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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힘웹댐 그 남편 조 비극속에 녀는 션왕조 소현씨자의 무잊때문에 … · 명획원 [永빼圖] 조선 제 16 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B집願世子)의

힘웹댐

조 션왕조 αpb 년 비운 의 께자빈 민회빈강씨

그 녀는 무잊때문에 그 토록 비팡하-최후를 맞이혜사끽 했을까

남편 소현씨자의 죽음과 몰아다「친멸문지화의

창극

정영미지음

그 비극속에 답껴있는 억사척 의미는 무엇잉가 죽음에 얽힌 셜타래를 억샤속에써 만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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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 지은이정영미 이화여자대학교국문학과졸업

1992년부터 방송작가로활동

주요프로그램으로는

일요스페셜

역사스페셜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현장르포저13지대

아침마당

제3지대 인간극장등이 있고저서로는

공저 ‘수다로푸는방송작가 와

1V인간극장2 가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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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웹뻐

조 선왕 조 ψ닫)념 비 운의 께 차빈 민회 빈강씨

그녀는 무엇때문에 그 토록 비캄한 최후를 맞아해야 했을까

남편 소현씨자의 죽음과 몰아닥친멸문지확의 창극

그 비극속에당껴있는억샤척의미는무엇인가 죽음에얽힌설타래률억사속에서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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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획원 [永빼圖] 조선 제16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B집願世子)의 비 민회빈강씨(뺑빼빼훌m의 묘소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老溫휴洞)에 소재하고 있다.

아왕룡(兒王뺑)이라고도 하며, 지정면적은 2,182m'이다. 민회빈은 우의정 강석기(姜뼈期)의 딸로 강감찬의 19대

손녀이다. 1627념(인조 5) 세자빈이 되었으며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으로 꿀려갔다가 귀국한 뒤 죽자, 반목하고 있던

초소용(빼뼈쩔)은 감빈이 세자를 죽었다고 무고(짧告)하여 궁중 후원에 유치(빼置)되었다가 1646년 사약올 받고 죽었다.

죽음과함께 펴|서인(廢많시이 되어 서민임 신분으로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무고(앉훌)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복원묘(復元홍)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750년(영조 26[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묘의 시설은 봉분, 흔유석(훌훌i:J), 장명둥(훌明뼈, 망추석(몇柱i:J), 석양(i:J후), 석효(i:J虎), 문인석(文Ai:J), 석at-(;o-馬)

등이 있으나 비석과정자각(T字뼈)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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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밴.,JMI ·흥.,t허| 후뼈---

애기능을 따라 영회원으로 가다 보면 슬푼 새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그소리를들으며 민회빈 강씨가묻혀있는영회원무덤 앞에 서면

360년 전 비운의 삶을마감한한여인이 가슴아프게 떠오릅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 비극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 하나 둘은 아니지만

특히 민회민 강씨의 기구한 삶은 비단 광명시의 역사인물을 떠나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고 봅니다

일국의 국모가 될 세자빈의 몸이 국난의 와중에 청국의 인질이 되고 종국에는

세자의 죽음에다 자신은 물론 집안 전체가 도륙을 당하는 침극의 주인공이 되었

으니 개인의 삶을 넘어 조선의 역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봅니다.

지난번 민회빈 강씨의 일대기를 실록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한 향토사료

를 발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민회빈 강씨의 삶과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추론하는데 중점을 두고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원고를 마감해 주신 KBS의 정영미 작가님께 감사

를 드리며 올 여름 원고를 마무리하고 책자발간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문화원

직원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자가 광명시의 한 귀퉁이에 쓸쓸히 묻혀있는 비운의 세자빈 민회

빈 강씨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녀의 삶이 조선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가를 다시 한 번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5년 9월

광명문화원장안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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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이. 프롤로그 ------------------------ ----------- 1 0

02. 의문의 죽음 -------------------------------------- 1 6

03. 운영적 만남 ------------------- - ------------- 2 6

04. 소현세자와 강빈 섬양으로 가다 ----------- - ------- 4 8

05. 깊어가는 갈등 --------------------- - -- - ------- 5 8

06. 여장부 민회빈 --------------------- ---- ------- 6 8

07. 위험한 만냥, 소현과 야당얄 ------------- ---------- 8 0

08. 폭풍천야 -------- -- ----------------------- 9 0

09. 이상한 아버지 ----------------- - - -------- ---- 104

10. 민회번을 죽여라 ----------------------------- ---- 116

11. 이어지는 의문의 죽음, 계속되는 소현의 이릉 ----------- 13 6

12. 에멸로그 / 누가 소현세자를 죽었나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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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 좋 · 흘 •

조선 왕가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던

소현세자와그의 아내 민회빈 강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 한획을긋는 17세기에 벌어졌던 이 음험한

비밀속에숨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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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그 날도 나는 도서관 한쪽 귀퉁이에서 고서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중세를 열었던 앵글로 색슨왕조의 시작 웨섹스가는 829년부터 1016년까지

100여년을 통치했고 댄가는 50년 그 뒤를 이은 노르만왕조는 1066년부터

1154년까지 100여 년간 영국을 지배했다. 그나마 좀 길게 다스렸던 왕조는 튜

더왕조. 1485년 영국 왕위에 올라 1603년 멸망한다. 120여 년간 왕조를 유지

한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어떨까? 중세시대 발루아 왕조는 1328년부터

1498년, 약 170여 년간. 부르봉 왕조는 1559년에서 1795년까지 약140여 년

간, 그리고 제l공화국의 경우는 불과 10년 안팎 프랑스를 지배한다. 고대로 올

라가면 좀 찾아볼 수 있을지 몰라도 중세 이후 전 세계적으로 한 왕조가 200

년을 넘기는 예가극히 드물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500년이다. 학자들은 이것

을보고 기적 같은 일이라한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뒤 1910년 일본제국에 직접 통치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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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 끝이 났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검토하는 중 하나의 사실에 눈

길이 머물렀다. 그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때는 1592년

바로 조선이 건국한 지 250년 만에 일어난 최대의 국난이다. 만약 세계사

의 법칙이 통했다면 조선은 이때 망했을 것이고 새로운 왕조, 새로운 국가

가 세워졌을 바로 그런 시기에 임진왜란은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선은 국난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또 한번의 중흥

기를맞이한다.

그 때 피폐해진 경제, 혼돈과 무질서의 사회를 바로 잡은 것이 바로 조선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 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소 중화주의를 내세우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는데 개인에

게는 생활의 질서를 제공하고 국가적으로는 철학과 원칙의 기퉁으로 자리

잡는다. 17세기 조선의 양반가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동우회를 만들어 국가

와 개인의 관계는 무엇인가? 임금과 신하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양반과 평민의 할 일은 무엇인가? 등 사회의 밑거름이 될 철학의 과제를

토론했다. 참으로 대견스런 조선의 힘이 여기에 있었다.

여기까지 공부하던 나는 다시 하나의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경제가 다시

성장하고 젊은이들은 실학을 논하며 관념보다 실용에 눈을 뜨며 사회는 조

선 초기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조금씩 다양성과 융통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끝내고 나라는 다시 한번 새 출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17세기 이후 조선의 한계 때문에 우리 역사는 불행스런 근세를 맞게

된다. 세계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던 아픈 경험 조선 후기에 이 땅에

·전번째 01°"71/의문의죽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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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조선을 쇠약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러 학자들은 그 원인을 개혁과 개방에서 찾는다. 내부적으로는 새 국가 이

념과 경제 개혁을 실시하지만 국제 정세에 너무 어두웠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임진왜란에 패한 뒤 나가사키를 국제항으로 설정, 서양의 문물과

과학기술을 받이들인다. 일본이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

던 결정적 계기가 바로 임진왜란 패전이후의 개방정책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중국에 대해 소 중화주의를 외쳤지만 여전히 중국은

본받고 따라야할 형님 국가였고 서양의 문물과 이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쇄

국정책을고수한다.

또 한 기-지 짚고 념어갈 것은 조선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

과 박해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일이었지만 왕실이 존재하는 국가 통치에 있

어서는 조금 다른 문제였던 것 같다. 당시 영국의 경우만 해도 여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철저하게 여성의 존재와 여성의 힘을 무

시했다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힘을 발휘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예〉라는 이름의 관습과 통념의 칼

을들었다

세계가 격동하던 17세기? 그렇다면 과연 조선의 엘리트 조선의 젊은 사대부와

왕실은 밀려드는 서양의 새로운 기운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개혁과 개방에

눈을 돌린 이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인가? 나라를 구해보고지- 새로운 사상 새

로운 시도를 행했던 여성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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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고민하며 17세기 조선 왕조의 기록을 뒤적

이던 나는 한 죽음과 만나게 됐다. 조선 왕가 최대의 의문사! 바로 인조의

첫째아들 소현세자의 죽음이다. 의문사라면 자잘이 아닌 타살일 것이고,

그 죽음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뭇이다. 세자의 죽음을 두고

후대 사람들이 왜 의문사라 부르는 것일까? 소현의 죽음에는 어떤 배경이

숨어있는 것일까? 의문은 이뿐만이 아니다. 세자가 죽은 다음해 그의 아내

민회빈 강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고 소현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

져 두 명이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관례대로 하자

면 민회빈 강씨는 대비가 돼야하고 왕세손이었던 소현의 첫째 아들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인조는 그의

손자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둘째이들이었던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 이건 뭔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의문을 떨쳐

버릴수가없었다.

조선 왕가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던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민회빈

강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17세기에 벌어졌던 이 음험

한 비밀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 천번째 이야기/의문의죽음 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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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 기

、혁,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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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l행빼 이야,,,

1645년 3월26일.

‘ 매서웠던 꽃샘추위도 완전히 가시고창경궁일대에도‘

온갖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봄날.

창경궁 환경당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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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 。추후

1645년 3월26일, 매서웠던 꽃생추위도 완전히 가시고 창경궁 일대에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봄날 창겸궁 환경당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이어 상궁이며 대신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세자가 고열에 시달린다

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3일전 어의들이 학질이라 판멍했다는데 어이없게도

제대로 치료도 해보지 못하고 세자가 서거한 것이다 조선 00대 임금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였다. 그의 나이 34세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9년 만에

영구 귀국한 지 불과 40일 만에 차기 대권주자였던 왕세자가 급서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것이다-

아버지 인조는 물론 왕실 전체가 경악할 일이었고 국가와 백성들은 자진해서

볼모생활을 감당했던 용기 있고 헌신적인 세자를 잃고 큰 슬픔에 빠져들었을

터, 인조실록은 아주 담담하고 간단한 기록만을 남기고 있다. 소현세자는 〈신

하들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은혜와 예의가 지극하고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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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한 덕망 높은 세자였으나 <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하고 전렵과

군마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무부와 노비들〉이라며 심

양에서의 일을 언급한다. 세자의 심양볼모 생활이 당시 인조를 비롯한 조

정 대신의 눈에 심각한 중대사로 비쳤음을 알 수 있다. 인조실록은 이어서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만을 일삼았으며 토목공

사와 말과 개를 기르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사망한 세자의 일대기를 기술하면

서 왜 이런 비난의 목소리를 강조해서 적었던 것일까? 세자임을 떠나서 망

자에 대한 예우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의혹은 과연 왕실의 어의가 세자의 병 학질을 왜 제대

로 치료하지 못했을까 히는 점이다. 학질이라면 말라리아를 가리키는데 학

질모기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병이다. 물론 학질은 현재도 전 세계적으로

한 해 2억-3억 명이 감염되고 한 해 250만-300만 명이 사망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키니네라는 치료법이 발견된 것은 18세기, 그러나 숱한 변종

모기의 동장으로 아직까지 완벽한 치료와 예방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병이

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의사들은 학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인조의 아버지 선조 때 사람 허준의 〈동의보감〉 〈내경〉에 따르면 학질

은 여름철에 더위에 상하면 가을에 가서 걸리는 병이라 적고 있는데 열대

지방의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방에서 자주 보이는 삼일 열 말라리아에 대

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삼일 열 말라리아 즉 조선시대 학질은 주로

가을에 나타나는 질병으로 오한과 고열을 동반하고 고열로 인한 발작이

·천번째 。|。 1=71 /의문의죽음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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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다.

〈동의보감〉을 보면 이 고열이 몸의 어느 부위에서 시작되느냐에 따라 증상과

치료가 달라진다고 적고 있다. 태양경에 병이 생긴 것은 한학이라 하여 땀을

내야하고 양명경에 생기면 열학 일부러 설시를 하게 해 열을 내려야 하고 소

양경에 병이 생기면 풍학이라 하는데 이때는 몸의 기운을 화해시키는 데 주력

해야 한다. 따라서 태양학에는 계지강할탕, 마황강활탕, 양명학에는 인삼백호

탕, 시령탕을, 소양학에는 시호계지탕, 시호가계탕을 쓰고, 태Ocf학과 양명학

이 겹친 데에는 계지작약탕 계지석고탕을 써야한다고 기록돼있다. 병의 증상

과 발전과정, 그리고 증세에 따른 상세한 치료법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왕실 어의가 허준이 알고 있었던 이런 방법들

을 몰랐을 리가 없다. 특히 이 병은 고열을 다스리지 못해 내장이 상하거나 열

이 오르고 내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발작을 다스리지 못할 경우, 또한 열이

완전히 내린 이후 체력이 뒷감당을 못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 대체로

10세 이하의 어린이나 노인들 중에 사망하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소현세자의

경우 발병한 지 3일 만에 34세의 장년이 가을도 아닌 음력 3월 봄에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기록을 자세히 검토하딘 중 몇 가지 소현세자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점점 김어졌다 우선 세자를 치료했던 어의에 대한 처

벌문제다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의사는 이형익 이형익은 그해 1월에 조정에

들어온 인물로 3일 만에 세자가사망했지만그는어떤 처벌도받지 않았다. 관

례대로 하자면 세자를 죽게 한 이형익은 참수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당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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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왕세자의 징후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었는데 이는 세자의 증

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은 탓이라고 지적했다. 따라

서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가 빗발쳤으나 몇 번의 상소

에도 인조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한 인조는 세자의 장례절치를 서둘러 진행한다 당시 세자의 대렴과 소

렴 때는 궁관과 빈궁 당상이 염 과정에 참여해서 보게 돼 있었는데 인조는

이를 허락지 않고 대신 족친 서너 명을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인열 왕후의 서제이자 종실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족친의

한 사람으로 세자의 염습에 참여하게 됐는데 그가 염이 끝난 뒤 전한 이야

기가 소현세자의 병사설에 결정적 의문을 갖게 했다 이세완의 아내가 전

한이야기는이렇다

〈온 옴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

러나오므로 검은 벽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

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

다〉

실록은 왕이 집권하는 동안 왕 곁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 국가의 중대사

에서 왕실의 사소한 일까지 전부 기록한 뒤 다음 대에서 정리해 영구히 보

관된 조선왕조의 정사다. 인조실록이라면 다음 왕인 봉림대군 즉 효종 대

에서 정리했을 터인데, 이 실록의 기록에는 소현세자 시신의 이상한 상태

에 대해 인조도 알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실록의 사가가 기록에 남

길 정도라면 분명 당시 조정과 왕실에서는 상당한 논란거리였음을 짐작할

·천번째 이ol'il /의문의죽음 O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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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기록이 전한대로 시신이 검은 빛으로 변하고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오는 것은 전형적인 익멜중독사 현상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이

미 당대에도 학질에 의한 병사가 아니라 약물중독사라는 의혹이 제기됐던 것

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당시 조정 대신들이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은 이형익이

탕약을 쓰지 않고 침만 놓았다고 질타했딘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학질의 치

료약에 의한 약물중독 현상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신의 상태로 보면 소현세

자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됐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족친의 전언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고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한 어떤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쯤에서 소현세자와 그가 살았던 조선시대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소현이 태어난 것이 1612년 선조의 손자 능양군의 첫째이들로 태어

났다. 이때 조선의 국왕은 광해군 1608년 병이 악되어 사경을 헤매던 중 선조

는 차기 대권을 서자이자 차남이었던 광해군에게 양위한다. 그런데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를 도왔던 영의정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자신

의 친형인 임해군 역시 죽음에 이르게 한다. 광해군을 옹위했던 정치세력은

정인홍, 이이첨 등의 대북파, 그러나 왕의 패륜이 극도에 달했다고 판단한 또

다른 정치세력들은 반역을 도모하게 된다. 바로 소현이 태어나던 그 해,이른

바 〈김직재의 옥〉으로 불리는 대옥사가 벌어진다. 소북파 인사 백여 명이 숙

청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원래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사건이었는데 모진 고문과정에서 엄청난 역모사건으로 변질된 사건이

다. 그리고 이듬해인 1612년 다시 〈질서의 옥〉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인

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었고 선조의 적자이자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

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의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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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시켰다가 증살(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며 그 열

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고 계모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대 참극

이 벌어진다. 또한광해군은자신을왕위에 오르게 했던 결정적인 자리, 즉

선조가 유명을 달리하던 그때 왕의 선위교지를 받드는 그 자리에 함께 했

던 일곱 명의 대신들을 삭직시켜버린다.

계속되는 숙청작업이 결국 종친들에게까지 이르게 되자 왕실은 얼어붙어

버렸다. 그때 가장 주목받은 대상은 선조의 다섯째 이들 정원군의 자손들,

즉 능Ocf군과 농창군이었다. 결국 1615년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아우

능창군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능창군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후 이런 역모사건은 무려 10여 년간이나

계속된다

1623년 소현의 나이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 능양군은 김류, 이귀, 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함께 군사를 이꿀고 창덕궁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이것

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이로써 광해군은 제거되었고 왕실과 조정은 새로운

시대를맞게된다.

그러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행보가 결코 순탄했을 리 만무하

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세력과 일부 남인세력들 간의 치열한 권력다

툼이 그의 집권기간 내내 계속됐기 때문이다. 왕가의 정통성은 무엇보다

혈통에서 비롯된다. 광해군이 패륜을 일삼았던 결정적 계기 또한 자신이

선조의 서자이자 차남이라는 점 선조의 선위교지가 과연 자신이었느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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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 그리고 중국 명나라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 등 정통

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건 당시

왕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의 그런 고민은 인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인조는 아무리 왕이지만 각 정치세력들을 누르고 자기주장을

펼칠 수 없는 한계가 태생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자연 인조에게 있어 왕위의 적통을 제대로 이어가는 문제는 사활을 걸고 지켜

야할 중대 사안이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

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자가 죽었다. 이 엄청난 사태 앞에서

자연인 아버지로서만이 아나라 왕실의 적통을 지켜야하는 임금으로서 인조가

얼마나 닥심했을 지는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인조는 왜 세자의

죽음을 간단하게 처리했던 것일까? 실록에까지 적힌 족친의 시신에 대한 소문

을 듣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허망한 세자의 죽음에 아무런 의혹도 품지 않

은 것은 진정 몰라서 였을까? 아니면 뭔가 의혹이 있긴 하지만 파헤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소현세자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님이 확실해져 가자 의혹은 증폭되어갔

다 소현세자는 왜 죽어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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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l앤째 이야1’, 응 I쟁켜

조선 왕가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던

소현세자와그의아내민회빈강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 한획을 긋는 17세기에 벌어졌던 이 음험한

비밀속에숨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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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처음부터 주목받는 세자는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왕실의 종친인

능양군의 첫째 아틀이었고 반정으로 아버지가 왕이 된 뒤 세자 책봉을 받긴

했지만 인조가 아직 젊고 한창 정열적으로 국정을 다스리던 시기라 세자에 관

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가 처음으로 조정 대신과 양반가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입담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흔사 문제였

던것으로보인다.

1625년 혼기가 찬 세자의 결혼상대자를 고르는 세자빈 간택이 시작됐다. 장차

왕비가 될 세자빈의 간돼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진행되는데 보통 초간택에서

5∼7명의 규수가 결정되고 재간택과 세 번째 간택 절차를 밟아 최종 확정된

다. 삼간택이 꿀나면 왕이 이름을 지적하고 영의정을 통하여 공시되는데 삼간

택에서 최후로 뽑힌 규수는 그 자리에서 벌써 왕비 또는 빈궁의 대우를 받아

다른 후보자들의 큰절을 받게 되고 왕 왕비 혹은 왕대비를 볍고 나서 사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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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별궁으로 큰 상궁이 모시고 가게 된다. 그러니까 삼간택이 끝나면 그

때부터 보통 양반가 규수가 아닌 귀하신 몸이 되는 것이다.

이때 삼간까지 오른 규수는 윤의립의 딸이었다. 윤의립은 남인계 인물로

인조는윤의립의 딸을 며느리로삼으려고 했으나사태는 심상치 않게 돌아

갔다.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했던 정치세력은 서인, 서인들이 윤의립의 형

윤경립의 서자 윤인발이 이괄과 함께 역모하다 죽었다는 명분을 들어 반대

하고나선 것이다. 그 때문에 인조와서인 정치세력들간의 보이지 않는힘

겨루기가 시작된다. 인조로서는구체적인 정치 사안이 아닌 흔사문제에까

지 개입하고 나서는 서인 세력들에게 경고를 보내야 할 때가 됐다고 여겼

고, 서인들은 세자의 혼사문제야 말로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설왕설래가 계속되는 가운데 심­

간까지 꿀낸 윤씨 소녀에 대한 정식발표가 하루 이틀 미뤄져갔다. 결국 인

조는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자니 싸워야 할 적이 너무 많았고,

포기하자니 왕의 체면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인조는 세자빈 간택

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명한 김자점과 이상급 심명세를 해직하고 가례도

감을 혁파해 간택을 중지시켜 버린다.

지금도 이미 결정된 혼사가 파기될 때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가 바로 신랑

신부 당사자들이다. 하물며 여성의 절개를 최대 미펙으로 삼고 있던 조선

시대에, 왕실의 삼간택까지 통과한 규수가 따혼을 당했다는 것은 그것이

설사 규수 당사자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쉽사리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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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었다. 윤의립의 딸은 결묘 누구와의 혼인할 수 없게 됐고 수절 아닌 수절을

하며 평생 세자빈이 되지 못한 벌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 윤의럽의 딸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

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소현세자의 마음이 펀할 리 만무했다. 얼핏 한번 보

게 된 윤씨 소녀를 마음에 둔 소현세자는 피혼이 결정된 뒤 심한 방황을 했다

고 전해진다. 강직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14세 청년 소현에게 마음에 아내

로 정한 처자와의 파혼과 그 처자의 죽음은 곧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또한 그 파혼과정이 대신들의 반대 때문이란 걸 잘 아는 터라 소현은

힘없는 왕, 소신 없는 왕실에 대해 비애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세자의 방황을 지켜보며 인조는 혼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2년 뒤인 1627

년 다시금 세자빈 간택을 위한 기-례도감이 설치되고 왕실은 절차를 밟기 시작

했다 9월29일 인조는 승지 강석기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한다는 교지

를 내리기에 이른다.

첫 번 세자빈 간택에서 극렬한 반대를 펼쳤던 서인 정치세력들은 이번만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세자빈 강씨의 아버지는 당시 서인계 사림의 한 일파

르 이룬 김장생의 문하생이자 도숭지였던 월당 강석기, 강석기는 직접 인조반

정에 참여했던 공신은 아니었지만 집권세력인 서인계 인물로서 강직한 원칙주

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집권 당시부터 왕비는 반드

시 서인 집안에서 배출하겠다는 국혼물실의 원칙과 숭용산림의 원칙이 지켜진

셈이라 이 혼사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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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해지는 몇 가지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야사집 〈대동기문〉에 의하면 강석기가 7살 때 아이들과 어울려

동네 뒷산에서 놀다가 마침 한 아이가 발을 헛디뎌 김은 구덩이에 빠지자

놀란아이들이 다 흩어졌지만강석기가아이들을모아허리띠를 이어 던지

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8살 때는 할머니

상을 맞아 아버지와 바깥채에서 근신하고 있는데 불이 났다. 이에 강석기

가 홀로 상복을 거머쥐고 뛰쳐나오니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다. 강석기

의 대탑이 〈상복은 다시 만들 수 없는 것이라 먼저 들고 나왔다〉고 대답해

아버지는 놀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와 예의바름이 뛰

어난 조선의 엘리트였다.

강석기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612년 광해군 4년 생원시에 합격하면서부

터였다. 4년 뒤 증광시에 병과 1등으로 입격 첫 보직은 승문원 정자였다.

그러나 첫 입문한 신입 관리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해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버린다. 인목대비를 폐모시키자는 회의가 열리기로 되어있

던 날 다른 많은 관리들이 불참하면 큰 화를 당할 것으로 알고 자신의 소신

을 저버린 채 휩쓸려 따라가는데 강석기는 달랐다. 영돈녕 부사 정창연, 진

원부원군 유근, 지중추부사 신식, 당하관 박자응 등과 함께 강석기는 처음

부터 끝까지 회의에 불참한 것이다. 이 때 일을 계기로 그는 계속해서 관직

이 제수되는데도 조정으로 나가지 않았다 인륜을 저버린 임금과 임금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신하들틈에서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그는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강석기의 가족들은 선산이 있는 금천(지금의 시

홍 광명지역)에 와서 작은 집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 소일하며 지낸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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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월당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사태가 역전되고 광해군이 사사된 후 강석기는 다시 관직으로

나아갔다.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종통을 중시하고 효를 다하고 간쟁하는

말을 듣고 보고 듣는 것을 공적으로 하며 궁의 기강을 엄히 하고 인심을 중시

할 것〉을 개진해 인조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인조는 강석기의 학

문의 깊이를 인정해 그를 소현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의 사서로

임명하기도 했다. 뒤에 사위가 되는 소현세자와의 인연이 이때부터 시작

된 것이다.

그러나 강직하고 원리 원칙에 충실했던 강석기는 조금씩 인조와 대립하기 시

작했다. 우선 조정의 대신들중에는 반정에 참여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세력

들간의 알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공서와 청서로 불리는데 반정에 참여하지 않

았던 청서는 신흠 오윤겸 김상용 나간갑과 강석기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공서와 정서 사이의 대립은 인조 집권 시기 내내 계속되는데 그 첫 번째

대립이 1626년 인조 4년 벌어진다. 인조를 낳은 어머니 계운궁 구씨가 죽지­

인조는 계운궁의 장례를 국상으로 하고 자신이 상주가 되어 3년 상을 지내려

고 했다. 조선의 예법에 따르면 친부모가 죽으면 3년 상을 지내는 것이 합당하

기에 그렇게 히려고 했으나 사대부들은 인조가 선조의 대를 직접 이는 것으로

보아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이므로 1년 상이 맞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의

선두주자가 바로 강석기의 스승인 김장생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3년 상이

냐 l년 상이냐의 절차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인조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이은 왕인가? 하는 물음까지 올라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사실 인조가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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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적자로 곧바로 대통을 이은 사람이었다면 이런 논의는 처음부터 일어나

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인조가 선조의 손자이며 더욱이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 정원군의 아들이자 선조가 지목한 다음 왕 광해군을 반정을 통

해 폐위시키고 왕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3년 상을 주장하

는 공서 세력의 속뭇은 이미 왕위에 오른 인조의 어머니를 국모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이었고 1년 상을 주장하는 청서 세력은 인조가 아무리

왕이 되었지만 그는 실제 선조의 대를 이은 적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

야 한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이 상

주 노릇을 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청서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추승문제로 후일 또다시 불거지기

시작한다.

강석기가 경상우도어사로 임명받아 있던 1627년 온 나라와 백성들이 기

다리던 세자의 혼인이 이뤄진다 그러나 그 해는 정묘호란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갔던 바로 그때였다. 이 때문에 강석기는 임금과 사돈이 되

면 나라에서 관례에 따라 행하는 일들 그러니까 집에 칠을 새로 해주고 주

변 사람들에게 흔례 물품을 제공하는 등의 왕실로부터의 선물을 모두 거절

하고 혼례 물품도 극히 간소화시킨다.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 아무리 국혼

이라 해도 간소하게 치러야 한다는 그의 청렴한 일면이 드러나는 대목이었

다. 정묘호란만 아니었으면 옹 나라 백성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았을 민회

빈 강씨, 어쩌면 그것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두 사람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

하는 신호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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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년인 1625년, 심양으로 천도하며 나라를 정비하기 시작한 후금은 이듬

해 누루하치 태조의 아들 태종이 뒤를 이었는데 태종은 중국 대륙을 정벌하기

위하여 명과 친교를 갖고 있는 조선을 정벌해 대륙 정별의 후환을 없애고, 군

량미를 지원받고자 공격을 감행해 들어온다. 그때 후금이 겉으로 내건 명분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1627년 정월 14일 후금의 주력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 안주와 명양을 거쳐 25일엔

황주에까지 다다랐다 후금의 침공 소식을 듣자 인조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고

김기종, 정충신, 신경원 등과 더불어 적을 막게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조선

군대의 방어선이 무너져 후퇴를 계속하는 가운데 장만의 본진이 개성에서 물

러나 버리자 조정에서는 파천 즉 왕과 왕실의 도성 한양을 버리고 피신을 논

의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10일만인 24일 먼저 세자를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하

고 27일에 인조는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피난해 들어갔다. 임금과 중

요 대신들이 한양을 버리고 떠나자 남아있던 도성민들이 모두 흩어졌고 한양

을 지키던 군시들 또한 일신의 인위를 맨저 도모하게 됐고 무뢰한 난민들은

밤을 이용, 작당을 하여 남의 집 가축을 훔치고 죽이며 이를 제어하는 군시들

에게 칼을 빼들고 항거하기에 이르니 수도 한양은 치안부재의 혼돈 속으로 빠

져들어 갔다 당시 사정은 유도대장 김상용이의 장계에 겨우 무뢰배 2명을 체

포하여 효시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양 방위 군대는 허수아비에 불과

했다. 그런데 왕과 대신들이 피신한 강화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겨우 1

개월 지탱할 식량 밖에 없었으므로 경창미를 속히 강화로 운송케 했었는데 후

금 선봉병이 서울 장안에 육박해 들어오므로 유도대장 김상용은 급히 명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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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어고(쩌]庫)와 병조 · 호조 · 태창(太용) · 선혜청(宣핀廳) · 경영(京

營) 등의 모든 창고에 불을 질러 버리니 나라의 저축곡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강화로 운수하려고 노량진나루에 쌓아 두었던 천여석의 양콕도 모

두 타 없어지는 것을 여인길이 몇 척의 배를 가지고 겨우 200여석을 실어

갔을 뿐이었다. 서울 장안은 곡식 타는 냄새로 덮이고, 오랑캐에 대한 두려

움과 무뢰배의 약탈로 남은 백성들은 공포에 싸이게 되었다.

한양 사정이 이쯤에 이르자 강화에서는 후금 측의 강화 제의에 따라 2월 9

일부터 화의 교섭이 진행되었다. 후금군은 처음부터 강화를목적으로왔던

만큼 순순히 이에 따랐는데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끝까지 싸워야한다는 주

전파와 화친을 맺자는 주화파가 팽팽히 맞서게 된다. 그러나 끝내 인조는

참판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 후금과 강회를 맺는다

총명하고 강직한 면모를 보이며 차기 국왕으로서 착실하게 수OJ'을 쌓아가

던 소현세자의 눈에 비친 정묘호란의 사태는 충격이었다. 장차 자신이 다

스릴 나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 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그는 궁궐

을 버리고 피신하면서 똑똑히 지켜봐야했다. 전란으로 황폐한 국토와 극도

의 가난으로 울부짖는 백성들 이들에게 국왕이란 무엇인가? 이런 고통 받

는 백성들을 위해 국왕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젊고 패기 넘치던 세자는 고

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야사에는 전쟁이 끝난 뒤 세자는 전란 복구

작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직접 복구 작업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다고 한

다, 그는 이제 구중궁궐에서 곱게 자라는 세자가 아닌 백성들의 일상을 궁

금해 하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세자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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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것이다.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윤씨 처자와의 혼인이 깨지고 그 당사자의 죽음으로

받았던 깊은 충격, 그리고 직접 맞닥뜨린 정묘호란의 참상, 어쩌면 소현세자

는그 해 12월 치러진 강석기의 딸강씨 규수와의 혼인이 탐탁치 않았을지 모

른다 아직 전란의 피해복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왕실과 조정 대신들

이 세자의 혼인 준비에 정신을 쏟는 것도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아내

라고 하지만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올리는 혼인, 더욱이 서인 정치세

력들이 정파의 이해에 따라 정해 치러지는 흔인이다.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강

씨 규수조차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강씨 규수

입장을 따져본다면 그것만큼 서럽고 억울한 일도 없다.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

명을 거스를 수 없어 세자빈이라는 엄청난 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신

분상승은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강씨 규수도 알고 있었다. 이제

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가 박탈되고 특히나 남편을 받들고 자녀를 키우며

한집안의 대소시를운영하는조선의 여인으로서의 사사로운즐거움과보람을

모두 저당 잡힌 생활을 명생 이어가야 한다 더욱이 남편 소현세자의 고민과

갈등을 전혀 모르지 않았을 터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피하

고 싶었을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강씨 규수는 간택과정에서 파격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초간택 당시 점심상을 받는 과정에서 앉거나 서는데 예의가 없고 말

하고 웃는 것이 절제가 없으며 음식을 주니 손으로 먹어 궁인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이런 거짓 행태를 통해

서라도 세자빈에 간택되는 것을 막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간택이 되고 말았으니 혼인에 임하는 강씨 규수의 마음 또한 펀치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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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의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전해지는 이야기

가 거의 없다. 그러나 결혼 초기 결코 명탄치 않았음을 알게 하는 일이 하

나 있다. 혼인한 지 9년 동안이나 후손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실

의 법도나 관행으로 비춰봤을 때 중차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일반 사가

에서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칠거지악이라 해서 이혼사유가 되는 터

에 왕실에서 9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다면 폐위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

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신기한 일을 발견했다. 기록에 민회빈에

대한 폐위 논란이 없다는 점이다. 아직 인조가 건재해 있고, 소현의 나이

또한 젊기 때문에 왕실이나 조정 대신들이 큰 문제를 삼진 않았을 지도 모

르나 9년이라면 분명 구설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는 시간이다. 초조하고 바

늘방석에 앉아있는 듯 걱정과 염려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때, 민회빈에

게는 이 고통의 시간이 남편 소현세자와의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는 전화

위복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소현세자가 그의 일생에 거쳐 민회빈

외에 다른 여자를 보지 않았고 소현세자가 나서지 않았다면 민회빈에 쏠

렸을 왕실과 조정의 질타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에 대해 막연한 거리감과 불편한 심경으로 이뤄진 혼인이었지만 후사 문제

로 애달파 하는 민회빈을 바라보며 소현세자는 서서히 아내에 대한 애듯한

감정을 키워갔던 것이다. 민회빈 또한 이 사태를 겪으면서 남편에 대한 믿

음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후일 두 사람의 일생에 있어 이 때 고통스러웠던 9년의 시간은 부부로서

한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힘겨운 고통의 시간을 함께

• 두번째 이야기/운명적묘밤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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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했다는 믿음,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엄청난 고난의 시간 동안 소현세자와

민회빈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 시기 민회빈을 괴롭히는 또 다른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버지 강석

기의 행보였다. 정묘호란으로 인한 정국의 혼란이 차츰 안정되어 가자 조정에

서는 또다시 인조 아벼지 정원군의 추승문제가 불거졌는데 무려 4년간이나 왕

과 신히들 간의 대립이 이어졌다‘ 이는 현재 왕위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를 왕

의 반열에 올려 인조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겠다는 사건이었다. 그러

나 강석기를 비롯한 청서 세력들은 정원군은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종묘

에 들어갈 수 없다는 원칙론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현재 그 아들이 왕이라

해도 원칙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대사헌으로 재직하던 강

석기는 대사간 조정호, 사간 채유후, 장령 임련 등과 함께 연일 상소를 올린

〈제왕의 효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성인이 어기지 말라고

한 경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생각컨대 성상께서는 성효를 타

고나시었으니 낳아주신 부모에 대해 융성하게 대하고자 함에 있어서 옹갖 방

도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전례에 관계된 일에 있어서는 지극한

정에 가리워져서 차질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추숭하는 대례에 대해서는 이

미 이루어진 일이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뭇밖에 또 태묘에

들이라는 명을 내렸으니 보고 듣는 사람치고 그 누가 놀라고 탄식하지 않겠습

니까? 무릇 종묘의 소목제도는 엄하고도 중한 것입니다.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종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여서 바꿀 수 없는 상경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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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원종 대왕께서는 성상을 낳아 기르시어 복을 내리고 경사스러움을 연

성대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일찍이 몸소 보위에 오르지 않았으니 어

찌 열성들과 태묘에서 함께 제사를 받으면서 계통을 이은 임금인 것처럼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나라에 두 개의 묘가 있고 묘에 예위가 없는

것은 실로 오늘날의 변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를 잃은 가운데서

도 경중이 있는 것으로 권도에 따라 별묘를 세운 제도가 크게 예에 어긋나

면서 태묘에 들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강석기의 상소는 인조의 회를 불렀다.

〈원종 대왕이야말로 선조를 계승한 이들로서 모든 신료들이 존경해야할

임금이시다. 이제 태묘에 들이면 선조 대왕은 후사가 없다가 후사를 얻게

되고 태묘는 예실이 없다가 예실을 갖추게 되니 인정과 예가 모두 마땅하

고 휴명이 모두 유감이 없어 조금도 참람됨이 없고 옹당치 않은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일종의 해괴한 논으로 저토록 분노하여 혹은 속이고

업신여기는 말로 감히 배척하는 바탕으로 삼고 혹은 당치 않은 말로 대중

을 격노시키는 자료로 삼고 있으니 불경스럽게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태도

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함부로 일제히 들고 일어나 조금도 돌아보거

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이에 인조는 정원군 추승문제에 반대했던 강석기, 조정호, 채유후, 임련,

염우혁, 안시현 등에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여 삭탈관작, 성문 밖으로 쫓아

내벼리라고 명한다. 강석기가 세지-빈의 아버지였음에도 같은 벌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강석기에게 가해졌던 이런 엄벌을 일거에 철회하도록 만든

• 두번째 이야기/운명적묘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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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 경사가 벌어졌다. 바로 세자빈 민회빈 강씨가 원손을 낳은 것이다.

그것은 1636년의 일이었다. 민회빈에게는 진정 고대하고 고대하던 아들이었

다. 이제 힘들었던 고생의 시간이 끝나고 당당한 세자빈으로서 제대로 된 궁

궐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

인 사면이 이어져 외할아버지인 강석기도 사면되고 예조판서에 기용된다. 이

때 세자 부부는 원손의 양육을 일시적으로 외가인 강석기 사저에 맡기기도 했

는데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온당치 못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인조

의 강석기에 대한 두터운 신임 때문에 별 탈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민회빈으

로서는 모든 악재를 일거에 만회시킨 참으로 귀한 원손인 셈이다. 그러나 민

회빈의 운명은 그녀를 행복하게 놔두질 않았다. 아들은 낳은 바로 그해, 병자

호란이 터지고 만 것이다. 민회빈과 청나라와의 얽히고 얽힌 고난의 인연이

또 한 번 그녀를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 역시-상 처음으로 겪었던 통한의 사건 그것은 1636년 청나라의 침

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이었다. 만주일대에서 그 세를 불리기 시작한 여진족

이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중국 본토 중원을 념보기 시작하고 있었

다. 당시 중원의 패자 명나라는 이미 국운이 다해가고 있던 때였는데 명나라

수도 북경 진입을 앞두고 청나라는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지내던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청나라 입

장에서는 후방에 또 다른 적을 두고 있는 형국, 명나라보다 우선 조선을 잠재

울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을 치

르고 아직 그 전쟁의 참화를 채 수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청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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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을 받은 조선은 제대로 싸웅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밀리기만 했다. 결

국 인조는 수도 한OJ'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이주했고 청나라는 결국 남한

산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45일간 항전을 계속했지만

13만의 대군을 거느린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불가

능했다.

정묘호란으로 조선 침입에 성공한 후금은 그 이듬해 내몽고로 진출하여 인

조 10년(1632)에는 내몽고의 제부를복속시켜 만주의 전역을 거의 차지하

게 될 만큼 그 세력이 성장하였다. 이 사이 변방의 민가와 관가의 창고를

약탈하는 등 후금군의 패악한 행위가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척화배금론자

(투和拜金論者)가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후금의 세력은 만리장성

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인조 10년(1632)에는 사신을 조

선에 보내어 그동안의 〈형제지맹(兄弟之盟〕〉즉 형제관계를 〈군신지의(君

멀之義)〉 , 왕과 신하의 관계로 바꾸고 조공 내역을 황금 1만량, 오색포 10

만동, 은 1만량, 백저포 1만동으로 증가시킬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정병 3

만, 전마 3천 멸을 요구해 왔다. 이런 요구가 없더 라도 오랑캐 나라 후금과

의 형제관계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조선의 조정대신들 사이에서는 후금과

의 관계를 끊어버리자는 절화비어론(*현和備鄭論)이 크게 일었으나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는 인조비의 상을 당하자 후금에서는 조문을 한다는 명목

아래 사신을 보내어 요구하기를 후금의 왕 태종에게 폰호를 올리고 조선이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후금의 이러한 태도에 대한 조

·두번째 이야기/운명적묘범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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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격앙은 절정에 달하여 사신을 목 베고 척화선전(J주和宣戰)할 것을 조야

에서 주장하게 되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후금사신 용골대, 마

부태는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망가게 되는데 이들은 도망가는 도중 조정에

서 평안감사에 보내는 편지 하나를 갈취한다. 이는 바로 후금 정벌을 위한 군

사 모집을 명하는 편지였다. 조선의 방침을 알아차린 후금은 이에 제 2차 조선

침략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관온인성황제〉의 칭호를 받고 국호

도 ’청 0휩)’이라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칭한다. 태종의 황제즉위식에 조선

의 춘신사 나덕헌, 회답사 이랑 등이 참행(參行)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매를 맞

으면서도 태종에게 허 리를 굽히지 않아 태종은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만일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으로 공격 하겠다〉는 내용

의 국서를 보낸다 이 국서에 접한 척회주장자들은 주화론자인 최명길을 참

(制)하자는 상소를 할 정도로 배금(拜金)의 기운이 짙어졌다‘ 이 해 11월에 조

선사신이 다시 심양에 이르렀을 때도 청 태종은 〈왕자, 대신 및 척화주창자를

청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번에도 역시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청 태종은 마침내 12월 1일 청인 몽고인 한인으로 구성된 10만 대군을 모아

이튿날 심양을 출발하여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하였다. 선봉에 선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철통같이 수비함을 알고 이 길을 피

하여 서울로 질풍처럼 진격하여 왔던 고로 13일에야 비로소 조정에서는 청나

리 군대가 안주까지 옹 것을 알았다. 비변사에서 미처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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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던 14일에 적은 벌써 개성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

징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임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

장을 겸하게 하여 강화를 수비케 하고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았다. 한

편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에게 종묘사직의 신주 세자빈 강씨, 원손 그리

고 봉림대군과 인명대군을 모시고 강화로 가게 하였다

인조는 이날 오후 서울을 버리고 남대문을 나가 강화로 가려 하는데 정탐

병의 전갈에 〈적이 이미 연서역을 통과하였고 또 마부태가 수백기병으로

벌써 홍제원에 도착하여 한 부대가 양천강을 차단하여 강화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인조는 다시 성내로 들어와 남대문 망루에 올

라가 앉으니 조정대신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해 있는 상

황, 이 때 체찰부의 졸병 지여해가 적이 사흘이 못되어 이곳까지 당도하였

으므로 군사와 말이 모두 지쳐 있을 것이니 정예포병 500으로 사현에서

맞아 그 선봉을 무찌르는 동안 강화로 띠신함이 좋겠다는 제의를 해왔는데

적의 군세를 알 수 없어 군 500명으로 시험적인 공격은 할 수 없어 망설이

게 된다. 그리하여 이조판서 최명길이 이경직과 함께 적진에 들어가 그들

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발동한 이유를 힐문하면서 일부러 적진에서 해

기울 때까지 시간을 꿀고 지체하여 인조로 하여금 수구문을 통해 말을 빨

리 달리어 남한산성에 들어갈수 있게 하였다.

청군 재침의 소식을 알게 된 13일의 한양은 온 성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

여 성문 밖으로 피난 나가는 자가 줄을 이었다. 아직 서울은 직접적인 피해

를 입지 않았으나 지난번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의 말발굽이 지나간 의주

·두번째 OfOt:"lf /운명적만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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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산, 철산 등지는 그들의 노략질로 이미 쑥밭이 되었고 남녀노소를 마구 잡

아가 혈육을 잃고 비탄해 하는 참상을 경험한 바 청병이 서울까지 침입해 온

다고 하자 도성민들은 두려움에 울부짖고 있었다. 인조 일행이 수구문을 빠져

나가 남한산성으로 향할 때는 청군의 도성 침입의 길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

고자 장안의 신문, 서문, 남문의 삼문을 굳게 닫았으며, 인조의 피난 행차는

수구문을 빠져나갈 때 맨발로 달음질치는 성중남녀 피난인들과 서로 뒤엉켰고

길에는 다투어 먼저 꾀난묘자 하는 자들로 혼잡하였으며, 또 이들의 울음소리

는 하늘을 진동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특히나 이 혼잡 속에서 소현세자의 말

고삐를 잡았던 자도 혼자 도망하여 세자는 하는 수 없이 손수 채찍을 잡고 말

을채찍하면서 간신히 수구문을빠져나갈수 있었다

도성에 침입한 청병들은 모화관에서 남관왕묘까지 진을 치고, 또 동문 밖에 5,

6개의 병영을 만들어 기치와 창칼을 나열하고 북을 치고 군악을 떠들썩하게

울려 이를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놀라고 미혹되게 하였다. 다만 도성민을 침

해하지 못하게 하고 도성민의 출입 왕래는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마를 보

면 빼앗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잡아갔다. 청군은 포로들 중 젊은 청년들은

머리를 깎이고 갑옷과 말을 주어 전투의 선봉에 세우고 노인들은 나무하고 물

김게 하는 노동일을 시켰으며 젊고 예쁜 부녀자는 군중에 잡아두고 또한 노

파는 불 때고 물 걷는 일을 시켰던 까닭에 적진 중에는 부녀들이 수 없이 많았

다. 그리고 진 밖에는 어린아이 시체가 무더기로 널려 있었는데 이것은 사족

과 민간 부녀들이 황망히 피난히는 중 화친의 소식이 있어 곧 화친되리라는

생각에 멀리 피난치 않았는데 16일 이후 적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

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에 버려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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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굶주리고 얼어 죽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 속에서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을 다시 빠져나와 강화로

피신하고자 하였으나 강화로 가는 길이 이미 막혀져 어쩔 수 없이 남한산

성에서 청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나라의 운명과왕실의 생폰이 한치 앞을알수 없는안개 속에 갇힌 채 해

가 바뀌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있던 인조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성안에는 만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식

량은 이미 바닥이 나고 있었다. 1월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조정대신 500

여명과 함께 엄동설한의 삼전도로 나아갔다. 삼전도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을 높이 쌓아 놓고 있었다. 거기서 인조는 북쪽의 청 태종을 향

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매頭)

로 항복의 예를 올린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때 얼어붙

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

가 패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꿀려간 조

선 백성이 60여만 명, (7년 전쟁〉이라는 임진왜란 때 왜에 납치된 숫자가

3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불과 (50일 전쟁〉으로 60만 명의 백

성이 청으로 꿀려간 것이다. 참담했던 당시 백성들의 상황이 이 숫자에서

도읽혀진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청나라는 11조항에 달하는 항복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

중 가장큰난제가세자와왕자 및 대신의 자녀를 청나라수도 심양으로 인

• 두번째 이。"71 /운명적묘범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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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리한 요구 앞에 조정 대신들은 불같이 일

어섰다.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다시 전쟁을 치르자는 치열한 논쟁이 계속

됐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신의 안위와 가문을 중시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자

녀를 볼모로 보내지 않기 위해 관직을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청나라는

오랑캐족 야만의 민족이라 볼모로 잡혀갈 경우 과연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그 생사여부조차 장담하기 어렵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에 누구도 선뭇 볼

모로 이들을 내놓는 이가 없었다. 그때 모든 논란을 잠재우며 볼모를 자청했

던 이가 소현세자였다. 백성들의 고통을 막고 혼란스런 조정을 다잡아 청나라

와의 전쟁을 끝낼 방법은 자신이 볼모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

다. 당시 소현세자의 나이 26세, 그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는 27세, 감격에 차

서 첫 이들을 얻었던 그 해 세자 부부는 청나라에 잡혀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린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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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치욕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만인 2월8일,

소현세자 일햄은 철수하는 청너라군대와함께 심양으로 출발했다.

인조는 창릉의 서쪽까지 나와세자 일행을 전송했는데

장성한두아들을멀리타국 더욱이적국에볼모로보내야히는인조는세자의

안위를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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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와 강!인 강|양으로 까다

삼전도의 치욕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만인 2월8일, 소현세자 일행은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와 함께 심양으로 출발했다. 인조는 창릉의 서쪽까지 나와 세자

일행을 전송했는데 장성한 두 아들을 멀리 타국, 더욱이 적국에 볼모로 보내

야 하는 인조는 청나라 대장 구왕에게 특별히 세자의 안위를 부탁했다. 〈자식

들이 깊은 궁궐에서만 생장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여러 날 동안 노숙하여 질병

이 벌써 생겼다 합니다. 가는 동안에 온돌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하면 다행이

겠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답변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만 리 길

을 떠나보내니 펼시 여러모로 마음을 쓰실 댄 데 국왕께서 건강을 해칠까 매

우 두렵습니다〉 했다 한다. 또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절하며 하직인사를

올리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

볍게 보이지도 말라〉 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소현세자가 엎드려 분부

를 받았는데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소현세자가 만류하며 말하기

를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는가, 각자 진중하도록 하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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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세자 일행을 청으로 보내는 일에 대해 인조가 얼

마나 상심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아버지의 그 괴로움을 읽

은 소현세자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도 보인다. 비록 전쟁에 참패한 힘없

는 나라의 국왕과 세자라 할지라도 주어진 운명에 당당히 맞서보겠다는 게

당시 소현세자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이때 민회빈의 아버지 강석기 또한 사위와 딸의 먼 고행 길을 배웅하러 나

왔다. 앞으로 딸이 겪어야 할 험한 여정을 알 길 없는 강석기는 조금이나마

딸을 돕기 위해 민회빈의 오빠이자 차남 강문명을 특별히 세자부부와 함께

심양으로 가도록 조치했다. 이는 당시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이었는데 다

른 대신들의 경우 행여나 심양에 보내질까 두려워 아들을 관직에 둥용하기

를 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강석기와 딸 민회빈은 인조와 소현

세자 앞에서 드러내놓고 석별의 마음을 나누지도 못한 채 안타깝게 마음으

로 안부를 빌었다. 이것이 민회빈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될 줄 그때

는아무도알지못했다.

강석기는 그 뒤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후처리 과정에서 도마에 오른다. 강

화도에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주장한 소위 척화파의 거두로 지목돼 항복하

고 화의하자는 측에서 처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간신히 최명길의

도웅으로 처벌은 면하게 됐지만 이 과정에서 생긴 정치에 대한 심한 불신

으로 강석기는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 금천에서 남은 일생을 보

내게된다.

드디어 행렬이 웅직이기 시작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겨울

·세번째 이야7 1/소현세X빠강빈심앙으로가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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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북쪽으로 땅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

을지 과연살아서 돌아올수 있을 것인지 조차알수 없는 기약 없는 길, 더욱

이 구중궁궐에서 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낯선 땅 볼모의 생활이 어떤 것

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 마음은 더욱 무겁고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전송 나온 신하들이 길가에서 통곡하며 엎드렸다 혹은 일행의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었는데 이 때문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통곡이 멈추기까지 한참

을 기다리기도 했다. 이에 정명수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자

이를 보고 경악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일행이 점점 북으로 이동하는 동

안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진다. 청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의정

이성구의 발의로 하는 수 없이 세자를 보필하는 일행의 수를 줄여야했다. 흉

년이 든 땅에서 일행이 너무 많으면 그 생계를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

었다,

그때 압록강을 건너던 일행의 심정을 알게 하는 시 두 편이 전해지고 있다.

〈이별하던 날에 피눈물이 날지 말지/압록강 내린 물이 푸른빛이 전혀 없네/배

위에 허떻게 머리 센사공이 처음보네 하더라〉

홍서봉이 지었다는 이 시는 피눈물을 삼키며 고향 조선 땅을 벗어나고 있는

세자 일행의 괴로움과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머리가 허떻게 셀 정도로 압

록강에서 배를 젓는 사공조차 이런 행색의 일행은 처음 봤다 한다. 혹은 고된

일정에 지쳐있었을 태고혹은 이 상황이 억울해 눈물을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현세자를 위해 드러내놓고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땅으로 접어들자 봉림대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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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석령 지났느냐 초하구가 어디인가/호풍도 차기도 차구나 꽃은비는 무

슨 일인고/아무나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데 드릴까〉

그래도 조선 땅을 지낼 때는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단동을 지나 단동과 심양의 접경지대에 있는 초하구에 이르게 되자 드디어

이곳이 오랑캐 청나라의 땅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호풍이 차다는 말

은 그래서 나옹 것이다. 이제부터 맞딱뜨릴 새로운 생활, 봉림대군은 울걱

두고 옹 궁궐과 아버지가 걱정됐던 것이다.

2월9일 출발한 세자 일행은 4월10일 심양성 남쪽에 도착한 후 청나라 고

관들의 영접을 받고 조선사신 접대소였던 동관에 잠시 짐을 풀었다. 그 후

5월7일 신관에 거처를 마련하니 이곳이 앞으로 9년을 살게 될 심양관이다.

당시 이곳 심양은 청나라의 수도 한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

한의 도시다. 지금도 도심 곳곳엔 청나라의 발상지였던 면모가 남아있는데

청 태조 홍타이지의 무덤을 비롯해 당시 각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청 황제

를 알현하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는 자리에 하마비라는 표석도 세워져있다.

소현세자 일행이 거처로 λF용한 심양관 자리엔 현재 심양시 아동도서관이

자리잡고있다 물론당시의건물은흔적도찾아볼수없고특별한표시도

없지만 2001년 심양시 시립도서관장 쥐진은 이곳이 심양관이었음을 확인

해주었다. 중국 문헌 〈성경통보〉에는 이 심양관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돼있

다. 〈대문은 남쪽으로 나 있으며 문간체가 3칸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남향

으로 5칸의 정발이 있어 세자와 대군이 기거했다고 한다. 또 그 양면으로

5칸씩 나란히 상방이 있어 수행한 조신들이 살림을 맡은 호방, 외무를 맡

·세번째 。,。 f:7 I/소현세X빠강빈심양으로가다 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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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예방, 마필을 관장하는 병방, 조선관의 수선을 도맡은 공방 등의 업무를 관

장하고 있었다. 중문밖에 하인들이 임시 처소를 짓고 기거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심양관의 볼모생활이 시작됐다. 심양관에는 공식

인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약 3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머물렀다.

심양관의 세자와 민회빈은 조선 조정을 대신하는 외교 책임자의 역할과 청나

라에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임, 세자로서 자존을 지키는 일, 또한 함께 한

많은 신하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임무에다 포로로 꿀려온 조선인들에 대한 구

호의 영사 업무까지 어깨에 지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소현세자의 일상은 감옥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심양관 밖으로 한 발지국도 나갈 수 없았다. 출입을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것뿐 아니라 조선에서 옹 사신들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이 계속됐다. 조선에 대한 각종 요구사항들

을 소현세자를 통해 관철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을 눈으로

목격한 소현은 결코 청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중국 문헌 〈방색지

의〉에 의하면 인질생활 3년이 지나도록 그는 정 황제의 사냥이나 연회에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에 파병이나 물품을 요구하는 일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거절하기도 했다 청 황제의 협박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데 볼모의 위치에 있으면서 소현이 이토록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청에 대한 복수의식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청나라는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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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이다. 명나라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리라던 예상을 뒤엎고 청나라는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해 나갔다. 그 바탕이 된 것이 막강한 군사력, 그

유명한 팔기군 이다. 만주족이라면 누구든 8개중 하나의 기에 들어가게 된

다. 그것이 만주족의 호적이자 전쟁을 수행하는 단위였다. 수렵생활을 통

해 다져진 그들의 용맹성은 만주족 만 명이면 무엇으로 당할 수가 없다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다.

명나라의 쇠퇴는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부 사정과 조선의

따병을 계기로 북만주에 힘의 공백을 생기자 그 틈에 힘을 모은 만주족은

파죽지세로 중원을 향해 나갔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던 시기 청은 이미

만리장성까지 진출해있었다. 중원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청나라의 압박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청나라는 대명정벌전쟁에 소현세

자가 동행해 줄 것을 요청 했다. 소현세자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세자는 자신의 판단보다도 아직 국내 조정 대신들 간에 팽배

해있는 친명 사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고심 끝에 소현세자는 병을 칭해 하루 이틀 동행을 미루다 결국 동생 봉림

대군을 보내는 계책을 생각해낸다. 소현의 속마음을 뻔히 아는 청나라였지

만울며 겨지- 먹기 식으로 소현의 동행을포기할수밖에 없었다.

소현세자와 청나라와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은 통역관 사건에 이르러 극도

로 악화된다. 청나라가 소현세자의 통역관 정뇌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그의 처형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 써!번째 。,。Pl/소현세자와강빈심앙으로가다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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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7년 5월 청나라 장군 용골대 마부달 두 장군이 심양의 대신들을 불러

통역관 정뇌경 등이 청나라를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정뇌경 등의 죄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며 조선에서도 이미 자문을 보내왔으니

지금 처치해야 할 것이다〉

놀란 대신들은 어떻게든 청나라 장군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속바치기, 즉 뇌물

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더욱 화를 내기 시작한다.

〈국왕이 신하들로 하여금 속바치는 것을 도모하게 하였는가? 신하들이 스스

로 속바치기를 도모하였는가? 신하들이 당초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이처럼

그를 구하려는 것인가?〉

〈국왕의 본뭇은 자문 안에 다 들어있다 어찌 다른 뭇이 있겠는가? 세자와 대

군도 모르는 바이다. 다만 우리들이 같이 있은 지 오래되어 그가 죽는 것을 차

마 볼 수 없었으므로 감히 이 계책을 내었을 뿐이다〉

신하들은 여러 번 간절하게 다시 요청했다. 그러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우리를 해치고자 도모한 자를 구원하는 것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고리를 먹은 뒤에야 마음에 쾌하겠는가?〉

자신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신하들은 이 일을 소현세자에게 알렸

다. 그러자 소현세자가 친히 장군들을 만나 통역관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나서

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라는 걸 신하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정명수,

김돌시 두 역관이 소현세자의 말 앞에 엎드렸다.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통역관들은 이 일로 인해 소현세자가 다치게 되는 일은 막아야만 했다

결국 정뇌경은 새 옷을 갈아입고 관문 밖에서 하직하니 세자가 인견하고 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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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했다. 정뇌경은 대문 안에서 동쪽 본국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그

어머니를 위하여 두 번 절한 뒤 죽임을 당하였다. 서리 강효원 역시 같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부하들조차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소현세자

는 김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 상태로 계속 꿀려 다닐 수는 없었다. 뭔

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소현세자의 어깨를 짓

누르기 시작했다.

• 세번째 이야기/소현세X빠강빈심양으로가다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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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II앤'»-If∼ 。,야,,, 갱어까응

인조는 수만리 떨어진 조선의 한S때l 있고 소현세자는 청나라 바로 곁

섬뺑l 있으니 청나라로서는마음만먹으면불가능한일도아니었다. 이런사태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인조와조선의 조정 대신들,

그들과소현세자사이엔조금씩벽이만들어지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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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의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조선 조정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청나라와 관련된 일들이 사사건컨 소현세자와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인조15년 실록을 보면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향할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이로부터 면포 수십 멸을 받게 됐는데 처음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래 신하

들의 청해 의해 이 면포를 받았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대신들은 소현세자가

적당한 구실로 면포를 거절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인조는

일처리가 아름답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인조는 소무가 겪었던 것처럼 고

생을 해야 히-는데 술 마시고 거처하는 것을 평소와 같이 하려고 한다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심양에 가는 이들은 반드시 단속하여 주의시키도록

하라고 말한다. 소무는 한나라의 신하로 흉노에 꿀려가 19년 동안 저항했던

충신의 표상이다. 세자는 일개 신하가 아니라 조선의 대표 자격이었음에도 인

조의 판단에는 지숙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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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자를 모시는 관원들을 적당한 시기를 두고 교체할 것을 건의해 인조

의 허락을 받아낸다. 세자 일행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듬해 인조16년이 되면서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소현세자가 청

나라에 대해서는 의연하고 꿋꿋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심양에 꿀려온 조선

인들에게는 여러 방면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었다. 팔왕을 비롯한 청

나라 대신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조선에 우호적인 의견을 가지도록 힘쓰는

한편 포로로 꿀려온 조선인들의 송환을 위해 번번이 관소의 은을 내어 몸

값을 지불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평안감사가 매월 초하룻

날에 심양의 소현세자에게 음식을 올렸는데 세자가 농사일이 한창 급할 것

이라 생각해 4월 초하룻날 올리는 음식을 줄이게 하니 이 일대 백성들이

감격하고 기뻐했디고 한디. 조금씩 조선의 북서쪽 지방에 소현세자의 칭송

이 이어지게 됐고, 청나라는 기개 있는 조선의 왕자에 대해 조금씩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 해 8월, 대신 박노가 심양에서 조선으로 돌아옹다. 실록은 그때 박노가

인조에게 심양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나왔다고 적고 있다 박노는 인조에게

이렇게보고한다.

〈피차간의 형세가 같지 않음으로 저 곳의 사정을 조정에 알리려고 나온 것

입니다. 이는 신의 의견도 아니고 또한 세자께서 마음대로 보낸 것도 아닙

니다. 저들이 아직도 우리나라를 믿지 않아 차관을 보내어 힐문하려고 하

기 때문에 부득이 나왔을 뿐입니다〉

인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소현세자가 조정에 다녀오라고 보낸 것도 아닌

데, 세자를 모시는 말단 관리가 제 판단대로 심양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 네번째 01。r71 /김어7 f는갈등 05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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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박노는 결국 조정 중신 중 누군가가 심양 사정을 정탐하기 위해 일부

러 뽑아서 보낸 밀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밀정의 보고 내용이 청나라가 조

선을 믿지 않고 있어 양국의 관계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록에는 이

보고에 대한 인조의 답변이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하건대 인

조는 세자가 심양에서 청나라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

하다.

우려하던 일은 결국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간 지 3년째 되던 인조 17년에 일어

나고 만다. 실록을 보면 3월 인조가 심양에서 오는 내관의 장계를 열어보지 말

라고 특별 명령을 내린다 실록은 이때 심양에서 일하는 내관의 장계 안에 비

밀히 계달한 일이 많이 있어 외정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이 하교가 있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심양에 파견된 내관 중에는 인조의 밀명을 받은 이들이 공

식적인 보고서 외에 비밀 보고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마침내 그해 7월

심양에서 대신 박황이 조정으로 들어온다. 이때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명나라

를 공격하는데 군사를 보내 협조하고 협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인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이에 응할 리가 없었다. 숭명반청의 사상이 뿌리 갚게 자

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박황의 보고는 인조와 조정 대신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이 저들의 지역에 오래 있었으니 반드시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 것이다〉

〈심양의 사정은 보안을 철저히 하여 알기가 어려웠습니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마침내는 불측한 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일찌감치 대비를 해야 할 것으로

여겁니다 신이 심양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범문정의 말을 은밀히 전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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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성에서 나왔을 때에 아들로 바꾸어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

는데 이는 참으로 망측한 말입니다〉

〈범문정이 말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정병에 관한 일을 거절한 이유로 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부제한 김반이 대화에 끼어든다.

〈정축년의 일은 종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보니 저들

이 호의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남의 성지를 이미 수선하였으

니 강도도 보장으로서 울타리가 되는 곳이니 모름지기 미리 잘 조처하여

후일의 진양으로 삼아야 됩니다〉

김반의 의견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청나라가 극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만약의 사태 즉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

러자 인조는 이렇게 사태를 정리한다.

〈경들의 돗은 이러하나 나는 오히려 호의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환란에 대한 방비는 미리 헤아려서 해야 한다. 바꾸어 세운다는 말은 공갈

에서 나옹것이니 갚이 염려할필요가없다〉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

다는 내용의 밀정 보고를 듣고 이를 거짓말일 것이라고 일축한 것이다. 그

러나 실상 이 문제는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며 조정을 극도의 위기감속

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을 남겨두고 조선

·네번째 이。n11깅어7 f는갈등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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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협력을 원했으나 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조선의 왕 인조를 수도 심

양에 불러들여 입조해야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를 차일피일 미루자 세자

전위 문제를 일부러 흘려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인조는 수만리 떨어진 조

선의 한양에 있고 소현세자는 청나라 바로 곁 심양에 있으니 청나라로서는 마

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사태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인

조와 조선의 조정 대신들 그들과 소현세자 사이엔 조금씩 벽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18년 세자는 인조의 문병을 이유로 일시 귀국을 허락받았다 청나라에서

는 세자의 귀국 조건으로 당시 4세밖에 되지 않았던 원손 석철을 심양으로 보

낼 것을 요구했다. 어린 원손은 먼 길을 이동해 평안도 숙천에서 세자와 교환

돼 심양으로 갔다. 상황은 억울하고 기막힌 일이었지만 민회빈 입장에서는 어

쨌든 이 일로 인해 보고픈 어 린 이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호란의 와중에서 아

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옹갖 방법을 강구했던 아들이다. 원손은 이 해 11월까지

심양에 머물다 돌아가게 된다.

인조의 병은 그리 위중한 상태는 아니 었다 소현으로서는 그리운 조국의 땅을

밟아보고 그동안 심양과 한양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조선을 식민지인양 여기는 청나라의 1차 공격

대상이었던 소현은 그동안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심양에 꿀려간 뒤

처음으로 밟는 고국땅, 그 조선은 동토의 땅 심양보다 더 출고 얼어붙어 있었

다. 아버지 인조는 아프다는 이유로 반기는 내색도 없었고 대신들조차 가깝게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어쩌면 청의 손에 의해 왕위가 전위될지 모른다는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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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감지되는 그 일, 지금으로선 역모라

밖에 칭할 수 없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경우 조선의 왕은 소현이 되겠지만

당장 소현의 편에 섰다가는 서슬 퍼런 인조의 손에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대신들은 일부러 소현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현은

당장 해야 될 일들, 그러니까 조선인 노예문제나 청나라의 파병요구 그리

고 청나라에 반대했던 척화파 대신들의 처리문제 등, 현안에 대한 조정의

입장을 확인하고 돌아서야 했다. 그저 착잡하고 쓸쓸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소현을 기다리는 건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였다 청은

세자가 앞장서서 나서주길 원했지만 본국의 입장을 너무나도 잘 아는 소현

으로서는 무조건 청의 입장을 따를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현의 태도에 화

가 난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는 드러내놓고 소현세자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용골대가 세자에게 회의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위협하는 말로 협박

하자세자가화를내면서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

박하지 말라〉

용골대가 웃으며서 사과하였다.

〈세자께서 이곳에 계시므로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여야 하나 때때로 본

국에 미루기도 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세자가대답하기를

• 네번째 이야71/갚어7 f는갈등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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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감히 할수 있는 일은스스로힘써 하고할수 없는 일은부득이 국왕께

통보하는 것인데 어찌 미루겠습니까〉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숨죽이며 살다 돌

아가자 했던 심양생활,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의 상황은 소현세자에게 변회를

강요하고 있었다. 보다 강하고 보다 지혜롭게 이 사태를 헤쳐 나가야 송}는 절

대 절명의 과제가 조선을 떠나오는 그 순간부터 그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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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뀔캠 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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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l행쩨 O「야1’, 여장뿐

소현세자와민회빈은이제명분보다실리를,

‘ 그것도백성들편에서서득실을표찌는새로운눈을카지게된것이다.

그들은조선역사상가장현실적이고실리적인세자와세자빈으로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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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혼하강 주맨엔 넓은 공터가 있었다. 마을 주민

들의 증언에 의하면 10년 전 아파트가 들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선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농사는 심양관의 소현세자 일행이 처음 시작했

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로부터 300년이 넘도록 심양 일대에서 중요한 논밭

으로 활용됐다 원래 이 일대는 땅이 척박하고 여름은 짧고 겨울이 길어 제대

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이다 더욱이 유목민이었던 청나라 사람들은 농

사에 대해 무지했다 심양관의 조선인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준 농작물 경영이

이후 심양 일대에 말없이 번져나갔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다시 심양으로 돌아옹 뒤 소현의 행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일단 그가 벌인 일이 농사였다. 당시 청나라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늘 물자

가 부족했다. 처음에는 심양의 식량은 공급해주더니 차차 그것조차 어려워지

고 있던 터라 농사를 지어 생활비를 보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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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은 발각 뒤집혔다. 소현을 모시던 관리 중에는 농사경험이 전혀 없는 양

반가문 출신도 있었고 대부분 궁궐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라 농사는 익숙

하지 않았다. 더욱이 농사까지 짓게 되면 어쩌면 영영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게 된다. 그런데 소현

은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생활비를 마련하는 차원

이 아닌 또 하나의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심양의 야리강가의 땅 3백일갈이(하루갈이는 장정1인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단위)와 사하보 근처의 100일 갈이를 비롯해 왕부촌과 사을고의 땅에

농사가 시작됐다 제법 땅도 넓었는데 이때 농경에 투입된 사람들이 노예

190여명, 조선 조정에서도 농군을 징발해 심양으로 보냈지만 대부분 민회

빈이 노예시장에서 사들인 조선인과 한인들이었다. 이때 농사를 짓는데 필

요한 종자 의복 식량을 본국 조선에 의뢰했는데 자연 조선에서는 많은 물

자가 심양으로 건너오게 됐다. 농사를 짓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기 때

문에 청의 관리들은 별반 트집을 잡지 않았다 이 물자를 직접 관리하고 정

리한 사람이 또한 세자빈 민회빈이었다. 농사를 계기로 민회빈이 심양관의

안주인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민회빈은 전형적인 조선의 여인이었다. 성리학의 원칙과 이론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아버지와 오빠들 그런 가풍에서 자라 차기 국모의 자리에 오

른 여인으로서 그녀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유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

은 하늘이고 남편의 뭇이라면 죽는 시늄까지도 해야 하는 게 아내의 도리

이고, 사농공상의 신분이 철저하게 존재해 농사짓고 장사하는 일은 양반이

·다섯번째 이야기/여장부민회빈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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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직접 노예시장의 일에 관여하고

나선 것이다. 농사도 직접 거들고 관리해나가기 시작한다 심양관 생활 3년 만

에 그녀는 남편의 그늘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 아내에서 적극적으로 남편의 일

에 협력하고 도와주는 조력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변신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소현과 민회빈은 처음부터

순탄한 과정을 걸었던 부부가 아니다‘ 첫 번 째 세자빈 간택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방황했던 소현, 더욱이 혼인한 지 무려 9년 만에 원손을 낳은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원하던 이들 부부 사이는 심양에 온 뒤 180도로 바

뀌었던 것이 분명하다. 원손 석철을 낳은 이후 심양에서 소현과 민회빈 부부

는 이들 2명에 딸 3명, 모두 다섯 명의 자식을 더 낳는다. 낯선 땅에서 수시로

맞서야 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대화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논

동안 특별한 부부의 정이 쌓여갔을 것이다. 더욱이 민회빈 으로서는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 오랑캐 족이라 멸시하던 청나라의 땅에서

벌어지는 낯선 일들로 인한 문회충격에다 노예로 잡혀와 온갖 고초를 겪는 조

선인들의 비참한 생활, 어떻게든 조선의 안위를 지켜야한다는 차기 국모로서

의 책임감에다 어떻게든 남편의 고민과 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내조자의 역

할까지, 쏟아지는 정보와 감정의 물결에 우왕좌왕했던 시간이 3년, 농사를 시

작하고부터 민회빈은 바빠졌다.

처음 심양관에서 부리던 노예는 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인은 한족, 즉 명

나라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그들은 한족에 대

해 남다른 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회빈은 조선에서 들어오는 물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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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펼요한 것과 나중에 필요한 것 돈으로 바꾸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들로 분류해 당장 필요하지 않는 것과 돈으로 교환할만한 것들

은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현금을 만들어갔다. 그 돈

이 쓰인 곳은 노예시장,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노예시장에서 조선인들의

몸값으로 지불하고 데려와 심양관의 농부로 부리거나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다. 소현세자도 민회빈도 자기 백성들이 이국땅에서 당하는 고초가 가

장 가슴 아프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노예로 꿀려

오지 않도록 조정에서 대처 방안이 나오게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조정

상황은 노예로 꿀려온 사람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정치적 외

교적인 해결방법이 시간이 걸리고 복잡한 길이라면 가장 단순한 것이 돈으

로 그들을 다시 사들이는 것이다.

그때 심양 남탑거리엔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이 형

성됐다. 당시 만주족은 조선인 포로들을 팔아 포상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50만 명, 본국 조선으로 송환하려면 소 6마리

라는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했다. 그것은 송환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잡혀옹 포로 중에는 여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본국으로

송환된다 하더라도 환향녀라 해서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다.

남탑거리 주변에서는 팔려나가는 조선인들의 울부짖음이 계속됐다. 심양

에 있던 민회빈은 이런 백성들의 처절한 상황을 직접 보고 들으며 한시가

급한 노예들을 구할 방법에 팔을 걷어 부치지 않을 수 없었다.

민회빈이 현실적인 해결방안에 몰두하는 사이 소현세지는 정치적 외교적

·다섯번째 이Ot:7f /여장부민회빈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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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으로 떠나는 |맡잉~-

노력에 심혈을 기울인다. 인조 21년 강계에서 붙잡혀간 조선인 문제를 심양관

에서 해결한 사건은 실록에까지 기록돼 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박씨 등

이 소현을 찾아와 강계에서의 사건에 대해 격렬히 항의한다. 사건인즉 산토,

외괴, 이동 세 곳에서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인삼을 캐다가 청나라 시-람

에게 발각돼 강계 사람 40여명이 잡히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잡아가던 중 50

여명이 뒤따라와 청나라 사람들을 포위히-고 대포와 활을 쏘이- 청인 2명이 죽

였다는 것이다 이때 잡힌 사람들이 36명인데 이들을 조사한 결과 강계부 전

령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단순히 농민들이 독자적으로 행한 일

이 아니라 병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보다 큰 세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며 따

지게 된 것이다. 상황을 듣고 보니 용골대 장수의 말이 맞았다. 소현세자는 이

죄를 어떻게 조치할 것이냐고 따지고 드는 용골대에게 공손한 말로 사과의 돗

을 표한다. 애써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모른다고 장아멜 일이 아니었다. 도리

어 소현은 잘됐다 싶었다.

다음날 통역관 정역은 무사히 36명의 강계인들을 데리고 심양관으로 돌아왔

다. 사형까지 내려진 이들을 석방하면서 용골대는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이들은 다 우둔히 여 무식한 지-들이고 따로 그 일을 주장한 사람이 있을 것이

니 이들의 사형을 감면하고 관소에 보내 농시꾼으로 살도록 하라〉

바로 소현이 이 점을 지적해 용골대를 설득했음이 분명하다. 농민들이 독자적

으로 벌인 사건이 아니라 분명 배후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농민들은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으니 굳이 사형까지 시킬 일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자 용골대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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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인조 20년 추수가 끝나자 심양관은 작

은 설레임과 기쁨으로 들폈다. 예상 밖으로 수확이 너무 좋았다. 곡물의 경

우 사을고 둔소가 857석, 왕부촌 둔소 761석, 사하보 둔소 736석과 노가

새 둔소 932석 등 총 3천3백19석으로 풍년이었다. 그 이듬해에는 둔전이

여섯 곳으로 늘어 5천24석의 곡식과 목화 620근을 생산했는데 둔전은 더

넓어져 인조 22년에는 채소밭까지 할양받았다. 심양관의 가장 윗전인 민

회빈이 팔을 걷어 부치고 농사에 열심을 내는데다가 민회빈이 돈을 주고

노예시장에서 데려옹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농사를 지은

결과였다. 특히 전 참용 백여욱은 유천호를 성실히 일궈서 콕물 1400석을

얻었고 속환인 출신 이우춘은 돌이 많고 메말라서 농사가 될 것 같지 않은

땅을맡아곡물의 수량이 800여석이 되도록농사를지어냈다.

이 심양관의 채소밭은 이후 유명해져서 연행 사신들이 자주 들러보는 곳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심양관의 바깥주인 소현과 안주인 민회빈의 이야기가

단골손님처럼 등장하게 된다. 연행록중의 하나인 〈계산기정〉의 아판시도

그중하나다.

〈야판의 모진 세월 되 뇌이니 눈물이 가이 없이 흐르는 구나

동쪽으로 머리 돌리고 남은눈물마저 닦으니

효종이 묻힌 능위에서 저녁 구름이 걷힌다

야판의 밭이량은 어디 가고

밭가의 전자는 모래언덕이 되었구려

한마디 풀피리 울려오니

갈매기 안개 낀 물 섬에 내려앉는다〉

• 다섯번째 이야기/여장부민회빈 7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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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이 급증하자 당연히 심양관의 재정은 넉넉해져 갔다. 그러나 민회빈은 여

기서 그치지 않고 무역에도 뛰어들었다. 심양을 중심으로 청나라 사람들이 선

호하는 물품을 눈여겨 본 다음에 본국에 물품을 요청해 가져온 뒤 몇 배로 가

격을 올려 되파는 일을 한 것이다. 심양관은 공식적인 무역을 할 수 없는 처지

라 몰래 청나라 관리의 눈을 피해 이뤄지는 일종의 사무역 이었는데, 청의 왕

족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은밀히 조선에 밀무역을 요구하는 이도 있었다 민

회빈은 조선과의 사이에서 탈이 없는 거래가 이뤄지는데 신경을 쓰는 한편,

청나라 왕족은 물론 고위층과 안면을 갖고 우애를 쌓는 기회로 활용한다. 사

실 심양관의 이런 모습은 조선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인조실록을 보

면 심양의 팔왕이 은밀히 은자 5백 냥을 보내오면서 면포, 표피, 수달피, 청서

피, 청밀, 백자 등의 물품을 무역할 것을 요구하니 조정이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구중궁궐에서 자란 소현과 대가 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민회빈에게 돈

은 늘 필요한 만큼 곁에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일도 돈 때문에 힘들고 가슴

아푼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심양관에서 돈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돈

만 있으면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조선인들을 풀어줄 수 있고 돈만 있

으면 배고파 국경을 념나드는 조선인들에게 밥을 줄 수 있었다 명나라와 친

하게 지내던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던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는 밥 한 덩어

리의 값어치도 없는 논쟁이었다 진정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었다면 청의 요구

를 적절히 수용하면서 전쟁은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조정에서 양반 대신들이

명분과 도덕과 예의를 따져 명나라와 의리를 지켜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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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백성들은 죽고 다치고 집을 잃어야 했다

값진 물건을 조선에서 들여오면 청나라의 도도하던 왕족들이 비굴한 웃음

을 지으며 돈을 싸들고 와 굽신거렸다. 또한 돈을 쥐어주면 조선을 멸시하

던 태도가 180도 바뀌어버린다. 힘없는 심양관의 주인으로서 어떻게든 청

나라에 조선의 이미지를 좋게 원만하게 심기 위해서는 돈이 펼요했다. 농

사와 밀무역으로 모은 돈은 노예시장에서 조선인을 구하는 데 먼저 쓰여

졌고, 일부는 소현세자가 청나라 고위 관리들을 조선 편으로 만드는 정치

비자금으로 쓰여 졌다. 밀무역에다 비자금, 뇌물까지, 돈의 어둡고 은밀한

구석을 소현과 민회빈은 경험하게 된다.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

전에 그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다.

인조 18년 심양관의 민회빈이 목돈을 쏟아부어야할 사건이 발생한다. 청

나라의 파병 압력에 못 이겨 인조는 명나라 정벌을 도울 지원군을 보내게

되는데 그 군대의 책임자로 하펼이면 임경업을 임명한다. 임경업은 유명한

반청주의자, 명나라를 치는 일에 열심을 부릴 까닭이 없는 임경엽은 명군

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

보타주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

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 일발의 상황에 빠져든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

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

• 다섯번째 이야71 /여장부민회빈 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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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

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r세자가감시를 이와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한마음이라는 것을 알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r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Ocf국 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 편을 들면서도 유화적인 몸

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

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청나라가 서둘러 소현에게 조선의

왕위를 물려주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현세자가 외교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 뒤에서는 민회빈이 뛰

고 있었다 민회빈은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벌어질 때마다 막대한 자

금을 쏟아 부었다 심양관의 이 뇌물 덕택에 심옥은 종결지어지고 단 한 명이

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을 백성들의 안위를 위

해 아낌없이 쓰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이끈 이가 바로 민회빈, 청나라의 고

위 관리들까지 쥐락펴락하는 그녀의 수완은 대단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은

이제 명분보다 실리를, 그것도 백성들 편에 서서 득실을 따지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세자와 세

자빈으로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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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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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이야1’ ,I 흑!혐송~ 딴냥, i현과

편지에서 〈저와저희 백성들을가르칠 수 있는

‘당신의동료가운데한사람이간다면매우기쁘겠습니타〉라는부탁을한다.

이에 아담살은 서양선교사의 직접 조선 입국은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생ζF하여

영세 받은 명나라의 환관과 궁녀를세자어1게 딸려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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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강남 r 소현과 아달

1640년, 그러니까 17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동아시아의 상황은 급변

하고 있었다. 중세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근세로 넘어가는 길목, 즉 서양

의 발달한 문명과 문화가 전달되면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빠른 진전이 이뤄지

고, 정치 질서도 절대왕권이 조금씩 붕괴되고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데다가 생

산력의 발전은 관습과 문화, 삶의 형태를 바꿔놓고 있는 바야흐로 변혁의 시

기였다.

심양관 생활 초기, 청나라 조정 대신들과의 만남 자체를 꺼려했던 소현은 시

간이 지나띤서 조금씩 그 생각을 바꿔간다. 1641년 인조 19년, 소현은 동생 봉

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금주 전투에 종군했다- 한 달 동안 전쟁터를 따라다

니면서 소현은 국제 정세와 청의 힘에 관해 놀라운 사실을 보고 느끼게 된다

총은 물론 강력한 폭탄까지 보유한 청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적을 물리쳐 나갔

다. 조선이 안타깝게 명나라를 붙잡아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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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뒤 인조 22년 드디어 청나라는 북경 대공격에 나선다. 소현세자는 역

시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군대의 마지막 진격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산

해관 전투 등에 종군한 세자는 5월2일 북경에 입성했다가 6월18일 돌아온

다. 300년 넘게 지켜옹 사대의 나라 명나라가 환관들의 전횡에 의해 망하

면서 의롭게 목숨을 던지는 이 하나 없는 모든 상황을 직접 보면서 청나라

에 대항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됐다.

1644년의 명, 청 교체는 반전을 거듭했던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자성이 이

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은 자잘하

고 이로써 명조 300년의 역사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그런데 청에 항

복한 명의 장군 오삼계의 인도로 청군이 만주로부터 내습, 여기서 이자성

이 패함으로써 천하는 순식간에 청으로 넘어간 것이다.

청 세조는 9월 심양에서 본진 군대를 이꿀고 북경으로 향한다. 심양에서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고 명실 공히 청나라가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선

포하기 위해서여였다. 이 여정에 심양관의 소현세자가 동행하게 된다. 세

조의 요청이었기에 싫든 좋든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소현세자

가 북경에 입성한 것은 9월19일, 그리고 11월26일 마침내 고대하던 완전

귀국 허가를 받게 되니 그의 북경 생활은 70일을 넘지 않는다. 북경의 70

일, 중원 천하를 둘러싼 거대한 전쟁이 바야흐로 청의 천하통일로 귀결되

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소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여섯번째 이야기/위험한뱀,소현과。땀살 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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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

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렬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

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댄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

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

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호기심 많고 세상의 새로운 문물과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소현에게 북경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행동이 완전히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북

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하루하루 소현은 달라질 수밖

에 없었다- 첨단과학기술 진보하는 인류의 문명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소

현의 눈은 성리학에 갇힌 폐쇄적인 조선의 세자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계

를 받아들이는 글로벌 인간으로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북경에서 만났

던 이들 중에 소현세자를 사로잡았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주교 신부

아담살이었다. 북경 동안문내에 묶게 된 소현은 가까운 거리에 아담살이 산다

는 애기를 듣고 그를 직접 찾아 나선다.

아담살, 중국식 이름은 탕약망, 그는 독일 뀔른에서 출생한 예수회 선교사였

다.1622년 중국으로 건너옹 아담살의 근본목적은 포교에 있었겠지만 실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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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땅에 서양의 첨단과학문명을전수한공이 큰 인물이다. 그는천문 역법

에 밝아 월식을 예측함으로 중국 사람들 사이에 이름을 얻었고 이후 대포

만드는 법을 알려줌으로써 청의 강희제 순치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다. 1645년 흠천감 즉 천문대장 직에까지 올라 이듬해 시헌력을 완성했다.

시헌력은 태음력에 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작과 하루의 시각

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달력으로 1628년부터 명나라에서 사용되다가 청

나라가 들어선 뒤 청에서도 그대로 받아 사용한 달력이다.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은 서양을 따라갈 수 없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지구는 둥글고 지구 반대편에는 서양이 존재한다는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

선조 36년에 마태로 닛치가 지은 만국여도가 전해졌고 광해군 6년인 1614

년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보면 서양의 존재가 분명하게 기록돼있

다. 1631년 인조 9년에는 정두원이 북경에서 몇 가지 과학기기와 서양 서

책을 가지고 들어옹다. 서양화포, 천리경, 자명종, 자목화, 원경서, 치력연

기, 이마두, 천문서, 직방외기, 서양국 풍속기, 등이었다. 진진사 정두원이

북경에 머물러 있딘 때에 그곳에서 전교수회의 포르투갈 신부 요하네스 루

드리게스의 내방을 받고 하나 얻기를 청하니 신부가 이를 들어줌과 더불어

여러 기기 또한내주었던 것이다. 시헌력은 1644년 청나라가북경이 점령

하던 그 해, 소현이 북경에 와 있었던 바로 그 해 김육이 숭정초년부터 사

용되고 있었던 시헌력을 구해 귀국함으로써 조선에서도 사용하게 된다.

소현과 아담살이 몇 번이나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상당히 깊은 관계로 발전했음을 짐작케 하는 몇 가지 단서들이

• 여섯번째 이야기/위험한묘밤, 소현과이담살JJ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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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소현의 귀국이 결정되자 아담살은 그에게 선물꾸러미를 보낸다. 지구가

원형을 보여주는 여지구 1개와 예수 초상화인 천주상 l폭, 우주만물 및 인체의

조직을 설명한 주제군정 2권, 여기에 숭정역서, 원경설, 서양측일력, 측식략,

신법력 등의 천문서적과 주교인기 진복성전 등의 기타 천주교 도서 둥이 들어

있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소현은 아담살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어제 천만 뭇밖에도 보내주신 귀중한 구세주 천주님의 성화를 비롯하여 각종

양학 서류 등의 선물을 배수히옵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는 지 귀하는

상상조차 못하실 겁니다.

거기엔 정신수양과 덕성 함양에 적합한 도리가 탁월 명확하게 구비돼 있음을

즉각 깨닫겠나이다. 천주님 성화의 그 존엄한 모습은 그를 앙모하는 자에게

심오한 인상과 감회를 자극하는데 이것을 벽에 걸어놓으니 보는 이의 미-음이

평온해질 뿐만 아니라 실로 속세의 때와 먼지를 청정케 하옵니다. 그리고 천

구의와 천문서류들은 천하에 없어서는 안 될 것 이온데 이제 이것이 저의 수

중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인지 저로서는 형언할 수 없

습니다 우리나라의 비슷한 것들은 솔직히 진부한 것들로 정밀하지 못합니다.

제가 귀국하면 다시 만들어 뭇있는 사람들에게 나누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

리 나라는 무지의 황야에서 학문의 전당으로 변모될 것이며 이 혜택에 두고

두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귀하와 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알지 못하였으나

이런 기연을 통하여 이처럼 사랑함이 혈연처럼 여겨지는 것은 수수께끼같은

일로 반드시 불가사의한 함이 우리를 이렇게 이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이런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하오나 저희는 아직

천주의 도를 알지 못하여 도리어 그 존엄성을 모독할까 염려되기에 천주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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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돌려드리겠습니다〉

면지에서 소현은 비록 천주의 존엄성이 모독될까 천주상은 돌려준다 했지

만 후에 〈저와 저희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당신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

이 간다면 매우 기쁘겠습니다〉라는 부탁을 한다. 이에 아담살은 서양 선교

사의 직접 조선 입국은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여 영세 받은 명나라

의 환관과 궁녀를 세자에게 딸려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편지의 내용과 이후의 요청 등을 통해 볼 때 소현은 아담살과의 만남을 통

해 상당한 수준까지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됐고 이미 흠빽 빠져들고 있었음

이 분명하다. 그가 진정 아담살에게 세례를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인이었는지는 밝혀낼 바는 없지만 그는 조선에 천주교를 전따하고 싶어 했

다. 북경에서 바라본 천주교와 서양의 기술문명은 부럽고 가지고 싶고 경

탄해마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조선에서도 똑같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인지, 사실 천주상을 돌려준 것을 보면 소현 또한 이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뒷걸음치지 않았

다. 북경이 달라진 것, 명나라가 패하고 청나라가 일어선 것, 그리고 세상

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일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이미 깨닫게 된 소현세자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앞으로 조선의

왕이 될 몸, 자신이 다스랄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온갖 수모를 당하며 보낸 9년 동안 그는 아프

게 곱썽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 경제적으로 부

강해 백성들이 배부른 나라 그리고 한 해 한 해 새롭게 변화 발전해가는

• 여섯번째 이뼈|/위험한만남,소현과。밤살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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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그래서 희망과 비전이 보이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소현세자가 아담살에게 보냈던 이 편지는 1928년 일본인 아마구찌에 의해 일

본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그해 여름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주로 아담살의 보고

를 토대로 한 중국 천주교의 흥망성쇠를 서술한 라틴어책(1672년 독일에서 간

행)을 발굴했는데 여기에 소현세지-와 아담살이 나눈 펀지가 수록돼있었던 것

이다. 소현세자의 편지는 원래 한문으로 씌어졌지만 라틴어로 번역돼 있었다.

아마구찌는 이 부분 본문 전체를 당시 서울주교 뭐텔에게 불역하게 하고 그가

본문중의 꽃이라고 감탄했던 소현세자의 펀지를 스스로 일본어로 번역해 불역

의 본문과 일역의 편지를 자신의 논문에 수록했다. 결국 세자의 면지는 한문

원본은 사라진 채 라틴어 불어 일이 호댁어 4개의 역문만 남은 셈이다. 그

나마 원본에 가장 가까운 라틴어본을 구해보기 어려운 상태여서 정확한 내용

을 확인하긴 어려우나 그가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에 대단히 호의적이

었고 조선에 전파하고 싶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9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귀국이 결정되고 소현은 북경을 떠나면서 아담살

이 작별의 선물로 보내준 서구의 과학기구와 서적들을 가방 속에 고이 담는

다. 나라의 안녕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던 숨 막히는 중화체제의 압력 속에서

틸 아시아, 개혁과 개방에 눈을 뜨게 된 서른 네 살의 세자, 그러나 이 귀국이

그의 생명을 앞당기는 일이 될 줄을 그때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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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뀔캠 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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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 핍 행뼈「 。, 。F,I., 목풍

∼ --

세자의 귀국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한양의 궁궐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기운이 감지되지 없따.

도리어 세자어l 대한 인조의 차가운 반응이 12월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인조는 재차삼차세자의 귀국에 다른 뭇이 없는 지를 묻는다 다른 뭇, 인조가 상상하는

그다른뭇이란과연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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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과 북경에서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조금씩 가까워져가고 있는 동안 조선의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소현세자와 조금씩 벌어져 가고 있었다. 심양관의 정치

적 외교적 활동이 눈에 띠게 많아지고 그러면서 청나라 왕족이나 고위관리와

접하는 기회가 많아지는 것을 인조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양관

생활 초기 청나라의 전위 언급이 없었더 라도 그때 조선의 조정과 사림은 숭명

반청, 즉 이제 세력을 얻은 청나라보다도 멸망해 버린 명나라를 더 숭배하는

사람들 눈에 소현이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1643년 6월 세자빈 강씨의 이버지 강석기가 죽었디. 세자는 청나라의 제왕들

에게 부탁해 강씨도 동행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강씨로서는 실로 6

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번에도 청나라는 원손 석철이 심양

으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다 어린 아들을 심양에 두고 다녀오는 이 여행이 소

현 부부에게 결코 편할 수 없는 일이었다. 12월 15일 북용한설이 몰아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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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세자 일행은 심양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만주 봉황성에 도착한

것이 다음 해 1월, 백여 리를 달려와 소현 부부는 어린 아들 석철을 만나

게 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날이 밝자 세자와 빈궁은 동쪽으

로 가고, 석철 일행은 서쪽으로 떠나는데, 차마 서로 손을 놓지 못하고 아

쉬워하니 따라가는 일행 중에 목이 메이지 않은 자가 없었고, 와서 보는 청

나라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고생 끝에 세자 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는데 궁궐에 머무르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아버지 강석기의 문상을 위해 귀국한 세자빈 강

씨에게 인조가 문상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왕위의 정통성을 위해 자신

의 아버지를 억지로 원종 추승하고 광해군이 폐위시킨 인목대비의 복위를

강조하는 등 예의와 명분을 중시하던 인조가 스스로 윤리를 저버린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영의정 심열을 비롯한 대신들이 직위를 걸고 문상을 허락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의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실록에는 정확한 이유가 기록돼있지 않지만 세

자 일행의 문상 귀국 문제를 놓고 보여주었던 인조의 태도를 들여다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강석기 사망 소식을 듣고 청나라가 문상 귀국을

허락한 직후 인조는 그것을 당황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때 영의정 심열, 좌의정 심기원, 우의정 김자점 모두 세자의 귀국 준비를

하자는데 이견이 없었다.

〈세자가 돌아온다는 말이 정명수 역관의 입에서 니-왔습니다. 저들이 이미

말을 꺼냈으니 우리 쪽에서 그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일곱번째 이야기/폭풍전야 O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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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확으훌 빼4논 빠잉~

〈명수는 이미 저쪽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이로써 먼저 생색을 내려고 한 듯합

니다〉

〈구왕이 일찍이 세자를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다가 이제는 많은 성의를 보이는

데 이는 우리에게 은혜를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서 분명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청인이 나에게 입조하라고 요구한 것은 전한 때부터 그러하였으나 내가 병이

들었다는 것으로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팍하다고 하니 그 돗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

가? 전일에는 세자에 대한 대우를 지나치게 박하게 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

나치게 후하게 한다하니 나는의심이 없을수없다〉

인조는 세자의 귀국에 무슨 따른 돗이 없는 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만약 좋은 뭇으로 내보낸다면 세자와 대군을 다 돌려보낼 것인데, 중

한 것을 포기하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 것은 무슨 뭇인가?〉

이때 인조를달랜사람은김자점이었다

〈구왕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의심하여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반드시 이런

조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환심을 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나 한번 갖게 된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는 법 인조의 의심은 심상치 않은

상태였다

〈만약 그렇다면 저쪽에서 내보내면 그만인데 우리의 말을 기다릴 게 뭐가 있

겠는가? 이와 같이 변수가 많으니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도리어 의혹이 생

긴다. 활에 한번 상처를 받은 새는 으레 이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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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역시 자신이 너무 앞서서 걱정을 사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형자의 말이 세자가 나옹다면 혹시 원손이 대신 들어갈 우려가 없지 않

다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인조는 소현의 안위보다 오히려 소현 대신 들어가게 될 원손 석절을 걱정

한다. 그러자 김자점이 다시 나선다-

〈세자께서 돌아오는 것은 우리나라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신이 이제 심양

에 갈 예정인데 명수 무리가 만약 신으로 하여금 제왕에게 영원히 귀국하

게 해달라고 강력히 청하게 한다면 신자의 분의 상 감히 청하지 않을 수 없

는데 어떻게 조처해야겠습니까〉

이것은 또 다른 새로운 이야기였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간 지 이미 5년이

넘었으니 이제 그만 볼모에서 풀어달라고 청나라에 요구해보자는 의견이

었다 어차피 문상 때문에 귀국 명령이 떨어진 지금 그 요청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닌 가 대신들은 고민 중이었다.

그때 인조는 이렇게 답변한다.

〈정축년에 산성에서 맺은 조약가운데 국왕이 유고한 뒤에 세자를 보낸다

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 이러한 설이 있으니 그 뭇을 모르겠다. 저쪽에서 만

약 진실한 도로써 돌려보낼 뭇이 있다면 저쪽에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

실 강하게 청해야할것이니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결코 청할수가 없다〉

세자가 돌아오는 것은 곧 국왕의 유고를 뭇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인조에게

· 일공번째 。|。 f'7 I I폭풍전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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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은 인조의 폐위를 뭇하는 것, 인

조에게 소현세자는 이제 아들이 아니었다. 호시탐탐의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가장무서운라이벌이었다

이때 인조를 위로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화지우지 하고 있는 인물이

우의정 김자점이다 반청의 입장이었던 청서 세력과 달리 청나라의 위세에 빌

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가는 등 처세에 능한 인물로 인조의 호위대장을 역임

하며 신임을 얻었고 자신의 손자를 인조 후궁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결혼

시켜 왕가에 한 발을 담근 뒤 정권에 유착한 전횡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후

에 세자빈 강씨를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희대의 간신이었다. 이때

는 김자점의 맞수였던 김상헌 최영길 등이 모두 심양에 꿀려가 정치적 공백

이 생긴 상태, 김자점의 위세가 날로 더해가던 때이다

이런 와중에 세자의 귀국이 달갑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이 강석기의 문상이었기 때문에 김자점조차 인조의 이런 의심과 불안을

달래고 있었다. 인조가 강력하게 세자빈 강씨의 문상을 막자 조정은 발각 뒤

집혔다. 예를 중시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

지를 지지하는 세력이나 세자를 거부하는 세력 모두 다 들고 일어났다. 그러

나 끝내 세자빈은 문상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와병중인 모친 정경부인 신씨

조차 만나지 못한 채 2월 심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왕곡 허락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세자빈에 대한 경고의 의

미가 있는 것이었다. 당대 예론의 대가 강석기의 딸로 하여금 예를 지키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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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막은 것은 분명 인조의 엄중한 경고임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며느리

인 강빈에게 인조는 왜 이토록 깊은 미움을 갖게 된 것일까?

인조는 심양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강빈의 태도가 심히 불만이었다.

인조 21년 의주 부윤 홍전이 정조사 일행의 인마 수를 기록해 올렸는데 그

가운데 백랍과 망건 둥의 물건을 실어가는 자가 있었다. 당시엔 조정이 조

선의 인마가 심양에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사행 때마다 반드시

강을 건너가는 수효를 기록해 올리게 하여 그 폐단을 막고 있었다.

인조가 이 사실을 알고 물었다.

〈백납과 망건은 어디로 보내는 것인가〉

〈지난해 가을에 시강원이 본사에 이첩하여 말하기를 잡혀갔다가 공속된

사람들이 모두 망건이 없고 또 청인이 백랍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기에 본

사가 제주에 통보하여 이 두 물품을 가져와서 절사 편에 보낸 것입니다〉

〈강관의 직책은 학문을 권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일 뿐인데 이를 생각지

않고 감히 멀리 바다 밖의 백성에게 폐를 끼쳤으니 일이 매우 그르다. 당해

관원을 우선 무겁게 추고하라〉

인조가 심양관에서 행한 일에 대해 화를 낸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세자는 심양에서 조선에서 잡혀간 남녀 노예들의 속환에 힘을 쏟고 있었

다. 그들을 속환하느라 재물도 모았고, 당장 숙식을 해결해주어야겠기에

집도 여러 채 늘려서 지었다. 그런데 이들을 본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

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일단 청나라 당국에 사실을 알리고 합법적으

로 보내는데 동의를 받아야 했고 조선 조정에서도 세자의 이런 공식적인

• 일곱번째 이야기/폭풍전야O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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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대한 허락이 있어야 했다. 그 모두가 시간이 걸리고 복잡한 문제였는

데 당장 오랑캐들처럼 머리가 깎인 노예도 있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이

많아서 백랍과 망건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 길 없

는 인조는 심양관의 세자 일행이 사치스럽게 물품을 쓰고 낭비한다는 오해를

품게 됐던 것이다. 이에 관련된 이들이 모두 파직 당했다.

세지-빈 강씨에 대한 더 깊은 오해는 바로 내관 조방벽 사건으로 시작됐다 내

관 조방벽이 심양에 있을 때 말할 때마다 반드시 내전이라 불렀다는데 법을

무시하고 아첨한 내용이 가증스럽다 하여 하옥된다. 세자빈을 내전이라 불렀

디는 것은 곧 중전의 대우를 받았다는 돗이다. 인조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으나 그 일을 알게 된 과정이 밀정의 보고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이 과연 사실이었는지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문제

의 발단이 있다. 오해는 곧 의심을 낳았고 의심은 더 큰 비극의 예고탄 이었다-

문상도 하지 못하고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조는 자신이 신임하던 내

관 김언겸을 딸려 보낸다. 보다 확실하게 세자와 세자빈의 동태를 감시하겠다

는 의도였다‘ 그런데 돌아가던 세자는 마침 명양에서 환송나온 문무 선비들을

보자 고무된 마음에 과저를 베풀었다 예로부터 세자가 궁궐을 떠났을 때는

그 지방에서 특별시험을 치루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준하여 과시를 연 것이

다. 세자 입장에서는 청나라와 경계를 대고 있기에 사신 접대와 심관 보급에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평안도 지방을 위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

다. 이때 소현세자가 내린 시제는 〈월조수납지〉 하지만 의심과 불안에 떨던

인조에게는 이것조차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다 인조는 세자가 돌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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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명양의 유생들이 과거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끝내 묵살하고 만다.

세자가 심양으로 돌아간 뒤 인조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사건이 발

생했다. 인조반정 1등 공신이었던 심기원의 역모사건이었다. 심기원은 김

자점 등의 청나라에 부역하는 세력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인조와 소현세자가

이 문제에 보다 더 강하게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신

이었던 심기원이 역모를 꾸밀만한 어떤 사건이나 계기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모반은 실패로 돌아갔고 심기원을 비롯한 관련지들은 사형당하거

나 멀리 유배조치 됐다. 이 역모사건으로 인해 김자점 일파는 더욱 득세했

고, 이에 세간에는 밀고에 의해 모반죄를 덮어쓴 조작된 사건이라는 소문

이끊이지않았다

인조는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신하로부터 반청의 자세가 부족하

다는 지적을 받은 셈이었기에 그는 더욱 완고해져갔다. 권력은 권신 김자

점의 손으로 집중돼갔고, 내전에서는 후궁 조귀인의 총애가 갈수록 높아졌

는데 그 가운데 심양관의 세자와 세자빈에 대한 인조의 불신은 더욱 갚어

만갔다.

그러던 중 소현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북경에 다녀온 뒤 막대한 식량을 본

국에 요청한다. 그것은 청나라가 조선에 요청하는 것으로 혼란스런 북경의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조선의 식량이 펼요했기 때문이다 소현으로서

는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미 중원을 차지한 강대국 청나라의 요

구를 간단히 무시할 상황이 아니 었다.

• 얼곱번째 이야기/폭풍전야 O익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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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 길 없는 인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인조는 소

현이 본국의 식량과 물자를 가져다 흥청망청 쓰는 게 아닌 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마부와 말이 부족한 폐단에 불과할 뿐이다. 용도

를 절제한다띤 폐단을 댈수가 있을 것인데 한갓 우려만 하고 절약해서 쓰는

방도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비록 세자의 삭선으로 말하더라도 전번에 20바리

를 보내고 지금 40바리를 더 보내는 것은 자못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옛말에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점이 여기

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면과 인정에 얽매여 이와 같이 낭비를 하니 내가 경

들의 뭇을알수 없다〉

그러자 소현세자의 명을 받들고 본국에 온 신하조차 인조의 불만을 거들고

나섰다.

〈세자가 신에게 이르기를 겨울이 되기 전에 먼저 5천석을 보내고 봄에 또 5천

석을 보내서 반드시 1만석의 숫자를 채워야만 그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

니 모름지기 이 돗으로본국조정에 아뢰어 알려드려라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실록에 기록된 이 신하의 고변은 한발 더 앞서

나간다

〈그런데 신이 명안도 지역을 지나오면서 농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북경에서

의 응접하는 모든 일에 소요되는 것을 다 충당하자면 지탱할 도리가 만무하여

백성들이 모두 흩어 질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반드시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만이 국사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걱정을 면할 것입니다〉

이말은 곧, 세자는 오랑캐 나라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나라의 경제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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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백성들의 어려움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뭇이다. 심양관에서 소현을 모

시던 신하들조차 한양에 들어와 조정 분위기를 살피니 이미 왕과 왕세자

사이의 깊은 골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왕의 심기를 파악한 소심한 신하들

은 함부로 소현의 편을 들지 못했다. 그들은 소현이 예의와 도리를 모르는

천한 청나라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몰아갔

고 나라의 안위와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된다. 현과

민회빈에 대한 참으로 위험한 소문들이 궁 전체에 번져나가고 있었다.

세자의 귀국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한양의 궁궐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도리어 세자에 대한 인조의 차가운 반응이 12월

부터감지되고있었다.

우의정 서경우가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뭇밖의 일로서 조종의 신령이 은밀하게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니, 국가의 경사가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의 이 조치가 참으로 좋은 뭇에서 나왔고 딴 마음은 없는 것인가?〉

〈천만돗밖에 이 조치가 있게 되었으나 다른 염려는 없을듯합니다〉

〈경들의 뭇도 다 그러한가?〉

인조는 재차 삼차 세자의 귀국에 다른 뭇이 없는 지를 묻는다. 다른 뭇, 인

조가 상상하는 그 다른 뭇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 인생의 황금기 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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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

던 고국 조선으로 돌아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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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된 일인지 인조는 세자를 환영하는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는다.

‘ 인조는‘종묘에 인사를 올리는 예식도극히 간소하게 치러질 것을명한다.

인조뿐 아니라조정 대신들도 세자의 물품과그가 심양관에서 이룬 농토, 재물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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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세자 일행의 귀국을 환영하며 안도의 숨을 돌렸다. 북경을 완전히

진압하고 중원을 통일한 청나라는 더 이상 주변국들의 왕족들을 인질로 잡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감이 생겼기에 흔쾌히 세자 일행의 귀국을 허락했다. 세

자일행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뒤 그 어떤 사안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

었던 조선은 이제야 큰 짐 하나를 덜게 됐다. 오랜만에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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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조는 세자를 환영하는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는다‘

인조는종묘에 인시를올리는 예식도극히 간소하게 치러질 것을 명한다

예조가아뢰기를

〈지금은 세자가 영원히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실로 전에 없던 온 나라

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세자가 도성에 들어온 다음날에 묘사에 고하고 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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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 하례를 드리는 등의 일을 관례에 따라 거행하시고 방물과 물선도

봉진하도록하소서〉

그러자인조가답하기를

〈아흰 대로 하되 방물과 물선은 봉진하게 하지 말라〉

세자의 환영식도 마찬가지였다.

사헌부가아뢰기를

〈세자가 영원히 돌아온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온 나라의 경사니 신민들의

손빽치며 기뻐하는 마음이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한번좀 하례를 올리고

옥안을 우러러 보는 것은 인정이나 예의상 그만두지 못할 일인 듯 한데 갑

자기 권정 하라는 명이 있으므로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모두 실망합니다.

사세가 매우 바빠서 미처 전달하지 못하였으나 하루쯤 물러서 거행하더라

도 늦지 않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그러나 인조는 이를 거절한다

〈날짜를물러서 거행하는 것은온당치 못하다〉

세자가 데리고 온 명(청)나라의 환관과 궁녀들, 그리고 많은 재화도 인조

와 조정 대신들 눈에는 좋게만 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자의 귀국길에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유진장이 취한 조치를 보면 채단 2백 펼을 세

자궁의 관원 및 볼모로 간 대신들의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또 한인

남녀 20여인, 채원부 2인, 환관 3인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또한 세자가

가져온 물품은 4백 필, 황금이 19냥에 달한다‘ 그런데도 세자가 싣고 옹

북경의 많은 물화를 보고 사람들이 실망해 인조가 이 물품들을 호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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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라고명한다.

인조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도 세자의 물품과 그가 심양관에서 이룬 농토. 재

물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비국이 이르기를

〈세자가 심양에 머물러 있을 적에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답을 떼 주고 거기

에 농사를 지어 관소에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본으로 삼도록 허락했는데

거두어 쌓아둔 각종 곡식이 아직 4천7백석이나 남아 있습니다. 세자와 대군은

이미 아주 돌아왔고 이 곡식은 이미 청나라 땅에서 생산된 것이므로 마구 팔

아서 값을 취하는 것은 실로 온편치 않은 일이고 소, 말, 노새, 나귀는 모두가

값을주고사놓은 것이지만 역시 모두 청나라에서 생산된 것들이니 호부에 이

자하여 청나라에서 처리하도록 맡겨두는 것이 사의에 합당하겠습니다〉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에서 생산된 것 청나라로부터 받은 것 모두 거부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현세자가 청나라 땅 심양에서 공들여 기-꿔놓은 농토나

그로 인해 얻은 재화가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귀국과 통시에 사사건건 인조의 심기를 거스르던 세자가 불과 3개월 만에 학

질을 앓다 사망하고 만다. 숱한 의혹의 말들이 오고 갔음에도 세자의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은 누구도 받지 않았다. 다만 세계를 향해 품었던 소현

세자의 원대한 꿈만이 조용히 스러져갔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

현세자가 아담살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만약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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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이지만 바로 그때 소현이 뭇밖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인조의 뒤를 이

어 조선을 통치했더라면 이후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변화하는 세계에 대

해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소현, 청나라의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그였

기에 훨씬 더 많은 교류가 이뤄졌을 것이고 보다 빨리 서양의 신학문의 세

계를 접하게 됐을 것이다. 어쩌면 소현이 살아 집권했더라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비극은 소현세자가 사망한 뒤에 더 크게 벌어졌다. 5월2일 민회빈이 개인

적으로 갖고 있었던 은 1만650냥 황금 160냥 왜검 19자루를 호조에 귀

족시키고 별도로 창고 하나에 비치해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겉으로는 소

현세자의 여러 자녀가 혼인할 때 쓰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민회빈의 재산을

압수함으로 그녀가 어떤 힘도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조치

였다‘

종통을 이을 세자가 죽었으니 당연히 후사를 결정해야했다. 정상적으로는

원손인 경선군 석철이 승계해야 했으나 인조는 책봉을 차일피 일 미룰 뿐이

었다. 이에 세자 시강원의 관원인 안시현과 산림의 지도자 송준길 등이 나

서서 촉구하기에 이른다.

〈세자의 상이 어찌 이토록 갑작스럽게 났단 말입니까? 10년 동안 타국에

서 갖은고생을두루 겪고 옛 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한가지

질병이 빌미가 되어 끝내 서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운명이라고는 하

지만 역시 사람의 과실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므로 이는 진정 신민들로서

는 차마 말도 못할 일이요 원손에게는 끝없는 애통으로서 만세토록 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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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이 돌보아서 종묘의 제사를 모실 주인

이 있게 되었으니 억만년 기업의 막중함이 원손에게 있고 억만겨레 신민들의

희망도 원손에게 있습니다.

속히 예관에서 명하여 일찍 원손의 위호를 정하시고 김상헌을 불러들여 빈사

의 직임을 두시고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세자가 병이 위독하던 때에 이형익

이 조금도 신중히 하지 않고 의술을 함부로 써서 끝내 대단히 잘못되게 하였

으니 신은 바라건대 속히 이형 익을 처형하여 온 나라 사람에게 사과하시고 전

하의 병세에 대해서는 당세의 훌륭한 의원들을 널리 불러들여 올바른 처방에

의해 약을 써서 일체 정당한 사리를 주로 삼으로서 그렇게 하시면 거의 만전

의 효험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송준길의 간절한 상소문에 대해 인조는 답하지 않고 그를 체직

하게 명하였다.

또한 펼선 안시현은상소문을 통해 말하기를

〈사부가 병이 있으면 왕세자가 궁관을 보내어 문병을 하는 것이 예입니다 사

부가 병이 있어도 왕세자가 오히려 궁관을 보내 문병을 하는 것이고 보면 지

금 이 왕세자의 상에는 사부 이하가 의당 빈궁께 조문하여 위로하는 예가 있

어야 할 터인데 아직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우 옹당치 못합니다. 빈

사의 도리가 비록 강관과는 다르나 옛 제도를 상고해보면 서연관과 혼칭되고

있는데 막 초상난 때부터 오늘까지 사부와 빈객이 한 사람도 빈궁께 조문하지

않은 것은 매우 예가 아닙니다.

또 원손이 오늘날에 상례를 몸소 행하고 있으니 어찌 조정의 소망이 아니겠습

니까? 원손의 뒤어나게 영리한 자질을 신하로서 감히 찬미할 바는 아니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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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과 임상을 한결 같이 타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국본 세우기를 청하는

것은 또한 오늘날에 차마 말할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미리 세우지 않아서

는 안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세자의 영구가 빈궁에 있음을 혐의롭

게 여기지 마시고 일찍 세손의 자리를 정하시어 신민들의 소망에 부응히소서〉

안시현의 상소문을 보면 당시 세자의 사망 뒤에도 사림과 여러 사부와 대

신 궁관들이 민회빈에게 조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상 문제

는 이런 불충을 저지른 대신들에게 있다기보다 이것이 분명 예법에 어긋나

는 일이었는데도 벌하지 않은 인조에게 있었다. 인조가 세자의 죽음과 그

장례에 대해 적극적인 어떤 태도를 갖지 않았기에 인조의 심사를 읽고 대

신과 궁관들이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시현의 이 상소에 대해 인조는 이렇게 반응한다.

〈이 같은 소인의 형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

인조는 그 자리에서 안시현의 상소를 물리쳐 버린다.

원손의 세자 책봉이 미뤄지는 가운데 소현세자의 장례일이 다가왔다. 그러

자 장례 절치를 두고 인조와 민회빈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다. 민회빈은 소

현세자의 장지로 홍제동을 바랐으나 인조는 일방적으로 고양의 효릉을 선

택했다‘ 또한 장례 일정에 대해서도 민회빈의 요구에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나서 조정 안팎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일의 시작은 김자점이었다. 그가 장지를 정하고 장례 일정을 잡아야 하

는데 이를 미루고 있자 주변에서 이런 저런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러자

김자점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 상소를올리면서 너무나 막중한 일이라신중

을 기하다 늦었다고 변명한다. 어쨌든 이 김자점의 상소를 계기로 소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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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일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데 술관들이 논의 끝에 영릉 동쪽 홍제동을

제 일의 명당으로 지적하자 인조가 길이 멀고 폐가 크다는 이유로 효릉의 등

성이로 쓰라고 명한다 좋은 자리를 놔두고 하필이면 더 먼 곳에 장지를 정하

라 하신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운 장진한이 물러가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었

는데 결국 이 이야기가 민회빈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됐다. 민회빈은 인조를

찾아가 강력하게 홍제동을 쓰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인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이뿐 만이 아니다. 민회빈의 동생 강문명이 최남에게 소현의 장례 날

로 정해진 그 날이 자오가 대충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 걱정했는데 최남이 이

말을 바로 김자점에게 고해바친다. 그러자 김자점 등은 후일 자기에게 죄가

돌아올까 염려하여 곧바로 빈청에 모여서 다른 산으로 바꾸어 자리 잡기를 청

하였는데 그때 인조는 크게 화를 내며 김자점을 책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직

접 장례를 집행하는 제조에서 또 날이 다시 가리자고 청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 인조의 화는 극에 달한다. 인조가 최남을 불러 신문하니 최남이 사실대

로 대답하자 상이 그렇다면 강문명에게 날을 정하게 하라고 불편한 심기를 그

대로 드러낸다. 인조의 화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음을 안 강문

명이 이때 퇴청하는 김자점의 가마를 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주변 사람들

은 도대체 강문명이 왜 이렇게 하는 지 알 수 없어 해괴한 일이라 했지만 이는

곧 닥칠 강씨 집안의 엄청난 재난의 서곡이었다.

이 와중에 5월14일 봉림대군이 귀국한다 세상의 인심은 이미 인조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 간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록에 조차 그 사실이 그

대로기록돼 있다.

〈봉림대군이 돌아왔다 이때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봉림대군은 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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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명성이 있어 상이 자못 그에게 뭇을 두고 있다고 하므로 숙배할 적에

금중 사람이 모두 다투어 보았다〉

소현세자의 장례는 6월19일 거행됐다. 조선왕조 그 어떤 세자보다 특별한

경험을 했던 소현세자는 9년간의 볼모생활동안 보고 느끼고 키웠던 그의

큰 뭇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하고 그 자신 너무나 사랑했던 조선 땅에서

더욱이 그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그의 궁궐에서 숨을 거뒀다. 인조실

록에 기록돼있는 대제학 이식이 지은 그의 장례 지문을 보면 당시 일반 대

신들과 사기들이 소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자는 타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자주 군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 삭황에서 사냥을 하고 서쪽으로 연새를 왕래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

너며 위험한 고생을 두루 겪었으므로 비록 신기는 태연자약하였으나 속으

로는 노고로 인해 손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환궁한 이후로 계속해서 한열

의 증세가 있었는데 의술을 잘못 시행하여 끝내 별세하기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 세자의 향년은 34세다. 빈궁이 3남 3녀를 키웠는데 원손 모는

지금 사부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세자는 타고

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학식과 고량이 영명하고 의연하였다.

어린 나이로 군사들을 안무할 적에 이미 스스로 영지를 내려 지휘하되 일

제 대조의 명계를 준행해서 자신에게 진공되는 물품을 절감하고 시종들을

엄격히 경계하여 오로지 폐단을 줄여 백성들을 여유있게 해주기를 힘썼으

며 주현에게 거듭 명령을 내려 농사철을 놓치지 말고 제 때에 농사짓도록

하였다. 세자는 또 길을 가다가 진창길에 깔이놓은 벗짚을 보고 명령하기

를 군시를 일으킬 때에 이것으로 말을 먹일 것이니 절대로 헤프게 쓰지 말라

• 여닮번째 。 1°1=71/이싣한아버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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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또 주방에는 쇠고를 금하고 수라도 진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농우를 잡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시조하는 신하가 세자께 가교를 탈 것을 청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중도에서 다시 청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오늘 내

일이 바로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는 날인데 어찌 감히 가교를 타고 앉았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중략)

이욱고 청나라 장수가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아 보내라고 협박하자 옹 성

중이 몹시 경악하였고 삼사는 결코 그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극력 쟁론하

였으며 상께서도 그들의 말을 차마 따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

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그곳

에 가는 것을 어찌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이욱고 심양으로 잡혀 갈 적에 봉

림대군도 함께 갔는데 형제가 감은 관소에 거처하면서 서로 화락함이 날로 돈

독하였으므로 여러 종자들 사이에 전혀 이간시키는 말이 없었다. 영주 금주의

전쟁 때에는 세자가 청나라로부터 종군하라는 협박을 받았는데 세자가 때마침

사소한 질병이 있으므로 시조하는 신하가 주선하여 봉림대군으로 대신하였디.

재차 종군할 때에는 세자가 대군 흔사서 수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다른 일

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굳이 자신이 갈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군문에서 그만

두게 하여 중지하였다. 이때 청나라와의 화친이 막 이뤄지고 나서 불화의 단

서가 되는 일이 많았고 타국과 이중으로 통역을 하는 가운데 교묘한 참소가

복잡다단하였으나 세자는 양쪽 사이에 처해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거스르

지도 않아서 어려움에 처하기를 마치 평탄한 데 처하듯이 하였고 그들을 접응

해서 임기응변으로 이러 저리 꾸며대되 전혀 실언한 것이 없었으므로 제왕들

과 뭇 장수들이 오래갈수록 더욱 좋아하게 됨으로써 끝내 세자에게 감히 무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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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굴지 못하였다. 세자는 허심탄회하게 사람을 대하고 겉치레하는 것을

끊어버렸으며 세자군이 신료들을 한결같이 온화하고 친후하게 대우하였

다. 그래서 질병이나 곤액을 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돌보아

구제해주고야 말았다, 문학 정뇌경의 관소에 있으면서 화한을 일으킨 것이

불측하게 되었으므로 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신구하였으나 끝내 어쩔 수

없게 되자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결별하니 애통해 하는 것이 죄우 사람들

을 감동시켰다. 정뇌경이 처형되고 나서는 그의 염습 도구들을 모두 스스

로 관소 안에서 준비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감동하여 사기가 솟구쳤다. 세

자는 항상 사부를 존경하였고 사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띤 반드시 거애

하여 친히 조위하였으며 이미 관직에서 물러났을지라도 특별히 옛날의 은

혜를 생각하여 자신의 돗으로 결단해서 시행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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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에게는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던 1645년 한해가저물고새해가밝았다

‘ 그러나 이 해는 민회빈에게 있어 이승의 마지막해였다

새해가 밝자마자 궁궐 내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인조의 수라상에 올린

전복구이에 독이 빌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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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을 죽여‘c.~

돗밖의 남편의 죽임을 지켜봐야 했던 민회빈 강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어의 이형익의 시술이 잘못됐다는시-실은궁궐 안팎에서 이미 인정한시­

실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인조는 이형익을 벌하지 않고 있고, 더욱이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도 미심쩍은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당연히 이뤄질

거라 믿었던 원손 석철의 세자 책봉도 감감 무소식인데다가 봉림대군이 귀국

하자 차기 왕권은 시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전제군주 국가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위치에 있

었던 석철과 민회빈이 자의건 타의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면 그 다음 수순은

목숨을 내놓아야 히-는 것, 만약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는다면 그때는 생

명을 부지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살며봐도 세자빈 강

씨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버지 강석기도 죽었고 김자점과 봉림대군에

앞서기에 친정 오라비들은 너무 세력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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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일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중신회의가 열린 것이다. 김자점과 영의정 김류를 제외한 중신들은 종통

상 원손이 세손이 되어야 함을 강론하였으나 인조는 강하게 밀어부쳤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 꿀에 봉림대군은 세자로 책봉된다. 김류와 김자점은

정통 사류라기보다는 권신세력에 가까운 이들로 임금의 의중을 잘 읽는 이

들이었다, 결국 다른 대신들도 강하게 반발하지 못하게 되니 인조의 의도

대로 세자의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 그를 평생 동안 괴롭힌 일중 하나가 바로

정통성 문제였다. 어쩌면 그는 자기 대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왕의 혈

통을 지키고 이어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자면

인조, 소현세자, 원손 석철로 이어지는 대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석철 대신 봉림대군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석철을 세자로

삼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에 오히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인조와 소

현세자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석철을 제외시킨 것에서 그

치지 않고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조치들이 계속된다 먼저

장례가 끝난 뒤 몇 개월 동안 인조는 치밀하게 민회빈 주변 인물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다. 조정에는강석기와가까운산림계 인사들도출시를 띠히­

는 형편이라 민회빈을 도외줄 우군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민회빈

은 특유의 친화력과 지도력으로 궁인들을 사로잡고 있었는데 인조는 이들

• 아홉번째 이。n11민회빈올죽여라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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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제거했던 것이다.

7월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데려온 명나라 환관과 궁녀를 청나라 사신 편에 돌

려보냈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소현세자가 아담살에게 부탁해 특별히 데려온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조선에서 뭇을 펼치기가

어렵게 됐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인조는 민회빈의 궁녀 애란의 귀양을 명한다. 애란은 유능

한 궁인으로 처음에는 조소용 사람으로 조소용이 민회빈을 감시하라고 지시해

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민회빈의 인덕과 친화력에 반한 애란이 오히려 조소

용을 배신하고 민회빈 편에 서서 그녀를 도왔던 것이다. 자연 조소용의 미움

을 사게 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진다, 무당을 통

해, 세자의 참변은 심양에서 가져온 비단 의복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 애

란과 민회빈 주변 인물들은 이것을 없애야 한다는 말에 비단의복을 챙기고 있

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소용은 부리나케 그 곳을 찾았고, 도와주는 척 하다가

갑자기 실신해 궁궐 안이 큰 소란에 휩싸이게 만든다. 결국 이 얘기가 인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고 애란은 조소용을 독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섬에 유배

조치된 것이다

8월에 접어들자 애란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더욱 심각한 일들이 벌어진다. 소

위 궁중 저주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민회빈의 궁녀 4명이 한꺼번에 국

문 끝에 죽어나갔다. 인조는 이들 궁녀의 입에서 저주는 민회빈이 사주한 것

이라는 말을 듣고자 했으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조가 바라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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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고 만다.

인조는 여러 차례 주변인들을쳐서 민회빈의 잘못을캐려 했지만그때마다

번번이 뭇을 이루지 못했다. 궁인들은 민회빈의 인품과 덕망 앞에 충성을

다했고, 그녀가 베풀어진 인정에 목숨으로 보답했다. 더 이상 이 방법이 통

하지 않는다는 결 알게 되자 인조는 방법을 바꿔나간다.

각사의 관리들에게 석철을 원손이라 부르는 것을 엄금하고, 8월 민회빈의

친정 형제 4명을 유배 조치시킨다 그나마 민회빈을 돕고 있는 세력을 뿌

리 채 뽑아버리겠다는 의도였다 강문성은 제주로, 강문명은 진도로, 강문

두는 흡곡으로, 그리고 강문벽은 명해로 떠나갔다. 유배를 떠나야 할 사유

가없는사건이었기에 여러 관원들이 나서서 사태를돌이키려 했다.

〈강문성 등을 정배하라는 명은 진실로 성상께서 그들을 보전하려는 지극

한 뭇에서 나옹 것이기는 하나 다만 생각건대 강문성 등이 비록 어리석고

분수에 넘친 일은 있지만 아직 확실히 드러난 죄명은 없으므로 원근 사람

들이 이 사실을 듣고서 성상의 염려하신 저의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혹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그러나 인조는 완강히 이를 거절한다. 억울한 민회빈은 인조 거처 근처에

가서 크게 울며 선처를 호소했으나 결국 이 일은 인조에게 민회빈을 내쫓

는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이미 소현세자는 사망했고 이들 석철은 세자 책봉에서 제외돼 수족이 잘

려나간 민회빈이다. 그런데도 궁궐 내에서 민회빈을 둘러싼 사건들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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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데에는 인조의 후궁 숙원 조씨 때문이었다. 이 무렵 조씨는 숙원에서 소

의로 그 품위가 또다시 상승한다 세자 책봉 후에 으례 있는 은전이라 실록에

는 기록돼있지만 중전이나 숙의가 모두 인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터에

조씨에 대한 인조의 총애는 더욱 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록에는

조씨의 성품이 영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뭇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히-기가 일쑤여

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그중에서도 소

현 세자빈 강씨가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더 심

해져갔던 것이다. 강문성이 귀양 가게 되자 궁궐 내에는 강빈에게 곧 화가 미

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기 시작했다.

이 해 11월 불길한 손길은 봉림대군에까지 미쳤다 세자로 책봉된 뒤 앓아오던

깎기가 오랫동안 낫지 않아 궁궐 내에 근심이 갚어가고 여러 의관이 약 처방

을 의논하였으나 모두 효과가 없자 인조가 이형익에게 진맥하라고 명하게 된

다. 이형익이란 바로 소현세자의 치료를 담당했던 어의이자 소의 조씨와 특별

하고 은밀한 관계라고 소문이 났딘 바로 그 사람이다. 이형익은 봉림대군을

진맥하고 난 뒤 그의 병이 사질이어서 사기를 다스리는 혈에다 침을 놓아야

된다고 처방했다. 그러자 인조가 세자에게 칩을 맞을 것을 명했으나 세자가

자신의 병은 감기라며 침 맞기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인조가 몇 차례에 걸쳐

강권했으나 세자가 극력 진술하고 끝까지 버렸는데 얼마 안가 감기가 낫는 비­

람에 이 일은 그대로 무마됐다.

민회빈에게는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던 1645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

다- 그러나 이 해는 민회빈에게 있어 이승의 마지막 해였다. 새해가 밝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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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내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인조의 수라상에 올린 전복구이에

독이 발견된 것이다. 혐의는 곧바로 세자빈 강씨에게 돌려졌다. 강빈을 모

시던 숱한 궁녀와 어주내인이 국문을 당하고 결국 강빈은 후원에 유치된

다. 궁인 정렬, 계일, 애향, 난옥, 향이, 천이, 일녀, 해매 등을 하옥하고 국

문했으나 끝내 자복하는 이가 없었다. 후원에 갇힌 민회빈은 방문을 폐쇄

하고 그 문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주게 하고 시녀는 한 사람도 따

라가지 못하게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세자인 봉림대군이 나섰다

〈강씨가 비록 불측한 죄를 젊어졌다 하더라도 간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죄지은 흔적이 분명하지도 않은데 성급하게 이런

조치를 내리고 또한사람도 따라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봉림대군은 간곡하게 인조에게 민회빈을 용서해달리-고 간청하자 결국 인

조는 시녀 한 명을 따라가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소의의 음모는

더욱 갚어져 강씨와 말하는 자는 모두 죄를 주겠다는 엄명이 멀어졌고 이

로써 누구도 민회빈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다. 실록에는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 상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인조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조소용

의 모함 때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고 기록돼있다.

만약 진정 민회빈이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면 이것은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다 그런데도 인조는 이를 정식으로 의금부에 회부하지 않고 궁궐내의

법으로처리해나간다. 이것만해도이미 객관성을잃은조치였고뚜렷한증

거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끝까지 증거는 밝혀지지 않았고 무고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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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만이 죽어나갔다. 대사간 조경, 헌납 조한영, 정언, 강호, 김휘 등이 상소를

올려 전복사건의 관계자들을 모두 하옥했는데 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는 곧 역적이 수라를 맡은 궁인들 사이에 아직도 몰래 숨어있다는

뭇이므로 정식으로 왕옥을 열어 범인을 가리자고 주장한다. 이에 인조는 또다

시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국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자 대사헌 이행원,

집의 김익회‘ 장령, 유심, 이석, 지평‘ 이재 등이 또다시 상소를 올린다 그러

자 결국 국문이 열리게 됐는데 일찍이 잡힌 민회빈의 궁녀들과 수라간 궁녀들

이 모두 자복하지 않고 죽어나가자 국정은 종결됐고 연루된 나머지 궁녀들은

석방조치된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인조는 대신들에게 강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확실하

니 죽여야겠다는 뭇을 밝힌다. 우의정 이경여를 비롯해 대사헌 홍무적 퉁이

인조의 조치에 반발하자 인조는 반발하는 이들은 당색에 물든 자들이라는 억

지를 쓰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훈련대장이 궁궐에 들어와 호위하게 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나간다. 결국 이경여와 홍무적은 유배당하고 만다. 그러

나 인조의 의심은 날로 더해 소현세자와 민회빈이 심양에 생활하고 있을 무렵

의 일까지 언급하기에 이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갑신년 봄에 청

나라 사람이 소현세자와 빈을 보내주었는데 그때 내간에서 혹 말하기를 강빈

이 은밀히 청나라 사람과 도모하여 장차 왕위를 교체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전위하려는 웅직임이 있었던 그 사건 자체를 강빈의

모함으로 돌리는 대목이다. 모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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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홍금적의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으며 세

자가 심양에 있을 때 서종들이 세자를 동전으로 불렀고 강빈을 빈전으로

불렀는데 대개 저들이 보고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세자와 빈이 스스로

부른 것은 아니 었다. 진신들 사이에서도 간혹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분명 누군가 소현과 민회빈에 대해 적의를 품고 거짓으로 인조에게

이른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인조는덧붙이기를

〈지난해 기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을 인해 시끄럽게 성내는

가하면사람을보내 문안하는예까지도폐한지가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

면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

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처지의 사이에서 하루

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율문에 상고해 품의

하여 처리하게하라〉

인조는 결국 민회빈의 사형을 명한 것이다. 이에 대신들이 놀라 이렇게 대

역죄를 짐작으로 단정 지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인조

는 민회빈에 대한 화를 거두지 않았다, 도리어 민회빈을 비호히는 대신들

을 노여워하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민회빈에 대한 사사 명령은 한 달이 넘도록 집행되지 못했다. 대신들의 강

력한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우의정 이경여, 대사헌 홍무

적, 심로가 유배됐고 30여명에 이르는 관원들이 사직하기에 이른다.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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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민회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2월29일 민회빈의 오

빠 강문성, 강문명 형제는 유배지에서 꿀려와 모진 고문 끝에 장살 당했다 사

사된 민회빈은 금천 광명의 선산에 쓸쓸히 묻히게 되나 열일곱에 궁궐로 시집

와 20년 만에 주검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조선 왕조의 역대 세자빈 가운데 가

장 활동적이고 가장 진취적이었던 민회빈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은밀하고 계획적으로 추진된 살인이

었다면 민회빈의 죽음은 모함과 억측으로 자행된 공개적인 살인이었다.

당시 조정과 세간의 여론이 어떠했는지는 인조실록이 가장 정확하게 일러주고

있다.

〈강문성과 강문명이 곤장을 맞다 죽었다. 강문명은 강석기의 둘째 아들로 사

람됨이 교만하고 망령되며 객기를 부려 사람을 능멸하였고 그의 형 강문성은

더 심하였는데 다 말하기를 강씨의 화가 반드시 이 무리들로부터 연유할 것이

다 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자 사람들이 오히려 억울하게 죽었다고 원통해

하였다〉

민회빈의 죽음에 대해선 이렇게 적고 있다

〈소현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하고 고명, 죽책, 인, 장복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

를 싣고 선인문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리-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썼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뭇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

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 숙의에게 죄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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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민심은 민회빈편 이었다. 민회빈이 인조를 시해하려했다는 증거는

물내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록에 그녀의 성격이 거겠다고

표현한 대목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민회빈이 일찍 죽을 수밖에 없었을 또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성이란 자신의 의견 하나 제대로 주장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었던 조선의 사회 성격상 심양관에서 보여준

그녀의 여장부 같은 일처리와 정확한 판단 지혜로운 언사가 결국 이런 결

괴를 낳았던 것이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민회빈은 너무 똑똑했기에 남

성 중심적인 조선은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민심이 이런 지경에 이르자 인조는 서둘러 수습책을 내놓아야 했

다 인조는 추측으로 나돌던 모든 소문과 모함을 기정사실이라 밝히며 민

회빈 사사의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반역하는 형상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군친을 해치고자 하기에 왕법을 부

득불 시행하여 윤기를 밝혔다. 이에 크게 알리어 나의 갚은 마음을 보이노

랴. 내가 부족하고 어두운 자질로 거듭 어려운 시기를 만났다. 마음을 주고

믿는 데에는 골육을 어루만지며 더욱 돈독히 했다 보호하고 기르는 데에

항상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궁중에서 갑자기 변이 발생했다. 역부 강은 타

고난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몸가짐이 거칠어서 오랫동안 대궐 안에 있

으면서 윗사람을 섬기는 유순한 예의를 크게 상실하였고 심양에 당도하여

서는 곧바로 왕위를 바꾸려는 흉측한 꾀를 꾸였으며 전의 칭호를 참람되게

사용하였으니 너희들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적의를 미리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분노를 빙자해 큰 소리로 부르짖어 어길 수 없는

위엄을 감히 범하였고 원망을 더욱 깊이 품어 문안하는 예를 폐지하는 데

• 아홉번째 이야기/민회빈올죽여라 |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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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이르렀다.

비록 극진히 위해 주고 싶지만 하늘을 스스로 끊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궁중

에 흉한 물건을 파묻었으니 이미 매우 참혹하고 수라에 독을 넣었으니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던 말인가? 돌아보건대 난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는가

만 이러한 악독한 역적은 옛날에도 있지 않았다. 지난 역사에 증험하니 윤리

를 파멸할까 경계하였고 오늘날로 논하건대 간악을 키울까 우려된다. 천지의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데 어찌 하루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있겠으며 강

상에 관계된 죄는 삼척의 장정이 진실로 엄하다. 그렇지만 본가에 나가서 죽

도록 하고 다시 물품을 주어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미 역부인 강

을 잡아 사사하였다. 아 춘추의 대의를 인용하건대 시역의 마음만 품어도 반

드시 처형해야 하고 국가의 떳떳한 법을 들추면 그 죄는 더구나 용서할 수 없

다. 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또한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인조는 강한 어조로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주장했지만 정국은 이미 흔들

리고 있었다. 왕위를 지킬 욕심에 아들마저 버린 아버지, 후궁의 모함에 눈이

어두워 며느리를 죽인 아버지 게다가 정확한 판단력을 상실한 왕의 곁에서

권력을 손에 쥔 몇몇 간신들 진심으로 나리를 걱정하는 이들은 하나 둘 관직

을 사퇴하고 낙향했으며 더이상 정가로 나서지 않는 이들이 늘어갔디- 세상은

또한번의 변혁을기대하며 숨을죽였다.

이 무렵 실록은 천문과 자연의 희귀한 정조를 기록히-면서 임금의 실정을

질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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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저절로 닫혔다〉

〈평안도 안주 지방에서 푸른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5일 동안 싸웠다〉

〈이때 천문의 변이 없는 날이 없었다. 태백이 경천한 지 이미 반년이 되었

는데도 일관이 아뢰지 않기도 하고 조정에서도 보통으로 생각하였다. 별의

변괴 중에서 봅시 참혹한 것은 일관이 숨기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사관이

기록한것이 적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조의 행동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인조는 소현의 세 아

들, 즉 자신의 손자에까지 마수를 뻗친다. 이것이 일명 유서사건이다. 민

회빈이 죽기 전 유서를 썼는데 이 유서 내용이 인평대군과 조소용이 자신

을 죽였으니 원수를 콕 갚아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인조는 이 유서를

들고나와그동안살아남은 민회빈의 궁녀틀을다죽음에 이르게 했다 또

한 강씨 집안이 다 같이 저주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두고 민회빈의 70넘은

노모와 강문두, 문벽 형제, 강문성의 첩 등이 처형당했다.

강석기에 대해서도 삭탈관직을 행함으로 죄가 있음을 물었다. 심지어 인조

는 민회빈이 유복자를 낳아 여승을 시켜 몰래 양주의 강에 버렸다는 사실

까지 조작해내 윤리적으로 확실히 매장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양주 인근

의 관아를 동원해 수색을 시키는 등의 소동을 벌였다 도대체 구중궁궐속

의 민회빈이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었다.

또한 민회빈을 모시던 신생이라는 내인을 전면에 내세워 이 모든 일의 증

인을 삼았는데 조작의 냄새가 확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사사건건 신

생을 적극 변호하며 보호했다. 심지어 당상관의 직급까지 내리려 했지만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뭇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

. 。f홉번째 이Of'71/민회빈을죽여라 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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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인조는 그의 손자들을 외척 세력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유배 보낸

다. 40여일의 고통스런 여정 끝에 어린 손자들이 당도한 곳은 제주도였다. 당

시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

인조가명령을내리기를

〈한 곳에 정배하여 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과 별장 등을 교대로 지정

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고 했다

이에 홍무적은 남해현으로 신득연은 진도군으로 옮겨졌다.

이 일을 두고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석철 등이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

린아이가 무슨 아는 것이 있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뜨거운 장기가 나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만약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

다면 성인의 자애로운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지각이 있

다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또한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현의 세 이들에 대한 인조의 화는 유배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

었다. 이해 10월 청나라 역관 정명수기- 황제의 명이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

에 관해 물어오니 온 조정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 대신들은 많은 뇌

물을 써서 정명수의 입을 막았는데 다음해 3월 다시 온 정명수는 소현의 아들

에 대해재차묻게된다.

〈소현의 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속담에 아버지는 뼈이고 어머니는 공석

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머니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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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수가 이렇게 묻고 나서자 김자점, 이행원이 답변하기를

〈강적은 그 어미 형제들과 함께 모역한 일이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세 아

이의 유모 등도 모의에 참여했다고 자복했기 때문에 세 아이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방축시켰는데 두 아이

는 마마를 앓다가죽었습니다.〉

그러나 정명수가 살아남은 한 아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나서자 옹 조

정 대신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했거니와 큰 아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

는가?〉

그 때 김자점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초에 모두 죽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신이 저들의 이

야기를 듣건대 칙사가 큰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을 하자 정칙이 우

선 생사를 알아볼 뿐이다. 어떻게 갑자기 데리고 갈 수 있겠는가 했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관심에 대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이는 바로 인조였다.

〈나의 생각에는 반드시 흉도가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일 이미 죽었

다고 한다면 반드시 구실을 삼을 것이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큰 아이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저들이 출발할 때에 말한다면 옹당하지 못할 것 같다〉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혹여 소현의 아이가 청나라에서 자라 조선의 왕이

되어 돌아올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김자점이 이르기를

• 아흥번째 이야기/민회빈을죽여라 | 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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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기펼코데리고가려 한다면차라리 편의에 따라처치할지언정 데리고

가게 해서는안됩니다〉

그러자인조가말하기를

〈누설할 사람은 역관들뿐이다. 역관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자가 없는가?〉

결국 역관 정명수는 영중추부사로 승진 제수됐고 장계우는 방산 만호로 삼는

특전이 베풀어진다.

그들이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소현의 아들 중 장남 석철은 결국 이 해 9월 13

세의 나이로 제주에서 죽었고 11월에는 차남 석린도 죽음을 맞았다. 석린의 나

이 9세, 원인은풍토병이었다. 인조는이들의 죽음에 책임을물어 보양하던궁

녀를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니 자신의 잘못을 궁녀들에게 떠넘긴 몰이었

다 다음해인 1649년 3월 막내아들은 육지로 옮겨졌다 소현세자와 민회빈의

아들 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이 막내 경안군은 그러나 한 많은 목숨을 부지

하다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소현세자가 죽은 4년 후인 1649년 인조도 세상을 폈다. 그 자리를 이은 인물

은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생활을 했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었다 효종에게는

즉위 자체가 하나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인조의 뒷자리는 소현세자의 것이

지 효종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현세자가 죽었다 해도 그 자리는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것이었다 종법에 따르면 대통은 분명 원손(Jc孫) 석

철의 것이었다. 효종은 소현세자와 석칠이리는 두 부자의 대통을 가로챈 셈이었다.

효종이 심양 시절부터 소현세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심양 시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시-이는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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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에게 돌

아오는 왕위를 거부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강빈

사사에 반대하다 유배된 이경여 심노 등의 유배를 풀었다. 정국화합을 위

한 조치였다. 또한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산림을 등용한다. 호서

산림은 대부분 사계 김자생 문하의 동문들로서 강석기와 같은 청서인맥이

었다. 이들 산림세력은 출사하면서 복수설치 강빈 신원 문묘조사, 김자점

축출 등을 명분으로 삼았다.

먼저 시작된 것은 김자점 축출 권신 김자점이 있는 한 산림의 정계 진출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 시대를 농단하던 김자점은

산림의 전면적인 공격에 실각하고 처형당했다. 조귀인 역시 사사됐다.

하지만 강빈의 신원 문제는 그리 쉽게 풀리지 못했다. 강빈이 명예회복을

하고 나면 하나 남은 막내아들 석견이 왕위의 정통후계가 되는 것, 그것은

이제 막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계된 일이었기에 산림에서도 신중

을 기해야했다. 처음에는 석견의 정배지를 펀한 곳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에

서 시작됐다, 효종3년에는 드디어 민정중이 강빈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효종은 언급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2년 뒤 심광수, 홍우원, 이경여가 연달아 석견의 석방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한다. 또한 김자점을 탄핵하는데 선봉에 섰던 황해감사 김홍욱

이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김자점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그

런데 효종은 즉시 김홍욱을 압송하여 친국하니 김홍욱은 상소를 올린 지

열흘 만에 장살되고 만다. 정국은 다시 얼어붙었고 강빈의 신원 회복은

• 아홉번째 이야기/민회빈을죽여라 , 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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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깊은 골방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세월은 조금씩 조금씩 흘렀다 소현과 강빈을 기억하는 이들도 하나 둘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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φf 빽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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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l헝째 이 Of,J'

일흥획 「흑흉, 껴!속힘슷

조선이 또 한 번의 발돋움으로 세계사로 편입되어야할그때

소현으로부터 시작된 어이없는 왕의 죽음들은 결국사도세자와정조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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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푼의 죽음r 계속되는 소현의 이릎

조선 왕실이 놀람과 격분에 휘말린 것은 이로부터 14년 뒤, 효종이 급서한 것

이다.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론을 두고 독대한 지 두 달 만이었다. 효종의 사인

은 사소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 난 종기 때문이었던 것이디. 종기가 독으로 번

지자 어의 신가귀가 종기에 침을 놓고 고름을 조금 짜내니 피가 서너 말이나

솟아나왔다.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이었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건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그는 수전증

으로 손을 떠는 상태였다 한다. 수전증이 있는 의사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가귀가 현종 즉위 후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다 수전증의 신가귀가 효종에게 침을

놓은 것도, 침이 혈맥을 건드린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돌

리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컸기에 고의란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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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죽음을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북벌론 때

문이다. 효종에게 있어서 북벌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며 부분이자 전체였다.

효종은 북벌 군주 그 자체였다. 소현세자가 볼모생활을 새로운 사상과 과

학기술을 받아들여 세계사의 흐름에 적응하는 기간으로 보냈다면, 봉림대

군은 원수인 청의 약점을 캐는 기간으로 보냈다 소현세자가 청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으로 보았다면 봉림대군은 전력을 다하면 념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같은 볼모기간을 보냈으면서도 세계관이 이처럼 완전

히 갈리는 것은 서로의 성격 탓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이다.

효종이 북벌에 전념했던 이유는 물론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소현세자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콤플렉스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

했을 것이다. 북벌은 삼전도의 치욕과 콤플렉스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저숭에서 소현세자를 떳떳이 볼 수 있는 유

일한방법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북벌은 소현세자보다는 효종에게 걸맞은 과제였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실로 삼국시대 이래 우리 역사상 거

의 유일한 무제(武帝)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그리

고 신라의 태종 무열왕처럼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의 길에 나섰던 무력의

군주였다

북벌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강력한 군사력이다. 효종

은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까지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다. 과거는 문 · 무과로 나뒤어 있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

• 영번째 이야71/이어지는의문의죽음 계속되는소현의이릅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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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과 출신들은 문과 출

신보다 한 등급 아래의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과 합격자는 지방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은 무과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효종은

무과 시험인 관무재 우수 합격자를 지방 수령에 임명했다. 그러자 문신들의

반발이 잇따랐지만 효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전란 후의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효종의 강력한 군사력 확장 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어 재위 6년에는 사대부

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막강해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세자와

문무백관, 그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량진 백사장에 나가 1

만3천여 조선군의 열병식을거행한것이었디.

효종은 제주도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 사람 하벨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

(‘원統)을 모방한 새로운 총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위군인 금군을 늘

리고 창덕궁 후원의 담장을 헐어 이들의 훈련장을 만들어주었다. 지형이 험준

한 우리나라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기병전의 여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광활한 만주와 중원을 공격할 때 사용할 목적임이 분명하다.

효종의 이런 군비확장책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조선 전 기간을 통틀어 전례

가 없던 군비확장책은 분신들의 강한 반발을 낳았다. 신속한 군비확장은 집중

된 권력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국왕의 권력

은 미약했다 부왕 인조는 서인들이 선택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를

준비하던 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명의 종친일 뿐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조정은 국왕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의 군비 확장

책은 서인 문신들의 반발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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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들은 물론 만주족 국가인 청을 중오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을 극도

로 표현하는 길은 기껏해야 삼학사 같은 지사적 처신이지 군사적 대응은

아니었다. 의기만 드높게 선전 교서를 던졌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혹한 속

의 산성에서 떨었던 문신틀에게 청은 마음속 증오의 대상일 뿐 군사적 정

복대상은 아니 었다. 그들이 효종에 대항해 내놓은 논리는 군비중강보다는

백성들의 생활이 더 급하다는 안민책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가장 시급

한 사안이긴 했다. 그러나 안민의 대계 중 강력한 국방책은 가장 첫머리에

놓여야 할 항목이란 점에서 안민책을 명분삼은 군비확장 반대도 전적인 정

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심지어 열병식이 청나라의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

하는이들도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한결같았다.

〈이것이 어찌 오랑캐의 주구가아니겠는가?〉

당시 효종이 던진 일침이었다.

그러나 재위 8년간 거의 독단적으로 군비 확장 책을 추진하다 보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효종의 치세에 대한 사대부

들의 불만을 집약해서 표출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흔히 송시열을 북

벌 이념의 제공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 확장 책에 가

장 격렬한 반대자였다. 송시열은 효종 8년 r정유봉사(丁댐封事) 를 올려

그간의 치세 전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전하께서 재위하신 8년 동안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 치의 실효도 없었

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습니까? 백성들이 원망하고 하

• 열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 죽음, 계속되는소현의이름 13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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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빼으훌 떠나논빠If:!~~

늘이 노하며 인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

습니다〉

송시열의 상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송의 주자가 처음에는 금나라에 대한 북벨을 주장하다가 20년 후에는 다

시 북벌에 대해 딸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북벌을 포기하라는 권고였다.

그러나 효종은 자신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사대부

들이 집단 반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은 사대부들과 전면전

을 벌이는 대신 티협에 나섰다 효종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에 정권을 넘

겨주기로 하였다. 대신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은 적극적인 북별책을

수행해야 했다. 이처럼 양자가 연합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북벌이었다.

송시열의 산당이 대외적으로 내건 명분은 「춘추대의」였다. 최고의 춘추대의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을 정벌하고 중화의 명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 길은

오직 북별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환상에 지나지 않

았다. 그들은 누구보디- 소리 높여 춘추대의를 외쳤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춘추

대의는 군사를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하는 북벌이 아니 었다 그들이 최고로 생

각하는 춘추대의는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망해버린 명을 섭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달랐다. 그에게 북벌은 군사를 동원해 만주와 중원

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과 효종의 북벌론에는 이론과

실제에 이토록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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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 같은 산당인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해 인사

와 군사 양방면의 전권을 맡겼다. 효종이 이들에게 정권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들이 소리 높여 주창하던 춘추대의를 실제로 수행하라는 것이

었다. 춘추대의는 말로써 드높일 수 있었지만 북벌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벌은군사력 확장이란가시적 성과가눈에 보여야했다.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 송준길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그 성과가 눈

에 보이지 않자효종은재위 10년 1659년 3월에 송시열과독대한다. 당시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것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는데

효종이 국법을 어겨가며 독대한 이유는 보안을 위해서였다. 바로 북벌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해년의 일이라 하여 「기해독대」로 불리는

이 독대에서 효종은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소,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

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효종의 북벌계획은 군사전략상으로 볼 때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청은 외

견상으로 견고해 보여도구조상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배층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고 띠지배층은 다수 민족인 한족이기 때문이다. 10만

조선정예군이 북벌을 단행하면 만주족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한족들이 봉

기할 것이라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효종은확신에 차서 말했다

· 영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죽음,계속되는소현의이름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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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대사는 과단성 있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효종이 독대까지 해가며 북벌을 주장하자 송시열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종

이 산림에 정권을 넘긴 이유는 단 하나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송시

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미련 없이 그를 버릴 것이다. 송시열 등

산림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벌을 강력히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에게 북벌은 불가능한 망상이었다.

조정 대신들이 바로 이 진퇴양난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때

효종이 급서하고 만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송시열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북벨은 주장하지 않았

다. 효종의 시신과 함께 북별도 땅속에 묻힌 것이다.

효종의 죽음은 조정에 돗밖의 논란을 불러왔다 효종의 급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효종의 장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이것이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유명한 「예송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

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이 얼마여야 하는가를 두고

발생했다.

조선의 상례에 따르면 부모상에 자식은 3년 복을 입고, 반대로 장자상(長子폈)

에는 부모가 3년 복을 입어야 했다. 장자를 부모와 같이 대우한 이유는 종통을

잇는 맏아들을 그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장자 아닌 차자(次 [-) 이하의 상사

에는 부모가 1년 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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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논쟁의 논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기 때

문이다 장자는 어디까지나 소현세자였다. 그러나 인조의 왕통을 이은 인

물은 효종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왕통을 이은 인물에게 장자냐 차자냐를 따

지는 것이 타당한 물음이냐는 반론이 가능한 것이다. 효종이 차자라는 서

인의 논거와 왕통을 이은 존재라는 남인의 논거가 부딪친 것이 1차 예송논

쟁이었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효종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1년 복을 입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선도로 대표되는 남인은 효종이 비록 차자지

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자칫

하면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 대신 왕위를 이은 것이 정당하냐는 숭

통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국에 피바람을 부를 수도 있는

민감한문제였다.

l차 예송논쟁은 효종 숭통의 정당성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문제로 비화될

뻔 하다가 가까스레 1년 설을 주장한 서인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서인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설을 주장하다 패배한 남인에 대해서

도 극단적인 정치보복은 행해지지 않았다. 형식상 정치논쟁이 아니라 예법

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년 후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학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종 15년에 벌어지는 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함으로써

발생한다. 자의대비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효종 장례 때와 같

• 열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죽음 계속되는소현의이릅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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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l차 예송논쟁이 아들 상사 때 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간 여부였다연 2차 예송논쟁은 며느리 상사 때의 시어머니의 상복 착용 기

간여부였던것이다.

장자, 차자의 상사 때 부모의 상복 착용 기간이 달랐던 것처럼 장,차자부 상사

때의 상복 착용 기간도 달랐다 장자부(長子힘)의 상은 1년 복을, 차자부(次子

!I-iii) 이하의 상은 9개월 복을 입었던 것이다 사망한 사람만 달랐지 그 내용이

나 배경은 1차 예송논쟁과 똑같았다. 1차 예송논쟁 때 1년 설을 주장했던 서인

들은 2차 예송논쟁 때 9개월 설을 주장했고 1차 때 3년 설을 주장했던 남인

들은 2차 때는 1년 설을 주장했다 즉 서인들은 1차 예송논쟁 때 효종을 차자

로 대우한 것처럼 효종비를 차자부로 대우한 것이고 남인들은 왕통을 장, 차

자 여부보다 높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자부가 아니라 왕비로 대우한 것이다.

1차 예송논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열아흡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른네 살

의 장년이 돼 있었다. 국왕인 현종의 자리에서 볼 때 1차 예송논쟁의 결과는

내심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송시열과 윤선도 같은 대군 사부들의 논쟁에

판정을 내릴 만한 견식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벼지 효종이

누구인가? 바로 국왕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을 장자와 치-자로 나누어 차

둥있게 대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이었으면 그뿐, 나머지 모든 예법은 왕통에 복종하는 것이 맞다는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한 직후에 서인들이 자의대비 복제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논쟁을 부추겼다 서인은 처음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 복으로 의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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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1차 예론에 참여했던 서인 중진들의 말을 듣고 9개월로 고쳐 올렸던

것이다. 현종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당초 1년 복으로 의정했다가 왜

9개월 복으로 개정했느냐고 추궁하고 나섰다 서인들은 여러 차례 모여 협

의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진퇴양난의 협곡에 빠졌던 것이

다. 현종이 원하는 대답은 1차 예송 때 서인들이 주장했던 1년 설과 지금의

9개월 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인하면 서인들은

국왕을 능멸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충수에 빠지는 것이었다. 서인들이

대탑을 못하고 시간만 꿀자 현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1,2차 예론은 모두

서인들이 왕권을 업신여긴 결과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3년 복으로 고치고 이번의 갑인예론(2차 예

송)도 1년 복으로 고쳐라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를 쓴 것으로 생각했는

데 안팎에서는 고례(중국의 옛법)를 썼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

하들이 하는 일은 무겁다는 말이냐? 겸들이 모두 선왕(효종)의 두터운 은

혜를 입고서도 감히 체이부정(體而不표)이라고 주장하니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럽게 굴 것인가?」

현종이 말하는 「두럽게 구는 누구」란 1차 예송 논쟁 때 1년 설을 이꿀었던

송시열을 뭇히는 것이었다. 현종은 서인들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평소 원

만했던 현종의 성품으로 보아 이례적인 분노였다. 현종은 드디어 예론을

잘못 이끈 책임을 물어 서인 영상 김수흥을 귀양 보내기에 이른다. 귀양 가

는 서인의 자리는 허적, 윤휴 같은 남인들이 메웠다. 이때가 1674년이었으

니 남인들은 1623년의 인조반정 이래 반세기 만에 정권을 잡는 길이었다.

·영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죽음,계속되는소현의이름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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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새로운시대가도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견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현종이 급서했던 것이다. 현

종은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일까? r현종실록」은 r현종의 기운이 몹시 지

쳐 병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과로라는 뭇이다. 과로로 쇠

약해진 몸에 열이 발생했고 그런 지 열흘 만인 그해 8월 승하하고 말았던 것

이다. 의혹을 부추기는 점은 이때가 약방에서 시약청을 설치한 하루 만의 일

이라는 점이다. 임금의 병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서둘러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약청 설치 하루 만에 사망하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당

시 현종은 「임금에게 야박하게 구는」 서인들을 한창 몰아세우던 중이었으므로

의혹이 잇따랐다‘ 그런 의혹을 남긴 채 현종은 가고 15세의 어린 숙종이 뒤를

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경종의 신산스러운 삶은 「장희빈의 아들」이란 한

마디에 포괄돼 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와 국왕의 총애를 놓고 다투

던 숙종 때는 조선 전 기간에 걸쳐 당쟁이 가장 심한 때였다 숙종 때는 서인

과 남인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이 거듭됐는데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가의

여인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가의 여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의

부상과 몰락은 익히 알려진 대로 현모양처와 악처 사이의 씨움이 아니라 서인

과 남인 사이의 대리전이었다

재위 15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숙종에게 옥동자를 안겨준 여인

이 바로 희빈 장씨였다. 숙종이 이 옥동자를 원자로 정호하려 하자 서인이 격

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숙종은 서인 정권을 갈아치운 후 남인에게 정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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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면서 원자 정호를 강행했고 동시에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씨를 왕비

로 책봉했다. 그리고 원자로 정호한 옥동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니 그가 바

로훗날경종이다.

그러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왕자를 낳자 희빈 장씨에

대한 축종의 총애는 점차 식어갔는데 서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희

빈 장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남인에 대해 서인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한 결

과,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남인들도 몰락하고 말

았다. 그리고사저로쫓겨났던 인현왕후가다시 왕비가되었다. 그후몰락

한 남인에 대한 치죄를 둘러싸고 서인들은 둘로 양분된다. 남인들을 강하

게 치죄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노론이고 유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옹건파가

소론이었다.

숙종과 노론이 희빈 장씨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 사약을 내려 죽이자

그녀 소생인 세자의 처지는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

여 버린 여인의 아들이 국왕으로즉위하는것을방관할수 없었다. 연산군

시절과 같은 살육이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숙종 또한 모후가 사형당한 한

을 품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숙

종과 노론 대신 이이명은 숙종 43년(1717)에 이른바 「정유 독대」를 통해

세자 교체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유독대의 합의사항은 숙종의 와병과 소론의 격렬한 반발

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그러자

·열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뿜,계속되는소현의이름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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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경종의 이복동생 즉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왕세

제로 밀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요구

했다. 노론이 연영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한 까닭은 그녀의 어머니 숙빈 최씨

가 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34세였던 경종은 노론의 이 주장을 받이들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하지만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

다. 이는 세제를 정사에 참여시키라는 말로 사실상 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주청이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히-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언이었다 국왕이 세제에게 대리시키겠디-고 해도 신하들

은 죽어도 안 된다며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해야 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말을

신히들이 먼저 주청하고 나선 것이다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제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이 격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은 노론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을 역모로 몰았고

경종이 이를 받아들여 정권은 소론에게 돌아갔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남인가의 인물인 목호룡이 노론쪽에서 경종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이

른바 「삼급수 살해 사건」을 고변하변서 조정은 충격에 휩싸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창집, 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과 많은 노론가 자제들이 사형당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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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은 몰락하는데 이것이 바로 임 인옥사다.

바로 이 임인옥사가 벌어진 직후 경종이 또다시 급서한다. 경종의 급서는

효종 현종의 사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문을 불러왔다. 경종이 독살 당

했을지도모른다는정치적 의학적 정황증거는한둘이 아니었다.

정치적 정황 증거는 소론 강경파와 경종비가 노론계인 연잉군 폐출을 계획

하던 와중에 발생한 사건이란 점이었다. 의학적 견지의 정황 증거도 많았

다. 그 하나가 게장과 생감이었다. 경종의 식욕이 부진하자 노론계인 대비

와 연잉군이 게장을 진어하고 곧바로 생감을 올렸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

은 극이었다고 경종실록은 적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

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이 조이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그 후 심각한 병세에

빠진 경종의 처방을 놓고 연잉군은 다시 어의와 다툰다 연잉군이 인삼차

를 올리려 하자 어의 이공윤이 r자신이 쓴 강한 처방약과 인삼은 서로 상

극」이라면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나 연잉군은 어의 이공

윤을 꾸짖어가며 인삼차를 연달아 세 번이나 올렸는데 그 직후 경종이 세

상을 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양자 입적 문제 의학적으로는 게장과 생

감, 그리고 인삼차 진어문제 등이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게 만들었다. 더

구나 소론과 노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역안에 등재된 노론계 세제가

어의와 다투어가며 특별 처방을 고집한 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보

아도 문제 있는 처신임에는 분명했다.

의혹의 당사자인 연영군이 즉위하자 전국 각지에 경종이 독살 당했다는 벽

서가 나붙었다. 심지어 군사 이천해란 인물은 즉위한 연잉군, 즉 영조가 능

·열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죽음,계속되는소현의이름 1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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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행차할 때 어가를 가로막으며 영조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는 이천해의

말을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며 사관에게 싣지 못하도록 명해서 실록에는

다만 「들을 수 없는 말(不忍之言)」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영조는 이천해는 물

론 경종 시절 자신을 핍박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사형에 처했으나 파문은 가

라앉지 않았다.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가 〈네 목을 베어 대행대왕(경종)의 빈

전에 바치겠다〉라고 꾸짖자 〈나도 선왕(경종) 곁에 묻히기를 원하오〉라며 반

발했다. 경종의 충신은 영조가 아니라 자신들이란 돗이었다.

급기야 영조 재위 4년에 소론 강경파가 경종의 복수를 내걸고 영남을 중심으

로 군사를 일으켜 경종의 복수와 영조 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군사는 조석으로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전

군이 모여 곡을 했다. 영조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과 토

역경과 투서사건으로 경종독살설은 다시 재연된다. 국문 당하던 소론인사가 <

나는 갑진년(경종이 사망하는 해)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경종 독살설

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이들였고 이 논쟁은 틈만 생기 면 재연됐다.

경종 독살설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급기야 사도세자에게까지 여파를

남겨 세자가 궁궐에서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조선 왕실사상 가장 큰 비극이

발생하게된다.

조선이 또 한 번의 발돋움으로 세계사로 편입되어야 할 그때 소현으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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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된 어이없는왕의 죽음들은결국사도세자와정조에까지 이른다. 성리

학으로 무장한 신하들은 왕의 전횡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아래 신권을 강화

해나갔고, 이에 맞서 왕권을 지키려 했던 왕들은 그러나 그 힘의 줄다리기

에서 자주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영번째 이야기/이어지는의문의죽음,계속되는소현의이름 I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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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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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에서 벌어졌던 왕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는 끝났다.

‘ 문제는 소현의 죽음만이 아니라소현이라는기둥이 ‘

사라짐으로써 흔들리게 된 조선 전체가 비극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소현을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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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에서 벌어졌던 왕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데리는 끝났다 문

제는 소현의 죽음만이 아니라 소현이리는 기둥이 사리짐으로써 흔들리게 된

조선 전체기- 비극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소현을

죽였을까?

죽음을 둘러싼 정황을 살며보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인조다. 아무리

왕위가 중하다 해도 어떻게 아버지가 이들을 죽일 수 있을까? 천륜을 배신하

는 이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반문하게 되지만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과 차기 대권을 쥐게 될 세자, 더욱이 사

상과 진로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면 부자지간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

를바라봐야할것이다.

인조가 소현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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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이 소현이 사망한 뒤 보여준 인조의 태도 때문이다. 인조는 왕가

의 통례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소현을 치료했던 어의 이형익에 대해 어떠

한 책임도 묻지 않았고 도리어 서둘러 장례를 치러버린다. 또한 소현의 아

들 석철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선택한다. 이것은 소현과

소현 일가에 대해 철저한 미움의 표현이었다

인조는 왜 그렇게 소현을 미워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청나라가 소현에게 왕위를 전위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다. 반정을 통해

어렵게 왕위에 올랐던 인조, 왕위를 빼앗긴 전 왕이 얼마나 참혹한 최후를

맞게 되는 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인조였다. 더욱이 두 번의 호란을

통해 철천지 원수가 돼있는 청나라인데 이번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불쌍한 아버지가 될 지도 모를 형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움은 명분만으로는 그리 깊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야 미움도 색깔을 달리하며 갚어진다. 소현에 대한 불

안감을 증폭시켰던 것이 바로 소현의 아내 강씨였다‘ 무조건 승복하고 무

조건 왕의 말에 따라줄 줄 알았던 세자빈이 심양관으로 건너간 뒤 남자도

하지 못한 일들을 척척 처리하며 정치에 관여하고 나서는 모습은 패썽죄를

적용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어 바라봤지만 시간이 지날수

록 강씨의 재주는 빛을 발해 재회는 날로 늘어갔고, 심양관의 위세가 더욱

강고해지자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조급증이 생겨났다. 며느리가 미울수

록 며느리를 감싸고도는 이들은 더욱 미운 법이다. 더욱이 멀리 타국에서

• 어!필로그/누가소현서J:A털죽였나 I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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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축으로 떠나는 l괜섭~

소현과 강씨는 더욱 가까워져가고 서로 의견도 척척 맞아가는 눈치였다. 여자

는, 며느리는, 세자빈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편견 속에 사로잡혀있던 인

조에게 세자빈 강씨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이었을 것이다.

소현이 죽은 뒤 강씨에게 행한 인조의 모든 행동을 살펴보면 도대체 이렇게

악한 시아버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강씨는 남펀을 잃었고 친정 오삐들, 즉

가족들을 잃는다. 또한 주변 궁녀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세자빈으로서의 모든 품위와 자존심을 빼앗아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끝없

이 인신공격을 감행한다. 성품이 거칠고 건방지고 악하다는 지적에서부터 그

녀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고 그 이-이를 또한 버렸다는 상상하

기 어려운 악성 루머까지 궁궐 안에서 인조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조는

이런 이야기틀을 사실로 공개하면서 강씨를 공격했는데, 조정의 간신들은 물

론이고 세간의 누구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무렵 실록

의 기록들이 강씨에 대한 인조의 처사가 지나치다며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만

보더라도알수있다.

그런데 미움이 아무리 지독하다해도구체적인행동으로옮기기에는상당한용

기가 필요하다 과연 인조에게 살인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또한 저지르도록 한

명분,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소현의 귀국 보따리 속에 들어있던 서양

의 과학기구들과 책이었다. 이 책과 기국들은 호조의 창고 속에 오래도록 보

관돼 있다가 무려 100여년이 훨씬 지난 뒤 정조대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는데

바로 정약용이 수원성 축조 때 사용했던 거중기가 이 과학서적을 토대로 만든

것이었다. 어쨌든 소현은 귀국하면서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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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 있었다.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성

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이 관점만 버린다면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고 실리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상대일 뿐이었다. <

세상엔성리학뿐아니라천주학이라는다른사상도있다. 여지구가보여주

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과학기술이 있다. 이것이 어쩌면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것이다〉

인조가 보기에 소현의 이런 생각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종묘사직을

뒤엎는 일, 단순히 왕위찬탈을 목적으로 하는 역모가 아닌 조선과 조선으

로 대변되는 모든 세계를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인조로서는 아

들에게 독약을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이유였다. 어찌 보면 소현과 강씨의 죽

음을 자행했던 인조에게도 종묘사직과 종통을 지킨다는 나름대로의 큰 명

분이숨어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이 따라오든 따라오지

못하든 상관없이 세계사의 시계는 그대로 흘러갔다. 성리학의 태두리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방의 태도로 중국을 바라보았던 조선 최초의 세자 소현,

그리고 관습과 사회 통념에 맞서 비록 여성이지만 역할과 지위에 충실하려

노력했던 대단히 특별했던 세자빈 강씨 그들을 그렇게 잃었다는 것은 조

선의 역사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도 아쉽고 안타까운 일로

남는다.

• 어|밀로그/누가소현서1;i;1를죽였나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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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힐 지은이 정영미 발행처 광명문화원

발행인 안수남

기획 이종락

편집 인쇄 그래픽신화

발행일 2005년 9월

※이 책자는 광명시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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