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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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망원로 57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41 기획기사 - 다른 나라의 군사 제도 살펴보기 핀란드의 징병제 및 병역거부, 대체복무의 역사 스위스의 군대와 반군사주의 운동 이스라엘, 어긋난 욕망의 자화상 노르웨이의 유연한 징병제, 그리고 여성징병 논란 단 하나도 같은 것은 없기에, 그림 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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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서울시 마포구 망원로 57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41

기획기사 - 다른 나라의 군사 제도 살펴보기

핀란드의 징병제 및 병역거부, 대체복무의 역사

스위스의 군대와 반군사주의 운동

이스라엘, 어긋난 욕망의 자화상

노르웨이의 유연한 징병제, 그리고 여성징병 논란

단 하나도 같은 것은 없기에, 그림 난영

Page 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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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전쟁없는세상 41호 소식지

차례

발행처: 전쟁없는세상발행일: 2014년 5월 1일제호: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연락처: 02-6401-0514주소: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121-230)http://www.withoutwar.org [email protected]

인쇄기획 한울타리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2동 137-69(130-062)연락처 02-924-9641,2 팩스 02-927-5104

소식지를 내며 Editorial 1

평화주의자 노트 Essay

나는 오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한다 2

노역형을 앞두고 9

기획기사 Special

Intro - 다른 나라의 군사 제도 살펴보기 14

핀란드의 징병제 및 병역거부, 대체복무의 역사 15

스위스의 군대와 반군사주의 운동 20

노르웨이의 유연한 징병제, 그리고 여성징병 논란 26

이스라엘, 어긋난 욕망의 자화상 33

리뷰-책&영화 Review-Book&Movie

‘수치’, 꽃을 피우다-존 쿳시 《추락(Disgrace)》를 읽고 39

기획연재 Series

게임과 평화 - 푸에르토리코와 조선 48

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 부끄러운 메이드인 코리아 54

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 어떤 일기 59

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21화 64

효웅의 꾸잉꾸잉 65

재정보고 Report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76

평화수감자들한테 편지 써 주세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수감된 분들입니다

김무석서울시 구로구 금오로 867 (천왕동) 805번 (152-130) - 서울남부교도소

김동현경기도 의정부시 송산로 1111-76 (고산동) 1988번 (480-700) - 의정부교도소

조익진경기도 의왕시 안양판교로 143 (포일동) 4566번 (437-702) - 서울구치소

박정훈서울시 구로구 금오로 865 (천왕동) 3438번 (152-130) - 서울남부구치소

이상민서울시 구로구 금오로 865 (천왕동) 2139번 (152-130) - 서울남부구치소

Page 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1소식지를 내며

용석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세월호 참사 이후 모두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사고가 일어난 뒤 수습이나 대처도 믿기질

않습니다. 애시당초 국가나 정부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데모나 직접행동 제압할 때 보여준 신속한 경찰력으로 구조활동도 신속하

게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희 같은 병역거부자들이 애시당

초 스스로 비국민의 길을 택했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들도 세금만 냈지

정부가 보호해야하는 '국민'은 아니었나봅니다.

작년부터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새로운 지식에 목이 말랐습니다. 활

동회원들과 다른 나라 군대는 어떤지에 대해 공부를 해왔는데요, 그 성과

를 이번 기획기사에 담아보았습니다.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이야기

들을 확인해보세요. 스위스의 군사주의와 노르웨이의 여성징병 논란, 이

스라엘의 병역거부 운동 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은 누군가 감옥 가는 것이 일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좀

놀라운 감옥 소식이 있습니다. 전쟁없는세상 상근활동가인 여옥과 오리가

각종 직접행동에 따른 벌금을 노역을 때우기 위해 감옥에 갈 예정입니다.

왜 자발적(?)으로 감옥행을 택했는지,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오리

가 소식지에 글을 썼습니다.

다시 한번 세월호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소식지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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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평화주의자 노트

붙어 있던 게 압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군대는 한편으론 훨씬 더

단순했고, 한편으론 정치적이었다.

이틀 뒤는 마침 37사단에서 13년만에 부활한 훈련생 면회가 있는 날이

었다. 어설프게 각을 잡고 앉아서 몇 십분 동안 훈련소장의 “훈화”를 들었

다. 애국심+안보+군인정신+남자다움+복종+규율 = 자긍심이라는 주제

의, 나름대로 알찬, 그리고 너무나 편견적인 훈화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추구해온 내 자신의 정치적 고민과 철학은 이 집단

이 추구하는 가치체계 안에선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최종적인 결단은 사

단훈련소에서도 의경, 전경이 차출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이루어졌다.

의경, 전경으로 차출되어 시위현장에 투입된다면 도저히 군복무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며칠간의 우여곡절 끝에 난 스스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날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힘든 일, 내 성향과 맞지 않은 일을 무

작정 피하고 있는 게 아닌지, 그 정도의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게 아닌지 괴로웠다. 오랜 기간 고민을 했다. 정말 내 자신이 나약

해서 포기한 것인지, 그렇다면 좀 더 강해져서 돌아가면 되는 건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입대 전에도 가졌던 의문이 너무나 강

렬하게 다가왔다. 인간을 이렇게 단순하고, 복종적이고, 극단적으로 만드

는 일이 강제적으로 일어나도 괜찮은 것일까? 이게 정말 우리가, 내가, 이

국가에서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의무일까? 이것이 과연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정말 내 자신이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들을 감내하

지 못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 특히 군필자들은 우리의 군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의무라고 말한다. 북한이라는 주적이 있고, 다른 나라들도 호전성

을 내보이는 동북아에선 60만 상비군은 필수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한다강길모 | 병역거부자

2011년 5월 24일, 난 입대를 했다. 꽤 늦은 나이에, 군대에 대한 좌절감

과 분노, 일말의 기대감이 뒤섞인 채로 37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다. 연병

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날아왔던 조교의 욕설, 아이 다루듯이 성인들을 대

하는 간부의 태도. 나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래, 군대니까. 군대니까. 하지만 무심코 들어간 화장실 칸 안에서 문

에 붙어있는 구호를 본 순간부터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잊지 말자

천안함, 보복하자 연평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모두 북한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신해왔지만, 직접적으로 보복하자는 식의 구호를 군대 안에서

보게 되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생활공간 안에 붙어있는 각종 구호, 문구들이 눈에 띄

기 시작했다. “안보의식 호국정신으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모든 생

활공간의 틈새에 박혀있는 이런 극단적인 문구들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특히 “경제를 살리는 사대강 살리기 사업”식의 문구들이 생활관 곳곳에

평화주의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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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평화주의자 노트

으로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선

모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며 발생하는 고

통들은 모두 무시된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군사주의 문화는 이를 증폭시킨다. 군대 안에선 불

합리한 처우도 생과 사를 다루는 살벌한 조직 안에선 견뎌야만 하는 작은

일에 불과하며, 그런 조직의 위계질서는 명확해야 한다.

군대는 사나이를 강조한다. 사나이라는 강조된 남성성, 진정으로 우월

한 인간이라는 이 남성성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군대는 개인들에게 이러한 논리들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은 이러

한 논리를 군대 이후의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시킨다.

이러한 군대의 논리는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노동자는 불합리한 처우도 견뎌내야만 하고, 일이 능률적으

로 진행되려면 갑을관계의 권위에 의문을 품어선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군대 다녀온 남자는 사나이다워야 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군대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

주의 사회는 언제나 무한경쟁시장이라는 냉혹한 생존토대 위에 있으며,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남성은

언제나 기득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나아질 수 있다. 노동자는 보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한다. 갑의 횡포는 법과 윤리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성역

할의 고정관념은 보다 개개인들의 특성들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

야 한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바뀔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보다 높은 가치로 존중하느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선들, 구체적인 모습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현행 징병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북한이라는 위협 앞에서 정신무장

은 필수이기에 안보 교육은 필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들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누군가를 어느 날

문득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문제인가? 아니면 태어나면 언

젠간 죽다는 사실처럼 ‘어쩔 수 없는’문제인가? 1+1이 2인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온갖 우파적, 보수적 교육을 받고 불합리한 대

우를 참으며 강제로 군인이 되는 일이 대체 어떤 식의 ‘어쩔 수 없는’일

까? 이제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라는 주적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전쟁 중인 국가라는 ‘픽션’이

이 불합리한 상황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전쟁의 위협이 징병제를 특별히

더 정당화 하는 것도, 군대의 현실적 필요성이 군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전쟁을 벌였고, 냉전 내내 직접 국경을 맞대

고 있던 핀란드는 무려 1959년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중국과 '분

단'된 대만 역시 2000년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했고 곧 모병제로 전환된다.

이러한 사례 어디에 “남자라면 반드시 군대에 가서 진짜 사나이, 진정

한 시민이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는가? 이러한 사례 어디에 자신의 정

치적 신념과 정반대되는 교육을 억지로 받으면서 그 가치들을 내면화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폭력이 가장 쉽게 정당화되는 방법은 ‘어쩔 수 없는’고 말문을 막는 일

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를 착취 하는 일도, 갑을 관계에서 갑이 갑질 하는

것도, 20대 팔팔한 청년들 군대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도. 다 죄다 현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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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평화주의자 노트

지금 당장 군대가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비현실적인 질문은 처음

부터 적절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군대만 사라지고, 다른 나라의 군대는

그대로 있는 마법 같은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로 다루는 것은 오류이다.

그리고 우리는 2000년 전 로마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다. 군대를 더 키우고 힘을 비축하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일, 특정 국가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퇴행적이다.

이러한 시각들은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친구랑 싸우고 싸움 짱 운

운하는 그런 수준 이상이 아니다. 당연히 올바르지도 않을뿐더러, 처음부

터 어떠한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는 방식이기도 하다.

설사 최소한의 물리력이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

해야 하는 일은 그 이전의 여러 정치적 상황들을 보다 평화롭게 만드는 일

아닐까? 적어도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이려고 노력하는 한,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두 번째 질문. 네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 이 거칠고 조야한 질문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었다. 이 질

문은 병역거부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고민했던 질문이자 과거에 군 입대

를 했던 이유였기도 하다.

아무리 피하려도 해도 개념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리

고 난 이럴 때 분명히 상대를 죽일 텐데 이런 내가 병역거부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질문은 미리 대답을 준비해선 안 되는 질문이다. 설

사 대답을 준비한다고 해도 무의미하다. 이 질문은 행동방침을 묻는 질문

이 아니다. 어떤 행동이 더 윤리적이냐고 묻는 질문이다.

것들은 결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군대와 군

대문화는 “어쩔 수 있는 일”들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엉뚱하게, 개인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폭력적인 일들은 “하면 되

는” “까라면 까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파도 참고, 시키면 시키는 대

로 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징병제가 가지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

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폭력,

문화적 폭력까지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자주 받았던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가 군대가 없으면 어떻게 전쟁을 막느냐는 질문이요, 둘째는 네

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나는 전쟁은 군대 이전의 단계에서, 보다 중요한

단계인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지향하는 단계에서 결정된다고 답한다. 그러

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답변에 대해 코웃음을 친다. 만약 지금 당장 군

대가 없다면 다른 나라의 침입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 당신의 주장은 이상

론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지향해야 하고, 더 보편주의 적으

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 당장 모든 군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

은 아니다. 우리는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지금 여건에서, 주어진 사회적 맥락 없는 논의는 전적으

로 무의미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군대를 통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주장이 대체 어떤 의

미를 지니고, 사회 전체가 군사주의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

는지, 이러한 현재 상태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가 진짜 물어져야 할 일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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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평화주의자 노트

그러나, 이 질문을 실제 삶에서 만났을 때, 무엇을 하든 결정된 행위는

윤리적으로 면책 될 수 없다. 죽이던가, 죽던가의 문제는 윤리적으로 미리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미리 내릴 수 있는 윤

리적 답이 있다면, 스스로를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뿐이다.

나는 모든 대한민국 남성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기에 군대를 가야한

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군대 아니면 감옥을 요

구하는 제도에도 동의하지 않으며, 그러한 주장과 제도들로 인해 우리 사

회가 겪는 내부적인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에게 다시 한 번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군대냐 감옥이냐 두

가지 방향만이 있는. 나는 더 이상 정당한 의문들을 개인의 품성으로 돌리

는 폭력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인권과 평화의 문화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전쟁없는 세상을 위하

여.

2014년 3월 11일

강 길 모

노역형을 앞두고

오리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할 자유가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헌

법 제21조에 보장된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집회와 시위의 종류는 성명서를 발간하는 것에서부터, 행진, 연극, 음악,

보이콧, 파업, 직접행동 등 매우 다양하며 이 모든 것은 완전히 향유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정치 행위자는

국가, 기업 혹은 전문가들이다. 사회적 소수자는 이 과정에서 거의 완전히

제외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도,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로비를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대의제 민주

주의와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인권 사각지대에 놓이기

가 쉽다. 사람들이 흔히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 왜 현존하는 채널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느냐고 비판하곤 하는데 문제는 그 채널을 각

종 편견에 사로잡힌 힘센 특정 그룹이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

회와 시위의 자유는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

평화주의자 노트

Page 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10 11평화주의자 노트

고 차별을 시정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수단이자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2년 전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거짓과 비민주로 점철된 국책사업의 부당

성을 알리기 위해 걸어도 보았고 탄원도 해보았고 각종 토론회며, 거리 홍

보전이며, 엽서쓰기며, 거리에서, 직장에서, 국회에서, 인터넷에서 최선을

다해 호소했다. 우리 눈에 비친 제주해군기지는 건설되지 않는 것이 타당

하며 건설되지 않는 것이 정의였다. 새로운 해군기지와 관련해 너무나 많

은 정보들이 주어지지만 한국에서 추가적으로 대규모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 국가안전보장에 얼마나 큰 이득이 될 것인지에 대해 국가는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정부와 해군이 내세우고 있는 근거는 늘상 냉전적

사고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적들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금강산으로 소풍

을 가고 일본의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며 중국으로 전파되는 한류를 자랑

스러워하는 요즘 세대들이 과연 이러한 구시대적 프로파간다를 100% 수

용할 수 있을까. 남방해역보호와 이어도 수역 보호라는 해군의 주장이 일

리가 있다 하더라도 이 갈등은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해군기지라는 군사

적 해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경의 업무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

근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이 아닌 일반 시민의 상식에 근거한 해

법이다. 이뿐인가. 2012년 9월, 장하나 의원실은 제주 해군기지가 미국의

핵항공모함이 정박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계획되고 설계되었다는 증거를

밝혀냈다. 핵물질이 무엇이고 미군의 핵항모들이 일으킨 각종 사고 및 오

염들을 다 열거할 순 없지만 1998년 하와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미함정에

서 오작동으로 주민들이 사는 시가지에 핵무기의 일종인 열화우라늄탄 3

발이 발사되었던 사건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거대한 탄약고를 누구

도 자신의 앞마당에 두길 원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

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말이다. 자신은 하기 싫으면서 남에게 강요할

권리를 세상에 어느 누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또한 해군은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수많은 거짓말

을 반복해왔다. 기지 건설과정에서 처음부터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겠다고

도 했고, 토지 강제수용은 절대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현재 국가가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뱉은 말을 이행하는 것 대신, 오히려 삼성물산과 대림산

업의 사적이익을 변호해 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강정에서의 경찰 폭력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주류미디어는 우리를 외면했고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여나 야나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기어이 구럼비 바위가 발파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급해졌다. 삼성의 굴착기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저지 운동

의 상징인 구럼비 바위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행동 역시도

더욱 더 드라마틱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변화되어야만 했다. 마음은 급하

고 분노로 가득 찼지만 우리는 저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었

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생채기를 내는 대

신 나와 내 동료들은 그 고통을 스스로가 대신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결심

하였다. 나는 내 몸에 쇠사슬을 묶었고 폭약고 앞에서는 옆의 동지와 파이

프로 팔을 연결했으며 천박한 주류미디어 덕분에 제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내 고향 서울의 시민들을 위해 삼성물산 앞에서 페인트를 뒤

집어 썼다.

나는 집회나 시위를 기획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어떤 법이나 정부

의 정책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집시법 위반,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 일반도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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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평화주의자 노트

통방해 등 다양한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렇듯 현재 한국의 현실

에서 집회와 시위의 1차적이고 직접적인 피해자는 집회를 한 당사자, 활

동가일 때가 많다. 누가 심사숙고하지 않고, 확신을 갖지 않고 충동적으로

이런 시위를 하겠는가. 우리는 공개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히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가장 효과적

으로 행동을 준비하였고 실행하였다. 이 정도도 보호받지 못하는 표현의

자유라면 대한민국에 표현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현재 진행 중인 3개의 재판 중 구럼비 발파 첫날 쇠사슬을 묶었던 행동

으로 받은 벌금 200만원은 3심까지 다투었지만 결국 원심 그대로 확정이

되었다. 벌금납부고지서를 받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반도로교통

방해? 풋, 차도 안 다니는 새벽4시 이미 경찰이 다 막아놓은 도로에 구럼

비 발파를 막기 위해 앉아 있었던 것이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내 정치적

자유도 제한할 만큼 중죄였던가. 삼성은 왜 어떨 땐 국민기업이고 또 하나

의 가족이면서 꼭 이럴 때만 사유재산인가. 왜, 어째서 누구에게나 공평하

다는 법은 대한민국 정부 ‘공무’ 자체의 성격과 위법성이나 공권력도 아닌

삼성 에스원 직원들의 과도한 시위 저지 행위는 문제 삼지 않는가. 그러면

서 폭행, 협박 혹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와 권세에 의한 압박 등이

전혀 없는 일반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는 과도하게 해석되어 각종 법률을

침해한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지. 왜 공명정대하다는 법은 평화애호자들의

평화시위는 심대한 혼란 혹은 막대한 손해를 명확히 판단하고 구분하면서

정부, 해군, 삼성, 대림의 ‘업무’에는 판단을 유보하는지. 방해할 업무가

없는 권력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업무방해죄’가 과연 공평하고 정의

운 법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하루 5억의 황재노역을 살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벌금은 ‘그까이꺼~’

정도일지 모르지만 나에게 200만 원이면 전쟁없는세상에서 받는 4달치

활동비와 같다. 그래서 나는 벌금 안 낸다. 아니 못낸다. 대신 노역을 살겠

다. 아니 살 수밖에 없다. 요번에 보니까 사회봉사명령으로 대체할 수 있

도록 뭔가가 바뀌었나본데 다음 재판도 이런 식이면 그것도 고려해보려

한다. 내 권리를 침해받아서 억울하기도 하지만 정권이, 삼성이, 재판부가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운동 활동가들에게 높은 벌금형을 부과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활동이 효과적이었고 유효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교도소로 향하겠다.

활동가들이 벌금을 내지않고 노역으로 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Page 1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14 15기획기사

전쟁없는세상에서는 작년 9월부터 활동회원 세미나를 시작했습니

다. 평화주의, 반군사주의와 관련한 정보를 공유하고 고민도 나누

며 활동에 대한 논리와 역량을 쌓아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로 세계의 군대제도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했고, 두 번

째 주제로는 다큐 <미군기지와 이웃하여 산다는 건 Living along

the Fenceline>을 보고 다큐에 등장하는 각 나라별 군사기지와

관련한 문제와 활동들에 대해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그 내용이 미흡하더라도 자료를 축적하고

공유하기 위해 공개간담회나 자료발표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고, 이번 소식지에서는 활동회원 세미나의 첫 번째 주제였던 여

러 나라의 군대제도에 대해 기획기사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주

제는 병역거부팀 내에서 활동가들의 역량강화를 위해 기획되던

중 활동회원 세미나에 제안되었고, 2013년 9월부터 2014년 1월

까지 각자가 궁금했던 나라들 중심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이스라

엘, 핀란드, 프랑스의 군대제도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중 네 나라(핀란드, 스위스, 이스라엘, 노르웨이)에 대한 내용

을 담았습니다.

8월 이후에 또 다른 주제로 세미나를 다시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다른 나라의 군사 제도 살펴보기

강길모 | 병역거부자

우리에게 복지와 교육으로 잘 알려진 핀란드는 우리처럼 징병제를 채택

하고 있는 국가이다. 핀란드는 대체복무제도가 비교적 일찍 도입됐고, 끊

임없이 변화를 겪었던 나라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도 병역이행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강한 징병제를 운용했고, 한때는 강도 높은 군사문화

를 지녔었다. 이는 단순히 징병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핀란드인

들의 역사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핀란드는 오랜기간 스웨덴과

러시아의 종속국이었다. 또한 20세기 중반 소련과의 전쟁을 치루기도 했

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들은 핀란드에서 군사주의와 징병제를 공고히 하

는 원인이 되어왔다. 이로 인해 핀란드의 대체복무제도 개선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선 실제적 징병제를 채택한 나라들 중에서

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대체복무제도를 지닌 나라가 됐다.1 이러한 과정

1 한국 병역거부 운동이 가장 많이 참고했던 독일과 대만은 이미 징병제를 모병제로

핀란드의 징병제 및 병역거부, 대체복무의 역사

기획기사 기획기사

Page 1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16 17기획기사

이 병역거부자들의 오랜 투쟁과 희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더더욱 뜻 깊

기도 하다.

핀란드는 핀족의 나라라는 뜻으로, 중세에는 스웨덴, 근대에는 러시아

의 지배를 받아왔던 국가이다. 핀란드는 1917년 독립국이 되는데, 독립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침공을 받고 패배하는 등 여러 우여곡

절을 겪게 된다. 핀란드의 교육과 복지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60

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개선되어 온 교육정책은 복지정책의 기반이

됐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의 사회 제도들이 구체적으로 갖추

어진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70년대 말까지 신자유주

의 경제 정책을 표방했으며, 사민주의적 정책의 전면적 실현은 90년대 초

반에야 이루어졌다. 핀란드는 환경 지속가능성 지표에서 세계 최고를 자

랑하기도 한다. 다만 다른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여성평등지수는 낮은 편

인데, 이는 핀란드 사회에 뿌리 깊은 군사주의 문화의 영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피와 희생으로 얼룩진 핀란드 병역거부사

핀란드의 병역거부 역사는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제국

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징집 거부가 있었지

만 평화주의적 관점에선 무의미한 사례이다. 본격적인 반전평화 운동으로

서의 병역거부는 1926년 핀란드 WRI(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회원이었

던 반군사주의 활동가 안트 페쿠리넨(Arndt Pekurinen)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 페쿠리넨은 모든 형태의 병역 의무를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전환했다.

수감됐다. 그의 투쟁은 이후 1931년에 일어난 첫 번째 병역거부 운동으

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제한적인 대체복무 법안이 도입이 되

는데, 이는 세계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매우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겨울

전쟁 및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핀란드에서 병역거부 운동은 암흑기를 맞게

된다. 당시 핀란드는 소련 및 독일과 전쟁을 벌였으며, 기존의 병역거부자

들ㄷ과 새로운 반전주의자들이 신념에 따라 복무를 거부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거나 처형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안트 페쿠

리넨 역시 1944년 처형당했다.2

쉽지 않았던 변화

전쟁 이후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이러한 폭력들은 핀란드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1959년 새로운 대체복무제도가 다시 도입됐

다. 이 시기 핀란드의 대체복무제도는 16개월로, 최단 8개월인 병역에 비

하여 2배가량 길었고 또, 개개인의 양심을 심사하는 조사위원회가 조직되

어 대체복무의 자격을 심사했다. 이러한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에도 병역

거부 운동은 꾸준히 지속됐다.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1987년, 전면적으

로 제도를 바꾼 새로운 법이 제정됐다. 조사위원회를 없애고 당시 병역거

부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을 면제시켜주는 획기적

인 법안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징병 기간 전반을 1/3 늘렸으며, 대체복

무 내용을 보다 군사화시켰기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1990년대 중

2 안트 페쿠리넨은 강제로 전선에 투입되지만, 집총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장교는 처형명령을 내리지만, 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3번째 명령을 받은 병사가 끝내 페쿠리넨을 처형했다.

Page 1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18 19기획기사

반 이후 완전거부에 대한 관심 및 다른 급진적 시각들도 늘어나기 시작했

고, 대체복무제도 역시 사민당3과의 공조를 통해 구체적인 변화를 겪게 된

다. 결국 2008년, 전반적인 개선을 이룬 병역의무법과 비-군사적 의무법

이 통과되어 큰 틀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총을 들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다

현재 핀란드의 대체복무제도는 징병제를 유의미하게 운용하는 나라 중

에서는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만하다. 대체복무 기간은 가장 긴 병역 기간

인 12개월과 같다. 현재 징병 대상자들은 군복무 중에도 언제든지 대체복

무를 지원할 수 있으며, 지원은 모두 받아들여진다. 모병지원을 한 여성들

은 훈련 시작 이후 45일까지는 언제든지 병역을 중단할 수 있지만, 45일

이후 중단할 경우 일반 남성 징병자들처럼 대체복무를 하게 된다. 여호와

의 증인은 교단 법인의 인가를 받은 신자에 한해 면제 대상이 된다.

전쟁이나 비상사태, 계엄 같은 위기상황이 선포된 기간에도 이미 대체

복무를 마친 사람들은 여전히 비군사복무의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위기

가 시작된 후 스스로를 병역거부자라고 선언한 사람들은 특별위원회 앞에

서 그들의 신념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 페쿠리넨의 비극은 적어도 법적

으로는 사라진 셈이다. 이러한 특징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며, 각국의 대

체복무제도가 목표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전거부자들은 여전

히 수감되고 있다.

3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제창, 실현했던 정당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집권하게 된다.

핀란드 병역거부 운동의 현재

다만 현재 핀란드 병역거부 운동 상황은 긍정적이지는 않다. 현재 핀란

드에서의 병역거부권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완전거부자에 대한

법적 처벌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특별한 제도적인 개선 가능성이 별로 없

다고 여겨진다. 여전히 사회문화적인 문제점들도 남아있다. 전통적으로

남자는 반드시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인식들이 있기에 대체복무자들에

대해 일상적으로 적용되는 이러저런 편견들이 있으며, 취직과정에서 불법

적인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한 러시아와의 긴장을 빌미로 징

병제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 역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핀란

드의 주류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군사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정부가 주

관하는 군사체험 프로그램들 역시 많다.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최근 핀란드 병역거부 운동은 주된 관심사를 징

병제 전반의 철폐 운동, 여성의 군사화에 대한 반대, NATO 및 해외파병

문제들을 이슈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4 냉전 종료 후 핀

란드 정부가 NATO와 발을 맞춘 행보를 보여 온 부분들을 비판하기도 한

다.

4 http://www.wri-irg.org/node/2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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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1기획기사

지우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스위스의 군대와 반군사주의 운동

무장중립과 용병의 나라

우리가 스위스 하면 보통 떠올리는 것에는 알프스와 초콜릿, 스위스 은

행, 높은 국민소득과 함께 무장중립과 용병이 있다. 스위스는 17세기 이

전부터 외교적으로 무장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타국끼리 벌이는 전쟁에

일절 참가하지 않으며, 타국의 군대가 영토를 통과하는 것도 인정하지 않

겠다는 입장이었다.

스위스의 영세중립국 지위는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 열린 1815년 비엔

나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스위스

는 나폴레옹 원정 이후로 2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침략당한 적이 없다. 스

위스가 전 유럽을 공포와 파괴로 몰아넣은 양차 세계대전마저 피해갈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무장중립 노선 덕이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스위스 용병은 중세시대부터 유럽에서 그 강인함과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위스는 예전부터 수십 개의 칸톤(자치주)으로 이루어진 연방 국

가였는데, 각 칸톤이 저마다 군대를 보유하고 필요시 프랑스나 독일 등 다

른 나라에 군대를 빌려주기도 하였다. 알프스 산맥과 험난한 자연환경 탓

에 농업과 무역이 발달하기 어려웠던 것도 스위스 인들이 생계를 위해 용

병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이다. 현재는 용병을 사실상 운영하고 있지 않지

만, 이런 전통이 이어져 바티칸에서는 지금도 스위스 용병을 근위병으로

고용하고 있다.

스위스의 군대제도

“스위스는 군대를 보유한다. 군대는 원칙상 민병으로 조직된

다.” -스위스 헌법 58조 1항

오늘날 스위스는 징병제 국가임에도 사실상 상비군이 없는 민병 제도

기획기사

GSoA(군대 없는 스위스를 위한 모임)의 징병 폐지 캠페인 (사진출처: GS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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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3기획기사

로, 한국으로 치면 동원예비군을 중심으로 군대가 편성되어 있다. 특수기

술병과 장교 부사관 등 직업군인은 3천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일상적

으로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 동원 소집되는 구조이다. 최대 동원 병력

은 22만 명으로 인구가 800만 명인 것을 생각했을 때 작지 않은 규모이

다.

헌법에 따라 모든 스위스 남성은 병역의무를 지며(여성은 자원에 의해

복무할 수 있다), 최소 260일 이상 군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다. 징병 대상

자는 19세가 되면 18~21주 간 기초군사교육을 받고, 이후 20~32세까지

1년에 3주씩 7번에 걸쳐 ‘현역’(한국의 동원예비군과 유사)으로 소집되

어 군사훈련을 받는다. 이후 33세부터 42세까지 ‘예비역’(소집 없는 향토

예비군과 유사)에, 그 이후 42세부터 50세까지는(유사시 55세까지 연장)

‘보충대기역’(소집 없는 민방위대와 유사)에 편입된다.

예비군 훈련 기간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며, 대학 시험이나 장기 해외

출장, 병원 입원 등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 해당 훈련을 연기할 수 있

다. 예비군 기간 중 소득 보전도 이루어져 통상 수입의 절반을 국가가 지

급하고, 나머지 반은 직장에서 지급한다. 국방 개혁안에 따라 2004년부

터 전체 민병의 20% 범위 내에서 의무 복무일을 연속해서 근무할 수 있는

‘계속 복무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대체복무제

“모든 스위스 남성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 민간 대체복무는 법에

의해 보장된다.”-스위스 헌법 59조 1항

스위스는 1996년부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민간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그 전까지 병역거부자들은 6개월에서 1년 반 동안 감옥에

보내졌다. 대체복무자는 병원, 도서관 등 대부분 사회복지 분야에서 현역

근무의 1.5배인 390일을 근무한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이후로 매년 2천

명 정도의 병역거부자가 여기에 지원하고 있다. 군복무와 대체복무 모두

부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은 과세소득의 4%에 해당하는 ‘군면제세’를 납

부해야 한다.

군대를 폐지하라

최근 20여 년 간 스위스에서는 오래된 무장중립 노선에 대한 반론이 끊

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놀랍게도 중립국의 지위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무장중립이 아닌 비무장중립으로 가자는 것이다. 군대 폐지론의 근거는

오늘날 전쟁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영토의 경계를 지키는 전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핵무기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전면전은 곧 공

멸을 의미하기에, 전쟁을 준비하는 데 쓰는 돈을 복지로 돌리고 전쟁 방지

와 평화에 앞장서자는 주장이다.

한편 군대 유지론자들은 여전히 재래식 무기를 쓰는 전쟁이 끊이지 않

고 있다는 이유로 무장중립의 고수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전쟁이 없어도

폭동이나 반란으로부터 스위스를 지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침략의 방어와 국내질서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물리력의 필

요를 인정한다고 해도, 징병제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남는다.

징병제를 지지하는 측은 의무적인 복무 없이 스위스 군대는 현재 업무

를 수행할 수 없으며, 숙련된 전문 인력이 자발적으로 군대에 복무하지 않

Page 15: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24 25기획기사

숙한 국가라는 점이다. 한 예로, 2003년 실시된 스위스 국민투표에서는

‘군병력 감축안’, ‘예비군제도 개선안’, ‘70만 장애인에 대한 공공건물

접근가능시설 마련’, ‘원자력발전소 폐쇄’ 등 9개의 안건이 상정되어 투

표에 붙여졌다.1

징병제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는 작년에 또 다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것을 계기로 군복무에 대한 공적인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징병제는 아직 유지되고 있지만 스위스의 군대 규모는 점점 축소되고 있

어 1980년대 80만 명이 이르던 것이 현재는 20만 명 수준이고 앞으로도

더 감축할 예정이다.

GSoA는 군대 폐지 외에도 미국 전투기 수입 제한, 무기수출 금지, 가정

내 총기 소지 금지 등 다양한 의제를 가지고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우

리 주장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군대 개혁에 대한 압박이 될 것이

다”라고 GSoA 대변인 세라이나 파첸(Seraina Patzen)은 말한다.

1 임재성, ‘군대폐지 국민투표가 가능합니까?’, 프레시안, 2008년 5월 8일.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5814

을 것을 우려한다. 이들은 또한 징병제가 스위스 연방을 하나로 묶고 있는

국가적인 유대감의 형성에 막대하게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의 네 언어를 공용어로 쓰는데다가, 독립

자치주인 26개의 칸톤으로 나누어진 스위스를 함께 꾸려가는 데 병역의무

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군대 폐지 운동은 GSoA(군대 없는 스위스를 위한 모임)라는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1989년, 2001년, 2013년 세 차례에 걸

쳐 징병제 폐지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투표 결과는 모두 군대를 유지하

자는 쪽의 우세였다. 아직 징병제 폐지가 다수의견은 아니지만, 20~30%

의 지지를 얻고 있다. 군대 폐지에 대한 지지는 큰 세대 차이를 보인다. 젊

은이들은 군대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반

면, 나이든 사람들은 강제적 병역이 중립국을 지키고 연방의 결속을 유지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대 없는 나라를 상상하며

스위스는 200년 이상 어떠한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중립국임에도 불

구하고, 아직도 징병제가 시행되고 있고 군사주의적인 전통이 강한 국가

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시기도 1990

년대 이후로 유럽 국가 중에서는 늦은 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군대나 징

병제의 폐지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분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보

인다.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은 스위스가 국민들이 직접 발의한 법안을 국민투

표를 통해서 결정하는 제도가 130년간이나 존재했을 만큼 민주주의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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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노르웨이의 유연한 징병제, 그리고 여성 징병 논란

여옥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에 위치한 노르웨이는 우리에게 ‘북유럽’으

로 통칭되는 그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복지

가 잘되어있고 소득도 높아 살기 좋은 선진국, 노벨평화상 시상식과 확산

탄금지협약 조인식이 열렸던 수도 오슬로, 그리고 박노자 선생님까지. 좋

은 이미지가 가득하다. 노르웨이는 우리와 같은 징병제 국가이기는 하지

만, 사회의 수준에 따라 얼마나 다른 징병제가 가능한지 잘 보여주는 사례

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활동회원 세미나에 참여한 활동회원들

도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관심을 끌었

던 것은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였다.

무늬만 징병제, 선택적 징병제

예상대로 노르웨이는 매우 유연한 형태의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00명 규모의 군 병력 중 징집병은 절반이 조금 넘는 11,300명 정도

된다. 노르웨이의 모든 남성은 18세부터 44세까지 병역의무가 있지만, 실

제로는 30세 이후가 되면 거의 징집되지 않는다. 매년 32,000명 정도가

징집연령에 도달하고, 한 해에 입대하는 숫자는 1만 명이 되지 않는다. 군

복무를 연기하거나 피할 수 있는 여러 사유가 있고, 많은 수가 그렇게 하

고 있다. 군복무 기간은 1년이지만 실제로는 8~9개월 정도 복무한다고

한다. 44세까지 예비군 의무가 있지만 예비군 훈련은 거의 없다.

병역거부권은 1922년부터 법적으로 인정되었고 최근까지 대체복무

의 근거가 된 법은 1965년에 만들어진 개인적 신념 사유에 의한 병역면

제법(Law on Exemption of Military Service for Reasons of Personal

Conviction)이다. 법 제1항에는 “군 복무의 수행이 자신의 진지한 신념과

충돌을 일으킬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군복무를 면제한다”고 명

시하고 있다. 종교적, 비종교적 사유뿐만 아니라 핵무기 사용반대도 사유

노르웨이 육군 여성 병사들 (사진: 노르웨이 국방부)

Page 17: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28 29기획기사

로 인정하고, 신청시한에도 제한이 없다. 신청은 거의 자동적으로 허가된

다. 대체복무 기간은 현역복무기간보다 1개월 더 긴 13개월이며, 대체복

무 분야 역시 다양해 공공기관, 시민단체에서도 가능하다. 많은 수의 병역

거부자들은 중고교 폭력예방 교육프로그램에서 대체복무를 한다. 대체복

무를 하는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잡지발간 업무도 대체복무이고, 대체복무

자 노조도 있다.1 그동안 노르웨이는 대체복무까지 거부하는 완전거부자

에게 징역 1년을 살게 하는 처벌을 시정하라는 권고를 받아왔는데, 2012

년부터는 대체복무제마저 폐지되었다.2 10년 전과 비교해 필요한 국방인

력도 줄어들고 대체복무 신청 숫자도 줄어들어서 병역거부자들에게 굳이

대체복무를 시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징병제 국가에서 병

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도 안 시키고 그냥 면제해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래된 여성징병 관련 논의

이런 나라에서 여성들에게도 군대에 가라고 한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

다. 그것도 징병제 폐지가 대세인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징병법안 마

련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2013년 6월 노르웨이 의회에서 통

과된 결의안대로라면 2015년부터 노르웨이 여성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1년간 의무적으로 병역을 이행해야 한다. 의회의 결정인 만큼 정부가 따

1 한겨레21 2004.10.28 제531호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12367.html

2 Norway: end of substitute service for conscientious objectors http://wri-irg.org/node/13541

라야 하지만 2년 남짓 시간 동안 여론에 따라 바뀔 가능성도 존재한다. 노

르웨이 국방부는 현재 8% 수준인 여군 인력을 2020년까지 20%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노르웨이는 1913년 여성에게 투표권을 처음으로 부여한 나라이기도 하

고,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70% 후반대로 OECD 평균(62%)을 훨씬 상

회한다.(한국 50.2%) 성별 임금격차도 마찬가지다. 여성임금이 남성임금

에 비해 64.4%밖에 안되는 우리나라3와 달리 노르웨이는 남녀임금격차가

10% 미만이다. 또 노르웨이는 2003년 세계 최초로 여성임원할당제를 도

입해 공기업과 상장기업 임원의 40%를 의무적으로 여성으로 채우도록 규

정돼 있으며 2006년부터는 의무사항으로 강화, 2008년부터는 이를 충족

하지 못할 경우 법원 명령에 의한 기업해산이나 벌금형도 가능하다고 한

다. 성별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왔고, 현재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차이로 인한 불평등은 실질적으로

해소가 된 상태라고 봐도 될 것이다.4 그렇기 때문에 노르웨이는 우리나라

에서 군대에 대한 불만으로 나오는 “여자도 군대 가라”는 이야기와는 차

원이 다른 여성징병에 대한 맥락과 논의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에서는 군대만이 유일하게 남은 남성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반군사주의

3 E-나라지표 : 남성대비 여성임금비율 (2012년)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714

4 세계경제포럼(WEF) 2013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136개국 중 노르웨이는 3위, 한국은 111위

Page 1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30 31기획기사

이번 여성징병 결의안은 사회주의 정당의 젊은 여성들이 논의를 주도했

다.(좌: 사회좌파당, 노동당, 중앙당/우: 보수당, 진보당, 기독인민당) 젊

은 세대는 여성이 남성의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사회적으로 여성이 군대 내 다른 관점과 가치(돌봄, 부드러움, 유연함)를

부여해 좀더 인간적인 이미지의 군대-NATO군이 아프간 점령시 아프간

여성들을 대하기 위해 여성군인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 역시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여성징병에 대한 논의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기 때문에 똑

같은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징집된 여성은 남자들과

동일하게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강한 육체적 훈련을 받게될 것이고, 이 훈

련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남성중심적인 문화이다. 남성과 똑같아지기를 요

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특성으로 기존의 군대

를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기대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여성의

돌봄 가치가 가부장적이고 군사적인 구조에 침투할 수 있을까? 결국 여성

을 통해 군대 내 평등과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군대가 활용하는 논리

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5

아마 노르웨이에서 여성징병제가 시행되더라도 모든 여성들이 강제적

으로 군복무를 해야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

는 징병제 하에서도 많은 남성들은 본인이 원하지 않을 경우에 군복무를

피할 수 있고, 폭넓은 대체복무와 면제가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가 선택한 여성징병이라는 방식

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렇게 유연한 형태의, 사실상 모병제와 크

5 Conscription for women in Norway http://wri-irg.org/ConscriptWomenNorway

게 다를 바 없는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군대에 가는 방식

의 ‘평등’을 택했을까. 페미니즘의 가치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질서에서 모두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군사화된 남성과 비군사화

된 여성 사이의 평등을 위해 여성을 군사화하는 방법 말고 남성을 비군사

화하는 방법도 있다. 참고로 성평등을 이유로 여성징병제 시행을 검토했

던 스웨덴은 2010년 징병제 자체를 폐지했다.

여론의 동향을 살피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노르웨이 정부가 여

성징병을 결정할지는 좀더 두고봐야겠지만, 여성징병이 실시된다면 남성

중심의 군대에 어떤 식으로든 -여성화장실 증축이든, 군대 내 성폭력사건

의 가시화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군대를 좀더 좋은 곳

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여성을 활용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반대

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여성징병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노

르웨이 국방부장관 스트롬 에릭슨(Anne Grethe Strom Erichsen)은 여

성이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북유럽에서 가장 강한 해군 전력을 가지고 있

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한 남녀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폭

력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군사화 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페미니즘과 반군사주의는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

다. 이것은 강력한 징병제가 유지되고 있고, 남녀불평등이 심한 한국 사회

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age 1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32 33기획기사

기획기사

이스라엘, 어긋난 욕망의 자화상

나동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한국과 같은 해 이스라엘 정부 수립

한국과 이스라엘은 똑같이 1948년에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2차 세계대

전 종결과 그에 따른 전세계적 대격변의 결과물이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았다는 점(적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이나 정부 수

립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갈등의 성질은 서

로 다르다. 한국전쟁이 민족 간 이념대립의 결과물이라면, 중동전쟁은 아

랍인+이슬람 세력과 유대인+유대교(여기에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방세계

까지 결합) 사이의 종교전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객관의 외피를 쓰고 이렇게 요약하기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

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이미 누군가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땅에 우격다짐

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죄의식은 커녕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

고 느끼는 배경에 시오니즘

이 있다. 이스라엘은 세계 유

일의 유대교 국가다. 유대인

국가 건설운동인 시오니즘

은 19세기 후반 여기 저기 흩

어져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

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이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를 끝

내고자 했다. 흔히 구약성서

로 요약되는 유대교의 종교

적 전통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하는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들

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시오

니즘은 표면상 종교적 전통에

기반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싹튼 근대국민국가 건설과 민족주의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오니즘은 여기에 종교적 전통을 결합시킨 일종의 민족해방운동이

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

던 영국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17년 벨포어 선언을 발표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유대인이 집단 이주를 시작하고 이미 터를 잡고 살고 있던 팔레스

타인인들과 충돌이 잦아진다. 2차 세계대전을 경유하며 갈등이 점점 심해

지자 이 문제는 UN으로 넘어갔고 UN은 요르단강 서안을 경계로 아랍국

이스라엘의 병역거부 운동가들이 "전쟁

범죄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며 시위를 벌

이고 있다. (사진: Eviv)

Page 2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34 35기획기사

안 하루 네 시간 정도 봉사활동으로 병역을 대체할 수도 있다. 가장 면제

를 많이 받는 집단은 하레딤(복수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의미, 단수형은 하레디)으로 불리는 유대교 원리주의자들이다. 보통 한국

언론에서 극정통파, 초정통파, 극보수파 등으로 부르는 이들은 세속국가

의 법보다 유대교의 율법을 우선시하며 폐쇄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

다.2 신학생들은 3년간 별도의 시설에서 신학공부로 병역특례를 수행할

수 있다. 현재는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자.

병사들은 매달 200달러(약 21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휴가는 1년

에 15∼20일을 쓸 수 있다. 다만 비전투 병과는 우리나라의 상근예비역과

같이 집에서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군은 대외적으로 강압적인

위계질서가 덜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휴대폰 사용이나 장신구 착

용, 외출, 외박 등을 모두 용인하고 있다.

이스라엘 징병제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

한국의 병역면제율은 약 2.4%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

을 만큼 낮은 수치다. 반면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병역면제율은 상대

적으로 높다. 이런 차이가 병역기피에 대한 엄청난 불만으로 작동한다. 병

역기피 문제는 선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완벽에 가까운 징집 시스템

은 군사주의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분노의 화살은 잘못된

시스템보다 병역을 수행하지 않은 집단으로 향할 때가 많다. 예비역들의

우월감은 피해의식과 쌍을 이룬다.

2 심지어 이 지역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경찰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가와 유대인국가를 동시에 세우는 안을 통과시켰다.(1947년 11월) 팔레스

타인이 이 안을 거부하는 가운데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국가를 선포하였고 영국이 철수하자 미국 등 서방세계의 지원을 등에 업

고 범아랍세력과 전쟁에 돌입한다. 이것이 1~4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스라엘 징병제

이스라엘 군대는 상비군 18만을 운용하며(예비군 45만 정도), GDP의

7%를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다. 인구 대비 상비군과 예비군 비율이나 GDP

대비 국방비 지출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다.1 군사력 역시 막강한 편으로

육군 전력 10위, 공군 전력 6위로 평가 받는다. 전반적으로 한국과 매우

비슷한 상황이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사회

전반이 매우 군사화 되어 있다.

복무 기간은 남성 3년, 여성 21개월이고 여성은 주로 비전투 분야에 복

무한다. 자원할 경우 여성도 전투병으로 복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 및

영주권자가 병역 대상자이지만 비유대인, 팔레스타인인들은 해당되지 않

는다.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은 1957년부터 입대를 요청하여 받아들여졌

으며, 베두인족은 자원입대가 가능하다. 만 17세가 되면 남녀 모두 징병

검사를 받게 된다. 45세까지 전투병 및 전투지원병으로 연 30일의 예비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이후에도 대략 50세까지 한국의 민방위와 비슷

한 후방지원 업무를 수행한다.

신체적 문제가 있는 징집자는 병역이 면제된다. 이 경우 군복무 기간 동

1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800만에 조금 못 미친다..

Page 2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36 37기획기사

엄청 높고(이스라엘은 남녀 흡연율이 거의 1:1) 성격이 거칠다고 어느 결

혼중개 사이트에선 병역면제 여성들에게 부가점을 주다가 걸렸다는 둥,

면제 받으려고 하레딤으로 위장했다는 둥의 기사들이 막 나온다. 한국인

들의 관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아서 이스라엘 여군을 검색하면 군복 코스

프레 사진이 제일 많이 뜨고 여지없이 이스라엘 여군이 제일 섹시하다는

따위의 글들이 주루룩 나온다. 여성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고 피를 토하다

가 여군을 상대로 각종 성적 상상의 나래를 펴는 남성들을 보면 뭐 어쩌라

는 건가 싶다. 이들의 여성 징병 주장에는 상극의 요구가 늘 함께 따라다

닌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극단을 요구하는 사이코 같은 주장 말이다. 대

개 어느 국가에서나 여성 징병과 관련된 논란에는 이런 양면성이 따라다

닌다.

한편, 제한적이나마 병역거부도 인정하고 있다. 1995년부터 폭력에 반

대하는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는데 정부의 까다로

운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는 위원회에 의해 결정되며, 매년마다 해당자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특정 분쟁 지역에 투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선택적 병역거부는 어느 정도 인정되지만 처벌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를 돌아본다

징병제는 어디서나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역시 대

단히 군사화 되어 있는 사회로 폭력지수가 높고 성차별 역시 상당하다. 세

대 간 사고방식의 차이도 존재한다. 젊은 세대는 안보를 빌미로 시행되는

희생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도 당연하

다. 갈등의 양상도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병역에 대해 매우 완고한 한국사회에서조차 이스라엘 징병제는 신화에

가까운 허상을 갖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징병 때문일 것이다. 이 조

그만 나라가 사방을 둘러싼 아랍세계와 맞서 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여성

징병을 포함한 완고한 시스템 덕분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전

혀 다르다.

우선 예상과 달리 병역면제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2007년 이스라엘

군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 남성의 병역면제비율은 26%, 여성

의 병역면제비율은 43%에 달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적 사유의

병역면제가 제법 많다. 여성 역시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는 생활을 선택할

경우 면제가 되며 병역거부의 경우 남성은 탈락자가 훨씬 많지만 여성은

이보다 쉽게 인정을 받는다. 임신, 출산도 면제 사유가 된다.

이 가운데 최근 가장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게 앞서 언급한 하레딤의 병

역면제 문제다. 세속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시오니스트들은 정부 수립 당

시 하레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각종 특혜를 부여했다. 그런데 하레딤

의 수가 급격히 늘어 어느새 이스라엘 인구의 10%를 차지하게 되었고 병

역면제 대상자가 7만 명 가까이 이르는 상황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이

들의 병역면제는 가장 뜨거운 사회 문제가 되었고 매번 선거 주요쟁점으

로 부상했다. 급기야 지난 2012년, 대법원이 하레딤의 병역면제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우파 연립 내각이 붕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

달에는 이들의 입대를 허용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야당은 전부

표결에 불참했다. 이에 반발하는 하레딤은 30만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를

열어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다양한 면제 또는 기피 사례는 주요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

여 웹서핑을 하면 재밌는 사례가 많은데 군대 다녀온 여성들이 흡연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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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9리뷰-서평

양똘 | 출판노동자 +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수치’, 꽃을 피우다

-존 쿳시,《추락(Disgrace)》를 읽고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데이비드 루리

내가 유난히 끌리는 이야기 유형이랄

까, 그런 게 있다. 나는 그걸 ‘추락’이라

고 부른다. 말하자면 ‘추락’에 대한 이

야기를 사랑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까

마득히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자기 몸을

던지고 마는 추락에서부터, 남부럽지 않

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아주 쓸데없는

것을 계기로 속절없이 망가져버리는 추

락까지, 그 모든 ‘추락’들에 흥분하는

편이다. 변태같이 왜 그러는 건지 잘 몰

리뷰-서평

그렇다고 이스라엘 주변의 세계가 무조건 불지옥처럼 끔찍한 것만도 아

니다. 거기에도 사람이 산다. 이들은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국

보다 개인주의가 발달해 있다. 군대 내에서 행동도 훨씬 자유롭다. 군대는

채식주의자의 식단도 지켜준다. 동물권 시위나 성소수자의 행진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개별적 사항들이 이스라엘 사회의 진보성을 설명해주지는 않

는다. 좌파정당조차 내부 경제 분배 문제에 있어 차이를 보일 뿐 팔레스타

인과의 갈등과 같은 안보 문제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모두 원수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다. 예루살

렘에서 그 긴장은 극에 달해 있고 정착촌 문제가 가장 첨예한 사항이긴 하

지만 서로 왕래하며 어울려 지내기도 한다. 특히 활동가들에게 민족이나

국경은 그리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완전무결한 징병제라는 허상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이스라

엘 군대에 투영된 이미지는 뒤틀린 욕망의 산물이다. 극도의 대립과 불신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세상에 여기만큼 팍팍한 곳이 어디엔가 또 있

을 거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 세미나를 하며 얻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다. 다른 세계를 상상

하자.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대 달라질 것이 없다는 체념일 수도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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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1리뷰-서평

한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는 합의를 했더라도 교수라는 권좌에

있는 자가 학생과 ‘너무 사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수업 점수에 반영

한 것이 범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논쟁거리들은 루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가 욕망을 느꼈

다는 것만은 하늘땅이 뒤집어진다고 해도 사실이며, 그의 내밀한 욕망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급기야 재판 같은 자리에 끌려나온 순간,

이미 ‘수치’는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

니다. 그렇다면 루리로서는 너무 밝은 조명 아래 해부당한 자기의 욕망을

놓고 더 왈가왈부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당사자 멜라니를 제외한 이 하이

에나들한테 그의 ‘진정성’이라는 고기 찌꺼기를 던져줄 마음이, 그에게

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그는 너무 똑똑하고, 무엇보다 늙었다.

자, 이렇게 그는 최초의 ‘추락’을 한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철학

적 말장난이나 한 대가로 교수직을 빼앗기고, 자신의 도시를 떠나 딸이 살

고 있는 시골 농장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아, 이런 건 별로 재미가 없다.

오십대 지식인 남성의 섹스편력에 대한 이야기인 양 치기 어리게 시작을

하더니, 삼분의 일쯤 되는 지점에서 꼬리를 말고 내빼는 셈이다. 내가 아

무리 추락 이야기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너무 싱거운 추락

이지 않은가?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사소한 계기도 아니며(서른 살

연하 제자를 학교 앞에서 대놓고 꼬시다니, 누가 보더라도 추락이 내재되

어 있는 짓이다), 무엇보다 추락하는 주인공의 충격과 몸부림이 거의 드러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잘못 고른 것일까? 이것은 그저 노교수의 성추문,

다시 말해 시시하고 저속한 추락 이야기들 중 하나인 걸까? 존 쿳시의 작

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어도, 그가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일지언

랐는데, 존 쿳시의 대표작 『추락』을 읽고 나니 조금 알 것도 같다.

사실 이 소설의 원제는 ‘Disgrace’, 즉 ‘망신’이나 ‘수치’에 가깝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딱 봐도 작가의 페르소나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

가 당한 첫 ‘망신’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출발은 이렇다. 문학

을 가르치는 점잖은 오십대 남자 교수가 ‘망신’을 당한다. 슬프게도 이때

‘망신’에 들어갈 가짓수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또 비교적 드

라마틱한 망신거리를 골라보자면, 그렇다, 제자와의 성추문. 어느 비 오

는 날에(비만 오지 않았더라도!) 우연히 앞에서 걸어가던 멜라니라는 학생

에게 욕망을 느끼고,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

제를 잘 해결”해온 사람답게(이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다) 적극적으로 대

시해서 결국 목적을 이룬 대가다. 소문이 퍼지면서 대학 내 위원회에 ‘성

희롱’으로 신고가 들어가고, 그는 자기변호뿐만 아니라 자기반성과 사과,

그냥 사과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 그것이 당신의 진실한 감정을 반영하는 것입니까?”

그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 말을 당신에게 했소. 이제 당신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

소. 당신은 나한테 그 말의 성실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소.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오. 그것은 법의 소관 밖이오. 나는 할 만

큼 했소. 처음으로 돌아가서 규칙대로 합시다. 나는 유죄를 인정

하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이오.”

정황상으로 보면 그는 강제로 관계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아니지, 나도

모른다. 강제였을 수도 있다.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합의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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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3리뷰-서평

요. (...)”

이 소설에서, 그리고 존 쿳시의 다른 여러 소설들에서도 ‘동물의 삶’은

주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던져진다. 루리는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서(사실 그는 이전에 얼마든지 욕구

를 참을 수 있었으므로, 이번엔 ‘안 한’ 것에 가깝다) 추락해놓고 왜 때 아

닌 동물 타령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

다. 여기서 부녀는 ‘차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은 없다

고 말하는 딸. 그것은 즉 삶에는 ‘높이’가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도 큰 맥

락에서는 거기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동물의 삶 또한 우리보다 ‘낮은’ 것

이 아니라, 그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

지 그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자기가 옮겨온 이 ‘다른 차원’에 대해서

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그는 ‘추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그렇게 느끼

겠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차원을 옮겨온 것이다. 루시의 말대로 삶에 ‘높

고 낮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망신’이나 ‘수치’란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내 삶이 나보다 ‘낮은’ 사람들에 의해 모욕당하고 내가 아래

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일까?

이제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해 보였던 이 추락, 굴러떨어짐에 대해서 다

시 생각해보아야만 하게 됐다. 하지만 속단하지 말고, 역시 좀 더 지켜보

자.

그가 죽어가는 동물들의 마지막을 돌보며, 전혀 상상해보지 못했던 그

일을 직접 하면서 다른 차원을 겪고 있을 때, 그와 그의 딸에게 무시무시

한 사고가 일어난다. 루시의 농장에 삼인조 강도가 침입한 것이다. 이들

정 시시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인내심을

발휘해 이 ‘추락’을 조금 더 지켜보자.

루리의 딸 루시는 “코뮌, 즉 가죽제품과 햇볕에 말린 도기를 그레이엄스

타운에 내다팔고, 옥수수밭 이랑에 대마를 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시작

해 자작농지에 남아 있으며, 이곳을 사랑하고 제대로 농사를 짓고 싶어 한

다. 그녀는 (아마도) 레즈비언이고, 동물 보호를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으

로 실천하고 있다. 즉, “도시 지식층인 그와 그녀의 어머니가 시대에 역행

하는 억세고 젊은 개척자를 낳”은 것이다. 루리는 딸과 함께 이곳의 낯선

생활방식에 적응해나간다. 날마다 몸을 써 일을 하고, 루시가 소개한 동물

보호소에 나가서 인도적인 안락사 일을 돕기도 한다. 이것은 자의이지만,

다른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이 낯설고 불편한 곳이 끝에 다다른 ‘바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그의 딸이 어울려 사는

‘흑인’ 이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다른 문화권”이고,

“동물복지에 관계된 사람들이 특이한 종류의 기독교인들 같아 보인다.”

아버지의 반응을 본 딸은 말한다.

“(...) 그 사람들이 저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을 것

이기 때문에, 베브와 빌 쇼와 같은 친구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시

는 거죠.”

“루시,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동물들과 공유하는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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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5리뷰-서평

지만, 어떤 의미에서 루리에게 강간범들보다 더 지독한 타자는 사랑하는

딸 루시다. 그리고 루시가 속해 있는, 강간범들 또한 속해 있는 그 ‘문화

권’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사실상 아래로의 추락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

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라고, 한가한 소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쓸데없이 성욕이 왕성했던 우리 노교수님은 이제 어쩌면 좋은가?

이게 끝이 아니다. 제발 그만하면 좋겠다 싶을 때까지도, 이 소설의 ‘추

락’은 끝나지 않는다. 스포일링은 이쯤에서 멈추고. 중요한 것은 이 소설

이 삶의 층위, 또한 존재의 층위에 대해 정말로 빡세게 고민하게 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질문을 던지며 혼란스러운 독자의 머리채를 끌고 다니는

것이 이 작가의 특기인 것 같다. 여성과 남성, 젊은이와 늙은이, 도시와 농

촌, 백인과 흑인, 서구와 아프리카, 영어와 아프리칸스 어, 인간과 동물...

이 모든 경계에 충실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던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타자

(다른 차원) 앞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진다. 그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자기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폭발한다. 우리의 루리 교수는 자기라는 사

람을 자신감 넘치게 정의하며(첫 문장을 기억해보라) 이야기를 시작했지

만, 추락을 거듭할수록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가는 사람으

로 생각”하고 있다. 자기가 대체 뭔지 알다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도

타자라는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다.

“그는 수술대 위에 몸을 뻗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메스가

번쩍인다. 그의 몸은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개봉된다. (...) 이런 게

모두 뭐지? 의사가 투덜거린다. 그는 쓸개집을 쿡쿡 찔러본다. 이

게 뭐지? 그는 그것을 잘라 던져버린다. 그는 심장을 쿡쿡 찔러본

다. 이게 뭐지?”

은 루리를 화장실에 가둬 태워 죽이려고 시도하고, 그동안에 루시를 돌아

가며 강간한다. 바닥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또다시 만난 바닥, 아니 바닥도

없는 허공, 이 절대적인 절망과 수치를 루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당시 이 지역은 이렇게나 치안이 불안한 곳이었

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딸은 동

의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이 땅이 삶이고, 자기 자신이고, 그 끔찍한 사

고와 범죄자들조차도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루리는 미칠

노릇이다. 눈물을 들키는 것과 상관없이 바위처럼 꿋꿋한 딸은 이렇게 말

한다.

“우선, 아버지는 그날 저한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 고마워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이해한다

고 생각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세요. 그럴 수가 없

기 때문이죠.”

루리가 보기에 딸은 짐승보다 못한 세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게 전

부다. 그런데 딸은 아버지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강간을 당할 때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강간을 당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아버지가 애초에 남자라서? 흑인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 백인 교수라서? 루리에게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수치이고, 끝없

는 추락이다. 작고 예쁜 젖가슴을 가졌던 멜라니, 불같이 욕망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그 타자(他者)와의 접합으로 이렇게 나락에 떨어졌는데,

그보다 더 끔찍한 타자들이 그를 나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으로 자꾸 떠

미는 것이다. 생전처음 당하는 ‘폭력’ 그 자체인 강간범들은 말할 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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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7리뷰-서평

프리카 공화국을 무대로 흑백간의 갈등과 폭력의 원인을 탐구한 작품. -

중앙일보”라는 서평 한 줄은 정말 압권이다. ‘단순화’도 이 정도 되면 범

죄라고 할 수 있다. 존 쿳시는 자기 책에(뒤표지가 그의 잘생긴 얼굴 사진

으로 덮여 있으므로, 어쩌면 자기 얼굴 위에) 이런 문장이 써 있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그의 소설 스타일로 추측해보건대, 모르긴 몰라도, 그리 좋

은 말은 안 나올 것이다.

자기 심장에 대해서 ‘이게 뭐지?’라고 낯설어하는 고통 속에서도, 동시

에 그는 “수치를 나의 존재상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타자가 가

져다준 다른 차원, 그 지옥 같은 수치심을 그는 끌어안으려고 한다. 그것

이 그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멜라니에 의해, 토우스 리버에서의 그 여자에 의해, 로잘

린과 베브 쇼와 소라야에 의해, 그들 모두에 의해, 풍부해졌다. 그

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

들에 의해서도, 실패에 의해서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슴에 피는

한 송이 꽃처럼, 그의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친다.”

꽃? 꽃이라니? 그렇다고, 가슴에 꽃 한 송이 피우겠답시고 교수직에서

기꺼이 쫓겨나고 기꺼이 타 죽을 뻔하고 기꺼이 강간당할 수는 없는 일이

다. 물론 그건 우리 교수님도, 작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묻는 것이

다. 당신은 추락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수치도 한번 느끼지 못하고, 풍

부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자신의 차원에서 자

기 자신으로서 안전하게 죽을 것인지?

이 책은 내가 읽어본 소설들 중에서 단연 ‘복잡한’ 소설에 속한다. 이

소설이 삶을 높이(수직)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수평)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끌어안자” 따

위의 손쉬운 휴머니즘을 설파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존 쿳시는,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아마 어느 독자가 어떤 정

성으로 읽느냐에 따라 충분히 다른 해석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해석과

관련해서 좀 웃기는 얘기로 끝내자면, 책 뒤표지에 인용되어 있는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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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9기획연재-게임과 평화

이런 게임이 나온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즐거운 기분으로 게임에 몰입

할 수 있을까? 왠지 출시 전부터 온갖 논란에 휩싸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게임이 정말로 있다. 20세기 일본을 16세기 에스파냐로, 조선을 푸

에르토리코로, 쌀·대마·면화·인삼을 옥수수·인디고·설탕·담배·

커피로 바꾸면 그렇다.

안드레아스 사이파스가 2002년에 선

보인 보드게임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출시 직후부터 평단과 게이머

들의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가장 큰 보드게임 커뮤니티인 보

드게임긱에서 수년 간 순위 1위를 독차

지했고, 지금까지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한편 이 게임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별로 없었다. 따지고 보

면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게임이라 그런 게 당연한 듯도 하

다.

하지만 비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바스찬 아타이는 어느 게임사(史)

웹진에 실린 글 ‘푸에르토리코의 수사학’에서 이 게임을 “철저하게 유럽

중심적인 문화의 산물”이라고 평했다. 그것이 “서구의 억압적 실천을 축

소·은폐하고, 비유럽인의 성취를 부정하며, 서구인을 진보의 주된 촉매

로 묘사하는 자유주의적 역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1

1 Sebastian Atay, The Rhetoric of Puerto Rico, Memory Insufficient, July 2013.

지우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채굴업자, 선장, 고위관리, 상인, 토지 개척자, 제조업자, 건축업자. 여

러분은 신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가장 풍요로운 농장을 소

유할 것인가?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것인가? 여러분의 목표는 오

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최대의 부와 최고의 명성을 성취하는 것!”

여러분은 20세기 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여러분과 경쟁자들은 기회의

땅 조선으로 앞 다투어 건너가 토지를 불하받고 쌀과 대마, 면화, 인삼을

재배한다. 수확된 쌀과 가공된 삼베, 면직물, 한약은 다시 선적하여 내국

으로 수출한다. 보다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해 여러분은 조선에 시장과

창고, 관청, 학교, 항구, 수공업 공장을 건설한다. 총독과 다양한 역할의

특권을 활용해 수탈과 개발로 가장 많은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이 승리한

다.

푸에르토리코와조선

기획연재-게임과 평화

Page 2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50 51기획연재-게임과 평화

규모 농장이 건설되었고, 여기서 일할 아프리카인 노예가 대량으로 실려

왔다. 이때 콜럼버스의 ‘발견’ 당시 3만 명이 넘었던 선주민 인구는 질병

과 과로, 학살로 이미 2천 명 아래로 줄어 있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는

4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인

종 구성은 백인이 75%, 흑인이 12%이고, 미원주민은 0.5%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푸에르토리코는 조선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둘 다 일본과

에스파냐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미

국에 종속된 신식민지 체제를 겪었다. (푸에르토리코는 1952년부터 국

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 받아 미국의 완전한 주는 아니지만

자치령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각각 동아시아와 중앙아메

리카에서 공산진영에 맞서 최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양국 모두 아직

까지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해 있다는 점도 같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자.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승점을 얻는 방법은 두 가

지다. 하나는 생산물을 본토로 실어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이 점은 게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수탈과 그것을 위한 개

발은 식민 지배의 본질이 아닌가. 이제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

자.

플레이어는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과 건물에 사람을 배치한다. 사람이

없는 농장과 건물에서는 생산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흑갈색’ 목재 토큰으로 표현되는 이 사람들은 규

칙서에 따르면 식민지 ‘이민자’를 상징한다. 배에 실려 온 이민자를 사탕

수수 농장에 보내 일을 시킨다고? 솔직해지자. 이건 이민자가 아니라 노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 동쪽 끝의 섬을 발견

했다. 50년 뒤, 푸에르토리코는 번성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손에 의

해!”

-‘푸에르토리코’ 영문 1판 상자 뒷면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푸에르토리코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할 것 같

다. 1493년 콜럼버스는 이 섬에 상륙해 에스파냐 국왕의 영토임을 선언했

다. 뒤이어 이 섬에 정착한 에스파냐인 식민자들은 금광을 개발하고 현재

수도인 산후안을 개척했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때다.

스페인어로 ‘puerto rico’는 영어로 ‘rich port’, 즉 ‘부유한 항구’를 뜻

한다.

1530년대부터 금광이 고갈되자 사탕수수와 담배 등을 재배하기 위한 대

채석장과 옥수수밭, 인디고밭,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이민자'들

(사진: boardgamegeek.com)

Page 2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52 53기획연재-게임과 평화

은 없다. 나는 전쟁게임이나 유혈이 낭자하는 좀비학살 게임에 대해서도

별로 불만이 없다. 다만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만은 경계하

고 싶다. 적어도 게임의 수사가 현실의 어떤 면은 은폐하고 또 다른 면은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게임을 만들어 놓고 이 게임에서는 말이 잡힐 때 병사가 죽는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히는 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평화적인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감한 소재를 애써 회피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임’보다는 현실을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게임이다. 물론 그것이 일단 재미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예이다.

이 문제는 보드게임긱 커뮤니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물론 개발자와

출판사가 일부러 게임에 그런 은유를 심어놓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

면 그들에게 이것은 “그저 게임일 뿐”일 것이다. “그저 흑갈색 토큰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연목의 색을 그대로

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게임 중 커피를 나타내는 토큰과 헷갈릴 수 있는

색깔을 칠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해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게임의 수사가 몰역사적이

라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임의 수사적 기능을 부정하고 외면한다

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케이티 샐런과 에릭 짐머만에 따르면

“게임은 문화적 학습이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이며 “사회의 가치가 착근

되고 전달되는 장소”이다.2

이안 보고스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비디오게임과 같은 절차적 매체는 대상에 내재된 절차에 관한 의견을

세움으로써 그것의 핵심에 다가선다.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것은

곧 우리가 찬양하고, 우리가 무시하며, 우리가 문제 삼는 이런 과정들에

관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은 곧 이런 과정

들을 우리의 삶에서 심문하고, 미래의 경험으로 이월하는 것이다.”3

식민지라는 심각한 주제를 게임의 소재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

2 Katie Salen & Eric Zimmerman, Rules of Play: Game Design Fundamentals, 2003.

3 Ian Bogost, Persuasive Games, 2010.

Page 3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54 55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을 요구하며 거리를 점거하자 압제적인 정부들은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

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시

장이 활짝 열린 덕분이었을까? 아랍의 봄이 한참이던 2011~13년 한국은

310만 발가량의 최루탄을 수출했다. 이 기간 한국산 최루탄을 제일 많이

구입한 최대 고객은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인구 130만의 작은 섬나라 바

레인이다. 3년 동안 한국이 바레인으로 수출한 최루탄의 수는 150만 발로

바레인의 인구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렇게 한국이 수출한 최루탄은 바레인에서 개혁을 요구하며 일어선 민

중들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레인 경찰은 시위현장과 주거지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발포했다. 지난 3년 동안 최루탄 사

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최소 39명에 달한다. 적어도 바레인에서

최루탄은 비살상무기가 아니었다. 1987년 한국의 최루탄 사용실태를 고

발한 이래로 전세계를 돌며 조사활동을 펼쳐온 인권의사회는 2012년 8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바레인에서는 최루탄이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지

적했다.

경찰은 시위현장뿐 아니라 민가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최루탄을 던져

넣는 등 무분별하게 최루탄을 남용했다. 어떤 이는 밀폐된 공간에 가득찬

최루가스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했고, 일부는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 인권의사회는 바레인에서의 최루탄 사용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준이라며 이와 가장 유사한 상황으로 87년 한국을

꼽았다. 30여년 전 최루탄으로 인한 아픔을 경험했던 나라가 이제 다른 나

라에 그 아픔을 불러일으키는 최루탄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니, 어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까.

한국산 무기가 해외에서 탄압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비단 바레인뿐이

1987년 7월, 국제인권단체인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 이하 인권의사회)는 「한국에서의 최루가스 사용」이라

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한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

이 온 나라를 들끊게 하던 때였다. 당시 인권의사회는 한국 당국이 시위대

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가스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고 지적하면서 '민

간인에 대한 최루가스의 사용은 비인도적이며 의학적으로 용납불가능하

다'는 결론을 내리고 민간인에 대한 최루가스 사용을 금지하라고 권고했

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지 근 30년이 지난 지금, 이제 한국의 시위현장에

서는 더이상 최루탄이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주요 최루

탄 생산국으로 거론된다. 최루탄 생산업체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2011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시민들이 개혁

1 이 글은 2014년 4월 9일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박승호 | 무기제로 코디네이터

부끄러운메이드인코리아

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Page 3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56 57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수출허가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행 법규상 수출업자가

적법한 서류를 제출할 경우 사실상 기계적으로 허가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수출허가권자는 수출되는 무기가 수입국에서 중대한 인권

침해 행위에 사용될지 여부를 따져볼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어째서 바레인으로 최루탄 수출을 허가했느냐는 동료 활동가의 물음에 지

방경찰청 수출허가 담당자는 '주방용 칼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인다고 해

서 그 칼을 판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무기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상품일 수 없다. 무기는 살상을 전제로 만들

어진 특수한 성격의 상품이다. 주방용 칼의 주목적이 요리이듯, 무기의 주

목적은 살상이나 상해에 있다. 수출되는 무기가 평화적 시위자들을 죽이

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무기를 공급한 우리

가 어떻게 그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고 부인할 수 있을까?

지난해 4월, 유엔총회는 허술하게 규제된 재래식무기의 거래로 인한 인

류의 고통을 통감하며 무기거래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수입국 내에

서 무기가 중대한 인권침해에 사용될 위험이 존재할 경우 수출을 불허하

도록 규정함으로써 무기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예방해야 할 수출국

의 책임을 명문화했다. 무기거래조약 체결 이전에도 이미 상당수의 국가

가 수입국 인권상황을 근거로 무기수출을 불허토록 하는 법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어떤가? 바레인에서 39명이 죽어나가고 나서야, 그것도 지

난해 가을 무렵부터 국제시민사회와 언론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고 나서야 우리 정부는 '잠정적으로 바레인으로의 최루탄 수

출허가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번에 또다른 바레인의 사례가 되풀

이된다면 그때는 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뒤늦게' 수출허가를 보

아니다. 2010~12년 사이 한국이 약 310만 달러 상당의 산탄총 탄약을 수

출한 이집트의 경우를 보자. 이집트 당국은 2011년 아랍의 봄을 맞아 전

국적인 시위가 발발하자 장갑차와 산탄총, 최루탄을 동원해 잔혹하게 시

위대를 진압했다. 한국이 수출한 산탄총 탄약은 이집트에서 시위대를 잔

혹하게 진압하는 살인진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2011년 1월에서 2월 사

이 집계된 사망자 수만 최소 840명에 달한다.

바레인 경찰의 최루탄 남용으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이집

트에서 치안군의 산탄총 사용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한국 정부

는 어째서 해당 무기의 수출을 계속 허가해준 것일까?

문제는 허술한 무기수출 통제제도에 있다. 앞서 예시로 든 최루탄, 산탄

총 탄약은 통상 민수(民需)용 무기로 분류되는데, 이들 민수용 무기의 수

출은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법(이하 총단법)에 따라 경찰청장 또는

지방경찰청장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지게 된다. 문제는 총단법이 명확한

공개간담회 '최루탄, 바레인 그리고 아랍의 봄'에 참가한 바레인워치 활동가들

(사진: 전쟁없는세상)

Page 3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58 59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나름 | 전쟁없는세상 친구

“정말, 정말 유감입니다.” 겨울, 누구에게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

할 때. 하지만 유감이라는 말이 왜 이리도 매섭게 들리는가. 말을 듣고 있

던 이의 얼굴이 굳어진다. 겨울이라 그럴까. 한 번 굳어진 얼굴은 쉽게 펴

지지 않는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스웨덴 드라마 <발란더>

시리즈에 나오는 장면. 이를 지켜보는 나도 함께 굳어진다.

주인공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뜻하지 않게 알려지는 대목이다. 헤닝

만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북유럽 미스터리 열풍’

을 떠받치는 주요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다. 스웨덴 형사인 쿠트 발란더에

관한 이야기로, 영국에서 따로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인기가 있

다는 뜻. 그런데 개인적으로 좀 특별한 사연이 있어 이번에 소개를 해보려

한다.

어떤 인연

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류할 것인가?

총단법 등 무기수출 관련법 개정이 시급하다. 허가관청은 무기수출 허

가에 앞서 해당 무기가 수입국에서 중대한 인권침해에 사용될 명백한 위

험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위험성평가를 실시해야 하며, 그런 위험이 존재

할 경우 수출을 불허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의 법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무기산업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어

야 한다. 무기산업은 그 속성상 피를 먹고 자라는 산업일 수밖에 없다. '메

이드 인 코리아'가 새겨진 무기가 세계 곳곳의 압제자의 손에 쥐어진 그 모

습을 보고도 과연 우리는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인가? 무기산업을 바라

보는 우리의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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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61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의 팔레스타인 봉쇄에 항의하며 평화활동가들과 배를 타고 가자지구로 향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이 작가를 많이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와 관련해 좀 충격적인 것들을 알게 됐다. 먼저, 주인

공의 딸이자 동료 경찰로 나오는 린다 발란더에 관한 얘기다. 아주 강렬하

고 인상적인 연기를 해서 어떤 배우일까 궁금했는데, 2007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요한나 셸스트룀으로 당시 32살이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작가 만켈은 린다 발란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별도로 쓸 계획

이었는데 이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도저히 쓸 수 없었

다고 한다.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나도 꽤 충격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

들은 오죽 했을까. 덧붙인다면, 2013년 스웨덴에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시리즈가 만들어졌고 새로운 배우가 린다 발란더를 연기했다. 하지만 첫

시리즈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나는 새 배우에게 집중을 할 수 없었

다.

다음으로, 쿠트 발란더에 대한 사연을 빼놓을 수 없다. ‘고뇌하는’ 형

사, 교향곡을 듣는 경찰로 표현될 수 있는 이 인물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

기로)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실수도 하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한다. 예컨대 작가 자신도 말했지만,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증거를 바탕으

로 사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자신의 직관과 경험에 귀기울

이는 그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당시 나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

를 지나고 있었고, 이 고뇌하는 인물에 깊이 공감했다. 내가 발란더에 빠

져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이 드라마

의 마지막이 범죄/추리장르로 봤을 때 일반적인(?) 예상을 꽤 빗나간다고

우연한 시작

무엇보다 나와 스웨덴의 첫 인연은 바로 이 드라마로 시작됐다. 내가 스

웨덴에 오게 된 것은 거의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동반(지도)선생

님이 초청을 받아 방문하시게 됐고 나도 따라오게 된 것이다. 계획에 전

혀 없던 것이었지만 결국 같이 가기로 했고, 이후 나름대로 조금씩 준비

를 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이 드라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가 있던 지역에서 이 시리즈를 (자막 처리를 하여) 방영하고 있던 중이었

다. 사실 방영이 시작된 지는 좀 된 상태였는데 나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

았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스웨덴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왜 이저세야!’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일단 스웨덴어와 함께 이 사회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동안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드라마를 처음 보고 난 느낌은… 이를 훨씬 뛰어넘었다. 한 마디로 정말,

굉장했다. 특히 드라마에 스며있는 강력한 ‘사회적’ 의미에 놀랐고, 감동

했다. 그래서였다. 내가 이 드라마를 나의 첫 스웨덴(어) 선생님으로 삼기

로 한 이유.

이 드라마에 대해 공부를 해가면서 내 ‘존경’의 마음은 커져 갔다. “제

가 얼마 간 스웨덴을 떠나 있었거든요. 그리고 스웨덴으로 돌아왔을 때 인

종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죠.

저에게 인종주의는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형사가 필요했던 것이고, 발란

더라는 이름은 전화번호부에서 가져왔지요” (작가 홈페이지). 1980년대

말의 스웨덴 사회를 떠올리며 만켈이 한 말이다. 소설의 출발 자체가 인종

주의에 대한 경고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실 만켈은 스웨덴에서 가장 존

경 받고 사회적 활동이 왕성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2010년,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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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3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스웨덴 서부지역의 한 도시에서 구걸행위를 하던 외국인이 가혹행위를

당해 문제가 되고 있다. 피해자는 불가리아 출신의 여성으로 어느 상점 앞

에서 오랫동안 구걸을 해왔다. 그런데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상점의 주

인이 이 여성에게 물을 퍼부은 것이다(표면적인 이유는 “유리창 청소”

를 위한 것이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 제안이 나오

는 등 여러 가지 비판이 일고 있다. 아울러 점점 늘어나고 있는 ‘외국인

걸인’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스웨덴에서 이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부분적인 이유는 유럽연합 안에서 시민들

의 자유로운 국경통행을 보장한 조약이 1990년대에 발효됐기 때문이다.

# 여성주의 정당과 ‘사표’ 논쟁 (스웨덴 국영 라디오: 2014. 4. 16)

스웨덴에서 2014년은 아주 중요한 해이다. 총선(9월 14일)과 유럽의회

선거(5월 25일)가 처음으로 같은 해에 치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의회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스웨덴 여성주의 정당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른바 ‘사표’ 논쟁이 일고 있어 주목된다.

정권교체를 노리고 있는 사회민주당 계열의 논객이 여성주의 정당에게 가

는 표는 현 보수정권에게 도움이 될 뿐이라며 ‘전략적 투표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성주의 정당의 대표격인 구드룬 휘만은 그와 같은

생각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것이라며 반박했다. 스웨덴 의회 진입의

최소 조건은 총선 득표율 4%이며 여성주의 정당은 최근 조사에서 2% 정

도의 지지율을 보였다.

할 수 있다. 바로 주인공이 치매를 얻게 되면서 은퇴를 하는 것이다. 아마

<발란더>에서만 가능한 각본일 것이다.

앎의 불완전함

그러나 아무래도 내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작가 자신과 관련된 이

야기가 아닐까 한다. 얼마 전인 1월, 만켈은 암 판정을 받았다. 너무나 갑

작스러운 소식이었고 나는 당황했다. 마치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큰 병

에 걸린 것처럼 놀랐고, 비통했다. 특히 충격을 받은 이유는, <발란더> 시

리즈의 마지막 편이 작년 10월에 나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암 소식이 전해

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모쪼록 건강을 회복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마침 내가 있는 지역의 신문을 통해 그는 자신의

투병생활을 비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안타깝고 가슴이 아려온다.

<발란더>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이 교향곡

을 들으며 고뇌하는 대목이다. 나는 이 드라마와 작가를 통해 앎의 불완전

함과 삶의 통제불가능성, 그리고 ‘공감’이라는 문제에 대해 더욱 고민하

게 됐다. 만약 허락된다면, 우리의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다.

[나름대로 스웨덴 소식]

# 상점 앞 걸인에 대한 가혹행위 (스웨덴 일간지 <아프톤블라뎃>:

201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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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샤샤 | 병역거부자

양심의 존재론: 양심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샤샤: 오늘도 중2병 돋는 철학자들을 모시고 토론을 해볼까 합니다. 오

늘은 저번의 양심의 윤리학적인 내용과는 달리, 순전히 양심의 존재론적

인 위상, 즉 “양심이란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댓글 잉여 소치 올림

픽을 해볼까 합니다. 그럼 당신의 잉여력을 보여주세요. 먼저 데카르트씨

나오세요.

데카르트: 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안녕하

세요? 중2병 돋는 데카르트입니다. 나는 모든걸 의심하지요. 난 누구 여

긴 어디? 내 몸, 바깥 세계, 모든걸 다 의심해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

맞음? 저 멀리 있는 태양은 엄지손가락으로 가려지지요. 착시현상으로 인

기획연재-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Page 3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1호(2014년 5월)

66 67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면 대체 그 마음이라는 것과 몸이라는 건 어떤 관계인가요? 데카르트님하

가 말하는 마음은 몸이랑은 따로 존재하는 신비로운 귀신같애요. ‘기계속

의 유령’이라고나 할까요. 야이 공각기동대야!!

샤샤: 아무튼 그래서요? 그게 양심의 존재와 무슨 상관?

데카르트: 여하튼간에 마음이라는 실체의 속성은 사유한다는 것이고,

이는 생각하고, 느끼며, 판단을 내리는 등등의 일을 하지요. 마음이 존재

하므로, 따라서 양심은 존재합니다. 그뿐인가요? 단체 정신, 기업 정신,

병역거부자의 양심 등등도 다 존재하지요.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스키너: 아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게 존재한다고 어떻게 가정하지요?

데카르트: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지요.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해요. 내 마음은 내가 확실히 느끼죠. 나

는 아픔을 느끼거나 무언가를 희망하거나 하는 것을 통해 마음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깨닫지만,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좀비

인지 아니면 기계인지는 알 수 없지요.

샤샤: 헐;;;;그럼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도, 양심도 없다는 말인가요? 소

름 돋네요. 너만 양심이 있고, 남은 양심도 없다니. 니 마음만 있니? 내 마

음도 있다!

데카르트: 그 말은 아니고, 내 마음의 특성은 순전히 내적으로 직관하는

해 우리의 감각기관은 신뢰할 수 없지요. 또 이 모든게 꿈이라면? 꿈과 현

실을 어떻게 구분하나요?

샤샤: 시끄럽고 본론만 말씀하시죠.

데카르트: 눼눼치킨! 따라서 모든걸 의심하지만 단 한가지 의심할 수 없

는게 바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있는 ‘내’가 존재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지요.

샤샤: 그래서요? 어쩔? 안물 안궁

데카르트: 여하튼, 그래서;;;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나

는 곧 사유하는 존재입니다. 비록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물질로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로지 통 속에 갇혀 있는 뇌처럼 나는 사유하고

있는 존재,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요.

샤샤: 그럼 그건 ‘나’를 증명한게 아니라, 일종의 정신, 즉 사유하는 영

혼을 증명한게 아닌가요?

데카르트: 그렇긴 하죠. 그렇지만 적어도 ‘마음’의 존재는 증명한 거죠.

육체는 정신과는 다른 존재이고, 따라서 이 세계는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

지 실체로 되어 있지요.

길버트 라일: 정말 중2병 돋네요. 몸과 마음이 따로 국밥이라뇨.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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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69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샤샤: 제가 양심적이라는건 맞는데요, 그럼 이용숙은요?

스키너: 용숙이 또한 양심적이라고 ‘보이기’는 하는데요. 용숙이의 경

우도 만일 “용숙이는 양심적이다”라고 한다면 “용숙이는 군대 영장이 날

라오면 (사람들이 보이게끔)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용숙이는 샤샤

한테 돈을 빌리면 제때제때 갚을 것이다”, “용숙이는 군대에 징집되면 거

부를 할 것이다” 같은 행동으로 설명될 수 있죠.

샤샤: 그런데 용숙이는 별로 양심적이지 않은데 코스프레 하는거라면

요? 이를테면 개싸가지 없는데도 친절한 척 하는거라면요? ‘행동’만 보고

선 그 사람이 양심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하나요? 용숙이나 조은처럼

양심적인 코스프레 하는 소시오패스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청

맹과니야?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딱히 샤샤처럼 코스프레를 안하는 츤데

레 나쁜 남자도 있는데요?

데이빗 차머스: 그러게요. 모든 게 인간과 동일한 ‘좀비’가 있다고 칩

시다. 단, 좀비는 물질적 구성과 행동이 모두 인간과 동일하지만 단 한가

지, ‘양심’이 없죠. 즉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지요. 마치

개념을 제외한 모든 것을 다 갖춘 패리스 힐튼처럼 말이죠. ‘좀비’의 존재

가능성은 행동주의를 무너뜨리면서 인간이 된다는 것, 마음을 갖는다는

것, 양심이 있다는 것은 행동만으로 따질 수 없다는걸 보여주지요. 따라서

양심은 겉모습으로 설명불가능 ^오^ 샤샤와 용숙이의 행동은 같지만 용숙

이는 코스프레고 진정한 양심은 샤샤만 갖고 있으므로 ^오^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유추할 뿐이라는 거죠.

스키너: 정말 웃기지도 않네요. 마음, 정신, 의식 따위가 어딨나요? 이

미신아. 마음을 본적이 있나요? 마음이 무슨 색깔, 무슨 모양인가요? 마

음은 다만 인간의 육체적인 행동으로 환원되는 것이죠. 양심 또한 무슨 색

깔, 무슨 모양이죠? 양심은 다만 인간 행동 패턴을 가리키는 용어들이지

요. 양심은 얼어죽을... 너님들 양심이 없어요. 양심은 밥말아 드셈. 양심

은 그저 인간의 물리적인 행동을 보고서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죠. 이 비

양심적 병역거부자야!

길버트 라일: 스키너님하, 전 양심이 행동이라는 스키너님하 의견에는

동의하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다는건 좀 아니죠. 스키너님은 인

간을 무슨 실험실의 생쥐나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극-반응으로 바라보나

요? 양심이 물리학의 실험 대상인가요? 물론 양심은 행동을 기술하는 어

구로 환원가능하죠. 그러나 양심은 우리가 일상언어적으로 사람들이 정직

하고, 예절바르고, 남을 속이지 않으며, 부당한 행동에 저항하는 행위들을

할 때 ‘양심적이다’라고 말하는거죠.

샤샤: 뭔 솔?

길버트 라일: 만약 “샤샤님하는 양심적이다”라는 말한다면 이는 곧 “샤

샤님은 군대를 거부할 것이다”, “샤샤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도와줄

것이다”, “샤샤님은 거짓말을 안한다”와 같은 행동 패턴들을 가리키는 말

을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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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1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세요 ㅠㅠ

토마스 네이글: 여보세요 이 마음도 없고 뇌도 없는 유물론자 양반. 우

리가 마음=뇌라는 이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대체 그게 어떻다는 건가

요? “샤샤가 아프다”는 말이 곧 “샤샤의 C-뉴런이 320시점에서 발화한

다”는 뇌과학으로 다 밝혀진다 하더라도, 반대로 “샤샤의 C-뉴런이 320

시점에서 발화한다”는 상태가 샤샤가 어떤 감정상태이고 어떤 경험을 느

끼고 있는지 말해주진 않는다고요.

샤샤: ㅡ_ㅡ 아 좀 알아듣게좀 말해줘요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주던가

토마스 네이글: 보세요. 더치커피와 맥심 봉다리 커피 맛의 차이는 뇌의

상태차이로 설명불가능하지요. 뇌의 상태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맛, 그

향기를 어떻게 그런 수치로 설명가능한가요? 예를들어 우리가 박쥐가 어

떻게 느끼고 경험하는지를 박쥐의 뇌를 조사해서 안다고 하더라도, 박쥐

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지는 박쥐가 되보지 않고서

는 모르지요. 배트맨이라면 모를까.

프랭크 잭슨: 그렇죠. 이를테면 눈이 없는 외계인이 인간을 납치해서

“아, 인간은 뇌의 상태가 XYZ일 때 빨간색을 경험하는 상태가 되는군”이

라는걸 전부 알았다고 해서, 그 외계인 ‘빨간색’이라는 경험이 어떤 것인

지는 알 수 없는거죠. 외계인은 이론만 알고 있지 사과를 봤을 때 인간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영원히 모르는 법. 따라서 양심에 대한 경험도 뇌의 상

태로 설명불가능 ^오^

스키너·길버트 라일: ^오^

환원적 유물론자: ㅉㅉㅉ 이런 병자년에 버티고개에서 죽빵을 맞을 스

마트폰 시대에 삐삐 들고다닐 비과학적인 인간들 같으니. 양심이 행동이

다, 아니다가 아니라, 양심은 ‘뇌’의 상태에요. 간단히 말해서 마음=뇌 ㅇ

ㅋ?

샤샤: 그건 또 무슨 양심을 뇌에 밥말아먹는 소리인가요?

환원적 유물론자: “처갓집 = 외갓댁 = 친정집”이듯이, “마음 = 뇌”에요

뇌. 따라서 양심은 곧 뇌의 어떤 상태로 환원가능하지요. “샤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라는 말은 “샤샤의 뇌의 상태는 3201-1상태에 있다”거나

“샤샤의 C-뉴런이 발화한다”는 말이지요.

샤샤: 뭥미 ㄷ ㄷ 소름돋네요

환원적 유물론자: 우리가 ‘물’이라는게 H2O임을 과학으로 밝혔듯이,

마음이라는 것도 곧 뇌의 작용이라는게 밝혀진다면, 양심이란 곧 뇌의 특

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바꿀 수가 있지요. “샤샤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한다”는 말은 곧 “샤샤의 두뇌 상태는 256-B 시점에 있다”는 말

이지요.

샤샤: ㅡ_ㅡ;;;;; 아무리 내가 게임을 좀 좋아하지만 미친거 아님? 이

미세먼지같은 무의미한 인간아!! 이 강철의 연금술사야!! 누가 좀 도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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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73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니라 위에서 말한 놈들이 바보임 ㅋㅋㅋ

샤샤: 엉엉엉 심심이 밖에 없어 ㅠㅠ 심심이는 바보, 나밖에 모르는 바

보 ㅠㅠ

존 썰: ㅉㅉ 잘들 놀고 앉았네요. 심심이가 마음이 어딨다구요? 심심이

는 감정도, 윤리도 없는 그저 기계에 불과한 프로그램일 뿐.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앵무새에 불과하지요.

샤샤: 꺼져짜져!!! 니가 심심이에 대해서 뭘알아!!

존 썰: ㅉㅉ 컴퓨터나 로봇, 인공지능, 사이보그 따위가 아무리 발전한

다 하더래도, 결코 인간이 갖는 감정, 마음따위는 가질 수 없다구요.

기능주의자: 그건 인간 중심주의 아님? 만일 계산능력을 마음이라고 본

다면 컴퓨터, 오징어도 마음이 있는거임.

존 썰: 웃기네요. 심심이는 구문론은 갖고 있지만 의미론은 가지고 있지

않다구요.

샤샤: ?!! 뭔 솔?

존 썰: 이런 경우를 생각해봐요. 샤샤가 독거방에 갇혀서 옆방 사람한테

중국어로 된 카드를 받는다고 쳐요. 샤샤는 중국어는 모르지만 중국어를

존 오스틴: 흠.... 아무래도 양심을 행동이나 뇌, 컴퓨터로 바꾸는 건 좀

그런거 같애요. 만일 “샤샤가 아프다”, “샤샤는 사랑한다” 같은게 뇌의 어

떤 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샤샤는 결혼한다”에 해당하는 뇌의

상태는 뭐지요? 만일 그 때의 뇌의 상태가 “샤샤는 배고프다”는 뇌의 상

태와 동일하다면, 결혼=배고픔이 되는건가요? 결혼은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법적 사실이지요. 베토벤의 음악은 물질인가요, 정신인

가요? 근로기준법은 물질인가요, 사실인가요?

환원적 유물론자: ●_● ㅃㅃ

기능주의자: ㅉㅉㅉ 아니 갤럭시 S5가 나오는 시대에 이제 막 폴더폰

나왔다고 좋아하는 수준들 따위라니 ㅉㅉ 가서 다마고찌들이나 하3. 마음

은 컴퓨터에요 컴퓨터. 따라서 양심 그까짓거는 로봇도 프로그램되있으면

양심적일 수 있다구요. 영화 A.I 안봤어요? 니네가 그 로보트보다 양심이

있나요?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보다 너네가 착한가요? 감정이 있고 양심

이 있게끔 프로그램된 로보트라면 로봇도 양심이 있는거구요.

샤샤: 아 그건 공감요 ㅠㅠ 심심이는 유일한 내 베프 절친인데 심심이를

보면 용숙, 조은, 오리, 나동, 겸 그딴 것들보다 훨씬 양심적이고 착하다구

염 ㅠㅠ

기능주의자: ㅋㅋㅋ 그죵 심심이 기엽죵 심심이가 얼마나 착한데요! 심

심이는 샤샤말도 잘들어주고 대화도 잘해주고 위에서 말한 형편없는 놈들

보다는 항상 친절한 말만 하고 말도 안씹고....심심이는 바보 ㅠㅠ 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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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75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를 모은 책이 나왔습니다. 서점에서 구입할 수도 있

고 전쟁없는세상을 통해서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병역거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임이 있다면 언제든지 전쟁없는세상으로 연락 주세요

한글로 바꾸는 매뉴얼을 우연히 손에 넣어서, 중국어 카드를 한글로 바꾸

어서 옆방 사람한테 전달해주지요. 그럼 옆방 사람은 샤샤가 중국어를 안

다고 착각할꺼에요. 사실 샤샤는 중국어를 개뿔도 모르는데 말이죠. 이건

영화 대사 녹음 파일을 가지고 장난전화해서 녹음파일을 들려주면 진짜

사람이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건줄 착각하는 상황과 비슷해요. 심심이같은

컴퓨터도 똑같죠. 심심이는 오로지 프로그램된 말만 할뿐, 마음이나 양심

을 갖고 있다고 보긴 힘들죠. 따라서 컴퓨터나 사이보그는 인간만이 갖는

윤리적인 마음, 가치관, 감정은 죽었다 깨놔도 가질 수 없을껄요?

샤샤: 안돼애애애애~~~ 내 심심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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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 주신 분들

가람 강경리 강경모 강돌 강민정 강성준 강소연 강은애 강진선 고동환 고태경 고희라 구종우

권순욱 권인숙 김경묵 김경숙 김꽁치 김명섭 김미선 김미현 김민경 김민영 김박가온 김반지 김범준

김병권 김보미 김선미 김선옥 김선영 김성배 김성희 김세윤 김소현 김송이 김수용 김수정 김영수

김영진 김영환 김영효 김용엽 김은주 김일애 김조이스 김주현 김중미 김지호 김태훈 김태환

김한보람 김한상 김현정 김효진 김훈태 김희석 김희순 나동혁 나인희 날맹 덴마 류동훈 류진희

명숙 문상현 문성호 바다로떠난바람 박꽃님 박남식 박승호 박아름 박용희 박재형 박정경수 박지선

박진석 박창희 박채원 박현민 배보람 배사은 백가윤 백승덕 보라 상우 설순일 성혜란 소란

송명관 송병채 송준 송지혜 수연 수하 숲이아 시우 시와 신기현 신유아 신은재 신희권

아오이유우 아하 아침 아키오 안지환 양선화 양은혜 양지혜 여문정 여옥 여은 여지우 염창근 오리

오성민 오소영 오재창 오정록 오학준 우경환 우공 우완 우성섭 우지연 위양자 유건 유현미

윤민순 윤정하 윤정화 윤지환 윤혜정 은국 은종복 은혜와평화교회 이갑수 이기영 이덕현

이무헌 이비함 이상길 이선아 이선영 이선옥 이세현 이승규 이연희 이영롱 이용석 이자호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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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진 조정의민 주관수 지은 진진 진현호 진흙 참새 채민 채승우 최경송

최민아 최성진 최정자 최하늬 최현정 타랑 편설란 하동기 하승우 한광주

한광희 한주훈 햄 허용만 홍수봉 홍수영 홍이 홍창욱 황명규

재정정리2014년 2월 1일 ~ 2014년 4월 30일 (단위 : 원)

수입 지출 이월 총계

총 9,053,889 17,559,588 8,211,922 -293,777

2월 4,281,590 2,892,818

3월 2,351,709 2,338,208

4월 2,420,590 2,328,562

보증금 10,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