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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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망원로 57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46 기획기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유승준과 선을 긋게 되었나 모병제가 대안이라고? 우리의 소원이 통일일까? 전쟁없는세상 46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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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서울시 마포구 망원로 57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46

기획기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우리는 왜 유승준과 선을 긋게 되었나

모병제가 대안이라고?

우리의 소원이 통일일까?

전쟁없는세상 46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Page 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wo

rld

wit

hout

war 소식지를 내며 Editorial 1

평화주의자 노트 Essay

홍콩방문기 2

50일간의 노력 8

참가후기

평화를 외치며 달리다 13

기획기사 Special

Intro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8

우리는 왜 유승준과 선을 긋게 되었나 19

모병제가 대안이라고? 28

우리의 소원이 통일일까? 33

리뷰-책&영화 Review-Book&Movie

'존재 증명'에 동참하여 읽기 37

기획연재

이예다의 프랑스 생활기- 유럽에서 병역거부를 말하다 43

게임과 평화 - 50

샤샤의 꾸잉꾸잉 54

재정보고 Report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59

전쟁없는세상 46호 소식지

차례

Page 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1소식지를 내며

승호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병역거부'가 오랜만에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논란의 시작은 세계병

역거부자의 날을 3일 앞둔 5월 12일 광주지방법원의 병역거부자 무죄 선고 소식

이었습니다. 마침, 국제앰네스티는 다음 날인 5월 13일 <감옥이 되어버린 삶: 한

국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인권상황>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고, 5월 15일

병역거부자의 날에는 전없세와 앰네스티가 자전거를 타고 국회, 국방부를 찾아

병역거부권 인정을 촉구하는 자전거 행진을 준비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

회에서 '병역기피'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유승준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

의 병역기피 논란을 둘러싼 심경고백을 예고한 것도 바로 5월 12일이었는데,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병역거부가 하나의 사회적 의제

로 각인되는 효과를 톡톡히 봤습니다. 병역거부 논란이 다루어진 언론 기사에는

늘 저질스런 악플이 달립니다. 병역거부/기피 문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뜨거

운 감자입니다. 해서, 이번 호에서 우리는 유승준과 징병제/모병제를 둘러싼 논란

의 중심에 서서 아예 작정하고 하고 싶던 이야기를 다해보면서 '어그로'를 끌어보

기로 했습니다.

한국에서 병역거부/기피를 둘러싼 논란이 일던 5월, 전없세의 활동가들은 마침

유럽에서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을 알리기 위한 스피킹투어에 참여하던 중이었습

니다. 늘 악플과 비난에 시달려야했던 병역거부 운동이 만난 유럽의 풍경은 낯설

기까지했습니다. 관련된 소식도 이번 소식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더운 날씨보다 더 뜨거운 글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소식지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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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방문기

양성택 | 일본 거주 병역거부 난민 지지자, [email protected]

6월 30일 밤부터 5일간 홍콩에 다녀왔다. 정확하게는 일이 있어서 홍콩에서 서

울로 바로 향했다. 홍콩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는 2년전에 알게 된 한 홍콩인 친

구 L씨였다. 어느날 주말마다 가는 오키나와 이자카야에 들어서자 통역 좀 해달라

고 해서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오키나와 여행 중 알게 된 일본인 여성을 쫓아서

도쿄에 까지 오게 됐는데 정작 그 여성은 도쿄까지 찾아오자 놀란듯 서둘러 피하

려는 눈치였다. 그런 관계로 남은 도쿄 체류일정을 내가 안내를 해주며 지내게 되

었고 돌아가는 길에 “반드시 홍콩에 와달라 내가 꼭 안내하겠다.” 초청을 받았었

다. 작년 연말에는 두 번째로 도쿄로 찾아와 마침 프랑스 망명 중인 징병거부자 이

예다씨의 방일 일정이 맞아서 약 한 달 동안 둘이 함께 마츠모토 하지메가 운영하

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여튼 L씨 처음만나고 나서 몇달 후 이른바 우산혁명이라 불리우는 대규모 데모

가 홍콩에서 일어났다. L씨도 집회에 참가하는듯 해서 SNS를 통해서 여러가지 상

평화주의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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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평화주의자 노트

황을 들었다. 인구 700만의 일개 자치도시가 15억 인구의 중국 중앙 정부를 향해

서 봉기를 일으킨 셈이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티벳 등지에서 자치권 문제로 봉기

를 일으켰다가 군대가 투입되서 진압되는 경우는 자주 봐 왔지만 홍콩의 경우는

초반부터 외신의 주목을 끌어내서 자치정부 관할 하에서의 진압만 가능했었던듯

하다. 시위를 주도한 두 그룹인 10대 운동단체 학민사조와 대학생연합이 주도면

밀하게 끌어온 결과로 보인다. 하여간 이때부터 상당히 홍콩에 관심을 가지고 공

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약간 무리한 일정으로 6월 30일 저녁에 홍콩으로 향했다. 6월 30일 오

전에는 모교인 릿쿄대의 강의에서 안악희씨가 1일 강연을 하는데에 통역으로 참

가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일주일간의 서울 출장이 있었다. 강

연후에 점심을 먹자마자 허둥지둥 짐을 싸서 나리타로 향했다. 이렇게 까지 타이

트한 스케쥴을 잡은 이유는 7월 1일의 홍콩 반환 기념일 집회를 구경하기 위해서

였다. L씨와 처음 만났을때 7월 1일의 데모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반환 이후에 중

국 경기가 좋은 만큼 홍콩서도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인줄 알고 물어보자 “we

never celebrate”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40 만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하니 어마어마

한 규모다. 다만 올해는 우산혁명의 원인이 됐던 선거법이 홍콩 의회에서 부결되

면서 5만 명 정도만 모였다고 한다. 작년에 문제가 된 홍콩의 선거법은 홍콩시민

들에게는 염원의 직선제 보통선거를 위한 것으로 홍콩의 대통령 정도로 볼 수 있

는 행정장관을 1인1표로 뽑도록 한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후보를 베이징의 전인

민대회에서 승인한 사람만 출마할 수 있도록 되 있는 부분이었다. 7월 1일 아침에

현지 뉴스를 보니까 국가안보법이라는게 베이징에서 통과 됐다고 한다. 내 홍콩

일정을 위해서 일부러 휴가까지 내서 5일간 계속 안내 주던 L씨에 의하면 적용 범

위가 “홍콩, 마카오 그리고 타이완”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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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본 도시에서 보는 만큼 데모는 상당히 진풍경이었다. 다만 더워서 일사

병으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안그래도 컴팩트하게 만들어진 도시에서 고층빌딩들

이 에어컨을 24시간 틀어대다보니 건물밖에 걸린 에어컨 실외기에서 물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었다. 데모는 각 단체들이 부스를 내놓고 모금함을 들고 전단지를 나

눠주는 식이었는데 나머지 15억 인민의 요구를 다 합친거 보다 더 많을 만큼 별의

별 단체가 다 있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규제를 철폐 할 단체’, ‘흡연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 ‘센카쿠 제도(중국명 다오위댜오) 영유권 단체’ ‘영국정부에게 홍

콩 시민의 영국국적 부여를 요구 하는 단체’ ‘탈북자를 북한으로 회송 시키는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인권단체’ ‘티벳과 홍콩의 자치권 보장을 요구하는 단체’ 심지어

는 ‘홍콩 건국’ 이라 써진 팻말 들고 다니는 노인도 있었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시

작한 행렬이 완차이역(灣仔) 근처로 오자 L씨가 “저기 그녀가 있다” 라고 외쳤다.

홍콩에 가기 전날인 29일에 시부야에서 홍콩의 우산혁명과 관련된 이벤트가

있었다. 일본의 홍콩 전문학자들이 모여서 우산혁명 주역의 학생들과 스카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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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평화주의자 노트

로 연결해서 여러가지 질문을 하는 이벤트 였다.

YouTube에서 홍콩 데모 지지를 알리는 동영상

등으로 유명하다는 Agnes Chow 여고생이랑 연

결 됐을 때(일본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이었다.) 방청

객에 질문 하는 시간이 오자 손을 들고 “저기..저

내일 홍콩에 가는데 7월 1일 데모 구경 갈건데 만

날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회장에서 웃음이 터졌

다. “아니 저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는

데....” 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팬들의 분노를 살 행

동을 했다고 학자들이 농담을 했었다. 그런데 실

제로 보게 된 것. 단상 위에서 뭔가 광동어로 외치고 있는 Agnes Chow씨에게 다

가가서 일본어로 “아.. 저기 그저께 도쿄랑 스카이프 연결했을 때 내일 홍콩간다

한 사람인데요.”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악수를 해주었다. 나중에 이벤트 주최측에

서 연락이 와서 페이스북의 공식 계정에 사진을 올리고 싶다 해서 승락하자 “이건

우연이 아니야” 라는 식의 댓글들이 달렸다.

이날 밤에는 호텔 근처의 한 펍에서 홍콩의 운동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랑 대

화를 나눴다. 여기서 나눈 대화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 사람이 말하기로는 홍콩

의 민주화 운동의 모델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며, 우산혁명 집회 당시에 변호인

이라는 영화를 광장에서 실제 상영하기도 했었다고. 진압으로 죽는 사람이 나오

는 경우에는 광주민주화항쟁과 같은 레벨의 투쟁이 홍콩에서도 일어날거라는 이

야기도 했었다. 재밌는 거는 한국이 관심의 대상이 된 계기였다. 2006년에 WTO

의 회의에 한국의 농민들이 원정와서 데모하던 모습이 TV에 중계되면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작년 홍콩의 데모에서 터진 최루탄은 사실 그때 이후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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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터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흥미로운점은 29일 시부야에서의 이벤트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홍콩인들은 원래 돈벌고 노는 데 바빠서 정치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홍콩반환때도 큰 저항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처음으로 불이 붙게

된 계기가 Queen’s Pier라는 부두의 폐쇄랑 관련된 문제였다. 이곳은 영국 왕실

등이 홍콩 방문때 사용하던 상징적인 곳으로 중국 정부는 절대로 사용한 적이 없

었고 2008년에 폐쇄를 결정했다. 다만 문화재적인 의미에서 보존을 원하는 홍콩

시민들이 반대 점거를 하자 무력 진압이 시작되면서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홍콩

인이라는 아이덴티티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홍콩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 그 사람

은 나에게 Queen’s Pier 자석 팻말을 선물해 줬다. 나는 도쿄 자택의 냉장고에 붙

였다.

7월 1일 데모 이외에도 홍콩 체류 중에 여러가

지 일정이 있었지만 한가지 더 기록하고 싶은 부

분은 6.4 기념관이다. 이곳은 29일 이벤트에서

만난 학자가 추천한 곳이다. 천안문사태에 관한

중국영토내 유일한 장소로 홍콩박물관 바로 건너

편 건물의 5층에 위치 해있다. L씨가 전화를 하자

1층 접수대에서 신분증 검사가 있고 직원이 위로

안내한다는 기묘한 답변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나 친중파의 홍콩인들

이 전시물을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 L씨의 아버지도 1970년대에

인민해방군의 감시를 피해 바다를 헤엄쳐서 홍콩에 왔다고 한다. 천안문 사태때

의 많은 민주화운동 학생들도 같은 경유로 홍콩으로 도망쳐 왔다. 자원봉사로 일

하는것으로 보이는 직원들은 내가 외국인이라 하자 전시물을 열심히 영어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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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평화주의자 노트

해 주었다. 중국 전체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홍콩이라는 자치도시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이 아닐까. L씨는 당시 베이징 대학생들이 썼다고 하는 6.4 기념 뱃

지를 하나 사서 선물해 주었다. 매우 숙연한 분위기였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홍콩인들은 보통선거권이라는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29

일 이벤트에서도 Agnes Chow학생은 “우리가 이렇게 싸워도 얻지 못한 보통선거

권을 일본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가지고 있는데 선거에 안가는 게 이해가 안 간다”

라는 말을 했었다. 낮은 투표율 때문에 실질적인 지지 특표율 20%대로 당선되서

집권한 아베 신조 수상이 안보법제를 밀어붙이는 현상황이 대비되서 아이러니한

기분이 들었다. 국회앞에 5만 명이 모였다고 일본 언론에서는 떼적으로 보도했지

만 홍콩에서는 “이번엔 사람이 적다” 라는 반응이었던걸 생각해보면 큰 차이를 느

낀다.

이렇게 5일간의 홍콩 여행은 끝나고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만

난 한 홍콩 거주 중인 한국인에게 도쿄에 살고 있다고 하자 과거 도쿄에서 11년간

거주했다면서 도쿄 서울 홍콩의 순으로 살기 좋다며 홍콩으로 이민 올 생각은 안

하는 편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도 상당히 매력적인 곳. 이곳의 민주화 열망을 보면

서 “내가 한국을 왜 떠났겠냐.... 그럴리는 없겠지만 일본서 설마 징병제라도 하면

반드시 여기로 이주올거다.” 라는 말을 남기고 징병국가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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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일간의 노력병역거부 유럽강연투어를 다녀와서

여옥 | 전쟁없는세상 홛동가

시작은 이러했다. 2014년 7월 남아공 WRI 국제회의에서 만난 독일의 해외 병

역거부자 지원단체 Connection에서는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을 독일에 알리는 강

연투어를 제안했다. 한국의 병역거부운동이 처한 여러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답

답하기도 했고, 최근 병역거부 난민문의가 많아지기도 해서 한번 해보기로 했었

던 이 프로젝트는 독일에서의 펀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기간도 지역도 인

원도 확대되었다. 처음엔 한 달 정도 독일지역을 생각했던 강연투어가 4~6월 3개

월 동안 독일을 비롯한 핀란드, 벨기에, 영국, 터키, 프랑스, 스위스를 3명의 활동

가(여옥, 날맹, 승호)와 프랑스에 난민으로 살고있는 이예다씨가 다녀오게 되었다.

그 중에 나는 4월 3일부터 5월 22일까지 유럽강연투어 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준비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짧지 않은 일정 때문에 전체일정을 참여할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고, 통역을 고려한 강연내용 준비도 만만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한

국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다시피한 유럽의 낯선 사람들에게 한국의 병역거부에

평화주의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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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평화주의자 노트

대해 설명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막막했다. 한국의 지정학

적 위치, 인구 등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으로 시작해, 일제식민지부터 한국전쟁, 군

사독재, 현재 군사비지출 순위까지 한국의 군사주의에 대한 배경설명까지 하려니

통역을 포함한 두 시간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강연을 다니며 매일매일 강연원

고와 프리젠테이션을 수정하고 한국어-영어-독일어 통역을 고쳐야했던 기억이

난다.

4월 7일 독일 노이디텐도르프에서 열린 세미나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15개가 넘는 도시에서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에 대한 대중강연, 간담회, 미팅, 면

담, 인터뷰를 이어갔다. 강연을 하러 다니면서 만난 나이지긋하신 많은 분들은 자

신을 병역거부자라고 소개하며 어떤 대체복무를 했는지도 설명해주셨다. 한국에

서 병역거부를 설명할 때 해외의 대체복무 사례를 자주 소개해왔지만 병역거부자

가 감옥에 가지 않는 그곳의 현실이 새삼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다. 독일은 나치의

믿기 힘든 대량학살이 ‘그저 명령에 따른’ 군인들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목

했고, 2차대전 이후 헌법에 병역거부권을 명시(제4조 3항, 1949년)한 이후 대체복

무제를 통해 병역거부권을 인정해왔다. 하지만 70년대에만 해도 국방부 내 심사

위원회가 난처하고 이상한 질문을 해서 병역거부자를 심사에서 떨어뜨리는 일이

잦았다. 2차까지 탈락을 하면 법원으로 가서 소송을 진행했다고 했다. 우리가 정

부를 비판하면 북한가서 살라는 비난을 듣는 것처럼, 분단시기의 독일에서도 병

역거부자들은 동독가서 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90년대 이후 병역거

부권의 행사가 일상화되면서 병역거부자 인정비율이 90%를 넘게 되고, 군 복무자

비율만큼 늘어난 병역거부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대체복무를 하고있었던 독일이

었다. 그래서 대체복무를 하던 그 많은 인원이 징병제 중단으로 사라지게 되면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징병제를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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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유지하려고 할 것이라는, 즉 대체복무가 징병제를 유지하는 이유가 될 것이라

는 추측이 많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대체복무제를 경험한 독일은 달랐다. 슈투트

가르트에서 20대 초반의 청년들 20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들은 사회봉사를 하기위해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강연을 조직한 활동

가에게 물어보니 성별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독일 청년들이 20대 초반에 이런 단

체, 모임을 찾아서 1년여 정도 다양한 사회봉사를 한다고 했다. 과거 대체복무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2011년 징집이 중단된 이후로도 계속해서 자발적

인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에서는 상상하기 어려

운 일이었다.

독일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의 하나는 목사님들이 보여주신 환대와 관심이었

다. 독일복음선교연대(EMS, 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와 독일동아시아선

교회(DOAM) 목사님들은 이번 투어의 펀딩뿐만 아니라 세미나와 강연조직을 통

해 한국 교회가 병역거부와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갖게할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함께

나누어주셨다. 특히 한국 교회와 장기간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독일 교

회의 목사님들과 함께한 워크샵에서는 보수적인 한국 교회와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어떻게 평화 이슈를 다룰지에 대한 의논을 하기도 했다. 워크샵 중에 목사님들

은 우리에게 과거 독일에서 대체복무를 하기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셨

다. 병역거부 심사가 몹시 까다롭고 탈락하기 일쑤였지만 병역거부권을 주장하며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은 주로 젊은 기독교 신앙인들이었다고 하셨다. 그중 여

호와의증인 신자들은 오히려 소수였다면서 왜 한국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은 강제되는 군 복무를 거부하지 않는지 우리에게 되물으셨다. 그건 우

리도 참 궁금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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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평화주의자 노트

독일 사민당 국회의원과의 면담

베를린에서 만난 독일 국회의원들은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에 대해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였고 구체적인 제안도 이어졌다. 사민당(SDP) 의원들은 한국 병역거부

상황에 대한 의회보고서를 추진할 것을 제안했고, 좌파당(Die Linke) 의원들은 탄

원 서명을 유럽 내 좌파당을 통해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독의원친선협회 소

속 의원들은 한국의 인권 후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병역거부와 관련한 여

러 질문과 답변이 오고간 뒤에 주한독일대사관에 연락해 상황을 공유하고 보고서

를 작성하도록 의견을 전달하기로 하고, 한국 방문시에 병역거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독일 외교부 인권정책 및 인도주의 지원 담당관은

과거 변호사시절에 병역거부자들을 변호했던 경험이 있어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

다며, 필요하다면 성명을 내주겠다고 했다. 베를린 로비 일정의 통역을 맡아주신

Korea-Verband의 나탈리 한 선생님은 이런 통역을 많이 해봤지만 이렇게 국회

의원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하셨을 정도였

다. 밥먹을 시간도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면담 일정 때문에 피곤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받아보지 못했던 국회의원들의 관심을 다른 나라에서 받으니

기운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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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독일어를 전혀 몰라서 남자여자 화장실 표시를

잘못 해석해 사고칠 뻔 했던건 약과였다. 강연을 위해 거의 매일 기차로 도시를 이

동해야하는 일정 중에 철도파업이 반복되었다. 독일어 안내방송을 알아들을 방법

이 없는 우리는 중간에 멈춰서 행선지를 바꾼 기차 안에 홀로 남겨지기도 했고, 기

차연착으로 비행기 시간에 못 맞출 뻔 하기도 했고, 기차 대신 차를 빌려 옆 나라

에 다녀오기도 했다.(덕분에 아우토반을 달리며 국경을 넘는 경험을^̂ ) 한 달쯤 지

나니 기차가 연착되거나 행선지가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고 다른 기차를 찾아서

탈 줄도 알게 되었고, 좌석이 없는 기차에서 빈자리 찾는 노하우도 터득하고, 기차

에서 나오는 안내멘트를 외워서 따라할 정도가 되었다. 4월의 핀란드 헬싱키는 눈

발이 날렸고,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정말 회의만 하고 돌아왔다. 환전해갔던 돈은

쓸 시간이 없어서 봉투 그대로 다시 가지고 돌아왔다는 건 조금 서글픈 이야기다.

한국에서도 해본적 없던 빡빡한 강연투어일정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많이 돌

아다니면서 우리가 겪고있는 문제들을 이미 오래전에 겪은 활동가들의 경험과 대

체복무 이후의 고민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군대가 가진 문

제점은 징병제든 모병제든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래서 독일의 반군사주의

활동가들은 신병모집반대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이예다씨와의 만남이나 독일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여러 나라의 병역거부자들을

만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독일 국회의원의 연락을 받은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연락을 해왔고, 10월에 독일 국회의원이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라

는 소식도 들었다. 이번 유럽강연투어가 처음에 계획했던 목표를 잘 달성했는지

는 아직 잘 모르겠다. 유럽에 한국의 병역거부 상황을 알리고 한국 정부에 국제적

압력이 행사되도록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성과들이 한국의 상황에 뭔가 작은

영향이라도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age 15: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13§

평화를 외치며 달리다2015 병역거부자의날 자전거 평화 행진

에리카 | 전쟁없는세상 회원, [email protected]

봄 :

자전거 평화행진을 한다는 공고가 떴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하는 많은 것들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이 맞아 신청을 한다.

거리도 멀지 않다. 집에서 걸어가면, 30분 걸리려나? 걸어가면 되겠네~

5.15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전쟁없는세상>과 <앰네스티> 주최로 진행된 자

전거 평화행진.

행진은 5월16일 토요일에 열렸는데, 이날은 뭐가 많은 날이다. 518광주묘역참

배도 있고, 서울역에서 아이다호(IDAHOT: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문화제가 있

고, 동물권을 위한 세미나가 있고, 병역거부자의 날을 위한 평화행진이 있다!

일정을 잘 짜야 많은 것들을 할 수가 있다!

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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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

“오리, 1인용 자전거 신청합니다.”

“에리카, 1인용 신청은 마감 됐으니 자동 2인용으로 갑니다.”

기쁘다!!!! 안 그래도 2인용 타고 싶었는데, 나와 자전거를 타줄 사람이 없어서 1

인용 신청했던 건데, 잘됐다!!!!

당일 :

그 어디냐, 그.. 처음 가본 곳, 아, 전쟁기념관!에 막 도착했다. 말그대로 전쟁을

기념한다는 전쟁기념관 앞에서 병역거부자의날 평화행진을 시작하다니! 내가 속

한 단체지만,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앞에서 우리는 꼬물꼬물 모였지.

자전거를 실은 트럭이 있어서 집결장소를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대표님도 딱히 세울 곳이 없어 세워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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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참가후기

1년 전 평화캠프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1년 만에 처음 보는 얼굴들

이라서 정말로 못내 반갑다.

어떻게 지냈는지, 이름이 뭐였는지를 서로(나만이라고 느꼈던 것은 기분 탓이

겠지!) 물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또 몇 명은 바로 전 날 땡땡책 후원주점에서 만났던 얼굴들도 있다!

이건 나의 생각이지만, 전쟁기념관에서 민원을 넣었는지, 경찰이 와서 차를 다

른 데에 정차시켜라, 언제쯤 떠날 거냐 등을 물어온다. 신고한 집회인데도 신고와

는 상관없다는 식의 말들.. 시작부터 울컥한 감정이 올라온다.

출발 전, 죄수복을 입고 우리는 전쟁 없는 평화를 원한다는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출발 :

이제 출발한다.

나는 2인용 자전거를 드디어 타게 됐다.

잠깐 2인용 자전거를 설명하자면, 2인용은 지붕이 있어 그늘이 생겼고, 지붕 아

래로 문구가 써 있는 현수막을 달아놨고, 바구니가 달려 있어 우리는 짐도 실었고

(짐꾼도 됐다), 내 옆에 탄 짝꿍 길수는 운전 똑바로 하라고 했고, 내가 면허 없고

운전만 할 줄 안다니까(거짓말-면허도 없고 운전도 못함) 그때부터 길수는 불안불

안해 했고, 나는 끝날 때 되어 2인용 자전거는 아~이래서 다들 기피하는구나를 느

꼈고, 그래도 너무 즐거워서 내년에도 2인용을 타리라 마음먹었다! 얍!

2인용이 먼저 출발을 하고, 그 중에서도 우리 자전거가 제일 앞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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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청 재미있고 뭔가 생길 것 같은 느낌에 흥분이 돼!

찻길에서 자전거를 타보는 것이 처음인 나는 짜릿짜릿한 쾌감에 털이 다 선 것

같았다!

아주 발랄하고 명랑한 경험이었다. 차로 하나를 자전거 행진이 다 쓰고 있었다

는 게, 그냥 마냥 좋았던 것일까.

우리 자전거가 제일 제일 앞쪽이라 신호등이 중간에서 떨어지면 중간에 행렬이

끊겨 잠시 쉬는 시간이 생긴다. 끊긴 뒷줄을 기다리며 의자에 기대 쉬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나비 한 마리가 내 눈앞을 쓱 지나간다. 자전거도 있겠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꾹 참고 다시 행진에 나선다.

천천히 길을 인도해주는 차를 따라 고가 밑을 지나~

한강 다리 위를 지나는데 바람이 쌩쌩 불어와 기분이 좋은 나는 웃음이 빵빵 잘

도 터진다.

지나지나 ~ 도착한 국회. 우리의 종착지!

우리는 다시 함께 모여 사진을 찍고 마무리! 찰칵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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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참가후기

마치며 :

나는 <전쟁없는세상>을 작년에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면서 알게 됐다.

나는 전쟁에 대해서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전쟁없는세상>을 만나면서 진정한

평화는,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전쟁으로 만들어진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전쟁의 모든 피해는 가장 약자, 소수자들이 지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고, 그들이 왜 범죄자 취

급을 받으면서도 군대를 거부를 하는지를 듣게 됐다.

작년에 전쟁없는세상에서 만난 사람 중 길모란 친구는, 나랑 함께 담배도 피우

고 보드게임도 하며 나랑 놀아준, 철학을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얼마 안 가 감옥에

갔다.

길모 뿐 아니라 이미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해, 우리의 평화를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해 감옥에 갔다.

병역거부자의 날이 있다는 것도 덕분에 처음 알았는데, 이 하루가 그들에게 조

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함께 평화행진을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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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이 병역거부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한국 사회는 물론이거

니와 진보 진영 안에서도 병역거부 혹은 군대와 관련한 이슈는 생소하고 낯

선 이슈였습니다.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병역거부 운동 초기라 우리끼리도 각자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 까닭

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존재 자체로 어그로를 끄는 게 병역거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돌려돌려 말하거나 꾹꾹 참아왔습니다.

물론 그 전략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자극적인 말로써 우리의 선명성

을 부각시키는 것이 사회운동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철

학을 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대화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사

람들과 어떤 식으로 대화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그래도 세월도 흘렀고 해서 이제는 이 정도는 말

을 꺼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주제들을 모아봤습니다. 물론

여전히 어그로를 끄는 주제들입니다. 아주 민감한 주제들일 수도 있는데,

저희가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툭 던져놓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만, 여름 휴가철을 맞이해서 그동안 쉬쉬했거나 어려워했던 이야기들을 편

하게 해보자는 생각으로 글을 썼으니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기를 바립니다.

물론 저희의 부족한 글이 좀 더 예리하고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

에게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저희로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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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기획기사

백승덕 | 병역거부자+징병제 연구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당연히’ 비난에 직면했다. 어느 포털사이트 1면에 실린

내 인터뷰 기사에는 나와 가족들을 조롱하는 댓글들이 수없이 달렸다. 예컨대 ‘니

애미도 널 낳고 미역국을 먹었냐’는 식이었다. 몇몇 지인들은 병역거부를 탐탁찮

아하면서도, 덮어두고 욕부터 먹는 내가 안쓰러워서 이렇게 두둔해줬다. “이 친구

가 유승준 같은 병역기피자도 아니고….” 나 또한 병역거부가 ‘유승준 같은’ 병역

기피와 다르다고 애써 선을 그었다. 내 기억에 그는 위선자에 불과했기에 그와 다

르게 보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얼마 전, 가수 유승준이 인터넷 방송에 나와 심경고백을 한 것을 보고는 후배가

위선자라고 조소했다. 미국정부가 자국인들이 해외에서 번 돈에도 세금을 세게

물리기로 하자 한국에 귀화하려는 쇼를 벌인 것이었다. 그렇게 볼 근거가 있냐고

물으니 후배는 그냥 욕하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왜 그리 욕하고 싶냐고 재차 물으

니 그 후배는 내게 말했다. “예비군 훈련 가야하는데, 가기 싫어서요.”

우리는 왜 유승준과 선을 긋게 되었나

기획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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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준이 인터넷 방송에 직접 나와 병역을 ‘기피’했던 과거에 대해 사과했지만

비난 여론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후배 말처럼 탈세를 위한 거짓 사과라는 음모론

도 떠돌았다. 방송이 끝난 뒤에 방송 관계자가 내뱉은 욕설이 그대로 흘러나온 사

건은 비난 여론에 결정적으로 불을 질렀다. 언론들은 신난 듯이 유승준에 대한 비

난에 부채질했다. 언론은 여론이 그렇다며 유승준을 욕했고, 여론은 언론을 따라

다시 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유승준은 한국에서 국민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돼버렸다. 유승준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우리는 당당한 국민이 될 수 있다. 병역을 거부하든, 군대에 갔

다가 예비군 훈련을 가야하든 간에 유승준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아야만

한국에서 국민으로 남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병역거부자

와 예비역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이며, 무슨 짓을 한 걸까?

최근 유승준의 입국금지와 관련해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다. 지난 6월 21일 새

정치민주연합의 백군기 의원이 ‘유승준 방지법’을 발의했다고 밝힌 것이다. 백 의

원은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해서 병역을 기피할 목적으로 한국 국적을 버린 사람의

입국금지 조치를 할 근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갑자기 의문이 생기기 시

작한다. 법무부와 병무청은 13년 전에 이미 출입국관리법에 따라서 유승준의 입

국을 금지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야 다시 근거가 필요하다니. 이 사건과 관련해

생기는 궁금증과 의아함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사건을 하나

하나 되짚어봐야 한다.

‘아름다운 청년’에서 ‘위험한 외국인’으로 전락한 해외파 가수

2000년 전후로 힙합이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해외파 가수들도 많아졌

다. 1990년을 전후해서 부모를 따라 이민을 떠난 재미교포 1.5세들이 힙합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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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기획기사

가지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져온 ‘본토’ 흑인음악은 곧바로 대중적인 상

품이 되진 못했지만 댄스음악이나 발라드로 포화가 됐던 음악시장에 새로운 물꼬

를 열었다. 그러나 해외파 가수들은 어디까지나 낯선 존재였다. 이들에겐 그래서

마약 복용 혐의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연예자본의 입장에서 해외파 가수들은 위험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상품이었다.

한국말도 못하고 태도도 뭔가 많이 다른 듯이 보여서 다루기가 까다롭지만, 잘만

다듬으면 대중적인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잠재적인 수요와 이

질성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적응할 수 있을 대체재가 필요했다. ‘아름다운 청년’

유승준은 이런 연예자본의 수요에 부합하는 가수였다.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주

먹질도 하다가 회개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된 청년, 격렬한 춤을 추지만 신앙 때

문에 담배를 끊어서 늘어난 폐활량 덕분에 열정이 넘친다는 청년…. 해외파 가수

들을 볼 때면 느껴지던 어떤 불안감이 그에겐 없었다. 유승준이 금연홍보대사까

지 맡으며 해외파 가수의 모범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해외파 가수들

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LA 뒷골목에서 방황했다던 모범적인 해외파 가수가 지금 다시 한 번 회개를 말

하고 있다. 유승준은 입국금지 외국인으로 추방된 지 13년 만에 자신을 받아달라

며 대한민국을 향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아름다운 청

년’이라며 추켜세웠던 언론매체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그의 진심이 의심된

다며 호되게 심문 중이다.

13년 전,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병무청은

그의 입국을 막아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병무청이 밝힌 법적 근거는 간단했

다.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에 대해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출입국관리법 제11

조 8항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을 병역기피자에게 적용한 사례는 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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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이전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없었을 만큼 이례적인 것이었다. 국적을 포기해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입국까지 막는 조치는 과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병무청

이 이처럼 과한 조치를 이례적으로 적용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병역비리수사의 불똥이 애꿎은 해외파 가수들에게

2001년 3월까지 유승준은 여느 해외파 가수들처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

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해외 영주권자들은 1년간 국내에서 체류하더라도 병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해외파 가수들은 6개월 정도 활동을 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가 휴식기를 가졌다. 하지만 2001년 3월 27일부터 개정된 병역법 시행령에

따라 영리 활동을 하는 경우 국내 체류 기간이 기존 1년에서 60일로 대폭 축소돼

버렸다. 두 달 활동을 하면 6개월 이상은 나가있어야만 입영 연기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입영을 미루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방법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변화는 급작스러웠다. 오점록 당시 병무청장이 연예인 병역비리를 언급하기 시

작한 것은 개정 시행령이 시행되기 한 달 전이었던 2월 22일이었다. 오 병무청장

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근 연예계에 ̀해외파'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들이 해외영주권을 이용, 편법으로 병역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병역면제를 받거나 대상에 있는 연예인 100여 명에 대한 집중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해외파 가수들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

며 입대를 미루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병무청이 급작스럽게 단호해진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한때 박노항이라는 이름이 온 나라를 뒤흔

든 적이 있었다. 2001년에 검거될 당시 그는 35개월 간 도피생활 중이었다. 박노

항 원사는 병무청 파견 수사관으로 있으면서 약 100여 건의 병무비리로 100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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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기획기사

대 수수료를 챙겼다. 그는 한때 ‘대한민국 병역면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

다. 그의 비리사건이 보도되자 누구나 병무청을 믿을 수 없다고 지탄했다. 1998년

국방부 감찰단이 카투사 입대 청탁비리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박 원사가 당시 육

군본부 인사참모부 소속 원용수 준위에게서 1억 7천만 원을 받아 12명을 면제시

켜준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공개됐다.

군과 검찰은 병무사범 합동수사부를 꾸려서 수사를 진행했다. 합동수사부는

“국민이 납득할 때까지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사상 최

대규모 수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고위공직자, 재벌, 군장성 자녀, 국회의원 자제 등

이 포함되지 않아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다 빠져나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합

동수사부는 이와 같은 지적을 의식해서 국회의원 자제들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지

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소환 조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병

역음해대책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항의하기까지 했다.

빠져나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나니 불똥은 연예인들에게 튀었다. 가뜩이

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해외파 가수들이 수사 대상으로 지목됐다.

2001년 2월 13일 합동수사반의 사회지도층에 대한 수사가 일단락나자마자 병무

청에서 바로 연예인들의 불법 병역면제 의혹을 대대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

이다.

병무청이 당시 수사대상으로 파악한 해외파 연예인 12명은 역시 모두 가수였

다. 이 중 ‘H.O.T.’의 토니안, ‘신화’의 에릭, ‘원타임’의 테디, ‘지누션’의 션, ‘코요

태’의 김구, ‘터보’의 마이키는 가족이 해외에 있어서 당시까지 병역이 면제됐다.

유승준, ‘태사자’의 이동윤, ‘지누션’의 지누는 신체검사가, 이현도, 정석원, ‘구피’

의 신동욱은 입영이 연기된 상황이었다.

병역이 면제된 이들을 제외하고 당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해외파

가수가 유승준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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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외면했던 현실적인 어려움

이때까지만 해도 언론들은 유승준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다.

그는 2001년 초에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지만 징집 면제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

은 아니었다. 병무비리 사건 여파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관심이 온통 그의 신체

검사 결과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사용하는 것이 크게 무리가 없다면

공익요원 근무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유승준의 소속사는 군 입대를 장담했다. “국내 체류기간 60일이 지나기 전 미국

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신체검사에 응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음

악작업을 하면서 국내에 머물러 왔다. 만약 징집 면제가 되지 않더라도 당당히 한

국 남자의 의무를 다하겠다.” (한국일보, 2001년 8월 6일) 언론들이 관심을 집중하

고 있으니 다르게 말할 별다른 방도도 없었을 것이다. 유승준 역시 입대를 약속했

다. 그러나 해병대에 가겠다고 말했다는 소문과 달리 그는 주저하는 내색을 보였

다. “솔직히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고 싶다. 하지만 신검에서 징병 대상자로 분류

된다면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2001년 8월 8일) 그는 8월

7일 대구 병무청에서 징병검사를 받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재검을 요구하며 13

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이날 검사는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

어졌지만 담당관들이 합의하지 못하고 판정 보류를 결정했다. 대구 경북 지방 병

무청은 보름간의 내부 논의를 거친 뒤에야 공익근무 처분을 발표했다. 28개월간

의 의무복무 기간 동안, 병적지인 대구 대신 출퇴근 가능한 서울에서 공익요원 복

무가 가능하다는 결정도 덧붙였다.

병무청의 발표가 나오자 병무청 게시판은 시끄러워졌다. 팬들은 유승준이 억울

한 희생양이라고 감쌌고, 비판자들은 유승준이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면 공

익판정도 이해가 안 된다며 당장 현역으로 보내야 한다고 팽팽히 맞섰다. 유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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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외 이주자 연예인에 대한 새 병역법 시행령의 적용을 받게 된 첫 케이스였기

때문에 인기만큼이나 논란이 컸다.

언론들은 유승준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띄우며 논란에 더욱 불을 붙였다. 그가

검사를 받는 자리엔 어김없이 리포터들이 찾아가서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입대할

의사가 있냐고 물었다. 카메라 앞에서 입대하겠다는 의지 표명 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지난 19일 아프리카 TV 생방송에서 ‘해병대 홍보대사’ 루머에

대해 해명했던 내용도 그의 처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1999년 집 근처에서 기자를

만났는데, 그가 “군대 가야지? 몸도 좋은데 해병대 어때?”라고 물어봐서 “해병대

좋죠”라고 답했더니, 다음날 1면에 박찬호와 함께 해병대 자진입대 기사가 나왔

다는 것이다. 오보로 정정되었지만, 사람들은 ‘해병대 홍보대사’로만 기억할 뿐이

었다.

유승준에 대한 여러 소문들과 달리 당시 신문 구석에서 그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2001년 9월 6일자 <소년한국일보>는 ‘공익근무 판정에 속타는 유승준’이라

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승준이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선, 그가 2001년 초에 서울음반과 37억짜리 대형 계약을 체결하고 정규 앨범 2

장과 베스트앨범 1장을 내기로 했기 때문에 입대를 하게 되면 계약 이행이 어렵다

는 것이다. 두 달 남짓 앞으로 다가온 입대일 전까지 정규앨범 1장과 베스트 앨범

을 만들기가 불가능하지만, 위약금도 물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

는 영주권 문제인데,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주권

을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주권을 포기하면 은퇴한 뒤에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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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무서운 사회”

2002년 1월 20일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이란 이름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끝

내 포기했다. 일본 공연 때문에 나간다고 해놓곤 미국으로 날아가 시민권을 취득

했다. 2001년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기로 예정되어있었지만 ‘가사’

사유로 다음해 2월 14일까지 입영연기 허락을 받은 뒤였다. 입영연기 당시에 병

무청 공보실에서는 “누구든 입대 전 가사사유로 3개월까지 연기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소문과 달리 특혜는 없었다.

한국 국적 포기와 함께 그가 이미 2년 전에 시민권 신청을 해두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는 주위에서 시민권 취득을 원했을 뿐 자신은 고민하고 있었다고 해

명했다. 다만 부모를 만나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당시 소속사에서는 "가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의 국적을 선택한 것

같다"고 전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한 명의 해외파 가수로서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도

아니고 ‘위험한 외국인’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경계가 만들어낸 잘 먹히는 대중

상품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는 떠날 수 있었고, 떠났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이 나라에서 그처럼 휙 떠날 수 있는 능력은 부럽고도 미운 것이다. 하지만 한 때

‘아름다운 청년’으로 칭송 받던 사람이 1년 새에 대한민국의 이익과 안전을 해칠

‘위험한 외국인’으로 배척당하게된 과정을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똑똑히 기

억해야 하지 않을까? 병무비리가 드러나자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잡아내지도

못하고 애먼 해외파 가수들에게 화살을 돌렸던 병무청, 상품성이 있을 때는 한껏

칭송하다가 바닥에 있는 대로 내리꽂은 언론과 연예 자본, 그리고 이제는 추방된

외국인이라고 이런저런 소문만 가지고 비난했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과

연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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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지금 유승준은 병역의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아늑한 집에

는 반드시 변기통이 있어야 하듯이 감정을 배설할 변기통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유승준은 이 나라에서 ‘국민 변기통’이 돼버렸다. 병역의 신

성성이 유승준에 쏟아지는 욕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병무청은 애초

에 유승준을 쿠마리(네팔의 살아있는 여신)처럼 만들어서 선전하려고 했지만 실

패했다. 그러나 원래 계획과 반대로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삼아도 나쁠 것은 없었

다. 신성성만 지킬 수 있다면 쿠마리나 마녀 어느 쪽이나 괜찮았다. 아니, 신성성

을 지키려는 종교적 의례에서는 보통 둘 모두 필요하다. 어떻게든 병역의 신성성

만 유지할 수 있으면 그 뿐이었다. 원래 쿠마리 후보였던 유승준이 마녀가 되고 곧

이어 차인표가 해외파 연예인 중에 유일하게 병역을 마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새

로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주목받게 된 차인표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 무서운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승준씨를 두둔할 생각은 아닙니다만, ‘비

난’이 ‘매도’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씁쓸했죠.”(동아일보, 2002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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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기획기사

모병제가 대안이라고?

오리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모병제가 우리 운동의 목표였던 적은 없다. 우리는 징병제를 끝내고자 했지만

이 제도가 또 다른 많은 사회적 부작용을 불러올 모병제로 전환되는 것을 원치 않

는다. 우리는 군대없는 세상, 전쟁없는 세상을 꿈꾼다.

모병제가 징병제의 폐해만을 쏙 뺀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큰 대

한민국 오산이다. 병역거부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모병제가 되면 한 해 700명씩

감옥에 가는 문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

럴까? 모병제가 되면 군대는 다른 직장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하나의 직업이 될까?

아직 실시되지도 언제 실시될지도 모르는 한국의 모병제가 어떤 모습일지 그리기

쉽지는 않지만 한국이 사랑해 마지않는 미국의 예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이다. 미국은 1973년 징병제를 폐지한 이후 모병제를 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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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기획기사

미국의 모병제도는

첫째, 자발적이나 강제적이다(응?). 미국은 징병을 하지는 않지만 18세 이상의

남성은 의무적으로 모병당국에 등록을 해야 한다. 현재의 모병제도도, 모병의 규

모도,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할 지도, 필요에 따라 징병제로 전환할 권리도 모

두 국가가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등록하지 않으면 처벌을 면키 어렵고 정부에서

주는 다양한 복지혜택에서도 제외되며 직업교육도 받을 수 없고 공무직에는 취업

할 수 없다. 어떤 주에서는 주립대학 입학을 허용하지 않기도 하며 심지어는 운전

면허를 취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다고 한다.

둘째, 거짓말과 뻥으로 운용된다. 군대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젊

은이들을 공략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유혹한다. 군대와의 계약이 끝나고

사회에 나온 사람들 중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징병관

들은 군대에서 다양한 기술을 배울 수 있고 못 다한 교육도 받을 수 있다고 뻥을

친다. 코미디 드라마라 과장이 굉장하지만 두 남자와 ½이라는 유명한 미드에서

징병관은 대학에 못가는 주인공에게 어드벤쳐, 컴퓨터 게임 등을 블라블라 하며

입대를 권유한다. 미드에서 이들은 지역 쇼핑몰에서 헌팅을 당하지만 모병에 정

작 일조하는 것은 일선 학교들이다. 모병관들이 학생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법률 조항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는 학생들의 개인 정보를 군대에 넘겨

준다. 이를 통해 군 모병관들은 학생들의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신병 모집에 관한

우편을 직접 발송할 수가 있다고 한다. 이에 불복하는 학교들은 정부에서 재정지

원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저항이 없

다고 한다. 더욱이 군에서 일체의 비용을 대고 실시되는 ASVAB 테스트는 군대 안

에서 나눠져 있는 각각의 영역에 적합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서 만들어

진 테스트로 군대는 이를 바탕으로 모병 계획을 세운다. 비록 강제적인 테스트가

Page 3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30

아니지만 미국의 많은 학교들에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셋째, 그만두기가 어렵다. 전력손실저지(stop-loss)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미국의 대통령은 복무중인 군인에게 적용되는 승진, 퇴역, 제대와 관련한 모든 법

조항들을 유보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대통령이 어떤 이유에서건 이 권리

를 행사하게 되면 복무기간이 종료된 군인들은 전역조치를 받지 못하고 강제적으

로 다른 예비군 부대로 옮겨지거나 교대요원으로 남게 되며 모든 행정적 제대 조

치는 중단이 된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

도 동의하지 않았는데 군복무가 연장된 사례들이 많이 접수되었다고 한다. 이렇

게 자의적으로 군인의 복무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국가안

보라는 명목으로, 무엇이 국가안보를 해치는 것인지는 철저히 국가의 몫이다. 미

국의 활동가들은 이러한 전력손실저지가 잘못되었거나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정

보에 근거한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프로그램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국제노동기

구는 이러한 미군의 방침에 대해 강제노동에 해당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넷째, 병역거부자들이 여전히 생기고 있다. 당연하다.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길

거부한 미군들의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한국의 지상파 채널에서 상영이 된

적도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국방부 훈령을 통해 병역거부를 원하는 미군

은 비전투원으로 재배치를 요구하거나 제대를 요청(어디까지 요청이다. 권리가

아님. 훈령에는 병력수와 능률을 고려해서 실질적이고 공정한 수준에서 승인할

수 있다고 씌여져 있음) 할 수 있도록 방침을 마련해 놓았다. 물론 방침 그대로 잘

실시되고 있는지는 완전히 다른 얘기지만.

이미 미국을 비롯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모병제로 전환했거나 평화 시에는 징

병을 유보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모병제로의 전환이 전 세계적인 추세인 것

처럼 보이지만 한국이 꼭 그 추세를 따라가라는 법도 없고 따라가더라도 세월이

Page 3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31기획기사

좀 많이 걸릴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어떤 정책들이 꼭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군대의 문제도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도처의 군사동맹들을

생각해보자). 또 어떤 학자는 한국의 노동시장이 숙련되고 복종적인 남성 임금노

동자를 주축으로 이뤄져 왔고 이 점에 우리 노동시장의 강점이 있기 때문에 자본

가들이 징병제를 폐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현대전의 양상, 각종 군사동맹에서 한국의 위치, 국내적 요구 등에 의해 권력은 강

제적이든 자발적이든 군사제도를 선택할 것이다. 징병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모

병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의 목표가 군대없는 세상, 전쟁없는 세상이라면 그

과정에서 징병제이든 모병제이든 우리에게는 죄다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병제 하 미국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보았으니 모병제 하에 살고 있는

활동가들의 모병제에 대한 입장과 전략이 어떤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장기적

인 관점을 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신병모집반대 캠페인일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

히 전개되고 있는 이 캠페인은 궁극적으로 신병모집당국이 징집연령층에서 모병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각종 워크숍과 집회를 주도하고 있

다. 이들은 신병모집관들이 하고 있는 거짓말을 드러내는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

고 학내 신병모집을 제한하는 정책을 펼치도록 학교 당국을 압박한다. 대학에서

는 ROTC 홍보 및 훈련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 캠페인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병역거부권을 비롯한 군인의 권리를 알려나가는 캠페인도 벌어지고 있다.

징병제 하에서의 병역거부 운동이 징집대상인 남성 개인(물론 여성이 징집되는

곳도 있음)에게 한정적인 반면에 모병제 하에서의 병역거부 운동은 보다 다양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불복종 교육, 군비지출에 쓰이

는 세금 거부, 병역거부, 군용재산 파괴, 무기생산 및 수출 관련 캠페인 등의 다양

한 전략들이 논의되고 실제로 실행되고 있다.

Page 34: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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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징병제가 폐지되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다. 더 이상 원치 않은 국가

의 부름에 응답할 필요가 없고 그 시간 자유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이 시민들의 감시로부터 군대가 멀어지는 것을 의미해서도 안 되며 무엇이 되었든

군대의 활동과 그 목적에 시민들이 (암묵적) 동의를 하는 것으로 읽혀도 안 된다.

국가안보를 자기 식대로 찜쪄먹는 권력의 얍실함과 오랜 세월 빨갱이 논리에 세뇌

되어 온 시민들의 자포자기가 징병제의 철폐를 요원하게 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서 징병제 이후의 전략을 고민한다는 것은 물론 시기상조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

생각해본 전략들은 꼭 모병제가 실시되어야지만 짠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도 아니

다. 게다가 현재 한국은 징병제와 모병제가 혼용되어 실시되고 있으며 급격하진

않지만 징병제의 비중이 줄어들고 모병제의 비중이 늘고 있지 않은가.

인도적 지원이나 평화재건 등 구질구질하게 전쟁의 정당성을 늘어놓거나 군대

가 좋은 곳이라든가 꼭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을 사회에 퍼뜨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권력의 모습은 평화운동, 반군사주의운동의 성과이다. 이들이 더욱더 당황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더 동분서주할 수 있도록 노

력하자. 이런 꼴이 점점 늘어나면 우리가 데모 잘 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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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기획기사

용석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일까?

원래는 다른 필자를 섭외했었다. 개인 사정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미쳤다고 대타를 자원했을까. 공부도 하나도 안 하고 조사도 하나도 안 하고 쓰는

글이니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십사 부탁을 드린다.

장면 1

2004년이었나 2005년이었나, 아무튼 10년쯤 전에 서울 우이동 봉도수련원에

서 평화활동가 대회라는 것이 열렸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과 지금은 없어진

당시 평화인권연대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다른 사람들은 누가 참여했는지, 무슨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술

을 마시는 자리다. 테이블별로 돌아가면서 평화와 관련된 노래를 불렀다. 우리 테

이블(전쟁없는세상+평화인권연대)은 산울림의 ‘내게 사랑은 너무 써’를 불렀다.

기획기사

Page 3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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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가 평화 노래냐고 묻는다면,

지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평화’가 특별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

나 소나 부시나 이명박이나 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너무 넓은 평화’는 아

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도 딱히 그 노래가 평화 노래라고 생각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반발심이었다. 우리 앞 테이블에서는 평화 노래로 ‘우

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는데, 내 생각에는 그 노래 또한 평화 노래가 아니었던

거였다.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인지 아닌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평화운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반전운동이 평화운동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생각일 뿐이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과연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일은 적

어도 내 소원은 아니다.

장면2

나는 고등학교 때 굉장한 애국자였다. 당시 IMF 구제금융시절, 금 모으기 운동

같은 게 온 나라를 휩쓸었는데, 나는 동참할 금이 없어서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정

말이지 금니라도 뺄 기세로 금모으기 운동을 지지했다. 그때 타이타닉 영화가 개

봉했는데, 타이타닉 영화에 관객이 100만 명이 들면, 전 국민이 모은 금 팔아서 충

당한 외화가 한순간에 다 사라진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친구들한테 타이타닉

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국산품을 써야 하며 이

미 산 외제는 메이커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나부터 베네통 가방의 베

네통 마크를 뗐다. 아무튼 이런 애국자였는데, 애국자였던 만큼 나의 소원은 첫째

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이었다. 당시 일기를 들춰보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통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이유나 근거 따위를 제시하지는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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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기획기사

았다. 일기장이라서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닌, 마치 해가

뜨면 밝아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좀 과한 편이긴 했지만, 당

시 내 또래의 아이들은 대체로 애국자였고, 북한에 대한 감정 혹은 판단과는 별개

로 통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러다가 대학에 갔는데, 수업 시간에, 그리고 선배와 세미나를 하면서 나는 충

격을 받았다. 독문과 수업을 들었는데, 귄터 그라스라는 독일 지식인이 독일 통일

을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귄터 그라스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양철북」

이라는 소설 이름은 알고 있었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니 그가 그냥 허튼 소

리를 한 건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양심적인 지식인이 통일을 반대했다니 나

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다. 교수가 말하길 “귄터 그라스는 2차 대전 가해국

인 독일이 강한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알려줬다. 놀랐지만, 그건

독일처럼 세계대전 가해국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께 세미나를 한 선배도 자기는 우리나라 통일에 반대한다는 거다. 나

는 그 선배에게 따졌지만 말빨에서 밀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선배는 통일이 왜

필요하냐고 나한테 물었고, 나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통일이 꼭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선배는 지금과 같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보통 국가 관계

만 되어도 이산가족이 못 만나지는 않는다며, 그게 통일을 해야 할 이유는 아니라

고 했다. 나는 선배 말을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백 프로

납득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교수와 선배의 말이 충격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나라는 꼭 통일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균열이 간 것은 김남주의 시 <겨레의 마지막 순결

너 백두산 기슭이여>를 읽고나서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김남주였는

데, 그는 민족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내는 시를 여러 편 썼다. 그런 그가 “통일이

안되어도 좋으니/천년 만년 남남북녀로 갈라져 살아도 좋으니”라고 이야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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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아닌가. 이유인즉슨 “겨레의 마지막 순결 너 백두산 기슭이여/자본의 유혹 앞

에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 말아라”는 것이었다. 지금 다시 보니 불편한 단어들

이 보이지만, 당시에 나는 이 구절을 보고 어렴풋하게나마 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

라 ‘어떤 통일’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꼭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병역거부 운동을 하면서 국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국가가

강한 힘을 갖는 게 어떤 의미인지, 특히 강한 군사력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생각의 결과는 이렇다.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은 위험하고 강한 국가를 향한 열정은 사회의 민주주의

에 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강한 경제력을 갖고 강한 군사력을 갖기 위해

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는 반대쪽에 설 것이다.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더 거대한 국가, 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

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대한민국(혹은 통일된 조국)보다는

지금 있는 두 나라도 더 잘게 쪼개어져야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다. 국가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도 중앙 정부보다는 지방정부, 지방정부보다는 더

작은 규모로, 사람들이 자치를 이어갈 수 있는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과 같은 남북 대치상황은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전협정이 정전

협정으로 바뀌고 한국과 북한이 유럽 국가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런 이야기는 하나마나한 공자님 말씀이겠지만 말이다.

분단체제 극복이 강한 국가, 큰 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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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똘 | 전쟁없는세상 회원+출판노동자

‘존재 증명’에 동참하여 읽기—《숫자가 된 사람들》 서평

‘평화’가 뭘까. 이 주제로 각자 책을 들고 모

였던 적이 있다. 모인 사람들 수만큼이나 다양

한 정의와 그에 걸맞은 책이 나왔던 걸로 기억

한다. 나는 중년·노년 여성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했던 지난 삶에 대해 직접 쓴 시

집을 가져갔다. 평화는 ‘누구나 자기 목소리로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

하고 싶어서였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나한테 가장 큰 위협으

로 다가오곤 하는 것은 주로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내 일상과 감정에 대해

서 말할 수 없을 때, 제대로 설명할 수 없거나 애써 설명하면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내 속은 말 그대로 ‘전쟁통’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이상, 나에게 평화란 영영 없는 셈이었다.

리뷰-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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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언뜻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

다. 왜 말하지 못하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실은 말하

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선 안 되는 것을 결정짓는 누군가가 말이다. 이렇듯 말이 곧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천지차이의 파급력을 발휘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같잖은 한마디는 신

문 1면을 도배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건 한마

디는 발화되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이 금세 휘발되어버린다. 누군가의 소

소한 경험담은 거창한 교훈으로 탈바꿈해 오래오래 전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

의 처절한 경험담은 그저 나와 관계없는 끔찍한 얘기,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져갈

뿐이다. 아니, 이 모든 결과 이전에 일단 말을 하는 것, 진실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도 당장 죄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때 죄를 부여하는 자들이 누군지 떠

올려보면, 확실히 말에는 권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생환자들의 말마디를 복원하다

《숫자가 된 사람들》(오월의봄, 2015)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열한 분의 이야

기를 인권기록활동 작가들이 ‘구술’ 형식을 바탕으로 담아낸 작업물이다. 사실 형

제복지원 사건 자체는 유명한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건인지 궁금하다면 인터넷 포털 검색창

에 ‘형제복지원’이라고 써넣기만 해도 주요 정보들이 쭉 펼쳐진다. ‘형제’‘복지’라

는 훈훈한 이름으로 사실상 강제수용소가 운영되었던 것, 거기서 어떤 가학 행위

들이 있었고 몇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형제복지원 원장은 겨우 2년 6개월 징

역을 살고 나왔고 대를 이어 ‘사회복지사업’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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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리뷰

하지만 이런 사실관계들을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이 사건은 도통 피부로 와 닿

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옥이란 게 있다고 치자. 지옥의 설계도나 구조도 따위를

백날 들여다봐야 그 끔찍함을 조금이라도 간접경험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의 한마디다. 우리는 그 실낱같은 말마

디를 붙잡고서야 겨우겨우 거대한 비극의 내부를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

지 못한다면 비극은 진즉에 매장될 것이고, 다른 듯 닮은 얼굴로 우리를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팀은 그 소중한 말마디를 복원하는 역

할을 했다.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한곳에 ‘치워져야’ 했던 존재들, 스스로 말

할 수 없었던 시간들, 형언하는 것이 고통일 만큼의 극한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

었던 삶, 아직도 견고한 사회 내부의 벽과 분리통치에 꽉 막혀 있는 목소리가 세상

에 나오게 도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형제복지원’이 대중의 눈앞에 제대로 ‘재건’되어야 했다. 피해생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비슷한 듯 다른 경험이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되면서 비로소 진짜 형

제복지원의 전모가 드러났다.

‘사회 정화’라는 숙원사업

형제복지원의 전모, 뭐였을까 그게.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 그것

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 책을 한 꼭지나마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이유가 그것이다. 이 충격은 단순히

그 안에서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학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남자 소대에서는 소대장이 성폭력을 일삼기도 했다는 등 정황상의

끔찍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갖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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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그곳에 어떻게 잡혀왔고, 그 안의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됐으며, 풀려

난 이후에 어떠했는지—이 별로 낯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세간의 기대와 달리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 같은 것이

아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고유명사를 작은따옴표 안에 묶는 게 당치 않게 느껴

질 만큼, 그것은 우리 세계와 긴밀히 이어져 있었다.

국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을 발령해 소위 ‘부랑인’ 단속을 적극적으

로 권장했다. 이 훈령에 따르면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

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

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제1장 제2절)이 단속 대상이 되었다.

이걸 요즘 상황에 비추어 다시 풀이하면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지하철역

안이나 공원 벤치에 추레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노숙인, 간혹 상점 안에까지 들어

와서 손님들에게 껌을 사라고 불쑥 내밀곤 하는 껌팔이, 지하철역 계단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수그린 채 거무튀튀한 두 손만을 벌리고 기다리는 걸인……” 이 모든

이들은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기 때문에 한곳에 격리해서 갱생시켜야

한다. 이것을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 지금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사

회 정화와 질서를 염원하는 지배층에게는 매력적인 숙원사업이 아니겠는가.

그보다 더 서늘한 것은 스스로 적어도 노숙인은 아니라고 안도하는 우리 또한

그러한 숙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피해생존자 김희곤 씨의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은, 마구잡이 부

랑인 단속을 명령한 국가권력과 머릿수당 인간장사를 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묵과한 시민사회에도 마땅히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형제복지원의 담 바깥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에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 사회복지시설이라는 미명 아래, 갱생이나 훈련, 때로는 재활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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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리뷰

요양이라는 명분으로 약자 또는 소수자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일은 지금도 자연스

럽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소위 ‘부랑인’의 이미지에 해당되지도 않는, 즉 집과 가족이

있고 행선지도 명확했던 이들까지 무차별로 형제복지원 단속차에 태워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왜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가, 잘 알아보고 잡아가

야지”라고 반응한다면, 웃프게도 이 책과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오히려 영영 멀어

지는 일이 되어버릴 터이다. 말 그대로 행선지가 없는 이들이라고 해서 한곳에 갇

혀야 할 까닭이 있는가? 형제복지원을 제대로 알려면, 그리고 그 피해자들의 삶을

지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사회적 치유를 제공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부랑인이란

대체 누구인가’ 하고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물어야만 한다. 필요에 따라 부랑인을

만들어내는 이들, 그 격리를 이용해 돈과 힘을 챙기는 이들의 면면을 똑바로 보고,

그들에게 책임 추궁의 화살을 겨눠야 한다.

‘기록’의 힘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책에는 어릴 때 집을 잠깐 나왔다가 잡혀간 아이들의 사례도 있지만, 분명히 일

찍이 부랑인으로 낙인찍혀서 오래도록 떠돌아야 했던 어른들의 사례도 있다. 생

의 기억이 집이 아니라 시설에서 시작되는 이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내 세 살

때 발생된 걸로 추정한대요”라고 설명하는 피해생존자 김영덕 씨 경우처럼 말이

다. 태어남에 대한 증명이랄까, 확인이 불가능했던 김영덕 씨는 그저 서류에 서류

를 찾아가며 자신이 처음에 어디서 발견되어 어디로 보내졌는지 스스로 추적해가

는 지난한 작업을 해왔다. 자신이 어딘가에 버려진 것은 ‘사건’에 해당했기에, ‘태

어났다’의 자리에 ‘발생했다’를 넣을 수밖에 없었던가보다. 하지만 발생이라고 하

더라도 그는 그 발생 경위를 밝혀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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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같은 처지의 ‘무연고자’들의 발생 또한 다 찾아내주고 싶다는 꿈을 꾼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 거추장스럽고 갑갑하게 생각하는 주민등록증을 비롯한 신

분증, 서류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절실한 존재 증명이었던 셈이다. 물론 인간이 서

류로 증명되어서는 안 되는 게 맞다. 아니, 서류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흔히 말하는 ‘인간 존엄’일 터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최소한의 존엄마저 빼앗긴 사람들, 어딘가에서 발생해서 물건처럼 몇 번이고 옮

겨져야 했던 사람들이 충실한 ‘기록’의 힘으로나마 다시 ‘출생’할 수 있다는 희망

이다.

이 책도 결국은 그러한 희망에서 쓰여졌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가는 일은 그 희

망에 동참하는 일이다. 조금 무섭게 들릴 테지만, 우리의 독서는 사장될 위기에 처

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할 힘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라면,

책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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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기획연재

기획연재-이예다의 프랑스 생활기

이예다 | 병역거부자

내가 병역거부의 방법을 ‘한국에 남아서 감옥을 갈까’, 아니면 ‘한국을 떠나서

난민인정으로 병역거부권 불인정이 국제 인권침해임을 증명할까’ 하고 고민하던

당시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족과 친구조차도 군대를 거부하는 내 기분을 이해하

는 사람이 없었다. 외로운 마음에 ‘전쟁없는세상’에 연락을 취해볼까 고민도 해봤

었지만 결국은 한국을 떠나는 방법을 선택했고, 공개적으로 내가 난민신청을 한

다는 것을 알리면 출국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전쟁없는세상’과는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없는세상’의 존재는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과 공식적으로 약

속을 잡고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도착하니 여옥님께서

마중을 나와주셨다. 처음 만난 만큼 우리는 서로의 소개와 병역거부에 관련한 이

야기를 하면서 프랑크푸르트의 ‘Connection’ 본부로 향했다. 본부라고 말하니 거

창해보이지만 독일의 ‘Connection’활동가들이 다층 주택에서 살며 본부로 사용

하는 구조였다. Rudi 씨가 거주하는 1층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Rudi씨의 부

유럽에서 병역거부를 말하다 - 유럽 스피킹투어 참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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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Karin씨께서 함께 있다고 여옥씨께서 설명해주셨다. “부인분은 혹시 일본분이

신가요?”하고 여쭤본 것이 무색하게 곧바로 카린씨와 직접 인사를 나누며 ‘카린이

라는 이름이 독일에도 존재하는가보다’하고 생각하게 됐다. 약간의 일정 브리핑

및 준비를 한 후 모두가 먹을 저녁을 함께 요리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며 첫날을 보

냈다.

내가 합류한 다음날의 날짜가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이었다. 병역거

부자의 날이 있는 5월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관련한 보고서가 앰네스티에서

나올 예정이었던데다가 5월 12일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3명에 대해 광주지

법에서 무죄판결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덕분에 병역거부자 및 관련 활동가들에게

뉴스와 다큐로서 다뤄질 예정이라하며 언론들이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나도 이

벤트 장소로 이동중 한국의 공중파 채널 SBS의 기자분과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

다. 내 이야기는 짧게 한마디가 들어갈 것 같다는 기자님의 말에 “종교도 없고, 성

소수자도 아니고요. 군대 문제만으로 다른 나라에서 난민으로 받아줄 정도의 상

태다, 그만큼 한국 군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며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 한 문장을 부탁 드렸다. 인터뷰에 한 말 그대로 병역거

부권이 없는 것과 군대문제 만으로 다른 나라에서 난민인정이 된다는 것의 의미

는 병역거부권은 국제적 기준에서 인권이고 그 인권이 침해 받았음을 전세계적으

로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한국 사람들에게, 징병된 남성뿐 아니라 그

들의 가족, 친구에게 슬픔과 짐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에게 나

의 외침이 닿았으면.. 병역거부 문제로 외로운 사람이,나와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

들이 사라지길.. 독일의 한 시골 구석에서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기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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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기획연재

도착한 첫번째 이벤트 장소는 펜션이었다. 화가,유리공예가 커플이 있는가 하

면 갖가지 예술품이 주변에 굴러다니고(?)있어 예술가의 마을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러가지 이벤트를 하는 곳인 듯 했다. 펜션으로서의 기능도 하며 손님도 받는 듯

했다.

또 익숙한 이름을 들었는데 Emmanuel 이라는 또 다른 망명자가 와서 이벤트

및 자유발언시 프랑스어-독일어, 독일어-프랑스어 통역을 도와준다고 했다. 통

역을 도와주기도하고 이름도 익숙해서 그런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꽤 즐겁게

시간을 보냈는데 엠마뉴엘씨는 앙골라에서 탈출해서 독일에서 11년간 기다려서

망명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앙골라에도 군사주의가 꽤나 깊숙해서 군대를 안

가면 고등교육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한다. 최근 한국 병무청이 매년 2만 3천

여 명 정도의 인력이 남아돌고 있다며 고등학교 중퇴 미만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에 대한 징집 결정을 취소했는데 그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인력부족이라며 매년

독일에서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의 언론과 전화로 인터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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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800명의 병역거부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징병대상자인 모든 남성들 사이

에서 학력차별마저 만드는 모습이다. 한국에서 남성들이 군대 가기를 싫어하지만

군대가 아니라면 감옥을 가야하기 때문에 인지부조화 현상도 일어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군대에 갔다!”,”군복무는 신성한 의무다”라면서.

이렇게 단순하게 스스로를 달래며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한국 군복무는

언제부터 의무였는지, 한국군은 어떤 전쟁에 참여했는지, 언제부터 신성시되고

사회인이 되기 위한 관문의 하나가 되었는지, 제대로 된 감사 기구 없이 돌아가는

이유는 어째서인지. 아무런 의문 없이 ‘군대가 없으면 국방이 위협받는다’는 말 한

마디로 정당화 되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없게끔.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예

외는 아니었다. 대다수가 군대 대신 감옥을 가는 행위를 오히려 겁쟁이로 몰아 세

웠는데 그에 대해 나는 “좀만 생각을 해 봐. 너희들도 인정하는 군대에 문제가 있

다는 것을 함구하고 2년동안 군대에 다녀오는 것, 군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 병

역거부를 한 댓가로 2년동안(6개월재판,1년6개월 수감) 수감생활과 후에 평생을

따라오는 차별을 감내하는 것. 어떤게 더 어려운 것 같아?”하고 답변하고는 했다.

친근한 이름의 두분과 함께. 왼쪽부터 나, 엠마뉴엘씨, 카린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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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기획연재

엠마뉴엘씨 외에도 에리트리아에서 탈주한 사람,터키에서 병역을 거부한 사람

들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펜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예술가의 마을(?)아니라 할

까 봐 단체로 작품을 만드는 시간을 보냈다. 갖가지 버려진 장신구,인형,피규어 등

등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상자 안에 자유롭게 담아내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전쟁과

군대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다. 모두들 각자의 경험이 작품에 그려지는듯 했다. 빨

간 물감에 범벅이 된 아기인형, 가시에 찔린 여자들, 전쟁이라고 적혀 있는 주사기

에 머리를 찔린 인형 등.. 여옥씨는 700의 숫자가 감옥안에 있는 걸 연상시키는 작

품을 만들었다. 한 해에 약 600~700명의 병역거부자가 한국에서 감옥에 가기 때

문이다. 저녁에는 반전운동과 관련 된 각자의 경험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

졌는데 우리가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병역거부를 사유로 수감 된 한

국사람이 전세계에서 90%이상을 차지 한다는 것을 설명하자 모두가 놀랐다.

한 명의 관객으로써 여옥씨의 스피치 속에 인상 깊었던것 중 하나는 여성이기

에 여성활동가로서 반전활동,병역거부 활동을 하며 받는 차별이었다. 집회나 모

임에서 말싸움&몸싸움이 벌어지면 여성 활동가는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한다.

전쟁없는세상에 항의 전화가 가끔 왔을 때 여옥씨께서 전화를 받으면 듣는 소리

는 ‘남자 (전화)바꿔’라고 한다. 모든 ‘남성’만이 징병 대상자이기 때문일까 군대문

제에 대해 토론하게 되면 징병 대상이 아닌 모든 사람(여성,신체 장애인과 저학력

자,이민자 등도 포함)은 남성들에게 ‘군대 가지 않은 자는 빠져라’라는 소리를 듣

게 된다.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있다고 해서 한국것은 물론 다른 나라의 전쟁사를

공부한 것도 아니면서 전문가인 사람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 나를 난민으로 받아들인 걸 공개하며 말

하고 싶은 것은 ‘한국 군대는 문제가 많은 곳이다. 당신 자신들, 당신들의 자식들

친구들 가족들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이 문제를 개선 시켜야 한다’인데 군대or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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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선택지 밖에 없는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오히려 화살을 나한테 돌리며 “군

대도 안 다녀 온 녀석은 군대에 대해 언급할 자격 없다!”로 일축해 버린다.

이런 이야기들도 나누며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평화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이해하지만 평화를 바라며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려고 부딪혔을 때

이런 반응이 나온다면 기운이 빠져요”라고 하는 나에게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조급해 하지말고 천천히 나아가도록 해. 스스로를 다스리며 즐겁게 인생을 살아

가는 것도 중요하고. 일상속의 행복을 소중히 하렴”하고 따뜻한 말도 해주셨다. 그

렇게 서로의 에너지를 나누며 하나의 일정을 마쳤다.

병역거부와 관련된 이번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과 단체사진

모두 따뜻했고 큰 에너지를 받았다.

다른 일정들은 주로 독일사람들과 대중강연, 로비활동, 언론 인터뷰 등으로 구

성 됐는데 한 기자분의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거부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 덕분에 내가 생각하던 평화주의는 무엇인지 한 번 더 고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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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기획연재

사실 한국에 남아서 병역거부를 할 생각이였을 때를 이야기 해주며 재판에서 “강

도가 들어와 당신(들)을 죽이려 한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것인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내 고민을 대답 대신 들려주었다. “전 저항하고 싸울 지도 몰라요. 상대를 죽

이진 않더라도 날 죽이려는 자에게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똑

같은 사람인데 가능하다면 대화로 날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해결책

을 찾아 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가능하다면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없

애려고 노력하고.. 전쟁도 마찬가지에요. 전 지금 당장 군대가 전쟁을 일부분 억제

하는 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안보를 외치며 군사력 유지만 할

것이 아니라 전쟁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과의

종전과 화합, 다른 나라와 함께 군축을 통해 군대 자체를 없애는 것.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보이고 힘든 이야기지만 불가능하다며 군사력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이해의 길을 내팽겨쳐 둔다면 갈등은 쌓이기만 할 것이

고 결국 준비 된 군사력만이 마치 IS의 테러처럼 폭발하지 않을까? ‘저항하고 싸울

지도’모른다고 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군대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

하는 세상을 나도 바란다.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만약 집에 강도가

들어온다면’ 같은 가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 병역거부고 내가 할 수 있

는 일을 찾아서 ‘저항하고 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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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게임과 평화

전쟁에서 모두가 군인인 것은 아니다 -디스 워 오브 마인

전쟁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개 병사나 지휘관이 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

무의 내용이 제국주의 침략이든 인종청소이든 아니면 ‘인도적 개입’ 혹은 ‘정의로

운 전쟁’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한편 현대전이 총력전의 양상을 띰에 따라, 전쟁에

는 전투원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행위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갈

수록 많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1차 세

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90%가 군인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10%에 불과했

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가 거의 반반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사망자 중 70%가 민간인이었고, 최근의 이라크전쟁과 아프가

니스탄전쟁에서는 민간이 사망자 비율이 80~85%에 달했다.”

- 하워드 진, 『역사를 기억하라』

지우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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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기획연재

2012년작 ‘스펙 옵스: 더 라인(Spec Ops: The Line)’이 흡사 영화 <지옥의 묵시

록>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라인으로 기존 전쟁게임의 틀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

기도 했지만, 이 게임 역시 주인공이 군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점

에서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은 아주 흥미롭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되어 전쟁의 현실에 내던져진다.

11비트 스튜디오가 2014년 11월 출시한 인디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사라예보를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전쟁통에 한데 모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일단의 생존자

들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은신처의 구멍 난 벽

을 보수하고, 부서진 잔해를 모아 각종 도구와 몸 누일 데를 만들고, 음식물을 마

련하다 보면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밤이 되면 한 명이 밖에 나가 저격수를 피해

폐허가 된 도시를 헤집으며 물자를 수집하고, 나머지는 약탈에 대비해 불침번을

서며 동료들과 은신처를 지킨다.

수도와 가스를 비롯한 모든 자원의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든

적병과 싸우기에 앞서 굶주림과 추위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적과 싸워야 한다. 식

수를 마련하기 위해 빗물을 받고, 겨울에는 눈을 녹인다. 겨울철에 땔감은 식료품,

의약품과 함께 가장 구하기 힘든 자원 중 하나이다. 먹을 것은 언제나 모자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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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한 끼나 제대로 먹으면 다행이고, 며칠을 굶다 덫에 걸린 쥐를 날로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밤에 버려진 건물을 뒤지다가 불한당의 총에 맞

을 수도 있고, 수집을 마치고 새벽에 은신처로 돌아오다가 정부군이나 반군 저격

수에게 당할 수도 있다. 병이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

국 죽게 될 것이며, 하나둘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본 생존자는 우울과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이 게임에는 세이

브/로드가 없다.

“현대전에서, 당신은 별 이유 없이 개처럼 죽게 될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람들은 보통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을까? 액

션게임들이 주는 말초적 쾌락이나 멋진 그래픽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은 아닐

것 같다. 최후 생존이라는 목표 달성에 따른 성취감 정도는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즐겁다기보다 우울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를 기다

리는 것은 어느 하나도 달갑지 않은 몇 가지 상황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골라

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연속이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려야 한다. 플레이어는 곤경에 처한 외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도 있고, 통조림 몇 병을 얻고자 무고한 이웃을 군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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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기획연재

밀고할 수도 있다. 노부부의 집을 강도질하든, 병원에서 붕대와 약을 훔치든, 총칼

로 중무장해 군부대를 습격하든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다. 일반적인

법칙은 몸이 편할수록 마음은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도 남는 것은 아픈 과거와 공

허한 현재뿐이다. 전장에서의 용맹과 활약을 기리는 훈장도, 명예로운 개선 행진

도 없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게임 중 가장 우울한 게임이었

다.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표현하지 않듯, 이 게임을 ‘재

미있는 게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자들에

게 이 게임을 추천한다.

게임 플레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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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샤샤의 뀨잉뀨잉

샤샤 | 병역거부자

채식에 대한 혐오

안녕하세요 샤샤에요. 제 얼굴에 김이 묻은거 같애요. 잘생김이요....ㅈㅅ...오늘

은 채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해양... ㅇㅅㅇ 제맘이에양. 언제 정해놓고 제가

글쓴적 있었나양...ㅎㅎ 오늘 할 이야기는 채식 전반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시의성

에 맞춰서 예전부터 제가 고민하던 지점인 바로 채식주의자에 대한 혐오라는 주

제에양 ㅎㅎ 채식을 당위적으로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에는 각종 암과 심장병의

원인인 육류섭취를 비난하고 채식을 의학-영양학에 근거해서 권장하는 논증이

하나 있고(존 맥두걸 박사, 콜린 캠벨 박사, 콜드웰 에셀스틴 등), 다른 하나는 비

인도적인 산업형 축산업과 동물의 고통 등에 근거한 철학-윤리학적 논증이 있어

양.(존 로빈스, 제레미 리프킨, 피터 싱어 등). 둘다 상당히 강력한 논증이에양. ㅇ

ㅅaㅇ 저는 비록 넘의 살을 너무 탐해서 잘 못지키고 있어성.... 스스로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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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기가 겁나 오글거리긴 하지만...시무룩 ㅠㅠ 그전부터 채식에 대한 이상하

리 만치의 적개심과 노골적인 편견과 망상을 한번 다뤄보고 싶긴했어양 ㅎㅎ

그래서 이번 뀨잉뀨잉에서는 이 생각의 단초들을 두서없이 말해볼까 해양 ㅎㅎ

채식에 대한 혐오는 구글링 같은거 해보면 이게 동서양 고금 막론하고 상당히 보

편적인 현상이라는걸 알수 있는데요, “채식주의하면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나요?”

라는 멘스플레인부터 (리베카 솔닛의 저서에서 나온 말로, 남성들이 항상 가르치

려고 드는걸 뜻하는 men+explain의 합성어) “그럼 식물은 생명 아닌가요?” “쓸데

없는거 신경쓰지말고 다른 사회문제에 관심가지시죠?” “채식하면 영양 결핍되요.

인간은 원래부터 육식동물인데 왠 채식?” “채식하다니 남자답지 못하군. 역시 남

자는 고기를 먹어야 힘이나지. 게이 아니야?” 뭐 이런 종류까지 다양한 형태를 띄

고 있는거 같애양. 문제는 대부분 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망상과 편견에 불과하다

는 내용이 대부분일텐데양, 제가 인터넷에서 봤던 채식주의 혐오글 중에는 생채

식 블로거랑 채식주의 바디빌더에게 “니새끼가 뭔데 채식하라마라 이래라저래라

임?” “식물도 생명인데 착한척 오지네 병신ㅋㅋ” 이런 욕설도 있었어양. 최근에 나

온 『채식의 배신』같은 책들도 이런 채식에 대한 근거없는 질투와 폄하, 편견, 망상

의 흐름에 발맞춰서 나온 책인거 같애양. 우선 단백질에 대한 망상부터 시작할게

요. 단백질은 현미, 채소, 과일 등에도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식물에 단백질이 안

들어있다는건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의학 상식이에요. 더군다나 단백질이 과다할

경우 신장과 간에 무리가 간다는 연구결과도 많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저자

영양학자 콜린 캠벨에 따르면 단백질 과다 섭취는 암 발생률의 증가와 밀접한 관

련이 있어양. 단백질 부족으로 죽은 사람 본적 있나양? 지방과 콜레스트롤로 심장

마비, 고혈압, 암으로 죽었다는 사람은 봤어도.. 『어느 채식주의』 의사의 고백의 저

자인 존 맥두걸 박사나 『당신이 몰랐던 지방의 진실』의 저자 콜드웰 에셀스틴 박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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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 따라도 단백질 과잉 섭취는 유사 호르몬 인자와 같은 역할을 해서, 노화를 촉

진시키고 각종 호르몬 이상을 야기한다고 해양. 따라서 오히려 육류 단백질이야

말로 채소, 과일의 단백질에 비해 질이 안좋은거졍. 그리고 대부분의 육류에는 콜

레스트롤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있어서 (채소 과일엔 제로!!) 혈관을 막히게 만드고

심장질환과 비만, 알레르기 등등 많은 악영향을 끼친다고 해양. 또한 베지닥터로

유명하신 황성수 박사에 따르면 현미 자체엔 모유보다 높은 단백질 수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채식이 단백질 섭취로 문제가 된다는 것은 근거없는 편견이자 무지

에 불과한거 같애양..ㅋ 그리고 육류는 도살과 양육방법이 악랄하고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각종 항생제, 살충제, 호르몬제 등등을 투여로 하면서 병든 동물들을 도

살하고, 그 자체로도 지방과 콜레스트롤, 단백질이 지나치게 많으면서 식이섬유

는 하나도 안들어 있다는게 문제가 된다더라구양 ㅎ(육류에는 식이섬유가 제로!!)

따라서 닭가슴살 먹고 보기엔 몸짱같이 보여도 사실은 내장 혈관이 막히고 각

종 부작용들을 나으면서 서서히 몸을 망가뜨린다는게 황성수 박사나 존 맥두걸

박사의 영양학-의학적인 채식론의 핵심인거 같애양. 그뿐 아니라 채식을 하면 근

육이 없어진다거나 힘이 약하다거나 여성스러워진다는 다분히 여성차별적인 편

견도 많은거 같애양. 우리몸이 필요한 단백질은 쌀, 콩 등 이런거에 충분히 들어있

고 파이토케미컬 같은 항산화물질이 육류엔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데 어째서 이런

근거없는 편견과 망상이 생겨서 채식주의자들에게 멘스플레인과 혐오발언을 시

전하는 걸까영??? 또한 인류가 육식동물이라는 것도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구영 g

구석기 시대에 이미 곡류를 먹은 유물들이 인류학적으로 발견되고, 육식동물이라

하기엔 소화기능이 전혀 다를뿐 아니라 구강구조와 시각능력 자체가 인간은 초식

동물에 가깝대양 ㅎ 유투브에 보면 황성수 박사가 채식의 배신에 대한 반론을 수

십가지 제공한 동영상이 있으니 참고해보시면 좋을 듯 하네양 ㅋ아무래도 전없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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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더리에서 채식을 지향하거나 하고 있으신 분들이 많으니 보시면 좋을 듯 해

양. 영양학과 의학과 각종 임상실험과 연구결과에 바탕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차원에서 채식의 장점을 강조하는 의사들의 논리적 논증들 마저도 편견과 망상으

로 부정하는 파오후들을 어째야할까영? ㅋ 제 글은 채식이 더 우월하다는 거도 아

니고 채식을 모두다 해야한다는 글도 아니고 단지 채식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과

무지로 공격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편견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에양 ㅎ 대부분 객

관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거든양...ㅎㅎ 여튼 더 나아간 채식과 육식의 논쟁들

에 대해선 다음책들을 보시면 좋을 듯 하네양ㅎㅎ 역시 사람은 배워야함..보시면

깜짝 놀라실거에양. 얼마나 채식에 대한 영양학-의학적 베이스 없이 망상과 피해

의식에 근거해서 채식을 공격하는지를영ㅎㅎ 채식이 비싸다는 논리도, 러비건 유

기농 푸드 찾으면서 아보카도나 코코넛 찾고 앉았는 강남 싸모님들이 아니라면

충분히 한식위주로도 할수 있을 듯 해양 ㅎ 국내의 황성수 박사는 현미, 채소, 과

일 등 위주로 오히려 육류보다 더 저렴하고 소박한 밥상으로도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는걸 보여주는 분이구양. 저도 현미밥에 상추, 깻잎쌈에 과일 정도 먹으면서

많이 좋아졌어양. 오히려 설거지나 요리로부터도 해방되양 ㅎ 여러분들도 네이

버 지식인이나 포탈 댓글 같은 근거 하나도 없는 허접쓰레기 지식들에 채식과 육

식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멍청하게 씨부리는 언론 기사글들이나 TV요리프로

따위들 보지마시구, 다음과 같은 책들 보시면서 제대로된 지식 쌓으시길 추천드

려양 ㅎㅎ 철학자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니가 먹는게 곧 너”니까영 ㅎ 내입으

로 들어가는 음식들이 어떤지는 최소한 제대로 알고 있어야 되는거자나양??? 건

강에 너무 신경쓴다구양? 그럼 너님은 메르스 유행할 때 마스크 안썼나양? 당장

감기만 걸려도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게 인간의 심리에양 ㅎㅎ 남이사 건

강 신경쓰던 안쓰던 뭔상관? 넌 건강 신경안쓰나양? ㅋ 저도 아래 추천도서들 읽

고 많이 배웠어양 ㅎ 그럼 또 뵐게요 손구락 아파서 ㅠㅠ 뱌뱌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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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웰 에셀스틴, 『당신이 몰랐던 지방의 진실』

존 맥두걸,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존 라빈스, 『음식혁명』

존 라빈스, 『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 』

콜린 캠벨, 『무엇을 먹을 것인가』

조엘 펄먼, 『 내 몸 내가 고치는 식생활 혁명』

조엘 펄먼, 『내 몸의 자생력을 깨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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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아 신희권 아하 아침 아키오 안지환 안진걸 양똘 양은혜 양지혜 에리카 여문정 여옥

여은 여지우 염창근 오리 오성민 오소영 오수환 오정록 오학준 우경환 우공 우성섭 우완

우지연 위양자 유건 유은정 유인해 유현미 윤민순 윤정하 윤정화 윤혜정 은국 은종복

은혜와평화교회 이갑수 이길준 이덕현 이비함 이상길 이선아 이선영 이선옥 이세현 이연지

이연희 이영롱 이용석 이자호 이장규 이재환 이종우 이종혁 이준규 이현우 이훈 이희진

임두리 임성엽 임재성 임재화 장미희 장정혜 장하나 장현진 전기화 전길수 전범준 전영욱

정명수 정우진 정인철 정주열 정창영 정현채 조은 조정의민 주관수 주홍 지은 진진 진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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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윤희끌레마 태환 편설란 하동기 하승우 한광주 한광희 한욱현 한주훈 햄 허용만 허윤정

허은 허인애 홍수봉 홍수영 홍이 홍창욱 황명규 황수영 황예랑 Tomas&Heidi

재정보고(2015년 2월~ 2015년 7월: 자세한 내역은 홈페이지에서확인할수있습니다)

총 수입 총 지출 이월금 총계

23,689,401 19,082,327 6,336,667 10,94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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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전쟁없는세상발행일: 2015년 8월 5일제호: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46호연락처: 02-6401-0514주소: 서울시 마포구 망원로 57 3층 (03958)http://www.withoutwar.org [email protected]

인쇄기획 한반도연락처 02-889-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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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경기도 화성시 남양우체국 사서함 3호 4011번 (18258)- 화성직업훈련교도소

하형환전남 장흥군 장흥우체국 사서함 1호 542번 (59328) - 장흥교도소

김성민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3723번 (15829) - 서울구치소

김경묵경남 통영우체국 사서함 17호 283번 (53034) - 통영구치소

김두원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우체국 사서함 99호 1868번 김두원 (11778) - 의정부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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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 46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