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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대만에서의 만화:사회사의 관점에서 陳仲偉진중위 (대만 펑지아대학 교양학부 객원 부교수) 번역:魏俊崎위준기(대만 동해대학 일본어학과 대학원 원생) 적요 1.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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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대만에서의 만화:사회사의 관점에서§„중위.pdf · 2011-11-15 · - 1 - 대만에서의 만화:사회사의 관점에서 陳仲偉진중위 (대만 펑지아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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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의 만화:사회사의 관점에서

陳仲偉진중위

(대만 펑지아대학 교양학부 객원 부교수)

번역:魏俊崎위준기(대만 동해대학 일본어학과 대학원 원생)

적요

본문은 사회사 관점에서 대만 만화가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 등 여러 면에서 발

전을 탐구해본다. 만화는 텍스트와 문화로서 전세계 다양한 곳의 지지로 발전해왔다.

이와 동시에 만화의 세계화와 지방화는 만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국가와 창작자가

주의해야 할 문제이다: 지방화로 만화는 그 지방의 생활, 정치와 문화 등 다양한 면

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화로 만화는 문화교류와 대화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

문은 만화와 대만 회사와의 다양한 관계를 정리하고, 만화의 대만에서의 정치적인

갈등을 검토하며 문화와 표현상의 역사와 제한을 살펴봄 으로써 대만 만화가 발전할

가능성을 찾는다.

키워드: 대만 만화, 만화 문화, 제한과 가능

1. 질문

지방 만화의 발전을 탐구하려면 그 만화의 기원, 중요한 대표적 창작자, 작품 그리

고 그 특징이 무엇인지 등의 문제에 주목한다. 대만 만화를 인식하기 위해서라면 이

상의 문제는 이미 지금의 대만 만화에 관한 논술에 그 답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후경(back ground)에 있기 마련이고, 스테이지에서 중요한 전경

(foreground)에 서는 일은 거의 없다. 첫 번째는 대만회사는 어떻게 만화를 대하고

있는가. 두 번째는 대만에서 의 만화가 ‘대만 만화’라고 할 수 있을 때부터 대만 만화

는 일본, 중국 만화 작품에 많이 영향을 받았는데, 영향을 받은 방식과 깊이가 다르

다. 일본과 중국 만화의 대만 만화에 끼친 영향은 중요한 것은 갖지 못한 채 단순히

한 마디로 해석되거나 또는 정치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그 중요성이 배제되었다.

만화의 탄생에는 창작자, 개인의 생각과 도화의 풍격이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 대

해서는 다수의 만화 평론과 연구가 오랫동안 주목되었다. 그러나 창작자에 관한 것

외에 사회문화 전체가 만화에 대한 중요한 관련과 교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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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어서 논하지 않기로 했다. 또는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만화는 단순히 도화나

텍스트가 아니다. 사회 속 하나의 문화이다. 요컨대 만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사

람의 천재 창작자가 있어서가 아닌, 그 특이한 천재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만화 창작의 붐이 비로소 성립된다. 즉 필요한 것은 단지 만화를 그리고 싶은 사람

들만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그린 만화를 보고자 하는 독자도 많이 있어야 한다. 덧

붙이자면 만화의 성공에 필요한 것은 만화를 창작 하는 사람들과 만화를 보는 사람

들뿐 아니라, 만화 자체의 발전, 제작과 의의 직시 외에 만화가 독자와 사회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초기 대만 만화

(1)초대의 대만 지역만화가

대만 만화의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주로 1945년부터 발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1945년 전에 대만 만화는 이미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이 상

황이 더욱 분명해졌다

洪德麟홍덕린(1998、1999、2000、2003)는 대만 초대 만화가가 일본 만화를

읽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당시의 대만 만화 창작자 는 일본

잡지에 등장했다. 예를 들면, 陳光熙진광희는 1925년 《KING》창간지 에서 응모 상

금 20엔을 받았다. 1930년대 어린이만화가 일본에서 유행 했었다. 陳定國진정국、王

朝基왕조기、陳光熙、洪晁明홍조명、許丙丁허병정 등 대만 만화가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 일본 당시의 유행 만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다. 당시 100명이

넘는 청소년은 일본 ‘신만화파 집단新漫画派集団’이 주최한 통신교육에 참가하였다.

陳光熙과 陳家鵬진가붕 등 대만 만화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 만화가들도 그 수업

의 일원이었다. 葉宏甲엽굉갑은 일본에서 천류미술학교川流美術学校에 다녔다. 陳定

國은 일본 도쿄태평양미술학교日本東京太平洋美術学校에 다니면서 일본 만화의 기술

과 생각의 진수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대만 만화가는 대만의 자기 지역에 대한 의식

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는 그 지역의 색이 넘쳐나 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일본의 대만 식민지통치도 끝났다. 1945 년 11월

15일 신고만화집단新高漫畫集團과 黃金穗황금수, 鄭世璠정세번 등의 협력으로 대만

광복 후 처음으로 종합잡지 《신신新新》이 창간되었다. 《신신》에 실은 시론時論

만화에는 당시 대만사회 전 후의 혼란, 빈부차, 물가 급등 과 정부와 기업과의 공모

등의 문제를 반영되었다. 이는 당시의 대만 만화 와 대만 역사의 중요한 증거가 되

었다. 그러나 경비와 당시의 자원부족, 환경이 나쁘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압력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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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1947년에 1월호가 출판된 이래로 휴간되었다. (李闡이천 1998, 洪德麟 2003)

전후 최초로 민간 그리고 만화를 실은 《신신》잡지는 대만 만화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신신》에 실렸던 만화 텍스트와 표현의 형식과 내용으로 보면 모두가

서양의 풍자화와 평론 만화와 비슷하게 보였다. 《신신》이후에 강렬한 정치 풍자성

을 가진 만화가, 그 중에는 신문에 실린 만화가 대표로 주류 만화의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국민당 정부가 중국 출신의 만화가를 데려왔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李闡

(1997)은 1949년 국민 정부가 대만으로 이주한 후, 남경南京《중앙일보中央日

報》가 타이페이에 복귀 간행 했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신생보新生報》,

《중화일보》와 《青年戰士報청년전사보》 등의 신문이 만화 발전의 근거지가 되었

다. 당시의 정치 만화의 주제는 거의 「반공항아反共抗俄」(공산당과 러시아에 대

항, 전복 시킨다)라는 큰 목표였다.

한편, 이 기간에 신문에 실렸던 정치 만화가 반영한 것은 문화발전이 정치에 영향

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국민정부가 온 이후로 성립한 정치 만화

를 말한다. 대만 초기의 정치 만화와 항전抗戰만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이 때문에 서

양의 풍자화와 창작의 본질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어, 역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정치 풍자화는 정치에 대한 불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당시 대만의 정치 만화의 대부분은 정치에 의해 조정 당하여 정치에

주도권을 잡혔다.

(2)만화 주간지와 어린이 만화의 출현과 유행

그러나 초기의 대만 만화는 신문과 잡지의 정치 풍자화만이 아니다. 洪德麟(1999)

는 당초의 대만 만화 종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에서

온 만화가는 평론적인 풍자 만화와 유머 만화를 중심으로, 대만의 지역만화가는 어

린이 만화와 삽화를 주로 그렸다.

대만 지역만화가와 정치 만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대륙에서 온 만화가와의 방향

성은 크게 다르다. 대만 만화가는 주로 어린이 만화 영역에서 발전했다.

1953년 당시의 대만 잡지는 257종류가 있었으며, 그 중 1/3이 만화를 실었다. (楊

孟瑜양맹유 1988) 이러한 만화는 대부분 어린이 만화였다. 1953년 《學友학우》발

행은 어린이 만화에 있어 중요한 기초가 되었으며, 잡지에 만화를 싣는 만화 붐을

가져왔다.1) 그 후 만화 전문지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1958년 이후 대만의 만화잡지

가 20종류가 넘었다.

1) 당시의 잡지 《학우學友》의 매출은 매 분기 2만 권 이상을 기록했다.(辛廣偉신광위, 200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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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말 다양한 만화잡지에 의해 초래된 만화 붐에 이은, 1960년대 만화 호황

으로 잇따라 데뷔한 신인들은 당시 만화잡지에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만

화형식인 ‘단행본’이 등장했다. 洪德麟(1998、1999、2003)는 당시에도 만화출판사

역시 줄지어 개업을 하였다. 예를 들면 毋忘在莒무망재거, 新臺신대, 志成지성, 太子

태자, 宏甲굉갑, 藝昇예승, 集英집영, 義明의명, 文昌문창, 南昌남창 등의 출판사가 출

판 전쟁에 합류했다. 그 때 데뷔한 신인 은 대부분 사오십 세로 육칠십 세에 출세했

다. 이를 동경하여 많은 사람들 이 만화업계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 만

화를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제자가 된 사람이나 중학교도

나오지 않고 업계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만화가를 목표로 하는 신인이 만화가 사

무 소로 모여들었다. 가령 당시의 葉宏甲은 20명 이상, 陳海虹진해홍에도 4명을 제

자로 삼았다. 그 밖에도 洪義男홍의남, 淚秋누추,傑祥걸상, 范藝南범예남, 蔡志昌채지

창, 許松山허송산, 王朝基、許華良허화랑 등 많은 만화가가 기상천외한 무협, 문예

만화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런 호경기도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

화는 곧바로 정부의 심사를 받았다.

3.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과 해적판 일본만화

(1)<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編印連環圖畫輔導辦法>、그 배후의 논리

대만 만화 발전을 둘러싼 대부분의 논술에서, 1966년 실시한 <편인연환 도서보도

판법>이 1945년부터 60년대까지의 대만 만화 발전을 저지 했다고 지적했다. 이 때

문에 대만 만화의 만화 창작의 침체는 20년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현재 대만 만화가

일본 만화와 경쟁할 수 없는 주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대만의 만화계는 <편인연환

도서보도판법>을 「만화 심사제도」라고 불렀다. 이것도 만화계가 이 제도에 대한

태도를 보이고 이 제도의 운영과 영향을 언급했다.2)

1962년 9월 27일, 대만의 행정원 제783차 회의에서 <편인연환도서 보도판법>을

통과시켰다. 그 해 11월 6일과 7일에 내정부와 교육부에서 공표하고 실시하였다. 심

사는 교육부 「국립편역관國立編譯館」이 담당하였다. 실제로 실시한 것은 1966년에

2) 현재의 대만 만화에 관한 논술과 연구에서 보면, 일본 만화에서 대만 독자에 대한 ‘문화침략’을 우려하고 있다

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 우려의 배후에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있다. 이는 ‘심사제도’이다. 그러나 전체적

인 관점에서 대만 만화의 발전, 대만 만화와 일본 만화의 갈등을 보는 사람은 지금도 적은 편이다. 지금은 洪

德麟(1999;2003)와 陳仲偉(2006)두 사람이 대만 만화사의 논술을 하고 있는데, 대만 만화의 분석의 흐

름에서 두 사람은 크게 동떨어져 있었다. 洪德麟가 중시하고 있는 것은 ‘대만인이 그리는 만화’이며, 거기에서

대만 만화가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하고 있다. 陳仲偉는 ‘대만에서의 만화’에 착안하였다. 만화가 얼마나 사회

와 교류를 하는가, 만화 창작자와 독자는 얼마나 사회와 대화하고 있는가 등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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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집행하였다. 1967년에 업무 전체 를 「국립편역관」으로 옮겼다. 그 후 심

사하기 위해서 <국립편역관 연환 도서편인급송심주의사항印及送審注意事項>、<국

립편역관 심사연환도서보충주의 사항>、<심사집조발급판법審查執照發給辦法>、그

리고 <국립편역관 연환도서 송심정서送審程序>와 <편인급 심사연환도서 참고자

료>를 추가하여 만화의 내용, 그림의 표현, 말투, 주제, 인쇄, 편집 등을 규정하였다.

만화 심사제도에서 대만 만화에 대한 영향을 전반적으로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다.

1.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 대부분의 규정 자체에 문제점이 있다.

2.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은 만화 창작을 죽이고, 대만 만화창작의 결락을 초래

하였다.

3.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판사는 일본 만화를 도입하였

다. 그 때부터 일본 만화는 대만의 만화계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앞에서 말한 몇 가지 포인트 외에 본문은 만화 심사제도의 배후에는 더욱더 깊은

무언가가 있고,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구조가 있다고 지적 하고 싶다. 이 구조야말로

만화 심사제도를 만든 주 요인으로 지금도 대만 만화 최대의 도전인 것이다.

우선, 전체 상황을 조망해 보자. 실제로 만화는 대만 정부에 전반적으로 거부당한

샘은 아니다. 50년대와 60년대에 정부와 군대는 다양한 만화 콘테스트와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50년 군대 안에는 만화가 있었으며, 50년대 「정공간부학교政工幹部

學校」(당시의 정부가 전쟁 준비를 위하여 설립한 학교)에는 이미 만화과정이 설

립되었다. 만화가 문예에서 배제 되는 일은 사실이지만, 정치풍자만화에 한하기는 하

나 정부는 만화계를 위해 노력 하였다. 당시의 계엄령과 하얀 공포의 대만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만화 심사제도의 문제는 ‘만약 없었다면’이 없어졌다. 만화 심

사제도는 ‘반드시’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도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즉 만화

의 레이팅등급문제이다)

당시 심사된 만화는 정부가 직접 제어하기 어려워 어린이 독자를 주로 하여 시장

에 유통한 「연환도서連環圖畫」였다.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에서 「본 제도가

말하는 연속그림은 신문, 잡지, 각종 교과서 외에 각종 문자와 그림으로 스토리를 연

결하는 책이다」、「정부는 사실에 근거하여 연속그림 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고, 소

년과 어린이의 심신건강과 기타 좋지 않은 영향을 막기 위하여 이 방법을 공표하였

다」.3) 정부가 주도한 정치만화는 이 심사제도에 포함되지 않았다.4)

3) 이는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의 제1조와 제2조이다. (「총통부 공보 제1383호」에서 인용) 이하에 신문

과 정부의 공보를 인용하는 부분은 주석을 보십시오. 특히 인용을 표기하지 않는 부분과 자료는 陳仲偉(2008)

에서 인용.

4) 1948년 5월 국민정부는 또한 대만에 안 왔을 때, 교육부와 내정부는 <편인연환 도서보도판법>을 공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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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에 만들어낸 대만 만화의 두 가지 루트: 정치의 영향을 받은 풍자 화와 어

린이 만화. 이 두가지의 루트를 합치면 바로 당시 정부와 사회에 대한 주요 생각이

된다. 만화는 억압되었다. 만화의 독자가 어린이라면 더욱더 억압과 보수가 필요했

다.

이거야말로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대만에서의 만화, 오랜 기간에 걸친 문화구조

이다:「정치 풍자만화는 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주도되어, 정치와 접하는 어린이 만화

는 금지와 지도 두 가지 방법으로 관리되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대만의 만화 문화가 발전하는 중요한 기초는 좁아졌다. 즉, 만

화 행동자이다. 옛날 만화의 행동자라고 하면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만화 창작자이

다. 지금까지 만화 심사제도에 대한 불만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언급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외의 만화 문화의 행동자, 즉 독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

지 않았다. 만화 심사제도가 야기한 만화 행동자의 무력화는 단순히 창작자가 만화

를 만들지 못할 뿐 만이 아니다. 심사제도를 만들어낸 사람은 그저 그 사람이 제멋

대로 한 것으로 만화 독자(즉 어린이)를 위해 완벽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상에

빠진 이상한 세계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만화 심사제도는 출현한 이래로 지금까지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독자의 의견이다. 지금은 단지 심사에서 지도로 그 주

목적이 바뀌었을 뿐이다.

(2)대만은 「해적판 왕국」이 되고, 만화 논쟁에 직면하다

1966년부터 실시한 만화 심사제도는 대만의 70년대 연속만화 창작을 대부분 무無

로 만들었다. 그러나 李闡(1998:123-126)은 《만화미학》에서 1970년대의 대만

만화의 발전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보였다. 李闡는 70년대에 열린 대형만화전람회와

중화민국 만화학회의 성립을 들어, 정치 만화가 성황하고 있는 점도 지적하였다. 실

제로는 70년대의 대만 만화 쇠퇴와 앞에서 말한 만화 이벤트와는 모순이 없다. 앞에

서 분석한 대만 만화의 주요 발전방향을 다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시장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분명 만화 심사제도가 1970년대 초기 대만의 만화

시장을 뭉개버렸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국립편역관 관리자는 만화창작가 쇠퇴하자

일본 만화의 심사를 개방하였다. 문창풀판사文昌出版社가 창간하고 일본 만화를 주

로 다룬 《주간만화대왕》(이 잡지에서 대만 만화는 겨우 錢夢龍전몽룡의 《서유

기》뿐)이 대만의 만화 시장을 되살렸다. 심사 범위를 개방하자 일본 만화를 전문

으로 한 출판사가 줄줄이 생겨 났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 만화의 해적판을 출판하는

다, 이 시기의 연속도화는 「글과 그림을 사용하여 스토리 를 이어가는 책을 말했다.」 정치 풍자화도 동일하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교육부내정부 공함教育部內政部公函 예자禮字 제92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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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만) 대기업으로는 東立동립, 虹光홍광, 伊士曼이사만, 華仁화인, 遠大원대, 志明

지명, 藍宏굉람, 力群역군 등으로 수십 개의 회사가 있었다.

행정원 신문국이 행정 명령하여 행정원 교육부에 소속된 국립편역관에게 수입을

금한 일본 만화를 심사하도록 하고 심지어 통과시켜 「심정 집조審定執照」를 발행

하였다.5) 그리고 대만 만화의 창작을 심사할 때는 트집을 잡는 일이 허다했으며 많

은 만화가가 불만을 품게 되었다. (洪德麟,1999)

대만 초기의 만화가 (특히 80년대 이전에 만화가가 된 사람) 중 일본 만화를 얘기

할 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는 완전히 일본 만화의 「문화침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만화에는 성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온 외래만화는 철저하게 소멸해야 한다고. 1980년대 초에 牛哥우가에 의해

「만화청결운동」을 실시, 일본 만화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언론에서도 「아

이들에게 만화는 『독』이다」라고 「일본문화침략」의 관점에서 수 년간에 걸친 만

화논쟁이 시작 되었다.

그 후 일본 만화의 ‘성性’은 각종 매체에서 화제가 되었다. 1980년부터 1982년 사

이에는 특히 심했다. (洪德麟,1999)당시에는 만화가뿐 아니라 아동문학계에서도

일본 만화에 저항하여, 일본 만화를 「제한」하고, 국내 만화가에게 시장을 유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혼란이 넘쳐나고 규정과 논술을 중심으로 잃어버리기 쉬운 시기

를 우리들은 어떻게 볼 것 인가. 蕭湘文소상문(2000)은 만화 심사 제도가 제한했던 것

은 지역만화가의 창작이다. 심사위원에 대한 의구심과 심사과정으로 낭비한 시간과

복잡함, 이들 문제로 인하여 만화출판업은 시장에 적응할 수 없게 되고 저예산으로

번역만 하는 방식으로 일본 만화를 취급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만화가의 창작이 쇠

퇴할 뿐 아니라, 시장에는 저속하고 조잡한 만화가 넘쳐났다. 해적판이기 때문에 그

질에 대해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오락 정보와 매개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독자의 만화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다. 牛哥 등 만화가는

「만화청결운동」을 통해, 시장에 있는 일본 만화의 성과 폭력에 대한 불만과 걱정

을 드러냈고, 언론과 교육 당국의 관심을 끌었지만 해적판 만화를 막기에는 정부의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일본 만화가 여전히 시장에 돌아다녔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기에 존재한 사회적 의의는 3가지이다. 첫 번째로 공권력보다 시장이

유력하다. 두 번째 사회의 만화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인상이 깊어졌다. 세 번째로

일본의 만화 창작 스타일 보급이다.

5) 대만 정부는 1973년부터 일본문화와 상품 수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말하는 것 또한 금지되었다. 1994년이

되어서야 일본의 상품 유입을 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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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만 만화의 재기와 재추락

(1)80년대 만화 콘테스트와 잡지의 영향

1983년 1월, 敖幼祥오유상이 《중국시보中國時報》에 실은 《烏龍院오룡원》은 많

은 회사원들의 출근 전 아침식사가 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이 만화를 읽는 습관이

몸에 배는 계기가 되었다. 《烏龍院》의 유행은 화제가 되어, 《烏龍院》 주변은 잇

따라 등장하고 TV와 영화도 있었다. 이는 1950년대 무협 만화 「四郎真平사랑진

평」붐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겨우 3년 만에 유행은 끝났다. 하지

만 《烏龍院》이 가져온 창작 붐은 계속되었다. 만화 콘테스트로 데뷔한 신인은 많

이 있었다. 朱德庸주덕강、蕭言中소언중、孫家裕손가유, 柏言상언, 老瓊노경, 蔡志忠

채지충, 王平왕평 등의 만화가는 대만 신문의 유머 만화를 활성화하였다. (洪德麟,

1999)

80년대 대만 만화가 유행하게 된 주요인은 만화 콘테스트다. 가장 주요 한 콘테스

트는 1984년 중화국만화학회, 중국시보계時報系, 세화世華은행 문화자선기금회와 중

화전시대電視台 등과 공동 개최한 「73년 전국만화대뢰대 全國漫畫大擂台」와 1986

년에 중국시보계, 중시中視、통일기업, 영기백화永崎百貨와 공동 개최한 「전국만화

대뢰대」였다. 이 두 콘테스트에는 1802건 그리고 800건 이상의 투고가 있었다. 콘

테스트에는 1칸, 코너(4칸), 연속만화 등 3종류가 있었다. 두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은

참가자는 그 후 중요한 대만 만화 창작자가 되었다. 이 붐으로 신문사는 만화코너나

만화잡지를 설립하였다. (李闡, 1998, 洪德麟, 2003)

1985년에 등장한 《환락만화歡樂漫畫》는 유머 만화, 스토리 만화, 만화에 관한

정보 등 3가지를 실었다. 만화를 게재했었던 만화가는 阿推아추, 鄭問정문, 廖文彬요

문빈, 蔡志忠, 魚夫어부, 朱德庸 등이었다. 이들도 역시 그 후 대만의 중요한 만화가

가 되었다. 그 가운데 鄭問과 蔡志忠은 해외 진출도 했다. 1989년 《성기만화星期漫

畫》는 鄭問, 麥仁杰맥인걸, 曾正忠회정충, 陳弘耀진홍요, 任正華임정화, 林政德임정

덕 등의 만화가를 영입하여 스토리 만화를 메인으로 취급하였다. 그 중 많은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성기 만화》는 1991년에 폐간되었지만, 이 때 축적한 기

초는 많은 만화가가 해외진출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館林見晴관림견청(2005a、2005b、2005c、2005d)은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콘

테스트, 즉 만화 신인상으로 대만 만화 스타일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대만의 만화 신

인상은 주로 한 주최자에 의해 대형콘테스트로서 개최되었는데, 실력 있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신인들을 기용하여 새로운 잡지가 창간되거나 또는

기존 잡지에 그들의 만화가 그래도 실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미小咪만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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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같이 잡지를 통해 만화수업을 하거나, 매 호 4~6페이지에 걸쳐 독자 투고와

질문코너를 가졌다. 이것으로 대만에서도 이른 시기에 체계적인 만화 인제 양성활동

이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소미小咪만화상은 5회 개최되었다. 그 후 대만의 중

요한 만화 창작자가 많이 참가하였다. 1984년과 1986년에 열린 전국만화대뢰대는

그 당시에 상금액수도 가장 큰 콘테스트였다. 전국만화 대뢰대의 심사기준은 ‘오락성’

과 ‘상업성’보다 ‘예술성’과 ‘표현방식’을 훨씬 중요시 하였다. 이는 당시의 여론이 만

화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국만화대뢰대’에서 원했던 것은 ‘키울 신인’보다는 바로 출전할 수 있는 ‘즉전력

即戦力’을 찾았다. 또한 발행부수 몇 만 이상의 잡지에서 싸울 수 있는 강한 전력이

다. 강한 사람을 발견하여 80년대 중기의 대만 만화 출판계에 활기를 불러일으켰지

만, 상금을 줄이기 시작하고 ‘인재양성’에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문과 잡지의 공급이 줄어들어 만화 전문지만이 남았다. 반대로

‘전국만화대뢰대’가 없어 지자 《환락》, 《성기星期》도 폐간했다.

1987년 7월 15일에 1949년부터 38년간 계속된 계엄시기가 끝났다. 1987년 12월

4일 <편인연환도서보도판법>도 없어졌다. (그러나 만화를 심사, 지도하는 일은 없

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경제발전으로 국민소득은 만 달러에 가까웠다. 동시에 정치

개방과 사회의 다원화로 인하여 출판계 의 출판물 내용에서 형식과 전체적인 출판시

장은 크게 변했다.

(2)만화 판권과 단기 붐

1992년 6월, 새로운 저작권법 실시와 1993년 5월 미국이 대만을 슈퍼 301조의

우선리스트에 올림으로써 대만 만화시장은 처음부터 재조직을 꾀했다. 1992년부터

東立, 大然대연, 尖端첨단, 長鴻장홍, 青文 등 출판사는 연이어 일본의 만화 출판사와

계약하고 만화잡지를 창간하였다. 가장 많을 때는 30종류나 있었다. 동립東立출판사

도 대만 만화만을 실은 만화잡지 《龍少年》, 《성소녀星少女》를 발행하였다. 大然

의 《공주公主》도 대만 창작을 메인으로 하였다. 東立의 《보도소년寶島少年》,

《신소년쾌보新少年快報》과 大然의 《열문소년熱門少年》에도 대만 만화작품을 실

었다.

90년 초반에 많은 대만 만화가가 해외에서 활약을 펼쳤다. 鄭問의 수묵 만화는 ‘일

본만화가협회 만화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아주지보亞洲至寶」라 불리었다. 曾

正忠은 「필적마술사」라 불리었으며, 高永고영, 度魯도로는 일본에서 작품을 연재했

다. 林政德임정덕, 練任연임, 洪正輝홍정휘, 張裕群도 일본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阿推아추와 麥仁杰는 프랑스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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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만화산업이 판권화 되면서 만화 산업에서의 경제이익이 확실 해졌다.

여러 언론과 사람들이 만화의 영향력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만 있지 않다. 만화는

전국운동이라는 포텐셜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90년대 중반 이후 만화

논쟁 재기의 씨앗이 되었다. 이는 대만사회, 대중매체가 만화와 만화 독자를 깊이 이

해하지 않고 경제이익만을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만화 문화 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이번 관점은 만화를 ‘독’으로 간주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만화는 돈이 된다’에만 주목했었다면 새로운 문제 같지

만 실제로는 동일한 문제가 재기되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대만 만화 붐은 판권화 또는 대만 만화가의 노력에만 그 공이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시 만화 판권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시

기의 일본의 요구였다. 즉 ‘제휴지’다. 판권을 얻기 위해서는 잡지에 대만 만화를 개

제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 만화와 대만 만화를 ‘제휴’하는 것이다. 이 때문

에 원래부터 일본 만화의 번역 출판만을 했었던 출판사도 하는 수 없이 대만 만화가

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계획적인 모집은 일시적으로 양만 많고 질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

가 나는 만화가를 출현시킬 뿐이었다. 이는 좋을 리 없으며, 그 원인이 비단 ‘제휴지’

에만 있지 않았다. 90년대에 열린 각종 만화 콘테스트와도 관계가 있다.

대부분의 대만 출판사 東立, 大然, 尖端, 長鴻, 青文 등은 만화 신인상을 설립하였

다. 그러나 東立 외에 만화 신인상은 거의 길게 가지 못했다. 수상한 사람이 반드시

데뷔 기회를 갖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館林見晴(2005a, 2005e, 2005f, 2005g, 2005h)에 의하면, 90년대 초반부터 중

반까지 신인상을 받은 신인 만화가는 잇따라 데뷔와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 중

東立출판사는 신인상을 계속해서 개최하였고 사무실을 빌려 東立에 소속 되어 만화

가로서 원고를 쓰도록 하였다. 심지어 기본급 제도도 도입했다. 그러나 97년 이후 만

화 시장의 부진으로 각 출판사의 신인상 개최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인상 개최에 참

여했던 長鴻와 青文는 1회 개최로 끝났다.6) 계속해서 개최했던 東立도 상금을 내렸

다. 신인상을 개최하여 적극적으로 인재를 찾고, 소속 만화가를 육성하는 형식은 상

징적인 활동이 되었다. 한편, 大然이 개최한 신인상 시리즈는 시스템상의 문제로 좋

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이러한 만화는 그저 형태만 있을 뿐 내용은 텅 비어 깊이도

없으며 수준이 낮고 일본 만화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독자의 비위 만을 맞

출 뿐 이었다. 만화에 정말 필요한 ‘재미’는 무시되었다. 이 때문에 독자는 대만 만화

는 ‘모방밖에 못한다. 카피투성이. 내용 같은 건 없다’라는 등의 평을 듣게 되었다.

1998년 만화 시장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만화에 대한 바이어스

6) 青文는 2005년에 제2회 만화 신인상을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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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컬처’, ‘성’과 ‘폭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해적판이 부활한 것이다. 출판사의

각각 경영전략에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인 문제는, 전문 편집자, 원작자 그리고 전

문 평론가가 부족한 상태 그대로라는 것 이다. 또한 대여 만화, 해적판, 평행수입에

시장가치를 빼앗겼다. 지역창작 작품은 국제관과 다원화 또는 창의력이 부족하다. 만

화 교육과 만화 확산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화출판동업협진회漫画出

版同業協進會는 그 기능을 하지 않는다. (蘇清霖:1999)

20세기 마지막 해에 대부분의 대만 만화출판사의 매출이 30% 이상 하락했다. 93

년과 95년 절정기와 비교하면, 95년 만화출판물 의 평균 인쇄양은 5천 권 이상이었

지만, 99년 시장에 나와 있는 작품의 대부분은 2천 권을 인쇄해도 50%도 팔리지 않

았다.

대만 만화의 실격문제에 대해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산업 또는 출판사와 창작자밖

에 보지 않는다. 사회가 만화에 미치는 영향은 극도로 간단화 하였다. 독자의 생각을

탐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만에 기존에 있는 만화 논술은 언제나 독자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만화가와 출

판사에만 그 중점을 두었다. 한편, 독자, 팬 컬처를 토론했을 때는 일본 만화와 합일

족哈日族(일본 마니아, 일본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또는 만화는

교육문제와 분급제도와 이어지기 쉽다.

(3)만화 교육론, 분급론의 출현

90년대는 만화 심사제도가 없었던 시대이다. 만화 판권화와 대만 만화 창작이 한

창일 때였다. 하지만 이 때가 진정으로 개방적이며 다원화적인 시대였을까? 그럴지

도 모르지만, 적어도 ‘만화유해론’이 유일한 최우선의 선택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출현한 것이 ‘만화교육론’과 ‘만화 분급론分級論’이다.

1995년 정부의 요구로 만화 출판업은 ‘청소년에게 적절하지 않은 출판 물은 출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1997년 9월 중화민국 도서출판 사업 협회와 타이페이시

출판상동업공회는 ‘중화민국도서평의위원회’를 공동 설립하였다. 1999년 1월 성性관

련출판물에관한법률, 형법 제235조 ‘산 포판매외설문서도서죄散佈販賣猥褻文書圖畫

罪’ (외설 책과 그림을 판매 또는 유포 하는 죄)로, 위반 시 ‘방해풍화妨害風化’ (사회

풍속을 위반)라는 중죄로 기소된 다. 한편, 청소년의 심리건강을 위해 성과 폭력으로

부터 지키려고 영화와 TV 레이팅 외에 신문국은 ‘도서분급제도’ (도서 레이팅)도 상

정하였다. (Sulpia,2001:227-229)

당시 만화 분급제도 설립에 대한 목소리 역시 90년대 중반 이후 만화에 대한 주요

의견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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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화의 사회사 시야

(1)만화는 정치로서 또는 경제로서

2002년 행정원은 ‘발전문화창의산업’ (문화창의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을 ‘도전2008:

국가발전중점계서國家發展重點計畫’의 핵심항목으로 정하였다. 만화 산업의 이름도

그 안에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화는 분명 정부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만화는

돈이 된다’라는 목적이 있었다. 2001년 행정원 신문국의 지지와 보조로 중화도서 출

판사업 발전기금회와 타이페이시 만화종업인원직업공회 는 ‘대만만화계’ 시리즈를 속

속 개최하고, ‘만화금상장金像獎’ 콘테스트도 개최 하였다.

2003년 만화는 정식으로 문화창업 산업발전계획의 ‘발전도문출판산업’으로 채택되

었다. ‘정부의 원조를 받아 『극정만화장劇情漫畫獎』이벤트를 개최하고, 애니메이션

업자와 게임 업자 채용을 추진한다. 만화 업자와 만화 단체의 지역만화 정기간행물

발행에 장려금을 준다.’ 그러나 극정만화장은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장려금은 계속

줄어들 뿐이었다. (총 장려금이 500만 위안에서 360만 위안, 235만 위안으로 줄더니

결국 2009년 개최를 중지) 만화 정기간행물은 정부의 보조가 없었다면 바로 폐간될

상황이 몇 번이고 있었으며 (예를 들면 《GO만화창의지漫畫創意誌》, 《BINGO낙투

만화월간樂透漫畫月刊》など), 보조금을 받고서도 출판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었다.

(如《판공실辦公室. 난서亂畫》)

대만 만화의 발전을 보면, 정치력이 만화에 자원을 쏟게 된 것은 이미 1949 년 국

민정부가 대만에 온 후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반공) 만화는 ‘스토리’도 아닌, ‘생활’

과 ‘문화’도 아닌 ‘무기’로서 그 역할이 주어졌다. 정부에서도 만화 콘테스트를 수 없

이 개최했지만 그다지 효과는 보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부가 만화산업을 보조한지 몇 년 만에 만화분급제도가 강하게 밀려

만화논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2001년 타이페이시 정부 신문처는 ‘만화 출판품 조수租售관리 자치조례 초안’을 만

들었다. 위반 시에는 벌금 3만 위안 이상, 10만 위안 이하를 부과한다. 대만고등법원

의 형사판결에 의하면, 만화는 제한급(R18지정)으로 등급 규정하더라도, 사회관습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에는 ‘공연 진열公然陳列외설문자, 도서죄’를 범하

게 된다.7) 2003년 ‘타이페이시 만화 급인체도及人體圖편출판품 조수관리 자치조례초

안’을 공표하였다. 그 해에도 ‘제한급을 넘는’ 책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 후 신문국

은 ‘아동급 소년 복리법’에 근거하여 2004년 12월 1일 실시 예정이었던 ‘출판품급녹

7) 민생보民生報 2001년 3월 27일 A10판, 종합보 2001년 3월 28일 제20판. 민생보 2001년 3월 27일 페이지

A10, 종합보 2001년 3월 28일 페이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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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錄影帶분급판법’이 더욱더 논쟁을 일으켰다.

만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만화의 경제이익 측면에서만 보지 말고 정부를

의지해서도 안 된다. 그 사회 기초를 탐구할 필요가 있는 것 이다. 이로서 만화는 일

시적이 아닌 붐을 일으킨 후에도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이어질 가능성을 갖게 된다

(2)만화는 ‘문화’와 ‘사회’로서의 제한과 가능성

대만의 여러 평론가들은 만화발전 문제에 대해 ‘절박한’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본

문은 만화 발전에 있어 서두를 수 없는 점이 많이 있다. 착실 하게 한 발 한 발 앞

으로 내딛는 것이 진정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만화 발전은 하나의 문화 발전이기 때

문이다. 사회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는 시간과 활동과 오랜 동안의 주목이 필요한 문

제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진행시키면 문제가 반복될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대만 만화에 대한 제한은 6가지가 있다: ①정치력 개입. ②문화 전통

의 창작에 대한 억압. ③경제논리의 과열. ④독자를 무시하지 말 것. ⑤생활과 문화

에서 만화를 생각하지 말 것. ⑥‘외래’(일본) 만화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일본

만화를 대만 만화의 계몽자와 제한자 두 가지 측면으로 보지 말 것. 이 6가지 포인

트는 모두 ‘문화와 사회’의 측면 에서 긴 세월 동안 축적된 문제로 특정 단기 사건은

하나도 없다.

본문에서 언급한 문화와 사회는, 만화는 사회와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그

렇지 않다면 만화에 대한 억압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산업 붐과 유

행밖에 없어 그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사회사 관점에서 본 대만 만화에서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의 흔적을 확실 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문화와 생활의 힘은 매우 약하다. 대만 만화에 있어 정치는 주도하

는 힘이고 경제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강화된 것으로, 문화는 오랫동안 억압된 상태

그대로다. 이 상황에서 만화를 사회와 대화 하도록 하기란 매우 어렵다.

만화 업계에는 분명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해결할 필요가 있음을 부정 할 수 없

다. 하지만 이 문제들은 만화업계에는 없는 일도 자주 있다. 그러 나 우리들이 보여

준 해결방법은 대부분 만화업계가 대상이 된다. 종합하라 는 힘을 분산하지 말라는

목소리는 자주 듣지만, ‘종합하는 기초’ 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것이야말로 미래를 보지 않는다는 증거다.

산업에 시간제한이 있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이해한다. 지금까지 계속

되는 문화 문제와 비교하면 산업문제는 분명 알기 쉽고 문제점과 해결방법도 찾기

쉽다. (예컨대 창작자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출판사는 무엇이 필요한가 등) 창작자

와 산업에 대한 논술은 이러한 중요성을 갖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대만만화 문화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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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대만만화 산업발전’이라는 전제가 보인다. 이 전제는 만화가 대만에서 발전함

에 있어 직면한 제한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원인이다.

만화의 발전가능성은 여러 방면에서 사회가 만화에 미친 제한을 이해해야 비로소

성립한다. 그런 후에 돌파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

은 오랜 시간에 걸친 건설로, 사건이나 붐에만 편승해서는 안 된다. 만화의 넓은 바

다를 어떻게 이해할 것 인가. 이는 결코 해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 수

없는 문제다. 바다는 항상 우리들의 시선을 빼앗지만, 역시 바다의 흐름과 규칙을 이

해할 필요가 있다. 축제로 예를 들어 보자.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축제로

빛나는 그 순간일 뿐, 한 시간의 축제라도 준비에는 몇 일, 몇 주, 몇 달 에서 몇 년

까지 걸린다. 우리들이 마주해야 할 것은 한 시간으로 끝나는 이벤트의 결과가 아닌,

기나긴 준비기간인 것이다.

만화사를 읽는다는 것은, 요컨대 만화가 우리들 사회에 제출한 질문에 대답하려

하는 것이다. 만화사는 우리들 사회에 어떤 질문을 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문화와 예술, 정치와 경제, 어린이와 청소년, 기술과 산업 등에 담겨

있으며, 또한 이 질문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만화 문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만화 문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이다. 본문에서 대만 만화에는 기회가 없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제한과 구조를 알아야 비로소 사물을 생각하고 이를 실천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

러나 본문도 단지 ‘문화결정론’의 관점을 안고 있지는 않는다. 문화는 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바꿀 가능성도 생활 속에 있다. 대만에 ‘만화 문화’가 있다고 선언

하고자 한다면 이는 단순히 다양한 만화가 우리들 사회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만화

가 꼭 물건을 필요로 하거나 예술에 속한다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만화를 좋

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만화 창작자가 되었다. 혹은 만화를 인생에 있어 중

요한 일부분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그녀)의 성장과 함께 만화가 줄곧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서 만화에서 느낀 점, 배운 지식이나 사물을 일상생활에서 실

천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만화 문화에는 텍스트와 그 창작 생산이 있어 읽고 소비

하는 것도 포함된다. 사회의 재현과 건설도 있다. 시간을 축적하는 것도 있다. 만화

작품에 대해 깊이 얘기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개개인의 생명으로 작품과 대화

할 수 있다면 만화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결코 사는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아와 생활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존재와 체험을 불러온다.

만화가 우리들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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