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자표기의 음운론 - korean.go.kr · 1)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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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륙정 ·차자표71 】

    차자표기의 음운론

    박창원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L 머리말

    이 글은 우리 민족이 한자를 벌어 문자 생활을 하던 시기의 음운사를 재

    구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을 논의하고 연구의 구체적인 예를 간단하게 제

    시하기 위한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의 음운사에 관한 연구는 향가 해독에 대한 관

    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었다. 또 많은 엽적이 쌓여 있으므로 새로운

    논의를 하기보다는 자료와 연구 방법에 관한 기초적인 것을 -차자 표기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가 이런 방면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갖추어야

    할 기초적인 지식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개하는 데에 본고의 일차적인

    목적을둔다.

  • 80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CJ1년 겨울)

    음운사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던 주제 내지는 앞으로 논의될 주제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모음 체계와 자음 체계가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

    다. 모음 체계와 관련하여 중성 모음의 존재와 이와 관련된 당시 모음의 목

    록수, 모음추이와관련된 모음들의 대립 관계, 모음조화의 양상등이 밝혀

    져야 할 것이다. 자음 체계와 관련하여 자음의 목록 수와 이들의 대립 관계

    특히 유기음과 유성음의 생성 및 소멸 과정이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음군 간소화에 관한 문제, 구개음화에 관한 문제, ‘E’과 관련된 일

    련의 문제 등도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본고는 어두 자음군의 생성 시기와

    종류에 한정하여 계림유사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보는 데에 이차적인 목

    적을둔다.

    &자료와방볍

    2. L 우리 문자가 없던 시절의 문어 자료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

    다. 하나는 외국인이 자국의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해 놓은 것이고 다른 하

    나는 우리 조상이 한자를 벌어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다.

    전자는 우리 민족 인근의 종족들이 우리 민족의 언어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인데, 주된 것은 중국인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중국 측의 옛 역사서에 단

    편적이나마 남아 있는 기록들1) 그리고 12세기 초반기의 언어 모습을 보여

    1)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에 대해 ·言語諸事多與夫짧同(언어와 제반 일이

    부여와 동일하다)’, 통옥저에 대해 ‘其言語典句뼈大同時時小異[그 언어가 ‘구려’

    (이것은 ‘高句홉를 지칭하는 것임)’와 크게 같고 때때로 조금 다르다]. 예에 대해

  • 차자표기의 음운론 81

    준다고 할 수 있는 계림유사와 1항11기 초반기의 언어 모습을 담았다고 할

    수 있는 조선관역어가 대표적이다.

    후자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지명 · 인명 · 관명 등의 기록

    이 있고, 삼국유사와 균여전의 향?t. 삼국 시대부터 근대 국어 시기까지 사

    용된 이두 자륙 고려 시대에 집중된 구결 자료 등이 있다.

    이러한 자료를 이용뼈 우리말의 역사를 재구할 때, 우선 조심해야 할 것

    은 이들 자료가 보여 주는 언어의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이다. 외국인이 우리

    말을 기록한 것은 한국어의 음성척 단위가 외국어의 음운척 단위로써 표기

    된 것이고, 우리 조상이 우리말을 기록한 것은 외국어의 음운적 단위가 한국

    ‘름語法{씁大雄與句 11同(언어와 법속이 대체로 ‘구려’와 같다)’라고 한 것은 부여,

    고구려, 동육저, 예의 언어가 서로 비슷하였음을 보여 주는 기술이다. 그리고 진

    한에 대해 ‘릅語끼훌馬'*同(언어가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변진[휴辰 : 변한과

    진한을 합친 용어인 듯한데, 여기서는 변한을 지칭한다]에 대해 ‘言語法ftt相似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라고 한 것은 한반도 남쪽의 언어 상황 내지는

    민족의 구성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남방이나 북방에 살면

    서 국가를 이루고 있던 종족들이 사용했던 언어들의 친소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삼국지 위지 통이전에 언급된 여러 국가의 이릅들 예를 들어 ‘훌훌빼’에 나

    오는 ·小石素園 大石索園, 훌休후짧園 速盧不斯圖 등 수십 개의 국명이나 ‘長빼,

    닮智, 몰借· 등의 관직명 등은 아직 해독은 못 하고 있지만, 삼국 시대 이전의 언

    어 상황을 추정하는 데 유일한 단서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梁홉 諸奭빼’에서 신라에 대해 ‘其倚呼城日健후羅 其몰內日흉評在外日몹勳 亦

    中園之言都厭:tI1,(중략) 其冠日遺子禮 橋日밟解 格日챔半 빼日洗[성을 (신라에서

    는) ‘健후羅’라고 하는데. (성) 내부의 융을 ·隊評이라 하고 성밖의 읍을 ‘물動’이

    라고 한다. 모두 중국의 말로는 군현이다., (중략) 그 ·冠올 ·遺子禮’라 하교 ‘播

    를 ‘밟뽑라 하고 .뿜를 ‘찌半·라 하고 ·聊를 .洗’라 한다J의 기술에서도 고대 언

    어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어휘를 얻을 수 있다.

  • 82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CJ1년 겨울)

    어의 음운적 단위로 표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접근 방법은 판이하게 달라진

    다.

    2.2. 중국인이 우리말을 기록한 문헌들은 당시의 우리말에 존재했던 음성

    의 일부분을 보여 준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말의 음성이 중국어의

    음운에 어떻게 대응되어 표기에 반영되었는가 핸 것을 보여 준다. 계림유

    사를 예로 하여 부연하면 다음과 갇다. 잘 알다시피 계림유사는 중국인 손목

    이 당시의 고려어를 송대음으로 전사한 것이다. ‘牙音’의 경우, ‘果 古, 油,

    光, 居 ... ’ 등 50개 남짓한 ‘見母’가 사용되고 있고, ‘1L. 苦, 표 口, 去 …’ 등

    40여 개의 ‘漢母’가 사용되고 있고、 ‘求, 훨, 權 具, 巨…’ 등 20항 정도의 ‘훌

    母’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疑母’는 ‘牛, 흙L 愚, 鼎, 宜…’ 등 30개 가까운

    한까 사용되고 었다~2) 이 사실은 당시의 고려어에 중국어의 음운 체계에

    대응될 수 있는 적어도 4개의 ‘牙흡’ 계열의 음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렇다고 하여 당시의 고려어의 음운 체계에 중국어와 동일한 4개의 변

    별적 음운이 존재했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다. 이들이 결합적 변이음의 관계

    에 있었던 것인지, 자유 변이음의 관계에 있었던 것인지 혹은 음운론적 대립

    관계를 유지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문헌에서 이들이 어떠한 분포 관

    계를 보이는지 혹은 후대에 이들의 대응음 내지는 변화음이 무엇인지 등 판

    단의 기준을 달리 세워야 한다.

    반면에 한국어에 차용된 한자음들은 한국어 음운 체계의 지배를 받게 된

    2) 이 숫자는 강신항(1980/1991, :09-.13)에서 나온 것이다.

  • 차자표기의 음운론 83

    다. 중국어의 ·見母, 樓母, 훌母, 疑母’에 해당되는 한자들이 우리말에 차용되

    어 사용되는 것은 한국어에 이들이 음성이나 음운이 존재했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되지 못한다. 이들이 1댐l기에 어떤 음으로 나타난다든개 한

    국 한자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음가 추정에 대한 참고 사항이지 정확한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체계가 변화 없이 후대에 전달되었으리라

    고 추정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당시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재구함으로써 이들이 차용될 당시에는 어떤 음

    으로 조음되었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2.3. 고유한 문자가 없던 시절, 인근 종족의 한자를 벌어 우리말을 표기하

    기 위해 우리 조^cf들은 한자의 음이나 훈을 빌리는데, 때로는 한자 본래의

    뭇이 살아 있을 때도 있었고 그 뭇이 살아 있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를 각

    각 음독 • 음차 • 훈독 · 훈차라 한다. 예를 들어3) ‘우리 나라의 소리’를 표기

    하기 위해 ‘我國之音’이라 표기했다면 이것은 우리말의 뜻과 일치하는 한자

    의 뭇을 벌어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다. ‘宇理那羅롯蘇理’로 표기했다면 이것

    은 우리말의 음과 같은 음을 가지고 있는 한자의 음을 벌어 표기한 것이 된

    다 전자는 한자 하나하나가 본래의 돗대로 사용된 것이고 후자는 한자의

    뭇과 무관하게 사용된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를 ‘훈독’이라 하고 후자를 ‘음

    차’라 한다. 초기의 한자 차용 표기는 。따 이 두 가지가 기본이 되었을 것이

    다.

    3) 이에 대한 구체척인 설명과 예는 양주동(100)), 남풍현(1981)을 참고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부연하는 것은 본고의 논의를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 84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r;n년 겨울)

    ‘훈독’과 ‘음차’의 방법으로 표기할 수 없거나, 표기상의 기교를 부리기 위

    하여, 혹은 발화의 단위인 단어를 의미 단위로 제대로 분석하지 못할 경우

    (예컨대 형태소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인해 ‘회11借’의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것을 표기하기 위해 ‘A是’

    라고 차자했다면 ‘是’의 훈으로 주격조사 ‘-이’를 표기한 것인데, 이것은 한

    자의 훈을 벌어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 되는 것이다.

    중국과의 접촉에 의해 새로운 문물과 개념이 도입되고, 이와 함께 중국어

    가 우리말의 일부분으로 사용되게 되면서 중국식 어휘가 고유어와 함께 사

    용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t용되는 것이 음독이다. ‘글을 벌어 적어

    놓은 것’을 ‘借字表記’라고 적고 이를 ‘차자 표기’라고 원는 것은 음과 뭇이

    다 살아 있는 음독의 방법이다. 음독이란 한자어의 침투를 전제로 하는 것이

    고、 한자어가 우리말 속에 그 영역을 넓혀 가면서 음독은 확대되어 가게 된

    다.4)

    2.4.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표기 중, 당시의 언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

    용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음차자들이다. 음차자들 중 말음 청기로

    사용된 것이거나, 후대의 문법 형태소와 그 연결 관계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것들은 당시의 언어를 재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於內秋察

    早隱風末(察亡妹歌), 惡#習落歐乎隱三業(觸悔業障歌)’의 ‘秋察, 惡--;f’ 등은

    15세기의 '7슐, 벚은(꽃은)’에 대응되고(末音$記), ‘執훌乎手母牛放敎遺

    4) 현대 한국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 혼용은 전부 음독의 방법이다.

  • 차자표기의 음운론 85

    (默花歌), 放좋찾用屋F總悲밤R古(醫千手觀音歌)’의 ‘遺, 古’ 등은 15세기의

    ‘-고’에 대응된다(문법 형태소 대응) . 당시의 음운 체계를 추정할 수 있는 자

    료로 자음과 관련하여 전자를, 모음과 관련하여 후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

    다. 훈독과 음차의 방법으로 두 개 이상의 지명이나 인명 등 고유명사의 표

    기가 남아 있거나,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관명이 남아 있을 때 역시 당시의

    음운 현상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永同那本吉同那

    (삼국사기, 34 : 5) , 密城那本推火那(삼국사기, 34 : 6), 水城짧本高句麗買忽

    那(삼국사기, 35 : 2) ’에서 ‘永’을 뭇하는 ‘吉’이라는 음을 가진 어휘를, ‘推’의

    뭇을 가진 ‘密의 음을 가진 어휘를, ‘水’를 뭇하는 것으로 ‘買’의 당시 음을

    가진 고구려 어휘와 ‘城’을 뭇하는 어휘로 ‘忽’의 당시 음을 가진 고구려 어

    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훈차와 훈차의 방식으로 둘 이상의 지명이나 인

    명 등이 남아 있을 때도 유익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推良火.

    一.~.三良縣(삼국사기, 34 : 7)’에서 ‘推’의 훈과 ‘三’의 훈을 가진 당시의 고유

    어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음차와 음차의 방식으로 혼기된 표기도 당시의

    음운 체계나 음운의 변화를 추정하는 유익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尼맨今(삼국유.̂ t. 1 : 17), 尼師今(삼국사기, 1 : 17)’의 혼기나, ‘次次雄或힐

    업充(삼국사기, 1 : 4)’의 혼기, 그리고 ‘尙質縣本百濟上業縣(삼국사기, 36:

    5), 烏兒縣本百뺑鳥次.(삼국사기, 36: 8) ’ 등의 예에서 고대 국어의 치음

    혹은 치음의 변화와 관련하여 귀중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의.혼기는위에서 언급한하바의 방식으로만나타냐는것이 아니

    라 몇 가지 방식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聽居

    世居西千(삼국사기, 1 : 1), 薦題內王(삼국유사 1: 12)’의 혼기는 훈독과 읍

  • 86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ff1년 겨울)

    차 등이 섞여 있는 것이다. 한두 예만 더 들기로 한다. ‘比멈火郵一힐比斯代

    (삼국사기, 34 : 7)’은 음차(比멈)와 음차(比斯), 훈차(火)와 음차(代)가 각

    각 대응되는 예이고、 ‘居業夫或굽뾰宗(삼국사기, 44 : 2)’는 음차(居뽕)와 훈

    독(뾰) , 훈독(夫)과 훈독(宗)이 각각 대응되는 예이다.

    2.5. 이렇게 이중으로 표기된 고유명사나 관직명 등이 당시의 음운을 추

    정하는 데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지만, 이들이 무한정 동일한 가

    치에 놓고 논의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二年那本三年山那(삼국사

    기, 34 : 5)’의 자료에서 ‘二年’과 ‘三年山’의 사이에 어떤 음운론적 대응 관계

    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마 부질없는 노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위의 두 부류 중 어느 쪽의 유형인지 판

    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古昌那本古階關(삼국사기 않 : 3)’의 경

    우 ‘;;:., E’의 유기음에 관련된 자료로 보。싸 하는지 혹은 자음군의 변화와

    관련된 추론을 할 수 있는 자료가 되는지 아니면 단순히 지명 개정의 한 예

    에 불과한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훈차로 해독할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二陽山縣本助比川縣(삼국사기

    34 : 5)’과 같은 자료를 대할 경우 그 판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 자료는 얼핏 보아 개정한 지명과 본래의 지명이 무관

    한 것같은데, 달리 보면 관련이 있는 것같기도 하다. 즉 ‘二’의 훈과 ‘助’의 훈

    은 초성자음이 동일하고 중성은 원순모음이고 ‘陽’의 훈은 ‘比’의 음과 유사

    점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초성은 동일하다. 그리고 ‘山’의 훈과 ‘)1 1’의 훈(

    ‘물’의 이전 형태를 선태할 경우-5) )도 초성이 동일하다. 이런 자료를 대할 경

  • 차자표기의 음운론 87

    우 이것이 당시의 언어 상황을 암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지명 개정의

    한 예에 불과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지명 개정의 원칙 혹은 혼기의 원리를 알아야 할 것인데 이것의 정리

    는 아직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나 관명의 혼기와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항은 이것

    이 음운 규칙의 지리적 확산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을 검토히는 일이다.

    ‘형山짧本高句麗烏斯含達縣(삼국사기, 35 : 4)’의 지명에서 ‘免’는 ‘烏斯含’에

    대응될 것이고, ‘山’은 ‘達’에 대응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15세기 형태 ‘돗기

    (두촉 21 : 38) ’와 비교하면 고구려 지역에 어두의 자음 약화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동일하게 ‘於斯內縣 一i쭈讓(삼국사기, 37 :

    4)’과 ‘돗귀(월석, 1 : 29) , 도치(두초, 25 : 2)’의 예에서도 어두의 자음 약화

    가 발생했음을 추론할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한반도에 전반적인 현

    상이 아니고、 특정한 지역에 한정하여 발생하였음을 짐작할 수 었다. 그리고

    ‘땐水縣本史꺼縣(삼국사기, 34 : 1이, 水城那本高句麗買忽那(삼국사기, 35:

    2), 을(월석, 1 : 11)’을 비교하면 ‘E ’ 탈락 규칙이 지역에 따라 적용 영역을

    달리 발생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음운규칙의 발생과 어휘적 확

    산 내지는 지리적 확산이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고유명사 혹은 관직명의 혼기와 관련하여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사항은 언

    어의 통시적 변화에 관련된 것이다. 이들도 언어 체계 특히 음운 체계의 변

    화와 더불어 그 발음이 변화해 가고 그래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지명과 입

    5) .淸川餘本훌買縣(삼국사기, 34 : 5)’에서 ‘川’이 ‘물’의 옛 음과 대응됩올 알 수 있다.

  • 88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ff7년 겨울)

    으로 전해지는 지명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이 혼기의 형태로 남아 있

    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烏표山縣本鳥也山縣 -~

    애道一줍鳥禮山(삼국사기. 34 : 6)’의 경우 제l음절 위치에 자음이 있는 것

    과 없는 것, 제2음절 위치에 역시 자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혼기를 보이

    고 있는데, 이 지명이 당시의 음운 현상을 반영하고 있고 그것은 일반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일탈하지 않는다면, ‘해道’가 가장 오래된 지명이고, ‘鳥也

    山縣’이 그 다음 단계의 지명이고 ‘烏표山縣’이 마지막 단계의 지명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첫 단계는 자음의 약화를 반영하

    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다음 단계는 과잉 교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

    에서 예로 들었던 ‘烏兒縣本百濟烏次縣(삼국사기 36 : 8)’도 지명의 통시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설명은 다른 자리로 미룬

    다. 요컨대 복수로 남아 있는 지명의 표기가 공시적 교체를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통시적 변화를 암시하는 것인가 혹은 통시적 변화의 다른 단계를 반

    영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a 에두자융군

    3. 1.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5세기 국어의 합용 병서에는 4가지 종류

    가 있었다ßl ‘〈’계 합용 병서, ·님’계 합용 병서, ‘$’계 합용 병서, ‘i’계 합

    6) 이 숫자는 훈민정음 해혜의 기술에 나오는 합용 병서의 종류의 수를 지칭하는 것

    이 아니라, 당시의 문헌에 실제 사용된 것올 기준으로 한 종류의 수를 지칭하는

    것이다.

  • 차자표기의 음운론 89

    용 병서 등이 그것이다. ‘λ’계 합용 병서에는 ‘FI , Æ, 뼈 , λL’ 등이 있었고,

    ‘님.계 합용 병서에는 ‘w., 훌,~,lIE’ 등이 있었고, ‘없’계 합용 병서에는 ‘뻐,

    w’ 등이 있었고, ‘i’계 합용 병서에는 ‘처’ 등이 있었다.

    이들 중 ‘〈’계를 제외한 합용 병서의 음7까 자음군이었을 것이라는 추정

    에는 이의가 없다. 반면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의 ‘λ’계 합용 병서의 음

    가에는 대체로 다음의 세 주장이 있다. 허웅(19.않)으로 대표될 수 있는 자음

    군설(허웅),7) 이기문(1댔)으로 대표될 수 있는 된소리설, 그리고 자음군이

    된소리로 변화해 가는 도중으로 자음군과 된소리의 음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박창원(1987) 의 주장 등이다.

    '1:l’계만을 자음군으로 인정하든, 합용 병서 전부를 자음군으로 인정하든,

    이러한 주장과 관계없이 왜 그러한 자음군만이 존재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

    기될 수 있고, 또한 어두 자음군의 생성 시기와 소멸 시기, 소멸 방향 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자음군의 생성 시기에 관해서는 ‘白米日漢홈훌 훌티田홈훌 등을 근거로

    하여, 12세기 초에는 자음군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논의되어 왔다(이기문,

    1972L , 자 .• 58). 자음군의 생성 시기, 자음군의 기원 특히 ‘

  • 90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w년 겨울)

    이 1음절 자음군의 표기인가 아니면 2음절의 표기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

    제를 검토하기 위해 언어의 차용 관계를 검토해 보는데, 영어의 ‘spring’이

    국어에 ~}용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pnng baby :철자 차용되는 언어 /sp때/ /뼈bν ·으n 으\!.

    [sP'쩌uJ or [sphriuJ [beibiJ : 음성실현 차용하는 언어/합p뻐띠/ or /sphriu/ 1:며pν : 음운인식(지각된 g 운)

    [하p파띠] [peibi]: 음성실현

    이 관계를 바탕으로 차용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 현상을 최적 이론

    (Op미빼ty πleory)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는데, 우선 차용어에서 발생하는

    제약의 범주를 나누어 보면 다음의 세 가지가 될 것이다.

    1. 구조 제약 : 음절구조 제약

    @ 한국어에서 초성과 종성에는 하나의 음소만이 올 수 있다. (자음군이

    불가하다)

    @ 하나의 음절은 반드시 하나의 모음을 가진다.

    @ 기타(본 논의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은 생략하기로 함)

    2 대응 제왜1)

    @ 극대화 제약 : 차용되는 언어의 음소는 차용하는 언어에 최대한 실현되

    어야 한다~ (차용하는 언어는 차용되는 언어의 일부분을 임의로 탈락시

    켜서는 안된다J

    @ 종속 제약 : 차용하는 언어에서 실현되는 음소는 차용되는 언어에 존재

  • 차자표기의 음운론 91

    하는 것이어야 한다". (차용하는 언어에서 임의로 삽입시켜서는 안 된

    다J

    a 대응 제왜앵) CD 공통음 대응 @ 무표음대응

    @유사음대응 @ 변이음 역 대응

    4. 실현 제약

    음성 ·음소 · 자질 연결 제약

    이러한 제약이 지켜져야 순서는 ‘구조 제약, 극대화 제약, 종속 제약, 대응

    제약, 실현 제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영어의

    ‘spnng’이 한국어에서 실현되는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예상출력형 구조제약 극대화제약 종속제약 실현제약

    . . • rIij. *1

    .S.p.rIij. *1 .SprIij. *1

    .SlpιrIij. * *1 CT .Sl.P1J1U. *

    12세기 고려의 언어가 ‘*얻술’로 존재했다면, 그것의 차자 표기는 (계림유

    8) 이것은 한 음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음성과 대응될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한다.

    본 논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간단하게 목록만 제시한다. 구체적인 내

    용은 박창원(1웠) 참고

  • 92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w년 겨울)

    사를 벌면) ‘홈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언어가 ‘*뿔’이었더라도

    중국인이 차자 표기할 때 역시 ‘홈훌’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으

    로설명할수 있다.

    r::r

    이러한 현상을 지배 음운론(Govemment Phonology)적으로는 고려어와

    중국어의 차이를 ‘적정 지배’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만약 당시의 고려어가 어

    두 자음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고려어의 두 음절은 중국어의 두 음절로

    대응되었을 것이다. 이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시해 볼 수 있다. 고려어의 다

    N : 음절혜 투사층위

    R: 마지막 R은승인된 빈 핵

    x

    O

    |l

    X ||

    E

    N

    R

    X

    음과같은발화는

    ~//~

    O

    ||

    X ||

    N ||

    R||

    X ||

    O||

    X ||

    어두 자음군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어에서도 똑같이 다음과 같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 차자표기의 음운론 93

    N : 음절핵 투사층위

    R: 마지막 R은 승인된 빈 핵

    x

    O||

    X l|C

    N

    l!

    R||

    X l|

    V

    N Ç=.//Ç=.

    R

    X

    V

    Ol|

    X ||C

    O

    X

    C : CV의 종류는 대응 제약(2)에 의해 결정됩.

    반면 당시의 고려어가 어두 자음군을 허용했다면, 어두 자음군인 고려어

    는, 다음 그림과 같이 제1음철 위치의 모음이 제2음절 위치의 모음에 의하여

    적정 지배를 받아 모음이 발화되지 않지만;(음절 구조는 논의에 오해를 초

    래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간단하게 제시한다J

    N : 음절핵 투사층위

    R : 마지막 R은 승인된 빈 핵

    x

    어두에 자음군올 허용하지 않는 중국어는, 제2음절 위치의 모음이 제1음절

    O

    ||

    X ||

    E

    N

    R

    Ç:::.lÇ:::.

    O

    ||

    X ||

    <

    위치의 모음을 적정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모음 삽입이 발생하게 된다.

    NllR||

    X

    0 | x |

  • 94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CJ1년 겨울)

    N : 음절핵 투사층위

    R: 마지막 R은 승인된 빈 핵

    x

    0||

    X ||

    C

    N

    R

    X

    V

    뿔 > 플’의

    변화를 겪었거나, “寶姐(얻톨) > 동 > 훌’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이 중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마지막의 가능성이다. 그 이유는 15세기 이전에

    ‘뿔 > 풀’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결해야 할 문

    제는 첫째 ‘寶姐(닝 톨) > 톨’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둘째 ‘톨 > 훌’의 변화를 어떻게 받이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전자는 자음군을 모르던 시기에 발생한 제1음절 위치의 모음 탈락은 어떤

  • 차자표기의 음운론 95

    결과를 야기할 것인가 하는 논의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 어두에 자음군을 모르던 시기에 제1음절

    위치의 모음 탈락은 제1음절 위치에 존재하던 자음까지 탈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두 자음군을 모르던 시기에 발생한 어두 자음군

    은 위에서 언급한 구조 제약을 위배하게 되기 때문에 자음을 탈락시키는 현

    상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어두 위치의 자생적 된소리화

    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어휘에 따라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면 해결될 수

    있을것이다.

    결론적으로 ‘女兒티寶姐’은 이 어휘의 어원과 변화 과정에 대해 많은 문제

    를 제기하지만 자음군이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언한다고 할 수 있

    3. 3. ‘ λ’계 자음군의 기원으로 ‘λ’이 존재했다는 것은 ·帶티體帶亦티調子

    帶, 女子勳쁨日寶帶, 男子日밍爛’과 이들의 15세기 형태인 ‘씌, 싸회’와 비교

    하여 알수 있다.

    이외에 ‘〈’계 합용병서의 기원에는 ‘z’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언하는 자료

    를 확보할 수 있는데, 그 예는 ‘쫓日質始’이다. 이것은 15세기의 ‘설’(두해, 8

    : 23 ; 훈몽, 하 : 4)에 해당한다. ‘質’의 초성은 ‘隆利切 혹은 之日切’로서 ‘설

    상 전청’ 혹은 ‘정치 조 三 계 전청’이다. 설상 전청음은 ‘c’을 반영하는 것이

    원칙이나 정치 전청음은 ‘z’으로 대응되는 것이 원칙이다. ‘質’의 음가를 추

    쩡하기 위해 계림유사에 사용된 ‘質’의 용례를 뽑아 보면, ‘席蘭日質薦, 累日

    質背’ 등인데, 이들은 각각·‘지흙 薦〈훈몽, 중 : 11), 흔디 〈능, 5 : 57;주딛 ~

  • 96 새국어생활 제7권 제4호(’CJl년 겨울)

    累〈훈몽, 중 : 30) 등으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P ’의 기원으로 ‘Ä'’을 설

    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맺는말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이전에 한자를 벌어 우리말을 표기하던 시철의 음운

    론은 당시의 표기가 음소를 인식하고 이것을 표기에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

    을 전제로 한 것이다. ‘소리’에 대한 인식 그 자체가 음소의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단어 문자인 한자를 음절 문자 내지는 음소 문자로 전환하

    여 사용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15세기 이전의 음운

    론은 이것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다.

    요즈음 고려 시대 구결 자료가 계속 발견됨으로써 이 시대의 연구가 활기

    를 떡고 있는 것은 국어 음운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하나로서 대

    단히 반가운 일이다. 이 방면에 대한 음운사 연구는 이송재(1994, 1뼈)에

    의해 시도되고, 주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본고에서 그 내

    용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이것은 오로지 지면의 제약 때문이다.

    시간의 제약과 지변의 제약 때문에 특히 능력의 한계로 본고에서 다루지

    못한 것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기면서 맺는다.

  • 삼국유사(일연)

    삼국사기(김부식)

    참고묻현

    支那史料救(소화 8년, 조선총독부)

    계립유사(손목)

    차자표기의 음운론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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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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