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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권 [특별 기고]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황경훈 박사 [심포지엄] 인간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바라본 평신도의 존엄성 – 고준석 신부 사회회칙의 지평과 전망 안에서 교황들이 요청하는 제 삼천년기 평신도들의 일과 희망 – 최우혁 박사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선교의 미래 - ‘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네오휴머니즘’에 대한 단상 – 김혜경 박사 인류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학 과제의 소고 –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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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9 권

    [특별 기고]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황경훈 박사

    [심포지엄]

    인간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바라본 평신도의 존엄성 – 고준석 신부

    사회회칙의 지평과 전망 안에서 교황들이 요청하는 제 삼천년기 평신도들의

    일과 희망 – 최우혁 박사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선교의 미래 - ‘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네오휴머니즘’에 대한 단상 – 김혜경 박사

    인류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학 과제의 소고 – 곽승룡 신부

  • 제 9 권

    [특별 기고]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황경훈 박사

    [심포지엄]

    ● 인간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바라본 평신도의 존엄성 – 고준석 신부

    ● 사회회칙의 지평과 전망 안에서 교황들이 요청하는 제 삼천년기 평신도들의

    일과 희망 – 최우혁 박사

    ●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선교의 미래 - ‘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네오휴머

    니즘’에 대한 단상 – 김혜경 박사

    ● 인류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학 과제의 소고 – 곽승룡 신부

    새천년복음화연구소

    2018

  • 차례

  • 차례

    발간사 / 조영동 ………………………………………………………………6

    [특별 기고]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황경훈 박사

    ……………………………………………………………………………… 15

    [제 19회 심포지엄]

    인간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바라본 평신도의 존엄성 – 고준석 신부

    ……………………………………………………………………………… 59

    사회회칙의 지평과 전망 안에서 교황들이 요청하는 제 삼천년기 평신도들의

    일과 희망 – 최우혁 박사

    ……………………………………………………………………………… 83

    [제 20회 심포지엄]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선교의 미래 - ‘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네오휴머니즘’에

    대한 단상 – 김혜경 박사

    …………………………………………………………………………… 133

    인류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학 과제의 소고 – 곽승룡 신부

    …………………………………………………………………………… 161

    [첨 부]

    새천년복음화연구소 약사 ……………………………………………… 193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 게재 원칙과 원고 작성 요령 ……………… 201

  • 발 간 사

    올 무술년(戊戌年)은 어느 해보다 우리나라에는 크나큰 지각 변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9권을 무난히 발간하게

    해주시고 축복해주신 하느님께 삼가 깊은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하시며

    물고기와 빵을 떼어 주셨습니다. 이 초대와 더불어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는 말씀은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지 못했다는

    큰 상처를 지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엄청난 위로의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 하느님과

    타인에게 죄를 짓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 자신들만 옳은 척하는

    사람, 공동체 건설에 무관심하며 자신의 성화만을 추구하는 사람 등등

    자기애에 갇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위로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종으로서 묵묵히 그 길을 걷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은 최근 발표한 2019년

    사목교서에서 복음화 5단계의 마지막인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교구민 모두가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그 여정을 충실히 걸었고,

  • 덕분에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새로운 해는

    그동안 맺은 열매를 바탕으로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자고 다음과 같이 초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 기쁜 소식을 곧바로 다른 이들에게 전했듯이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지체 없이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세례를 통하여 짊어진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체험한 기쁨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선물이요 아름다운

    몸짓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의 표지로 도미니코 성인을

    듭니다. 성인은 아침마다 먹을 양식을 구걸하여 돌아오던 수도회의 두

    형제가 어느 날 길에서 만난 걸인들에게 빵을 모두 나누어주어 형제들이

    굶게 되었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천사들로부터

    빵을 전달받아, 형제들이 그날의 아침을 먹게 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찾아주셨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는 행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하시던

    일이셨고, 복음선포는 우리 주님께서 하시던 그대로 우리가 따라하는

    말과 행동들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일화입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막사를 찾아온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하면서 하느님께 대접해드린다는 마음가짐으로 기쁘게

    상을 차린 것도 그들이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그분이 심어주신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

    갇힌 이들,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에게 대접하며 그리스도께

    대접해드린다는 마음가짐으로 행합니다. 게다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먼저

  • 바라봄으로써 타자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영성으로 이웃을 바라보기까지

    합니다. 인류에 대한 인간애를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쉬운 삶이 아니라

    그런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형제 자매들에 대해 어찌

    크고 깊은 경외심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논문집 제9권은 그러한 의미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평신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제삼천년기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대주제 아래

    고준석 신부의 논문과 최우혁 교수의 논문을, “삼천년기 도입부의 복음화

    과제들, 제4차 산업혁명과 오늘의 생태학”이라는 대주제 아래 김혜경

    교수의 논문과 곽승룡 신부의 논문을 한 권에 모아 펴냈습니다.

    고준석 신부는 [인간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바라본 평신도의

    존엄성]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제도인

    교회와 세속적 질서의 구별에서가 아닌 모두 ‘하느님의 백성(Populus

    Dei)’으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가 아직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탁월한 사명이 있음을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예리한 진단을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지성과

    자유의 존재인 개별성을 가집니다. 이 개별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일반

    피조물들이 갖는 임무 외에도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그에 합당한 자신만의 고유한 존엄성을 지닙니다.

    평신도는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지니는 “신성함” 곧 하느님 모상과

    닮은꼴로 창조된, 의식과 자유의 주체로서 인격을 지닌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평신도들은 의식적인 주체성으로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살아

    있는 구성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와 하느님

    백성 안에서 다양한 직무들을 통해 인간을 들어 높이고 해방시키는

  • 데 봉사하는 사도직을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구성원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제들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신도는 비그리스도인과 구별된 정체성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갖는 품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품위는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의

    발을 씻으시면서 종의 모습을 취하는 데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행함으로 종으로서의

    품위와 특권을 갖습니다. 하느님의 종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교회헌장 33항), 그리고 복음화와 구원의 공동체의

    건설에 대한 책임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친교와 공동책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거룩한 교역에 세워져 그리스도의 권위로

    하느님의 가정을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고 다스리며 모든 이가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키도록 사목하는 이들도 형제로”(교회헌장 32항) 삼으면서

    자신의 역동적이고 유일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성을 살아갑니다.

    최우혁 교수는 [사회회칙의 지평과 전망 안에서 교황들이 요청하는

    제삼천년기 평신도들의 일과 희망]에서 구원의 서사를 요약한 후

    21세기 새로운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과 희망에 대해

    알려줍니다.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해방 기억을 통해 죽음의 땅인

    이집트를 탈출하여 생명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한 힘의 근원이 되었고, 그래서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걸음의 방향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다인 예수님

    또한 그 조상들이 죽음을 넘어서 해방된 기억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는

    만찬으로 기념하며 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으로의 여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일체이신 당신이 곧

  •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을 통해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알게 하라

    명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파견하셨음과 같이 당신도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다시 재림할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치된 모습이 파견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교회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고

    삼천년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리고

    현대의 구체적인 요구에 실제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복음의 기쁨 95항

    참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후속 권고들 또한 제목에서부터 기뻐하고, 찬미하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거룩한 삶의 지속성은 돈이 우상이 되고, 배척과 불평등을 더

    강화하는 국가 폭력, 사랑과 배려가 넘쳐야 할 가정의 위기 등 하느님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랑이

    모자라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사랑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복음에 눈을 뜬 사람들,

    평신도들은 이제 돈과 권력으로 인간과 일상의 가치를 측량하던 적폐를

    청산할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사랑에 눈뜨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때 예수의 복음은 비로소 새로운 기쁨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

    김혜경 교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선교의 미래]에서 제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는 201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회장의 입에서 나온 이래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세계적인 화두가 되었다는 정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제4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와 클라우딩,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나노 및 바이오 기술 등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혁명을 통해 경제와

  • 사회는 물론 인간의 신체와 정신까지 재구성 할 수 있다고 공언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이기를 통해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과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까지 바꿀

    수 있는 존재의 출연 예고에 인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공존하고

    있는 것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기호와 감정

    혹은 개인적인 견해나 편견으로 인해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토대로 한 판사나 의사라면 인간보다 훨씬 공정하고

    완벽한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에 김혜경 교수는 앞선 3차에 걸친

    산업혁명에 비해 4차 산업혁명이 이렇게 크게 논의되는 것은 과거에

    인류가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빠른 속도로 눈부신 진전이 예상되기 때문에, 거대한 시대에 직면하여

    인간에 관한 고찰을 계몽주의 시대 이후 몇 가지 휴머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함께 살펴보는 가운데, 어떠한 혁명에도 흔들림 없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회복하는 의미로서 선교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곽승룡 신부는 [인류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학 과제의

    소고]에서 그리스도인은 인류 역사에서 삼천년을 살아가면서 세 번의

    충격 전환점을 맞이했음을 알려줍니다. 첫째 충격의 전환점은 313년

    밀라노 칙령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는 로마제국에서

    종교의 자유가 선포된 사건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16세기까지 1천 2백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둘째 충격의 전환점은 1517년 종교개혁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시기가 된 사건으로 인간의 나라

    르네상스 시대가 5백년 이상 지속됩니다. 셋째 충격의 전환점은 2015년

  • 「찬미받으소서」가 선포된 사건입니다. 이는 땅의 자유를 바탕으로

    땅의 본모습을 회복하는 지구의 나라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세 번의

    시기들이 도래한 이유를 찾는다면, 각 시대 말(末)의 힘과 가치가

    변화라는 새로움을 담아 왔기 때문입니다. 곧 로마 제국의 힘에서

    하느님 나라의 힘 그리고 신의 나라에서 인간의 정신과 힘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환 지점에 무엇이 일어났고 어떤 것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기 위해 변환 지점에 부패와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 지점들에서 발생한 공통점들이 바로

    인간의 부패였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로마제국 중심에서 그리스도교

    신 중심,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와 미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분명한 것은 인간 중심에서

    지구와 우주중심으로 옮겨와 지구를 회복할 인류의 정신과 삶의 구체적인

    실천이 요청됩니다. 곽승룡 신부는 생태 위기에 처해있는 지구에

    직면하여, 인류 구원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오늘의 생태 현실의 과제를

    ‘위기의 끝자리에 처한 지구, 하느님의 선물인 땅의 공격’에 대해, 이어서

    생태적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와 삶의 토대가 되는

    우주 그리스도론과 육화 그리고 사목헌장을 새로운 생태적인 구원의

    패러다임으로 해석을 한 후, 생태적 비전을 마지막 장에서 살핍니다.

    본 논문집은 예수님의 성탄 목전에서 가난하여 굶주리고 버림받은

    이웃들이 성경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가운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 좋았던 상태였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세상은 원래 모두의

    것이었으나 인간이 그어 놓은 선에 의해 세상은 인간이라는 영역을

    규정하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이 영역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피조물들이

    세상에 자리하게 한다면 세상은 보다 더 인간에게 이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세상은 우주라는 세상에 보듬어진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고, 가정과 사회가 모두 즐거운 세상을 열망하는

    것이 그저 한갓 바람으로 남아 사라져버릴 운명에 놓이지 않도록 매일

    매일 파견 받는 삶을 살아 세상에 희망을 안겨봅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논자들의 주옥같은 논지들은 우리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고 그래서

    제4차 산업혁명을 막 시작하고 있는 지금에 참으로 시의적절하였다

    생각합니다.

    신학이 목표로 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비롯한 모든

    공동체의 복음화와 개인 및 공동의 구원에 당신의 지혜와 무한한

    은총으로 도움주시는 하느님께 글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몸으로 체험하며 지내는,

    그리고 앞으로 그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세상에서

    종의 모습을 한 내 이웃과 신앙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다시 한 번 주옥같은 논문을 수록할 수 있게 해주신 논자들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 연구소 연구논문집에 옥고를 게재하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늘 본 연구소를 돌보아주시는 심상태 몬시뇰님, 이재룡

  • 신부님, 곽승룡 신부님, 조재형 신부님과 조성풍 신부님 그리고 최양호

    신부님과 고승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정치우 교장님과 임지은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기도해주시는 새천년복음화사도직협회

    회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본 연구소 논문집을 만드는데

    수고하여주신 강세종 부소장님, 오경아 연구실장님과 박은경

    사무국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모두를 축복해주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8. 12

    새천년복음화연구소 소장 조영동 세례자 요한

  • [특별기고]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황경훈(우리신학연구소장)

  • [특별 기고]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황 경 훈(우리신학연구소장)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19

    1. 들어가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을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 등 ‘새로운 교회’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용어를 유행시켜 왔다. 최근에는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시노드 또는 ‘시노드로서의 교회’(synodal Church), 또 그

    과정으로서의 ‘공동합의성’(synodality)1)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평등한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합리적 교회상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개혁 조치를

    단행해오고 있다. 본 논문은 이것의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 어원에 대한

    연구나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비롯한 교부들의 이와 관련된 신학사상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한국 교회에서 한 세대 정도의 기간인 초기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평등의 공동체,

    ‘공동합의성’을 바탕으로 한 교회상을 지역 교회, 특히 아시아 교회에서

    1)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주교 시노드가 열렸던 2015년 10월 17일 개막 연설에서 시노드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노드의 정신’ 또는 그것의 여정으로서 ‘공동합의성’(synodality)을 공식 언급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논하겠다.

    황 경 훈(우리신학연구소장)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0 | 특별기고

    찾아보고 소개하면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는 것을 본고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10월말에 끝난 청년에 관한 주교 시노드가 어떻게 공동합의성을 바탕으로

    실험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노드는 거룩한 전체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걷는 여정’일 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서 낡은 구조를

    평등한 공동체로 바꾸는 교회쇄신과 개혁의 길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두

    전임 교황보다는 ‘가난한 이의 교회’(the Church of the Poor)를 처음으로

    발설한 교황 요한 23세를 따라2) ‘시노드’는 이러한 교회로 가기 위한

    ‘우회로로서의 교회개혁’의 의미도 있으므로3) 시노드와 교회개혁의 연결은

    교회쇄신을 바라는 평신도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편, 청년을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가 열리고 있는 21세기 아시아,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 청년들의 삶은 어떠한가. ‘갑을 관계’ 또는

    ‘갑질’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빈부의 극단화와 폭력화, 흙수저·금수저

    논란, 삼포세대를 넘어 N포세대, 혼밥·혼술·혼잠 속의 고단한

    ‘헬조선’의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불화와 갈등으로, 또는 ‘여성 혐오’나

    ‘성대결’로 치닫는 등 ‘현실’이라는 까마득히 높다란 벽 아래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인공지능 ‘알파고의 위력’을 목격한

    청년들은 인공지능 중심의 ‘제4차 산업혁명’에 따른 실업과 보이지 않는

    2) Desmond de Sousa, “To the Concerns of Workers in the Ling of Catholic Social Teaching”, News

    letter of FABC-OHD, Jan.-June 2012 vol. 38, no.1-6. 여기서 드수자 신부는 교황 요한23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날밤 보낸 라디오 메시지와 공의회 개막연설을 각각 소개하면서 교황이 ‘가난한 이의

    교회’가 강조한 대목을 인용한다. “In dealing with the underdeveloped countries, the Church presents

    herself as she is and as she wants to be - as a church for all men and especially the church of

    he Poor .” 개막 연설에서도 이러한 그의 교회론은 이어진다. “[The Council] ought to contribute to the

    diffusion of the social and communitarian content which is inherent in authentic Christianity in its

    entirety: only in this manner can the Church present herself as the Church of all peoples (universal)

    and above all, as the Church of the Poor .” 두 인용문은 이 뉴스레터 6쪽에 실려 있음.

    3) 로버트 미켄스, “우회로를 통한 교황청 개혁-프란치스코 개혁의 이해”, NCR, 편집국 번역 , 2016.07.07.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664 (검색일:

    2018.12.12.)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1

    미래에 대해 더욱 우려와 불안의 시간을 맞고 있다고 보인다.4)

    ‘일자리’의 문제는 단지 실업이나 새로운 직종의 출현 등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곧 전통적으로 여겨 온 노동, 일, 쉼 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도전받으면서, ‘평생 직장’으로 상징되는 항구적인

    안정성이라는 개념과는 현격히 다른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다. 처음

    입사해 채 2년이 안 되어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청년 사이에 무슨

    유행처럼 번져가고5) ‘프리랜싱’(freelancing) 노동형태가 점차 확산되어

    문화화함으로써 ‘신·구세대’ 간의 소통단절과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왔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2014)과

    「찬미받으소서」(2015)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고 이를 ‘생태계’

    전반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눈물이 지구의

    눈물’과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이 두 문헌에서는 본고의 중심 주제인 ‘공동합의성’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교회개혁’과 ‘성직주의’ 극복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고 보인다. 이 글은 개별적으로 보이는 이 개념들이 어떻게

    필연적인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가를 ‘공동합의성’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탐색하고자 한다.

    4) 지난 2016년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고, 여기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라는 167쪽짜리 방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현 자본을 대변하는

    이들이 생산한 담론’이라는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된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향후 5년간 세계 고용의 65%를 차지하는 선진국 및 신흥시장 15개국에서 일자리 710만개가 사라지고,

    21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롭게 생겨날 것으로 예측했다. 김종진, 「4차 산업 시대 노동의 미래: 디지털

    노동의 노동조합 대응과제」, 《노동사회》 제200호(2018.5·6월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http://klsi.org/

    content/8954) 참조. (검색일: 2018.12.05)

    5) 김소엽, 「입사 2년 차, 그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 《중앙일보》 2016.6.15.(https://news.joins.com/

    article/20171570) 참조; 최현준, 「일자리, 쉽게 그만두는 청년 VS 그만둘 수 없는 노년」, 《한겨레》

    2012.7.19.(https://bit.ly/2KQ5cC1) 참조.

  • 22 | 특별기고

    2. 프란치스코 교황과 공동합의성(synodality)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전체 교회와 관련된 중요 문제들을

    협의해 교황을 보필하는 기구로 ‘주교 시노드(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창설했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주교가 약 5,200여 명이나 되기

    때문에 주교 시노드에는 각 지역 교회에서 주교를 뽑아서 참가하게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나 베네딕토 16세 교황 때에도 주교 시노드를

    열어서 이 말이 낯설지는 않지만,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짧은 기간

    동안 가정과 관련해 이미 두 번의 주교 시노드를 열었고 또 2018년

    10월에 청년을 주제로 주교 시노드를 열었으며 2019년에도 범아마존

    생태계 및 그 지역 토착민 문제를 주제로 주교 시노드를 개최할

    계획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정과 관련한 제2차 주교 시노드가 열렸던

    2015년 10월 17일 개막 연설에서 시노드의 의미와 중요성을 분명히

    했다. 교황은 “시노드(synod)는 그리스 어원을 갖는 용어로 평신도,

    사제, 그리고 ‘로마의 주교’인 자신을 포함해 주교들이 ‘함께 걷는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쉬운 뜻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이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동합의성(synodality),

    곧 시노드의 여정은 하느님이 삼천년기 교회에 바라는 길이다.

    공동합의에 바탕을 둔 시노드 교회는 듣는 교회로서 주의 깊은 청취는

    그냥 듣는 것 이상이며, 사려 깊은 듣는 행위를 통해 서로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교회와 시노드는

    같은 말”이라고 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함께

    걷는 여정’이 교회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높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서로가 서로를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3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6)

    시노드가 어떤 특정한 의사결정구조는 아니지만 ‘함께 걷는

    여정’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교회라는 공동체 모든

    성원이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나누고,

    대화하고 의논하며 때로는 함께 결정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시노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노드 정신을 한층 더 고양시킨 진보적 재해석이다. 시노드의 최종

    결정은 교황이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공동합의성이 단지 결정을 누가 하느냐보다 진지하고 세세한 합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교황은 최근 교황령 “주교들의 친교”(Episcopalis Communio)를

    발표하고 시노드가 여전히 주교들의 회의이기는 하지만 “전체 백성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강조했다.7) 2018년 9월 18일자로 반포된 이번 교황령의 핵심은

    시노드의 결정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주교시노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인데, 교황은 이를 통해 주교뿐만 아니라 전체 하느님의 백성의

    의견도 반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황령은 2014-15년도에 있었던 가정

    시노드의 절차대로 본 시노드가 열리기 전에 하느님 백성과 협의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각 교구와 수도회 차원에서

    6) 아래 인용문은 이 연설문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Pope Francis, “Ceremony commemorating the

    50th Anniversary of the Institution of the Synod of Bishops”, Paul Vi Audience Hall, 2015.10.17.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speeches/2015/october/documents/papa-

    francesco_20151017_50-anniversario-sinodo.html (검색일: 2018. 12. 05)

    7) 편집국, “프란치스코 교황, 주교시노드 역할 강화: 시노드는 ‘전체 백성의 소리 듣는 도구’”, 2018.09.21. 평신도의 관점에서 성속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능성을 제안하면서

    여전히 본당-교구 모델에 바탕을 두는 ‘주교 중심 교회론’(episcopal ecclesiology)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그만큼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Massimo Faggioli, ”The uncertain

    future of synodality“, LaCROIX International, August 21, 2018, https://international.la-croix.com/

    news/the-uncertain-future-of-synodality/7790?utm_source=UCAN&utm_campaign=From-our-

    partners&utm_medium=Referral# (검색일: 2018.10.08.) 참조.

  • 24 | 특별기고

    진행될 뿐만 아니라 평신도 조직들을 통해서도 이뤄진다.8)

    이러한 ‘민주적 협의 절차’와 관련해 단체성(collegiality) 개념도 교회

    통치(governing)에 있어 주교들의 태도와 입장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관점에서 다시 성찰될 필요가 있다. 이브 꽁가르는

    공의회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단체성이 공의회에서는 교회 제도

    측면으로 국한되었다고 지적했다. 단체성에 대한 평신도의 재해석과 이를

    통한 의미의 확장이 중요함에도, 공의회는 이를 위계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우려를 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는 단체성을 위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견지에서 신학적 의미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의 제안을 한국 교회의 맥락에서 받아들인다면 단체성처럼 교회

    제도와 구조의 쇄신 방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신학적 개념들을 평신도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평신도 해석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새겨도

    좋을 듯하다. 비슷한 시각으로 보자면 공동합의성의 의미를 평신도

    관점에서 확장해 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노드를 이해하는 관점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황은 시노드 전에 하느님의 백성에게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면서, “실제 가정에 묻지 않고,

    이들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어려움을 듣지 않고 가정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라고 묻는다.9)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노드라

    8) 앞의 글. 사실 프란치스코는 교황에 즉위한 해인 2013년에 발표한 『복음의 기쁨』에서 이미 이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복음화 하도록 내어 맡겨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198항, 필자 강조) 프란치스코는 복음화와 관련해 교회를 복음화하는 주체가 가난한

    이들 뿐만 아니라 ‘타자’ 일반으로 확대시킨다. “...우리는 더 나은 교육, 깊은 사랑, 복음에 대한 더

    분명한 증언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우리를

    복음화하도록 내어 맡겨야 합니다.”(121항, 강조 필자)

    9) Cindy Wooden, “Pope calls for ‘synodal’ church that listens, learns, shares mission”,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5.10.17.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5

    불리는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도 위에 있을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백성이 지닌 ‘신앙감각(sensus fidei)’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하느님이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감을 식별하는 ‘코(신앙감각)’가 있으므로,

    이들은 이미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배워야

    하는 존재다. 이제는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이해한다. 교계가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에서 배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성직자와 더불어 토론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내리는‘합리적인 교회’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10)

    꽁가르의 영향으로 한스 큉(Hans Kung)은 이를 더 밀고 나가,

    단체성은 주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는 교회의 모든 수준에서 적용해야

    할 원칙이라고 분명히 했다. 큉은 ‘공동체적 교회리더십’(collegial Church

    leadership)을 제안하면서 주교단 회의의 파트너 기구로서 평신도

    평의회(lay council)를 보편 교회차원과 대륙별로 설치하고 나아가 지역

    교회에서는 본당, 교구, 전국 차원에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사목자, 사제, 주교는 교회의 성원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큉의 제안에 보태어 앞서 언급한대로 본 논문은 ‘공동체적

    교회 리더십’이라는 관점에서 ‘공동합의성’을 이해하되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아시아 지역교회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지난 10월에 한 달 동안에 걸쳐

    진행된 청년에 관한 주교시노드가 어떻게 ‘공동합의성’을 실험하는 장이

    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0) 정희완,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 『가톨릭신학 』 제29호, 2016, 95-96. 정희완은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 보편사제직, 대중신심, 신앙감각을 든다.

    11) 이와 관련해 Hans Kung, Reforming the Church Today: Keeping Hope Alive, Crossroad, 1990, 79-

    100 참조.

  • 26 | 특별기고

    3. 청년을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공동합의성’의 실험

    3.1. 시노드 준비 회의와 ‘의안집’12)

    잘 알려진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2015년 2년 동안 동분서주

    하며 ‘가정’에 관한 주교시노드를 두 차례나 개최하고 『사랑의

    기쁨』이라는 교황교서를 내놓았다. ‘본당 차원에서부터 주교회의까지

    의견을 수렴하라’라는 지침을 몇 번씩 강조하면서 성실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가능한 다양하고 많은 의견을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단지 ‘준비과정’의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는 중요성이 있다. 시노드는

    ‘주교들의 회의’이고 다른 ‘하느님의 백성’은 참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과연 시노드라는 형식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지역교회들은 교황의 바람대로

    것 같지 않고 그런 대표적인 사례를 한국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13)

    이번 청년, 신앙 및 식별에 관한 주교시노드 준비도 그와 비슷하게

    ‘아래로부터의 과정’을 강조해왔다.

    교황은 2017년 1월에 ‘의제 개요’와 질문지를 각 지역 주교회의를 통해

    배포하고 온라인으로도 의견을 수렴하도록 조치했다. 또 2017년 9월과

    2018년 3월에 로마에서 청년들이 참가하는 시노드 준비를 위한 회의를

    개최함으로써 가능한 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주교 시노드에 반영하기

    위해 힘썼다. 특히 지난 3월에 열린 회의에는 이미 22만 명이 온라인으로

    개진한 의견을 수렴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300여 명의 청년이 참가해

    12) 이 부분은 황경훈,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청년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가톨릭 평론』

    제17호 (2018.09)를 수정 및 보완해 재수록 했음을 밝힌다.

    13) 한국천주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바람과 지시와는 다르게 시노드 의제 개요와 질문지를 본당으로

    내려보내지 않고 거의 모든 교구에서 교구청 직원이 작성해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을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에는 한국교회 신도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한수진, 「교황청 가정생활 실태조사, 한국에선 어떻게 진행됐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1.13. 기사 참조.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7

    20여 개의 분과로 나뉘어 토론한 결과를 16쪽 분량의 최종 성명에 담았다.

    이 성명서의 내용이 주교시노드의 ‘의안집(Instrumentum Laboris)’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는데 좀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의안집은 청년들의

    논의를 담은 사전준비 회의(Pre-synodal meeting) 최종문서의 내용에서

    무려 66번을 직접 인용했다. 총 214항으로 이루어진 의안집이 A4용지

    66쪽으로 되어 있으므로 한쪽에 적어도 한 인용문이 직접 인용 형태로

    반영되었다.14)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청년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방향으로 시노드 논의가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준비 과정과 절차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의안집은 크게 봐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직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며, 새로운 교회로 가는 길을 찾아 나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년들이 직면한 현실과 관련해서는 여러

    방면에 걸쳐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문서는 “폭력이 만연하는 풍조를

    일으키고 일부 젊은이들을 조직범죄와 마약 밀매로 끌고 가는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7항) 또 여러 형태의 실업을 낳게 하고, 전 지구적

    이주노동 현상을 가속화하여 이주노동자를 내보내는 나라의 인적 자원을

    고갈시킴으로써 그 나라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위협받는다고 분석한다.

    또한 문서는 가난과 높은 실업률,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같은 어려운 현실

    아래서 고통받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들과 이들의 문제를

    주교시노드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도록 4명의 추기경을 시노드 의장

    사절(presidents-delegate)로 임명했다. 이라크 바그다드대교구의 루이스

    14) 의안집은 주교시노드 홈페이지(http://www.synod2018.va)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인용한 의안

    내용은 주교회의 번역을 기본으로 하고 필자가 수정하였으며 수정한 번역을 사용할 경우 이를 밝혔다.

  • 28 | 특별기고

    사코(Louis Sako) 추기경, 마다가스카르의 토아마시나대교구 데시레

    차라하자나 (Desire Tsarahazana) 추기경, 미얀마 양곤대교구의 찰스

    보 (Charles Bo) 추기경, 파푸아 뉴기니 포트로레스비대교구의 존

    리바트(John Ribat) 추기경이 7월 18일 자로 의장 사절로 임명되어

    주교시노드의 세션을 주재하게 된다. 차라하자나 추기경의 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세계 최대 극빈국 가운데 하나로 인구의 90% 이상이

    최저 빈곤선인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이라크의 사코 추기경의

    임명은 중동지역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미얀마 보 추기경과 파푸아 뉴기니 리바트 추기경은

    세계 토착민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8억 유럽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아시아의 토착민 문제에 관한 관심과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에 대한 교황의 관심을 직접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시노드 의장 사절의 임명은 청년이 부딪힌 현실과 이들의

    관심사를 구체적으로 다루려는 의지의 표현이자, 그동안 교회가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하지 않는’ 모습에 청년들이 크게 실망했음을 교황이

    인지한다는 표지로도 읽힌다. 이러한 교황의 태도는 의안집에서 빈곤과

    기후변화 또는 생태계 보호 같은 주요 문제에 교회가 ‘더 많은 실질적인

    실천(greater operational pragmatism)’에 매진하도록 주문하고 있는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많은 청년들은 주요한 여러 문제에서 교회가 더 많은 실질적인 실천에

    나서도록 요구한다. 이를테면 교회가 정말로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고,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올바른 선택과 투명성을 보여주며, 또 사회와

    세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악을 가차 없이 고발하는 용기와 진정성을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29

    가져야 한다.15)

    의안집은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근거로 청년들이 성(sexuality)에

    대한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다. 이어

    “어떤 주교회의에서도 (성과 관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며, 많은

    청년은 ‘성에 대한 문제는 어떤 편견 없이 가능한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본다”(53항)고 적시한다. 이 대목은 성과 관련해 고답적인

    입장만을 되풀이하는 교회의 태도에 식상한 청년들에게 관심을 끌만한

    말이다. 이런 주제와 관련해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들

    중에서도 어떻게든 교회에 남고자 하는 이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미

    청년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동성애나 성평등

    같은 논란적인 주제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언어로 말하라”(53항)고 더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사실 이 부분도 청년들이 참가한 시노드 사전준비

    회의 최종문서를 그대로 인용하는데, 이 문서에서는 동성애나 성평등

    문제뿐 아니라 인공피임, 낙태, 동거, 결혼 같은 주제도 교회 안팎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는 주제라고 언급되었다. 위에서

    한 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청년들이 교회가 하는 일이나 말을 얼마나

    추상적으로 느끼는지 ‘실질적이고 명확한 말과 행동을 하라’고 재차

    재촉하는 데서 그 답답함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이 반포된 지

    50주년을 맞는 2018년의 시점에서 청년들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그동안

    15) 의안집 71항, 필자 번역. 영문 참조. “Many young people are asking the Church for greater

    operational pragmatism, touching on various issues: truly siding with the poor, caring about

    environmental issues, making visible choices of sobriety and transparency, being true and clear

    but also bold in denouncing evil in a radical way, not only in civil society and the world, but also in

    the Church herself.” http://www.vatican.va/roman_curia/synod/documents/rc_synod_doc_20180

    508_instrumentum-xvassemblea-giovani_en.html#A_Community_“Committed_to_Justice” (검색일:

    2018.12.10.)

  • 30 | 특별기고

    교회가 인공피임과 낙태를 포함한 ‘생명’ 문제를 얼마나 추상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인간 생명』은 인간의 성과 생명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고 여러 면에서 성찰할 주제를 제공했지만, 인공피임을 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교회에서 성 담론이 제대로 논의될 여지를 잘라버렸다.

    그렇게 50년이 흐르는 사이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콘돔을

    사용해왔고, 교회 당국은 이에 대해 침묵 내지는 방관 또는 형식적인

    ‘인공피임 금지’ 원칙만을 되풀이해왔다. 청년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교회

    신자를 포함해 동시대 성인들이 거의 다 거리낌 없이 하는 인공피임에

    대해서, 콘돔 사용에 대해서, 또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실패작

    자연주기법에 대해서 더는 위선적이지 말고 솔직히 말하자’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제는 교회가 이를 외면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와 더불어 많은 청년은 “교회와 사회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과 강화 등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70항)고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다는

    인식도 각국 주교회의를 통해 확인했다고 의안집은 지적한다.(128항)16)

    의안집 마지막 부분에서 바티칸 문서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LGB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비록 단 한 번이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이고, 그것도 교회가 이들을 배척하기보다는 끌어안으려는

    긍정적인 태도라는 데서 더 눈길을 끈다.

    LGBT 청년들은 …… 교회와 ‘더 가까워지도록 도움을 바라며’(benefit

    from the greater closeness) 교회가 이들을 더 큰 관심으로 돌보고

    16) 주교회의는 women and minorities를 ‘여자들과 아동’으로 번역했는데 ‘여성과 소수자’가 더 정확한 번역으로

    보인다. 영문 참조: “The rage of young people in the face of rampant corruption, growing structural

    inequality, contempt for human dignity, human rights violations,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and

    minorities, organized violence, and injustice does not seem to be taken into due account...” (no. 128)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31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있다.17)

    이 의안집을 바탕으로 주교들이 논의한다면, 이들에 대해 교회가

    지금까지 취한 입장에서 한 걸음 나아가 좀 더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나 태도를 기대할 만하다.

    3.2. 교회의 진정성과 주교 시노드

    의안집은 청년들이 참가한 준비회의 최종문서를 인용해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인’,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거듭 요청한다. 이는

    한마디로 교회가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라는 요구이다. “주로 일반

    사회 청년들의 상당수는 교회에 뭘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살아가는 데 교회를 중요한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이들에게 짜증나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져서 그냥 좀 내버려

    달라”(66항)는 청년들도 있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태도는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교회의 성추문과 금전적 부패

    같은 심각한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청년들은 “교회가 교회

    기관 안에서(within her institutions) 벌어지는 성학대에 대해 무관용

    원칙(zero-tolerance)을 계속 지켜나가라고”(66항) 주문한다.

    근래 들어 한국천주교회도 각종 대형 스캔들로 주요 언론 보도에

    오르내리고, 또 ‘미투 운동’도 종교계에서는 가장 먼저 불거졌다. 이러한

    이들이 우연이 아니라면, 청년들의 무관용 원칙에 대한 요구는 교회

    당국이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년들의 요구는 여기서

    17) 197항, 영문 참조: “Some LGBT youths, through various contributions that were received by the

    General Secretariat of the Synod, wish to «benefit from greater closeness» and experience

    greater care by the Church...” (no.197) 여기서 ‘좋은 것을 준다’는 어원을 갖는 benefit을 ‘혜택’으로

    번역한다면 다른 이들과의 차별을 전제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도움’(assistance)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 32 | 특별기고

    끝나지 않는다. 의안집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청년들은 준비회의

    성명서에서 “교회가 의사결정과정에 청년을 반드시 참여시켜야 하며

    지도자 역할을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은 “우리는 이미 확고하게

    준비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이러한 청년을 등용하는 주요 직책이나

    지위는 본당, 교구, 전국 차원에 마련되어야 하며 나아가 국제적 수준에서,

    특히 바티칸의 위원회에도 주어져야 한다고 대담하게 제안했다.

    이러한 요구는 본고의 논의 중심주제인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시노드,

    곧 합리적 교회상을 말하는 ‘공동합의성(synodality)’의 핵심이며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개혁’의 기치 아래 줄기차게 주장해온 평등한

    친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의 중심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교황청이 주최한 시노드 준비회의에서 나온 것은 분명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반면 지역교회로 갈수록 이러한 개혁 의지가 약화되고

    성직주의가 여전히 강고하여 교황의 교회개혁 조치에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평신도가정위원회 청소년국 주최로 2018년 7월 태국에서 열린 ‘젊은이에

    관한 제4차 평신도 사도직 주교 연수회(BILA IV)’만 보더라도, 최종문서를

    놓고 보건대 ‘지역교회 차원의 형식적인 대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인다. 압축하면 1쪽에 담을 수 있는 분량의 메시지에는 같은 해 3월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 준비회의에 참가했던 청년 대표 6명을 포함해

    평신도가 41명이나 참가했음에도 구체적인 사목적 제안이 없다. 또

    “젊은이들은 교회 생활에서 수용자보다는 주체와 주역이 되기를 원한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생각을 고려해 주기 바라며 교회가 그들의 관점에서

    상황과 문제들을 살펴봐 주기를 원한다.”18)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18)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평신도가정위원회, 「젊은이에 관한 제4차 평신도 사도직 주교 연수회 최종

    메시지」, 2018. 7. 9 ~ 13.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

    id=13013478) (검색일: 2018. 12. 15)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33

    이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해왔던 말을 되풀이 하는 데에서 그치고 있다.

    이를테면 ‘젊은이들을 환대해야 한다’거나 ‘청년 지도자들에 대한 전인적

    양성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늘 반복해온 언사가 그것이다.19)

    시노드 준비회의 최종문서가 바로 이러한 ‘안일한’ 교회의 태도를

    일갈했음에도 지역교회는 이에 공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뒷걸음질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지난 10월 로마에서 열린 청년을 주제로 한 시노드가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역교회 차원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곧 논의하게 될 인도, 필리핀, 한국 지역 교회의

    예에서 보이듯이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로 끝나버릴 가능성도 크다.

    4. 공동합의성의 아시아 교회 사례

    4.1. 인도 교회의 사례: ‘인도가톨릭평의회’(Catholic Council of India, CCI)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에

    와서야 ‘공동합의성’(synodality)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명명된 이 주제가

    21세기의 ‘지구적 가톨릭’(global Catholic Church)에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느리기는 하지만 세상은 점점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고

    고대나 중세의 왕이나 봉건군주가 다스리던 전제주의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가는 길’ 또는 ‘함께 하는 여정으로서의

    교회’를 synodality라고 한다면 이는 교회의 발전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여러 측면에서 이를 조망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특히 이 장에서는

    ‘공동합의를 바탕으로 한 의사결정 과정과 구조’에 초점을 두고

    사용하고자 한다. 본고는 그것의 어원이나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제로 그

    교회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지역 교회, 특히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19) 위의 글 참조.

  • 34 | 특별기고

    소개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과 더불어 여러 교회의 문제들이 대개 의사결정권자인 교회

    ‘지도자’의 문제였고 그런 지도자를 양산해 내는 제도, 곧 구조의 문제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교회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합당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교회의 대다수인 평신도는 이런 지극히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어떻게 바꿔 볼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무력하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교회 역시 나약하고

    한계 많은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점에서 이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나라의 표지’로서 교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임에도 이에 대한

    교계의 대응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공동합의성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지역 교회의

    사례를 찾고 이를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의 교회상을 찾기 위해 탐구하고

    실험하는 일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교회’에 있는 평신도 신학자와

    활동가들이 해야 할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선

    주교회의 차원에서 수도자와 평신도가 의결권을 갖는 기구를 설립한

    인도 교회와 전국 단위의 사목 평의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오고 있는

    필리핀 교회의 예를 소개하고 거기서 공동합의성의 정신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구조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인도 가톨릭 주교회의(CBCI)는 1996년 2월 13-21일 인도 남부의

    티루바난타푸람에서 격년제로 열리는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평신도

    대표를 포함한 교회의 모든 부문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교회의의 논의 구조를 개혁하기로 결정했다.20) 주교들은 이를 위해

    ‘인도가톨릭평의회’(Catholic Council of India, CCI)에 교회 특정 문제에 관한

    20) 특집, “인도, 평신도에 의사결정권 개방,” , 1996.03.18. 제27호, 3.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35

    결정권을 위임하고 또 주교회의에서 다를 안건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또한 주교들은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1997년까지 인도

    전체 129개의 교구와 소속 본당에 평의회를 설치하여 인도 가톨릭평의회의

    총회를 소집하도록 추진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승인했다.21)

    인도주교회의 평신도 위원회 의장인 뭄바이 대교구의 페나 보좌주교는

    총회에서 주교들에게 주교와 사제의 ‘태도 변화’와 평신도와 기꺼이 함께

    일할 것과 이들을 ‘아이가 아니라 어른’으로 존중하는 ‘지배하지 않는

    지도자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페나 주교에 따르면, 본당

    평의회, 소공동체, 평신도 선교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과 다양한

    평신도 단체가 ‘교회 행정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22)

    그러나 주교회의의 ‘논의구조 개혁’은 2018년 12월 현재까지도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고 보인다. 특정

    문제로 제한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권을 위임’하기로 했다면 이는

    주교회의 차원의 사안임에도 인도 주교회의 웹사이트 어느 곳에서도

    ‘인도 가톨릭평의회’를 언급하고 있는 곳은 단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공지사항’이나 ‘소식’ 또는 기사에서도 다루고 있지 않다.23) CCI는

    자체 인터넷 홈페이지는 없지만 SNS의 하나인 페이스북(facebook)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일년에 한 두 번의 소식을 업데이트 하는데

    그것도 크리스마스 같은 축일의 의미나 축하 등의 매우 ‘가벼운’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 ‘공동합의성’이나 ‘의사결정’과 같은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24) 다행히 아시아 가톨릭 언론에서 CCI를 다룬 몇 개의 기사를

    21) 앞의 글. CCI는 주교회의 상임위원, 지역별 사제, 수도자, 청년, 평신도 대표와 인도수도자회 임원들,

    전국교회단체 대표, 주교회의 사무차장과 임원들이 추천하는 12명 등으로 구성된다.

    22) 위의 기사.

    23) 이와 관련해 인도주교회의 홈페이지 참조. https://www.cbci.in/#1 (검색일: 2018. 12. 20)

    24) CCI의 페이스북 참조. https://www.facebook.com/CCIHYDERABAD/ (검색일: 2018. 12. 20)

  • 36 | 특별기고

    찾을 수 있었지만 이 기사들은 앞의 ‘주교회의 의사결정권 개방’이나 ‘논의

    구조개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홍보성’ 기사들이다.25)

    인도 주교회의 총회에서 이 결정이 내려진 지 15년 뒤에 FABC 평신도국

    버지니아 살다나(Virginia Saldanha) 전 사무총장과 델리대교구 평의회

    마이클 크루즈 (Michael Cruz) 전 사무총장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결정사항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도주교회의는

    CCI를 주요한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부속기관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 또 많은 평신도가 CCI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CCI의 총회의 주제도 이들이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정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평신도에게

    의사결정권을 개방한다’는 당초의 취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이를

    ‘공동합의성’이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보인다.26) 인도의 종교언론 매체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평신도는 여전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주요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기사는 “CCI는

    ‘전체 교회의 축소판’이라고 불리지만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지적함으로써 앞서 버지니아와 마이클의 지적이 옳음을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CCI의 전신인 ‘전국자문위원회’는

    80년대에 분명한 역할과 적극적인 기능을 했다. 기사에 따르면, 주교회의

    의장이 자문위의 의장을, 또 2명의 평신도 지도자가 부의장을 맡아

    지도력을 행사하면서 전국을 대표하는 25명의 대표들과 총회를 구성해

    25) ‘Church leaders pledge to work for development’ Nov. 24, 2011; ‘Cardinal Gracias inaugurates

    CCI meet on Vatican II’ Nov. 14, 2013; ‘Church needs to move toward renewal and change: CCI’

    Nov. 18, 2013. 뒤의 두 기사는 제12차 CCI 총회를 다루고 있지만, 기사 내용에서는 누가 선출되었다는

    소식만이 있고 CCI의 역할이나 주교회의와의 관계, 의결내용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기사들은 아시아가톨릭뉴스 또는 ucanews.com의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

    india.ucanews.com/news/Catholic-Council-of-India/tag (검색일 2018.12.25.)

    26) 현재 버지니아 살다나는 ‘세계 가톨릭 교회개혁 네트워크’(CCRI)에서 활동하며 인도와 한국 교회 및

    아시아 전체 교회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버지니아와 마이클이 나눈 대화는 개인 전자메일이며

    저자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에 여기서는 비공개함을 밝힌다.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37

    활동해 온 바 있다.27)

    4.2. 필리핀 교회: ‘필리핀 사목평의회’(Pastoral Council of Philippines, PCP)

    필리핀 가톨릭교회는 1991년에 제2차 필리핀 사목총회(the Second

    Plenary Council of the Philippines, PCP Ⅱ)를 개최하고 ‘가난한 이의

    교회’를 공식 교회론으로 선언한다. 이는 “2000년 희년의 문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교와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의 이 공동체가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명하신다”28)는 선언으로 요약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난한 이의 교회’를 공식 교회론으로 선포한

    지역교회가 없었다는 점에서 필리핀 교회의 이 같은 선언은 ‘교회사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리핀 교회 전문가인 소피아 머리지(Sophia

    Marriage)는 PCP Ⅱ가 필리핀 교회에 준 의미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 및 의미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한다.29) 이 과정을

    잠시 살펴보면, 우선 필리핀 주교회의가 전면에 나서 준비한 점이 눈에

    띈다. 이미 주교회의는 1990년을 ‘평의회의 해’(the Year of Council)로

    기념하는 마당에 정기총회를 열어 그 이듬해인 1991년에 ‘제2차 필리핀

    사목평의회’(PCP II)를 개최할 것을 결정한다. 오스카 크루즈(Oscar

    Cruz) 대주교의 리더십 아래 PCP II 전국사무국은 주교, 본당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6개의 위원회에서

    공동작성한 작업문서들을 위한 기초자료로 사용했다. 사무국 위원장인

    크루즈 대주교에 따르면,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사제성소가 줄고 있는

    27) 이와 관련해 “CCI executive decides on national assembly” Religious India, May 7, 2012 참조.

    http://www.religiousindia.org (검색일: 2018. 10. 12.)

    28) Sharing Our Stories, Sharing our Spirit: An Encounter of the Pastor & the Flock toward a New

    Way of Being Church, ed. by Celeste Gimena and others, Socio-Pastoral Institute and Lay Forum

    Philippines-National Center, 2000 preface by Julio Labayen.

    29) Sophia Marriage, “The Place of the Local Church in the Liberation/Inculturation Debate: the Infanta

    Prelature Experience”, East Asian Pastoral Review, vol. 37, no.1, 2000, 참조

  • 38 | 특별기고

    현실에 우려를 나타냈으며, 그 다음으로 정부, 기업, 사회의 주요부문에서

    평신 리더십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이어 세 번째로 응답자들은

    정의평화, 부, 생태, 이데올로기 등을 포함하는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또 설문은 ‘기초그리스도교 공동체’(BCCs)가 민다나오 지역에서

    강하게 나타났고 공동체적(communal)인 성격을 갖는 반면 대도시

    마닐라를 포함하고 있는 루손지역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더 구조화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기도 공동체’ 성격을 띤다고 보고했다.30)

    사실 필리핀 기초공동체는 1960년대 말 ‘기초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불리던 것과 같은 ‘기초 그리스도인 공동체’(BCC)라는

    이름으로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BCC는 교회와 사회의

    기층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시대의 변화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찾고 실천하는 전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1984-1985년

    즈음에 필리핀 교계는 BCC의 이름을 BEC로 바꾸기로 결정하는데,

    이는 좌파운동이 교회 단체와 운영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루어진 조치였다.31)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필리핀

    교계가 어떻게 BCC를 ‘교회’ 색채가 강한 BEC로 바꾸어간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자발성에 기초하여 자생적으로 성장하던 BCC가 어떻게

    필리핀주교회의에 흡수되어 통제 아래 놓이게 됐는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필리핀 남부지역 교회에서 설립한 ‘민다나오-술루

    사목총회’(Mindanao-Sulu Pastoral Conference, MSPC)의 변천

    과정이다. MSPC 내부에서, 특히 몇 차례의 총회를 둘러싸고 MSPC를

    ‘교회내기구’로 한정하려는 주요 흐름과 ‘민중교회’로 자리매김하려는

    주교들 사이의 갈등 상황이 전개되고 전자가 압도하여 결국은 제도권으로

    30) “Second plenary council of the Philippine church takes shape”, ucanews.com, 1990.01.17.

    31) Emmanuel S. de Guzman, “Base Communities in the Philippine Church (Ⅲ): Seeds of Democratization

    and Renewal”, MST Review 4, no. 1, 2000, 1-2 참조.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39

    흡수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32)

    당시 사회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던 사제와 교회 활동가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의지를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고, 이는 이들이

    지하 혁명운동조직과 연계하는 데로 이어진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일이었다. 앞의 설문조사가 실시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만 해도

    사제들이 지하 공산주의 운동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 산으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도대체 종교적 비타협주의(religious radicalism)와 정치화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일부 설문 응답자들이 물었다고 크루즈

    대주교가 말한 것으로도 당시 교회 안의 이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33)

    제도 교회의 우려대로 대부분 이들의 활동은 기층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교계의 그러한 판단과 대응은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인다. 일부 사제, 수도자, 교회 일꾼들은 지하 혁명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협조자 역할을 하였고 일부 교회와 교회 단체는 좌익연합체의

    일부로서 기능하였다. 이렇게 되자 교회 안팎의 일부 인사들은

    정치세력으로서 지하 혁명운동이 교회에서 가능한 모든 재원과 수단을

    동원하여 혁명에 이용한다는 의혹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34)

    일부에서는 필리핀 교회가 근본적으로 철저한 가난한 이의 교회로

    가는 것을 희석하기 위해 PCP Ⅱ를 열었다고 보는 반면, 한편에서는

    인구의 대다수가 빈곤 에 시달리는 필리핀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진실된

    응답이었다고 보는 양면의 평가가 있다.35) 인판타 교구의 라바옌(Julio

    X. Labyen) 주교를 중심으로 1999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참가

    교구들이 주체가 되어 PCP Ⅱ에 대한 후속 작업으로서 ‘가난한 이의 교회’

    32) Emmanuel S. de Guzman, ibid. 8-12.

    33) “Second plenary council of the Philippine church takes shape”, ucanews.com, 1990.01.17.

    34) Ibid. 4-5.

    35) Sophia Marriage, ibid. 88.

  • 40 | 특별기고

    라는 교회론의 현재를 지속적으로 평가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PCP

    Ⅱ가 필리핀 교회에 갖는 의미는 긍정될 수 있다고 보인다. PCP Ⅱ 이후

    8년 뒤인 1999년 2월 세부(Cebu)에서 열린 “PCP Ⅱ 2기”에는 PCP Ⅱ에

    참가했던 교구 가운데 12개 대/교구가 모여 ‘가난한 이의 교회’로 가는

    8년 동안의 여정에서 경험한 성취와 실패 등을 나누었고, “청지기역을

    통한 가난한 이의 교회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of the Church of

    the Poor through Stewardship)이라는 제목 아래 2003년에 열린 후속

    회의에서는 참가자를 다양한 수도회로 확대한 점이 눈에 띈다.36) 또

    라바옌 주교는 1999년 회의에서 PCP Ⅱ로써 필리핀 교회가 전환점을

    맞았다고 평가하면서, “2000년 희년의 문턱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교와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의 이 공동체가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명하신다”37)는 PCP II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또한 그는 PCP

    Ⅱ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도록 요청한 교황 요한 23세에

    대한 필리핀 교회의 공식 응답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8)

    그러나 라바옌 주교의 인판타 교구를 비롯해 참가교구들이 필리핀

    교회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여기서 결의한 내용이

    PCP II의 정신인 ‘가난한 이의 교회’를 진정으로 실천했는가라는 점에서

    과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가는 미지수다. 오히려 형식적인

    행사였으며 그 내용도 애초에 지향한 교회론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눈에 띈다. 그 가운데 ‘아시아

    36) Sharing Our Stories, Sharing our Spirit: An Encounter of the Pastor & the Flock toward a New Way

    of Being Church, Socio-Pastoral Institute and Lay Forum Philippines-National Center, 2000; id.,

    Sustainability of the Church of the Poor, Socio-Pastoral Institute, 2003.

    37) 라바옌, 같은 쪽.

    38) 1999년과 2003년 회의에서 라바옌 주교는 가난한 이의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잇고

    있으며, 특히 교황 요한 23세가 한 다음의 말에서 그 계승성을 찾고 있다. “모든 이들의 교회로서,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the Church be able to present itself as it should, as a

    Church of all peoples and, above all, as a Church of the Poor). 원문은 Labayen, Sustainability and

    the Church of the Poor, 6에서 재인용.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41

    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는 전직 메리놀회 선교사 데니스 머피(Denis

    Murphy)의 비판은 그 핵심에 닿아 있다고 보인다. 30여년 동안 도시빈민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온 활동가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빈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증거’로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로서 그가 PCP II를 바라보는 시각은 진정으로 ‘가난한 이의

    교회’에 대한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내린 평가라고 판단해 여기에

    소개한다.39)

    머피는 PCP II 문서를 초안한 세 명 가운데 한 명이자 ‘수도자 의안

    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테오도로 바카니(Teodoro Bacani) 주교가 쓴

    글을 바탕으로 PCP II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PCP II가 있고 10년 뒤에

    대표들이 마닐라에 모여 ‘가난한 이의 교회되기’라는 노력이 실패했다는

    데에 동의했다면서 바카니 주교가 당시 PCP II 문서에서 인용한 부분을

    적시한다.

    “필리핀 교회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때 가난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이고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교회 생활과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전체 필리핀 교회의

    일치를 위한 표지요 도구이다.”40)

    머피는 바카니 대주교가 문서에서 인용한 위와 글들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떠한 연민과 열정도 느껴지지 않고,

    필리핀 사회문화 전반을 공격해온 부패와 탐욕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며

    39) Denis Murphy, “Too Late for a ‘Church of the Poor’”, inquirer.net, July 21, 2015. 지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전국 일간지이며 데니스 머피는 이 글을 논평(commentary)란에 게재했다. https://

    opinion.inquirer.net/86897/too-late-for-a-church-of-the-poor (검색일: 2018.12.10.)

    40) Denis Murphy, ibid.

  • 42 | 특별기고

    또 해방신학의 흔적도 없다면서, ‘가난한 이의 교회는 오직 부패와

    탐욕으로 썩어가고 있음을 아는 그런 사회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PCP II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매우 절박한 평의회였지만

    여전히 교계 중심의 형식적 노력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지적하면서,

    가난한 이의 교회는 ‘사제와 주교가 무수한 폭력의 상황에 처한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통에 정면으로 뛰어들 때에야’(priests and bishops run

    head-on into suffering)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머피는 전체 교회와

    PCP II 대표자들이 당시 했던 약속을 지켰다면 상황이 나아졌을까를

    자문하고는, “적어도 가난한 이의 교회가 되는 길의 일부분이라도 될 수

    있었을 것”41)이라고 답했다.

    머피의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비록 그가 온건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필리핀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는 길의 일부분조차 찾지도, 그것을 위한

    노력도 없었다는 매우 혹독한 비판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머피는 역사적으로 교회가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위해 권력 있는 이들에

    의존해왔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가난한 이의 교회라는 교회론을

    발전시킨 라틴 아메리카를 볼 때 ‘반드시 가난한 이들 자신이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았다. 인도

    교회의 가톨릭평의회처럼 필리핀의 경우에도 ‘공동합의성’은 무늬만 있고

    내용은 거의 실천이 되지 않는 껍데기뿐인 것으로 결과 되었다고 보인다.

    4.3. 한국 교회 공동합의성의 예: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1984년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을 맞아 열렸던 사목회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적극적인 응답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사목회의는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41) Ibid.

  • ‘공동합의성’과 합리적 교회상: 아시아 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 43

    수도자, 평신도가 같이 참여하는 회의라는 데서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며 특히 이 땅에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과 같이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니 사목회의는 교회 생명 자체를 다루는 것”42)이라고 그 의의를

    설파했다.

    200주년 사목회의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백성 전체

    즉 평신도 지도자 성직자가 같이 참여하여 회의하고 토론하는 획기적인

    자리였다. 한국 교회에서 전국 규모의 이런 회의를 개최한 것이 처음이라

    회의의 명칭이나 내용, 또 운용 방식 등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본고가 주목하는 ‘함께 가는 길’로서의 ‘공동합의성’에

    부합한다고 보인다. 사실 사목 회의의 전 과정이 함께 길을 찾아나가는

    여정이었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전국 교구와 수도회 평신도 단체

    등 현장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이고 열띤 참여로 총 313개의 제안으로 모아냈고 이 제안들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와 비슷한 형식으로 교회의 ‘내적 쇄신’과 ‘세상과의

    대화’ 분야로 나뉘어 총 12개의 의제로 정리되었다.

    각 의제는 학문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1년 동안의 회의와 합의를 거쳐

    마련된 의안 초안을 바탕으로 1983년에 교구별로 사목회의를 진행하였고,

    그 논의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바탕으로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가운데 전국 사목회의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1980년

    11월부터 1984 년 12월 1일 폐막까지 4년여의 준비기간과 본회의를 거친

    200주년 사목회의의 모든 의안은 90% 이상의 투표 결과로 종결되었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하며 마무리되었다. 후속 조치로

    42) 한상봉, “복권이 필요한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 2016.08.02.에서 재인용.http://

    www.catholicworker.kr/news/articleView.html?idxno=507 (검색일: 2018. 12. 20.)

  • 44 | 특별기고

    10년 후인 1995년 주교회의는 사목회의 의안을 반영한 ‘한국 천주교회

    사목지침서’를 발간하였다.43)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에는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에 대한

    적극적인 권고를 담았는데, 이를테면 평신도의 종신부제직 수여 문제,

    평신도연구기관 설치 등 평신도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다양한

    제안들이 담겼다. 본당이나 교구 단위의 다양한 협의기구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심지어는 주교회의에도 평신도가 참관하여 자문할

    수 있도록 권고하기도 하였다. 또 최종의안에 담기지는 않았지만 주교

    선출에 대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제청으로 교황이 임명하도록

    하자는 제안이 논의되기도 했다.44)

    또 사회정의, 언론, 사회개발, 사회복지를 다루고 있는 「사목회의

    의안 12권-사회」에서는 ‘제안사항’ 가운데 가장 먼저 교회 공식기구로

    ‘사회교리연구소’ 설립을 요청했다.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일치된 시각을

    제공하고, 사회사목 단체들의 유기적 연락과 자료 교환을 위한 목적으로

    제안되었다. 그럼에도 현재도 교회 내에서 그러한 연구소의 효용가치가

    매우 높은데도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연구소는 아직

    한국 교회 안에 없다. 한국 교회가 2011년에 선포한 ‘사회교리 주간’이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강조를 잠시만 상기하는

    것으로도 30년 전에 있었던 사목회의나 사회교리연구소 설립제안 등이

    얼마나 선구자적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