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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듣는 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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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에게 듣는 예술경영

  • 005004

    편집인의 글

    예술경영 원로들의 인터뷰를 두 번째로 기획한다. 첫 번째는 『weekly@예술경영』 ((재)예술경영지원센터 발

    행) 창간2주년기념 특별기획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으로 2010년 11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게재되었다.

    당시 이 기획의 출발은 소박한 것이었다. 분야별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어보자는 것

    이었다. 그렇다고 이즈음 학문적 방법론으로 정립되고 있는 구술사를 시도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선

    생님들이 작업해 오신 이야기를 듣다보면 예술경영 분야에 대한 사적 흐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

    다. 무턱대고 선생님들을 찾아가 녹음기를 틀어놓고 말씀을 부탁드렸던 셈이다. 소박한 출발에 비하면 독자

    들에게 과분한 격려를 받았고, 덕분에 다시 새로운 기획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원로에게 듣는 예술경영 PRESTORY』는 “한국현대예술경영의 흐름”에서 출발하면서 웹진의 기획을 보완했

    다. 웹진 책임기획을 맡으셨던 이용관 선생님과 박신의, 양효석, 이승엽 선생님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셨다.

    가장 먼저 검토했던 점은 기존 기획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분야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의 역시 좌담에서

    다루고 있는 ‘예술경영 기점’만큼이나 현재적 이슈라 할 것인데, 결국 두 문제 모두 ‘예술경영이란 무엇인가’라

    는 질문에 가닿기 때문이다. 공연에서는 강석흥 선생님을 새롭게 모셔서 예술단체 운영 및 공연예술경영 등

    좀 더 세부적인 분야에 집중하고자 했다. 미술에서는 하정웅 선생님과 노준의 관장님을 통해 컬렉터와 사립

    미술관 등 현재적 관점에서 주목이 필요한 분야에 집중하고자 했다.

    다음으로는 예술경영 이슈를 좀 더 부각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기존 기획에서도 개인사의 술회에서 당대 예

    술환경이라든가 예술경영의 전개가 드러나지만 이번 기획에서는 이를 좀 더 부각하고자 했다. 웹진에서 발행

    되었던 김의경, 강준혁, 오광수, 이종인 선생님의 경우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 인터뷰를 재정리하였다. 또한 이

    를 위해 각 선생님들의 말씀에서 주요한 예술경영의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글을 추가했다.

    한편 안타깝게도 웹진에서 다루었던 선생님들을 이 자료집에 게재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상만 선생님편

    과 신문사 문화사업 분야 좌담은 『예술경영과 공연기획, 어제, 오늘, 내일』(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 30주년

    기념 발간물)에 수록되었다. 중복게재를 피하기 위해 이번 자료집에서 빠졌다. 박래경 선생님은 좀 더 보완

    된 인터뷰를 위해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 자료집에서 다루고 있는 선생님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다. 이

    때문에 자료집의 제목에 ‘원로’라는 말이 적합한가라는 고민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활동해온 시

    간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역사’라는 점을 부각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일곱 선생님들의 말씀을 모았다. 지면의 한계 등등으로 안타깝게 빠뜨려야 했던 말씀도 적

    지 않다. 또 엄정한 학문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안타깝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자료집에서 전개

    되는 이야기들은 비단 개인사에 대한 술회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획을 진행하면서 다시 들었던 생각은

    더 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자료집을 마무리하면서 드는 생각

    은 엄정한 학문적 방법론에서는 미처 그리기 어려울 수도 있는 ‘사람’과 ‘시간’을 이 자료집은 담고 있다는 것

    이다. 한 분 한 분 모두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척박한 현실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개척해 오신 분들이

    다. 이 자료집이 역사를 정립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를 만드는 시간을 살아낸 선생님들의 삶이, 예

    술경영의 현재에 놓여 있는 시간의 두께가 독자 여러분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 소 연

  • 6 7

    원 로 에 게 듣 는 예 술 경 영 P R E S T O R Y

  • 김의경

    직업극단

    연극기획과 제작

    음악극

    공연예술 국제교류

    010

    오광수

    미술비평

    국제전 커미셔너

    큐레이팅

    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098

    강준혁

    소극장 운영

    문화프로젝트 컨설팅

    축제

    문화예술 기획경영 아카데미

    040

    하정웅

    컬렉터

    기부

    공공미술관

    120

    강석흥

    예술단체 운영

    공연매니지먼트협의회

    아트마켓

    072

    노준의

    토탈미술관

    사립미술관협회

    152

    이종인

    예술지원기구

    문화정책

    문화예술조사통계

    186

    편집인의 글

    004

    한국현대예술경영의 전개

    김소연/박신의/양효석/이승엽/이용관

    214

    좌 담

  • 10 11

    김의경

    직업극단

    연극기획과 제작

    음악극

    공연예술 국제교류

    60년대 동인제 극단의 출발

    실험극장과 매니페스토

    장충동 국립극장 “극장은 레퍼토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직업 극단의 꿈, 현대극장 창단

    계층 연령 지역을 넘어 관객과 만나다

    뮤지컬과 음악극

    《제3세계연극제》, 《베세토연극제》 그리고 97년 《세계연극제》

    제작자 30년 대차대조표

  • 김의경

    직업극단

    연극기획과 제작

    음악극

    공연예술 국제교류

    김의경은 1936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어났다. 서울사대부고를 거

    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 실

    험극장 창단을 주도하고 1972년까지 대표를 맡았다. 실험극장은 아

    직도 활동하고 있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민간극단으로서 1960년대

    한국연극계의 ‘동인제 극단의 시대’를 열었다.

    1964년 『문학춘추』에 와 이 추천되면

    서 극작가로 데뷔했다. 그 전해에는 실험극장이 공연한 단막극 가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을 수상

    했다. (1975), (1986)는 백

    상예술상 희곡상을, (1991)은 서울연극제에서 작

    품상, 희곡상, 연기상 등을 받았다. 그의 희곡은 주로 실험극장이나

    현대극장 등 자신이 주도한 공연집단에 의해 무대화되었다.

    1970년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원 연극학과에서 한국인 최초로 연극

    학 MFA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이후 중앙대

    학교와 통합)에 부임하여 연극영화학과 학과장을 맡았다. 1973년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 후 초대 공연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1976년까

    지 일했다. 1976년에는 그의 연극인생 전성기를 담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극장을 만들었다. 현대극장은 창단 후 지금까지 70

    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제작했다. 특히 , , 등은 우리나라 공연계에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 아시테지 초대 이사장(1982년-1986년), 한국연극협회 이사

    장(1986년-1989년), 한국 ITI 회장(1995년-2000년), 《세계연극제

    집행위원장》(1997년), 서울시립극단 초대 예술감독(1997년-2000

    년),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초대 집행위원장 겸 예술감독(2002-

    2003) 등을 지냈다. 2001년 공연문화산업연구소를 창립하여 지금

    까지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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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

    경 ●

    직업

    극단

    연극

    기획

    과 제

    작 음

    악극

    공연

    예술

    국제

    교류

    연극인 김의경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연극인’ 정도가 그의

    다양한 활동의 테두리를 그나마 맞게 표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의 연극

    인생을 관통하는 역할과 활동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먼저 극작가. 1964년 『문학춘추』를 통해 극작가로 데뷔했다. (1973), (1991), (1999) 등 서사극과 역사극이

    주요 영역이다. 다음은 제작자다. 그의 프로필은 극작가로 시작하지만 한국 연

    극계에서 그의 자리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제작자로서의 김의경이

    다. 그는 1960년 실험극장의 창단부터 시작하여 줄곧 제작자 또는 그와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특히 1976년에 창단한 현대극장의 제작자인 김의경은 우리 공

    연사에 프로듀서 또는 제작자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공연기획과 관객개발,

    연극경영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김의경의 또 다른 면은 조직자다. 극단과 사업을 조직하는 것은 제작자로서 당

    연한 일이지만 그는 국내외에 새로운 조직과 행사를 만드는 데 선수였다. 그의

    주도로 이루어진 《제3세계연극제》, 《베세토연극제》,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등은 그 중 일부다.

    예술경영자, 예술행정가, 연극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장충동으로 옮긴 국립

    극장의 첫 공연과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서라벌예대(후에 중앙대

    학과 합쳤다)의 교수이기도 했고, 아시테지 초대 이사장과 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서울시극단의 초대 단장도 그의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록자다. 실험극장 이후 그가 거쳐 간 자리에는 이전과는 다

    른 수준의 기록이 남았다. 지금도 ‘기록’은 그의 주 관심사 중의 하나다. 우리 예

    술경영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만난 인물로 합당한 이유를 고루 갖춘 셈이다.

    60년대 동인제 극단의 출발

    실험극장과 매니페스토

    “언젠가 ‘연극을 왜 하게 되었느냐’ 라고 질문 받은 적 있는

    데, 무심코 ‘조직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대구 피난 시절이

    었죠. 그때 고 1이었는데, 학교에서 연극을 했어요. 나는 주인공 할 생각으로

    갔는데 내게 맡겨진 것은 프롬프터였습니다.(웃음) 그때는 프로들이 하는 연극

    도 연습을 몇 달 하는 법이 없었어요. 보통 일주일, 열흘, 길어야 2주였습니다.

    배우가 대충 대사만 맞춰 보고 다 외우지 않은 채 공연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장치 뒤에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게 프롬프터입니다. 특별히 연

    극을 좋아할 이유도 없었는데 궁하게나마 찾아낸 게, 어떤 조직에 대한 매력,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1936년 평안남도 순안생이다.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철학과

    를 졸업했다. ‘조직하는 데 재미를 느낀’ 그는 이후 연극 분야 안에서 다양한 분

    야에서 재미를 느끼게 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연극 모임들이 생기기 시작

    했는데, 그때 그 모임의 주요 멤버들이 HLKZ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에 있었습니다. 방송국이 화신백화점 건너편 보신각 바로 옆 건물에 있

    었죠. 사장은 장기영 씨(한국일보 사주)였고 방송부장은 나중에 MBC 사장을

    하신 최창봉 씨였습니다. 제작극회의 창립동인이기도 했던 최창봉 씨가 방송

    부장을 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도 했지요. 그때는 녹화방식이 없었으니 드라

    마도 다 생방송이었습니다. 작고한 이기하, 황운진 이런 사람들이 조무래기로

    참여할 때였는데, 나는 그나마도 나이가 한두 살 모자라서 끼지는 못하고 옆에

    서 왔다 갔다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실험극장이 만들어졌죠. 앞에 말한 이기하

    이승엽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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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

    경 ●

    직업

    극단

    연극

    기획

    과 제

    작 음

    악극

    공연

    예술

    국제

    교류

    는 연대 국문과 출신인데 나중에 KBS, MBC에서 드라마 제작국장을 지낸 이예

    요. 이 사람이 ‘연희극예술회’, ‘고대극회’ 등 대학극 출신 젊은이들을 모아서 연

    출을 했어요. 대전고등학교 출신인데 조그맣고 못생겼어요. 진짜 못생겼어요.

    내가 백 배는 잘생겼지.(웃음) 하지만 그이의 열정과 재주는 ‘못생긴 것의 백배’

    는 될 겁니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잡담이나 하고 그러기보다는 무언

    가 필요한 일을 해보자, 공부를 해보자, 연극 얘기를 좀 조직적으로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극단이 목표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작을 하자마자, 6개월 만인가, 공연을 했으니까 결국 그게 극

    단의 출발이었던 셈이지요. 1960년 11월에 이오네스코의 을 공

    연했어요.”

    우리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실험극장, 1960년 10월 창단한 실험극장

    은 1960년대 들어 연극계를 주도하는 동인제 극단의 선두주자였다. ‘연극을

    학문으로서 공부하고 연극을 직업으로 한다’는 기본자세에 5조 10항의 화려한

    공약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험극장을 시작하면서 선언문(manifesto)을 냈었는데,

    내가 그걸 어디서 배웠냐면, 우연히 『막』(幕)이라는 동경학생예술좌의 잡지 창

    간호를 보고서였습니다. 대학 후배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 다락방에서 그 책을

    봤어요. 후배 아버지가 아마 동경 유학생이었던 모양이지요. 한 50여 페이지

    되는 얄팍한 잡지였습니다. 동경학생예술좌는 1934년에 주요한의 동생인 주

    영섭(朱永涉, 이후 월북)이 주도하고 마완영, 이해랑, 이진순, 박동근 같은 사람

    들이 참여해 4~5년쯤 활동을 했죠. 그 사람들 거의가 1916년생이니까 스무 살

    안쪽 때였죠. 『막』에 실린 그 사람들의 선언문을 보고, ‘아, 극단이라는

    건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래서 뒤에 우리도

    모두가 연극의 실험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연극을 직업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식의 선언문을 썼지요. 다들 또래들이고 갓 대학

    을 졸업해서 직업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험극장 운영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원 조성과 회원제 등의 고민이 엿보

    인다. 관객실태조사와 관객운동을 사업계획에 포함시킬 정도다.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관객개발을 도모했다. ‘상술이 좋아도 상품이 좋지 않아서는 아니 된

    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상술이 뒤따르지 않아서는 아니 된

    실험극장 창단 10주년 파티

    실험극장과 60년대 동인제극단 - 실험극장은 대학 연극반 출신의 이십대 젊은이들이 신협 등 기성 극계에 반대하며 1960년에 창단한 극단이다. 실험극장을 시작으로 산하(1963), 민중극장(1963), 드라마센터(1964), 가교(1965), 여인극장(1966), 자유극장(1966), 극단 에저또(1967) 등이 연이어 창단된다. 60년대 동인제극단의 출현은 ‘첫째, 급격한 연극계의 세대교체를 가시화했다는 점 / 둘째, 연극 행위에 대한 새로운 이념이나 접근 방법의 정립을 재촉했다는 점 / 셋째, 한국연극을 세계 연극의 패러다임 속에 배치시키려는 인식적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 등으로 한국연극의 지형

    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70년대 이후 이들 동인제극단들이 한국연극의 주류로 성장하는데, 그 대표주자인 실험극장은 극단 자체 소극장을 운영하면

    서 , , 등 소극장 연극의 대표작들을 발표한다.

    실험극단 10년지

  • 018 019

    김의

    경 ●

    직업

    극단

    연극

    기획

    과 제

    작 음

    악극

    공연

    예술

    국제

    교류

    다’(『실험극장 10년지』)는 주장은 1960년대 초반에 이미 공연마케팅을 본격적

    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장충동 국립극장

    “극장은 레퍼토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1971년 대학에 자리를 옮길 때까지 10년 이상 젊은 김의경의 직장은 방송국이

    었다. 나중에 그가 뮤지컬 등 대형 공연을 흥행시킬 때 미디어와 협업하는 과

    정에서 이 인연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61년 MBC 창설멤버로 직

    장생활을 시작했고 1971년 퇴직할 당시에는 TBC 소속이었다. 서라벌예대 연

    극영화과 학과장으로 짧은 교원생활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옮긴 것이 1973년이

    다. 장충동에 새 극장을 짓고 개관한 국립극장 의 첫 공연과장이었다. 그 직전

    에 그는 미국에 가서 연극 공부를 하고 MFA를 딴다. 미국에서 연극 전공으로

    딴 첫 MFA 취득자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진 그의 미국 유학 경험

    은 그가 후에 국제 활동을 하는 밑거름이 된다.

    “장충동 국립극장의 초대 극장장은 김창구 씨라고, 서울

    대 음대 1기 졸업생입니다. 다른 공무원하고는 달리 극장경영에 관심이 컸던

    분이죠. 다른 곳 옮기기 전에 들르는 임시정거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극장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거기서 1973년부터 1976년 초까지 2년 반

    정도 초대 공연과장을 지냈습니다. 여러 관습들을 새

    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는데 특히 두 가지가 기억에 남

    습니다. 첫 번째는 그때까지 국립극장을 내셔널 씨어

    터(National Theater)라고 썼는데 내가 오브 코리아(of

    Korea)를 붙였습니다. 공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셔널 씨어터 오브 코리아(National Theater of Korea)라고 씁니다.

    두 번째는, 내가 들어간 이듬해에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제외한 다른 단체들은

    모두 일 년 전에 레퍼토리를 정했습니다. 무슨 작품을 할까 그때그때 정하는

    게 아니라, 다음해 일 년 동안의 작품을 미리 선정한 거죠. 개관 초기 프로그램

    책자를 찾아보면, 다음 해 공연 레퍼토리를 알리는 광고가 있을 겁니다.”

    최신식 설비와 넓은 로비 등을 갖춘 국립극장의 개관을 준비하면서 이전의 관

    행을 바꾸고 새로운 것들을 정착시킨다. 이 과정에 그는 유럽식 레퍼토리 시스

    템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연극사에서 연극에 관한 한 극장사의 시작은

    이 장충동의 국립극장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은 공연예술

    의 터인데 그 터 없이 지속적인 공연예술을 기대할 순 없으니까요. 극

    장이 없는 극단은 당장 다음해에 어디서 공연할지도 모르는 형편이

    죠. 그래서 나는 거기서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단체마다 고정 레퍼토리를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 년에 네 작품

    을 한다면 그 중 두 작품은 레퍼토리로 하고 두 작품은 신작을 하는 식이죠. 소

    국립극장 개관 기사(경향신문 1973.10.13)

    장충동 국립극장 시대 개막 - 국립극장은 1948년 12월 통과된 국립극장 설치령을 바탕으로 설립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극장건물 지정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구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의사당)을 국립극장으로 지정하고 1950년 4월 29일 개관기념 공연 (유치진 작, 허석 연출)을 개막한다. 그

    러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문화극장으로 옮겨갔다가 휴전 후에도 환도하지 못한 채 대구에 머문다. 한때 국립극장 폐지론까지 거론되는 가운데 1957년 서울시공관(현재 명동예술극장)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된다. 1962년 서울 시민회관이 개관하면서 단독으로 사용하게 되자 극장을 전면 개보수하고 재개관한다. 1967년 정부는 국립극장 신축을 발표하고 명동 국립극장 매각을 추진한다. 그러나 공연예술계에서는 명동 국립극장이 대관극

    장으로 민간공연단체가 활발히 사용했던 점을 들어 매각을 반대한다. 비용 등등의 문제로 당초 계획보다 늦어진 1973년 장충동 국립극장이 완공되고 10월 17일 으로 개막공연을 연다. 국립극장 설립 23년 만에 우리 손으로 지은 극장을 갖기에 이르고 대관 위주 극장에서 전속예술단 제작공

    연을 중심으로 운영하게 된다. 명동 국립극장은 예술극장으로 개칭하고 대관극장으로 운영되다가 75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되면서 극장을 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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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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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극

    공연

    예술

    국제

    교류

    위 유럽식의 레퍼토리 공연을 하려면 한 시즌에 몇 개 공연을 정해서 2~3일 공

    연하고 무대 바꿔서 다른 공연하고 그래야 하는 거죠. 상업연극처럼 한 달 또

    는 두 달 내내 한 공연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시 제가 그런 제안을 했더니

    무대과장이 자기네를 죽일 셈이냐며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장

    치를 세우고 철수하는 무대 작업이 미숙할 때니까요. 무엇보다 인력이 모자랐

    지요. 개관 초기라 나도 양보하고 극장장도 어쩔 수 없어 레퍼토리 시스템을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놓자마자 깨졌어요. 공연 목록이라는 것을 최소한

    일 년 전에 정해서 미리 준비해 내놓던 것도 내가 2년 반 만에 극장을 그만두고

    나니 지속되지 않게 되었죠.”

    직업 극단의 꿈, 현대극장 창단

    1970년 실험극장 10년을 맞아 『실험극장 10년지』가 발간되었다. 그는 이 책자

    에 실은 ‘실험극장의 출발과 재출발’이라는 글에서 “지난 10년은 실험극장의 아

    마추어적인 방황기로 보아도 좋았다. 새 10년은 프로페셔널리즘의 정착기로

    삼고 싶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이런 희망은 현대극장을 창단하면서 구체적으로

    진척을 보이게 된다. 1976년의 일이다.

    “미국서 돌아온 해가 마침 실험극장 10주년이어서 ‘실험극

    장의 출발과 재출발’이란 글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구체적으로 직업연극

    을 표방한 건 현대극장을 하면서였다고 봐요. 그때는 직업화가 가능하지 않을

    까 생각했었는데, 솔직히 지금 그게 얼마나 이뤄졌냐고 물으면 글쎄요.

    내가 현대극장을 만들 때도 모든 연극 단체들이 일 년에 두 번 정도밖

    에 공연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극장은 되도록 많은 공연을 하려

    고 했습니다. 한창 때는 일년에 100일, 150일까지 공연을 했었죠. 그렇

    게 극단이 운영되려면 배우들을 붙잡아 둬야 하고, 배우들을 붙잡아

    두려면 또 공연을 해야 했죠. 김상열을 포함해서 7~8명에게 월급을 십

    만 원씩 줬습니다. 그때 월급 받았던 배우들이 윤문식, 작고한 김종구, 미국

    에 간 양성화, 양재성, 최주봉 등입니다. 이 친구들이 그 때를 회고하면서, 그

    십만 원이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들 해요. 지금도 현대극장 연구생 출신들이

    사방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현대극장 시절에 서울이건 지방이건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 큰 메리트였다고 봅니다. 그 만큼 연기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커뮤니티 의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단원부터 가족까지 매

    년 봄이면 극단 체육대회를 하는데 단원 부인들까지 애를 업고 와서 참가하곤

    했었죠. 애들 경주도 하고 점심도 먹고 술도 먹고 하는, 요샛말로는 패밀리데

    이 같은 걸 매년 했습니다. 가을에는 수련대회를 가졌어요. 1박2일 코스로 산

    에 가서 자고 왔었죠. 그게 커뮤니티를 감각적으로 의식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

    었나 생각합니다. 나는 극단이라는 것이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공

    동체라고 봅니다. 이런 뜻으로 내가 쓰는 ‘모둥킴’이라는 단어도, 동경학생예

    술좌의 『막』이라는 잡지에서 처음으로 발견해서 쓰는 단어인데, 일종의 ‘집단

    성’이란 의미입니다. 주영섭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극단은 하나의 부족

    이다. 만약 그 부족이 왼쪽 귀를 자르는 풍습이 있다면 모든 단원들의 귀를 잘

    라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물론 귀를 자르라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공동체 의식을 갖고 일 년에 몇 번씩 지방공연을 다니고 공연

    일수도 많으니까 자연히 단원이 연애할 시간조차 없었을 정도였죠. 그런 식으

    로 단체가 존재해야 구심력이 나오고 가족의식 같은 것도 생기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상업연극은 관계가 없지만, 연극을 진실로 전문직업으로 삼고 싶다면

    반드시 그런 공동운명체 같은 의식을 갖고 하나의 예술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 022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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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일본의 스즈키 다다시 극단 같은 거

    고, 손진책의 미추도 비교적 그런 편이죠. 현대극장 초기에 했던 것이 그런 것

    들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이합집산 하는 극단이어서는 자기 자신의 스타일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계층 연령 지역을 넘어 관객과 만나다

    현대극장의 창단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는다. 현대극장의 방향으로 제

    시한 ‘전문연극’, ‘직업연극’, ‘과학화’의 화두들이 매우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그것이 연극이 살 길이다. 김의경이 막 40대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첫 공연 (1976)를 올렸지요. 당시 신문기사를 보

    면 ‘전문극단, 연극의 직업화의 새 시도, 상업극단과 동인제의 한계성 탈피’, ‘현

    대극장이 상업극시대를 열었다’ 뭐 이렇게 썼었죠.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상황

    에서 상업극을 한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것으로는 전문

    화하는 게 첫째이고 전문화하기 위해 평균 B학점 이상의 스태프와 캐스트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공연을 많이 해야 했죠. 당시 극장이 몇 개

    밖에 없어서 극장의 개념을 확대하기 위해 유관순기념관 빌려서 공연하고 지

    방에서는 문예회관이 없어서 체육관을 빌려서 공연하고 그랬습니다.

    1980년에 들어서는 농촌, 어촌, 탄광촌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습니

    다. 그때 이동무대를 만들었어요. 극장이 없으면 공연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연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죠. 초등학교, 중학교 운동장

    에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했습니다. 미국의 연출가이자 평론가인 해롤

    드 클러먼(Harold Clurman, 1901 ~ 1980)의 충고도 한 몫 했어요. 그 사람은 ‘연

    극은 어린이 연극부터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공연을 보게 해서

    미래의 재능과 미래의 관객을 개발한다는 것이죠. 관객의 전 연령층화! 그래서

    어린이 연극, 청소년 연극, 어른 연극, 심지어는 장애인 연극, 거기에 한 술 더

    떠 교도소에 연출자를 파견해서 수감자들과 공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

    는 여대생들이 주요 관객이었는데 여대생들은 연애할 때만 남자친구

    들하고 극장에 오고 결혼하면 극장에 안 왔어요. 관객개발을 위해 여

    대생에 편중되어 있는 관객층을 어린이, 청소년, 어른, 장애인 등으로

    넓힌 것이죠. 장애인에게 관람 기회를 주고, 수감자들과 공연을 같이

    만들면서 계층적으로 연령적으로 공연을 확대하는 것이 우리들의 중

    현대극장 창단 관련기사(신아일보 1976. 9. 4 / 서울신문 1976. 9. 6)

    현대극장의 농어촌, 탄광촌의 청소년을 위한 순회공연 - 현대청소년극장은 1986년 으로 전국 15개 도시에서 농어촌 및 탄광촌의 청소년과 주민을 위한 순회공연을 갖는다. 농어촌과 탄광촌의 문화소외지역 순회공연 기획은 이듬해 1987년 (이재현 작, 최창권 음

    악, 문석봉 연출)로 이어진다. 은 국내 최초로 컴퓨터 음악을 사용, 블루스 창법을 선보이며 60여명이 출연한 록뮤지컬 공연으로, 경북 문경과 상주의 탄광촌을 비롯하여 전국 31개의 시군에서 두 달여 동안 순회공연을 갖는다. 현대극장의 대표를 맡아 전국순회공연을 이끈 최문경은

    1990년 장애를 갖고 있거나 근로청소년 혹은 소년원생들을 위한 ‘전국청소년연극축전’을 개최한다.

  • 024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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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을 많이 할 수 있었죠.

    스폰서를 많이 따온 내 처(崔文卿)의 공로가 컸습니다. 그에 의하면, 자기는 단

    단한 다이아몬드라는 겁니다. 관공서 관리의 대부분은 일반인들과 달리 금속

    인데, 자기는 다이아몬드라 금속보다 강하다는 거지요. 내 처는 현대그룹, 태

    평양화학 같은 데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스폰서를 받아와서 청소년공연

    도 하고 전국순회공연도 할 수 있었죠. 어린이공연은 해태가 스폰서를 해줬습

    니다. 그런 식으로 연령층 지역을 확대하고 보급하게 된 거죠.

    그렇게 공연을 하려면 그만큼 인적 자원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1977

    년에 현대연극아카데미(Hyundai Academy for Dramatic Arts, 이하

    HADA)를 만들게 되었죠. 드라마틱 아츠라는 말은 영국의 로열연극아카데

    미(Royal Academy for Dramatic Arts)의 표기를 따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식

    으로 현대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이 500명 정도 되는데 그 중 20%는 현역으

    로 남아 있습니다. 김갑수(1기)나 박해미 같은 사람도 현대 출신입니다. 그들

    에게 재능과 열정도 있었겠지만, 공연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도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극단의 연구생들은 일 년에 20~30일 정도 출연하

    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재능을 늘릴 수 없죠. 그런데 우리는 한번

    농어탄광촌 공연을 하면 제주도 포함해서 52곳, 54회 공연을 했죠. 그것이 배

    우들에게는 상당한 기회가 됩니다.”

    현대극장은 어린이 연극과 청소년 연극으로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다. 극단

    사계의 명작극장을 연상시키는 해태명작극장이나 청소년 프로그램은 현대극

    장의 강점 중 하나다. 관객개발이나 공연의 횟수를 최대화하는 효과도 있었지

    만 현대극장이 추구하는 ‘연령과 지역의 한계를 넘는 관객층’에 대한 적극적 접

    근방식이다.

    “영국 학자가 쓴 『드라마의 이론』(Allardyce Nicoll의 『The-

    ory of Drama』)을 보면, 어느 특정 계층만이 아닌, 사회 각 계층의 관객(Hetero-

    genous Audience)이 골고루 서포트를 해줘야 극장 예술이 산다고 해요.

    우리에게는 어린이 연극을 위한 해태명작극장이 있었고, 일반 공연을 청소년

    들에게 맞게 각색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중고생을 위한 ‘청소년극장’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이 공연들은 상당 부분 태평양화학에서 스폰서를 했습

    니다. 오리온하고는 인형극장을 만들었는데 길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해태명

    작극장은 1977년 제1회로 을 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예가 일본의 극단 시키(四季)입니다. 극단 시키는 1950년대 창단

    해서 1960년대 전후해서 으로 어린이 연극을 처음 시작했습

    니다. 극단 시키가 라이센스 뮤지컬로 유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활동도 꾸준히

    해왔던 거죠. 현대극장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뮤지컬 이 그쪽과는 아무런 교감이 없이 시작했는데 일본에서도 같은

    소재로 제목도 이런 식으로 붙인

    공연을 제작했더라고요. 출연자도 우리는 가수 윤복희, 그쪽은 고시지 후부키

    (越路吹雪)라는 유명한 대중가수였습니다. 의도나 방식이 아주 비슷했죠.”

    뮤지컬과 음악극

    뭐니 뭐니 해도 현대극장의 브랜드는 뮤지컬이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논쟁으로 이끈 진원지이기도 하고 현대극장 레퍼토리의 중심을 이루는 장르이

    다. 현대극장이 뮤지컬을 전면에 내세울 때만 해도 뮤지컬은 이단 취급을 받는

    때였다.

  • 026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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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 도 음악극적인 접근이었는데, 우리

    가 음악극으로 간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어떻게 관객들과 폭넓게

    접촉할 것이냐 할 때 음악적 요소와 무용적 요소가 관객들을 끌어내는 데 도움

    이 될 것이라고 봤어요. 두 번째는 그걸 통해서 극단의 살림을 향상시켜야겠다

    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다음에는 대담하게 를

    올렸습니다. 정말 노심초사하면서 공연을 올렸는데,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처

    음 8일간 공연했을 때는 빚이 조금 남았고, 나중에 재공연할 때는 청소년극장

    과 연계해서 청소년들을 동원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손해는 안 봤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합하면 총관객수가 200만 명에 육박할 겁니다.

    그 시대에는 뮤지컬을 연극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있었죠. 이해랑 씨나 차범

    석 씨도 그랬습니다. 요새는 그런 구분을 안 하잖아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

    르겠지만, 내 경우 상당히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작품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

    니다. 요즘처럼 재미만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뮤지컬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

    었던 거죠. 사람들은 내가 뮤지컬을 많이 했네 어쩌네 하면서 긍정적으로도 부

    정적으로도 보는데, 극단을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앞서 얘기한 대로 극단

    이 하나의 부족(部族)으로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부족이 가져야 하는 양식

    이라든가 목표, 감각 등 끊임없이 여러 요소의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의 트랙을

    찾아가야 연극이 성립되죠. 그냥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처럼 이거 해서 돈

    을 벌겠다는 것, 거기에 1차적 목표가 있으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난 지금도

    당분간 연극이 극단 중심으로 해야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지원사업도

    정책적이고 철학적인 백그라운드를 정리하고 그러한 배경 위에서 펼쳐져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도 끌어들이고 극단 살림도 하려면, 아무래도 전형적인 브로드웨이류의

    안정적인 공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 같은 프로그램은 좀 불안해 보인다. 이미 검증된 브로드웨이 작품

    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을까?

    “브로드웨이에서 온 검증받은, 안정적인 공연보다 나 을 선택한 것은 당시의 우

    리 현실 때문입니다. 소위 라이선스에 대한 개념도 몰랐고. 어디에 가서 구하

    겠어요? 는 옛날에 뉴욕에서 팔았던

    『Selections of Superstar』라는 보컬 스코어가 있었습니다. 그걸 구했

    어도 오케스트레이션은 돈 안주면 못 구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모험

    을 한 줄 아세요? 정성조라고 지금 서울예대 교수로 있는 이에게 보컬

    악보하고 카세트를 주고 전부 채보를 하게 했습니다. 당시 정성조 악

    단은 11~13인조의 관악기 위주의 악단으로 로얄호텔에서 공연했습니

    다. 그래서 첫 번째 공연을 할 때는 관악기만 가지고 반주했었죠. 관악

    기의 짱짱한 소리가 나니까 배우 가사가 안 들렸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사운드

    시스템이 없어서 무대에 마이크 몇 개 매달고 배우가 그 앞에 가서 노래를 하

    니 전달이 더 안 되었죠. 음악은 꽝꽝 울리는데 배우의 노랫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라이브를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서울 공연 끝나고 마침 대구에 초청을 받아서

    갈 때 녹음을 했습니다. 녹음을 하니까 가사 전달 방법이 나오는 거죠. 솔로는

    과 연극의 상업화/대중화 논쟁 - 김의경, 표재순, 이반 등은 PD제 운영을 선언하며 1976년 극단 현대극장을 창단한다. 현대극장은 1977년 창작뮤지컬 (백승규 작, 표재순 연출)을 류관순기념관에서 공연한다. 인기가수 윤복희와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파격적 캐스팅과 추송웅, 이순재 등 명망 있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단 5일의 공연에 14,358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몇 차례 이어진 공연 역시 크게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공연에 대한 평론가들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며 제작측(김의경)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논쟁으로까지 발전

    한다. 이태주, 유민영, 정진수 등은 이 연극을 저질 상업극이라 비판했으나, 김의경 등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이원화하는 것에 대해 공박했다.

  • 028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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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그래서 내가 일본 국립극장에서 보고 온 구식방법으로, 바턴

    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상하운동의 기능에다, 그 바턴에 롤러

    를 달아서 좌우와 상하운동을 시도했어요. 당연히 무대 앞 관

    객 머리 위를 나는 전후운동은 불가능했어요. 여하튼 도르래

    를 써서 한쪽에서는 바턴을 올리고 내리고 한쪽에서는 줄을 잡

    아당기고 해서 무대에서 윤복희가 날았죠. 리허설도 없이. 부

    랴부랴 철공소에서 만들어 온 걸로. 몇 년 뒤에는 라스베가스의

    Peter Foy사(社)를 정식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들은 앞쪽으로 나르는 게

    백미였습니다. 처음 할 때는 잘 안되었는데 한번 보니깐 금방 알겠더

    군요. 그래서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당히 연구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식구인 표재순이나 유경환 모두 기술적인 무대를 즐겨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성과로 무대가 재미있어지니까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이선스 관련 클레임이 들어오

    기 시작했어요. 1994년에 처음으로 돈을 내고 공연을 했죠. 돈은 좀 들었지만

    그때부터 뮤지컬이 본격화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 비하면 는 그렇게 폭발적이지 않더군요. 도

    초기에는 라이선스를 안 했는데, 영국의 라이선스 회사인 매킨토시 사무실에

    서 편지가 왔어요. 하지 말라고. 그래서 내 딴에는 비장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공연 때 부르고, 합창은 미리 녹음한 걸 틀었습니다. 10일 공연 하고 나서 녹음

    하니까 녹음이 하루 만에 끝났어요. 공연 전에 녹음했으면 아마도 3일은 걸렸

    을 겁니다.

    우리는 무대기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1979년도 을 공연

    할 때인데, 피터팬이 날아야 하잖아요? 철공소에 있는 친구와 얘기를 해서 배

    우를 매다는 것까지는 생각했는데 좌우로만 움직이는 겁니다. 그나마 그 사람

    이 설계한 것도 실행을 못한 이유는, 카운터 웨이트를 만들어 밸런스를 맞춰

    야 사람이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그러려면 세종문화회관 바닥에 볼트를 박

    아야 하니 할 수가 없었죠. 그때는 밤에 주로 무대 작업했는데, 우리 나름의 비

    행장치를 설치하고 몸이 제일 가벼운 이영주를 매달았는데도 안 되는 겁니다.

    공중장치를 이용한 현대극장의 피터팬 공연(1991. 12), 『현대극장 30년사』

    공연과 저작권 -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법률인 저작권법은 정부 수립 이후 1957년 최초로 제정된 이래, 1986년 전면개정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정착되었다. 그동안 저작권법은 실연자의 저작인접권, 2차저작물작성권 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해외 저작물의 국내 공연과 관련해

    서 가장 큰 변화는 세계저작권협약(UCC : 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에 가입한 1987년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으로 우리나라도 WTO 회원국으로서 TRIPs 협정에 따르게 된 1996년이다. 이로써 공연 저작물과 관련된 권리와 행위는 국제적 기준에 따르게 되었다. 1992년 (정덕애 번역, 임영웅 연출)와 (허순자 번역, 손진책 연출)가 해외 저작자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공연한 첫 사례들이다. 주요한 공연과 관련된 저작권 분쟁으로는 뮤지컬 (2000년, 원저작물인지 2차 저작물로서 회복저작물인지 여부), 뮤지컬 (2007년, 제작자, 기획자, 연출자의 저작권 및 결합저작권), (2009년, 상표등록권자와 창작자의 저작권 다툼) 등이 있다.

    현대극장의 아동극 피터팬 기사 (경향신문 1979. 5. 5)

  • 030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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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교류

    ‘너희는 로열티가 일상화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렇지 않고, 협회에

    가입한 것도 최근 일이다. 너희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그 다음부터는 그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어느새 그는 ‘음악극’이라는 말을 쓴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에는 뮤지컬이

    라는 말 대신 음악극이 사용된다. 이 축제는 차별적인 포지셔닝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로 평이 나있다.

    “음악극과 뮤지컬은 넓게는 같은 뜻이지요. ITI (국제극예

    술협회, 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에서는 주로 ‘Music Theatre’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게 좀 더 외연이 넓은 표현이라 하겠지요. 우리나라의 대부분 창작

    뮤지컬은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릅니다.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뮤지컬 코미디’

    의 약자입니다. 미국에서는 코미디가 아닌 것을 ‘뮤지컬 플레이’라고 합니다.

    장르상 코미디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엄밀히 따지려면 뮤지컬 코미디나 뮤

    지컬 플레이라 표현해야죠. 미국은 뮤지컬 코미디가 대부분이니까 뮤지컬로

    쓰는 겁니다.

    ITI에는 음악극 분과(Music Theatre Committee)가 있습니다. ITI의 뮤직

    씨어터 개념에서 따와서 음악극이라 했고, 그래서 의정부에서도 뮤지

    컬축제가 아니라 음악극축제로 하자고 했죠. 의정부에서 어느 날 찾

    아 와서 어떤 축제를 했으면 하고 묻기에 주저 없이 ‘음악극축제’를 하

    라고 했습니다. 내가 초대 《의정부음악극축제》 예술감독이었어요. 2

    년 하고 스스로 그만두었지요.”

    《제3세계연극제》, 《베세토연극제》

    그리고 97년 《세계연극제》

    1960년대에 연극공부를 미국에서 한 덕일까. 그는 일찍 세계에 눈뜬 연극인이

    다. 엄혹한 군사정권 아래에서 비수교국이 대거 참여하는 《제3세계연극제》

    를 유치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국제 교류 사업을 주도했다.

    “굳이 공헌이라 말할 건 아니지만, 1981년에 처

    음으로 《제3세계연극제》를 유치했는데, 그게 우리나라 국제공

    연예술제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8년에 ITI

    에 가입신청을 해서, 1959년 헬싱키 총회에서 공식가입이 됐습

    니다, 《제3세계연극제》를 하면서 한국ITI가 국제적으로 발돋움

    ITI와 아시테지 - 국제극예술협회(약칭 ITI)와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아시테지, 약칭 ASSITEJ)는 공연예술의 국제적 교류를 목표로 하는 비정부 국제연극기구이다. ITI는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후원으로 1948년 체코 프라하에서 설립되었으며, 한국은 1958년 회원국으로 가입해 1985년 한국본부가 창설됐다. 아시테지는 1965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되었으며, 아동청소년연극의 정보교류와 공연교류를 목적으로 한다.

    1982년 아시테지 한국본부가 설립됐다. 국제극예술협회는 2년마다 108개 국가가 가입한 회원국을 돌며 세계총회를 열어 연극, 무용, 음악극 등의 공

    연예술의 국제적 교류를 꾀하며 세계연극제를 개최한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는 세계대회를 3년에 한번 씩 개최하고 있으며, 국제아동청소년연

    극협회 한국본부는 1년에 두 번씩 아동청소년연극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의정부음악극축제》 -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는 의정부예술의전당이 개관 1주년 기념으로 2002년에 시작한 국제공연예술축제이다. 의정부예술의전당의 관장 구자흥과 초대 집행위원장 김의경이 주도했다. 축제를 준비하던 2001년은 우리 뮤지컬에 지각변동을 가져온 이 큰 화제

    를 모았던 시기다. 오늘날과 같은 시장구조를 갖게 되며 본격적으로 서구 뮤지컬 시장에 편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브로드웨이류의 뮤

    지컬을 중심에 두지 않은 ‘음악극’을 내세운 것은 모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우려와 크지 않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축제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공

    연 이벤트로 자리를 잡았다. 브로드웨이류의 뮤지컬을 넘어 음악극의 지평을 넓힌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우싱궈의 경극 , 하이너괴벨

    스의 등 동시대의 주목받을 만한 해외 공연들이 이 축제를 통해 소개되었다. 초대 예술감독 김의경에 이어 박상순(연극평론가/경민대 교

    수), 이승엽(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임경식(연출가/서경대 교수)을 거쳐 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예술감독으로 축제를 이끌고 있다.

    《제3세계연극제》 - 《제3세계연극제》는 국제극예술협회 아시아·남미·아프리카의 연극인들이 소속된 제3세계 분과위원회에서 개최하는 국제연극제다. 1971년 마닐라에서 처음 개최되었으며, 1981년 제5회 연극제가 서울에서 개최된다.(집행위원장 : 여석기 / 부위원장 : 김정옥 / 사무국장 : 김의

    경) 한국 연극계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국제연극제이다. 당시 연극제에는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프랑스, 일본, 튀니지, 방글라데시 등 9개국의 10개 단체가 참여했으며, 그림자극, 인형극, 가면극 등의 전통극 요소가 강한 작품부터 전통적 요소와 현대적 무대 언어가 공존하는 작품까지 다양한 세계 연극의 풍경을 보여줬다. 1981년의 《제3세계연극제》 서울 개최를 계기로 대학로의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이 개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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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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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극

    공연

    예술

    국제

    교류

    을 할 수 있었죠. 연극제 직후에 마드리드에서 ITI 총회가 있었는데 그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이사국으로 처음 피선이 됐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

    사국으로 있습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정도를 제외하고는 연속

    으로 이사국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 이사에 선출될 때는 영국, 이집트, 중

    국하고 경합해서 3차 투표까지 갔어요. 결국 1표 차로 우리가 되었죠.”

    그의 주도로 창설된 《베세토연극제》 (BeSeTo연극제, 이하 베세토)는 그의 대

    표작이다.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는 중국, 일본, 한국 다 구분이 되

    지만, 예를 들어 미국에서 본다면 유럽과 아시아의 문제로 구분됩니다. 하와이

    에 이승만 박사가 다니던 릴리하(Liliha)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문이 엄밀

    히 말하면 중국식 문이었는데 서양 사람들이 보면 아시아적인 것이라고 봅니

    다. 내가 하와이 갔을 때 그 릴리하 교회 문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세사에서 우리와 일본과 중국의 아름답지 못한 역사에서 제일 희생당한 게

    한국입니다. 그런데 연극으로 보면 일본과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몇 백 년 앞선

    ‘극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것입니다.

    1994년에 베세토를 만든 것은 한국의 연극이 중국과 일본에 미치지 못

    하는 현실에서 살아날 길이 뭐냐, 전통극이 아니라 현대연극이다, 라

    는 판단에서였습니다. 한국의 현대연극은 중국과 일본의 현대연극과

    맞서도 꿀리지 않는다, 이거죠. 그것이 내가 베세토를 하게 된 속마음

    입니다. 전통극으로 하면 우리가 뒤져요. 예를 들어 리얼리즘 연극은, 북경인

    민예술극원 같은 경우는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전에 러시아에서 리얼리즘

    연극을 배우고 온 사람들이 있어서 철저히 리얼리즘을 배우고 그게 지속되었

    습니다. 현대연극이라면 겨뤄서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의 이유

    는 중국, 일본의 연극과 우리 연극이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른지를 깨닫

    는 것이 한국연극을 발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을 비교함으로써 장단점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중국에 같이 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해 봄에 그분이 돌아가셨습니

    다. 그래서 새 파트너를 찾는데 마침인 사람을 찾았어요. 당시 중국희극가협

    회 부주석이고 북경중앙희극학원 원장이 서효종(徐曉鐘)이라는 사람입니다.

    1928년생인데요, 모스크바에서 6여 년간 유학한 연출자로 상당한 파워가 있

    었습니다. 더구나 북경중앙희극학원이란 곳이 연출가와 배우를 키워내는 학

    교니 제자들이 전국적으로 퍼져있고. 중국 내에서 신망이 대단합니다. 그 때

    만 해도 중국 경제가 지금만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예총 같은 문련(文聯)의 간

    《제3세계연극제》

    《베세토연극제》 - 한 · 중 · 일 삼국의 연극인들이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는 공연예술축제로 세 나라의 현대연극 교류를 목적으로 한다. 1994년 처음 개최되었으며 서울, 베이징, 도쿄 세 도시에서 번갈아 해마다 열리고 있다. 한편 한중일 합동공연도 제작하고 있는데, , , ,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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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국제

    교류

    부가 거의 마오쩌뚱 혁명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이니까 사회적 발언권도 셌

    죠. 결국 북경에 가서 서효종 선생을 만났습니다. 문련 건물 맨 꼭대기에 식당

    이 있는데 그 곳에서 저녁을 하면서, 내가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 근세사를

    봐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비극은 곧 동양

    의 비극 아닌가. 이런 관계 속에서 과거에 우리가 당한 침략은 우리나

    라가 약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틀림없지만, 연극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를 단순히 역사로 바라보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연극을 통해서 상대를 진실로 이해하려는 태

    도를 찾아야할 것이다.’ 서효종 씨는 내 애기를 듣자마자 심각한 표정이 되

    어 일어나더니, ‘지금까지 미적거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안하다.

    우리도 하겠다. 첫 단체는 중국 최고의 단체인 중국 북경인민예술극원을 보내

    겠다’ 하더군요.

    반면 일본은 ITI가 약해요. 일본 ITI와 이 얘기를 했는데 우리처럼 짜임새가 있

    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들보다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더 조직적으로 잘 하죠.

    그래서 일본 ITI랑 협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즈키 다다시 씨를 만나서 취지를

    말하니 즉석에서 찬성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첫 행사를 치르게 되었는데 1994년 서울의 예술의전당에서였습니

    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연극 를, 스즈키 다다시의 을, 한국은 손진책 연출의 과 오태석 연출의 를 공연했습니다. 스즈키 다다시는 런던공연을 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와

    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국수호의 무용 프로그램을 더했죠. 우리나라는

    연극 쪽과 무용 쪽이 상당히 친한데, 중국과 일본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 번도 베세토에 무용을 가져온 적이 없습니

    다. 중국에서는 우리에게 꼭 무용단을 데려와야 하냐고 그럴 정도였

    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개방적이죠.

    거창하게 시작을 한 건 다 타이밍 덕이었지요. 그 때 일 년 후배가 서울시 부시

    장 김의재(金義在) 씨였는데, 동창회에서 만났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습니다. ‘내년이 서울정도(定都) 600주년 되는 해인데, 삼국이 모여서

    행사를 하고 싶다. 길이 없을까요?’ 그는 이 행사의 뜻을 즉시 이해하더군요. 그

    의 노력으로 예산을 만들 수 있었지요. 거기에 우리 대학 동기, 연극을 좋아하

    는 한완상 씨에게 대회장을 부탁했어요. 스폰서로는 현대그룹을 끌어들였어

    요. 착착 진행된 겁니다.

    그런데 세 도시를 어떻게 묶으면 좋을까 곤란했어요. 북경 서울 도쿄인데, 베

    세토, 세베토, 토세베 등 다 따져봤는데 어감이 베세토가 제일 나았습니다. 거

    기에 알파벳순으로도 베이징 서울 도쿄인 거예요. 그래서 베세토가 되었죠.

    제1회 《베세토연극제》팜플렛(1994) 《베세토연극제》창립의 주역들(왼쪽부터 서효종, 김의경, 스즈키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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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베세토연극제》는 매년 세 도시를 돌아가면서 개최하는데 개최국이 프로그램

    을 조금씩 다르게 해요. 그 중에서도 2000년 연극제에서 을 일본, 중

    국, 한국이 공동으로 제작한 적이 있는데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봐

    요.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세토는 또 다른 매머드 행사로 이어진다. 그가 탄생시킨 가장 거대한 축제

    인 ITI세계총회 및 97년 《세계연극제》 가 그것이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

    렸다. 그가 한국 ITI 회장을 맡고 있을 때 유치했다. 25개국 40여 개 공연단체를

    포함해서 74개국에서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예산만 37억 원이 소요된 이 축제

    가 우리 공연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는 ‘초대’자가 붙은 직책을 많이 지낸 인물이다. 국립극장 공연과장, 서울

    시립극단,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베세토연극제》, 실험극장 등이 모두

    그렇다. 그런 한편으로 기록을 중시한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기록이 쌓인

    다. 2001년 창립한 공연문화산업연구소는 아예 가장 중요한 일이 기록과 보

    존이다.

    “기록과 관련해서도 내가 ‘초대’가 많죠. 1997년 초대 서울

    시립극단을 맡았을 때 만든 프로그램 겸 잡지가 『시민연극』이었습니다. 일반

    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만들 때 배우들 사진만 크게 넣는데, 나는 공연에 대

    한 이해를 위해 작품의 백그라운드, 리뷰, 차기공연에 대한 정보 등을 넣어서

    책으로 만들었지요.

    지금 공연문화산업연구소를 운영하는데, 우리 연극인들이 기록에 대한 열정

    이 없다는 것과 극단 경영에 대한 과학성이 없다는 것, 그리고 연극계에 할 일

    이 많은데 모두가 공연에만 매달려 있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연극인이, 특히 지방 연극인이 오랫동안 연극에 일생을 바쳤는데 내게 남은 게

    뭐 있어,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하나하나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고 본 겁니다.

    나는 역사적인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예를 들면 공연할 때 국

    내 박사급 논문을 총 망라했고, 한국에서 셰익스피어의 공연 목록을 쫙 뽑거나

    서울시립극단 시절 만든 프로그램 겸 잡지 『시민연극』

    97년 《세계연극제》 - 1997년 9월 국제극예술협회 제27차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면서 이 시기에 맞춰 연극과 무용을 포함하는 세계연극제, 세계마당극큰잔치, 서울연극제, 베세토연극제, 창무국제예술제, 세계대학연극축제 등 대규모 연극제와 부대행사가 열린다. 국제극예술협회 총회는 2년마다 회원

    국에서 개최되고 있는데, 세계연극제가 함께 열린다. 97년 세계연극제(집행위원장 김의경)에서는 45일간 25개국이 참가한 140여 편의 공연을 선보였다. 미국 라마마 극단의 , 일본 지진카이의 , 신주쿠양산박의 , 캐나다의 등이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과천에서 처음 열린 세계마당극 잔치도 성공을 거두면서 과천마당극축제(현재 과천축제)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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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류

    했죠.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그 시대의 연극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는 연극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우리 연극계에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바빠서 하지 않는 일들을 골라서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작자 30년 대차대조표

    현대극장 출발로만 계산해도 예술경영자로서의 그의 삶은 30년이 넘었다. 게

    다가 그가 제작한 공연들은 규모나 장르 면에서 부침이 심한 분야다. 그가 내

    리는 자체결산은 어떨까?

    “뮤지컬을 많이 제작했으니 김의경이 떼돈을 벌었다는 사

    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제작한 공연이 크게 재미 본 것도 별로 없

    지만 엄청나게 깨진 것도 없습니다. 한번 제작한 공연은 계속 횟수를 늘리며

    공연하니까 처음에는 손해를 보지만 최종 결과는 그렇지 않죠. 전국 안 찾아

    간 데가 없습니다. 근로청소년 대상으로 공단(工團)을 찾아갔고 당시 내

    무부와 정주영 씨 도움으로 농 · 어 · 탄광촌 방문공연 프로그램을 만

    들어 다녔지요. 그러니 총관객수는 엄청났죠. 언론사들을 끌어들인

    것도 주효했죠. 방송국 스팟 홍보를 도입한 게 나부터인데, 큰 공연은

    40, 50회 스팟을 내보냈습니다. 내가 방송 쪽에서 일한 것이 도움이 됐

    겠지요. 덕분에 이 극단 사무실 하나 남았습니다. 대신 내 집은 없습니다. 사

    무실도 은행 빚이 좀 있으니 온전한 재산은 아니지만...”

    그의 물질적 대차대조표와는 달리 제작자로서는 길고 굵은 흔적을 남겼다. 극

    단과 연극제작에 경영과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공연을 통해 더 강해진

    수백 명의 연극인을 배출했다. 전국의 모든 연령대를 관객으로 삼은 그의 기획

    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먼저 세계와 보조를 맞추

    었고 오늘날 공연예술시장을 독식하는 뮤지컬과 음악극 분야에는 그가 놓은

    주춧돌이 건재하다.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현대적 의미에서

    프로페셔널한 제작자 1호로서 손색이 없다. 더욱이 그는 아직도 현장을 지킨

    다. 1960년대 그와 그의 동료들이 내세운 ‘직업연극’에의 꿈은 아직도 그의 가

    슴에 살아 있다.

    현대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공연

    이승엽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 교수로 축제와 관련해서는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2007-2009)와 《하이서울페스티벌》(2010-2011) 예술감독 등으로 일한 인연이 있다.

  • 40 41

    강준혁

    소극장 운영

    문화프로젝트 컨설팅

    축제

    문화예술 기획경영 아카데미

    국내 최초 음악캠프

    세실극장 개관 작업

    전속단체 없는 소극장, 공간사랑

    비주류 공연 정기 프로그램

    극장의 교육프로그램

    인력은 최소화 하되, 프로그램은 전문극장

    예술의전당 프로그램 매뉴얼 소위

    연기자 교육, 아리아카데미

    스튜디오 메타와 문화프로젝트 컨설팅

    축제의 시대가 시작되다

    《아비뇽페스티벌》 한국주간

    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 다움아카데미

    문화복지 정책 1호, 문화의집

    《나담문화축제》,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문화 뿌리찾기

    20세기와 21세기를 잇다

  • 강준혁

    소극장 운영

    문화프로젝트 컨설팅

    축제

    문화예술 기획경영 아카데미

    043

    강준혁은 1947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강갑문은 음악애호가

    이며 가족들이 모두 그렇다. 강준혁의 바로 윗 형인 강준일은 서울

    대학교 물리학과 졸업을 얼마 앞두고 동생과 같은 해에 음대에 입학

    해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강준혁은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자 바로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고1 때는 경희대

    학교 음악콩쿠르 관악부수석, 고3 때는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콩쿠르에서 수석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는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

    과에 입학한다.

    대학 입학 후 금난새를 비롯해 고교시절 음악친구들이 많아 음대에

    서 살다시피 하면서 여름 겨울 음악캠프를 조직하게 되고 이것이 계

    기가 되어 ‘서울음악학회(SMA)’가 자리잡게 된다. 이후 1977년부

    터 10년 간 소극장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일하면서 사물놀이, 공옥

    진의 1인 창무극, 무속굿제 등 전통예술을 현대 공연문화와 접목하

    는 다양한 공연 기획과 제작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이외에

    도 다양한 현대 공연예술을 소개했다.

    1988년 공간사랑을 떠나 스튜디오 메타 혹은 개인 작업으로 《춘천

    인형극제》, 《안동탈춤페스티벌》, 《전주세계소리축제》, 《세계평

    화축전》 등 대표적인 문화예술축제를 만들었으며 1998년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주간 예술감독으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했다. 한편

    같은 해 (사)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를 창립하고 다움아카데미

    원장을 지내면서 문화예술기획 교육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00년 추계예술대학교 예술경영대학원 원장을, 2004년부터 현재

    까지는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원장으로 있다.

  • 044

    강준

    혁 ●

    소극

    장 운

    영 문

    화프

    로젝

    트 컨

    설팅

    축제

    문화

    예술

    기획

    경영

    아카

    데미

    045

    이미 알려져 있듯이 강준혁은 1977년 개관한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수많은 프

    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이후 그는 스튜디오메타를 설립하고 문화예술

    분야 기획컨설팅을 독자적인 영역으로 전문화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축

    제의 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춘천인형극제》를 시작으로 수많은 축제를

    기획하고 만들어왔다. 그리고 다움아카데미, 추계예대 예술경영대학, 성공회

    대 문화대학원 등을 설립부터 이끌며 기획경영 교육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삶을 일별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문화예술기획의 전개라 할 것이다. 그

    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문화기획자 1호’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그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는 일을 시

    작하지만, 이후 그 일은 뚜렷한 하나의 영역이 되고 많은 이들이 그 일에 뛰어

    든다. 그가 ‘문화기획자 1호’라 불리는 이유는, 그가 ‘처음’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의 맨 앞자리에서 물꼬를 터왔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 음악캠프

    강준혁 선생은 상당히 오랫동안 음악가를 꿈꿨다. 고등학교 때는 전국음악콩

    쿠르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주위에서도 모두 음악가가 되려니 으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1966년 대학은 미학과로 진학한다. “순수한 학문에 대한 막

    연한 동경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생활 내내 선생은 거의 음대에

    서 살다시피 했다. 학교생활만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금난새와

    는 연주단체 메아리를 만들어 연주를 다니고 1968년에는 음악캠프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의 음악캠프가 2년 후 서울음악학회 로 발전하였고 지금까지 일 년

    에 두 번씩 열리는 캠프가 운영되고 있다.

    “처음 계획은 서울 농대 기숙사에서 하는 것이었다. 그런

    데 학교에서 허락을 안했다. 여름방학도 다 끝나갈 즈음 다시 궁리를 하다가

    매형의 은사이신 원주에 계신 장일순 선생께 의논을 드렸다. 장일순 선생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지학순 주교에게 말씀드리니 지 주교께서 아직

    문도 안 열었던 가톨릭센터를 쓰라고 허락하셨다. 그래서 갑자기 준

    비해서, 음악캠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90여 명이 왔는데, 처음 있

    는 일이니 첼로 전봉천, 바이올린 양혜엽 선생이 지도교수 격으로 왔

    다. 그때 박은성(전 지휘자협회 회장) 선배가 4학년이었는데 지휘를

    맡아 오케스트라 연습을 했다. 강좌도 하고, 좀 엉성했지만 열흘 정도

    재미있게 했다.”

    김소연

    연극평론가

    서울음악학회 - 1968년 창립된 서울음악학회는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생이었던 강준일, 금난새, 임현정, 강준혁 등 젊은 음악인들의 정기적인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서울음악학회는 매년 여름음악캠프(‘SMA 음악캠프’)를 열고, 공간사랑의 ‘실내악의 밤’ 프로그램에 참여해 실내악 운동

    을 펼친다. 70년대까지 우리나라 음악은 서양 음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교향악단의 외형적 포맷에 치중했다. 그러나 서울음악학회는 연주자 개인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소규모로 진행돼 무대와 객석이 일체감을 느끼기에 용이한 실내악을 보급한다. 서울음악학회의 활동은 서울쳄버오케스

    트라의 창단(1978년)과 서울바로크합주단의 부활 등과 함께 80년대 실내악에 대한 관심을 국내에 싹트게 했다.

    서울음악학회 《협주곡의 밤》 공연 리플렛(197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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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

    “초기에는 항상 원주에 내려가서 했다. 하루는 장일순 선

    생의 동생이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음악선생을 통해 학생을 하나 데려

    왔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고. 그때 선생님이 데리고 왔던 학생이 박종서(작

    곡)이다. 그 때쯤 원주에서 학생이 오면 맡아 가르치기도 했다. 박종서(작곡),

    정치용(지휘) 등 우리 캠프가 작은 씨앗이 되어 원주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이

    들이 계속 나왔다. 캠프에서 배우고 학교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서울음악학회

    에 와서 캠프를 다니고 그랬다. 그때는 지휘과 같은 곳이 없었으니까 젊은 친

    구들이 우리 캠프 오면 지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결국 그 사람들이 원주시립

    교향악단을 만들고 지휘자가 되었다.”

    세실극장 개관 작업

    그는 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다니는 것도 아닌, 학림에서 음악 듣고 서울

    음악학회 친구들과 연주회를 하면서 20대 청춘을 통과해간다. 그 와중에 잠시

    세실극장 개관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1975년 가을쯤으로 기억하는데, 하루는 동아일보 사업부

    장으로 퇴임한 임석규라는 분이 서울음악학회에 찾아왔다. 그 분이 퇴직금으로

    공연장을 빌렸는데, 운영할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 자기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서울음악학회가 새로운 오케스트라 운동으로 신문에도 나고 그랬는데,

    보고 찾아온 거다. 오케스트라의 기획 일을 내가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기획

    이라는 말 자체를 안 쓰던 시대지만, 내가 하는 게 좋겠다 해서 가게 되었다.”

    조명, 음향 설비부터 객석 번호표를 붙이는 것까지 부족한 돈 때문에 친구들

    손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공연장 설비를 마치고 개관공연까지 치렀지만, 결국

    운영자금이 없어 대관극장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고 극장 프로그램을 운영할

    형편이 안 되었다.

    “온갖 고생 하면서 극장을 만들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나와

    야 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하지만 “결국 잘 된 일이었다”. 세실을 그만두고 다시

    학림과 서울음악학회로 되돌아온 그는 그해 겨울, 김수근 선생을 만나게 된다.

    “겨울음악 캠프를 마치고 돌아와 1월초에 김수근 선

    생이 만나자고 연락을 하셨다. 찾아갔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더

    라. 면접이었던 셈인데, 당시에는 그런 줄도 몰랐다. 선생이 ‘공간’의 지

    향이 무엇인 것 같으냐 물으시기에, 현대와 전통의 조화인 것 같다고 했

    더니 맘에 들었던 듯하다. 그때 여전히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지

    금 당장 일할 수 있겠냐 하고 물으시더라. 대학을 안 끝냈다고 했더니, 그래도 일할

    수 있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끝나고 공간에 들어갔다.”

    전속단체 없는 소극장, 공간사랑

    “1977년 1월초부터 일을 시작해서 공간사랑 은 4월 22일

    에 개관했다. 공간그룹의 메인은 건축이라서 당시 공간사랑 소극장은 획기적

    공간사랑 - 1977년 4월 22일 개관한 공간사랑(空間舍廊)은 건축그룹인 ‘공간’이 사옥을 건축하면서 만든 소극장이다. 종로구 원서동 219번지 공간사옥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건평 60평 중 40평이며 무대는 8평, 150석 정도의 유동적인 객석을 갖추었다. 공간사는 이미 종합문화예술지를 표방

    하는 『공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고, 72년부터 『공간』 독자들을 위한 현대음악 감상회와 한국 전통예술 초청 공연, 각종 전시회를 마련하여

    24회의 예술발표회 및 감상회를 가져왔다. 공간사랑은 그러한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지어졌다.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는 가변형 구조로 크기가 다른 680개의 나무 상자를 계단식으로 포개어 객석을 대신하였고 공연의 형태에 따라 무대나 객석의 배치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건물 벽돌을 헌 벽돌로 구축하여 대사의 정반사를 피하였고, 우수한 조명과 음향시설 또한 제한된 극장 공간을 확대하여 공연예술의 입체적인 효과를 얻

    을 수 있도록 갖추었다. 또한 ‘사랑’이라는 명칭처럼 극장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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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었다. 블랙박스형 극장으로, 가로세

    로 45센티, 높이 15센티, 30센티의 박

    스들을 조합하여 객석을 만들었다. 그

    러니까 객석이 아닌 부분은 무대가 되

    는 거다. 승효상(건축가)의 아이디어

    였다. 승효상은 나보다도 어렸는데,

    일찍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 아

    이디어를 많이 냈다.

    김수근 선생이 워낙 최고를 좋아하신 분이어서 설비도 최고였다. 음향은 정말

    좋은 게 들어와 있었다. 그 작은 극장에 슈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주문해놨

    더라. 정말 놀라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명기 배튼을 레일로 움직이게도 해

    놓고. 그런데 디머도 금방 망가지고 조명은 좀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작은 공

    간이지만 굉장히 시설이 뛰어난 극장이었다.

    박용구, 황병기, 강석희 선생 등이 공간 그룹의 자문위원이었는데, 개관공연을

    할 때 도움을 많이 주셨다. 당시만 해도 나는 전통예술을 잘 모를 때여서 황병

    기 선생이 많이 도와줬다. 4월 22일부터 8일 동안 개관기념공연을 했는데, 전

    통예술의 밤 나흘, 현대음악의 밤 나흘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내가 ‘한국문화기획사’를 강의 할 때에 공간사랑은 강조

    해 이야기한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극장들이 생겨나는데, 드라마

    센터, 카페 떼아뜨르, 에저또로 시작한 삼일로창고극장, 극단 실험극

    장의 실험소극장 등이 있었다. 그러니까 연극 하려고 모여 있는 극단

    들이 자기들이 공연할 공간이 없으니까 소극장이건 카페건 공간을 점

    유해서 공연장화 하는 것이 70년대 중반 극장들 이었다. 그런데 공간

    사랑은 공연단체 없이 공연장을 만들어놓은 거다. 그러니 어디선가

    공연할 사람을 데려오든가 직접 돈을 들여 제작해야 했다. 기획 제작

    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공간사랑의 태생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단체에서 만든 공연장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예술

    가들이 식구같이 항상 여기 있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람들

    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일 년 내내 사람 만나서 커

    피 마시고 떠드는 일이었다. 학림생활의 연장이다. 단, 공간사랑에서는 양악뿐

    아니라 연극, 국악 하는 사람들까지 폭넓게 만났다. 그때 황병기(가야금연주

    자), 심우성(민속학자), 최종민(동국대학교 교수) 선생을 자주 만났다. 그냥 차

    마시러 얘기하러 오는 거다. 사랑방 오듯이.”

    공간사랑에서 일했던 10년 동안 따로 사무실도 없었던 당시 공간사랑 1층 카페

    가 곧 그의 사무실이었다. 커피마시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곧 그의 가장 중요

    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사람과 친해져서 다음번엔 뭘 하겠다’는 생각

    으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소에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

    지고, 그걸 통해서 자연스럽게 공연이건 뭐건 활동이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

    다”고 생각하는 세대여서,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하지 않으면 시간의 손해”인

    것처럼 생각하는 요즘 세태가 불편하다.

    리플렛 중 공간사랑 극장 소개

    70년대 소극장 운동 - 69년 카페 떼아뜨르와 에저또 소극장이 개관하면서 70년대 내내 다양한 소극장들이 문을 연다. 살롱드라마를 표방한 카페 떼아뜨르의 활동은 설파음악실, 까페 파리 등의 다방극장으로 확산되었고, 극단전용극장으로는 에저또 소극장에 이어 실험소극장(1973), 민예소극

    장(1974), 중앙소극장(1975), 삼일로창고극장(1976)이, 대관극장으로는 연극인회관(1974), 세실극장(1976), 공간사랑(1977) 등이 개관한다. 이중 공간사랑은 다양한 프로그램 기획을 선보인다. 70년대 소극장들은 거의 민간에 의해 개관한 것으로 60년대를 거쳐 7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

    지 공연장 난을 겪으며 정부에서 마련한 대극장 중심의 단기 공연을 해오던 민간단체들은 비로소 소극장 중심의 공연체제를 갖추게 된다. 전용극장

    을 지닌 극단들은 행사성 공연에서 벗어나 장기공연 체제로 전환, 레퍼토리 시스템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외 극단들도 소극장이 증가함에 따라 공

    연 날짜와 횟수를 늘려 공연하였다. 극단, 공연작품, 공연회수가 증가하면서 관객 확대도 함께 이루어져 , 등과 같

    은 흥행작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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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예술과 소극장의 접목

    ‘사물놀이’와 공옥진 ‘창무극’의 발견

    “진정성 있는 사람들은 계속 만나다보면 자연스럽게 일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이가 심우성 선생이다. 심 선생은 공주 출

    신의 부잣집 자제였는데, 선친께서 남겨주신 재산을 민속학 답사한답시고 거

    의 탕진했다. 물론 그래서 좋은 것을 많이 수집하고 나중에 공주민속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필드를 잘 아시는 분이었다. 공간사랑을 자주 드나들며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했다.”

    심우성 선생의 소개로 민속악회 시나위의 정기연주 프로그램으로 기획한 것이

    1978년 2월에 시작된 《공간 전통예술의 밤》이었다.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사

    물놀이’가 탄생하게 된다.

    “첫 프로그램에는 시나위 합주, 웃다리 풍물이 있었고 마

    지막은 채희완(무용평론가) 씨의 허튼춤이었다. 웃다리 풍물은 장고 김덕수,

    꽹과리 김용배, 징 최태현, 북 이종대 이렇게 넷이 연주했다. 최태현과 이종대

    는 타악 연주자가 아니고 해금과 대금 연주자이다. 웃다리 풍물은 중부지방의

    농악가락이다. 본래 농악대가 대열을 이루어서 연주하던 것인데 그 가

    락을 소극장에서 공연한 것이다. 정말 멋있게 했다. 1978년 2월 22일,

    23일 이틀간 공연이었는데, 연주자들도 너무나 좋아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전문공연장에서 이런 식으로 공연한 것이 처음이었다. 첫 번

    째 공연이 끝나고 웃다리만 할 게 아니고 아랫것도 해보고 다 해보자,

    하고 합의가 됐다. 그래서 그 다음에 삼천포 12차 농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전문적인 타악 주자가 들어와야겠더라. 그래서 이광수, 최종실

    이 들어왔다.”

    전통예술을 소극장이라는 현대적 극장공간에 접목시키면서 ‘사물놀이’라는 새

    로운 장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또 하나의 예가 있으니, 바로 공옥진의

    창무극 이다. 이 역시 그가 말했던 그의 작업방식, ‘카페에서 일 년 내내 사람들

    만나서 떠드는’ 중에 시작된다.

    “1978년 개관 후 1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정병호 선생이 영광에 곱사춤을 잘 추는 사람이 있는데 부르면 어떠냐고 꼬드

    기는 거다. 곱사춤이 여흥거리로는 괜찮지만 개관 1주년 극장프로그램으로 곤

    공간사랑에서 탄생한 사물놀이의 첫 공연(1978. 2)

    공간사랑에서 공연된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매일경제 1982. 2. 19)

    공옥진 창무극 - 공옥진은 1933년 남도인간문화재 1호인 공대일 명창의 딸로 태어났다. 전남 영광에서 춤과 소리를 연마해오다가 공간사랑에서 첫 선을 보인 창무극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공옥진은 , , 등의 일부분을 곱사춤과 동물춤 등으로 창의적 해석해 보여주

    며 ‘천 가지 표정’이라 일컬어지는 뛰어난 표현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전통춤과 민중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당시의 상황도 영향을 미친다. 이후 서울과 전국 각지를 비롯해 세종문화회관의 단골 레퍼토리로 공연되었고, 미국 링컨센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1인 무대를 갖는다. 소외된 이들

    의 한풀이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공옥진의 창무극은 창작이란 이유로 다소 늦은 2010년에 무형문화재지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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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너무 재주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일단 개관 1주년 프

    로그램에 넣었다. 드디어 공연 날, 아무도 없는 아침에 와서 공옥진 씨가 리허

    설을 하고 있었다. 살풀이를 추는데, 내가 전통공연을 많이 보진 못했지

    만, 살풀이를 정말 제대로 추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병신춤으로 넘어가더라. 앞곱사, 뒷곱사 춤을 추고 또

    의 맹인잔치를 소리와 몸짓을 섞어서 하더라. 제대로 다듬어 올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