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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박진한 1 - 7 - Ⅰ. 문화적 기억과 도시정체성 Ⅱ. 천수각의 기원과 성곽의 보존 Ⅲ. 천수각 재건사업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 Ⅳ. ‘대오사카’의 새로운 상징과 기념의 욕망 Ⅴ. ‘충군애시(忠君愛市)’의 표상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守閣)’ 재건사업(1928~1931)을 중심으로- 박진한* Ⅰ. 문화적 기억과 도시정체성 오늘날 세계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도시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가지고 있다. 굳이 그 도시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뉴욕하면 자유의 여신상, 런던하면 빅벤, 파리하면 에펠탑, 베이징하면 천안문광장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높이 55미터의 ‘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 守閣)’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의 천수각이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쌓은 축성물이 아니라, 1928년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關一)의 주도하에 재건된 복원물이란 점이다. 대학에서 사회정책을 강의하며 사회개량주의자로 활동했 던 세키 시장은 오사카 시장으로 재임하는 동안(1925~1935) 불량주택 개량, 시영주택 건설, 직업소개소 운영, 노동자 재해보조법 등의 혁신적인 도시정책을 입안·시행해 시민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지지를 받았다. 1) 오사카 시민들은 천수각 재건사업을 제 *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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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

    - 7 -

    Ⅰ. 문화적 기억과 도시정체성

    Ⅱ. 천수각의 기원과 성곽의 보존

    Ⅲ. 천수각 재건사업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

    Ⅳ. ‘대오사카’의 새로운 상징과 기념의 욕망

    Ⅴ. ‘충군애시(忠君愛市)’의 표상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守閣)’ 재건사업(1928~1931)을 중심으로-

    박진한*

    Ⅰ. 문화적 기억과 도시정체성

    오늘날 세계 주요 도시들은 저마다 도시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가지고 있다. 굳이

    그 도시를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뉴욕하면 자유의 여신상, 런던하면 빅벤, 파리하면

    에펠탑, 베이징하면 천안문광장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높이 55미터의 ‘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

    守閣)’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의 천수각이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쌓은 축성물이 아니라, 1928년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關一)의 주도하에

    재건된 복원물이란 점이다. 대학에서 사회정책을 강의하며 사회개량주의자로 활동했

    던 세키 시장은 오사카 시장으로 재임하는 동안(1925~1935) 불량주택 개량, 시영주택

    건설, 직업소개소 운영, 노동자 재해보조법 등의 혁신적인 도시정책을 입안·시행해

    시민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지지를 받았다.1) 오사카 시민들은 천수각 재건사업을 제

    *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조교수.

  • 2 인천학연구 11(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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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한 세키에게 열렬한 환호와 함께 모금활동을 벌여 150만엔의 기금을 제공하였다.

    오사카시는 시민들의 기금을 바탕으로 오사카성 내에 위치한 육군 제4사단 청사를 이

    전하고 그 자리에 옛 천수각(天守閣)을 다시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31년 11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5층 구조물의 천수각이 완성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1928년 세키시장의 주도 하에 추진된 ‘오사카성 공원화 및 천수각

    재건사업’(이하 ‘천수각 재건사업’으로 약칭)을 소재로 도시 상징물과 정체성의 관계,

    그리고 시정당국과 언론, 시민들의 개입 과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의 아스만

    부부는 ‘텍스트와 이미지, 장소(공간)와 상징물 등을 매체로 생성되고 공유되는 개인

    적, 집단적 정체성’을 ‘문화적 기억’으로 정리한 바 있다.2) 얀 아스만에 따르면 동시대

    인의 생생한 체험은 신성화된 전승으로 기억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체험과 전승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멀어지면서 기원에 대한 기억은 문화적 형태를 띠고 재현된다

    고 보았다. 다시 말해 기억은 시간적 간극을 거슬러 올라가 재현되기 때문에 문화적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한 사회 내에서 정치적 헤게모니

    를 쟁취한 집단은 그들의 배타성을 은폐하기 위해 텍스트나 이미지 또는 제례적 관행

    등을 포함하는 문화적 기억으로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보편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기억이 항상 특정 공간과 결부되어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현재에 재현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세력의 갈등과 경쟁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기억의 관

    점은 우리로 하여금 도시 상징물에 녹아든 의미체계, 즉 기표와 기의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갈등관계를 살펴보는데 많은 시

    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에서는 이 같은 작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위해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초점

    을 맞추고자 한다.3) 첫째, 기억의 저장고로서 오사카성 천수각 재건사업이 갖는 의의

    1) ジェフリー·E·へインズ著, 宮本憲一監訳, 主体としての都市-関一と近代大阪の再構築-, 勁草書房, 2007.

    2)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 외 옮김,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교출판부, 2003.3) 오사카 천수각 재건사업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오사카성 건설 당시 육군 측과의 교섭과정 및

    시민모금의 경과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를 소개하는 牧英正, 「昭和の大阪城天守閣築造」(大阪市公文書館研究紀要 5, 1993)와 역사박물관으로 ‘오사카성 천수각’의 기능과 역할, 관리 등에 주목한 北川央, 「大阪城天守閣-復興から現在にいたるまで-」(歷史科學 157, 1999),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인기를 바탕으로 ‘정신적 방면을 통일하는 신성한 장소’로 오사카성의 성역화 과정에 주목한 酒井一光, 「大坂城天守閣復興と城内の聖域化-「大大阪」シンボルの誕生-」, 橋爪節也編著, 大大阪イメージ‐増殖するマンモス/モダン都市の幻影, 創元社, 2007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오사카성 천수각’ 관장을 지낸 牧英正의 논문은 육군과의 교섭과정을 비롯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중요한 사료들을 소개하고 있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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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한 고찰이다.4) 오사카에는 오사카성 이외에도 도시의 역사와 기원을 담고 있는

    유적과 사적이 적지 않게 존재하였다. 하지만 천수각 재건사업과 함께 도시의 시원은

    이제 더 이상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사천왕사(四天王寺)나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모시는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에서부터 구해졌다. 다시 말해, 천수각 재건사업은 유사 이래 오사카의 지층

    아래에 묻혀 있던 다양한 인물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히데요시’와 ‘오사카성’

    이라는 단일한 공간으로 통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천수각 재건사업에 참가한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천수각

    재건사업에는 시정 관료뿐만 아니라 지역유지와 문화인사, 매스미디어, 일반시민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과 세력이 참가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세력이 재건사업에 개

    입·관여하게 되면서 애초 사업을 주도했던 시정 당국의 의도와 달리 여러 사회세력

    간의 갈등과 경쟁 속에서 도시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셋째, 여러 도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개별 도시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오사카는 에도시대부터 에도(江戸, 후에 도쿄), 교토와 함께 ‘삼도(三都)’라 불리며 일본 내 여타 도시와 구분되는 우월한 경제적 지위와 문화적 특성을 인정

    받았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제도(帝都)’로 거듭난 도쿄 중심의 일원적인 중앙집

    권적 국가구조에 편입되면서, 오사카는 단지 ‘동양 최대의 공업도시’로 단지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며 나름의 전통과 개성을 상실해갔다. 이러한 점에서 오사카시민들이

    천수각 재건사업에 보여준 열렬한 호응과 기대는 다름 아닌 제도(帝都)인 도쿄, 고도

    (古都)인 교토에 대한 경쟁심과 민도(民都)로 거듭나려는 오사카에 대한 긍지에서 비

    롯된 측면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 본 논문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천수각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 건설되었다. 이들 천수각의 상당

    수는 역사적 자료나 유물에 토대를 두고 과거를 정확히 재현하기위한 ‘복원(復元)’ 방식이 아닌, 지역의

    관광시설로 이용하기 위해 실제와 상관없이 장대한 외관을 강조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일본에서는 이

    렇게 건설된 건축물을 ‘부흥(復興)’ 혹은 ‘모의(模擬)’ 천수각이라 부른다. 본고에서는 과거의 역사적 건

    축물을 현재적 의도에 따라 ‘다시 건설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재건(再建)’ 천수각으로 부를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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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천수각의 기원과 성곽의 보존

    전국시대 영주의 성곽은 일반적으로 산꼭대기나 산 중턱에 축조되었다. 이는 험준

    한 지형을 이용해 군사상의 방어를 용이하게 만들고 일원적인 영국(領國)지배를 과시

    하려는 전국다이묘(戰國大名)의 축성 전략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5) 전국다이

    묘의 뒤를 이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같이 일본

    전역의 통일을 지향하는 이른바 ‘통일권력’이 나타남에 따라 성곽구조에도 많은 변화

    가 생겨났다. 이들은 안정적인 권력 행사를 위해 편의적으로 쌓은 전국시대의 산성과

    달리, 평지에 높은 석단을 쌓은 성곽을 축조하고 그 내부에 초석과 기와를 갖춘 건축

    물을 지어 성곽과 건물의 영구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리고 통일권력의 절대성과 우

    월성을 가시화하기위해 수직으로 높이 솟은 천수각을 건립하였다.

    천수각의 기원은 본래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적을 경계하기위한 ‘야구라(櫓, 망루)’

    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를 성곽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수직으로 높이 솟은 장대한

    건축물로 축조하고 그 내부에 영주의 생활공간을 배치한 이는 다름 아닌 오다 노부나

    가였다. 천하를 손에 넣었다하여 ‘덴카비토(天下人)’라 불린 노부나가는 1579년, 비와

    호(琵琶湖) 주변의 아쓰치(安土)에 새로이 자신의 거성을 축조하면서 ‘천수(天守)’라

    이름붙인 5층 구조(약 35m)의 장대한 구조물을 지었다. 천수각은 지상에서 최상단까

    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복층 구조로 지어졌다. 그리고 각 층에는 마루를 깐 거주공간

    이 마련되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던 시절에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처럼 높은 구조

    물에 거주하려했던 것은 여타 다이묘와 차별화된 권력의 우위를 상징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6)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권력의 절대성과 우월성

    을 과시하기위한 상징물로 천수각을 도시 중심에 두고 조카마치(城下町) 어디에서나

    시각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통일적인 공간배치를 시행하였다.7)

    5) 최근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산성 내부에는 영주와 가신의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시설까지 갖추

    었다고 한다. 영주의 거관은 산 정상부에 위치한 반면 가신의 거주지는 산등성이와 비탈을 따라 건설되

    었다. 그리고 산 밑 평지에는 영민(領民)의 생활공간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사회적 권력의

    편성 원리가 고도차에 의해 수직적으로 계서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성곽에

    대한 최근의 종합적인 연구 성과로는 千田嘉博·小島道裕編, 天下統一と城, 塙書房, 2002 들 수 있다. 아울러 전국시대 성곽과 도시구조에 관해서는 小島道裕, 「戰國期城下町の構造」, 日本史研究 257, 1984; 小島道裕, 「織豊期の都市と都市遺構」, 國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8, 1995 참조하기 바람.

    6) 中井均, 「戰國の城から近世の城へ」, 千田嘉博·小島道裕編, 天下統一と城, 塙書房, 2002. 7) 도요토미 정권은 일찍이 나가하마성(長浜城) 이래 오사카성(大坂城), 하치만성(八幡城) 등의 조카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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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5층 구조로 정형화된 천수각의 외부 구조는 에도막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그 내부는 이제 더 이상 영주의 생활영역으로 이용되지

    않고 텅 빈 공간으로 남겨졌다. 장군권력의 안정과 함께 전쟁의 실제적인 위험성이

    사라진 1630년대 이후 성곽과 천수각은 단지 영주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례의 장으로 그 의의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8) 심지어 낙뢰나 화재로 인해 천수각

    이 소실된 이후에도 무가제법도와 재정난 등을 이유로 이를 재건하지 않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9) 1638년에 완성된 에도성 천수각은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1657년

    대화재로 인해 소실되지만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오사카성 천수각은 1615년 두 차례

    의 오사카전투로 소실된 이후 1629년 에도막부에 의해 중흥되지만 1666년 낙뢰로 전

    소된 이후에는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다이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

    를 들어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오쿠라(小倉), 요도(淀), 기시와다(岸和田), 후쿠

    이(福井), 히로사키(弘前) 등지에서는 낙뢰나 화재 등으로 천수각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건립하지 않았다. 막번 영주의 입장에선 더 이상 천수각과 같은 시각

    적인 연출물로 공권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강력한 영주 권력을 사회적으

    로 구축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함께 성곽과 천수각은 보다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메

    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서구식 신병기로 무장한 신정부군과 옛 무사계층이 중심이 된

    구 막부군 사이의 전투에서 성곽은 이제 더 이상 화포의 발달로 인해 ‘무용의 것’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보신전쟁(戊辰戦争)동안 막부 편에 섰던 동북지방의 다이묘들은 신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우쓰노미야(宇都宮), 와카마쓰(若松), 이와키(岩木)성 등이 파괴

    되었다. 또한 서남전쟁 동안에도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히토요시(人吉)성 등이 피해

    를 입었다.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파괴와 함께 근대화 과정 중에 성곽을 훼손하는 경

    건설 사업에서 알 수 있듯이, 천수각에서 시내 주요 거리를 내려다보는 영주의 시선을 의식해 주요 거

    리와 가도를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공간배치를 시행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宮本雅明, 「象徵性と公共性の都市史」, 鈴木博志 外編, シリーズ都市·建築·歴史 5 近世都市の成立, 東京大學出版會, 2005, 42~52쪽.

    8) 세키가하라 전투(1600)와 오사카 여름·겨울 전투(1614·15)를 거치면서 에도막부를 중심으로 안정된

    무가권력이 확립됨에 따라 다이묘의 지위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무력이나 실력이 아닌, 무사집단의

    수장인 장군으로부터 위임받는 공권력, 즉 ‘공의’에 의해 보장받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더욱이 영주의

    거성(居城) 이외에 모든 성곽을 파괴하도록 지시하는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과 같은 조치를 통해 다

    이묘의 전투능력이 약화되고 사적인 전투를 부정함에 따라 성곽은 이제 더 이상 군사시설이기보다 영

    주 권력의 상징물로서 보다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9) 千田嘉博, 「集大成としての江戸城」, 國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50,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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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역시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전국의 모든 성곽의

    소유와 관할은 병부성(훗날 육군성의 전신)으로 이전되었다. 이듬해 1월 14일 태정관

    령에 따라 육군성에서는 에도성을 비롯한 41개 성곽의 존속을 인정하는 대신 144개

    의 폐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폐성으로 지정된 성곽 내 천수각, 야구라와 같은 건축

    물은 민간에게 입찰을 통해 불하하도록 지시하였다.10)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

    으로 국민국가 건설 움직임이 본격화됨에 따라 성곽은 이제 단지 무용한 군사시설을

    넘어, 구 영주 권력의 상징물이자 청산해야할 봉건시대의 유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사카성 역시 위의 경우와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1868년 1월 3일 교토 인

    근의 도바(鳥羽), 후시미(伏見)에서 왕정복고를 꾀한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양 번

    과 막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사쓰마, 조슈 군대의 승리로 끝이 나고

    여기서 패배한 막부군은 일단 오사카성으로 퇴진하여 농성을 준비한다. 그러나 1월 6

    일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수명의 측근과 함께 성을 빠져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9일 사쓰마, 조슈 군대가 성을 접수하려하자, 성 내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주요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11)

    신정부 수립 이후 일본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二郎)는 오사카성 일대를 일본육군의 중심지로 전환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869년 7월 육

    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 청년학사와 육군성의 전신인 육군소가 오사카

    성내에 창설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오사카 성곽 주변에 조병사(造兵司), 육군 군

    의학교, 교도대(敎導隊, 하사관양성소)가 건립되었다. 1871년에는 도쿄, 오사카, 구마

    모토(熊本), 센다이(仙台)에 사단의 전신인 진다이(鎭臺)가 설치되면서 오사카성은 오

    사카진다이의 본부가 되었다. 1888년 진다이제가 사단병제로 전환되면서 오사카진다

    이는 제4사단으로 개편되었고 아울러 오사카성은 육군 제4사단 사령부와 주둔지가

    되었다. 그리고 성 외곽 지역에 위치한 광대한 무사거주지에는 포병창을 비롯해 여러

    병창공장이 들어서게 된다.12)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에서 도시화에 소요되는 막대한 물

    10) 하지만 존속이 결성된 41개 성곽 가운데 수리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모리오카(森岡), 와카마

    쓰(若松), 마쓰마에(松前), 히코네(彦根), 돗토리(鳥取), 쓰(津) 등지의 성곽 역시 점차 폐성화되어 갔

    다. 佐藤滋, 城下町の近代都市づくり, 鹿島出版会, 1995, 34·35쪽.11)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이래 수차례의 파괴와 재건 과정을 반복하였다. 축성으로부터 불

    과 30여년이 지난 1615년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를 제거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이은 공격

    으로 완전히 전소되었다. 1626년 에도막부는 무사지배의 권위를 과시하기위해 성을 재건하지만 1665

    년에는 낙뢰로 말미암아 천수각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200여 년간 오사카성은 천수각이

    없는 성곽으로 남아있었다.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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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재정적 지원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던 메이지정부는 이처럼 성곽을 파괴하고

    해자를 매립해 이를 관청용지나 군용지, 학교부지, 공원 등의 공공용지로 사용함으로

    써 근대도시 건설에 필요한 공간과 재정을 충당하고자 했다. 그 결과 메이지 말기 온

    전히 천수각을 보존하면서 파괴를 면한 성곽은 겨우 18개에 불과할 정도였다.13)

    하지만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곽과 천수각에 대한 인식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

    나기 시작한다.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에 따르면 (일본에서) ‘고향’은 1880년대 후반

    에서 1890년대에 걸쳐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시골청년들이 조직한 동향회를 통해

    그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이 부여되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향은

    역사적인 시간과 풍경의 공간, 그리고 언어의 공유를 통해 만들어진 공동의 감정으로

    새로이 구성된 것이었다. 이처럼 고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기에 오락

    회나 운동회 같은 각종 모임과 동향기숙사와 같은 사건, 그리고 ‘성곽’과 같은 구체적

    인 사물을 통해 구현되어야만 했다. 이 중에서 특히나 성곽은 ‘실감’에 근거한 고향의

    역사성을 담아내는데 좋은 사물이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역에선 옛 성에 고향의 역

    사성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고향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지역주민과 동향회를 중심으로

    천수각 보존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마쓰모토성(松本城)은 지역주민들이 나서

    천수각을 보존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쓰모토성은 1504년에 건립되지만,

    1876년 화재로 인해 많은 건물이 소실되고 “천수각 한 동”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수각 보존을 호소하는 무명씨의 필자는 “옛날을 회고하는 정”과 “향

    리의 체면을 중시하는 지성”의 두 가지 이유에서 이를 보존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

    였다. 무명씨는 마쓰모토성 천수각이 마쓰모토=고향의 상징임을 전제로 향리의 역사

    와 체면을 위해 보존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14)

    천수각이 고향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이자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물로 그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주민들에 의해 새로이 복원하는 경우 또한

    생겨났다. 1910년 기후시(岐阜市)에서는 관광협회의 전신인 보승회(保勝會)와 건설업

    조합을 중심으로 천수각을 재건하였다.15) 이들은 나가라(長良)강에 건설된 교각의 폐

    12) 岡本良一, 岩波新書の江戸時代, 大阪城, 岩波書店, 1993, 190~193쪽. 병창공장을 비롯한 군수공장의 역사에 관해서는 三宅宏司, 大阪砲兵工廠の研究, 思文閣出版, 1993 참조하기 바람.

    13) 佐藤滋, 앞의 책, 35쪽.

    14) 나리타 류이치 지음, 한일비교문화세미나 옮김, 고향이라는 이야기-도시공간의 역사학-,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109쪽.

    15) 1539년 전국다이묘인 사이토 도쟌(斎藤道三)에 의해 건설된 기후성은 역사상 이나바성(稲葉城)으로

  • 8 인천학연구 11(2009.8)

    - 14 -

    자재를 활용해 마지막 성주인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이래 약 300년간 긴코산(金華

    山) 정상에 폐허로 버려졌던 옛 성터에 에도시대 양식의 천수각을 재건하였다.

    이상에서처럼 성곽과 천수각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군사시설로서의 실용성과 기능

    성을 상실하고 소멸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하지만 근대도시의 성립과정에서 ‘향리의

    체면’과 ‘지역의 통합’을 위한 상징물로 그 가치와 의의를 재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보

    존과 복원의 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16)

    Ⅲ. 천수각 재건사업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

    도쿄와 교토, 오사카17)는 에도시대 중엽부터 이른바 ‘삼도(三都)’라 불리며 저마다

    독특한 도시문화와 풍습을 형성하였다. 이들 세 도시는 폐번치현 이후 부현 통폐합과

    정에서도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여타 ‘현(縣)’과 구분되는 ‘부(府)’로 편제되었다.

    이후 근대도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쿄는 국내 통치의 거점이자 근대 국

    가의 수도로 기능하기위해 1872년 긴자 대화재 이후 아카렌가(赤煉瓦)거리조성사업,

    76년 도교시구개정계획 등의 도시정비사업의 결과 문명개화의 전범으로 간주되었

    더욱 유명하다. 1564년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세키가하라전투가 있던 1600년까지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히데타다(織田秀忠)를 거쳐 여러 다이묘의 거성으로 이용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성주인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가 서군 편에 섰던 관계로 1601년 성은 폐성으로 버려지고

    천수각과 야구라 등의 건축물을 이웃한 가노성(加納城)으로 이전되었다.

    16) 메이지유신 이후 1995년까지 일본에서는 오사카성 천수각을 모델로 삼아 총 65건의 천수각 재건사업

    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아타미(熱海), 요코테(横手), 오카자키(岡崎), 지바(千葉), 고마키야마(小牧山), 가미오카(神岡)의 6곳은 과거 천수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지었다. 그리

    고 도야마(富山), 나카쓰(中津), 가라쓰(唐津)의 3곳은 천수각에 대한 확실한 사료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강행하였다. 지방자치단체가 건립한 천수각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치밀

    하게 고증하고 복원하기보다 장대하고 화려하게 외관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공유한다. 이렇

    게 재건한 천수각의 대부분은 오사카의 경우와 같이 그 지역의 향토자료관을 두었지만 실제 활용도는

    미미한 편이라고 한다. 이는 천수각이 지역의 과거를 재현하는 역사유적이기보다는 지역의 관광시설

    로 기획된 기념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増田泰良·藤岡洋保, 「戦後の天守閣に込められた意味」, 学術講演梗概集(関東), 社団法人日本建築学会, 2001 참조.

    17) 17세기중엽 전국적인 상품유통망의 정비에 따라 상품생산 및 유통의 거점으로 오사카, 거대소비시장

    으로 에도, 문화와 전통의 중심지로 교토가 부상함에 따라, 이들 세도시를 흔히 ‘삼도’라 칭하며 각자

    의 도시성과 도시문화를 비교하는 출판물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 같은 삼도비교론은 에도시대 중엽

    부터 교토와 오사카, 에도는 저마다 독특한 도시 문화와 풍습을 형성하면서 이른바 ‘삼도’라 불렸다.

    그리고 이들 세 도시의 풍속과 인정, 기질, 문화 등을 비교하는 삼도비교론이 세간에서 많은 인기를

    모았다.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9

    - 15 -

    다.18) 이에 반해 메이지천황의 동천(東遷)으로 옛 도성의 영예를 상실한 교토는 천황

    즉위식과 대상제(大嘗祭)를 (교토의 옛) 황거에서 거행하도록 황실전범에 규정하는

    한편 ‘간무(桓武)천황천도 1100주년기념제’ 등과 같이 천황가의 유서와 역사를 적극적

    활용한 도시진흥책을 마련해 ‘고도(古都)’로서의 재흥을 꾀하였다.19) 한편 메이지유신

    에 따른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전통적인 상업, 유통도시로서의 기능에 심대한 타격

    을 입은 오사카는 조병사(造兵司), 조폐국과 같은 관영공장을 유치하여 근대 상공업

    도시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후 산업화과정에서 면방적업을 중심으로 도시경제를 활

    성화하는 것은 물론 1903년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근대도시에 걸맞은

    기반시설을 구축할 수 있었다.20)

    근대화와 함께 일본 내 산업, 특히나 군수공업의 중심지로 성장한 오사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경제의 호황으로 도시노동자 유입이 늘어나면서 시민안식의 장소

    가 종래 오사카시의 시역으로 불충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1925년 4월 세키시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 히가시나리(東成)·니시나리(西成) 2개 군(郡)을

    합병하는 제2차 시역확장사업을 단행하였다.21) 이로서 인구는 50% 증가한 211만 명

    으로, 면적은 3배 이상 증가한 60여 평방 헥타르로 늘어났다. 그 결과 오사카는 간토

    대지진으로 인구가 급감한 ‘제도(帝都)’ 도쿄를 제치고 명실 공히 일본 제1의 대도시

    로 부상하게 되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大阪毎日新聞社)는 그 해 3월부터 4월까지 “대오사카(大大阪)를 건설해 크게 면목을 일신하게 된 것”을 경축하기 위해 ‘대오사카기념박람회(大

    大阪記念博覧会)’ 행사를 개최하였다. 대오사카기념박람회 행사는 오사카시는 물론, 오사카성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육군 제4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1회장인 덴

    노지(天王寺)공원 이외에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오사카성에 별도의 제2회장을 마련

    하였다. 산업도시 오사카의 기량을 자랑하기 위해 최신 공업제품을 전시하는 ‘본관’과

    ‘별관’, 도시의 역사를 개관하는 ‘도시관’ 등을 비롯해 총 8개의 전시관을 설치하였

    18) E·사이덴스티커 지음, 허호 옮김, 도쿄이야기, 이산, 1997.19) 高木博志, 近代天皇制と古都, 岩波書店, 2006.20) 근대도시 오사카에 관한 연구사 및 도시의 근대화 과정에 관해서는 芝村篤樹, 日本近代都市の成立

    -1920·30年代の大阪-, 松籟社, 1998 참조.21) 原武史, 「民都」大阪對「帝都」東京: 思想としての關西私鐵, 講談社, 1998, 125쪽. 세키시장의 주도 하

    에 이루어진 오사카시 제2차 시역확장사업의 내용과 취지에 대해서는 関一, 「大阪市の諸問題」, 大大阪 1-1, 1925.

  • 10 인천학연구 11(2009.8)

    - 16 -

    풍공관 원경을 담은 그림엽서

    다.22) 이 가운데 박람회장을 찾은 시민들로

    부터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곳은 다름 아

    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자료를 전시

    하는 ‘풍공관(豊公館)’이었다.23)

    덴노지공원에 마련된 여타 전시관들과 달

    리 풍공관은 육군 제4사단이 주둔한 오사카

    성 내 옛 천수각 터에 모모야마(桃山)양식의

    2층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 건물 1층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출품한 도요토미 관련

    물품과 자료를 전시하고, 2층에는 약 22미

    터에 이르는 성곽 자체의 높이를 살려 오사

    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전망대를 설치

    하였다. 그리고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 대형 고층건물과 명승지, 고분까지의

    거리를 적어두어 관람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박람회장을 찾은 전직 총리 기요우라 게이코(清浦奎吾)가 “나는 뭐라 해도 풍공관이 좋다. 덴노지회장도 아름답지만 풍공관의 규모는 정말로 웅대하다. … (중략) …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부흥한 것은 정말로 흥미진진한 계획”이라고24) 자신의 감상을

    피력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풍공관 인기의 비결은 히데요시에 대한 기억을 되살

    리기 위해 석단만 남아있던 옛 천수각 터에 가설로 만든 풍공관 건물 그 자체에 있었

    다. 풍공관 1층에 마련된 전시물들과 2층에 설치된 전망대를 돌아본 관객들은 오사카

    성 건립자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와 기억을 떠올리며 천수각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심지어 도쿄시장과 내·외무대신을 두루 역임했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역시 이곳

    을 방문하고 나서 “오사카의 역사를 기념하기위해 그리고 시민들의 수양을 위해 도요

    22)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는 제5회 권업박람회 이후 30여 년간 박람회가 개최되지 않았던 사정을 고려해,

    신문발간 1만5천호를 자축하고 오사카시의 제2차 시역확장사업을 기념하기위해 ‘대오사카기념박람회’

    를 계획하였다. 박람회의 취지와 경과에 대해서는 大阪毎日新聞社編, 大大阪記念博覧会誌, 大阪毎日新聞社, 1925 참조.

    23) 대오사카기념박람회를 관람한 총 입장객 189만8468명 가운데 풍공관 입장객 수는 69만8386명이었다.

    大阪城天守閣編, 特別展: 大阪城の近代史, 大阪城天守閣特別事業委員会, 2004, 45쪽. 24) 大阪毎日新聞社編, 大大阪記念博覧会誌, 1925, 782쪽.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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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공관 앞에 줄을 늘어선 관객

    토미 축성 당시의 건축구조를 면밀히 연구하

    여 현재의 위치에 풍공관처럼 항구적인 천수

    각을 건조해 이를 박람회나 전람회 등의 회장

    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떨지”를 제안하기까지

    할 정도였다.25) 고토 신페이가 풍공관을 방문

    한 당일 오사카상업회의소에서 세키시장과 환

    담을 나눈 사실에 비추어, 바로 이 자리에서

    천수각 재건에 관한 고토의 견해가 세키에게

    전달되었고 결과적으로 천수각 재건의 직접적

    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

    도 했다.26) 하지만 천수각 재건사업은 단지

    고토나 세키와 같은 시정관료 개인의 기원과

    바람에서라기보다는 오사카 시민 다수의 염원

    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같은

    오사카 시민 다수의 바람과 염원 속에는 조카

    마치(城下町) 오사카의 창건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향수와 인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에도막부를 건립한 다음, 안정적인 권력계승을 위해 1615년 두 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여 히데요

    시의 계승자인 히데요리(秀頼)를 제거하고 그의 거성이었던 오사카성 역시 파괴하였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단절시킨 이후에도 조정에서 수여한 ‘도요쿠니다이

    묘진(豊國大明神)’의 칭호를 금지하고 그를 모신 도요쿠니신사(豊国神社) 또한 파괴하여 도요토미의 존재와 권위마저 부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막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서민들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전국쟁란의

    와중에서 개인의 능력만으로 입신출세를 거듭해 마침내 ‘덴카비토(天下人)’의 지위에

    까지 오른 히데요시의 성공담은 신분 간 이동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에도시대 서민들

    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나 오사카 지역 주민들은 도쿠가와막부 설립 이전

    히데요시의 슬하로 오사카가 누린 옛 영화와 도요토미가의 비운에 대한 동정, 에도막

    25) 위의 책, 1925, 781쪽.

    26) 牧英正, 앞의 논문, 6쪽.

  • 12 인천학연구 11(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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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에 대한 현실정치의 비판 의식 등을 담아 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에 주목한 오사카의 출판업자들은 히데요시의 일생을 출세과정에 따라 삽화 형식으

    로 제작한 에혼타이코기(絵本太閤記)를 판본을 달리해 수차례 간행하였다. 심지어 막부는 히데요시에 대한 서민들의 인기가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반감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 관한 출판물을 금서로 지정할 정도였다.27)

    에도시대 금기시되었던 히데요시의 존재는 메이지유신과 함께 복권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에도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정부는 1868년 윤4월 6일 막부가 파괴했던 옛 도

    요쿠니신사를 오사카성 근처에 재흥하도록 지시하였다. 막부에 의해 신군(神君)으로

    추앙받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종교적 권위를 부정하기 위해 히데요시를 복권시키려

    는 목적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그런데 메이지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생각지 않은 파

    문을 불러일으켰다. 재흥해야할 도요쿠니신사의 위치를 두고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

    이다. 도요쿠니신사가 파괴된 다음, 히데요시의 묘지와 사당은 교토 히가시야마(東山)

    묘법원(妙法院) 내로 이전되지만 오랫동안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관계로 그

    사실마저 망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메이지정부는 오

    사카성이 아닌, 본래 히데요시의 묘지가 안장된 묘법원 내에 도요쿠니신사를 재흥하

    도록 지시를 번복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사카가 반대의사를 표명함과 동시에 교

    토시민 역시 히데요시 신사 유치운동에 나서면서 도요쿠니신사 재흥을 둘러싼 양 도

    시의 치열한 유치경쟁이 벌어졌다. 오사카와 교토는 물론 신정부 관료 사이에도 견해

    가 나뉘는 등, 오랫동안 분규가 계속되지만 1875년 4월 7일 히데요시의 묘지가 위치

    한 교토 시모히가시야마(下東山)에 도요쿠니신사를 조영하는 대신 오사카에는 별사를

    건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28)

    에도시대 중엽부터 저마다 독특한 도시 문화와 풍습을 형성해 이른바 ‘삼도(三都)’

    라 불렸던 도쿄, 교토, 오사카는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에서 도요쿠니신사의 조영뿐만

    아니라 천도에 따른 수도의 제정,29) 국립대학의 설치 등을 둘러싸고 심심치 않게 경

    쟁 관계에 놓였다.30) 이러한 가운데 1928년 11월 쇼와천황의 즉위식을 경축하기위한

    27) 津田三郎, 秀吉英雄伝説の謎-日吉丸から豊太閤へ-, 中央公論社, 1997, 248~55쪽.28) 津田三郎, 위의 책, 260~270쪽.29) 佐々木克, 江戸が東京になった日-明治二年の東京遷都-講談社選書メチエ202, 講談社, 2001.30) 이들 도시 사이의 경쟁관계는 이른바 삼도비교론이란 이름으로 수필가나 평론가들에 의해 좋은 비교

    대상이 되었다. 17세기중엽 전국적인 상품유통망의 정비에 따라 상품생산 및 유통의 거점으로 오사

    카, 거대소비시장으로 에도, 문화와 전통의 중심지로 교토가 부상함에 따라, 이들 세도시를 ‘삼도’라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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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大典)기념사업은 저마다 도시의 기량과 위용을 과시하시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교토는 오카자키공원에서 ‘쇼와대례대박람회(昭和大禮大博覧会)’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예전부터 오사카에는 시민에게도 외지인에게도 보여줄 것이 없어, 오사카를

    상징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온 세키시장은 “각 도시가 대전기념사업에 관해

    경쟁하듯이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는 상황”에서31) ‘오사카성 공원화 및 천수각 재건

    사업’을 시민에게 제안하였다. 시정당국의 계획에 따르면 천수각 재건사업은 “(고성이

    가진) 사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역사적 교화의 효과가 막대한 것은 물론이고 장중한

    위용은 실로 당당하게 도시의 일대미관”을 이루는 동시에 “오사카시 중흥의 아버지이

    자 일세의 영웅인 도요토미의 장대한 계획을 오랫동안 기리기위한” 것이었다.

    일반 시민과 시의원들은 시정당국의 제안에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보여주었다.

    1928년 2월 오사카 시의회 역시 천수각 재건에 관한 세키시장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하지만 사업을 실행하려면 넘어야할 장애물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

    시 오사카성 내에는 육군 제4사단사령부 소관시설로 사단 사령부와 창고 등의 군용시

    설이 위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황이 계속되면서 시 예산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에 세키시장은 천수각 재건과 오사카성 공원화 사업을 성사

    시키기 위해 육군 수뇌부와의 교섭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그 해 3월 31일 제4사단 경

    리부장으로부터 오사카성 내 사단사령부 부지의 일부를 공원으로 개방하는 대신 사령

    부 청사의 신축비용 130만엔(円)을 오사카시가 전액 부담하라는 요구를 전달받는다.

    이후 오사카시와 제4사단 사이에 수차례 교섭의 결과, 최종적으로 육군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오사카성을 포함한 주변 용지의 용도를 변경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오사카시는 1928년 7월 13일 대전기념사업으로 오사카성 공원화와 천수각 재건

    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경비 등의 사항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7월

    칭하며 각자의 도시성과 도시문화를 비교하는 출판물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막말시기에 정형화된 삼

    도비교론은 교토, 오사카에 비해 신흥도시였던 에도의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인 열등감의 발로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에도=도쿄가 제도로 위치 지워짐에 따라 도시의 비교대상은

    일본 내 국내 도시가 아닌 구미 도시에 구해졌지만 1920년대 접어들면서 오사카를 중심으로 또다시

    삼도비교론이 활황을 이루게 된다. 당시 오사카에서 출판된 도시비교론 저작들은 상대적으로 경제력

    이 뒤처진 오사카를 고무하는 한편 시구개정(도시계획)에 의한 도시발전을 기대하는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橋爪紳也, モダン都市の誕生-大阪の街·東京の街-, 吉川弘文館, 2003, 168~172쪽 참조.

    31)《大阪毎日新聞》1928년 7월 14일자 사설. 이하 신문기사는《大阪毎日新聞》에서 참조, 인용함을 미리 밝혀둔다. 앞으로《大阪毎日新聞》의 기사는 ‘OO년 O월 O일자’로 표기하도록 한다.

  • 14 인천학연구 11(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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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자《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에 따르면 총 경비 150만엔 가운데 천수각 재건 비용으로 42만엔, 사령부건축 신축비용으로 80만엔을 사용하며 여기에 필요

    한 자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32)

    앞서 살펴보았듯이 시정당국은 제4사단 측이 요구한 사령부 신축비용 130만엔을

    부담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80만엔으로 발표한 것은 사업경비 대부분

    이 사령부건물 신축 비용에 투입될 경우 예상되는 시민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오사카시는 7월 19일 제4사단 사령부에 제출한 사업서 말미에 “시 부담

    액은 80만엔으로 개산(槪算)하여 이미 시 의회에 제안해 진행 중인 사정을 이해해주

    시기 바랍니다. 다만 실행과정에서는 당초 요구했던 소요액을 부담해 귀측의 건축을

    차질 없이 수행”할 것을 이면으로 약속하고 시보좌관인 다키야마 요이치(滝山良一)의 서명을 첨부했다.33) 이후 1930년 5월 6일 지신제와 함께 착공된 천수각 재건공사는

    이듬해인 1931년 4월 24일 길일(吉日)을 맞이해 상량식을 거행하고 마침내 11월 7일

    준공식을 맞이하였다.

    Ⅳ. ‘대오사카’의 새로운 상징과 기념의 욕망

    세키시장이 천수각 재건 사업을 공포하자 많은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하지만 모든 시민들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1929년 2월 8일 오사카 시

    의회에서 시의원인 가와니시 에이노스케(川西栄之助)는 ‘대례기념사업실시에 관한 건’에 대해

    가까운 시일 내 대례기념사업을 착수한다는 것은 기쁜 일임에 분명하나 사단사령부 건축비

    로 80만엔을 계상하였다. 시민들의 참된 정성의 결과로 모은 150만엔의 절반 이상을 사단사

    령부 건축에 사용하는 것에 일부 시민들은 심히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것이 기부

    금을 모으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34)

    32)《大阪毎日新聞》1928년 7월 14일자.33) 牧英正, 앞의 논문, 7~25쪽.

    34) 1929년 2월 8일 오사카 시의회 속기록.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5

    - 21 -

    고 하여 세키시장을 힐난하였다. 가와니시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많은 시민

    들은 자신의 기부금이 본래의 취지와 달리 사실상 육군 제4사단 사령부 건축비용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례기념사업’에 대한 반대움직임은 세

    키시장의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세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1928년 10월 26

    일 사회민중당 소속 시의원인 만다 키요미(万田清臣)를 비롯해 수명의 의원이 찾아와 “기념사업에 반대의견서를 제출”한 사실을 적고 있다.35) 하지만 반대의견서의 구체적

    인 내용을 적고 있지 않아 이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기념사업을 반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마키 히데마사가 발굴해 소개한 모년 10월 23일자 소인의 엽서는 천수각 재

    건 당시 시중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북구청(北區

    役所) 구장(區長)’ 앞으로 엽서를 보낸 무명씨는

    오사카 사람 중에는 천수각 재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이는 비국민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전기념사업은 국가적인데 자기 동네에 시료원(施療院)을 설치해달

    라는 요청은 비국민의 목소리인 것이다. 널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반드시 (천수각) 재건을

    부탁하는 바이다. 그날 벌어 먹고사는 나 같은 이도 응분의 기부금을 내려고 매일같이 노동

    에 종사하고 있다

    고36) 하여 천수각 재건에 반대하는 이를 ‘비국민’으로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가 비판

    한 ‘비국민의 목소리’를 통해 오히려 불황의 와중에 오사카시민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대전기념을 위해 계획된 천수각 재건사업이 아니라 ‘시료원(施療院)’ 같은 사회

    복지시설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7월 13일 시당국은 오사카성공원과 천수각 재건사업이 시의회의 승인을 얻

    자 이를 언론에 정식으로 공표하였다. 시당국의 계획에 따르면 천수각은 “왕고의 기

    록을 참작하되 여기에 근대식 건축법을 더하여 구조는 철근콘크리트로 한다. 그리고

    석단 중앙부 바닥을 견고하게 다지는 기초공사를 실시해 내진구조를 갖추고 중앙부에

    는 계단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편의를 꾀하며 최상층에는 전망대를 두고 그 외 각 층에는 향토사료진열 등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37)

    35) 関一研究会編集·校訂, 関一日記: 大正·昭和初期の大阪市政, 東京大学出版会, 1986, 723쪽.36) 牧英正, 앞의 논문, 37쪽에서 자료인용.

  • 16 인천학연구 11(2009.8)

    - 22 -

    공사 중인 천수각

    시당국의 재건 계획이 공표되자 이번에는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복원양식과 기능, 구조

    등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먼저

    언론에서는 목재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천수

    각을 재흥한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관심과 놀

    라움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완성 후 석단의

    높이를 포함해 오사카에서 최고층을 기록할

    근대식 건축물이 “겨울이면 특히나 서풍이 강

    하게 부는” 풍토에 적합한 것인지 의구심을

    표시하며, “강한 천수각도 바람에 흔들리는”

    구조로 짓기를 주문하였다. 또한 향토사료 진

    열장으로 사용하게 될 경우 전시 공간의 편의

    성을 우선시하여 기둥과 총구, 창문 등의 세밀한 복원과정이 소략하게 되지 않을지를

    걱정하였다.38)

    복원 양식뿐만 아니라 천수각재건사업의 의의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다. 교토

    대학 교수로서 실증주의 역사학으로 유명한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는39) 1928년

    12월 오사카 중앙공회당에서 개최된 ‘대전봉축기념강연회’에서 천수각재건사업이 쇼와

    천황의 즉위식 기념행사로 준비된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의 대중강연을 벌였다. 그는

    오사카와 천황가의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 오사카시의 역사적 시원과 기원을 히데요시

    의 오사카성 축성에 두지 않고, 진무천황의 동정(東征) 설화에서 구하였다. 이에 따라

    오사카의 역사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오진(應神)천황의 오스미궁(大隅宮), 인덕(仁德)천황의 나니와다카쓰궁(難波高津宮), 고도쿠(孝德)천황의 나가라노도요사키

    궁(長柄豊碕宮)이 터를 잡았던 “황도(皇都)가 있던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오사카성은 “인덕(仁德)천황의 나니와다카쓰궁과 고도쿠(孝德)천황의 나가

    라노도요사키궁이 위치했던 곳에 실로 히데요시의 오사카성이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었다.40) 천수각 재건사업을 추동시킨 원동력은 도요토미에 대한

    37)《大阪毎日新聞》1928년 7월 13일자. 38)《大阪毎日新聞》1929년 1월 6일자.39) 미우라 히로유키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永原慶二, 20世紀日本の歴史学, 吉川弘文館, 2003, 76~78쪽. 40) 三浦周行, 「難波津と皇室」, 大大阪 5-2, 1929, 14쪽.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7

    - 23 -

    모모양식의 샤치호코(왼쪽)와 새로

    개주한 샤치호코의 모습(오른쪽)

    오사카시민들의 대중적인 인기였지만 미우라에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업의 본래 취

    지였다. 다시 말해, 천수각 재건사업은 쇼와천황의 즉위식을 기념하기위한 ‘대례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상, 새로운 천수각은 이를 기념하는 반영구적인 건축물이

    자 황실과 오사카 사이의 깊은 유대와 존경을 담기위한 저장고로서 그 의의가 인정될

    뿐이었다.41)

    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번에는 천수각

    지붕을 장식할 샤치호코(鯱)42)의 양식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덴노지(天王寺)

    사범교유이자 오사카사적회(大阪史蹟会) 회장인 사토(佐藤)를 비롯해 시건축과

    직원인 후루카와(古川) 등을 포함한 일

    부 고고연구자들은 주조장인인 이마무

    라(今村) 형제가 사비를 들여 제작해 오

    사카시에 기증한 샤치호코가 도요토미

    정권 당시의 미술양식인 모모야마(桃山)

    식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다시 주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오사카사적회 임원진들로 활

    동하던 이들은 1931년 8월 9일 오전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개주(改鑄)운동’을 펼칠 뜻을 표명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이마무라 형제가 제작한 샤

    41) 천수각재건 이후 도요토미 관련 유물전시와 관련해 조사위원으로 임명·활동했던 우오즈미 소고로(魚

    澄惣五郞) 역시 1929년 5월 잡지 大大阪(5-5)의 게재물인 「皇室と大阪 その二三について」에서 미우라와 마찬가지로 “오사카 지방이 고대 제도(帝都)”였던 사실을 지적하며 오사카의 시원와 역사를 황실

    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였다. 그의 논고는 앞서 이루어진 미우라의 강연을 보강하기위한 것으로 생

    각된다. 당시까지 미우라나 우오즈미 등의 역사학자들은 어디까지나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진무(神武)천황의 동정(東征) 기사 등에 기초해 오사카의 시원을 고대 제도로부터 구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주사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국가주의가 본격화됨에 따

    라 오사카는 물론 오사카 성지(城址)의 역사적 시원은 “태고 이래 경승의 땅으로 일찍이 천황이 머물

    렀던 곳”으로 고착되고 만다(市民局振興課編, 皇室と大阪, 大阪市役所, 1944). 오사카, 오사카성지와 천황가의 관계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인식변화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42) 샤치호코(鯱, しゃちほこ)란 몸은 물고기이고, 머리는 호랑이, 꼬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고, 배와 등에는 날카로운 돌기가 나와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물을 뿜어 불을 끈다는

    의미에서 기와나, 나무, 돌 등으로 만들어 지붕 끝에 장식했다. 그중에서도 오사카성, 나고야성 등에

    는 금박을 입인 긴샤치(金鯱, 긴코, 긴노샤치호코)를 두어 세인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 18 인천학연구 11(2009.8)

    - 24 -

    치호코는 첫째, 모모야마식이 아닌 에도식이 가미된 형태이며, 둘째, 목이 길고 밑바

    닥이 협소하여 위엄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샤치호코 형상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어

    버려 불안정하며, 셋째, 안면에 머리카락이 없어 샤치호코의 날카롭고 용맹함(銳猛)이

    훼손되었다는 것이다.43) 이처럼 샤치호코의 형상을 두고 오사카사적회와 시건축과 사

    이에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시당국은 이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았다.44) 그러자 이

    들은 여러 방면의 지지를 얻어 자신들의 주장을 영구히 보존할 요량으로 도쿄의 권위

    있는 조각가에 의뢰해 일척(尺)의 높이에 청동으로 도금한 샤치호코를 제작해 주요

    신사와 사원에 봉헌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오전 10시 도요토미를 모

    신 오사카 나카노시마(中の島) 도요쿠니신사(豊国神社)에서 첫 번째 봉헌식을 거행하였다.45) 사실 히데요시 축성 당시의 오사카성에 관한 전경과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

    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오사카성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계획 자체가 무리한

    시도였을지 모른다.46) 이러한 점에서 샤치호코의 형상에 관한 논쟁은 천수각 재건사

    업이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 아닌 ‘재건’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47)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한편에서는 천수각을 흥행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완공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1931년 8월 18일 오사카 시내의 일곱 유곽

    에서는 천수각 낙성을 기념하여 “불경기 극복[退散]을 위해 다가올 11월 3일의 메이지

    절(明治節)을 전후로 미기(美妓) 3천명을 선별해 대대적으로 축하 퍼레이드를 개최”한

    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부인교풍회’(婦人矯風會)의 하야시우다(林歌), 일본

    43)《大阪毎日新聞》1931년 8월 9일자.44)《大阪毎日新聞》1931년 11월 5일자.45)《大阪毎日新聞》1931년 10월 5일자. 오사카사적회에서는 샤치호코를 제작해 주요 사원에 봉헌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사찬본(大阪史蹟会, 復興大坂城天守閣の表現に対する一希望, 大阪史蹟会, 1931; 佐藤佐·古川重春, 復興大坂城天守閣鯱鉾に関する経過報告並に絶対反対声明書, 第2冊, 大阪史蹟会, 1931)을 제작해 간행하기까지 했다.

    46) 에도시대 후쿠오카번(福岡藩)의 영주인 구로다(黒田)가문에서 대대로 소장해온 ‘오사카 여름 전투 병풍도(大阪夏の陣図屏風)’는 모모야마 양식으로 축성된 오사카성의 전경을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근세 초기 오사카의 풍경과 풍속을 담은 회화 작품에 관해서는 神山登, 「近世初期大阪の風景·風俗図-特集大阪城四〇〇年-」, 大阪春秋 34, 大阪春秋社, 1982 참조하기 바람.

    47)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콘크리트와 같은 근대적 재료로 옛 건축물을 다시 짓는 것을 과

    연 복원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문에서는 지진과 강한 바람에 견딜 수 있도

    록 콘크리트 구조물을 짓고 여기서 황금색 도료를 칠한 천수각은 향토사료전람관으로 사용하기 위한

    정도라면 괜찮지만 이는 사실(史實)에 근거한 건축이 아니며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건축

    가들의 고민을 소개하였다.《大阪毎日新聞》1929년 1월 6일자.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19

    - 25 -

    천수각 준공 기념 특집호 광고기사

    구세군 게이한(京阪)지역 연대장인 소에다(添田) 등은 이처럼 저속한 축하행사가 사

    회풍교 상 심대한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들은 17

    일 아침 시청에서 관계자를 만나 반대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미기들의 축하 퍼레이드

    를 둘러싼 소동이 벌어졌다.48)

    한편 백화점과 일반 상점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천수각 준공을 축하하는 다양

    한 기념행사가 계획되었다. 백

    화점 다카시마야(高島屋)에서는

    도요토미를 경축하기위한 다이

    가쿠상(太閣像) 인형전을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개최하였다.

    또 다른 백화점 마쓰자카야(松

    坂屋)에서는 11월 7일부터 13

    일까지 영업시간을 오후 9시까지 대폭 연장하는 것은 물론 전 점포에서 천수각 준공

    기념 복주머니행사를 진행하였다.《오사카마이니치신문》천수각 준공기념 특집호에서

    는 다이코기(太閤記)의 형식을 빌려 도요토미의 일생을 연대기 순으로 배치한 총 13

    편의 특집 광고를 마련해 게재하였다.

    천수각 재건사업이 이윽고 막바지에 다다르자 오사카시는 그해 11월 7일 오사카성

    공원 및 천수각 준공식을 ‘대례기념사업준공식’이란 이름으로 성대하게 거행할 것을

    공표하였다. 11월 7일로 기념일을 잡은 것은 쇼와천황의 즉위식이 1928년(昭和3) 바

    로 이날에 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수각 준공을 앞두고 시민들 사이에서 성대하고

    사치스런 행사와 함께 떠들썩하고 소란스런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치안당국은 사

    회 불온세력이 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11월 7·8일 오사카 시중에서 개최될 예정

    인 행사에 대해 관계자협의를 갖고 무자행렬, 제등행렬 이외의 가장행렬과 개인적인

    행사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소동을 일으킬 수 있는 가마나 큰 북의 사용 역시 불허할

    뜻을 공표하였다.49)

    한편 오사카시는 대례기념사업준공식 당일 육군 및 오사카부 의회 관계자, 신문기

    48)《大阪毎日新聞》1931년 8월 18일자. 49)《大阪毎日新聞》1931년 10월 24일자.

  • 20 인천학연구 11(2009.8)

    - 26 -

    자, 긴키(近畿)지역 내 자치단체장 및 시내 학교장 등 약 천 2백 명의 인사를 공식적

    으로 초청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준공식 다음날인 11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 동안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대례기념사업의 기부자와 시, 구장촉탁위원 등을 포

    함해 약 8만5천여 명을 초대하여 이들의 관람에 편의를 도모하였다. 또한 축제분위기

    를 돋우기 위해 준공식을 전후한 6일 저녁부터 9일까지 4일간 꽃과 전구로 장식한

    전차를 운행(실제로는 6일부터 12일까지 연장)하고 6일 저녁부터 15일까지 천수각 주

    변에는 야간 조명을 설치해 일류미네이션 행사를 벌이도록 계획하였다.50)

    하지만 준공식 행사는 정작 시정 당국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공교롭게 행사

    당일인 11월 7일은 쇼와천황의 즉위식일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혁명 14주년 기념일

    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오사카 부내에 숨어있는 극열분자들이 불온행동을 책모”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침 “오사카성 천수각준공식으로 시민들이 들떠 있는 상황을

    이용해 같은 날 저녁 혼잡한 시민들 속에 잠입해 오사카성공원에 집합하여 제4사단사

    령부와 오사카부청 경찰부를 습격하는 한편 별동대가 천수각을 점령해 기세를 높이려

    는” 비밀 계획이 경찰당국에 의해 적발되었다. 이에 오다케(大竹) 경찰부장은 오전 11

    시 시내 4곳의 경찰서에 명령을 내려 특고과(特高課)에 경계령을 내리고 각종 축하행

    렬 역시 엄중히 감시할 것을 지시하였다.51)

    천수각 준공 당일이 되자 시민들의 축하 분위기는 정점에 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시민들의 축하 인파는 저녁이 되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언론 추산 10만여 명이 넘는

    인파가 오사카성 정문인 오테문(大手門) 앞에서 화려한 천수각의 일류미네이션을 감

    상하기위해 저녁 늦게까지 군집해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무엇보다 “좌익극렬분자”의

    선동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좌익세력들은 경찰 특고과(特高課)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8일 오후 8시 성곽 주변에 위치한 성동(城東)연

    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약 6~70여명의 인사들이 집합했지만 경계중인 경관대가 즉

    각 현장에서 덤벼들어 난투극 끝에 집회는 해산되고 만다. 그리고 참가 인사 가운데

    미싱공인 한봉삼(22) 외 2명이 검거되어 나카본서(中本署)로 이송되었다.52)

    경찰의 엄중한 탄압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사회 불온세력’들은 천수각에 모

    여든 수많은 군중들을 상대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를 표명하려는 시도를 중단

    50)《大阪毎日新聞》1931년 10월 24일자.51)《大阪毎日新聞》1931년 11월 8일자.52)《大阪毎日新聞》1931년 11월 8일자.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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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않았다. 천수각이 일반에게 공개된 지 4일이 지난 19일 정오 이토법랑공장(伊藤

    琺瑯工場) 쟁의단은 밀려드는 관람객에 뒤섞여 천수각에 올라, 오사카부청을 면한 창

    으로 “친애하는 오사카시민에게 고한다. 이토법랑 쟁의에서 승리하자”는 문구를 적은

    길이 2척의 깃발을 늘어뜨렸다.53) 이들은 그 자리에서 경찰관에 의해 모두 연행되었

    다. 하지만 이들의 데모행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삼일 후인 22일 오후 2시 데

    모단은 또다시 천수각에 올라 “전 오사카 무산시민의 압력으로 이토법랑 쟁의단의 승

    리를 쟁취하자.”라는 내용의 백기를 내걸었다.54)

    Ⅴ. ‘충군애시(忠君愛市)’의 표상

    세키시장은 제2차 시역확장사업으로 급속히 팽창한 ‘대오사카’에 시민 복지를 위해

    군사령부가 주둔한 오사카성 일부를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개방하고 옛 천수각

    건물을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시정당국의 주도 하에 추진된 ‘재건 천수각’은

    오사카의 지층 아래 묻혀있던 다층적인 기억과 역사를 히데요시와 오사카성이라는 단

    일한 공간으로 수렴하여 “장차 번성해나갈 대오사카의 두상에 빛나는 광채를 발”하는

    새로운 상징물로 기대되었다.55) 하지만 재건 천수각을 ‘시민들의 애향정신’ 혹은 ‘남

    다른 자치정신’의 상징물로 표상하려는 시정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천수각에 대

    한 시민들의 기념의 욕구와 열망은 결코 획일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은 천수각

    을 불황 타개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 정치이념과 쟁의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점거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의 개전 이후 국가주의의 강화 속에서 1932년 11월에 이루

    어진 쇼와천황의 오사카 방문은 오사카성 천수각을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 즉

    ‘충군애시(忠君愛市)’의 상징물로 재배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1월 10일부터 17일까지 8일간에 걸친 쇼와천황의 오사카 방문은 육군의 특별대연습

    통감을 주된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진무(神武)천황릉과 메이지천황릉 참배

    53)《大阪毎日新聞》1931년 11월 20일자.54)《大阪毎日新聞》1931년 11월 23일자.55) 1928년 8월 세키시장은 시민들의 참여와 기부를 독려하기위해 기부신청서를 하단에 첨부한 형태로 「大

    阪城天守閣復興趣意書」를 발간하였다. 세키시장의 「大阪城天守閣復興趣意書」는 大阪城天守閣編, 大阪城の近代史, 大阪城天守閣特別事業委員会, 2004 에서 참조.

  • 22 인천학연구 11(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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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고(접수)일 : 2009. 06. 30 심사(수정)일 : 2009. 07. 21 게재확정일 : 2009. 07. 24

    주제어 : 도시 정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사카, 오사카성, 천수각

    를 비롯해 오사카 시내를 시찰하는 것 역시 천황의 지방순행이 가진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이러한 점에서 오사카 순행의 대미를 장식한 행사는 다름 아닌 개관 1주년

    을 맞이한 오사카성 천수각 방문이었다.

    일반에게 시민공원으로 개방된 오사카성은 11월 16일 천황의 방문을 앞두고 시정

    당국자와 보도진을 제외한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에 따라 천황 방문

    을 환영하고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오사카성을 찾아온 이들은 인근 성동

    연병장으로 몰려들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만의 환영인파가 천황 방문 한 시간

    전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56) 천수각 이곳저곳을 안내하던 세키시장은 ‘오

    사카시가 대전기념사업으로 천수각 재건사업을 시작하였고 시민들의 정성과 기부로

    완성’된 사실을 천황에게 보고하였다.57) 세키의 축사에서 알 수 있듯이 당초 쇼와천

    황의 즉위를 축하하기위한 대전기념사업으로 기획되었던 천수각 재건사업은 천황의

    오사카 방문과 천수각 등림 행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쇼와천황의 천수각 등림은 1928년 세키시장의 제언으로 시작된 천수각 재건사업을

    최종적으로 종결짓는 공식적인 행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오사카시민들의 인기와 숭경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애향

    정신’을 담아두기 위한 기억 공간은 만주사변 개전 이후 쇼와천황의 방문을 계기로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기위한 반영구적인 기념물이자 황실과 오사카 사이의 깊은 유대

    와 존경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제 그 의의를 달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56)《大阪毎日新聞》1932년 11월 17일자.57) 関一, 「輝く天守閣の復興と大阪城の公園化 特集, 関市長式辭」, 大大阪 7-12, 1931, 7쪽.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23

    - 29 -

    ▮국내문헌E·사이덴스티커 지음, 허호 옮김, 도쿄이야기, 이산, 1997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 외 옮김,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교출판부, 2003나리타 류이치 지음, 한일비교문화세미나 옮김, 고향이라는 이야기-도시공간의 역사학-, 동국대

    학교출판부, 2007

    ▮국외문헌- 자료

    《大阪毎日新聞》1928년 1월~1931년 11월関一研究会編集·校訂, 関一日記: 大正·昭和初期の大阪市政, 東京大学出版会, 1986大阪都市協會, 大大阪 [CD-ROM版]1卷1號(1925년 12월)~20巻1号 (1944년 1월), 思文閣出版, 1996

    - 논문

    関一, 「大阪市の諸問題」, 大大阪 1-1, 1925関一, 「輝く天守閣の復興と大阪城の公園化 特集, 関市長式辭」, 大大阪 7-12, 1931 神山登, 「近世初期大阪の風景·風俗図-特集大阪城四〇〇年-」, 大阪春秋 34, 大阪春秋社, 1982 小島道裕, 「戰國期城下町の構造」, 日本史研究 257, 1984原口虎雄, 「薩摩藩外城制度の成立と元和の一國一城令-薩摩藩外城制度の研究」, 法制史研究 36, 1986牧英正, 「昭和の大阪城天守閣築造」, 大阪市公文書館研究紀要 5, 1993小島道裕, 「織豊期の都市と都市遺構」, 國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8, 1995北川央, 「大阪城天守閣-復興から現在にいたるまで-」, 歷史科學 157, 1999増田泰良·藤岡洋保, 「戰後の天守閣に込められた意味」, 学術講演梗概集(関東), 社団法人日

    本建築学会, 2001. 宮本雅明, 「象徵性と公共性の都市史」 (鈴木博志 外編, シリーズ都市·建築·歴史 5 近世都市の成

    立, 東京大學出版會, 2005)酒井一光, 「大坂城天守閣復興と城内の聖域化-「大大阪」シンボルの誕生-」 (橋爪節也編著, 大大阪

    イメージ‐増殖するマンモス/モダン都市の幻影, 創元社, 2007)

    - 단행본

    大阪毎日新聞社編, 大大阪記念博覧会誌, 1925市民局振興課編, 皇室と大阪, 大阪市役所, 1944岡本良一, 岩波新書の江戸時代: 大阪城, 岩波書店, 1993三宅宏司, 大阪砲兵工廠の研究, 思文閣出版, 1993

  • 24 인천학연구 11(2009.8)

    - 30 -

    津田三郎, 秀吉英雄伝説の謎-日吉丸から豊太閤へ-, 中央公論社, 1997原武史, 「民都」大阪對「帝都」東京: 思想としての關西私鐵, 講談社, 1998佐々木克, 江戸が東京になった日-明治二年の東京遷都- 講談社選書メチエ202, 講談社, 2001芝村篤樹, 都市の近代·大阪の20世紀, 思文閣出版, 1999; 千田嘉博·小島道裕編, 天下統一と城, 塙

    書房, 2002

    橋爪紳也, モダン都市の誕生-大阪の街·東京の街-, 吉川弘文館, 2003大阪城天守閣編, 特別展: 大阪城の近代史, 大阪城天守閣特別事業委員会, 2004市立長浜城歴史博物館編, 神になった秀吉ー秀吉人気の秘密を探るー, 市立長浜城歴史博物, 2004Hanes, Jeffrey E著, 宮本憲一監訳, 主體としての都市: 關一と近代大阪の再構築, 勁草書房, 2007佐賀朝, 近代大阪の都市社會構造, 日本經濟評論社, 2007

  • 근대도시 오사카의 상징물과 기억공간의 형성 ▮ 박진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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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mbol of Modern Osaka and Formation of Place of Memory

    - Centered on Tenshukaku reconstruction project of Osaka Castle(1928~1931) -

    Park, Jin-han

    This paper discusses the formation of osaka's city identity through the

    Tenshukaku reconstruction project of Osaka Castle. Osaka rapidly grew after

    the second expand project, and Mayor Seki championed public welfare pro-

    grams in this Dai-Osaka by opening public park in part of Osaka Castle, as

    well as building Tenshukaku. The goal of the reconstruction of Tenshukaku

    included: restoration of memory of Toyotomi Hideyoshi, the founder of

    Osaka, and solidification of city identity by enhancing Osakan's devotion to

    hometown.

    Despite the resolute purpose of city government, people of Osaka re-

    sponded to the project in diverse ways. Some used the Tenshukaku plan as a

    propaganda method to find a way out of depression. Others saw this as an

    opportunity for political or ideological struggle. Therefore, in spite of the city

    government's effort to make Tenshukaku as a representation of "allegiance to

    country and love to city(忠君愛市)", it could not oppress citizen's various

    demands.

    However, the meaning of Tenshukaku evolved still again after the break of

    Manchu Incident in 1931. Since the Showa Tenno's visit that year, Osaka

    Tenshukaku was no longer a place of remembrance and veneration for

    Toyotomi Hideyoshi. Rather, it became a memorial for Tenno coronation and

  • 26 인천학연구 11(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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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 Words : City Identity, Toyotomi Hideyoshi, Osaka, Osaka Castle, Tenshukaku

    served as a storage of bonds between imperial family and Osa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