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북원공차 北苑貢茶 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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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북원공차 ( 北苑貢茶 ) 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유 수 현 * 만시태학당 원장 Bukwon Tribute Tea and Its Tea Culture Development and Position in Song Dynasty You, Su-Hyeon * Director of Mansi Village School, Seoul 03132, Korea . 머리말 . 북원공차의 발전 . 북원공차의 茶文化史的 위상 . 맺음국문초록 본고에서는 北苑貢茶茶文化史的 발전과 位相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송대의 북원공차는 중국의 차문화사에서 그 이전 및 그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 황실에서의 차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으며, 飮茶풍습도 넓게 확산되고 先導하였다. 북원공차가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요인은 송대의 공차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송대 북원공차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에 대한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導出해 냈다. 첫째, 송대 북원공차는 의 생산시기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으며, 공차생산의 技術發展에 크게 기여하여, 공차생산은 황제의 기호에 따라 50여종의 품종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둘째, 공차 및 사차로 인하여 鬪茶 및 도자 기술이 발달하였고, 민간의 차생산과 차 제 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飮茶풍습의 大衆化로 일상생활에 必需品化 되었고, 茶館茶坊 商業的 茶文化空間이 발달하 였다. 넷째, 차문화적인 측면에서 詩書畵 茶藝術이 발달하였다. 차문화는 복합적 문화로서 오관을 충족시키는 예술이다. 차가 마시는 기 능을 넘어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종합적인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아, 茗宴茶宴會鬪茶 등을 하며 차문학의 소재가 되어 주된 茶風을 이 루었다. 御茶園北苑貢茶로 인하여 송대의 차 관련 주요문헌이나 茶詩 등 차문학의 초석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송대 차문화, 차산업, 北苑貢茶, 鬪茶, 차예술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Bukwon Tribute Tea, and its tea culture development and position. Song Dynasty Bukwon tribute tea made royal tea culture flourish more abundantly than any other times of China’s history of tea culture. The custom of tea drinking was widespread, and promoted. The reason for speaking highly of Bukwon tribute tea is considered attributable to Song Dynasty’s policy for tribute tea, and the findings of this study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 First, Song Dynasty tribute tea advanced the tea production time, contributed greatly to the development of tribute tea production technology, and some 50 diverse types of tea were developed according to the Emperor’s tastes. Second, tribute tea and private tea helped the development of tea fight and ceramic war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the private-sector tea production and tea making. Third, the custom of tea drinking was popularized, making tea a daily necessity, and commercial tea culture spaces such as tea houses and tea rooms were developed. Fourth, culturally, tea arts such as poem writing and painting were developed. Tea culture, a comprehensive culture, is a form of arts that satisfies five senses of humans. Tea, more than a drinking food, was established as a comprehensive culture that could be enjoyed, promoting tea sprout feast, tea feast and tea fight, and creating a tea fashion involving tea literature. Bukwon tribute tea at Royal Tea Garden created the foundations for tea * Corresponding Author: You Su-Hyeon, E-mail: [email protected], Tel: 82-32-678-1332 한국예다학 창간호 pp.4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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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유 수 현*41)

    만시태학당 원장

    Bukwon Tribute Tea and Its Tea Culture Development and Position in Song Dynasty

    You, Su-Hyeon*

    Director of Mansi Village School, Seoul 03132, Korea

    목 차

    Ⅰ. 머리말Ⅱ. 북원공차의 발전Ⅲ. 북원공차의 茶文化史的 위상Ⅳ.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北苑貢茶의 茶文化史的 발전과 位相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송대의 북원공차는 중국의 차문화사에서 그 이전 및 그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 황실에서의 차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으며, 飮茶풍습도 넓게 확산되고 先導하였다. 북원공차가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요인은 송대의 공차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송대 북원공차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에 대한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導出해 냈다. 첫째, 송대 북원공차는 茶의 생산시기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으며, 공차생산의 技術發展에 크게 기여하여, 공차생산은 황제의 기호에 따라 50여종의 품종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둘째, 공차 및 사차로 인하여 鬪茶 및 도자 기술이 발달하였고, 민간의 차생산과 차 제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飮茶풍습의 大衆化로 일상생활에 必需品化 되었고, 茶館⋅茶坊 등 商業的 茶文化空間이 발달하였다. 넷째, 차문화적인 측면에서 詩書畵 등 茶藝術이 발달하였다. 차문화는 복합적 문화로서 오관을 충족시키는 예술이다. 차가 마시는 기능을 넘어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종합적인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아, 茗宴⋅茶宴會⋅鬪茶 등을 하며 차문학의 소재가 되어 주된 茶風을 이루었다. 御茶園의 北苑貢茶로 인하여 송대의 차 관련 주요문헌이나 茶詩 등 차문학의 초석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 송대 차문화, 차산업, 北苑貢茶, 鬪茶, 차예술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Bukwon Tribute Tea, and its tea culture development and position. Song Dynasty Bukwon tribute tea made royal tea culture flourish more abundantly than any other times of China’s history of tea culture. The custom of tea drinking was widespread, and promoted. The reason for speaking highly of Bukwon tribute tea is considered attributable to Song Dynasty’s policy for tribute tea, and the findings of this study reached the following conclusion. First, Song Dynasty tribute tea advanced the tea production time, contributed greatly to the development of tribute tea production technology, and some 50 diverse types of tea were developed according to the Emperor’s tastes. Second, tribute tea and private tea helped the development of tea fight and ceramic war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the private-sector tea production and tea making. Third, the custom of tea drinking was popularized, making tea a daily necessity, and commercial tea culture spaces such as tea houses and tea rooms were developed. Fourth, culturally, tea arts such as poem writing and painting were developed. Tea culture, a comprehensive culture, is a form of arts that satisfies five senses of humans. Tea, more than a drinking food, was established as a comprehensive culture that could be enjoyed, promoting tea sprout feast, tea feast and tea fight, and creating a tea fashion involving tea literature. Bukwon tribute tea at Royal Tea Garden created the foundations for tea

    * Corresponding Author: You Su-Hyeon, E-mail: [email protected], Tel: 82-32-678-1332

    한국예다학 창간호 pp.49-61

  • 50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literature including tea poetry and major tea-related literature in Song Dynasty. key words: Tea culture in Song Dynasty(宋代 茶文化), Tea industry(차산업), Bukwon Tribute Tea(北苑貢茶), Tea fight(鬪茶),

    Tea arts(차예술).

    Ⅰ. 머리말

    宋代(960-1279) 차문화의 형성배경으로는 정치적 변화와 기후변화 및 인구증가, 경제적 변화, 사회문화적 변화, 공차제도의 흥성, 투다풍습의 일반화 등으로 거론할 수 있다. 송대의 차문화는 매우 화려하고 번성했던 시기였다. 송대에는 황제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飮茶풍습이 널리

    확산 되었고, 지리적 계층적 구분을 탈피하고 보편화 하여 차는 미염(米鹽)과 같이 하루도 없으면 안 되는 日用之物로 일상화 되었다. 송대의 차문화는 唐代에 비해 파격적으로 증가된 茶稅⋅茶專賣⋅賜茶⋅貢茶제도와 어차원(御茶園)확대 조성 및 투다(鬪茶)풍속 등을 송대 차문화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송대는 당대의 연평균기온보다 2∼3도가 낮아졌다. 특히 寒氣에 의해 차나무의 피해가 심했고, 찻잎의 생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절강성의 호주(湖州)와 고저(顧渚)에서 헌납하는 찻잎은 청명절 전에 首都[개봉]로 운송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헌납하는 進貢茶의 생산지는 자연히 남쪽으로 옮겨 建安(복건성 건구시)의 북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北苑은 공차생산지로 되면서 송대에서 茶生産을 선도하는 지역으로 되었다.

    北苑地域은 현재의 복건지역으로 서쪽으로는 건안의

    회계20리 근방에서 동쪽으로는 동궁 백리 너머까지를 포함한다.1) 북원은 南唐(937-975)부터 원나라(1271-1368)때 까지 300여년(336년)간 황실전용의 다원인 어차원이 있었던 지역이다. 건안의 북원차는 당(618-907)말 부터 남송(1127-1279)말까지 400여 년에 걸쳐 제다기술과 차의 종류 및 품목개발에서 황제의 기호에 맞게 다양하게 발전되었으

    며, 북원지역의 차는 당말 이후 중국대륙의 기온저하로 인하여 우수한 차 생산지가 되었다. 建安(복건성)지역의 북원차는 五代(907∼960)에 들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송대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주로 공차가 생산되었던 북원지역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당나라 말부터 중국대륙의 평균기온이 강하하면서 차의 주생산지가 양자강 일대에서 남쪽의 건안 지역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북원지역은 송나라 공차생산의 중심지였으며, 공차가 가지는 특성, 예를 들어 새로운 생산품의 개발 및 생산방법의 개선 등 차생산의 기술적 측면을 선도했던 것이다.

    송대의 생산되는 차는 크게 民間茶園과 官營茶園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관영다원은 조정에서 파견된 전운사라는 관리에 의하여 차의 모든 생산이 이루어졌

    으며 생산품은 지체 없이 황제를 비롯한 궁중으로 공납 進

    上되었다. 본 논문은 송대를 중심으로 공차생산의 기술개발에 따른

    북원공차 산업발전과 차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찰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송대 북원공차에 대하여 중국 다서 및 茶事에 나타난 북원지역의 공차산업을 분석함으로써 북

    원공차의 실체를 재구성하고 송대 차산업에서 북원공차가

    차지하는 차문화사적 位相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자한다.

    Ⅱ. 북원공차의 발전

    북원공차는 硏膏茶로부터 시작되어 龍團⋅鳳團 그리고 小團⋅密雲龍⋅瑞雲祥龍⋅과차(銙茶)의 순으로 계속해서 정밀해지고 화려하게 다양한 변화를 꾀하였다. 북원공차의 생산지인 북원(건안)지역은 당대에 육우(733-804)가 쓴 茶經이나 배문(裴汶)이 쓴 다술(茶述)(8세기)에서 모두 북원지역에 대해 논하지 않았으며, 북원차는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북원의 차가 으뜸으로 평

    가를 받기 시작했다. 오대 때에 전촉의 사신인 모문석이 쓴 다보에서 건안에 자순차가 있음을 언급하였다.2) 송 왕조에서 공차지로 북원지역을 선정한 것은 건안의 북원차가

    품질이 특히 좋았기 때문이다. 송대 북원지역 어차원에서는 차 재배 및 제다기술이 발달하였고 독특하였다는 것은 송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차산업이 발전하여 새로운 차가 나오면 황실에선 이전 순위의 차는 다음의 등급으로 밀려났

    고, 따라서 북원의 어차원에선 새로운 공차로 생산량을 증가시켜 진공하였다. 본장에서는 공차제도 발전 및 북원공차의 발전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송자안의 동계시다록에 의하면 동계지역은 광의로는 오늘날 복건성의 건안 지역에서 북원 및 그 주변 지역 전체를 총칭하는 것이다. 즉 동계지역은 북원, 증갱, 석갱, 학원, 엽원, 불령 및 사계 등 7개 지역을 총칭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로서는 차 생산지로서 알맞은 지역, 즉 북원의 봉황산으로부터 남으로는 고죽원두까지 동남으로는 장갱두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원의 지리적 위치는 봉황산 일대를 중심으로 공차를 생산하는 관배가 있었던 전지역을 통털어 불렀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2)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 “陸羽 茶經 裴汶 茶述 皆不第建品. 說者但謂二子未嘗之閩. 而不知物之發也. 固自有時. 蓋昔者山川尙閟. 靈芽未露. 至于唐末. 然後北苑出爲之最. 是時. 僞蜀詞臣毛文錫作 茶譜亦第言建有紫筍.”

  • 유 수 현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 51

    1. 공차제도의 발전

    1) 공차의 기원 및 전개

    공차에 관해서는 상거의 화양국지(華陽國志)3) 「파지(巴志)」에서 “周武王 發이 銀나라의 紂王을 토벌하고 巴⋅蜀의 나라를 얻었다. … 곡물, 가축, 뽕나무, 누에, 삼베, 모시, 물고기, 소금, 구리, 청, 단사, 차, 꿀, 영귀 등의 특산물을 공납 받았다. 남안과 무양에는 모두 좋은 차가 난다.”4)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중국의 음다역사와 周代의 음다기원 및 공차를 가늠케 하는 최초의 자료이다. 당 광덕(廣德)연간(763∼764)부터 시작된 공차는 송대 공차의 모태가 되었으며, 明朝 홍무(洪武 8년; 1375년)에 파공(罷貢)되기까지 6백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공차는 新唐書5) 「地理志」에도 당조 무덕 3년에 차를 조정에 바쳤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당대의 공차는 실제 차세금의 다른 한 형식으로 일종의 정액실물

    세이며,6) 공차지역은 5道17郡(5道17州府)7)으로 기록되어있다.8) 당대부터 존재하였던 공차제도는 장순민(張舜民)의 화만록(畫墁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당나라의 차품이 있는데 양선차를 공납한다.”9)라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공차인 고저 자순차(顧渚 紫笋茶)는 당대에 이미 널리 알려졌으며, 주변국가로 전파되었다. 결국 당대의 공차제도는 국가 주요세원을 확보하게 하였으며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

    어 견당사들을 통해 차는 물론 茶具까지도 각국으로 전파

    시켰다. 당대는 권력에 의하여 세금의 형태로 茶를 징수하

    는 일종의 현물세 또는 실물세로 도입되었으나,10) 송대에 들어서는 차생활 문화 확산으로 통치계층의 차 수요에 대

    응하는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송대는 공차제도를 실시하면서 여러 지역에서 進貢을

    받았던 당대와는 달리, 어차원(御茶園)을 北苑에 한정시켰다.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에 “황실에 진공하던 단차는 용봉무늬를 새겨 민간의 차와 구별하였고, 용⋅봉차는 태평흥국(976-983) 초년에 용과 봉황 무늬의 틀을 갖추고 사신을 북원에 보내 단차를 만들게 하였다.”11)고 하였으며, 구양수의 귀전록에 의하면 “용봉단차 한 개의 가치가 金二兩이며, 금은 가이 구할 수 있었으나 차는 구할 수가 없다”12)고도 하였다. 조여려의 북원별록에도 “龍園勝雪은 최고로 精巧하다. 建人들은 4만전의 가치가 있다”13)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북원에서 만들어진 용봉단차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최상의 進貢茶로서 황제의 기호에 알맞

    게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송대 공차는 당대의 기초위에 비교 크게 발전되었다. 역

    사상 絶後의 貢茶院인 건안지방의 북원공배소가 건립되므

    로 당연히 송대 강소⋅사천⋅강서貢茶院 등은 폐하여 없어졌다. 북원지역 공차소는 규모가 거대하여 남당부터 점차 늘어 民官 1,336茶焙所가 있었다.14) 또 황실에 진공하는 북원공차는 종류가 50여 품목15)에 이르고 있으며, 차의 품목이 다양화됨으로써 용⋅봉단차는 더욱 화려해지고 고급화되었다. 또 공차도 ‘進貢하는 것은 건주의 용봉단차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공차지역이 차 재배에 기후조건이 알

    3) 화양국지(華陽國志)는 중국 동진(東晉) 영화(永和) 11년(355년)에 상거(常璩)에 편찬된 화양(華陽) 즉 파(巴), 촉(蜀), 한중(漢中)의 지리지이다. 고대로부터 진나라(晉)까지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쓰여 있고, 연혁과 산물(産物)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

    4) 常璩, 華陽國志 「巴志」, “… 武王旣克殷. 以其宗姬於巴, 爵之以子, 古者遠國雖大, 爵不過子, 故吳, 楚及巴皆曰子, 其地東至魚腹. 西至 楚道. 北接漢中. 南極黔涪, 上植五穀. 牲具六畜, 桑, 蠶, 麻, 紵, 魚, 鹽, 銅, 鐵, 丹漆, 茶, 蜜, 靈龜, 巨犀, 山雞, 白雉, 黃潤 鮮粉, 皆納貢之. 화양국지 파지 涪陵郡. 巴之南鄙, ……無蠶桑, 少文學, 惟出茶, 丹漆, 蜜蠟, ……蜀志 什邡縣, 山出好茶, 南安 武陽 皆出名茶.”,中國茶葉歷史資料選集, p.205.

    5) 신당서(新唐書)는 북송 인종이 구당서(舊唐書)의 내용이 충실치 못하다고 하여 구양수 등에 명하여 1044년-1060년에 걸쳐 완성한 당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이십사사 중 하나에 속한다.

    6) 夏濤 主編, 중화차사, 안휘교육출판사, 2008. pp.69-70. ; 郭孟良, 中國茶事, 山西古籍出版社, 2006, p.45. 7) 郭孟良, 中國茶事, 山西古籍出版社, 2006, p.45.8) 新唐書 唐朝貢茶地區 : “하북도 懷州河內郡(今河南泌陽), ; 산남도 峽州夷陵郡(湖北宜昌), 歸州巴東郡(湖北秭歸), 夔州雲安郡(四川奉節),

    金州漢陰郡(陜西安康), 梁州漢中郡(陜西南鄭) ; 회남도 壽州壽春郡(安徽壽縣), 廬州廬江郡(安徽合肥), 蘄州蘄春郡(湖北蘄春), 申州義陰郡(河南信陽市南) ; 강남도 常州晉陵郡(江蘇常州南宜興), 湖州吳興郡(浙江吳興), 睦州新定郡(浙江建德), 福州長樂郡(福建福州), 饒州鄱陽郡(江西波陽), 黔中靈溪郡(湖南沅陵) ; 검남도 雅州盧山郡(四川雅安), 等等.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서문, p.24. ; 김명배, 中國의 茶道, 명문당, 1993. p.30.

    9) 장순민의 畫墁錄에 이르기를 “당나라의 차품이 있는데 양선차를 공납한다. 건계북원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정원중(785-805) 상연이 건주자사가 되어서 처음으로 쪄서 덖고 갈았으며, 이것을 연고차라 했다.” 張舜民 畫墁錄 云. ‘有唐茶品. 以陽羨爲上供. 建谿北苑未著也。貞元中. 常兗爲建州刺史. 始蒸焙而硏之. 謂硏膏茶’, .

    10) 夏濤 主編, 중화차사, 안휘교육출판사, 2008, pp.69-70.11) 熊蕃, 선화북원공다록, “太平興國初, 特置龍鳳模, 遣使卽北苑造團茶, 以別庶飮, 龍鳳茶蓋始於此.”, 中國古代茶道秘本50種1책, 신화서점

    북경발행소, 2003, pp.290-291. ; (影印)文淵閣 欽定四庫全書, 844책-p.637.12) 구양수(歐陽脩), 귀전록 ; “重一斤 其價直金二兩 然金可有 而茶不可得. 13) 趙汝礪, 北苑別錄, “龍園勝雪爲最精 而建人有直四萬錢之語.”; 中國茶葉歷史資料選集, p.84. 14) 夏濤 主編, 중화다사, 안휘교육출판사, 2008. p.117.15)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85.

  • 52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맞은 황실용 전용 다원이 있는 건안지역으로 제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북원지역에서 생산된 공차는 태조 태평흥국 2년부터 제

    조되기 시작하여 전운사인 채양, 황유, 여혜경, 웅번, 조여려 등등에 의해 철저한 감독으로 제조되어 황실에 진공되

    었다. 제품으로는 大龍團, 小龍團, 密雲龍, 瑞雲翔龍, 白茶, 三色細芽, 試新銙, 貢新銙 등 수십 종류가 있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신품이 계속 잇달아 제조되었고 휘종 때에는 공차가 궁정으로 운반되는 순서로 차의 운송조

    직인 ‘강(綱)’의 순번도 세색오강과 추색칠강으로 합하여 12강이 조직되어 여름까지 진공이 계속되었다. 휘종 선화연간 때 북원 공차의 양은 약 47,100근으로 철종 원부년간때(18,000근)의 2.6배였고, 인종때(15,860근)의 3배였으며, 당나라 건중2년(781년, 3,800근)에 비해서는 무려 13배 정도의 수량이 진공되었을 정도로 융성하였다.16)

    그러나 송대에 천하제일로 회자(膾炙)되던 차였으나 후대에 그 맥을 잇지 못하고 한 시대에 그치고 말았다. 지나친 공차로 貢茶民의 생활이 어려웠고, 경제적으로 나라에서 차를 전매하니 茶稅金이 너무 많아 공차민의 반발이 일

    어났으며, 민중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사치스런 차의 제조는 일부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로 단차 한 편을

    만들기 위해 茶農夫들의 노역이 너무 심하여 쇠퇴하는데

    일조를 했다. 송대의 공차에 대하여 몇몇 다서에 기록된 공차의 종류와 그 화려함 그리고 봉건적 착취라는 측면에서

    공차의 쇠퇴를 알 수 있다.

    2) 공차의 下賜(賜茶) 문화

    사차(賜茶)란 공납된 차를 다시 관료에게 하사하여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데, 양억의 담원에 의하면 “貢茶는 황제의 玉食으로 제공되고 또한 執政⋅親王⋅長主에게 하사하였다. 나머지 皇族⋅學士⋅將帥에게는 대개 鳳茶를, 舍人⋅近臣에게는 京挺차와 的乳차를 하사했고, 舘閣 즉, 翰林에게는 白乳차를 하사하였다.”17) 라고 하였다. 進上된 龍茶는 황제나 황태자, 공주 전용품 이었으며, 鳳茶는 그 외의 황족이나 대신 장군용으로 사용하였다.

    황제가 북원에서 생산한 차를 封建時代의 등급에 따라

    나누어 주는 관습은 貢茶制度가 정교해진 송대의 상황이

    다. 또 황제의 ‘사차’는 대신, 관료들뿐 아니라 서민이나 승도에게도 행해졌으며, 異民族에게도 행해졌다. 그러므로 송대 황실에 의하여 主導된 貢茶정책은 차의 생산과 소비

    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공차의 생산측면에서는 황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끊임없는 품질경쟁이

    이루어졌으며, 소비측면에서 황실의 賜茶는 민간의 음다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황실에서의 차는 단순한 음료 그 이상으로, 정치적으로는 군신간의 충성을 맹세하며, 경제적으로 나라의 稅源을 담당하는 등 황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

    이다.

    2. 북원지역 공차산업 발전

    1) 북원지역 御茶園과 茶産業 발전

    건안지역 북원은 황실용 차밭인 어용다원을 조성하여 황

    실 공납용 공차를 관리하는 새로운 유명한 차산업지로 주

    목 받았다. 황유의 품다요록에 “북원은 왕실의 차밭과 御焙所가 높고 넓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신령의 가호로, 폭 넓은 음덕을 받았다”18)고 까지 하였다. 송대 공차산업지인 북원 어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차산업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첫째, 차생산의 생태적 조건 즉, 기후⋅지세⋅토양 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그 동안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재배기술이 唐代에 비해 크게 발전 되었다. 둘째, 다원의 경영형태를 보면 북원지역은 황실용 어차원이 있었던 유일한 지역으로 어차원의 비중이 증가되면서 차산

    업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셋째, 제다기술면에서 당대에는 團⋅餠茶 주도였으나 송대에 들어서는 황실 진공용 공차인 용봉단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공차의 발전을 매개로

    화려하고 다양한 여러 종류의 名茶를 생산하였다. 조여려의 北苑別錄에 따르면 “송초 태평흥국 年間

    에 북원에 황실전용의 御茶園이 만들어졌고 용봉단차 등

    을 만들어 진상하였으며, 북원 일대의 어차원은 46개소가 있었다”19)고 하므로 다원과 茶焙所(차 제조공장)의 盛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송대 북원에서 만들어진 용봉단차는 대개 그 제조법이 까다롭고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 황

    제 이외의 사람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20) 어차원 현황을 살펴보면 송대 북원공차의 다원은 민관다원이 1,336곳이라고 하였고,21) 이 중 관에서 운영하는 어차원은 46곳이었다.

    16) 서은미, 「북송대 복건납차와 다법」, 역사학보 제173호(2002.3), pp.175-176.17) 楊億, 談苑, ; 龍茶以供乘輿. 及賜執政, 親王, 長主, 餘皇族, 學士, 將帥皆鳳茶. 舍人, 近臣賜京挺, 的乳. 館閣賜白乳. 建安志載 談苑

    云. “京鋌, 的乳 賜舍人, 近臣, 白乳, 的乳 賜館閣, 疑京挺誤金挺, 白乳下遺的乳.”

    18) 황유의 품다요록 ; “御焙占此大岡巍隴. 神物伏護. 得其餘蔭耶.”19) 조여려의 북원별록, 어차원 관배 46개소 ; 中國古代茶道秘本50種1책, pp.207-208. ; (景印)文淵閣 欽定四庫全書, 844책-pp.647-648. ; 진조

    규⋅주자진,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85.20) 서정임, 「당대 문인의 다도관 연구 : 육우를 중심으로」, 원광대박사논문, 2009. p.29.21) 陣宗懋 主編,中國茶葉大辭典, 中國輕工業出版社, 2011. p.5.

  • 유 수 현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 53

    특히 공차의 주요산지는 송대로 들어서면서 기온변화로 인

    하여 북원지역으로의 공차생산지가 이동되었다. 송자안의 동계시다록의 의하면 송대 북원공차의 官焙

    所는, 북원 증갱, 석갱과 부속 된 건계의 제다소는 32곳22)

    이 있는데, 북원이 그 첫 번째라고 하였다.23) 건안에서는 그 북쪽 동산에 황실전용의 찻잎을 생산하는 어차원과 용

    배소 등 茶焙所를 설립하고 조정에서는 전운사를 두어 차

    밭을 운영하며 관리하여 茶産業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이 북원에는 황실용 다원인 46곳의 御茶園과,24) 32곳의 茶焙所25) 등 民官茶園의 경영형태도 크게 변화되고 발전되었다.

    2) 茶葉 채취 기술에 대한 연구 심화

    동계시다록 「採茶」조에는 채다시기, 채다시각, 채다방법 등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26) 즉 채다시기에 대하여, “민간에서는 경칩을 절기로 삼아 건계차는 他郡지역에 비해서 제일 먼저 따며, 북원, 학원(壑源)의 것은 더욱 이르다.”27) 채다 시각에서는 “모든 제다소는 북원보다 반달 뒤에, 더 먼 곳은 더욱 늦게 딴다. 무릇 차 따기는 반드시 아침 일찍 시작해야지, 태양이 뜨면 안 된다. 해가 나면 이슬이 스러지는데, 햇볕에 건조해지면 곧 싹의 기름진 고가 안에서 소모해지는 경우가 생겨난다. 차는 물기를 머금게 되면 선명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아침 일찍 하는 게 최고이다. 민간에선 항상 봄철 아지랑이가 끼고 흐린 날을 차 따기 호시절로 여긴다. 해가 나서 채집하면 곧 싹 잎이 쉬이 摩損되기 때문에, 건안 사람들은 이를 일러 차 따기가 신선하지 못하다고 하였다.”28)고 하였으며, 채다방법으로는 “싹을 딸 땐 반드시 손톱으로 따야지 손가락으로 해

    선 안 된다. 손톱으로 하면 속히 따서 부드러워지지 않고, 손가락으로 하면 온기가 많아서 쉬이 마손되기 싶기 때문

    이다”29)라고 하였다. 대관다론 「采擇」조30)에서도 “차는 동틀 무렵 따고

    해가 보이면 멈춘다.31) 손톱을 써서 움을 끊고, 손가락으로 주물러 따지 않음은, 땀기운 등 더러운 냄새가 스며들어, 차가 깨끗하지 못할까 하는 염려에서이다.”32) “무릇 차 움이 참새 혀나 곡식낱알과 같은 것은, 品質 겨루기 감으로 하고, 일창일기(한 싹에 한 잎)는 간아로 하고, 일창양기(한 싹에 두 잎)는 중아라고 한다. 이 나머지는 하등으로 삼는다. 차 움이 萌發하기 시작하면, 白合이 있고, 이미 차 잎을 따면 烏蔕가 생긴다. 가공 할 때에 白合을 버리지 않으면 차 맛을 해치고, 오체를 제거하지 않으면 차의 빛깔을 해친다.”33)고 차 따는 방법을 묘사하는 등 찻잎을 따는 기술적인 면에 대해 여러 다서에서 상세히 기록하였다.

    3) 공차의 고급화에 따른 제다기술 발달

    송대 북원에서는 황실진공용 용봉단차라는 까다롭고 화

    려한 차를 제조하였다. 고급화에 따른 제다기술이 발달되면서 황실진공용으로 정밀하고 화려한 용봉단차를 제다하는

    등 기술의 변화가 촉진되었다. 조여려의 북원별록에 나타난 북원공차의 제다과정은34) ①차판 벌이기(開焙), ②찻잎따기(採茶), ③찻잎 가리기(揀茶), ④採葉 후 찻잎 세척, ⑤찻잎 찌기(蒸茶), ⑥쪄낸 찻잎의 세척, ⑦찻잎 짜기(榨茶), ⑧차갈기(硏茶), ⑨차만들기(造茶), ⑩차말리기(過黃) 등 세밀한 제다공정을 10여 조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황유의 품다요록에서의 제다방법으로 “찻잎의 채취 및 선별의 적기를 놓칠 때, 백합(白合)이나 도엽(盜葉)

    22) 진조규⋅주자진,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p.33-34.23)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 “北苑 建谿之焙三十有二. 北苑首其一.”24) 조여려의 북원별록 「御園」조에는 內園과 外園 46곳의 지명이 명시되어 있다. 내원에는 ‘구과십이롱’부터 ‘관평’까지 22곳의 관영다원과, 외원에는

    ‘상하관갱’부터 ‘소산’ 까지 24곳의 어차원이 있다. ;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135.25)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隄首七閩」조에 나오는 지명으로 15곳을 서술하고. 관배 32곳을 거론하였다.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33, p.135.

    26)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 “採茶 辨茶須知製造之始, 故次, 建谿茶. 比佗郡最先. 北苑壑源者尤早. 歲多暖則先驚蟄十日卽芽, 歲多寒則後驚蟄五日始發, 先芽者氣味俱不佳. 唯過驚蟄者最爲第一, 民閒常以驚蟄爲候, 諸焙後北苑者半月. 去遠則益晩, 凡採茶必以晨興. 不以日出, 日出露晞. 爲陽所簿. 則使芽之膏腴. 出耗於內. 茶及受水而不鮮明. 故常以早爲最, 凡斷芽必以甲. 不以指, 以甲則速斷不柔. 以指則多溫易損, 擇之必精. 濯之必潔. 蒸之必香. 火之必良. 一失其度. 俱爲茶病.”, 진조규⋅주자진,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33.

    27)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採茶」 ;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55.28)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55.29) 유수현, 위의 논문, p.55.

    30) 휘종의 대관다론 「采擇」조: “擷茶以黎明. 見日則止, 用爪斷芽. 不以指揉. 慮氣汗熏漬. 茶不鮮潔, 故茶工多以新汲水自隨. 得芽則投諸水, 凡芽如雀舌穀粒者爲鬪品, 一槍一旗爲揀芽. 一槍二旗爲次之. 餘斯爲下茶. 茶始芽萌. 則有白合. 其擷則有烏蔕, 白合不去害茶味. 烏蔕不去害茶色.”, 진조규⋅주자진,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42.

    31) 휘종의 대관다론 「采擇」, “擷茶以黎明. 見日則止.” 32) 휘종의 대관다론 ; 유수현, 위의 논문, p.61.33) 유수현, 위의 논문, p.156.

    34) 조여려의 북원별록 ; 진조규⋅주자진,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84.

  • 54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등 가짜를 섞을 때, 설익게 찔 때, 지나치게 찔 때, 솥이 탈 때, 익은 찻잎을 제 때에 만들지 않을 때, 다고35)를 잘못 짤 때, 차를 잘못 말릴 때, 학원(壑源)과 사계(沙溪)의 제품에 관한 판별” 등36) 제다과정에서 ‘차의 採造에 대한 득실, 비교시험에서 나타난 우열 등’을 차례대로 열 가지의 설명을 통해, 그 병폐를 논하여 제다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또 송자안의 동계시다록에서는 ‘채다시기부터 채다방법, 차싹의 감별법, 다고를 제거하는 방법 등 차의 제다에서 차의 병통10가지를 설명하고 있다.37) 채양은 다록에서 “송대 단차 제조의 특징은 ‘茶色貴白’38)이라 하여 백색의 차를 귀하게 여겼고 백색차를 만들기 위해 찻잎을 쪄

    서 搾機[짜는 틀]에 넣고 차의 진액인 다고를 짜내었다.”39) 그러나 완성된 차의 탕은 하얗게 거품으로 일어나지만 차의 진정한 맛과 향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진공할 때는 향을 돋우기 위해 다른 사향이나 용뇌향 등을

    약간 섞어 膏를 만들어 그 향기를 돋우고자 하였다.40) 이와 같이 송대 북원에서는 공납차의 고급화에 따른 製茶技

    術이 발달되면서 황실진공용으로 정교하고 화려한 용봉단

    차를 제다하는 등 기술의 변화가 촉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북원에서의 다양한 공차 개발

    북원공차의 다양한 제품별 단차를 살펴보면, 송대의 차 종류는 크게 산차와 편차로 나눌 수 있다. 송대 차의 종류로는 ①硏膏茶 ②龍⋅鳳團茶 ③小團茶 ④臘面茶 ⑤白茶 등 과 貢新銙, 試新銙, 龍園勝雪, 御苑玉芽, 萬壽龍芽, 上林第一, 乙夜淸供, 無比壽芽 등 선화북원공다록과 북원별록에서 北苑에서 생산된 貢茶 50여 종의 용봉단차 품명을 거론하고 있다.41)

    건안에는 남당(937-961)으로부터 해마다 6곳의 군현민들을 거느리고 採茶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남당 때부터 건안 官焙에서 다양한 공차가 생산 제조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차의 종류도 처음에는 연고차를 만들고 이어서 계속 납면차를 만들었으며, 그 제품에서 가장 좋은 것을 경정(京鋌)이라고 불렀다. 북송 태조시기인 태평흥국

    (976-984)초에 이르러 특별히 용과 봉황무늬를 새긴 틀을 만들고 조정에서 사신을 북원에 파견하여 용봉과 같은 단

    차를 만들어 백성들이 마시는 차와 구분을 지었다. 용봉차는 이때부터 비롯한 것이며 至道(995-997)년간 주요공차는 石乳 的乳 白乳 등 공차 수는 50여 편에 달하였다.

    인종(1023-1063) 경력(1041-1048)년간에 채군모가 건주의 지사가 되어 차의 정밀한 것을 가리고 분별하기 시작하

    였다. 소용단 10근을 만들어 헌공했으며, 한 근을 10병(十餠)으로 했다.

    구양수의 歸田錄에 “차의 품질로 용봉차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이것을 小團이라 했다. 무릇 28편에 무게가 1근이며 값은 금2냥이다.”라고 할 정도로 귀한 공차를 개발하여 진공하였다. 신종 원풍년간(元豊;1078-1085)에는 새롭게 밀운룡차를 만들어 진상했으며, 황정견의 황산곡에는 이를 13인이 갈아 마셨다는 기록도 보인다.

    소성(紹聖)년간(1094-1098)때 채조(蔡絛)가 편찬한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는 “철종조(1086-1100)에 다시 서운상룡(瑞雲翔龍)차를 진상했는데, 어부(御府)에서는 해마다 12병을 얻는데 그쳤다.” 단차는 점차 늘어 원부년간(1098-1100)때에 이르러 편수는 18,000개나 되었고 초기에 비하면 몇 갑절이 되었으나 아직 번성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선화년간 공차 수가 47,100편에 달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휘종 대관년간(1107-1110)에는 일창일기로 만든 백차와 간아, 수아, 어원옥아, 만수용아, 무비수아, 시신과 등을 제조하였고, 휘종 정화년간(1111-1117)에 공신과, 시신과를 제조하였으며 차나무 3만 그루 증식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선화년간(1119-1125)엔 백유⋅적유⋅석유 등을 폐지하고 20여종의 花銙를 제조하였으며, ‘茶色貴白’으로 다고를 다 제거했으므로 처음에는 용뇌향이나 사향등을 섞

    었다. 다양한 단차의 오묘는 휘종때 ‘용원승설’에 이르러 극치에 도달했다. 무릇 은선수아는 선화연간에 비로소 나왔으며, 용원승설차와 백차가 쌍벽을 이루었다는 것. 또 거듭하여 어원옥아 이하의 품종이 실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건안에서는 그 북쪽 동산에 황실전용 찻잎을

    생산하는 茶焙所를 설립하고, 전운사라는 직책을 두어 철

    35) 류건집은 膏를 7가지로 정의하였다. “첫째는 어떤 액체를 고아 졸여서 엉기게 한 즙의 뜻으로 茶膏를 예로 들었다. 둘째는 걸쭉하고 풀 같은 뻑뻑한 모양이라는 뜻으로 점다에서 調膏의 상태이 다. 셋째는 찻잎속의 차즙이다. 넷째는 肥肉으로 살찐 고기의 뜻이다. 다섯째는 사물의 精華란 뜻이다. 여섯째는 潤澤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일곱째는 떡차의 표면으로 스며나와 번질거리는 기름기이다.”, 류건집, 宋代茶書의 註解상권, 이른아침, 2012, p.137.

    36) 황유의 품다요록에서는 「채조과시(采造過時) 백합도엽(白合盜葉) 입잡(入雜) 증불숙 (蒸不熟) 과숙(過熟) 초부(焦釜) 압황(壓黃) 지고(漬膏) 상배(傷焙) 변학원사계(辨壑源沙溪)」 등을 기록하고 있다.

    37)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55.38) 채양의 다록 「色」조, “茶色貴白. 而餠茶 多以珍膏油去聲其面. 故有靑黃紫黑之異, 善別茶者. 正如相工之瞟人氣色也. 隱然察之於內. 以肉

    理潤者爲上, 旣已末之. 黃白者 受水 昏重. 靑白者 受水鮮明. 故建安人 開試. 以靑白勝黃白”, 진조규⋅주자진,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 북경; 농업출판사, 1981. p.30.

    39) 채양, 다록, “色 茶色貴白. 而餠茶 多以珍膏油去聲其面.”, 中國古代茶道秘本50種권2, p.856.40) 채양, 다록, “香 茶有眞香. 而入貢者微以 龍腦和膏. 欲助其香.”, 中國古代茶道秘本50種권2, p.856.41) 유수현, 위의 논문, p.85. p.184. ; 선화북원공다록의 51종 용봉단차 제품명.

  • 유 수 현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 55

    저하게 감독하며 50여 종의 용봉단차를 생산하고 세색5강과 추색7강으로 황실에 진공하는 등 공차생산에 주력하였으며, 공차의 생산은 황제의 기호에 따라 제품이 다양하게 발전되고 개발되었던 것이다.

    5) 北苑貢茶의 茶産地 및 生産量

    차의 산지에 관하여 살펴보면 남북조 시기(420-589)에 茶를 재배한 지역은 몇 곳에 불과하지만 唐朝시기 茶의

    생산은 이미 장강유역의 각 城에 보급되었음을 문헌을 통

    하여 알 수 있다. 또 唐⋅宋시기는 중국 고대의 茶생산 재배업이 크게 발전을 가져온 시기이다. 송대의 차산지 재배상황을 살펴보면 경영주체별로 관영다원, 私人지주다원, 寺院다원, 小農다원 등 4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송대의 다원은 民官茶園 포함하여 1,336곳이며, 어차원도 46곳으로 북원전체 땅 넓이의 30여 리가 된다.42)

    조여려의 북원별록에 의하면 “건계의 북원에는 茶焙所 32곳과 다원 25곳이 있으며, 송대에는 건안이라든지 북원 등의 차산지가 황실의 다원으로 경영되었다.”43) 송자안의 동계시다록에 “북원에는 황실용 어차원 46곳, 관영茶焙所 38곳(정위는 32곳이라고 하였다)과 관영다원 25곳”44)에 대한 지역에 대하여 상세히 거론하고 있다. 북원지역에는 황실용 차밭인 御茶苑을 조성하였고 따라서 어차

    원에서 생산한 공차는 건안의 북원 차문화가 발달하는데

    중심역할을 하였다. 차산지에 대하여 송자안은 동계시다록에서 관에서 운영하는 관배의 기록만 하였고, 私焙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은 없다. 다만 정위의 기록을 인용하여 건계차의 일들을 적고 있는데, 茶品기록에 대해서는 단지 북원 학원령((壑源嶺)만 언급하였고 官과 民의 제다소가 총 1,336개소 라는 총체적인 기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45) 송대의 차는 건안의 생산량이 가장 많았으며, 북원과 학원의 茶가 유명하다. 북원지역의 왕조별 생산 제작된 공차 생산수량은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을 참고하여 요약하면 과 같다.

    북원지역의 공차 중에서도 선화북원공다록과 북원별록에는 어차원에서 황실에 진공하는 45종의 공차의 수량과 순서까지 정하여 기록하였다. 즉, 세색 제1강(綱)부터 제5강까지 正貢은 6,423餠. 續添은 690餠, 共 7,113餠과 추색(麤色)은 제1강에서부터 제7강까지 입뇌자 21,460편, 불입뇌자 20,940편 등 추색합계가 42,400편이며, 一片

    당 평균1,034銙이다. 또 북원다배에서 생산된 연간 차는 해마다 48,613銙로 내배와 민간다배 등 방대한 수량이 생산되었으며, 세색공차 합계가 6213銙, 추색차 합계가 42,400片이었다.46) 그중에서 공신과(貢新銙)를 으뜸으로 삼았고 차 판을 벌인지 10일 만에 進貢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휘종 황제는 특히 백차와 용원승설을 가장 좋은 차로 여겼다. 공차 중에도 간아(揀芽)는 40떡을 1각(角)으로 삼았으며, 소용봉은 20餠을 1각으로 삼고, 부들의 싹으로 동여매고 붉은 실로 묶은 다음, 붉은 종이로 싸서 화려한 비단장식으로 봉했다. 다만 간아(揀芽;일창일기로 만든 차)만은 모두 황금색으로 포장하고 進貢하여 황제의 玉食으로 獻貢하였다. 모두 4만餠을 만드는데 淸明전에 만든 明前茶였다.

    Ⅲ. 북원공차의 茶文化史的 위상

    송대는 중국차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정치사 경제사

    는 물론 차문화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문헌을 통하여 볼 때 송대의 문인들은 차를 애호하고 즐겼을 뿐만 아

    니라 차를 고급문화로 생각하고 차생산량이 증가되어 茶稅

    制度 茶馬貿易 등이 시행되었다. 송대의 차문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차사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대는 중국의 차문화사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차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었고, 음다풍습도 넓게 확산되었다. 본 절에서는 송대 북원공차의 차문화사적 위상으로서 차산업 발전으로 鬪茶와 도시인구 밀집으로 인한 상업

    도시의 茶館문화 번창 및 시서화 등 차의 예술발달 등으로

    나누어 그 고찰하고자 한다.

    1. 차산업의 비약적 발전

    북원공차는 송대에 매우 발전하여 官營茶園으로써 중

    국차 생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대는 茶業의 발전 속도가 급진적으로 빨라져 생산면적이 당대에 비해 2∼3배 증가하였으며, 茶의 생산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당대의 차생산은 대체로 곡우를 전후로 하여 이루어졌으나, 송대 북원지역 어차원의 공차생산은 경칩을 전후로 생산되었으므

    로 약 1개월 정도 빨라졌다. 그리하여 공차는 해마다 두강(頭綱)차를 시작으로 10여 강(綱)으로 나누어 進上하였다.

    42)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31.43) 김수인, 청규와 차, 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54.44)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建溪之焙三十有二. 北苑首其一. 而園別爲二十五. 苦竹園頭甲之. 鼯鼠窠次之、張坑頭又次之.”, 中國茶葉歷史資

    料選集, p.34. ; 유수현 박사논문- p.54. p.136.45) 송자안의 동계시다록, “丁謂之記, 錄建溪茶事詳備矣. 至於品載. 止云北苑壑源嶺. 及摠記官私諸焙千三百三十六耳.”46) 石田雅彦, 茶の湯 前史の硏究, 東京: 雄山閣, 2003, pp.275-277. ;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199.

  • 56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북원지역의 왕조별 생산 제조된 공차47)

    왕조별 공차명 및 내용과 수량 출전 典籍

    태조

    태평흥국

    (976-983)

    어차원 설치. 용봉과 같은 단차. 태평흥국(976-983)초에 공차의 수는 50편이었다.

    선화북원공다록북원별록

    지도년간

    (995-997) 주요공차는 石乳⋅的乳⋅白乳였다. 선화북원공다록

    인종년간

    (1041-48)

    소룡 소봉 각 30근, 대룡, 대봉은 300근을 만들었다. 향을 넣지 않은 경정은 200근 납차는 15,000근-건주지역의 공납 용봉차는 820근이었다.

    王存의 元豊九域志중화다서

    〃 채군모가 소용단 10근을 만들어 헌공했으며, 한 근이 10병(十餠)이다. 용봉차는 8편을 한 근으로 하고, 소용단의 상품용차를 만들었는데 28편에 겨우 1근 정도였다.

    중화다서.채양의 다록

    〃 차의 품질로서 용봉차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이것을 小團이라고 하며 무릇 28편이 1근이며 값은 금2냥이다.

    歐陽脩의 歸田錄〃 상품용차 1근이 20餠이다. 王闢之의 澠水燕談錄〃 건주에서는 해마다 대용봉단차를 각 2근을 공납하였는데 8餠이 한 근이 된다. 葉夢得의 石林燕語〃 ‘小龍 小鳳은 처음에 채군모가 10근을 만들어 헌공했다,

    다음해에 조칙으로 第一綱을 다 만들었다.吳曾의 能改齋漫錄

    신종 熙寧

    (1068-1077)희녕(1068-77)때 부터 비로소 密雲龍이 귀하게 되었는데, 매년 頭綱으로 공납했다. 周輝의 淸波雜志

    〃賈靑이 轉運使가 되어 소단을 정밀하게 하여 밀운룡이라 했다. 20병을 한 근으로 하여 두 보자기에 싸는데, 大小團차는 쌀 때 붉은 비단을 사용하여 하사품으로 보급되게 하였고 밀운룡만은 황색으로 포장하여 모두 황제의 옥식으로 봉하여 올렸다.

    葉夢得의 石林燕語

    신종 원풍

    (1078-1085)박사 王揚休가 밀운용을 갈아서 모두 13인이 마셨다 황정견의 山谷集

    哲宗 紹聖

    (1094-1098)철종조(1086-1100)에 다시 瑞雲翔龍을 진상했는데, 御府에서는 해마다 12병 얻는데 그쳤다.

    蔡絛의 철위산총담哲宗 元符

    (1098-1100)편수를 헤아리다 보니 18,000개. 선화연간 공차의 수가 47,100편이었다.

    范逵의 용배미성다록徽宗 대관

    (1107-1110)어원옥아와 만수용아를 제조했으며

    대관4년 부터는 무비수아 및 시신과 제조선화북원공다록

    정화3년(1113)

    貢新銙를 만들었다. 정화연간(1111-1117) 때 차나무 3만 그루를 증식하였고, 창첨 증첨의 목록을 추가하였다.

    선화북원공다록휘종 선화

    (1119-1125)백유, 적유, 석유 등을 폐지하고 20여종의 화려한 단차를 새로 만들었으며, 처음에는 공차 속에 모두 용뇌향을 섞었다.

    선화북원공다록高宗 建炎

    (1127-1130)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3분의 1의 조서에 세공 공물을 폐지했을 때, 興國巖小龍, 小鳳 등은 없어졌다.

    선화북원공다록고종 소흥

    (1131-1162)대용봉차 1,728근을 다 보내지 못했으며, 소흥5년에는 다시 大龍鳳 및 京鋌의 반을 감했다.

    선화북원공다록高宗 소흥

    (1131-1162)京鋌茶를 없애고 大龍團을 만들었다. 京鋌은 大龍團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로부터 대용단의 수가 대봉단보다 많아졌다.

    선화북원공다록〃 해마다 편차 216,000근을 공납했다 宋史⋅食貨志〃 건차는 해마다 950,000근이 생산되었으며, 그 團胯를 臘茶라 불렀다. 옛 제도에 따라

    해마다 편차 216,000근을 공납하였다.李心傳의 朝野雜記

    소흥4년(1134)

    大禮때 5만근을 행사를 위해 시장에서 구입했다. 李心傳의 朝野雜記 선화북원공다록 주석을 중심으로 論者 작성

  • 유 수 현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 57

    북원공차는 제다산업의 기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북원지역의 공차는 날이 갈수록 고급화 되고 龍腦香이나

    麝香 등 각종 향료를 첨가 하였으며, 단차 표면에 화려하게 용무늬나 봉황무늬 등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이와 같이 공차생산은 황제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품종이 개발 되

    었다. 북원지역은 황실용 다원인 어차원이 있었던 유일한 지역으로 다원의 비중이 증가되면서 차 산업의 발전을 주

    도하였으며 북원지방은 유명한 전통적 차산지로서 송대 단

    차의 모태인 연고차를 제조한 곳이다.48) 북원은 황실용 차밭인 御用茶園을 조성하여 황실 공납용 공차를 관리하는

    새로운 유명한 차산지로 주목 받았고 이로 인하여 제다기

    술면에서 송대에 들어서는 소용단 용봉단차로 황실용 공차

    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따라서 북원지역에서는 공차의 발전을 매개로 하여 수많은 名茶를 생산하였다. 북원에서는 전운사가 황실진공용 용봉단차라는 까다롭고 화려한 차

    를 제조하였으며 공차의 고급화에 따른 제다기술이 발달되

    고 이에 따라 제다부문 등 비약적으로 차산업의 발전을 이

    루었다.

    2. 鬪茶문화의 발달

    송대의 사람들이 투다에 사용하였던 것은 주로 건안에서

    생산된 북원차이다. 송대는 공차제도의 흥성으로 제다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투다도 성행하게 된다. 황실에 進貢된 북원공차는 賜茶에 의하여 송대의 투다문화

    에 큰 영향을 끼쳤다. 투다의 기원은 陶谷의 천명록(荈茗錄)에 나타나는 「탕사(湯社)」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49) 투다는 五代(907∼960)에 시작하여 송대에 성행한 일종의 차 겨루기로서 다구품평과 다엽의 질량 및 烹茶⋅點茶시 技藝의 우열을 가리는 일종의 茶藝이다.50)

    송대의 투다는 음다풍속을 변화시켰다. 차는 음용에 그치지 않고 점차 종합성을 띤 기예로 발전하여 다구의 예술

    성과 차의 色⋅香⋅美⋅浮를 품평하고 행다 일체로서 오관을 충족시키는 종합예술로 승화시키는 계기로 되었다. 또한 황제에서부터 사대부들까지 투다가 하나의 의례적 행

    사가 됨으로써 투다의 형식은 더욱 정치(精緻)해지고 고아(高雅)해졌다. 투다가 확산되면서 차 생산자와 차 제조

    자들은 더욱 우수한 상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

    고, 그러한 노력은 좋은 상품을 사려는 구매자에게로 확산되었다.

    茶具⋅茶⋅水⋅茶湯 및 行茶의 우열을 겨루는 투다는 송대 차문화의 하나로 북원지역 민간에서 비롯하여 황

    제에서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 문화로

    흥성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맛은 지극히 좋아 오늘날 건안(북원)차가 天下第一”51)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동시에 건안의 북원차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준이 되어 전파되

    었다. 차탕의 색에 대해서 송대 사람들은 찻물에 눈같이 흰 거품이 생기는 것을 즐겼는데, 鮮白, 靑白, 勝雪 등을 찻물 색 중의 上品으로 추구하였다. 또 투다에서 이기면 신선이 되고, 지면 패장이 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송대의 사대부들이 투다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송대는 도시경제의 번영으로 하나의 커다란 도시민 계층

    이 형성되었고, 차의 보급이 널리 민간에게까지 보편화 되었는데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차문화가 확산되면서 차 시장

    이 활발해지고 거리에는 전문찻집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반사람들도 다관(茶館, 茶肆 茶坊)에서 차를 마시고 담소를 하며 휴식을 취하며, 차 겨루기도 성행했다.

    남송 때에도 수도인 臨按은 도시 인구의 폭증과 구성원

    이 복잡해지면서 시민계층은 점차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도시문화도 상업화된 경영방식에 따라 대중화 되거나 고급

    화 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52) 사대부들의 이러한 투다문화는 성도의 도시인구 밀집으로 인한 상업도시 발달로

    茶館문화가 번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茶館에 모여 도시민

    과 함께 호흡하며 투다문화는 점차 확산되었던 것이다.

    3. 도자산업의 발달

    송대는 貢茶의 차생산과 맞물려 도자의 최고 기술을 나

    타낸 시대로서, 차를 마시는 풍속의 일반화와 투다로 인하여 茶道具가 발전하였다. 특히 찻잔은 陶瓷器의 발전을 先導하였다. 송대는 차를 마시는 풍속으로 도자기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러한 수요의 급증은 송대 도자기 산업을 발

    전시켰으며, 차생산의 급증으로 음다는 도자 산업의 발전을

    47)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p.81-82.48)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기록을 보면, 하교원何喬遠(明末의 史學家)의 민서閩書에서는 남당 보대3년 (945년)에 왕연정을 포로로 삼아 그 땅을 얻었

    다. 해마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북원에서 차를 따 처음으로 연고차를 만들었으며 이어 납면차를 만들었다. 정진공의 茶錄에 ‘泉南에 사는 노승 청석淸錫이 나이 84세에 일찍이 이국주(李國主;이경)의 글을 보고 연고차를 보냈으며, 두해동안을 이어서 납면차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경우연간(1034-1037)중에 감찰어사 구하(丘荷)가 편찬 한 어천정기御泉亭記에 ‘당말 조칙으로 복건 감람공차를 파하고 납면차를 바쳤다. ;장순민의 畫墁錄에 이르기를 ‘당나라 차품이 있는데 양선차를 공납한다. 건계북원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정원중(785-805) 상연이 건주자사가 되어서 처음으로 쪄서 덖고 갈았으며, 이르기를 연고차라 했다.

    49) 신미경, 「茶事典籍을 通해 본 宋과 高麗의 茶文化考察」, 성신여대박사논문, 2008. p.71.50) 徐海榮 主編, 中國茶事大典, 華夏出版社, 2001. p.245.51) 팽승의 續墨客揮犀, “其味極佳而已. … 今建安茶遂爲天下第一.” 52) 吳元敬, 「臨按茶館을 통해 본 南宋朝都市茶文化」, 중국사연구 70, 2011, p, 164.

  • 58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자극한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대규모의 차 생산과 소비는 다구의 수요를 촉진하였다. 송대에는 點茶法이라는 새로운 음다법의 출현과 함께 이에 적합한 黑釉찻잔

    이 애호되었다. 특히 建窯에서 생산된 검푸른 빛의 건잔(建盞)은 송대 茶書에 으뜸이 되는 찻그릇으로 기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황실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찻그릇으로 애호되었다.53)

    휘종의 대관다론에는 점다하여 유화를 피게 할 수 있는 차도구의 발전이 눈에 띤다. 즉 긴 죽협(竹筴)과 짧은 차시(茶匙)의 효율적 측면이 결합하여, 찻그릇에 적합하게 길이도 짧고, 휘저어도 다완 손상이 적은 대나무 소재의 다선(茶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54) 대관다론 「잔(盞)」조에는 ‘검푸른 빛에 옥호 있는 잔’을 으뜸으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지만, 위 내용은 토호잔(兎毫盞)55)을 직접 명시하고 있어 궁정 투다에 애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

    고 있다. 북송대는 특히 도요지와 茶碗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송대 도자산업의 중심지는 하북 정주의 정요, 하남 여주의 여요, 절강 원주의 창천 등지에서 고급품이 제조되었고, 특히 청자가 유명하였다.56) 그리고 건안의 북원은 어차원이 있던 품질 좋은 차산지였고, 차를 즐기고 감별하는 투다의 진원지였으며, 찻그릇인 건잔을 만들어낸 건요가 있던 상징적인 곳이었다.57) 건안에서 생산된 건요의 흑유잔은 건잔이라 불리는데, 民窯이지만 진상품으로서 公窯의 역할도 하였다. 이와 같이 송대는 공차제도의 흥성으로 투다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에 아울러 도자산업의 最盛期였다.

    4. 詩⋅書⋅畵 등 茶藝術 발달송대에는 공차의 발전과 더불어 茶에 관한 다량의 저술

    로 茶文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송대에는 차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부분이 북원공차에 대한 기록이 많으며, 특히 황실의 下賜茶는 문인들에 있어서 차문학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황실에서의 공차문화와 賜茶문화는 귀족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文人이나 士大夫들의 생활양식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다대주(以茶代酒)’라 하여 손님을 접대할 때 술 대신에 茶를 대접하기 시작하였고 문학정서를 풍부하게 하는데도 차가 큰 기여를

    하였다. 진조규⋅주자진이 편찬한 중국다엽역사자료선집에는

    451종목의 茶事와 58종의 茶書, 67종목의 茶法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송대의 차사전적 100여종58)과 송대 문인들에 의해 저술된 주요다서59) 14종목이 실려 있다.60) 또 청나라 때 왕계호는 송대 웅번이 쓴 선화북원공다록에 주석으로 총 58종의 다서에 대하여 부연하였다. 즉 공차에 대하여 본문 및 왕계호가 주석한 선화북원공다록에 인용된 북원차에 관한 茶事문헌 50여종61)을 인용하여 주석하였다.62) 대체로 송대에 출현한 다서는 대부분이 공차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이는 다서의 저자들이 대부분 북원지역의의 茶事를 맡아보던 전운사 등 관리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직접 생생하게 경험한 것들의 기록이라 차의 개배 및 채다에서 부터 건조까지의 제다과정과 공차

    의 종류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63) 송대 북원지역의 전운사들이었던 문인들은 차를 애호하

    고 즐겼을 뿐만 아니라 차를 고급문화로 생각하였다. 문학의 정화(精華)라고 일컫는 詩역시, 차문화 발전사와 시기를 같이한다. 两晋 南北朝시기에 형성된 차 문학은 당대에 흥하여 송대에 가장 발전하였다.64) 송대에 이르러 북원지방 차 생산에 따른 시문으로 建茶, 建盏, 建安鬪茶의 시문 등 차와 관련된 시를 남긴 문인들은 그 수가 매우 많

    아 文苑史上의 絶色이다. 송대 茶詩文의 문인들65)중 육

    53) 고연미, 「북송대 徽宗의 예술성에 대한 茶文化史的試論」, 한국차학회, 19-1(2013. 3), pp.11-12.54) 고연미, 「차그림에 나타난 茶筅연구」. 한국차학회지 2009, 15(1), p.14.55) 다완의 문양이 마치 토끼털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토호잔이라고 한다.

    56) 이춘식, 중국사 서설, 교보문고, 2005, p.324.57) 고연미, 「북송대 徽宗의 예술성에 대한 茶文化史的試論」, 한국차학회, 19-1(2013. 3), p.20.58) 진조규⋅주자진, 中國茶葉歷史資料選集의 書目 61-160번까지가 송대 茶事에 대한 책이다.59) 북송대의 다서로 정위(966-1037)의 북원다록, 蔡襄(1049∼1053)의 茶錄, 宋子安의 東谿試茶錄(1064前後), 黃儒의 品茶要錄(1075前後),

    沈括의 本朝茶法(1091左右), 徽宗 趙佶의 大觀茶論(1107), 唐庚의 鬪茶記(1112), 熊蕃의 宣和北苑貢茶錄, 趙汝礪의 北苑別錄(1186)과 남송대 심안노인의茶具圖贊등이 있다.

    60)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40.61) 선화북원공다록에 인용된 50여 茶事 書名과 편찬자 및 내용; 유수현, 「宋代 宣和北苑貢茶錄에 관한 硏究」, 원광대박사논문, 2013. pp.108-111. 62) 유수현, 위의 논문, p.107.

    63) 유수현, 위의 논문, p.64.

    64) 朱自振⋅沈漢, 中國茶酒文化史, 文津出版社, 1995. p.56.65) 宋祁(998∼1061), 林逋(967-1028), 丁谓(966-1037), 蔡襄(1012-1067), 范仲淹(989-1052), 梅尧臣(1002-1060), 沈括(1031∼1095), 王安石

    (1021-1086), 苏轼(1037—1101), 苏辙(1039—1112), 秦观(1049-1100), 黄庭坚(1045-1105), 陸游(1125—1210), 李清照(1084年-1155),曾几(1085-1166),晁补之(1053—1110),周必大(1126-1204), 杨萬里(1127-1206), 朱熹(1130∼1200) 등 30여 명이다.

  • 유 수 현 / 송대 북원공차(北苑貢茶)의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 ▪ 59

    유는 「건안설(建安雪)」66)에서 ‘건계의 관영차는 천하의 절정이다(建溪官茶天下绝)’로 표현했으며, 소식(苏轼)의 시 「수조가두(水调歌头)⋅도화차(桃花茶)」,67) 「시원전다(試院煎茶)」와 범중엄의 시 「화장민종사투다가(和章岷从事鬪茶歌)」,68) 매요신 시 「건계신명(建谿新茗)」, 황정견 시 「봉사류경문송단차(奉謝劉景文送團茶)」 등은 송대의 대표적 차시들69)이다.

    또한 송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龍茶錄後序 등 많은 茶文을 남긴 구양수는 그의 시 「상신차정성유(嘗新茶呈聖兪)」에서 ‘건안이 삼천리인데, 수도에서 3월에 차를 맛볼 수 있고, 햇차⋅좋은 물⋅정결한 다구⋅좋은 날씨⋅좋은 茶友 등을 다섯 가지의 아름다움’이라고 읊고, 이 같은 찻자리가 바로 眞物有眞賞의 경지라 하였다.70) 이 글은 당시 상층 도시민들과 문사들이 차에서 맛과 멋을 추구하여

    음다의 흥취를 詩文에 담아냄으로써 ‘品飮聚談(품음취담)’풍의 사교문화를 이끌어 나갔던 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 송대 문인들의 글 중에서 북원의 용봉단차를 언급한

    시의 구절들이 많이 보이며, 용봉차를 題材로 하는 시들이 대량으로 저작되었다. 문인들의 작품을 통해 보면 차는 단순한 음료에서 점차 정신세계의 음료로 발전해온 것을 알

    수 있다. 朱存理는 다구도찬후서에서 “북원 용봉단차의 사치스러운 꾸밈에 대하여 당시 전운사였던 채양을 책망해

    야 한다.”71)고 넌지시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공차재배로 유명한 북원지역 어차원의 차는

    최고의 명망을 누렸으며, 황실에 제공되었다. 음다의 풍습이 사대부에게 전해지면서 시문의 내용에 차에 대한 설화

    가 많이 등장하였고, 햇차를 주고 받으며 쓴 시나, 투다의 내용도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웅번의 선화북원공다록에 기록된 10수의 「御苑採茶歌」는 貢茶의 채다에서부터 제다하는 모든과정을 묘사한 칠언절구 시로 공차

    를 관리하는 공차사가 황제께 올리는 최상의 차를 만드는

    과정과 이로 인한 차농민들의 지나친 착취와 압박 등을 잘

    묘사하였다. 송대의 전운사들은 문인으로서 그들의 詩賻, 論策 등의

    문학적 재능과 정서를 북원지역의 공차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해 더욱 풍부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많은 문인과 학자, 관료들이 곧 차의 명인이었으며, 차생활에서 얻어지는 조화로운 아취와 심오한 정신세계를 시나 서화 등 송대

    의 문학작품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Ⅳ. 맺음말

    송대 공차생산 중심지인 북원의 공차가 발전한 근저에는

    당시 상품경제가 미발달했던 상황으로, 지배계층에게 필요한 여러 물품들이 시장을 통해 조달하기가 어려워 강제 징

    발의 형식을 취했다는 제도적 요인도 있었다. 북원의 차산업은 북원공차에 힘입어 전국에 알려졌으며, 그 에 따른 지명도와 위상은 북원차가 가장 넓은 판매망을 확보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북원차가 높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의 시장 경제를 좌우할 만큼 생산량이 많아서

    가 아니라, 황실 進貢용 貢茶의 생산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北苑은 공차생산지로서 송대에서 茶生産을 선도

    하는 지역으로 되었다.송대는 비약적인 차산업의 발전과 아울러 민간의 차생산

    및 제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茗戰⋅鬪茶⋅試茶⋅分茶 등 차겨루기 발전, 차 생산량 및 소비증가로 찻잔의 발달에 따른 도자산업 발전, 상업도시 발달에 따른 인구증가로 茶館⋅茶肆⋅茶坊 등 상업적 차문화공간 발달, 공차산업 발달 등 영향으로 다량의 송대 茶書와 茶文學이

    발달되었다. 또한 茶馬貿易, 專賣制度, 榷茶制度 등에 이르기 까지 차가 융성했던 송대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중

    요한 사료로서 그 位相을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송대의 북원공차는 중국의 차문화사에서 그 이전 및 그 이후의 어느

    시대보다 황실에서의 차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으며, 음다풍습도 넓게 확산되고 先導하였다. 북원공차가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요인은 송대의 공차정책에 기인한 것

    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송 황실에 의하여 主導된 공차정책은 차의 생산과 소비

    면에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차의 생산측면에서는 황실의

    66) 육유(陸游)의 「建安雪」 ; “建溪官茶天下绝, 香味欲全须小雪. 雪飞一片茶不忧, 何况蔽空如舞鸥。银瓶铜碾春风里, 不枉年来行萬里. 从渠荔子腴玉肤, 自古难兼熊掌鱼.”

    67) 소식(苏轼)의 「水调歌头⋅桃花茶」 ; “已过几番雨, 前夜一声雷. 旗枪争战, 建溪春色占先魁. 采取枝头雀舌, 带露和烟捣碎, 结就紫云堆. 轻动黄金碾, 飞起绿尘埃. 老龙团, 真凤髓, 点将来兔毫盏里, 霎时滋味舌头回. 唤起青州从事, 战退睡魔百萬, 梦不到阳台. 两腋清风起, 我欲上蓬莱.”

    68) 범중엄(范仲淹)의 「和章岷从事斗茶歌」 ; “北苑将期献天子, 林下群豪先斗美。鼎磨云外首山铜, 碧玉瓯中翠涛起。斗茶味兮轻醍醐, 斗茶香兮薄兰芷。其间品第胡能欺, 十目视而千手指。勝若登仙不可攀, 输同降将无穷耻。吁嗟天产石上英, 论功不愧阶前冥。众人之浊吾可清, 千日之醉我可醒。屈原试與招魂魄, 刘伶却得闻雷霆。”

    69) 유수현, 위의 논문, pp.258-260. 송대 문인들의 茶詩.

    70) 구양수의 「嘗新茶呈聖兪」 ; “建安三千里 京師三月 嘗新茶甘泉器潔 天色好座中揀擇客亦嘉.” 71) 주존리의 「다구도찬후서」 ; “육우가 다경을 저술하고, 채양이 茶錄을 지었으며, 맹간의가 노동에게 월단 삼백편을 보내고, 나중에는 사치스러움이

    용과 봉황의 꾸밈에 이르렀으니, 이는 마땅히 채군모를 책망해야 할 것이다. 차를 만드는 데는 반드시 기구가 있어야 하는데, 성과 명칭을 알맞게 붙여주고 벼슬도 봉하며 호까지 붙였으니, 이 글은 宋末의 좋은 글이다. 그리고 이 글의 위상이 맑고 드높아 위로는 王公들과 통하고, 아래로는 멀리 山林에 묻힌 이들과 함께하니 이 또한 雅趣가 있다.”

  • 60 ▪ 한국예다학 창간호(2015. 10)

    관심을 끌기 위하여 끊임없는 품질경쟁이 이루어졌으며 소

    비측면에서 황실의 賜茶는 민간의 음다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송대에 차문화가 흥성할 수 있었던 것은 貢茶制度⋅茶專賣⋅茶馬貿易⋅茶稅法을 제도화함으로 차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신유학 발전에 따른 사대부중심의 차문학, 도시인구 증가에 따른 상업용 茶館문화발전, 경제번영 등 송대 차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송대는 북원공차라고 하는 사회적 최상의 기준이 있어

    이는 황실차를 대변하였고 이를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강하였다. 송대의 관영다원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하여 차의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생산품은 지체없이 궁중으로

    공납 進上되었고, 관영다원의 차 생산은 중국 茶葉生産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대 북원공차에 관한 차문화사적 발전과 위상에 대하여 고찰해 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첫째, 송대는 차의 생산시기를 크게 앞당겼다고 볼 수 있

    다. 당대의 차생산은 대체로 곡우를 전후로 하여 이루어졌으나 송대의 공차는 경칩을 전후로 생산되었으므로 약 1개월 정도 빨라졌다.

    둘째, 공차생산은 제다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차는 갈수록 고급화되었고 용뇌향이나 사향 등 각종 향료

    를 첨가 하였으며, 단차표면에 화려하게 봉황무늬 등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셋째, 공차생산은 황제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품종으로 개발되었다. 선화북원공다록에는 용봉단차의 제품명이 50여종이 기록되어 있다. 宋代 북원의 공차재배로 어차원의 다배소에서 만든 용봉단차는 수 십종으로 차가 최고의

    名望을 누리며 해마다 품종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넷째, 송대에는 鬪茶문화가 매우 발달하여, 민간의 차생

    산과 차 제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말 오대 때 건안민간에서 비롯된 투다는 송대 들어 황제에서 사대부,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문화로 자리하게 되

    었다. 황실 및 사대부를 비롯하여 일반 도시민사이에 사교와 오락을 겸비한 點茶時 우열을 가리는 투다가 발전하였

    고, 또 찻잔은 도자기의 발전을 특히 선도하였다. 송대는 도시경제의 번영으로 하나의 커다란 도시민 계층이 형성되

    었고, 차의 보급이 널리 민간에게까지 보편화 되었는데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차문화가 확산되면서 차 시장이 활발해

    지고 거리에는 전문찻집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투다문화는 성도의 도시인구 밀집으로 인한 상업도

    시 발달로 茶館문화가 번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茶館에 모

    여 도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점차 확산되었던 것이다.다섯째, 북원공차의 발전은 도자산업 특히 다완의 발전

    에 영향을 주었고 찻잔은 陶瓷器의 발전을 先導하였다. 송대는 차를 마시는 풍속으로 도자기 수요가 급증하였고

    이러한 수요의 급증은 송대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차생산의 급증으로 飮茶는 도자 산업의 발전을 자극한 주

    요 요인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대규모의 차 생산과 소비는 다구의 수요를 촉진하였다.

    여섯째, 차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詩⋅書⋅畵 등 차예술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차문화는 복합적 문화로서 오관을 충족시키는 종합예술이다. 송대는 차의 생산과 보급이 일반화 되었고 음다법도 다양해지고, 차가 마시는 기능을 넘어서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종합적인 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아, 湯社⋅茗宴⋅茶宴會⋅鬪茶 등을 하며 문인들에게 차문학의 소재가 되어 주된 茶風을 이루며 시인 묵객들의

    시 속에, 그림 속에 더 많이 자리하게 되었다. 송대의 차 관련 문헌이나 차시들은 茶文學의 礎石을 이루게 한 작품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본 논문에서는 송대 북원지역의 공차발전과

    선화연간에 절정을 이루었던 다양한 공차발전 및 그에 따

    른 차문화사적 위상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러나 많은 異說을 배제하고 북원공차의 원류를 찾기 위하여 세심한 분

    석과 고찰을 하였으나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부분

    도 없지 않다. 未盡한 부분에 대하여는 앞으로 보강된 연구가 있기를 기대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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