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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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5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 홍 태 영* 목 차 . 들어가는 말 . 산업주의의 낙관적 전망으로서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과 희망으로서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디스토피아 . 산업주의의 현실들 .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하여 요 약 유토피아는 현재 그리고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 그리고 다른 시간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혹은 그러한 공간은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먼 미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이미 존재한 적이 있는 것 - 동양에서 요순시대, 루소에게서 황금시대 등 - 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장소유토피아’ 즉 플라톤의 전통을 수용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생각은 주로 섬이라든가 반도와 같은 공간적인 영역을 통하여 형상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 미래지향 적 사고 형태를 지닌 ‘시간 유토피아’로 변화된다. 즉 공간적 형태의 유토피아주의에서 시 간적 과정의 유토피아주의로의 변화이다. 그와 동시에 19세기부터 디스토피아의 전망이 등 장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에 공통된 것은 근대의 산업주의가 인간 의 본성, 특히 인간의 정념에 반한다는 생각이다. 산업주의는 근대 이성의 발현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간의 정념에 대한 억압을 가져오며,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가 될 수 없 다는 판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모던의 새로운 문제 의식들이 등장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정념의 문제를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 그것은 근본 적인 문제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 한 사유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고 이후 디스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19세기 산업주의 나 아가 근대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며, 그러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근 대를 넘어선 새로운 전망의 가능성을 찾아 보았다.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 피아’에 대한 전망을 갖기를 바라는 바에서이다. 주제어: 산업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자본주의, 진보 * 국방대학교 /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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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5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

    홍 태 영*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산업주의의 낙관적 전망으로서 유토피아

    Ⅲ.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과 희망으로서 유토피아

    Ⅳ.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디스토피아

    Ⅴ. 산업주의의 현실들

    Ⅵ.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하여

    요 약

    유토피아는 현재 그리고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 그리고 다른 시간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혹은 그러한 공간은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먼

    미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이미 존재한 적이 있는 것 - 동양에서

    요순시대, 루소에게서 황금시대 등 - 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는

    ‘장소유토피아’ 즉 플라톤의 전통을 수용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생각은 주로 섬이라든가

    반도와 같은 공간적인 영역을 통하여 형상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 미래지향

    적 사고 형태를 지닌 ‘시간 유토피아’로 변화된다. 즉 공간적 형태의 유토피아주의에서 시

    간적 과정의 유토피아주의로의 변화이다. 그와 동시에 19세기부터 디스토피아의 전망이 등

    장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에 공통된 것은 근대의 산업주의가 인간

    의 본성, 특히 인간의 정념에 반한다는 생각이다. 산업주의는 근대 이성의 발현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간의 정념에 대한 억압을 가져오며,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가 될 수 없

    다는 판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모던의 새로운 문제

    의식들이 등장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정념의 문제를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 그것은 근본

    적인 문제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

    한 사유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고 이후 디스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19세기 산업주의 나

    아가 근대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며, 그러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근

    대를 넘어선 새로운 전망의 가능성을 찾아 보았다.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

    피아’에 대한 전망을 갖기를 바라는 바에서이다.

    주제어: 산업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자본주의, 진보

    * 국방대학교 /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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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들어가는 말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아니한 세계지도는 쳐다볼 가치가 없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은 그만큼 인간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유토피아 혹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전망 혹은 바람은 시간적으로

    고대 이래로,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하여 왔다. 현재 그리고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곳 그리고 다른 시간에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혹은 그러한 공간은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먼 미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이미 존재한 적이 있는 것 - 동양에서

    요순시대, 루소에게서 황금시대 등 - 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플라톤 이래 르네상스 시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까지의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주요하게는 ‘평화’와 ‘안녕’ 그리고 아우타르키적 삶을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근대 산업자본주

    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도 질적인 변환을 겪는다.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은 ‘장소유토피아’ 즉 플라톤의 전통을 수용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생각은 주로 섬이라든가 반도와 같은 공간적인 영역 - 홍길동의

    ‘율도국’도 동일하다 - 을 통하여 형상되었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

    미래지향적 사고 형태를 지닌 ‘시간 유토피아’로 변화된다. 즉 공간적 형태의

    유토피아주의에서 시간적 과정의 유토피아주의로의 변화이다(Harvey 2001,

    238).

    ‘시간 유토피아’의 형성은 근대적 시간 개념의 형성 즉 ‘진보’라는 개념의

    형성과 그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선형적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확신과 그것의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대의

    진보 개념 속에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그 시간의 흐름은 동력과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된다. 따라서 그 흐름에 새로운 동력을 제시한다거나

    새로운 자극을 가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단축시킴으로써 발달된 미래를 앞당겨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근대의 진보적 사고들 속에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근대’의 특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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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7

    두 가지 사건이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다. 전자는 정치적 측면에서 새로운

    근대의 이성적인 인간이 정치적 주체로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고, 후자는

    근대적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 속에서 등장한 19세기에서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의 출현이다.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은 자기 나름대로 미래를

    선취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은 자기나름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그러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주체와 방식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이들 이데올로기들은 프랑스혁명

    과 산업 혁명이 가져온 결과로부터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대부분

    은 유사한 출발점을 보이고 있다. 즉 새롭게 등장한 인간이라는 주체를 어떻게

    평가하고 그들에게 어떠한 역사적 임무를 맡길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산업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산업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로부터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주요하게 등장한 이

    두가지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으로 집약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19세기 초반기에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낙관적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19세기가

    끝나고 산업의 발달 즉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결과는 결코 낙관적

    전망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경제불황과 공황 등이 발생하고

    현실적으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가 실험에 들어가면서 등장한

    것은 오히려 비관적 전망이었다. 이러한 것은 특히 소설의 형태를 띠고 많이

    등장하였으며, 이른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사실 19세기에 등장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와 그 발전에 대한 전망의 차이일 뿐이다. 즉 두 가지 미래에 대한

    상(像) 모두가 그 출발과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다만 미래에 대한 낙관과

    비관의 차이라는 극히 미묘한 차이 - 또 달리 말하면 아주 큰 차이이기도 하다

    - 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주로 19세기 전반기에 유토피아의 전망에 우세하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디스토피아의 전망이 우세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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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디스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유토피아적

    전망이 실현불가능하다는 비관론은 물론 현실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를

    보면서 내놓은 전망들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고 이후

    디스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살펴보는 것은 시간적 순서이거나 병렬적인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 산업주의 나아가 근대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전망의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근대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모색을 추구하는 시점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새롭게 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바에서이다. 따라서 마지막 절에서는

    앞의 두 가지 논의들을 새롭게 점검하면서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다양한 전망들을 살펴보면서 이 글이 주목하는 부분은 새롭게

    탄생한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들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는가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조직화의 방식에 대한 이해이

    다. 19세기에 산업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대와 전일화와 그에 따른 개별 인간 삶의 변화 등을 겪었다. 그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해결책에 대한 모색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유토피아라는

    미래에 대한 전망은 현재의 삶에 대한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현재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지침의 역할도 하였다.

    즉 미래의 ‘역사’가 현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Ⅱ. 산업주의의 낙관적 전망으로서 유토피아

    근대를 연 두 계기로 간주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다. 그것은 근대 이성의 기획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그로부터 유추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이다. 프랑스 혁명이후

    콩도르세, 생시몽, 콩트 등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실현가능한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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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9

    미래의 모습으로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실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현실의 운동의 가속화시켜 시간 압축의 효과를 가져오고자

    한다.

    18세기 계몽시대와 프랑스혁명을 잇는 인물이었던 콩도르세는 『인간정신

    진보의 역사적 소묘』에서 진보의 매개물로서 과학을 제시하고, ‘완전성의 법칙’

    과 ‘진보의 법칙’이 실현되는 역사적 필연으로서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그의

    이상은 과학적 원칙의 정교화와 수학적 분석의 적용을 통해 정치적 ․ 사회적

    삶을 합리화하는 것, 신분과 계층에 의한 사회를 법앞에 평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들의 집합인 국민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리고 계몽된 행정과 합리적인

    공적 숙고를 통해 군주권력을 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고, 그것을 위해

    구체제(Ancien Régime) 하에서 활동하였다(Baker 1988). 이후 프랑스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가 제시한 공교육에 대한 제안 속에서 그는 보편

    교육의 평등한 실현을 통해 인간의 완전성을 증대시키며, 그것을 통해 시민은

    국민적 경계를 넘어 세계시민이 되며 계몽이 보편화됨으로써 세계주의를 지향하

    고 동시에 ‘정직한 인간의 인터내셔널’을 통해 실현되는 진보의 전망을 제시하였

    다(de Condorcet 2002). 공화주의자였던 콩도르세였지만, 그의 공화주의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화국 즉 고대적 ‘덕성의 공화국’과는 명확히 대비되는 과학적

    이성과 진보의 철학에 기반한 공화국이었다.

    콩도르세는 역사를 열 개의 시대로 나눈다. 정태적인 부족사회에서 농업과

    알파벳의 발견, 그리스인들의 재능의 개화와 쇠퇴, 중세의 오랜 퇴보, 창조력의

    부활과 르네상스,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이 여덟 번째 시대에 이른다. 아홉 번째

    시대는 데카르트에서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시대로서 진정한 폭발적 진보의

    정점에 해당하는 시기이다(장세룡 2002). 그리고 열 번째 시대는 합리적 예언에

    기초한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완전해질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데카르트의 이성의 발견과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통한 구체적인 실현을 보면서 콩도르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그리고 무모한 낙관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진보의 자연스럽고 또한 당연한 전망은 이후 생시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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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트에게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며, 특히 ‘역사’ 개념의 강화와 함께 그것이

    뚜렷해진다.1) 생시몽의 ‘산업사회’, 콩트의 ‘실증주의 시대’ 역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것들은 근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 속에서 과학기술의 극한적 발전에 기반한 일종의 ‘기술적

    유토피아’라고 불릴 수 있는 전망이다.

    생시몽은 인류발전의 최종적인 체계로서 산업체제를 상정하였다. 그는 산업자

    - 산업부르조아지 - 가 유한자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인류역사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산업계급만이 유용한 계급”이며 마침내는 “단일계

    급”이 됨으로써 계급적인 갈등이 사라질 것을 기대하였다(최갑수 1991, 207-210).

    생시몽은 산업체제에서 절대적인 평등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형제애의

    원칙에 기반한 신기독교를 통해 각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박애주의적 감정을

    깨우는 일과 그 박애주의를 통해 사회를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최갑

    수 1991, 247). 새로운 산업체계에서 시민은 새로운 연합체의 성원으로서 신분이

    변하게 되면 각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노동과 재능, 자본에 의존하여 생산도구의

    관리에 참여하고 또 이러한 세가지 바탕 위에서 생산된 부의 몫을 받음으로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종국적으로 정치는 경찰의 역할로

    축소되고 인간에 대한 통치는 과학자집단의 후원아래 사물에 대한 관리로 대체된

    다. 생시몽은 이 과학집단에게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식의 교회는 전통적

    세계의 비합리주의와는 반대로 과학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종교의 관리자가

    된다(Dilas-Rocherieux 2007, 132).

    생시몽의 산업체제에 대한 전망은 과학과 산업의 힘에 근거한 산업주의에

    대한 거의 물신적인 믿음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생시몽주의자들은

    산업계급 혹은 생산자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대기업가들에 대한 기대로 옮아갔다.

    프랑스 철도산업의 선구자인 페리에(Perrier) 형제의 예에서 알수 있듯이 산업문

    1) 생시몽과 콩트에 대한 콩도르세의 영향은 뚜렷하다. 하지만 콩도르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면서, 이성과 자유의 진보가 역사의 발전법칙이라고 간주하

    였다면, 생시몽과 콩트에 이르러서는 역사 자체의 진보를 강조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진보

    는 역사의 발전에 종속되는 것이었다(Baker 1988, 483-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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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1

    명의 선두에 서있던 철도에 대한 기대는 말그대로 유토피아적이었다. 생시몽주의

    자 페퀘르는 철도가 인간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공장에

    노동자들이 거대한 무리로 모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도나 증기선으로 이루어

    지는 공동체 여행은 현저하게 평등과 자유의 느낌을 촉진시키고 이에 익숙해지도

    록 할 것이다. 철도는 원하던 방식대로 진정한 박애에 기반한 사회관계가 지배적

    인 관계가 되도록 영향을 미칠 것이고, 민주주의 선창자들이 과장해서 표현하는

    예언 이상으로 평등구현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이 모두가 가능해질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하고 모든 사화계급들이 철도 등에서 만나,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각양의 운명들, 사회적인 차이, 개성들, 행동 양식들,

    습관들, 의상들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생생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지역 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감각 역시

    동일하게 줄어들게 된다”(Schivelbusch 1999, 94). 또한 생시몽주의자로서 나폴

    레옹 3세의 제2제정 시기 영불무역자유협정 체결을 주도했던 프랑스 측의 대표

    슈발리에(Chevalier)는 “지중해는 동양과 서양의 결합의 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동력이 철도에 있음을 강조하였다(Duroselle 1956에서 재인용).

    생시몽의 영향은 콩트에게서도 유사하게 드러났다.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그것이다. 콩트는 인간정신의 발전 단계를 3단계 즉, 신학의

    단계, 형이상학의 단계, 실증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신학의 단계는 인간 지성의

    출발점이고, 실증의 단계는 인간 지성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콩트에 의하면

    인간 정신의 역사는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정신의 자발적 축소의 역사이자

    실증정신의 점진적 부상의 역사이다. 실증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현실적 학문을

    일반화시키고 사회생활의 기술을 체계화시키는 것”이다(Comte 2001, 30).

    콩트는 실증주의에 근거한 인간 사고의 실질적인 체계화와 그에 기반한 도덕적

    권위의 형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의 재조직화를 전망하고 있다. 콩트는

    『실증주의 서설』 결론에서 “사랑은 우리의 원칙, 질서는 우리의 토대, 진보는

    우리의 목표”라고 제시하고, 이것이 “실증주의가 감정과 이성과 행동 사이의

    변경할 수 없는 조합을 통해 인간의 모든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을 체계화함으로써

    시작하게 된 궁극적 체제의 기본 성격”이라고 정리한다. 콩트는 이성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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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사이의 일정한 조합을 염두해 두지만, 결국은 “유일하게도 이성만이 다양한

    현상들을 규제하는 모든 자연스런 법칙에 따라 당연히 인간생활 전체를 이끌어가

    게 마련인 기본질서를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생시몽이나 콩트에게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도식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더불어 결국 인간들의 공동체적 삶을 최종적으로 가능케 하는

    ‘종교적 형태’에 대한 의지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제에 해당하는 과학기술에

    의한 산업주의의 결함을 보충하는 차원이라기 보다는 과학기술의 근저에 있는

    실증주의적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술 유토피아가 실현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벨라미

    (E. Bellamy)의 소설 『뒤를 돌아보면서Looking Backward 2000-1887』(1888)이

    다.2) 벨라미는 19세기의 사회적 모순, 산업사회의 후진성을 고발하고 21세기의

    발전된 산업사회를 유토피아 양식으로 표현, 대비시키고 있다. 이 시간의 흐름은

    단지 “한 세기가 흘렀을 뿐이지만, 세계사에서 수천년 동안의 변화에 비견될

    만”하다라는 언급에서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시간의 응축 효과를 보여주

    는 예이다(58).

    국가는 인민을 대표하는 단일기업연합이자 기업조직으로서 유기적 통일체로

    변모되어 유일의 고용주이자 자본가로 기능한다. ‘산업군대’는 국가가 운영하며,

    모든 인민들은 ‘산업군대’에 피고용인이 되어 평등하게 복무한다. 이 체제 하에서

    모든 노동자들은 산업군(industrial army)에 소속되고 산업군에서 산출되는

    모든 생산물은 모든 인민에게 평등하게 분배된다. 산업군의 조직은 모든 남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받은 다음 21세부터 45세까지 산업군에

    2) 과학, 산업주의에 대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드러난 대표적인 또 다른 예가 대표적인

    19세기인으로 쥘 베른(Jules Verne)이다. 시리즈를

    이루고 있는 60여편(중편과 사후 작품을 포함하면 80여편)의 책을 보면 지상, 지하, 하늘까

    지 묘사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실제 과학에서 이루어낸 발전에 기반하여 그의 상상력을

    덧붙인 미래 상황에 대한 예측은 탁월하다. 『80일간의 세계일주』,『해저2만리』, 『15

    소년표류기』,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지구속 여행』 등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작

    들이다. 다만 그의 책이 구체적인 사회의 구성과 조직화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서 이 글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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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3

    소집되어 복무하는 것을 주요한 틀로 한다. 여기에서 산업군에의 복무는 노동자

    들의 조직화라는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마키아벨리적인 공화주의적 특징 즉

    ‘시민적 휴머니즘’의 의미를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 더 나아가 벨라미의 산업군이

    라는 노동자들의 준군사적 조직은 스파르타의 군사조직과 놀랍도록 유사하다(손

    세호 1993). 이러한 것은 이전세기에 대한 비판 - 사실상은 벨라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서 - 으로서 과도한 개인주의와 공공정신가 조화되지 못한

    점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제시된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에서 자생적 사회주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벨라미의 유토피아는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영향이라기보

    다는 산업주의의 폐해를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개별 노동자들은 공화주의적 원칙의 교육이

    중요해진다.3)

    19세기에 ‘사회과학(social science)’이라는 용어는 1820년대 이래 콩트, 밀

    등에 의해 상용되어 왔다. 콩트는 사회학(sociologie) 혹은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4) 그것의 의미는 사회를 연구대상에 자연과

    학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라 가능하고, 그에 따라 과학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과학적 법칙의 유추가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자연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장악력을 증가시키고 있었고 그에 따른 낙관적

    전망은 과학기술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낳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산업주의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근거하여 미래의 유토피아를 그릴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가져오는 빈곤과 노동조건의 열악 등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일 따름이었다.

    3) 벨라미의 책은 8개월 동안에 35만부 이상이 팔리면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세기 말

    유토피아를 그린 이러한 류의 책들이 유행처럼 등장하였지만, 벨라미의 책이 단연 탁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영향력으로 벨라미의 생각들을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국민주의클

    럽(Nationalist Clubs)이 만들어지고 하였다. 일종의 미국적 국민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Forbes 1927)

    4) 자연과학에서의 혁명이 인간과학 내지는 사회과학으로 전이되는 서로 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에 대해서는 Bowler & Morus(2008),

    Mucchielli(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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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Ⅲ.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과 희망으로서 유토피아

    19세기 산업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현실의 변화는 지대한 것이었다. 엄청난

    사회적 부가 증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져온 폐해 역시 컸다.

    따라서 산업주의의 발달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한 비판과 그러한 산업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역할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하였다.

    우선 19세기 동안 많은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적 산업의 발달이 가져온 현실의

    노동자의 삶의 변화가 묘사되었다. 빌레르메(L. Villermé)의 『면공업, 모직공업,

    견직공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 관한 보고서Tableau

    de l'état physique et moral des ouvriers employés dans les manufactures de coton,

    de laine et de soie』(1840)는 당시 사회분석에 대한 탁월한 저작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많은 경우 로랑(Laurent)의 『궁핍화와 상호조합Le paupérisme et les

    assoications de prévoyance』(1856)처럼 궁핍화의 문제는 노동자들의 도덕의

    향상, 상호조합 등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우세하였다. 그것은 당시 자유주의

    나 혹은 기독교적 경향의 많은 박애주의자(philanthrophe)들에게 당연한 방식이

    었다(Procacci 1993; Barret-Ducrocq 1991; Castel 1995). 하지만 엥겔스는 자신

    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모든 사회운동의

    진정한 토대이자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Engels 1988, 18).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책을 찾는 가운데 유토피아

    적 전망이 위치한다.

    푸리에(Fourier)는 산업주의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대안의

    제시에 있어서 근본적인 방식을 취하였다. 푸리에가 상정하고 추구했던 인간은

    근대의 초입에 등장하고 가정되었던 인간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인간이었다.

    19세기 초반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맞물리면서 가정되고

    현실화되는 인간의 모습은 이성적 인간이었고, 자유로운 계약의 주체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푸리에의 사상은 도발적이었다. 그는 획일주의적 거대원리에 대항하여

    오로지 개인들에서 출발하여 사회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Dilas-Rocherieux

    2007, 146).5) 그는 산업사회에서 개인들의 노동이 빈곤을 가져오고 억압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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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5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정념(passion)에 근거하고 그 정념이 실현되는

    공간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성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면서 인간의

    나약함과 불확실성을 강조할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이성은 열정적 인력을

    위해 봉사하는 부차적인 존재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Ucciani 2000). 그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이성을 가진 열정적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푸리에는 사회계약을 논박하고 인간의 결함들 하나하나에 긍정적인 지위를

    부여하면서 그 결함들이 다양성 속에서 조직화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다(Dilas-Rocherieux 2007, 149). 푸리에가 구상하였던 팔랑스테르에

    서 개인의 욕구와 공동체 사이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 간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노동은 매력적인 것이 되고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정념을 발휘하는 공간으로서 생활의 터전이 된다.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로

    서 평가되는 푸리에게서 권력의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푸리에의 경우 권력이

    더 이상 팔랑스테르 사회의 기본단위인 팔랑스의 조직에서 최종목표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바로 정념들이다(Paquot 2002,

    66). 정념을 발산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 팔랑스테르가

    구성되며, 권력의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 모든 인간은 신으로부터 고유한 열정을

    부여받았으며, 그 “모든 열정을 자유롭게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변기찬 2003, 97에서 재인용). 푸리에가 꿈꾸웠던 팔랑스테르는

    개인들의 열정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면서 그들의 열정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는 생시몽의 산업체제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를 통한

    유토피아의 구현이라는 사상들을 ‘과학적’이지 못하고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

    한다. 물론 맑스와 엥겔스에게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전망은 역시 유토피아로서

    존재하였다. 그리고 많은 부분 그들 유토피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사받은

    점들 또한 존재한다.6)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에게 유토피아로서 공산주의는

    5) 푸리에는 유토피아에 대해 사고하면서 개인성에 대해 탐구한 유일한 경우로 평가된다

    (Paquot 2002, 23).

    6) 맑스나 엥겔스가 빚지고 있는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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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동시에 현실의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로서 제시된

    측면과 동시에 현실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운동으로서 존재하였다. 노동자운동

    은 유토피아로서 공산주의를 실현하려는 자본주의 사회 내의 커다란 주체적인

    흐름으로 간주되었다. 주체에 대한 문제설정은 맑스의 공산주의가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와 구별짓는 점이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가 말하고 있듯이,

    잃을 것은 쇠사슬 밖에 없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유토피아인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주체로서 설정된다. 그들은 현실의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속에서 임금투쟁

    과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거듭난다. 또한 노동자

    정당과 노동자 운동 그리고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속적인 결합을 통해 공산주

    의로의 이행을 사유하고 실행해 옮긴다. 이것이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공산주의적

    경향인 것이다. 이 주체의 문제는 또한 푸리에게서 존재하지 않았던 권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기로 칭하고 있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비상시기이며, 종국적으로 국가권력의 소멸을 준비하는

    이행의 시기이다.

    구체적인 운동으로서 맑스주의와 노동자 운동과의 결합을 사유하고 실현하고

    자 하는 경향성과 더불어 맑스주의 내의 유토피아적 경향성 역시 존재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유토피아에 대한 묘사였다.

    나아가 현실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다. 따라서 이러한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은 구체적인 실현 의지를 가지고 현실에

    작동하는 운동에 따라는 부수적인 효과의 측면이기도 하다. 맑스에게서 공산주의

    특히 맑스는 디킨즈(Charles Dickens)에 대해 “어느 직업적인 정치가나 평론가들보다 분명

    하게 정치사회적 진실을 잘 드러냈다”고 평가하였다. 산업사회에 대한 낭만주의의 비판

    - 버크, 콜리지(Coleridge), 스콧(W. Scott), 카알라일(Carlyle), 러스킨(J. Ruskin), 모리스(W.

    Morris) 등 - 은 근대성 자체에 대한 비판의 측면을 포함하여 이후 자본주의 비판에 큰 영향

    을 미쳤다(Lö̈wy 1987). 물론 낭만주의 내부에도 슐레겔(F. Schlegel)과 같이 중세에 기댄

    복고적인 낭만주의도 존재하지만, 19세기 많은 경우 근대성에 대한 근대적 비판의 의미를

    지닌 낭만주의 흐름 - 영국의 디킨스 등과 프랑스의 푸리에, 미슐레 등 - 이 강하였다(Lö̈wy

    et R. Sayre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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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7

    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모순들이 해결되는 곳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

    적대로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의 해소는 물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의 대립의 해소가 실현된다.

    맑스가 먼 미래의 공산주의를 묘사할 때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몽상적으로 그리고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 맑스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구성원 자유가 실현되는 곳이며, 그러한 구성원들의 자유의 실현이

    결코 공동체의 구성과 모순되지 않는 다는 점이 부각된다. 맑스가 몇몇의 곳에서

    그리고 있는 공산주의의 모습을 살펴보자. 우선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

    의는 아침에 일을 하고 낮에 낚시를 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는 곳으로 묘사된다.

    이후 「고타강령비판」에서 공산주의는 두 단계로 나타난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즉 아직은 자본주의 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개개인은

    정확히 자신이 주는 만큼 사회로부터 돌려 받게 된다.” 이 경우 불평등한 개인의

    소질, 자연적인 노동능력에 따른 특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맑스는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그 내용상 불평등한 권리”라고 본다. 하지만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가 되면, “개인이 노예처럼 분업에 예속하는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

    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이 사라지고 나면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일차적인 욕구가 되며, 개인들의 전면적인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여 집단적인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넘치고, 그 때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르조아적 권리의 좁은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Marx

    & Engels 1997).

    이러한 유토피아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묘사에서 탈근대적인 측면으로 새롭게

    강조되는 부분은 맑스 및 맑스주의에서 ‘정치’에 대한 사유이다. 오랫동안 맑스가

    말했던 ‘국가소멸론’의 테제는 공산주의에서 동시에 ‘정치’의 소멸로 이해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억압적 기구로서 국가의 소멸과 함께 맑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새로운 실천’을 사유했다고 평가된다. 공산주의로 이행 속에서

    ‘국가파괴로의 경향’과 함께 ‘정치의 새로운 실천의 형성 경향’을 파악하게

    된다(Balibar 1989, 106-107). 이러한 측면이 맑스주의가 생시몽주의의 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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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벗어나 푸리에와 같은 개인들의 열정의 문제를 사유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묘사들을 종합해 볼 때, 맑스는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에서 개인의

    자유의 실현과 공동체의 조직화라는 과제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전망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푸리에의 유토피아적 전망과 유사한

    측면을 갖는다. 앞서 언급한 콩트나 생시몽의 논리가 거대구조 속에 개인들의

    배치라고 한다면, 푸리에와 맑스에게서 중요한 점은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라는

    시각이다.

    Ⅳ. 산업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디스토피아

    디스토피아를 구상하는 경우는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경우와 유사하지만, 당연히 디스토피아는 그에 대한 대안으

    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디스토피아로의 경향을 보여주면서

    비판으로 끝을 맺는다. 나아가 디스토피아는 앞의 유토피아의 경향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즉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결국은 현실적으

    로 디스토피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디스토

    피아를 그리는 경우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이 소설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는 점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24)에서부터 조지 오웰의 『1984』

    (1949)는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7)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헉슬리와 조지 오웰의 작품들은 주요하게 전체주의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단지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전체주의 사회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첫 번째 경향의 유토피아에 대해서 역시

    비판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근대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헉슬리가 말하는 ‘포드 기원’ 등의 표현은 포드주의의 극단화가 가져올 수 있는

    7) 이하의 글에서 인용은 괄호 안의 숫자로 페이지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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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19

    기술적 유토피아의 허구를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이라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 역시 보이고 있다. 실제 1920-30년대 소련과 미국은 동시에 자신들의

    기술적 유토피아라는 공동의 목표 속에서 극단적인 실험들을 행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그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헉슬리나

    오웰의 눈에 그것들은 한갓 몽상이었을 뿐이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의 서문에서 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권력의

    집중의 경향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응용과학이 정말로 발전을 보게 된 이후에 계속되어 온 바로 그런 종류의

    잡아늘리고 잘라버리는 행위가 약간 늘이고 줄이는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겠지만,

    이번만큼은 과거보다 그것이 상당히 더 심해질 것이다. 결코 고통스럽지 않은

    이런 현상은 지극히 중앙집권화된 독재 정부들에 의해서 획책될 것이다. 곧

    닥쳐올 미래는 방금 지나간 과거와 비슷하겠고 가까운 과거에서는 대부분이

    무산층인 사회에서 대량생산을 지향하는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기술상의

    개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항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인 혼란을 자아내는

    경향을 그려내었으므로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서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해 왔고, 정부의 통제력이 증가했다”(11).

    “정말로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라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치적 우두머리

    들로 이루어진 간부진과 그들이 거느린 다수의 관리 층이 노예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가 없는 노예들을 통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사랑하게끔 만든다는 것은 오늘날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는 선전부서

    장들과 신문편집인들과 학교선생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다”(12).

    이러한 헉슬리의 지적은 굳이 우리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에 대한 지적들, 그리고 알뛰세르가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다양한 활동이라는 분석 등을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 그려진 새로운 세계로서 ‘오세아니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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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20세기 전반기 등장한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에 기술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을

    덧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동물농장』의 연장선 상에서

    존재하지만은 않는다. 즉 소련 사회주의의 극단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물론 산업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삶은 철저하게 통제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단순히

    일상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그 내용까지 철저하게 통제된다. 푸리에가

    유토피아에서 마음껏 펼쳐지기를 바랐던 인간의 열정은 철저하게 억압된다.

    이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통제되는 것은 물론이다.

    작자인 오웰이 보여주는 사회에서 당이 인간을 단순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무의식까지 통제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들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주인공인 윈스턴이 하는 일은 사람들의 기억과 관련한 것들이다.

    현재의 상황이 변하면 과거의 기억을 다시 만드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 당의

    슬로건 역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53)라고 밝히고 있듯이, 오세아니아 사람들의 기억을 만드는

    것은 곧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은 물론

    시공간을 넘어서는 지배의 일상화이다. 일상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언어에 대한 통제이다. 그와 관련한 일은 매일 수십, 수백개의 단어를 없애는

    일이다. 최소한의 필요 속에서 낱말이 존재할 뿐이며, 보조적인 단어들은 삭제된

    다. 당의 중요 행정기관의 명칭이 실재와 정반대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그러한 연장선상이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들이다. 당의 감시체계가 어떠한 방식으

    로 구성원들을 옭죄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실 중의 하나는 잠꼬대에서

    말을 실수하는 사람을 체포한다는 것이다. 감시체계가 인간의 무의식까지 통제하

    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 예이다.

    『1984』나 『멋진 신세계』 두 책 모두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금지된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같은 청사에서 근무하는 줄리아와 연인

    관계를 맺는다. 사실 철통같은 감시체계에서 그러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조차도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러한 감시망을 뚫고서 섹스의 쾌락을 맛보고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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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21

    느낀다. 사실 “만족을 위한 성행위는 반역이었고,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97). 두 연인은 철저한 감시망을 뚫고서 자신들에게 억눌려 있던 자유와

    인간에 대한 애착을 맛본다. 『멋진 신세계』에서 사랑은 금지되어 있으며,

    다만 성행위만이 가능하다. 주인공은 신세계의 여성 레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서 청혼을 하지만, 이미 구세계의 것이 되어버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레니나는 기계적으로 성행위를 위한 준비를 한다. 『1984』에서 윈스턴

    과 줄리아가 사랑을 속삭이던 낡은 다락방은 일종의 해방공간이자 저항의 공간이

    다. 도시 밖을 산책하면서 발견한 고물상 그리고 그곳에 널려 있는 과거의

    유물들 그리고 둘만의 공간인 다락방은 “또 하나의 세계였고 멸종된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과거의 주머니”였다(236). 『멋진 신세계』에서나

    『1984』에서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은 철저하게 없어져야 할 것으로 묘사되며,

    ‘만인은 만인을 위한 공유물’이라는 의미에서 성행위라는 유희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말 그대로의 ‘신세계’와 대비되어 등장한다.

    인간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는 곳이다. 주인공 존은 끊임없이 세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새로운 어휘에 눈뜨고 어휘들의 신비한 마력에 빠져든다. 존은 신세계

    시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무스타파

    몬드 총통에게 소환당한다. 그 자리에서 존은 자신은 편안한 삶을 원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와 인간의 선함, 그리고 시”라고 말한다(299).

    두 개의 책 속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감정은 새롭게 구성된

    사회 속에서 다시 길들여지거나 조정된다. 『멋진 신세계』의 경우 이미 태아

    시기부터 인간의 감정들을 일정한 틀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의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고문과 세뇌

    속에서 연인마저 배반하고 당이 원하는 것 모두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당이 행하는 것은 단순한 범죄행위에 대한 예방과 처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인민 모두의 머리 속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너희들은 당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오브라이언의 단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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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럼 윈스턴은 그렇게 되어 가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고문을 통해 단순히 죄를

    고백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시키는 것이 당의 목표였다.

    『1984』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회는 약간은 세련되지 못한 ‘판옵티콘’의

    사회일 것이다. 푸코가 말하고 있는 판옵티콘의 사회의 경우 구성원들은 사회적

    규율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있다(Foucault 1975). 그러한 의미에서 훨씬

    더 세련된 규율 사회일지 모른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1984』

    에서 그리고 있는 사회 보다 훨씬 더 세련되게 우리는 통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그러한 우려 속에서 헉슬리나 오웰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산업주의의

    극단으로서 ‘디스토피아’를 그렸을 것이다.

    Ⅴ. 산업주의의 현실들

    현실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염두해

    두었던 유토피아에 대한 기획들이 현실화되는 것은 말그대로 현실적인 것이었다.

    유토피아적 사유들은 사회적 현실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유토피아로서의 의미는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푸리에의

    팔랑스테르가 현실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유사한 흐름 속에서 고댕이 파밀리스테

    르를 실험한 적이 있다. 그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푸리에의 그것과

    의 근본적인 차별성을 갖는다.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의 기본적인 출발은 개인의

    정념을 통한 즐거운 노동의 추구와 그것들의 자연스러운 조화였다면, 고댕의

    파밀리스테르는 노동의 즐거움과 성과에 대한 올바른 분배를 통해 물질적,

    도덕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민유기 2005). 현실의 자본주의적 산업사회

    속에서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일종의 고립된 섬을 만드는 방식이었

    고, 현실적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유토피아적 실험에

    그치거나 아주 현실적인 적응 혹은 현실화된 정책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노동자 혹은 빈민의 문제는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서 제기되었다. 앞서 다양하게 살펴본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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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23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답변들은 어떠하였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부르조

    아지의 현실적 전략 중의 하나는 박애주의(philanthropism) 전략이었고, 구체적

    인 주택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간의 실현으로 나타났다. 박애주의

    전략은 대중적인 빈곤과 피폐에 대해서는 세심한 조사와 탐구를 통해 현상을

    명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하고자 한다. 19세기 박애주의는

    대중들을 포섭하고 통제하기 위해 주요하게 두 개의 축을 통해 전략을 구사하였

    다. 하나는 사회적 보조(assistance)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위생주의적 축(pô̂le

    médical-hygiéniste)이었다(Donzelot 1977, 56). 이 두 축을 통해 “인구를 보호하

    고 형성하는 실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하였다.

    19세기 부와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지리적 불균등발전이 발생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교외의 ‘프라이버토피아(privatopias)’가 형성된다. 19세기 런던의

    교외지역은 소수 엘리트들을 위한 선택된 피난처로서 시작되었고, 거의 영국

    중산층의 지배적인 가정형태가 되었다(Fishman 2000, 101). 사실상 이것은

    도시의 ‘문이 있는(gated) 지역사회들’로서 스스로 폐쇄되면서 시민권, 사회적

    소속감, 상호부조의 개념들을 훼손시키기 까지 한다(Harvey 2001, 210). 이러한

    프라이버토피아 형태의 제한적 공간 내에서의 유토피아적 발상은 토마스 모어시

    대까지 이루어졌던 공간적 유토피아의 재현이다. 즉 특정한 공간 내에서 유토피

    아의 실현이라는 사고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주의 도시 계획안을 나름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이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이다. 그의 작품

    「현대도시(La ville contemporaine)」는 생시몽주의를 실현하고 있다(정진수

    1989, 41). 산업계층의 엘리트는 도시 내의 호화로운 고층아파트에 거주하며,

    하위계층은 교외의 전원아파트에 거주한다. 생산과 행정의 위계질서에 따라

    거주형태와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후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에

    서 르 코르뷔지에는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주의를 결합하고자 한다. 「빛나는

    도시」에는 끊임없이 연속되는 공원 속에 기둥과 같은 원형적 유형의 개방된

    도시이며, 개인들은 반복되는 생활단위 내에 정원을 가지고 있다. 주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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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전원과 도시를 동시에 즐긴다는 의미로 설계된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르 코르뷔

    지에의 도시계획안이 실현되는 방식은 20세기 초반 대도시의 인구과밀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대단위 주거단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상 20세기에 들어서

    나타나는 근대도시 주거계획에서는 강조되는 부분은 기능과 효율성의 측면이었

    고, 인간본질의 측면은 뒤로 밀려났다.8) 유토피아적 공간은 고립적이거나 선택적

    혹은 제한적으로만 존재 가능할 뿐이었다. 1933년 근대건축국제회의(CIAM

    - Les Congrè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에서 채택된 은 현대 도시의 기능으로 네가지, 즉 주거, 여가, 노동, 교통을 채택하였고,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은 강력하였다(스즈키 히로유키 2003). 그것은 현실적인

    자본주의적 도시에 대한 구상이었다.

    20세기 두 개의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의 기술유토피아일 것이다. 두 나라 모두 19세기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시도들이었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의 구체적인 실험과

    실현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신경제정책을 실험하면서 레닌은 사회주의는 곧

    포드주의와 노동자통제를 결합시킨 것일 뿐이라고 말하였다(Lenin 1991). 신경

    제정책 속에서 전기화는 기술적인 프로그램이자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국가전기화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전기화는 경제의 재건을 가속화시

    킬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나라를 서유럽의 가난한 사회에서 전기와 라디오가

    가득 찬 근대적이고 문화적인 사회로 탈바꿈시킬 것이다”(Buck-Morss 2008,

    174에서 재인용). 신경제정책 속에서 근대적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는 시도들은

    자본주의와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존재했으며, 다만 소유권의 노동자 혹은 노동자

    8)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와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의 논쟁은 주목할만 하다. 초현실주의자

    들은 집을 ‘사는 기계’로 정의한 르 코르뷔지에의 기계론적 합리주의를 비판했다. 기계문

    명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와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미학에 근거해 창조된 르 코르

    뷔지에의 주택은 살기 불편하다는 불만이 거주자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초현실

    주의자들은 자궁 속에서 태아가 느끼는 편안함이 주택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면서 ‘둥글고

    공모양의 비정형’이라는 형태와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촉감의 깊이’라는 해답

    을 제시하였다(임석재 2008, 27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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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25

    국가로의 이전이라는 단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산업화 그리고 테일러주의를 대체한 스타하노비즘은 1930년대 소비에트 노동의

    모델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서구 따라잡기”는 자본주의와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자연에너지를 이용하여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

    는 것이었다(Buck-Morss 2008, 167). 1844년 맑스가 「경제학 ․ 철학 수고」에

    서 인간소외의 극복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 즉 “인간의 실현된 자연주의 그리고

    자연의 실현된 인간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유권의

    이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비록 레닌이 처했던 현실이었던 제국주의에 둘러싸인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과제와 맑스의 유토피아로서 공산주의 사이에

    간극이 불가피하게 존재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 사회는

    유토피아와는 너무나도 멀었다. 또한 그 구체적인 노력 속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지향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미국 역시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연호가 ‘포드 기원 〇〇〇년’이듯이 포드주의는 20세기 초반 등장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대량 소비 체제를 가져온다. 이른바 풍요의 시대를 가져오

    리라는 기대를 품게 하였다. 1920년대 미국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만드는

    듯 하였다. 1920년대 중반 경 미국 가구의 60%이상이 전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이 전 세계 전기발전량의 절반이상을 소비했다(Taylor 2005, 61).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시점에서 미국 산업은 과학기술에 대한 주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노동자들의 하루 생산량이 유럽노동자들보다 2∼5배 더 많았다

    (Taylor 2005, 65). 이미 영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미국의 헤게모니가 본격적

    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국식 사회의 모델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세계의 미국화가 시작되었다. 포드주의의 일관작업체계에

    기반한 기술패러다임과 법인자본주의의 막대한 생산능력은 미국식 근대성의

    체계의 등장을 가져왔다.9) 미국은 ① 법인자본의 잠재적 분배력, ② 자본-노동의

    9) 산업자본주의 시대 영국식 가족자본주의는 1920년대 이후 미국식 법인자본주의 체제로

    대체된다. 미국의 법인기업들은 제품의 다양화와 이에 따른 다부문 조직구조의 채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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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갈등을 생산성, 효율성이라는 기술적 문제로 전환하는 거시경제조정을 통해

    완전고용을 약속한 국가의 ‘중립적’ 조절장치와 노동력 관리정책 등에 기초해,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없이도 대중노동자에게 일할 권리와 소득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다(안정옥 2005, 95). 이러한 대중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는 미국의 헤게

    모니 속에서 높은 대중소비에 접근할 수 있는 ‘소비자 시민’의 권리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것들을 테일러는 네덜란드의 상인적 근대성에서 영국의 산업적

    근대성을 거쳐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으로 진화했다고 근대성의 근대화를 파악한

    다. ‘모두를 위한 대중소비’를 약속한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은 모더니즘 건축양식

    에서 드러나는 안락에 대한 경멸과 대조적으로 핵가족을 위한 소비적 안락이

    집중된 장소로서의 ‘교외주택+쇼핑몰’로 상징되는 일상적 ‘안락의 민주화’를

    표상한다(Taylor 1999, 211).10) 하지만 자발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과 취향으로

    표상되는 이러한 소비행위들 조차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있으며, 그것은 자본에

    의해 욕구가 조절되고 방향지워지면서 통제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자본에

    의해 근대인들의 이성은 물론 그 욕망까지도 제어되고 장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앞서 헉슬리나 오웰이 묘사한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 인간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모습은 결국 낯선 것이 아니다.

    결국 20세기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산업주의가 현실 속에서 가능한 형태들을

    실험해보는 세기였다. 사실상 꿈꾸웠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었고,

    그 속에서 살아왔던 인간은 근대초기 상정되었던 이성의 만개를 통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였다. 근대인의 삶과 그들의 사회는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단순히 경제적 삶의 윤택함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해 가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권력의 망의 존재 때문이다. 그것은 푸코가 상이한 방식으로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특징으로 하는 대개편을 단행했다. 미국의 법인자본주의는 상품과 시장 다양화의 방향으

    로 움직임과 동시에 고객을 “제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Arrighi 2008).

    10) 또한 소비적 근대성의 이면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소비자가 될 수 없었던 많은 하층민들

    특히 흑인을 위시로 한 유색인종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저임금 노동자층

    은 다양한 형태의 이민노동자로 유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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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27

    Ⅵ. 새로운 유토피아를 위하여

    프랑스 공산당은 1978년 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폐기를

    선언하였고, 2000년 3월의 30차 당대회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결정론과 혁명적

    폭력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후 ‘자본주의 추월계획’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재활성화하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맑스주의가 이전의 유토피아

    에 대한 사유들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던 이유는 그러한 사유들에서 이행의

    문제 즉 주체의 문제와 권력의 문제의 부재때문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프랑스공

    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혁명의 폐기는 사실상 맑스주의를 유토피아의

    공상성에 한정하여 두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사회주의’의 실험은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맑스주의가 유효

    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제기한 문제가 아직은 미해결인 상태 때문이

    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랑스공산당의 변화는 맑스주의가 갖는 유토피아적 의미만

    을 강조하는 것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에 공통된 것은 근대의 산업주의가

    인간의 본성, 특히 인간의 정념(passion)에 반한다는 생각이다. 산업주의는

    근대 이성의 발현의 산물이고 그것은 인간의 정념에 대한 억압을 가져오며,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모던의 새로운 문제의식들이 등장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정념의 문제를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11)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새로운 공동체

    에 대한 사유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을 주도하였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변화의 내용

    과 폭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고,

    11) 근대 초기의 스피노자, 19세기 푸리에, 20세기의 벤야민은 아마도 그러한 경향의 사고를

    전개한 사람들이다. 근대적 이성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정념의 발현을 모색했던 이들이

    다. 박주원이 ‘맑스에게서 푸리에로“라는 의미는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박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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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랭보는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이 두 개의 슬로건은 하나의

    것이다”(임홍배 2003, 6에서 재인용).12) 그러한 브르통의 선언은 그의 「초현실

    주의선언」에서 강조한 ‘상상력’의 문제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주고 상상력이 그 가공할 금지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다”라는 선언은 20세기의 화두 중의 하나가 된다(Breton 1987, 113). 1968년

    혁명의 구호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였다. 그리고 68 혁명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이성에 기반한 근대적 기획’에 대한 거부였다. 19세기의 전망이 실현되

    었던 20세기 동안 그것의 유토피아적 전망은 사실상 힘을 잃은 듯 하다. 오히려

    19세기의 다양한 유토피아적 전망 가운데 근대적 기획의 한계를 인식한 가운데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던 시각들이 주목을 다시 받기 시작한 것은 산업주의

    자체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이다. 지금은 상상력을 더욱 더 발휘해야 할 시점인

    듯하다.

    12) 브르통은 (1944)에서 “사람들은 푸리에를 무시했지만,

    언젠가는 이들은 좋든 싫든 간에 당신의 치료약을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정념에 대해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 모든 인간적 태도에 대한 존중, 이러저러한

    행동에 대한 판단의 거부, 즐거움에 대한 호소, 상상계 문화, 이러한 것들은 기만과 위선이

    지배하는 물질주의적 사회와 관계를 끊고자 하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들이었다(Th. Paquot 2002,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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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산업주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투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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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 고 일 : 2010년 2월 18일▣ 심 사 마 감 일 : 2010년 3월 31일▣ 수 정 일 : 2010년 4월 5일▣ 최종게재확정일 : 2010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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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Abstract

    Utopia and Distopia of modern industrialism: projection of future of the moderns

    Tai-Young Hong

    Utopia is an expression of belief that there is a place which doesn't exist and

    there is another time-space and belief. And It is an expression of will that would

    explore and create a new imaginary space. Utopia may be a thing of future or that

    of past which existed - for example, golden age of J. J. Rousseau, Thoughts of

    utopia were a sort of space-utopia, which would be realized in the some islands,

    after Platon. But after 18th century and French Revolution, These are transformed

    for time-utopia which would be searched in the future. That is, from utopianism of

    space-form to that of time-proces. At the same time, perspectives of distopia are

    appeared in the 19th century. Common problematics of distopia perspectives are

    that modern industrialism is against human nature, in particular, human passion. Modern

    industrialism is product of modern reason and that is resulted in oppression of human

    passion. That society is not our ideal society. Recently, critics of modernity and new

    problematics of post-modernism demand to think fundamentally for human passion.

    They require new comprehension of human nature itself. And thoughts of new community

    can be related to those of utopia. This article explores perspectives of utopia and

    those of distopia. That examines change of perspectives of industrialism and modernity

    itself. In examining those changes, we researche new possibilities of perspective which

    can overcome modernity. This is in the expect of new utopia.

    key words: industrialism, utopia, distopia, capitalism,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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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학 형성의 역사와 패러다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33

    프랑스 정치학 형성의 역사와 패러다임: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

    하 상 복**

    목 차

    Ⅰ. 논의를 시작하며

    Ⅱ. 자유정치대학의 탄생과 이념적 지평

    Ⅲ. 자유정치대학의 교육 패러다임 - 과학주의와

    실용주의의 결합

    Ⅳ. 정치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 정치학 패러다임

    논쟁

    Ⅴ. 사회학의 부상과 정치학의 위기:

    배제와 포섭 사이에서

    Ⅵ. 논의를 마치며

    요 약

    이 연구는 자유정치대학 탄생의 역사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프랑스 정치학의 특수성에

    답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서구(미국을 포함) 정치학 탄생의 기점을 19세기 후반, 보다 정

    확히는 1870년대로 잡는데 그 시기의 준거는 프랑스에서 찾는다. 1872년에 최초의 정치학

    전문학교인 ‘자유정치대학’이 설립되어 실증주의와 역사학적 관점에 입각한 교육 프로그램

    으로 고위 국가공무원 양성 교육에 주력했다. 이러한 프랑스적 상황은 이웃국가인 영국과

    신대륙인 미국으로 알려지고, 그 두 나라는 프랑스적 교육 모델에 입각해 자국의 그것을

    주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스적 모델이 그 두 나라에 이식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대학 제체 바깥에서 정치학 교육제도를 수립하고자 했던 반면에, 영국과 미국은

    제체 내부에서 그것을 도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의 경우 2차 대전 직전에야 정치

    대학 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미국과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적 정치학 모델을 거부

    하면서 강력한 철학적 전통에 연결된 정치학 교육 패러다임 형성에 주력했다. 이러한 역사

    적 사실은 제도(학교)와 학문(정체성과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프랑스 정치학을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던져준다. 프랑스 정치학은 서구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후의 발전과정에서는 다른 나라들보다 지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정치학의 정체성

    역시 확립되지 못했다. 이러한 특수성은 프랑스 정치학이 탄생한 뒤에 인접학문들(특히 법

    학과 사회학)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견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치학의

    정체성 문제는 이러한 국내적 조건을 넘어 유럽 내부와 세계적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는

    ‘학문의 지구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주제어: 프랑스, 정치학, 패러다임, 정체성, 학문의 지구화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

    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7-321-B00008).

    ** 목포대학교 /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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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I. 논의를 시작하며

    미국을 포함해, 서구에서 정치학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분과(discipline)

    로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학문의 자율성과

    독자성에 관한 보편적인 기준을 설정하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한 연구자

    (Stein 1995)가 제시하는 기준들 가운데, 공식고등교육체계 내에서 명확한 제도

    적 영역을 확보하면서 인접 학문분과와 가시적인 경계선을 긋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주목한다면1) 우리는 서구에서 정치학이 태동한 때를 1870년대 초반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최초의 문을 연 나라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는 1872년

    파리에 ‘자유정치대학’(E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을 설립해 정치학

    교육을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도 정치학 과정이 개설되

    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880년에 컬럼비아 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정치

    학과가 개설된 이래 독자적 학문영역으로서 정치학의 길이 열렸으며, 영국은

    1895년에 런던정치경제학학교를 세워 정치학 교육의 공식적 닻을 올렸다. 한편,

    독일에서 제도로서 정치학의 등장은 몇몇 요인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지체된

    양상을 보였는데, 2차대전 종전 즈음에야 베를린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 정치전

    문대학이 개설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서구 정치학의 시간적 준거가 프랑스에 있음을 말해준

    다. 하지만 프랑스가 가장 먼저 정치학 교육제도를 구축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에 관련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미국, 영국, 독일 세 나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프랑스를 기준으로 자신의 고유한 정치학 교육 모델 또는 패러다임을

    조형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컬럼비아 대학에 정치학 교육을 이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버제스(John W. Burgess)는 프랑스의 자유정치대학의 교육이념을

    1) 그 밖에도 연구자는 그 학문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자 그룹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가,

    그와 관련해 독자적인 학회(association)가 구성되어 있는가, 나아가 그 학문에 특화된 학술

    지(journal)가 실질적인 학문적 교류의 장을 제공하고 있는가, 등을 언급하고 있다(Stein

    1995,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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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학 형성의 역사와 패러다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35

    따라, 국가발전에 필요한 엘리트 양성을 위한 정치학 교육을 구상했다. “프랑스에

    서도 정치과학자유대학2)이 새로 설립되어 제3공화국을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받

    은 것에 버제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로스 2008, 147). 영국도 미국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는데,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정치학 교육을 이끈 월러스(Graham

    Wallas)는 프랑스 자유정치대학의 모델을 모방해, 능력 있는 공직자 육성을

    위한 정치학 교육을 바라마지 않았다(Hayward 1991, 305). 이와는 달리 독일은

    영국과 미국이 받아들인, 국가공무원 양성이라는 프랑스적 정치학 교육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은, 내부의 몇몇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용주의적 교육이념에 맞서 정치학을 철학적 사유의 전통 속으로 통합하기

    위한 제도적 토대 구축에 주력했다(Beyme 1991, 267).

    이렇듯 서구 정치학 교육 패러다임의 형성과 관련해 프랑스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이후 정치학

    의 제도적 발전과정에서 다른 나라들, 특히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쳐진

    양상을 보여 왔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우선, 프랑스의 정치학은 미국에

    비해 그 학문적 성과의 양적 규모와 생산성 면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다. 역으로

    말해보면, “미국의 정치학은 의심할 나위 없이 한층 더 전문화되어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한층 더 일관된 학문적 표준을 유지하고 있다”(McKay 1991, 463).3)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정치학이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엄격히 말해 정치학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구축한 예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더 복잡한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듯하다. 정치학이 사회학과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난제다. 정치학을 단일의 통합

    학문으로 규정지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에서 정치학이란 용어가 정초될

    때의 이념적 연속선상에서, 독자적인 하위 학문영역들로 묶인 복수의 학문으로서

    2) 역자는 프랑스의 Ecole Libre des Sciences Politiques를 필자와 같이 자유정치대학이 아니라

    정치과학자유대학으로 번역했는데 역자의 뜻을 존중해 그대로 기술했다.

    3) 물론, 우리는 그것을 영국과 독일을 포함하는 서유럽 전반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

    다면 그 속에서 프랑스만의 특수한 사정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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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OUGHTOPIA: The Journal of Social Paradigm Studies

    ‘정치학들’(sciences politiques)로 규정지을 것인가 또한 중요한 쟁점영역이다.

    우리는 프랑스 정치학이 당대의 특수한 학문적․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하나의 제도로서 자유정치대학이 어떻게 설립되는지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