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무대예술의 최고 전문가가 되십시오등단작 의 주인공은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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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and audience 최상의 교육 환경과 시설, 미래지향적인 커리큘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정헌)가 운영하는 공연·무대예술 전문 교육기관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은 1월 2일부터 2월 1일까지 2008년도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경기도 고양시(일산구 사리현동)에 위치한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는 공연·무대예술 분야 전문인력 육성을 목표로 1989년 개설되어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 유일의 교육용 극장인 실험무대와 제작공방인 무대미술스튜디오 안에 작화실, 제도실, 제작실, 소품실, 의상제작실, 음향녹음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서울 대학로에 소재한 ‘상상관’에서는 공연비평·극작, 연출·안무 전공을 중심으로 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수진은 공연·무대예술 현장에서 활동하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전 의식과 열정을 가진 뜻있는 여러분의 많은 지원을 바랍니다. ■ 지원 자격 ㅇ 해당 지원 분야 현장 2년 이상 유경험자, 또는 대학 2년 이상 수학한 자(전공 불문) ㅇ 특별 전형 : 자신의 지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자(관련 수상 경력자 등) ■ 학제 : 2년 4학기 ■ 등록금(2008년도 1학기) ㅇ 무대미술, 무대조명, 무대음향, 무대의상 : 735,000원 ㅇ 연기·춤, 극작·비평, 연출·안무 : 630,000원 ■ 지원서 접수 기간 : 2008.1.2(수)~2.1(금)까지 / 방문 및 등기우편 접수 ■ 접수처 411-530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464-1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 문의 : ☎ 02-760-4654, 4663 ※ 보다 상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http://edu.arko.or.kr 참조 ■ 모집 전공 및 정원 전 공 정 원 무대미술 10명 무대조명 10명 무대음향 10명 무대의상 5명 연기 · 15명 공연·무대예술의 최고 전문가가 되십시오 2008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제12기 신입생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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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and audience ►

최상의 교육 환경과 시설, 미래지향적인 커리큘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정헌)가 운영하는 공연·무대예술

전문 교육기관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은 1월 2일부터 2월 1일까지

2008년도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경기도 고양시(일산구 사리현동)에 위치한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는

공연·무대예술 분야 전문인력 육성을 목표로 1989년 개설되어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 유일의 교육용 극장인

실험무대와 제작공방인 무대미술스튜디오 안에 작화실, 제도실, 제작실,

소품실, 의상제작실, 음향녹음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서울 대학로에

소재한 ‘상상관’에서는 공연비평·극작, 연출·안무 전공을 중심으로

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교수진은 공연·무대예술

현장에서 활동하는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전 의식과 열정을 가진 뜻있는 여러분의 많은 지원을 바랍니다.

■ 지원 자격

ㅇ 해당 지원 분야 현장 2년 이상 유경험자, 또는 대학 2년 이상 수학한 자(전공 불문)

ㅇ 특별 전형 : 자신의 지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자(관련 수상 경력자 등)

■ 학제 : 2년 4학기

■ 등록금(2008년도 1학기)

ㅇ 무대미술, 무대조명, 무대음향, 무대의상 : 735,000원

ㅇ 연기·춤, 극작·비평, 연출·안무 : 630,000원

■ 지원서 접수 기간 : 2008.1.2(수)~2.1(금)까지 / 방문 및 등기우편 접수

■ 접수처

411-530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464-1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 문의 : ☎ 02-760-4654, 4663

※ 보다 상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http://edu.arko.or.kr 참조

■ 모집 전공 및 정원

전 공 정 원

무대미술 10명

무대조명 10명

무대음향 10명

무대의상 5명

연기·춤 15명

극작·비평 5명

연출·안무 10명

공연·무대예술의 최고 전문가가 되십시오2008 아르코공연예술아카데미 제12기 신입생 모집

110 2007 겨울 문화예술 111

골라야 했다. 학원에 늦지 않기 위해 저녁을 굶기 일쑤였고,

지하철역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에 다리가

푸들거리기도 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국철. 자고

나면 돌아오는 아이들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배차

시간이 긴 국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 손에 토스트를 들고

지하에서부터 숨이 막히게 뛸 때면, 구두코에 머스터드소스와

케첩이 묻어 있곤 했다. 그리고 속절없이 멀어져가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대체 나아진다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자오선을 지나갈 때>). 김애란의 소설에서

탈것의 대표 기호가 지하철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녀의

소설에는 렉서스는 고사하고 소나타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비사회의 풍속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신산한 분위기

속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함에도 불구하고 김애란의 인물들은

비슷하거나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타인들을 따스하게

환대하고 배려한다. 불안한 시대의 ‘이태백 세대’가 보인

건강한 윤리 감각을 김애란은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김미월의 소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속절없이 ‘동굴’에 갇힌

젊은이들의 내면 정경을 웅숭깊게 형상화한다. 2004년

등단작 <정원에 길을 묻다>의 주인공은 인터넷 해결사

사이트를 통해 남의 글을 대필해주는 사람이다. “이름도

모르는 아빠, 이름만 기억나는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랑을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나 또한 누구에게도 그런 사랑을

준 적이 없었다.”는 진술에서 분명하듯 그녀는 사랑이

결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내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내가 나에게 사랑을 받”기 위한 매개

공간으로 “황량한 시멘트 바닥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들게

되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출구가 어디 그리 쉽게 열리는

것이던가. 출구인가 싶다가도 여전히 동굴 상태인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서울 동굴 가이드>에서 김미월은 동굴

가이드인 작중 주인공의 의식을 빌어 “동굴을 통과하고 나면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새로운 어딘가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늘 배반을 경험하기

일쑤다. 그러기에 그녀는 “지금의 꿈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고, 예상할 수 있는 일들만을 겪으면서

무난하게 사는 것”이라며 자위한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동굴은 길을 잃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정답을

김미월의 <서울 동굴 가이드>(문학과지성사),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윤이형의 <셋을 위한

왈츠>(문학과지성사), 정한아의 <달의 바다>(문학동네) 등등

올 여름에서 가을까지 나온 여러 소설집과 장편소설들이 그

대상들이다. 이 작가들은 이른바 IMF 외환위기 시절에 대학을

다녔거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들은

대개 그 시절의 취업 실패기라든지, 사업 파산기 등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서사화하면서 삶의 윤리와

문학적 윤리의 21세기적 접목 방식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문단에서 가장 젊은 작가에 속하는 정한아(1982년생)의

장편 <달의 바다>는 촉망받던 엘리트 소녀가 취업재수생

처녀로 전락했다가 미주여행을 다녀온 후 갈빗집 처녀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신문사 입사 시험에 거듭 실패한

스물여섯의 주인공 ‘나’(은미)가 미국여행을 간다고 할 때

갈빗집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펄쩍 뛴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살 일을 배우기 시작해야지.

미국은 무슨 얼어 죽을 미국이야?” 그러나 손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지닌 할머니는 다르다. “쟤는 취직에 잠깐

실패한 것뿐이지, 인생 전부에 실패한 건 아니라구요.”

“한평생 책 보는 일밖에 안 했던 애예요. 어떻게 식당 일을

시켜요?”라며 손녀를 감싼다. 이와 같은 현실적 윤리와

낭만적 윤리 사이에서의 길항 작용을 이 작품은 예민하게

다룬다.

정한아보다 두 살 위인 김애란(1980년생)은 ‘이태백

세대’의 탄생과 확산의 분위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실감 있게

형상화한다. 시골 소읍에서의 어린 시절을 보낸(<칼자국>,

<도도한 생활>) 여주인공은 서울로 상경하여(<도도한 생활>)

재수를 하거나 대학에 진학한다. 어렵사리 대학 생활(<네모난

자리들>)을 하고 졸업을 하지만,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한

취업예비군이거나 원하지 않는 직장에서 소외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침이 고인다>, <기도>, <성탄 특선>). 물론

그들의 삶이 노숙자들의 그것처럼 매우 혹독한 풍경인

것은 아니지만, 외환위기 시절의 중하층 젊은이들의 표정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 “나는 학교 시간표와 겹치지 않고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을 찾기 위해, 고만고만한 보습 학원 중 차악(次惡)을

‘이태백 세대’의 윤리 감각과 상상력

먹고사는 문제에 대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작가 박일문이

제16회 ‘오늘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5.18세대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있는 이 작품은 1980년대 운동권이었던 인물의 1990년대적 고뇌를 그린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었다. 당시는 ‘386세대’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요즘 식으로

하면 ‘386세대’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을 당시에 한 사회학자가 읽은 다음에

내게 물었다. “요즘 소설에는 왜 먹고사는 문제가 빠져 있지요?” 그의 말인즉, 대학을

졸업한 서른 전후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이야기에서 경제 활동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사회적 정치적

고민이어서 실감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사회학자다운 독법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사태를 정확히 꿰뚫은 나름의 혜안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1980년대의 민중소설이나 노동소설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간절한

절규를 담고 있었다. 정화진이나 방현석의 노동소설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서, 혹은 최소한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얼마나 가혹한

노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던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시리다. 그런데 1990년대를

맞으면서 옛 소련 해체와 동구 변혁이라는 세계사적 지각변동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광범한 유포 등과 더불어 작가들은 먹고사는 문제와는 다른 지평의 문학적

질문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압되었던 인간 욕망의 귀환 장정이라든지,

여성적인 것 혹은 페미니티의 정치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안티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일상생활의 정치성 등에 대한 미시적 눈그물을 드리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먹고사는 문제 또는 하부구조의 유령이 멀찌감치 밀려나야 했던 것이 1990년대의

소설적 풍경이었다.

2000년대 소설의 새로운 윤리 감각

2000년을 전후해 등단한 젊은 작가들의 최근 작업을 보면 그와 같은 1990년대적인

것과는 다른, 그렇다고 1980년대적인 것과도 확실히 다른 문학적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文化藝術四季

문 화 예 술 사 계

문학동향

우찬제 본지 편집위원

112 2007 겨울 문화예술 113

신정아를 통해 본 한국의 미술지형

지난 몇 달간 한국 미술계는 단군 이래 최초로 집중적인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일반인들에게 ‘미술’이 이토록 화제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 이번 신정아 사건은 한국

미술계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분출된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 한국 사회의 현실,

정치권력과 자본, 기업과 미술, 언론, 대학, 미술계 그리고 비엔날레와 큐레이터 등

많은 문제들을 동시에 건드리고 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술계의 여러 문제들이

적극 노출되는 것은 어찌됐든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지속되고,

더욱 고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불거져 나온 이번 일로 미술관의

역할, 미술관의 관장과 큐레이터의 일과 소명, 미술과 언론의 관계, 기업의 후원,

정치권력의 압력과 미술계 내부의 인적 구성원들의 능력과 검증 등의 재인식과

정의, 논의가 새삼 필요해졌다. 아울러 미술계에서 큐레이터나 기획자, 평론 등의

일을 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의해 그 일의 질이 검증받을

수 있는지, 또 누가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까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작품의 질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시장논리,

자본논리로만 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작가들 역시 작업을

한다는 것에 있어 요구되는 나름의 작가적 윤리, 자세, 그리고 좋은 작품에 대한

고민과 그 과정에 대한 투명하고 객관적인 검증의 틀들을 존중하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비평과 안목이 사라진 미술계, 닫혀 있는 미술관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은 점차 실종되고, 노골적으로 자본의 논리로

몰려간다는 것은 거의 명백하다. 물론 미술과 돈, 미술계와 자본이란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전 세계 미술계의 자본주의화 역시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상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구 쪽은 시스템 자체가 한국 미술계에

비해 확고하고 비교적 투명한 체계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른바 팔리는

작가들의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최소한 객관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미술비평이란 것이

워낙 이 땅에서, 우리 미술계에서 힘이 없긴 했지만, 오늘날 미술비평은 미술현장과

文化藝術四季

문 화 예 술 사 계

미술동향

박영택 본지 편집위원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을 향해 가혹한 배신을

자행한다(<매일 기다려>). 그런가 하면 알몸 비디오 촬영

등으로 협박하며 두 여자에게 동시에 가학적 폭력을

가하는 남자의 이야기(<굿바이 투 로맨스>)도 있다. 이렇듯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위악적 폭력의 이야기의 이면에는

대개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문제로 작용한다. 물론 전적으로

경제결정론에 의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려운 난민들의 처지를 극적인 방식으로

환기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매일 기다려>의 노인이나

<조대리의 트렁크>의 조대리 같은 인물을 통해 그런 폭력성을

감싸안고 위무하면서 난세에 요구되는 배려의 윤리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IMF 시절에 대학을 다닌 윤이형이 보이는 비극적 세계관

역시 주목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젊은 주인공들은 대개

현실에서 제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마련하지 못한 채 고독과

소외에 빠져 있다(<DJ 론리니스>). 대신 가상현실에 접속하여

가상의 존재 둥지를 마련하고자 한다(<피의 일요일>, <안개의

섬>, <판도라의 여름> 등). 상황이 이러하기에 이들은 종종

현실에 대해 절규를 토하고 싶은 심정에 휘말린다(<절규>).

<절규>에서 ‘절규하는 여자’는 현실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대신해 절규를 대행해주는 것으로 치유를 돕고자 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치료사이다. 그밖에도 상담사(<검은 불가사리>),

음악 치료사(<셋을 위한 왈츠>)가 등장하는데, 이는 비극적

현실에서 고통에의 절규를 통해 고통에서 치유로 탈주하려는

상상적 의지의 소설적 의장으로 보인다. 이야기를 통한 고통

치유의 지평을 위해 공들이는 작가의 내면에서, 난세를

탈주하려는 소설가의 윤리 감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작가들의 이야기가 자기 해방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더불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응시할 때, 상상력과 서사 윤리는

진정성의 지평을 환기하게 마련이다. IMF 외환위기 시절에

대학을 다녔거나 새롭게 소설쓰기를 시작한 일련의 2000년대

작가들에 의해 포스트리얼리즘의 신천지가 열릴지도

모르겠다는 예단을 하게 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태백 세대’의 새로운 윤리 감각과 서사적 상상력으로

소설도, 삶도 공히 위기를 넘어서고 고통에서 탈주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는 소망이 담긴 문장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러니 소설이 끝나도 길은 새로 출발되는 격이 된다. 삶의

길을 안내해 줄 ‘인생 동굴 가이드’가 없는 탓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주 ‘황사주의보’에 시달려야 하며, ‘해피데이’란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보다 더한 아이러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김미월은 그런 세상에서 자기 소설이

희미하나마 ‘인생 동굴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21세기 들어 가장 인상적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구사하고

있는 편혜영은 <사육장 쪽으로>에서 정한아나 김애란,

김미월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비슷한

시기의 고난상을 극화한다. <사육장 쪽으로>의 주인공은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소시민 가장이다. 전형적인 도시인이라

여겼던 그는 어느 날 남의 부추김에 이끌려 교외의

전원주택을 마련한다. 그런데 빚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져

급기야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된다. 존재의 둥지에서 내몰리게

되는 불안감은, 근처에 있는 사육장에서 개 짖는 소리와

더불어 점증된다. 물론 개 짖는 소리는 그를 쫓아내고자

하는 외부 세계의 상징이다. 그런 와중에 아이가 개들에

물어뜯기는 사태가 발생한다. 개들로부터 아이를 겨우 떼어내

병원을 찾는데, 사육장 근처에 있다는 병원은 끝내 찾아지지

않는다. 압류를 알리는 경고장, 고속도로에서 폭력적인

대형 트럭들의 질주,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 등의 기호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면서 범상한 일상 속에 드리워진 존재의

위기 상황을 유려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통의 절규와 포스트리얼리즘의 신개지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도 가학적 도착 상태에서

늙은 노모를 사정없이 구타하는 패악한 아들의 이야기를

비롯한 끔찍한 서사를 다루었던 백가흠은 <조대리의

트렁크>에서도 매우 가혹한 상황을 연출한다. 아이를

방치하여 치사케 하는 철부지 어미가 있는가 하면(<웰컴,

마미!>),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이를 낳아 유기하는

룸펜 부모가 있고(<웰컴, 베이비>), 사업 실패와 인생에

비관하여 아내를 살해하고 노모를 유기한 다음 자살하는

사내가 있다(<조대리의 트렁크>). 혹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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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이고 진정한 아티스트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미술계에서 진정한 아티스트는 간

데 없고 모두 인테리어업자나 디자이너, 미술정치꾼들이

상당수이다.

그래서인지 현재 우리 미술은 결국 두 가지,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들과 구상화 계열이나 팝(pop)적인 그림들이 전부다.

영국의 ‘네오팝’이나 중국현대미술의 영향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젊은 작가들은 너도나도 특정 소재 하나를

잡아 손의 기량을 극대화하거나, 이질적이거나 신선하거나

흥미로워 보이는 재료를 이용해 공들여 연출하는 작업을

한다. 특정 오브제, 재료를 연금술사처럼 다루며 일종의

특허품처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는 서로서로 베끼고 흉내

내기를 거듭한다. 자개나 쌀알이 뜨니 모두들 비슷한 재료를

다루고, 김동유의 ‘더블화면’이 뜨니 착시효과를 노리는

비슷한 작업들이 양산되는 식이다. 패러디와 키치작업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 시장에서 통하고

있고, 또 화랑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서

전시를 하고 판매를 한다. 1970년대 단색조 그림이 한 시대를

횡행했던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젊은

작가들이나 학생들 역시 자본과 시장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동물적으로 체감하며 시장논리에 맞춰가고 있는 형편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가, 경매에서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작가들이 좋은 작가들이고 그들이 본받아야 할 작가들이 된

것이다.

그런 것이 미술이라면 굉장히 공허하다. 시장의 활성화도

좋지만 진정으로 좋은 작품이 팔리도록 해야 하고,

그 작업들 역시 좀더 다변화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자본논리로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이란 것은

유일하게 우리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새삼 필요한 때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위상이나 체면이 깎이는 것에 대해서만

신경 쓰거나 심지어 은폐하려고도 하는 것이다. 관장들은

오로지 해당 기업의 오너들에게 비치는 모습만을 걱정한다.

그들에게 미술관의 전시나 운영에 대한 최종 라인은 결국

그룹 회장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친인척이 와 있는 한 이같은

구조는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 스스로 내부

시스템을 검증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미술관 밖에서 다양한 의견이나 전시 관련 비평이 없는 것도

매우 큰 문제다. 외부에서 논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간단한 전시리뷰 정도가 전부다. 비평가가 한 미술관에

대해 신랄하게 비평하기도 어렵고, 혹 그런 글이 쓰여도

미술관에서 수용하지 않는다. 이같은 폐쇄적인 오늘날의

미술관 구조가 지금의 문제를 키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는 그런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이라든가 대안의 제시 혹은 개선 능력 자체가

부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앞서서 해결할 만한

도덕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관장들은 마음과 귀를

열고 외부의 의견을 듣고, 좋은 전시를 위해 더 능력 있는

큐레이터를 구하거나 객원큐레이터를 영입하는 등 여러

방법을 강구해서 전시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해당 큐레이터들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조를

모색해야 한다.

미술시장은 뜨겁다. 그러나 작품은 공허하다

작가들은 어떠한가? 원로든 젊은 작가든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싶어 안달 난 작가들은 해당 미술관의 관장이나

큐레이터에 줄을 대고자 열망하고 그로 인해 공생관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나이든 작가들, 이미

이곳저곳에서 대우받는 미술계의 어른이란 작가들이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

우리 사회나 미술계가 오로지 자본과 이윤의 추구, 세속적인

가치나 권력지향적인 것을 쫓는 것이 대세임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자유롭기도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미술은

무목적적이고 무가치적이며 비권력적, 반권력적인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용성과 효율성,

도구성, 또는 합리성이 아닌 다른 것들 역시 매우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그것이

미술시장에서 완벽하게 무의미해지고 있다. 최소한 작가들의

작품이 공론화되고, 그것에 의해 작품의 위계가 정해지고,

그러한 위계가 미술관/화랑으로 전이되는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하며, 그런 작품들이 소장되고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구조로 가야 하는데, 국내에는 그런 것이 부재하기 때문에

작가라는 존재가 매우 모호해지고 미술작품 역시 모호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능력과 안목, 지식 없이도

미술계에서 일할 수 있는 구조다.

작가를 선정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전문성과 윤리관이 그래서 더욱 요구되고 또 그렇기에

검증의 필요성이 크다. 사실 국내 사설미술관이나 기업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의 경우 일부는 전문 큐레이터를 쓰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정당한 대우를 외면하거나 큐레이터의 일,

미술관의 역할과 소명, 전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

결국 미술관이 왜 있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이는 미술관의 관장들이 대부분

비전문가이며, 해당 모기업의 친인척으로 이루어져 있고

죽을 때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무소불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내 미술관 내가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론플레이 잘하고 기업에서 후원금

잘 받아오고 관객을 많이 동원하면, 그게 좋은 기획전시고

일 잘하는 큐레이터라고 믿고 있으며, 이런 인식이

미술계의 문제를 점점 키우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그렇지만 비전문가가 전문인을 뽑고 좌지우지하는

구조에서는 고치기 어려운 부분이다. 최소한 미술관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그런 일을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장의 사고와 미술관의 인식이 부재하다면

이런 일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미술관 관장들은 해당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전시 기획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외부에서 그 큐레이터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예민해야 한다.

그러나 미술관은 항상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제시하는 닫힌 구조를 지니고

있다. 관장이나 큐레이터는 언론의 홍보나 전시 선전,

지면의 기사를 제외한 외부의 시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행여 외부 비평가가 전시를 비난하기라도 하면 매우

불쾌해한다. 기획 자체에 대한 논의나 담론을 주고받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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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藝術四季

문 화 예 술 사 계

음악동향

진회숙 본지 편집위원

2007 겨울 문화예술 117

있어도 그 비중이 아주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각종 음악회

대신 치러 드립니다”라는 식으로 마케팅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관(官)의 지원을 받지 않는 순수

민간단체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그 ‘순수’의

얼굴 뒤에는 관보다 훨씬 많은 자금력을 자랑하는 기업의

얼굴이 숨어 있다. 순수 민간단체로서 자생력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기업의 후원을 통해 자생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자생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기업의 후원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외국의

유명 악단들도 기업의 후원을 받는다. 비용이 많이 드는

클래식 공연의 특성상 (특히 오페라 같은 경우) 객석이 모두

매진되어도 수익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관객을

확보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진지한 노력보다 수익 올리기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다. 수익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이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골치 아프게 표를

파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 이런 식으로 손쉬운 존재방식을

택하고 있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자생을 외치고 있는 단체가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요즘

들어 기업후원에 쏠림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위

‘잘나가는’ 단체가 기업의 후원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후원하는 김에 프로그램 참견도

이렇게 잘나가는 단체가 수없이 많은 공연을 통해, 수없이

많은 대중적(?) 클래식을 퍼트리고 있다. “쉽고 재미있는

클래식,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친절한 해설”이 이들이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나는

‘쉬운 클래식’, ‘대중 클래식’이라는 말의 난센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클래식은 고급예술음악이다. 본질적으로

쉬울 수가 없는 음악이다. 물론 클래식 중에는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금세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진정으로 클래식을 알고

즐기려면 부단히 공부하고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 적지

않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는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

티켓을 대개는 무료로 뿌리고, 공짜로 초대권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공연장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사정이

이러니 매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빈 자리가 많은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업 음악회 대신 치러 드립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문화예술 분야에 후원하는 기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자꾸 회의가 생긴다. 과연 이런 식의 기업후원이 우리

문화 발전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클래식 공연계를 예로 들어, 한 기업이 어떤 공연에 많은

돈을 후원하고 그 대가로 받은 초대권을 무료로 뿌린다고 해

보자. 사람의 심리가 묘해서 일단 무료로 받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해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날 연주되는 곡이

얼마나 좋은 곡인지, 그날 무대에 서는 연주자의 실력이

어떤지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니 공짜로 생긴 티켓을 가지고

음악회를 가도 그만, 그냥 썩혀버려도 그만인 것이다. 그들이

그냥 썩혀버리는 그 티켓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로 메마른

일상에 한줄기 샘물 같은 기회를 선사하는 귀한 것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요즘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기업후원

공연이 많이 열리고 있다. 특히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는 이런

이벤트성 공연이 많이 눈에 뜨인다. 물론 관객 입장에서 질

좋은 공연을 공짜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성 공연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냥 이벤트일 뿐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이런 경험이 한 사람을 지속적인 클래식

관객으로 바꾸어놓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이런 종류의 공연이 넘쳐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공연단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단 티켓판매나

관객동원에 대한 부담 없이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주로 이런 공연만 하는

단체들도 생겼다. 그 연주 스케줄을 보면 대부분 기업의 자체

행사 음악회나 후원음악회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페스티벌 공연으로 채워져 있다. 관객확보를 위한 진지한

노력이나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자체 기획공연은 없거나,

매진된 로열석이 텅 빈 까닭

연주회 ‘전석 매진’의 허상

몇 달 전의 일이다. 국내의 한 유명 교향악단에서 일반인들에게 인기 있는 클래식

레퍼토리를 가지고 연주회를 연 적이 있었다. 레퍼토리가 워낙 대중적이었기

때문인지 일찍부터 그 연주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리고 나도 서둘러 티켓을 사기 위해 인터넷

예매 사이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연주회까지 기일이 꽤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티켓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자리라고는 꼭대기 자리가 전부였다.

아무리 연주회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연주회가 열리는

극장의 2층 꼭대기는 무대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앉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서적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꼭대기 자리를 살 수밖에.

그런데 연주회 당일 막상 공연장에 가보니 아래쪽에 있는 좋은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인터넷으로 예매할 때 분명 이미 팔려나간 것으로 표시되어 있던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는 사람이 없고, 꼭대기에 있는 좌석에만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연주회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까지 오는 사람이 없자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이 슬슬

앞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티켓의 좌석번호를 확인한 안내원에 의해

또 다시 제자리로 쫓겨나야 했다.

외형적으로는 매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매진일 수 없는 공연 당일의 풍경은

사실 나에게는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기업의 후원을 받는 대부분의 공연이

이런 식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공연의 경우, 후원하는 기업 측에 로열석을

포함한 좋은 좌석의 대부분을 넘겨주고, 일반관객에게는 극히 적은 수의 좌석, 그것도

쾌적한 감상이 불가능한 최악의 좌석만 제공한다. 일반 관객들은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아 음악을 감상하고 싶어도 티켓 예매 단계에서부터 원천적으로 그 가능성을

배제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주최측에서는 전석 매진이라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실제 공연장에

가보면 빈 자리가 너무나 많이 눈에 뜨인다. 후원을 하는 기업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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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가 있을까. 이것은 관객들에게도, 그리고 공연단체나

연주자들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공연단체나

연주자들이 기업의 후원에 기대어 질 높은 공연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나 고민 없이 손쉽게 살아가는 것에 안주한다면

관객들은 그만큼 질 높은 클래식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기업의 후원이 많아지면서 우리 클래식 공연계는 과거에 비해

외형적으로 매우 풍성해졌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아직

일회성, 이벤트 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년 내내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갈라콘서트만 열면서 매일 축제처럼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공연계는 지금도 매일

매일 축제 중이다.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는 음악회는 풍성한 반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잡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음악회는 빈약하다.

그것도 모자라 이 풍성한 돈잔치에 기생하는 세력까지 생기고

있으니 서글픈 노릇이다.

2007 겨울 문화예술 119

공연예술 축제들의 현재와 미래는

축제는 가을을 좋아해

가을을 맞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이 축제의 바다에 빠졌다. 수준 높은 각 축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멋진 작품들을 유치, 시간표를 작성해 명작을 찾아다니느라 발이

부르틀 정도였다. 아쉬움 속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는 작품도 많았다.

국내 최대의 종합공연예술 축제로 평가되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부터

세계 국립극장페스티벌, 과천한마당축제, 서울거리예술축제, 프랑스 익스프레스,

세계명인문화예술대축제, 국내 최대 규모의 무용축제로 꼽히는

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SIDance)에 이르기까지 축제 하나하나가 개성 있는

주옥같은 축제였다. 참가 작품도 모두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한국 문화예술이 질적,

양적 측면에서 대단히 높아졌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좋은 축제와 공연들이 단기간에

집중돼 과열에 의한 낭비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축제협의회 회장 김철리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예술감독은 “각 축제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성격이 유사해 낭비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 공연계의 지적”이라며

“서로 의논을 잘 해 소통하면서 양보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한국축제협의회 전 회장인 임수택 과천한마당축제 예술감독은 “현재 한국의 축제는

약 1200개로 추산되나 정통 국제 공연예술축제는 20개가 채 안 된다”며 “이는 프랑스

등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상당히 모자라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주요

축제가 9, 10월에 집중돼 효용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라며 “독창적 성격의 축제는

병렬이 가능하지만 비슷한 성격의 축제는 자연스럽게 통합, 정리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처럼 각 예술감독들이 자연적 해결을 전망하고 있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올 들어 성격이 유사한 축제들 간에 통합논의가 상당 수준까지 진행됐지만 각각이

많은 희생을 통해 이만큼 성장해왔기 때문에 양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내부의 해결보다는 바깥에서의 해결방안 제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이승엽 교수는 “각자의 선의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좋은

축제들이 우연히 마주쳤다”며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제 자신의 축제뿐 아니라

다른 축제도 생각할 때가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본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고

文化藝術四季

문 화 예 술 사 계

무용동향

김승현 본지 편집위원

클래식이다. 따라서 클래식 대중화는 단시일 내에 이벤트성

공연을 올리는 것으로는 이룰 수가 없다. 진정으로 클래식

대중화를 원한다면 연주자나 연주단체는 물론 클래식을

후원하는 기업들도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일회성 공연에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은들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클래식 대중화의 시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이들이 쏟아 붓는 돈은 공연단체에 속한 지휘자와 연주자의

배를 불려줄 뿐이다.

물론 대중화를 표방한 클래식 공연이 완전히 무익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잘 알려진 인기

레퍼토리로만 채워진 클래식 연주회, 매일 듣고 또 들었던

유명 레퍼토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연주회를 통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클래식 감상층을 확보할 수 없다. 본래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은 그 성과가 단시일 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업들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대하고, 그 결과 이에 편승해 기업의 후원금에

기생하는 단체가 생겨났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후원은 하되

프로그램의 내용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때로는 후원기업이 프로그램의 내용까지

좌지우지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기업은 자신들의 일천한

음악적 소양을 기준으로 프로그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한다고 하는데, 내가 전해 들은 그 참견의 내용이

놀랍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연주한다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한다고

하면 이런 걸 누가 듣느냐고 반대한단다. 가을이니까

<코스모스를 노래함>과 같은 가을 노래를 불러야 하고,

밤이니까 세레나데를 연주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참신하고 창의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상투적인 주문을 하면 공연단체로서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돈줄은 그 쪽이 쥐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몇몇

소신 있는(?) 공연단체를 제외하면 기업 후원음악회의 내용이

대동소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객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관객들의 취향에 맞는 연주회는 기업 후원

없이도 잘 굴러간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관객들이 알아서

찾아간다. 그런데 이런 음악회에 굳이 기업이 후원을 할

120 2007 겨울 문화예술 121

생각된다.

또한 한국의 고급스러운 예술축제를 지향, 춤 자체의

아름다움과 깊이와 내력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SIDance는 10회째를 맞아 질적 변화, 도약하는 느낌이다.

개막공연인 이탈리아 아떼르발레또무용단 및 스페인

아이다 고메스 무용단의 작품, 그리고 폐막작인 영국의

러셀 말리판트 무용단의 <유동(Flux)>, <밀다(Push)>, <작은

보트>는 이 축제의 지향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도 서울공연예술제는 연극과 무용의 구분 없이 양

축으로 함께 가는 한국 대표 공연축제로, 과천한마당축제는

연극, 무용, 마임, 놀이 등을 하나로 묶은 세계 수준의 거리극

축제로 잡아가고 있다. 결국 앞으로는 이들과 같이 정체성을

확보한 우수 축제를 중심으로 통합될 것으로 분석된다.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지금 유행하는 것에서 모티브를

가져온다면 자연히 전체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컬렉션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분절적인 손동작이 많았는데 이 부분은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됐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서도 이 동작의 사용이

작품의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또한 작품의 요소가 아니라 배경으로의 영상 사용도 문제다.

현대무용에서 무대와 영상은 이제 거의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세계적 수준에서는 영상을 더 이상 배경으로는 쓰지

않는다. 사람의 몸에 투사하는 방식도 낡은 방식이다. 영상이

실체이고, 사람이 허상 같은 영상 기법이 개발돼 무대에서

실험한 지도 몇 년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배경이 되는 영상을

따라가 춤을 춘다는 것은 춤의 영역을 스스로 좁히고, 작품을

진부하게 보이게 하는 감점 요인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콩쿠르 스타일도 문제다. 스스로 움츠려

도전의식을 버리고, 기존의 형식을 쫓아가게 만드는 교과서적

움직임이다. 컬렉션은 배운 것을 보여주는 아마추어의 무대가

아니다.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상에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는 모습으로는 아무리 잘해도 모방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춤을 잘 추고 좋은 평가를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로 남의 춤을 췄기 때문이다. 이밖에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는 신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뻔한 이야기,

소통불가능한 사적 감정을 독창성으로 오해하는 경우 등도

문제로 생각된다.

자기 색깔이 있는 축제가 살아남는다

제1회 국립극장 페스티벌은 빛나는 기획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는 국립보다 동인극단, 무용단 등 일반 단체가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이는 선비정신 등 재야의

비판정신을 높이 평가해온 한국적 문화전통과 식민지와

독재를 겪으며 어용집단이 아닌 재야단체를 신뢰했던 경험의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외국은 다르다. 국립단체가 대중성은

물론 해당국 전체 예술의 수준을 견인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수한 외국 국립단체의 작품과 비교해 국립극장의 우수한

작품을 보여준 국립극장 페스티벌은 한국의 국립극장

작품수준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한 맞춤한 아이디어로

후 연극, 무용제가 각각 분리돼 나갔다. 이후 이 축제는 연극

중심으로 치러졌고 무용은 구색 갖추기에 그친 느낌이었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 양적인 측면에서, 질적인 측면에서

무용이 연극을 압도한 느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실력파

무용가들이 대거 참여, 전문 무용제 이상의 작품으로 성찬을

이뤘다. 현대무용으로 전미숙의 신작 <묻지마세요>를 비롯해

댄스시어터 까두의 <로미오와 유령 줄리엣>(안무 박호빈),

발레 작품으로 새롭게 창단된 유니버설발레Ⅱ의 예술감독

백연옥이 첫선을 보인 <밤부, 밤부>, 서울발레시어터의

한국적인 서사를 도입한 신작 <마스크> 등 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 초연됐다.

또한 지난해와 올해 화제를 모은 명작을 다시 보는 기쁨도

있었다. 올해 예술의전당의 ‘자유젊은무용’작품으로 선정돼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은 김윤정의 <베케트의

방>이 다시 무대에 올랐고, 지난해 한국 무용계 최고의

화제작으로 각 무용상을 휩쓴 전미숙의 <가지마세요>는

이 축제에 참가한 외국 무용가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다.

김윤정의 경우 관객들의 환호와 평단의 호평에 따라 내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다시 초청될 예정이다.

아직 미흡한 한국의 젊은 춤 창작

축제의 성공은 결국 작품에 달려 있다. 우수한 작품의 유치가

축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수 작품 초청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창작이다.

이와 관련,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처음 마련한 제1회

서울댄스컬렉션은 젊은 춤 창작에 대한 하나의 전범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댄스컬렉션은 첫 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무용가들이 참여했다. 국내 무용평론가, 해외 무용제

예술감독, 무용가 등이 작품 하나하나를 두고 치열한 토론을

벌인 끝에 <Transforming View>(안무 박영준, 인정주)에

1등이 돌아갔다.

하지만 한두 개 우수한 작품을 제외하고 제1회

서울댄스컬렉션의 경향을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아직

젊은 무용가들이 자기 색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형식의 측면에서 대부분 어디서 본

듯한 무엇이다. 사람이 만든 것이 과연 해 아래 새 것이

있겠냐마는 과거의 것을 응용해, 과거가 씨앗이 돼 새로운

나머지는 티끌로 보는 것이 세정 아닌가”라며 “최근 여름

축제도 강해지고 있으니 진통은 있겠지만 결국 조정될 것으로

본다”고 낙관했다.

문화관광부 황성운 공연예술팀장은 “총량에서 많은 것은

아니지만 지자체별로 경쟁적으로 축제를 양성하며 축제의

효용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협력과 제휴를 유도하고, 엄밀한 평가를

통한 차별적 지원을 통해 독창적 축제를 육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한국의 가을 축제는 양적으로 일단 풍요롭다. 이는

질적인 전환을 앞두고 있다는 설명도 된다. 양이 질로

변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축제가 이같이 발전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일제 식민지로 뿌리째 뽑혔던 지방축제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12년 만에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합리적인 방향으로 정리될 것으로 기대한다.

무용과 연극의 경계가 무너지다

최근 축제의 경향은 분명 장르를 넘어선다. 제1회

국립극장 페스티벌이 그렇고, 7년째 계속돼온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그렇다. 무용 전문 축제인

SIDance의 작품도 무용과 연극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 세계

공연계의 현실을 반영, 연극적 무용작품이 많이 눈에 띄었다.

거리극, 마당극 축제의 경우 연극으로 분류되지만 표현

양식과 성격 자체에서 무용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세계 공연의 흐름은 분명 춤, 음악, 연극, 미술이 따로

떨어져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혼성의 시대다. 설치와 영상

등 미술 작품들이 배경을 이루고 다양한 음악의 편집과

작곡, 연주가 무대를 채운다. 그리고 무용적인 연극,

연극적인 무용이 펼쳐진다. 프랑스에서 연극과 무용은

더이상 테아트르(théâtre)와 당스(danse)로 나뉘지

않고, 스펙타클 비방(spectacle vivant), 즉 ‘살아있는

스펙터클’로 돼버렸다. 제1회 국립극장 페스티벌의 개막작이

국립무용단의 창작춤 <춤 춘향>인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르를 넘는 크로스오버가 가장 눈에 띈 축제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다. 이 축제는 당초 2002년 한일월드컵을

즈음해 서울연극제와 서울무용제를 합쳐 만들어졌다가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