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차로쿠 禪茶錄 해제cmsorgan.wku.ac.kr/kottri/wp-content/uploads/sites/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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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차로쿠 ( 禪茶錄 ) 해제 1. 젠차로쿠(禪茶錄) 저술 소개 및 저작 연대 일본인들은 차노유(茶の湯)를 하나의 예술로서 간주하 는데 사호(作法)’를 차노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최고 의 전통적 종합예술로 여기기도 한다. 1) 또한 선차(禪茶)진차(眞茶)의 도()이며, 차노유의 필요성과 방향 그 자체 이므로, 선차의 사상은 진차의 사상이며 동시에 진차의 철 학이라고도 한다. 2) 따라서 일본다도는 그 전통적인 사호 (作法) 행위의 근저에 있는 정신, 즉 선()사상을 깨우치 지 않고서는 진정한 차사(茶事)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젠차로쿠(禪茶錄)는 일본 다도(茶の湯)사상을 대표 하는 다서 중의 하나이다 . 역주한 젠차로쿠 의 원문은 도고전전집 3) 에 실린 내용을 번역의 주 교재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원문의 구성은 소주제에 따른 일련번호가 정렬되 어있지 않으나 편의상 아래와 같이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정리하였다. 젠차로쿠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1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차사(茶事)는 선도(禪道)가 으뜸() 차사(茶事)는 수행(修行) 다의(茶意) 선다기(禪茶器) 와비() 차사(茶事)의 변화(變化) 스키(數奇) 로지(露地) 片野 체용(體用) 무빈주(無賓主)의 차사(茶事) 젠차로쿠()는 내용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차젠 도이치미(同一味)라는 책을 보완 편집하여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차젠도이치미소탄이쇼 (宗旦遺書), 차젠도이치미(同一味)라고도 하는데 4) 일각에서는 차젠도이치미를 가리켜 일명 젠차로쿠고도 한다. 그러나 차젠도이치미는 소탄(宗旦)의 저서라 고 하기는 어렵다. 5) 센노 리큐 (千利休)의 손자인 센소탄 (千宗旦)이 남긴 젠도이치미 내용은 그 전문이 다이쇼(大正) 14(1925) 2 월호 차도겟포(茶道月報)에 발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사(茶事)는 선도(禪道)가 으뜸() 차사(茶事)는 수행(修行) 다의(茶意) 선다기(禪茶器) 로지(露地) 차젠도이치미 본문의 전체 내용 5장은 젠차로쿠 10 장 중 각각 1,2,3,4,8장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있 . 이로 인하여 젠차로쿠의 저자가 기존의 차젠도이치 5장에 본인 저술의 5장을 덧붙여 편집하여 젠차로 을 지었다고 보는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일각에서 젠차로쿠가 먼저 지어졌고, 그것을 5장으로 편집하여 만들면서 선차에 명성이 있었던 소탄(宗旦)의 이름을 차명 하여 차젠도이치미을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6) 젠차로쿠 는 자쿠안 소다쿠 (寂庵宗澤)가 문정 11(1828)음력 2월에 발행한 저작물이다. 이 책은 니혼바시(日本橋) 의 큰 서적상인 스하라야 모헤에(須原屋茂兵衛)에서 간행 되었다 . 7) 소탄 (宗旦)1658년에 죽었고 , 소탄의 유서로 1) 千玄室, 茶道の精神, 중앙대학교 박사논문, 2008, p.291.:임찬수조용란, 茶道敎論白首詠에 나타난 다도정신 연구, 일본문화학보 제45, 2010, p.329. 2) 池田豊人, 禪茶の思想-禪茶錄をめぐって, 印度學佛, vol.35, No.2, 印度學佛, 1987. p.317. 3) 千宗室 監修, 茶道古典全集 10, 淡交社, 1962.: 茶道古典全集에는 다도의 기본적 문헌이 망라되어있으며, 1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본 역주는 茶道古典全集 10권에 수록된 禪茶錄 원문을 주 번역교재로 채택하였다. 또한 본문을 역주하면서 주 번역 교재의 이외에도, 寂庵宗 擇 著, 片野慈啓 , 禪と諸道-録」 Vol.3539, 人間出版部, 2013; 寂庵宗澤 著, 吉野翻訳, 現代語禪茶錄, 知泉書館, 2010; 三枝博音 著, 日本哲學全書 11, 第一書房, 1937. 등에 실린 다른 판본의 원문을 참조하여 비교분석 역주하였다. 4) 久松, わびの茶道, , 1987, p.29. 5) 桑田忠親, 茶道の歷史, 講談社, 1998, pp.163-164. 6) 千宗室 監修, 西田直二郎⋅久松神田喜一監修, 茶道古典全集 10, 淡交社, 1962. p.314. 한국예다학 창간호 pp.8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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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젠차로쿠(禪茶錄) 해제

    1. 젠차로쿠(禪茶錄) 저술 소개 및 저작 연대일본인들은 차노유(茶の湯)를 하나의 예술로서 간주하

    는데 ‘사호(作法)’를 차노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최고의 전통적 종합예술로 여기기도 한다.1) 또한 선차(禪茶)는 진차(眞茶)의 도(道)이며, 차노유의 필요성과 방향 그 자체이므로, 선차의 사상은 진차의 사상이며 동시에 진차의 철학이라고도 한다.2) 따라서 일본다도는 그 전통적인 사호(作法) 행위의 근저에 있는 정신, 즉 선(禪)사상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차사(茶事)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젠차로쿠(禪茶錄)는 일본 다도(茶の湯)사상을 대표하는 다서 중의 하나이다. 역주한 젠차로쿠의 원문은 다도고전전집3)에 실린 내용을 번역의 주 교재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원문의 구성은 소주제에 따른 일련번호가 정렬되어있지 않으나 편의상 아래와 같이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정리하였다. 젠차로쿠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1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⓵ 차사(茶事)는 선도(禪道)가 으뜸(宗)⓶ 차사(茶事)는 수행(修行)⓷ 다의(茶意)⓸ 선다기(禪茶器)⓹ 와비(侘)⓺ 차사(茶事)의 변화(變化)⓻ 스키(數奇)⓼ 로지(露地) 片野⓽ 체용(體用)⓾ 무빈주(無賓主)의 차사(茶事)

    젠차로쿠(禅茶録)는 내용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차젠도이치미(茶禅同一味)라는 책을 보완 편집하여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차젠도이치미는 소탄이쇼(宗旦遺書), 차젠도이치미(茶禅同一味)라고도 하는데4) 일각에서는 차젠도이치미를 가리켜 일명 젠차로쿠라고도 한다. 그러나 차젠도이치미는 소탄(宗旦)의 저서라고 하기는 어렵다.5)

    센노 리큐(千利休)의 손자인 센소탄(千宗旦)이 남긴 차젠도이치미 내용은 그 전문이 다이쇼(大正) 14년(1925) 2월호 차도겟포(茶道月報)에 발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⓵ 차사(茶事)는 선도(禪道)가 으뜸(宗)⓶ 차사(茶事)는 수행(修行)⓷ 다의(茶意)⓸ 선다기(禪茶器)⓹ 로지(露地)차젠도이치미 본문의 전체 내용 5장은 젠차로쿠 10

    장 중 각각 1,2,3,4,8장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로 인하여 젠차로쿠의 저자가 기존의 차젠도이치미의 5장에 본인 저술의 5장을 덧붙여 편집하여 젠차로쿠을 지었다고 보는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젠차로쿠가 먼저 지어졌고, 그것을 5장으로 편집하여 만들면서 선차에 명성이 있었던 소탄(宗旦)의 이름을 차명하여 차젠도이치미을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6)

    젠차로쿠는 자쿠안 소다쿠(寂庵宗澤)가 문정11(1828)년 음력 2월에 발행한 저작물이다. 이 책은 니혼바시(日本橋)의 큰 서적상인 스하라야 모헤에(須原屋茂兵衛)에서 간행되었다.7) 소탄(宗旦)이 1658년에 죽었고, 소탄의 유서로 차

    1) 千玄室, 「茶道の精神」, 중앙대학교 박사논문, 2008, p.291.:임찬수⋅조용란, 「茶道敎論白首詠에 나타난 다도정신 연구」, 일본문화학보 제45집, 2010, p.329.

    2) 池田豊人, 「禪茶の思想-禪茶錄をめぐって」, 印度學佛教學研究, vol.35, No.2, 印度學佛教學, 1987. p.317.3) 千宗室 総監修, 茶道古典全集 第10巻, 淡交社, 1962.: 茶道古典全集에는 다도의 기본적 문헌이 망라되어있으며, 총 1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본 역주는 茶道古典全集 제 10권에 수록된 禪茶錄 원문을 주 번역교재로 채택하였다. 또한 본문을 역주하면서 주 번역 교재의 이외에도, 寂庵宗擇 著, 片野慈啓 訳, 「禪と諸道-禅茶録」 Vol.35∼39, 人間禅出版部, 2013; 寂庵宗澤 著, 吉野亜湖 翻訳, 現代語訳 禪茶錄, 知泉書館, 2010; 三枝博音 著, 日本哲學全書 제11권, 第一書房, 1937. 등에 실린 다른 판본의 원문을 참조하여 비교⋅분석 역주하였다.

    4) 久松真一, わびの茶道, 灯影舎, 1987, p.29.5) 桑田忠親, 茶道の歷史, 講談社, 1998, pp.163-164.6) 千宗室 総監修, 西田直二郎⋅久松真一⋅神田喜一郎 監修, 茶道古典全集 第10巻, 淡交社, 1962. p.314.

    번 역 한국예다학 창간호 pp.89-104

  • 90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젠도이치미를 편집 출간했다고 알려져 있는 센소 소시츠(仙叟宗室)8)는 그로부터 39년 후인 1697년에 졸하였고, 이토 소시츠(一燈宗室)9)는 1771년에 세상을 떴다. 따라서 젠차로쿠가 출간된 연도(1828)만을 비교해본다면 차젠도이치미가 먼저 출간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젠도이치미가 소탄이 지은 것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볼 때,10) 출간의 선후를 결론내리는 것은 아직 어렵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차젠도이치미 가 소탄의 저술이 아니라 하더라도 연대적으로 더 오래되었다고 보고 그 책에 5장의 내용이 덧붙여져 전체 내용이 10장으로 전개⋅편집되었을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따라서 젠차로쿠보다 차젠도이치미가 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 저자 자쿠안 소타쿠(寂庵宗澤)에 대하여

    젠차로쿠(禪茶錄)의 저자인 자쿠안 소타쿠에 대하여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생몰연대를 비롯하여 자세한 사항

    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젠차로쿠의 판본에 “東都 寂庵宗澤 著”라고 명기되어 있으므로 ‘도토(東都)’11)라는 단어로 미루어 볼 때, 저자는 적어도 에도(江戶)출신이거나 에도에 살았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출간하였던 곳도 에도에 있었던 발행소 도토쇼시(東都書肆)12)로 니혼바시난잇쵸메(日本橋南一丁目)13)의 스하라야 모헤에(須原屋茂兵衛)14) 이다.

    그 외 소타쿠에 대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젠차로쿠의 내용으로 보아 승려이며, 다이도쿠지(大德寺)계의 선승일 가능성을 유추해보는 정도이다.15) 젠차로쿠(禪茶錄) 전문을 놓고 볼 때, 선서(禪書)가 아닌 일반불경에서 발췌 인용한 내용이 많을 뿐만 아니라, 본문의 인용구에서도 출처에 오류가 보이는 등 철저한 고증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으나 선과 차를 정신적인 면으로 연결 지어 다

    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드러낸 책으로서 의미가 있는 저술이다.

    7) 吉野亞湖 訳, 現代語訳 禅茶録, 知泉書館, 2010, p.85.8) 仙叟宗室(1622∼1697)은 裏千家 4대 이에모토(家元)이다.9) 一燈宗室(1719∼1771)는 裏千家 8대 이에모토(家元)이다.

    10) 하나의 예로 茶禪同一味가 소탄이 저작한 것이라면 우라센케(裏千家)의 이에모토(家元)로서 南方錄에 대한 인용이 있어야 하나, 그에 대한 인용이나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점이 의구심을 갖게 하는 측면이 있다.

    11) 도토(東都)는 에도(江戸; 일본 도쿄 도(都) 동부의 의 옛 이름, 1868년 도쿄로 개칭했다)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교토(京都)와 비교하여 비공식적으로 도토(東都)라고 불렀다.

    12) 쇼시(書肆)는 서점이라고도 한다. 에도시대 초기 민간에서 출판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존재하였던 출판물의 발행소이다. 당시 쇼시(書肆)가 편집에서 제작, 도소매, 고서의 매매 등을 도맡아서 하였다.

    13) 니혼바시미나미잇쵸메(日本橋南一丁目; 현재의 동경도 중앙구 1번지)는 니혼바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양쪽에 펼쳐진 곳이다. 큰길(현재 중앙거리)에는 시로키야(白木屋), 긴코야(近江屋), 에도 최대의 서적도매상이자 발행소였던 스하라야(須原屋)등의 유명한 대형 서점(발행소)등이 집중되어 있어 에도의 출판 주요거리로 번성하였던 곳이다.

    14) 스하라야모헤에(須原屋茂兵衛)는 에도시대 출판물의 발행소로, 야고(家号, 옥호라고도 하며, 한 문중이나 가문의 특징을 바탕으로 그 집에 붙여지는 칭호)는 센카네보오(千鐘房(堂))이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에도지역 업체로서 일찍이 대두하여 에도 출판업계 최대의 입지를 구축하였던 발행소이다. 만지(万治), 겐로쿠(元禄)시대부터 메이지(明治) 37년(1904)까지 9대 동안 계승하여 내려왔다. 초대 모헤에(茂兵衛)는 만지 겐넨(万治 元年1658) 에도의 니혼바시도리잇쵸메(日本橋通一丁目)에 가게를 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15) 다이도쿠지(大德寺)는 무로마치시대 이후 잇큐소준(一休宗純)을 비롯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와비차(侘び茶)의 창시자인 무라다 주코(村田珠光) 등 동산문화를 이끌어간 승려들이 잇큐소준(一休宗純)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다이도쿠지는 차노유(茶の湯)와 연관이 깊다. 다케노 조오(武野紹鴎), 센노 리큐(千利休), 고보리 엔슈(小堀遠州)등의 차인을 비롯해 많은 와비차 차인들이 다이도쿠지와 관련이 있다.

  • 정순일⋅김수인⋅이묘희⋅김대영 / 禪茶錄 ▪ 91

    禪 茶 錄

    東都 寂庵 宗澤 著*16)

    鄭舜日⋅金修忍⋅李妙姬⋅金大永 譯注

    一. 차사(茶事)는 선도(禪道)가 으뜸(宗)

    끽다에서 선도(禪道)를 주(主)된 [근본으로] 하는 것은, 무라사키노(紫野)의 잇큐(一休)선사16)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난도(南都)17) 쇼묘지(稱名寺)18)

    의 주코(珠光)19)는 잇큐(一休)선사의 법제(法弟)인데, 주코가 차사(茶事)20)를 즐겨 매일 행하는 것을 잇큐선사가 보시고, 차는 불도(佛道)의 묘소(妙所)21)[라 해도] 마땅한 것으로, 점차(點茶)에 선의(禪意)22)를 옮겨, 중생에게 자신의 심법(心法)23)을 관(觀)24)하도록 해야 다도(茶道)[가

    완성된다]라고 이르셨다. 고로 일체의 차사가 행용(行用)되어지는 바가 선도(禪

    道)와 다르지 않다. 무빈주(無賓主)의 차(茶),25) 체용(體用),26) 로지(露地),27) 스키(數奇),28) 와비(侘)29) 등의 명칭을 비롯하여, 그 밖의 하나하나가 선의 아닌 것이 없다. 세세한 것은 뒤에 펼쳐 [언급]할 것이다. 이것을 두고 시구(詩句)30)에서 ‘다미(茶味)와 선미(禪味)를 안다(知量)’31)

    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격언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기화진보(奇貨珍寶)를 좋아하고, 주식(酒食)

    의 정호(精好)를 가리며, 혹은 차실을 꾸미고, 정원의 수석

    * 자쿠안 소다쿠(寂庵宗澤): 생몰⋅약력 미상, 다이토쿠지계(大徳寺系)의 승려로 추측되고 있다.16) 잇큐 소쥰(一休宗純, 1394˞1481): 무로마치(室町)시대 임제종(臨済宗)의 선승으로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의 스승이다.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徳寺: 현.

    京都府 京都市 北区 紫野大徳寺町 소재)에 주석하였다.17)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의 수도(나라 市; 긴키 지방(近畿地方), 나라 현 북쪽에 위치, 8세기에 헤이조쿄(平城京)가 자리 잡았던 고도)를

    가리키며, ‘남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난도(南都)’라고 불렀다. 이 지역에 도다이지(東大寺), 사이다이지(西大寺), 야쿠시지(薬師寺), 고후쿠지(興福寺) 등의 사원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번성하였다.

    18) 난도(南都) 쇼묘지(稱名寺)는 나라시(奈良市) 쇼부리케쵸(菖蒲池町)에 위치하고 있다. 사원의 종파는 서산정토종으로 난도(南都) 고후쿠지(興福寺)의 학승이었던 센에이(專英), 린에이(琳英)형제가 상행염불 도량으로서 문영 2년(1265)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초에는 고후쿠지(興福寺)의 북쪽에 위치하여서 고호쿠지(興北寺)라고도 불렸다. 와비차의 조상 무라다 주코(村田珠光)가 불도를 공부한 사원이기도 하다.

    19)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1422˞1502): 무로마치시대의 차인으로 잇큐(一休)의 문하에서 참선하였으며 노아미(能阿弥)의 추천으로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의 다도지남(茶道指南:다도를 가르치는 벼슬이름)으로 출사하였다. 후에 와비차의 창시자가 되었다.

    20) 차를 달이는 일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말한다.

    21) 아주 뛰어난 점. 절묘한 멋이 있는 부분을 말한다.

    22) 선도(禪道)의 의취(意趣)를 이르는 말이다. 심원(深遠)한 선(禪)의 묘지(妙旨)를 말한다.

    23) 일심(一心)의 이법(理法)을 줄인 말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심본성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불성(佛性), 영성(靈性)이라고도 일컬어진다. “心法無形, 通貫十方,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嗅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本是一精明, 分為六和合。심법(心法)은 모양 없이 시방(十方)에 관통하는데, 눈으로는 본다고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며,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만지고, 발로 걸으니, 본시 하나의 정명(精明)이던 것이 나뉘어져 육화합(六和合)이 된 것이다.”(大正藏 47, 497a.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鎮州臨濟慧照禪師語錄)).

    24) 마음으로 깊이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지혜로서 경계를 비추어보는 것이다.

    25) 주인과 손님의 구별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상대적인 분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다도의 경지를 상징한다.(뒤의 10장 참조).

    26) 본체와 그 작용을 말한다. (뒤의 9장 참조).

    27) 차실(茶室)의 정원이나 뜰을 가리킨다.(뒤의 8장 참조).

    28) 풍류, 특히 다도(茶道)나 와카(和歌) 따위를 즐기는 것을 이른다.(뒤의 7장 참조).

    29)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 한거(閑居)한 장소나 그러한 생활을 즐김을 가리킨다. 다도에서 간소한 속에서 발견되는 맑고 한적한 정취, 유한(幽閒)한 정취 등을 말한다.(뒤의 5장 참조).

    30) 일본의 임제종 승려이며, 다이토쿠지(大德寺)의 주지(住持)였으며 사카이(堺)의 난슈지(南宗寺)를 개산(開山)한 다이린 소토(大林宗套, 1480˞1568)선사가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화상(畵像)에 쓴 찬게(讚偈)를 지칭한다.

    31) 다음의 시구에 나오는 말이다.“曾結彌陀無礙因, 일찍이 아미타불과 무애한 인연을 맺고,宗門更轉活機輪, 종문에서 다시 살아있는 기틀의 바퀴를 굴렸네. 料知茶味同禪味, 다미와 선미가 같음을 요지하였으니,

  • 92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을 완상(琓賞)하는 등 놀며 즐기는(遊樂) 꺼리로 [준비]하는 것은 다도의 원래 정신과 다르다. 다만, 전적으로 선차(禪茶)를 기꺼이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본회(本懷)32)일 것이다.

    점차는 전적으로 선법(禪法)으로서 자성(自性)33)을 료해(了解)34)하는 공부이다. 석존[께서] 40여 년 동안 설(說)한 경(經)의 뜻35)은, 모든 세계의 중생을 위해, 본명(本明)36)을 개발하신 것으로서, 심외무법(心外無法)37)[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을 [가지가지] 종종인연(種種因緣) 비유언사(譬喩言詞)38)로 방편설시(方便說示)39)하신 것이다. 차사도 또한 [불법(佛法)의 경우와 같이] 방편지견(方便知見)을 본떠, 점차하는 행위를 빌려(託), 본분(本分)40)을 증득(証得)[케] 하는 관41)법(觀法)이다. 무릇 제불(諸佛)의 교화(敎化)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다도를 배척하는 글들이 세간

    (世間)에 많이 나오고, 비례(非礼)의 예(礼)를 행한다는 등 온갖 말로 비난하지만, [만약] 그것이 선의(禪意)가 파묻히고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 지말(枝末)[에 빠져버린 상황을 비난하는 것이라면]은 비난받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만약 [선과 다도의] 본면목(本面目)42)을 [세상 사람들이] 이회(理會)43)한다면, 어찌 반드시 [그들이 다인들에 대하여] 험구할 수만 있을 것인가.

    특히 선차(禪茶)에서는 예(礼)보다 [훨씬] 승(勝)하고 중(重)한 도(道)가 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차인들에 대하여] 예에만 집착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변제(邊際)에 치우친 견해이다. 예는 부처님의 묘법(妙法)에 비교한다면, 대천세계(大千世界)44)[가운데] 하나의 섬과 같다. 예는 불도(佛道)의 지엽(枝葉)에 불과한 것이다.

    금강경45)의 주(註)46)에, “비록 인의예지신(仁義礼智信)을 행(行)한다고 하더라도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

    吸盡松風意不塵, 송풍을 남김없이 들여 마셔도 마음이 더렵혀지지 않네.”이 詩句가 야마노우에노 소지키(山上宗二記), 「주코잇시모쿠로쿠(珠光一紙目録)」 속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紹鷗末期云, [다케노]조오가 말기에 이르기를 量知茶味與禪味, 다미와 선미가 같음을 알았으니 吸盡松風意不塵, 송풍을 남김없이 들여 마셔도 마음이 더렵혀지지 않네.”

    32) 본래 품은 뜻을 말한다.

    33) 자성(自性)은 산스크리트어 스바하바(svabhāva)의 역어(譯語)이며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말한다.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 독자적인 본성을 이르며 선불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자(自)는 타(他)와 분별되고, 성(性)은 불변(不變)의 진성(眞性)을 이르는 말인데,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佛性)을 일컫는 것으로, 앞의 본문에 나오는 ‘자신의 심법’이라 한 말과 실은 같은 내용이다.

    34) 의리⋅도리 등을 완전히 터득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견지에 서는 것 혹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확실하게 끝까지 보는 것이다.

    35) 석존은 35세 때 대오성도(大悟成道)하여 80세에 입멸하였는데, 그 사이에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신 것을 모아놓은 것이 오늘날 경문(經文)이라 말하는 것들이다. 석존 전법륜의 생애는 45년이다.

    36)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명지(明智)를 말하며, 미오(迷悟)에 연연치 않는 절대적인 심지(心地)를 말한다. ‘명(明)’은 깨달음의 본심(本心)을 말하며, ‘무명(無明)’은 이 깨달음의 본심이 번뇌의 구름으로 인해 혼미해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은 깨달음이고, 무명은 미혹함을 가리키는 불교의 대표적인 용어이다. 자성의 본질을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한다.

    37) 사람이 인식하고 있는 이 우주만상은 모두 일심(一心)의 소현(所現)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일심 외에 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뜻이다.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偈가 있다. “通玄峰頂, 是不人間, 통현봉 꼭대기는 인간세상이 아닌데, 心外無法, 滿目靑山,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에는 푸른 산이 가득하네.”(大正藏 51, 407b.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25卷).

    38)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로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 이와 관련된 내용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舍利弗 未來諸佛 當出於世 亦以無量無數方便 種種因緣 譬喩言辭 而爲衆生 演說諸法 是法皆爲一佛乘故 是諸衆生 從佛聞法 究竟皆得一切種智. 사리불이여 미래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면, 또한 무량하고 무수한 방편과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와 언사로 중생을 위해 모든 법문을 연설하시리라. 이 법문은 모두 일불승을 위한 까닭이니, 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을 좇아 법문을 듣고 구경에 모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게 될 것이니라.” (大正藏 9, 7b.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卷1, 「방편품(方便品) 第二」).

    39) 방법편선(方法便宣)의 줄임말이며,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가르침을 편다는 뜻이다. 방편은 산스크리트어 upāya의 번역어인데, 부처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어떻게든 절대적인 묘리(妙理)에 귀입(歸入)시키고자 자비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가설(假說)하여 유도(誘導)하신 것을 말한다. 즉 부처가 중생유도(衆生誘導)하기 위한 선교(善巧), 또는 스승이 제자에 대한 접화(接化)의 수단 등을 가리킨다. 대승불교의 10바라밀 가운데 방편바라밀이 있고, 법화경과 유마경에 「방편품」이 있다.

    40) 본래 지니고 있는 분제(分際), 또는 미오(迷悟)에 연연치 않는 절대의 경지를 말한다. 케이잔 조킨(瑩山紹瑾, 1268˞1325)이 찬한 좌선용심기(坐禪用心記)에 “좌선(坐禪)은 사람으로 하여금 심지(心地)를 개명(開明)하여 본분(本分)에 안주(安住)하게 한다. (夫坐禪者, 直令人開明心地安住本分)”라고 적혀 있다. (大正藏 82, 412a. 좌선용심기(坐禪用心記)).

    41) 불교에 있어서 실천적 수행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법을 관함, 곧 마음으로 진리를 관념하는 것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를 번역한 글이다. 마음에 깊이 진리를 관(觀)하는 수행을 말하며, 후일 선불교에서 좌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2) 여기서는 ‘본래의 진실한 양태’라는 의미이지만, 원래는 선어(禪語)인 ‘본래의 면목(面目)’에서 나온 말이다. 선어에서는 한 점의 분별심도 섞이지 않은 본심본성, 즉 본래 자기의 풍모를 말한다. 법을 자각한 진실의 자기를 말하기도 한다.

    43) 사리를 획득하는 것, 이치를 아는 것을 말한다.

    44)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약어(略語)이다. 인도불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 주장하고 있는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

  • 정순일⋅김수인⋅이묘희⋅김대영 / 禪茶錄 ▪ 93

    두루]공경(恭敬)함이 없으며 [나는 인의예지신을 행할 줄 안다 하며 다른 이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인상(人相)이라 이른다.”47)라고 하였다.

    노자(老子)48)에, “도덕을 훼손하여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잘못”49)이라고도 하거니와, 사물이 있기 이전(未始有物)50)부터 존재하는 현현(玄玄)하고 미묘(微妙)한 대도(大道)이면서, 인위적이지 않은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이 이치를 깨달아(領悟)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선차의 공부를 비방하면, 자포자기한 망인(妄人)이 되어, 자신에게 주먹질하여, 스스로의 머리를 쳐서 깨트리는 것과 같다. 나의 문중[에 속한] 사람들은 삼가 이 하나의 대의(大義)를 존봉(尊奉)하여 선미(禪味)의 진차(眞茶)를 수행할지니라.

    二. 차사(茶事)는 수행(修行)

    무릇 차(茶)[사(事)]의 근본 의미는 [차사를 하면서] 기물(器物)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으며, 점차(點茶)할 때의 용태(容態)를 논(論)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차사를 하는 것은] 다기(茶器)를 다루는 삼매(三昧)51)에 들어, [본래 마음의] 본성(本性)52)을 관(觀)하는 수행(修行)이다. 그리고 차사를 통하여 자성(自性)을 구하는 [선수행(禪修行)

    의] 공부는 다름 아니라, 주일무적(主一無適)53)의 일심(一心)으로 다기를 다루는 삼매[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차숟가락(차샤꾸:茶杓)54)을 사용하려고 할 때는 그 차숟가락에만 오로지 마음을 타입(打入)하여, 다른 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시종(始終) [차숟가락을] 다루는 일인 것이다. 또, 그 차숟가락을 [놓아] 둘 때에도, 앞서와 같이 마음을 깊게 담아 [놓아] 두어야 한다. 이[와같이 차사를 일심으로 하는 것]는 차숟가락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차사에서] 다루는 일체의 기물 어느 것도 모두 앞서[의 의미]와 같[이 해야 한]다.

    또, 그 다루는 기물을 놓을 때, 손을 거두어들일 때, 마음을 조금도 풀지 말고, 다음에 다루려는 다른 기물에 그대로 그 마음을 옮겨서, 어디까지나 기(氣)를 풀지 않고 [차사의 순서에 따른 의미와] 형식을 [엄격하게] 유지하면서 점차하는 것을 ‘기쓰즈키타테(氣續立)’라고 하는 것이니, [그러한 차사는] 오직 차삼매(茶三昧)를 행하는 것이라.

    [차사의 본래 의미를] 요해(了解)[하는 것]는 그 사람의 의지[와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는]른 것이며, 무턱대고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는 [차사의 본래 의미에] 미치기 어렵다. 다만 일념(一念)의 일으킴에 [의지와 수준에 따라] 얕고 깊이[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므로 오로지 마음을 집중하고, 뜻을 다하여 다처(茶処)에서의 삼매수행(三昧修行)에만 힘써야 한다.

    에 사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을 굉장한 철위산(鐵圍山)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며, 이것을 하나의 세계라 한다. 이러한 우주를 천 개 합쳐서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하며, 다시 그것이 천 개 합쳐서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 천 개를 합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하나의 대천세계는 소천⋅중천⋅대천의 세 종류의 천(千)이 있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는 무한대의 우주를 형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45)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말한다. 이 경(經)은 공(空)의 묘지(妙智)를 설하고 무상(無相)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후세의 선종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육조단경(六祖檀經)에는 육조 혜능(慧能)이 이 경의 내용을 듣고 출가를 단행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46)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想 卽非菩薩’이란 본문(本文)에 대한 육조의 주석(註釋)가운데 볼 수 있는 말이다.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卍續藏 24, 539c. 금강반야바라밀경주(金剛般若波羅蜜經註) 卷上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第三」).

    47) 근본적 입장에서는 무상(無相)의 상(相)을 참된 부처로 삼는다. 그러므로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想)의 사상(四相)을 여의지 않으면 범부(凡夫)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의예지신을 행하더라도 이것은 인상에 지나지 않으며 무상의 묘상(妙相)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48) 노자는 도교(道敎)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며,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략 서기전 4⋅5백 년경 사람으로 성은 이(李),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라고 한다. 주(周)의 수장실(守藏室) 관리였으며, 초(楚)의 고현(苦縣) 곡인리(曲仁里)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9) 본문에는 ‘도덕을 훼손시켜 인의를 행하는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라는 어구를 노자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며, 장자(莊子) 에 나오는 말이다. “及至聖人, 屈折禮樂以匡天下之形, 縣跂仁義以慰天下之心, 而民乃始踶跂好知, 爭歸於利, 不可止也。此亦聖人之過也. 성인이 등장하여 예악으로 휘어잡아 세상의 바탕을 바로잡고, 인의를 내걸어 세상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비로소 좋은 것을 알아 날뛰고 이익을 쫓아 다투며 멈추지 않았다. 이 또한 성인의 잘못이다.” (출처: 장자 「外篇」 第九 「馬蹄」).

    50) 미시유물(未始有物) : 본시부터 사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며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夫聖人未始有天, 未始有人, 未始有始, 未始有物, 與世偕行而不替, 所行之備而不洫, 其合之也若之何” (莊子 「雜篇」 第25篇 「則陽」).

    51)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Samādhi의 음역(音譯)이다. 정(定)⋅정정(正定)⋅정수(正受)⋅등지(等持)⋅적정(寂靜) 등으로 의역(意譯)한다. 마음을 일경(一境)에 멈추어 산란함과 동요함을 막고, 마음을 바로 하여 망념⋅잡념으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말한다. 일상적으로는 한 가지 일에 몰입하여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52) 자기 본구(本具)의 불성(佛性), 부처나 중생을 막론하고 본래 지니고 있는 영성(靈性)을 말한다. 즉 자성(自性)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53) 마음을 일점(一點)에 집주(集注)하여 외물(外物) 등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유교에서는 ‘경(敬)’의 실천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 15에서 “敬只是主一也, 所謂敬者 主一之謂敬”이라 되어 있다.

    54) 점다(點茶)할 때 차(특히 가루차)를 덜어내는 데 사용되는 작은 숟가락을 말한다. 통상 차회나 차사를 행할 때마다 만들어 사용하고 보관하지 않는 관습 때문에 남아있는 유물이 적다. 센노 리큐(千利休)가 직접 만들어 최후의 차회에서 사용하고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에게 준 ‘나미다(泪)’ 차샤쿠(茶杓)가 유명하다.

  • 94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삼매(三昧)는 산스크리트어(梵語)이다. 번역하여 ‘정수(正受)’라고 한다. 어떻게 하든 일심(一心)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함이다. 원법사(遠法師)55)가 말씀하시었다. “대저 삼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56) 오로지 고요한 상(寂相)을 생각하는 것을 이름이다. 생각이 오롯한 즉 뜻이 하나 되어(志一) 나누어지지 아니하고, 상(相)이 고요하게 되면 곧 기(氣)가 비어(虛) 신령스럽고 또랑또랑(神朗)하게 된다. 기가 비면 곧 지혜가 깨쳐 신령스럽고 또랑또랑함을 비추어, 어두워 통철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이 두 가지는57) 자연의 현부(玄符)이니, [두 가지를] 하나로 사용하여 [여러] 쓰임새(德用)에 이르게 한 것이다.”

    또 법화경(法華經)58)에, “고요한 방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일심이 되면 일좌(一座)에 팔만 사천 겁(八萬四千劫)59)”이라고 하였는데,60) 일좌의 관법(觀法)은 팔만 사천 겁[의 시간과 맞먹는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차장(茶場)에 들어 삼매를 수행하는 것은 즉 일좌의 관법[에 드는 것]이 된다.

    또한 우담보감(優曇寶鑑)61)에서는 “보왕론(宝王論)에 이르길, ‘일상염불삼매(一相念佛三昧)를 수지(修持)하는 것은 마땅히 행주좌와(行住坐臥)간 [염불에] 생각을 묶어(繫念)62) 잊지 않아서, 혼매(昏寐)할 때마다 또한 [염불에] 생각을 묶어 깨어있으면 [그 염불삼매가] 지속63)

    되는 것’이다.”라고 인용되어 있다.64) 이러한 것들을 본받아 점차선(點茶禪)을 할 때에도 하루 종일(二六時)65) 해태(懈怠)하지 않고 [모든 일에] 일처(一處) 계념(繫念)하여, 오로지 용맹심(勇猛心)을 발(發)하여 수행삼매(修行三昧)에 들어갈지니라.

    그리고 다기(茶器)를 다루는 것으로서 본성(本性)을 관(觀)한다는 것은 바로 좌선공부(坐禪工夫)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좌선한다고 하여 정묵(靜黙)하게 있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다, 그 [정묵한] 것[만]을 일러 암증(闇證)66)의 좌선이라 하여, 천태지자(天台智者)67)께서도 꺼려하셨다. 그러므로 거래좌립(去來坐立) 모두에서 [삼매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좌선의 요법(要法)68)이라면, 차사에서도

    55) 혜원(廬山慧遠, 334˞416)법사를 가리킨다. 중국 동진(東晋)시대 스님이며 여산(廬山) 백련사(白蓮寺)의 개조(開祖)이다. 산서성(山西省) 안문군(雁門郡) 누번현(樓煩縣)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여 13세에 이미 대경(大經)을 독파했고 특히 노장학(老莊學)에 뛰어났다. 21세 때 도안(道安, 312˞385)을 태행항산(太行恒山)으로 찾아가 연마수행하고, 나중에 제자 수십 명과 여산에서 지냈다. 도우(道友) 혜영(慧永, 332˞414)의 도움으로 동림(東林)에 방사(房舍)를 지어 주석하였다. 덕을 흠모하여 찾아오는 사람 백 수십 명과 함께 백련사를 창건하여 염불 수련하였으며 30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진(晉) 의희(義熙) 13년(417년) 병을 얻어 83세를 일기로 시적(示寂)하였다. 당 선종(宣宗)은 변각대사(辨覺大師), 송 태종(太宗)은 원오대사(圓悟大師)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대지도론요약(大智度論要略) 20卷, 문대승중심의십팔과(問大乘中深義十八科) 3券,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법성론(法性論) 3권 등을 저술하였다.

    56) “夫稱三昧者何. 思專想寂之謂也, 思專則志一不移, 想寂則氣虛神朗, 氣虛則智恬其照, 神朗則無幽不徹, 斯二乃是自然之玄符, 會一而致用也” (大正藏 47, 140b. 念佛三昧寶王論 卷中 「高聲念佛, 面向西方門」 第十一).

    57) 기허(氣虛)와 신랑(神朗)을 가리킨다.

    58) 대승불교권에서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가리킨다. 반야경, 유마경, 화엄경과 함께 초기에 성립된 대승경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엄사상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경전이며, 구마라습이 한역한 「법화경」은 모두 7권 28품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의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따로 ‘관음경’ 또는 ‘보문품경’이라 불리며, 한국불교에서 널리 독송되고 있는 경전이다.

    59) 겁(劫)은 산스크리트어 Kalpa의 음역(音譯)이다. 겁파(劫波⋅劫跛) 등에서 유래되었다. 장시(長時)⋅대시(大時) 등으로 의역한다. 옛날 인도에서는 통상의 세월로는 계산할 수 없는 원대한 시간을 겁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방광(方廣) 40리의 돌을 천인이 날개옷을 입고 3년에 한 번 불식(拂拭)하여 마침내 그 돌이 마멸하기에 이르는 동안을 일겁이라 한다. 또 겁에는 대⋅중⋅소 세 종류가 있는데, 방광 40리의 돌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하는 것을 소겁이라하고, 방광 80리를 중겁, 120리를 대겁이라 한다. 그러므로 팔만 사천 겁(八萬四千劫)은 무량무한(無量無限)의 장원(長遠)한 시간을 의미한다.

    60) 법화경(法華經) 第三卷, 「화성유품(化城喩品)」, 第七에 “靜室入禪定, 一心一處坐, 八萬四千劫. 고요한 방에서 선정에 드시니 일심 일처좌가 팔만사천겁이라.”는 내용에서 유래하였다. 진정한 일좌는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다. (大正藏 9, 26a.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卷3, 「화성유품(化城喩品) 第七」).잇큐(一休)선사는 시에서 “一寸線香一寸佛, 寸寸積成丈六身, 三十二相六十種, 自然莊嚴本來人. 일촌의 향에서 일촌의 부처가 다투니 촌촌의 마디에서 장육신을 이루네. 삼십이상 육십종이 본래인에서 자연히 장엄하네.”라 하였다. ‘일촌선향(一寸線香)’이란 잠깐 동안의 좌선을 말한다.

    61) 이 책은 우담(優曇)의 저술인데 본디 제목은 여산연종보감(여산蓮宗寶鑑)이다. 우담(優曇)은 원대(元代) 백련종(白蓮宗) 승려 우담보도(優曇普度, ?˞1330)를 가리킨다. 속성은 장(蔣)씨이며, 단양출신이다. 어릴 때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출가하여 후에 단양의 묘과사(妙果寺)로 옮긴다. 원 지대(至大)원년, 무종(武宗)이 조서를 내려 연종(蓮宗)을 금지하자, 대사는 크게 탄식하며 연종을 부흥시키고자 연종보감(蓮宗寶鑑) 10권을 저술하였다. 지순(至順)원년(1330년)에 입적하였다.

    62) 한 곳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 속박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데 여기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3) 이 책의 본문에서는 ‘読’이라고 되어있으나, 이는 잘못 된 것으로 ‘續(續)’이 올바른 표현이다. 저본에 따라 본문에서 ‘續’을 ‘讀’으로 ‘令’을 ‘今’으로 쓴 경우가 있으나 경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의 오자로 보인다.

    64) “寶王論云。修持一相念佛三昧者。當於行住坐臥繫念不忘。縱令昏寐亦繫念而寢。覺即續之.” (大正藏 47, 312b. 廬山蓮宗寶鑑念佛正教卷2) 자나 깨나 염불삼매임을 설한 일문이다.

    65) 하루의 시간을 12간지의 12각(十二刻)으로 표시하였던 시대에 사용되었던 시간 개념이다. 하루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고, 육각(六刻)으로 두 번하여 12각이니 2✕6=12란 의미로 하루 종일을 의미한다.

    66) 암증선(闇證禪) 혹은 암선(暗禪)의 다른 말이며 교리에 어두운 선종을 비판한 말이다. 암증의 선이란 남북조시대 불교의 양극화상황에서 북조 선종에서 좌선만을 수행해 교리에 어두운 것을 남조 쪽에서 비난할 때 사용한 말로 담연(荊溪湛然, 711˞782)의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에서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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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찬가지로 행주좌와(行住坐臥)간에 게을리 하지 않고 [삼매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차사에서 행주좌와[간에서]의 수행이 가능할 것인가 하고, 혹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수행하기 나름이다. 왜냐하면 항상 차실에 들어 점끽수행(點喫修行)을 할 때에, 또한 일심 집중하여 일체의 의식을 수행하며 행주좌와에 빈틈없이 [삼매에] 힘쓰기 때문이다.

    매일 동정(動靜) 가운데 방심하지 않고 [집중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면 사려분별을 힘써 행하지 않아도

    일체를 능히 조화롭게 하며, 모든 군신부자(君臣父子) 인륜의 도(道)도, 스스로 그 극처(極處)에 도달할 것이다. 특히 이 좌선관법(坐禪觀法)은 [처음에는] 이런 저런 [쓸모없는] 무량한 염상(念想)이 떠올라 번거롭지만, [점차 더] 깊이 공부하면, 그 공부에 눌려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 [삼매를 얻는 공부는] 형식을 빌려서 행하는 것이 아닌지라, [좌선은] 자칫하면 공부하는 중 일념에 다른 생각이 섞여서 분요(紛擾)의 근심이 생하기 쉬운 것이다. 그렇지만 다도는 지체(肢體)를 활동하여 기물을 다루며 마음을 그것에 맡기면, 다른 [잡념과] 감정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 또한 공부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것이 잇큐(一休)선사의 묘지(妙智)에서 나온 [것으로] 참으로 감상할만한 묘도(妙道)이다.

    三. 다의(茶意)

    다의(茶意)는 곧 선의(禪意)이다. 그러므로 선의를 떠나 다른 곳에 다의가 없고, 선미(禪味)를 알지 못하면 다미(茶味)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세속에서는 [일부의 사람들

    이] 다의란 하나의 취향(趣)을 가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표방하는] 취향을 참된 선차(禪茶)의 뜻으로 알아 [선의 경지에] 증입(證入)한 척 하는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고, 증상만(增上慢)69)을 일으켜 망령되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세상의 차인들은 모두 다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혹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의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형태 [혹은 규범으]로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 관(觀)하여 깨달으라(領解)고 말하며, 이를 교외별전(敎外別傳)70)인양 말하여, 독각(獨覺)의 사견을 일으키니, 이[양자(兩者)]는 모두가 [선의가 아닌] 취향(趣)을 이루는 업(業)[을 짓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내세운 취향과 다른 사람[이 표방하는] 취향[사이]의 피아(彼我)간에 간격이 생겨, [자신의 취향에 편향되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의를 알지 못한다고 비[방하고] 웃어댄다. 취향은 사람마다 [누구나] 가지는 것이며 [그 취향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다른 [취향을 가지는] 것을 서로 비방하는 것은 쟁송(爭訟)의 바탕이 되며, [자(自)]만심(慢心)이 점점 커져 마침내 잘못된 취향(惡趣)71)[으로 물든 자신]의 속차(俗茶)를 [점점] 흥미롭게 알아가고, 일체의 삿된 생각이 [그에 따라] 생겨나게 된다. 이를 참된 선차라고 생각한다면 [선차의 본래 뜻에] 어긋나기가 천만[리의 거]리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대저 취향이라는 것은 [어떤 목적지에] 이른다(到)는 [것의] 의미인데, [일반 중생들의 윤회선상(輪廻線上)에서 볼 때] 그 선악(善惡) 업(業)72)의 원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몸을 받도록 하는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생의 연기(緣起)의]것[도 이것]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육취(六趣)73)에 미혹되어 빠진다고 하는 것

    “世有講者皆以初住爲果佛者。亦由失於六即之意。講者尚爾況暗禪耶” (大正藏 46, 178c.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若直暗證尚未及於有慧無聞” (大正藏 46, 179c.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尚非別教教道所知。況暗證拙匠能揆則耶” (大正藏 46, 291c.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

    67) 천태지자(天台智者) 지의(智顗, 538˞597)를 가리킨다. 천태종의 개조(開祖)이며 중국 형주(荊州) 화용현(華容縣) 사람이다. 속성은 진(陳)씨, 자는 덕안(德安), 호는 지의(智顗)이다. 18세 때 출가하여 율학의 태두 혜광(惠曠)으로 부터 율(律)과 대승불교를 공부하였고, 혜사(慧思, 515˞577)를 섬기며 심관(心觀)을 배웠다. 30세 때 혜사의 지시에 따라 금릉(金陵)에 전도하였고, 38세에 천태산에 들어가 오로지 연구에만 힘써 마침내 법화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이에 천태종의 일파를 일으켰다. 수나라 개황5년 다시 금릉으로 나와, 대극전(大極殿)에서 대지도론(大智度論) 法華經을 강의하고, 같은 해 11년 여산에 머물며 진왕(晋王)에게 보살계를 주고 왕으로부터 지자대사의 호를 받았다. 또 고향 형주에 옥천사(玉泉寺)를 세우고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하였다. 개황17년(597) 10월, 천태산 산자락의 석성사(石城寺)에서 시적(示寂)하였다. 나이 61세. 세상에서 경칭(敬稱)하여 천태대사라 부른다.

    68) 일체시 일체처(一切時 一切處)에서 행하는 것이 진실된 좌선이라는 뜻이다.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2)대사의 증도가(證道歌)에는 좌선의 요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 걷는 것도 선이요 앉는 것도 선이며 말하고 묵묵하고 동하고 정하는 체가 모두 편안한 것이다.” (大正藏 48, 396a. 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

    69) 깨달음을 얻지도 못하고, 깨달았다고 생각하여 뽐내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아도취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 만(增上慢⋅卑下慢⋅我慢⋅邪慢) 가운데 하나이다.

    70) 문자의교(文字義敎)에 의존하지 않는 특별한 전승(傳承), 즉 석존의 깨달음의 경지를 직접 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禪)의 특이성을 표시하는 어구이다. 선종에서는 달마 이후 성립된 선풍(禪風)을 나타나내는 어구로서 ‘교외별전⋅불립문자⋅직지인심⋅견성성불’의 4구(句)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선종의 종취로 간주된다.

    71) 여기서는 나쁜 취의 혹은 취향을 의미하고 있으나 원래 불교에서 악취(惡趣)는 악업에 이끌려 나아가는 장소란 뜻으로, 육도 윤회 중에서 지옥⋅아귀⋅축생⋅수라 등의 윤회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72) 업(業)은 산스크리트어로 Karma이다. 조작⋅행위 등의 의미이다. 보통은 번뇌가 신⋅구⋅의(身⋅口⋅意) 상에서 행위로서 발동하는 것을 업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선악의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한다.

  • 96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迷淪)74)은 아마도 여기[십이연기]에서 [처럼]헤매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佛法)75)에는 마음을 [색(色)에 대하여] 움직이는 것을 제 1의[무거운] 파계(破戒)76)라고 하며,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77)의 [가장 중요한] 요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취향을 내세워 만사를 행하는 것은 선차에서는 극히 꺼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차(俗茶)는] 그 마음을 움직여 향하는 것을 주된 뜻으로 삼아 차사를 하는데, [그것은] 본래 선기(禪機)78)와는 전도(轉倒)[되어 그르치게] 된 것이다.

    무릇 취[향이]라 함은 일체 사물에 집착하고 마음을 일으켜 사려작위(思慮作爲)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와비(侘)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사치함이 생(生)하고, 기물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촌법(寸法)이 생하고, 스키(数寄)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기호가 생하고, 자연으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인위적인] 창의(創意)가 생하고, [만]족함으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만]족하지 않은 마음이 생하고, 선도(禪道)로써 마음을 움직이매 사법(邪法)이 생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악취(惡趣)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것들은 참으로 상락아정(常樂我淨)[에서]의 사전도(四顚倒)79)를 즐겨 구함과 비슷하다. 경문(經文)에도 사람의 목숨은 호흡사이에 있는 것80)이라고 설하셨다.

    그리하여 명(命)은 수유(須臾)에 끝나는 것인데 신체의 무상함을 [항]상(常)하다고 생각하며, 기완진기(奇玩珍器)를 모아 비장(秘藏)하고, 무익한 보물에 염착(念着)하여

    생애를 보내고, 또한 마음은 즐겁지 않은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차실과 정원에 과분한 재화를 들이고, [음식에서] 조리(調理)의 호오(好惡)를 가리며, 빈객의 응접에 마음 쓰는 것을 최상의 낙으로 삼는다.

    또한 법[의 본질]은 무아(無我)인데 사람들은 각기 얻은 취향을 과시하고, 자신이 행한 바(所作)를 무엇보다도 옳다하여, 다른 사람을 경멸하며, 아(我)[상(相)]를 내세워 편견에 머무른다. 혹은 일체의 부정(不淨)한 것을 정(淨)하다고 생각하며, 대체로 깨끗하지 못한 일을 즐겨 행하며, 도리어 [그 행동을] 깨끗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청정함마저도 더럽힌다. 이것이 모두 세속에서 즐겨하는 차사로서 [이것은] 실로 사전도(四顚倒)의 악취(惡趣)[라 할 만하]다.

    법화경(法華經)의 주(注)에서는81) “우치(愚痴)하여 방일(放逸)함을 즐기며 항상 모든 고뇌를 받는다.”고 말한다. 대개 일체 중생은 때가 많이 묻고 [중생심(衆生心)의] 정이 깊으며,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색진(色塵)82)에 미혹(迷惑)되어 무익함을 즐기고 모든 괴로움을 받으며 삼계(三界)83)육도(六道)84)에 유전(流轉)하여 [육도 윤회(輪廻)의] 처처(處處)에 수생(受生)하는 까닭에 ‘중처(衆處)에 생(生)함’이라는 말로 인하여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만약 [다도 수행자가] 중생의 고뇌를 면하려고 생각한다면 한 결 같이 믿음을 일으키고 선차의 문에 들어서서 득도

    (得道)해탈(解脫)85)의 공부를 닦아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범부의 행하는 바는 선악(善惡)이 모두 악(惡)이 되며, 꿈

    73) 개체가 윤회하는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육계(六界)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취(趣)는 도달하다(到)는 의미로, 일체의 유정(有情)이 선악의 업인(業因)에 따라 이 육계를 윤회전생(輪廻轉生)해 간다고 할 때 사용된다.

    74) 방황하며 악취(惡趣)의 세계에 빠져든다는 뜻이다. 미륜(迷淪)은 미혹(迷惑)과 침륜(沈淪)이 합쳐진 말이다.

    75) 저본 중 日本哲學全書 11권(第一書房, 1937), 茶道古典全書 10권(淡交社, 1956)에서는 ‘불법(佛法)’으로, 禪 36권(人間禪, 2012)의 카타노 시케이(片野慈啓)의 글에서는 ‘불성(佛性)’으로 되어 있으나 ‘불법’이 맞는 표현이라고 본다.

    76) 불교도가 잘 수지해야 할 계법을 깨고 어기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규율규범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비난하는 의미로 쓰인다.

    77) 마음을 능히 일경(一境)에 안주하여 정적(靜寂)의 경계에서 이르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산스크리트어 dhyāna의 음역(音譯)인 선(禪)과 jhāna의 의역(意譯)인 정(定)으로 된 범한병용어(梵漢倂用語)이다. 또한 六祖壇經 第五 「坐禪品」에 ‘外離相即禪。內不亂即定。外禪內定是為禪定. 밖으로 상(相)을 여의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안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고 명명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78) 선적(禪的) 기틀, 선을 수행하여 그 결과로 심신에 갖추어진 선적(禪的) 묘용(妙用)을 작용으로써 나누는 것을 말한다. 임제의 할, 덕산의 봉 등이 대표적이다.

    79) 열반의 상태를 가리키는 상락아정에 대한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즉 범부의 망견(妄見)을 이르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항존성(恒存性) 없는 것을 항상(常)하다고 생각하고, 즐겁지 않은 것을 즐겁다고 생각하며, 오온이 가화합(五蘊假和合)한 것에 불과한 것을 나(我)라고 생각하고 예오(穢惡)한 것을 청정(淸淨)한 것이라 생각하는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이다. 이 글에서는 ‘사전도(四顚倒)’를 ‘四轉倒’로 誤記하였다.

    80) 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의 내용을 말한 것이다.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 呼吸之間。佛言 善哉 子可謂為道者矣。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시니 ‘사람의 목숨은 얼마동안에 있는가?’ ‘호흡의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가 말씀하시길 ‘훌륭하구나, 그대는 도를 성취한 자라 이를 만하구나’.” (大正藏 17, 724a,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81) 본문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의 주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으나 이는 오류이며, 正法念處經 「觀天品」의 야마천왕 모수루타(牟修樓陀)의 게송의 내용이다. “愚癡樂放逸, 常受諸苦惱, 若離放逸者, 則得常安樂。一切諸苦樹, 放逸為根本, 是故欲離苦, 應當捨放逸。우치하여 방일함을 즐기면 항상 모든 고뇌를 받으리라. 만약 방일을 떠난 자는 바로 언제나 안락을 얻으리라. 일체 모든 고뇌의 나무는 방일을 뿌리로 삼으니 그러므로 고뇌를 떠나려면 마땅히 방일을 버려야 한다.” (大正藏 17, 334c.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

    82) 색(色)은 정신계에 대비되는 물질계를 말한다. 즉 현상에 변화를 일으켜 결국에는 파괴되어버리는 ‘변괴(變壞)’와, 자타 상호간에 서로 장애를 일으키는 성질을 가진 ‘질애(質礙)’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말의 총칭이다. 색이 진성을 더럽히고 번뇌를 일으키므로 색진(色塵)이라 한다.

    83) 중생이 생사유전을 멈출 수 없는 미계(迷界)를 분류하여, 욕계⋅색계⋅무색계(欲界⋅色界⋅無色界)의 삼계라 이른다. 욕계란 탐욕으로 색⋅식⋅수(色⋅食⋅睡)의 삼욕(三欲)이 특히 강하다. 색계는 욕계와 같은 욕구는 없지만 미묘한 형체를 지닌 세계를 말한다. 무색계는 순수한 정신적 존재의 세계를 말한다.

    84) 중생이 그 업인(業因)에 따라 생사 윤회하는 도정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을 이른다. 육취(六趣)라고도 한다.

  • 정순일⋅김수인⋅이묘희⋅김대영 / 禪茶錄 ▪ 97

    속[에서의 일과] 같이 유무(有無) 모두 무(無)가 되며, 미혹함 속[에서 판단하는] 사견(邪見)은 시비(是非) 모두 비(非)가 된다. 그렇다면 세속의 취[향]에 집착하여 진선(眞善)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어찌 믿어 취할 수 있으리오.

    도리어 무익한 일락(逸樂)에 시간을 쏟고 헛된 세월을 보내면 불타 대성(大聖)의 교화(敎化)에 배치(背馳)되고 다도에서도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을 지라. 오직 촌음(寸陰)을 중히 여겨 찰나(刹那)라도 퇴전(退轉)하지 않고 선차의 큰 쓰임새로써 묘도(妙道)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四. 선다기(禪茶器)

    선차(禪茶)의 기물(器物)은 미기(美器)가 아니고 진기(珍器)도 아니며 보기(寶器)도 아니고 구기(舊器)도 아니다. 원허청정(圓虛淸淨)한86) 일심(一心)을 그릇으로 삼는 것이다. 이 일심(一心)청정(淸淨)을 그릇으로 삼는 것이 선기(禪機)의 차(茶)이다.

    그렇다면 명물(名物)이라고 세상에서 완상하는 다기(茶器)는 귀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잔의 차를 마시는 데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無價) [고가의] 그릇을 구입하고, 수장고에 숨겨두고 보물로 여기는 것은 도(道)에는 또한 이익 됨이 없기 때문이다. 소인(小人)이 재화를 지니면

    (小人懷貨)87) 이르는 곳마다 재해를 초래하는 매개가 된다. 노자(老子)에서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백성을 도둑으로 만들지 아니한다.”88) 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물의 선악(善惡)을 논해서는 안 된다. 선과 악 두 가지의 사견(邪見)을 끊고 실상청정(實相淸淨)의 그릇89)을 자기의 마음으로 찾아 얻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심(一心)의 그릇은 사람이 의도적으로 빚어내는 물건이 아니다. [일심의 그릇이] 천지자연의 기물이라면, 음양일월(陰陽日月) 삼라만상(森羅萬象) 백계천여(百界千如)90)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이치를 구족하여 밝은 달이 비추는 것과 같은 허령불매(虛靈不昧)91)한 불심인 것이다. 그러한 [본래 불심인 것을 내(我相)가] 번뇌(煩惱)의 구름을 일으킴으로써 진여(眞如)92)의 빛을 가리고 오진(汚塵)93)에 물들어, 하고 싶은 대로 정욕을 생하고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을 발하여, 일심청정[의 깨끗한 그릇]을 마침내 삼독의 그릇[으로 만들고] 만다.

    그렇다면 세간의 중생이 공겁(空劫)94)이래로 오탁(五濁)95)의 티끌이 묻어서 자신의 그릇이 추악함을 깨닫지 못하고 이미 무명(無明)96)을 취결한 것이라면 [자신들이] 선(善)이라고 자랑하더라도 참된 선이 아닌 것이다. 노자(老子)에서 또한 “천하[사람]가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한 것일 뿐이다. [천하 사람이]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97) 라고 말한다. 이것은 비유하면 [어

    85) 득도는 대도를 회득(會得)하는 것, 즉 깨달음을 여는 것이다. 해탈은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육도를 벗어나 자재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통상 득도와 해탈은 같은 의미이다.

    86) 원허(圓虛)는 평온하고 공허하여 일체의 장애가 없는 상태이며 청정은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고 일체의 번뇌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는 일심(一心) 즉 미오(迷悟)를 초월한 절대심 또는 깨달음의 묘심(妙心)의 내용을 형용한 말이다.

    87) 소인은 덕이 없는 자, 천한 자를 가리키는데, 덕이 없는 자가 보물을 지니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재해가 닥치게 될 것이니, 도리어 몸에 지니지 말라는 격언이다. 좌전(左傳)에 ‘필부무죄(匹夫無罪), 회벽기죄(懷璧其罪)’라는 글이 있다. “周諺有之: 匹夫無罪, 懷璧其罪.”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환공(桓公) 10년」).

    88)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는 老子 상편 불상현(不尙賢)장 제3에 나오는 어구이다. “얻기 힘든 보물은 애지중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여러 가지 진귀한 보물을 진열하여 애완(愛玩)하는 것을 보고 서민들까지 배워서 그것을 탐내다가 마침내 손에 넣지 못하게 되면 도둑질까지 하게 된다.”라는 노자의 사상이다.

    89) 실상(實相)은 불교어로서는 생멸유전(生滅流轉)의 상(相)을 여읜 진실상을 말한다. 진여(眞如)의 본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실상 청정의 기’란 앞서 서술한 ‘원허청정의 일심으로써 기를 삼는다.’라는 이전의 말과 같은 뜻으로 보인다,

    90) 천태종에서 말하는 개념으로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계(十界)는 고립되는 일없이 각각 그 하나하나가 본래부터 또한 십계를 갖고 있다고 하므로, 십계에 열을 곱해서 백계(百界)라 한다. 게다가 이 백계는 각각 십여시(十如是; 相⋅性⋅體⋅力⋅作⋅因⋅緣⋅果⋅報⋅本末究竟)의 상(相)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천여시(千如是)가 되는데 이로써 우주만법의 총칭으로 삼는다.

    91) 모양 없이 소리 없이 공(空)하면서도 영묘(靈妙)한 작용을 확실히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불성의 영묘성을 비유할 때 사용되고 있다.

    92) 우주만유에 편만해 있는 상주불변의 본체를 가리킨다. 위망(僞妄)이 아닌 진실이라는 뜻과 개변(改變)없는 여상(如常)이라는 뜻을 합쳐서 ‘진여(眞如)’라 한다. 주관적으로는 본성, 불심 등이라고도 하며, 객관적으로 진여라 한다. 원래 내용적으로는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

    93)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대상인 오경(五境)을 말한다. 이 다섯 종의 대경(對境)은 우리의 진성(眞性)을 가려서 더럽히고 번뇌를 일으키게 하므로 티끌(塵)이라 표현한다. 따라서 오경은 오진(汚塵)이 된다.

    94) 겁(劫)은 무한원대한 긴 세월을 말한다. 성겁(成劫)⋅주겁(住劫)⋅괴겁(壞劫)⋅공겁(空劫)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 괴멸기를 가리키는 괴겁 뒤의 세계는 완전히 공무(空無)로 돌아가는데, 공겁(空劫)은 다시 다음 세계 성립기 즉 성겁에 이르기까지 중간의 20중겁 사이를 말한다.

    95) 오탁(五濁)은 불교어로 오재(五滓), 오혼(五渾)이라고도 하며 나쁜 세상에 대한 다섯 가지 더러움을 말한다. 겁탁(劫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중생탁(衆生濁)⋅명탁(命濁)의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96) 무명(無明)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를 말하며, 산스크리트어로 avidyiā이다. 원시불교에서는 ‘사제(四諦)의 이치, 또는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정의한다. 대승에서 무명은 ‘진여(眞如)의 이치를 모르는 상태, 또는 유(有)를 무(無)로 보고, 무를 유로 본다.’라고 정의되며, 소지장(所知障: 알아야 할 대상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장해)이다. 이 소지장을 없애면 진여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 즉 보리를 얻는다고 한다.

  • 98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떤] 향기에 익숙한 사람은 그 향기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세간의 중생들은] 행하는 바[를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두가 악취(惡趣)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선차(禪茶)의 교용(巧用)으로써 [세간의 차인들의] 더러운 그릇을 버리고 [일심의] 본래 청정한 기물로 교체해야 한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에서 ‘힘은 이 선기(善器)를 받아서 감당해 내는 것을 말함이니’98)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힘써 수행하면 하근기(下根機)도 반드시 선기를 받을 수 있다. 가령 [궁극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선차의 문에 들어[서서] 다가서면 마침내 선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어(家語)99)에 “좋은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안개 속을 가는 것과 같아서 옷을 [일부러] 적시지 않아도 점점 촉촉해진다. 무식한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은 측간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옷을 [일부러] 더럽히지 않아도 점점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악인과 함께 가는 것은 칼날[로 우거진] 속을 가는 것과 같아서 사람을 상처내지 않더라도 점차로 놀라고

    두렵다.”100)고 하여 결코 악도(惡道)와는 얽히지 않아야 한다.

    인(因)은 반드시 과(果)에 이르게 되기 마련이어서 악(惡)은 악소(惡所)에 향하고 선(善)을 즐겨하면 선소(善所)에 다다르는 법이니 한 결 같이 용맹심을 분기(奮起)하여 간절하게 선차의 공부를 [열심히] 해 가면 현세에서는 권력자의 감옥101)을 면하고, 죽어서는 삼도(三途)의 문102)

    을 닫게 하여 승천득도(昇天得道)함을 의심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성취한 것을 천지동일(天地同一) 원조청정(圓照淸淨)103)의 보기(寶器)라 한다. 이것을 선차의 기(器)[물(物)]이라 칭한다. [그러하노니] 고구진기(古甌陣器)의 뛰어난 기완(奇玩)을 어찌 보배라 할 것인가.

    五. 와비(侘)

    와비(侘)라는 한 글자는 다도에 있어서 중[요]하게 쓰이며, [차인들의] 지계(持戒)가 된다. 그런데 세속의 무리들은 양(陽)[즉 겉으로 나타난]의 용태(容態)는 와비를 빌리고 있으나, 음(陰)[즉 안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조금도 와비스럽지 않다. 고로, 겉으로 와비스러운 하나의 차실(茶斎)에, 허다한 돈을 소모하고, 진기(陳奇)한 자기(磁器)를 [사는 데] 전원을 [팔아] 바꾸고 귀한 손님에게 자랑한다. [그들이] 이것을 와비풍류(侘風流)라고 주창하는 것은, 대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와비란 [원하는] 물건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일체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蹉跎)는 의미이다. [즉] 타제(佗傺)된 상태가 계속됨을 말한다. 「이소(離騷)」104)의 주(注)에 “타(佗)는 서[있다]는 것이고, 제(傺)는 머무[르]는 것이다.105) [이것은] 근심(憂思)과 실의이니, 머물러 서서 능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됨

    97) 본문에서의 내용은 노자(老子) 상편 「천하개지(天下皆知)」장 제2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知善之爲善斯不善已. 천하[사람이] 모두 아름다움의 아름다움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한 것일 따름이다. [천하 사람이] 모두 착한 것의 착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착하지 않을 따름이다.”

    98) “力是堪任善器” (大正藏 33, 694b.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 卷2).99) 가어(家語)는 공자가어(孔子家語)를 말하며, 공자의 언행 및 공자와 그 문인들이 문답한 이야기를 집록한 것이다. 처음에는 27권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10권으로 알려져 있다.

    100) 본문의 인용문이 가어(家語)에 있다고 하고 있으나,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와 있는 문장은 그 의미는 같은 내용이지만 어구는 상당히 다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即與之化矣; 與不善人居, 如入鮑魚之肆, 久而不聞其臭, 亦與之化矣。丹之所藏者赤, 漆之所藏者黑。是以君子必慎其所與處者焉。선인과 함께 있는 것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과 같다. 오래 지나면 그 난초의 향을 분간하지 못하고 곧 바로 이에 동화된다. 불선인과 함께 있는 것은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다. 오래 되면 그 냄새를 분간하지 못하고 역시 이에 동화된다. 붉은색 속에 넣어둔 것은 붉고, 검은색 속에 넣어둔 것은 검다. 이로써 君子는 반드시 더불어 있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4 「육본(六本)」 제15.).그러나, 오히려 본문에 있는 글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 인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家語云與好學人同行, 如霧露中行, 雖不濕衣, 時時有潤. 與無識人同行, 如厠中坐, 雖不汚衣, 時時聞臭. “가어에 이르길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과 동행하면 마치 안개 속을 가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은 젖지 않더라도 점점 촉촉해지고, 무식한 사람과 동행하면 마치 뒷간에 앉은 것 같아서 비록 옷은 더럽히지 않더라도 때때로 그 냄새를 맡게 된다.” (명심보감 하권, 「교우(交友)」 제19).

    101) 통치자나 권력자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는 것과 같은 재난이나 불행을 이른다.

    102) 삼도(三途⋅三塗)는 삼악도(三惡道)라고도 하며 화도(火塗)⋅도도(刀塗)⋅혈도(血塗)를 가리킨다. 즉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취(三惡趣)를 말하며, 삼도지문호(三途之門戶)는 삼악취로 가는 입구이다.

    103) 천지동일(天地同一)은 천지와 뿌리를 같이 하는 만물이 일체라는 의미이다. 자타대소(自他大小)를 초월한 경지이다. 원조청정(圓照淸淨)은 원만하게 비추어 장애가 없고, 허물이나 더러움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경지이다. 이 모두가 유일진심(唯一眞心)을 형용한 말이다.

    104) 초사(楚辭)의 주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소(離騷)」는 중국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 기원전340˞278)의 시(詩)이다. 굴원의 이상과 우국충정, 울분, 현실비판 등을 토로하며 근심, 비통해하는 장편의 시가 「이소」이다. 「이소」의 뜻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사마천과 반고(班固)의 견해로 ‘이(離)’는 ‘만나다’의 뜻이고 ‘소(騷)’는 근심의 뜻으로 “근심(불행)을 만나 이글을 지었음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후한 때 왕일(王逸)의 견해로 ‘이’는 이별의 뜻이고 ‘소’는 근심(愁)의 뜻이므로 ‘이별을 근심하다’라는 뜻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전자의 뜻에 가깝다고 본다.

    105) 타제(佗傺)는 내 뜻대로 하지 못하고 불행하며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초사(楚辭) 권 제2, 이소경(離騷經) 제10, 왕일(王逸) 주(註)).

  • 정순일⋅김수인⋅이묘희⋅김대영 / 禪茶錄 ▪ 99

    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또, 석씨요람(釋氏要覽)에 “‘사자후보살(獅子吼菩

    薩)이 물어 이르기를 욕심을 적게 하는 것과 족(足)할 줄 아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욕심이 적다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고 취하지 아니하며, 족함을 안다는 것은 적은 것을 얻을지라도 유감스러워 하

    지 않음(悔恨)이다’.”106)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가르침의 뜻을] 합하여 와비의 의미와 자훈을 살펴보면, ‘부자유스럽지만 부자유스럽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부족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골라 맞지 아니하여도 골라 맞지 않았다는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와비[스러움이]라고 깨쳐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부자유를 부자유로 생각하고, 부족함을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골라 맞지 못함을 보고 골라 맞지 못했다고 꾸짖는다면 그건 와비가 아니니, [그런 사람들은 소유가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만 하다.

    옛 성인이 “도(道)라 하더라도 결코 제 이념(第二念)으로 흐르지(流至) 않아야 한다.”107)라고 법문을 설하였고, 영평고조(永平高祖)108)께서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는 결코 제 일념(第一念)에도 흐르지 않아야 하며, 결코 무념에도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라고 설하였다.109) [이처럼] 일체가 [근본이 아닌 다른] 생각에 흐르지 않을 때 견고히 와비의 뜻을 지키는 것이니, [이는] 곧 부처님의 계

    율을 지키는 것과 같다.그러므로 와비[의 근본 뜻]를 알면 간탐(慳貪)을 일으키

    지 않으며, 계율을 어기지 않으며, 성냄(嗔恚)을 일으키지 않으며, 게으름(懈怠)을 일으키지 않으며, 산란(動亂)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우치(愚癡)함을 일으키지 않는다.110)

    또한 [와비의 근본 뜻을 알면] 종래의 간탐하는 마음은 보시(布施)의 마음으로 바뀌고, 계율을 어기는 마음은 지계(持戒)의 정신으로 바뀌며, 진에(嗔恚)는 인욕(忍辱)으로 바뀌고, 게으름은 정진(精進)으로 바뀌며, 마음이 산란함은 선정(禪定)으로 바뀌고, 우치는 지혜(智慧)로 바뀐다.

    이를 육바라밀(六波羅蜜)111)이라 이르는데, 보살112)행을 지켜 능히 [불도를] 성취하는 것을 이름이다.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梵語)로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며, 깨달음(悟道)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와비라는 글자는 육도(六道)113)의 행용(行用)에 배대(配對)하여, 받들어 믿고(尊信) 수지(受持)해야만 할, 다법(茶法)의 계도(계율과 법도)114)가 아니겠는가.

    六. 차사(茶事)의 변화(變化)

    차사(茶事)의 변화에는 의미가 있다. 난보로꾸(南方錄)115)에, “[다도의] 도구(道具)나 기물(器物)을 놓는 법,

    106) “獅子吼菩薩問云 少欲知足 有何差別。佛言 少欲者 不求不取。知足者 得少不悔恨.” (大正藏 54, 296c. 釋氏要覽 卷下).107) 옛 성인이란 황벽희운(黃蘗希運, ?˞850)을 가리킨다. 황벽희운은 당 후기의 중국선종의 10대 조사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의 법을 이어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에게 전했다. 복주(福州)사람으로 황벽산에 들어가 출가하였으며 시호는 단제(斷際)이다. 배휴(裴休, 797˞870)가 황벽희운의 법어를 집대성하여 만든 전심법요(傳心法要)와 완릉록(宛陵錄)이 전한다.이 내용은 후대에 황벽스님의 행록을 모아 완릉록의 말미에 덧붙인 곳에서 나온다.“從上祖師唯傳一心, 更無二法。指心是佛, 頓超等妙二覺之表;決定不流至第二念, 始似入我宗門。위로부터 조사들께서 오로지 일심만을 전하셨으니, 결코 두 가지 법이란 없었다. 마음이 부처임을 바르게 가르치신 것이니, 등각과 묘각 두 깨우침의 밖으로 단박에 뛰어넘어 결코 제 이념으로 흘러들어선 안 된다. 비로소 우리 종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서는 것이다.”(白蓮禪書刊行會, 禪林寶典, 藏經閣, p.324, 宛陵錄).

    108) 영평광록(永平廣錄)의 같은 대목에서는 ‘영평(永平)’으로 나온다. 에헤이지(永平寺)의 개산조(開山祖)인 도겐(道元, 1200∼1253)을 가리킨다. 도겐선사는 카마쿠라(鎌倉)시대 초기의 선승이며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이다. 같은 취지로 고조(高祖)라고 존칭되고 있다. 시호는 불성전동국사(仏性伝東国師), 승양대사(承陽大師)이다. 1217년에 겐닌지(建仁寺)에서 에이사이(榮西)선사의 제자 묘젠(明全)에게 사사(師事)받았으며, 1223년에 묘젠과 함께 남송으로 건너가 조동종 선사 천동여정(天童如浄)에게 인가(印可)받았다. 그 때의 문답 기록으로 보경기(宝慶記)가 있다.

    109) “師云, 古聖雖道決定不流至第二念, 永平又道, 決定不流至第二念, 決定不流至無念”(永平広録, 卷8 「越州永平禅寺玄和尚小参 第八」): ‘현화상(玄和尙)’은 도겐(道元)선사의 별칭이며, 도겐선사 스스로 ‘희현(希玄)’ 또는 ‘도현(道玄)’으로 밝힌 바도 있으며,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 않고 피휘(避諱)하여 쓴 예이다.

    110) 간탐(慳貪)은 인색하고 욕심이 많은 것, 훼금(毁禁)은 금계(禁戒)를 깨고 지계를 지키지 않는 것, 진에(嗔恚)는 분노하고 화내는 것. 해태(懈怠)는 게으름 피우는 것. 동란(動亂)은 침착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것, 우치(愚痴)는 어리석고 도리에 어두운 것을 가리킨다. 이 여섯 가지는 대승의 깨달음에 이르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공덕에 대비되는 악덕이다.

    111)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aramita의 음역이며, 도도피안(度到彼岸)등으로 음역되고 있다. 즉 세속의 고해를 건너 이상향인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는 여섯 가지의 수행 방법으로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를 이른다.

    112)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역(音譯)이며,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 또는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113) 본문에는 ‘육도(六道)’로 되어 있는데 ‘六道’는 육도윤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六度’로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육도(六度)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한다.

    114) 계도(戒度)란 지켜야할 계법과 수행해야 할 육도(六度)를 가리킨다.

    115) 난보로쿠(南方錄)는 난보 소케이(南坊宗啓)가 쓴 다도서(茶道書)이다. 센노 리큐(千利休)의 수제자인 소케이가 리큐에게 친히 견문 습득한 차노유(茶の湯)의 마음가짐을 기록한 것으로, 다치바나 지츠잔(立花実山)이 편집한 책이다. 난보로쿠(南方錄)의 전체 9권 중 7권(「멸후」)까지를 난보 소

  • 100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데마에116)(手前) 작법,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갖가지 법식을] 만단(萬端)하여 벗어나지 않고, 근본 규구(規矩)117)

    와 음양의 비사(秘事)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쳐 배울(覺盡) 때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경지가 된다.”118)고 한다.

    이리하여 [다도의 법식이나] 규구(規矩)의 [범위]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다도인]데, [일반 사람들은] 규구[의 범위]에 부합하는 것을 [다도의] 변화(變化)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작위(作爲)를 빌리고 사려(思慮) 속에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정한 다도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와는 다르다.

    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자연의 기틀(機)에 따르고 규구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며, 그 변화하는 것에도 마음이 머무르지 않고 행하여 나아가는 것을 변화의 묘용(妙用)이라고 한다.

    세상에 [유포되어 있는 시가] 다쿠안(澤庵)화상(和尙)의 게(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 게(偈)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차사는 본래 면목이 없으니(茶事本來無面目),일심이 어지럽지 않으면 바로 하늘의 가르침이라네(一心

    不亂只天敎).규구가 있다 하나 [고착된] 규구가 없는 것이니(有規矩而

    無規矩),뜻에 따라 효를 변함이 참으로 중요하다네.(當意則妙要

    變爻)”119)

    이 시는 점차의 근본정신을 읊고 있다. 진실로 결구의 뜻에 의지하여, 그 상황의 묘함을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다도의 [궁극적] 묘처(妙處)이니,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음이 귀한 것이다.

    만일 [인위적이며 의도적인] 생각을 하려 하는 것은, 어

    느 정도 능숙하게 [다도 수행의]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모두 사취(私趣)120)에 빠진 것이라서, 자연의 묘기(妙機)에 위배된다. 무릇 변화란 천지기화(天地氣化)121)의 자연에서 생(生)하며, 이것을 사람의 몸에 품수(禀受)하여, [자유]자재로 운동하고 활용한다는 뜻이므로, 이 이치를 헤아려서 찻자리에 들어서도 천기(天機)가 저절로 펼쳐지는 것에 맡기고, 스스로[가 지닌 작은] 지혜를 버려 공적(空寂)하고 허정(虛靜)122)하게 함으로써, 곧 바로 처음과 끝을 마쳐야만 한다.

    또한 선차에는 여러 가지 [번거로운 절차와] 명목이 적으므로, 비밀스럽게 감추어 행 할 것도 없다. 만약 그[러한 비밀스럽고 번거로운] 명목[상]의 차를 동경하여 [필기하고 익히는] 수기(受記)123)에 여가[시간]를 써 버린다면, 어느 때에 선차의 참된 도를 성취하여 변화의 묘[용을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리오. [너희들은] 오직 선차의 [참된] 면목을 지켜 정진하고 수지한다면, 저절로 변화의 묘[용]에 도달하게 될지니라.

    七. 스키(數奇)

    세상의 차인들이 ‘호(好)’라는 글자를 끌어와서 고노미 도구(好み 道具)[따위로 조합]하여 즐겨 놀기(玩弄)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래 이 글자(‘好’)는 [단순히] 사물을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꺼려하게 되어 [그 대신에] 스키(數奇)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난보로쿠(南方錄) 의 「로지다이가이(露地大槪)」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124)

    “대개 스키(數奇) 도구 등의 본의를 생각해 볼 때, [발음은] 스키(數奇) [혹은] 스키(好) 등으로 동일하게 사용하고

    케이의 기록으로 보며, 이후 「비전」과 「추가」는 다치바나 지츠잔의 보론(補論)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116) 데마에(手前)는 다도의 예법이나 양식을 가리킨다.

    117) 규구(規矩)는 규구준승(規矩準縄)의 준말로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나 사물의 준칙(準則)을 이른다.118) 본문의 인용문은 난보로쿠(南方錄) 「秘伝」 「南方録秘伝九ヶ条」 중 마지막 조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山水、草木、草菴、諸具、賓客、菴主、歷然トシテ前ニアリ、シリ[後]ヘニアリ、其規矩、法式、物々、事々ニ、ソナハルコト勿論也、其置方、幷ニ手前ノ取サバキ、師伝万般ニシテ、ノガル、ニ所ナシトイヘドモ、只根本ノ規矩、陰陽ノ五六、少カネノ七ツ、一尺四寸、一尺八寸五分、ト云一句ニ在テ、千変万化、自由自在也、五十、六十、ノカザリ、所作、ハ只是枝葉ノ至也、本規ニ至ルベキトノ階子ナリ、又大秘事ト伝ハ、カノ山水、草木、草菴、主客、諸具、法則、規矩、トモニ只一箇ニ打擲シ去テ、一物ノ念ナク、無事安心一様ノ白露地、コレヲ、利休宗易大居士、的伝ノ大道ト知ルベシ、

    119) 이 게(偈)는 ‘다쿠안(澤庵)화상의 게인지 아닌지’라고 하여 이 선다록의 저자도 확인하지 못하였고, 다쿠안전집(澤庵全集)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출처불명의 게(偈)이다.

    120) 사취(私趣)는 자신의 사적인 취향이나 자기 멋대로의 분별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121) 눈에 보이지 않고 모양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런데도 저절로 서로 감응하는 작용을 기화(氣化)라 한다.

    122) 공적허정(空寂虛靜)은 마음을 무념 무심의 청정 안정(安靜)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123) 수기(受記): 허가사항, 전수(傳授)사항을 기록한 책자를 받는 것이나 비전(秘傳)의 책을 받는 것을 말한다.

    124) 본문에서는 인용된 글이 난보로쿠(南方錄)의 「로지다이가이(露地大槪)」에 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로지다이가이(露地大槪)」가 아닌 호츄로담(壺中盧談) 중의 「소안다이가이(草庵大槪)」에 나와 있는 글이다.

  • 정순일⋅김수인⋅이묘희⋅김대영 / 禪茶錄 ▪ 101

    있지만, 그 정신은 크게 차이가 난다. 스키는 사기(史記)의 「이광전(李廣傳)」125)에, ‘이광은 늙어서(考)126) 수기(數奇)하다’[라고 했는데] 그 주석에 [보면], 복건(服虔)이 이르기를 ‘일을 도모함에 수(數)가 우(偶)하지 않다’라고 [주석]하였다.127) 또 전한[서](前漢[書])의 「이광전(李廣傳)」에서도 동일한 [말이] 나오고 있다. 사고(師古)128)의 注에 [보면], ‘[운]명이 외로워(隻) 짝을 이루지(偶合) 못함을 말함이니, …’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스키에서 영여(零餘)129)를 기(奇)라고 한다. 홀수의 상태가 되어, 사물이 서로 [짝을] 갖추지 않은 것이 근본[뜻]이다. 진실로 이것이 차노유(茶の湯)의 본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짝을 짓지 아니하고, 세속에 따르지 않으며, 골라 맞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사가] 뜻과 같지 않을지라도 즐거움으로 여긴다. 이것이 잇키(一奇)130)의 라쿠진(屋人)이며, 스키샤(数奇者)라고 말한다.

    가옥으로[비유하여 보면]는 소나무 기둥과 대나무 서까래의 곡직방원(曲直方円)[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에 [맡겨], 상하 좌우로 사용하고, 신고(新古)⋅경중(輕重)⋅장단(長短)⋅광협(廣狹)[을 그대로 살려]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부서진 것을 철(綴)하여 어찌되었건 짝이 맞아지는 것이 없다. 이[처럼 짝이 맞지 않는] 이키(一奇)의 기물을 스키 도구라고 칭한다.

    [이상] 그 작용의 차이를 능히 배합할 경우에, 홀수(奇)가 되어 나눌 수 없는 경우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또한 홀수나 짝수나 마찬가지로(奇偶一同), 홀수가 짝수가[되]며 짝수가 홀수[가 되는]인 경우도 고리[모양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에] 같아서 [그러한 예들은] 필설로 다 헤아릴 수 없다.

    ‘호(好)’라는 글자는, ‘풍류를 좋아한다’는 말의 예처럼 [무엇인가를] 즐긴다는 뜻으로 본다면, 로지(露地)소안(草庵)131)의 취지(趣)와는 크게 어긋난다. 세간에서 [말하는]

    스키라는 것은 모두가 [유별난] 사물을 좋아하는 모노스키(物數奇)도구[라는 의미]가 되어버려서, 이것을 차노유(茶の湯)라고 생각하니 슬픈 일이다.

    “스키의 두 글자가, 세속의 티끌(世塵)에 묻혀 사라진지 백 여 년이 넘었구나. …” 라고 했다.132)

    그러나 [세간에서 통용되는] 고노미 도구나 스키(好)는 차의 본의와 달라서 모두가 [본래의] 뜻과 같지 않게 되었다. 스키라는 글의 [본래] 의미를 지켜야만 하는데 ‘호’라는 글자에만 집착하여, 차실을 비롯하여, 정원의 모양, 기물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고노미(好)라는 말을 붙이지 않음이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차를 전통으로 삼는 집(家門)에서는, 그 비조(鼻祖)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 세대[에 걸쳐], 한 인물도 물건을 고노미[의 대상을 삼아 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하여 손톱 끝만 한 (一二分寸) 사소함까지 다투어, 장단과 광협을 정하여, 자기 집안의 고노미라고 칭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리큐(利休) 고노미, 저것은 소오탄(宗旦) 고노미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스키(奇)를 창안하고, 각각의 집안마다 지정한 기물의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리느라 겨를이 없었다.

    또한 평소 [자신의 가문에서] 사용하는 기물이 아니라면 [차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 [사용해서]도 안 되었다. 또한 일[거리 만드는 것]을 즐겨하여 쓸모도 없는 장식용 뒷간(雪隱) 등을 만들고, 모래 뿌린 판자(砂かき板)의 종류까지, 일이 분(一二 分)의 [세밀한 단위까지] 설계를 하는 등, 모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華靡) 풍류를 경쟁하는 것이 필경 모두 고노무(好)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다.

    또 「다기대개(茶器大槪)」의 부(部)133)에 다만134) 차의 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