 경제적 수단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오늘날에는 자유로이 단체

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에서도 역시 이러한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 단체는 주

로 경제적인 단체(wirtschaftende Gemeinschaft)일 수 있다. 그 경우에 구조가

본질적으로 경제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본과 내적 구조가 가지는 중

요성의 정도와 성질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118] 신용의 기초와 위험이 가지

는 중요성의 정도와 성질에 의해서이다. 자본주의적 영리가 목적인 경우(그 중에서

도 주식회사·광업회사·선박공유체[Reederei]·국채단체·식민단체)에는 그 때문

에 - 단체의 지불능력에 대해서는 자본이 개개인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익배당의

기회가 매우 중요한 결과 - 구성원의 자격이 원칙적으로 폐쇄적인 것으로 되어 있

고, 또 비교적 엄격하게 목적에 구속되게 되는데 동시에 구성원권은 형식상 불가

침이기는 하나 상속가능한, 또 대개는 자유양도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고, 관리

는 관료적으로 행해지고 직접적 내지 대표적인 법에 따라서 민주제적으로 지배되

나 사실상은 금권정치적으로 지배되는 구성원총회 - 그것은 토의와 투표에 의해

서 자본의 지분에 따라서 협력하는 것이다 - 를 가지게 된다. 또 이러한 영리가 목

적인 경우에는 외부관계에 대한 구성원의 책임이 신용평가에 있어 그렇게 중요성

을 가지지 않게 됨으로 그의 대외책임을 인정하지 않게 되며, 일반적으로 - 다만

광업자본의 구성의 결과 광업회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 내부관계에 대한 구

성원의 책임도 없게 된다. 다른 한 편 자연경제적인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는 경

우에는 그 때문에 공동체의 목적이 총괄적이면 그러할수록 더 전체의 권력이 우월

하여 고정된 구성원권이 인정되지 않게 되어 공산주의경제 - 예컨대 그 기초가 직

접민주제적인 것이라도 가부장제적인 것이라도 - 에 가까워진다(가공동체, 가산

공동체[Gemeinderschaft], 엄격한 경지공동체[Feldgemeinschaft]). 그런데 공

동체 내부이 폐쇄상과 토지점취가 증대함에 따라서 구성원권은 점점 전면화하여

진다(촌락공동체[Dorfgemeinschaft]와 마르크공동체[Markgemeinschaft]). 다

른 한 편 점취되어 개인적 지배에 복종하게 된 용익을 수반하는 토지는 공동체의

관리 아래 머물러 있게 되어 그것은 사정에 따라서 순번으로 혹은 세습기관에 의

해서, 또는 (그룬트헤르에 의해서) 권력지배적으로 행사되는 관리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개인적인 생산경제와 소비경제를 공동경제에 의해서 보충하기 위

한 자유의사에 근거하는 이익사회관계(Vergesellschaftungen)의 경우에는 - 이

른바 근대법에서의 협력조합(Genossenschaften)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서 - 구

성원의 자격은 단지 부수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구성원권은 확실히 보존되어

마치 구성원의 의무처럼 확고하게 한계지워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보통은 자유로

이 양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태의 경우에는 인적 책임이 단체의 신용평

가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보다 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보

통이다. 그러나 보통 그의 책임은 유한하거나 위험이 예견될 수 있는 경[119]우에는

무한이거나의 어느 것이다. 또 보통 그의 관리는 형식상 관료적이고 사실상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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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4 28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가 불평등한가에 근거하는 관리 - 그것은 순번제의 또는 선거로 선출된 임원이 하

는 것인데 - 또는 규범 내지 전통에 의해서 제약되었지만 그밖의 점에서는 일 개

인 내지 매우 제한된 일단의 권리의 담당자들의 전제적인 군권(君權) - 그것은 정

기적인 선거 내지 기타의 선출에 의해서 또는 상속권에 의해서 또는 특정한 재산

객체를 소유하는 것에 까지도 결부되는 것이 가능하였던 양도할 수 있는 법적 권

원(Rechtstitel)의 힘에 의해서 취득되었다 - 과 같은 형태이다. 그리고 전체의 기

관의 구조는 이것을 명확히 제한된 권리들로서 된 대권, 한 묶음의 구체적인 특권

들 - 즉 개개의 지배권한을 권리로서 사용해야 할 월권을 불허하는 특권들을 한

묶음으로 한 것 - 인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서 또는 객관적인 규범에 의해서 제한

되고는 있으나 그 범위 내에서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지 자유인 통치권인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서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 이 통치권도 사단적으로 혹은 기구

적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구조의 내용은 엄격히 단체목적에 적합한 제

약을 받은 것도 있었고 혹은 비교적 자유롭게 변동하는 것도 있었다. 자치의 범위

는 그의 구조에 응하였다. 예컨대 자치가 바로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권리의 취

득 및 급부의무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배분되는 것도 있었으나 이것

은 영국에 있어서의 많은 라이투르기슈한 단체들이 그러하였다. 또는 정립된 자율

적인 법이 단지 탄력적인 규범들 - 그것은 인습적인 또는 수여에 근거하여 정립된

또는 다른 타율적인 규범인데 - 에 의해서만 제한되면서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

도 있었다.

이들 양자택일 중의 어느 것이 취하여졌나 하는 것은 먼저 제일 개개의 단체의

구체적 목적, 특히 경제적 수단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오늘날에는 자유로이 단체

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에서도 역시 이러한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 단체는 주

로 경제적인 단체(wirtschaftende Gemeinschaft)일 수 있다. 그 경우에 구조가

본질적으로 경제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본과 내적 구조가 가지는 중

요성의 정도와 성질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118] 신용의 기초와 위험이 가지

는 중요성의 정도와 성질에 의해서이다. 자본주의적 영리가 목적인 경우(그 중에서

도 주식회사·광업회사·선박공유체[Reederei]·국채단체·식민단체)에는 그 때문

에 - 단체의 지불능력에 대해서는 자본이 개개인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익배당의

기회가 매우 중요한 결과 - 구성원의 자격이 원칙적으로 폐쇄적인 것으로 되어 있

고, 또 비교적 엄격하게 목적에 구속되게 되는데 동시에 구성원권은 형식상 불가

침이기는 하나 상속가능한, 또 대개는 자유양도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고, 관리

는 관료적으로 행해지고 직접적 내지 대표적인 법에 따라서 민주제적으로 지배되

나 사실상은 금권정치적으로 지배되는 구성원총회 - 그것은 토의와 투표에 의해

서 자본의 지분에 따라서 협력하는 것이다 - 를 가지게 된다. 또 이러한 영리가 목

적인 경우에는 외부관계에 대한 구성원의 책임이 신용평가에 있어 그렇게 중요성

을 가지지 않게 됨으로 그의 대외책임을 인정하지 않게 되며, 일반적으로 - 다만

광업자본의 구성의 결과 광업회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 내부관계에 대한 구

성원의 책임도 없게 된다. 다른 한 편 자연경제적인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는 경

우에는 그 때문에 공동체의 목적이 총괄적이면 그러할수록 더 전체의 권력이 우월

하여 고정된 구성원권이 인정되지 않게 되어 공산주의경제 - 예컨대 그 기초가 직

접민주제적인 것이라도 가부장제적인 것이라도 - 에 가까워진다(가공동체, 가산

공동체[Gemeinderschaft], 엄격한 경지공동체[Feldgemeinschaft]). 그런데 공

동체 내부이 폐쇄상과 토지점취가 증대함에 따라서 구성원권은 점점 전면화하여

진다(촌락공동체[Dorfgemeinschaft]와 마르크공동체[Markgemeinschaft]). 다

른 한 편 점취되어 개인적 지배에 복종하게 된 용익을 수반하는 토지는 공동체의

관리 아래 머물러 있게 되어 그것은 사정에 따라서 순번으로 혹은 세습기관에 의

해서, 또는 (그룬트헤르에 의해서) 권력지배적으로 행사되는 관리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개인적인 생산경제와 소비경제를 공동경제에 의해서 보충하기 위

한 자유의사에 근거하는 이익사회관계(Vergesellschaftungen)의 경우에는 - 이

른바 근대법에서의 협력조합(Genossenschaften)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서 - 구

성원의 자격은 단지 부수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구성원권은 확실히 보존되어

마치 구성원의 의무처럼 확고하게 한계지워저 있기는 하나 그러나 보통은 자유로

이 양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상태의 경우에는 인적 책임이 단체의 신용평

가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보다 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보

통이다. 그러나 보통 그의 책임은 유한하거나 위험이 예견될 수 있는 경[119]우에는

무한이거나의 어느 것이다. 또 보통 그의 관리는 형식상 관료적이고 사실상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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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6 2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층적(honoratiorenmässige)인 것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단체가 이해관계를 가지

는 불특정한 다수인 또 그리고, 은혜를 받는 불특정한 다수인을 위하여 만들어진

기관인 성격을 농후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또 이해관계인 측에서 전체로부터 받는

급부에 대하여 영속적으로 출연을 하고 혹은 대상을 지불하기 위하여 출자의 중

요성이 감소하면 할수록 일층 전체 재산에 대한 개인적인 구성원권이 구조를 결정

한다는 의미를 점점 더 상실해 가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보험회사에서도 그러하나 사회정책적 그리고 자선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기구에서

는 완전히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단체가 제일 먼저 근본적으로 경제외적인 목적에

봉사하며 경영되는 단체에 불과하게 되면 될수록 구성원의 보장된 재산권은 일층

더 그 중요성을 상실하고, 일반적으로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구조가 결정되는 정도

가 점점 적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단체의 법적 구조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주로 경제적

으로 제약된다는 것은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먼저 첫째로 중세의 발전과 근대

의 영국의 발전과 유럽 대륙의, 특히 독일에서의 발전 사이의 커다란 대립이 그

증명이 된다. 노르만 정복 이래 영국법은 일반적으로 기이르케의 술어의 의미

에서의 게노센샤프트를 알지 못했다. 영국법은 근세에서 비로소 대륙의 쾨르퍼

샤프트(Körperschaft)식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중세 독일에서 자명하였

던 것과 같은 의미와 범위에서의 단체의 자치를 알지 못했었다 - 단지 그 싹을

아는데 불과하였다 - 다른 한 편 규범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규제된 단체의 법

인격을 알지 못했다. 메이틀랜드(Maitland)와 그 이후에는 하체크(Hatschek)

가 분명히 하였듯이, 기이르케의 게노센샤프트이론은 그에 의해서 지배적 단체

(Herrschaftsverband)라고 불린 형태를 제외하고는 영국법 분야에서 거의 타당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르케에 의해서 지배단체라고 불린 형태만이 타당하였

다고는 하나 아깝게도 이것은 그에 의해서 창조된 것과는 다른 범주로 법학적으

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영국에서는 현재 구성되고도 있다. 영국에서는 이

와 같이 이른바 게르마니스텐이 주장하는 단체법의 형태를 갖지 않았는데 그것

은 단지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하였다고 할뿐만 아니라 어

떤 부분에서는 바로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던 결과이었다. 즉 로마의 사단법인

(Korporation)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다음의 두 가지를 용이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먼저 최초에 교회기구만이 카논법에 의해서 실[120]효적인 사

단법인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과, 다음에는 영국의 단체 전부에는 교회와 같은 성

격을 가진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내재했다는 것이다. 단독법인(Corporation

sole)의 이론, 즉 직무담당자의 서열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 현직(顯職)의 이론이 영

국의 법률학으로 하여금 국가행정과 지방행정을 - 교구관청이 카논법에 의해서

취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 하나의 법인격으로서 취급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왕

은 17세기까지 단독법인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에도 정치단체의 전체 권리와 의무

의 담당자라고 생각되는 것은 국가나 국고가 아니고 국왕인데, 이것은 로마의 영

향을 받은 독일적인 법인 개념이 이전에 없었다는 것 - 그것은 등족국가의 정치구

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 의 결과인 동시에 카논법의 영향의 결과이다. 근세에

여하튼 영국의 사단법인이라는 것이 생긴 후 그것이 본질적으로 보유한 것은 기구

적 성격이며 사단적인 성격은 아니었고, 여하튼 그것은 결코 독일적인 게노센샤프

트로는 되지 않았다. 이것은 대륙에서는 중세의 게노센샤프트법이 사멸하는 과정

에서 로마법이 종종 믿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사실 로마니스텐의 법률가들은 중세의 단체들이 유스티니아누스 법

에 전적으로 소원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들

을 둘러싸고 있는 실무의 사실을 대단히 많은 점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의 이론 - 그들이 아주 의문스러운 사고수단으로서 연구한 것이라고 하

더라도 - 이 중세의 단체들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언

제나 매우 부동적인 독일법의 사고형태에 가름하는 법인 개념의 구상을 자력에 근

거하여 성취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촉진하였다. 한편 영국

의, 다른 한 편, 대륙 특히 독일의 발전의 기초는 오히려 중세에도 근세 초기에도

전적으로 주로 정치적인 사정들에 존재하였다. 양자의 차이를 초래한 것은 본질적

으로 왕의 강력한 중앙권력이고 플랜타제네트 왕조와 그 후계자의 기술적인 행정

수단이며, 또 독일에는 강력한 정치적 중앙권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 부동

산법의 분야에서의 영국의 코먼로의 일정한 봉건적인 기초가 나중에까지 작용을

미쳤다는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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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6 2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층적(honoratiorenmässige)인 것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단체가 이해관계를 가지

는 불특정한 다수인 또 그리고, 은혜를 받는 불특정한 다수인을 위하여 만들어진

기관인 성격을 농후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또 이해관계인 측에서 전체로부터 받는

급부에 대하여 영속적으로 출연을 하고 혹은 대상을 지불하기 위하여 출자의 중

요성이 감소하면 할수록 일층 전체 재산에 대한 개인적인 구성원권이 구조를 결정

한다는 의미를 점점 더 상실해 가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보험회사에서도 그러하나 사회정책적 그리고 자선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기구에서

는 완전히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단체가 제일 먼저 근본적으로 경제외적인 목적에

봉사하며 경영되는 단체에 불과하게 되면 될수록 구성원의 보장된 재산권은 일층

더 그 중요성을 상실하고, 일반적으로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구조가 결정되는 정도

가 점점 적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단체의 법적 구조의 발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주로 경제적

으로 제약된다는 것은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먼저 첫째로 중세의 발전과 근대

의 영국의 발전과 유럽 대륙의, 특히 독일에서의 발전 사이의 커다란 대립이 그

증명이 된다. 노르만 정복 이래 영국법은 일반적으로 기이르케의 술어의 의미

에서의 게노센샤프트를 알지 못했다. 영국법은 근세에서 비로소 대륙의 쾨르퍼

샤프트(Körperschaft)식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중세 독일에서 자명하였

던 것과 같은 의미와 범위에서의 단체의 자치를 알지 못했었다 - 단지 그 싹을

아는데 불과하였다 - 다른 한 편 규범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규제된 단체의 법

인격을 알지 못했다. 메이틀랜드(Maitland)와 그 이후에는 하체크(Hatschek)

가 분명히 하였듯이, 기이르케의 게노센샤프트이론은 그에 의해서 지배적 단체

(Herrschaftsverband)라고 불린 형태를 제외하고는 영국법 분야에서 거의 타당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르케에 의해서 지배단체라고 불린 형태만이 타당하였

다고는 하나 아깝게도 이것은 그에 의해서 창조된 것과는 다른 범주로 법학적으

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영국에서는 현재 구성되고도 있다. 영국에서는 이

와 같이 이른바 게르마니스텐이 주장하는 단체법의 형태를 갖지 않았는데 그것

은 단지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하였다고 할뿐만 아니라 어

떤 부분에서는 바로 로마법을 계수하지 않았던 결과이었다. 즉 로마의 사단법인

(Korporation)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다음의 두 가지를 용이하게 하였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먼저 최초에 교회기구만이 카논법에 의해서 실[120]효적인 사

단법인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과, 다음에는 영국의 단체 전부에는 교회와 같은 성

격을 가진다는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내재했다는 것이다. 단독법인(Corporation

sole)의 이론, 즉 직무담당자의 서열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 현직(顯職)의 이론이 영

국의 법률학으로 하여금 국가행정과 지방행정을 - 교구관청이 카논법에 의해서

취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 하나의 법인격으로서 취급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왕

은 17세기까지 단독법인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에도 정치단체의 전체 권리와 의무

의 담당자라고 생각되는 것은 국가나 국고가 아니고 국왕인데, 이것은 로마의 영

향을 받은 독일적인 법인 개념이 이전에 없었다는 것 - 그것은 등족국가의 정치구

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 의 결과인 동시에 카논법의 영향의 결과이다. 근세에

여하튼 영국의 사단법인이라는 것이 생긴 후 그것이 본질적으로 보유한 것은 기구

적 성격이며 사단적인 성격은 아니었고, 여하튼 그것은 결코 독일적인 게노센샤프

트로는 되지 않았다. 이것은 대륙에서는 중세의 게노센샤프트법이 사멸하는 과정

에서 로마법이 종종 믿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사실 로마니스텐의 법률가들은 중세의 단체들이 유스티니아누스 법

에 전적으로 소원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들

을 둘러싸고 있는 실무의 사실을 대단히 많은 점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의 이론 - 그들이 아주 의문스러운 사고수단으로서 연구한 것이라고 하

더라도 - 이 중세의 단체들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언

제나 매우 부동적인 독일법의 사고형태에 가름하는 법인 개념의 구상을 자력에 근

거하여 성취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촉진하였다. 한편 영국

의, 다른 한 편, 대륙 특히 독일의 발전의 기초는 오히려 중세에도 근세 초기에도

전적으로 주로 정치적인 사정들에 존재하였다. 양자의 차이를 초래한 것은 본질적

으로 왕의 강력한 중앙권력이고 플랜타제네트 왕조와 그 후계자의 기술적인 행정

수단이며, 또 독일에는 강력한 정치적 중앙권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 부동

산법의 분야에서의 영국의 코먼로의 일정한 봉건적인 기초가 나중에까지 작용을

미쳤다는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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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8 28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처럼 영국에서의 극단으로까지 기구적, 권력지배적인 구조는 그렇다고 유

일한 것은 아니었다. 구조와 더불어 일정한 사람들 또는 직무담당자를 수탁자

(Teuhänder) - 일정한 수익자(Destinatäre)나 공중 일반의 어느 것을 위하여 일

정한 권리를 신탁 받은 자 - 로서 취급하는 [121] 것이 대륙의 사단법인의 대체

물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17세기 말 이래 왕은 때로는 공공의 수탁자(trusteedes

public)로서 생각되고, 교구관청과 지방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의 염두에 목적재산의 개념이 떠오르는 어떤 곳에서도 영국법에서의 수탁자가 기

술적 수단이 되고 있다. 이 기구의 구조의 특수성은 수탁자가 자기의 권한 내의 것

을 해서 좋을 뿐만 아니라 해야만 된다는 것이고, 즉 직무의 개념에 가름하는 것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탁의 기원은 로마의 신탁유증(Fideicommissum)과 같

이 - 먼저 최초에는 일정한 금지법, 특히 사수법(死手法, Amortisationsgesetze)

과 당시의 법의 다른 제한들을 회피할 필요에 있었으며, 또 이와 더불어 중세에는

하나의 사단법인 개념도 없었던 데에 있다. 그런데 영국법이 사단법인 개념을 사용

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상술한 신탁이라는 법기술적인 수단은 사단법인으로서 구

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구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유사한 특

성은 영국의 사단법인법 전체를 계속 지배하고, 사단법인법의 영역 밖에서까지도

근본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말한 사정에서 마르크 게노센샤프트가 영국법에서는 독일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지배적인 특성을 가지고 그중에서도 영주가 원칙적으로 분배되지 않

는 영지의 소유자로 생각되고, 농민은 단지 타인의 재산의 이용권의 설정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국왕재판소가 농민들에게 제소의 길을 열

어주었다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견해에 대하여 그렇게 농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

은 아니며, 그 결과로서 단순 봉토권(fee simple)이 영국의 토지소유권의 근본형식

으로서 인정된 것인데 그것은 로마의 최고의 권리로서 사유(私有)하고 있던 토지

(ager optimo jure privatus)가 과거에 실제로 지배한 것보다도 더 한층 철저해서

였다. 이로써 총수적(總手的) 상속제(Ganerbschaft)와 독일법에서 이와 전형적으

로 결부된 전체 현상은 봉건적 장자상속의 원칙만으로부터서도 인정되지 않은 것

으로 되었다. 그리고 전체 토지소유가 종국적으로는 왕의 부여에 환원된 것으로부

터 당연한 결과로서, 무릇 단체의 그것까지도 포함시킨 처분권이 특정인 내지 그

승계인이 특권에 의해서만 취득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라는 생각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실제는 메이틀랜드의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것을 승인하지 않

으면 안 된다 - 게노센샤프트에 관여하는 자의 전체를 독자적인 권리주체로서 법

적으로 다룰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은 권리와 의무가 전연 자동적으

로 각자의 지분에 따라서 각인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며, [122] 여기서 말하는 분

배는 예전의 후페제도(Hufenverfassung)에 특유하였던 것이 유사한 전체 단체

에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다른 한 편 국가제도의 혹은 봉건적인 혹은 특

수신분적인 구조에 의해서 조장되었다. 먼저 왕과 귀족의 이익을 위하여 토지보유

를 지방공공단체를 포함시킨 죽은 손(tote Hand)에 이전하는 것을 금지한 사수

법(死手法)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금지를 면하는 것은 특수한 특권이 부여된 경우

에만 한정되었으며 실제로 15세기의 도시특권은 당해 도시에 대해서 적극적 내용

을 가지는 법인권을 주었는데 (최초는 1439년의 킹스톤에 대한 특권), 그것은 동시

에 바로 도시들이 전술한 금지를 면하기 위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

로써는 법인권은 특수한 특권임에 그치고 신분적인 법형성의 일반적인 귀결에 복

종하는 것이었다. 국왕과 의회를 비롯하여 모든 지배권력은 일정한 대권과 특권

의 복합물로서 생각되었다. 어떠한 종류의 권리이건 순수한 사적인 계약에 의해서

는 취득할 수 없는 권리를 행사하는 자는 누구나 법적으로는 그러한 권리를 유효

한 특권에 의해서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엄밀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그러한 권리를 가지는데 불과하였다. 단지 태고로부터의 관례가 있는 경우에 이것

으로서 특권의 명확한 증명에 가름할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법인 개념이 발생한

후에도 그 때문에 근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매우 준엄하게 유지되었다. 즉

이에 의하면 법적 행위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허용된 특권의 범위를 넘어 권한 밖

(ultra vires)에서 행한 단체는 전부 그것에 의하여 특권남용으로 되고 특권박탈

(Privilegienkassation)의 처분을 받았고 이 특권박탈은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

조에서 수많이 그런 처분을 시켰다. 그 결과 공법상인 것 사법상인 것 - 이러한 대

치는 영국법에서는 원래 알려지지 않았는데 - 을 불문하고, 법인의 설립은 전부

특허되거나 인가를 받을 의무를 지고 관리와 감독에 복종하고, 공식적으로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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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88 28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이처럼 영국에서의 극단으로까지 기구적, 권력지배적인 구조는 그렇다고 유

일한 것은 아니었다. 구조와 더불어 일정한 사람들 또는 직무담당자를 수탁자

(Teuhänder) - 일정한 수익자(Destinatäre)나 공중 일반의 어느 것을 위하여 일

정한 권리를 신탁 받은 자 - 로서 취급하는 [121] 것이 대륙의 사단법인의 대체

물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17세기 말 이래 왕은 때로는 공공의 수탁자(trusteedes

public)로서 생각되고, 교구관청과 지방단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의 염두에 목적재산의 개념이 떠오르는 어떤 곳에서도 영국법에서의 수탁자가 기

술적 수단이 되고 있다. 이 기구의 구조의 특수성은 수탁자가 자기의 권한 내의 것

을 해서 좋을 뿐만 아니라 해야만 된다는 것이고, 즉 직무의 개념에 가름하는 것

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탁의 기원은 로마의 신탁유증(Fideicommissum)과 같

이 - 먼저 최초에는 일정한 금지법, 특히 사수법(死手法, Amortisationsgesetze)

과 당시의 법의 다른 제한들을 회피할 필요에 있었으며, 또 이와 더불어 중세에는

하나의 사단법인 개념도 없었던 데에 있다. 그런데 영국법이 사단법인 개념을 사용

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상술한 신탁이라는 법기술적인 수단은 사단법인으로서 구

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구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유사한 특

성은 영국의 사단법인법 전체를 계속 지배하고, 사단법인법의 영역 밖에서까지도

근본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말한 사정에서 마르크 게노센샤프트가 영국법에서는 독일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지배적인 특성을 가지고 그중에서도 영주가 원칙적으로 분배되지 않

는 영지의 소유자로 생각되고, 농민은 단지 타인의 재산의 이용권의 설정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국왕재판소가 농민들에게 제소의 길을 열

어주었다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견해에 대하여 그렇게 농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

은 아니며, 그 결과로서 단순 봉토권(fee simple)이 영국의 토지소유권의 근본형식

으로서 인정된 것인데 그것은 로마의 최고의 권리로서 사유(私有)하고 있던 토지

(ager optimo jure privatus)가 과거에 실제로 지배한 것보다도 더 한층 철저해서

였다. 이로써 총수적(總手的) 상속제(Ganerbschaft)와 독일법에서 이와 전형적으

로 결부된 전체 현상은 봉건적 장자상속의 원칙만으로부터서도 인정되지 않은 것

으로 되었다. 그리고 전체 토지소유가 종국적으로는 왕의 부여에 환원된 것으로부

터 당연한 결과로서, 무릇 단체의 그것까지도 포함시킨 처분권이 특정인 내지 그

승계인이 특권에 의해서만 취득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이라는 생각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실제는 메이틀랜드의 연구에 따르면, 다음의 것을 승인하지 않

으면 안 된다 - 게노센샤프트에 관여하는 자의 전체를 독자적인 권리주체로서 법

적으로 다룰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는데 그것은 권리와 의무가 전연 자동적으

로 각자의 지분에 따라서 각인에게 분배되었기 때문이며, [122] 여기서 말하는 분

배는 예전의 후페제도(Hufenverfassung)에 특유하였던 것이 유사한 전체 단체

에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다른 한 편 국가제도의 혹은 봉건적인 혹은 특

수신분적인 구조에 의해서 조장되었다. 먼저 왕과 귀족의 이익을 위하여 토지보유

를 지방공공단체를 포함시킨 죽은 손(tote Hand)에 이전하는 것을 금지한 사수

법(死手法)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금지를 면하는 것은 특수한 특권이 부여된 경우

에만 한정되었으며 실제로 15세기의 도시특권은 당해 도시에 대해서 적극적 내용

을 가지는 법인권을 주었는데 (최초는 1439년의 킹스톤에 대한 특권), 그것은 동시

에 바로 도시들이 전술한 금지를 면하기 위하여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

로써는 법인권은 특수한 특권임에 그치고 신분적인 법형성의 일반적인 귀결에 복

종하는 것이었다. 국왕과 의회를 비롯하여 모든 지배권력은 일정한 대권과 특권

의 복합물로서 생각되었다. 어떠한 종류의 권리이건 순수한 사적인 계약에 의해서

는 취득할 수 없는 권리를 행사하는 자는 누구나 법적으로는 그러한 권리를 유효

한 특권에 의해서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엄밀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그러한 권리를 가지는데 불과하였다. 단지 태고로부터의 관례가 있는 경우에 이것

으로서 특권의 명확한 증명에 가름할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법인 개념이 발생한

후에도 그 때문에 근세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론이 매우 준엄하게 유지되었다. 즉

이에 의하면 법적 행위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허용된 특권의 범위를 넘어 권한 밖

(ultra vires)에서 행한 단체는 전부 그것에 의하여 특권남용으로 되고 특권박탈

(Privilegienkassation)의 처분을 받았고 이 특권박탈은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

조에서 수많이 그런 처분을 시켰다. 그 결과 공법상인 것 사법상인 것 - 이러한 대

치는 영국법에서는 원래 알려지지 않았는데 - 을 불문하고, 법인의 설립은 전부

특허되거나 인가를 받을 의무를 지고 관리와 감독에 복종하고, 공식적으로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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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0 2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목적 단체로 설립하도록 강제되었다. 법인은

전부 정치적인 정치적 사명을 지닌 목적 기구로서 성립하였다. 이러한 법적 상태는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그 궁극적인 기원에 있어 후술하듯이, 노르만적 행정의 라이

투르기슈한 성격의 산물이었다. 국왕은 사법이나 행정에 대해서 필요한 급부를 확

보하는 수단으로서 집합적 의무(Kollektivpflicht)를 수반하는 강제단체를 만들었

는데 그것은 중국법·그리스법·후기 로마법·러시아법 그리고 다른 법에도 알려져

있는 것에 원칙적으로 유사한 것들이었다. 지방공공단체는 전적으로 국왕의 행정

을 위한 라이투르기슈한 의무단체로서 성립하며, 전적으로 국왕의 부여 내지 인가

에 의해서 권리를 가졌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는 이러한 공동체는 전부 법적으로

는 근세에 있어서도 인격 없는 사단(bodies non corporate)에 불과하였다. 단체를

국가 제도화하는 경향은 영국의 법사의 단서에서는 엄격한 가산적·중앙집권적 행

정의 결과 정점에 달하고 그 후 점차로 약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대륙의 법사에서

는 근세의 관료적인 군주국가가 비로소 전통적인 법인의 독립성을 깨트리고 지방

공공단체·쭌푸트·길드·마르크 게노센샤프트·교회·기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법

인을 그의 감독 아래 두고 이것을 인가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인가되지 않은 권

리를 전부 파기하였고, 설립된 단체는 전부 영주의 직권으로만 자립적인 전권과 법

인격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레지스트(Legisten)의 이론이 실제면을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그 후 그 영향이 오래 미친 지역에서 전체 사단설립뿐만 아니라

매우 좁게 한정된 목적을 위하여 명시적으로 인가된 것이 아닌 모든 종류의 사단

형성과 모든 사단자치까지도 일반적으로 파괴하였다. 특히 파괴의 원동력이 된 것

은 모든 과격한 민주제에 전형적인 정치적 이유이고, 또 그와 함께 자연법적으로

순리적인 관념이고, 끝으로는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인 요인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

무분별성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강하게 이론적으로 영향을 받은 시민적 동기

도 그러하다. 법전은 법인 일반의 개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데 그것으로써 법

인을 배척하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필요와 비자본주의적인

계층에서는 시민경제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정당의 정치적 선

동의 필요에 의해서, 끝으로는 문화적 이해관계가 개인 간에서 인적으로 분화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요구가 점점 물적으로 분화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발전을 다시

원상태로 수정하게 되었다. 영국의 법인법은 이러한 과거와의 준엄한 단절을 체험

하지 않았다. 영국의 법이론은 16세기 이후 먼저 도시에 관하여 법적으로 사적 영

역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의 기관과 기관행위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으

나 당시에는 정치단체(로마의 Corpus)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후 법이론은

쭌푸트를 법인유형 속에 넣고 도장을 가질 경우에는 지방공공단체가 소송상 및

계약상 독립하여 행위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전원일치에 가름하여 다수결원리를

승인함으로써 인가된 법인에게 조례, 따라서 제한된 자치를 허용하였다. 또 그의

이론은 17세기에서는 법인의 불법행위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18세기까지 법인을

재산법상의 단지 개인을 위해[124]서 하는 신탁수탁자로서 취급하는데 그치고, 개

인의 법인에 대한 청구는 에퀴티(형평법)에 따라서 인정되는데 불과하였다. 18세기

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이론은 아주 서서히 이기는 하나 회사에 대해서 주식의 이

전을 인정하고, 그 효과로서 법인의 채무에 대한 주주의 책임은 - 지불불능의 경

우는 예외이지만 - 해소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블랙스톤에 있어서 비로소 로마

법을 인용하여 법인재산과 개인재산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전에서 자

본주의의 요청은 점차 영향력을 증가하는 것이 뚜렷하게 된다. 중상주의적인 튜더,

스튜어트 시대의 대회사는 법률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하나의 기구였다. 잉글랜드

은행도 같다. 중세에는 법인이 발하는 문서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날인을

하여 인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러한 필요와 법인재산의 어떤 부분이 토지

였을 경우에는 주식이 부동산으로서 취급되었다는 것, 그리고 법인의 목적이 공적

인 것 또는 공공이익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영리회사에 대해서는 실행하지 못

할 바이고, 따라서 18세기 중에 소멸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상거

래를 하는 법인에 대한 유한책임제도의 도입, 전체 주식회사를 규정하는 규정들의

제정 그리고 우호복지단체(die friendly und benevolent societies), 학술단체, 보

험회사, 저축은행, 끝으로 노동조합(trade union) 등에서의 특수규범의 제정이 그

것에 대응하는 대륙의 입법에 거의 평행하여 행하여졌다. 그러나 결코 낡은 형식이

아주 포기된 것은 아니다. 인가된 일련의 사단(우호단체도 그렇다)이 재판상의 행

위를 하는 데에는 오늘날에도 미리 신탁수탁자를 선임하는 것이 필요하며, 법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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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0 2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목적 단체로 설립하도록 강제되었다. 법인은

전부 정치적인 정치적 사명을 지닌 목적 기구로서 성립하였다. 이러한 법적 상태는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그 궁극적인 기원에 있어 후술하듯이, 노르만적 행정의 라이

투르기슈한 성격의 산물이었다. 국왕은 사법이나 행정에 대해서 필요한 급부를 확

보하는 수단으로서 집합적 의무(Kollektivpflicht)를 수반하는 강제단체를 만들었

는데 그것은 중국법·그리스법·후기 로마법·러시아법 그리고 다른 법에도 알려져

있는 것에 원칙적으로 유사한 것들이었다. 지방공공단체는 전적으로 국왕의 행정

을 위한 라이투르기슈한 의무단체로서 성립하며, 전적으로 국왕의 부여 내지 인가

에 의해서 권리를 가졌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는 이러한 공동체는 전부 법적으로

는 근세에 있어서도 인격 없는 사단(bodies non corporate)에 불과하였다. 단체를

국가 제도화하는 경향은 영국의 법사의 단서에서는 엄격한 가산적·중앙집권적 행

정의 결과 정점에 달하고 그 후 점차로 약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대륙의 법사에서

는 근세의 관료적인 군주국가가 비로소 전통적인 법인의 독립성을 깨트리고 지방

공공단체·쭌푸트·길드·마르크 게노센샤프트·교회·기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법

인을 그의 감독 아래 두고 이것을 인가하고 규정하고 통제하고 인가되지 않은 권

리를 전부 파기하였고, 설립된 단체는 전부 영주의 직권으로만 자립적인 전권과 법

인격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레지스트(Legisten)의 이론이 실제면을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그 후 그 영향이 오래 미친 지역에서 전체 사단설립뿐만 아니라

매우 좁게 한정된 목적을 위하여 명시적으로 인가된 것이 아닌 모든 종류의 사단

형성과 모든 사단자치까지도 일반적으로 파괴하였다. 특히 파괴의 원동력이 된 것

은 모든 과격한 민주제에 전형적인 정치적 이유이고, 또 그와 함께 자연법적으로

순리적인 관념이고, 끝으로는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인 요인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

무분별성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강하게 이론적으로 영향을 받은 시민적 동기

도 그러하다. 법전은 법인 일반의 개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데 그것으로써 법

인을 배척하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필요와 비자본주의적인

계층에서는 시민경제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정당의 정치적 선

동의 필요에 의해서, 끝으로는 문화적 이해관계가 개인 간에서 인적으로 분화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요구가 점점 물적으로 분화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발전을 다시

원상태로 수정하게 되었다. 영국의 법인법은 이러한 과거와의 준엄한 단절을 체험

하지 않았다. 영국의 법이론은 16세기 이후 먼저 도시에 관하여 법적으로 사적 영

역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의 기관과 기관행위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으

나 당시에는 정치단체(로마의 Corpus)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후 법이론은

쭌푸트를 법인유형 속에 넣고 도장을 가질 경우에는 지방공공단체가 소송상 및

계약상 독립하여 행위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전원일치에 가름하여 다수결원리를

승인함으로써 인가된 법인에게 조례, 따라서 제한된 자치를 허용하였다. 또 그의

이론은 17세기에서는 법인의 불법행위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18세기까지 법인을

재산법상의 단지 개인을 위해[124]서 하는 신탁수탁자로서 취급하는데 그치고, 개

인의 법인에 대한 청구는 에퀴티(형평법)에 따라서 인정되는데 불과하였다. 18세기

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이론은 아주 서서히 이기는 하나 회사에 대해서 주식의 이

전을 인정하고, 그 효과로서 법인의 채무에 대한 주주의 책임은 - 지불불능의 경

우는 예외이지만 - 해소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블랙스톤에 있어서 비로소 로마

법을 인용하여 법인재산과 개인재산을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전에서 자

본주의의 요청은 점차 영향력을 증가하는 것이 뚜렷하게 된다. 중상주의적인 튜더,

스튜어트 시대의 대회사는 법률적으로는 아직 국가의 하나의 기구였다. 잉글랜드

은행도 같다. 중세에는 법인이 발하는 문서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날인을

하여 인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러한 필요와 법인재산의 어떤 부분이 토지

였을 경우에는 주식이 부동산으로서 취급되었다는 것, 그리고 법인의 목적이 공적

인 것 또는 공공이익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영리회사에 대해서는 실행하지 못

할 바이고, 따라서 18세기 중에 소멸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상거

래를 하는 법인에 대한 유한책임제도의 도입, 전체 주식회사를 규정하는 규정들의

제정 그리고 우호복지단체(die friendly und benevolent societies), 학술단체, 보

험회사, 저축은행, 끝으로 노동조합(trade union) 등에서의 특수규범의 제정이 그

것에 대응하는 대륙의 입법에 거의 평행하여 행하여졌다. 그러나 결코 낡은 형식이

아주 포기된 것은 아니다. 인가된 일련의 사단(우호단체도 그렇다)이 재판상의 행

위를 하는 데에는 오늘날에도 미리 신탁수탁자를 선임하는 것이 필요하며, 법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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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2 29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아닌 사단(클럽)에서는 어떤 법률행위를 함에 있어서도 전원일치로서 하는 위임이

필요하다. 월권행위의 금지, 제정법상의 범형에 속하지 않는 법인의 금지 그리고 인

가주의는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법전 이후 독일에도 존

재하는 상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상태이다.

게르만 법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로마법의 개인적 성격이라는 대단히 잘 운위되

는 표어로써는 법발전의 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위의 간단한 비교적

스케치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커다란 법영역을 각각 일별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중세에 게노센샤프트 조직이 풍부하게 존재했다는 것은 아주 개성적인, 그

리고 또 특히 순수하게 정치적인 운명에 의한 것인데,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세계

에 그 예를 볼 수 없다. 러시아법이나 인도법을 포함한 동양법에서는 강제협동체

(Zwangsgenossenschaft), 특히 촌락공동체 또한 수공업자 동료들의 라이툴기슈

한 집합책임 그리고 여기에 따르는 집합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법들은

또 - 그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 가족협동체의 연대책임을 인정하며 형제

적 결사에 의해서 창설되는 가족에 유사한 노동협동체의 연대책임까지도 종종 -

러시아의 알티옐(Artjel)에서는 그러하였다 -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분화된 공동체법은 이들 법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하물며

로마법과 중세법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리적인 법인개념에서이랴. 이슬람법의 재

단법은 기술하였듯이, 고대 동방의 특히 이집트의, 그리고 특히 비잔틴의 법발전

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법인이론에의 아무런 싹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끝으로 중

국법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의 보장자라는 의미에서의 가족·씨족의 유지와 가산적

군주지배와의 공동을 전형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국가의 개념은 사인으로서의 황

제로부터 독립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적 법인법, 사단법도 존

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적인 단체나 국가에 소속하는 단체나 그렇지 않으면

특히 인가된 단체나의 어느 것도 아닌 단체는 전부 정치적인 원인에 의해서 경찰적

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별개의 것이다. 지방공공단체는 공식적인 법에 대

해서는 세금과 부역에 대한 가족책임단체(Familienhaftungsverband)로서만 존

재한다. 가족책임단체는 씨족단체를 기반으로 하여 실제로 그 구성원에 대하여 언

제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권위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공동시

설을 만들고,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지배기관이 그것을 가장 강력한 지역적 권

력으로서 생각할 정도의 단결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사실은 여기서도 타국에서와

같이, 공식적인 여러 종류의 법개념 안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법

개념의 활동을 저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에 대해서는 씨족과 지방공공단체

의 혈수(血讐) 안에 인정되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법에 의해서는 결코 승인되지 않

는 자치는 그 내용을 명료하게 획정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씨족과 가족의 외부에서는 사적 단체의 상태, 특히 현저하게 발전한 대차제도,

매장비제도 그리고 직업단체는 일부는 로마의 제정시대의 상태에, 일부는 19세기

의 러시아법에 필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적 의미에서의 법안격의 개념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며, 라이투르기슈한 기능은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었다 하더

라도 - 이것은 전혀 확실하지 않으나 - 그러한 한에서는 현재 완전히 사멸해 버

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재산공동체는 중세 남유럽에서와 같이, 가(家)공동체

에의 형식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공정적인 상호와 같은 제도들이

사실상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법형식에까지 발전 - 중세 남유럽에서는

13세기에는 이미 이러한 발전을 볼 수 있었다 - 하지 않고 있다. 전체 책임은 채권

법의 상태에 따라서 - 중국법상에도 씨족이 위법행위책임(Deliktshaftung) - 그

개개의 유물이 일반적으로 아직 남아 있다 - 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순수

하게 개인적 책임인 계약책임은 연대적은 아니고, 도망한 동료를 데리고 온다는 의

무를 다른 동료가 지는데 그치고, 그 밖에는 다른 동료는 실질적으로는 지분의 분

할에 따라서 개인적으로만 책임을 지는데 불과하다. 재정법만이 가족의 연대책임

과 가족의 재산에의 집행을 인정하며, 다른 한 편 사적인 이익사회 관계의 전체 재

산은 중국법에서는 법적으로는 로마 고대에서처럼 거의 존재하지 않으나 근대의

상거래 단체는 고대의 조세청부인조합(Publicanengesellschaft)과 같이, 법적으

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지배인을 가지는 조합 및 합자회사관계(Konsortial

und Kommanditbeteiligungen)로서 다루고 있다. 사적인 단체법 및 물적회사

(Vermögensgesellschaft)의 법이 전술한 바와 같은 미발달인 상태에 있는 원인

이 된 것은 고대나 동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씨족 - 모든 경제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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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사단(클럽)에서는 어떤 법률행위를 함에 있어서도 전원일치로서 하는 위임이

필요하다. 월권행위의 금지, 제정법상의 범형에 속하지 않는 법인의 금지 그리고 인

가주의는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법전 이후 독일에도 존

재하는 상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상태이다.

게르만 법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로마법의 개인적 성격이라는 대단히 잘 운위되

는 표어로써는 법발전의 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위의 간단한 비교적

스케치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커다란 법영역을 각각 일별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중세에 게노센샤프트 조직이 풍부하게 존재했다는 것은 아주 개성적인, 그

리고 또 특히 순수하게 정치적인 운명에 의한 것인데,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세계

에 그 예를 볼 수 없다. 러시아법이나 인도법을 포함한 동양법에서는 강제협동체

(Zwangsgenossenschaft), 특히 촌락공동체 또한 수공업자 동료들의 라이툴기슈

한 집합책임 그리고 여기에 따르는 집합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한 법들은

또 - 그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 가족협동체의 연대책임을 인정하며 형제

적 결사에 의해서 창설되는 가족에 유사한 노동협동체의 연대책임까지도 종종 -

러시아의 알티옐(Artjel)에서는 그러하였다 -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분화된 공동체법은 이들 법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하물며

로마법과 중세법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합리적인 법인개념에서이랴. 이슬람법의 재

단법은 기술하였듯이, 고대 동방의 특히 이집트의, 그리고 특히 비잔틴의 법발전

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법인이론에의 아무런 싹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끝으로 중

국법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의 보장자라는 의미에서의 가족·씨족의 유지와 가산적

군주지배와의 공동을 전형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국가의 개념은 사인으로서의 황

제로부터 독립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적 법인법, 사단법도 존

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적인 단체나 국가에 소속하는 단체나 그렇지 않으면

특히 인가된 단체나의 어느 것도 아닌 단체는 전부 정치적인 원인에 의해서 경찰적

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별개의 것이다. 지방공공단체는 공식적인 법에 대

해서는 세금과 부역에 대한 가족책임단체(Familienhaftungsverband)로서만 존

재한다. 가족책임단체는 씨족단체를 기반으로 하여 실제로 그 구성원에 대하여 언

제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권위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공동시

설을 만들고,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지배기관이 그것을 가장 강력한 지역적 권

력으로서 생각할 정도의 단결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사실은 여기서도 타국에서와

같이, 공식적인 여러 종류의 법개념 안에는 거의 채택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법

개념의 활동을 저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부에 대해서는 씨족과 지방공공단체

의 혈수(血讐) 안에 인정되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법에 의해서는 결코 승인되지 않

는 자치는 그 내용을 명료하게 획정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씨족과 가족의 외부에서는 사적 단체의 상태, 특히 현저하게 발전한 대차제도,

매장비제도 그리고 직업단체는 일부는 로마의 제정시대의 상태에, 일부는 19세기

의 러시아법에 필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적 의미에서의 법안격의 개념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며, 라이투르기슈한 기능은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었다 하더

라도 - 이것은 전혀 확실하지 않으나 - 그러한 한에서는 현재 완전히 사멸해 버

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재산공동체는 중세 남유럽에서와 같이, 가(家)공동체

에의 형식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공정적인 상호와 같은 제도들이

사실상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법형식에까지 발전 - 중세 남유럽에서는

13세기에는 이미 이러한 발전을 볼 수 있었다 - 하지 않고 있다. 전체 책임은 채권

법의 상태에 따라서 - 중국법상에도 씨족이 위법행위책임(Deliktshaftung) - 그

개개의 유물이 일반적으로 아직 남아 있다 - 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순수

하게 개인적 책임인 계약책임은 연대적은 아니고, 도망한 동료를 데리고 온다는 의

무를 다른 동료가 지는데 그치고, 그 밖에는 다른 동료는 실질적으로는 지분의 분

할에 따라서 개인적으로만 책임을 지는데 불과하다. 재정법만이 가족의 연대책임

과 가족의 재산에의 집행을 인정하며, 다른 한 편 사적인 이익사회 관계의 전체 재

산은 중국법에서는 법적으로는 로마 고대에서처럼 거의 존재하지 않으나 근대의

상거래 단체는 고대의 조세청부인조합(Publicanengesellschaft)과 같이, 법적으

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는 지배인을 가지는 조합 및 합자회사관계(Konsortial

und Kommanditbeteiligungen)로서 다루고 있다. 사적인 단체법 및 물적회사

(Vermögensgesellschaft)의 법이 전술한 바와 같은 미발달인 상태에 있는 원인

이 된 것은 고대나 동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씨족 - 모든 경제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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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주로 그 내부에서 행해진다 - 이 계속하여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자

치적인 사단형성이 정치적 가산제에 의해서 저해되었던 것이며, 또 자립적인 자본

이 국고의 수익의 기회와 결부되고, 그 나머지만이 상거래와 결부되었을 뿐이다.

중세의 서유럽에서의 발전이 다른 과정을 거친 원인은, 먼저 특히 거기서는 가산

제가 신분적인 성격을 가지고 가장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 있으나 이것은

뒤에 설명하듯이,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특히 군사적 그리고 국가경제적인 조건

에 따른 것이었다. 또 원인으로서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재판의 딩게노센샤프트적

인 형식이 발전하고 유지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형식의 역사적인 지위에 관해서

는 곧 설명할 것이다. 예컨대 인도에서 바라만이라는 강대한 지위가 생긴 후에 그

러하였듯이, 재판의 이러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사실상 사단형식과

게노센샤프트의 형식이 풍부하게 존재했어도 그것을 여기에 대응하는 풍부한 법

발전의 바닥에 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합리적이며 일반적으로 강

력한 중앙권력이 오랫동안 계속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흠결이 잠시 중단될 뿐으로

서 반복해서 생겼기 때문에 상인적·직업적 또는 민회적인 단체들의 자치가 생겼고

법도 명시적으로 이 자치를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양식의 법형성은 거기서

부터는 생기지 않았다. 딩게노센샤프트의 재판의 실제적인 귀결이었던 것은 수장,

즉 정치적 수장이나 그룬트헤르에 대해서 판결이나 바이스튜마를 자신으로 발견하

거나 또는 지인에게 발견케 하지도 않고 법협동체 구성원의 범위로부터의 집회민에

의해서, 또는 바로 그의 결정적인 협력 아래 발견하는 것을 강제한다는 것이며, 이

에 위반할 때에는 판결이나 바이스튜마는 현실로 객관적으로 구속력을 가지는 법

의 조정(措定)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즉 개개의 법역의 이해관계인이 이러한 확

정의 각기에 협력하였고, 예속농민(Grundholden), 장원예속민(Hofhörigen), 가

인(Dienstmannen)은 그들의 경제적 및 개인적인 종속관계로부터 생기는 권리의

무에 관해서, 또 봉신(Vasallen)이나 도시 시민은 그들의 계약상의 또는 정치적인

종속관계에서 생기는 권리의무에 관하여 그의 확정에 협력하였다. 이것은 원래 공

적인 재판소협동체가 방위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것에 근거하는 것인데, 그로

부터 중심권력이 붕괴함에 따라서 재판권이 부여되고, 또는 이것을 찬탈한 단체들

의 전부에 계수되었던 것이다. 이 제도는 자치적인 법형성과 동시에 쾨르퍼샤프트

와 게노센샤프트 조직의 이 이상 없는 강력한 보장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보장의 성립과 이와 동시에 개개의 법적 이해관계인 권(圈)이 그 법의 형성에 있어

서 영위하는 사실상의 자치의 성립을 서구의 게노센샤프트의 법, 쾨르퍼샤프트 법

의 발전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적인 합동형태의 발전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주었

는데,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이며 행정기술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다. 즉 영주는 언제

나 군사적으로 시달렸으며, 또 그에게 종속하는 합리적인 행정기구를 사용하여 그

의 신하를 콘트롤하는 일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영주는 신하의 자유의사에 의존

하고 있었으며, 영주 자신의 청구권의 보호나 그에게 종속하는 자가 전통에 따라

서 가지거나 또는 찬탈한 반대청구권의 보호에 있어서 항상 신하의 협력에 의뢰했

었다. 종속하는 이러한 계층의 권리를 협동체 구성원의 권리로서 고정하고, 전유

(Appropriation)하는 것은 이 점에 그 기원을 가진다. 딩게노센샤프트의 법의 조

정의 형식으로부터 타당한 단체의 법을 정기적으로 구두의 증거에 의하여 확정하

고, 또 서면으로 바이스튜겔 안에 수록한다는 관습과 이러한 법상태를 적당한 기

회에 특권에 의해서 인증받는다는 것은 종속자의 습관이 발생했으나 이들은 단

체규범의 보장을 높이는 것이었다. 지배적·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단체의 내부

에서의 이러한 경과는 자연히 비지배적인 자유로운 사단[128]적 통일체에 관해서

도 역시 게노센샤프트적인 자치를 유지하는 기회를 높였다. 영국에서도 그러한 것

과 같이, 강력한 가산적 권력을 가지는 왕의 재판소가 그라프샤프트나 지방단체

(Gemeindeverbände) 등의 구식의 딩게노센샤프트적 재판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전술한 상황을 볼 수 없는 곳에서는 게노센샤프트 법도 발전하지 못했고, 바이스

튜겔이나 자치특권도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드물고

대륙의 사태가 가지고 있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정치적 그룬

트헤르의 권력이 협동체 구성원의 재판 없이도 할 수 있도록 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에 이르러 직시로 게노센샤프트의 자치와 게노센샤프트의 법 자체가 거기서도 급

속히 쇠퇴한다. 물론 이것이 바로 로마니스트적으로 구성된 지배자제도의 개입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한 것은 아니지만 로마법 자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게르마니스트적인 법기술적 수단들에 의해서 게노센샤프

트의 법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영국에서는 단독법인이나 신탁회사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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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4 29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도 주로 그 내부에서 행해진다 - 이 계속하여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자

치적인 사단형성이 정치적 가산제에 의해서 저해되었던 것이며, 또 자립적인 자본

이 국고의 수익의 기회와 결부되고, 그 나머지만이 상거래와 결부되었을 뿐이다.

중세의 서유럽에서의 발전이 다른 과정을 거친 원인은, 먼저 특히 거기서는 가산

제가 신분적인 성격을 가지고 가장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 있으나 이것은

뒤에 설명하듯이,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특히 군사적 그리고 국가경제적인 조건

에 따른 것이었다. 또 원인으로서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재판의 딩게노센샤프트적

인 형식이 발전하고 유지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형식의 역사적인 지위에 관해서

는 곧 설명할 것이다. 예컨대 인도에서 바라만이라는 강대한 지위가 생긴 후에 그

러하였듯이, 재판의 이러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사실상 사단형식과

게노센샤프트의 형식이 풍부하게 존재했어도 그것을 여기에 대응하는 풍부한 법

발전의 바닥에 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합리적이며 일반적으로 강

력한 중앙권력이 오랫동안 계속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흠결이 잠시 중단될 뿐으로

서 반복해서 생겼기 때문에 상인적·직업적 또는 민회적인 단체들의 자치가 생겼고

법도 명시적으로 이 자치를 승인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양식의 법형성은 거기서

부터는 생기지 않았다. 딩게노센샤프트의 재판의 실제적인 귀결이었던 것은 수장,

즉 정치적 수장이나 그룬트헤르에 대해서 판결이나 바이스튜마를 자신으로 발견하

거나 또는 지인에게 발견케 하지도 않고 법협동체 구성원의 범위로부터의 집회민에

의해서, 또는 바로 그의 결정적인 협력 아래 발견하는 것을 강제한다는 것이며, 이

에 위반할 때에는 판결이나 바이스튜마는 현실로 객관적으로 구속력을 가지는 법

의 조정(措定)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즉 개개의 법역의 이해관계인이 이러한 확

정의 각기에 협력하였고, 예속농민(Grundholden), 장원예속민(Hofhörigen), 가

인(Dienstmannen)은 그들의 경제적 및 개인적인 종속관계로부터 생기는 권리의

무에 관해서, 또 봉신(Vasallen)이나 도시 시민은 그들의 계약상의 또는 정치적인

종속관계에서 생기는 권리의무에 관하여 그의 확정에 협력하였다. 이것은 원래 공

적인 재판소협동체가 방위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던 것에 근거하는 것인데, 그로

부터 중심권력이 붕괴함에 따라서 재판권이 부여되고, 또는 이것을 찬탈한 단체들

의 전부에 계수되었던 것이다. 이 제도는 자치적인 법형성과 동시에 쾨르퍼샤프트

와 게노센샤프트 조직의 이 이상 없는 강력한 보장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보장의 성립과 이와 동시에 개개의 법적 이해관계인 권(圈)이 그 법의 형성에 있어

서 영위하는 사실상의 자치의 성립을 서구의 게노센샤프트의 법, 쾨르퍼샤프트 법

의 발전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적인 합동형태의 발전에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주었

는데,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이며 행정기술적인 조건에 의한 것이다. 즉 영주는 언제

나 군사적으로 시달렸으며, 또 그에게 종속하는 합리적인 행정기구를 사용하여 그

의 신하를 콘트롤하는 일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영주는 신하의 자유의사에 의존

하고 있었으며, 영주 자신의 청구권의 보호나 그에게 종속하는 자가 전통에 따라

서 가지거나 또는 찬탈한 반대청구권의 보호에 있어서 항상 신하의 협력에 의뢰했

었다. 종속하는 이러한 계층의 권리를 협동체 구성원의 권리로서 고정하고, 전유

(Appropriation)하는 것은 이 점에 그 기원을 가진다. 딩게노센샤프트의 법의 조

정의 형식으로부터 타당한 단체의 법을 정기적으로 구두의 증거에 의하여 확정하

고, 또 서면으로 바이스튜겔 안에 수록한다는 관습과 이러한 법상태를 적당한 기

회에 특권에 의해서 인증받는다는 것은 종속자의 습관이 발생했으나 이들은 단

체규범의 보장을 높이는 것이었다. 지배적·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단체의 내부

에서의 이러한 경과는 자연히 비지배적인 자유로운 사단[128]적 통일체에 관해서

도 역시 게노센샤프트적인 자치를 유지하는 기회를 높였다. 영국에서도 그러한 것

과 같이, 강력한 가산적 권력을 가지는 왕의 재판소가 그라프샤프트나 지방단체

(Gemeindeverbände) 등의 구식의 딩게노센샤프트적 재판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전술한 상황을 볼 수 없는 곳에서는 게노센샤프트 법도 발전하지 못했고, 바이스

튜겔이나 자치특권도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드물고

대륙의 사태가 가지고 있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정치적 그룬

트헤르의 권력이 협동체 구성원의 재판 없이도 할 수 있도록 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에 이르러 직시로 게노센샤프트의 자치와 게노센샤프트의 법 자체가 거기서도 급

속히 쇠퇴한다. 물론 이것이 바로 로마니스트적으로 구성된 지배자제도의 개입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한 것은 아니지만 로마법 자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게르마니스트적인 법기술적 수단들에 의해서 게노센샤프

트의 법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영국에서는 단독법인이나 신탁회사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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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6 29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인가된 유형의 이익사회 관계의 구성 안에 포함되지 않은 단체는 구성원의 순전한

계약관계와 전적으로 동일시되고 규약은 계약의 신청이 가입에 의해서 수락되었다

는 의미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 것에 불과하나, 이것은 로마니스트적인 이론구

성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을 조정하는 단체의 정치적 구조와 법형성

의 직업적인 담당자의 성질에 관해서는 후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들이 결정적

인 요소였다.

제6절 법공동체의 내부에서의 자유와 강제

법적으로 규정된 관계의 계약사회에 이르는 발전과 계약자유, 특히 법적 범형

에 의해서 규정된 수권에 의한 자치에의 법 자체의 발전의 특질을 속박으로부터

의 해방, 개인주의적 자유의 증가로서 특징짓는 것이 보통이다. 타인과의 계약관

계에서는 그 내용을 전적으로 개별적으로 합의하는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넓

은 의미에서의 이익사회 관계를 위해서 법이 설정하는 점점 수가 많아지는 범형

을 임의로 사용할 가능성은 적어도 근대법에서는 재화의 거래와 인적 노동과 고

용급부의 영역에서 과거의 시대에 비하여 아주 대단히 확대되었다. 이로써 실제상

의 결과에서도 자기의 생활의 조건을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개인적 자유가 얼마만

큼 증가했나 또는 그럼에도 [129] 불구하고 또 일부는 이와 결부하여 생활의 강제

적인 범형화가 얼마만큼 증가했다는 것을 법형성의 발전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전

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정된 계약범형이 형식상 대단히 다종다양하며 공식적

인 전체 범형을 제외한다면 임의로 계약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형식상 수권되어 있

어서도 이것은 결코 그 자체로서 누구나가 실체로 이 형식상의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상의 이용가능성을 저해

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사실상의 재산분배의 구분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것

이다. 노동자는 가각 임의의 내용의 노동계약을 임의적인 기업가와 체결할 수 있

는 형식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 권리는 구직자에 대해서는 실제로 노동조건

을 자신이 형성함에 있어서의 최소의 자유조차 의미하지 않으며, 구직자에 대해

서 그것만으로써는 노동조건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

지 않고 적어도 이 권리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시장에서의 유력자 이 경우에는 보

통 기업자가 이 조건을 자기의 재량에 의해서 결정하여 이것을 구직자에게 제시

하여 그 채택여부를 결정시키거나 또 구직자의 노동공급이 대략 보다 강한 경제

적 긴급성을 가지는 경우에는 이 조건을 구직자에게 강압한다는 가능성에 불과

하다. 즉 계약자유에서 나오는 결과는 제1차적으로는 시장에서 재화의 소유를 현

명하게 이용하여 법의 제한에 방해를 받지 않고 타인에게 우월한 권력의 취득수

단으로서 이것을 이용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세력을 갖는 이해관계인

이 이러한 법질서의 이해관계인이다. 특히 유효한 합의의 범형을 만드는 「수권법규」

(Ermächtigungsrechtsätze)의 제정은 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그 범형은 형식상 누구나 다 이용할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가진 자만이

이것을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결국 가진 자만의 자치와 세력적 지위를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또 법률행위에 의한 이해관계인의 유형적으로 제한된 자치의 이러

한 근대적 형식에 의해서 표현되는 「법창조의 분권」(Dezentralisation der

Rechtsschöpfung)(이것은 안드레아스 포이그트[Andreas Voigt]의 그 자체로서

는 좋은 표현이기는 하지만)이 예컨대 다른 「사회주의적인」 질서를 가지는 공동체

에 비하여 법공동체 내부에서 사용되는 강제의 양이 적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흔

히 있는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위의 사실을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명령규

범과 수권규범이 위하하는 강제가 「계약자유」, 특히 전부를 「자유로운」 합의에 맡

기는 수권규정의 중요성이 높아짐으로써 상대적으로[130] 후퇴한다는 것은 형식적

으로는 확실히 강제의 감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이 수권

을 이용할 수 있는 자를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그

법공동체 내부에서의 「자유」의 총량이 얼마나 증가했는가는 그러나 아주 구체적

인 경제질서와 특히 재산분배의 태양의 문제이고, 여하튼 법의 내용으로부터 판정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사회주의적인」 공동체에서는 여기서 설명한 양식의 수권규

정은 분명히 근소한 역할만을 할 것이며, 또 강제를 행사하는 지위, 강제의 방식과

강제가 그때그때 향해지는 상대방이 사경제적인 질서에서와는 다른 일도 있을 것

이다. 사경제적인 질서에서는 강제는 주로 생산수단·영리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

는 자가 법에 의해서 그에게 보장된 재산에 의해서, 그리고 시장투쟁에서 권력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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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된 유형의 이익사회 관계의 구성 안에 포함되지 않은 단체는 구성원의 순전한

계약관계와 전적으로 동일시되고 규약은 계약의 신청이 가입에 의해서 수락되었다

는 의미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 것에 불과하나, 이것은 로마니스트적인 이론구

성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을 조정하는 단체의 정치적 구조와 법형성

의 직업적인 담당자의 성질에 관해서는 후술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들이 결정적

인 요소였다.

제6절 법공동체의 내부에서의 자유와 강제

법적으로 규정된 관계의 계약사회에 이르는 발전과 계약자유, 특히 법적 범형

에 의해서 규정된 수권에 의한 자치에의 법 자체의 발전의 특질을 속박으로부터

의 해방, 개인주의적 자유의 증가로서 특징짓는 것이 보통이다. 타인과의 계약관

계에서는 그 내용을 전적으로 개별적으로 합의하는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가장 넓

은 의미에서의 이익사회 관계를 위해서 법이 설정하는 점점 수가 많아지는 범형

을 임의로 사용할 가능성은 적어도 근대법에서는 재화의 거래와 인적 노동과 고

용급부의 영역에서 과거의 시대에 비하여 아주 대단히 확대되었다. 이로써 실제상

의 결과에서도 자기의 생활의 조건을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개인적 자유가 얼마만

큼 증가했나 또는 그럼에도 [129] 불구하고 또 일부는 이와 결부하여 생활의 강제

적인 범형화가 얼마만큼 증가했다는 것을 법형성의 발전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전

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정된 계약범형이 형식상 대단히 다종다양하며 공식적

인 전체 범형을 제외한다면 임의로 계약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형식상 수권되어 있

어서도 이것은 결코 그 자체로서 누구나가 실체로 이 형식상의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상의 이용가능성을 저해

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사실상의 재산분배의 구분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것

이다. 노동자는 가각 임의의 내용의 노동계약을 임의적인 기업가와 체결할 수 있

는 형식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 권리는 구직자에 대해서는 실제로 노동조건

을 자신이 형성함에 있어서의 최소의 자유조차 의미하지 않으며, 구직자에 대해

서 그것만으로써는 노동조건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

지 않고 적어도 이 권리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시장에서의 유력자 이 경우에는 보

통 기업자가 이 조건을 자기의 재량에 의해서 결정하여 이것을 구직자에게 제시

하여 그 채택여부를 결정시키거나 또 구직자의 노동공급이 대략 보다 강한 경제

적 긴급성을 가지는 경우에는 이 조건을 구직자에게 강압한다는 가능성에 불과

하다. 즉 계약자유에서 나오는 결과는 제1차적으로는 시장에서 재화의 소유를 현

명하게 이용하여 법의 제한에 방해를 받지 않고 타인에게 우월한 권력의 취득수

단으로서 이것을 이용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세력을 갖는 이해관계인

이 이러한 법질서의 이해관계인이다. 특히 유효한 합의의 범형을 만드는 「수권법규」

(Ermächtigungsrechtsätze)의 제정은 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그 범형은 형식상 누구나 다 이용할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가진 자만이

이것을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결국 가진 자만의 자치와 세력적 지위를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또 법률행위에 의한 이해관계인의 유형적으로 제한된 자치의 이러

한 근대적 형식에 의해서 표현되는 「법창조의 분권」(Dezentralisation der

Rechtsschöpfung)(이것은 안드레아스 포이그트[Andreas Voigt]의 그 자체로서

는 좋은 표현이기는 하지만)이 예컨대 다른 「사회주의적인」 질서를 가지는 공동체

에 비하여 법공동체 내부에서 사용되는 강제의 양이 적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흔

히 있는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위의 사실을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명령규

범과 수권규범이 위하하는 강제가 「계약자유」, 특히 전부를 「자유로운」 합의에 맡

기는 수권규정의 중요성이 높아짐으로써 상대적으로[130] 후퇴한다는 것은 형식적

으로는 확실히 강제의 감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경제적으로 이 수권

을 이용할 수 있는 자를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그

법공동체 내부에서의 「자유」의 총량이 얼마나 증가했는가는 그러나 아주 구체적

인 경제질서와 특히 재산분배의 태양의 문제이고, 여하튼 법의 내용으로부터 판정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사회주의적인」 공동체에서는 여기서 설명한 양식의 수권규

정은 분명히 근소한 역할만을 할 것이며, 또 강제를 행사하는 지위, 강제의 방식과

강제가 그때그때 향해지는 상대방이 사경제적인 질서에서와는 다른 일도 있을 것

이다. 사경제적인 질서에서는 강제는 주로 생산수단·영리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

는 자가 법에 의해서 그에게 보장된 재산에 의해서, 그리고 시장투쟁에서 권력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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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8 29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라는 형태로서 이것을 행사한다. 이러한 종류의 강제는 그것이 전 권위적 형식을

억제하는 범위에서 「강제를 원했다」(coacus voluit)라는 명제를 특히 철저히 한다.

그의 재산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보다 강한 입장에 선 자가

제시하는 조건에 복종한다는 것은 노동시장의 이해관계인의 「자유인」 의사인 것이

다. 사회주의적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생각되든지 간에 단일한 경제행위를 규율하

는 재판소가 발하는 직접적인 행위명령과 금지명령은 형식상 훨씬 더 강력하게 나

타날 것이다. 이 명령에 위반한 경우에는 시장투쟁에 의한 강제를 제외한 어떤 양

식의 「강제」로써 이를 준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도대체

보다 많은 강제가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인가, 사실상 보다 많은 개인적 자유의 영

역이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인가 라는 것은 여하튼 한편 또는 다른 한 편의 경우

에 타당하고, 또는 생각할 수 있는 형식적인 법을 분석하는 것만으로써는 결정할

수 없다. 사회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는 전적으로 강제의 질적인 특

성에서의 위의 구별과 법공동체에 그때그때 관여하는 자 사이에서의 강제의 분배

뿐이다.

(현재 보급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의미에서의) (민주) 사회주의적인 질서는 강

제로 그것이 시장투쟁에 의해서 사적 재산에 근거하여 행사되는 형식에 있어서 배

척할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권위적 청구권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까지도 배척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협정된 추상적인 법칙(이 명칭을 사용하

나 어떤가는 문제가 아니다)의 타당만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장공동체 자

신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권위에 의한 형식적 강제를 형식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시장공동체[131]는 자신 안에 어떤 강제상태 - 그리고 이 강제상태는 노동

자에 대해서도 기업가에 대해서도 생산자에 대해서도 소비자에 대해서도 원칙적으

로 차별이 없다 - 를 산출하나 그것은 시장투쟁의 순수경제적인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비개인적인 형식을 취하며, 경제적인 힘의 (적어도

상대적인) 상실, 사정에 따라서는 경제적 생산능력 일반의 상실이라는 제재를 수

반한다. 시장공동체는 자본주의적 조직을 기초로 하고 자본주의적 「경영」에서의

사실상 존재하는 인적 그리고 권위적인 종속관계도 「노동거래시장」의 대상으로 한

다. 그러나 그 경우, 권위적인 관계로부터 보통의 감정적인 모든 내용을 제외한 것

은 강제의 권위적인 성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속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강화되

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모습에서 「규율」에 근거하여 존립하는 구

성체인 자본주의적 산업경영이 보다 크게 팽창하면 할수록 그만큼 점점 가차 없이

사정에 따라서는 권위적인 강제를 그들 안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타에 대하여 이

러한 종류의 강제를 행사하고 또 이 힘을 법질서를 매개로 보장 받을 수 있는 힘을

장악하는 사람의 범위는 그만큼 점점 적게 된다. 따라서 형식상은 아주 많은 「자

유권」과 「수권」(Ermächtigungen)을 보장하고, 주고 또 아주 극히 적은 정도만을

명령규범, 금지규범에 포함하는 법질서라도 그의 사실상의 효과에서는 강제의 질

적 및 양적으로 매우 현저한 강화에 사용될 뿐 아니라 강제권위적 성격의 강화에

도 사용되는 일이 있다.

제4장 법적 사고의 형태들과 법명망가

제1절 경험적 법학과 합리적 법학 - 변호사훈련과 대학교수 -

「전문적인」 법학과정과 동시에 전문적 법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실무가에 의한 법의 경험적 교설

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또는 주로 실무 자체 안에 존재하는데 따라서 「경험적」이라

는 의미에서 「수공업적」 교설이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법교육과 합리적·체계적인

취급에서의 법의 이론적 교설이며, 따라서 이러한 순수한 기술적 의미에서의 「과학

적」 교설이다. 첫 번째 종류의 유형의 상당히 순수한 유형은 영국의 변호사에 의한

길드적 법학이었다. 중세에 있어서 「대변자」와 「변호사」는 첨예하게 구별되었다. 전

자, 즉 대변자는 재판민단체적[132] (dinggenossenschaftlichen) 절차의 여러 종

류의 특색에 따라서 생긴 것이며, 후자 즉 변호사는 배심재판의 절차와 기록의 증

거력에 의하는 군주의 재판소에서의 소송절차의 합리화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소송의 역사에서는 언어형식주의(Wortformalismus)가 「대변자」 제

도의 기원으로서 재판민단체의 소송의 엄격한 심리원칙과의 관련을 유지하면서 명

확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오류는 소장을 파괴한다」(Fautes valent exploits)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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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298 29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라는 형태로서 이것을 행사한다. 이러한 종류의 강제는 그것이 전 권위적 형식을

억제하는 범위에서 「강제를 원했다」(coacus voluit)라는 명제를 특히 철저히 한다.

그의 재산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것으로 경제적으로 보다 강한 입장에 선 자가

제시하는 조건에 복종한다는 것은 노동시장의 이해관계인의 「자유인」 의사인 것이

다. 사회주의적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생각되든지 간에 단일한 경제행위를 규율하

는 재판소가 발하는 직접적인 행위명령과 금지명령은 형식상 훨씬 더 강력하게 나

타날 것이다. 이 명령에 위반한 경우에는 시장투쟁에 의한 강제를 제외한 어떤 양

식의 「강제」로써 이를 준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도대체

보다 많은 강제가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인가, 사실상 보다 많은 개인적 자유의 영

역이 존재하는 것은 어느 것인가 라는 것은 여하튼 한편 또는 다른 한 편의 경우

에 타당하고, 또는 생각할 수 있는 형식적인 법을 분석하는 것만으로써는 결정할

수 없다. 사회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는 전적으로 강제의 질적인 특

성에서의 위의 구별과 법공동체에 그때그때 관여하는 자 사이에서의 강제의 분배

뿐이다.

(현재 보급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의미에서의) (민주) 사회주의적인 질서는 강

제로 그것이 시장투쟁에 의해서 사적 재산에 근거하여 행사되는 형식에 있어서 배

척할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권위적 청구권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까지도 배척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협정된 추상적인 법칙(이 명칭을 사용하

나 어떤가는 문제가 아니다)의 타당만을 인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장공동체 자

신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권위에 의한 형식적 강제를 형식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시장공동체[131]는 자신 안에 어떤 강제상태 - 그리고 이 강제상태는 노동

자에 대해서도 기업가에 대해서도 생산자에 대해서도 소비자에 대해서도 원칙적으

로 차별이 없다 - 를 산출하나 그것은 시장투쟁의 순수경제적인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비개인적인 형식을 취하며, 경제적인 힘의 (적어도

상대적인) 상실, 사정에 따라서는 경제적 생산능력 일반의 상실이라는 제재를 수

반한다. 시장공동체는 자본주의적 조직을 기초로 하고 자본주의적 「경영」에서의

사실상 존재하는 인적 그리고 권위적인 종속관계도 「노동거래시장」의 대상으로 한

다. 그러나 그 경우, 권위적인 관계로부터 보통의 감정적인 모든 내용을 제외한 것

은 강제의 권위적인 성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속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강화되

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모습에서 「규율」에 근거하여 존립하는 구

성체인 자본주의적 산업경영이 보다 크게 팽창하면 할수록 그만큼 점점 가차 없이

사정에 따라서는 권위적인 강제를 그들 안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타에 대하여 이

러한 종류의 강제를 행사하고 또 이 힘을 법질서를 매개로 보장 받을 수 있는 힘을

장악하는 사람의 범위는 그만큼 점점 적게 된다. 따라서 형식상은 아주 많은 「자

유권」과 「수권」(Ermächtigungen)을 보장하고, 주고 또 아주 극히 적은 정도만을

명령규범, 금지규범에 포함하는 법질서라도 그의 사실상의 효과에서는 강제의 질

적 및 양적으로 매우 현저한 강화에 사용될 뿐 아니라 강제권위적 성격의 강화에

도 사용되는 일이 있다.

제4장 법적 사고의 형태들과 법명망가

제1절 경험적 법학과 합리적 법학 - 변호사훈련과 대학교수 -

「전문적인」 법학과정과 동시에 전문적 법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실무가에 의한 법의 경험적 교설

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또는 주로 실무 자체 안에 존재하는데 따라서 「경험적」이라

는 의미에서 「수공업적」 교설이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법교육과 합리적·체계적인

취급에서의 법의 이론적 교설이며, 따라서 이러한 순수한 기술적 의미에서의 「과학

적」 교설이다. 첫 번째 종류의 유형의 상당히 순수한 유형은 영국의 변호사에 의한

길드적 법학이었다. 중세에 있어서 「대변자」와 「변호사」는 첨예하게 구별되었다. 전

자, 즉 대변자는 재판민단체적[132] (dinggenossenschaftlichen) 절차의 여러 종

류의 특색에 따라서 생긴 것이며, 후자 즉 변호사는 배심재판의 절차와 기록의 증

거력에 의하는 군주의 재판소에서의 소송절차의 합리화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의 소송의 역사에서는 언어형식주의(Wortformalismus)가 「대변자」 제

도의 기원으로서 재판민단체의 소송의 엄격한 심리원칙과의 관련을 유지하면서 명

확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오류는 소장을 파괴한다」(Fautes valent exploits)는 원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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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0 30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칙이나 당사자 자신 그리고 판결인의 한 번 말한 법적인 말에 구속된다는 것은 제

소를 위해서 재판관에 의해서 판결인의 단체 중에서 당사자에게 붙여지는 「전치재

판인」(avant rulier), 즉 대변자의 의장(prolocutor)의 원조를 구하도록 비전문가

를 강요하였고, 그들은 당사자에 가름하여 또 당사자의 이름으로 소송의 진행을

위해서 필요한 말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로써 동시에 당사자는 - 그들 자신은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이익으로서, 특히 빈번한 「수정」이라는 가능성을 취하였

다. 소송대행인(Vorsprecher[Counsel])은 원시적으로는 법정에서 당사자의 옆에

섰다. 이로써 소송대행인은 「변호사」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었다. 변호사는 소송준비

와 증거수단의 발견이라는 기술적인 일을 당사자를 위하여 인수하였다. 변호사는

소송이 상당히 합리화된 후에 비로소 그러한 방법으로 기능할 수가 있었다. 현대

의 기능에 있어서의 「변호사」는 원시적인 소송에서는 결코 가능하지는 않았다. 변

호사는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국왕의 소송법이 소송대리를 가능케 한 후에 비로소

당사자의 「대리자」로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변호사의 임명은 보통 먼저 특별

한 특권에 근거하고 있다. 소송대행인은 그 지위에 의해서 판결발견에 관해서 참가

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판결제의를 하기 위해서는 소송대행인

은 판결인단에 속해야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변호사」는 당사자대리인이며, 그 이

외의 다른 자가 아니었다. 변호사는 원래 영국의 재판소에서는 독필에 능숙한 자

(Schreibkundigen), 즉 그러한 일이 주된 수입원을 이루고 있던 성직자로부터 거

의 보충되었다. 한편으로는 교회봉사의 이해, 다른 한 편으로는 상류 평민의 증대

하는 법교양은 변호사직업으로부터 성직자를 강력하게 제외하게 되었고, 또 「법조

학원」(Inns of Courts)의 4 길드에서의 비전문변호사의 연합에서 점차 제척 당하

게 되었다. 그때에 사실상 15, 16세기에 실행된 재판관과 법적 지식을 요하는 관직

지위의 독점에로의 명백한 경향이 있었다. 고대의 「대변자의 의장단」이 합리적인

소송절차에 의해서 소멸하게 된 때에 「소송대행인」, 「변호인」 그리고 「변호사」라는

귀족적인 법명가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국왕재판소에서의 당사자의 대리가 허용된

변호사는 고대의 소송대행인의 지위의 많은 특징을 계승하였다. 변호사는 가장 엄

격한 신분적 예의를 지켰다. 변호사는 기술적인 소송 추행(追行)사무를 거부하였

으며, 결국에는 그가 만날 일이 없는 당사자와의 개인적 교섭을 일반적으로 거부

하였다. 「소송추행」은 「대리인」이나 「사무변호사」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은 영업계

층의 직업적이긴 하지만 길드적이 아닌 계층에 속하며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길

드적 법학교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변호사가 법정에서 법률적으로 대리할 수 있

도록 소송사전의 상태(Status Caussae)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개업한 변

호사는 길드의 사무소에서 단체적·결합적으로 공동으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재

판관도 배타적으로 그들의 내부로부터 나왔으며, 그들과의 생활공동체를 계속하

였다. 「변호사단」(bar)과 「재판관단」(bench)은 배타적인 법조계층의 두 개의 기능

형식이었다. 법조계층도 중세에 있어서 주로 귀족 중에서 강제적으로 징모되었으

나 길드에 들어가는 허가를 점차 자치적으로 규제하고 - 이 길드에 들어가기 위

해서는 먼저 길드학교에서의 교육을 합하여 4년간의 수련기간 그리고 변론할 권리

를 주는 「변호단에의 소집」은 변론의 권리를 주었으며, 기타 순수하게 실무적인 훈

련을 필요로 하였으나 - 그 위에 법조계층은 에티켓(전적으로 자유의사에 의하는

것으로 액수의 다소는 문제 삼지 않는 최소한의 사례를 내는 것)의 준수도 요구하

였다. 길드학교의 강의는 단지 대학의 수업에 대한 경쟁적인 투쟁의 성과였다. 즉

독점이 이루어지자마자 그것은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소멸하였

다. 그 이래 예비교육은 순수하게 실용적·경험적인 것이었으며, 산업적 길드에서

와 같은 특수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법학은 필연적으로 형식주의적인 선

례와 추론에 구속되는 법의 취급을 생산하였다. 이미 변호사의 수공업적 특수화

는 법적 소재의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전망을 저해하였다. 그러는 법적 실무는 그

자체로서 합리적 체계를 추구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용적으로 유용한 그것도

법관계인들의 유형적으로 반복되는 개개의 요구에 즉응하도록 방향지워진 계약과

소송의 형식을 추구한 것이다. 이리하여 법적 실무는 보통 로마법에 근거하여 「예

방법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산출하였다. 또 예를 들면 새로운 사건의 정서와 판결

을 숙지의 형식에 따라서 용이하게 하는 절차적 의제의 사용을 산출했으며, 또 유

사한 실무적인 취급들을 산출하였다. 법적 실무의 내재적인 발전계기로부터 합리

적·체계적인 법이 생긴 것이 아니며, 또 [134] 한정된 의미에서만이지만 법의 합리

화도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적 실무가 형성한 개념은 가장 강

력하고 구체적이며, 또한 일상의 경험에 명백히 숙지되어 있어서 이러한 의미에서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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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0 30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칙이나 당사자 자신 그리고 판결인의 한 번 말한 법적인 말에 구속된다는 것은 제

소를 위해서 재판관에 의해서 판결인의 단체 중에서 당사자에게 붙여지는 「전치재

판인」(avant rulier), 즉 대변자의 의장(prolocutor)의 원조를 구하도록 비전문가

를 강요하였고, 그들은 당사자에 가름하여 또 당사자의 이름으로 소송의 진행을

위해서 필요한 말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로써 동시에 당사자는 - 그들 자신은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이익으로서, 특히 빈번한 「수정」이라는 가능성을 취하였

다. 소송대행인(Vorsprecher[Counsel])은 원시적으로는 법정에서 당사자의 옆에

섰다. 이로써 소송대행인은 「변호사」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었다. 변호사는 소송준비

와 증거수단의 발견이라는 기술적인 일을 당사자를 위하여 인수하였다. 변호사는

소송이 상당히 합리화된 후에 비로소 그러한 방법으로 기능할 수가 있었다. 현대

의 기능에 있어서의 「변호사」는 원시적인 소송에서는 결코 가능하지는 않았다. 변

호사는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국왕의 소송법이 소송대리를 가능케 한 후에 비로소

당사자의 「대리자」로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변호사의 임명은 보통 먼저 특별

한 특권에 근거하고 있다. 소송대행인은 그 지위에 의해서 판결발견에 관해서 참가

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판결제의를 하기 위해서는 소송대행인

은 판결인단에 속해야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변호사」는 당사자대리인이며, 그 이

외의 다른 자가 아니었다. 변호사는 원래 영국의 재판소에서는 독필에 능숙한 자

(Schreibkundigen), 즉 그러한 일이 주된 수입원을 이루고 있던 성직자로부터 거

의 보충되었다. 한편으로는 교회봉사의 이해, 다른 한 편으로는 상류 평민의 증대

하는 법교양은 변호사직업으로부터 성직자를 강력하게 제외하게 되었고, 또 「법조

학원」(Inns of Courts)의 4 길드에서의 비전문변호사의 연합에서 점차 제척 당하

게 되었다. 그때에 사실상 15, 16세기에 실행된 재판관과 법적 지식을 요하는 관직

지위의 독점에로의 명백한 경향이 있었다. 고대의 「대변자의 의장단」이 합리적인

소송절차에 의해서 소멸하게 된 때에 「소송대행인」, 「변호인」 그리고 「변호사」라는

귀족적인 법명가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국왕재판소에서의 당사자의 대리가 허용된

변호사는 고대의 소송대행인의 지위의 많은 특징을 계승하였다. 변호사는 가장 엄

격한 신분적 예의를 지켰다. 변호사는 기술적인 소송 추행(追行)사무를 거부하였

으며, 결국에는 그가 만날 일이 없는 당사자와의 개인적 교섭을 일반적으로 거부

하였다. 「소송추행」은 「대리인」이나 「사무변호사」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은 영업계

층의 직업적이긴 하지만 길드적이 아닌 계층에 속하며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길

드적 법학교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변호사가 법정에서 법률적으로 대리할 수 있

도록 소송사전의 상태(Status Caussae)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개업한 변

호사는 길드의 사무소에서 단체적·결합적으로 공동으로 생활하였다. 그리고 재

판관도 배타적으로 그들의 내부로부터 나왔으며, 그들과의 생활공동체를 계속하

였다. 「변호사단」(bar)과 「재판관단」(bench)은 배타적인 법조계층의 두 개의 기능

형식이었다. 법조계층도 중세에 있어서 주로 귀족 중에서 강제적으로 징모되었으

나 길드에 들어가는 허가를 점차 자치적으로 규제하고 - 이 길드에 들어가기 위

해서는 먼저 길드학교에서의 교육을 합하여 4년간의 수련기간 그리고 변론할 권리

를 주는 「변호단에의 소집」은 변론의 권리를 주었으며, 기타 순수하게 실무적인 훈

련을 필요로 하였으나 - 그 위에 법조계층은 에티켓(전적으로 자유의사에 의하는

것으로 액수의 다소는 문제 삼지 않는 최소한의 사례를 내는 것)의 준수도 요구하

였다. 길드학교의 강의는 단지 대학의 수업에 대한 경쟁적인 투쟁의 성과였다. 즉

독점이 이루어지자마자 그것은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소멸하였

다. 그 이래 예비교육은 순수하게 실용적·경험적인 것이었으며, 산업적 길드에서

와 같은 특수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법학은 필연적으로 형식주의적인 선

례와 추론에 구속되는 법의 취급을 생산하였다. 이미 변호사의 수공업적 특수화

는 법적 소재의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전망을 저해하였다. 그러는 법적 실무는 그

자체로서 합리적 체계를 추구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용적으로 유용한 그것도

법관계인들의 유형적으로 반복되는 개개의 요구에 즉응하도록 방향지워진 계약과

소송의 형식을 추구한 것이다. 이리하여 법적 실무는 보통 로마법에 근거하여 「예

방법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산출하였다. 또 예를 들면 새로운 사건의 정서와 판결

을 숙지의 형식에 따라서 용이하게 하는 절차적 의제의 사용을 산출했으며, 또 유

사한 실무적인 취급들을 산출하였다. 법적 실무의 내재적인 발전계기로부터 합리

적·체계적인 법이 생긴 것이 아니며, 또 [134] 한정된 의미에서만이지만 법의 합리

화도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적 실무가 형성한 개념은 가장 강

력하고 구체적이며, 또한 일상의 경험에 명백히 숙지되어 있어서 이러한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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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2 30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형식적인 사실 - 그것은 외부적으로 명백한 규준에 따라서 서로 구별되지만 - 에

의해서 정해되며,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이전에 언급한 수단에 의해서 확대되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실무가 형성한 개념은 구상으로부터의 추상에 의

해서 논리적 의미에 의해서 일반화와 포섭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규범으로서 3

단 논법적으로 적용되는 보편개념은 아니었다. 법적 실무와 법학의 순수하게 경험

적인 운영은 언제나 개별로부터 개별에로서만 완결하는 것이며, 그리고 일반적 법

규로부터 개별적 법규에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송추행은 한편으로

는 그것이 언어(Wort)를 요구에 적합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모든 방향으로 전용시

키고 해석하고 확대하는 그 말에 주박(呪縛)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전술한 방법

으로 달성할 수 없는 한 「유추」 또는 기술적 의제에로 지향한다. 한 번 법관계인의

실제적 요구에 의해서 촉진된 계약과 소송법의 범형이 충분한 탄력성에서 창조되

면 공적으로 타당한 법은 고도로 고대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또 가장 강

력한 경제적 변화에도 형식상으로는 아무런 변화 없이 남을 수 있었다. 토지점유

법(Seisinerecht)의 고대적인 카주이스틱, 예컨대 노르만인 시대의 후페제도나 그

룬트헤르샤프트의 조건에 상당하는 카주이스틱은 이론적으로 관찰한다면 미국의

중서부의 이주 영역에서는 자주 매우 그로테스크한 결과를 현대의 직전까지 고수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법학이나 법이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태로부터

그 자체로서는 결코 성립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법적 실무가, 그 중에서도 변호

사가 법학의 담당자로서 또 실무허가의 독점적 담당자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경우

에는 공적인 법의 안정화를 위해서 배타적인 경험적 방법에 의하는 그 적용의 계

속을 위하여, 또한 그것의 입법적인 또는 학문적인 합리화를 방해하는데 있어서

경제적 계기, 즉 법실무가의 수수료적 이해가 아주 강력하게 중요성을 가지게 되

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소송의 전통적 형식에의 온갖 간섭, 동시에 계약과 소송

의 범형을 한편으로는 형식적 규범에, 다른 한 편에서는 당사자의 요구에 합치시

킨다는 일을 실무가에게 맡긴다는 상태에 까지 간섭한다는 것은 소송의 실질적 이

해를 위하하는 것이다. 영국의 법실무가, 그 중에서도 변호사계층은 체계적·합리

적인 법창조 마찬가지로 독일의 대학에서와 같은 종류의 합리적 법교육을 방해하

는 데에 아주 성공하였다. 「변호사단」과 「재판관단」 사이의 관계는 앵글로색슨인의

국가들에서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럽대륙에서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특

히 새로운 법창조의 해석은 「변호사단」의 내부로부터 나온 재판관의 수중에 맡겨

졌다. 그러서 영국의 입법자는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새로운 법에 관하여 모든 종

류의 가능한 법실무가의 「조직」항상 반복하여 발생한 것이었으며, 입법자의 의향에

직접 반할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가능한 법실무가의 「조직」을 명백히 배제하는 데

에 특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이

른바 내재적인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인,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는 소송추행 실무가

의 전통주의에 의하여 규제된 경향은 매우 중요한 실무적 결과를 가져왔다. 예컨

대 토지대장과 따라서 합리적인 저당부 대부의 결여는 현존하는 법적 불안에 있어

서 불가피한 지권(地券)의 검사가 결과시키는 수수료에 대한 변호사의 경제적 이해

에 의해서 매우 본질적으로 제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의 토지소유분

할, 특히 소작계약(「합동영업」[joint business])의 형성의 성격에 근본적으로 영향

을 미쳤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신분적으로 구별되고 길드적으로 조직된 변호사계

층은 결여하고 있었다. 변호사의 필요성은 매우 오랜 시일 동안 없었으며, 프랑스

에서도 역시 없었다. 재판민단체적 소송절차의 형식주의는 확실히 여기서도 「대변

자」에 의한 비호와 그 의무의 단속을 일반적인 요구로 만들었다. 그것에 관한 명확

한 규정은 여하튼 1330년 바이에른에서 최초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변자와 변

호사의 구별은 독일에서는 아주 빨리 본질적으로는 로마법의 침입의 영향 아래 달

성되었다. 변호사의 예비교육에의 요구는 로마법의 대학교육이 상류의 법실무가라

는 표준을 결정했던 시대에 등족의 불평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되

었다. 그리고 재판의 집중배제는 유력한 길드를 결코 성립시킬 수 없었다. 변호사

의 지위는 자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규제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근대의 합리적인 법률의 대학교육은 법적 사고의 교육의 두 번째 종류의 가장

순수한 유형을 표현한다. 대학교육을 마친 자만이 법적 실무가 허용되는 곳에서

는 대학교육이 법학을 독점한다. 대학교육이 현대에도 완전히 실무에서의 견습과

실무에 수반하는 자격증명에 의해서 보완되는 곳에서는 - 독일에서는 한자 도시

들에서만 앞서까지 단순한 학사학위만이 변호사자격으로서 유지되었다 - 대학교

육은 우선 일반적으로 경험적인 법학에 결부되어 있다. 대학교육이 교육한 개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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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2 30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형식적인 사실 - 그것은 외부적으로 명백한 규준에 따라서 서로 구별되지만 - 에

의해서 정해되며,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이전에 언급한 수단에 의해서 확대되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실무가 형성한 개념은 구상으로부터의 추상에 의

해서 논리적 의미에 의해서 일반화와 포섭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규범으로서 3

단 논법적으로 적용되는 보편개념은 아니었다. 법적 실무와 법학의 순수하게 경험

적인 운영은 언제나 개별로부터 개별에로서만 완결하는 것이며, 그리고 일반적 법

규로부터 개별적 법규에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송추행은 한편으로

는 그것이 언어(Wort)를 요구에 적합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모든 방향으로 전용시

키고 해석하고 확대하는 그 말에 주박(呪縛)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전술한 방법

으로 달성할 수 없는 한 「유추」 또는 기술적 의제에로 지향한다. 한 번 법관계인의

실제적 요구에 의해서 촉진된 계약과 소송법의 범형이 충분한 탄력성에서 창조되

면 공적으로 타당한 법은 고도로 고대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또 가장 강

력한 경제적 변화에도 형식상으로는 아무런 변화 없이 남을 수 있었다. 토지점유

법(Seisinerecht)의 고대적인 카주이스틱, 예컨대 노르만인 시대의 후페제도나 그

룬트헤르샤프트의 조건에 상당하는 카주이스틱은 이론적으로 관찰한다면 미국의

중서부의 이주 영역에서는 자주 매우 그로테스크한 결과를 현대의 직전까지 고수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법학이나 법이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태로부터

그 자체로서는 결코 성립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법적 실무가, 그 중에서도 변호

사가 법학의 담당자로서 또 실무허가의 독점적 담당자로서 자기를 주장하는 경우

에는 공적인 법의 안정화를 위해서 배타적인 경험적 방법에 의하는 그 적용의 계

속을 위하여, 또한 그것의 입법적인 또는 학문적인 합리화를 방해하는데 있어서

경제적 계기, 즉 법실무가의 수수료적 이해가 아주 강력하게 중요성을 가지게 되

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소송의 전통적 형식에의 온갖 간섭, 동시에 계약과 소송

의 범형을 한편으로는 형식적 규범에, 다른 한 편에서는 당사자의 요구에 합치시

킨다는 일을 실무가에게 맡긴다는 상태에 까지 간섭한다는 것은 소송의 실질적 이

해를 위하하는 것이다. 영국의 법실무가, 그 중에서도 변호사계층은 체계적·합리

적인 법창조 마찬가지로 독일의 대학에서와 같은 종류의 합리적 법교육을 방해하

는 데에 아주 성공하였다. 「변호사단」과 「재판관단」 사이의 관계는 앵글로색슨인의

국가들에서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럽대륙에서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특

히 새로운 법창조의 해석은 「변호사단」의 내부로부터 나온 재판관의 수중에 맡겨

졌다. 그러서 영국의 입법자는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새로운 법에 관하여 모든 종

류의 가능한 법실무가의 「조직」항상 반복하여 발생한 것이었으며, 입법자의 의향에

직접 반할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가능한 법실무가의 「조직」을 명백히 배제하는 데

에 특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이

른바 내재적인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인,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는 소송추행 실무가

의 전통주의에 의하여 규제된 경향은 매우 중요한 실무적 결과를 가져왔다. 예컨

대 토지대장과 따라서 합리적인 저당부 대부의 결여는 현존하는 법적 불안에 있어

서 불가피한 지권(地券)의 검사가 결과시키는 수수료에 대한 변호사의 경제적 이해

에 의해서 매우 본질적으로 제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의 토지소유분

할, 특히 소작계약(「합동영업」[joint business])의 형성의 성격에 근본적으로 영향

을 미쳤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신분적으로 구별되고 길드적으로 조직된 변호사계

층은 결여하고 있었다. 변호사의 필요성은 매우 오랜 시일 동안 없었으며, 프랑스

에서도 역시 없었다. 재판민단체적 소송절차의 형식주의는 확실히 여기서도 「대변

자」에 의한 비호와 그 의무의 단속을 일반적인 요구로 만들었다. 그것에 관한 명확

한 규정은 여하튼 1330년 바이에른에서 최초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변자와 변

호사의 구별은 독일에서는 아주 빨리 본질적으로는 로마법의 침입의 영향 아래 달

성되었다. 변호사의 예비교육에의 요구는 로마법의 대학교육이 상류의 법실무가라

는 표준을 결정했던 시대에 등족의 불평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되

었다. 그리고 재판의 집중배제는 유력한 길드를 결코 성립시킬 수 없었다. 변호사

의 지위는 자치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규제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근대의 합리적인 법률의 대학교육은 법적 사고의 교육의 두 번째 종류의 가장

순수한 유형을 표현한다. 대학교육을 마친 자만이 법적 실무가 허용되는 곳에서

는 대학교육이 법학을 독점한다. 대학교육이 현대에도 완전히 실무에서의 견습과

실무에 수반하는 자격증명에 의해서 보완되는 곳에서는 - 독일에서는 한자 도시

들에서만 앞서까지 단순한 학사학위만이 변호사자격으로서 유지되었다 - 대학교

육은 우선 일반적으로 경험적인 법학에 결부되어 있다. 대학교육이 교육한 개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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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4 30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추상적 규범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그것은 원칙적으로 적어도 논리적인 의미 [136]

해석으로 엄격하게 형식적·합리적으로 형성되며, 또 서로 한계지어진다. 추상적 규

범의 합리적·체계적인 성격과 그 근소한 구상적 내용은 법적 사고로 하여금 법관

계인의 일상적 요구로부터 광범위하게 해방될 수 있게 하였다. 속박이 제거된 순수

하게 논리적인 법학의 요구라는 힘과 그 힘에 의해서 지배된 법적 실무와는 법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힘으로서의 관계인의 요구를 광범위하게 배제한다는 결과를

가질 수 있었다. 예컨대 매매가 임대차로 깬다는 명제 - 그것은 고대의 사회적 권

력관계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 의 독일 민법전에의 도입을 최초로 방지하는 데에

는 주지하듯이, 항상 다대한 긴장을 요했으나 독일 민법전의 일부에 도입하려고 했

던 시도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시종일관성에 근거했던 것이다.

제2절 신정적 법교육

합리적이지만 법적으로는 형식적이 아닌 법학의 고유한 특수형식은 사제자의 학

파의 법학 또는 사제자의 학파에 결부된 법학에 의해서 가장 순수한 유형으로서

표현된다. 이러한 특수성의 일부는 사제자의 (그리고 그것에 가까운 자 전부의) 법

의 취급이 법의 형식적 합리화가 아니고 실질적 합리화를 추구한다는 것에 의해

서 제약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여기서 이러한 법학의

형식적 특수성에 의해서 야기되는 일정한 일반적 결과에 관해서 고찰하자. 이러한

학파의 법학, 즉 보통 신전에 의해서 고정된 또는 일정한 구전 전통, 나중에는 문

헌적인 전통에 의하여 고정된 신법에서 유래하는 법학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

에서의 합리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이러한 학파의 법학은 순수하

게 신정적으로 구성되어 법관계인의 실천적 요구로 향하기보다는 오히려 학자들의

자유로 움직일 수 있는 주지주의의 요구에서 나온 카주이스틱을 특히 촉진하게 되

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인」방법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그 법학은 추상적 개념

을 성숙시킬 수 있었으며, 또 그것에 의해서 합리적·체계적인 법학에 접근할 수 있

었다. 다만 다른 한편 이러한 유형의 법교육은 무릇 사제자의 지혜처럼 전통에 의

하여 제약되고 있다. 따라서 법학의 카주이스틱은 그것이 실용적이고 또 주지주의

가 아닌 요구에 봉사하는 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에서 형식주의적이다. 즉 그

러한 카주이스틱은 법관계인의 추이하는 요구에 대한 전통적이며 또 불가침한 규

범을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

다는 의미에서 형식주의적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합리적인 법체계의 창조라는

의미에서는 형식주의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학은 이미 규칙적으로 인간과

법질서에 대한 이념적인 종교적·윤리적인 요구만을 의미하며, 경험적으로 유효한

질서의 논리적인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사제자의 지도로부터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해방된 법교

육도 신법에 구속된 법교육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신」법은 그것이 순수하게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에서는 인도법이 특히

명확하게 재현하는 유형에 접근한다. 「서적종교」(Buchreligion)에서와 같이, 일정

한 명령이 문자에 의한 계시거나 또는 계시의 영간적인 기록에 의하여 고정되지 않

은 한 신법은 「확정적」으로, 즉 증인들의 견고한 연관에 의해서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서적종교에서는 신성적 규범의 확증적인 해석과 다른 방법의 전승

에 의하는 그것의 보유도 전술한 방법으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이 힌

두법이나 이슬람법에 공통적인 필서된 전통을 거부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필서

된 기록에 대한 신뢰는 사람이 카리스마적으로 자격지어진 사람, 즉 예언자나 교

사 대신에 고문서나 잉크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코란 자체는 저작

이었다 - 그것의 장절은 이미 마호메트에 의해서 알라(Allah)와 협의한 후 일반적

으로 주의 깊은 문서적 고정에서 공포되었다 - 따라서 이슬람의 교육은 바로 자연

적 창조의 교설에 의해서 개개의 교전(敎典)의 사본을 알라 자신에 의한 사본으로

서 시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전(聖傳, Hadithe)에 대해서는 구전이 유효하였다.

보다 뒤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구전에 의해서 위태롭게 된 전승의 통일성에

의 이해에서 문서주의(Schriftlichkeit)가 택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에 이것은

카리스마적인 시대가 훨씬 이전부터 소멸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보통 우리들이 이

미 아는 것처럼 유형적인 새로운 계시의 거부와 결부되어 있다. 이 경우 언제나 종

교적인 공동체의 「기구적인」 성격에 대한 기본적 명제가 확립된다(최근에는 헬트

링 남작에 의해서 적절하게 형식화되었다). 즉 신성한 문서가 전통이나 교회 교의

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에 의하여 진리의 신탁유증으로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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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4 30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추상적 규범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그것은 원칙적으로 적어도 논리적인 의미 [136]

해석으로 엄격하게 형식적·합리적으로 형성되며, 또 서로 한계지어진다. 추상적 규

범의 합리적·체계적인 성격과 그 근소한 구상적 내용은 법적 사고로 하여금 법관

계인의 일상적 요구로부터 광범위하게 해방될 수 있게 하였다. 속박이 제거된 순수

하게 논리적인 법학의 요구라는 힘과 그 힘에 의해서 지배된 법적 실무와는 법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힘으로서의 관계인의 요구를 광범위하게 배제한다는 결과를

가질 수 있었다. 예컨대 매매가 임대차로 깬다는 명제 - 그것은 고대의 사회적 권

력관계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 의 독일 민법전에의 도입을 최초로 방지하는 데에

는 주지하듯이, 항상 다대한 긴장을 요했으나 독일 민법전의 일부에 도입하려고 했

던 시도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시종일관성에 근거했던 것이다.

제2절 신정적 법교육

합리적이지만 법적으로는 형식적이 아닌 법학의 고유한 특수형식은 사제자의 학

파의 법학 또는 사제자의 학파에 결부된 법학에 의해서 가장 순수한 유형으로서

표현된다. 이러한 특수성의 일부는 사제자의 (그리고 그것에 가까운 자 전부의) 법

의 취급이 법의 형식적 합리화가 아니고 실질적 합리화를 추구한다는 것에 의해

서 제약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여기서 이러한 법학의

형식적 특수성에 의해서 야기되는 일정한 일반적 결과에 관해서 고찰하자. 이러한

학파의 법학, 즉 보통 신전에 의해서 고정된 또는 일정한 구전 전통, 나중에는 문

헌적인 전통에 의하여 고정된 신법에서 유래하는 법학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

에서의 합리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이러한 학파의 법학은 순수하

게 신정적으로 구성되어 법관계인의 실천적 요구로 향하기보다는 오히려 학자들의

자유로 움직일 수 있는 주지주의의 요구에서 나온 카주이스틱을 특히 촉진하게 되

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인」방법이 적용되는 경우에는 그 법학은 추상적 개념

을 성숙시킬 수 있었으며, 또 그것에 의해서 합리적·체계적인 법학에 접근할 수 있

었다. 다만 다른 한편 이러한 유형의 법교육은 무릇 사제자의 지혜처럼 전통에 의

하여 제약되고 있다. 따라서 법학의 카주이스틱은 그것이 실용적이고 또 주지주의

가 아닌 요구에 봉사하는 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에서 형식주의적이다. 즉 그

러한 카주이스틱은 법관계인의 추이하는 요구에 대한 전통적이며 또 불가침한 규

범을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

다는 의미에서 형식주의적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합리적인 법체계의 창조라는

의미에서는 형식주의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학은 이미 규칙적으로 인간과

법질서에 대한 이념적인 종교적·윤리적인 요구만을 의미하며, 경험적으로 유효한

질서의 논리적인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사제자의 지도로부터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해방된 법교

육도 신법에 구속된 법교육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신」법은 그것이 순수하게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에서는 인도법이 특히

명확하게 재현하는 유형에 접근한다. 「서적종교」(Buchreligion)에서와 같이, 일정

한 명령이 문자에 의한 계시거나 또는 계시의 영간적인 기록에 의하여 고정되지 않

은 한 신법은 「확정적」으로, 즉 증인들의 견고한 연관에 의해서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서적종교에서는 신성적 규범의 확증적인 해석과 다른 방법의 전승

에 의하는 그것의 보유도 전술한 방법으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이 힌

두법이나 이슬람법에 공통적인 필서된 전통을 거부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필서

된 기록에 대한 신뢰는 사람이 카리스마적으로 자격지어진 사람, 즉 예언자나 교

사 대신에 고문서나 잉크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코란 자체는 저작

이었다 - 그것의 장절은 이미 마호메트에 의해서 알라(Allah)와 협의한 후 일반적

으로 주의 깊은 문서적 고정에서 공포되었다 - 따라서 이슬람의 교육은 바로 자연

적 창조의 교설에 의해서 개개의 교전(敎典)의 사본을 알라 자신에 의한 사본으로

서 시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전(聖傳, Hadithe)에 대해서는 구전이 유효하였다.

보다 뒤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구전에 의해서 위태롭게 된 전승의 통일성에

의 이해에서 문서주의(Schriftlichkeit)가 택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때에 이것은

카리스마적인 시대가 훨씬 이전부터 소멸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보통 우리들이 이

미 아는 것처럼 유형적인 새로운 계시의 거부와 결부되어 있다. 이 경우 언제나 종

교적인 공동체의 「기구적인」 성격에 대한 기본적 명제가 확립된다(최근에는 헬트

링 남작에 의해서 적절하게 형식화되었다). 즉 신성한 문서가 전통이나 교회 교의

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에 의하여 진리의 신탁유증으로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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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6 30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립된 교회나 그 전통의 신성성이 신성한 문서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

은 시종일관하여 실제적이다. 반대의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역사적·언어적

비판의 신성한 원천을 가리키고 있다. 힌두교에 대해서 베다(Veda)는 신성한 저작

이다. 베다에는 「법」은 코란, 특히 율법(Thora)에 있[138]어서 보다 훨씬 근소하게

밖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베다는 계시서(Sruti)(계시)로 생각되고, 모든 파생적

인 신성한 전거는 전통록(Smeti)(「기억」, 전통)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제2차

적 문헌의 가장 중요한 범주인 다르마수트라(Dharmasutras)와 다르마샤스트라

(Dharmashustras)는 (후자가 신이데 대해서 전자는 산문이며, 후자가 완전히 전

통록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 전자는 중간적 지위를 차지한다) 교리론, 윤리학, 법학

의 강요이며, 모범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생화원리나 성직자의 교의에 관한 전통과

병존한다. 이러한 후자의 전거는 바로 이슬람의 「성전」(聖傳)에 상당하는 것이며,

예언자나 그 동료의 모범적인 태도에 관한 전통이며, 또 코란에 수록되지 아니한

전자의 격언에 관한 전통이다. 이슬람의 예언자의 시대는 예언자의 생애로서 끝나

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인정된다. 이에 반하여 인도의 다르마법서

(Dharmabücher)는 이슬람에 있어서의 신성한 문서에만 의하는 서적종교에 부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유태교나 기독교에서의 서적종교에 부합할 수 있는 것

도 아니다.

제3절 「법 서」

다르마 법서, 특히 보다 후기의 그것 - 마누(manu) 법전 - 은 「법서」, 즉 법

학자의 사적 저작으로서 오랫동안 법정에서 규준적인 것이었으나 결국 그것

은 하자의 학파의 체계적인 편집이나 주석에 의해서 실무로부터 아주 구축되었

기 때문에 영국의 정복시대에는 이러한 제3의 전거, 즉 (11세기에 생긴) 주석법전

(mihakshara)이 사실상 실무를 결정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강요와 주석에 의해서

종규적으로 형성된 이슬람의 「마호메트 전승」(Sunnah) - 그것에 관해서는 또다시

논급할 것이다 - 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으며, 보다 근소한 정도에서이지만 고대(탈

무드 법전)나 중세에서의 랍비(Rabbinen)의 노력에 의한 토라(Thora)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 그러나 랍비의 법형성은 고대에 존재했으며 또 일정한 범위에서는 현

대에도 존재한다. 이슬람 사람의 법형성은 현대에도 강도로 해답적인 신학적 법학

자의 수중에 잇다. 다른 한 편, 힌두교도 기독교회도 -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윤리

적인 성격이었던 카리스마적 예언자와 경전(Didaskalien)이 소멸한 후에는 - 이러

한 종류의 것을 몰랐다. 그 이유는 양자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도법에서

는 국왕의 가사제자(家司祭者)는 국왕재판소에 속고, 단식으로 오심(誤審)을 참회

하였다. 모든 중요한 사건은 국왕재판소의 사건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재판소와 종

교재판소의 미분리는 보증되고 해답적인 법명망가의 특권적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장소가 없다. 이에 반하여 소구의 기독교회는 종교회의, 즉 사교(Diocess)나 로마

법왕정(Kurie)의 관직기관에서, 특히 로마 법왕의 재판권력이나 필수적인 교직기

관에서 합리적인 법창조의 기관을 창설했었고, 이러한 기관은 그 밖의 모든 대종

교에는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기독교회에서는 교회관청의 법적 지시와 법

령은 종교결의나 교서와 함께 이슬람에서는 법학자의 판결(Fetwa des Mufti)에

의해서, 유태에서는 랍비의 의견에 의해서 인수되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힌두교의 법적 학식은 매우 강력하게 순수히 학파적·신학적이며 체계적이

고, 철학자나 신학자의 수중에 있었다. 또 사회적으로 제약된 신학적이며 체계적인

그리고 실무가의 손에 의해서는 거의 발전시킬 수 없는 법적 사고라는 특수 유형적

인 색채를 즉자적으로, 특히 고도로 가졌으며 이러한 특색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

도 기독교에 비하여 본질적으로 보다 강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전형적인 「신」법,

특히 인도법의 신법은 학설의 교리의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학설의 교리의 편집

에 있어 훨씬 이전에 폐퇴되어버린 제도의 풍부한 카주이스틱이 시현되고 있다(예

컨대 마누법전에서의 4 카스트 질서나 이슬람 학파의 이슬람교법[Schariah]의 전

부 폐퇴된 부분). 교리목적의 우위와 사제자의 사고의 합리적 성격 때문에 이러한

법서의 체계는 사제자가 아닌 자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창조된 법서보다도 보다 합

리적인 것이 종종 있다. 인도의 법서는 작센슈피겔보다도 본질적으로 「보다 체계

적」이다. 그러나 체계는 결코 법률적이 아니며 오히려 신분에 관한 것이거나 실제

의 생활문제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서는 신성한 목적에 봉사하는 법

이 존재하는 강요이며, 법만이 아니라 동시에 의례나 윤리, 또한 사정에 따라서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예의를 포함한 강요이기 때문이다. 그 일반적인 결과는 카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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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6 30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립된 교회나 그 전통의 신성성이 신성한 문서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

은 시종일관하여 실제적이다. 반대의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원리는 역사적·언어적

비판의 신성한 원천을 가리키고 있다. 힌두교에 대해서 베다(Veda)는 신성한 저작

이다. 베다에는 「법」은 코란, 특히 율법(Thora)에 있[138]어서 보다 훨씬 근소하게

밖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베다는 계시서(Sruti)(계시)로 생각되고, 모든 파생적

인 신성한 전거는 전통록(Smeti)(「기억」, 전통)으로 생각된다. 이에 반하여 제2차

적 문헌의 가장 중요한 범주인 다르마수트라(Dharmasutras)와 다르마샤스트라

(Dharmashustras)는 (후자가 신이데 대해서 전자는 산문이며, 후자가 완전히 전

통록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 전자는 중간적 지위를 차지한다) 교리론, 윤리학, 법학

의 강요이며, 모범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생화원리나 성직자의 교의에 관한 전통과

병존한다. 이러한 후자의 전거는 바로 이슬람의 「성전」(聖傳)에 상당하는 것이며,

예언자나 그 동료의 모범적인 태도에 관한 전통이며, 또 코란에 수록되지 아니한

전자의 격언에 관한 전통이다. 이슬람의 예언자의 시대는 예언자의 생애로서 끝나

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인정된다. 이에 반하여 인도의 다르마법서

(Dharmabücher)는 이슬람에 있어서의 신성한 문서에만 의하는 서적종교에 부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유태교나 기독교에서의 서적종교에 부합할 수 있는 것

도 아니다.

제3절 「법 서」

다르마 법서, 특히 보다 후기의 그것 - 마누(manu) 법전 - 은 「법서」, 즉 법

학자의 사적 저작으로서 오랫동안 법정에서 규준적인 것이었으나 결국 그것

은 하자의 학파의 체계적인 편집이나 주석에 의해서 실무로부터 아주 구축되었

기 때문에 영국의 정복시대에는 이러한 제3의 전거, 즉 (11세기에 생긴) 주석법전

(mihakshara)이 사실상 실무를 결정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강요와 주석에 의해서

종규적으로 형성된 이슬람의 「마호메트 전승」(Sunnah) - 그것에 관해서는 또다시

논급할 것이다 - 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으며, 보다 근소한 정도에서이지만 고대(탈

무드 법전)나 중세에서의 랍비(Rabbinen)의 노력에 의한 토라(Thora)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 그러나 랍비의 법형성은 고대에 존재했으며 또 일정한 범위에서는 현

대에도 존재한다. 이슬람 사람의 법형성은 현대에도 강도로 해답적인 신학적 법학

자의 수중에 잇다. 다른 한 편, 힌두교도 기독교회도 -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윤리

적인 성격이었던 카리스마적 예언자와 경전(Didaskalien)이 소멸한 후에는 - 이러

한 종류의 것을 몰랐다. 그 이유는 양자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도법에서

는 국왕의 가사제자(家司祭者)는 국왕재판소에 속고, 단식으로 오심(誤審)을 참회

하였다. 모든 중요한 사건은 국왕재판소의 사건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재판소와 종

교재판소의 미분리는 보증되고 해답적인 법명망가의 특권적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장소가 없다. 이에 반하여 소구의 기독교회는 종교회의, 즉 사교(Diocess)나 로마

법왕정(Kurie)의 관직기관에서, 특히 로마 법왕의 재판권력이나 필수적인 교직기

관에서 합리적인 법창조의 기관을 창설했었고, 이러한 기관은 그 밖의 모든 대종

교에는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기독교회에서는 교회관청의 법적 지시와 법

령은 종교결의나 교서와 함께 이슬람에서는 법학자의 판결(Fetwa des Mufti)에

의해서, 유태에서는 랍비의 의견에 의해서 인수되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힌두교의 법적 학식은 매우 강력하게 순수히 학파적·신학적이며 체계적이

고, 철학자나 신학자의 수중에 있었다. 또 사회적으로 제약된 신학적이며 체계적인

그리고 실무가의 손에 의해서는 거의 발전시킬 수 없는 법적 사고라는 특수 유형적

인 색채를 즉자적으로, 특히 고도로 가졌으며 이러한 특색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

도 기독교에 비하여 본질적으로 보다 강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전형적인 「신」법,

특히 인도법의 신법은 학설의 교리의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학설의 교리의 편집

에 있어 훨씬 이전에 폐퇴되어버린 제도의 풍부한 카주이스틱이 시현되고 있다(예

컨대 마누법전에서의 4 카스트 질서나 이슬람 학파의 이슬람교법[Schariah]의 전

부 폐퇴된 부분). 교리목적의 우위와 사제자의 사고의 합리적 성격 때문에 이러한

법서의 체계는 사제자가 아닌 자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창조된 법서보다도 보다 합

리적인 것이 종종 있다. 인도의 법서는 작센슈피겔보다도 본질적으로 「보다 체계

적」이다. 그러나 체계는 결코 법률적이 아니며 오히려 신분에 관한 것이거나 실제

의 생활문제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서는 신성한 목적에 봉사하는 법

이 존재하는 강요이며, 법만이 아니라 동시에 의례나 윤리, 또한 사정에 따라서는

사회적인 관습이나 예의를 포함한 강요이기 때문이다. 그 일반적인 결과는 카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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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8 30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스티슈하며 비구상적이고 비구체화이기 때문에 법률적으로는 대단히 비형식적이

고 단지 상대적으로만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법적 소재의 취급이 성립한다. 왜냐하

면 이러한 경우에는 언제나 추진적인 힘을 순수한 법적 실무가에서처럼 구체적인

명백한 재료와 요구로써 하는 사무운영도 아니고 또 순수한 법학적 순이론가에서

처럼 전문적인 전제에 제약된 논리도 아니어서 오히려 전체 재판의 전문사항운영

과는 전혀 이질적인 실질적인 근거 이에는 아닌 까닭이다.

이에 반하여 법교육의 담당자들이 법운영의 실무에 대해서 직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양식에서는 영국의 변호사처럼 특별 길드적도 영리 직업적도 아닌 양식을[140]

가지는 명망가였을 때에는 이에 대하여 법교육의 효과는 다시 별종의 것으로 형성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법실무에 종사하는 명망가는 일반적으로 한

편으로는 법운영이 종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직업적 부담이

도시의 거래요구에 의해서 제약되는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중세의 북부 유럽대륙의 경험적 법률가가 이 유형에 속한다. 그리고 또 경제적인

거래의 중심에서는 법명망가의 기능의 자문법학자로부터 예방학자에로의 추이만

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이러한 추이는 고유한 조건 아래 이루어졌다. 로마 제국

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공증인이 발전된 거래법을 전하고 개량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으로 남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특수한 또 장기간에 걸쳐서 지배적

이었던 법명망가층이었다. 급격히 성장한 도시의 내부에서 공증인은 길드로 결합

하고 정치적으로 유력한 명망가층인 부유국민(popolo grasso)의 아주 중요한 구

성요소가 되었다. 바로 상인의 거래는 처음부터 공증인의 문서의 형식으로서 활동

하였다. 즉 도시들, 예컨대 베니스의 소송질서는 고대의 재판집회민의 소송의 비합

리적 증거형식에 대해서 문서거증을 합리적인 증거수단으로서 우대하였다. 유가증

권의 발전에 대한 공증인의 영향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이다. 그러나 공증인들은

일반적으로 법발전에 대하여 가장 표준적인 계층의 하나였으며, 이탈리아에서의

학식 있는 재판관 계층이 발전하기까지는 아마 표준적인 계층이었다. 동부 그리스

에서의 공증인의 선구자와 같이 공증인은 지방간의 법의 조정, 특히 이탈리아에서

도 그리스에서도 최초 문서실무에 의하여 일어난 로마법의 계수에 관해서 아주 결

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공증인 자신의 전통, 또한 오래 계속된 국왕도 재판

소와의 결합 그리고 또 급속히 성장한 거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합리적인

법을 신속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 그리고 유력한 대학의 사회적 힘

은 이탈리아의 공증인으로 하여금 로마법을 본래의 거래법으로서 계수시키게 하

였다. 그런데 그것은 영국의 국민적인 법조계층이 길드적으로, 또한 특히 수수료적

이해에 의해서 로마법의 계수를 방해했다는 것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의 공증인은 로마법의 근대적 유행(usus modernus)의 창조에 관심을 가

지고, 또 거기에 실천적으로 관여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오랜 법명망가의 계층

이며, 또 영국의 변호사와 같은 국민적 법의 담당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탈리

아의 공증인은 영국의 법률가와는 반대로 국왕재판소에의 재판의 집중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법의] 국민적 통일을 결여했으므로 그들의 길드적 법학에 의해서 대

학과 경쟁하려는 시도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 의해

서 이탈리아에서의 로마법은 법과 법학의 형식적 구조로서 세계적 힘으로 되었으

며, 그것은 로마법의 본래의 정치적 관계인인 국왕이 정치적으로 이미 중요하지 않

게 딘 후에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장(Potestate)은 아주 종종 대학

에서 교육받은 법명망가 신분으로부터 나오고 관인(Signorie)은 법명망가 신분에

서 나온 정치적 교의에 완전히 의거하였다. 프랑스나 동부 스페인의 항구도시에서

의 공증인의 지위도 전적으로 같았다.

이에 반하여 독일이나 북부 프랑스의 법명망가의 상태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도시적 법관계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란트적·그룬트헤르적 법관계의 범위

에서 심판인 또는 관료로서 법의 취급에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아이케 폰

레프고(Eike von Repgow)나 보마노아르(Beaumanoir) 등과 같은 법명망가의 가

장 영향력 있는 유형은 일상 실무의 구상적인 문제 제출에 근거하는, 따라서 본질

적으로 경험적이고 추상에 의해서 거의 세련되지 않은 개념에 근거하는 법의 체계

를 창조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편찬된 법서는 전통의 고정을 원하는 것이었으며,

때때로 이론구성을 포함하였으나 특수적인 법률적 이유(ratio)를 거의 포함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작센슈피겔은 실제로는 타당하지 않은 법

제도의 약간의 구성이 아니고, 저자의 조소적(彫塑的) 요구나 성스러운 수에 대한

편애에 의하여 법의 간극이나 불충분한 점을 환상적으로 채운다는 것을 포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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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08 30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스티슈하며 비구상적이고 비구체화이기 때문에 법률적으로는 대단히 비형식적이

고 단지 상대적으로만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법적 소재의 취급이 성립한다. 왜냐하

면 이러한 경우에는 언제나 추진적인 힘을 순수한 법적 실무가에서처럼 구체적인

명백한 재료와 요구로써 하는 사무운영도 아니고 또 순수한 법학적 순이론가에서

처럼 전문적인 전제에 제약된 논리도 아니어서 오히려 전체 재판의 전문사항운영

과는 전혀 이질적인 실질적인 근거 이에는 아닌 까닭이다.

이에 반하여 법교육의 담당자들이 법운영의 실무에 대해서 직업적이기는 하지만

그 양식에서는 영국의 변호사처럼 특별 길드적도 영리 직업적도 아닌 양식을[140]

가지는 명망가였을 때에는 이에 대하여 법교육의 효과는 다시 별종의 것으로 형성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특별한 법실무에 종사하는 명망가는 일반적으로 한

편으로는 법운영이 종교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직업적 부담이

도시의 거래요구에 의해서 제약되는 정도에까지 이르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중세의 북부 유럽대륙의 경험적 법률가가 이 유형에 속한다. 그리고 또 경제적인

거래의 중심에서는 법명망가의 기능의 자문법학자로부터 예방학자에로의 추이만

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이러한 추이는 고유한 조건 아래 이루어졌다. 로마 제국

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공증인이 발전된 거래법을 전하고 개량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으로 남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특수한 또 장기간에 걸쳐서 지배적

이었던 법명망가층이었다. 급격히 성장한 도시의 내부에서 공증인은 길드로 결합

하고 정치적으로 유력한 명망가층인 부유국민(popolo grasso)의 아주 중요한 구

성요소가 되었다. 바로 상인의 거래는 처음부터 공증인의 문서의 형식으로서 활동

하였다. 즉 도시들, 예컨대 베니스의 소송질서는 고대의 재판집회민의 소송의 비합

리적 증거형식에 대해서 문서거증을 합리적인 증거수단으로서 우대하였다. 유가증

권의 발전에 대한 공증인의 영향은 우리가 이미 아는 바이다. 그러나 공증인들은

일반적으로 법발전에 대하여 가장 표준적인 계층의 하나였으며, 이탈리아에서의

학식 있는 재판관 계층이 발전하기까지는 아마 표준적인 계층이었다. 동부 그리스

에서의 공증인의 선구자와 같이 공증인은 지방간의 법의 조정, 특히 이탈리아에서

도 그리스에서도 최초 문서실무에 의하여 일어난 로마법의 계수에 관해서 아주 결

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공증인 자신의 전통, 또한 오래 계속된 국왕도 재판

소와의 결합 그리고 또 급속히 성장한 거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합리적인

법을 신속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 그리고 유력한 대학의 사회적 힘

은 이탈리아의 공증인으로 하여금 로마법을 본래의 거래법으로서 계수시키게 하

였다. 그런데 그것은 영국의 국민적인 법조계층이 길드적으로, 또한 특히 수수료적

이해에 의해서 로마법의 계수를 방해했다는 것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의 공증인은 로마법의 근대적 유행(usus modernus)의 창조에 관심을 가

지고, 또 거기에 실천적으로 관여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오랜 법명망가의 계층

이며, 또 영국의 변호사와 같은 국민적 법의 담당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탈리

아의 공증인은 영국의 법률가와는 반대로 국왕재판소에의 재판의 집중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법의] 국민적 통일을 결여했으므로 그들의 길드적 법학에 의해서 대

학과 경쟁하려는 시도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 의해

서 이탈리아에서의 로마법은 법과 법학의 형식적 구조로서 세계적 힘으로 되었으

며, 그것은 로마법의 본래의 정치적 관계인인 국왕이 정치적으로 이미 중요하지 않

게 딘 후에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 도시들의 시장(Potestate)은 아주 종종 대학

에서 교육받은 법명망가 신분으로부터 나오고 관인(Signorie)은 법명망가 신분에

서 나온 정치적 교의에 완전히 의거하였다. 프랑스나 동부 스페인의 항구도시에서

의 공증인의 지위도 전적으로 같았다.

이에 반하여 독일이나 북부 프랑스의 법명망가의 상태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도시적 법관계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란트적·그룬트헤르적 법관계의 범위

에서 심판인 또는 관료로서 법의 취급에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아이케 폰

레프고(Eike von Repgow)나 보마노아르(Beaumanoir) 등과 같은 법명망가의 가

장 영향력 있는 유형은 일상 실무의 구상적인 문제 제출에 근거하는, 따라서 본질

적으로 경험적이고 추상에 의해서 거의 세련되지 않은 개념에 근거하는 법의 체계

를 창조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편찬된 법서는 전통의 고정을 원하는 것이었으며,

때때로 이론구성을 포함하였으나 특수적인 법률적 이유(ratio)를 거의 포함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작센슈피겔은 실제로는 타당하지 않은 법

제도의 약간의 구성이 아니고, 저자의 조소적(彫塑的) 요구나 성스러운 수에 대한

편애에 의하여 법의 간극이나 불충분한 점을 환상적으로 채운다는 것을 포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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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0 31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있다. 형식적으로는 법서의 체계적인 법기록은 인도나 로마나 이슬람의 법률가의

사적 저작이었다. 법서는 편리한 강요로서 매우 현저하게 법적 실무에 영향을 미

쳤으며, 법서의 어떤 것은 재판소에 의해서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규준적인 법원(法

源)으로서 인정되었다. 법서의 저자는 한편으로는 명망가재판의 대표자이기는 하

였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영국의 변호사나 이탈리아의 공증인과 같이 유력한 길

드로 통일되는 신분을 형성하지 않았다. 즉 길드적인 영리 관심과 재판관의 지위

의 독점에 의해서 중앙재판소의 좌석에 통일적으로 결집하고, 국왕이나 의회에 의

해서도 용이하게 제거되지 않는 힘을 장악했던 신분을 형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영국의 변호사처럼 길드적 법교육의l 담당자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한 따라서 합리적인 대학교육의 법적 사고와 대학에서 교육받은 법률가에게 장기

간 저항할 수 있는 일정한 경험적인 전통과 법발전이 담당자로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중세의 법서법(Rechtsbücherrecht)은 형식적으로는 상당히 발전되었으

며, 그것은 체계적이고 카주이스티슈[141]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은 아니며 또 추상

적인 의미해석과 법논리에로 지향하는 바가 적고, 그 대신에 강력하게 구상적인 구

별수단에로 지향하고 있다.

제4절 로마의 법률가와 로마법의 형식적 성격

고대 로마의 법률가가 법에 미친 영향의 특질은 후에 보편적인 관점에서 논술하

듯이, 로마의 명망가 행정이 관료의 절약에 의해서 구체적인 소송지휘에서의 소송

지휘적인 관료의 간섭을 극소로 한다는 사정에 최초에는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스

의 데모크라시와 대립적인 것으로서 로마를 특색지우는 특수적인 명망가지배의

경향은 아테네의 인민재판인 「카디(Kadi) 재판」을 배제하였다. 관직상의 소송지도

는 관료와 법판고자의 권력분립과 함께 유지되었다. - 이들은 서로 합하여 로마의

소송심리의 실무를 창조하였다. 즉 재판관명부에 근거하여 선출된 시민에 대한 정

무관의 엄격한 형식적 지시 - 정무관이 신청된 요구를 존재하는 것으로서 승인할

또는 부인할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조건에 관한 엄격한 형식적 지시를 창조하였다.

정무관 후에 법무관, 안찰관은 이러한 소송심리의 방식을 그들의 재직기간의 시

초에 그들의 「고시」(Edikt) 중에 결정적으로 써 넣기 시작하였으며, 북유럽의 재판

관의 판결의 구속력과는 반대로 「고시」의 내용에 그들은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 구

속되었다. 그러나 물론 고시는 법실무가의 협력 아래 구상되었으며, 그것에 의해

서 그때그때에 새로 나타나는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점

에서는 대체로 관직의 전임자의 고시를 인계하였다. 그때에 대다수의 승인된 소송

이유는 당연히 구체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 언어의 법개념에 의해

서 결정되어야 하였다. 소송방식을 선택한 당사자 측의 법률상 허위인 형식의 사용

은 따라서 현대의 「소송실체화」의 원칙과는 반대로 패소의 원인이 되었으며, 현대

의 「소송실체화」 아래서는 사실들의 제시는 그것이 어떠한 형식은 문제로 삼지 않

고, 법적 발견에서 보아 제시된 청구를 정당케 하는 것인 경우에는 소송에 기초를

주는 데에 충분하다. 「실체화의 원칙」 아래서는 아주 예리한 법률적 개념의 고정에

의 강요는 로마의 소송에서 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명백하다. 로마의 소송에서 실

무가는 법률상의 일상개념들을 법률적으로 전적으로 엄격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분리하고 한정하는 것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제시를 하는 정무관이 소송지시를 순

수하게 사실적인 사건에 결부하는 (사실소권[actiones in factum]) 곳에서도 법률

적 사고의 저 기술의 결과로서 해석은 엄격하게 형식적인 법률적 성격을 취득하였

다. 법적 실무의 실무적 발전은 이러한 상태 아래서는 최초 아주 광범위한 정도에

서 「예방법학」에 맡겨져 있으며, 따라서 자문법학자에게 맡겨져 있었다. 자문법학

자는 당사자를 위하여 계약방식을 입안하였으며 또 정무관의 고시나 소송방식의

조정의 전문가로서 정무관을 「자문위원회」에서 원조했던 - 그것은 전체 로마의 관

료에 대해서 전형적이었다 -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심판에 소집된 시민이 정무관

에 의해서 제시된 문제를 취급하거나 소송심리의 지도에 관하여 해석할 때에 조언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의미에서의 자문적 활동은 전통적으로는 최초 신관(Pontifices),

즉 매년 그 목적을 위해서 선출되는 신관의 수중에 있었던 같이 보인다. 이러한 사

제자의 영향 아래서는 재판은 12표법의 편찬에도 불구하고 마호메트의 법에 관

해서 이슬람 법학자의 자문적 활동이 산출했던 것은 성격, 즉 종교적으로 제약된

비합리적인 성격을 용이하게 취득하였다. 옛 로마법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서 종

교적 영향이 아주 제2의적인 역할을 하는데 불과했던 것은 명백한 것처럼 생각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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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0 31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있다. 형식적으로는 법서의 체계적인 법기록은 인도나 로마나 이슬람의 법률가의

사적 저작이었다. 법서는 편리한 강요로서 매우 현저하게 법적 실무에 영향을 미

쳤으며, 법서의 어떤 것은 재판소에 의해서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규준적인 법원(法

源)으로서 인정되었다. 법서의 저자는 한편으로는 명망가재판의 대표자이기는 하

였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영국의 변호사나 이탈리아의 공증인과 같이 유력한 길

드로 통일되는 신분을 형성하지 않았다. 즉 길드적인 영리 관심과 재판관의 지위

의 독점에 의해서 중앙재판소의 좌석에 통일적으로 결집하고, 국왕이나 의회에 의

해서도 용이하게 제거되지 않는 힘을 장악했던 신분을 형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영국의 변호사처럼 길드적 법교육의l 담당자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한 따라서 합리적인 대학교육의 법적 사고와 대학에서 교육받은 법률가에게 장기

간 저항할 수 있는 일정한 경험적인 전통과 법발전이 담당자로 될 수 있는 것은 아

니었다. 중세의 법서법(Rechtsbücherrecht)은 형식적으로는 상당히 발전되었으

며, 그것은 체계적이고 카주이스티슈[141]하기는 하지만 합리적은 아니며 또 추상

적인 의미해석과 법논리에로 지향하는 바가 적고, 그 대신에 강력하게 구상적인 구

별수단에로 지향하고 있다.

제4절 로마의 법률가와 로마법의 형식적 성격

고대 로마의 법률가가 법에 미친 영향의 특질은 후에 보편적인 관점에서 논술하

듯이, 로마의 명망가 행정이 관료의 절약에 의해서 구체적인 소송지휘에서의 소송

지휘적인 관료의 간섭을 극소로 한다는 사정에 최초에는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스

의 데모크라시와 대립적인 것으로서 로마를 특색지우는 특수적인 명망가지배의

경향은 아테네의 인민재판인 「카디(Kadi) 재판」을 배제하였다. 관직상의 소송지도

는 관료와 법판고자의 권력분립과 함께 유지되었다. - 이들은 서로 합하여 로마의

소송심리의 실무를 창조하였다. 즉 재판관명부에 근거하여 선출된 시민에 대한 정

무관의 엄격한 형식적 지시 - 정무관이 신청된 요구를 존재하는 것으로서 승인할

또는 부인할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조건에 관한 엄격한 형식적 지시를 창조하였다.

정무관 후에 법무관, 안찰관은 이러한 소송심리의 방식을 그들의 재직기간의 시

초에 그들의 「고시」(Edikt) 중에 결정적으로 써 넣기 시작하였으며, 북유럽의 재판

관의 판결의 구속력과는 반대로 「고시」의 내용에 그들은 후에 이르러서 비로소 구

속되었다. 그러나 물론 고시는 법실무가의 협력 아래 구상되었으며, 그것에 의해

서 그때그때에 새로 나타나는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점

에서는 대체로 관직의 전임자의 고시를 인계하였다. 그때에 대다수의 승인된 소송

이유는 당연히 구체적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 언어의 법개념에 의해

서 결정되어야 하였다. 소송방식을 선택한 당사자 측의 법률상 허위인 형식의 사용

은 따라서 현대의 「소송실체화」의 원칙과는 반대로 패소의 원인이 되었으며, 현대

의 「소송실체화」 아래서는 사실들의 제시는 그것이 어떠한 형식은 문제로 삼지 않

고, 법적 발견에서 보아 제시된 청구를 정당케 하는 것인 경우에는 소송에 기초를

주는 데에 충분하다. 「실체화의 원칙」 아래서는 아주 예리한 법률적 개념의 고정에

의 강요는 로마의 소송에서 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명백하다. 로마의 소송에서 실

무가는 법률상의 일상개념들을 법률적으로 전적으로 엄격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분리하고 한정하는 것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제시를 하는 정무관이 소송지시를 순

수하게 사실적인 사건에 결부하는 (사실소권[actiones in factum]) 곳에서도 법률

적 사고의 저 기술의 결과로서 해석은 엄격하게 형식적인 법률적 성격을 취득하였

다. 법적 실무의 실무적 발전은 이러한 상태 아래서는 최초 아주 광범위한 정도에

서 「예방법학」에 맡겨져 있으며, 따라서 자문법학자에게 맡겨져 있었다. 자문법학

자는 당사자를 위하여 계약방식을 입안하였으며 또 정무관의 고시나 소송방식의

조정의 전문가로서 정무관을 「자문위원회」에서 원조했던 - 그것은 전체 로마의 관

료에 대해서 전형적이었다 -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심판에 소집된 시민이 정무관

에 의해서 제시된 문제를 취급하거나 소송심리의 지도에 관하여 해석할 때에 조언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의미에서의 자문적 활동은 전통적으로는 최초 신관(Pontifices),

즉 매년 그 목적을 위해서 선출되는 신관의 수중에 있었던 같이 보인다. 이러한 사

제자의 영향 아래서는 재판은 12표법의 편찬에도 불구하고 마호메트의 법에 관

해서 이슬람 법학자의 자문적 활동이 산출했던 것은 성격, 즉 종교적으로 제약된

비합리적인 성격을 용이하게 취득하였다. 옛 로마법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서 종

교적 영향이 아주 제2의적인 역할을 하는데 불과했던 것은 명백한 것처럼 생각된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41: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12 31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다. 그러나 로마법의 세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질, 즉 순수하게 형식적인 성질

에 관하여 데멜리우스가 아마 적어도 중요한 하나의 실례로 보았듯이, 신법의 영

향이 명백하게 간취되는 것이다. 소송의제와 같은 중요한 법기술의 제도는 신법

의 「가장된 것이 진실로서 인정된다」(simulata pro veris accipiuntur)라는 원칙

의 영향 아래 성립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민족의 사영(死靈)숭배에서 「가장행위」

(Scheingeschäft)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것, 특히 의례적 의무가 절대적

형식으로 고정된 사정 아래서 어떠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라는 것, 그러

나 경제적으로 아주 부담적인 의무의 실질적인 이행에 대한 본질적으로 시민적인

사회의 혐오가 그런 의무를 가장된 이행에 의해서 제거하기 위하여, 특히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로마의 생활의 실질적 세속화와 사제

자 계층의 정치적 무력은 나중에 종교적 사건에 관한 순수하게 형식주의적이고 법

률적인 취급을 위한 수단을 육성하였다. 시민의 거래에서의 예방법학의 방법론의

초기의 발전은 예배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더 증대시켰다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그 우선권이 신법의 영역에서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는 것을 우리는 단언해도 좋다.

초기 로마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의 하나 - 그것은 예링(Jhering)의 많이 진부

한 정식화 속에 나타나 있듯이 - 는 탁월한 분석적 성격[145]이다. 특히 소송은

문제제기로 분석되고, 법률행위는 윤리적으로 「가장 간단한」 요소로 형식화되었

다. 하나의 소송은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만 있으며,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하

나의 소송만이 있으며, 하나의 법률행위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있으며, 하나

의 약속은 하나의 급부에 대해서만 있다. 따라서 단지 일면적으로만 처해 가는 이

러한 방법, 예컨대 일상생활의 조소적(彫塑的, plastisch)인 사실의 복합을 법률

적으로 일의적으로 적절한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 사실상 초기 시민법의 방법론적

으로 그 이상 없이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향인 것은 전적으로 명백하다. 다른

한 편 논리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법상상(法想像)의 산물로서 생기는 조소적인 법

제도를 파악함에 있어서 종합으로 구성하는 능력은 그 때문에 대단히 압박을 느

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로의 경향은 국민적인 로마 종교의 내부의 의례적 의무

의 아주 원시적인 취급에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본래의 로마의 종

교의 특색, 특히 개념적이며 추상적인 철저하게 「분석적인」 신의 권한의 분리가 종

교적 문제의 합리적·법률적 취급의 현저한 규준을 창조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전

통에 따라서 신관(神官)을 허용할 수 있는 소송의 일정한 방식을 안출하였다. 그러

나 그 경우 이러한 신관의 법기술은 신분적으로 독점된 비술로서 전해졌다. 3세기

에 이르러 비로소 종교적인 법발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졌다. 전주(專主)가 되

려고 노력한 조사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 Claudius) 한 사람의 해방노예가

전통적인 신관의 소송방식을 발간했다고 한다. 최초의 평민 출신 대신관 티베리우

스 코룬카니우스(Ti. Coruncanius)는 또한 최초의 공적인 해답자였다고 한다. 이

제야 비로소 관료의 고시는 뒤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의의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동

시에 또 속인 명망가가 자문법학자나 소송대리인으로서 간극을 메꾸었다. 자문법

학자의 해답은 당사자에게는 구두로 주어지고 그것을 의뢰한 관청에는 문서로 주

어졌으나, 황제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카리스마적인 법적 지시의 신화이나 법학

자의 판결과 같은 형식으로, 즉 이유를 첨부하지 않고 주어졌다. 수요의 증대에 근

거하는 확대된 전문적 교육과 직업적 법률가적 활동은 이미 공화제 시대에 형식적

법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법학생은 공화제시대에 이미 이러한 법실무가의 자문가

로서 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실용적으로 유효한 법과 그 소송법적 취급은 매우 고

도의 형식적·합리적 성격을 취득했음에 틀림없을 것이지만 그것은 외부적으로는

목적계기에서 이루어진 도시의 영리활동이 산출한 법실무의 대상에 의해서 필연적

으로 결정되었다. 그것은 중세 독일에서 비중이 컸던 농촌관계와는 반대이다. 중세

독일의 농촌관계에서는 주요한 관심은 사회적 서열, 부동산소유, 혼인법, 가족법에

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법생활은 제정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종합적·구성적인 성격

뿐만 아니라 합리적·체계적인 성격도 때때로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이 결여되

었다. 실용적으로 유효한 법에 체계를 결정적으로 수여한 것은 비잔틴의 관료제였

으나 법률적 사고의 형식엄격성에 관해서는 공화제나 원수제 시대의 자문법학자

의 업적보다 훨씬 후퇴하였다. 그리고 자문법학자의 저서 중에서 체계적으로 가장

유익한 업적인 가이우스의 『법학제요』, 즉 법학입문을 위한 강요는 그의 생존시에

는 무명의, 따라서 권위 없는 그리고 법명망가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을 저자로 하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42: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12 31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다. 그러나 로마법의 세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질, 즉 순수하게 형식적인 성질

에 관하여 데멜리우스가 아마 적어도 중요한 하나의 실례로 보았듯이, 신법의 영

향이 명백하게 간취되는 것이다. 소송의제와 같은 중요한 법기술의 제도는 신법

의 「가장된 것이 진실로서 인정된다」(simulata pro veris accipiuntur)라는 원칙

의 영향 아래 성립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민족의 사영(死靈)숭배에서 「가장행위」

(Scheingeschäft)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것, 특히 의례적 의무가 절대적

형식으로 고정된 사정 아래서 어떠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나 라는 것, 그러

나 경제적으로 아주 부담적인 의무의 실질적인 이행에 대한 본질적으로 시민적인

사회의 혐오가 그런 의무를 가장된 이행에 의해서 제거하기 위하여, 특히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로마의 생활의 실질적 세속화와 사제

자 계층의 정치적 무력은 나중에 종교적 사건에 관한 순수하게 형식주의적이고 법

률적인 취급을 위한 수단을 육성하였다. 시민의 거래에서의 예방법학의 방법론의

초기의 발전은 예배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더 증대시켰다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그 우선권이 신법의 영역에서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는 것을 우리는 단언해도 좋다.

초기 로마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의 하나 - 그것은 예링(Jhering)의 많이 진부

한 정식화 속에 나타나 있듯이 - 는 탁월한 분석적 성격[145]이다. 특히 소송은

문제제기로 분석되고, 법률행위는 윤리적으로 「가장 간단한」 요소로 형식화되었

다. 하나의 소송은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만 있으며,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는 하

나의 소송만이 있으며, 하나의 법률행위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있으며, 하나

의 약속은 하나의 급부에 대해서만 있다. 따라서 단지 일면적으로만 처해 가는 이

러한 방법, 예컨대 일상생활의 조소적(彫塑的, plastisch)인 사실의 복합을 법률

적으로 일의적으로 적절한 요소로 분해하는 것이 사실상 초기 시민법의 방법론적

으로 그 이상 없이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향인 것은 전적으로 명백하다. 다른

한 편 논리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법상상(法想像)의 산물로서 생기는 조소적인 법

제도를 파악함에 있어서 종합으로 구성하는 능력은 그 때문에 대단히 압박을 느

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로의 경향은 국민적인 로마 종교의 내부의 의례적 의무

의 아주 원시적인 취급에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본래의 로마의 종

교의 특색, 특히 개념적이며 추상적인 철저하게 「분석적인」 신의 권한의 분리가 종

교적 문제의 합리적·법률적 취급의 현저한 규준을 창조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전

통에 따라서 신관(神官)을 허용할 수 있는 소송의 일정한 방식을 안출하였다. 그러

나 그 경우 이러한 신관의 법기술은 신분적으로 독점된 비술로서 전해졌다. 3세기

에 이르러 비로소 종교적인 법발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졌다. 전주(專主)가 되

려고 노력한 조사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 Claudius) 한 사람의 해방노예가

전통적인 신관의 소송방식을 발간했다고 한다. 최초의 평민 출신 대신관 티베리우

스 코룬카니우스(Ti. Coruncanius)는 또한 최초의 공적인 해답자였다고 한다. 이

제야 비로소 관료의 고시는 뒤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의의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동

시에 또 속인 명망가가 자문법학자나 소송대리인으로서 간극을 메꾸었다. 자문법

학자의 해답은 당사자에게는 구두로 주어지고 그것을 의뢰한 관청에는 문서로 주

어졌으나, 황제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카리스마적인 법적 지시의 신화이나 법학

자의 판결과 같은 형식으로, 즉 이유를 첨부하지 않고 주어졌다. 수요의 증대에 근

거하는 확대된 전문적 교육과 직업적 법률가적 활동은 이미 공화제 시대에 형식적

법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법학생은 공화제시대에 이미 이러한 법실무가의 자문가

로서 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실용적으로 유효한 법과 그 소송법적 취급은 매우 고

도의 형식적·합리적 성격을 취득했음에 틀림없을 것이지만 그것은 외부적으로는

목적계기에서 이루어진 도시의 영리활동이 산출한 법실무의 대상에 의해서 필연적

으로 결정되었다. 그것은 중세 독일에서 비중이 컸던 농촌관계와는 반대이다. 중세

독일의 농촌관계에서는 주요한 관심은 사회적 서열, 부동산소유, 혼인법, 가족법에

관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로마의 법생활은 제정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종합적·구성적인 성격

뿐만 아니라 합리적·체계적인 성격도 때때로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이 결여되

었다. 실용적으로 유효한 법에 체계를 결정적으로 수여한 것은 비잔틴의 관료제였

으나 법률적 사고의 형식엄격성에 관해서는 공화제나 원수제 시대의 자문법학자

의 업적보다 훨씬 후퇴하였다. 그리고 자문법학자의 저서 중에서 체계적으로 가장

유익한 업적인 가이우스의 『법학제요』, 즉 법학입문을 위한 강요는 그의 생존시에

는 무명의, 따라서 권위 없는 그리고 법명망가의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을 저자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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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4 31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였으며, 가이우스 『법학제요』의 지위는 법학자의 저작인 동시에 가정교사의 현대

적 강요와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이우스가 속

하지 않았던 로마의 실무적 법학자의 저작은 대학의 수업을 성립시키는 것과 같은

합리적 법체계라는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개의 판결을 전적으로 고

도로 합리적으로 정리한 집성이었던 것이다.

자문법학자는 특수한 명망가층에 속한다. 자문법학자는 로마의 소유계층에게

는 전체경제적인 사무에 관한 일반적인 「청죄사제」(聽罪司祭, Beichväter)였다. 키

케로의 한 절이 추정할 수 있는 해답가를 위한 형식적 특허가 보다 옛 시대에 부여

되었는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뒤의 시대에서도 그러한 특허는 결코 존재하지 않

았다. 해답법학자는 증대하는 논리적 세련에 의해서 예전의 예방법학의 방법으로

부터 해방되고, 또 분명히 문서기초자와의 인격적 일치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공화

정의 종말에는 학파로 결집하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어서 키케로와 같은 법

정변사가 기록에 의해서 주지된 경향, 즉 합리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사

람에 따라서」(ad hominen) 활동하고 그리하여 엄밀한 개념형성의 완화에 기여했

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러한 한에서 특수한 정치적인 배심대판은 인민재판의 성격

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러한 것을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소송

에만 관한 것이었다. 제정시대에는 재판은결정적으로는 전문적인 사무였다. 자문

법학자 계층의 일부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그들의 해답이 재판관을 구속한다

는 특권이 수여됨으로써 재판에 대한 공적 지위에 앉게 되었다. 이러한 자문법학

자는 결코 대리인(Causidici)이 아니며 따라서 사고훈련이 일상의 실무와 법관계인

의 요구에 향해 있는 변호사의 길드도 아니었다. 자문법학자의 감정은 오히려 모든

순수한 변호사활동의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146] 전적으로 법적인 재판에 의해서

제시되고 변호사와 재판관 또는 양자의 어느 것에 의해서 준비된 사실에 전적으로

관계시켰던 것이다. 상술한 것은 확실히 엄격한 추상적·법률적 개념형성의 조탁의

최선의 기회였다. 이리하여 해답은 본래의 법운영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을 학문적

방법론에 의해서 보편적인 원칙에 환원하는 것을 권하기 위하여 충분한 거리를 두

었다. 이러한 거리는 언제나 소송대리인이었던 영국의 변호사의 그것보다도 컸다.

그러나 학파의 논쟁도 이러한 경향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다. 자문법학자는 그들의

구속적인 감정에 의하여 재판을 지배하였다. 해답은 최초에는 마치 현자의 신탁이

나 법학자의 판결과 같이 이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법률가는 해답을 모으기 시

작하고, 또 점차 법률적인 이유를 붙여서 제출하기 시작하였다. 「법학생」을 위한

학파간의 논쟁이나 법률사건의 토론은 법학생이 자문실무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

함으로써 발전하였다. 이로써 공화정 말기에 비로소 일정한 교육과정이 성립하였

다. 그리스 철학에 의해서 증대하는 형식교육은 법률적 사고에 대해서는 언제나

일정한 의의를 가졌었고, 그리하여 법학파의 외부적인 정비에 대하여 그리스 철학

의 학파는 분명히 종종 모범으로 되었다. 로마법이 개념의 모든 정확성에도 불구하

고, 아직 강도로 경험적인 기술이었던 단계로부터 점차 합리적인 기술과 학문적 순

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법학파의 이러한 교훈적이고 저널리스트적인 활동에 근

거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론적 법학파의 법적 실무에 대한 완전히 제2차적

인 지위는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하였다. 즉 추상적인 법개념의 매우 적은 발전

도 그것이 실용적인 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으로 체계적인 요구에 봉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도 법적 사고의 고도의 추상성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을 분명

히 하였다. 다수의 일견하여 이질적인 사실을 예컨대 「임약」(賃約, locatio)의 범주

아래 통일적으로 총괄한다는 것은 중요한 실용적 결과를 얻었다. 이에 반하여 「법

률행위」라는 개념의 형성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갖지 못하였다. 즉

법률행위의 개념은 단지 먼저 첫째로 체계적 요구에 봉사하는 데에 불과하다. 따

라서 이러한 개념은 「청구권」이나 「처분」 등등의 개념처럼 옛 로마에는 결여되었으

며, 이러한 체계화는 일반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서도 아직 정말 눈

에 띠이지 않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합리화된 데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념의 순화

는 구체적인 소송과 계약의 방식에 관련하여 언제나 행하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순

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현대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결과

가 되었다. 즉 먼저 첫째로 재판, 특히 자문법학자를 포함한 재판의 완전한 세속화

가 결정적이었다. 이슬람 법학자의 판결은 전적으로 로마의 법학자의 구속적인 해

답과 대비된다. 왜냐하면 이슬람 법학자도 역시 특허가 인정된 자문법학자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법학자는 이슬람 대학에서의 교육으로 그의 교양을 받았

다. 이슬람 대학은 확실히 보다 후기의 공인된 동로마 제국의 법학파를 모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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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으며, 가이우스 『법학제요』의 지위는 법학자의 저작인 동시에 가정교사의 현대

적 강요와 같은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이우스가 속

하지 않았던 로마의 실무적 법학자의 저작은 대학의 수업을 성립시키는 것과 같은

합리적 법체계라는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개의 판결을 전적으로 고

도로 합리적으로 정리한 집성이었던 것이다.

자문법학자는 특수한 명망가층에 속한다. 자문법학자는 로마의 소유계층에게

는 전체경제적인 사무에 관한 일반적인 「청죄사제」(聽罪司祭, Beichväter)였다. 키

케로의 한 절이 추정할 수 있는 해답가를 위한 형식적 특허가 보다 옛 시대에 부여

되었는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뒤의 시대에서도 그러한 특허는 결코 존재하지 않

았다. 해답법학자는 증대하는 논리적 세련에 의해서 예전의 예방법학의 방법으로

부터 해방되고, 또 분명히 문서기초자와의 인격적 일치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공화

정의 종말에는 학파로 결집하였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있어서 키케로와 같은 법

정변사가 기록에 의해서 주지된 경향, 즉 합리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서적으로 「사

람에 따라서」(ad hominen) 활동하고 그리하여 엄밀한 개념형성의 완화에 기여했

다는 것은 명백하며, 그러한 한에서 특수한 정치적인 배심대판은 인민재판의 성격

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러한 것을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인 소송

에만 관한 것이었다. 제정시대에는 재판은결정적으로는 전문적인 사무였다. 자문

법학자 계층의 일부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그들의 해답이 재판관을 구속한다

는 특권이 수여됨으로써 재판에 대한 공적 지위에 앉게 되었다. 이러한 자문법학

자는 결코 대리인(Causidici)이 아니며 따라서 사고훈련이 일상의 실무와 법관계인

의 요구에 향해 있는 변호사의 길드도 아니었다. 자문법학자의 감정은 오히려 모든

순수한 변호사활동의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146] 전적으로 법적인 재판에 의해서

제시되고 변호사와 재판관 또는 양자의 어느 것에 의해서 준비된 사실에 전적으로

관계시켰던 것이다. 상술한 것은 확실히 엄격한 추상적·법률적 개념형성의 조탁의

최선의 기회였다. 이리하여 해답은 본래의 법운영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을 학문적

방법론에 의해서 보편적인 원칙에 환원하는 것을 권하기 위하여 충분한 거리를 두

었다. 이러한 거리는 언제나 소송대리인이었던 영국의 변호사의 그것보다도 컸다.

그러나 학파의 논쟁도 이러한 경향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다. 자문법학자는 그들의

구속적인 감정에 의하여 재판을 지배하였다. 해답은 최초에는 마치 현자의 신탁이

나 법학자의 판결과 같이 이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법률가는 해답을 모으기 시

작하고, 또 점차 법률적인 이유를 붙여서 제출하기 시작하였다. 「법학생」을 위한

학파간의 논쟁이나 법률사건의 토론은 법학생이 자문실무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

함으로써 발전하였다. 이로써 공화정 말기에 비로소 일정한 교육과정이 성립하였

다. 그리스 철학에 의해서 증대하는 형식교육은 법률적 사고에 대해서는 언제나

일정한 의의를 가졌었고, 그리하여 법학파의 외부적인 정비에 대하여 그리스 철학

의 학파는 분명히 종종 모범으로 되었다. 로마법이 개념의 모든 정확성에도 불구하

고, 아직 강도로 경험적인 기술이었던 단계로부터 점차 합리적인 기술과 학문적 순

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법학파의 이러한 교훈적이고 저널리스트적인 활동에 근

거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론적 법학파의 법적 실무에 대한 완전히 제2차적

인 지위는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하였다. 즉 추상적인 법개념의 매우 적은 발전

도 그것이 실용적인 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으로 체계적인 요구에 봉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도 법적 사고의 고도의 추상성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을 분명

히 하였다. 다수의 일견하여 이질적인 사실을 예컨대 「임약」(賃約, locatio)의 범주

아래 통일적으로 총괄한다는 것은 중요한 실용적 결과를 얻었다. 이에 반하여 「법

률행위」라는 개념의 형성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갖지 못하였다. 즉

법률행위의 개념은 단지 먼저 첫째로 체계적 요구에 봉사하는 데에 불과하다. 따

라서 이러한 개념은 「청구권」이나 「처분」 등등의 개념처럼 옛 로마에는 결여되었으

며, 이러한 체계화는 일반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서도 아직 정말 눈

에 띠이지 않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합리화된 데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념의 순화

는 구체적인 소송과 계약의 방식에 관련하여 언제나 행하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순

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현대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결과

가 되었다. 즉 먼저 첫째로 재판, 특히 자문법학자를 포함한 재판의 완전한 세속화

가 결정적이었다. 이슬람 법학자의 판결은 전적으로 로마의 법학자의 구속적인 해

답과 대비된다. 왜냐하면 이슬람 법학자도 역시 특허가 인정된 자문법학자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법학자는 이슬람 대학에서의 교육으로 그의 교양을 받았

다. 이슬람 대학은 확실히 보다 후기의 공인된 동로마 제국의 법학파를 모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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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6 31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하여 발전한 것이며, 또한 일시적으로는 고대 철학에 근거하는 형식적 교육의 영

향 아래 고대적인 방법론까지도 발전시켰다. 다만 교육은 주로신학적인 것에 그쳤

고, 종교적인 또는 전통적인 구속과 그 효력이 제거되지도 않고, 또한 실무에서 관

철되지도 않는 신법의 불명확하고 실용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 그리고 신전(神

典)에 제약된 종래의 신정적 재판의 여러 가지 특색 등은 상술한 것과 같은 발전의

가능성을 부단히 감소시켰으며 또한 강도로 기계적이며 경험적인 법적 소재의 획

득에 대한 법학을 순수하게 이론적인 실제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주이스틱에

의하여 제약하였다. 구별하는 두 번째의 이유는 재판조직의 성격과 정치적으로 제

약된 경제의 합리화의 제한이 생겼다는 조건에 있다. 로마의 법적 발전에는 신학

적 요소는 완전히 결여되었다. 순전히 세속적이고 증대한 관료제적인 후기 로마제

국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학설휘찬』(Pandekten)의 집성이 해답법학자나 그의

문하의 아주 정확한 로마적 법사상의 상대적으로만 합리적으로 체계화된 저작으

로부터 선택되었다. 그리고 이 후기 로마제국은 자기의 법창조에 의한 체계적인 보

충을 하여 그것은 수세기 후에도 아직 중세의 대학교육에서의 법사상에 대한 재료

를 제공하였다. 이미 제정시대에서도 로마법에 예부터 고유한 분석적 특징과 함께

그 밖의 요소, 즉 증대하는 법개념의 추상적 성격이 나타났다. 이러한 추상적 성격

은 부분적으로는 로마의 소송방식의 본질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소송방

식은 각기 사실로서의 법개념에 관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개념은 매우 다

양한 경제사실을 하나의 적당한 개념 아래 통일할 수가 있어 따라서 법실무가, 특

히 예방법학자, 자문법학자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것으로서 부분적으로는 파악

되었다. 새로운 경제적 요구에의 적응은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옛 개념을 합리적

으로 해석하고 확대 전개시킨다는 방법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법논리적이고 구성적인 작업은 그것이 순수하게 분석적 방법이라는 기초에 서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곳까지 비로소 높여졌다. 골드슈미트가 임대(locatio),

임차(conductio), 매매(emptio, venditto), 위임(mandatum)(특히 명령소권

[actio quod iussu depositum])과 같은 법개념의 대단한 탄력성과 특히 문답계약

(stipulatio), 변제약속(constitutum)의 거의 전체 경우에 적응하는 무제약한 수

용능력을 지시한 것은 정당하였다. 현대에는 이와 같은 것이 어음 또는 다른 형식

적인 일정한 금액에 대한 채무[법적 보증 아래 지정된 행위]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

다. 주어진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생긴 로마의 법논리의 특수성은 그것을 예컨대 영

국의 예방법학의 작업양식과 비교한다면 특히 명백하게 된다. 영국의 예방법학도

역시 종종 그의 조력을 얻어 매우 다양한 사실에 법적인 소송가능성을 주기 위해

서 아주 대담하게 개개의 법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구별은 즉 한편

으로 로마의 법률가는 「지도」(指圖, iussus)라는 범주를 보증(Kreditbürgschaft)

이나 지시(指示, Anweisung)의 구성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한편 영국의 법률

가는 침해소송(trespass)이라는 범죄개념으로부터 다수의서로 전혀 다른 계약의

소송원인을 얻었다는 경우에 생기는 구별은 명백하다. 영국의 경우에는 법률적으

로 이질적인 것이 우회로를 거쳐 법적 강제를 얻기 위하여 혼동되는데 대하여 로

마의 경우에는 경제적(외부적)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사실이 거기에 적합한 법개념

에 종속시켜지고 있다. 물론 현대, 특히 「로마적인」 것으로서 간주되는 법개념의 추

상적 성격은 로마법에 원초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 부분적으로는 고대에

는 결코 생기지 않았던 것도 있다. 예컨대 많이 논의 된 로마의 소유권개념은 로마

법이 국적을 상실하고 세계법으로 된 결과 외의 것은 아니었다. 국민적 로마법에서

의 소유권은 결코 특히 「추상적」으로 질서된 원칙이 아니며, 또한 결코 통일적인 원

칙도 아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근본적인 구별을 제거하고, 즉 토

지법이 나타내는 몇 가지 형식에로 환원한 것이며, 고대의 특시명령에 의한 보호

(Interdiktenschutz)의 절차적·사회적 조건이 고사한 후에 학설휘찬의 개념내용

의 중세적 분석에 대하여 두 개의 원칙, 즉 소유(dominium)와 점유(Possessio)

가 전적으로 추상적인 사실로서 남겨졌다. 그 원칙은 그 밖의 많은 원칙과 본질적

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대개의 고유한 로마의 법제도의 본래의 성격은 본질적으

로는 게르만법의 그것보다 결코 추상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설휘찬의 특수형식

은 로마 국가형식의 고유한 변전에 응하는 것이었다. 법률적 사고의 순화 그 자체

는 그 방향에서 이미 논술한 바에서 명백하듯이, 부분적으로는 정치관계 그것도

공화정 시대와 제정시대에서 상위하는 정치적 관계의 결과이었다. [149] 고대의 재

판과 자문법학자와의 아주 중요한 기술적 특색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 본질

적인 부분이 공화정의 명망가지배의 성과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원래 법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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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6 31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하여 발전한 것이며, 또한 일시적으로는 고대 철학에 근거하는 형식적 교육의 영

향 아래 고대적인 방법론까지도 발전시켰다. 다만 교육은 주로신학적인 것에 그쳤

고, 종교적인 또는 전통적인 구속과 그 효력이 제거되지도 않고, 또한 실무에서 관

철되지도 않는 신법의 불명확하고 실용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 그리고 신전(神

典)에 제약된 종래의 신정적 재판의 여러 가지 특색 등은 상술한 것과 같은 발전의

가능성을 부단히 감소시켰으며 또한 강도로 기계적이며 경험적인 법적 소재의 획

득에 대한 법학을 순수하게 이론적인 실제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주이스틱에

의하여 제약하였다. 구별하는 두 번째의 이유는 재판조직의 성격과 정치적으로 제

약된 경제의 합리화의 제한이 생겼다는 조건에 있다. 로마의 법적 발전에는 신학

적 요소는 완전히 결여되었다. 순전히 세속적이고 증대한 관료제적인 후기 로마제

국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학설휘찬』(Pandekten)의 집성이 해답법학자나 그의

문하의 아주 정확한 로마적 법사상의 상대적으로만 합리적으로 체계화된 저작으

로부터 선택되었다. 그리고 이 후기 로마제국은 자기의 법창조에 의한 체계적인 보

충을 하여 그것은 수세기 후에도 아직 중세의 대학교육에서의 법사상에 대한 재료

를 제공하였다. 이미 제정시대에서도 로마법에 예부터 고유한 분석적 특징과 함께

그 밖의 요소, 즉 증대하는 법개념의 추상적 성격이 나타났다. 이러한 추상적 성격

은 부분적으로는 로마의 소송방식의 본질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소송방

식은 각기 사실로서의 법개념에 관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개념은 매우 다

양한 경제사실을 하나의 적당한 개념 아래 통일할 수가 있어 따라서 법실무가, 특

히 예방법학자, 자문법학자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것으로서 부분적으로는 파악

되었다. 새로운 경제적 요구에의 적응은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옛 개념을 합리적

으로 해석하고 확대 전개시킨다는 방법으로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에 의하여

법논리적이고 구성적인 작업은 그것이 순수하게 분석적 방법이라는 기초에 서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곳까지 비로소 높여졌다. 골드슈미트가 임대(locatio),

임차(conductio), 매매(emptio, venditto), 위임(mandatum)(특히 명령소권

[actio quod iussu depositum])과 같은 법개념의 대단한 탄력성과 특히 문답계약

(stipulatio), 변제약속(constitutum)의 거의 전체 경우에 적응하는 무제약한 수

용능력을 지시한 것은 정당하였다. 현대에는 이와 같은 것이 어음 또는 다른 형식

적인 일정한 금액에 대한 채무[법적 보증 아래 지정된 행위]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

다. 주어진 형식적 조건들로부터 생긴 로마의 법논리의 특수성은 그것을 예컨대 영

국의 예방법학의 작업양식과 비교한다면 특히 명백하게 된다. 영국의 예방법학도

역시 종종 그의 조력을 얻어 매우 다양한 사실에 법적인 소송가능성을 주기 위해

서 아주 대담하게 개개의 법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구별은 즉 한편

으로 로마의 법률가는 「지도」(指圖, iussus)라는 범주를 보증(Kreditbürgschaft)

이나 지시(指示, Anweisung)의 구성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한편 영국의 법률

가는 침해소송(trespass)이라는 범죄개념으로부터 다수의서로 전혀 다른 계약의

소송원인을 얻었다는 경우에 생기는 구별은 명백하다. 영국의 경우에는 법률적으

로 이질적인 것이 우회로를 거쳐 법적 강제를 얻기 위하여 혼동되는데 대하여 로

마의 경우에는 경제적(외부적)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사실이 거기에 적합한 법개념

에 종속시켜지고 있다. 물론 현대, 특히 「로마적인」 것으로서 간주되는 법개념의 추

상적 성격은 로마법에 원초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 부분적으로는 고대에

는 결코 생기지 않았던 것도 있다. 예컨대 많이 논의 된 로마의 소유권개념은 로마

법이 국적을 상실하고 세계법으로 된 결과 외의 것은 아니었다. 국민적 로마법에서

의 소유권은 결코 특히 「추상적」으로 질서된 원칙이 아니며, 또한 결코 통일적인 원

칙도 아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근본적인 구별을 제거하고, 즉 토

지법이 나타내는 몇 가지 형식에로 환원한 것이며, 고대의 특시명령에 의한 보호

(Interdiktenschutz)의 절차적·사회적 조건이 고사한 후에 학설휘찬의 개념내용

의 중세적 분석에 대하여 두 개의 원칙, 즉 소유(dominium)와 점유(Possessio)

가 전적으로 추상적인 사실로서 남겨졌다. 그 원칙은 그 밖의 많은 원칙과 본질적

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대개의 고유한 로마의 법제도의 본래의 성격은 본질적으

로는 게르만법의 그것보다 결코 추상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설휘찬의 특수형식

은 로마 국가형식의 고유한 변전에 응하는 것이었다. 법률적 사고의 순화 그 자체

는 그 방향에서 이미 논술한 바에서 명백하듯이, 부분적으로는 정치관계 그것도

공화정 시대와 제정시대에서 상위하는 정치적 관계의 결과이었다. [149] 고대의 재

판과 자문법학자와의 아주 중요한 기술적 특색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 본질

적인 부분이 공화정의 명망가지배의 성과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원래 법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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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18 31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전문교육의 이러한 지배는 선출된 단기간의 정치적으로 고귀한 관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만족할 것은 아니었다. 12표법의 지식은 고래 학교수업의 대상이었으나 공

화정 시대의 로마의 관료는 법률의 지식을 본질적으로는 실무에 의해서만 얻었다.

다른 것은 그의 자문관들에 의하여 배려되었다. 이에 반하여 체계적인 법학연구의

필요는 임명된 관료, 관료의 합리화 그리고 관료제화로써 하는 황제의 행정에 의

해서 그중에도 속주 직무에서 아주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지배의 관료제화

의 보편적 작용에 관해서는 우리는 뒤에 다시 보다 커다란 관련에서 이해할 것이

다. 영국에서는 지배의 관료제화가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의 체계적 합리화는

아주 현저하게 지체하였다. 자문법학자가 법명망가로서 로마의 재판을 지배하는

한 로마에서는 체계에 대한 노력이 빈약하였으며, 특히 정치적 권력의 법전편찬에

의 또는 체계화에의 관여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세베루스 황제 치하의 로마 귀

족의 몰락은 동시에 해답가 신분의 의의의 쇠퇴와 또 거기에 대비하여 재판실무에

대한 황제의 훈령의 급격히 증대하는 의의를 가르쳤다. 나중 시대에 국가적으로 인

허된 학교의 법교육은 법학자의 저작으로부터 원용한 문헌적인 수업만을 하였다.

재판실무는 법학자의 저작을 권위 있는 법원으로서 사용하였으며, 황제는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에는 이른바 「인용법」(Zitiergesetze)에 의해서 법학자의 저작의

다수결과 순위를 결정하였다. 해답집은 따라서 영국에서의 코먼로의 선레집과 같

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지위는 학설휘찬의 형식을 조건지었으며, 적어도 고

전적 법학문헌으로부터 학설휘찬 안에 수습된 단편을 보존해가도록 하였다.

제5장 법의 형식적 합리화와 실질적 합리화

제1절 법형식주의의 의의와 일반적 조건

상술한 논의로서 법의 형식적 성격에 주는 정치적 지배형식의 작용이라는 이미

때때로 논술하여온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였다. 물론 이 문제의 결정적인 논의는 지

배형식의 분석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몇 가지의 [150] 일반적인 고찰을 서술해야 할 것이다. 원

래 씨족간의 속죄절차인 고대의 인민재판은 도처에서 군주나 정무관의 권력(벌령

권[罰令權 Bann, 제권[帝權 imperium])의 작용에 의해서, 또한 사정에 따라서는

조직화된 사제자권력의 작용으로 속죄절차의 원시적인 형식주의적 비합리성으로

부터 떨어져 나오고 동시에 법내용도 이러한 권력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

은 것이다. 법내용은 지배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군주나 교

주의 지배기구가 합리적이면 합리적일수록, 또한 「관료」에 의해서 매개되면 될수록

점점 그 작용은 재판에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합리적인 성격 - 그것은 물론

다양한 의미에서의 합리적 성격인데 - 을 수여하며, 비합리적인 소송수단을 제거

하려는 데에 향해지며 또 실질적 법을 체계화하려는 데로 향하며, 이것은 동시에

언제나 실질적 법을 합리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이것은 예컨대 고대의 명예법

이나 법무관의 소송수단에, 또 프랑스 국왕의 칙령에, 또 영국의 국왕이나 대법관

의 소송개혁에, 또 교회의 규문절차에 인정된다). 그러나 상술한 권력들은 이러한

합리적인 경향을 다음의 경우에만 명백한 태도로 취하였다. 즉 그것은 권력 자체

의 합리적 행정에 대한 관심이 권력에게 이러한 길을 지시한 경우(교황의 교회통치

처럼)이거나 또는 권력이 유력한 법적 관계인의 단체와 동맹한 경우이다. 또 이 유

력한 법적 관계인의 단체는 로마, 중세 말기 또는 근세에서의 시민계급과 같이 법

과 소송의 합리적인 성격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동맹이 결여된 곳

에서는 법의 세속화와 엄격하고 형식적인 법적 사고의 분화와는 시원적 단계에 남

아 있거나 또는 방해되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교황이나 가산적 군주의

「합리주의」가 실질적 성격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교황이나 가산적 군주의 합리주의

에서는 형식적·법률적으로 가장 정확한 기회의 계산이나 법과 소송의 합리적인 체

계에 가장 적합한 특색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자의 실용적·공리적이며 윤리적인 요

구에 내용적으로 가장 적응한 특색이 추구된다. 「도덕」과 「법」의 분리는 이미 보았

듯이, 전자의 자족적 전문적으로 「법률적인」법의 취급에 대하여 전혀 연고 없이 대

립하는 후자의 법형성의 요소들의 목적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특히 보통 도덕적 요구와 법률적 규정을 결합한 신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법형성에

관해서 타당하다. 물론 한편으로는 증대하는 법적 사고의 합리화에 의하여,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관계의 형식들에 의하여 사찰자의 영향력에 의하여 지지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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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교육의 이러한 지배는 선출된 단기간의 정치적으로 고귀한 관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만족할 것은 아니었다. 12표법의 지식은 고래 학교수업의 대상이었으나 공

화정 시대의 로마의 관료는 법률의 지식을 본질적으로는 실무에 의해서만 얻었다.

다른 것은 그의 자문관들에 의하여 배려되었다. 이에 반하여 체계적인 법학연구의

필요는 임명된 관료, 관료의 합리화 그리고 관료제화로써 하는 황제의 행정에 의

해서 그중에도 속주 직무에서 아주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러한 지배의 관료제화

의 보편적 작용에 관해서는 우리는 뒤에 다시 보다 커다란 관련에서 이해할 것이

다. 영국에서는 지배의 관료제화가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의 체계적 합리화는

아주 현저하게 지체하였다. 자문법학자가 법명망가로서 로마의 재판을 지배하는

한 로마에서는 체계에 대한 노력이 빈약하였으며, 특히 정치적 권력의 법전편찬에

의 또는 체계화에의 관여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세베루스 황제 치하의 로마 귀

족의 몰락은 동시에 해답가 신분의 의의의 쇠퇴와 또 거기에 대비하여 재판실무에

대한 황제의 훈령의 급격히 증대하는 의의를 가르쳤다. 나중 시대에 국가적으로 인

허된 학교의 법교육은 법학자의 저작으로부터 원용한 문헌적인 수업만을 하였다.

재판실무는 법학자의 저작을 권위 있는 법원으로서 사용하였으며, 황제는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에는 이른바 「인용법」(Zitiergesetze)에 의해서 법학자의 저작의

다수결과 순위를 결정하였다. 해답집은 따라서 영국에서의 코먼로의 선레집과 같

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지위는 학설휘찬의 형식을 조건지었으며, 적어도 고

전적 법학문헌으로부터 학설휘찬 안에 수습된 단편을 보존해가도록 하였다.

제5장 법의 형식적 합리화와 실질적 합리화

제1절 법형식주의의 의의와 일반적 조건

상술한 논의로서 법의 형식적 성격에 주는 정치적 지배형식의 작용이라는 이미

때때로 논술하여온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였다. 물론 이 문제의 결정적인 논의는 지

배형식의 분석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몇 가지의 [150] 일반적인 고찰을 서술해야 할 것이다. 원

래 씨족간의 속죄절차인 고대의 인민재판은 도처에서 군주나 정무관의 권력(벌령

권[罰令權 Bann, 제권[帝權 imperium])의 작용에 의해서, 또한 사정에 따라서는

조직화된 사제자권력의 작용으로 속죄절차의 원시적인 형식주의적 비합리성으로

부터 떨어져 나오고 동시에 법내용도 이러한 권력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

은 것이다. 법내용은 지배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군주나 교

주의 지배기구가 합리적이면 합리적일수록, 또한 「관료」에 의해서 매개되면 될수록

점점 그 작용은 재판에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합리적인 성격 - 그것은 물론

다양한 의미에서의 합리적 성격인데 - 을 수여하며, 비합리적인 소송수단을 제거

하려는 데에 향해지며 또 실질적 법을 체계화하려는 데로 향하며, 이것은 동시에

언제나 실질적 법을 합리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이것은 예컨대 고대의 명예법

이나 법무관의 소송수단에, 또 프랑스 국왕의 칙령에, 또 영국의 국왕이나 대법관

의 소송개혁에, 또 교회의 규문절차에 인정된다). 그러나 상술한 권력들은 이러한

합리적인 경향을 다음의 경우에만 명백한 태도로 취하였다. 즉 그것은 권력 자체

의 합리적 행정에 대한 관심이 권력에게 이러한 길을 지시한 경우(교황의 교회통치

처럼)이거나 또는 권력이 유력한 법적 관계인의 단체와 동맹한 경우이다. 또 이 유

력한 법적 관계인의 단체는 로마, 중세 말기 또는 근세에서의 시민계급과 같이 법

과 소송의 합리적인 성격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동맹이 결여된 곳

에서는 법의 세속화와 엄격하고 형식적인 법적 사고의 분화와는 시원적 단계에 남

아 있거나 또는 방해되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교황이나 가산적 군주의

「합리주의」가 실질적 성격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교황이나 가산적 군주의 합리주의

에서는 형식적·법률적으로 가장 정확한 기회의 계산이나 법과 소송의 합리적인 체

계에 가장 적합한 특색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자의 실용적·공리적이며 윤리적인 요

구에 내용적으로 가장 적응한 특색이 추구된다. 「도덕」과 「법」의 분리는 이미 보았

듯이, 전자의 자족적 전문적으로 「법률적인」법의 취급에 대하여 전혀 연고 없이 대

립하는 후자의 법형성의 요소들의 목적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특히 보통 도덕적 요구와 법률적 규정을 결합한 신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법형성에

관해서 타당하다. 물론 한편으로는 증대하는 법적 사고의 합리화에 의하여,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관계의 형식들에 의하여 사찰자의 영향력에 의하여 지지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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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의 비법률적 요소로부터 다양한 결과가 생겨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의 하

나는 신성한 명령이 「신법」(fas)으로서 제정법, 즉 사람들의 종교에 무관심한 이해

의 분쟁의 조정을 위한 제정법인 「인법」(jus)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때에 후자, 즉

인법에는 보다 논리적인가 보다 경험적인가에 따라서 합리적 또는 형식적으로 형

성된 법에의 자율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것은 중세에서와 같이, 로마에서

도 볼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제약된 법과 자유로이 제정된 법의 관계가 그때에 어

떠한 방법으로 규제되는가 하는 것은 뒤에 논술할 것이다. 그리고 뒤에 논하듯이,

종교적 법은 증대한 사상의 세속화와 함께 철학적으로 기초지워진 「자연법」에 그

경쟁자 또는 대용자를 유지했던 것이다. 자연법은 실정법과 함께 혹은 이념적 요

청으로서 혹은 다른 강력한 법적 실무에 영향을 미치는 교의로서 존재하였다. 또

하나의 결과는 신성한 명령의 세속적 법으로부터의 분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종교

적이고 의례적인 요구와 법적 요구와의 특수한 신정적 혼합이 존속했다는 경우이

다. 그 경우에는 도덕적 의무와 법적 의무, 도덕적 명령과 법적 명령의 애매한 교착

이 형식적으로는 예리한 대립 없이 성립하였으며, 따라서 특수한 비형식적 법이 성

립하였다. 이러한 두 결과 중 어떤 것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일부는 이미 상론하

였듯이, 당해 종교의 내부적 특색과 그것의 법과 국가에 대한 원칙적 관계에, 일부

는 - 후술하는 바와 같이 - 정치적 권력에의 관계에서의 사찰자 계층의 권력지위

또는 정치적 권력의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동양의 법영역에서 후자의

상태가 나타나서 존속했다는 것은 후술하게 될 지배구조의 조건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법의 논리적 구조에서의 일정한 공통된 특징도 서로 아주 다양한 지배

형식의 성과일 수도 있다. 비형식적 법은 특히 한편으로는 경건에 근거하는 권위

적 권력에 의해서, 즉 신정과 가산적 군주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

나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정치의 일정한 형태들도 역시 아주 유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점에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그 권력의 담당자 -

그것은 교황·전제군주(「계몽적」전제군주도 포함한다)·민중선동가이다 - 가 그들

에 의해서 분명히 종교적으로 신성한, 따라서 절대적으로 구속인 것으로 보지 않

으면 안 될 이러한 규범 이외에는 어떠한 종류의 형식적 제한에도 그들 자신에 의

해서 제정된 규칙에도 구속되지 않는 권력들이 존재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권

력의 담당자는 전부가 법논리의 추상적 형식주의와 법에 의한 실질적 요청의 이행

에의 요구와의 불가피한 충돌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특수한 법형식

주의는 법적 기구를 마치 기술적·합리적 기[152]계와 같이 기능시키면서 개개의 당

사자에게 활동의 자유, 특히 그 목적적 행위의 법적 효과와 기회의 합리적 계산을

위한 활동의 여지에 관하여 상대적인 규준을 주기 때문이다. 법형식주의는 일정한

침범하기 어려운 「경기규칙」에 결부된 평화적 이해투쟁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소송

을 다루었다. 재판집회민의 재판처럼 씨족간의 원시적인 속죄절차는 엄격하게 형

식적으로 구속된 증거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러한 증거법의 기

원은 주술적 관념에 제약되었으며, 즉 증거신문은 정당한 방법과 정당한 당사자에

의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합리적 수단에 의해서 「사실」을 현대의 소

송이라는 의미에서 「확정할 수」 있다는 것, 특히 현대의 가장 중요한 「증인」의 심문

이라는 수단으로 또는 「간접증거」에 의해서 확정할 수 있다는 사상은 재판에는 오

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소송의 「선서보조자」는 「사실」이 진실인 것을 서약

한 것은 아니며, 신적 저주에 대해서 그의 인격을 투입함으로써 당사자의 「정당성」

을 보증했던 것이다. 실무 그 자체는 여하튼 적어도 현대와 같이 실제적이다. 현

대의 소송에서도 전제 증인의 다수는 그들의 역할을 누가 「정당」한가를 서언한다

는 것 이외에는 거의 이해하고 있지 않다. 고대법은 따라서 「증거」를 「의무」로서 파

악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권리로서 파악한 것이며, 고대법은 이러한 권리를 당사

자에게 적어도 아주 광범위하게 걸쳐서 지정하였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러한 규칙

과 전통적인 증거방법에 엄격하게 구속되었다. 현대의 「일반적」 소송의 「거증책임」

의 이론은 그것이 증거를 「의무」로서 파악한다는 것에 의해서 고대의 소송으로부

터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그의 이론은 당사자가 제출한 증거신고와 증거

방법에 재판관을 구속하였다. 그러한 것이 소송추행의 취급 전체에도 들어맞는다.

재판관은 「심리원칙」에 의해서 당사자의 제소를 기다렸다. 당사자가 제소하거나 보

증하거나 하지 않는 사실은 재판관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합리적이건 비합

리적이건 일반적으로 질서된 증거방법에 의하여 확증되지 아니한 사실도 마찬가지

로 존재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따라서 당사자의 소송행위에 의해서 주어진 한계의

범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상대적 진실성만을 추구하였다. 이것에 유사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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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0 32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법학의 비법률적 요소로부터 다양한 결과가 생겨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의 하

나는 신성한 명령이 「신법」(fas)으로서 제정법, 즉 사람들의 종교에 무관심한 이해

의 분쟁의 조정을 위한 제정법인 「인법」(jus)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때에 후자, 즉

인법에는 보다 논리적인가 보다 경험적인가에 따라서 합리적 또는 형식적으로 형

성된 법에의 자율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며, 그것은 중세에서와 같이, 로마에서

도 볼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제약된 법과 자유로이 제정된 법의 관계가 그때에 어

떠한 방법으로 규제되는가 하는 것은 뒤에 논술할 것이다. 그리고 뒤에 논하듯이,

종교적 법은 증대한 사상의 세속화와 함께 철학적으로 기초지워진 「자연법」에 그

경쟁자 또는 대용자를 유지했던 것이다. 자연법은 실정법과 함께 혹은 이념적 요

청으로서 혹은 다른 강력한 법적 실무에 영향을 미치는 교의로서 존재하였다. 또

하나의 결과는 신성한 명령의 세속적 법으로부터의 분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종교

적이고 의례적인 요구와 법적 요구와의 특수한 신정적 혼합이 존속했다는 경우이

다. 그 경우에는 도덕적 의무와 법적 의무, 도덕적 명령과 법적 명령의 애매한 교착

이 형식적으로는 예리한 대립 없이 성립하였으며, 따라서 특수한 비형식적 법이 성

립하였다. 이러한 두 결과 중 어떤 것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일부는 이미 상론하

였듯이, 당해 종교의 내부적 특색과 그것의 법과 국가에 대한 원칙적 관계에, 일부

는 - 후술하는 바와 같이 - 정치적 권력에의 관계에서의 사찰자 계층의 권력지위

또는 정치적 권력의 구조에 의존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동양의 법영역에서 후자의

상태가 나타나서 존속했다는 것은 후술하게 될 지배구조의 조건들의 결과이다.

그러나 법의 논리적 구조에서의 일정한 공통된 특징도 서로 아주 다양한 지배

형식의 성과일 수도 있다. 비형식적 법은 특히 한편으로는 경건에 근거하는 권위

적 권력에 의해서, 즉 신정과 가산적 군주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

나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정치의 일정한 형태들도 역시 아주 유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점에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그 권력의 담당자 -

그것은 교황·전제군주(「계몽적」전제군주도 포함한다)·민중선동가이다 - 가 그들

에 의해서 분명히 종교적으로 신성한, 따라서 절대적으로 구속인 것으로 보지 않

으면 안 될 이러한 규범 이외에는 어떠한 종류의 형식적 제한에도 그들 자신에 의

해서 제정된 규칙에도 구속되지 않는 권력들이 존재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권

력의 담당자는 전부가 법논리의 추상적 형식주의와 법에 의한 실질적 요청의 이행

에의 요구와의 불가피한 충돌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특수한 법형식

주의는 법적 기구를 마치 기술적·합리적 기[152]계와 같이 기능시키면서 개개의 당

사자에게 활동의 자유, 특히 그 목적적 행위의 법적 효과와 기회의 합리적 계산을

위한 활동의 여지에 관하여 상대적인 규준을 주기 때문이다. 법형식주의는 일정한

침범하기 어려운 「경기규칙」에 결부된 평화적 이해투쟁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소송

을 다루었다. 재판집회민의 재판처럼 씨족간의 원시적인 속죄절차는 엄격하게 형

식적으로 구속된 증거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러한 증거법의 기

원은 주술적 관념에 제약되었으며, 즉 증거신문은 정당한 방법과 정당한 당사자에

의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합리적 수단에 의해서 「사실」을 현대의 소

송이라는 의미에서 「확정할 수」 있다는 것, 특히 현대의 가장 중요한 「증인」의 심문

이라는 수단으로 또는 「간접증거」에 의해서 확정할 수 있다는 사상은 재판에는 오

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소송의 「선서보조자」는 「사실」이 진실인 것을 서약

한 것은 아니며, 신적 저주에 대해서 그의 인격을 투입함으로써 당사자의 「정당성」

을 보증했던 것이다. 실무 그 자체는 여하튼 적어도 현대와 같이 실제적이다. 현

대의 소송에서도 전제 증인의 다수는 그들의 역할을 누가 「정당」한가를 서언한다

는 것 이외에는 거의 이해하고 있지 않다. 고대법은 따라서 「증거」를 「의무」로서 파

악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권리로서 파악한 것이며, 고대법은 이러한 권리를 당사

자에게 적어도 아주 광범위하게 걸쳐서 지정하였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러한 규칙

과 전통적인 증거방법에 엄격하게 구속되었다. 현대의 「일반적」 소송의 「거증책임」

의 이론은 그것이 증거를 「의무」로서 파악한다는 것에 의해서 고대의 소송으로부

터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그의 이론은 당사자가 제출한 증거신고와 증거

방법에 재판관을 구속하였다. 그러한 것이 소송추행의 취급 전체에도 들어맞는다.

재판관은 「심리원칙」에 의해서 당사자의 제소를 기다렸다. 당사자가 제소하거나 보

증하거나 하지 않는 사실은 재판관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합리적이건 비합

리적이건 일반적으로 질서된 증거방법에 의하여 확증되지 아니한 사실도 마찬가지

로 존재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따라서 당사자의 소송행위에 의해서 주어진 한계의

범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상대적 진실성만을 추구하였다. 이것에 유사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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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2 32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가장 오래고 예리하게 각인된 전근하기 쉬운 형식에서의, 즉 분쟁하는 씨족간의

속죄절차나 중재절차에서의 소송수단으로서의 신탁이나 신판(神判)을 가지고 하

는 법발견의 성격이었다. 이러한 소송절차는 주술적인 또는 신적인 힘들의 호출에

근거하여 행해지는 전체 행위처럼 엄격하게 형식적이며 그것은 결정적인 소송수단

의 비합리적 초자연성격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정당한」판결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

러나 권위와 비합리적인 에의 신앙이 소멸하고 합리적인 증거방법이나 논리적 판결

이유가 그것에 가름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면 형식적 재판에는 단지 적어

도 상대적으로 최량의 진실발견의 기회라는 방향에서 규제된 당사자의 이익투쟁이

라는 성격만이 남게 된 것이다. 소송추행은 당사자의 사무이고 공적 권력의 사무

는 아니다. 재판관은 당사자에게 당사자 자신이 요구하지 않은 것을 하도록 강제하

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재판관이 재판, 즉 개개의 사건에 관하여

구체적인 합목적성이나 형평감정에 만족을 주는 재판을 하는 것에 대한 실질적 요

청을 최선으로 이행하라는 요구 - 그것은 재판에서 실질적 요구 아래 정치적 합

목적적으로 동기지어진 기대나 또는 도덕적·감정적으로 동기지어진 기대가 취급된

다 하더라도 - 에 당연한 것이지만 결코 적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의

형식적·법적 이익을 대표할 때의 저 형식적 재판에 의해서 인정한 당사자의 최대

의 자유는 형식적 재판에 의하여 합법화된 경제력의 배분의 불평등의 결과로서 종

교적인 윤리나 정치적인 이유의 실질적 요청이 침해당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결과

를 부단히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적 재판은 권위의 자유스러운 은총

과 권력에의 개인의 예속을 해방하니까 전체 권위주의적 권력, 즉 신정이나 가장제

에 충격을 주며, 또한 단체의 결의에의 법적 실무의 의존 따라서 개인의 의존을 감

소하기 때문에 데모크라시에도 충격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경제적 또는 사회

적 권력관계의 증대하는 집중화의 기회는 소송의 평화적 이익투쟁에의 형성에 의

해서 다시 높여질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형식적 재판은 그 불가피한

추상적 성격에 의해서 실질적인 정의관념을 침해한다. 다른 한 편 경제적으로 유력

한 자, 따라서 그들의 자유로운 수익에 관여하는 자뿐만 아니라 또한 바로 개인의

기회와 능력의 전개를 위해서 권위적 구속의 파괴와 비합리적 대중 본능의 파괴를

유치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담당자도 역시 이러한 추상적 성격 안에

형식적 재판의 결정적인 특징을 보고, 이에 반하여 비형식적 재판에서는 절대적

자의와 실체적 불안정의 기회만을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에게 소송의 항수성과

계산성이 중요성을 가지는 정치적·경제적인 관계인들, 따라서 특히 합리적인 경제

와 정치의 지속적 운영의 담당자들도 그들 안에 귀속시켜졌다. 특히 경제적으로 유

력한 자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합리적인 재판은 「자유」의 보증으로 생각되며, 그

리고 또 그것은 신정적인 또는 가장적인, 또 사정에 따라서는 [154] 민주적인 권력

들 그리고 또한 전체 경우에 실질적 정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관계하는 권력들을

배척하는데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들에는 형식적 재판이 아닌 「카디 재판」

(Kadijustiz)이 봉사하였다. 예컨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제에서의 인민재판은 고도

로 이러한 재판이었다. 근대의 배심재판은 형식적인 법에서는 그렇지는 않으나 그

작용에서는 종종 카디 재판이다. 왜냐하면 이 부단히 강도로 정식화된 인민재판

의 한정된 협력의 형태에서도 소송이 직접 기술적으로 강요하는 범위 안에서만 형

식적 법의 규칙에 구속된다는 경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또 그 밖의 점에서는 이

인민재판은 그 정도가 높아지면 질수록 구체적인 도덕적 또는 정치적으로 - 특히

아테네에서 볼 수 있으나 오늘날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 혹은 사회정책적으로 제

약된 「감정」에 의해서 판결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의 경향들은 신

정 가장적인 제후의 권위적 권력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랑스의 배심원이

형식적 법에 반하여 체포된 간부(姦夫)를 살해한 부를 원칙적으로 방면했다는 사

례, 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칙재재판소」를 제분업자인 아놀드를 위하여 행사했다

는 사례와 같은 까닭이다. 신정적 재판의 결정적인 본질은 전적으로 구체적이며 도

덕적인 형평의 관점의 지배라는 점에 있다. 형평의 관점의 비형식적이고 반형식적

인 경향은 명확히 고정된 신법에 의해서만 제약되었다. 신법이 관여하는 경우에는

신정적 재판은 반대로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서 비상적인 형식주의적인

카주이스틱을 산출하였다. 세속적인 가산적·권위적 재판은 그것이 전통에 구속되

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도 - 그 경우에라도 그것의 재판의 보다 커다란 탄력성에

의해서 - 본질적으로는 신정적 재판보다도 일층 자유로운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

로 전형적인 명망가재판은 명망가층의 전형적인 법관계인이 문제가 되는가 또는

명망가에 의하여 지배된 계층의 법관계인이 문제가 되는가에 따라서 종종 이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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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고 예리하게 각인된 전근하기 쉬운 형식에서의, 즉 분쟁하는 씨족간의

속죄절차나 중재절차에서의 소송수단으로서의 신탁이나 신판(神判)을 가지고 하

는 법발견의 성격이었다. 이러한 소송절차는 주술적인 또는 신적인 힘들의 호출에

근거하여 행해지는 전체 행위처럼 엄격하게 형식적이며 그것은 결정적인 소송수단

의 비합리적 초자연성격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정당한」판결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

러나 권위와 비합리적인 에의 신앙이 소멸하고 합리적인 증거방법이나 논리적 판결

이유가 그것에 가름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면 형식적 재판에는 단지 적어

도 상대적으로 최량의 진실발견의 기회라는 방향에서 규제된 당사자의 이익투쟁이

라는 성격만이 남게 된 것이다. 소송추행은 당사자의 사무이고 공적 권력의 사무

는 아니다. 재판관은 당사자에게 당사자 자신이 요구하지 않은 것을 하도록 강제하

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재판관이 재판, 즉 개개의 사건에 관하여

구체적인 합목적성이나 형평감정에 만족을 주는 재판을 하는 것에 대한 실질적 요

청을 최선으로 이행하라는 요구 - 그것은 재판에서 실질적 요구 아래 정치적 합

목적적으로 동기지어진 기대나 또는 도덕적·감정적으로 동기지어진 기대가 취급된

다 하더라도 - 에 당연한 것이지만 결코 적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의

형식적·법적 이익을 대표할 때의 저 형식적 재판에 의해서 인정한 당사자의 최대

의 자유는 형식적 재판에 의하여 합법화된 경제력의 배분의 불평등의 결과로서 종

교적인 윤리나 정치적인 이유의 실질적 요청이 침해당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결과

를 부단히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적 재판은 권위의 자유스러운 은총

과 권력에의 개인의 예속을 해방하니까 전체 권위주의적 권력, 즉 신정이나 가장제

에 충격을 주며, 또한 단체의 결의에의 법적 실무의 의존 따라서 개인의 의존을 감

소하기 때문에 데모크라시에도 충격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경제적 또는 사회

적 권력관계의 증대하는 집중화의 기회는 소송의 평화적 이익투쟁에의 형성에 의

해서 다시 높여질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형식적 재판은 그 불가피한

추상적 성격에 의해서 실질적인 정의관념을 침해한다. 다른 한 편 경제적으로 유력

한 자, 따라서 그들의 자유로운 수익에 관여하는 자뿐만 아니라 또한 바로 개인의

기회와 능력의 전개를 위해서 권위적 구속의 파괴와 비합리적 대중 본능의 파괴를

유치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담당자도 역시 이러한 추상적 성격 안에

형식적 재판의 결정적인 특징을 보고, 이에 반하여 비형식적 재판에서는 절대적

자의와 실체적 불안정의 기회만을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들에게 소송의 항수성과

계산성이 중요성을 가지는 정치적·경제적인 관계인들, 따라서 특히 합리적인 경제

와 정치의 지속적 운영의 담당자들도 그들 안에 귀속시켜졌다. 특히 경제적으로 유

력한 자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합리적인 재판은 「자유」의 보증으로 생각되며, 그

리고 또 그것은 신정적인 또는 가장적인, 또 사정에 따라서는 [154] 민주적인 권력

들 그리고 또한 전체 경우에 실질적 정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관계하는 권력들을

배척하는데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들에는 형식적 재판이 아닌 「카디 재판」

(Kadijustiz)이 봉사하였다. 예컨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제에서의 인민재판은 고도

로 이러한 재판이었다. 근대의 배심재판은 형식적인 법에서는 그렇지는 않으나 그

작용에서는 종종 카디 재판이다. 왜냐하면 이 부단히 강도로 정식화된 인민재판

의 한정된 협력의 형태에서도 소송이 직접 기술적으로 강요하는 범위 안에서만 형

식적 법의 규칙에 구속된다는 경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또 그 밖의 점에서는 이

인민재판은 그 정도가 높아지면 질수록 구체적인 도덕적 또는 정치적으로 - 특히

아테네에서 볼 수 있으나 오늘날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 혹은 사회정책적으로 제

약된 「감정」에 의해서 판결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의 경향들은 신

정 가장적인 제후의 권위적 권력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랑스의 배심원이

형식적 법에 반하여 체포된 간부(姦夫)를 살해한 부를 원칙적으로 방면했다는 사

례, 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칙재재판소」를 제분업자인 아놀드를 위하여 행사했다

는 사례와 같은 까닭이다. 신정적 재판의 결정적인 본질은 전적으로 구체적이며 도

덕적인 형평의 관점의 지배라는 점에 있다. 형평의 관점의 비형식적이고 반형식적

인 경향은 명확히 고정된 신법에 의해서만 제약되었다. 신법이 관여하는 경우에는

신정적 재판은 반대로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서 비상적인 형식주의적인

카주이스틱을 산출하였다. 세속적인 가산적·권위적 재판은 그것이 전통에 구속되

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도 - 그 경우에라도 그것의 재판의 보다 커다란 탄력성에

의해서 - 본질적으로는 신정적 재판보다도 일층 자유로운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

로 전형적인 명망가재판은 명망가층의 전형적인 법관계인이 문제가 되는가 또는

명망가에 의하여 지배된 계층의 법관계인이 문제가 되는가에 따라서 종종 이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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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4 32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인 모습을 나타낸다. 예컨대 영국의 재판소는 중앙재판소에 가져오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엄격하게 형식적인 재판을 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계쟁과 집단의 비행에 대

한 치안판사의 재판은 어느 정도에서 비형식적·직접적인 유럽 대륙에서는 전혀 알

지 못했던 「카디 재판」이었다. 그리고 변호사의 재판의 고가성은 다른 한 편 다른

이유에서 생긴 공화정 시대 로마의 재판처럼 결과적으로는 무자력자에 대한 사실

상의 재판거부를 의미하였으며 그것은 오히려 소유자계층이나 자본가계층의 이해

에 널리 적응하였다. 이러한 법적 실무의 이원론, 즉 자기의 계층내의 계쟁에 대한

형식적 재판과 경제적 무자력자에 대한 자의 또는 사실상의 재판거부가 달성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본주의적 이해는 당연히 엄격하게 형식적이며 변론주의에 근거하

는 재판의 보편적 실시에서 가장 잘 진전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명망가 재판

은 그 불가피하게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법적 실무 그 복잡한 소송수단 체계 또한

그 고가성에 의해서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었을 경우에는 - 즉

영국에서는 그 법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법의 구조에 저항해

서까지도 자본주의상의 우위를 얻었다 - 부르주아 계층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법실무에의, 따라서 체계적인 명확한 목적합리적으로 창조된 형식적 법에의 가장

강력한 관계인인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합리적 법실무와 형식적 법에 의해서 전

통의 구속과 자의는 모두 배제되고 권리는 객관적 규범으로부터만 나오게 하였다.

영국의 청교도는 로마의 평민이나 15세기 독일의 부르주아처럼 이러한 체계적으로

편찬된 법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체계적인 법전편찬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긴

과정이 있었다.

신정적 재판에서 뿐만 아니라 세속적 명망가의 재판에서도 또는 사적이나 공적

으로 승인된 자문법학자에 의해서 지도된 재판에서도 소송을 지도하는 정무관,

제후, 관료의 임페리움이나 벌령권에 근거하는 법과 소송의 발전에서도 관념은 먼

저 첫째로 다음의의 것을 고집하였다. 즉 법은 근본적으로 고래로부터 동일하게

타당한 것이며, 또 개개의 사건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적용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다. 여하튼 우리가 관찰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는 거의 미분화의 상태에서라

도 주술적인 정체화의 힘이 파괴되어 있는 범위에서만 합리적으로 통합된 규범의

전진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능하다. 혁신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비합리적

인 계시수단(Offenbarungsmittel)의 존재는 언제나 사실적으로는 규범들의 광범

위의 가능성을 의미하였으며, 그 개시수단의 폐지는 종종 고도의 정체화를 의미하

였다. - 왜냐하면 신정한 전통의 힘이 「신성한 것」으로서만 의도되고 또 사제에 의

해서 신법의 한 체계에로 순화되었기 때문이다.

제2절 법의 실질적 합리화, 신법

신법과 신성한 법창조의 지배는 매우 다양한 정도로 개개의 지리적이며 사실적

인 법영역에 침투하고 다시 거기서부터 밀려나왔다. 우리는 여기서는 전체 형벌문

제, 속죄문제에 대한 본래 순수하게 주술적 규범에 의해서 기초지어진 신법의 특

수한 관여, 그리고 신법의 다른 것과의 관련에서 논술해야 할 정치적 법에 대한 관

여 그리고 끝으로[156] 소송의 신법적으로 허용된 때와 장소 그리고 증거방법에 관

한 본래의 주술적으로 제약된 규범을 전혀 다루지 않고, 주로 보통의 의미에서의

「사법」(私法)의 영역만을 관찰하려고 한다. 혼인체결의 승인과 결과에 관한 원칙이

나 가족법 및 가족법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상속법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그리고

로마의 신법이나 이슬람교법(Schariah) 중세의 교회법에서 신법의 주요 영역이었

다. 고대의 주술적인 근친상간의 금지는 혼인의 종교적 통제의 선구였다. 이에 더하

여 유효한 조선공의(祖先供儀)와 가족의 다른 신성사와의 중요성이 나타나서 신법

의 가족법과 상속법에의 간섭을 결정하였다 상술한 관여가 부분적으로 소멸한 기

독교의 영역에서는 교회의 유언의 효력에의 재정적 관여는 상속법통제의 유지라는

방향에서 작용하였다. 종교적 목적에서 전심한 또는 다른 이유에서 신성한 또는

반대로 주술적으로 금제된 대상과 장소에 대한 종교적 규범들은 우선 첫째로 세속

적 거래법과 충돌하였다. 종교적 의무형식, 예컨대 선서가 선택되었을 경우에는 -

그것은 비상적으로 종종 행해졌으며 또 처음에는 오히려 규칙적으로 행해졌을 것

이다 - 신법은 형식적 이유에 근거하여 계약법의 영역에 관계하였다. 종교적 윤리

의 강제적 규범, 예컨대 고리금지가 문제가 된 경우에는 신법은 실질적 이유에 근

거하여 관여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점에 관해서는 종교윤리의 경제적 의의에 관

한 논의를 하는 데에서 논술하여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의 논의에 근거하여 신법

으로부터 인법에로의 관계는 종교윤리의 원칙적 성격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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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4 32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인 모습을 나타낸다. 예컨대 영국의 재판소는 중앙재판소에 가져오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엄격하게 형식적인 재판을 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계쟁과 집단의 비행에 대

한 치안판사의 재판은 어느 정도에서 비형식적·직접적인 유럽 대륙에서는 전혀 알

지 못했던 「카디 재판」이었다. 그리고 변호사의 재판의 고가성은 다른 한 편 다른

이유에서 생긴 공화정 시대 로마의 재판처럼 결과적으로는 무자력자에 대한 사실

상의 재판거부를 의미하였으며 그것은 오히려 소유자계층이나 자본가계층의 이해

에 널리 적응하였다. 이러한 법적 실무의 이원론, 즉 자기의 계층내의 계쟁에 대한

형식적 재판과 경제적 무자력자에 대한 자의 또는 사실상의 재판거부가 달성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본주의적 이해는 당연히 엄격하게 형식적이며 변론주의에 근거하

는 재판의 보편적 실시에서 가장 잘 진전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명망가 재판

은 그 불가피하게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법적 실무 그 복잡한 소송수단 체계 또한

그 고가성에 의해서 부르주아 계층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었을 경우에는 - 즉

영국에서는 그 법의 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법의 구조에 저항해

서까지도 자본주의상의 우위를 얻었다 - 부르주아 계층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법실무에의, 따라서 체계적인 명확한 목적합리적으로 창조된 형식적 법에의 가장

강력한 관계인인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합리적 법실무와 형식적 법에 의해서 전

통의 구속과 자의는 모두 배제되고 권리는 객관적 규범으로부터만 나오게 하였다.

영국의 청교도는 로마의 평민이나 15세기 독일의 부르주아처럼 이러한 체계적으로

편찬된 법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체계적인 법전편찬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긴

과정이 있었다.

신정적 재판에서 뿐만 아니라 세속적 명망가의 재판에서도 또는 사적이나 공적

으로 승인된 자문법학자에 의해서 지도된 재판에서도 소송을 지도하는 정무관,

제후, 관료의 임페리움이나 벌령권에 근거하는 법과 소송의 발전에서도 관념은 먼

저 첫째로 다음의의 것을 고집하였다. 즉 법은 근본적으로 고래로부터 동일하게

타당한 것이며, 또 개개의 사건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적용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

이다. 여하튼 우리가 관찰한 바와 같이, 경제적으로는 거의 미분화의 상태에서라

도 주술적인 정체화의 힘이 파괴되어 있는 범위에서만 합리적으로 통합된 규범의

전진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능하다. 혁신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비합리적

인 계시수단(Offenbarungsmittel)의 존재는 언제나 사실적으로는 규범들의 광범

위의 가능성을 의미하였으며, 그 개시수단의 폐지는 종종 고도의 정체화를 의미하

였다. - 왜냐하면 신정한 전통의 힘이 「신성한 것」으로서만 의도되고 또 사제에 의

해서 신법의 한 체계에로 순화되었기 때문이다.

제2절 법의 실질적 합리화, 신법

신법과 신성한 법창조의 지배는 매우 다양한 정도로 개개의 지리적이며 사실적

인 법영역에 침투하고 다시 거기서부터 밀려나왔다. 우리는 여기서는 전체 형벌문

제, 속죄문제에 대한 본래 순수하게 주술적 규범에 의해서 기초지어진 신법의 특

수한 관여, 그리고 신법의 다른 것과의 관련에서 논술해야 할 정치적 법에 대한 관

여 그리고 끝으로[156] 소송의 신법적으로 허용된 때와 장소 그리고 증거방법에 관

한 본래의 주술적으로 제약된 규범을 전혀 다루지 않고, 주로 보통의 의미에서의

「사법」(私法)의 영역만을 관찰하려고 한다. 혼인체결의 승인과 결과에 관한 원칙이

나 가족법 및 가족법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상속법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그리고

로마의 신법이나 이슬람교법(Schariah) 중세의 교회법에서 신법의 주요 영역이었

다. 고대의 주술적인 근친상간의 금지는 혼인의 종교적 통제의 선구였다. 이에 더하

여 유효한 조선공의(祖先供儀)와 가족의 다른 신성사와의 중요성이 나타나서 신법

의 가족법과 상속법에의 간섭을 결정하였다 상술한 관여가 부분적으로 소멸한 기

독교의 영역에서는 교회의 유언의 효력에의 재정적 관여는 상속법통제의 유지라는

방향에서 작용하였다. 종교적 목적에서 전심한 또는 다른 이유에서 신성한 또는

반대로 주술적으로 금제된 대상과 장소에 대한 종교적 규범들은 우선 첫째로 세속

적 거래법과 충돌하였다. 종교적 의무형식, 예컨대 선서가 선택되었을 경우에는 -

그것은 비상적으로 종종 행해졌으며 또 처음에는 오히려 규칙적으로 행해졌을 것

이다 - 신법은 형식적 이유에 근거하여 계약법의 영역에 관계하였다. 종교적 윤리

의 강제적 규범, 예컨대 고리금지가 문제가 된 경우에는 신법은 실질적 이유에 근

거하여 관여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점에 관해서는 종교윤리의 경제적 의의에 관

한 논의를 하는 데에서 논술하여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의 논의에 근거하여 신법

으로부터 인법에로의 관계는 종교윤리의 원칙적 성격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최고도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55: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26 32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로 다양하게 형성된다는 것이 추정된다. 이러한 종교윤리가 주술적이며 의례적인

형식주의의 단계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사정에 따라서는 그 자체의

방법의 도움을 얻어서 주술적 카주이스틱의 세련된 합리화를 통하여 끝으로 완전

한 기능상실에로 마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로마의 신법은 공화정 시대의 과정에

서 전적으로 이러한 운명에 빠져버렸다.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적당한 신성한 기술

적 수단이나 회피형식이 발견되지 않는 신성한 규범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

결의에 대한 새점(鳥占) 치는 자 동료들의 종교적인 판결파기권력은 - 왜냐하면 종

교적 형식흠결과 흉조(凶兆)에 인하는 항의도 거기에 돌아가기 때문에 - 로마에서

는 형식적으로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의 아레오파고스의 동일하게

종교적으로 제약된 판결파기권력은 에필랄테스(Ephilaltes)와 페리클레스에 의하

여 폐지되었다. 그러나 판결파기권력은 사제자 계층에 대한 세속적인 관료귀족의

절대적 지배 아래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목적에만 봉사하였으며 그 카주이스틱은

실질적인 신법의 카주이스틱과 같이 이러한 기능에서도 역시 신성한 기술적 수단

에 의해서 전혀 무해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후기의 그리스법과 같이, 완전히 세속

화된 「인법」은 로마의 생활에 있어서 의례적 의무에의 고려가 취득하고 있던 광대

한 장소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으로부터의 침해에서 충분히 보증되어 있었다. 고대

의 폴리스 땅에서의 사제자 권력의 세속적 권력에의 복종은, 기술한 바와 같은 로

마 신들의 세계와 이들 세계를 다루는 특색 다음에 이러한 발전을 결정하였다.

제3절 인도법

지배적인 사제자 계층이 전체 생활을 의례적으로 규제할 수 있으며, 또 그의 통

제 아래 전체 법을 포괄적으로 보유한 곳에서는, 즉 인도에서는 사정은 전혀 다르

다. 인도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법은 달마스트라에 포함된다. 따라서 순전히

세속적인 법형성은 개개의 직업적 신분, 즉 상인, 수공업자 등등을 위한 특별법의

발전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직업단체나 카스트 법은 그들 자신의 법으로서 정립

되었다는 것, 따라서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격언에 관해서는 누구나 의심

하는 자가 없었으며, 또 거의 전부의 실제로 유효한 세속적 법은 이러한 원천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 대개의 세속적인 생활관계에 대해서만 고려된 이

러한 법도 사제자적 교설이나 철학적 교육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이

리하여 일반적으로 결코 직업적으로 관리되는 대상으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

적 법은 어떠한 합리화도 결여했으며, 또 이론적으로는 절대적인 강제규범인 신법

에 대해서 실제상은 아주 무관심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법으로부터 일탈한 경

우에는 안정된 효력의 보증을 결여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법발견은 한편으로는 종

교의 성격, 다른 한 편으로는 신정적·가장적 생활 규제에 따르는 주술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의 고유한 혼합을 나타낸다. 소송의 형식주의는 전체로서 근소하다.

재판소는 재판집회민의 성격을 가지지 아니한다. 국왕을 수석재판관의 판결에 구

속하도, 속인배심원 (보다 이전의 법원[法源]에서는 상인과 서기, 뒤의 법원에서는

조합에 속하는 주인직공과 서기)의 초빙을 지령하는 것은 합리적인 질서에서 유래

하였다. 사적 중재재판소의 중요한 의의가 단체의 자치적인 법정립과 부합한다. 그

러나 다른 한 편 단체의 조직적인 재판소로부터 공적 재판소에의 상소는 일반적으

로 허가된다. 증거방법은 오늘날에는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다. 즉 문서 또는 증인이

다. 신판은 합리적 증거의 명백성이 결여된 경우를 위하여 유보되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신판은 그의 파괴되지 않는 주술적 의의의[158]를 보유하였으며, 특히

선서(자기저주에 대한 감시 기간)에서 그렇다.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강제집행 수단

(채무자 집 앞에서 채권자가 굶어죽는 것)이 직업적인 강제집행이나 합법적인 자력

구제와 함께 성립하였다. 신법과 인법의 상당히 완전한 평행이 형사절차에서 존재

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융합에의 경향은 발전적인 것으로서 인정되며 전체로서 신

법과 인법은 실제로 불가분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일은 고대의

아리안 민족의 법의 잔존을 불분명하게 하는 것이며, 또 단체의 자율적 재판이나

가장 효과적인 전체 강제수단, 즉 카스트로부터의 추방을 지령하는 카스트 재판

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불교가 국교로서 인정되는 범위에서는(실론, 인도차이

나, 캄보디아, 미얀마) 불교 윤리가 입법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남녀의

동등한 지위(여계 친상속법, 재산의 공유) 피안의 양친의 운명이라는 관심에서의

양친에의 경건(따라서 유산상속인의 채무책임) 법의 심정윤리적 순화, 노예의 보

호, 형법의 온화성(그것과 대조적인 최고도로 잔인한 정치적 형법이라는 예외를 제

외하고) 품행방정의 보증은 어느 것이나 불교윤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 밖의 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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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6 32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로 다양하게 형성된다는 것이 추정된다. 이러한 종교윤리가 주술적이며 의례적인

형식주의의 단계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사정에 따라서는 그 자체의

방법의 도움을 얻어서 주술적 카주이스틱의 세련된 합리화를 통하여 끝으로 완전

한 기능상실에로 마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로마의 신법은 공화정 시대의 과정에

서 전적으로 이러한 운명에 빠져버렸다.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적당한 신성한 기술

적 수단이나 회피형식이 발견되지 않는 신성한 규범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인민

결의에 대한 새점(鳥占) 치는 자 동료들의 종교적인 판결파기권력은 - 왜냐하면 종

교적 형식흠결과 흉조(凶兆)에 인하는 항의도 거기에 돌아가기 때문에 - 로마에서

는 형식적으로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아테네에서의 아레오파고스의 동일하게

종교적으로 제약된 판결파기권력은 에필랄테스(Ephilaltes)와 페리클레스에 의하

여 폐지되었다. 그러나 판결파기권력은 사제자 계층에 대한 세속적인 관료귀족의

절대적 지배 아래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목적에만 봉사하였으며 그 카주이스틱은

실질적인 신법의 카주이스틱과 같이 이러한 기능에서도 역시 신성한 기술적 수단

에 의해서 전혀 무해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후기의 그리스법과 같이, 완전히 세속

화된 「인법」은 로마의 생활에 있어서 의례적 의무에의 고려가 취득하고 있던 광대

한 장소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으로부터의 침해에서 충분히 보증되어 있었다. 고대

의 폴리스 땅에서의 사제자 권력의 세속적 권력에의 복종은, 기술한 바와 같은 로

마 신들의 세계와 이들 세계를 다루는 특색 다음에 이러한 발전을 결정하였다.

제3절 인도법

지배적인 사제자 계층이 전체 생활을 의례적으로 규제할 수 있으며, 또 그의 통

제 아래 전체 법을 포괄적으로 보유한 곳에서는, 즉 인도에서는 사정은 전혀 다르

다. 인도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법은 달마스트라에 포함된다. 따라서 순전히

세속적인 법형성은 개개의 직업적 신분, 즉 상인, 수공업자 등등을 위한 특별법의

발전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직업단체나 카스트 법은 그들 자신의 법으로서 정립

되었다는 것, 따라서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격언에 관해서는 누구나 의심

하는 자가 없었으며, 또 거의 전부의 실제로 유효한 세속적 법은 이러한 원천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 대개의 세속적인 생활관계에 대해서만 고려된 이

러한 법도 사제자적 교설이나 철학적 교육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이

리하여 일반적으로 결코 직업적으로 관리되는 대상으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

적 법은 어떠한 합리화도 결여했으며, 또 이론적으로는 절대적인 강제규범인 신법

에 대해서 실제상은 아주 무관심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법으로부터 일탈한 경

우에는 안정된 효력의 보증을 결여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법발견은 한편으로는 종

교의 성격, 다른 한 편으로는 신정적·가장적 생활 규제에 따르는 주술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의 고유한 혼합을 나타낸다. 소송의 형식주의는 전체로서 근소하다.

재판소는 재판집회민의 성격을 가지지 아니한다. 국왕을 수석재판관의 판결에 구

속하도, 속인배심원 (보다 이전의 법원[法源]에서는 상인과 서기, 뒤의 법원에서는

조합에 속하는 주인직공과 서기)의 초빙을 지령하는 것은 합리적인 질서에서 유래

하였다. 사적 중재재판소의 중요한 의의가 단체의 자치적인 법정립과 부합한다. 그

러나 다른 한 편 단체의 조직적인 재판소로부터 공적 재판소에의 상소는 일반적으

로 허가된다. 증거방법은 오늘날에는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다. 즉 문서 또는 증인이

다. 신판은 합리적 증거의 명백성이 결여된 경우를 위하여 유보되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신판은 그의 파괴되지 않는 주술적 의의의[158]를 보유하였으며, 특히

선서(자기저주에 대한 감시 기간)에서 그렇다. 마찬가지로 주술적인 강제집행 수단

(채무자 집 앞에서 채권자가 굶어죽는 것)이 직업적인 강제집행이나 합법적인 자력

구제와 함께 성립하였다. 신법과 인법의 상당히 완전한 평행이 형사절차에서 존재

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융합에의 경향은 발전적인 것으로서 인정되며 전체로서 신

법과 인법은 실제로 불가분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일은 고대의

아리안 민족의 법의 잔존을 불분명하게 하는 것이며, 또 단체의 자율적 재판이나

가장 효과적인 전체 강제수단, 즉 카스트로부터의 추방을 지령하는 카스트 재판

에 의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불교가 국교로서 인정되는 범위에서는(실론, 인도차이

나, 캄보디아, 미얀마) 불교 윤리가 입법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남녀의

동등한 지위(여계 친상속법, 재산의 공유) 피안의 양친의 운명이라는 관심에서의

양친에의 경건(따라서 유산상속인의 채무책임) 법의 심정윤리적 순화, 노예의 보

호, 형법의 온화성(그것과 대조적인 최고도로 잔인한 정치적 형법이라는 예외를 제

외하고) 품행방정의 보증은 어느 것이나 불교윤리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 밖의 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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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8 32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서는 불교의 상대화된 세계윤리는 한편으로는 심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의례적 형

식주의를 철저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의 신 「법」이 특별한 교의의 대

상으로서 이러한 기저 위에 성립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적

으로 각인된 법서의 문헌이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미얀바에서 1875년에 공적 법으

로서 「불교법」(즉 인도 전래의 법으로서 순순하게 불교적으로 수정된 법)을 공포할

수가 있었다.

제4절 중 국 법

중국에서는 반대로 독재적 관료제는 주술적이며 정령숭배적인 의무를 순수하게

의례적인 영역에 제한하였으며, 우리가 관찰해온 바와 같이, 또 관찰할 바와 같이,

독재적 관료제는 경제에 대해서 상당히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재판

의 비합리성은 가산적으로 조건지워지며 신정적으로 조건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예언자처럼 법예언자도 역사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해

답법학자의 계층도 볼 수 없으며, 특별한 법교육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형식적

법의 발전에 반항하는 정치단체의 가장적 성격에 부합한다. 「무」(巫, Wu)와 「형」(巫

見, Wei) (「도교의」 주술적 사제자)는 주술적 의례에 관한 고문이며 또 그들의 성원

으로서 시험을 통과하고 문학적 교양을 지닌 자는 가족이나 씨족이나 촌락을 위

하여 의례적이며 법적인 사무에 관한 조언자이다.

제5절 이슬람법

이슬람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법생활의 영역에서는 신성한 규범의 요구가 세속적

법발전의 길을 거의 차단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으로는 그리스법과 로마법의 계

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전체 민법은 코란의 해석이거나 또는 코란

의 관습법적 보습이거나가 요구된다. 오마이야 왕가(Omajiaden)의 전복과 앗바

스 왕조(Abbassididenherrschaft)의 성립 이후에는 차라투스트라의 사산 왕조

의 정교합일주의의 원리가 신성한 전통에의 회귀라는 슬로건 아래 이슬람에 옮겨

졌을 경우에는 이것은 특히 이루어졌다. 이슬람에서의 신법의 지위는 고유한 예언

적으로 창조된 「서적종교」에서의 신법이 작용하기 위한 적당한 모범이라는 것이다.

코란은 다수의 순수하게 실증적인 법적 규정을 포함하였다(예컨대 남자와 그의 양

녀 간의 혼인금지의 폐지이다 - 이러한 자유는 마호메트 자신에 소용되었다). 그러

나 법률적 법규정의 주요한 점은 따로 기원을 가졌다. 법률적 규정은 일반적으로

성전(聖傳, hadith)의 형상에서 나타난다.즉 예언자의 모범적 행위와 격언에서 나

타난다. 그리고 그 신빙성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 본래는 특별히 자격지어

진 마호메트의 생애의 반려에까지 구두에 의해서 소급되는 보증의 계승에 의해서

기초지워져 있다. 법률적 규정은 이러한 인적 보증 계열의 불가결한 계속성을 위하

여 구체적으로 구두에 의해서 전해져서 「마호메트 전승」(Sunnah)을 형성하는 것

이며, 또 그렇게 생각되고 있다. 마호메트 전승은 「코란의 해석」이 아니고 코란 옆

에 있는 전통이다. 마호메트 전승의 가장 오랜 요소는 그 본질적인 부분이 원(原)

이슬람 시대, 특히 메디나의 관습법에서 유래한다. 그 관습법의 마호메트 전승으

로서의 편집은 말리크 이븐 아나(Malik-ibn- Anas)에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코란도 마호메트 전승도 그 자체, 재판관이 사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법원(法源)은

아니며 오히려 이슬람법학(fiqh)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슬람법학, 즉 저자

에 의해서 질서된(musnad) 성전(聖傳)의 집성이거나 또는 대상에 따라서 체계화

된 (작품 musannaf, 그의 6으로부터 전문경전, Traditions Canon이 형성된다)

성전의 집성인 법학파의 사변적 노작의 성과이다. 이슬람법학은 도덕적이며 법적

인 명령을 포괄했으며, 법을 확정한 후에는 점점 다수가 되는 완전히 노후하게 된

성격의 부분까지도 포함하였다. 그러나 확정화는 공식적으로는 법해석의 카리스마

적, 법예언자적인 힘(idschtihad)이 성천(聖遷, Hidschrah)의 7-8세기 이래, 즉

기독 기원[160] 13-14세기 이래 소멸했다는 견해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 그의 견

해는 주지하듯이, 예언자의 시대의 종결에 관한 기독교회나 유태교의 견해에 유사

하다. 법예언자, 즉 카리스마적 시대의 법예언자(Mudschtahiden)는 법적 계시의

담당자로서 생각되었으나 그들은 물론 전체 범위에서 정통으로 인정된 네 개의 법

학파(madhhab)의 창설자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하여 법예언자적 힘이 소멸한 후

에는 주석자(muquallid)만이 존재하고, 법의 고정성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4 법

학파의 싸움은 처음에는 정통적인 마호메트 전승(Sunnah)의 성질에 관한 싸움이

었으나 그와 관련하여 해석방법에 관한 싸움으로 되고, 그리고 법의 화정화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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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28 32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서는 불교의 상대화된 세계윤리는 한편으로는 심정을 다른 한편으로는 의례적 형

식주의를 철저하게 기도하였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의 신 「법」이 특별한 교의의 대

상으로서 이러한 기저 위에 성립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적

으로 각인된 법서의 문헌이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미얀바에서 1875년에 공적 법으

로서 「불교법」(즉 인도 전래의 법으로서 순순하게 불교적으로 수정된 법)을 공포할

수가 있었다.

제4절 중 국 법

중국에서는 반대로 독재적 관료제는 주술적이며 정령숭배적인 의무를 순수하게

의례적인 영역에 제한하였으며, 우리가 관찰해온 바와 같이, 또 관찰할 바와 같이,

독재적 관료제는 경제에 대해서 상당히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재판

의 비합리성은 가산적으로 조건지워지며 신정적으로 조건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인 예언자처럼 법예언자도 역사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해

답법학자의 계층도 볼 수 없으며, 특별한 법교육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은 형식적

법의 발전에 반항하는 정치단체의 가장적 성격에 부합한다. 「무」(巫, Wu)와 「형」(巫

見, Wei) (「도교의」 주술적 사제자)는 주술적 의례에 관한 고문이며 또 그들의 성원

으로서 시험을 통과하고 문학적 교양을 지닌 자는 가족이나 씨족이나 촌락을 위

하여 의례적이며 법적인 사무에 관한 조언자이다.

제5절 이슬람법

이슬람에서는 이론적으로는 법생활의 영역에서는 신성한 규범의 요구가 세속적

법발전의 길을 거의 차단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적으로는 그리스법과 로마법의 계

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전체 민법은 코란의 해석이거나 또는 코란

의 관습법적 보습이거나가 요구된다. 오마이야 왕가(Omajiaden)의 전복과 앗바

스 왕조(Abbassididenherrschaft)의 성립 이후에는 차라투스트라의 사산 왕조

의 정교합일주의의 원리가 신성한 전통에의 회귀라는 슬로건 아래 이슬람에 옮겨

졌을 경우에는 이것은 특히 이루어졌다. 이슬람에서의 신법의 지위는 고유한 예언

적으로 창조된 「서적종교」에서의 신법이 작용하기 위한 적당한 모범이라는 것이다.

코란은 다수의 순수하게 실증적인 법적 규정을 포함하였다(예컨대 남자와 그의 양

녀 간의 혼인금지의 폐지이다 - 이러한 자유는 마호메트 자신에 소용되었다). 그러

나 법률적 법규정의 주요한 점은 따로 기원을 가졌다. 법률적 규정은 일반적으로

성전(聖傳, hadith)의 형상에서 나타난다.즉 예언자의 모범적 행위와 격언에서 나

타난다. 그리고 그 신빙성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 본래는 특별히 자격지어

진 마호메트의 생애의 반려에까지 구두에 의해서 소급되는 보증의 계승에 의해서

기초지워져 있다. 법률적 규정은 이러한 인적 보증 계열의 불가결한 계속성을 위하

여 구체적으로 구두에 의해서 전해져서 「마호메트 전승」(Sunnah)을 형성하는 것

이며, 또 그렇게 생각되고 있다. 마호메트 전승은 「코란의 해석」이 아니고 코란 옆

에 있는 전통이다. 마호메트 전승의 가장 오랜 요소는 그 본질적인 부분이 원(原)

이슬람 시대, 특히 메디나의 관습법에서 유래한다. 그 관습법의 마호메트 전승으

로서의 편집은 말리크 이븐 아나(Malik-ibn- Anas)에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코란도 마호메트 전승도 그 자체, 재판관이 사용할 수 있는 직접적인 법원(法源)은

아니며 오히려 이슬람법학(fiqh)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슬람법학, 즉 저자

에 의해서 질서된(musnad) 성전(聖傳)의 집성이거나 또는 대상에 따라서 체계화

된 (작품 musannaf, 그의 6으로부터 전문경전, Traditions Canon이 형성된다)

성전의 집성인 법학파의 사변적 노작의 성과이다. 이슬람법학은 도덕적이며 법적

인 명령을 포괄했으며, 법을 확정한 후에는 점점 다수가 되는 완전히 노후하게 된

성격의 부분까지도 포함하였다. 그러나 확정화는 공식적으로는 법해석의 카리스마

적, 법예언자적인 힘(idschtihad)이 성천(聖遷, Hidschrah)의 7-8세기 이래, 즉

기독 기원[160] 13-14세기 이래 소멸했다는 견해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 그의 견

해는 주지하듯이, 예언자의 시대의 종결에 관한 기독교회나 유태교의 견해에 유사

하다. 법예언자, 즉 카리스마적 시대의 법예언자(Mudschtahiden)는 법적 계시의

담당자로서 생각되었으나 그들은 물론 전체 범위에서 정통으로 인정된 네 개의 법

학파(madhhab)의 창설자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하여 법예언자적 힘이 소멸한 후

에는 주석자(muquallid)만이 존재하고, 법의 고정성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4 법

학파의 싸움은 처음에는 정통적인 마호메트 전승(Sunnah)의 성질에 관한 싸움이

었으나 그와 관련하여 해석방법에 관한 싸움으로 되고, 그리고 법의 화정화 이래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59: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30 33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학파의 대립은 점점 고정되었다. 다른 한 편 한발학파는 전체 이설(異說, bida), 전

체 신법(新法), 전체 신성전(新聖傳, hadiths), 전체합리적인 법해석의 수단을 거부

하였으며, 또 「너 들어가는 것을 강제하라」(Coge intrare)의 원칙에 의해서 원리적

으로 서로 관대한 그 박의 학파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이러한 학파는 본질적으로는

법창조를 위하여 법학자의 기술에 할당되는 역할을 구별하였다. 오랫동안 아프리

카와 아라비아에서 지배적이었던 말리크학파는 그 기원이 가장 오랜 이슬람의 정

치 수도(메디나)에 있는 것으로, 특히 전(前) 이슬람법을 계수하였다는 것이 추정

된다. 그러나 그 학파는 하나피학파, 즉 이리크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강도로 비잔

틴의 영향을 받은 학파에 대해서 오히려 보다 강력하게 전통의 제약을 받았던 것

으로 인정된다. 하나피학파는 회교주인 칼리프의 궁전에서 규준적인 것이며, 터키

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집트에서도 역시 공식적으로 지배적인 학파였

다. 하나피학파의 보다 강도로 궁전에 순응한 법학은 유추(qijas)의 이용이라는 이

슬람법학의 경험적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이며, 이에 더하여 특히 받아들인 코란의

해석에 대해서 자립적인 근거로서의 학문적인 견해인 「개인적 해석」(ra’j)을 대표하

는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샤피 학파는 바그다드에서 나와서 남아라비아, 이집트, 인도네시아에 확

대된 것으로서 하나피학파가 가지는 학문적 기술이나 외국법적 표절을 거부하고

또 말리크 학파가 가지는 전통에 대해서 자유로운 입장을 거부하고, 따라서 전통

학파로서 인정된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성전을 대량으로 전통 안에 계수하였다는

데에서 다른 학파와 같은 결과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 전통주의자인 아시

아브 알 하디스 간의 싸움과 합리주의적 법학자인 아시아브 알 피크후 간의 싸움

은 전체 이슬람 법사(法史)를 관통하고 있다.

이슬람의 신법은 철두철미하게 특수한 「법조법」이다. 신법의 효력은 「이슬람법

학자의 합의」(idschma)(만인의 묵시적인 합의[idschmah-al-ammah= tacitus

consensus Omnium)에 근거한다.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는 실제로는 법예언자,

즉 대법률가(fuqaha)의 동의로서 결정된다. 공식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의 무과오

와 병존하여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무과오가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코란과 마

호메트 전승은 단지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역사적인 전거에 불과하다. 재판관은

토란이나 마호메트 전승을 조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편찬을 조사하였다. 신성한 문서와 전통에 관한 자립적인 해석은 재판관에 대해서

금지되었다. 법률가 자신의 지위는 로마의 그것과 유사하며, 특히 학교조직은 로마

의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다. 자문적 실무와 학생의 수업의 병존, 따라서 법관

계인의 실용적인 요구에 대한 관계 및 체계적인 정서를 필요로 하는 실용적·교육

적 요구에 대한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나 신학파를 창설할 때(Idschtihadperiod)

의의 종결 이래 학파의 제1인자에 의해서 고정된 해석방법과 일정한 해석에의 법

적 구속은 모든 자유로운 해석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카이로에서의 알 아즈할 대

학과 같은 관립대학에서는 - 거기에서는 네 정통적 학파의 각기의 대표자가 교사

였다 - 교육은 일정한 격언의 아주 기계적인 암송으로 변해버렸다. - 본질적으로

는 이슬람의 조직, 즉 자문법학자의 결여와 확실한 교직은 이러한 신법의 발전을

정체적인 법조법이 되도록 제약하였다. 실제상의 결과에서는 신법의 직접적인 효력

은 일정한 기본적인 제도로서 머무르고 그것도 전제로서는 예컨대 중세의 교회법

의 객관적 법영역보다도 본질적으로는 결코 보다 크지 않은 범위에 제약되었다. 신

성한 전통의 지배라는 원리적인 보편주의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즉 불가피한 혁신은 일반적으로 개개의 사건을 위해서 구해진 또는 절취된 판결

(Fewa)에 근거하거나 또는 대립적으로 경쟁하는 정통적 법학파의 논쟁된 카주이

스틱에 근거한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로부터 이전에 언급했던 법사상의 형

식적 합리성의 결여 외에 특히 내적 또는 외적인 법의 통일의 목적을 위한 체계적

인 법창조의 불가능이 생겼다. 신법은 제거되지 않았으며, 또 온갖 순응이 이루어

졌지만 현실로 실무에서 행해지는 일도 없었다. 직권적으로 허가된 법률가, 즉 샤

익흐루 이슬람을 선두로 하는 교직자들의 사건마다 카디 또는 당사자에 의해서 구

해지는 규준적인 해답은 너무 강력하게 편의주의적으로 제약되고, 사람이 다른데

다가 동요하고 신판의 방법으로 선고되고, 합리적인 이유를 표시하지 않고 또 법

의 합리화에 아주 근소하게도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법의 비합리성을

실제상으로도 높이는 것이[162]다. 그리고 그 때에 신법은 이슬람의 법동료의 신분

법으로서 인정되고, 복종한 이단자를 위한 신분법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법적 특수성은 다양하게 묵인된, 일부는 적극적으로 특권지어진 일부는 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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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0 33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학파의 대립은 점점 고정되었다. 다른 한 편 한발학파는 전체 이설(異說, bida), 전

체 신법(新法), 전체 신성전(新聖傳, hadiths), 전체합리적인 법해석의 수단을 거부

하였으며, 또 「너 들어가는 것을 강제하라」(Coge intrare)의 원칙에 의해서 원리적

으로 서로 관대한 그 박의 학파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이러한 학파는 본질적으로는

법창조를 위하여 법학자의 기술에 할당되는 역할을 구별하였다. 오랫동안 아프리

카와 아라비아에서 지배적이었던 말리크학파는 그 기원이 가장 오랜 이슬람의 정

치 수도(메디나)에 있는 것으로, 특히 전(前) 이슬람법을 계수하였다는 것이 추정

된다. 그러나 그 학파는 하나피학파, 즉 이리크에서 유래하며, 따라서 강도로 비잔

틴의 영향을 받은 학파에 대해서 오히려 보다 강력하게 전통의 제약을 받았던 것

으로 인정된다. 하나피학파는 회교주인 칼리프의 궁전에서 규준적인 것이며, 터키

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집트에서도 역시 공식적으로 지배적인 학파였

다. 하나피학파의 보다 강도로 궁전에 순응한 법학은 유추(qijas)의 이용이라는 이

슬람법학의 경험적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이며, 이에 더하여 특히 받아들인 코란의

해석에 대해서 자립적인 근거로서의 학문적인 견해인 「개인적 해석」(ra’j)을 대표하

는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샤피 학파는 바그다드에서 나와서 남아라비아, 이집트, 인도네시아에 확

대된 것으로서 하나피학파가 가지는 학문적 기술이나 외국법적 표절을 거부하고

또 말리크 학파가 가지는 전통에 대해서 자유로운 입장을 거부하고, 따라서 전통

학파로서 인정된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성전을 대량으로 전통 안에 계수하였다는

데에서 다른 학파와 같은 결과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 전통주의자인 아시

아브 알 하디스 간의 싸움과 합리주의적 법학자인 아시아브 알 피크후 간의 싸움

은 전체 이슬람 법사(法史)를 관통하고 있다.

이슬람의 신법은 철두철미하게 특수한 「법조법」이다. 신법의 효력은 「이슬람법

학자의 합의」(idschma)(만인의 묵시적인 합의[idschmah-al-ammah= tacitus

consensus Omnium)에 근거한다.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는 실제로는 법예언자,

즉 대법률가(fuqaha)의 동의로서 결정된다. 공식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의 무과오

와 병존하여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무과오가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코란과 마

호메트 전승은 단지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역사적인 전거에 불과하다. 재판관은

토란이나 마호메트 전승을 조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슬람 법학자의 합의의

편찬을 조사하였다. 신성한 문서와 전통에 관한 자립적인 해석은 재판관에 대해서

금지되었다. 법률가 자신의 지위는 로마의 그것과 유사하며, 특히 학교조직은 로마

의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다. 자문적 실무와 학생의 수업의 병존, 따라서 법관

계인의 실용적인 요구에 대한 관계 및 체계적인 정서를 필요로 하는 실용적·교육

적 요구에 대한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나 신학파를 창설할 때(Idschtihadperiod)

의의 종결 이래 학파의 제1인자에 의해서 고정된 해석방법과 일정한 해석에의 법

적 구속은 모든 자유로운 해석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카이로에서의 알 아즈할 대

학과 같은 관립대학에서는 - 거기에서는 네 정통적 학파의 각기의 대표자가 교사

였다 - 교육은 일정한 격언의 아주 기계적인 암송으로 변해버렸다. - 본질적으로

는 이슬람의 조직, 즉 자문법학자의 결여와 확실한 교직은 이러한 신법의 발전을

정체적인 법조법이 되도록 제약하였다. 실제상의 결과에서는 신법의 직접적인 효력

은 일정한 기본적인 제도로서 머무르고 그것도 전제로서는 예컨대 중세의 교회법

의 객관적 법영역보다도 본질적으로는 결코 보다 크지 않은 범위에 제약되었다. 신

성한 전통의 지배라는 원리적인 보편주의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즉 불가피한 혁신은 일반적으로 개개의 사건을 위해서 구해진 또는 절취된 판결

(Fewa)에 근거하거나 또는 대립적으로 경쟁하는 정통적 법학파의 논쟁된 카주이

스틱에 근거한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로부터 이전에 언급했던 법사상의 형

식적 합리성의 결여 외에 특히 내적 또는 외적인 법의 통일의 목적을 위한 체계적

인 법창조의 불가능이 생겼다. 신법은 제거되지 않았으며, 또 온갖 순응이 이루어

졌지만 현실로 실무에서 행해지는 일도 없었다. 직권적으로 허가된 법률가, 즉 샤

익흐루 이슬람을 선두로 하는 교직자들의 사건마다 카디 또는 당사자에 의해서 구

해지는 규준적인 해답은 너무 강력하게 편의주의적으로 제약되고, 사람이 다른데

다가 동요하고 신판의 방법으로 선고되고, 합리적인 이유를 표시하지 않고 또 법

의 합리화에 아주 근소하게도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법의 비합리성을

실제상으로도 높이는 것이[162]다. 그리고 그 때에 신법은 이슬람의 법동료의 신분

법으로서 인정되고, 복종한 이단자를 위한 신분법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법적 특수성은 다양하게 묵인된, 일부는 적극적으로 특권지어진 일부는 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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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2 33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특권지어진, 종교에 대해서도 또 지방적 관습, 직업적 관습에 대해서도 전

체 형태에 있어서 항상적인 것으로서 존속하였다. 이러한 법적 특수성의 존속은 특

별법은 일반법을 깬다는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법적 특수성이 무제약한 효력을 요

구하고 그러나 그 때에 불안정으로 해석되는 신법과 대립한다면 그 효력에 관해서

는 의문이 많다. 이슬람의 거래법은 특히 서구가 부분적으로 직접 계수한 상업제도

에 관한 후기 고대의 법기술의 형성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거래법의 효력은 이슬

람 안에서는 중요한 부분에서 거래의 신의와 재판에 대한 상인의 경제적 영향에 의

해서만 보증되었으며, 제정법이나 합리적 법의 안정된 원칙에 의해서 보증된 것은

아니다. 신성한 전통은 대개 이러한 제도를 추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해

서 위하적일 수 있었다. 신성한 전통은 법을 넘어서(praeter legem) 존속하였다.

내적 또는 외적인 법의 통일의 방해는 신법의 효력이나 불역의 전통의 효력이 중

국, 인도, 이슬람의 법영역에서처럼 일반적으로 항상적으로 엄숙한 것으로서 생각

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다시 이슬람의 내부에서

는 법의 속인주의는 카롤링거 왕조에서 인민법에 관계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순수

한 정통적 학파에 관계하였다. 정복시대의 영국의 코먼로, 공식적으로는 헨리 2세

이후의 코먼로가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토지의 법률」의 창조는 전적으로 불가능하

였다. 실제로 현대에는 대이슬람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세속적 재판과 종교적 재판

의 이원론이 성립하고 있다. 즉 카디와 세속적 관료, 또한 이슬람교법과 오마이야

왕조 이래 시작된 카로링거 왕조의 칙령에도 비할 세속적 관령법(官令法, Qanun)

이 병존하여 성장하여 후자가 정체함에 따라서 점점 증대하는 의의를 얻었다. 칭

호, 혼인, 상속법, 이혼, 사정에 따라서는 재단의 재, 따라서 또한 토지소유, 이외

의 전체 사건에 관한 결정은 세속적 재판관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세속적 재관

판은 - 종교적 법의 간섭이 세속적 법규의 전 체계적인 폐쇄성을 배제한 이래 (공

식적으로는 1869년으로부터 공포하게 된 터키의 법전은 결코 「법전편찬」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피 학파의 법적 규칙의 집성에 불과하다) - 일반적으로 종교법의 금제

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건에 관하여 지방관습을 물었던 것이다. 형식적·법

률적 개념에서의 법의 논리적 체계화는 이러한 상태에 의해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태의 경제적 의의는 뒤에 보는 바와 같이 근소한 것은 아니다.

제6절 페르시아법

페르시아에서의 공식적인 종파인 시아파(Schiite)에서는 신법의 비합리성은 훨

씬 높아졌다. 마호메트 전승이 준 항상 비교적 고정된 근거점이 결여되었다. 이론

적으로 과오를 범하지 않는 자질이 부여된 눈에 보이지 않는 도사(Imam)[교사]의

존재의 신앙은 확실히 그것에 가름하는 대용물은 아니다. 재판관의 허가는 페르시

아 왕(Schah) 측에서 행하여졌다. 페르시아 왕은 종교적인 불법적 지배자로서 무

제약하게 재판관에 대해서 개관적으로 지방명망가의견해를 강력하게 고려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허가는 객관적으로는 관직상의 「임명」이 아니라 오히려 전문적

인 신학교에 의해서 자격이 부여된 유자격 졸업자의 임명에 불과한 것이며, 그리고

관할은 존재하지만 개개의 재판관의 명확하게 고정된 권한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보인다. (S. 476) 오히려 당사자는 다수의 서로 경쟁하는 재판관 중에서 선택

하여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예언자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이 점에도 명백

하게 나타나 있다. 자라투스트라의 영향에 의해서 성격적으로 높여진 시아파의 엄

격히 종교적인특색은 이교도와의 모든 경제적인 재산거래를 불결한 것으로서 직접

으로 의례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러나 많지 않은 의제에 의해서 이러한 신법의 요구

를 궁극적으로 실제로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그것에 의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

역으로부터의 거의 전적인 철퇴가 일어났으며, 또한 - 입헌제가 판결(Fetwas)에

의해서 코란의 인용문에 근거하여 「기초지워진」 이래는 -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역

으로부터의 거의 전적인 철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제

1차대전 이전 - 편자) 신정제가 경제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양은 결코 아니다. 재

판에의 신정의 관여는 그 범위가 점차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 후에 지배형식으로

서의 근동의 가산제에 관해서 논술할 특색과 함께 - 경제에 대해서 진정으로 중

요한 의의를 가졌으며 또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 여기서도 타처에서와 같

이 - 신법의 실증적 규범에 의거하는 것이 재판의 원칙적인 「의향」에 의거하는 것

보다 훨씬 근소하였다. 재판의 원칙적인 「의향」은, 이해투쟁의 형식적 규제를 추구

하는 것이 아니며 「실질적」정의를 추구하였다. 이리하여 그것은 예컨대 그의 권한

에 속하는 부동산소송에서 아주 포괄적으로 구체적인 형평의 관념에 따라서 판결

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전법이 결여된 곳에서, 특히 쉽게 행하여졌다. 그리고 그 때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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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2 33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특권지어진, 종교에 대해서도 또 지방적 관습, 직업적 관습에 대해서도 전

체 형태에 있어서 항상적인 것으로서 존속하였다. 이러한 법적 특수성의 존속은 특

별법은 일반법을 깬다는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법적 특수성이 무제약한 효력을 요

구하고 그러나 그 때에 불안정으로 해석되는 신법과 대립한다면 그 효력에 관해서

는 의문이 많다. 이슬람의 거래법은 특히 서구가 부분적으로 직접 계수한 상업제도

에 관한 후기 고대의 법기술의 형성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거래법의 효력은 이슬

람 안에서는 중요한 부분에서 거래의 신의와 재판에 대한 상인의 경제적 영향에 의

해서만 보증되었으며, 제정법이나 합리적 법의 안정된 원칙에 의해서 보증된 것은

아니다. 신성한 전통은 대개 이러한 제도를 추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해

서 위하적일 수 있었다. 신성한 전통은 법을 넘어서(praeter legem) 존속하였다.

내적 또는 외적인 법의 통일의 방해는 신법의 효력이나 불역의 전통의 효력이 중

국, 인도, 이슬람의 법영역에서처럼 일반적으로 항상적으로 엄숙한 것으로서 생각

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다시 이슬람의 내부에서

는 법의 속인주의는 카롤링거 왕조에서 인민법에 관계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순수

한 정통적 학파에 관계하였다. 정복시대의 영국의 코먼로, 공식적으로는 헨리 2세

이후의 코먼로가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토지의 법률」의 창조는 전적으로 불가능하

였다. 실제로 현대에는 대이슬람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세속적 재판과 종교적 재판

의 이원론이 성립하고 있다. 즉 카디와 세속적 관료, 또한 이슬람교법과 오마이야

왕조 이래 시작된 카로링거 왕조의 칙령에도 비할 세속적 관령법(官令法, Qanun)

이 병존하여 성장하여 후자가 정체함에 따라서 점점 증대하는 의의를 얻었다. 칭

호, 혼인, 상속법, 이혼, 사정에 따라서는 재단의 재, 따라서 또한 토지소유, 이외

의 전체 사건에 관한 결정은 세속적 재판관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세속적 재관

판은 - 종교적 법의 간섭이 세속적 법규의 전 체계적인 폐쇄성을 배제한 이래 (공

식적으로는 1869년으로부터 공포하게 된 터키의 법전은 결코 「법전편찬」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피 학파의 법적 규칙의 집성에 불과하다) - 일반적으로 종교법의 금제

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건에 관하여 지방관습을 물었던 것이다. 형식적·법

률적 개념에서의 법의 논리적 체계화는 이러한 상태에 의해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태의 경제적 의의는 뒤에 보는 바와 같이 근소한 것은 아니다.

제6절 페르시아법

페르시아에서의 공식적인 종파인 시아파(Schiite)에서는 신법의 비합리성은 훨

씬 높아졌다. 마호메트 전승이 준 항상 비교적 고정된 근거점이 결여되었다. 이론

적으로 과오를 범하지 않는 자질이 부여된 눈에 보이지 않는 도사(Imam)[교사]의

존재의 신앙은 확실히 그것에 가름하는 대용물은 아니다. 재판관의 허가는 페르시

아 왕(Schah) 측에서 행하여졌다. 페르시아 왕은 종교적인 불법적 지배자로서 무

제약하게 재판관에 대해서 개관적으로 지방명망가의견해를 강력하게 고려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허가는 객관적으로는 관직상의 「임명」이 아니라 오히려 전문적

인 신학교에 의해서 자격이 부여된 유자격 졸업자의 임명에 불과한 것이며, 그리고

관할은 존재하지만 개개의 재판관의 명확하게 고정된 권한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보인다. (S. 476) 오히려 당사자는 다수의 서로 경쟁하는 재판관 중에서 선택

하여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법예언자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이 점에도 명백

하게 나타나 있다. 자라투스트라의 영향에 의해서 성격적으로 높여진 시아파의 엄

격히 종교적인특색은 이교도와의 모든 경제적인 재산거래를 불결한 것으로서 직접

으로 의례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러나 많지 않은 의제에 의해서 이러한 신법의 요구

를 궁극적으로 실제로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그것에 의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

역으로부터의 거의 전적인 철퇴가 일어났으며, 또한 - 입헌제가 판결(Fetwas)에

의해서 코란의 인용문에 근거하여 「기초지워진」 이래는 -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역

으로부터의 거의 전적인 철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제

1차대전 이전 - 편자) 신정제가 경제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양은 결코 아니다. 재

판에의 신정의 관여는 그 범위가 점차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 후에 지배형식으로

서의 근동의 가산제에 관해서 논술할 특색과 함께 - 경제에 대해서 진정으로 중

요한 의의를 가졌으며 또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 여기서도 타처에서와 같

이 - 신법의 실증적 규범에 의거하는 것이 재판의 원칙적인 「의향」에 의거하는 것

보다 훨씬 근소하였다. 재판의 원칙적인 「의향」은, 이해투쟁의 형식적 규제를 추구

하는 것이 아니며 「실질적」정의를 추구하였다. 이리하여 그것은 예컨대 그의 권한

에 속하는 부동산소송에서 아주 포괄적으로 구체적인 형평의 관념에 따라서 판결

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전법이 결여된 곳에서, 특히 쉽게 행하여졌다. 그리고 그 때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63: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34 33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문에 [164] 그것은 계산가능성의 기회를 멀리하였던 것이다(「카디 재판」). 그 결과

예컨대 튜니스에서 처럼 “Chara”(종교적 재판)가 부동산소송에 대해서 권한을 가

지는 한 토지의자본주의적 이용은 불가능하였다. 자본주의적 이해가 이러한 권한

의 제거의 관철에 성공하였다. 경과는 전형적으로는 신정적 재판이 일반적으로 합

리적인 경제에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정도에서만 대립하며, 그것도 내재적인 성격에

의해서 대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과를 가리킨다.

제7절 유태법

유태의 신법은 이슬람의 신법과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 제약되면서도 형식적으로

는 유사하였다. 또 유태에서는 율법을 해석하고 보충한 신성한 전통은 보편적인 규

범, 즉 요구에 따라서는 법생활의 전체 범위를 지배하는 규범으로서 인정되었다.

이슬람에서 처럼 유태에서도 역시 신법은 신앙단체를 위해서만 있었다. 그러나 이

슬람과는 반대로 신법의 담당자는 지배적인 신분이 아니라 천민이었다. 따라서 외

부와의 거래는 법적으로는 외국과의 거래였다. 그 거래에는 기술한 바와 같이, 부

분적으로는 다른 윤리적 규범이 유효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유태인이 환경에 유효

한 규범을 법으로 적합시키려는 한, 한편으로는 그것은 유태인의 환경에 용납되고

다른 데에서는 의례적인 고려에 대립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였다. 고대의 토지의 신

탁(빛과 진실)은 제정시대에는 이미 활동적인 법예언자에 의해서 가름되었다. 법예

언자는 유태법에서는 게르만법에서의 법예언자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법명령 발포

의 권한에 관하여 국왕과 싸웠다. 예언자 - 제정시대의 점성자 또는 물론 법예언

자 - 가 처음에 「율법학자」에 의해서 추방된 후에는 그리스적 교양을 받은 고귀한

학자층 - 후에는 소시민의 겸업을 포함한다 - 이 완전히 그것에 교체하였으며,

늦어도 기독 기원 직전의 세기에는 의례적 또는 법적 질문의 정당한 취급 동시에

율법해석자의 법률적 기술, 유태 민족의 근동의 두 중심지, 즉 예루살렘과 바빌론

에서의 자문법학자의 법률적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들은 이슬람이나 인도의 법률

가와 아주 동일하게 율법을 일부는 해석하고 일부는 율법으로부터 떨어진 전통의

담당자였다. 이러한 전통은 시나이에서의 신과 모세의 40일간의 해후를 통하여 신

이 모세에게 전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내용으로 공적인 제도, 예컨대 러비라트

혼(婚)은 이슬람이나 인도에서와 아주 동일 하게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또 이슬람

이나 인도처럼 유태에서도 전통은 처음에는 엄격한 구두의 전통이었다. 설교자들

(Tannaim)에 의한 문서적 고정은 증대하는 이산한 유태인의 분산화로서 시작되

었으며, 또 기독 기원의 초두 이래의 학파(히럴학파와 샤마이학파)의 발전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문서적 고정은 확실히 자문법학자의 해답이나 선례에의 재

판관의 구속에 통일성의 안정을 위하여 행하여졌다. 로마나 영국에서처럼 개개의

판결의 보증인은 소환되는 것이 보통이며, 그리고 전문적 교육시험 면허가 형식적

으로 자유로운 법예언에 결정적으로 가름하였다. 유태교의 율법(Mischna)은 해답

자 자신이 활동한 성과이며 교문 예후다(Jehuda)의 집성이다. 다른 한 편 그것의

보충적인 주석서(Gemara)는 교육받은 법률가, 즉 주석가 안에서 생긴 아모라학

파가 활동한 성과였다. 그리고 이 주석자는 명령된 지위에 있는 헤브라이의 낭독

자가 청중을 위하여 아라메아어를 번역하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레스티나

에서는 「랍비」(Rabbi)의 칭호를 가지고 바빌론에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칭호(mar)

를 가졌다. 서구 신학의 방법에 따른 「변증법적」 방법은 본질적으로는 바빌론에서

의 판베디타 「학원」(Pumbeditha “Akademie”)에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

법은 정교(正敎)의 후기에서는 근본적으로 혐의를 받았으며 현대에는 엄금되어 있

다. 그 이래로 율법의 사변적 신학적 취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통의 교양적·교

화적인 요소와 법률적 요소 - 하가다(haggada)와 할라카(halacha) - 와는 인도

나 이슬람에서보다 더욱 명확하게 기능에 있어서 분리되고 또 저작상에서도 분리

되어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학자의 조직의 중심은 점차로 바빌론에로 옮겼다. 폐쇄

왕(Resch Galata)(Exilarch)은 명확하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11세

기에 이르기까지 바빌론에서 거주하였다. 유폐왕의 관직은 다윗 왕의 가족에게 상

속되었으나 그것은 파르티아나 페르시아 군주, 나중에는 이슬람의 군주들에 의해

서 국가적으로 승인되고, 그리고 사교의 궁정이 부여되고, 재판권은 장기간 부여되

고 (그것은 형사사건에 대해서까지도 인정되었다), 또 종교적인 파문권력이 부여되

었다. 법발전의 담당자는 수하(Sura)와 이미 언급한 판베디타 - 전자가 보다 고귀

하다 - 에 있는 두 개의 서로 경쟁하는 대학이었다. 이러한 대학의 학장(Geomin)

은 중의소(衆議所, Sanhedrin)의 성원으로서의 법활동을 전체 이산(Diaspor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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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4 33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문에 [164] 그것은 계산가능성의 기회를 멀리하였던 것이다(「카디 재판」). 그 결과

예컨대 튜니스에서 처럼 “Chara”(종교적 재판)가 부동산소송에 대해서 권한을 가

지는 한 토지의자본주의적 이용은 불가능하였다. 자본주의적 이해가 이러한 권한

의 제거의 관철에 성공하였다. 경과는 전형적으로는 신정적 재판이 일반적으로 합

리적인 경제에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정도에서만 대립하며, 그것도 내재적인 성격에

의해서 대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과를 가리킨다.

제7절 유태법

유태의 신법은 이슬람의 신법과 서로 대립하는 상태에 제약되면서도 형식적으로

는 유사하였다. 또 유태에서는 율법을 해석하고 보충한 신성한 전통은 보편적인 규

범, 즉 요구에 따라서는 법생활의 전체 범위를 지배하는 규범으로서 인정되었다.

이슬람에서 처럼 유태에서도 역시 신법은 신앙단체를 위해서만 있었다. 그러나 이

슬람과는 반대로 신법의 담당자는 지배적인 신분이 아니라 천민이었다. 따라서 외

부와의 거래는 법적으로는 외국과의 거래였다. 그 거래에는 기술한 바와 같이, 부

분적으로는 다른 윤리적 규범이 유효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유태인이 환경에 유효

한 규범을 법으로 적합시키려는 한, 한편으로는 그것은 유태인의 환경에 용납되고

다른 데에서는 의례적인 고려에 대립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였다. 고대의 토지의 신

탁(빛과 진실)은 제정시대에는 이미 활동적인 법예언자에 의해서 가름되었다. 법예

언자는 유태법에서는 게르만법에서의 법예언자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법명령 발포

의 권한에 관하여 국왕과 싸웠다. 예언자 - 제정시대의 점성자 또는 물론 법예언

자 - 가 처음에 「율법학자」에 의해서 추방된 후에는 그리스적 교양을 받은 고귀한

학자층 - 후에는 소시민의 겸업을 포함한다 - 이 완전히 그것에 교체하였으며,

늦어도 기독 기원 직전의 세기에는 의례적 또는 법적 질문의 정당한 취급 동시에

율법해석자의 법률적 기술, 유태 민족의 근동의 두 중심지, 즉 예루살렘과 바빌론

에서의 자문법학자의 법률적 기술이 발달하였다. 그들은 이슬람이나 인도의 법률

가와 아주 동일하게 율법을 일부는 해석하고 일부는 율법으로부터 떨어진 전통의

담당자였다. 이러한 전통은 시나이에서의 신과 모세의 40일간의 해후를 통하여 신

이 모세에게 전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내용으로 공적인 제도, 예컨대 러비라트

혼(婚)은 이슬람이나 인도에서와 아주 동일 하게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또 이슬람

이나 인도처럼 유태에서도 전통은 처음에는 엄격한 구두의 전통이었다. 설교자들

(Tannaim)에 의한 문서적 고정은 증대하는 이산한 유태인의 분산화로서 시작되

었으며, 또 기독 기원의 초두 이래의 학파(히럴학파와 샤마이학파)의 발전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문서적 고정은 확실히 자문법학자의 해답이나 선례에의 재

판관의 구속에 통일성의 안정을 위하여 행하여졌다. 로마나 영국에서처럼 개개의

판결의 보증인은 소환되는 것이 보통이며, 그리고 전문적 교육시험 면허가 형식적

으로 자유로운 법예언에 결정적으로 가름하였다. 유태교의 율법(Mischna)은 해답

자 자신이 활동한 성과이며 교문 예후다(Jehuda)의 집성이다. 다른 한 편 그것의

보충적인 주석서(Gemara)는 교육받은 법률가, 즉 주석가 안에서 생긴 아모라학

파가 활동한 성과였다. 그리고 이 주석자는 명령된 지위에 있는 헤브라이의 낭독

자가 청중을 위하여 아라메아어를 번역하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레스티나

에서는 「랍비」(Rabbi)의 칭호를 가지고 바빌론에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칭호(mar)

를 가졌다. 서구 신학의 방법에 따른 「변증법적」 방법은 본질적으로는 바빌론에서

의 판베디타 「학원」(Pumbeditha “Akademie”)에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

법은 정교(正敎)의 후기에서는 근본적으로 혐의를 받았으며 현대에는 엄금되어 있

다. 그 이래로 율법의 사변적 신학적 취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통의 교양적·교

화적인 요소와 법률적 요소 - 하가다(haggada)와 할라카(halacha) - 와는 인도

나 이슬람에서보다 더욱 명확하게 기능에 있어서 분리되고 또 저작상에서도 분리

되어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학자의 조직의 중심은 점차로 바빌론에로 옮겼다. 폐쇄

왕(Resch Galata)(Exilarch)은 명확하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11세

기에 이르기까지 바빌론에서 거주하였다. 유폐왕의 관직은 다윗 왕의 가족에게 상

속되었으나 그것은 파르티아나 페르시아 군주, 나중에는 이슬람의 군주들에 의해

서 국가적으로 승인되고, 그리고 사교의 궁정이 부여되고, 재판권은 장기간 부여되

고 (그것은 형사사건에 대해서까지도 인정되었다), 또 종교적인 파문권력이 부여되

었다. 법발전의 담당자는 수하(Sura)와 이미 언급한 판베디타 - 전자가 보다 고귀

하다 - 에 있는 두 개의 서로 경쟁하는 대학이었다. 이러한 대학의 학장(Geomin)

은 중의소(衆議所, Sanhedrin)의 성원으로서의 법활동을 전체 이산(Diaspor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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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6 33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위한 자문적 실무에 결부하고, 또 대학의 법학교육에 결부하였다. 지도자(Gaon)

는 일부는 승인된 교사 중에서 선발하고 일부는 폐쇄왕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대

학의 외부적인 조직은 중세의 학교나 동양의 학교에 유사하다. 정규 학생은 기숙학

교에서 생활하였다. 그들 중에는 집회 날에 외국으로부터 랍비의 지위를 구하기 위

하여 모여든 다수의 원숙한 청강생이나 지원자[166]가 있었으며, 그들은 탈무드의

토론의 연습에 열석하였다. 지도자는 그의 해답을 일부는 직접으로 그 자신으로

부터 주었고, 일부는 집회에서의 토론이나 학생과 토론한 후에 주었다. 학장의 문

필활동(6세기 이후)은 순수하게 외부적으로는 주석 외에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의 선행자, 즉 유태 율법(mischna)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아모라학파(amoraim)

나 아모라학파의 후계자, 즉 비교적 자유로이 해석한 사보라학파(Saboraim)나 교

설자들(Tannaim)의 일보다도 본질적으로 더욱 절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

상 그들은 그들의 활동의 확고한 조직에 의해서 바빌론의 탈무드의 효력을 이슬람

의 탈무드에 대해서 우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상권(至上權)은 특히 이

슬람 국가들에 존재하였으나 10세기에 이르러 서구에 복종하였다. 그 이후로 또한

유폐왕 관청(Exilarchenamt)의 소멸(박해에 의한다) 이래로 비로소 서부는 동부

의 영향에서 해방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율법박사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예컨대

일부일처제에의 추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이모니데스나 아시리아의 학문적 활동

이 정교에 의해서 합리주의적인 것으로써 거부된 후에 스페인의 유태인 요제프 카

로(Josef Karo)는 「슐르칸 아루크」(Schulchan Aruch)에서 이슬람 교회의 체계에

비교하면 매우 말맞고 간결한 강요를 작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강요는 실제로

탈무드이 해답의 권의에 가름하는 것이었으며, 예컨대 알제리에서 왕왕 유럽대륙

에서도 법전과 같이 실무를 지배하였다. 고유한 탈무드 법학은 재판실무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더욱 루즈한 관계에 있었다. 즉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활발하지 못한 카주이스틱의 현저한 우월이

있고, 그것은 순수한 합리적 구성의 좁은 제한 내에서는 고유한 체계에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법의 카주이스틱한 순화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작지 않았

다. 그러나 살아있는 법과 죽은 법은 서로 착종하며 법률적 규범과 도덕 규범은 분

리되지 않았다. 내용적으로는 이미 탈무드이전 시대에 대량의 계수가 근동으로부

터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근동법에 대응하는 유태법의 전부가 계수법이라

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 편 예컨대 증권과 같은 자본주의적인 거래법이 유태의 중

요한 법제도로서 유태 교유의 법의 기저로부터 발전하여 그런 후에 서구에 이입된

현대의 임기적인 가설은 진실로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참인의 조건을 포함한

문서가 함무라비 시대의 바빌로니아법에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법적인 증명서

에 불과하고 증권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이 바로 문제이다. 전자, 즉 법

적 증명서는 그리스법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적 구성은 서구에서는 다르다.

서구에서는 증권은 그것을 권리의 「담당자」로 하는 게르만의 견해에 근거하며, 따

라서 「상업화」라는 의미에서 휠씬 현실적이다. 그리고 또 서구의유가증권의 기원이

이러한 국가적 형식에서 중세 초기의 소송의 이해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

한 것이므로, 이 점에 관한 유태의 법적 실무의 영향이라는 것은 특히 진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증권의 「유가증권」인 성격을 준비하는 조건은 본래 결코 상업

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소송적 목적, 특히 결여된 소송대리를 보

충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나의 법제도라 하더라

도 유태인에 의해서 이입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되고 있다. 유태법이

외국 민족에 의해서 계수된 법으로서 현실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양에서였다. 모세법의 중요한 요소는 기독교화에 의해서 아르메니아법에

그것의 더욱 발전된 요소로서 수용되었다. 카자르 왕조(Chazarenreich)에서는 유

태교는 공식적인 종교였으며 그것으로 유태법은 거기에서는 어떠한 형식에서도 효

력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법사는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오랜 러시아법의

일정한 요소가 유태·탈무드의 법규의 영향 아래 성립된다는 것을 아마 가능하게

하는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하여 서구에서는 유사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서구에

서 거래형식의 이입이 유태법의 매개 아래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 이러한 것은 확

실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 이러한 제도는 그 기원에서 고유한 유태법에

소급하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시리아, 비잔티움법, 사정에 따라서는 아마

그리스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방에 공통된 바빌론법에 소급하는 것이었다. 동

양의 상업기술이 서구에 이입한 것에 관해서는 적어도 후기 고대에서는 유태는 특

히 시리아와 경쟁하였다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고유한 유태법 자체, 특히 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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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6 33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위한 자문적 실무에 결부하고, 또 대학의 법학교육에 결부하였다. 지도자(Gaon)

는 일부는 승인된 교사 중에서 선발하고 일부는 폐쇄왕에 의해서 지명되었다. 대

학의 외부적인 조직은 중세의 학교나 동양의 학교에 유사하다. 정규 학생은 기숙학

교에서 생활하였다. 그들 중에는 집회 날에 외국으로부터 랍비의 지위를 구하기 위

하여 모여든 다수의 원숙한 청강생이나 지원자[166]가 있었으며, 그들은 탈무드의

토론의 연습에 열석하였다. 지도자는 그의 해답을 일부는 직접으로 그 자신으로

부터 주었고, 일부는 집회에서의 토론이나 학생과 토론한 후에 주었다. 학장의 문

필활동(6세기 이후)은 순수하게 외부적으로는 주석 외에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의 선행자, 즉 유태 율법(mischna)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아모라학파(amoraim)

나 아모라학파의 후계자, 즉 비교적 자유로이 해석한 사보라학파(Saboraim)나 교

설자들(Tannaim)의 일보다도 본질적으로 더욱 절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

상 그들은 그들의 활동의 확고한 조직에 의해서 바빌론의 탈무드의 효력을 이슬람

의 탈무드에 대해서 우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상권(至上權)은 특히 이

슬람 국가들에 존재하였으나 10세기에 이르러 서구에 복종하였다. 그 이후로 또한

유폐왕 관청(Exilarchenamt)의 소멸(박해에 의한다) 이래로 비로소 서부는 동부

의 영향에서 해방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율법박사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예컨대

일부일처제에의 추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이모니데스나 아시리아의 학문적 활동

이 정교에 의해서 합리주의적인 것으로써 거부된 후에 스페인의 유태인 요제프 카

로(Josef Karo)는 「슐르칸 아루크」(Schulchan Aruch)에서 이슬람 교회의 체계에

비교하면 매우 말맞고 간결한 강요를 작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강요는 실제로

탈무드이 해답의 권의에 가름하는 것이었으며, 예컨대 알제리에서 왕왕 유럽대륙

에서도 법전과 같이 실무를 지배하였다. 고유한 탈무드 법학은 재판실무에 대해서

비교적으로 더욱 루즈한 관계에 있었다. 즉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활발하지 못한 카주이스틱의 현저한 우월이

있고, 그것은 순수한 합리적 구성의 좁은 제한 내에서는 고유한 체계에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법의 카주이스틱한 순화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작지 않았

다. 그러나 살아있는 법과 죽은 법은 서로 착종하며 법률적 규범과 도덕 규범은 분

리되지 않았다. 내용적으로는 이미 탈무드이전 시대에 대량의 계수가 근동으로부

터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근동법에 대응하는 유태법의 전부가 계수법이라

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 편 예컨대 증권과 같은 자본주의적인 거래법이 유태의 중

요한 법제도로서 유태 교유의 법의 기저로부터 발전하여 그런 후에 서구에 이입된

현대의 임기적인 가설은 진실로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참인의 조건을 포함한

문서가 함무라비 시대의 바빌로니아법에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법적인 증명서

에 불과하고 증권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이 바로 문제이다. 전자, 즉 법

적 증명서는 그리스법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적 구성은 서구에서는 다르다.

서구에서는 증권은 그것을 권리의 「담당자」로 하는 게르만의 견해에 근거하며, 따

라서 「상업화」라는 의미에서 휠씬 현실적이다. 그리고 또 서구의유가증권의 기원이

이러한 국가적 형식에서 중세 초기의 소송의 이해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

한 것이므로, 이 점에 관한 유태의 법적 실무의 영향이라는 것은 특히 진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증권의 「유가증권」인 성격을 준비하는 조건은 본래 결코 상업

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소송적 목적, 특히 결여된 소송대리를 보

충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하나의 법제도라 하더라

도 유태인에 의해서 이입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되고 있다. 유태법이

외국 민족에 의해서 계수된 법으로서 현실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서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동양에서였다. 모세법의 중요한 요소는 기독교화에 의해서 아르메니아법에

그것의 더욱 발전된 요소로서 수용되었다. 카자르 왕조(Chazarenreich)에서는 유

태교는 공식적인 종교였으며 그것으로 유태법은 거기에서는 어떠한 형식에서도 효

력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법사는 이러한 방법으로 가장 오랜 러시아법의

일정한 요소가 유태·탈무드의 법규의 영향 아래 성립된다는 것을 아마 가능하게

하는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하여 서구에서는 유사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서구에

서 거래형식의 이입이 유태법의 매개 아래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 이러한 것은 확

실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 이러한 제도는 그 기원에서 고유한 유태법에

소급하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시리아, 비잔티움법, 사정에 따라서는 아마

그리스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동방에 공통된 바빌론법에 소급하는 것이었다. 동

양의 상업기술이 서구에 이입한 것에 관해서는 적어도 후기 고대에서는 유태는 특

히 시리아와 경쟁하였다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고유한 유태법 자체, 특히 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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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8 33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권법은 형식적 성격에 따르면 법률행위의 유형의 자유로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근

대의 자본주의가 가져온 것과 같은 제도를 위하여, 특히 적합한 배양지가 되는 것

은 결코 아니었다. 신법이 「의식」인한 특히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규범은

일부는 (안식년처럼) 신성한 토지에 제한되었으며 (- 여기서도 그것은 바로 랍비의

면허장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일부는 경제제도의 변화로 폐퇴되어 버리거나 또는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구성적 취급으로 실제로 회피되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해

방 이전에 이미 신법의 타당한 범위와 의의는 장소마다 아주 다른 것이었다. 형식

적으로는 유태의 신법은 다른 신법에 대립하는 어떠[168]한 특수성도 나타내는 것

이 없었다. 유태의 신법은 특별법으로서 또 여하튼 불완전하지만 체계화되고 합리

화된 법 그것도 카주이스틱하지만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법으로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특생를 나타낸다. 즉 신성한 규범의 통제와 그것의

편찬 아래 사제자나 신학적 법학자에 의해서 발전된 성과라는 일반적인 특색을 나

타낸다. 테마 그 자체가 얼마나 흥미있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는 특수한 관찰

을 해야할 기연을 갖지 아니한다.

제8절 교 회 법

기독교의 교회법은 모든 다른 신법에 대해서 적어도 점차적으로는 특별한 지

위를 얻었다. 우선 첫째로, 기독교의 교회법은 중요한 부분에서 그 밖의 신법보다

도 본질적으로 합리적이며 또 보다 강하게 형식적 법률적이다. 또 교회법은 처음

부터 세속법에 대한 관계에서 쌍방의 영역의 상당히 명확한 구별에 의해서 비교

적 명백하게 이원론에 입각하였다. 이러한 교회법의 세속법에 대한 이원론의 입장

은 우선 첫째로 교회가 고대에 수세기에 걸쳐 국가와 법에의 어떠한 관계도 거부

해왔다는 사정의 결과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성격은 다양한 사정의 결

과로서 생겼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에의 관계를 구하게 되었을 때에도 기술한 바

와 같이, 교회는 이러한 관계를 「자연법」의, 따라서 합리적인 사고형상의 스토아

적인 구상의 도움으로 정서하였다. 로마법의 합리적인 전통은 교회 자체의 행정에

서 더 오래 계속하여 살았다. 이리하여 중세 초에 서구의 교회는 최초의 교회의 체

계적인 법형성을 기도하였는데 교회는 게르만 법의 주요한 형식적인 요소를 모방

하여 속죄질서를 창조하였다. 중세에 서구의 대학교육은 한편으로는 신학의 교육,

다른 한 편으로는 세속법의 교육을 교회법의 교육으로부터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

였으며, 이리하여 일반적으로 다른 곳에서 생겼던 신정적 혼합의 성립을 저해하였

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대의 철학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고대의 법학에 의

해서 훈련된 엄격하게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법학의 방법은 교회법의 취급에도 아

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 법학자의 수집활동은, 서구에서는 해답이나 선례

로 향해진 것은 아니고 - 그 밖의 장소에서는 해답이나 선례로 향하였으나 - 오히

려 종교회의 결정가관의 훈령 교령집에 향하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목

적의식적으로 위조에 의해서 작성하려고(사이비 이시돌법령집[Pseudoisidor]) 했

으나 이러한 것은 기독교회의 지반에서만 생겼다. 그리고 끝으로 - 고대 교회의

카리스마적 시기가 끝난 후부터는 - 교회의 직원이 교회의 조직을 특색짓는 합리

적이고 관료제적인 관직이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특히 교회법규의 성격에 영

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관직이라는 성격은 초기 중세에서 봉건제제도의 방해

를 받은 후에는 그레고리 법왕 시대 이래 다시 부활하고 독재적으로 되었다. 그것

은 고대와 연계한 결과였다. 그래서 서구의 교회는 그 밖의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훨씬 강력한 규준에서 합리적인 규정에 의한 법창조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합리적이고 계층적인 교회의 조직은 경제적으로 실행곤란한 따라서 부

담 많은 규정 - (다른 관련에서) - 고리 금지로써 관찰한다는 것과 같은 - 을 영

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폐지된 것으로서 다룰 수 있는 일반적 법령을 발할 수 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수많은 사례에서 신정적 법형성의 특색을 조금

밖에는 갖지 않았다. 즉 실질적 입법동기나 실질적 도덕목적과 형식적·법률적으로

중요한 규정의 요소와의 혼합 또 그 결과로서 생기는 정확성의 손실을 부인하였으

며, 이리하여 교회법은 전체 신법 중에서도 가장 많이 엄격하게 형식적인 법적 기

술을 얻으려고 하였다. 교회법에는 이슬람법이나 유태법에 존재했던 해답법학자

에 의한 형성이 결여되었으며 신약성서는 - 종말론적인 속세와의 단절이라는 결

과로부터 - 의례적 또는 법적 성격의 형식구속적 규범을 최소한으로만 포함하였

기 때문에 순수하게 합리적 규정을 위한 길이 완전히 자유롭게 열려져 있었던 것

이다. 법학자, 랍비, 교회법학자, 지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최초로 반혁명적 청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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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38 33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권법은 형식적 성격에 따르면 법률행위의 유형의 자유로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근

대의 자본주의가 가져온 것과 같은 제도를 위하여, 특히 적합한 배양지가 되는 것

은 결코 아니었다. 신법이 「의식」인한 특히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규범은

일부는 (안식년처럼) 신성한 토지에 제한되었으며 (- 여기서도 그것은 바로 랍비의

면허장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일부는 경제제도의 변화로 폐퇴되어 버리거나 또는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구성적 취급으로 실제로 회피되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해

방 이전에 이미 신법의 타당한 범위와 의의는 장소마다 아주 다른 것이었다. 형식

적으로는 유태의 신법은 다른 신법에 대립하는 어떠[168]한 특수성도 나타내는 것

이 없었다. 유태의 신법은 특별법으로서 또 여하튼 불완전하지만 체계화되고 합리

화된 법 그것도 카주이스틱하지만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법으로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특생를 나타낸다. 즉 신성한 규범의 통제와 그것의

편찬 아래 사제자나 신학적 법학자에 의해서 발전된 성과라는 일반적인 특색을 나

타낸다. 테마 그 자체가 얼마나 흥미있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여기서는 특수한 관찰

을 해야할 기연을 갖지 아니한다.

제8절 교 회 법

기독교의 교회법은 모든 다른 신법에 대해서 적어도 점차적으로는 특별한 지

위를 얻었다. 우선 첫째로, 기독교의 교회법은 중요한 부분에서 그 밖의 신법보다

도 본질적으로 합리적이며 또 보다 강하게 형식적 법률적이다. 또 교회법은 처음

부터 세속법에 대한 관계에서 쌍방의 영역의 상당히 명확한 구별에 의해서 비교

적 명백하게 이원론에 입각하였다. 이러한 교회법의 세속법에 대한 이원론의 입장

은 우선 첫째로 교회가 고대에 수세기에 걸쳐 국가와 법에의 어떠한 관계도 거부

해왔다는 사정의 결과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성격은 다양한 사정의 결

과로서 생겼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에의 관계를 구하게 되었을 때에도 기술한 바

와 같이, 교회는 이러한 관계를 「자연법」의, 따라서 합리적인 사고형상의 스토아

적인 구상의 도움으로 정서하였다. 로마법의 합리적인 전통은 교회 자체의 행정에

서 더 오래 계속하여 살았다. 이리하여 중세 초에 서구의 교회는 최초의 교회의 체

계적인 법형성을 기도하였는데 교회는 게르만 법의 주요한 형식적인 요소를 모방

하여 속죄질서를 창조하였다. 중세에 서구의 대학교육은 한편으로는 신학의 교육,

다른 한 편으로는 세속법의 교육을 교회법의 교육으로부터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

였으며, 이리하여 일반적으로 다른 곳에서 생겼던 신정적 혼합의 성립을 저해하였

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대의 철학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고대의 법학에 의

해서 훈련된 엄격하게 논리적이고 전문적인 법학의 방법은 교회법의 취급에도 아

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 법학자의 수집활동은, 서구에서는 해답이나 선례

로 향해진 것은 아니고 - 그 밖의 장소에서는 해답이나 선례로 향하였으나 - 오히

려 종교회의 결정가관의 훈령 교령집에 향하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목

적의식적으로 위조에 의해서 작성하려고(사이비 이시돌법령집[Pseudoisidor]) 했

으나 이러한 것은 기독교회의 지반에서만 생겼다. 그리고 끝으로 - 고대 교회의

카리스마적 시기가 끝난 후부터는 - 교회의 직원이 교회의 조직을 특색짓는 합리

적이고 관료제적인 관직이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특히 교회법규의 성격에 영

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관직이라는 성격은 초기 중세에서 봉건제제도의 방해

를 받은 후에는 그레고리 법왕 시대 이래 다시 부활하고 독재적으로 되었다. 그것

은 고대와 연계한 결과였다. 그래서 서구의 교회는 그 밖의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훨씬 강력한 규준에서 합리적인 규정에 의한 법창조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합리적이고 계층적인 교회의 조직은 경제적으로 실행곤란한 따라서 부

담 많은 규정 - (다른 관련에서) - 고리 금지로써 관찰한다는 것과 같은 - 을 영

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폐지된 것으로서 다룰 수 있는 일반적 법령을 발할 수 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수많은 사례에서 신정적 법형성의 특색을 조금

밖에는 갖지 않았다. 즉 실질적 입법동기나 실질적 도덕목적과 형식적·법률적으로

중요한 규정의 요소와의 혼합 또 그 결과로서 생기는 정확성의 손실을 부인하였으

며, 이리하여 교회법은 전체 신법 중에서도 가장 많이 엄격하게 형식적인 법적 기

술을 얻으려고 하였다. 교회법에는 이슬람법이나 유태법에 존재했던 해답법학자

에 의한 형성이 결여되었으며 신약성서는 - 종말론적인 속세와의 단절이라는 결

과로부터 - 의례적 또는 법적 성격의 형식구속적 규범을 최소한으로만 포함하였

기 때문에 순수하게 합리적 규정을 위한 길이 완전히 자유롭게 열려져 있었던 것

이다. 법학자, 랍비, 교회법학자, 지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최초로 반혁명적 청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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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0 34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나 영혼의 지도자(direcreurs de lame), 옛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목사가 표현하였

다. 실제로 사교적인 카주이스틱은 적어도 가톨릭의 범위에서는 탈무드의 작품과

의 어떤 미미한 유사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전부가 로마법왕의 중앙

관청의 통제에 복종하고, 그것의 최고도로 탄력성 있는 명령에 의해서만 구속적인

도덕적·사회적 규범의 형성이 생겼다. 이로써 서구에서는 신법과 인법 사이에 다

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관계, 즉 교회법이 인법을 위해서 합리화에의 길을 가

리키는 안내자의 하나가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기독교회의 합리적인 「기구적」 성격의 결과로서 성립하였다. 실

질적 법의 범위에서는 교회의 단체개념이 고(故)사교유산계승소송(Spolienklage)

이나 Summariissimum과 같은 세목 형식 없는 계약의 승인, 특히 종의(終意)에

의한 신앙심 깊은 기부에 대한 이해에서의 유언의 자유의 지지와 함께 대단히 커

다란 의의를 가졌었다. 교회는 법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기구」였으며, 그로부터 법

인으로서의 공적 단체의 법률적 구성이 생겼다. 그에 관해서[170]는 이미 관찰하

였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 있는 실질적인 민법, 특히 행위법의 범위에서의 교회법

의 직접적으로 실질적인 의의는 여하튼 불안정하였다. 그러나 전체로서는 중세에

도 그 의의는 세속법에 비하여 적었다. 고대에 교회법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이

르기까지도 자유로운 이혼의 현실적인 법적 제거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

며, 종교적인 재판권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것으로서 남았다. 교회법이 전체 신정

적인 법과 같이 하는 전체 생활태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요구의 원칙적인 무

제약성은 서구에서는 법률적 기술 때문에 비교적 무해한 것으로서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형식적으로 극도의 완전성에 달한 세속법으로서, 또한 사적 연속에 의해

서 보편적인 세계법으로 된 세속법이 로마법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교회법에 대해

서 그 경쟁자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고대의 교회 자체는 로마의 임페리움과 로

마법을 차안적 시계의 지속을 위하여 결정적인 것으로서 다룬 것이다. 그러나 교

회법의 요구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시민계층의 경제적 이해 로마법왕과 동맹한 이

탈리아 도시들의 경제이해가 매우 정력적으로, 또한 결과적으로 유효하게 반작용

을 하였다. 도시의 신분이나 길드의 신분에서 - 독일에서는 전자만이 아니고 이탈

리아에서는 쌍방이 모두 - 종교적 재판에 관계하는 시민에 대한 예리한 형벌규정

을 볼 수 있으며, 그와 함께 또 「고리」 때문에 있는 종교적 형벌에 대한 길드의 규

정 위에서 전액상각에 관한 거의 아이러니칼하게 작용하는 규칙이 인정된다. 그와

동시에 합리저인 변호사 길드나 신분적 회합에서 법관계인, 특히 법실무가의 실질

적이며 이념적인 계급적 이해는 교회법에 반항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로마법에도

반항하였다. 세속적 재판에 대한 교회법의 영향은 개개의 제도를 제외하고는 주로

소송절차의 영역에 있었다. 형식주의적인 도한 변론에 근거한 세속적 소송의 증거

법과는 반대로 전체 신정적 재판의 단지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이며 절대적인진실

의 추구는 아주 일찍부터 특히 실질적인 직권주의를 발전시켰다. 신정적 재판은 진

실발견을 당사자의 자의에 맡길 수도 없었으며 또 행해진 불법의 속죄에도 맡길 수

가 없었다. 신정적 재판은 「직권상」(직권주의) 처치했으며, 진실의 사실을 가장 적

절하게 확정하는 보증을 나타내는 증거절차를 창조하였다. 이리하여 교회법은 서

구에서 「규문절차」를 발전시켰으나 그것은 후에 세속적인 형사재판이 차용하는 바

가 되었다. 실질적인 교회법을 둘러싼 싸움은 서구에서는 뒤에 정치적인 것으로 되

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아직 존속하고 있는 교회법의 요구는 그 실제적인 의미에서

결코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의 교회는 과실 없이 교직의 부존재와 집회에 의한 입법의 부존재의 결과

로부터 이슬람에 유사한 상태가 되었다. 술탄 정치의 아바쥐드의 칼리프 정치에서

분리된 동방의 술탄 또 Mutawakkil에 의한 술탄 셀림(Sultan Selim)에의 칼리

프 정치의 양도 후 유력하게 되고 또한 페르시아 왕의 그 시아파의 신하에 대한 불

안정한 정통성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터키의 사르탄에 비교하여 적어

도 비잔티움의 군주는 본질적으로는 보다 강력한 정교합일적 요구를 제기하였다.

후기 비잔티움의 지배자도 러시아나 그 밖의 정교합일주의의 지배자도 새로운 신

법을 정립할 수 있을 요구를 언제나 제기하지 않았다. 동양의 교회에서도 전체 기

관, 이슬람에서와 같은 법학교도 결여했던 결과로서 여기서는 교회법은 그 본래의

영역에 한정되고 완전히 고정되어 버려서 경제생활에 대한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

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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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영혼의 지도자(direcreurs de lame), 옛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목사가 표현하였

다. 실제로 사교적인 카주이스틱은 적어도 가톨릭의 범위에서는 탈무드의 작품과

의 어떤 미미한 유사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전부가 로마법왕의 중앙

관청의 통제에 복종하고, 그것의 최고도로 탄력성 있는 명령에 의해서만 구속적인

도덕적·사회적 규범의 형성이 생겼다. 이로써 서구에서는 신법과 인법 사이에 다

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관계, 즉 교회법이 인법을 위해서 합리화에의 길을 가

리키는 안내자의 하나가 된다는 관계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기독교회의 합리적인 「기구적」 성격의 결과로서 성립하였다. 실

질적 법의 범위에서는 교회의 단체개념이 고(故)사교유산계승소송(Spolienklage)

이나 Summariissimum과 같은 세목 형식 없는 계약의 승인, 특히 종의(終意)에

의한 신앙심 깊은 기부에 대한 이해에서의 유언의 자유의 지지와 함께 대단히 커

다란 의의를 가졌었다. 교회는 법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기구」였으며, 그로부터 법

인으로서의 공적 단체의 법률적 구성이 생겼다. 그에 관해서[170]는 이미 관찰하

였다. 우리는 여기서 흥미 있는 실질적인 민법, 특히 행위법의 범위에서의 교회법

의 직접적으로 실질적인 의의는 여하튼 불안정하였다. 그러나 전체로서는 중세에

도 그 의의는 세속법에 비하여 적었다. 고대에 교회법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이

르기까지도 자유로운 이혼의 현실적인 법적 제거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

며, 종교적인 재판권은 순수하게 자발적인 것으로서 남았다. 교회법이 전체 신정

적인 법과 같이 하는 전체 생활태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요구의 원칙적인 무

제약성은 서구에서는 법률적 기술 때문에 비교적 무해한 것으로서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형식적으로 극도의 완전성에 달한 세속법으로서, 또한 사적 연속에 의해

서 보편적인 세계법으로 된 세속법이 로마법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교회법에 대해

서 그 경쟁자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고대의 교회 자체는 로마의 임페리움과 로

마법을 차안적 시계의 지속을 위하여 결정적인 것으로서 다룬 것이다. 그러나 교

회법의 요구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시민계층의 경제적 이해 로마법왕과 동맹한 이

탈리아 도시들의 경제이해가 매우 정력적으로, 또한 결과적으로 유효하게 반작용

을 하였다. 도시의 신분이나 길드의 신분에서 - 독일에서는 전자만이 아니고 이탈

리아에서는 쌍방이 모두 - 종교적 재판에 관계하는 시민에 대한 예리한 형벌규정

을 볼 수 있으며, 그와 함께 또 「고리」 때문에 있는 종교적 형벌에 대한 길드의 규

정 위에서 전액상각에 관한 거의 아이러니칼하게 작용하는 규칙이 인정된다. 그와

동시에 합리저인 변호사 길드나 신분적 회합에서 법관계인, 특히 법실무가의 실질

적이며 이념적인 계급적 이해는 교회법에 반항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로마법에도

반항하였다. 세속적 재판에 대한 교회법의 영향은 개개의 제도를 제외하고는 주로

소송절차의 영역에 있었다. 형식주의적인 도한 변론에 근거한 세속적 소송의 증거

법과는 반대로 전체 신정적 재판의 단지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이며 절대적인진실

의 추구는 아주 일찍부터 특히 실질적인 직권주의를 발전시켰다. 신정적 재판은 진

실발견을 당사자의 자의에 맡길 수도 없었으며 또 행해진 불법의 속죄에도 맡길 수

가 없었다. 신정적 재판은 「직권상」(직권주의) 처치했으며, 진실의 사실을 가장 적

절하게 확정하는 보증을 나타내는 증거절차를 창조하였다. 이리하여 교회법은 서

구에서 「규문절차」를 발전시켰으나 그것은 후에 세속적인 형사재판이 차용하는 바

가 되었다. 실질적인 교회법을 둘러싼 싸움은 서구에서는 뒤에 정치적인 것으로 되

었다. 그리고 현대에도 아직 존속하고 있는 교회법의 요구는 그 실제적인 의미에서

결코 경제적으로 중요한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의 교회는 과실 없이 교직의 부존재와 집회에 의한 입법의 부존재의 결과

로부터 이슬람에 유사한 상태가 되었다. 술탄 정치의 아바쥐드의 칼리프 정치에서

분리된 동방의 술탄 또 Mutawakkil에 의한 술탄 셀림(Sultan Selim)에의 칼리

프 정치의 양도 후 유력하게 되고 또한 페르시아 왕의 그 시아파의 신하에 대한 불

안정한 정통성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터키의 사르탄에 비교하여 적어

도 비잔티움의 군주는 본질적으로는 보다 강력한 정교합일적 요구를 제기하였다.

후기 비잔티움의 지배자도 러시아나 그 밖의 정교합일주의의 지배자도 새로운 신

법을 정립할 수 있을 요구를 언제나 제기하지 않았다. 동양의 교회에서도 전체 기

관, 이슬람에서와 같은 법학교도 결여했던 결과로서 여기서는 교회법은 그 본래의

영역에 한정되고 완전히 고정되어 버려서 경제생활에 대한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

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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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2 34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6장 법의 형식적 성격에의 영향에서의 임페리움과 가산적 군주의 권력, 법전편찬

제1절 임페리움

고대의 재판집회민의 재판의 형식주의와 비합리주의에 간섭한 권위적 권력은 군

주, 정무관 또는 관료의 임페리움(벌령권, 직권)이다. 군주의 개인적인 종속, 그의

직무적 종속자 특히 그의 군대를 위해서 창조한 특별법 - 그리고 그것의 법적으

로 유효한 나머지는 현대에도 아직 남아있다 - 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는 전혀 하

지 않는다. 이러한 법창조는 과거에 가장 중요한 특별법형성, 즉 피호민법(被護民

法, Klientelrecht), 가인법(家人法), 렌법을 결과했으나 그러한 특별법의 형성은

전부 고대에도 중세에도 보통법이나 정규의 재판권과 떨어져 여러 가지 로 복잡한

양식으로 그것들과 자신을 나누는 경계를 가리켰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그

정치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형식적 구조를 그 자체로서 가지는 것은 아니

었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적 성격에 따라서 이러한 특별법은 다음과 같이 규제된

다. 예컨대 고대의 피호민법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법과 혼합하고 다른 한 편으로

는 관습법과 혼합하는 것이 있으며, 또 중세의 가인법이나 렌법과 같이 신분적 성

격을 가지는 것이 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현대의 관리법이나 군사법과 같이

일부는 행정법이나 국가법의 특수 규범이고 일부는 단순한 실질적인 절차적인 특

별심에 속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임페리움이 보통법 그것에

보통법의 변경에 또한 보통법과 함께 또는 교체하고 또[172]는 대항하여 일반적으

로 타당하게 된 법의 성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며, 또 일반적으로 이

러한 상태가 법의 형식적 구조에 주는 영향이 긴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만이

일반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즉 이러한 종류의 특별법의 발전의 정도는 여하튼 임

페리움과 임페리움이 그의 권력의 담당자로서 예기하지 않으면 안 될 계층과의 상

호의 힘 관계를 보기 위한 일종의 규준이라는 것을 말이다. 영국의 왕권은 렌법을

독일에서처럼 특별법으로서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통일적인 「국법」, 즉

코먼로에 흡수시키는 것을 달성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물론 총체적인 토지법, 가족

법, 상속법은 강력하게 봉건적으로 각인되었다. 로마의 국법은 피호민을 개개의 개

별적인 규정에서 본질적으로는 저주하여 쫓아버리는 형식으로 주목하였으나 여하

튼 이 로마 귀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중대한 제도는 시민법에 의해서 규제되는

영역에는 고의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중세의 이탈리아 조례는 영국법처럼 통일적인

국법을 창조하였다. 중세의 유럽 대륙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것은 절대주의적인 제

후국가에 의해서 처음으로 기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는 근대의 국가 기구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히 흡수된 특별법의 실질적 요소의 보호를 고려하였다.

군주·정무관 또는 관료가 보통법을 창조하고 간섭하는 자격과 사실적 권력을

어디에서 취득하고, 또 이러한 군력이 어떻게 해서 개개의 지리적인 객관적인 법영

역에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의 간섭의 계기에 관한 의론과 같이 지배의 형식을

논의할 때까지 유보된다. 사실상 그러한 권력이 최고도로 다양한데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났다. 전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군주의 벌령권의 첫 번째 창조는 합리적

형법인 것이 보통이다. 군사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질서」에의 이해가 바로 이러한

영역의 규제를 압박하였다. 종교적인 린치재판에 관하여 군주의 직권은 특별 「형사

소송」의 두 번째의 주요 기원이었다. 아주 종종 사제자의 직접적인 영향이 이러한

발전에 관여하였다. 예컨대 기독교 국가에서처럼 형수와 결투의 근절에의 관심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공후(Knjäs)는 옛 시대에는 단지 중재재판관의 기능만을 수행

하였으나 기독교화 된 후에는 곧 사교의 영향 아래 카주이스티슈한 형법을 창조하

였다. 「형벌」(Prodascha)의 개념은 전문용어적으로는 그 때에 처음으로 나타났

던 것이다. 서구에서처럼 이슬람에서도 또 확실히 인도에서도 사교자 계층의 합리

적인 계층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전체 고대 법규의 상세한 인명금(人命金)과 속죄

금의 가격은 언제나 결정적으로 군주의 간섭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것은 수긍될 것

같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속죄조건이 발전한 후에는 원시적으로는 - 빈

딩(Binding)이 독일법에 대해서 지적했듯이 - 살인이나 같은 형량의 혈수를 환기

하는 상해에 관한 주요 속죄규정과 그 밖의 모든 침해에 대해서 무차별하게 적용

되는 훨씬 작은 속죄규정과의 병립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인이 행위에 착수

하기 전에, 또 법률에 호소하기 전에 그것이 「보람이 있나」 여부를 숙고하지 아니치

못할 것과 전혀 생각할 수 있는 한의 침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평가는 오히려 군

주의 영향 아래 성립하였다. 범죄와 형벌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평가가 뚜렷하게 눈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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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2 34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6장 법의 형식적 성격에의 영향에서의 임페리움과 가산적 군주의 권력, 법전편찬

제1절 임페리움

고대의 재판집회민의 재판의 형식주의와 비합리주의에 간섭한 권위적 권력은 군

주, 정무관 또는 관료의 임페리움(벌령권, 직권)이다. 군주의 개인적인 종속, 그의

직무적 종속자 특히 그의 군대를 위해서 창조한 특별법 - 그리고 그것의 법적으

로 유효한 나머지는 현대에도 아직 남아있다 - 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는 전혀 하

지 않는다. 이러한 법창조는 과거에 가장 중요한 특별법형성, 즉 피호민법(被護民

法, Klientelrecht), 가인법(家人法), 렌법을 결과했으나 그러한 특별법의 형성은

전부 고대에도 중세에도 보통법이나 정규의 재판권과 떨어져 여러 가지 로 복잡한

양식으로 그것들과 자신을 나누는 경계를 가리켰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그

정치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형식적 구조를 그 자체로서 가지는 것은 아니

었기 때문이다. 법의 보편적 성격에 따라서 이러한 특별법은 다음과 같이 규제된

다. 예컨대 고대의 피호민법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법과 혼합하고 다른 한 편으로

는 관습법과 혼합하는 것이 있으며, 또 중세의 가인법이나 렌법과 같이 신분적 성

격을 가지는 것이 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현대의 관리법이나 군사법과 같이

일부는 행정법이나 국가법의 특수 규범이고 일부는 단순한 실질적인 절차적인 특

별심에 속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임페리움이 보통법 그것에

보통법의 변경에 또한 보통법과 함께 또는 교체하고 또[172]는 대항하여 일반적으

로 타당하게 된 법의 성립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며, 또 일반적으로 이

러한 상태가 법의 형식적 구조에 주는 영향이 긴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만이

일반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즉 이러한 종류의 특별법의 발전의 정도는 여하튼 임

페리움과 임페리움이 그의 권력의 담당자로서 예기하지 않으면 안 될 계층과의 상

호의 힘 관계를 보기 위한 일종의 규준이라는 것을 말이다. 영국의 왕권은 렌법을

독일에서처럼 특별법으로서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통일적인 「국법」, 즉

코먼로에 흡수시키는 것을 달성하였다. 그것에 대하여 물론 총체적인 토지법, 가족

법, 상속법은 강력하게 봉건적으로 각인되었다. 로마의 국법은 피호민을 개개의 개

별적인 규정에서 본질적으로는 저주하여 쫓아버리는 형식으로 주목하였으나 여하

튼 이 로마 귀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중대한 제도는 시민법에 의해서 규제되는

영역에는 고의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중세의 이탈리아 조례는 영국법처럼 통일적인

국법을 창조하였다. 중세의 유럽 대륙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것은 절대주의적인 제

후국가에 의해서 처음으로 기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는 근대의 국가 기구에

의해서 비로소 완전히 흡수된 특별법의 실질적 요소의 보호를 고려하였다.

군주·정무관 또는 관료가 보통법을 창조하고 간섭하는 자격과 사실적 권력을

어디에서 취득하고, 또 이러한 군력이 어떻게 해서 개개의 지리적인 객관적인 법영

역에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의 간섭의 계기에 관한 의론과 같이 지배의 형식을

논의할 때까지 유보된다. 사실상 그러한 권력이 최고도로 다양한데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났다. 전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군주의 벌령권의 첫 번째 창조는 합리적

형법인 것이 보통이다. 군사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질서」에의 이해가 바로 이러한

영역의 규제를 압박하였다. 종교적인 린치재판에 관하여 군주의 직권은 특별 「형사

소송」의 두 번째의 주요 기원이었다. 아주 종종 사제자의 직접적인 영향이 이러한

발전에 관여하였다. 예컨대 기독교 국가에서처럼 형수와 결투의 근절에의 관심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공후(Knjäs)는 옛 시대에는 단지 중재재판관의 기능만을 수행

하였으나 기독교화 된 후에는 곧 사교의 영향 아래 카주이스티슈한 형법을 창조하

였다. 「형벌」(Prodascha)의 개념은 전문용어적으로는 그 때에 처음으로 나타났

던 것이다. 서구에서처럼 이슬람에서도 또 확실히 인도에서도 사교자 계층의 합리

적인 계층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전체 고대 법규의 상세한 인명금(人命金)과 속죄

금의 가격은 언제나 결정적으로 군주의 간섭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것은 수긍될 것

같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속죄조건이 발전한 후에는 원시적으로는 - 빈

딩(Binding)이 독일법에 대해서 지적했듯이 - 살인이나 같은 형량의 혈수를 환기

하는 상해에 관한 주요 속죄규정과 그 밖의 모든 침해에 대해서 무차별하게 적용

되는 훨씬 작은 속죄규정과의 병립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인이 행위에 착수

하기 전에, 또 법률에 호소하기 전에 그것이 「보람이 있나」 여부를 숙고하지 아니치

못할 것과 전혀 생각할 수 있는 한의 침해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평가는 오히려 군

주의 영향 아래 성립하였다. 범죄와 형벌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평가가 뚜렷하게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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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4 34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에 뜨이는 것은 렌 시대의 농민층에도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속죄의 확정적인 양

정이라는 형식주의는 군주의 자의적인 거부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어디서나 이처

럼 엄격한 형식주의는 재판의 가장적인 발전에 따라 보다 탄력성 있는 마지막에는

종종 완전히 자의적이기도 한 과형을 행하는 재판에 자리를 양도한다.

「민」법의 영역은 군주의 벌령권에 의해서 형식적 질서의 보증과 안정성의 보증

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찰되는 형사재판과 같이는 영향될 수 없었으나 어디에서도

훨씬 후기에 속하는 형식에서도 결과에서도 아주 다양한 임페리움의 간섭을 가리

키고 있다. 보통법에 대립하는 군주의 법이나 정무관의 법은 부분적으로는 전적

으로 명백하게 다음에 예시하듯이, 특별한 법원(法源)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즉 로

마의 법무관의 고시의 「명예법」이나 영국 국왕의 「권리영장」그리고 또한 영국의 대

법관의 「형평법」이다. 사법행정에 임명된 관료의 재판 벌령권은 이러한 법을 창조

한 것인데, 법관계인의 요구에 관한 법실무가의 의향, 특히 자문관(로마)이나 변호

사(영국) 따라서 법명망가 계층의 의향에 근거하는 것이며, 그 힘에 의해서 재판관

을 결정적으로 구속하도록 훈령하거나(법무관), 또는 당사자를 구속하는 명령(금령

[injunction])을 준다든지 - 예컨대 영국에서는 코먼로 재판소와의 쟁의에서 금령

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대법관(프랜시스 베이컨)에게 일반적으로 귀속시켰다 - 또

는 소송을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 관료 자신의 법정 또는 특별한 법정에 가져가

게 했다(영국에서는 국왕재판소에로 나중에는 형평재판소로 가져가게 하였다). 이

로써 그들은 결과적으로 유효한 보통법(jus civile[코먼로])을 광범위하게 무효로

만드는 새로운 법률상의 수단을 창조하였다. 그때에 이러한 후기의 직권적인 실질

적 법의 혁신에 대해서 공통된 것은 이들이며 주로 합리적·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계층, 즉 부르주아 계층에서 나오는 소송의 보다 합리적인 형성에의 요구에 결부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예전의 금지소송(Interdiktionsprozess)과 사실소권은 로

마의 법무관이 아에부티아법[174](lex Aebutia) 이전에 이미 소송에서의 지배적 지

위, 즉 배심원에 대한 교시권을 소유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나 고시의 실

질적인 법적 내용을 잠깐 본다면 그것은 증대하는 거래의 강렬성에 의한 시민층의

거래요구가 고시의 규칙에서의 형식적 절차를 창조하였으며, 그것이 또 일정한 본

래 주술적으로 제약된 형식주의의 제거에의 요구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을 가리

킨다. 국왕재판소의 주요한 색인력(索引力)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로마에서처

럼) 언어형식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던 것이며, 또 (영국에서는) 소환의 형식주의(국

왕에 의한 벌칙부 소환영장으로부터의)의 해방이었다. (서구에서 매우 보급된) 선

서에서의 당사자의 심문의 승인을 형성하였으며, 또한 영국에서는 시민에게 참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증거방법, 특히 결투를 배제하고, 배심 그리고는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는 기록의 증거력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국왕재판소의 주요한

매력으로 되었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이후 처음으로 실질적 법의 입법이 형평법의

기초에서 생겼다. 루이 4세나 헨리 2세나 그의 후계자 (특히 에드워드 3세)는 그

때문에 특히 (상대적인) 합리적 증거절차를 창조하였으며, 또 일반적으로 재판집회

민의 또 주술적인 형식주의의 잔재를 제거하였다. 영국의 대법관의 「형평법」은 그

영역으로부터 국왕재판소의 소송의 절차적으로 커다란 업적인 배심을 새로운 법

수단의 범위에서 다시 제거하였다. 따라서 영국법에서 처럼 미국법에서도 현대에

도 아직 존재하는 「코먼로」와 「형평법」간의 법이원론의 형식적 구별은 - 많은 경우

에 원고로 하여금 양자의 어느 것을 선택시키는 법명령을 인정한다 - 전자에는 배

심을 협력시키고 후자에는 협력시키지 않는 점에 있다. 그러나 관리법의 기술적 방

법은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경험적이며 완전한 형식주의적인 성격을 가

졌었고 (특히 종종 프랑스의 칙령에서의 의제의 사용에서 인정되는) 법적 실무에서

직접 자라난 전체 법의 성격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에 법의 기술

적 성격도 변화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형평법」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듯이, 실질적

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법에 대한 요구가 간섭에의 자극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것의 형식주의는 종종 증대하게 되었다. 상술한 바는 임페리움이 재판과 경

합하는 경우에 관한 것이며 - 언어형식주의나 증거비합리성 아래처럼 - 법관계인

의 아주 강력한 의도가 임페리움에 응하지 않은 한 재판의 정당성은 임페리움에

대하여 불가가침이며, 또 그 때문에 임페리움은 재판의 보편적인 기초에 맞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이에 반하여 임페리움의 권력의 증대는 유효한 법의 변형이 「보통」법과 같은 의미

에서의 군주의 유효한 명령에 의해서 요구되는 경우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예컨대

프랑크 제국의 칙령의 일부(법에 부가된 훈령[capitula legibus addenda])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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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뜨이는 것은 렌 시대의 농민층에도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속죄의 확정적인 양

정이라는 형식주의는 군주의 자의적인 거부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어디서나 이처

럼 엄격한 형식주의는 재판의 가장적인 발전에 따라 보다 탄력성 있는 마지막에는

종종 완전히 자의적이기도 한 과형을 행하는 재판에 자리를 양도한다.

「민」법의 영역은 군주의 벌령권에 의해서 형식적 질서의 보증과 안정성의 보증

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찰되는 형사재판과 같이는 영향될 수 없었으나 어디에서도

훨씬 후기에 속하는 형식에서도 결과에서도 아주 다양한 임페리움의 간섭을 가리

키고 있다. 보통법에 대립하는 군주의 법이나 정무관의 법은 부분적으로는 전적

으로 명백하게 다음에 예시하듯이, 특별한 법원(法源)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즉 로

마의 법무관의 고시의 「명예법」이나 영국 국왕의 「권리영장」그리고 또한 영국의 대

법관의 「형평법」이다. 사법행정에 임명된 관료의 재판 벌령권은 이러한 법을 창조

한 것인데, 법관계인의 요구에 관한 법실무가의 의향, 특히 자문관(로마)이나 변호

사(영국) 따라서 법명망가 계층의 의향에 근거하는 것이며, 그 힘에 의해서 재판관

을 결정적으로 구속하도록 훈령하거나(법무관), 또는 당사자를 구속하는 명령(금령

[injunction])을 준다든지 - 예컨대 영국에서는 코먼로 재판소와의 쟁의에서 금령

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대법관(프랜시스 베이컨)에게 일반적으로 귀속시켰다 - 또

는 소송을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 관료 자신의 법정 또는 특별한 법정에 가져가

게 했다(영국에서는 국왕재판소에로 나중에는 형평재판소로 가져가게 하였다). 이

로써 그들은 결과적으로 유효한 보통법(jus civile[코먼로])을 광범위하게 무효로

만드는 새로운 법률상의 수단을 창조하였다. 그때에 이러한 후기의 직권적인 실질

적 법의 혁신에 대해서 공통된 것은 이들이며 주로 합리적·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계층, 즉 부르주아 계층에서 나오는 소송의 보다 합리적인 형성에의 요구에 결부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예전의 금지소송(Interdiktionsprozess)과 사실소권은 로

마의 법무관이 아에부티아법[174](lex Aebutia) 이전에 이미 소송에서의 지배적 지

위, 즉 배심원에 대한 교시권을 소유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나 고시의 실

질적인 법적 내용을 잠깐 본다면 그것은 증대하는 거래의 강렬성에 의한 시민층의

거래요구가 고시의 규칙에서의 형식적 절차를 창조하였으며, 그것이 또 일정한 본

래 주술적으로 제약된 형식주의의 제거에의 요구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을 가리

킨다. 국왕재판소의 주요한 색인력(索引力)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로마에서처

럼) 언어형식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던 것이며, 또 (영국에서는) 소환의 형식주의(국

왕에 의한 벌칙부 소환영장으로부터의)의 해방이었다. (서구에서 매우 보급된) 선

서에서의 당사자의 심문의 승인을 형성하였으며, 또한 영국에서는 시민에게 참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증거방법, 특히 결투를 배제하고, 배심 그리고는 다른 데서도

볼 수 있는 기록의 증거력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국왕재판소의 주요한

매력으로 되었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이후 처음으로 실질적 법의 입법이 형평법의

기초에서 생겼다. 루이 4세나 헨리 2세나 그의 후계자 (특히 에드워드 3세)는 그

때문에 특히 (상대적인) 합리적 증거절차를 창조하였으며, 또 일반적으로 재판집회

민의 또 주술적인 형식주의의 잔재를 제거하였다. 영국의 대법관의 「형평법」은 그

영역으로부터 국왕재판소의 소송의 절차적으로 커다란 업적인 배심을 새로운 법

수단의 범위에서 다시 제거하였다. 따라서 영국법에서 처럼 미국법에서도 현대에

도 아직 존재하는 「코먼로」와 「형평법」간의 법이원론의 형식적 구별은 - 많은 경우

에 원고로 하여금 양자의 어느 것을 선택시키는 법명령을 인정한다 - 전자에는 배

심을 협력시키고 후자에는 협력시키지 않는 점에 있다. 그러나 관리법의 기술적 방

법은 전체적으로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경험적이며 완전한 형식주의적인 성격을 가

졌었고 (특히 종종 프랑스의 칙령에서의 의제의 사용에서 인정되는) 법적 실무에서

직접 자라난 전체 법의 성격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에 법의 기술

적 성격도 변화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형평법」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듯이, 실질적

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법에 대한 요구가 간섭에의 자극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것의 형식주의는 종종 증대하게 되었다. 상술한 바는 임페리움이 재판과 경

합하는 경우에 관한 것이며 - 언어형식주의나 증거비합리성 아래처럼 - 법관계인

의 아주 강력한 의도가 임페리움에 응하지 않은 한 재판의 정당성은 임페리움에

대하여 불가가침이며, 또 그 때문에 임페리움은 재판의 보편적인 기초에 맞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이에 반하여 임페리움의 권력의 증대는 유효한 법의 변형이 「보통」법과 같은 의미

에서의 군주의 유효한 명령에 의해서 요구되는 경우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예컨대

프랑크 제국의 칙령의 일부(법에 부가된 훈령[capitula legibus addenda])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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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6 34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리아 도시들의 최고관청의 명령지령에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로마 원수제의 법령

으로서 유효한 후기의 법령(제정 초기에는 관료를 구속하는 지령만이 있었다)에 인

정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에 대부분은 명망가(원로원, 제국관료회합)의 동의에 의

해서 혹은 재판집회민의 대표자의 동의에 의한 것까지도 있으나 그렇게 해서 발포

된 법령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프랑크의 부족에서는 이러한 법령은 진정한

「법」을 창조할 수 없다는 의식이 오랫동안 살아있었으며, 그것은 군주의 입법에 감

지할 수 있는 커다란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러한 단께로부터 서구의 군사적 독재

자나 동양의 가산적 군주의 현행법에 대한 사실상 완전히 전능한 지배라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에는 수많은 과정을 볼 수 있다.

가산적 군주의 입법 역시 물론 전통을 아주 존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가

산적 군주의 입법이 재판집회민의 재판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할수록 더

욱 -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인데 - 그것은 일층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으

며, 또 더욱 많이 그것에 특유한 형식적 성질을 법에 각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

질은 뒤에 관찰하는 바와 같이, 가선적인 군주의 권력의 상이한 정치적인 존재조

건과 부합하여 두 종류의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

첫째는 특히 군주에 의해서 정당하게 얻는 권리로서의 군주 자신의 정치적 권

력이 어떠한 통례의 재산권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인정되는 경우에 군주가 이

러한 권력의 일부를 양도한다는 방법으로 입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

주가 이러한 권력의 일부를 양도한다는 방법은 군주가 타자, 즉 - 관료, 신민, 외

국상인 또는 개인, 단체 - 에게 군주의 보증 아래 권리(특권)를 수여하는 그리고

이 권리의 존재가 군주의 재판에 고려되는 것이 된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러한 것이 행해지는 한 「개관적」 법과 「권리」, 「규범」과 「청구권」은 - 사람이 상태

에 관하여 그 최종적인 귀결까지도 끝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 법질서가 순수한

특권의 묶음이라는 성격을 취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방법으로 하나로 돌아가

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연 반대의 형식으로서 행해진다. 즉 군주는 그 자신에게

나 그의 사법(司法)에 대해서 구속력 있는 청구권을 누구에게도 대여하지 아니한

다. 군주는 그 경우에 또 그의 완전히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서 명령을 준다. 이 경

우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객관적」법과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결여하고 있[176]다.

혹은 또 군주는 그의 관료에의 일반적인 지시를 포함하는 규칙을 발령한다. 그 규

칙의 내용은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즉 그 밖의 지령이 발령된다는 경

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규정된 방법에 따라서 피지배자의 사무와 그들의 분쟁

을 질서지우고 조정한다는 의미에서 파악된다. 그 경우에 개개의 법관계인이 그의

바람과 이해를 위해서 일정한 종류의 결정을 받는 기회는 결코 「권리」가 아니며 오

히려 단지 사실적인 법적으로 보증되지 않는 규칙의 결정의 「반사」에 불과하다. 이

것은 형식적·법률적 원칙으로서도 또한 일정한 소송의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아

버지가 그 아들의 바람을 이행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사실상 「국부적」

(國父的) 재판의 극한의 결과는 계쟁의 가족내적 해결의 정치적 단체에로의 전용

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로 그 귀결에까지 추구하여 고려한다면 재판

전체가 「행정」에 해소되어버린다.

제2절 가산적 군주의 법의 「신분적」구조와 「가장적」구조

이러한 두 형식 가운데 첫 번째 것을 가산적 군주의 재판에의 「신분적」 유형으로

하고 두 번째의 것을 「가장적」 유형으로 하여 구별하기로 한다. 신분적인 재판과 입

법 아래서는 법질서는 엄격하게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전연 구체적이며 이러한 의

미에서 비합리적이다. 「경험적」법해석만이 발전할 수 있었다. 전체 「행정」은 「특권」

(그 존립은 행정에 의해서 고정되어야 한다)에 관한 거래, 매매, 계약이며 또 그래

서 행정은 재판절차의 방법으로 행해지니까 형식적으로는 재판에서 구별되지 아니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영국의회의 또한 본래 행정관청인 동시에 사법관청이기

도 하였던 대평의회의 행정처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신분적」 가산제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하고 완전히 발전한 실례는 중세에서의 서구의 정치적 단체이다. 순수

한 「가장적」행정 아래서는 사정은 전혀 반대이며 일반적으로 「규칙」이 지배적인 경

우에 「법」이 언급된다면 그때의 규칙은 언제나 비형식적인 것이다. 사법행정은 실

질적인 진실수사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형식에 구속된 증거법을 쫓아버린다.

이로써 「가장적」 행정은 종종 고대의 주술적 절차와 충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법

과 신법의 관계는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원고는 왕왕 군

주의 판결에 의해서 신판에 상소하거나 또는 고대의 신성한 소송의 담당자인 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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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6 34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리아 도시들의 최고관청의 명령지령에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로마 원수제의 법령

으로서 유효한 후기의 법령(제정 초기에는 관료를 구속하는 지령만이 있었다)에 인

정되는 것이다. 물론 그때에 대부분은 명망가(원로원, 제국관료회합)의 동의에 의

해서 혹은 재판집회민의 대표자의 동의에 의한 것까지도 있으나 그렇게 해서 발포

된 법령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프랑크의 부족에서는 이러한 법령은 진정한

「법」을 창조할 수 없다는 의식이 오랫동안 살아있었으며, 그것은 군주의 입법에 감

지할 수 있는 커다란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러한 단께로부터 서구의 군사적 독재

자나 동양의 가산적 군주의 현행법에 대한 사실상 완전히 전능한 지배라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에는 수많은 과정을 볼 수 있다.

가산적 군주의 입법 역시 물론 전통을 아주 존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가

산적 군주의 입법이 재판집회민의 재판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할수록 더

욱 -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인데 - 그것은 일층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으

며, 또 더욱 많이 그것에 특유한 형식적 성질을 법에 각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

질은 뒤에 관찰하는 바와 같이, 가선적인 군주의 권력의 상이한 정치적인 존재조

건과 부합하여 두 종류의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

첫째는 특히 군주에 의해서 정당하게 얻는 권리로서의 군주 자신의 정치적 권

력이 어떠한 통례의 재산권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인정되는 경우에 군주가 이

러한 권력의 일부를 양도한다는 방법으로 입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

주가 이러한 권력의 일부를 양도한다는 방법은 군주가 타자, 즉 - 관료, 신민, 외

국상인 또는 개인, 단체 - 에게 군주의 보증 아래 권리(특권)를 수여하는 그리고

이 권리의 존재가 군주의 재판에 고려되는 것이 된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러한 것이 행해지는 한 「개관적」 법과 「권리」, 「규범」과 「청구권」은 - 사람이 상태

에 관하여 그 최종적인 귀결까지도 끝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 법질서가 순수한

특권의 묶음이라는 성격을 취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방법으로 하나로 돌아가

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연 반대의 형식으로서 행해진다. 즉 군주는 그 자신에게

나 그의 사법(司法)에 대해서 구속력 있는 청구권을 누구에게도 대여하지 아니한

다. 군주는 그 경우에 또 그의 완전히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서 명령을 준다. 이 경

우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객관적」법과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결여하고 있[176]다.

혹은 또 군주는 그의 관료에의 일반적인 지시를 포함하는 규칙을 발령한다. 그 규

칙의 내용은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즉 그 밖의 지령이 발령된다는 경

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규정된 방법에 따라서 피지배자의 사무와 그들의 분쟁

을 질서지우고 조정한다는 의미에서 파악된다. 그 경우에 개개의 법관계인이 그의

바람과 이해를 위해서 일정한 종류의 결정을 받는 기회는 결코 「권리」가 아니며 오

히려 단지 사실적인 법적으로 보증되지 않는 규칙의 결정의 「반사」에 불과하다. 이

것은 형식적·법률적 원칙으로서도 또한 일정한 소송의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아

버지가 그 아들의 바람을 이행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사실상 「국부적」

(國父的) 재판의 극한의 결과는 계쟁의 가족내적 해결의 정치적 단체에로의 전용

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상태로 그 귀결에까지 추구하여 고려한다면 재판

전체가 「행정」에 해소되어버린다.

제2절 가산적 군주의 법의 「신분적」구조와 「가장적」구조

이러한 두 형식 가운데 첫 번째 것을 가산적 군주의 재판에의 「신분적」 유형으로

하고 두 번째의 것을 「가장적」 유형으로 하여 구별하기로 한다. 신분적인 재판과 입

법 아래서는 법질서는 엄격하게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전연 구체적이며 이러한 의

미에서 비합리적이다. 「경험적」법해석만이 발전할 수 있었다. 전체 「행정」은 「특권」

(그 존립은 행정에 의해서 고정되어야 한다)에 관한 거래, 매매, 계약이며 또 그래

서 행정은 재판절차의 방법으로 행해지니까 형식적으로는 재판에서 구별되지 아니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영국의회의 또한 본래 행정관청인 동시에 사법관청이기

도 하였던 대평의회의 행정처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신분적」 가산제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하고 완전히 발전한 실례는 중세에서의 서구의 정치적 단체이다. 순수

한 「가장적」행정 아래서는 사정은 전혀 반대이며 일반적으로 「규칙」이 지배적인 경

우에 「법」이 언급된다면 그때의 규칙은 언제나 비형식적인 것이다. 사법행정은 실

질적인 진실수사를 추구하는 것이며 따라서 형식에 구속된 증거법을 쫓아버린다.

이로써 「가장적」 행정은 종종 고대의 주술적 절차와 충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법

과 신법의 관계는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원고는 왕왕 군

주의 판결에 의해서 신판에 상소하거나 또는 고대의 신성한 소송의 담당자인 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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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48 34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呪物) 사제자나 Oghangas의 황홀한 판결환각에 상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

른 한 편 엄격하게 가장적인 군주의 재판은 이해갈등의 객관적으로 「정당한」그리

고 「형평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중재의 결과를 달성하려는 지향 때문에 권리의 형

식적 보증이나 엄격한 「변론주의」를 배제하였다. 그때 가장적 재판은 일정한 원칙

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성을 사실상 가질 수 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그

것은 법률적 사고방법의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

치적 내용, 복지공리적 내용,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는 사회질서의 실질적 원칙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재판과 행정이 합일시켜지나 그

러나 전체 행정이 재판의 형식을 취득한다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전체 재판이 행

정의 특질을 취득한다는 의미에서 합일시켜진다. 군주의 행정관료는 동시에 재판

관이다. 군주 자신은 「칙재재판소」란 이름으로서 수의로 재판에 간섭하고, 자유로

운 평가에 따라서, 또한 형평의 합목적성의 또는 정치적인 관점에 따라서 결정하

고 법적 보증을 광범위하게 미치는 자유의 은총으로서 개별적인 경우에서의 특권

으로서 다루고, 또 법적 보증의 조건과 형식을 규정하여 자유로운 직권적 진실수

사(직권주의)를 위하여 소송의 비합리적인 형식과 증거방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러한 합리적 재판의 이상상은 솔로몬 판결의 「카디 재판」이며, 카디 재판을 종교전

설상의 영웅과 대표자로서의 산초 판사(Sancho Pansa)가 행사하였다. 전체 가산

적 군주의 재판은 그 자체 안에 이러한 길을 걸어갈 경향을 가졌었다. 영국 국왕

의 「영장」은 형식적으로는 국왕의 자유로운 은총에의 소원에 의해서 얻어진다. 「사

실소권」은 로마의 정무관 자체가 얼마나 현저하게 자유로운 소송제기와 재판거부

기한 소권(actiones temporales)에 관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는 것을 예감시

킨다. 근대 영국의 관직재판도 역시 「형평법」으로서 나타났다. 프랑스의 루이 9세

의 개혁은 전적으로 가장적인 형식을 나타내었다. 동양의 재판은 인도의 재판처럼

신정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가장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재판

은 재판과 행정의 한계의 가장적 혼합의 전형이다. 황제의 명령은 절반은 교훈적

이며 절반은 명령적인 내용이며, 일반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간섭하였다. 판결발

견은 그것이 주술적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닌 한, 실질적인 규준에 정해지는 것으

로 형식적인규준에 정해지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형식적인 또는 경제적인 「기대」

에 의해서 측정한다면 강도로 비합리적이며 구체적인 「형평」재판이다. 재판과 법발

견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임페리움의 간섭은 가장 다양한 「문화단계」에서 볼 수 있

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조건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으

로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장의 권력이 주

술적 사제층과의 결합[178]으로 또는 전투의 중요성에 의해서 또는 궁극적으로는

상업독점화에 의해서 발전되는 곳에서는 고대의 형식주의적이며 주술적인 소송이

나 전통의 배타적 지배는 종종 거의 완전히 소멸시켜지는 것이 아니고, 한편으로는

군주의 명의로써 하는 공적 소환에 의한 재판절차(피소환자의 「선서」에 의한다), 증

거로써 하는 합리적 증거수단에 의한 집행,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에만(아샨티족)

의하거나 또는 군주와 공동체(남기니아)의 갈채에 의하는 법의 정립은 신판에 가

름하여 성립하였다. 그러나 군주, 수장, 또는 그의 재판관은 전연 자유로운 자의

와 형평에 따라서 결정하였으며, 규칙에의 어떠한 형식적 구속에도 따른 일이 없었

다(이것은 예컨대 바수토, 바롤롱, 다호메이, 무아타 카젬베, 모로코에서처럼 - 상

이한 아주 다양한 문화발전의 영역에서 인정된다). 이 경우에는 지배자 자신의 「정

통성」이 종국적으로 근거하는 법, 특히 종교적으로 유효한 전통규범을 너무나 심

하게 굴곡할 때의 왕위를 상실할는지도 모른다는 위험만이 한계를 창조하였다. 이

러한 가장적 행정의 반형식적이며 실질적인 성격은 (세속적 또는 사제자적) 군주가

적극적인 종교적 이해에 봉사하는 경우, 그것도 특히 군주가 의례적 종교심의 요청

이 아니고 오히려 심정적 종교심의 요청을 선전하는 경우에 그 정점에 달하는 것

이 보통이다. 신정제의 반형식적인 경향은 모두 이러한 경우에는 그 밖의 유효한

의례적 따라서 형식적인 신성규범에서 분리하여 정당한 내부적 태도의 훈육만을

기도하는 가장적 복지사업의 무형식성과 결합하는 것이며, 그때 행정은 「사목직」

(Seelsorge)의 성격에 접근한다. 법과 도덕, 법적 강제와 아버지의 훈계 입법적 동

기와 목적과 법기술적 수단 간의 장벽 전체가 제거된다. 불교도의 아소카 왕의 고

시는 이러한 「가장적」 유형에 가장 많이 접근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산적 군주

의 재판에서는 신분적 요소와 가장적 요소의 상호 결합 그리고 그것과 재판집회민

의 형식적 소송의 결합이 지배적이다. 어느 요소가 우세한가는 - 뒤에 「지배」의 분

석과 관계하여 논하듯이 - 본질적으로는 전연 정치적 사정과 힘 관계에 의해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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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呪物) 사제자나 Oghangas의 황홀한 판결환각에 상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

른 한 편 엄격하게 가장적인 군주의 재판은 이해갈등의 객관적으로 「정당한」그리

고 「형평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중재의 결과를 달성하려는 지향 때문에 권리의 형

식적 보증이나 엄격한 「변론주의」를 배제하였다. 그때 가장적 재판은 일정한 원칙

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성을 사실상 가질 수 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그

것은 법률적 사고방법의 논리적 합리성이라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

치적 내용, 복지공리적 내용,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는 사회질서의 실질적 원칙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재판과 행정이 합일시켜지나 그

러나 전체 행정이 재판의 형식을 취득한다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전체 재판이 행

정의 특질을 취득한다는 의미에서 합일시켜진다. 군주의 행정관료는 동시에 재판

관이다. 군주 자신은 「칙재재판소」란 이름으로서 수의로 재판에 간섭하고, 자유로

운 평가에 따라서, 또한 형평의 합목적성의 또는 정치적인 관점에 따라서 결정하

고 법적 보증을 광범위하게 미치는 자유의 은총으로서 개별적인 경우에서의 특권

으로서 다루고, 또 법적 보증의 조건과 형식을 규정하여 자유로운 직권적 진실수

사(직권주의)를 위하여 소송의 비합리적인 형식과 증거방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러한 합리적 재판의 이상상은 솔로몬 판결의 「카디 재판」이며, 카디 재판을 종교전

설상의 영웅과 대표자로서의 산초 판사(Sancho Pansa)가 행사하였다. 전체 가산

적 군주의 재판은 그 자체 안에 이러한 길을 걸어갈 경향을 가졌었다. 영국 국왕

의 「영장」은 형식적으로는 국왕의 자유로운 은총에의 소원에 의해서 얻어진다. 「사

실소권」은 로마의 정무관 자체가 얼마나 현저하게 자유로운 소송제기와 재판거부

기한 소권(actiones temporales)에 관계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는 것을 예감시

킨다. 근대 영국의 관직재판도 역시 「형평법」으로서 나타났다. 프랑스의 루이 9세

의 개혁은 전적으로 가장적인 형식을 나타내었다. 동양의 재판은 인도의 재판처럼

신정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 한 본질적으로 가장적이다.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재판

은 재판과 행정의 한계의 가장적 혼합의 전형이다. 황제의 명령은 절반은 교훈적

이며 절반은 명령적인 내용이며, 일반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간섭하였다. 판결발

견은 그것이 주술적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닌 한, 실질적인 규준에 정해지는 것으

로 형식적인규준에 정해지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형식적인 또는 경제적인 「기대」

에 의해서 측정한다면 강도로 비합리적이며 구체적인 「형평」재판이다. 재판과 법발

견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임페리움의 간섭은 가장 다양한 「문화단계」에서 볼 수 있

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조건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으

로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장의 권력이 주

술적 사제층과의 결합[178]으로 또는 전투의 중요성에 의해서 또는 궁극적으로는

상업독점화에 의해서 발전되는 곳에서는 고대의 형식주의적이며 주술적인 소송이

나 전통의 배타적 지배는 종종 거의 완전히 소멸시켜지는 것이 아니고, 한편으로는

군주의 명의로써 하는 공적 소환에 의한 재판절차(피소환자의 「선서」에 의한다), 증

거로써 하는 합리적 증거수단에 의한 집행,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에만(아샨티족)

의하거나 또는 군주와 공동체(남기니아)의 갈채에 의하는 법의 정립은 신판에 가

름하여 성립하였다. 그러나 군주, 수장, 또는 그의 재판관은 전연 자유로운 자의

와 형평에 따라서 결정하였으며, 규칙에의 어떠한 형식적 구속에도 따른 일이 없었

다(이것은 예컨대 바수토, 바롤롱, 다호메이, 무아타 카젬베, 모로코에서처럼 - 상

이한 아주 다양한 문화발전의 영역에서 인정된다). 이 경우에는 지배자 자신의 「정

통성」이 종국적으로 근거하는 법, 특히 종교적으로 유효한 전통규범을 너무나 심

하게 굴곡할 때의 왕위를 상실할는지도 모른다는 위험만이 한계를 창조하였다. 이

러한 가장적 행정의 반형식적이며 실질적인 성격은 (세속적 또는 사제자적) 군주가

적극적인 종교적 이해에 봉사하는 경우, 그것도 특히 군주가 의례적 종교심의 요청

이 아니고 오히려 심정적 종교심의 요청을 선전하는 경우에 그 정점에 달하는 것

이 보통이다. 신정제의 반형식적인 경향은 모두 이러한 경우에는 그 밖의 유효한

의례적 따라서 형식적인 신성규범에서 분리하여 정당한 내부적 태도의 훈육만을

기도하는 가장적 복지사업의 무형식성과 결합하는 것이며, 그때 행정은 「사목직」

(Seelsorge)의 성격에 접근한다. 법과 도덕, 법적 강제와 아버지의 훈계 입법적 동

기와 목적과 법기술적 수단 간의 장벽 전체가 제거된다. 불교도의 아소카 왕의 고

시는 이러한 「가장적」 유형에 가장 많이 접근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산적 군주

의 재판에서는 신분적 요소와 가장적 요소의 상호 결합 그리고 그것과 재판집회민

의 형식적 소송의 결합이 지배적이다. 어느 요소가 우세한가는 - 뒤에 「지배」의 분

석과 관계하여 논하듯이 - 본질적으로는 전연 정치적 사정과 힘 관계에 의해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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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0 35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약된다. 서구에서는 이에 더하여 (본래 정치적으로 제약된) 제판집회민의 재판이라

는 전통이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국왕에게 판결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것은 재판의 「신분적」형식의 우위에 대해서 중요하였다.

서구에서 근대에 관찰되는 바와 같은 이러한 가산법의 전형적인 상태를 부정하

는 형식주의적 합리적 요소의 전진은 가산적 군주의 행정 자체의 내부적 요구에

유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분적 특권과 재판과 행정의 신분적 성격

과의 우위의 제거가 문제로 되는 경우에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에 대항하는 합리

성의 향상에의 관심, 즉 형식적인 법적 획일성과 객관적·형식적 규범의 지배력 향

상에의 관심은 특권자들에 대항하는 군주의 지배이해와 제휴하여 나아갔다. 「특

권」에 가름하여 「규칙」이 양자의 이해에 봉사한다. 반대로 (1) 일정한 규칙을 위한

(2) 피지배자의 재판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창조를 위한, 즉 「권리」의 보증을 위한

절대적 자유인 가장적 자의의 제한이 문제로 되는 한 사정은 다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양자는 그 자체가 동일하지는 않다. 즉 일정한 행정규정에 따라서 다

루는 계쟁중재는 아직 보증된 「권리」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

자 즉 객관적으로 고정된 규범의 존재뿐만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법」

의 존재도 적어도 사법의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규범에의 구속성을 보증

하는 유일한 안정적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증은 군주가 국고적이며 정치적인

권력이해를 의해서 사정에 따라서는 보호하거나 자기에게 예속시키려고 한 경제적

인 관련단체에 의해서 구하여졌다. 특히 부르주아의 이해에 의해서 구해졌다. 부르

주아의 이해는 비합리적인 행정의 자의나 또한 구체적인 특권에 의한 비합리적인

방해를 제거하는 법을 요구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며, 또 계약의 법적 구속성을 안

정적으로 보증하고, 이러한 모든 특색의 결과로서 계산가능하게 기능하는 법을 요

구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군주의 이행하 부르주아의 계층의 이해와의 동맹은 형

식적인 법적 합리화의 가장 중요한 촉진적 힘의 일부였다. 그러나 동맹이라는 것은

이러한 두 군력의 직접적인 「협력」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관료행정의 공리적 합리주의가 자립적 요인으로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부

르주와지 계층의 사경제적 합리주의와 광범위하게 제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리고 군주의 국고적 이해는 이미 성립한 자본주의적 이해에 대해서 그 당시 실제

로 의의가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서 자본주의적 이해에의 길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나 관료의 자의에 종속하지 않는 법의 보증은 물론 관료제 자

체의 고유한 발전경향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법의 보증은 무조건적으로 자본주

의적 이해의 방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다 예전의 본질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강

한 자본주의의 형식이 문제로 되는 한 사정은 오히려 반대이다. 이 형식에 대해서

는 특수적인 현대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와 대조하면서 후술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의 시원 자체라 할지라도 보증된 권리에의 전형적

인 관심을 아직 가리키는 것[180]은 아니며, 혹은 한정된 정도에서만 가리키는데

불과한 것이며 종종 반대의 것까지도 가리킨다. 왜냐하면 식민적·상업적 독점가뿐

만 아니라 중상주의적인 매뉴팩츄어 시대의 독점적 대기업가도 역시 일반적으로

군주의 특권에 의거하였다. 이 특권은 종종 유효한 보통법, 특히 쭌프트법을 깨트

려서 시민의 중간계급의 성난 저항을 도발하였으며, 따라서 자본가로 하여금 군주

에 대해서 불안정한 법적 지위를 통해서 하는 특권적 영리기회를 매수하도록 가르

쳤다. 정치적이며 중상적인 색채가 강한초기 중상주의의 자본주의는 등족이나 시

민적 상공계급에 대립하는 가장적 군주권력의 창조와 유지에 대해서도 이해관계

인이 되는 일이 있다. 바로 스튜워드 시대에 인정되고 현대에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시 증대되고 아직 존속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생활에 대한 임페리움의 간섭, 특히 군주의 임페리움의 간섭이 점점 강력하게 되

고 군주의 권력이 지속적으로 형성되면 될수록 점점 일반적으로 법 자체의 통일화

와 체계화, 즉 「법전편찬」이 촉진되었다. 군주는 「질서」를 원하며 또 법의 「통일성」

과 폐쇄성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행정의 전문가 요구와 동시에 관료의 개인적인

이해라는 이유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군주의 지배의 전체 영역에서의 그이 관료의

무차별적인 이용은 법의 통일성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고 관료에 대해서 출세의 기

회를 확대한다. 관료는 출신지의 법 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것에 의해서 출신지에

속박되는 일은 이제는 없어진다. 그리고 관료가 일반적으로 법의 「일목요연함」을

얻으려고 힘쓰는데 대하여 시민계층은 법발견의 「안정성」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80: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50 35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약된다. 서구에서는 이에 더하여 (본래 정치적으로 제약된) 제판집회민의 재판이라

는 전통이 존재하였으며, 그것은 국왕에게 판결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것은 재판의 「신분적」형식의 우위에 대해서 중요하였다.

서구에서 근대에 관찰되는 바와 같은 이러한 가산법의 전형적인 상태를 부정하

는 형식주의적 합리적 요소의 전진은 가산적 군주의 행정 자체의 내부적 요구에

유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분적 특권과 재판과 행정의 신분적 성격

과의 우위의 제거가 문제로 되는 경우에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에 대항하는 합리

성의 향상에의 관심, 즉 형식적인 법적 획일성과 객관적·형식적 규범의 지배력 향

상에의 관심은 특권자들에 대항하는 군주의 지배이해와 제휴하여 나아갔다. 「특

권」에 가름하여 「규칙」이 양자의 이해에 봉사한다. 반대로 (1) 일정한 규칙을 위한

(2) 피지배자의 재판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창조를 위한, 즉 「권리」의 보증을 위한

절대적 자유인 가장적 자의의 제한이 문제로 되는 한 사정은 다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양자는 그 자체가 동일하지는 않다. 즉 일정한 행정규정에 따라서 다

루는 계쟁중재는 아직 보증된 「권리」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

자 즉 객관적으로 고정된 규범의 존재뿐만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법」

의 존재도 적어도 사법의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규범에의 구속성을 보증

하는 유일한 안정적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증은 군주가 국고적이며 정치적인

권력이해를 의해서 사정에 따라서는 보호하거나 자기에게 예속시키려고 한 경제적

인 관련단체에 의해서 구하여졌다. 특히 부르주아의 이해에 의해서 구해졌다. 부르

주아의 이해는 비합리적인 행정의 자의나 또한 구체적인 특권에 의한 비합리적인

방해를 제거하는 법을 요구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며, 또 계약의 법적 구속성을 안

정적으로 보증하고, 이러한 모든 특색의 결과로서 계산가능하게 기능하는 법을 요

구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군주의 이행하 부르주아의 계층의 이해와의 동맹은 형

식적인 법적 합리화의 가장 중요한 촉진적 힘의 일부였다. 그러나 동맹이라는 것은

이러한 두 군력의 직접적인 「협력」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관료행정의 공리적 합리주의가 자립적 요인으로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부

르주와지 계층의 사경제적 합리주의와 광범위하게 제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리고 군주의 국고적 이해는 이미 성립한 자본주의적 이해에 대해서 그 당시 실제

로 의의가 있는 영역을 훨씬 넘어서 자본주의적 이해에의 길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나 관료의 자의에 종속하지 않는 법의 보증은 물론 관료제 자

체의 고유한 발전경향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법의 보증은 무조건적으로 자본주

의적 이해의 방향에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다 예전의 본질적으로 정치적 색채가 강

한 자본주의의 형식이 문제로 되는 한 사정은 오히려 반대이다. 이 형식에 대해서

는 특수적인 현대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와 대조하면서 후술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의 시원 자체라 할지라도 보증된 권리에의 전형적

인 관심을 아직 가리키는 것[180]은 아니며, 혹은 한정된 정도에서만 가리키는데

불과한 것이며 종종 반대의 것까지도 가리킨다. 왜냐하면 식민적·상업적 독점가뿐

만 아니라 중상주의적인 매뉴팩츄어 시대의 독점적 대기업가도 역시 일반적으로

군주의 특권에 의거하였다. 이 특권은 종종 유효한 보통법, 특히 쭌프트법을 깨트

려서 시민의 중간계급의 성난 저항을 도발하였으며, 따라서 자본가로 하여금 군주

에 대해서 불안정한 법적 지위를 통해서 하는 특권적 영리기회를 매수하도록 가르

쳤다. 정치적이며 중상적인 색채가 강한초기 중상주의의 자본주의는 등족이나 시

민적 상공계급에 대립하는 가장적 군주권력의 창조와 유지에 대해서도 이해관계

인이 되는 일이 있다. 바로 스튜워드 시대에 인정되고 현대에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시 증대되고 아직 존속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생활에 대한 임페리움의 간섭, 특히 군주의 임페리움의 간섭이 점점 강력하게 되

고 군주의 권력이 지속적으로 형성되면 될수록 점점 일반적으로 법 자체의 통일화

와 체계화, 즉 「법전편찬」이 촉진되었다. 군주는 「질서」를 원하며 또 법의 「통일성」

과 폐쇄성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행정의 전문가 요구와 동시에 관료의 개인적인

이해라는 이유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군주의 지배의 전체 영역에서의 그이 관료의

무차별적인 이용은 법의 통일성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고 관료에 대해서 출세의 기

회를 확대한다. 관료는 출신지의 법 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것에 의해서 출신지에

속박되는 일은 이제는 없어진다. 그리고 관료가 일반적으로 법의 「일목요연함」을

얻으려고 힘쓰는데 대하여 시민계층은 법발견의 「안정성」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181: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52 35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3절 법전편찬의 추진력

관료계층의 이해, 시민의 영리관심, 군주의 국고적 및 행정기술적 이해는 사실

상 법전편찬의 일반적인 담당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일한 담당자는 아니었다. 시

민계급 이외의 정치적 피지배계급도 법의 명확한 고정에 이해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 할 수 없이 또는 자진하여 그들에게 양보하는 지배

적 권력은 반드시 군주만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인 법전편찬은 보편적이고 자각적인 법적 생명의 새로운 방향의 결과일

수 있었으며, 예컨대 외부적·정치적 창조의 결과로서 또는 정치단체의 내부적·사

회적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신분적 또는 계급적 타협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성립

하였으며, 또 사정에 따라서는 양자의 결합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성립하였다. 법

전편찬은 예컨대 고대의 식민지의 위임법(leges datae)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토지에서의 단체의 계획적인 새로운 형성에 근거하거나 또는 이스라엘의 선서공동

체처럼 일정한 관계에서 통일적인 법에 종속하는 정치단체의 새로운 창립에 근거

하거나 또는 이른바 12표법에서 보듯이, 신분간의 타협 또는 계급간의 타협에 의

한 혁명의 종결에 근거하는 것이다. 체계적인 법의 기록은 사회투쟁 후에 오는 법

적 안정성에 대한 관심에서 착수한다. 그때에 있어서 기록의 관계자는 당연히 이

때까지 명확하게 고정된 보편적으로 친근할 수 있는 규범, 따라서 재판의 통제에

적합한 규범의 부족에 고심해온 계층인 것이 보통이다. 그 계층은 특히 귀족적인

또는 귀족에 지배되고 있던 명망가재판 또한 사제자의 재판에 대립하는 농민층이

나 시민층이다. 그것이 고대에서의 전형적인 상태였다. 체계적인 법의 기록은 이러

한 경우에는 포괄적으로 법의 새로운 규정을 포함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며, 따라

서 아주 규칙적으로 예언자나 예언자에 유사한 중개자(Asymneten)에 의해서 계

시나 구해진 신탁에 근거하는 위임법으로서 발포된다. 그때 한편으로는 확정될 이

해관계는 참가한 다양한 관계인에 대하여 상당히 명백하게 염두에 떠 있는 것이

며, 그리고 법적 중재의 가능한 방법은 토의와 선동에 의해서 상당히 명백하게 되

어 있으며 예언자나 재판관인 지배자의 선언이 곧 얻어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이 보통이다. 다른 한 편 관계인은 체계적인 법보다도 더 많이 형식적으로 또 명백

히 쟁점을 조정하는 법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법적 규범화는 신탁이나 바이

스튬 또는 자문법학자의 해답에도 다 같이 특징적이며 경구적인, 따라서 법격언적

인 간결성에서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실로 그것에 유사한 것을 12표법에서

볼 수 있다. - 따라서 하나의 행위(uno actu)로부터 12표법과 입법의 유래를 의심

하는 것은 부당하다 - 또 모세의 십계나 유태의 성약에도 볼 수 있다, 양자의 명

령과 금지의 복합이라는 특색 있는 형식은 그것이 진정한 법예언적인 또 재판관인

지배자적인 유래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양자는 종교적 명령과시민적 명령

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공통된 특색을 가진다. 즉 12표법은 아버지를 구타한 자식

이나 피호민에게 충실치 않았던 비호자에 대하여 저주의 말(「죽음에 바쳐지거라」

[sacer esto])을 내뱉고 있다. 이 두 경우에 시민의 법적 효과는 제외되고 있다. 가

(家)의 기율이나 가의 경건이 붕괴하게 되기 때문에 명령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 된

다. 유태의 법전편찬의 종교적 내용이 못의 십계에서 체계화되어 있는데 대해서,

로마의 법률의 종교적 내용은 개개의 규정에서 성립한다. 즉 신법은 전체로서 고

정되고 새로운 종교적인 계시는[182]제시되지 아니하였다. 전혀 다른 종적인 문제,

즉 「12」표법이 법예언자에 의해서 제정된 로마의 도시법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의 여부의 문제, 또 갈리아의 대화재에서 파멸당한 것으로 추정할 것인가의 여

부 문제는 모세의 법률의 두 개의 표보다도 훨씬 보다 역사적이다. 그러나 언어상

의 이유도 - 규정의 구두에 의한 전승에서는 전혀 중대하지 않다 - 즉물적인 이

유도 입법의 연대와 완결에 관한 전설을 무리하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2

표법은 법격언의 수집이며, 또한 법명망가의 판결의 결과의 수집이라는 의견은 그

자체 안에 내적 진실성을 가진다. 12표법은 상당히 추상적인 성격의 보편적이며 또

한 그 일부는 분명히 아주 의도적이며 목적자각적인 성격이며, 다른 부분은 신분

들의 이해 사이의 타협을 즉자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이 판결실무에서

유래한다는 의견은 적어도 있을 수 있는 것 같지 않으며, 판결의 수집자 예컨대 S.

Aelius Paetus Catus의 문헌적 업적이 도시라는 장소에서 합리적 이익투쟁이 침

투한 시대에서 이러한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밖의 재판관인 지배자의 업적과 유사하다는 것은 너무나 현저한 것이다.

어떤 「체계적」법전편찬은 재판관인 지배자가 법정립을 하는데 전형적인 상태로부

터, 또 그러한 법정립에 의해서 만족할 수 있는 요구들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물론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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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2 35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3절 법전편찬의 추진력

관료계층의 이해, 시민의 영리관심, 군주의 국고적 및 행정기술적 이해는 사실

상 법전편찬의 일반적인 담당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유일한 담당자는 아니었다. 시

민계급 이외의 정치적 피지배계급도 법의 명확한 고정에 이해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들의 그러한 요구를 받아 할 수 없이 또는 자진하여 그들에게 양보하는 지배

적 권력은 반드시 군주만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인 법전편찬은 보편적이고 자각적인 법적 생명의 새로운 방향의 결과일

수 있었으며, 예컨대 외부적·정치적 창조의 결과로서 또는 정치단체의 내부적·사

회적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신분적 또는 계급적 타협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성립

하였으며, 또 사정에 따라서는 양자의 결합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성립하였다. 법

전편찬은 예컨대 고대의 식민지의 위임법(leges datae)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토지에서의 단체의 계획적인 새로운 형성에 근거하거나 또는 이스라엘의 선서공동

체처럼 일정한 관계에서 통일적인 법에 종속하는 정치단체의 새로운 창립에 근거

하거나 또는 이른바 12표법에서 보듯이, 신분간의 타협 또는 계급간의 타협에 의

한 혁명의 종결에 근거하는 것이다. 체계적인 법의 기록은 사회투쟁 후에 오는 법

적 안정성에 대한 관심에서 착수한다. 그때에 있어서 기록의 관계자는 당연히 이

때까지 명확하게 고정된 보편적으로 친근할 수 있는 규범, 따라서 재판의 통제에

적합한 규범의 부족에 고심해온 계층인 것이 보통이다. 그 계층은 특히 귀족적인

또는 귀족에 지배되고 있던 명망가재판 또한 사제자의 재판에 대립하는 농민층이

나 시민층이다. 그것이 고대에서의 전형적인 상태였다. 체계적인 법의 기록은 이러

한 경우에는 포괄적으로 법의 새로운 규정을 포함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며, 따라

서 아주 규칙적으로 예언자나 예언자에 유사한 중개자(Asymneten)에 의해서 계

시나 구해진 신탁에 근거하는 위임법으로서 발포된다. 그때 한편으로는 확정될 이

해관계는 참가한 다양한 관계인에 대하여 상당히 명백하게 염두에 떠 있는 것이

며, 그리고 법적 중재의 가능한 방법은 토의와 선동에 의해서 상당히 명백하게 되

어 있으며 예언자나 재판관인 지배자의 선언이 곧 얻어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이 보통이다. 다른 한 편 관계인은 체계적인 법보다도 더 많이 형식적으로 또 명백

히 쟁점을 조정하는 법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법적 규범화는 신탁이나 바이

스튬 또는 자문법학자의 해답에도 다 같이 특징적이며 경구적인, 따라서 법격언적

인 간결성에서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실로 그것에 유사한 것을 12표법에서

볼 수 있다. - 따라서 하나의 행위(uno actu)로부터 12표법과 입법의 유래를 의심

하는 것은 부당하다 - 또 모세의 십계나 유태의 성약에도 볼 수 있다, 양자의 명

령과 금지의 복합이라는 특색 있는 형식은 그것이 진정한 법예언적인 또 재판관인

지배자적인 유래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양자는 종교적 명령과시민적 명령

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공통된 특색을 가진다. 즉 12표법은 아버지를 구타한 자식

이나 피호민에게 충실치 않았던 비호자에 대하여 저주의 말(「죽음에 바쳐지거라」

[sacer esto])을 내뱉고 있다. 이 두 경우에 시민의 법적 효과는 제외되고 있다. 가

(家)의 기율이나 가의 경건이 붕괴하게 되기 때문에 명령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 된

다. 유태의 법전편찬의 종교적 내용이 못의 십계에서 체계화되어 있는데 대해서,

로마의 법률의 종교적 내용은 개개의 규정에서 성립한다. 즉 신법은 전체로서 고

정되고 새로운 종교적인 계시는[182]제시되지 아니하였다. 전혀 다른 종적인 문제,

즉 「12」표법이 법예언자에 의해서 제정된 로마의 도시법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의 여부의 문제, 또 갈리아의 대화재에서 파멸당한 것으로 추정할 것인가의 여

부 문제는 모세의 법률의 두 개의 표보다도 훨씬 보다 역사적이다. 그러나 언어상

의 이유도 - 규정의 구두에 의한 전승에서는 전혀 중대하지 않다 - 즉물적인 이

유도 입법의 연대와 완결에 관한 전설을 무리하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2

표법은 법격언의 수집이며, 또한 법명망가의 판결의 결과의 수집이라는 의견은 그

자체 안에 내적 진실성을 가진다. 12표법은 상당히 추상적인 성격의 보편적이며 또

한 그 일부는 분명히 아주 의도적이며 목적자각적인 성격이며, 다른 부분은 신분

들의 이해 사이의 타협을 즉자적으로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이 판결실무에서

유래한다는 의견은 적어도 있을 수 있는 것 같지 않으며, 판결의 수집자 예컨대 S.

Aelius Paetus Catus의 문헌적 업적이 도시라는 장소에서 합리적 이익투쟁이 침

투한 시대에서 이러한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밖의 재판관인 지배자의 업적과 유사하다는 것은 너무나 현저한 것이다.

어떤 「체계적」법전편찬은 재판관인 지배자가 법정립을 하는데 전형적인 상태로부

터, 또 그러한 법정립에 의해서 만족할 수 있는 요구들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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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4 35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순수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법전편찬은 모세의

십계에서의 도덕에도 12표법이나 성약의 법적 명령에서의 거래생활에도 마찬가지

로 인정되지 아니한다. 체계와 법률적 「합리 성」은 - 일정한 범위에서 - 법적 실무

가의 노작에 의해서 비로소 가져오게 되었으며 특히 법학교육의 필요에 의해서 가

져오게 되었다. 군주의 관료의 노작에 의해서 다량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군주의

관료는 진정한 치계적인 법전편찬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연히 그들에 대해서

「전망할 수 있는」 체계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

의 법전편찬은 가장 포괄적인 재판관인 지배자의 또는 예언적인 제정보다도 체계

적 고려에 있어서 더욱 합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다.

법에서의 「체계화」는 군주의 법전편찬에 의한 이외의 방법으로서는 교훈적·문

헌적 작품에 의해서 그중에도 「법서」에 의해서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다. 법서는 그

경우 왕왕 재판 및 법률에 대해서 지배적인 것을 교회의 신망을 얻었던 것이다. 그

러나 양자의 경우에 체계적인 법적 기록은 처음에 일어난 의문점과 쟁점을 제거하

기 위한 기존의 법의 집성으로서만 성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수의 외부적으로는

「법전편찬」으로 인정되는 가산적 군주의 위임에서 창조된 관헌적 법률에나 규칙의

수집은 - 예컨대 중국의 관헌적 법령집이나 그것에 관한 것이 그러한데 - 기계적

인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구분의 일정한 「체계화」가 존재함에도 불구

하고 법전편찬적인 법의 제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밖의 법전편찬은 단지

기존의 법을 하나의 질서지어진 조직적인 형식으로 하려는데 불과하다. 이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살리카 법전이나 그와 거의 동종의 「인민법」은 재판집회민의 재판의

법적 실무의 편찬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가지는 예루살렘 왕국의 법전은 선례에서

확정된 상관습의 편찬이며, 7편 법전(Siete Partidas)이나 「로마인 법전」에 소급하

는 법전편찬은 로마법의 실용적인 살아있는 부분의 편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법전편찬은 어느 정도의 체계화와 이러한 의미에서 법적 소재의 합리화를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따라서 법전편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존의 법의 체계적

이며 내용적인 수정이라는 의미의 본래의 법전편찬ㄹ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나 마

찬가지이다. 양자는 예리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법전편찬에 의해서 창조된 「법적

안정성」에 관해서는 강도의 정치적 이해가 성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법전편

찬은 특히 정치적인 혁신 전체에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징기스칸에 의한 몽고

제국의 건설에도 이러한 경향(야사 법전[Yasa]의 집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새롭게

는 나폴레옹의 국가건설에도 많은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서구에 관해

서는 법전편찬의 시기는 표면상, 역사법칙에 반하여 바로 역사의 발단에 존재한다.

예컨대 로마의 토지상에 새로이 건설된 게르만 국가의 법전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

은 것이다. 종족적으로 혼합된 정치적 형상의 평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법의 확

립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전체 관계의 군사적 혁명은 실행의 형식적

급진주의를 용이하게 한다. 군주의 위세 요구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아래서)

와 함께 관직기구의 정확한 기능에의 이해에 있어서의 내부적·법적 안정성의 형성

은 후기 로마의 법령집, 최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법전편찬을 마련한 동기

였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마치 일종의 스페인의 7편 법전과 같은 중세에 있어서의

군주의 로마법의 편찬을 동기지웠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사적 경제의 관계

인이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하여 가장 오랜 상당히 완전히

전해진 더구나 이러한 종류의 것으로서는 현존하는 법전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함

무라비 법전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시킨다. 즉 재

산거래의 관계인의 비교적 강력한 계층이 존재했다는 것, 또 국왕은 그 자신의 정

치적·국고적 이해에서 재산거래의 법적 안정성을 지[184]지하려고 원했다는 것을

추론시킨다. 이러한 상태는 도시 왕권의 기초에 근거하고 있다. 남겨진 보다 초기

의 법규의 단편은 고대 도시에 전형적인 신분적 또는 계급적 대립이 것에 작용하였

다는 것 (물론 정치적 기구가 다름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생기지만)을 충분히 추측

케 한다. 함무라비 법전편찬에 관해서는 그것이 보다 예전의 문서를 통하여 음미

되는 한, 결코 진정한 새로운 법을 제정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법을 편찬

했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최초의 것이 아니었다는 확인된다. 가장제에 대

해서 항상 중요한 관심사였던 가족의 경건의무, 특히 자녀의 경건의무의 철저한 규

칙으로서의 명백히 나타나는 경제적이고 종교적인 관심보다 이상으로 여기서도 그

밖의 대부분의 군주의 법전편찬과 같이 제국 내부에서의 제국 그 자체의 통일에의

정치적 관심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 밖의 대부분의 군주의 법전편찬도 역시 주지

하듯이,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의 제거라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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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4 35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순수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법전편찬은 모세의

십계에서의 도덕에도 12표법이나 성약의 법적 명령에서의 거래생활에도 마찬가지

로 인정되지 아니한다. 체계와 법률적 「합리 성」은 - 일정한 범위에서 - 법적 실무

가의 노작에 의해서 비로소 가져오게 되었으며 특히 법학교육의 필요에 의해서 가

져오게 되었다. 군주의 관료의 노작에 의해서 다량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군주의

관료는 진정한 치계적인 법전편찬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연히 그들에 대해서

「전망할 수 있는」 체계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

의 법전편찬은 가장 포괄적인 재판관인 지배자의 또는 예언적인 제정보다도 체계

적 고려에 있어서 더욱 합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다.

법에서의 「체계화」는 군주의 법전편찬에 의한 이외의 방법으로서는 교훈적·문

헌적 작품에 의해서 그중에도 「법서」에 의해서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다. 법서는 그

경우 왕왕 재판 및 법률에 대해서 지배적인 것을 교회의 신망을 얻었던 것이다. 그

러나 양자의 경우에 체계적인 법적 기록은 처음에 일어난 의문점과 쟁점을 제거하

기 위한 기존의 법의 집성으로서만 성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수의 외부적으로는

「법전편찬」으로 인정되는 가산적 군주의 위임에서 창조된 관헌적 법률에나 규칙의

수집은 - 예컨대 중국의 관헌적 법령집이나 그것에 관한 것이 그러한데 - 기계적

인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구분의 일정한 「체계화」가 존재함에도 불구

하고 법전편찬적인 법의 제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밖의 법전편찬은 단지

기존의 법을 하나의 질서지어진 조직적인 형식으로 하려는데 불과하다. 이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살리카 법전이나 그와 거의 동종의 「인민법」은 재판집회민의 재판의

법적 실무의 편찬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가지는 예루살렘 왕국의 법전은 선례에서

확정된 상관습의 편찬이며, 7편 법전(Siete Partidas)이나 「로마인 법전」에 소급하

는 법전편찬은 로마법의 실용적인 살아있는 부분의 편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법전편찬은 어느 정도의 체계화와 이러한 의미에서 법적 소재의 합리화를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따라서 법전편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존의 법의 체계적

이며 내용적인 수정이라는 의미의 본래의 법전편찬ㄹ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나 마

찬가지이다. 양자는 예리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법전편찬에 의해서 창조된 「법적

안정성」에 관해서는 강도의 정치적 이해가 성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법전편

찬은 특히 정치적인 혁신 전체에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징기스칸에 의한 몽고

제국의 건설에도 이러한 경향(야사 법전[Yasa]의 집성)을 인정할 수 있으나 새롭게

는 나폴레옹의 국가건설에도 많은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서구에 관해

서는 법전편찬의 시기는 표면상, 역사법칙에 반하여 바로 역사의 발단에 존재한다.

예컨대 로마의 토지상에 새로이 건설된 게르만 국가의 법전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

은 것이다. 종족적으로 혼합된 정치적 형상의 평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법의 확

립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전체 관계의 군사적 혁명은 실행의 형식적

급진주의를 용이하게 한다. 군주의 위세 요구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아래서)

와 함께 관직기구의 정확한 기능에의 이해에 있어서의 내부적·법적 안정성의 형성

은 후기 로마의 법령집, 최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법전편찬을 마련한 동기

였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마치 일종의 스페인의 7편 법전과 같은 중세에 있어서의

군주의 로마법의 편찬을 동기지웠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사적 경제의 관계

인이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하여 가장 오랜 상당히 완전히

전해진 더구나 이러한 종류의 것으로서는 현존하는 법전 중에서도 유일무이한 함

무라비 법전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시킨다. 즉 재

산거래의 관계인의 비교적 강력한 계층이 존재했다는 것, 또 국왕은 그 자신의 정

치적·국고적 이해에서 재산거래의 법적 안정성을 지[184]지하려고 원했다는 것을

추론시킨다. 이러한 상태는 도시 왕권의 기초에 근거하고 있다. 남겨진 보다 초기

의 법규의 단편은 고대 도시에 전형적인 신분적 또는 계급적 대립이 것에 작용하였

다는 것 (물론 정치적 기구가 다름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생기지만)을 충분히 추측

케 한다. 함무라비 법전편찬에 관해서는 그것이 보다 예전의 문서를 통하여 음미

되는 한, 결코 진정한 새로운 법을 제정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법을 편찬

했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최초의 것이 아니었다는 확인된다. 가장제에 대

해서 항상 중요한 관심사였던 가족의 경건의무, 특히 자녀의 경건의무의 철저한 규

칙으로서의 명백히 나타나는 경제적이고 종교적인 관심보다 이상으로 여기서도 그

밖의 대부분의 군주의 법전편찬과 같이 제국 내부에서의 제국 그 자체의 통일에의

정치적 관심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그 밖의 대부분의 군주의 법전편찬도 역시 주지

하듯이,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의 제거라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이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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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6 35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러한 동기는 근대의 관료국가의 성립에 의해서 증대하는 군주의 법전편찬에 있어

서도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법전편찬은 아주 적은 부분 외에는 진정한 새

로운 창조가 아니다. 오히려 적어도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는 세계법으로서의

로마법이나 교회법의 효력이 그것의 전제였다. 「보충적」법으로서 로마법이 특별법

은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에 우위를 인정한데 대해서 교회법은 그 자신의 규정

에 관하여 강제적이고 보통적인 효력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교회법의 많은 성과는

로마법과 다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4절 로마법의 근대적 법논리의 발전

법사상과 유효한 실질적 법의 혁명에 관한 의의에 있어서 어떠한 군주의 법전편

찬도 로마법의 계수에 비교할만한 것은 없었다. 여기는 그 역사를 추구할 장소가

아니므로 약간의 소견을 말하는데 그쳐야 할 것이다. 그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그리고 후에는 법전편찬에 관여한 제후가 고려되는 한, 로마법의 계수라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전편찬에서 뚜렷하게 된 군주의 주권적 지위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다. 로마법의 계수의 배후에 경제적 이해가 존재하였는가의 여부, 또한

존재하였다면 어떠한 경제적 이해였었는가 하는 문제, 또 그것이 계수에 의해서

촉진될 것인가의 여부의 문제는 아직 조정되지 아니한 논쟁이며, 아마 결코 조정

될 수 없는 논쟁이다. 그리고 로마 정신의 담당자이며 가산적 군주의 소송의 담당

자였던 교양 있는, 즉 대학교육을 받은 법조계급의 전진이 무엇에 원인되었던가 하

는 문제도 같다고 고찰된다. 특히 중재계약에 의해서 재판소에 가름하여 법률적으

로 교육된 군주의 행정관료에 제소한 것이 따라서 「법률상의」 결정 대신에 「직권상

의」 결정을 채택하고 고대의 재판을 구축하는 자가 본질적으로 법관계인이었는가

의 여부의 문제(슈퇴첼[Stözel]), 또 그 결과 (특히 로젠탈[Rosenthal]이 근본적으

로 증명하려고 한 바와 같이) 재판소가 군주의 이니시아티브에 의해서 증가한 법률

가를 배심원으로서의 명망가에 가름하여 채용했는가의 여부에 관한 문제도 같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떤 것이던 간에 다음의 것만은 확정하고 있다. 즉 사료에 따

르면 로마법의 침입에 대하여 불신의 염으로써 대립하는 신분적 계층도 일반적으

로 배심원으로서의 “독토렌”(Doktoren)의 참가를 반박하지 아니한 것이 보통이며

단지 후자의 우세 및 외국인의 채용에 대해서 싸운다는 데 불과했으므로 법운영

의 몰주관적 필요가 여하튼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전문교육에 의해

서 얻어진 복잡한 사실을 법률상 명확한 문제로서 다루는 능력, 그리고 아주 일반

적으로 말한다면 소송절차의 분리화의 필요가 전문적 법률가가 진출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한 한에서 법실무가의 소송운영 이해는 시민과 같이

귀족의 사적 법관계인의 이해와 합치한다. 이에 반하여 로마법의 실질적 규정의 계

수에 대해서는 「가장 근대적인」, 따라서 시민적인 법관계인은 전연 관계하지 않았

다. 즉 중세의 상법이나 도시의 재산법의 제도가 그들의 요구에 훨씬 잘 적응했던

것이다. 로마법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성질만이 불가피하게 증대하는 법운영의 전

문화에 따라서 그들에게 도처에서 승리를 얻게 하였다. 다만 영국에서는 이미 고

유한 국민적 법학교육이 성립하여서 그것은 강력한 관계인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

었다. 이러한 형식적 성질은 서구의 가산적 군주의 재판이 다른 곳에서처럼 진정

한 가장적인 복지재판과 실질적인 형평재판의 길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결정하

였다. 법률가는 관료로서 형식주의적 교육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또

가산적 군주재판의 나아가는 길에 본질적인 방해를 하여 당시의 서구의 재판에 대

한 법률적으로 보아 형식적인 성격의 규준을 유지하였다. 이 규준은 다른 대부분

의 가산적 법치행정과 대비하여 서구의 재판에 특유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법과 로

마적 교육에 대한 존경은 대학에서 교육된 법률가의 합리주의의 완전한 창조인 든

대 초기의 군주의 법전편찬을 전부 지배하였다.

로마법의 계수는 새로운 종류의 법명망가의 계급, 즉 문필적인 법학교육에 근거

하여 대학의 독토르 학위기를 가지는 법[186]학자를 창조하였다 - 이 점에 로마법

의 권력지위의 사회학적인 기초가 있다. 법의 형식적 성질의 의의는 아주 중요하

게 되었다. 로마의 제정기에 있어 이미 로마법은 순수하게 문필적인 활동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독일이나 프랑스의 중세의 법명망가에 의한 「법서」의 창

조나 영국의 법률가의 유효한 방법의 강요의 창조 - 이러한 창조의 영향은 그 밖

의 점에서는 중요하였다 - 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법률가의 철

학적 교양 - 그것이 피상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 의 영향 아래 순수하게 논리

적인 요소의 의의가 법사상에서 현저하게 증대하였다. 그리고 또 서구에서는 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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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6 35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러한 동기는 근대의 관료국가의 성립에 의해서 증대하는 군주의 법전편찬에 있어

서도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법전편찬은 아주 적은 부분 외에는 진정한 새

로운 창조가 아니다. 오히려 적어도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는 세계법으로서의

로마법이나 교회법의 효력이 그것의 전제였다. 「보충적」법으로서 로마법이 특별법

은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에 우위를 인정한데 대해서 교회법은 그 자신의 규정

에 관하여 강제적이고 보통적인 효력을 요구하였다. 실제로 교회법의 많은 성과는

로마법과 다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4절 로마법의 근대적 법논리의 발전

법사상과 유효한 실질적 법의 혁명에 관한 의의에 있어서 어떠한 군주의 법전편

찬도 로마법의 계수에 비교할만한 것은 없었다. 여기는 그 역사를 추구할 장소가

아니므로 약간의 소견을 말하는데 그쳐야 할 것이다. 그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그리고 후에는 법전편찬에 관여한 제후가 고려되는 한, 로마법의 계수라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전편찬에서 뚜렷하게 된 군주의 주권적 지위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다. 로마법의 계수의 배후에 경제적 이해가 존재하였는가의 여부, 또한

존재하였다면 어떠한 경제적 이해였었는가 하는 문제, 또 그것이 계수에 의해서

촉진될 것인가의 여부의 문제는 아직 조정되지 아니한 논쟁이며, 아마 결코 조정

될 수 없는 논쟁이다. 그리고 로마 정신의 담당자이며 가산적 군주의 소송의 담당

자였던 교양 있는, 즉 대학교육을 받은 법조계급의 전진이 무엇에 원인되었던가 하

는 문제도 같다고 고찰된다. 특히 중재계약에 의해서 재판소에 가름하여 법률적으

로 교육된 군주의 행정관료에 제소한 것이 따라서 「법률상의」 결정 대신에 「직권상

의」 결정을 채택하고 고대의 재판을 구축하는 자가 본질적으로 법관계인이었는가

의 여부의 문제(슈퇴첼[Stözel]), 또 그 결과 (특히 로젠탈[Rosenthal]이 근본적으

로 증명하려고 한 바와 같이) 재판소가 군주의 이니시아티브에 의해서 증가한 법률

가를 배심원으로서의 명망가에 가름하여 채용했는가의 여부에 관한 문제도 같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떤 것이던 간에 다음의 것만은 확정하고 있다. 즉 사료에 따

르면 로마법의 침입에 대하여 불신의 염으로써 대립하는 신분적 계층도 일반적으

로 배심원으로서의 “독토렌”(Doktoren)의 참가를 반박하지 아니한 것이 보통이며

단지 후자의 우세 및 외국인의 채용에 대해서 싸운다는 데 불과했으므로 법운영

의 몰주관적 필요가 여하튼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전문교육에 의해

서 얻어진 복잡한 사실을 법률상 명확한 문제로서 다루는 능력, 그리고 아주 일반

적으로 말한다면 소송절차의 분리화의 필요가 전문적 법률가가 진출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한 한에서 법실무가의 소송운영 이해는 시민과 같이

귀족의 사적 법관계인의 이해와 합치한다. 이에 반하여 로마법의 실질적 규정의 계

수에 대해서는 「가장 근대적인」, 따라서 시민적인 법관계인은 전연 관계하지 않았

다. 즉 중세의 상법이나 도시의 재산법의 제도가 그들의 요구에 훨씬 잘 적응했던

것이다. 로마법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성질만이 불가피하게 증대하는 법운영의 전

문화에 따라서 그들에게 도처에서 승리를 얻게 하였다. 다만 영국에서는 이미 고

유한 국민적 법학교육이 성립하여서 그것은 강력한 관계인에 의해서 옹호되고 있

었다. 이러한 형식적 성질은 서구의 가산적 군주의 재판이 다른 곳에서처럼 진정

한 가장적인 복지재판과 실질적인 형평재판의 길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결정하

였다. 법률가는 관료로서 형식주의적 교육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또

가산적 군주재판의 나아가는 길에 본질적인 방해를 하여 당시의 서구의 재판에 대

한 법률적으로 보아 형식적인 성격의 규준을 유지하였다. 이 규준은 다른 대부분

의 가산적 법치행정과 대비하여 서구의 재판에 특유한 것이다. 따라서 로마법과 로

마적 교육에 대한 존경은 대학에서 교육된 법률가의 합리주의의 완전한 창조인 든

대 초기의 군주의 법전편찬을 전부 지배하였다.

로마법의 계수는 새로운 종류의 법명망가의 계급, 즉 문필적인 법학교육에 근거

하여 대학의 독토르 학위기를 가지는 법[186]학자를 창조하였다 - 이 점에 로마법

의 권력지위의 사회학적인 기초가 있다. 법의 형식적 성질의 의의는 아주 중요하

게 되었다. 로마의 제정기에 있어 이미 로마법은 순수하게 문필적인 활동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독일이나 프랑스의 중세의 법명망가에 의한 「법서」의 창

조나 영국의 법률가의 유효한 방법의 강요의 창조 - 이러한 창조의 영향은 그 밖

의 점에서는 중요하였다 - 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법률가의 철

학적 교양 - 그것이 피상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 의 영향 아래 순수하게 논리

적인 요소의 의의가 법사상에서 현저하게 증대하였다. 그리고 또 서구에서는 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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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58 35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실무의 형식에 대해서 어떠한 신법의 구속도 어떠한 신학적이고 실질적인 도덕적

관심도 이러한 사상을 속박하지 않는다는 것, 또 그것에 의해서 순수하게 사변적

인 카주이스틱에의 길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에 더욱 강렬한 결과를 주

었던 것이다.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고 「구성」할 수 없다면 법현실적으로는 존재

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는 원칙의 싹은 사실상 이미 로마의 법률가에서 볼 수 있

다. 「전체에 부담되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는다」(quod universitati

debetur, singulis non debetur), 「처음부터 하자있는 것은 시간이 경과로 유

효하게 될 수 없다」(quod ab initio vitiosum est, non potest tractu temporis

convalescere) 등과 같은 수많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명제가 이 점에 소속한다. 그

때에 추상적 법논리의 반체계적인·임기적인 산출이라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개

개의 경우에 주어지며, 구체적으로 동기지워진 결정에 근거를 주는 것으로서 부

가된 것이며, 종종 같은 법률가에 의해서 다시 부주의하게도 투기(投棄)되었다.

(beiseite werfen)(S. 492) 법사상의 본질적으로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성격은 그것

에 의해서 조금도 개변되지 않거나 조금만 개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로마법의 계

수에 있어서 사정은 전혀 달랐다. 먼저 첫째로 로마법의 계수는 로마 시민법의 제

국법에로의 발전에 의해서 시작된 법제도의 추상화에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증대

하는 정도에서 전진시켰다. 특히 에얼리히(Ehrlich)가 정당하게 강조했듯이, 그리

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 로마의 법제도는 국민적 구속의 모든

나머지를 박탈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또한 완전히 논리적 추상의 영역으로 높

여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으로 로마법은 「논리적으로 정당한」 법으로서 명백하게

절대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보통법의 법학의 6세기 이상의 활동

을 경과하여 사실상 생겼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법적 사고의 방법은 현저하게 형

식적 논리의 방향에로 추이하였다. 조금 전에 인용한 명제와 같은 종류의 로마의

법률가의 임기의 빛나는 착상은 그것이 학설휘찬 안에서 무제한하게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와의 관련에서 떨어져서 궁극인 법원리에 까지 높여져서 그것으로부

터 연역적으로만 논결되는 것이었다. 로마의 법률가에 강력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

던 것, 즉 순수하게 체계적인 범주가 창조되었다. 고대의 법학 자체에서는 그 통일

적인 명칭까지도 결여되었던 「법률행위」나 「의사표시」와 같은 개념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는, 따라서 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명제가 이제는

현실적·실용적 의의를 얻었다. 고대의 법률가에게는 로마 법사상의 역사적으로 제

약된 분석적 본성의 결과로서 본래의 구성적 능력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하

더라도 작은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이제는 이러한 법이 완전히 이질적인 종류의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전용하게 되니까, 사실을 모순 없이 법률적으로

「구성」하려는 과제가 거의 독무대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또한 그것에 의해서 하나

의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 없는 빈틈없이 꽉 짜인 「규범」의 합성 - 그것은 「적

용」될 규범의 합성인데 - 이 법이라는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법사상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종의 법의 논리화 아래서는, 예컨대 「계산가능한」

법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같은 생활의 요구가 형식적인 법에 대한 경향에서처럼 결

정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구는 전체 경험이 가리키듯이,

무정형의 경험적인 선례에 구속되는 법에 의해서도 같은 정도로 또는 오히려 보다

잘 달성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률구성의 결과는 거래관계인

의 기대에 대해서 아주 종종 전연 비합리적이며 바로 이질적이다. 즉 흔히 비난을

받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의 「생활소외」는 이 점에 그 근거를 두었다. 오히려 순수

하게 논리적인 법률적 구성은 법이론가나 그들에 의해서 교육받은 독토렌의, 즉 법

의 영역에서의 문필적 교양을 갖춘 전형적인 귀족의 내부적인 사고요구였다. 이로

부터 상술과 같은 발전이 나타났다. 자격 있는 전문가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는

의심스러운 법률사건에 관한 궁극적인 권위였던 것이며, 대학에서 교육받은 재판

관, 공증인, 변호사가 전형적인 법명망가였다. - 조직적이며 국민적인 법조계급이

일반적으로 결여된 곳에서는 로마법은 승리를 거두면서 전진하였다. 즉 영국·북부

프랑스·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하고 로마법은 스페인으로부터 스코틀랜드·러시아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을 정복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는 적어도 공증인이 주로

운동의 담당자이고, 북부에서는 특히 그 배후에는 거의 도처에[188]서 제후령이

성립하고 있었던 제후에 의해서 교육된 재판관이 운동의 담당자였다. 서구 이외의

법의 발전은 (영국법 이외의 법의 발전도 동일하게) 로마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

았다. 로마법의 흔적은 영국법의 체계에서 또한 수많은 법제도에서 많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코먼로의 법원(法源)의 정의에서도, 즉 재판관의 선례나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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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의 형식에 대해서 어떠한 신법의 구속도 어떠한 신학적이고 실질적인 도덕적

관심도 이러한 사상을 속박하지 않는다는 것, 또 그것에 의해서 순수하게 사변적

인 카주이스틱에의 길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에 더욱 강렬한 결과를 주

었던 것이다.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고 「구성」할 수 없다면 법현실적으로는 존재

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는 원칙의 싹은 사실상 이미 로마의 법률가에서 볼 수 있

다. 「전체에 부담되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는다」(quod universitati

debetur, singulis non debetur), 「처음부터 하자있는 것은 시간이 경과로 유

효하게 될 수 없다」(quod ab initio vitiosum est, non potest tractu temporis

convalescere) 등과 같은 수많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명제가 이 점에 소속한다. 그

때에 추상적 법논리의 반체계적인·임기적인 산출이라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개

개의 경우에 주어지며, 구체적으로 동기지워진 결정에 근거를 주는 것으로서 부

가된 것이며, 종종 같은 법률가에 의해서 다시 부주의하게도 투기(投棄)되었다.

(beiseite werfen)(S. 492) 법사상의 본질적으로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성격은 그것

에 의해서 조금도 개변되지 않거나 조금만 개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로마법의 계

수에 있어서 사정은 전혀 달랐다. 먼저 첫째로 로마법의 계수는 로마 시민법의 제

국법에로의 발전에 의해서 시작된 법제도의 추상화에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증대

하는 정도에서 전진시켰다. 특히 에얼리히(Ehrlich)가 정당하게 강조했듯이, 그리

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 로마의 법제도는 국민적 구속의 모든

나머지를 박탈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또한 완전히 논리적 추상의 영역으로 높

여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으로 로마법은 「논리적으로 정당한」 법으로서 명백하게

절대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보통법의 법학의 6세기 이상의 활동

을 경과하여 사실상 생겼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법적 사고의 방법은 현저하게 형

식적 논리의 방향에로 추이하였다. 조금 전에 인용한 명제와 같은 종류의 로마의

법률가의 임기의 빛나는 착상은 그것이 학설휘찬 안에서 무제한하게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와의 관련에서 떨어져서 궁극인 법원리에 까지 높여져서 그것으로부

터 연역적으로만 논결되는 것이었다. 로마의 법률가에 강력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

던 것, 즉 순수하게 체계적인 범주가 창조되었다. 고대의 법학 자체에서는 그 통일

적인 명칭까지도 결여되었던 「법률행위」나 「의사표시」와 같은 개념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는, 따라서 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명제가 이제는

현실적·실용적 의의를 얻었다. 고대의 법률가에게는 로마 법사상의 역사적으로 제

약된 분석적 본성의 결과로서 본래의 구성적 능력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지 않다하

더라도 작은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이제는 이러한 법이 완전히 이질적인 종류의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전용하게 되니까, 사실을 모순 없이 법률적으로

「구성」하려는 과제가 거의 독무대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또한 그것에 의해서 하나

의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 없는 빈틈없이 꽉 짜인 「규범」의 합성 - 그것은 「적

용」될 규범의 합성인데 - 이 법이라는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법사상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종의 법의 논리화 아래서는, 예컨대 「계산가능한」

법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같은 생활의 요구가 형식적인 법에 대한 경향에서처럼 결

정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구는 전체 경험이 가리키듯이,

무정형의 경험적인 선례에 구속되는 법에 의해서도 같은 정도로 또는 오히려 보다

잘 달성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률구성의 결과는 거래관계인

의 기대에 대해서 아주 종종 전연 비합리적이며 바로 이질적이다. 즉 흔히 비난을

받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의 「생활소외」는 이 점에 그 근거를 두었다. 오히려 순수

하게 논리적인 법률적 구성은 법이론가나 그들에 의해서 교육받은 독토렌의, 즉 법

의 영역에서의 문필적 교양을 갖춘 전형적인 귀족의 내부적인 사고요구였다. 이로

부터 상술과 같은 발전이 나타났다. 자격 있는 전문가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는

의심스러운 법률사건에 관한 궁극적인 권위였던 것이며, 대학에서 교육받은 재판

관, 공증인, 변호사가 전형적인 법명망가였다. - 조직적이며 국민적인 법조계급이

일반적으로 결여된 곳에서는 로마법은 승리를 거두면서 전진하였다. 즉 영국·북부

프랑스·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하고 로마법은 스페인으로부터 스코틀랜드·러시아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을 정복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에는 적어도 공증인이 주로

운동의 담당자이고, 북부에서는 특히 그 배후에는 거의 도처에[188]서 제후령이

성립하고 있었던 제후에 의해서 교육된 재판관이 운동의 담당자였다. 서구 이외의

법의 발전은 (영국법 이외의 법의 발전도 동일하게) 로마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

았다. 로마법의 흔적은 영국법의 체계에서 또한 수많은 법제도에서 많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코먼로의 법원(法源)의 정의에서도, 즉 재판관의 선례나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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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0 36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상의 원칙들」에서도 물론 내부적 구조에서 차이가 현저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

타난다. 로마법의 본래의 고향은 물론 이탈리아다. 특히 제노바인이나 그 밖의 교

육을 받은 최고법정(rotae)의 세력 아래 있었으며, 그 법정의 집성된 세련되고 구

성적인 판결은 16세기에 독일에서 인쇄되고 독일은 그것을 제실재판소와 교육받은

란트재판소의 세력 아래 두게 되었다.

제5절 가산적 법전편찬의 유형

충분하게 발전된 「계몽전제주의」 시대에 비로소 즉 18세기 이래 보통법과 거기에

관련된 대학의 법명망가의 세계 중에서 서구에서만 발전한 특수적·형식적인 법논

리의 성격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때에 결정적인 역할은 관

료제의 보편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그의 가장 자주적인 발전에서, 또한 그 소박한

아는 체 하는 것에서 연기(演技)되었다. 핵심에 있어서 가장적인 정치적 지배는 뒤

에 논술하듯이, 복지국가의 유형을 얻었으며, 또 법관계인의 구체적 의사에 대해서

도 교육받은 법률적 사고의 형식주의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나아갔다. 가장적 정

치지배는 이러한 전문적 사고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 것처럼 보인

다. 왜냐하면 법은 그의 전문법률적 성격을 박탈당하고 또한 법이 관료뿐만 아니

라 특히 신하도 역시 그들의 법적 상태에 관해서 외부의 원조 없이 철저하게 교화

한다는 방법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법률적 천칙주의와 형식주의를 제거하는 실

질적 정의를 추구하는 재판에로의 요구는 우리들이 관찰했듯이, 무든 군주의 가

장제에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제가 아무리 거리낌 없이 이러한 경향에 따라 나

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그것이 편찬하고 체계

화한 순화된 법조법에 관하여 학생이나 해석자로서의 「비전문가」라는 것에는 생각

이 미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고전적 법학자의 업적이나 인용

법에 의해서 공적으로 승인된 그들의 권위에 반대하여 법학의 전문교육을 근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그 후 규준적인 인용문 집성만을

공간할 수 있었는데 인용문 집성은 학생의 교육상의 필요에 봉사하였으며, 따라

서 법률의 형식을 한 교과서의 입문서(『법학제요』)로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하여 가

장제는 근대의 「복지국가」의 고전적 기념상, 즉 프로이센의 「일반 란트법」에서 무제

약하게 지배하였다. 주관적 「권리」의 신분의 세계에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객관적

법」이 여기서는 주로 법의무의 세계이다. 즉 「숙명의 의무와 책임」의 보편성이 형식

적이라기보다 이러한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실질적인 종류의 체계적인 합리

주의에 의해서 그 뚜렷한 특징이 형성되는 법질서의 주요한 성질이다. 실질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유효한 곳에서는 단지 사실상의 법으로서 유효한 것, 특히 「관습

법」은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전체의 법전편찬은 독일 민법전의 최초의

초안에 이르기까지 관습법에 대해서 투쟁을 언명하였다. 입법자의 명확한 규정에

근거하지 아니한 법실무의 관례나 전체 전통적인 종류의 법해석은 이러한 합리주

의적인 입법자에 대해서 법의 적용에 관한 아주 열등한 법원(法源)이며, 기껏해야

법률이 제시되지 아니한 사이에만 찾아야할 법원에 불과하였다. 법전 자체는 「빠

짐 없는」 것이라야 되고, 또 「빠짐 없는」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의문의 사건에 관

해서는 프로이센의 재판관은 증오해야할 법학에 의한 법의 새로운 형성을 모두 방

해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특히 형성된 위원회 밑에서 반문하도록 지시되었다. 이러

한 일반적인 경향의 결과는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에도 나타나 있다. 프로이센의

일반 란트법에서의 입법자 측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공중의 계몽에 의해서 전문법학

으로부터 해방하려는 시도는 로마법 개념에 정해져서 고정한 그리고 고려하지 않

으면 안 될 실무의 사고관습에 대해서는 최고도로 상세한 카주이스틱을 그 결과로

서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카주이스틱은 형식적인 예리함의 추구

가 아니라 실질적 정의추구의 결과로서 종종 정확성의 부족에로만 이르렀다. 그때

에 개념의 저장에의 의존과 로마법의 방법은 많은 개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한 최초에 독일의 법률에서 기도된 정력적인 전문언어의 독일어 번역에도 불구하

고, 없어지지 않고 남았다. 다수의 교훈적이며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법규는 종종

어떠한 범위에까지 개개의 사건에 관하여 강제가능한 법규범이 유효하게 되나 하

는 점에 관하여 의문을 발생시켰다. 끝으로 체계화는 부분적으로는 형식적·법률

적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법에의 관계인의 실용적 관계로부터 출하

였기 때문에 체계화는 오히려 법제도의 논의를 분열시키고, 그리하여 명확성의 추

구에도 불구하고 불명확성을 창조하였다. 전문법학자에 의한 법의 수정의 배제라

는 목표는 사실상 입법자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달성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입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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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0 36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상의 원칙들」에서도 물론 내부적 구조에서 차이가 현저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

타난다. 로마법의 본래의 고향은 물론 이탈리아다. 특히 제노바인이나 그 밖의 교

육을 받은 최고법정(rotae)의 세력 아래 있었으며, 그 법정의 집성된 세련되고 구

성적인 판결은 16세기에 독일에서 인쇄되고 독일은 그것을 제실재판소와 교육받은

란트재판소의 세력 아래 두게 되었다.

제5절 가산적 법전편찬의 유형

충분하게 발전된 「계몽전제주의」 시대에 비로소 즉 18세기 이래 보통법과 거기에

관련된 대학의 법명망가의 세계 중에서 서구에서만 발전한 특수적·형식적인 법논

리의 성격을 의식적으로 극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때에 결정적인 역할은 관

료제의 보편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그의 가장 자주적인 발전에서, 또한 그 소박한

아는 체 하는 것에서 연기(演技)되었다. 핵심에 있어서 가장적인 정치적 지배는 뒤

에 논술하듯이, 복지국가의 유형을 얻었으며, 또 법관계인의 구체적 의사에 대해서

도 교육받은 법률적 사고의 형식주의에 대해서도 무관심으로 나아갔다. 가장적 정

치지배는 이러한 전문적 사고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 것처럼 보인

다. 왜냐하면 법은 그의 전문법률적 성격을 박탈당하고 또한 법이 관료뿐만 아니

라 특히 신하도 역시 그들의 법적 상태에 관해서 외부의 원조 없이 철저하게 교화

한다는 방법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법률적 천칙주의와 형식주의를 제거하는 실

질적 정의를 추구하는 재판에로의 요구는 우리들이 관찰했듯이, 무든 군주의 가

장제에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제가 아무리 거리낌 없이 이러한 경향에 따라 나

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그것이 편찬하고 체계

화한 순화된 법조법에 관하여 학생이나 해석자로서의 「비전문가」라는 것에는 생각

이 미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고전적 법학자의 업적이나 인용

법에 의해서 공적으로 승인된 그들의 권위에 반대하여 법학의 전문교육을 근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은 그 후 규준적인 인용문 집성만을

공간할 수 있었는데 인용문 집성은 학생의 교육상의 필요에 봉사하였으며, 따라

서 법률의 형식을 한 교과서의 입문서(『법학제요』)로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하여 가

장제는 근대의 「복지국가」의 고전적 기념상, 즉 프로이센의 「일반 란트법」에서 무제

약하게 지배하였다. 주관적 「권리」의 신분의 세계에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객관적

법」이 여기서는 주로 법의무의 세계이다. 즉 「숙명의 의무와 책임」의 보편성이 형식

적이라기보다 이러한 경우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실질적인 종류의 체계적인 합리

주의에 의해서 그 뚜렷한 특징이 형성되는 법질서의 주요한 성질이다. 실질적으로

「이성적인 것」이 유효한 곳에서는 단지 사실상의 법으로서 유효한 것, 특히 「관습

법」은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전체의 법전편찬은 독일 민법전의 최초의

초안에 이르기까지 관습법에 대해서 투쟁을 언명하였다. 입법자의 명확한 규정에

근거하지 아니한 법실무의 관례나 전체 전통적인 종류의 법해석은 이러한 합리주

의적인 입법자에 대해서 법의 적용에 관한 아주 열등한 법원(法源)이며, 기껏해야

법률이 제시되지 아니한 사이에만 찾아야할 법원에 불과하였다. 법전 자체는 「빠

짐 없는」 것이라야 되고, 또 「빠짐 없는」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의문의 사건에 관

해서는 프로이센의 재판관은 증오해야할 법학에 의한 법의 새로운 형성을 모두 방

해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특히 형성된 위원회 밑에서 반문하도록 지시되었다. 이러

한 일반적인 경향의 결과는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에도 나타나 있다. 프로이센의

일반 란트법에서의 입법자 측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공중의 계몽에 의해서 전문법학

으로부터 해방하려는 시도는 로마법 개념에 정해져서 고정한 그리고 고려하지 않

으면 안 될 실무의 사고관습에 대해서는 최고도로 상세한 카주이스틱을 그 결과로

서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카주이스틱은 형식적인 예리함의 추구

가 아니라 실질적 정의추구의 결과로서 종종 정확성의 부족에로만 이르렀다. 그때

에 개념의 저장에의 의존과 로마법의 방법은 많은 개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한 최초에 독일의 법률에서 기도된 정력적인 전문언어의 독일어 번역에도 불구하

고, 없어지지 않고 남았다. 다수의 교훈적이며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법규는 종종

어떠한 범위에까지 개개의 사건에 관하여 강제가능한 법규범이 유효하게 되나 하

는 점에 관하여 의문을 발생시켰다. 끝으로 체계화는 부분적으로는 형식적·법률

적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법에의 관계인의 실용적 관계로부터 출하

였기 때문에 체계화는 오히려 법제도의 논의를 분열시키고, 그리하여 명확성의 추

구에도 불구하고 불명확성을 창조하였다. 전문법학자에 의한 법의 수정의 배제라

는 목표는 사실상 입법자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달성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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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2 36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법자가 기도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공중[190]의 현실적인 법지식은 만개

의 조문으로 구성된 호한한 작품으로도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것이며, 그때에 변호

사나 그 밖의 법률전문의 실무가로부터 해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러한 목

적은 사물의 본성에 의해서 근대 법생활의 제약 아래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선례

의 권위는 최고법원이 그 판결의 공식적인 집성을 발간한 후에는 영국 이외의 어떤

나라보다도 강력하게 발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법의 학술적인 취급에는 사실상 누

구나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법의 학문적인 취급은 완전히 정확한 형식적 규범도

창조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소적(彫塑的) 법제도도 창조하지 아니하였다 - 양자가

다 공리적인 입법자에 의해서는 기도되지 아니하였다. 가산적·실질적 합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당연히 어디에서나 형식적·법률적 사고를 자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법전편찬은 법률가의 고유한 학문적인 노력을 일부는 바로 로마법에, 일부는 국민

적 이념의 영향 아래 과거로부터 전해진 고대 독일법의 조소적인 법제도에 향하게

한다는 것, 그것도 양자를 사적 방법론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그 본래의 「순수한」

형상을 만든다는 것에 공헌하였다. 로마법에 관해서는 이것은 로마법이 역사적 교

양 있는 전문법률가의 손에 의해서 로마법의 계수 시에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

기 위하여 받은 변경을 불식하고 재차 원형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즉 「판

덱텐 법전의 현대적 사용」(Usus modernus Pandectarum)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의 보통법적 수정이라는 업적이 망각되고, 마치 중세 라틴어의 서법(書法)이 인문

주의적 언어학자의 학문적 노작에 의해서 과거에 배척된 것처럼 학문적·사적 언어

정화주의에 의해서 배척되었다. 그리고 라틴어의 학문상의 언어로서의 몰락이 결

과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로마법의 근대적 거래이해에의 적응의 상실이 나타났다.

이제 비로소 추상적인 법논리에의 길이 완전히 열려졌다. 따라서 학문적 합리주의

의 작용은 하나의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에로 추이시켜진 것이며 - 역사가가 흔히

믿고 있듯이 - 극복된 것은 아니다. 고대법의 순수하게 논리적인 새로운 체계화

는 물론 역사주의적 법률가에 의해서 납득이 가는 방법으로 도달된 것이 아니었다

는 것은 분명하다. 주지하듯이, 그리고 우연적이 아니고 빈트샤이트(Windscheid)

의 강요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전부의 학설휘찬의 교과서가 미완성으로 그쳤다. 다

른 한 편 로마로부터 유래되지 아니한 제도의 엄격하게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순화

는 역사학파의 게르마니스트에 의해서도 거의 달성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제

도에 관해서 역사가가 학문적으로 흥미를 가진 것은 바로 신분적 법질서로부터 유

래하는 비합리적이고 반형식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단지 시민의 거래이익에 의해

서 자율적으로 그 요구에 적응시켜지고, 또 특수재판소의 실무에 의해서 경험적

으로 합리화된 특별법, 그중에서도 어음법, 상법에 관해서만 실무에 적응할 수 있

는 학문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법전편찬적으로 결여하는 바 없는 체계화가 성공하

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는 강제적이며 명확한 경제적 요구가 관계하였기 때문

이다. 그러나 70년 후에 역사가의 지배와 타국에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었던 법

사학의 발전이 독일 제국의 건설의 결과 민법의 통일을 국민적 과제로서 열정적으

로 언명했을 때 독일의 법조계층은 로마니스트와 게르마니스트로 분열하여 이러

한 민법의 통일이라는 일에 일부는 싫지만 접근하게 되어 그 일을 위한 준비상태

를 가장 적게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가산적 군주의 법전편찬과 겉은 유형에 그 밖의 특히 오스트리아나 러시

아의 법전이 속한다. 러시아의 법전은 물론 본질적으로는 수에 있어 근소한 특권

적 계층의 신분적인 법만을 의미하였다. 그것도 약간의 계층, 특히 훨씬 다수의 신

하를 포함하는 농민층의 특별법을 거기에 손도 대지 않고 남겨두었다. 그 후에 농

민 자신의 재판권도 언제나 실용적인 중요한 범위에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프로이

센의 법에 비해서 보다 간결한 양 법전편찬은 본질적으로는 규정의 보다 근소한 정

확성에 의해서 획득되고 오스트리아의 법전은 로마법에 대한 훨씬 근소한 독창성

에 의해서 획득되었다. 학문적 사고는 10년 후에 비로소 (운거[Unger]의 저작에 의

해서) 로마법에 정통했으나 그 경우에도 거의 전부 로마니스티슈한 범주를 사용하

고 있다.

제7장 혁명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 자연법

제1절 프랑스 민법전의 특색

혁명 이전 시대의 법전과 혁명의 아들, 즉 프랑스 민법전과 전체 서유럽이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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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2 36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법자가 기도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공중[190]의 현실적인 법지식은 만개

의 조문으로 구성된 호한한 작품으로도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것이며, 그때에 변호

사나 그 밖의 법률전문의 실무가로부터 해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러한 목

적은 사물의 본성에 의해서 근대 법생활의 제약 아래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선례

의 권위는 최고법원이 그 판결의 공식적인 집성을 발간한 후에는 영국 이외의 어떤

나라보다도 강력하게 발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법의 학술적인 취급에는 사실상 누

구나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법의 학문적인 취급은 완전히 정확한 형식적 규범도

창조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소적(彫塑的) 법제도도 창조하지 아니하였다 - 양자가

다 공리적인 입법자에 의해서는 기도되지 아니하였다. 가산적·실질적 합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당연히 어디에서나 형식적·법률적 사고를 자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법전편찬은 법률가의 고유한 학문적인 노력을 일부는 바로 로마법에, 일부는 국민

적 이념의 영향 아래 과거로부터 전해진 고대 독일법의 조소적인 법제도에 향하게

한다는 것, 그것도 양자를 사적 방법론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그 본래의 「순수한」

형상을 만든다는 것에 공헌하였다. 로마법에 관해서는 이것은 로마법이 역사적 교

양 있는 전문법률가의 손에 의해서 로마법의 계수 시에 법관계인의 요구에 적응하

기 위하여 받은 변경을 불식하고 재차 원형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즉 「판

덱텐 법전의 현대적 사용」(Usus modernus Pandectarum)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의 보통법적 수정이라는 업적이 망각되고, 마치 중세 라틴어의 서법(書法)이 인문

주의적 언어학자의 학문적 노작에 의해서 과거에 배척된 것처럼 학문적·사적 언어

정화주의에 의해서 배척되었다. 그리고 라틴어의 학문상의 언어로서의 몰락이 결

과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로마법의 근대적 거래이해에의 적응의 상실이 나타났다.

이제 비로소 추상적인 법논리에의 길이 완전히 열려졌다. 따라서 학문적 합리주의

의 작용은 하나의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에로 추이시켜진 것이며 - 역사가가 흔히

믿고 있듯이 - 극복된 것은 아니다. 고대법의 순수하게 논리적인 새로운 체계화

는 물론 역사주의적 법률가에 의해서 납득이 가는 방법으로 도달된 것이 아니었다

는 것은 분명하다. 주지하듯이, 그리고 우연적이 아니고 빈트샤이트(Windscheid)

의 강요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전부의 학설휘찬의 교과서가 미완성으로 그쳤다. 다

른 한 편 로마로부터 유래되지 아니한 제도의 엄격하게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순화

는 역사학파의 게르마니스트에 의해서도 거의 달성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제

도에 관해서 역사가가 학문적으로 흥미를 가진 것은 바로 신분적 법질서로부터 유

래하는 비합리적이고 반형식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단지 시민의 거래이익에 의해

서 자율적으로 그 요구에 적응시켜지고, 또 특수재판소의 실무에 의해서 경험적

으로 합리화된 특별법, 그중에서도 어음법, 상법에 관해서만 실무에 적응할 수 있

는 학문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법전편찬적으로 결여하는 바 없는 체계화가 성공하

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는 강제적이며 명확한 경제적 요구가 관계하였기 때문

이다. 그러나 70년 후에 역사가의 지배와 타국에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었던 법

사학의 발전이 독일 제국의 건설의 결과 민법의 통일을 국민적 과제로서 열정적으

로 언명했을 때 독일의 법조계층은 로마니스트와 게르마니스트로 분열하여 이러

한 민법의 통일이라는 일에 일부는 싫지만 접근하게 되어 그 일을 위한 준비상태

를 가장 적게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가산적 군주의 법전편찬과 겉은 유형에 그 밖의 특히 오스트리아나 러시

아의 법전이 속한다. 러시아의 법전은 물론 본질적으로는 수에 있어 근소한 특권

적 계층의 신분적인 법만을 의미하였다. 그것도 약간의 계층, 특히 훨씬 다수의 신

하를 포함하는 농민층의 특별법을 거기에 손도 대지 않고 남겨두었다. 그 후에 농

민 자신의 재판권도 언제나 실용적인 중요한 범위에서 그대로 방치되었다. 프로이

센의 법에 비해서 보다 간결한 양 법전편찬은 본질적으로는 규정의 보다 근소한 정

확성에 의해서 획득되고 오스트리아의 법전은 로마법에 대한 훨씬 근소한 독창성

에 의해서 획득되었다. 학문적 사고는 10년 후에 비로소 (운거[Unger]의 저작에 의

해서) 로마법에 정통했으나 그 경우에도 거의 전부 로마니스티슈한 범주를 사용하

고 있다.

제7장 혁명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형식적 성질, 자연법

제1절 프랑스 민법전의 특색

혁명 이전 시대의 법전과 혁명의 아들, 즉 프랑스 민법전과 전체 서유럽이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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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4 36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의 모방을 비교한다면, 형식적 차이는 현저하다. 프랑스

민법전은 비법률적 요소의 혼합을, 즉 전체 교훈적이며 도덕적인 훈계적인 특색과

전체 카주이스틱을 결여하였다. 프랑스 민법전의 다수의 법규는 12표법의 법규와

같은 의미에서 경구적으로 조소적으로 작용하였으며, 다수의 법규는 고대의 법언

처럼 민족적 소유로 되었다. 그리고 일반 란트법에도 그 밖의 독일의 법전에도 이

러한 것이 발생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앵글로색슨법의 법률적 실무의 성과, 일반

로마법, 이론적·문필적 법학적 교양의 성과(그것에 동부[192] 또는 중부 유럽의 법

전편찬의 대다수가 근거하고 있다)와 함께 프랑스 민법전의 법은 합리적 입법의 성

과로서 제3의 위대한 세계법으로 되었는데, 그렇게 된 근거를 형성한 것은 규정의

극도의 명확성과 정확한 평이성을 일부는 현실적으로 포함하고 일부는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적 성질에 있다. 프랑스 민법전은 그 많은 법규의 이러한 박진성

에 관하여 북부 프랑스의 관습법에 규정된 수많은 법제도의 은혜를 입고 있다. 이

러한 박진성을 위해서 많은 것이 형식적·법률적 성질과 실질적인 고려에 대한 철저

성을 대가로서 치루었다. 그러나 법체계의 추상적 전체 구조와 다수의 개개의 규정

의 공리주의적 성격에 의해서 법적 사고는 전체로서 그것의 실용적 관련에서의 법

제도의 고유한 구성적 편성에 자극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체로 다음과 같은

프랑스 민법전에 왕왕 인정되는 정식화에 지적되는 바이다. 즉 프랑스 민법전이 법

규칙(Rechtsregeln)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법규」(Sätze)로서 생각되어 실

무의 문제의 손에 적용되는 「법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정식화에 근대의 프랑스 법

학의 형식적 성격은 아마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모순 많은 법률의 특색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색은 특수한 합리주의의 표현이다. 즉 여기서는 첫째로,

벤담의 이념에 부합하여 순수하게 합리적인 전체 역사적인 「편견」에서 해방된 법률

이 창조된다는 우월적 자각의 표현이다. 이러한 법률은 아마 그 내용을 순화된 상

식, 즉 그 힘을 정당성이 아니고 독창력에 입고 있는 위대한 국민의 특수한 국가

이유와 결합하는 상식에서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법논리를 위한 입장의 성격

은, 그것이 조소적 형상 때문에 법률적 순화를 희생하는 한, 개개의 경우에는 직

접,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간섭이 예기하는 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경구적인

연극성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헌법에서의 「인권과 시민권」과 같은 종류의 정식화에

부합한다. 법규의 내용에 관한 일정한 공리는 여기서는 객관적인 법규칙의 형식에

서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요구적 격언형식에서 가져온다. 추상적 법규

의 형성의 특수방법을 우리는 간단히 다루려고 한다.

어떤 합리적·실정적인 법질서의 내부에서의 「법의 정당성」에 관한 관념이 사회학

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의해서 법창조자, 법실

무가, 법관계인의 행동에 관한 실제적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경우에 한한다. 일정한

법원리의 특수한 「정당성」의 신념 그리고 실정법의 어떠한 강요에 의해서도 파괴되

지 않는 직접적으로 구속적인 일정한 법원리의 힘이 실제의 법생활에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향을 줄 때에 「법의 정당」의 개념이 고려된다. 이러한 것은 사실상

역사적으로는 반복되었으나 특히 근대 초기, 즉 혁명기에 존재하였고 부분적으로

는 (미국에서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의 내용은 「자연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보통이다.

제2절 실정법의 규범적 규준으로서의 자연법

우리는 이미 「자연법」(lex naturale)을 기독교가 그 자신의 도덕과 세계의 규범

사이에 다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지정한 본질상 스토아 철학적인 창조물로서 파악

하였다. 자연법은 현실의 죄와 폭력의 세계의 내부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서 정당화

된 「만인을 위한 법」이었으며, 직접으로 신의 신앙자를 위해서만 계시되고 종교적

으로 선택된 자에게만 분명한 신의 명령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자연

법을 다른 측면에서 관찰한다. 「자연법」은 전체 실정법에 의존하지 않으나 오히려

실정법에 우월하는 유효한 규범의 총체이며, 자연법의 위엄은 렌(Lehen)의 자의

적인 규정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규정을 제한하는 힘

을 최초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당한 입법자로부터의 기원에 의하는 것

이 아니라 순수한 내재적인 성질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규범의 총체이다. 즉 종교적

계시, 권위적인 전통의 신성성 그리고 그 담당자가 폐지되는 경우에도 아직 잔존할

수 있는 법의 정당성의 특수하고 유일한 정합된 형식이다. 따라서 자연법은 혁명

에 의해서 창조된 법질서의 특수한 정당성의 형식이다. 「자연법」에의 상소는 언제

나 반복하여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는 계급이 - 실정적 종교적 규범과 계시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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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4 36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의 모방을 비교한다면, 형식적 차이는 현저하다. 프랑스

민법전은 비법률적 요소의 혼합을, 즉 전체 교훈적이며 도덕적인 훈계적인 특색과

전체 카주이스틱을 결여하였다. 프랑스 민법전의 다수의 법규는 12표법의 법규와

같은 의미에서 경구적으로 조소적으로 작용하였으며, 다수의 법규는 고대의 법언

처럼 민족적 소유로 되었다. 그리고 일반 란트법에도 그 밖의 독일의 법전에도 이

러한 것이 발생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앵글로색슨법의 법률적 실무의 성과, 일반

로마법, 이론적·문필적 법학적 교양의 성과(그것에 동부[192] 또는 중부 유럽의 법

전편찬의 대다수가 근거하고 있다)와 함께 프랑스 민법전의 법은 합리적 입법의 성

과로서 제3의 위대한 세계법으로 되었는데, 그렇게 된 근거를 형성한 것은 규정의

극도의 명확성과 정확한 평이성을 일부는 현실적으로 포함하고 일부는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적 성질에 있다. 프랑스 민법전은 그 많은 법규의 이러한 박진성

에 관하여 북부 프랑스의 관습법에 규정된 수많은 법제도의 은혜를 입고 있다. 이

러한 박진성을 위해서 많은 것이 형식적·법률적 성질과 실질적인 고려에 대한 철저

성을 대가로서 치루었다. 그러나 법체계의 추상적 전체 구조와 다수의 개개의 규정

의 공리주의적 성격에 의해서 법적 사고는 전체로서 그것의 실용적 관련에서의 법

제도의 고유한 구성적 편성에 자극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체로 다음과 같은

프랑스 민법전에 왕왕 인정되는 정식화에 지적되는 바이다. 즉 프랑스 민법전이 법

규칙(Rechtsregeln)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법규」(Sätze)로서 생각되어 실

무의 문제의 손에 적용되는 「법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정식화에 근대의 프랑스 법

학의 형식적 성격은 아마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모순 많은 법률의 특색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색은 특수한 합리주의의 표현이다. 즉 여기서는 첫째로,

벤담의 이념에 부합하여 순수하게 합리적인 전체 역사적인 「편견」에서 해방된 법률

이 창조된다는 우월적 자각의 표현이다. 이러한 법률은 아마 그 내용을 순화된 상

식, 즉 그 힘을 정당성이 아니고 독창력에 입고 있는 위대한 국민의 특수한 국가

이유와 결합하는 상식에서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법논리를 위한 입장의 성격

은, 그것이 조소적 형상 때문에 법률적 순화를 희생하는 한, 개개의 경우에는 직

접, 나폴레옹의 개인적인 간섭이 예기하는 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경구적인

연극성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헌법에서의 「인권과 시민권」과 같은 종류의 정식화에

부합한다. 법규의 내용에 관한 일정한 공리는 여기서는 객관적인 법규칙의 형식에

서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요구적 격언형식에서 가져온다. 추상적 법규

의 형성의 특수방법을 우리는 간단히 다루려고 한다.

어떤 합리적·실정적인 법질서의 내부에서의 「법의 정당성」에 관한 관념이 사회학

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의해서 법창조자, 법실

무가, 법관계인의 행동에 관한 실제적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경우에 한한다. 일정한

법원리의 특수한 「정당성」의 신념 그리고 실정법의 어떠한 강요에 의해서도 파괴되

지 않는 직접적으로 구속적인 일정한 법원리의 힘이 실제의 법생활에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향을 줄 때에 「법의 정당」의 개념이 고려된다. 이러한 것은 사실상

역사적으로는 반복되었으나 특히 근대 초기, 즉 혁명기에 존재하였고 부분적으로

는 (미국에서는)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의 내용은 「자연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보통이다.

제2절 실정법의 규범적 규준으로서의 자연법

우리는 이미 「자연법」(lex naturale)을 기독교가 그 자신의 도덕과 세계의 규범

사이에 다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지정한 본질상 스토아 철학적인 창조물로서 파악

하였다. 자연법은 현실의 죄와 폭력의 세계의 내부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서 정당화

된 「만인을 위한 법」이었으며, 직접으로 신의 신앙자를 위해서만 계시되고 종교적

으로 선택된 자에게만 분명한 신의 명령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자연

법을 다른 측면에서 관찰한다. 「자연법」은 전체 실정법에 의존하지 않으나 오히려

실정법에 우월하는 유효한 규범의 총체이며, 자연법의 위엄은 렌(Lehen)의 자의

적인 규정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규정을 제한하는 힘

을 최초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당한 입법자로부터의 기원에 의하는 것

이 아니라 순수한 내재적인 성질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규범의 총체이다. 즉 종교적

계시, 권위적인 전통의 신성성 그리고 그 담당자가 폐지되는 경우에도 아직 잔존할

수 있는 법의 정당성의 특수하고 유일한 정합된 형식이다. 따라서 자연법은 혁명

에 의해서 창조된 법질서의 특수한 정당성의 형식이다. 「자연법」에의 상소는 언제

나 반복하여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는 계급이 - 실정적 종교적 규범과 계시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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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6 36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하지 않는 한 - 그들의 요구에 근거하는 법창조에 정당성을 수여할 수 있는 형식

이었다. 그리고 또 전체 자연법이 그 의도에서 그것이 기존의 질서에 반대하여 폭

력적 행위에 의해서 실시되거나 또는 소극적 반항에 의해서 실시된다는 정당성을

일정한 규범에 준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장 다양한 종류의

권위적 권력이 「자연법」에 의해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영향력이 많은 「역

사적으로 자라난 것으로서의 자연법」 자체가 추상적 규칙에 기초하는 사고나 추상

적 규칙을 산출하는 사고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유래한 자연법의 공리

는 예컨대 「관습법」의 우월을 인정하는 역사법학파의 이론의 기초로도 되어 있었

다. 「관습법」도 역사법학파에 의해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완성된 개념이다. 그의 주

장에 있어 입법[194]자가 제정법에 의해서 관습법의 효력범위를 법적으로 유효하게

제한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특히 법률에 대한 관습법의 적용제한력

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 생성이 실현

된다는 것을 사람은 금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가 이

러한 결론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제정법은 「단순한」실정적인 것으로 영락케

하는 전제는 낭만주의에 특유한 사상계열이 여러 형태로서 표현하고 있는 유일한

자연적이고, 그 때문에 정당한 법원으로서의 절반은 역사적이고 절반은 자연주의

적인 「민족정신」의 이론에 의해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민족정신」에서 법과 문화

가 유출하며, 특히 이로써 모든 진정한 법이 「유기적」으로 자라나며, 또 직접적으

로 「법감정」에 뿌리를 두고 「인위적」인, 즉 목적합리적인 제정법이 아닌 진정한 법

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의 비합리주의에 대해서 법합리주의의 자연법적 공리는 모순되는 것

으로서 대립한다. 그리고 후자만이 형식적 종류의 규범을 일반적으로 창조하였으

므로 자연법 아래에 필요에 따라서 형식적 종류의 규범만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

다.

제3절 근대 자연법의 기원

근대에서의 자연법의 형성은 합리적인 종파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기초에 첨가

하기를 일부는 도처에서 「자연법」에 의해서 의사된 것의 규준을 파악하려고 추구

한 르네상스의 자연개념의 창작이었으며, 일부는 전체 국민의 일정한 태어나면서

가지는 자연권이라는 특히 영국에 특유한 사상을 모방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러

한 생득권(birth right)이라는 특수한 영국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 본래 귀족에게만 문서로써 확인된 일정한 신분적 자유의 통속적 해석의 영향

아래 영국의 신하 자체의 국민 자유권으로서 성립한 것이며, 거기에 관해서는 국

왕도 그 밖의 어떠한 정치적 권력도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하여 모든 인간 자

체의 권리라는 개념에로의 이행은 종교적, 특히 재침례론자의 영향의 때때로 아주

강력한 협조에 인도되어 본질적으로는 17, 18세기의 합리주의적인 계몽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도된 것이다.

제4절 자연법과 자유권

자연법의 공리는 다양한 유형에 소속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여기서는 특히 경

제질서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을 관찰하기로 한다. 실정법의 자연법적 정당성은 형

식적 조건에 결부시킬 수 있거나 또는 실질적 조건에 결부시킬 수 있거나의 어느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한 형식적 자연법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구별은 명확하지 않

다. 왜냐하면 순수한 형식적 자연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전적으로 내

용이 빈약한 일반적인 법률개념으로 떨어져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자의 대립은 아주 중요하다. 첫 번째 종류의 가장 순수한 유형은 17,

18세기에 처음으로 기술한 바와 같은 영향 아래 나타난 자연법이며, 그중에서도

계약이론의 형상에 있어서 그것도 특히 계약이론의 개인주의적 형식에서 성립한

자연법이다. 모든 정당한 법은 법의 정립에 근거하며, 법의 정립 자체는 궁극적으

로는 언제나 합리적 합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 합의는 사실상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제정법의 성립의 방법을 규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현실적인 근원계

약(Urvertrag)에 근거하는 것이거나 또는 법의 내용이이성적인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질서의 개념에 반하지 않는 경우에 이러한 법만이 정당화된다는 관

념적인 의미에서의 것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의 본질적 요소는 「자

유권」이며 계약의 자유이다. 자발적인 합리적 계약은 국가를 포함하는 모든 결합

의 현실적·역사적 근거로서 혹은 평가의 조정적 규준으로서 자연법적 구성의 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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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 한 - 그들의 요구에 근거하는 법창조에 정당성을 수여할 수 있는 형식

이었다. 그리고 또 전체 자연법이 그 의도에서 그것이 기존의 질서에 반대하여 폭

력적 행위에 의해서 실시되거나 또는 소극적 반항에 의해서 실시된다는 정당성을

일정한 규범에 준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장 다양한 종류의

권위적 권력이 「자연법」에 의해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영향력이 많은 「역

사적으로 자라난 것으로서의 자연법」 자체가 추상적 규칙에 기초하는 사고나 추상

적 규칙을 산출하는 사고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유래한 자연법의 공리

는 예컨대 「관습법」의 우월을 인정하는 역사법학파의 이론의 기초로도 되어 있었

다. 「관습법」도 역사법학파에 의해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완성된 개념이다. 그의 주

장에 있어 입법[194]자가 제정법에 의해서 관습법의 효력범위를 법적으로 유효하게

제한하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 특히 법률에 대한 관습법의 적용제한력

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 생성이 실현

된다는 것을 사람은 금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가 이

러한 결론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제정법은 「단순한」실정적인 것으로 영락케

하는 전제는 낭만주의에 특유한 사상계열이 여러 형태로서 표현하고 있는 유일한

자연적이고, 그 때문에 정당한 법원으로서의 절반은 역사적이고 절반은 자연주의

적인 「민족정신」의 이론에 의해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민족정신」에서 법과 문화

가 유출하며, 특히 이로써 모든 진정한 법이 「유기적」으로 자라나며, 또 직접적으

로 「법감정」에 뿌리를 두고 「인위적」인, 즉 목적합리적인 제정법이 아닌 진정한 법

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의 비합리주의에 대해서 법합리주의의 자연법적 공리는 모순되는 것

으로서 대립한다. 그리고 후자만이 형식적 종류의 규범을 일반적으로 창조하였으

므로 자연법 아래에 필요에 따라서 형식적 종류의 규범만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

다.

제3절 근대 자연법의 기원

근대에서의 자연법의 형성은 합리적인 종파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기초에 첨가

하기를 일부는 도처에서 「자연법」에 의해서 의사된 것의 규준을 파악하려고 추구

한 르네상스의 자연개념의 창작이었으며, 일부는 전체 국민의 일정한 태어나면서

가지는 자연권이라는 특히 영국에 특유한 사상을 모방하여 성립한 것이다. 이러

한 생득권(birth right)이라는 특수한 영국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 본래 귀족에게만 문서로써 확인된 일정한 신분적 자유의 통속적 해석의 영향

아래 영국의 신하 자체의 국민 자유권으로서 성립한 것이며, 거기에 관해서는 국

왕도 그 밖의 어떠한 정치적 권력도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하여 모든 인간 자

체의 권리라는 개념에로의 이행은 종교적, 특히 재침례론자의 영향의 때때로 아주

강력한 협조에 인도되어 본질적으로는 17, 18세기의 합리주의적인 계몽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도된 것이다.

제4절 자연법과 자유권

자연법의 공리는 다양한 유형에 소속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여기서는 특히 경

제질서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을 관찰하기로 한다. 실정법의 자연법적 정당성은 형

식적 조건에 결부시킬 수 있거나 또는 실질적 조건에 결부시킬 수 있거나의 어느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한 형식적 자연법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구별은 명확하지 않

다. 왜냐하면 순수한 형식적 자연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전적으로 내

용이 빈약한 일반적인 법률개념으로 떨어져버릴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자의 대립은 아주 중요하다. 첫 번째 종류의 가장 순수한 유형은 17,

18세기에 처음으로 기술한 바와 같은 영향 아래 나타난 자연법이며, 그중에서도

계약이론의 형상에 있어서 그것도 특히 계약이론의 개인주의적 형식에서 성립한

자연법이다. 모든 정당한 법은 법의 정립에 근거하며, 법의 정립 자체는 궁극적으

로는 언제나 합리적 합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 합의는 사실상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제정법의 성립의 방법을 규제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현실적인 근원계

약(Urvertrag)에 근거하는 것이거나 또는 법의 내용이이성적인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질서의 개념에 반하지 않는 경우에 이러한 법만이 정당화된다는 관

념적인 의미에서의 것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의 본질적 요소는 「자

유권」이며 계약의 자유이다. 자발적인 합리적 계약은 국가를 포함하는 모든 결합

의 현실적·역사적 근거로서 혹은 평가의 조정적 규준으로서 자연법적 구성의 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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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8 36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인 형식적 원칙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형식적 자연법처럼 이러한 형식적 자

연법도 따라서 원칙적으로 목적계약에 의해서 정당하게 얻은 권리의 체계에 근거

하는 것이며 또한 경제적 재산에 관한 한 소유권의 완전한 발전에 의해서 창조된

경제적인 합의공동체에 근거하는 것이다. 전부와의 자유로운 계약(근원계약)에 의

하여 또는 개개의 타자와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서 얻어진 정당한 소유권, 또 그

러한 소유권에 관한 처분의 자유 그리고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경쟁은 형식적 자연

법의 자명한 요소이다. 따라서 계약의 자유는 계약이나 공동행위로서 그것이 정당

화하는 자연법 자체를 일반적으로 침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영구히 시효에 걸리지

않는 자유권을 침해하지 못한다는 한도에서 형식적 제한을 가졌다 - 이것은 개인

의 사적 협정이나 단체기관의 조직적인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성원의 종순이

문제로 되는 경우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은 정치적 노예신분에도 사법적 노예신분

에도 유효하게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는 어떠한 규정도 개인의 소

유와 그의 노동력에 관한 개인의 자유로운 처분을 유효하게 제한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자유로운」노동협약의 일정한내용을 금지하는 모든 법률상의 「노동자보호」

는 따라서 계약의 자유에의 간섭이며, 그리고 미국의 대법원[196]은 그러므로 최근

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규정이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보더라도 헌법의 자연법적 서

언의 기초에 비추어 볼 때 무효라는 설을 고집했었다. 그러나 자연법적으로 정당한

것에 관한 실질적인 규준은 「자연」과 「이성」이다. 양자 및 양자에서 나오는 규칙,

즉 행해지는 것의 보편적 규칙과 보편적으로 유효한 규범과는 일치하는 것으로 생

각된다. 인간의 「이성」의 인식은 「사물의 본성」, 즉 근대적으로 표현하면 「사물의 논

리」(Logik der Ding)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타당해야 할 것은 사실상 도처에

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개념의 논리적 형성에 의해서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얻어진 「규범」은 「자연법칙」과 같은 의미에서 「신도 병경

할 수 없는」, 또한 법질서도 거기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보

편적으로 구속적인 규칙에 속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로운 물적 교환의 과정을

거쳐 화폐기능에 도달하는, 바꾸어 말하면 금속적 화폐의(「금속화폐주의」) 존재는

사물의 본성과 얻어진 권리의 정당성의 근거에 부합하였다. 따라서 19세기에서도

때에 따라서 광신자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주장되었다. 즉 법질서는 법의 정

당한 요소를 「인위적인」 화폐의 창조의 불법성에 의해서 더럽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국가를 파멸시켜야 할 자연적 의무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법의 침해는

국가의 「개념」을 지양하는 것이니까 라고.

제5절 형식적 자연법의 실질적 자연법에로의 변화

자연법에서의 이러한 형식주의의 약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립하였다. 먼저 첫

째로, 자연법은 기존의 질서와의 관계를 얻기 위해서 계약의 자유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권리의 정당한 취득근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상속

법에 의한 취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속법을 자연법적으로 근거지우

려는 다양한 시도는 형식법학적인 성격을 지닌 시도가 아니라 법철학적 성격의 시

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결국 실

질적인 계기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또 아주 인공적인 구성이 들어오는 일이 많다.

유효한 법의 다수의 그 밖의 제도는 실용적으로 공리적인 이외에는 형식적으로 정

당화되지 않았다. 자연법적 「이성」은 그러한 「정당화」를 통하여 공리적 관찰방법의

길에로 미끄러지는 것이 통례이며, 이것은 「이성」의 개념의 추이에 나타났다. 순수

하게 형식적인 자연법에서는 이성적인 것은 자연과 논리의 영원한 질서 - 양자는

쉽게 교차된다 - 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영국의 「이성적인 것」의 개

념은 처음부터 「실용적으로 소용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의의를 포

함한다. 그 기초 위에 실용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로 되는 것은 자연과 이성에 의해

서 의욕된 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질적인 전제의

이성의 개념에로의 명확한 삽입 - 이러한 실질적인 전제는 물론 객관적으로는 사

실상 고래로부터 이성의 개념 안에 잠재적으로 살아있었다 - 을 의미하였다. 사실

상 각기의 개념의 이러한 추이의 도움으로, 예컨대 미국의 대법원은 최근세에 아주

포괄적으로 형식적 자연법에의 구속을 제거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예컨대 사회

적 입법의 일정한 부분의 효력을 확인하는 가능성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취득된 권리의 정당성이 취득방법의 형식적 법률적 특색에

고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실질적 경제적 특색에 고착하자마자, 형식적

자연법은 실질적 자연법으로 변화한 것이다. 라살레의 취득된 권리의 체계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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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68 36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인 형식적 원칙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형식적 자연법처럼 이러한 형식적 자

연법도 따라서 원칙적으로 목적계약에 의해서 정당하게 얻은 권리의 체계에 근거

하는 것이며 또한 경제적 재산에 관한 한 소유권의 완전한 발전에 의해서 창조된

경제적인 합의공동체에 근거하는 것이다. 전부와의 자유로운 계약(근원계약)에 의

하여 또는 개개의 타자와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서 얻어진 정당한 소유권, 또 그

러한 소유권에 관한 처분의 자유 그리고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경쟁은 형식적 자연

법의 자명한 요소이다. 따라서 계약의 자유는 계약이나 공동행위로서 그것이 정당

화하는 자연법 자체를 일반적으로 침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영구히 시효에 걸리지

않는 자유권을 침해하지 못한다는 한도에서 형식적 제한을 가졌다 - 이것은 개인

의 사적 협정이나 단체기관의 조직적인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성원의 종순이

문제로 되는 경우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은 정치적 노예신분에도 사법적 노예신분

에도 유효하게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점에서는 어떠한 규정도 개인의 소

유와 그의 노동력에 관한 개인의 자유로운 처분을 유효하게 제한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자유로운」노동협약의 일정한내용을 금지하는 모든 법률상의 「노동자보호」

는 따라서 계약의 자유에의 간섭이며, 그리고 미국의 대법원[196]은 그러므로 최근

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규정이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보더라도 헌법의 자연법적 서

언의 기초에 비추어 볼 때 무효라는 설을 고집했었다. 그러나 자연법적으로 정당한

것에 관한 실질적인 규준은 「자연」과 「이성」이다. 양자 및 양자에서 나오는 규칙,

즉 행해지는 것의 보편적 규칙과 보편적으로 유효한 규범과는 일치하는 것으로 생

각된다. 인간의 「이성」의 인식은 「사물의 본성」, 즉 근대적으로 표현하면 「사물의 논

리」(Logik der Ding)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타당해야 할 것은 사실상 도처에

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개념의 논리적 형성에 의해서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얻어진 「규범」은 「자연법칙」과 같은 의미에서 「신도 병경

할 수 없는」, 또한 법질서도 거기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보

편적으로 구속적인 규칙에 속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로운 물적 교환의 과정을

거쳐 화폐기능에 도달하는, 바꾸어 말하면 금속적 화폐의(「금속화폐주의」) 존재는

사물의 본성과 얻어진 권리의 정당성의 근거에 부합하였다. 따라서 19세기에서도

때에 따라서 광신자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주장되었다. 즉 법질서는 법의 정

당한 요소를 「인위적인」 화폐의 창조의 불법성에 의해서 더럽히는 것보다는 오히려

국가를 파멸시켜야 할 자연적 의무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법의 침해는

국가의 「개념」을 지양하는 것이니까 라고.

제5절 형식적 자연법의 실질적 자연법에로의 변화

자연법에서의 이러한 형식주의의 약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립하였다. 먼저 첫

째로, 자연법은 기존의 질서와의 관계를 얻기 위해서 계약의 자유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권리의 정당한 취득근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상속

법에 의한 취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속법을 자연법적으로 근거지우

려는 다양한 시도는 형식법학적인 성격을 지닌 시도가 아니라 법철학적 성격의 시

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결국 실

질적인 계기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또 아주 인공적인 구성이 들어오는 일이 많다.

유효한 법의 다수의 그 밖의 제도는 실용적으로 공리적인 이외에는 형식적으로 정

당화되지 않았다. 자연법적 「이성」은 그러한 「정당화」를 통하여 공리적 관찰방법의

길에로 미끄러지는 것이 통례이며, 이것은 「이성」의 개념의 추이에 나타났다. 순수

하게 형식적인 자연법에서는 이성적인 것은 자연과 논리의 영원한 질서 - 양자는

쉽게 교차된다 - 로부터 연역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영국의 「이성적인 것」의 개

념은 처음부터 「실용적으로 소용된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라고 하는 의의를 포

함한다. 그 기초 위에 실용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로 되는 것은 자연과 이성에 의해

서 의욕된 법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질적인 전제의

이성의 개념에로의 명확한 삽입 - 이러한 실질적인 전제는 물론 객관적으로는 사

실상 고래로부터 이성의 개념 안에 잠재적으로 살아있었다 - 을 의미하였다. 사실

상 각기의 개념의 이러한 추이의 도움으로, 예컨대 미국의 대법원은 최근세에 아주

포괄적으로 형식적 자연법에의 구속을 제거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예컨대 사회

적 입법의 일정한 부분의 효력을 확인하는 가능성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취득된 권리의 정당성이 취득방법의 형식적 법률적 특색에

고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실질적 경제적 특색에 고착하자마자, 형식적

자연법은 실질적 자연법으로 변화한 것이다. 라살레의 취득된 권리의 체계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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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0 37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정한 문제를 자연법적으로 형식적 수단에 의해서 헤겔의 발전이론의 형식수단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것 시도되었다. 실정적 규정에 근거하여 형식적으로 정당하게

취득된 권리의 불가침성이 전제로 되었었다.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자연법적 제한

은 이른바 법률의 반동적 힘의 문제에 관계하여, 또 거기에 관련된 특권폐지 때의

국가의 배상의무의 문제에 관계하여 나타난다. 여기서 관심되지 않는 해결의 시도

는 전연 형식적이며 자연법적인 성격의 것이다.

실질적 자연법에의 결정적인 변동은 특히 자기 자신의 노동에 의한 취득의 배타

적인 정당성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론과 결합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적 이론에 대

해서는 상속법이나 보증된 독점에 의한 무상의 취득뿐만 아니라 또 계약자유라는

형식적 원리도 계약에 의해서 취득된 권리의 근본적인 정당성도 전부 포기하기 때

문이다 - 그 이유는 물적 재의 전유는 전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취득근거로서

의 노동에 근거하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실질적으로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다.

제6절 자연법적 이데올로기의 계급관계

계약의 자유라는 형식적인 합리주의적 자연법과 노동소득의 배타적인 정당성이

라는 실질적 자연법은 모두 당연히 아주 강력한 계급관계를 가진다. 계약의 자유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정당한 소유에 관한 모든 규정은 물론 생산수단의 결정적

인 소유에 관여하는 시장관계인의 자연법이었다. 반대로 누구든지 그의 노동에 의

해서는 생산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 의한 토지의 특수적인 점유불[198]가능의 교설

은, 토지공동체의 폐쇄성에 대한 항의는 토지독점자의 속박 아래 좁혀진 활동의

여지가 강제된, 토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한 농민의 계급상태에 일치하는 것임

은 명백하고, 그와 동시에 농업적인 재산생산의 수익에 관하여 주로 토지의 자연적

인 사정이 결정적이며 동시에 토지점유가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아직 폐쇄되지 아

니한 곳, 또한 농업에서의 노동조직으로서의 합리적인 「대경영」이 결여되었으며 또

한 그룬트헤르의 지대(地代)가 종종 「흑토」의 영역에서 인정되듯이, 순수한 소작 지

대이거나 또는 농민의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이표어가 격렬한 설득

력을 얻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농민의 자연법은 다의적으로 적

극적으로 전용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1) 자기의 노동력의 충분한 이용의 범위의

토지의 지분에 대한 권리이며 (러시아어의 「노동기준」[trudowajanorma]) (2) 전통

적인 불가결의 수요충족의 범위에서의 토지소유에 대한 권리이고 (러시아어의 「소

비기준」[potrebitjelnaja norma]) - 바꾸어 말하면 관용적인 술어로서는 「노동권」

과 「생존권」이며 - 그리고 양자와 결합하는 (3) 충분한 노동소득에 대한 권리를 결

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의 러시아의 혁명은 현대에 생각할 수 있는 한

아마 세계에서 마지막 자연법적 농업혁명일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자연법 규범의

조정불가능한 대립으로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출혈사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자

연법규범은 서로 대립할 뿐만 아니라 또 역사적인 또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또는 실

용적·경제적인 또는 끝으로 - 자기의 고유한 교설 외의 모순 때문에 혼미에 빠졌

기 때문인데 -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동기지어진 농민의 강령에 대하여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 개의 「사회주의적인」 개인의 권리는 주지하듯이 공업적 프롤레

타리아트의 관념적 세계에서도 그 역할을 하였다. 세 개의 권리 중에서 첫 번째 권

리와 두 번째 권리는 모두 노동자의 수공업적 존재조건에서도 자본주의적 존재조

건 하에서도 이론적으로 의미가 풍부할 수 있으나, 이에 반하여 세 번째 권리는 수

공업적 존재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고, 자본주의적인 존재조건 하에는 결코 가능하

지 않다. 단지 교환에 있어서 일정한 원가의 엄격하고 전통적인 보존이 보편적으

로 행해진다고 생각되는 (또는 실행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

주의적 생산분업은 곧 직접적 농업생산의 장소로부터 농업도구, 인공비료 등의 작

업장에 농업토지소득의 가산(加算, Zurechnung)을 옮겼으며, 같은 것이 공업의

영역에서도 행하여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장에서의 생산의 환가가 자유경쟁에

의해서 수익을 결정하는 곳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권리의 내용은 불가피하게 - 이

미 결코 존재하지 않는 - 개인적인 「노동소득」이라는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공통

이 계급상태에 있는 것의 단체적 요구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수 있었다. 실제로 그

것도 그때 「생활임금」(living wage)에 대한 요구가 되고, 따라서 「관행적 요구에 의

해서 결정된 최저생활비에 대한 권리」의 변종으로 되는 것으로서 중세의 교회의

도덕에 의해서 요구된 「정당한 대가」와 유사한 것이다. 「정당한 대가」는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당해 가격으로서 당해 수공업자가 신분에 상응하는 생계를 발견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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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0 37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정한 문제를 자연법적으로 형식적 수단에 의해서 헤겔의 발전이론의 형식수단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것 시도되었다. 실정적 규정에 근거하여 형식적으로 정당하게

취득된 권리의 불가침성이 전제로 되었었다.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자연법적 제한

은 이른바 법률의 반동적 힘의 문제에 관계하여, 또 거기에 관련된 특권폐지 때의

국가의 배상의무의 문제에 관계하여 나타난다. 여기서 관심되지 않는 해결의 시도

는 전연 형식적이며 자연법적인 성격의 것이다.

실질적 자연법에의 결정적인 변동은 특히 자기 자신의 노동에 의한 취득의 배타

적인 정당성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론과 결합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적 이론에 대

해서는 상속법이나 보증된 독점에 의한 무상의 취득뿐만 아니라 또 계약자유라는

형식적 원리도 계약에 의해서 취득된 권리의 근본적인 정당성도 전부 포기하기 때

문이다 - 그 이유는 물적 재의 전유는 전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취득근거로서

의 노동에 근거하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실질적으로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

문이다.

제6절 자연법적 이데올로기의 계급관계

계약의 자유라는 형식적인 합리주의적 자연법과 노동소득의 배타적인 정당성이

라는 실질적 자연법은 모두 당연히 아주 강력한 계급관계를 가진다. 계약의 자유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정당한 소유에 관한 모든 규정은 물론 생산수단의 결정적

인 소유에 관여하는 시장관계인의 자연법이었다. 반대로 누구든지 그의 노동에 의

해서는 생산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 의한 토지의 특수적인 점유불[198]가능의 교설

은, 토지공동체의 폐쇄성에 대한 항의는 토지독점자의 속박 아래 좁혀진 활동의

여지가 강제된, 토지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한 농민의 계급상태에 일치하는 것임

은 명백하고, 그와 동시에 농업적인 재산생산의 수익에 관하여 주로 토지의 자연적

인 사정이 결정적이며 동시에 토지점유가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아직 폐쇄되지 아

니한 곳, 또한 농업에서의 노동조직으로서의 합리적인 「대경영」이 결여되었으며 또

한 그룬트헤르의 지대(地代)가 종종 「흑토」의 영역에서 인정되듯이, 순수한 소작 지

대이거나 또는 농민의 기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이표어가 격렬한 설득

력을 얻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농민의 자연법은 다의적으로 적

극적으로 전용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1) 자기의 노동력의 충분한 이용의 범위의

토지의 지분에 대한 권리이며 (러시아어의 「노동기준」[trudowajanorma]) (2) 전통

적인 불가결의 수요충족의 범위에서의 토지소유에 대한 권리이고 (러시아어의 「소

비기준」[potrebitjelnaja norma]) - 바꾸어 말하면 관용적인 술어로서는 「노동권」

과 「생존권」이며 - 그리고 양자와 결합하는 (3) 충분한 노동소득에 대한 권리를 결

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10년의 러시아의 혁명은 현대에 생각할 수 있는 한

아마 세계에서 마지막 자연법적 농업혁명일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자연법 규범의

조정불가능한 대립으로 순수하게 관념적으로 출혈사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자

연법규범은 서로 대립할 뿐만 아니라 또 역사적인 또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또는 실

용적·경제적인 또는 끝으로 - 자기의 고유한 교설 외의 모순 때문에 혼미에 빠졌

기 때문인데 -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동기지어진 농민의 강령에 대하여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 개의 「사회주의적인」 개인의 권리는 주지하듯이 공업적 프롤레

타리아트의 관념적 세계에서도 그 역할을 하였다. 세 개의 권리 중에서 첫 번째 권

리와 두 번째 권리는 모두 노동자의 수공업적 존재조건에서도 자본주의적 존재조

건 하에서도 이론적으로 의미가 풍부할 수 있으나, 이에 반하여 세 번째 권리는 수

공업적 존재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고, 자본주의적인 존재조건 하에는 결코 가능하

지 않다. 단지 교환에 있어서 일정한 원가의 엄격하고 전통적인 보존이 보편적으

로 행해진다고 생각되는 (또는 실행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

주의적 생산분업은 곧 직접적 농업생산의 장소로부터 농업도구, 인공비료 등의 작

업장에 농업토지소득의 가산(加算, Zurechnung)을 옮겼으며, 같은 것이 공업의

영역에서도 행하여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장에서의 생산의 환가가 자유경쟁에

의해서 수익을 결정하는 곳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권리의 내용은 불가피하게 - 이

미 결코 존재하지 않는 - 개인적인 「노동소득」이라는 의미를 상실한 것이며 공통

이 계급상태에 있는 것의 단체적 요구로서의 의미만을 지닐 수 있었다. 실제로 그

것도 그때 「생활임금」(living wage)에 대한 요구가 되고, 따라서 「관행적 요구에 의

해서 결정된 최저생활비에 대한 권리」의 변종으로 되는 것으로서 중세의 교회의

도덕에 의해서 요구된 「정당한 대가」와 유사한 것이다. 「정당한 대가」는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당해 가격으로서 당해 수공업자가 신분에 상응하는 생계를 발견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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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2 37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있는가 하는 검사 (그리고 그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에 의해서 결정된다.

교회의 경제윤리의 가장 중요한 자연법적 요소였던 「정당한 대가」는 아주 일반적

으로 같은 운명에 빠졌다. 교회의 문헌에서의 「정당한 대가」의 결정 근거의 토의를

읽으면 사람은 시장공동체의 진보에 따라서 이러한 「생계의 원칙」에 부합되는 노동

가치의 가격의 「자연적」가격으로서의 경쟁가격에 의한 점진적인 격퇴의 모양을 추

구할 수가 있다. 이미 플로렌스의 안토니오의 저작에서는 후자는 결정적으로 우세

하였다. 물론 청교도에 있어서는 그것은 완전히 지배적이었다. 「부자연한」 것으로

서 배척해야 할 가격은 그 후 독점이나 그 밖의 자의적인 인간적 간섭에 의해서 방

해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경쟁에 근거하지 않는 가격이었다. 이러한 원칙은 청교

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전체 앵글로색슨의 세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작용

을 미쳤다. 이러한 원칙은 그것의 자연법적 위엄에 의해서 유럽 대륙에서의 바스티

아에 의한 순수하게 공리적이며 경제적인 이론보다도 언제나 훨씬 부담력이 있는

「자유경쟁」의 이념을 위한 기둥인 것을 증명하였다.

제7절 자연법의 실용적 의미와 그 해체

모든 자연법의 교설은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법창조와 법발견에 다 같이 뚜렷

하게 영향을 미쳤다. 자연법의 교설은 부분적으로는 그 성립의 경제적 조건들보다

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하였으며 법발전의 독자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우선 첫째로 논리적 추상적 법에로의 경향, 일반적으로 법사상에서

의 논리의 힘을 높였다. 그 영향은 실질적으로 극도로 다양하였으나 그러나 어디에

서도 중요하였다. 여기는 자연법 교설의 영향과 여러 가지의 자연법 공리의 변화와

타협을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장소는 아니다. 혁명적 법전편찬 뿐만 아니라 혁명 이

전의 합리주의적인 근대국가와 관료주의의 법전편찬도 역시 자연법의 교설에 의해

서 영향을 받았으며, 법전[200]편찬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특수한 정당성은 결국

그 법의 「합리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개념에 인도되어 도덕적·

법률적 형식으로부터 공리적·기술적 실질에의 이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

리고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미 관찰하였다. 이러한 변동도 물론 우리가 이미

파악한 이유에 의해서 혁명 이전적인 가장적 권력에 대해서는 관계가 깊었다. 다른

한 편 반대로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 아래 실시된 혁명의 법전편찬은 정치적 지배권

력에 대해서 개인과 개인의 법영역의 형식적 자연법적 보증을 강조하고 높였다. 그

때 사회주의의 성장은 최초 대중의 머릿속에서의 그것 이상으로 대중 속의 지식층

에 속하는 이론가들의 머릿속에서의 실질적 자연법 교설의 높아가는 지배를 의미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자연법의 교설은 재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영향을 주기에 이르기 전에 이미 바

로 이러한 지식계급 자체에 그 급격한 영향을 미쳤던 실증주의적인 상대주의적 진

화론적인 회의에 의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형이상학적인 급진주의의

간섭 아래 대중의 종말론적 기대는 요청이 아니라 예언에 그 거점을 구하였다. 그

결과 혁명적 법이론에 근거하여 자연법학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론적 교설에 의해

서 파괴되었다. 관학 측에서는 일부는 꽁트(Comte)의 발전도식에 의해서, 일부는

역사주의의 「유기적」발전이론에 의해서 자연법학은 근절되었다. 「현실 정치」라는 혼

입물 역시 동일한 영향력을 가졌다. 이것은 특히 공법의 취급에서 근대 권력정치의

감화를 받으면서 얻어진 것이다.

공법학 이론가의 방법은 고래 또 현대에도 광범위하게 그들이 반대하는 법률적

구성의 귀결로서 그 구성 중에서 나오는 실용적·정치적으로 불합리한 결론을 지

시하고, 그것으로써 해결이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는 처치를 취한다. 이러한 방법

은 형식적 자연법의 방법과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다른 한 편 실질적 자연

법 자체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밖의 점에서는 유럽 대륙의 법학은 최근에 이

르기까지 본질적으로 논란되지 아니한 실정법의 논리적 「완결성」이라는 공리에 의

해서 활동하였다. 그것은 최초 벤담에 의해서 코먼로의 선례로서의 경제성과 비합

리성에 대한 반대로서 표시되었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모든 초실정법, 특히 자

연법을 거부하는 모든 방향에 의해서 지지되고 또 그것에 관한 한에서 역사법학

파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법실무가에 대한 자연법의 공인되지 아니한 공리의 잠

재저인 영향력이 완전히 근절된다는 것은 물론 거의 불가능하다. 자연법의 공리론

은 형식적 자연법공리와 실질적 자연법 공리의 상호 조정될 수 없는 상반성의 결과

로서, 또 발전이론의 다양한 형식의 업적의 결과로서 또 일반적으로 모든 형이상

학적 공리의 계속하는 해체와 상대화의 결과로서 일부는 법률적 합ㄹ주의 자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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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2 37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있는가 하는 검사 (그리고 그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에 의해서 결정된다.

교회의 경제윤리의 가장 중요한 자연법적 요소였던 「정당한 대가」는 아주 일반적

으로 같은 운명에 빠졌다. 교회의 문헌에서의 「정당한 대가」의 결정 근거의 토의를

읽으면 사람은 시장공동체의 진보에 따라서 이러한 「생계의 원칙」에 부합되는 노동

가치의 가격의 「자연적」가격으로서의 경쟁가격에 의한 점진적인 격퇴의 모양을 추

구할 수가 있다. 이미 플로렌스의 안토니오의 저작에서는 후자는 결정적으로 우세

하였다. 물론 청교도에 있어서는 그것은 완전히 지배적이었다. 「부자연한」 것으로

서 배척해야 할 가격은 그 후 독점이나 그 밖의 자의적인 인간적 간섭에 의해서 방

해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경쟁에 근거하지 않는 가격이었다. 이러한 원칙은 청교

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전체 앵글로색슨의 세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작용

을 미쳤다. 이러한 원칙은 그것의 자연법적 위엄에 의해서 유럽 대륙에서의 바스티

아에 의한 순수하게 공리적이며 경제적인 이론보다도 언제나 훨씬 부담력이 있는

「자유경쟁」의 이념을 위한 기둥인 것을 증명하였다.

제7절 자연법의 실용적 의미와 그 해체

모든 자연법의 교설은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법창조와 법발견에 다 같이 뚜렷

하게 영향을 미쳤다. 자연법의 교설은 부분적으로는 그 성립의 경제적 조건들보다

도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하였으며 법발전의 독자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우선 첫째로 논리적 추상적 법에로의 경향, 일반적으로 법사상에서

의 논리의 힘을 높였다. 그 영향은 실질적으로 극도로 다양하였으나 그러나 어디에

서도 중요하였다. 여기는 자연법 교설의 영향과 여러 가지의 자연법 공리의 변화와

타협을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장소는 아니다. 혁명적 법전편찬 뿐만 아니라 혁명 이

전의 합리주의적인 근대국가와 관료주의의 법전편찬도 역시 자연법의 교설에 의해

서 영향을 받았으며, 법전[200]편찬에 의해서 창조된 법의 특수한 정당성은 결국

그 법의 「합리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개념에 인도되어 도덕적·

법률적 형식으로부터 공리적·기술적 실질에의 이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

리고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미 관찰하였다. 이러한 변동도 물론 우리가 이미

파악한 이유에 의해서 혁명 이전적인 가장적 권력에 대해서는 관계가 깊었다. 다른

한 편 반대로 부르주아 계급의 영향 아래 실시된 혁명의 법전편찬은 정치적 지배권

력에 대해서 개인과 개인의 법영역의 형식적 자연법적 보증을 강조하고 높였다. 그

때 사회주의의 성장은 최초 대중의 머릿속에서의 그것 이상으로 대중 속의 지식층

에 속하는 이론가들의 머릿속에서의 실질적 자연법 교설의 높아가는 지배를 의미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질적 자연법의 교설은 재판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영향을 주기에 이르기 전에 이미 바

로 이러한 지식계급 자체에 그 급격한 영향을 미쳤던 실증주의적인 상대주의적 진

화론적인 회의에 의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형이상학적인 급진주의의

간섭 아래 대중의 종말론적 기대는 요청이 아니라 예언에 그 거점을 구하였다. 그

결과 혁명적 법이론에 근거하여 자연법학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론적 교설에 의해

서 파괴되었다. 관학 측에서는 일부는 꽁트(Comte)의 발전도식에 의해서, 일부는

역사주의의 「유기적」발전이론에 의해서 자연법학은 근절되었다. 「현실 정치」라는 혼

입물 역시 동일한 영향력을 가졌다. 이것은 특히 공법의 취급에서 근대 권력정치의

감화를 받으면서 얻어진 것이다.

공법학 이론가의 방법은 고래 또 현대에도 광범위하게 그들이 반대하는 법률적

구성의 귀결로서 그 구성 중에서 나오는 실용적·정치적으로 불합리한 결론을 지

시하고, 그것으로써 해결이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는 처치를 취한다. 이러한 방법

은 형식적 자연법의 방법과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다른 한 편 실질적 자연

법 자체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밖의 점에서는 유럽 대륙의 법학은 최근에 이

르기까지 본질적으로 논란되지 아니한 실정법의 논리적 「완결성」이라는 공리에 의

해서 활동하였다. 그것은 최초 벤담에 의해서 코먼로의 선례로서의 경제성과 비합

리성에 대한 반대로서 표시되었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모든 초실정법, 특히 자

연법을 거부하는 모든 방향에 의해서 지지되고 또 그것에 관한 한에서 역사법학

파에 의해서도 지지되었다. 법실무가에 대한 자연법의 공인되지 아니한 공리의 잠

재저인 영향력이 완전히 근절된다는 것은 물론 거의 불가능하다. 자연법의 공리론

은 형식적 자연법공리와 실질적 자연법 공리의 상호 조정될 수 없는 상반성의 결과

로서, 또 발전이론의 다양한 형식의 업적의 결과로서 또 일반적으로 모든 형이상

학적 공리의 계속하는 해체와 상대화의 결과로서 일부는 법률적 합ㄹ주의 자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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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4 37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의해서, 일부는 현대의 지식계급의 회의에 의해서 현대에는 신뢰를 상실해 버렸다.

여하튼 자연법의 공리론은 법의 기초로서의 부담력을 상실하였다. 법규범의 적극

적 종교적 표시에의 강한 신앙이나 태고의 전통의 침범하지 못할 신성성에의 강한

신앙에 비교한다면 추상에 의해서 얻어진 규범은 가령 최고의 설득력을 가지는 것

이라도 이러한 이행(법의 기초로서의 부담력)을 위해서는 너무나 궤변의 성질이 강

하다. 그 결과로서 법실증주의는 우선 끊임없이 전진하여 갔다. 옛 자연법사상의

쇠퇴는 법의 내재적 성질에 의해서 법 그것에다가 초월적인 품위를 부여하려는 가

능성을 원칙적으로 해소시켰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법의 태반이 특히 많은 원리적

으로, 특히 중요한 규정이 이익조정의 소산이며 기술적 수단이라는 사실에 명료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바로 자연법의 초법학적인 정박상태에서의 이러한 고사(枯死)

는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발전에 속하였다. 즉 구체적인 법질서의 개개의 규정

의 존엄에 대한 회의를 높였으나, 바로 그럼으로써 그때그때에 정당한 것으로서 행

세하는 권력의 지금은 단지 공리적 가치 외에는 인정되지 않는 힘에의 사실적 종

순성을 전체로서 극도로 촉진한 이데올로기적 발전에, 특히 법실무가 단체의 내부

에서는 말이다.

제8절 법실증주의와 법조계급

기존의 법의 유지라는 직업적 의무는 법실무가를 일반적으로 「보수적」 권력의 권

내에 편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법실무가가 「아래」로부터는 「사회적」

이념의 이름에서처럼 「위」로부터는 가장적 권력 및 정치적 권력의 복지관심이라는

이름에서의 실질적 요청을 냉냉한 태도로서 응접한다는 이중의 의미에서 종종 진

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무특권자의, 그리고

특히 형식적 법의 평등성의 대변인의 역할은 관계인에의 그들의 직접적 관계에 의

해서, 또 그들의 영리적이며 사회적으로 동요적인 것으로서 평가를 받는 사인으

로서의 성질에 의해서 특히 변호사에 접근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자치체의 인민

운동에서 나중에는 근대의 전체 부르주아 혁명에서 또 다시는 사회주의적 정당에

서 변호사와 법률가는 일반적으로 탁월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수하게 민주적인 정

치단체(프랑스·이탈리아·미국)에서는 그들은 단지 법적 가능성에 관해서만 전문

[202]적 조예 있는 기술자로서 또는 명망가로서 또는 변호의뢰인의 절친한 동무로

서 정치적 경력에 대한 주어진 후보자이다.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사정에 따라서는

이데올로기적 이유에 근거하여 또는 신분적 연대에 근거하여 또는 경제적 이유에

근거하여 가장적 권력에 대한 아주 강력한 반대를 형성했었다. 모든 외부적 권리

와 의무의 일정한 규칙적 확실성은 재판관에 대해서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가

치 있는 가치로서 나타나며, 이러한 특수한 그들의 사상의 시민적 기초는 권위적·

가산적 자의와 은총을 억제하기 위하여 인도되는 정치적 투쟁에서 그들의 상상하

는 입장의 원인이 되었다. 법조계급이 권위적 권력 측에 서는가 또는 반권위적 권

력측에 서는가는, 일단 사회질서의 「규칙성」이 달성된 후에는 「질서」자체의 사실에

중점이 두어지거나 또는 개인의 영역에 주어지는 보증과 안정, 즉 「자유」에 중점이

두어지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라드브루흐의 구별에 의하면 법을 「규칙」으로 평

가하는가 또는 「권리」의 근거로서 평가하는가에 의해서). 그러나 이러한 대립뿐만

아니라 형식적 법이념과 실질적 법이념과의 예전의 양자택일이나 경제적으로 제약

된 후자의 강한 재생도 역시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 법률가 자신의 대항적

지위의 약화를 발생시켰다. 권위적 권력이 어떠한 기술적 수단에 의해서 재판관 계

층의 내부로부터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는가는 뒤에 논술할 것이

다. 그러나 법률가의 태도를 변경하는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적 이유 중에서 자연법

의 신념의 소실은 중대한 역할을 한다. 법조계급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전형적

으로 된 사회적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제시하는 한에서 그것은 - 영국

이나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법률가 일반으로 하여금 계몽시대의 법률가와 비교하

여, 또한 가산적 군주의 전제정치, 의회, 1860년대의 프로이센의 「순회재판관회의」

에 이르기까지의 자치체 법인의 내부에 있는 것에 비교하여 - 「질서」측에, 즉 실제

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때그때에 바로 지배적인 「정당한」 정치적 권위 측에 섰다. 그

시대가 전기한 시대보다 이전이면 이전일수록 더 강력하게 권위 측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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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서, 일부는 현대의 지식계급의 회의에 의해서 현대에는 신뢰를 상실해 버렸다.

여하튼 자연법의 공리론은 법의 기초로서의 부담력을 상실하였다. 법규범의 적극

적 종교적 표시에의 강한 신앙이나 태고의 전통의 침범하지 못할 신성성에의 강한

신앙에 비교한다면 추상에 의해서 얻어진 규범은 가령 최고의 설득력을 가지는 것

이라도 이러한 이행(법의 기초로서의 부담력)을 위해서는 너무나 궤변의 성질이 강

하다. 그 결과로서 법실증주의는 우선 끊임없이 전진하여 갔다. 옛 자연법사상의

쇠퇴는 법의 내재적 성질에 의해서 법 그것에다가 초월적인 품위를 부여하려는 가

능성을 원칙적으로 해소시켰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법의 태반이 특히 많은 원리적

으로, 특히 중요한 규정이 이익조정의 소산이며 기술적 수단이라는 사실에 명료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바로 자연법의 초법학적인 정박상태에서의 이러한 고사(枯死)

는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발전에 속하였다. 즉 구체적인 법질서의 개개의 규정

의 존엄에 대한 회의를 높였으나, 바로 그럼으로써 그때그때에 정당한 것으로서 행

세하는 권력의 지금은 단지 공리적 가치 외에는 인정되지 않는 힘에의 사실적 종

순성을 전체로서 극도로 촉진한 이데올로기적 발전에, 특히 법실무가 단체의 내부

에서는 말이다.

제8절 법실증주의와 법조계급

기존의 법의 유지라는 직업적 의무는 법실무가를 일반적으로 「보수적」 권력의 권

내에 편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법실무가가 「아래」로부터는 「사회적」

이념의 이름에서처럼 「위」로부터는 가장적 권력 및 정치적 권력의 복지관심이라는

이름에서의 실질적 요청을 냉냉한 태도로서 응접한다는 이중의 의미에서 종종 진

실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다. 무특권자의, 그리고

특히 형식적 법의 평등성의 대변인의 역할은 관계인에의 그들의 직접적 관계에 의

해서, 또 그들의 영리적이며 사회적으로 동요적인 것으로서 평가를 받는 사인으

로서의 성질에 의해서 특히 변호사에 접근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자치체의 인민

운동에서 나중에는 근대의 전체 부르주아 혁명에서 또 다시는 사회주의적 정당에

서 변호사와 법률가는 일반적으로 탁월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수하게 민주적인 정

치단체(프랑스·이탈리아·미국)에서는 그들은 단지 법적 가능성에 관해서만 전문

[202]적 조예 있는 기술자로서 또는 명망가로서 또는 변호의뢰인의 절친한 동무로

서 정치적 경력에 대한 주어진 후보자이다.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사정에 따라서는

이데올로기적 이유에 근거하여 또는 신분적 연대에 근거하여 또는 경제적 이유에

근거하여 가장적 권력에 대한 아주 강력한 반대를 형성했었다. 모든 외부적 권리

와 의무의 일정한 규칙적 확실성은 재판관에 대해서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가

치 있는 가치로서 나타나며, 이러한 특수한 그들의 사상의 시민적 기초는 권위적·

가산적 자의와 은총을 억제하기 위하여 인도되는 정치적 투쟁에서 그들의 상상하

는 입장의 원인이 되었다. 법조계급이 권위적 권력 측에 서는가 또는 반권위적 권

력측에 서는가는, 일단 사회질서의 「규칙성」이 달성된 후에는 「질서」자체의 사실에

중점이 두어지거나 또는 개인의 영역에 주어지는 보증과 안정, 즉 「자유」에 중점이

두어지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라드브루흐의 구별에 의하면 법을 「규칙」으로 평

가하는가 또는 「권리」의 근거로서 평가하는가에 의해서). 그러나 이러한 대립뿐만

아니라 형식적 법이념과 실질적 법이념과의 예전의 양자택일이나 경제적으로 제약

된 후자의 강한 재생도 역시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 법률가 자신의 대항적

지위의 약화를 발생시켰다. 권위적 권력이 어떠한 기술적 수단에 의해서 재판관 계

층의 내부로부터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는가는 뒤에 논술할 것이

다. 그러나 법률가의 태도를 변경하는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적 이유 중에서 자연법

의 신념의 소실은 중대한 역할을 한다. 법조계급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전형적

으로 된 사회적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계를 제시하는 한에서 그것은 - 영국

이나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법률가 일반으로 하여금 계몽시대의 법률가와 비교하

여, 또한 가산적 군주의 전제정치, 의회, 1860년대의 프로이센의 「순회재판관회의」

에 이르기까지의 자치체 법인의 내부에 있는 것에 비교하여 - 「질서」측에, 즉 실제

에 비추어 말한다면 그때그때에 바로 지배적인 「정당한」 정치적 권위 측에 섰다. 그

시대가 전기한 시대보다 이전이면 이전일수록 더 강력하게 권위 측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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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6 3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8장 근대법의 형식적 성질

제1절 근대법에서의 법전문화

특수적·근대적인 서구의 재판의 성격은 이러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법창조에

근거하여 성립하였는데, 그러한 서구의 재판의 성격의 기초적인 형식적 특색은 바

로 최근의 발전의 결과로 결코 분명하지는 않다.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법의 혼

합에 관하여 결정적이었던 고대의 원칙들, 즉 권리가 인적 결합의 성원의 「유효한」

자질을 - 그것은 인적 결합에 의해서 독점된다 - 나타낸다는 것, 즉 권리의 부족

적 또는 신분적 인격성이나 게노센샤프트적 단체에 의해서 또는 특권에 의해서 찬

탈되거나 합법화된 권리의 특수성은 소멸하였으며, 그와 함께 신분적 또는 특수

단체의 소송과 재판도 소멸하였다. 그러나 보든 특수적 개인적 권리 모든 특수 재

판권도 그것에 의해서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최근의 법발전은 바로 증

대하는 법의 특수성을 성숙케 하였다. 단지 효력범위의 구획의 원리만이 특징적으

로 변화시켜졌다. 그것의 전형적인 사례는 근대의 법특수화의 가장 중요한 사례의

하나로서의 상법이다. 예컨대 독일 상법전에 의하면, 이러한 특별법 아래서는 한편

으로는 일정한 종류의 계약이 존재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것, 즉 이득을 가져오는

장래의 매각을 목적으로 하는 취득은 전적으로 합리화된 법이란 의미에서 형식적

성질을 지시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거래행위가 가지는 목적합리적인

의미와 연관시킴으로써 정의된다. 그 구체적인 거래행위의 의미라 함은 미래의 다

른 거래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득」 외에는 아니다. 다른 한 편 상법에는 일정

한 종류의 인격이 존재하는데 그 인격의 결정적인 특징은 의와 같은 종류의 계약

이 그들에 의해서 「영업상」 행해진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법의 효력범위의 구획에

대하여 결정적인 것은 따라서 언어이해가 아니라 사실에 따른다면 「경영」의 개념이

다. 왜냐하면 경영은 그것이 구성요소로서의 상술과 같은 거래행위로부터 구성되

는 경우에는 상인의 경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부의 몰주관적으로, 즉 다시 말

하면 목적된 의도에 따라서 구체적인 상인의 경영에 「속하는」 계약은 어떠한 성격

이라도 마찬가지로 - 법률이 규정하는 경우에는 - 「상업거래」이다. 그 밖에 상인

의 경영에 대해서 구성요소로 되는 거래는 그것이 비상인의 임시거래로서 체결되

는 경우에도 특별한 방법에 속한다. 따라서 효력범위의 구획에 관해서 한편으로는

개개의 거래의 몰주관적인 성질 (특히 목적합리적인 「의미」), 다른 한 편으로는 경

영의 합리적인 목적결합에의 몰주관적(목적합리적 의미의) 소속이 결정적인 것이

었으나 과거에 있어 일반적이었던 것처럼 합의나 특권에 의해서 법적으로 구성된

신분에의 소속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상법은 그것이 인적으로 한정되는 한 계

급법이지 신분법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와의 이러한 대립은 의문 없이 상대적인 것

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상업의 법 또는 그 밖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직업」의 법

에 관해서[204] 구획의 원칙은 종래부터 외부적 형식에서는 종종 다르지만 사실상

내부적으로는 유사한 순수한 몰주관적 성격을 가졌다. 단지 그것과 더불어 순수

하게 신분적으로 구획된 법특수화가 훨씬 중대한 양적 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존재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직업적 특별법의 효력범위의 구획은 - 어떤 통일체에의 귀속

에 근거하여 행해지지 않는 한 - 대부분은 특허나 특권의 취득에 의해서 전적으

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독일의 상법에서 시행된 상인이 상업등기등록

을 필함으로써 자격이 부여된다는 경우에는 상법의 인적 범위는 순수하게 형식적

인 특색에 의해서 구획되는데 그 밖의 경우에는 영업의 모습이라는 경제적 의미에

따라서 구획되는 것이다. 그 밖의 직업계급에 관한 특별법은 주로 마찬가지로 몰

주관적 징표에 따르는 것으로서, 그리고 일정한 사정 아래서만 형식적으로 구획되

는 것이다. - 특수적인 근대의 특별법에 다수의 특별재판소나 특수적 특별소송이

부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법이 성립하는 이유에는 본질적으로 두 종류가 있다. 우선 첫째로,

그것은 직업분화의 결과이며 또 재산거래와 경제적·영리적 재산생산의 관계인을

고려에 넣는 것이 점점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러한 특수화

에 의해서 그것의 법적 사무의 전문적인 조예 깊은 해결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와 함께 바로 최근에 있어 특수화의 두 번째 이유로서 구체적인 사건에 보다 적합

한 보다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 정규의 소송의 형식성을 회피하려는 바람이 증대하

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본질적 관삼으로부터의 법형식주의의 약화를 의

미하였다. 그러한 한에서 이 현상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볼 수 있었던 유사한 근대

화의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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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6 37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8장 근대법의 형식적 성질

제1절 근대법에서의 법전문화

특수적·근대적인 서구의 재판의 성격은 이러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법창조에

근거하여 성립하였는데, 그러한 서구의 재판의 성격의 기초적인 형식적 특색은 바

로 최근의 발전의 결과로 결코 분명하지는 않다. 「주관적」 권리와 「객관적」 법의 혼

합에 관하여 결정적이었던 고대의 원칙들, 즉 권리가 인적 결합의 성원의 「유효한」

자질을 - 그것은 인적 결합에 의해서 독점된다 - 나타낸다는 것, 즉 권리의 부족

적 또는 신분적 인격성이나 게노센샤프트적 단체에 의해서 또는 특권에 의해서 찬

탈되거나 합법화된 권리의 특수성은 소멸하였으며, 그와 함께 신분적 또는 특수

단체의 소송과 재판도 소멸하였다. 그러나 보든 특수적 개인적 권리 모든 특수 재

판권도 그것에 의해서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최근의 법발전은 바로 증

대하는 법의 특수성을 성숙케 하였다. 단지 효력범위의 구획의 원리만이 특징적으

로 변화시켜졌다. 그것의 전형적인 사례는 근대의 법특수화의 가장 중요한 사례의

하나로서의 상법이다. 예컨대 독일 상법전에 의하면, 이러한 특별법 아래서는 한편

으로는 일정한 종류의 계약이 존재한다. 그의 가장 중요한 것, 즉 이득을 가져오는

장래의 매각을 목적으로 하는 취득은 전적으로 합리화된 법이란 의미에서 형식적

성질을 지시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거래행위가 가지는 목적합리적인

의미와 연관시킴으로써 정의된다. 그 구체적인 거래행위의 의미라 함은 미래의 다

른 거래행위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득」 외에는 아니다. 다른 한 편 상법에는 일정

한 종류의 인격이 존재하는데 그 인격의 결정적인 특징은 의와 같은 종류의 계약

이 그들에 의해서 「영업상」 행해진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법의 효력범위의 구획에

대하여 결정적인 것은 따라서 언어이해가 아니라 사실에 따른다면 「경영」의 개념이

다. 왜냐하면 경영은 그것이 구성요소로서의 상술과 같은 거래행위로부터 구성되

는 경우에는 상인의 경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부의 몰주관적으로, 즉 다시 말

하면 목적된 의도에 따라서 구체적인 상인의 경영에 「속하는」 계약은 어떠한 성격

이라도 마찬가지로 - 법률이 규정하는 경우에는 - 「상업거래」이다. 그 밖에 상인

의 경영에 대해서 구성요소로 되는 거래는 그것이 비상인의 임시거래로서 체결되

는 경우에도 특별한 방법에 속한다. 따라서 효력범위의 구획에 관해서 한편으로는

개개의 거래의 몰주관적인 성질 (특히 목적합리적인 「의미」), 다른 한 편으로는 경

영의 합리적인 목적결합에의 몰주관적(목적합리적 의미의) 소속이 결정적인 것이

었으나 과거에 있어 일반적이었던 것처럼 합의나 특권에 의해서 법적으로 구성된

신분에의 소속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상법은 그것이 인적으로 한정되는 한 계

급법이지 신분법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와의 이러한 대립은 의문 없이 상대적인 것

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상업의 법 또는 그 밖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직업」의 법

에 관해서[204] 구획의 원칙은 종래부터 외부적 형식에서는 종종 다르지만 사실상

내부적으로는 유사한 순수한 몰주관적 성격을 가졌다. 단지 그것과 더불어 순수

하게 신분적으로 구획된 법특수화가 훨씬 중대한 양적 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존재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직업적 특별법의 효력범위의 구획은 - 어떤 통일체에의 귀속

에 근거하여 행해지지 않는 한 - 대부분은 특허나 특권의 취득에 의해서 전적으

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독일의 상법에서 시행된 상인이 상업등기등록

을 필함으로써 자격이 부여된다는 경우에는 상법의 인적 범위는 순수하게 형식적

인 특색에 의해서 구획되는데 그 밖의 경우에는 영업의 모습이라는 경제적 의미에

따라서 구획되는 것이다. 그 밖의 직업계급에 관한 특별법은 주로 마찬가지로 몰

주관적 징표에 따르는 것으로서, 그리고 일정한 사정 아래서만 형식적으로 구획되

는 것이다. - 특수적인 근대의 특별법에 다수의 특별재판소나 특수적 특별소송이

부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법이 성립하는 이유에는 본질적으로 두 종류가 있다. 우선 첫째로,

그것은 직업분화의 결과이며 또 재산거래와 경제적·영리적 재산생산의 관계인을

고려에 넣는 것이 점점 불가피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러한 특수화

에 의해서 그것의 법적 사무의 전문적인 조예 깊은 해결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

와 함께 바로 최근에 있어 특수화의 두 번째 이유로서 구체적인 사건에 보다 적합

한 보다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 정규의 소송의 형식성을 회피하려는 바람이 증대하

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본질적 관삼으로부터의 법형식주의의 약화를 의

미하였다. 그러한 한에서 이 현상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볼 수 있었던 유사한 근대

화의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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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8 3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2절 근대법의 발전에서의 반형식적 경향

법과 소송의 일반적 발전은 이론적인 「발전단계」로 나누면 「법예언자」에 의한 카

리스마적인 법의 고시로부터 법명망가에 의한 경험적 법창조와 법발전에로 (예언

적 선례적 법창조), 나아가 세속적인 임페리움이나 신정적 권력에 의한 법제정에

로, 그리고 끝으로 법의 교양 있는 자(전문법률가)에 의한 체계적인 법정립과 문필

적·형식논리적 교육에 근거하여 전문적으로 실시되는 「재판」에로 이른다. 그때에

법의 형식적 성질은 원시적 소송에서의 주술적으로 제약된 형식주의와 계시적으

로 제약된 비합리성과의 결합으로부터 경우에 따라서는 신정적으로 또는 가산적

으로 제약된 실질적이고 비형식적인 목적합리성의 우회로를 거쳐서 증대하는 전문

적 법률적인, 따라서 논리적인 합리성과 체계화에로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서 - 우선 순수하게 외부적으로 관찰한다면 - 증대하는 논리적 순화(醇化)와 법

의 연역적 엄격성 그리고 소송의 증대하는 합리적 기술에로 발전한다. 여기서 이

론적으로 구성된 합리성의 단계가 역사적 사실에서는 어디까지나 합리성의 정도

의 순서에서 계속하여 계기한 것은 아니며, 또 서구의 어디에서나 일어나지 않았

다는 것, 또는 현대에도 법의 합리화의 종류와 정도에 관한 근거는 역사적으로는

- 이미 우리의 간단한 스케치가 가리키듯이 - 오히려 더 다양하게 특색지어진다

는 것, 이러한 것은 전부 여기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아주 일반적인 발전

의 모습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발전의 커다란 차이는 본질적으로는 (1) 정치

적 권력관계의 각양의 차이에 의하여 제약되었다(된다) - 임페리움이 씨족적·재판

집회민적·신분적 권력들에 대해서 후술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이유에 근거하여 얻

은 권력은 그 강력도에 관해서는 아주 다양하였다 - (2) 신정적 권력과 세속적 권

력의 권력관계에 의해서 제약되었다(된다) (3) 강도로 정치적 형세에 의해서 제약

되는 법형성에 대해서 규준을 주는 법명망가의 구조의 차이에 의해서 제약되었다

(된다). 서구만이 충분히 발전한 재판집회민의 재판과 가산제의 신분적 고정을 알

았으며, 또한 합리적 경제의 생장을 알았다. 합리적 경제의 담당자는 최초 신분적

권력을 전복하기 위해서 군주의 권력과 동맹하였는데, 다음에는 신분적 권력에 대

해서 혁명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래서 서구만이 「자연법」을 알았다. 서구만이 법의

개인성과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과의 완전한 제거를 안다. 서구만

이 로마법의 특성을 갖춘 하나의 형상의 성립을 보며 로마법의 계수와 같은 경과

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것의 전부는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서 나머지의 전 세계에

서는 상당히 거리가 먼 유사성만이 인정되는 구체적·정치적으로 일어난 경과였다.

그러므로 또 법률적인 전문 교육의 법의 단계는 이미 보았듯이, 충분한 범위에서

서구에서만 달성된다. 그때 경제적 조건은 우리가 도처에서 보았듯이, 아주 강력하

게 협력하였다. 그러나 뒤에 정치적 지배를 설명하는 곳에서 표시하듯이 경제적 조

건만으로는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 현대의 서구의 법의 특수

한 근대적 특색에 관계시키는 한 그것이 작용하는 방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상품시장의 관계인에 대하여 법의 합리화와 체계화는 일반적으로 또 후에 한정적

으로 논술하는 유보 아래 재판의 기능의 증대하는 계산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

한 계산가능성은 경제[206]적인 지속적 경영을 위한 특히 법률적 「거래안전」을 필

요로 하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예비조건의 하나이다. 어음이나

어음절차와 같은 특수한 거래형식, 특수한 절차는 법적 보증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명확성에 대한 이러한 요구에 봉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근대의 (일정한 한도에

서는 고대 로마의) 법발전은 법형식주의의 해소를 후원한다는 경향을 보유하였다.

얼핏보아 「자유심증주의」를 위해서 형식적으로 구속된 증거법이 해소한 것은 본질

적으로 기술적 성격의 것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관찰하였듯이, 원시적인 본래 주

술적으로 제약된 증거수단의 형식적 구속의 파괴는, 일부는 신정적 합리주의, 일

부는 가산적 합리주의의 소업이었으며, 양자가 모두 「실질적 조사」를 요구한 것이

며, 따라서 실질적 합리화의 성과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유심증주의의 범위와

한계는 첫째로 「거래이익」 따라서 경제적 계기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전에는 아주

중요하였던 형식적·법률적 사상의 영역이 자유심증주의에 의해서 점점 빼앗겼다

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실체법의 영역에서 이것과 부합하는 경향에 우리에 우리

는 많은 관심을 둔다. 그러한 경향의 일부는 법사상의 내부적 발전의 영역에 있다.

그것의 증대하는 논리적인 순화는 어디서나 법률규범 자체, 특히 법률행위의 해석

에 관해서 외부적으로 명백한 형식적 징표에의 의거에 증대하는 논리적 의미해석

으로써 대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의미해석은 보통법의 교설에서 당사자

의 「현실적 의사」에 효력을 주는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로써 개인주의적이고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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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78 37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제2절 근대법의 발전에서의 반형식적 경향

법과 소송의 일반적 발전은 이론적인 「발전단계」로 나누면 「법예언자」에 의한 카

리스마적인 법의 고시로부터 법명망가에 의한 경험적 법창조와 법발전에로 (예언

적 선례적 법창조), 나아가 세속적인 임페리움이나 신정적 권력에 의한 법제정에

로, 그리고 끝으로 법의 교양 있는 자(전문법률가)에 의한 체계적인 법정립과 문필

적·형식논리적 교육에 근거하여 전문적으로 실시되는 「재판」에로 이른다. 그때에

법의 형식적 성질은 원시적 소송에서의 주술적으로 제약된 형식주의와 계시적으

로 제약된 비합리성과의 결합으로부터 경우에 따라서는 신정적으로 또는 가산적

으로 제약된 실질적이고 비형식적인 목적합리성의 우회로를 거쳐서 증대하는 전문

적 법률적인, 따라서 논리적인 합리성과 체계화에로 발전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서 - 우선 순수하게 외부적으로 관찰한다면 - 증대하는 논리적 순화(醇化)와 법

의 연역적 엄격성 그리고 소송의 증대하는 합리적 기술에로 발전한다. 여기서 이

론적으로 구성된 합리성의 단계가 역사적 사실에서는 어디까지나 합리성의 정도

의 순서에서 계속하여 계기한 것은 아니며, 또 서구의 어디에서나 일어나지 않았

다는 것, 또는 현대에도 법의 합리화의 종류와 정도에 관한 근거는 역사적으로는

- 이미 우리의 간단한 스케치가 가리키듯이 - 오히려 더 다양하게 특색지어진다

는 것, 이러한 것은 전부 여기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아주 일반적인 발전

의 모습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발전의 커다란 차이는 본질적으로는 (1) 정치

적 권력관계의 각양의 차이에 의하여 제약되었다(된다) - 임페리움이 씨족적·재판

집회민적·신분적 권력들에 대해서 후술하는 바와 같은 정치적 이유에 근거하여 얻

은 권력은 그 강력도에 관해서는 아주 다양하였다 - (2) 신정적 권력과 세속적 권

력의 권력관계에 의해서 제약되었다(된다) (3) 강도로 정치적 형세에 의해서 제약

되는 법형성에 대해서 규준을 주는 법명망가의 구조의 차이에 의해서 제약되었다

(된다). 서구만이 충분히 발전한 재판집회민의 재판과 가산제의 신분적 고정을 알

았으며, 또한 합리적 경제의 생장을 알았다. 합리적 경제의 담당자는 최초 신분적

권력을 전복하기 위해서 군주의 권력과 동맹하였는데, 다음에는 신분적 권력에 대

해서 혁명적으로 대립하였다. 그래서 서구만이 「자연법」을 알았다. 서구만이 법의

개인성과 「특별법이 일반법을 깨트린다」는 원칙과의 완전한 제거를 안다. 서구만

이 로마법의 특성을 갖춘 하나의 형상의 성립을 보며 로마법의 계수와 같은 경과

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것의 전부는 아주 본질적인 부분에서 나머지의 전 세계에

서는 상당히 거리가 먼 유사성만이 인정되는 구체적·정치적으로 일어난 경과였다.

그러므로 또 법률적인 전문 교육의 법의 단계는 이미 보았듯이, 충분한 범위에서

서구에서만 달성된다. 그때 경제적 조건은 우리가 도처에서 보았듯이, 아주 강력하

게 협력하였다. 그러나 뒤에 정치적 지배를 설명하는 곳에서 표시하듯이 경제적 조

건만으로는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 현대의 서구의 법의 특수

한 근대적 특색에 관계시키는 한 그것이 작용하는 방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상품시장의 관계인에 대하여 법의 합리화와 체계화는 일반적으로 또 후에 한정적

으로 논술하는 유보 아래 재판의 기능의 증대하는 계산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

한 계산가능성은 경제[206]적인 지속적 경영을 위한 특히 법률적 「거래안전」을 필

요로 하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예비조건의 하나이다. 어음이나

어음절차와 같은 특수한 거래형식, 특수한 절차는 법적 보증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명확성에 대한 이러한 요구에 봉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근대의 (일정한 한도에

서는 고대 로마의) 법발전은 법형식주의의 해소를 후원한다는 경향을 보유하였다.

얼핏보아 「자유심증주의」를 위해서 형식적으로 구속된 증거법이 해소한 것은 본질

적으로 기술적 성격의 것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관찰하였듯이, 원시적인 본래 주

술적으로 제약된 증거수단의 형식적 구속의 파괴는, 일부는 신정적 합리주의, 일

부는 가산적 합리주의의 소업이었으며, 양자가 모두 「실질적 조사」를 요구한 것이

며, 따라서 실질적 합리화의 성과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유심증주의의 범위와

한계는 첫째로 「거래이익」 따라서 경제적 계기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전에는 아주

중요하였던 형식적·법률적 사상의 영역이 자유심증주의에 의해서 점점 빼앗겼다

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실체법의 영역에서 이것과 부합하는 경향에 우리에 우리

는 많은 관심을 둔다. 그러한 경향의 일부는 법사상의 내부적 발전의 영역에 있다.

그것의 증대하는 논리적인 순화는 어디서나 법률규범 자체, 특히 법률행위의 해석

에 관해서 외부적으로 명백한 형식적 징표에의 의거에 증대하는 논리적 의미해석

으로써 대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의미해석은 보통법의 교설에서 당사자

의 「현실적 의사」에 효력을 주는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로써 개인주의적이고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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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0 3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실질적인 계기를 법형식주의 안에 가져오게 하였다. 그 밖에 이러한 의미

해석은 우리가 주지하는 종교적 윤리의 체계화와 전적으로 평행하여 - 당사자 상

호간의 관계를 그들의 태도의 「내부적」핵심에 근거하여, 즉 「심정」(선의·악의)에 근

거하여 언제나 구성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법적 효과를 비형식적 요소에 결부했

던 것이다. 재산거래의 대부분은 원시적 거래에서도 기술적으로 분화된 거래에서

도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인적 신뢰의 기초에 근거하여 또 타자의 태도의 실질적 성

실에 근거하여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재산거래의 의의가 중대하게 굄에 따라서 법

적 실무에서는 이러한 사물의 본성상 형식적으로는 불완전하게만 한정하는 태도

에 관한 보증의 필요가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법적 실무에 의한 심정윤리

적 합리화는 강력한 이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재산거래의 범위 밖에서도 법의

합리화는 외부적 경과에 의한 평가에 가름하여 오히려 심정을 원래 의의 있는 것

으로 전경(前景)에 두었다. 법의 합리화는 형법에서 그것이 가지는 요구상 결과에

중점이 두어지는 복수에 가름하여 합리적인 - 그것이 도덕인 것이든 공리적인 것

이든 - 「형벌목적을」 내세워 그것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증대하는 비형식적 계기를

법적 실무 안에 가져온다. 그러나 결과는 또 이 이상의 범위에 미친다. 심정의 고려

는 사법(私法)의 영역에서도 역시 사실상 재판관에 의한 그것의 평가를 포함한다.

「성실과 신의」 거래의 「선량한」 풍속 결국 도덕적 범주는 당사자가 의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것에 관해서 이제는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선량한」 거래

관행을 참조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사실상 당사자의 평균적 견해의 승인이다. 즉 당

사자에 의해서 당연 평균적으로 기대되어 따라서 재판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규범

규준으로서의 본질적으로 사실적인 성질의 일반적이며 몰주관적·거래적인 징표의

승인이다.

그러나 이미 관찰하였듯이, 순수한 전문법률적 논리, 즉 생활의 사실을 추상

적 「법규」에 적합시키는 법률적 「구성」이며, 또 학문적 업적으로 확인된 「원칙」

의 규준에 따라서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는 경우에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는 지배적인 원칙 아래 있는 순수하게 전문법률적 논리는 사적 법관계인의 「기대」

를 가장 근본적으로 실망시킨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법관계인의 「기

대」는 법규의 경제적인 또는 거의 공리적·실용적인 의미를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

은 법논리적으로 관찰한다면 비합리적이다. 「비전문가」는 「전기절도」가 고대의 절

도의 정의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괴리를

결과시키는 것은 결코 근대 법학의 우둔함이 아니라 오히려 광범위하게 전체 형식

적인 법사상 일반의 논리적 자기법칙성과 경제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고 경제적으

로 적합한 기대를 기도하는 합의와 법적으로 중요한 당사자의 행위가 불일치한, 완

전히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러한 이유에 근거하여 현대에도 언제나 새로이 법률가

의 전문적인 사고 자체에 대한 관계인의 반항이 성립하였다. 다만 그 자체에 내재

하는 형식적 성격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으면 법조법은 결코 이러한 기대에 충분한

보증을 가져오지도 못하였으며, 또 못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는 우리가 종종 찬

미하는 영국 법조법에서 고대 로마의 법조법이나 근대의 유럽 대륙의 법률적 사고

관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다. (에리히 융[Erich Jung]에 의한) 시도와 같

은 극복된 「자연법」 대신에 관계인의 (평균적) 「기대」에 일치하는 「계쟁조정」을 「자

연적 권리」(natürliches Recht)로서 요구한다는 시도는 따라서 일정한 내재적 한

계에 충돌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러한 사상은 확실히 법생활의 사실에 관계

를 가진다. 후기 공화정 시대, 특히 제정시대의 고대 로마법은 사실상[208] 이미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종류의 거래도덕을 원칙적으

로 발전시켰다. 고대 로마법은 그러므로 전체로서 직접적으로 불결한 또는 사기적

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서 좁은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능에서 법은 사실

상 「윤리적 최소한」만을 보증할 수 있었다. 선의(bona fides)에도 불구하고, 「매주

는 주의하라」(caveat empyor)는 명제가 타당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계급문제의

각성에 의한 법에 대한 실질적 요구는 한편으로는 법관계인(특히 노동계급)의 권리

에 의해서 성립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거래도덕의 규준의 독점효력에 대해

서 향해지며, 또한 사회법을 장중한 도덕적 요청(「정의」, 「인간의 존엄」)에 의해서

기초놓으려는 것을 요구하는 법이데올로기스트에 의해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요구는 법의 형식주의를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곤궁의 착취」

(Ausbeutung der Notlage)와 같은 개념의 사용(폭리단속법에서의) 또는 대상(代

償)의 부조화 때문에 계약을 선량풍속에 위반하는 것으로서, 또한 따라서 무효인

것으로서 다루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는 법적으로 관찰한다면 반형식적 규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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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0 38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적으로) 실질적인 계기를 법형식주의 안에 가져오게 하였다. 그 밖에 이러한 의미

해석은 우리가 주지하는 종교적 윤리의 체계화와 전적으로 평행하여 - 당사자 상

호간의 관계를 그들의 태도의 「내부적」핵심에 근거하여, 즉 「심정」(선의·악의)에 근

거하여 언제나 구성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법적 효과를 비형식적 요소에 결부했

던 것이다. 재산거래의 대부분은 원시적 거래에서도 기술적으로 분화된 거래에서

도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인적 신뢰의 기초에 근거하여 또 타자의 태도의 실질적 성

실에 근거하여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재산거래의 의의가 중대하게 굄에 따라서 법

적 실무에서는 이러한 사물의 본성상 형식적으로는 불완전하게만 한정하는 태도

에 관한 보증의 필요가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법적 실무에 의한 심정윤리

적 합리화는 강력한 이해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재산거래의 범위 밖에서도 법의

합리화는 외부적 경과에 의한 평가에 가름하여 오히려 심정을 원래 의의 있는 것

으로 전경(前景)에 두었다. 법의 합리화는 형법에서 그것이 가지는 요구상 결과에

중점이 두어지는 복수에 가름하여 합리적인 - 그것이 도덕인 것이든 공리적인 것

이든 - 「형벌목적을」 내세워 그것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증대하는 비형식적 계기를

법적 실무 안에 가져온다. 그러나 결과는 또 이 이상의 범위에 미친다. 심정의 고려

는 사법(私法)의 영역에서도 역시 사실상 재판관에 의한 그것의 평가를 포함한다.

「성실과 신의」 거래의 「선량한」 풍속 결국 도덕적 범주는 당사자가 의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것에 관해서 이제는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선량한」 거래

관행을 참조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사실상 당사자의 평균적 견해의 승인이다. 즉 당

사자에 의해서 당연 평균적으로 기대되어 따라서 재판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규범

규준으로서의 본질적으로 사실적인 성질의 일반적이며 몰주관적·거래적인 징표의

승인이다.

그러나 이미 관찰하였듯이, 순수한 전문법률적 논리, 즉 생활의 사실을 추상

적 「법규」에 적합시키는 법률적 「구성」이며, 또 학문적 업적으로 확인된 「원칙」

의 규준에 따라서 법률가가 「사고」할 수 없는 경우에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는 지배적인 원칙 아래 있는 순수하게 전문법률적 논리는 사적 법관계인의 「기대」

를 가장 근본적으로 실망시킨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법관계인의 「기

대」는 법규의 경제적인 또는 거의 공리적·실용적인 의미를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

은 법논리적으로 관찰한다면 비합리적이다. 「비전문가」는 「전기절도」가 고대의 절

도의 정의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괴리를

결과시키는 것은 결코 근대 법학의 우둔함이 아니라 오히려 광범위하게 전체 형식

적인 법사상 일반의 논리적 자기법칙성과 경제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고 경제적으

로 적합한 기대를 기도하는 합의와 법적으로 중요한 당사자의 행위가 불일치한, 완

전히 불가피한 결과이다. 이러한 이유에 근거하여 현대에도 언제나 새로이 법률가

의 전문적인 사고 자체에 대한 관계인의 반항이 성립하였다. 다만 그 자체에 내재

하는 형식적 성격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으면 법조법은 결코 이러한 기대에 충분한

보증을 가져오지도 못하였으며, 또 못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는 우리가 종종 찬

미하는 영국 법조법에서 고대 로마의 법조법이나 근대의 유럽 대륙의 법률적 사고

관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다. (에리히 융[Erich Jung]에 의한) 시도와 같

은 극복된 「자연법」 대신에 관계인의 (평균적) 「기대」에 일치하는 「계쟁조정」을 「자

연적 권리」(natürliches Recht)로서 요구한다는 시도는 따라서 일정한 내재적 한

계에 충돌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러한 사상은 확실히 법생활의 사실에 관계

를 가진다. 후기 공화정 시대, 특히 제정시대의 고대 로마법은 사실상[208] 이미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종류의 거래도덕을 원칙적으

로 발전시켰다. 고대 로마법은 그러므로 전체로서 직접적으로 불결한 또는 사기적

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서 좁은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능에서 법은 사실

상 「윤리적 최소한」만을 보증할 수 있었다. 선의(bona fides)에도 불구하고, 「매주

는 주의하라」(caveat empyor)는 명제가 타당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계급문제의

각성에 의한 법에 대한 실질적 요구는 한편으로는 법관계인(특히 노동계급)의 권리

에 의해서 성립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거래도덕의 규준의 독점효력에 대해

서 향해지며, 또한 사회법을 장중한 도덕적 요청(「정의」, 「인간의 존엄」)에 의해서

기초놓으려는 것을 요구하는 법이데올로기스트에 의해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러

한 요구는 법의 형식주의를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곤궁의 착취」

(Ausbeutung der Notlage)와 같은 개념의 사용(폭리단속법에서의) 또는 대상(代

償)의 부조화 때문에 계약을 선량풍속에 위반하는 것으로서, 또한 따라서 무효인

것으로서 다루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는 법적으로 관찰한다면 반형식적 규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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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2 3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형식적 규범은 법률적·계약적 또는 전통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도덕적 성격을 가진다. 즉 형식적 합법

성 대신에 실질적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실무가의 내부적인 신분적 이데올로기는 특히 한편으로는 데모크라시의 사회

적 요구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군주정치의 복지관료제의 사회적 요구에 의

해서 생긴 영향과 함께 법과 법적 실무에 작용한다. 단순한 개조와 계약에 제한된

법자동기계, 즉 그것에다가 사람이 위에서부터 사실과 비용을 투입하면 판결과 이

유가 거기에서 나오는 법자동기계의 위치는 근대의 법실무가에 대해서 열등한 것

으로서 나타나며, 또한 바로 편찬된 형식적 법률의 보편화와 함께 점점 더 불쾌한

것으로서 느껴진다. 근대의 법실무가들은 적어도 법률이 기능하지 못하는 곳에서

재판관을 위해서 「창조적」인 법적 활동을 요구한다. 「자유법의」교설은 법률이 기능

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의 비합리성에 대한 전체 법률의 원칙적인 운명이라는

것, 따라서 수많은 사례에서 단순한 해석에 의한 적용이 가상에 불과한 것이고,

재판은 형식적 규범이 아니라 구체적 가치고려에 따르는 것이며 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기도하였다. 주지하듯이 그 실제적 효과에 관하여 물

론 종종 과대평가된 스위스 민법전 제1조 - 그것에 의하면 재판관은 법률의 명확

한 교시가 결여된 경우에는 그 자신이 입법자라면 제출할 것이라는 규칙에 따라서

결정해야 한다 - 는, 즉 형식적으로는 주지하듯이 칸트 철학의 정식화에 부합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전술한 이념에 일치하는 재판례는 가치타협의 불가피

성에 직면하여 추상적 규범에의 관계를 종종 전연 도외시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였

으며, 또 적어도 가치충돌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평가 따라서 비형식적인

법발견 뿐만 아니라 또 합리적 법발견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실제로

법의 불가피한 불완전성과 법의 체계화의 폐쇄성의 기능에 대한 대항이라는 교설

과 함께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주장이 나타났다. 즉 법발견은 일반적으로 원칙적

으로는 일반적 규범의 구체적 사실에의 「적용」이 아니고 (또 「적용」이어서는 안 된

다) - 그것은 언어적 표현이 문법상의 규칙의 「적용」이 아닌 것과 같다 - 또한 「법

규」는 구체적 판결, 즉 재판관 활동의 성과이며 「유효한」 법의 진정한 장(場)인 구

체적인 판결로부터 추상에 의해서 얻어진 제2차적인 것이라는 광범한 주장이 나

타났다. 다른 한 편 또 사실행동을 결정하는 원칙의 다대한 양에 대해서 재판관이

판결하는 법적 사건이 양적으로 적다는 것은 「단순한」 「재판규범」으로서 관찰되는

법률상의 지위를 소송과 관련 없는 일상생활에서 사실상 「유효한」 규칙에 대해서

낮추는 것에 이용되고, 이 점에서 법학의 「사회학적」 기초지움의 요청이 나오는 것

이다. 법이 오랫동안 증가하는 법률적으로 조언을 받은 법관계인의 활동의 경과이

며, 점증하는 법률적으로 교육받은 재판관의 활동의 성과라는 역사적 사실, 그리

고 그것과 결부된 예컨대 독일 제국재판소의 재판실무가 현금에도 민법전 실시 후

에는 때에 따라 새로운 법원칙을 - 그것이 법률을 초월하여(paraeter legem) 있

는 것이든 법률에 반하는(contra legem) 것이든 - 제출했다는 명백한 사실로부

터 몇 번이나 개관적 규범의 합리적 정립에 대한 선례의 우위 그리고 일반적인 「규

범」의 창조와 승인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합리적인 이해조정의 우위가 도출되었다.

현대의 법원(法源)론은 역사주의가 창조한 반(半)신비주의적인 「관습법」의 개념처

럼 법률의 성립방법의 단계에 의해서 (위임기록이나 그것에 유사한 법원에 근거하

여) 확인될 「입법자의 의사」의 역사적 개념도 해체하였다. 즉 법률가는 「입법자」에

가 아니고 「법률」에 준거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고립된 「법률」은 그리하여 가동과

사용을 위해서 법률가에게 - 또는 (근대의 법전의 동기에서 아주 종종) 「학문」에나

또는 실무가에게 - 인도된다. 그때 법명령의 입법자에 의한 확정의 의의는 사정에

따라서는 법규의 효력의 단순한 「징후」나 또는 법규의 효력의 단순한 요구 - 그러

나 그것은 법실무의 태도가 정해질 때까지는 미해결이다 - 의 역할로까지 낮아진

다. 제정법에 불리한 법생활[210] , 즉 법실무가의 생활에 의해서 관계되는 판례법

에의 편애는 판례가 불가피하게 언제나 구체적인 평가가능성들 사이에서의 자유로

이 한 경중의 형량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개개의 사건을 넘어서 구속적일 수 없다는

요구에 반복하여 대항하였다. 이러한 가치비합리주의의 결과와 대립하여 객관적

인 가치계량을 재흥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법질서 자체가 단순한 「기술」을 표현

한다는 인상이 밀려오면 올수록 점점 강하게 당연히 이러한 폄하는 법률가에 의해

서 기피된다. 일정한 재산의 한계를 넘은 경우에 일정한 공과가 지불된다는 순수

한 기술적 명령이 결혼이나 친권, 소유권의 내용에 관한 법규의 단계에서 조정(措

定)된다면 법실무의 감정은 그것에 반항할 것이며, 그리하여 변하기 쉽고 광범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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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2 38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형식적 규범은 법률적·계약적 또는 전통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도덕적 성격을 가진다. 즉 형식적 합법

성 대신에 실질적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실무가의 내부적인 신분적 이데올로기는 특히 한편으로는 데모크라시의 사회

적 요구에 의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군주정치의 복지관료제의 사회적 요구에 의

해서 생긴 영향과 함께 법과 법적 실무에 작용한다. 단순한 개조와 계약에 제한된

법자동기계, 즉 그것에다가 사람이 위에서부터 사실과 비용을 투입하면 판결과 이

유가 거기에서 나오는 법자동기계의 위치는 근대의 법실무가에 대해서 열등한 것

으로서 나타나며, 또한 바로 편찬된 형식적 법률의 보편화와 함께 점점 더 불쾌한

것으로서 느껴진다. 근대의 법실무가들은 적어도 법률이 기능하지 못하는 곳에서

재판관을 위해서 「창조적」인 법적 활동을 요구한다. 「자유법의」교설은 법률이 기능

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의 비합리성에 대한 전체 법률의 원칙적인 운명이라는

것, 따라서 수많은 사례에서 단순한 해석에 의한 적용이 가상에 불과한 것이고,

재판은 형식적 규범이 아니라 구체적 가치고려에 따르는 것이며 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기도하였다. 주지하듯이 그 실제적 효과에 관하여 물

론 종종 과대평가된 스위스 민법전 제1조 - 그것에 의하면 재판관은 법률의 명확

한 교시가 결여된 경우에는 그 자신이 입법자라면 제출할 것이라는 규칙에 따라서

결정해야 한다 - 는, 즉 형식적으로는 주지하듯이 칸트 철학의 정식화에 부합하

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전술한 이념에 일치하는 재판례는 가치타협의 불가피

성에 직면하여 추상적 규범에의 관계를 종종 전연 도외시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였

으며, 또 적어도 가치충돌의 경우에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평가 따라서 비형식적인

법발견 뿐만 아니라 또 합리적 법발견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실제로

법의 불가피한 불완전성과 법의 체계화의 폐쇄성의 기능에 대한 대항이라는 교설

과 함께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주장이 나타났다. 즉 법발견은 일반적으로 원칙적

으로는 일반적 규범의 구체적 사실에의 「적용」이 아니고 (또 「적용」이어서는 안 된

다) - 그것은 언어적 표현이 문법상의 규칙의 「적용」이 아닌 것과 같다 - 또한 「법

규」는 구체적 판결, 즉 재판관 활동의 성과이며 「유효한」 법의 진정한 장(場)인 구

체적인 판결로부터 추상에 의해서 얻어진 제2차적인 것이라는 광범한 주장이 나

타났다. 다른 한 편 또 사실행동을 결정하는 원칙의 다대한 양에 대해서 재판관이

판결하는 법적 사건이 양적으로 적다는 것은 「단순한」 「재판규범」으로서 관찰되는

법률상의 지위를 소송과 관련 없는 일상생활에서 사실상 「유효한」 규칙에 대해서

낮추는 것에 이용되고, 이 점에서 법학의 「사회학적」 기초지움의 요청이 나오는 것

이다. 법이 오랫동안 증가하는 법률적으로 조언을 받은 법관계인의 활동의 경과이

며, 점증하는 법률적으로 교육받은 재판관의 활동의 성과라는 역사적 사실, 그리

고 그것과 결부된 예컨대 독일 제국재판소의 재판실무가 현금에도 민법전 실시 후

에는 때에 따라 새로운 법원칙을 - 그것이 법률을 초월하여(paraeter legem) 있

는 것이든 법률에 반하는(contra legem) 것이든 - 제출했다는 명백한 사실로부

터 몇 번이나 개관적 규범의 합리적 정립에 대한 선례의 우위 그리고 일반적인 「규

범」의 창조와 승인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합리적인 이해조정의 우위가 도출되었다.

현대의 법원(法源)론은 역사주의가 창조한 반(半)신비주의적인 「관습법」의 개념처

럼 법률의 성립방법의 단계에 의해서 (위임기록이나 그것에 유사한 법원에 근거하

여) 확인될 「입법자의 의사」의 역사적 개념도 해체하였다. 즉 법률가는 「입법자」에

가 아니고 「법률」에 준거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고립된 「법률」은 그리하여 가동과

사용을 위해서 법률가에게 - 또는 (근대의 법전의 동기에서 아주 종종) 「학문」에나

또는 실무가에게 - 인도된다. 그때 법명령의 입법자에 의한 확정의 의의는 사정에

따라서는 법규의 효력의 단순한 「징후」나 또는 법규의 효력의 단순한 요구 - 그러

나 그것은 법실무의 태도가 정해질 때까지는 미해결이다 - 의 역할로까지 낮아진

다. 제정법에 불리한 법생활[210] , 즉 법실무가의 생활에 의해서 관계되는 판례법

에의 편애는 판례가 불가피하게 언제나 구체적인 평가가능성들 사이에서의 자유로

이 한 경중의 형량을 할 수 있기 위해서 개개의 사건을 넘어서 구속적일 수 없다는

요구에 반복하여 대항하였다. 이러한 가치비합리주의의 결과와 대립하여 객관적

인 가치계량을 재흥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법질서 자체가 단순한 「기술」을 표현

한다는 인상이 밀려오면 올수록 점점 강하게 당연히 이러한 폄하는 법률가에 의해

서 기피된다. 일정한 재산의 한계를 넘은 경우에 일정한 공과가 지불된다는 순수

한 기술적 명령이 결혼이나 친권, 소유권의 내용에 관한 법규의 단계에서 조정(措

定)된다면 법실무의 감정은 그것에 반항할 것이며, 그리하여 변하기 쉽고 광범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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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4 38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게 「기술적」으로 인정된 것으로서의 실정법의 피안에 초실정적 법에 동경하는 사

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예전의 「자연법」은 역사적 비판과 법실증주의적 비판에 의

해서 신용을 상실하였다. 이 보충으로서 일부는 종교적으로 제약된 (가톨릭의) 교

설 학자의 자연법이 생기고, 일부는 법의 「본질」로부터의 연역으로 객관 규준을 얻

으려는 시도가 생겼다. 하나는 선험적인 신칸트학파에 의해서 정해진 방법에 근거

하는 것이다. 즉 「자유인의 사회」의 질서로서의 「정당한 법」이 합리적 법창조를 위

한 입법상의 규준인 동시에 법률이 재판관에게 비형식적 징후를 지시하는 사건에

서의 법발견의 근거라는 것이다 - 양 경향이 다 그것은 본질상 우선 실시될 수 없

는 약속이다. 둘은 경험적인 꽁트에 의해서 창도된 방법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법

관계인이 상술한 이유에 따라서 타자의 의무의 평균적 해석에 의해서 보통 둘러싸

고 있는 「기대」를 법률에 대립하는 궁극적인 최고의 재판규범, 즉 불명확한 것으

로서 느껴지는 「형평」의 개념 그리고 그것에 유사한 것을 대리하는 궁극의 최고의

재판규범으로서 탐구할 것을 시사함으로써 말이다. 이미 간단한 스케치가 가리키

는 것 같은 서로 아주 모순된 결과에 도달하는 이러한 동향의 특별한 토의와 충분

한 「비판」은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동향의 존재는 국제적인 것인데 독

일과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러한 동향은 전래된 또한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

배적이었던 법의 개념상의 「무흠결성」의 부당전제(petitio principii)의 거부에 있

어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또 이러한 동향은 아주 다양한 반대자에 대립한다. 즉

프랑스에서는 법전해석파, 독일에서는 판덱텐법학파의 방법론에 대립한다. 이러한

동향은 그 담당자의 특색에 응하여 결과적으로 「학문」의, 따라서 이론가의 위세에

소용되는가 또는 법실무가의 위세에 소용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한다. 정식화한 제

정법, 특히 체계적 법전편찬의 연속적인 증대에 의해서 대학의 법학자는 그들의 학

문적 사고의 활동의 자유의 중대성과 기회에 관해서 통절히 협박을 느꼈으며 그것

에 의해서 나폴레옹의 법전제정 후의 프랑스 법학의 운명이나 프로이센 일반 란트

법전 제정 후의 프로이센 법학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을 겁낸 독일에서 반논리적인

동시에 반역사주의적인 활동이 급속히 증대했다는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이며 내부적·지성적인 이익상황의 결과 외에는 아니다.

그러나 보통법학에서 발전한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체계로부터의 배리라는 비합

리주의적 변종은 다른 한 편 또한 자기전복적인 과학적 합리화와 무가정(無假定)

의 법사고를 자각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신이 합리주의적 성격을 갖지 않

는 한에서도 그들은 역시 비합리적인 것에로의 도피의 형식으로 법기술의 증대하

는 합리화에 계속하는 부수현상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종교의 비합리화에 유사

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이것은 점차 이해단체에로 결합하는 근대의 법실무

가의 권력의식의 고양에 의한 신분적 위엄감정의 고양에의 노력 여하에 의하는 것

이다 - 이것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예로서는 독일에서 영국의 합리적 법

에 구속되지 않은 재판관의 「고귀한」지위에의 언급이 종종 있다는 것으로서도 알

것이다.

앵글로색슨법에 대해서 유럽 대륙법이 보여주는 차이의 근거가 되는 사정들은

주로 일반적인 지배구조의 차이와 그 결과로서 생기는 사회적 명예를 분배하는 방

법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사정들이다.

제3절 현대의 앵글로색슨법

그것에 관해서는 일부는 기술하였으며, 일부는 또 다른 관련에서 논술할 것이

다. 여하튼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인 결정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도 마찬

가지로 아주 내부적인 법조계급이 놓여있는 경우와 존재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 사정들이며 또 정치적 발전의 차이에 근거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

사적 형세의 차이의 결과로서 - 여기서 우리들에게 관계있는 것은 -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두루 번영하여 근대의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적

동질적 특색이 법률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규범과 법제도를 가지는 법질

서 아래 제시될 뿐만 아니라 - 「소유권」과 같은 대단히 기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개념도 이 명칭의 대륙 제도의 양식으로서는 앵글로색슨법에는 현대에도 아직 존

재하고 있지 않다 - 또 형식적인 구조원칙의 궁극점에 관해서도 가능한 한에서 서

로 나뉘어지는 법질서 아래서도[212] 제시된다. 영국의 법사상은 (1) 현대에도 언제

나 보다 강력하게 되는 학문적 교육에의 요구에 의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정도로 「경제적인」기능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즉 백년 이상까지도 경과한 판례에

관계시키는 것이 「불공정」이라고 인식되는 이외에는 「선례」는 그 옛 의의를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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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4 38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게 「기술적」으로 인정된 것으로서의 실정법의 피안에 초실정적 법에 동경하는 사

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예전의 「자연법」은 역사적 비판과 법실증주의적 비판에 의

해서 신용을 상실하였다. 이 보충으로서 일부는 종교적으로 제약된 (가톨릭의) 교

설 학자의 자연법이 생기고, 일부는 법의 「본질」로부터의 연역으로 객관 규준을 얻

으려는 시도가 생겼다. 하나는 선험적인 신칸트학파에 의해서 정해진 방법에 근거

하는 것이다. 즉 「자유인의 사회」의 질서로서의 「정당한 법」이 합리적 법창조를 위

한 입법상의 규준인 동시에 법률이 재판관에게 비형식적 징후를 지시하는 사건에

서의 법발견의 근거라는 것이다 - 양 경향이 다 그것은 본질상 우선 실시될 수 없

는 약속이다. 둘은 경험적인 꽁트에 의해서 창도된 방법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법

관계인이 상술한 이유에 따라서 타자의 의무의 평균적 해석에 의해서 보통 둘러싸

고 있는 「기대」를 법률에 대립하는 궁극적인 최고의 재판규범, 즉 불명확한 것으

로서 느껴지는 「형평」의 개념 그리고 그것에 유사한 것을 대리하는 궁극의 최고의

재판규범으로서 탐구할 것을 시사함으로써 말이다. 이미 간단한 스케치가 가리키

는 것 같은 서로 아주 모순된 결과에 도달하는 이러한 동향의 특별한 토의와 충분

한 「비판」은 여기서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동향의 존재는 국제적인 것인데 독

일과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러한 동향은 전래된 또한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

배적이었던 법의 개념상의 「무흠결성」의 부당전제(petitio principii)의 거부에 있

어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또 이러한 동향은 아주 다양한 반대자에 대립한다. 즉

프랑스에서는 법전해석파, 독일에서는 판덱텐법학파의 방법론에 대립한다. 이러한

동향은 그 담당자의 특색에 응하여 결과적으로 「학문」의, 따라서 이론가의 위세에

소용되는가 또는 법실무가의 위세에 소용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한다. 정식화한 제

정법, 특히 체계적 법전편찬의 연속적인 증대에 의해서 대학의 법학자는 그들의 학

문적 사고의 활동의 자유의 중대성과 기회에 관해서 통절히 협박을 느꼈으며 그것

에 의해서 나폴레옹의 법전제정 후의 프랑스 법학의 운명이나 프로이센 일반 란트

법전 제정 후의 프로이센 법학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을 겁낸 독일에서 반논리적인

동시에 반역사주의적인 활동이 급속히 증대했다는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이며 내부적·지성적인 이익상황의 결과 외에는 아니다.

그러나 보통법학에서 발전한 순수하게 논리적인 법체계로부터의 배리라는 비합

리주의적 변종은 다른 한 편 또한 자기전복적인 과학적 합리화와 무가정(無假定)

의 법사고를 자각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그것 자신이 합리주의적 성격을 갖지 않

는 한에서도 그들은 역시 비합리적인 것에로의 도피의 형식으로 법기술의 증대하

는 합리화에 계속하는 부수현상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종교의 비합리화에 유사

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이것은 점차 이해단체에로 결합하는 근대의 법실무

가의 권력의식의 고양에 의한 신분적 위엄감정의 고양에의 노력 여하에 의하는 것

이다 - 이것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예로서는 독일에서 영국의 합리적 법

에 구속되지 않은 재판관의 「고귀한」지위에의 언급이 종종 있다는 것으로서도 알

것이다.

앵글로색슨법에 대해서 유럽 대륙법이 보여주는 차이의 근거가 되는 사정들은

주로 일반적인 지배구조의 차이와 그 결과로서 생기는 사회적 명예를 분배하는 방

법의 차이와 관련이 있는 사정들이다.

제3절 현대의 앵글로색슨법

그것에 관해서는 일부는 기술하였으며, 일부는 또 다른 관련에서 논술할 것이

다. 여하튼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인 결정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도 마찬

가지로 아주 내부적인 법조계급이 놓여있는 경우와 존재조건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 사정들이며 또 정치적 발전의 차이에 근거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

사적 형세의 차이의 결과로서 - 여기서 우리들에게 관계있는 것은 -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두루 번영하여 근대의 자본주의에 의한 경제적

동질적 특색이 법률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이질적인 규범과 법제도를 가지는 법질

서 아래 제시될 뿐만 아니라 - 「소유권」과 같은 대단히 기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개념도 이 명칭의 대륙 제도의 양식으로서는 앵글로색슨법에는 현대에도 아직 존

재하고 있지 않다 - 또 형식적인 구조원칙의 궁극점에 관해서도 가능한 한에서 서

로 나뉘어지는 법질서 아래서도[212] 제시된다. 영국의 법사상은 (1) 현대에도 언제

나 보다 강력하게 되는 학문적 교육에의 요구에 의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정도로 「경제적인」기능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즉 백년 이상까지도 경과한 판례에

관계시키는 것이 「불공정」이라고 인식되는 이외에는 「선례」는 그 옛 의의를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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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6 3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보유하였다. (2) 그때에 거기에서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히 특히 강도로 신대륙

에서 특히 미국에서 법발견의 진정한 「카리스마적인」 성격이 아직 명확한 모습으

로서 보존되고 있다. 실무에서 선례는 가장 다양한 중요성을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심급의 계급적 지위에 따라서 가질 뿐만 아니라 개개의 재판관의 가장 개인적인

권위에 따라서도 가진다. 법적 수단의 중요한 새로운 창조에 관하여 이것(법발견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 예컨대 맨스필드 백작의 카리스마처럼 - 전체 앵글로색슨

법의 영역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미국적 견해에서는 유럽 대륙의 관료제적 직권용

어의 비개인적인 「국왕직권재판」과는 반대로 판결은 일반적으로 이름으로서 표시

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는 구체적인 재판관의 개인적 창조이다. 그리고 영국의 재판

관도 이러한 지위를 요구한다. 그것과 관련하여 (3) 법의 합리성의 정도는 대륙의

유럽법보다도 본질적으로 보다 근소하며 또 법의 합리성의 종류도 대륙의 유럽법

과는 다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분히 오스틴에 이르기까지는 대륙의 개념의 기

초에 서서 고찰한 경우에 「학」이라는 이름 값하는 영국의 법학은 거의 완전히 결

여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벤담이 요구한 법전편찬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러

한 특색은 바로 영국법의 「실용적」 적합가능, 특히 관계인의 입장에서의 영국법의

「실용적」 성격을 낳은 것이다. 「비전문가」의 법사상은 한편으로는 언어구속적이다.

비전문가는 「법률적으로」 논의한다고 믿고 있을 때에도 엉터리 변호사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밖에 개개의 사건에서 개개의 사건을 추론한다는 것이 비전문

가에게는 자연이고 「전문가」의 법률적 추상은 비전문가에게는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이미 관찰했듯이, 양 관계에 있어서 경험적 법학의 기술은 비전문가에게는 친근

한 것이다. 경험적 법학의 기술은 비전문가에 대해서 비동정적일지 모른다 - 세계

의 어떠한 나라도 영국과 같은 변호사의 법운영에 대한 통절한 불평과 풍자를 알

지 못한다. 그리고 예방법학자의 구성적 형식은 비전문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역시 영국에서는 최고도로 그러하다. 그러나 경험적 법학의 원칙적

인 특성은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비전문가는 그것을 「추체험」하며 또

그것과 화해할 수가 있다. 비전문가는 언젠가 한 번은 - 전체 영국의 실업가가 그

렇게 하듯이 - 전체 생산관계를 위해서 한 사람의 법률적인 청죄사제를 임명하고

사례금을 지불할 것이니까. 그러나 법형식주의를 위한 통풍변이 존재하였다. 실로

사법(私法)의 영역에서는 코먼로, 그리고 현대에는 형평법도 선례구속에 의해서 실

용적 취급에 있어서 광범위한 정도로 「형식화」되어 있다. 변호사영업의 전통구속

성이 이미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시민배심(Civiljury) 제도는 합리성의 한

계를 가져온다. 이 한계를 불가피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선

례에의 구속성을 위하여 중요시되며, 한편 구체적인 가치형량이 자유로 되어야 할

영역에서 선례가 형식적·구속적인 규칙(하나의 「악법」)이 창조되지 않도록 배려한

다. 이러한 선례구속성의 영역과 또 하나의 구체적인 가치형량의 영역에의 구분이

실제로 기능하는 모양은 여기서는 다루지 아니한다. 여하튼 그것은 재판의 합리화

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 밖에 영국에서의 치안판사의 개별적 재판권에 있어서 일

상의 모든 간이소송사건을 다루는 때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가장적이며

가장 비합리적인 즉결의 방법이 성립하였다. 그것은 - 맨델스존(Mendelssohn)의

서술에 의해서 쉽게 납득할 수 있듯이 - 우리에게는 미지의 방법 「카디」 재판의 성

격을 보유하였다. 요컨대 재판의 현상은 그것의 실체법과 절차법의 가장 원칙적이

고 형식적인 특색에 있어서 신정적 제약과 가산적 권력에서 해방된 세속재판 운영

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에서 대륙의 구조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도 영국법의 법발견은 중점적으로는 대륙법처럼 논리의 도움으로 법률명령의 내용

에서 순화된 「법규」의 「적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적으로도 사회

적으로도 상당히 감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언제

나 개별적 결과이며, 경제의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는 아니다. 자본주의

의 전개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정만이 편리했다고 관찰된다. 즉 법형성이 중

점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재판관이 보충되는 변호사의 수중에 있으며 - 따라서 부

유한 특히 자본주의적인 사적 관계인에의 봉사에 활동하며, 또 실질적으로 그들로

부터 그들의 직접 생계의 재화를 얻는 계층의 수중에 있다는 사정이다. 그와 관련

하여 런던에서의 제국재판소에의 재판의 집중 그리고 재판의 심한 고가성이 사실

상 무자산가에 대한 재판거부를 의미하였다는 사정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한 자본주의적 발전도 법의 특색의 아주 예리한 대립을

조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법과 재판의 구조가 자본주의적 경제의 계기로부터

대륙적 상태의 방향에로 변형한다는 것에 관하여 결코[214] 명백한 경향은 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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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6 38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보유하였다. (2) 그때에 거기에서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확실히 특히 강도로 신대륙

에서 특히 미국에서 법발견의 진정한 「카리스마적인」 성격이 아직 명확한 모습으

로서 보존되고 있다. 실무에서 선례는 가장 다양한 중요성을 어디서나 그러하듯이

심급의 계급적 지위에 따라서 가질 뿐만 아니라 개개의 재판관의 가장 개인적인

권위에 따라서도 가진다. 법적 수단의 중요한 새로운 창조에 관하여 이것(법발견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 예컨대 맨스필드 백작의 카리스마처럼 - 전체 앵글로색슨

법의 영역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미국적 견해에서는 유럽 대륙의 관료제적 직권용

어의 비개인적인 「국왕직권재판」과는 반대로 판결은 일반적으로 이름으로서 표시

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는 구체적인 재판관의 개인적 창조이다. 그리고 영국의 재판

관도 이러한 지위를 요구한다. 그것과 관련하여 (3) 법의 합리성의 정도는 대륙의

유럽법보다도 본질적으로 보다 근소하며 또 법의 합리성의 종류도 대륙의 유럽법

과는 다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분히 오스틴에 이르기까지는 대륙의 개념의 기

초에 서서 고찰한 경우에 「학」이라는 이름 값하는 영국의 법학은 거의 완전히 결

여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벤담이 요구한 법전편찬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러

한 특색은 바로 영국법의 「실용적」 적합가능, 특히 관계인의 입장에서의 영국법의

「실용적」 성격을 낳은 것이다. 「비전문가」의 법사상은 한편으로는 언어구속적이다.

비전문가는 「법률적으로」 논의한다고 믿고 있을 때에도 엉터리 변호사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밖에 개개의 사건에서 개개의 사건을 추론한다는 것이 비전문

가에게는 자연이고 「전문가」의 법률적 추상은 비전문가에게는 인연이 없다. 그러나

이미 관찰했듯이, 양 관계에 있어서 경험적 법학의 기술은 비전문가에게는 친근

한 것이다. 경험적 법학의 기술은 비전문가에 대해서 비동정적일지 모른다 - 세계

의 어떠한 나라도 영국과 같은 변호사의 법운영에 대한 통절한 불평과 풍자를 알

지 못한다. 그리고 예방법학자의 구성적 형식은 비전문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역시 영국에서는 최고도로 그러하다. 그러나 경험적 법학의 원칙적

인 특성은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비전문가는 그것을 「추체험」하며 또

그것과 화해할 수가 있다. 비전문가는 언젠가 한 번은 - 전체 영국의 실업가가 그

렇게 하듯이 - 전체 생산관계를 위해서 한 사람의 법률적인 청죄사제를 임명하고

사례금을 지불할 것이니까. 그러나 법형식주의를 위한 통풍변이 존재하였다. 실로

사법(私法)의 영역에서는 코먼로, 그리고 현대에는 형평법도 선례구속에 의해서 실

용적 취급에 있어서 광범위한 정도로 「형식화」되어 있다. 변호사영업의 전통구속

성이 이미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시민배심(Civiljury) 제도는 합리성의 한

계를 가져온다. 이 한계를 불가피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선

례에의 구속성을 위하여 중요시되며, 한편 구체적인 가치형량이 자유로 되어야 할

영역에서 선례가 형식적·구속적인 규칙(하나의 「악법」)이 창조되지 않도록 배려한

다. 이러한 선례구속성의 영역과 또 하나의 구체적인 가치형량의 영역에의 구분이

실제로 기능하는 모양은 여기서는 다루지 아니한다. 여하튼 그것은 재판의 합리화

의 약화를 의미한다. 그 밖에 영국에서의 치안판사의 개별적 재판권에 있어서 일

상의 모든 간이소송사건을 다루는 때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가장적이며

가장 비합리적인 즉결의 방법이 성립하였다. 그것은 - 맨델스존(Mendelssohn)의

서술에 의해서 쉽게 납득할 수 있듯이 - 우리에게는 미지의 방법 「카디」 재판의 성

격을 보유하였다. 요컨대 재판의 현상은 그것의 실체법과 절차법의 가장 원칙적이

고 형식적인 특색에 있어서 신정적 제약과 가산적 권력에서 해방된 세속재판 운영

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한에서 대륙의 구조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도 영국법의 법발견은 중점적으로는 대륙법처럼 논리의 도움으로 법률명령의 내용

에서 순화된 「법규」의 「적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경제적으로도 사회

적으로도 상당히 감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언제

나 개별적 결과이며, 경제의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결과는 아니다. 자본주의

의 전개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정만이 편리했다고 관찰된다. 즉 법형성이 중

점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재판관이 보충되는 변호사의 수중에 있으며 - 따라서 부

유한 특히 자본주의적인 사적 관계인에의 봉사에 활동하며, 또 실질적으로 그들로

부터 그들의 직접 생계의 재화를 얻는 계층의 수중에 있다는 사정이다. 그와 관련

하여 런던에서의 제국재판소에의 재판의 집중 그리고 재판의 심한 고가성이 사실

상 무자산가에 대한 재판거부를 의미하였다는 사정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어디서나 동일한 자본주의적 발전도 법의 특색의 아주 예리한 대립을

조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법과 재판의 구조가 자본주의적 경제의 계기로부터

대륙적 상태의 방향에로 변형한다는 것에 관하여 결코[214] 명백한 경향은 존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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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재판과 법형성의 이러한 두 종류가 서로 경합하는 기회가

있었던 곳 - 예컨대 캐나다에서처럼 - 에서는 앵글로색슨의 방법이 우월하며, 우

리에게 관례로 되어 있는 것을 비교적 신속하게 배제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는 중세의 로마니스트의 대학교원 이래 유럽 대륙에서 특히 보유하고 있는

법의 법리화의 형식에 편의적인 결정적인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4절 비전문가 재판과 근대 법조계급의 신분적 경향

반대로 근대의 사회적 발전은 이미 언급한 정치적 최후에 논의된 내부의 신분

적·법률적 계기 외에 형식적인 법합리주의를 약화시키는 한편 그 밖의 일반적 계

기를 발전시켰다. 직접적인 비합리적인 「카디 재판」은 현대 형사 재판에서 광범위

하게 배심원의 「민중적」 재판으로 행하여진다. 「카디 재판」은 법의 형식주의에 의해

서 구체적인 경우에 언제든지 그 감정이 손상되는 전문법률가적으로 교육받지 아

니한 비전문가의 감상과 또 실질적 정의를 요구하는 특권을 가지지 아니한 계급의

충동을 영합하였다. 다만 이러한 상대적 인민재판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 배심재

판의 특색에 대해서 두 측면에서 공격이 일어난다. 먼저 첫째로는 전문가의 내부

적 태도에 상응하는 몰주관성에 비하여 보다 강력한 배심원의 이해구속성 때문이

다. 고대 로마에서 이미 배심원의 리스트가 계급투쟁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현대에

는 「유서 깊은」 명망가 계급층으로부터의 배심원의 선택은 오늘날 우세하며, 또 일

정한 범위에서는 거의 불가피하지만 당연히 특히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제약된 것

이며, 배심원이 가령 주로 평민적 계층의 것이라 하더라도 특히 노동자 계급에 의

해서 계급재판으로서 유리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기피되었다. 또 노동자 계급이 배

심원의 자리에 관여하고 있는 곳에서는 반대로 소유계급에 의해서 기피되었다. 또

관계인이 「계급」자체만이 아닌 일이 있다. 즉 독일에서는 물론 부녀의 정절이 언제

나 최저로 평가되는 곳인데 배심원으로서의 남성이 그들의 동성인 남성의 한 사람

에게, 예컨대 강간 때문에 유죄의 선고를 내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

다. 즉 적어도 소녀가 배심원에 대해서 「비난할」 것으로서 인정할 경우에는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는 비전문가재판에 대하여 법률의 전문교육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서 공격하였다. 즉 비전문가는 형식적·법률적으로는 종종 가장 논란의 여지

있는 평결 이유를 표시하지 않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신탁의 방법에 따라서 하게

되나 판결을 내리는 것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심리에 종속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안

에서는 일반적으로 경험에 따르면 비전문가는 전문가보다도 영향에 있어서 열등한

혼합된 합의체가 형성된다. 그리하여 비전문가의 임석은 스위스에서 재판소의 심

의의 공개에 의해서 그 실시가 시도되었던 전문법률가의 고려의 일종의 공개강제라

는 의미 외에는 실제로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공격하였다. 한편으로는 전문재판

측에서도 형사상의 영역에서, 특히 중대한 형사사건의 판정을 위한 책임이 증대하

여 전가하게 되는 전문 정신병의사에 의한 금치산에 있도록 눈짓을 한다. 이리하

여 전문정신병 의사에게 합리주의는 진정한 자연과학의 수단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임무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전체 이러한 갈둥은 분명히 주지주의에 편의적

인 기술적·경제적 발전에 의해서는 아주 간접적으로만 조건지어저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동등한 계급상태 아래서도 서로 충돌하는 재판의 형식적 원칙과 실질적

원칙 간의 해결할 수 없는 대립의 근본적이며 주요한 결과이다. 또 현대의 특권을

가지지 아니한 계급, 특히 노동계급이 비형식적 재판으로부터 법률가의 이데올로

기가 상정하는 것으로부터 노동자의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관료제화되고 그 지도적인 지위에서 증대적·계획적으로 국가

조직으로부터 모집된, 또 이에 더하여 그 전진에 있어 완전히 정치적 지배에 의존

하였던 법조계급은 스위스나 영국의 재판관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하물며 미국의

재판관과 동일시할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재판관으로부터 순수하게 몰주관적인

법형식주의의 신성성에의 신념을 제거하고 대신에 「평가할」것을 지시한다면 의심

없이 결과는 스위스와 영국의 법영역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관찰할 것이 아니다. - 몇 가지 역사적 오류를 수정하는 것

만이 필요하다.

예언자만이 현행법에 대해서 구체적·의식적인 「창조적인」, 즉 새로운 법을 창조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밖의 점에서는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면 가장 많이 「창

조적」인 법실무가도 특히 근대에서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주관적으로는 기존의 규

범의 대변자로서만 - 혹은 잠재적으로 - 느꼈던 것이며, 기존의 규범의 해석자,

적용자로서 느끼고 그것의 창조자로서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재차 힘주어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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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88 389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재판과 법형성의 이러한 두 종류가 서로 경합하는 기회가

있었던 곳 - 예컨대 캐나다에서처럼 - 에서는 앵글로색슨의 방법이 우월하며, 우

리에게 관례로 되어 있는 것을 비교적 신속하게 배제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는 중세의 로마니스트의 대학교원 이래 유럽 대륙에서 특히 보유하고 있는

법의 법리화의 형식에 편의적인 결정적인 계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4절 비전문가 재판과 근대 법조계급의 신분적 경향

반대로 근대의 사회적 발전은 이미 언급한 정치적 최후에 논의된 내부의 신분

적·법률적 계기 외에 형식적인 법합리주의를 약화시키는 한편 그 밖의 일반적 계

기를 발전시켰다. 직접적인 비합리적인 「카디 재판」은 현대 형사 재판에서 광범위

하게 배심원의 「민중적」 재판으로 행하여진다. 「카디 재판」은 법의 형식주의에 의해

서 구체적인 경우에 언제든지 그 감정이 손상되는 전문법률가적으로 교육받지 아

니한 비전문가의 감상과 또 실질적 정의를 요구하는 특권을 가지지 아니한 계급의

충동을 영합하였다. 다만 이러한 상대적 인민재판의 성격에 의해서 결정된 배심재

판의 특색에 대해서 두 측면에서 공격이 일어난다. 먼저 첫째로는 전문가의 내부

적 태도에 상응하는 몰주관성에 비하여 보다 강력한 배심원의 이해구속성 때문이

다. 고대 로마에서 이미 배심원의 리스트가 계급투쟁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현대에

는 「유서 깊은」 명망가 계급층으로부터의 배심원의 선택은 오늘날 우세하며, 또 일

정한 범위에서는 거의 불가피하지만 당연히 특히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제약된 것

이며, 배심원이 가령 주로 평민적 계층의 것이라 하더라도 특히 노동자 계급에 의

해서 계급재판으로서 유리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기피되었다. 또 노동자 계급이 배

심원의 자리에 관여하고 있는 곳에서는 반대로 소유계급에 의해서 기피되었다. 또

관계인이 「계급」자체만이 아닌 일이 있다. 즉 독일에서는 물론 부녀의 정절이 언제

나 최저로 평가되는 곳인데 배심원으로서의 남성이 그들의 동성인 남성의 한 사람

에게, 예컨대 강간 때문에 유죄의 선고를 내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

다. 즉 적어도 소녀가 배심원에 대해서 「비난할」 것으로서 인정할 경우에는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는 비전문가재판에 대하여 법률의 전문교육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서 공격하였다. 즉 비전문가는 형식적·법률적으로는 종종 가장 논란의 여지

있는 평결 이유를 표시하지 않고, 따라서 비합리적인 신탁의 방법에 따라서 하게

되나 판결을 내리는 것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심리에 종속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안

에서는 일반적으로 경험에 따르면 비전문가는 전문가보다도 영향에 있어서 열등한

혼합된 합의체가 형성된다. 그리하여 비전문가의 임석은 스위스에서 재판소의 심

의의 공개에 의해서 그 실시가 시도되었던 전문법률가의 고려의 일종의 공개강제라

는 의미 외에는 실제로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공격하였다. 한편으로는 전문재판

측에서도 형사상의 영역에서, 특히 중대한 형사사건의 판정을 위한 책임이 증대하

여 전가하게 되는 전문 정신병의사에 의한 금치산에 있도록 눈짓을 한다. 이리하

여 전문정신병 의사에게 합리주의는 진정한 자연과학의 수단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임무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전체 이러한 갈둥은 분명히 주지주의에 편의적

인 기술적·경제적 발전에 의해서는 아주 간접적으로만 조건지어저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동등한 계급상태 아래서도 서로 충돌하는 재판의 형식적 원칙과 실질적

원칙 간의 해결할 수 없는 대립의 근본적이며 주요한 결과이다. 또 현대의 특권을

가지지 아니한 계급, 특히 노동계급이 비형식적 재판으로부터 법률가의 이데올로

기가 상정하는 것으로부터 노동자의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관료제화되고 그 지도적인 지위에서 증대적·계획적으로 국가

조직으로부터 모집된, 또 이에 더하여 그 전진에 있어 완전히 정치적 지배에 의존

하였던 법조계급은 스위스나 영국의 재판관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하물며 미국의

재판관과 동일시할 수 없다. 만약 사람들이 재판관으로부터 순수하게 몰주관적인

법형식주의의 신성성에의 신념을 제거하고 대신에 「평가할」것을 지시한다면 의심

없이 결과는 스위스와 영국의 법영역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관찰할 것이 아니다. - 몇 가지 역사적 오류를 수정하는 것

만이 필요하다.

예언자만이 현행법에 대해서 구체적·의식적인 「창조적인」, 즉 새로운 법을 창조

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밖의 점에서는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면 가장 많이 「창

조적」인 법실무가도 특히 근대에서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주관적으로는 기존의 규

범의 대변자로서만 - 혹은 잠재적으로 - 느꼈던 것이며, 기존의 규범의 해석자,

적용자로서 느끼고 그것의 창조자로서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재차 힘주어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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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90 3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관적 신념 - 그것은 바로 정평 있는 유력한 법률가의 것인

데 - 에 대해서 현대에는 객관적으로 그것과 다른 상태에 있는 사실을 대조시키

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관적 태도를 위한 규범을 만들려는 것은 - 그 요구에 대

하여 종래와[216] 같은 태도가 취해진다 하더라도 - 언제나 주지주의적인 현실 폭

로의 소산이다. 영국 재판관의 전통적 지위는 관료화와 「형식적」 법규의 진보에 의

해서 결국은 강하게 동요할 것이다. 편찬된 법을 가지는 나라에서 관료적 재판관

에게 「창조자」의 관을 덮어씌움으로써 그들을 단지 법예언자로 만들 수 있는가 하

는 것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 법률적 개념 대신에 사회학적·경제적·도덕적 논증

이 나타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재결이유에 표시되는 법률적 정확성이라는 것은 상

당히 저하될 것이다. - 운동은 요컨대 운동 자신의 아버지인 「전문가주의」의 지

배와 합리주의에 대한 특색 있는 반격의 하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법의 형식적 성

질의 발전은 독특한 상반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거래의 안전이 요구되는 한 법은

엄격하게 형식주의적이며 명확한데 대하여 거래의 성실의 관심에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의 논리적 의미해석과 「윤리적 최소한」의 방향에서 제시되는 「선량한 거래풍

속」이 조건지어저 있는 한, 법은 거래의 성실성을 위해서 비형식적이다. 평화적 이

익투쟁의 수단과는 다른 요구를 법실무에게 제출하는 전체 권력에 의해서 법은 반

형식적인 길로 몰린다. 따라서 법의 반형식적 경향은 사회적 계급이해와 이데올로

기의 실질적인 정의의 요구에 의해서 일정한 정치적, 특히 독재적인 또는 민주적

인 지배형식의 그리고 지배형식에 적합한 법의 목적에 관한 견해의 오늘날에도 유

력한 본질적 성질에 의해서 또한 「비전문가」의 이해할 수 있는 재판에 대한 요구

에 의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정에 따라서는 이미 관찰했듯이, 법조계급 자신

의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초지어진 권력요구에 의해서 촉진된다. 이러한 영향 아래

어떻게 법과 법실무가 형성되어 가더라도 기술적·경제적 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나

는 것은 비전문가재판주의에도 불구하고 전문적 내용을 언제나 증가하는 법에의

불가피하게 증대하는 비전문가의 부지(不知)이다. 즉 법의 전문화이다. 그리고 합

리적인 따라서 언제나 목적합리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전체 내용적 신성성을 결여

한 기술적 장치로서의 현행법의 평가의 강화는 법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이러한 운

명은 일반적인 이유에서 종종 증대하는 기존의 법에서 종순성에 의해서 은폐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기존의 법으로부터 이반시켜질 수는 없다. 간결하게 언급한 근

대의 학문적으로는 대단히 가치 많은 법사회학적 또는 법철학적 방법의 표명은 이

러한 인상을 강하게 할 뿐일 것이다. 그들이 법의 본질과 재판관의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내용의 학설을 대표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끝) [2016. 5. 21]

주 석

* 497 치텔만(Ernst Zitelmann, 1852-1923): 괴팅겐·로스토크·할레·본대학 교수.

민법·비교법·법사학자. 주저 『국제사법』(Internationales Privatrecht, 2 Bde.

1897-1912), 법사학자로서의 논문 「법에서의 흠결」(Lücken im Recht, 1903).

* 497 기이르케(Otto von Gierke, 1841-1921): 게르마니스의 입장에서 판덱텐법학

의 형식적 개념주의와 추상적 개인주의를 비판. 주저 『독일단체법』(Das deutsche

Genossenschaftsrecht, 1868, 1873, 1881, 1913) 전4권.

* 497 에얼리히(Eugen Ehrlich, 1862-1922):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교수자격취

득. 1896년부터 1907년 Czernowitz 대학 교수와 총장 역임. 「살아있는 법」의 탐

구가 법사회학의 과제라고 주장. 주저 『법사회학의 기초이론』(Grundlegung der

Soziologie des Rechts, 1913 [부분 번역 장경학역, 원기사, 1955). 슈뢰더, 68면.

* 519 루돌프 좀(Rudolf Sohm, 1841-1917): 법사학자. 프라이부르크·슈트라스

부르크대학 교수 역임. 주저 『법학제요교과서』(Institutionen. Geschichte und

System des römischen Privatrechts, 1883)과 『교회법』(Kirchenrecht, 1892).

슈뢰더, 247면.

* 539 루드비히 미타이스(Ludwig Mitteis, 1859-1921) 프라하·빈·라이프치히대

학 교수 역임. 로마니스텐 법사학자. 아들 하인리히 미타이스(Heinrich Mitteis,

1889 -1952)도 법사학자로서 쾰른·하이델베르크·뮌헨·빈대학 교수 역임.

* 544 콜러(Josef Koher, 1849-1919): 법사학자. 뷔르츠부르크와 베를린대학 교수.

비교법학과 같은 뜻의 보편법사(Universalrechtsgeschichte)를 제창.

* 551 Träger 「담당자」 또는 「담지자」 등으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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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90 391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관적 신념 - 그것은 바로 정평 있는 유력한 법률가의 것인

데 - 에 대해서 현대에는 객관적으로 그것과 다른 상태에 있는 사실을 대조시키

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관적 태도를 위한 규범을 만들려는 것은 - 그 요구에 대

하여 종래와[216] 같은 태도가 취해진다 하더라도 - 언제나 주지주의적인 현실 폭

로의 소산이다. 영국 재판관의 전통적 지위는 관료화와 「형식적」 법규의 진보에 의

해서 결국은 강하게 동요할 것이다. 편찬된 법을 가지는 나라에서 관료적 재판관

에게 「창조자」의 관을 덮어씌움으로써 그들을 단지 법예언자로 만들 수 있는가 하

는 것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 법률적 개념 대신에 사회학적·경제적·도덕적 논증

이 나타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재결이유에 표시되는 법률적 정확성이라는 것은 상

당히 저하될 것이다. - 운동은 요컨대 운동 자신의 아버지인 「전문가주의」의 지

배와 합리주의에 대한 특색 있는 반격의 하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법의 형식적 성

질의 발전은 독특한 상반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거래의 안전이 요구되는 한 법은

엄격하게 형식주의적이며 명확한데 대하여 거래의 성실의 관심에 있어서 당사자의

의사의 논리적 의미해석과 「윤리적 최소한」의 방향에서 제시되는 「선량한 거래풍

속」이 조건지어저 있는 한, 법은 거래의 성실성을 위해서 비형식적이다. 평화적 이

익투쟁의 수단과는 다른 요구를 법실무에게 제출하는 전체 권력에 의해서 법은 반

형식적인 길로 몰린다. 따라서 법의 반형식적 경향은 사회적 계급이해와 이데올로

기의 실질적인 정의의 요구에 의해서 일정한 정치적, 특히 독재적인 또는 민주적

인 지배형식의 그리고 지배형식에 적합한 법의 목적에 관한 견해의 오늘날에도 유

력한 본질적 성질에 의해서 또한 「비전문가」의 이해할 수 있는 재판에 대한 요구

에 의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정에 따라서는 이미 관찰했듯이, 법조계급 자신

의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초지어진 권력요구에 의해서 촉진된다. 이러한 영향 아래

어떻게 법과 법실무가 형성되어 가더라도 기술적·경제적 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나

는 것은 비전문가재판주의에도 불구하고 전문적 내용을 언제나 증가하는 법에의

불가피하게 증대하는 비전문가의 부지(不知)이다. 즉 법의 전문화이다. 그리고 합

리적인 따라서 언제나 목적합리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전체 내용적 신성성을 결여

한 기술적 장치로서의 현행법의 평가의 강화는 법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이러한 운

명은 일반적인 이유에서 종종 증대하는 기존의 법에서 종순성에 의해서 은폐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기존의 법으로부터 이반시켜질 수는 없다. 간결하게 언급한 근

대의 학문적으로는 대단히 가치 많은 법사회학적 또는 법철학적 방법의 표명은 이

러한 인상을 강하게 할 뿐일 것이다. 그들이 법의 본질과 재판관의 지위에 관하여

어떠한 내용의 학설을 대표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끝) [2016. 5. 21]

주 석

* 497 치텔만(Ernst Zitelmann, 1852-1923): 괴팅겐·로스토크·할레·본대학 교수.

민법·비교법·법사학자. 주저 『국제사법』(Internationales Privatrecht, 2 Bde.

1897-1912), 법사학자로서의 논문 「법에서의 흠결」(Lücken im Recht, 1903).

* 497 기이르케(Otto von Gierke, 1841-1921): 게르마니스의 입장에서 판덱텐법학

의 형식적 개념주의와 추상적 개인주의를 비판. 주저 『독일단체법』(Das deutsche

Genossenschaftsrecht, 1868, 1873, 1881, 1913) 전4권.

* 497 에얼리히(Eugen Ehrlich, 1862-1922):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교수자격취

득. 1896년부터 1907년 Czernowitz 대학 교수와 총장 역임. 「살아있는 법」의 탐

구가 법사회학의 과제라고 주장. 주저 『법사회학의 기초이론』(Grundlegung der

Soziologie des Rechts, 1913 [부분 번역 장경학역, 원기사, 1955). 슈뢰더, 68면.

* 519 루돌프 좀(Rudolf Sohm, 1841-1917): 법사학자. 프라이부르크·슈트라스

부르크대학 교수 역임. 주저 『법학제요교과서』(Institutionen. Geschichte und

System des römischen Privatrechts, 1883)과 『교회법』(Kirchenrecht, 1892).

슈뢰더, 247면.

* 539 루드비히 미타이스(Ludwig Mitteis, 1859-1921) 프라하·빈·라이프치히대

학 교수 역임. 로마니스텐 법사학자. 아들 하인리히 미타이스(Heinrich Mitteis,

1889 -1952)도 법사학자로서 쾰른·하이델베르크·뮌헨·빈대학 교수 역임.

* 544 콜러(Josef Koher, 1849-1919): 법사학자. 뷔르츠부르크와 베를린대학 교수.

비교법학과 같은 뜻의 보편법사(Universalrechtsgeschichte)를 제창.

* 551 Träger 「담당자」 또는 「담지자」 등으로 번역.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221: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92 39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 566 호이슬러(Andreas Heusler, 1834-1921): 바젤 대학 교수, 1891-1907년 바젤

항소법원 원장 역임.

* 570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 라이프치히대학 로마법교수·베를린

대학 고대사 교수 역임. 주저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 1854-56)[김남우·

김동훈·성중모 옮김, 『몸젠의 로마사』, 푸른역사, 2014]; 『로마국법』(Römisches

Staatsrecht, 3 Bde. 1871-1888). 막스 베버의 스승. 슈뢰더 185면.

* 582 기구개념(Anstaltsbegriff): 일반적으로 「시설」이라고 하며 공법상은 영조물

(營造物)로서 사법상의 재단에 상당하는 개념이다. 「법인공동체」 또는 「공법기관」이

라고도 번역한다. 베버는 근대 국민국가와 가톨릭교회 조직을 전형적인 사례로 든

다.

* 589 메이틀랜드(Frederic William Maitland, 1850-1906) 영국의 법제사가. 케임

브리지 대학 교수(1888-1906). 영국의 법제사·사회사 연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

겼다. Pollock과 공저한 “History of English Law before the Time of Edward

I (1895)는 법제사학에서 획기적인 명저로 평가를 받고 있다.

* 613 아이케 폰 레프고(Eike von Repgow, um 1180/90-nach 1232) 작센슈피겔

(Sachsenspiegel)의 저자로 독일 최초의 법사상가. 공법 지식이 없던 시대에 작센

부족의 법을 작센슈피겔의 란트 법서와 봉건법서에서 기술한 것이 탁월한 업적. 슈

뢰더, 76면.

* 616 예링(Rodolf von Ihring, 1818-1892): 19세기 독일 사법학의 대표자. 미완

성 대저 『로마법의 정신』 (Geist der römischen Rechts auf den verschiedenen

Stufen seiner Entwicklung, 3 Teile, 1852-1865) 외에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유명.

* 627, 654 카디재판(Kadi-Justiz): 카디란 이슬람교의 재판관으로서 주로 종교법

에 관련된 사건을 관장한다.

* 640 하드리아누스(Hadrian, Publius Aelius, 76-138): 로마의 황제.

* 669 운거(Josef Unger, 1828-1913):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오스트리아 사

법학자로서 빈대학 교수 역임. 역사법학파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 법학쇄신

자, 주석학파의 극복자라고 평가. 주저 『오스트리아 일반 사법의 체계』(System

desösterreichischen allgemeinen Privatsrechts, Bd. I. 1856 ff.). 슈뢰더 298면.

* 669 빈트샤이트(Bernhard Windscheid, 1817-1892): 사법학자. 하이델베르크·

라이프치히 대학교수 역임. 독일 라이히 민법전편찬위원회위원. 1896년 민법전 제1

초안은 조문의 형식을 취한 빈트샤이트의 판덱텐교과서라고 불린다.

* 681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 바이마르 시대 사회민주주의 입

장에 선 가장 유력한 법률가. 법철학과 형법 전공.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역임.

주저 『법철학』(최종고역, 1973) 등. 슈뢰더 218면.

* 691 콩트(Auguste Comte, 1789-1857):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실증철학의

선구자. 저서 『실증주의서설』(김점석 옮김, 민음사, 2001).

* 경건관계(Pietätsbande): 베버는 부모 내지 조상에 대한 효성과 외경의 뜻으로 사

용한다. 경애(敬愛)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베버의 법사회학 관련 논문 (경제와 사회질서와 힘들, S. 181-198)

제1절 법질서와 경제질서

제2절 법질서, 관습 그리고 윤리

제3절 경제에 대한 법적 강제의 의미와 한계

* Max Weber-Gesamtausgabe, Bd I/23: Wirtschaft und Gesellschaft.

Soziologie. Unvollendet. 1919-1920. Herausgegeben von Knut Borchardt,

Edith Hanke und Wolfgang Schluchter, Tübingen: Mohr Siebeck 2013. ¤ 320.

막스 베버에 관한 한국 문헌

(문헌목록)

이순구편, 막스 베버에 관한 문헌 목록, 『현상과 인식』, 창간호(1977); 동인, 『막

스 베버 연구』(진명출판사, 1989).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222: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92 393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 566 호이슬러(Andreas Heusler, 1834-1921): 바젤 대학 교수, 1891-1907년 바젤

항소법원 원장 역임.

* 570 몸젠(Theodor Mommsen, 1817-1903): 라이프치히대학 로마법교수·베를린

대학 고대사 교수 역임. 주저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 1854-56)[김남우·

김동훈·성중모 옮김, 『몸젠의 로마사』, 푸른역사, 2014]; 『로마국법』(Römisches

Staatsrecht, 3 Bde. 1871-1888). 막스 베버의 스승. 슈뢰더 185면.

* 582 기구개념(Anstaltsbegriff): 일반적으로 「시설」이라고 하며 공법상은 영조물

(營造物)로서 사법상의 재단에 상당하는 개념이다. 「법인공동체」 또는 「공법기관」이

라고도 번역한다. 베버는 근대 국민국가와 가톨릭교회 조직을 전형적인 사례로 든

다.

* 589 메이틀랜드(Frederic William Maitland, 1850-1906) 영국의 법제사가. 케임

브리지 대학 교수(1888-1906). 영국의 법제사·사회사 연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

겼다. Pollock과 공저한 “History of English Law before the Time of Edward

I (1895)는 법제사학에서 획기적인 명저로 평가를 받고 있다.

* 613 아이케 폰 레프고(Eike von Repgow, um 1180/90-nach 1232) 작센슈피겔

(Sachsenspiegel)의 저자로 독일 최초의 법사상가. 공법 지식이 없던 시대에 작센

부족의 법을 작센슈피겔의 란트 법서와 봉건법서에서 기술한 것이 탁월한 업적. 슈

뢰더, 76면.

* 616 예링(Rodolf von Ihring, 1818-1892): 19세기 독일 사법학의 대표자. 미완

성 대저 『로마법의 정신』 (Geist der römischen Rechts auf den verschiedenen

Stufen seiner Entwicklung, 3 Teile, 1852-1865) 외에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유명.

* 627, 654 카디재판(Kadi-Justiz): 카디란 이슬람교의 재판관으로서 주로 종교법

에 관련된 사건을 관장한다.

* 640 하드리아누스(Hadrian, Publius Aelius, 76-138): 로마의 황제.

* 669 운거(Josef Unger, 1828-1913):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오스트리아 사

법학자로서 빈대학 교수 역임. 역사법학파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 법학쇄신

자, 주석학파의 극복자라고 평가. 주저 『오스트리아 일반 사법의 체계』(System

desösterreichischen allgemeinen Privatsrechts, Bd. I. 1856 ff.). 슈뢰더 298면.

* 669 빈트샤이트(Bernhard Windscheid, 1817-1892): 사법학자. 하이델베르크·

라이프치히 대학교수 역임. 독일 라이히 민법전편찬위원회위원. 1896년 민법전 제1

초안은 조문의 형식을 취한 빈트샤이트의 판덱텐교과서라고 불린다.

* 681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 1878-1949): 바이마르 시대 사회민주주의 입

장에 선 가장 유력한 법률가. 법철학과 형법 전공.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역임.

주저 『법철학』(최종고역, 1973) 등. 슈뢰더 218면.

* 691 콩트(Auguste Comte, 1789-1857):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자. 실증철학의

선구자. 저서 『실증주의서설』(김점석 옮김, 민음사, 2001).

* 경건관계(Pietätsbande): 베버는 부모 내지 조상에 대한 효성과 외경의 뜻으로 사

용한다. 경애(敬愛)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베버의 법사회학 관련 논문 (경제와 사회질서와 힘들, S. 181-198)

제1절 법질서와 경제질서

제2절 법질서, 관습 그리고 윤리

제3절 경제에 대한 법적 강제의 의미와 한계

* Max Weber-Gesamtausgabe, Bd I/23: Wirtschaft und Gesellschaft.

Soziologie. Unvollendet. 1919-1920. Herausgegeben von Knut Borchardt,

Edith Hanke und Wolfgang Schluchter, Tübingen: Mohr Siebeck 2013. ¤ 320.

막스 베버에 관한 한국 문헌

(문헌목록)

이순구편, 막스 베버에 관한 문헌 목록, 『현상과 인식』, 창간호(1977); 동인, 『막

스 베버 연구』(진명출판사, 1989).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223: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94 39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김중섭, 한국에서의 막스 베버 연구, 『현상과 인식』제4권 4호(1980).

(생애)

1. 마리안네 베버, 조기준역, 『막스 베버』(세기의 전환을 이끈 위대한 사상가), 소

이연, 2010. [같은 역자의 『막스 베버의 생애』(삼성문화재단, 1975)의 신판]

2. 마리안네 베버, 민병산역, 『막스 베버의 생애』(일신서적출판사, 1995).

3. H. N. 퓨겐 지음, 박미애 옮김, 『막스 베버: 사회학적 사유의 길』(서광사,

1994).

4. 『막스 웨버 청년시대의 편지』(중앙일보 동양방송, 1977).

5. 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 사상사, 2008).

(번역)

1. 최식역, 『법과 사회』(박영사, 1959) (박영문고 1-11)[수정판 『동아법학』 제71호

(2016)]

2. 박봉식역, 『직업으로서의 정치』(박영사, 1959) (박영문고 1-14)

3. 이경구역, 『직업으로서의 정치』외 1편 (신아사, 1959)

4. 한태연·김남진 공역, 『관료제』(법문사, 1959) (위성문고 7)

5. 김석현역, 『사회과학적 방법론』(법문사, 1959) (위성문고 51)

6. 최문환 옮김, 『웨버의 학문과 정치론』(대한교과서, 1963)

7. 권세원 외역, 『사회학의 기초개념』(휘문출판사, 1972) (세계의 대사상 1)

8. 조기준역, 『사회경제사』(삼성출판사, 1976) (세계의 사상 19)

9. 손제석 등역, 『사회학의 기초개념』(휘문출판사, 1978)

10. 금종우역, 『지배의 사회학』(한길사, 1981)

11. 주수만역, 『막스 베에버어의 정치사상』(경희대 출판부, 1982) (국민국가와 국

민경제정책, 1-44면; 신질서 독일에 있어서의 의회와 정부, 45-186면; 직업

으로서의 정치, 187-270면)

12. 홍윤기역, 『힌두교와 불교』(한국신학연구소, 1986)

13. 금종우역, 『직업으로서의 학문』(서문당, 1986) (서문문고 203)

14. 양회수역, 『사회과학논총』(을유문화사, 1987) (세계사상교양전집)

15. 진영석역, 『야훼의 사람들(고대 유대교)』(백산출판사, 1989)

16. 이상률 옮김, 『유교와 도교: 중국 종교의 정통과 이단』(문예출판사, 1990)

17. 임영일 옮김, 『막스 베버 선집』(까치, 1991)

18. 민족국가와 국민경제정책, 『사회와 문화』 제7권 1호(1992)

19. 이건용 옮김, 『음악 사회학』(민음사, 1993)

20. 금종우·전남석 공역, 『지배의 사회학』(한길사, 1993)

21. 이상률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문예출판사, 1994)

(학문, pp. 9-65; 정치, pp. 67-175; 부록 볼프강 슐르흐터, 가치자유와 책

임윤리, pp. 177-229), 전체 269면.

21. 박성환 옮김, 『경제와 사회(1)』(문학과지성사, 1997)

22. 전성우역,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사회비평사, 1997)

23. 양회수역, 『사회과학논총』(을유문화사, 1998) (세계의 사상 15)

24. 이상률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직업으로서의 정치)』(문예출판사, 1999)

25. 전성우 옮김,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종교·정치』(막스 베버 사상 선집

I) (나남, 2000)

26. 김진욱 옮김, 『이해 사회학의 카테고리』(범우사, 2002) (범우문고 175)

27. 김진욱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정치』(범우사, 2002)

28. 이남석역,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지도자 선출』(책세상, 2002)

29. 염동훈역, 『내 안의 두 세계』(일신사, 2003)

30. 염동훈역,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일신사, 2003)

31. 진영석 옮김, 『야훼의 예언자들』(백산출판사, 2004)

32.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 2006)

33.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나남, 2007)

34. 전성우 옮김, 『종교사회학 선집』(나남, 2008), 308면 (신분집단, 계급 그리고

종교; 세계종교와 경제윤리: 비교사회학적 시도 서론과 중간고찰 수록).

동국대학교 | IP: 210.94.201.*** | Accessed 2016/09/13 14:02(KST)

Page 224: 법과 사회(법사회학) - KTUG, KTSktug.org/~nomos/sol/weber_sol.pdfAPA Style 막스 베버, 최식 (2016). 법과 사회(법사회학). 동아법학, (71), 173-398. 이용정보

東亞法學 第71號394 395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김중섭, 한국에서의 막스 베버 연구, 『현상과 인식』제4권 4호(1980).

(생애)

1. 마리안네 베버, 조기준역, 『막스 베버』(세기의 전환을 이끈 위대한 사상가), 소

이연, 2010. [같은 역자의 『막스 베버의 생애』(삼성문화재단, 1975)의 신판]

2. 마리안네 베버, 민병산역, 『막스 베버의 생애』(일신서적출판사, 1995).

3. H. N. 퓨겐 지음, 박미애 옮김, 『막스 베버: 사회학적 사유의 길』(서광사,

1994).

4. 『막스 웨버 청년시대의 편지』(중앙일보 동양방송, 1977).

5. 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 사상사, 2008).

(번역)

1. 최식역, 『법과 사회』(박영사, 1959) (박영문고 1-11)[수정판 『동아법학』 제71호

(2016)]

2. 박봉식역, 『직업으로서의 정치』(박영사, 1959) (박영문고 1-14)

3. 이경구역, 『직업으로서의 정치』외 1편 (신아사, 1959)

4. 한태연·김남진 공역, 『관료제』(법문사, 1959) (위성문고 7)

5. 김석현역, 『사회과학적 방법론』(법문사, 1959) (위성문고 51)

6. 최문환 옮김, 『웨버의 학문과 정치론』(대한교과서, 1963)

7. 권세원 외역, 『사회학의 기초개념』(휘문출판사, 1972) (세계의 대사상 1)

8. 조기준역, 『사회경제사』(삼성출판사, 1976) (세계의 사상 19)

9. 손제석 등역, 『사회학의 기초개념』(휘문출판사, 1978)

10. 금종우역, 『지배의 사회학』(한길사, 1981)

11. 주수만역, 『막스 베에버어의 정치사상』(경희대 출판부, 1982) (국민국가와 국

민경제정책, 1-44면; 신질서 독일에 있어서의 의회와 정부, 45-186면; 직업

으로서의 정치, 187-270면)

12. 홍윤기역, 『힌두교와 불교』(한국신학연구소, 1986)

13. 금종우역, 『직업으로서의 학문』(서문당, 1986) (서문문고 203)

14. 양회수역, 『사회과학논총』(을유문화사, 1987) (세계사상교양전집)

15. 진영석역, 『야훼의 사람들(고대 유대교)』(백산출판사, 1989)

16. 이상률 옮김, 『유교와 도교: 중국 종교의 정통과 이단』(문예출판사, 1990)

17. 임영일 옮김, 『막스 베버 선집』(까치, 1991)

18. 민족국가와 국민경제정책, 『사회와 문화』 제7권 1호(1992)

19. 이건용 옮김, 『음악 사회학』(민음사, 1993)

20. 금종우·전남석 공역, 『지배의 사회학』(한길사, 1993)

21. 이상률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문예출판사, 1994)

(학문, pp. 9-65; 정치, pp. 67-175; 부록 볼프강 슐르흐터, 가치자유와 책

임윤리, pp. 177-229), 전체 269면.

21. 박성환 옮김, 『경제와 사회(1)』(문학과지성사, 1997)

22. 전성우역,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방법론』(사회비평사, 1997)

23. 양회수역, 『사회과학논총』(을유문화사, 1998) (세계의 사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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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전성우 옮김,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종교·정치』(막스 베버 사상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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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진욱 옮김, 『이해 사회학의 카테고리』(범우사, 2002) (범우문고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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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남석역,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지도자 선출』(책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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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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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法學 第71號396 397막스 베버/최 식 : 법과 사회(법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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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국민국가와 경제정책』, (성대 e-books)

(번역 2)

1. 권세원·강명규 공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일조각,

1958)

2. 양회수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유문화사, 1979)

3. 박종선역,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세계,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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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성수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문예출판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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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 『사회학의 근본개념』 수록).

10. 최기철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다락원, 2010)

11. 김덕영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서출판 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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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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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김도현, 막스 베버의 법의 개념, 『법과 사회』 제16권 1호(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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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성환, 『막스 베버의 한국사회론: 유교적 가산제 비판』(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6. 배동인 등저, 『막스 베버 사회학의 쟁점들』(민음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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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동준, 합리적 법과 행위의 합리성: 막스 베버의 법사회학과 의미의 문제,

『사회이론』 제46권(2014), 259-289면. 한국사회이론학회, 한국인문사회과

학회 엮음, 『다시 읽는 막스 베버: 탄생 150주년기념, 베버의 삶과 학문 연구』

(문예출판사, 2015), 289-324면에 재수록.

9. 양건, 법사회학의 기초이론: Marx-Engels와 Weber, 『법학논총』(숭전대) 창

간호(1985).

10. 유석춘, 『막스 베버와 동양 사회』(나남, 1992).

11. 윤영승, 막스 베버의 법사회학에 대한 일 연구, 『서강 사회학 연구』 창간호

(1992).

12. 은숭표, 『루만의 법사회학: 루만의 시스템 이론』(신영사, 2002).

13. 이근관, Max Weber의 법사회학에 관한 일고: 법과 자본주의 발전간의 관

계를 중심으로, 최대권외, 『법사회학의 이론과 방법』(일신사, 1995).

14. 이상돈·홍성수 공저, 『법사회학: M. Weber, J. Habermas, N. Luhmann

의 사회학이론과 법 패러다임』(박영사, 2000).

15. 장경학, 막스 웨버의 법사회학, 『정경연구』 1968년 1·4·5·9·12월호.

16. 전성우, 『막스 베버 사회학』(나남, 2013).

17. 전성우, 막스 베버의 근대사회론, 유석춘 엮음, 『막스 베버와 동양사회』(나남,

1992).

18. 차성환, 『막스 베버와 근대의 의미 세계』(학문과 사상사, 1997).

19. 최대권, 우리나라 공법사 이해의 한 시도: 막스 웨버의 임페리움 및 공법 개

념을 중심으로, 『서울대 법학』 제17권 1호(1976).

20. 최문환, 『막스 웨버 연구』(삼영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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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국민국가와 경제정책』, (성대 e-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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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세원·강명규 공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일조각,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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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엮음, 『다시 읽는 막스 베버: 탄생 150주년기념, 베버의 삶과 학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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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은숭표, 『루만의 법사회학: 루만의 시스템 이론』(신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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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성우, 막스 베버의 근대사회론, 유석춘 엮음, 『막스 베버와 동양사회』(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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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차성환, 『막스 베버와 근대의 의미 세계』(학문과 사상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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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황산덕, 『막스 웨버』(사상계사, 1960); 신판 (서문당, 1999) (서문문고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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