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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31 1908년 桑港義擧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박민영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1. 머리말 張仁煥 田明雲 양의사가 대한제국 外部 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 1851~1908)를 처단한 桑港義擧(샌프란시스코의거)는 義烈鬪爭의 본격적 始端이었다. 의열투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심을 관류하는 중요한 투쟁 방략의 하나였다. 일제 침략 이래 강점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의열투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의 정의와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한 방 편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 에서 의열투쟁은 곧 한민족의 자존,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유린하는 인물이 나 기관을 의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스티븐스 역시 일제와 결탁하여 자유 1. 머리말 2. 상항의거와 국내외 한인사회의 동향 3. 義烈鬪爭에 미친 영향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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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31

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박민영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1. 머리말

張仁煥・田明雲 양의사가 대한제국 外部 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

1851~1908)를 처단한 桑港義擧(샌프란시스코의거)는 義烈鬪爭의 본격적

인 始端이었다. 의열투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심을 관류하는 중요한 투쟁

방략의 하나였다. 일제 침략 이래 강점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의열투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의 정의와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한 방

편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

에서 의열투쟁은 곧 한민족의 자존,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유린하는 인물이

나 기관을 의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스티븐스 역시 일제와 결탁하여 자유

1. 머리말

2. 상항의거와 국내외 한인사회의 동향

3. 義烈鬪爭에 미친 영향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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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의를 무시하고 한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데 앞장섰던 그러한 부류의

인물이었다.

상항의거 이전에도 의열투쟁의 형태로 전개된 항일운동은 있어왔다. 상항

의거가 결행되기 1년 전인 1907년에 羅寅永과 吳基鎬가 을사5적 처단을 시

도했던 의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의거는 결국 실패로 귀착되었고, 또한 여

러 가지 환경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전 민족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는

여파가 미치지 못하였다.

한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특히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은 이 시기

독립운동사를 상징하고 있었다. 전국 의병을 선도하던 이강년・허위・민긍호

・고광순 등이 보여준 義氣는 의열투쟁에서 표출되는 義節과 일맥상통한다.

미국에서 발간되던 영자신문에 상항의거 직후 의거 관련 보도기사와 함께 구

국의 성전인 의병전쟁을 선전하는 李麟榮 명의의 격문이 게재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1)

상항의거는 국내독립운동이 국외로 확산되고 더욱 심화되는 계기로 작용

하였고, 이후 펼쳐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모색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

쳤다. 가깝게는 대한침략의 원흉인 伊藤博文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의거에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큰 영향을 미쳤고, 멀게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거사로 평가되는 姜宇

奎 의사의 齋藤實 총독 처단 미수의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 등의 始

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항의거는 그 사후처리 과정에

서나 또는 민족적 공감이 환기되는 과정에서 민족 구성원과 독립운동세력이

단결과 화합을 모토로 한민족의 항일전력이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서 그 의의는 매우 컸다.

1) The San Francisco Call 1908년 3월 24일자; Los Angeles Times 1908년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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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항의거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학계에서 연구가 진행되어 의거과정을 비

롯해 장인환・전명운 양의사의 생애에 대한 연구 등은 이루어져 왔다.2) 그러

나 상항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전모를 더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모

체가 되었던 韓人共同會 등 상항 한인사회에 대한 심층적 분석, 스티븐스의

친일행적 등에 대한 연구 등은 향후 더 진척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는 그러한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상항의거가 이후 국내외 한인사회와 의열투

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견지에서, 본고는 상항의거가 국내외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

지 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 상관성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

해 우선 상항의거 이후 국내외 한인사회의 동향과 그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

다. 의거 직후 각지에서 벌어진 의연금 모금운동의 양상과 성격을 비롯하여

이상설이 지은 『양의사합전』의 영향과 역할, 그리고 미주 한인사회의 동향

등을 구체적으로 논급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상항의거가 직접 영향을 미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와 이재명의거를 중심으로 상항의거 이후에 전개

된 의열투쟁과의 상호 관련성과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상항

2) 상항의거에 대한 학계의 중요 연구성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尹炳奭, 『國外韓人社

會와 民族運動』, 일조각, 1990; 張伯逸, 『義士 田明雲』, 集文堂, 1997; 성백걸, 『샌프란

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100

년사편찬위원회, 한들출판사, 2003; 김원용 지음, 손보기 엮음, 『재미한인 50년사』, 혜

안, 2004; 尹炳奭, 「李相卨의 遺文과 李儁・張仁煥・田明雲의 義烈」, 《한국독립운동사연

구》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金源模, 「張仁煥의 스티븐즈 射殺事件

硏究」, 《東洋學》 1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8; 金源模, 「서울에서의 스티븐스의

親日外交活動」, 《항토서울》 46, 1988; 金度勳, 「共立協會(1905~1909)의 민족운동 연

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 1989; 崔起榮, 「舊韓末 美洲의 大同保國會에 관한 一考

察」, 『수촌 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鄭濟愚, 「竹嵓 田明雲 硏

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0, 1996; 오인환・문충한・공정자, 「장인환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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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과 의의를 종합 정리해 보

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학문적 역량이 협소하고 또한 誠力이 부족

한 탓으로 所期의 성과를 거두는 데는 이르지 못한 듯해, 한계를 自認하지 않

을 수 없다. 先學諸賢의 叱正을 바라마지 않는다.

2. 상항의거와 국내외 한인사회의 동향

장인환・전명운 양의사에게 처단된 대한제국의 外部 고문 스티븐스는 伊

藤博文을 필두로 한 일제의 對韓侵略政策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했던 일제의 忠犬 또는 忠僕이었다. 1852년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한 그는 뉴욕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법학과 외교학을 전공한 뒤 일

시 미국 국무성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東京에

서 1년간 지내면서 일본과 인연을 맺었다. 1883년에는 워싱턴으로 돌아가 미

국 주재 일본영사관의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 외무성의 고

문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으로 일제의 대한침략정책을 뒷받침하는 침략외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884년 갑신정변의 결

과 漢城條約이 체결될 때 일본 전권대사 井上馨을 따라 방한한 것이었다. 이

때 조약체결 과정에 공을 세워 그 댓가로 일제로부터 旭日章이란 훈장까지

받았다. 그뒤 영일동맹, 포오츠머드 강화조약에서 한국을 병탄할 수 있는 조

건을 만드는 지도(Guidance)・보호(Protection)・감리(Control) 등의 조항

을 규정하게 하는 데도 조력하였다. 더욱이 스티븐스는 1904년 8월에 체결된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에 근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 고문으

로 들어앉아 통감 伊藤博文의 대한침략정책을 외교적으로 뒷받침하며 대외

적으로 홍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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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강탈하는 을사조약을 늑결할 때는 대한제국 ‘보호국화’를 위해 외교적 역

할을 수행하였다. 이어 1907년 6월 헤이그사행을 계기로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伊藤博文을 도왔던 중요한 인

물이었다. 그러므로 스티븐스는 통감 伊藤博文과 더불어 대한제국 침략의 원

흉으로 지목되던 인물로, 전 민족의 公憤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3)

이처럼 일제의 走狗였던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난 이유는 겉으

로는 다년간의 해외근무로 휴가를 얻어 워싱턴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의 중요한 密令을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미국 안에서 일본 노동자 배척운동이 격화되는

분위기에서 미국 의회에서 그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있었으므로 스티븐

스를 일시 귀국시켜 미국 의원 및 기타 유력인사들과 접촉을 갖게 하여 법안

제출 또는 통과를 막고자 한 것으로, 이미 전년 11월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항일운동이 격화되고 있는 ‘배일운

동의 상황을 시찰’시켜, 미국 조야의 반일여론을 무마시키면서 한인의 민족

운동을 봉쇄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4) 상항의거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는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 탄압 목적에 대해 1907년 11월 28일

자로 일본 외무부장이 통감부 丸山 경시총감 앞으로 보낸 문건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에 있어서의 배일운동은 근래 더욱 더 극심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바 그

유래는 여러 가지의 사정이 있으나, 한국 황실의 상태, 한국에 대한 帝國(일본—필

3) 《共立新報》 1908년 3월 25일자, 「政敵須知分來歷」.

4) 尹炳奭, 「李相卨의 遺文과 李儁・張仁煥・田明雲의 義烈」,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독

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17~18쪽; 尹炳奭, 『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일조각, 1990, 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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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의 정책, 아울러 한국에 있어 제국 臣民(일본인—필자주)의 행동에 관하여

망령되이 中傷的 언론을 논하고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국인을 선동하여 제국 정부

및 제국 신민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도발하는 외에도 외국인의 행동, 아울러 배일

사상을 가진 재미 한국인의 행동이 크게 관여되어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5)

곧 일제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항일민족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원인과

이유에 대해 배일언론, 항일세력과 연계된 미국인의 반일운동, 그리고 재미

한인사회의 반일투쟁 등이라고 분석하고, 이를 억압하기 위한 적임자로 스티

븐스를 지목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국권과 한민족의 인권을 유린하던 일제와 깊이 결탁하여 침

략외교를 자행하던 스티븐스 처단의거는 국내외 한인사회를 크게 고무시켰

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커다란 충격과 파장을 가져왔다. 상항의거에 대

한 반향은 국내외에 걸쳐 크게 나타났다. 특히 거사 현지인 미국 샌프란시스

코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San Francisco Chronicle,

《샌프란시스코 콜》 The San Francisco Call,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San

Francisco Examiner 등은 의거 기사를 연일 자세히 실었다. 의거 관련자들의 인

물 사진은 물론 장인환의 격발 장면과 전명운의 구타 장면 등을 묘사한 커다

란 삽화까지 게재할 정도였다.6) 국내외에서 간행되던 《공립신보》, 《대한매일

신보》, 《해조신문》 등의 한인신문에서는 또한 이러한 기사들을 정리하여 소

개함으로써 이 거사가 객관적으로도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

였다. 특히 1908년 3월 25일자 《공립신보》에서는 「英字報의 評論, 스톄분

은 한국의 공적이라」라는 題下에 전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게재된

5)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국가보훈처, 2008, 115쪽.

6) San Francisco Examiner 1908년 3월 24일자, ‘Durham W. Stevens, American Diplomat Shot

by Assassin’ ;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7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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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 애국지사 장인환과 전명운이가 한국 정부 고문관으로 수년 있다 워싱턴으

로 향하여 가는 스테븐은 장씨 총에 두 방을 맞고 전씨도 장씨 총에 한 방 맞았더

라. 한국에서 일인에게 잡혀 있는 한인들은 이 총 놓았다는 소식 듣고 장인환과 전

명운을 칭찬하면서 그이들은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 같이 생각할 터이고, 일본서는

이 소문을 듣고 한국을 파란국(폴란드-필자주)과 같이 하기를 생각한 터이고, 외

교계에서는 그와 같이 일본을 잘 섬기던 미국인을 암살하려는데 경동(驚動)이 되

어 세계 각국이 그 재판을 자세히 살펴보리라. … 스테븐을 쏘려던 일이 일본이 삼

년 동안에 한국의 독립을 없이 하고 저의 식민지 만든 사실이 반포되도다. 스티븐

이 외부 고문관으로 있어서 그리 됨으로 한인은 그 이를 매국적(賣國賊)으로 생각

함이더라.7)(맞춤법 및 한자—필자)

즉 한인들은 의거 소식에 고무되어 항일민족운동의 기세가 ‘용을 타고 승

천하는 것’같이 더욱 격화될 것이며, 폴란드의 강경한 독립투쟁의 노선을 상

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논지를 편 것이다. 한편 이 기사는 국내의 《대

한매일신보》(1908년 4월 22일자)와 연해주에서 간행되던 《해조신문》(1908

년 5월 8일자)에도 轉載되어 동일하게 실렸다.8) 그밖에 상항의거와 관련되어

그 전후로 국내외에서 보도된 여러 기사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논설

인 「政敵의 遭禍」9), 장인환 의사의 옥중 기고문인 「謹告愛我同胞諸君」10) 등

7)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462쪽.

8)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780・801쪽.

9) 《공립신보》 1908년 3월 25일자;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

집』 2, 455쪽.

10) 《공립신보》 1909년 1월 6일자;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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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 수 있다.

桑港 韓人共同會에서는 이러한 신문의 보도 기사와는 별도로 「奸賊須知

分砲擊顚末」을 別報로 간행하여 한인사회에 널리 배포하였다.11) 이처럼 샌프

란시스코의 한인사회는 의거 전후부터 결속하여 공동회를 개최하고 뒤이어

열린 공판투쟁을 통하여 스티븐스의 죄상은 물론 일제의 한국침략을 통절히

규탄하고 나아가 국내외를 망라한 국권회복운동의 한 전기로 삼았다.

이와 같이 고무된 분위기하에서 한인사회는 상항의거를 계기로 여러 결사・단체

의 통합과 다양한 민족운동 세력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다지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거사 후 장인환・전명운 양의사를 위한 공판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

연금 모금운동이었다. 의거 당일 저녁에 大同保國會와 共立協會가 합동으로 개최

한 제2회 공동회 자리에서 의거 이후의 대책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이 회의에서

양의사의 공판에 대비하여 최유섭・문양목・정재관・이일・김영일・이용하・백일규

등 7명을 판사 전담위원으로 선임하고, 널리 의연금을 걷기로 하여 이 업무를 담당

할 재무로 문양목과 김영일 두 사람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40여 명

으로부터 7백 달러를 모금한 것을 필두로 의연금 모금활동에 착수하였다. 또한 그

취지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공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첨동포」를 작성해 발

표하였다.

우리의 억울한 시정(時政—필자주)을 세계에 반포할 기회가 없어 항상 개탄이

더니 오늘 양씨의 충의로 소개하여 반일 동안에 각쳐 호외 신문과 세계 전보가 사

람의 이목을 경동케 하였으니 만일 양씨의 의혈(義血—필자주)이 아니면 우리의

원통한 것을 세계 만국에 공포하였으리까.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곧 금일이오 한국

집』 2, 520쪽.

11)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7일자, 「須知分砲殺詳報」;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7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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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곧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요 우리의 억울한 것을 재판하는 날

이니 우리가 각각 줌치를 기울여(자금을 갹출하여—필자주) 독립을 위하여 재판

하기를 힘쓰야 될지니 이 재판은 세계에 공개 재판이요 이 재판은 우리의 독립 재

판이니 우리가 이 재판을 이겨야 우리 二千萬의 독립이 될지니 시호시호여 千재의

일시로다. 황천이 한국에 독립할 기회를 주셨으니 잃지 말고 일하여 봅시다.12)(맞춤

법—필자)

이와 같이 시작된 의연금 모금운동은 미주 전역의 한인사회는 물론 국내・

연해주・만주・상해 한인사회 등지에서도 널리 전개됨으로써 거족적 운동으

로 승화되어 갔다. 의연금 모금운동은 상항의거를 뒤이은 안중근 의사의 하

얼빈의거 직후에도 거족적 차원으로 다시 한번 펼쳐져 한인사회의 단결과 반

일애국의 공감대 형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상항의거 이후 전개된 각지 모금운동 가운데 연해주지역의 경우를 보면 현

지에서 조직된 의연금 모금 발기회가 주축이 되고, 현지에서 간행되던 한인

신문인 《해조신문》이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미

주지역의 모금운동에 호응하여 1908년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洪順日

과 黃鳳龍, 그리고 이형욱 등이 ‘상항의거의연금모금발기회’를 결성하여 모

금활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 《해조신문》에 게재된 취지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하와이 기타 재미동포가 전・장 양씨의 의기를 흠모하여 의연금을 모집하고 옥

중의 양씨를 구하고자 한다. 오호라, 양씨의 의기야말로 일월과 그 빛을 다툴 만하

고 秋霜과 그 열을 다툴 만하니, 이에 欽愛치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비록 타국 영

12) 《공립신보》 1908년 3월 25일자, 「경고첨동포」;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

스코의거 자료집』 2, 4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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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에 있을지라도 조국에 대한 충정은 감히 어느 누구에게 뒤떨어지지 않음을 자신

하는 바이다. 노령 재류 우리 동포 수십만인 중 어찌 양씨와 같은 충의지사가 없다

고 하겠는가. 우리들은 양씨를 위해 의연금 모집을 발기한다.13)

연해주 한인사회는 상항의거 직후부터 의거 관련 소식들을 비교적 소상하

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미주 한인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모금

운동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자료부족으로 모금의 구체적인 내역은 잘 파악

되지 않지만, 4월 17일까지 159원의 의연금이 모금된 것으로 확인된다.14) 그

리고 연해주를 제외한, 미주본토와 하와이・국내・멕시코・상해 등지에서 모

금된 의연금의 총액은 8,568원 41전으로 일제측 자료에 나타나 있다.15)

한편, 상항의거 이후 미주뿐만 아니라 국내외 각지 한인사회에 애국심을

파급하고 항일의 의기를 고양하는 데 크게 기여한 매개체로 주목되는 것은

이상설이 ‘창해자 우ㄷ손’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양의사합전』이다.16) 『양

의사합전』은 1909년 3월 상항한인공동회에서 발간한 책자로, 같은해 4월에

《신한민보》에 게재되었고, 이어 5월에는 연해주의 《대동공보》에도 연재 소

개됨으로써 각지 한인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저술은 주지하다시

13)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22일자, 「해항동포의연」; 정제우, 「죽암 전명운 연구」, 《한

국독립운동사연구》 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244쪽.

14) 정제우, 「죽암 전명운 연구」, 245쪽.

15) 國史編纂委員會 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291~292쪽. 이 자료에는 각지 의연금

모금액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한국(204명): 1,316원 30전 2. 일본(26명): 47원 25전

3. 미국(506명): 4,696원 4. 하와이(2,084명): 2,338원 80전

5. 멕시코(73명): 67원 6. 上海(42명): 103원 6전

16) 이 자료의 가치와 내용에 대해서는 尹炳奭, 『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265~378쪽

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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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41

피 장인환과 전명운 양의사의 桑港義擧 전말을 포함한 略傳과 그 의의를 논

술한 글이다. 일제는 이러한 『양의사합전』의 반포 상황과 아울러 의연금 모

집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용 1) 일찌기 명치 41년(1908) 3월 스티븐스 씨를 미국 상항 재류 한국인이

암살하자 재외 각 한글 신문은 그 凶行者 전명운・장인환의 행동을 賞揚하여 상항

신한민보는 兩義士合傳이라고 題한 기사를 게재하고 하와이 신한국보, 블라디보

스토크 대동공보 역시 이를 轉載하여 성히 배일사상 고취에 노력하고 재외 한국인

을 感奮시켜 다액의 의연금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국 내지에 있어서도 該 「양의

사합전」을 비밀히 살포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여 兇行者에게 보낸 형적이 있다. 이

와 같은 한인의 행동은 이번 흉행자(안중근—필자주)의 심정에도 다소의 감동을

주었으리라고 사료된다.17)

(인용 2) 작년 스티븐스가 상항에서 한인이 살해한 바가 되자 신한민보의 전신

인 공립신보, 신한국보의 전신인 合成新報, 대동공보의 전신인 해조신문은 다같

이 수개월에 걸쳐 筆鋒을 하나로 兇行을 賞揚하고 거기다 흉행자 전명운・장인환

의 閱歷을 輯錄하여 兩義士合傳이라 이름을 붙여 서로 이를 게재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그 기사의 一斑을 소개하면 “장・전 양씨는 스티븐스를 포살한 義士이

다. 양씨는 실로 대한 사천년 초유의 烈士이며 이천만 민족의 光榮이다. 身名을 희

생에 供하여 公敵을 죽였다. 壯哉아 義哉아.” 혹은 스티븐스의 암살은 바로 純淸

한 애국혈성에서 나왔고 양씨는 충의열성의 장부이다. 이 장부가 있어 동포는 타의

노예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블라디보스토크의 大韓學校 생도는 의연금을

모아 양씨를 祭하였다는 등 激越한 언론을 弄하여 암살자의 배출을 선동 고취하는

17) 國史編纂委員會 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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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상황이 있었다.18)

위의 일제 정보기록들을 통해서 보더라도 의열투쟁의 선구인 장인환・전명

운 양의사의 의거와 略傳을 정리한 이상설의 『양의사합전』은 국내외 한인사

회에 폭넓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이후 연속되는 안중근의 하얼빈의거 등

의열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스티븐스 처단 소식은 의거 다음날 바로 중국 上海에도 알려졌다. 상

해 주재 일본총영사 永瀧久吉은 당시 상해 한인사회 부의장을 소환하여 한

인들이 상해에서 결성한 정치서클에 일본 총영사가 개입할 것을 선언하고 한

인들에게 일본 영사관에 등록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미등록 한인들에게

2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보호구역에

있었던 광무황제의 특사였던 玄尙健 등 한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

하지 못하였다. 이후 상해 공동조계지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프랑스 조계지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프랑스 조계지로 한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한인들

의 새로운 정치기지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조계지가 한인 독립운동가

들의 주요 활동지로 부각되면서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 상해에서 수

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준 것이다.19)

뿐만 아니라 상항의거는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촉진하는

일대 계기로 작용하여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

인국민회가 탄생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하와이에서 합성협회가 성립되

어 여러 단체가 하나로 통합되자, 미주 본토에서도 상항의거를 계기로 양대

한인단체였던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간에 통합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두

18) 國史編纂委員會 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292쪽.

19) 이명화, 「헤이그특사가 국외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헤이그특사와 한국독립운동』, 독

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394~3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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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43

단체는 의거 직후 공동으로 號外를 발행하고 각처 동포에게 전보로 의거 소

식을 전하고, 변호사를 초빙하여 공판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함께 의연

금을 모집하는 등 의거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서 공동보조를 취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단체 통합을 위한 구체적 노력이 1908년 7월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

지대표회로 나타났다. 해외 각지의 한인단체 통합을 목적으로 한 이 대회에

는 朴容萬의 주도로 朴處侯・吳興泳・李鍾喆・李承晩 등 각지의 한인대표가

참석하여 각종의 한인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대회

는 미주의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나아가 적극적인 조국 독립

운동의 새 국면을 전개시켰다. 이 대회에서는 이전의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양자의 통합론에서 더 나아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간의

대동통합까지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09년 2월 1일, 먼저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드디어 國民會가 탄생하였다.20)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에는 鄭元明, 미주 국

민회 총회장에는 鄭在寬이 선임되었으며, 두 회의 기관지였던 《공립신보》

와 《합성신보》는 각각 《신한민보》와 《신한국보》로 바뀌어 계속 발간되었다.

《신한국보》는 그뒤 1913년 8월부터 제호를 《國民報》로 바꾸어 간행되었다.

상항의거가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처럼 국민회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 계기

가 된 역사적 상황과 과정에 대해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역사가인 洪焉

은 1914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융희 2년 곧 건국 기원 4241년 3월 23일에 북미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정거장

에서 장・전 양의사의 사건이 발생하니 이는 해외 한인의 강개한 역사상에 가장 중

20) 《대동공보》 1909년 3월 10일자, 「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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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요한 기념이라 … 이때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총기관이 모두 상항에 있어 일

체 외교 사무를 확장하다가 뜻밖에 이같은 중대한 일을 당함에 그 의견이 스스로

융합하여 일변 호외를 돌리며 각처 동포에게 전보를 발하여 소식을 통하고 변호사

를 연빙하여 재판을 시작하니 미주・하와이와 멕시코・원동・내지 각처 동포들이

한 목소리로 양의사, 양의사를 부르며 의연금을 거두어 상항한인공동회로 보내어

양의사의 처형 감등을 운동하니 … 서력 1908년 11월에 미주 공립협회 당국자 정

재관 등 제씨와 하와이 합성협회 당국자 정원명・이래수 등 제씨가 해외 한인단체

의 대세를 헤아리며 일반 여론의 추향을 따라 미・하 양대 단체의 합동을 발기하여

합동취지서를 세상에 돌리며 위원을 선정하여 응용규칙을 기초하고 양회 합동의

절차를 협의하니 미주・하와이 양 단체의 합동을 이로부터 준비하였나이다.21)(맞춤

법—필자)

곧, 위 인용문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공립협회와 대동보국

회 두 기관이 상항의거를 계기로 긴밀히 연계활동을 전개한 사실과, 이 의거

가 계기가 되어 미주의 공립협회, 하와이의 합성협회 두 기관이 통합하게 된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로써 상항의거가 미주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과 그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근간이 되어 결성된 국민회는 “교육과 실업을 진흥

하여 자유 평등을 제창하며 동포의 영예를 증진하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함”

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22) 그후 국민회는 재미한인사회의 중심기관으로 확

대되고 미주지역 외의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조직을 확대하게 되었다. 1909

년 4월 북미지방총회에서는 황사용과 방화중을 멕시코에 보내어 멕시코 지

방총회를 설립하도록 지도하였다. 또한 그 해 5월에는 미주와 하와이 지방총

21) 《신한민보》 1914년 2월 26일자, 「국민회역사」.

22) 《신한민보》 1909년 2월 10일자, 「賀國民會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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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45

회의 공동결의로 鄭在寬과 李相卨을 만주와 연해주, 곧 遠東으로 파견하여

활동케 하였다. 정재관은 이강과 동행하여 만주를 순행하였고, 이상설은 이

미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있던 金成茂, 田明雲과 함께 연해주에서 활

동하였다.23) 이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에서는 16개 처에, 그리고 만주에는 8개

처에 각기 지방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24)

한편, 대동보국회는 1910년 5월 10일 국민회에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국

민회는 대한인국민회로 개명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단일지도 기구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3. 義烈鬪爭에 미친 영향

상항의거 직후 일왕 明治는 “스티븐스가 죽은 것을 슬퍼하고 친서를 발하

여 조상하였으며”, 급보를 들은 伊藤博文도 대경실색하여 “보는 사람마다 애

통한 정을 말하며”조의를 표하였을 만큼, 대한침략의 원흉들은 그들의 忠僕

을 잃은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5) 나아가 이등박문이 대한침략 정

책을 수행해 나가는 途程에서 手足처럼 움직였던 스티븐스의 처단은 곧 이등

박문 자신이 응징당할 전도를 예고한 셈이었다.

상항의거가 일어난 다음날, 3월 24일 의거 장소인 샌프란시스코 현지에서

발간되던 영자신문 《샌프란시스코 콜》The San Francisco Call은 의거 관련 특

집을 다루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스티븐스의 친일행적과 처단과

23) 尹炳奭, 『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310~312쪽.

24)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1958, 111~112쪽.

25) 《공립신보》 1908년 4월 1일자, 「旣失鷹犬日國昻激」;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

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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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서부터 일제의 대한침략 실상, 한민족의 저항 등에 이르기까지 상세하

게 다루었다. 그 가운데 한민족의 대일무력전인 의병전쟁을 ‘聖戰’Holy War

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곧 이 신문에는 ‘大

韓關東倡義將 李麟榮’의 명의로 된 「檄告在外國同胞文」26)이 영인 전재되

었고, 이와 함께 ‘한국민의 對日聖戰 격문은 스티븐스 사형집행 영장Korean

Proclamation of Holy War Against Japan is Death Warrant for Stevens’이라는 제

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인들은 일본에 대해 聖戰을 선언하였다. 어제 외교관 스티븐스를 암살한 것은

일본인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데 목숨을 내놓은 열혈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걸쳐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응징 캠페인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집단은 ‘의병’으

로 불린다. 한국 내에서 이 집단은 일본인들을 죽이는 데 목숨을 내놓기로 맹세한

충성스런 인물들로 이루어졌다. 이 무장집단이 전 세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격

문을 발송하였다. 그 격문은 스티븐스가 타고 온 그 배에 실려 이곳에 도착했고, 한

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이 사람을 암살하는 거사가 즉시 결행되었던 것이다.27)

위 인용문에서는 이인영 명의로 발포된 의병 격문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했을 때, 그 격문에 영향을 받아 가장 먼저 결행된 거사가 장・전 양의사에 의

한 상항의거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거사는 앞으로 계속될 의열투쟁의 先

導인 동시에 그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함으로써 향후 이어질 의열투

쟁을 정확히 예견하였다.

26) 이 檄文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神戶新報》 1908년 4월 14일자에도 그 원문이 全載되어

있다(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663쪽 참조).

27) The San Francisco Call 1908년 3월 24일자;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

의거 자료집』 Ⅰ, 733・7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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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47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상항의거는 국내 의병전쟁과 일맥상통하고 있

었으며, 의병전쟁의 해외파급인 동시에 국외확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항의거가 일어난 이듬해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연해주 의병장 安重

根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대한침략의 원흉 伊藤博文을 처단하였다. 이 하

얼빈의거는 의병전쟁의 대단원인 동시에 그 前年에 일어난 상항의거와 밀접

한 연관을 갖고 그 영향하에 일어났다. 곧 상항의거는 의병전쟁이 국외로 파

급 확대되는 도정에 일어났고, 하얼빈의거는 의병전쟁의 大尾를 장식한 쾌거

로 상항의거의 영향하에 결행된 것이었다.

하얼빈의거 직후 안중근은 이른바 피고인 신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상항

의거와의 연관성을 일관되게 부인하였다. 일제는 상호간의 관계를 어느 정도

탐지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안의사를 심문하였던 것이다.28)

問 그대는 田明雲이라는 자를 알고 있는가?

答 신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보았는데 지금은 美國에 가 있다.

問 美國에 지금 있는가?

答 美國에 收監되었다고도 들었으나 자세한 것은 모른다.

問 그 사람이 무슨 일로 수감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答 그것은 그 분과 張仁煥 양인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까닭이라는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 그 저격한 원인은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은 한국민의 의사

일 것이라는 것을 스티븐스가 신문에 論說로 게재한 까닭이다.

問 그 장인환과 그대는 면회한 일이 있는가?

答 없다.

28) 國史編纂委員會 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 6, 1976,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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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안중근 의사는 장인환・전명운 등 상항의거 관련자들과의 관계를 이처럼

부인으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그는 상항의거 전말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

었다. 이 점은 상항의거가 자신이 결행한 거사와 일정한 연계가 있던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판단된다. 사실 안중근은 당시 연해주 독립운동계에서 활

동하고 있던 전명운과는 동지적 관계에서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지만, 일제

의 마수로부터 전명운을 보위하기 위해 관계를 부인했던 것이다. 일제 정보

기록에서 “이와 같은 韓人의 행동(상항의거-필자)은 금차 兇行者(안중근의

사-필자)의 심정에도 다소의 감동을 주었으리라 사료된다.”29)라고 판단한 대

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등박문이 처단된 직후

《京城日報》 호외는 가해자의 신원에 대해 ‘범인은 排日黨 수령 전명운’이라

고 지목하여 연해주로 망명해서 활동하던 전명운이 伊藤博文을 처단하였다

고 단정해서 誤報한 것도 역시 이러한 까닭에서였다.30)

안중근이 상항의거의 영향을 받아 하얼빈의거를 결행했던 정황은 기타 여

러 자료에서도 확인되지만, 아래와 같은 일제 기록은 양자간의 상호 연계성

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應七은 늘상 해삼위・연추・수청에 있는 동지 李相卨・鄭順萬・奇山道・李範允・

李範錫・田明雲・朴主善・崔鳳俊・崔基興・金相萬・李瑋鍾・金國甫・李京化・崔行

倫・朴春成・韓起洙 등과 서로 왕래하여 기맥을 통하고 연추에 있어서는 國民會와

一心會란 阿片禁止會를 조직하여 동지를 맺고 또 해삼위에서는 金起龍・嚴仁燮

등과 同義會란 것을 조직하여 崔都憲(연추에서 러시아 관헌의 用達을 하고 있는

자)을 회장에 추대하고 김기룡・엄인섭 등과 더불어 청년들의 두목이 되었다. 일찍

이 스티븐스 암살의 보도가 이르자 무릎을 치며 큰 소리로 환호하였고 당시의 가해

29) 國史編纂委員會 編, 『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1978, 291쪽.

30) 《京城日報》 1909년 10월 27일자 號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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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桑港義擧가 한국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49

자 장인환・전명운 등의 거사를 敬慕하여 곧 기부금을 모집하여 송부하고 또 나에

게 軍資를 공급하면 반드시 일본군을 괴롭히겠다고 揚言하는 등 과격한 언동을 일

삼았다.31)

일제가 파악한 위 정보에 의하면, 안중근은 이상설・정순만・전명운 등 미

주지역의 한인사회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상항의거 관계 인물들과 긴밀한

연계하에 연추 국민회 및 연추의 의병 조직인 同義會에서 주로 활동해 왔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항의거 소식에 크게 고무되어 의연금 모금운동에 동

참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크게 받아 제2의 의거를 일으킬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얼빈의거를 결행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이와 같은 의거는 앞서 1907년 6월의 헤이그특사의거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얼빈의거 직후 旅順에 급파되었던

한국주차헌병대 사령관 明石元二郞이 1909년 12월 2일 통감부 총무장관 石

塚英藏에게 보낸 전보에서 “전명운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며 變名을 쓰

고 있는 듯함. 同人 및 이상설이 안중근과 同黨派가 된 것을 보면 금회의 사

건(하얼빈의거—필자)은 헤이그 및 스티븐스 사건과 동일 계통인 것 같음.”32)

이라고 파악한 대목 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상항의거와 하얼빈의거로 연속되는 의열투쟁은 국내에서 치

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이 그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나아가 위에서 언

급했듯이 의병전쟁의 국외 확대인 동시에 그 延長이었다는 점에서 한국독립

운동의 계기적, 발전적 특징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얼빈의거에 이어 1909년 12월 22일에는 만고역적 李完用 처단 거사인

李在明義擧가 일어났다. 비록 이완용을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이 의거는 상

31)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96쪽.

32) 윤병석 편, 『장인환・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의거 자료집』 2,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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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항의거-하얼빈의거와 연계선상에 놓여 한민족의 의열투쟁의 드높은 기상을

널리 떨친 쾌거였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대한침략의 원흉인 伊藤博文과

더불어 일제의 대한침략 정책을 철저히 추종하면서 민족을 배신한 매국노의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원성이 尤甚하던 인물이었다. 곧 이완용은 일제의

대한침략의 원흉 伊藤博文, 일제의 주구였던 미국인 스티븐스와 더불어 어깨

를 나란히 하는 한민족 내의 公敵이었던 셈이다. 그는 오히려 이들보다 더 심

한 지탄의 대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거사를 결행한 이재명 의사는 1890년 평북 宣川에서 태어난 뒤 8세 때 평

양 衙聽里로 가서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뒤 1904년에 미국 勞動移民社의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노동을 하였다. 장인환・전

명운과의 구체적인 교유관계는 확인되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내는

수년 동안 양의사와 일정한 교유가 있었으며, 이재명의 일생 歷程도 장인환・

전명운 양의사와 흡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미국에서 노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일제의 침략을 개탄하는 애국열정을 품

고 지냈다. 그뒤 그는 1907년 10월 9일 ‘싸베리아’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長崎를 경유하여 환국하였다.33) 그가 급거 환국한 이유도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결행하려는 데 있었다.

귀국 후 이재명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매국노 처단

계획을 추진해갔다. 그는 서울에서 吳復元・金龍文을, 평양에서는 金貞益・

池麟瑞 등의 동지들을 포섭하여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이재명은 국망

의 주범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에게 ‘합방’을 선창한 일진회장 이용

구 두 사람을 대표적・상징적 國賊으로 지목하여 동지들과 함께 결의하여 이

들을 처단하려 했다. 그리하여 거사를 결행하는 과정에서 이재명이 이완용을

33) 《공립신보》 1907년 10월 18일자, 「잡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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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처단하게 된 것이다.34)

이재명은 12월 22일 마침내 거사를 결행하였다. 이날, 서울 鐘峴 천주교회

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와 인력거를

타던 이완용의 어깨를 등 뒤에서 단도로 찔렀다. 이완용은 왼쪽 어깨에 10cm

가량의 刺傷을 입어 肺部까지 이르렀고, 오른쪽 어깨와 허리의 자상은 6cm

에 달하였다.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지만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지

는 많았다. 하지만, 이재명은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고 대한만세를 부른 뒤 달

려든 경찰에 피체되었다.

이재명 의사의 공판은 1910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다. 공판

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5월 13일 예상했던대로 사형을 선고받고 국치 후인 9

월 30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35) 이재명 의사의 공판투쟁은 안중근 의사의 경

우를 방불할 만큼 강경하였다. 그는 항소심에서 賊臣들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규탄하였으며, 특히 이완용에 대해서는 을사조약에 협조한 죄, 광무황제의

폐위를 도운 죄,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에 협조한 죄 등 모두 8가지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며 통렬히 성토하였다.36) 그리고, 일본인 재판장 塚原友太郞이

증거물로 권총과 단도 등을 제시하며 “이 물건들이 兇行에 사용된 도구들인

가?” 라고 심문하자, 이재명은 분연히 화를 내며 “어찌 凶行이라 하느냐. 나

34)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23일자, 「잡보」. 이재명이 동지들과 함께 거사계획을 최

종적으로 논의한 결과, 일제에게 이른바 합방을 탄원하던 매국노 일진회장 이용구와 이

완용을 동시에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명과 金丙祿・李東秀는 이완용을

맡고, 金貞益과 趙昌鎬는 이용구를 맡아 동시에 처단하기로 하였는데, 이재명이 먼저 거

사를 결행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11월 16~18일자, 「苟生한 李完用과 絞

殺된 李在明(五~七)」)

35) 《朝鮮總督府官報》 1910년 10월 4일자.

36) 鄭喬, 『大韓季年史』 下, 國史編纂委員會, 1955, 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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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義行을 한 것이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37) 사형선고가 내려졌을 때도 이

재명 의사는 “불공평한 법률로 나의 생명은 빼앗으나 국가를 위하는 나의 忠

魂義魄은 가히 빼앗지 못할지니, 한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거니와 생전에

미수에 그친 한은 기어코 갚으리라.”38)라고 하여, 지하에서라도 대한독립을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또 양정여학교에 다니던 이재명 의사의 부인 吳仁星

도 “國賊 이완용은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나의 家夫는 사형에 처하느냐.”라고

절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이재명의거는 하얼빈의거 직후에 일제의 무도한 倂呑 시도에 반대

하여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해 결행된 의열투쟁으로, 한국독립운동의 기치를

드날리게 한 기념비적 거사였다. 이러한 이재명의거는 상항의거와 안중근의

거의 계승인 동시에 연장으로서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일찍이 연해주에서

활동한 국학자 계봉우가 「만고의사 안중근전」에서

상항 정거장에서 일성 방포로 미국사람 스티븐슨을 쏘아 죽이던 장인환은 공의

한 몸이니라. 종현 대도상에서 매국적 이완용을 다섯 걸음에 찌르던 이재명도 공의

한 몸이니라.39)

라고 摘記한 대목도 그와 같은 역사적 맥락과 상호간의 계기적 관련성을 알

려주고 있다. 곧 계봉우는 이재명의거를 상항의거, 그리고 하얼빈의거 등 세

의거가 긴밀한 상관성을 가지고 동일한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으로 파악

하였던 것이다.

또 이재명 의사의 변호를 담당하였던 安秉瓚이

37) 鄭喬, 『大韓季年史』 下, 398쪽; 宋相燾, 『騎驢隨筆』, 157쪽.

38)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4일자.

39) 《권업신문》 1914년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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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愛國憂世之士이다. 오늘날 국가가 이토록 비참한 지경에 이른 것을 보고

열혈이 끓어올라 이 거사를 한 것이니, 세상에 어느 나라가 그 義理를 흠모하지 않

겠는가. 저번에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죽이자 미국사람이 寬典을 써서 죽이지 않았

고 伊庭想太郞이 大臣 星亨을 죽였지만 일인이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원컨대 이

로써 법을 삼아라.40)

라고 한 변론도 이재명의거를 상항의거와 같은 맥락에서 인식한 결과였다.

이로써 보건대, 이재명의거의 母胎도 또한 상항의거였던 셈이다.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항일독립투사들의 열전을 기록한 역사가 宋相燾

도 의열투쟁을 주도했던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대저 충신열사가 병인양요 이후로 늠름히 우뚝우뚝 日月로 빛을 다투는 자 또한

적지 않았지만, 討敵復讐에 이르러 천하에 春秋大義를 잡은 자로는 안중근・장인

환・이재명・강우규 등 數人이로다. 그 연유가 무엇인가? 무릇 義氣는 四時 중에 가

을 秋에 속하며 五行 중에 쇠 金에 속하며 四方 중에 서쪽 西에 속한다. 황해・평안

양도는 나라의 서방에 있으며 秋와 金의 고을이로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이 모두

황해・평안도에서 나서 義烈을 天下에 떨치게 된 것이다.41)

라고 하여 장인환・안중근・이재명과, 齋藤實 총독 처단미수 의거의 주역 姜

40) 宋相燾, 『騎驢隨筆』, 157쪽. “律師安秉瓚曰 被告 卽一愛國憂世之士 今日見國家至此

悲慘 熱血沸騰 遂爲此擧 世之有國者 孰不其欽慕義理 曩時 張仁煥殺須知分美人 用寬

典不死 伊庭殺大臣星亨 日人不殺之 願以此爲法”

41) 宋相燾, 『騎驢隨筆』, 280쪽. “蓋忠臣烈士 自丙寅洋擾以後 凜凜巍巍 與日月爭光者 亦

不爲不多 而至於討戕復讎 秉春秋於天下者 未有若安重根・張仁煥・李在明・姜宇奎等

數人 抑其故何哉 夫義在四時屬秋 在五行屬金 在四方屬西 黃・平二省 在國之西方 爲

秋・金之鄕也 是以 此四人者 皆出於黃・平 以義烈聞天下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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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奎 등 4명의 義士가 의열투쟁을 주도한 사실을 밝힌 다음, 이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양서지방의 지리적・환경적 조건까지 부기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전북 임실에서 간행된 李漢龍의 시문집인 『唐川集』에도 이준 열사의

순국, 장인환・전명운의 상항의거,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를 동일선상에 놓고

정미년에 이준이 헤이그 공판석에서 할복 자결하였고, 미국 대통령은 일왕에게

조회하여 그 呑弱의 죄를 물었다. 스티븐스를 한국에 파견하여 조사하도록 하였으

나, 伊藤博文은 거액의 뇌물을 주고 스티븐스에게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는 것이라

고 설명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스티븐스는 기쁘게 이를 받아들여 자국에 그렇게 復

命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를 알게 된 장인환・전명운 양인은 분개를 견디지 못해

스티븐스를 총살하였다. 그들을 본 미국의 관헌은 두 사람의 충의를 감탄해 마지

않았다. 장・전 양인은 두 손으로 6만 리 밖에서 천하를 진동시켰다. 이것은 참으로

쾌거라 할 것이다. 안중근의 功烈은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것은 우리 조선 5백년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동방 이천만 민족의 인구에 회자되어 千古에 걸쳐서

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42)

라고 평가하였다. 산중초야에 묻혀 지냈던 한 書生의 이 기록은 일제의 야만

적 강권통치하에서도 상항의거를 비롯한 의열투쟁의 역사가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고 한민족의 앞날에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송상도는 상항의거에 대해서

생각컨대 丙午年間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桑港에서 六穴砲를 한번 쏜 것은 그

소리가 북미대륙을 轟振시켰고 그후에 여러 의사의 육혈포가 서로 이어 일어나 내

42) 李漢龍, 「時聞撮記」, 『唐川集』; 朝鮮總督府 警務局 圖書課, 「不許可 差押 및 削除 出

版物 要旨」, 《朝鮮出版警察月報》 3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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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각지에서 전후 10여회를 세웠다. 그 중 큰 것만 들어도 하얼빈에서 安重根, 남

대문역에서 姜宇奎, 총독부에 金益相, 일본 東京에서 金祉燮, 중국 대만에서 趙明

河의 포가 있었다. 그 중에 혹은 명중하기고 하고 못하기도 했으나 이것이 다 전명

운과 장인환이 先唱한 것이니 張子房의 한 철퇴가 천하 영웅을 喚起시킨 것보다

큰 것이 아닌가.43)

라는 史評을 내렸으며, 이것은 동시에 의열투쟁의 淵源으로서 상항의거가 지

닌 역사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상항의거는 1910년 경술국치를 눈앞에 두고는 하얼빈

의거와 이재명의거로 이어져 한민족의 격분과 의기를 동시에 떨쳤다. 그리고

국치 후에는 남대문역에서 齋藤實 총독을 응징하고자 했던 姜宇奎 의사, 東

京에서 일왕의 궁성에 폭탄을 던졌던 金祉燮 의사, 일왕을 처단하려 했던 李

奉昌 의사, 上海 홍구공원의거를 결행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尹奉吉

의사, 臺灣에서 일본왕족 久邇宮을 저격한 趙明河 의사 등의 의거로 간단없

이 이어져, 일제 침략・강점하에서 독립운동의 중요한 방략 가운데 하나로 의

열투쟁이 설정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상항의거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

큰 軌跡을 남기게 되었다.

43) 宋相燾, 『騎驢隨筆』, 87쪽. “按丙午年間 田明雲・張仁煥 射一砲桑港 其聲轟震北米大

陸 其後諸義士之砲 相繼而起內外各地者 首尾凡十數 而以其大者言之則 哈爾賓有安重

根 南門驛有姜宇奎 總督府有金益相 日本之東京有金祉燮 中國之臺灣又趙明河 其中

有或中或不中 而此皆明雲仁煥倡之 亦非所子房一椎 喚起天下英雄者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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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음말

이상으로 상항의거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대강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항의거는 국내외 한인사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제침략으로 인해 한민족이 고통받던 참담한 현실에서 상항

의거의 쾌보는 전 민족 구성원에게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원기를 배양해주었

다. 그러므로 이 의거를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의연금 모금운동 등의 형태

로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상설이 지

은 『양의사합전』이 항일민족의식을 고양, 전파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상항의거는 국내외 한인사회에서 의거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진보한 형태로

조직적이고도 효과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미주

한인사회는 장인환 의사의 공판이 종결된 직후인 1909년 2월 1일 미주 본토

의 共立協會와 하와이의 合成協會가 합동하여 國民會를 탄생시켜 항일독립

운동의 중추기관을 세웠다. 이 국민회는 그후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물론, 남

북만주, 연해주지방의 한인사회까지 세력을 확장시켜 전체 해외한인사회의

결속과 조국독립운동을 추진해 갔던 것이다.

상항의거는 일제의 침략・강점하에서 추진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방략

가운데 하나였던 義烈鬪爭을 선도하였다. 상항의거 후 국치 이전에 결행된

安重根의사의 하얼빈의거와 이재명의거는 상항의거로부터 연원되는 직접적

인 영향하에서 나온 것이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는 과정에서 대한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伊藤博文, 일제의 走狗로 대한침략정책을 대변하여 한민

족의 자주의식을 왜곡 선전, 홍보하던 스티븐스, 그리고 일제 침략세력과 결

탁해 민족을 배신한 만고역적 이완용 등 3인은 곧 한민족의 公敵이었다.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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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븐스와 이등박문은 처단 응징되었고, 이완용은 비록 살아남아 목숨을 연장

했지만, 이들 세 公敵을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선후로 심판한 것은 의열투

쟁의 精髓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강우규・김지섭・이봉창・윤봉길・조명

하 의사의 의거가 간단없이 일어나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일제의 간담을 서

늘케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