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9월 2주차 · 2016. 9. 11. · - 1 - 2016년 09월 2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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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16년 09월 2주차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국고전문화연구원입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뒤로하고 어느새 한가위가 다가왔습니다. 잠시 바빴던 일상을 잊고, 가을 햇살처럼 풍요롭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향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고 댁으로 돌아오실 때는 편안한 여정되시길 빕니다. 남은 올 한해 뜻 깊게 보내시길 바라며,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기쁨도 행복도 즐거움도 풍성한 명절 되십시오.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은 남은 한 해에도 여러분과 함께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가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격려와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분투하겠습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2016년 9월 11일 한국고전문화연구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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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09월 2주차

    회원�여러분�안녕하세요.�한국고전문화연구원입니다.

    유난히�더웠던�여름을�뒤로하고�어느새�한가위가�다가왔습니다.잠시�바빴던�일상을�잊고,�가을�햇살처럼�풍요롭고�여유로운�마음으로건강하고�행복한�명절�보내시길�바랍니다.

    고향에서는�가족들과�함께�즐거운�명절을�보내시고댁으로�돌아오실�때는�편안한�여정되시길�빕니다.

    남은�올�한해�뜻�깊게�보내시길�바라며,무엇보다�몸과�마음이�건강하고�행복해지시길�바랍니다.기쁨도�행복도�즐거움도�풍성한�명절�되십시오.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은�남은�한�해에도�여러분과�함께�더�나은�내일을�향해�가겠습니다.앞으로도�변함없는�관심과�애정으로�격려와�지지를�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끊임없이�분투하겠습니다.�즐거운�추석�보내세요.�감사합니다.

    2016년� 9월� 11일

    한국고전문화연구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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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원 소식

    ○ 연구원 호남인물·전북의병장 사료읽기 야간 강좌

    : 9월 7일(水)에는 ‘호남인물읽기’의 일환으로 『노사 기정진 연보』를, 08일(木)에는

    ‘전북의병사료읽기’의 일환으로 최제학의 『습재실기』를 교재로 하여, 김건우 이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의 강의가 연구원 201호 강의실에서 있었습

    니다.

    ※ 야간 강좌의 문은 항상 열려있으니 매주 수, 목 18시 30분까지 오시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부담은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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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 소식○ 이강안 감사 “전북일보” 기고

    광복회 전북지부장이자 연구원 감사인 이강안 회원께서 전북일보에 “왜 생일이 꼭 건

    국절 이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건국절 주장의 부당함’에 대해 글을 쓰셨습니다. 기고

    문을 통해 광복 71주년이자 경술국치일 106주년을 앞둔 시점에 역사를 송두리째 버리려

    는 음모에 빠졌다면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건국절로

    했을 경우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질문하셨습니다. 기고문 전문은 “연구원 홈페

    이지(알림마당 – 회원소식)” 또는 “전북일보 홈페이지(2016.9.2.일자 오피니언)” 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문명철 이사 “목재제품 발굴대회 대상 수상”

    - 한국임업진흥원이 주관하고 산림청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공동으로 개최한

    “2016 수출유망 목재제품 발굴대회” 에서 우리 연구원의 문명철 이사가 몸담고 있는 ‘㈜

    가온우드’가 최고상인 대상(산림청장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번 대회는 ‘세계를 사로잡을

    나무로 만든 우수 제품 찾기’라는 슬로건으로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국내 우수

    목재제품을 홍보하고 세계 시장 수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올해 처음 개최되었습니

    다. 대상을 수상하신 문명철 이사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회원 여러분께서

    도 축하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관련 기사는 “연구원 홈페이지(알림마당 – 회원소식)” 를

    통해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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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원 소식

    ○ 2016년 연구원 소모임 안내

    - 동아리명 : 인자요산(仁者樂山)

    - 활동목적 : 등산과 답사를 통한 회원 간 소통의 장을 만들고 연구원 사업에 적극참여

    - 구성인원 : 회장, 총무 각 1인 / 15명 이내

    - 세부계획 : 전북권 500m 미만 산과 인근 지역 답사 및 산행

    3월~12월까지 총 8회에 걸쳐 답사와 산행

    일 시 내 용 비 고

    10월 1일 망해사와 진봉산(해발 72m / 김제시 진봉면)

    10월 29일 섬진강과 옥출산(해발 276m / 순창군 풍산면)

    11월 19일 군산저수지와 청암산(해발 118m / 군산시 회현면)

    12월 17일 쑥고개와 천잠산(해발 159m / 전주시 삼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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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詩와의 만남

    뉴스레터에 분재되고 있는 당시(唐詩)는 유영봉 회원(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께서 2009년 범한서적을 통해 출판한 도서 “당나라 시인들을 만나다” 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일

    부를 발췌 게재하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시세계를 안내하기 위해 당나라 시인들의 삶을 평전형

    태로 소개하고 있는 이 도서는 시판중이니 서점을 통해 접하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작 품賦得古原草送別(부득고원초송별) 옛 언덕의 풀밭에서 송별하며 지은 시

    離離原上草(이리원상초) 무성하게 자란 언덕 위에 풀잎은 一歲一枯榮(일세일고영) 해마다 한번 시들고 한번 우거져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 들불도 다 태우지 못해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 봄바람 불면 또다시 돋아난다. 遠芳侵古道(원방침고도) 그윽한 향기는 옛 길에 스며들고 晴翠接荒城(청취접황성) 맑은 비취빛은 거친 성을 덮는데 又送王孫去(우송왕손거) 그대를 다시 보내고 나면 悽凄滿別情(처처만별정) 서글프게 가득한 이별의 정.

    ❚ 작자소개 -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唐)나라 때의 현실주의(現實主義) 시인이다. 그 시가의 주제와 형식은 매우 다양했고, 언어는 평이하며 통속적이었다. 시마(詩魔)와 시왕(詩王)으로 일컬어진다.

    ❚ 감 상- 시인의 나이 16세, 장안에 와서 과거를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시절 '고원초(古原草)라는 시제를 받고 지은 시라고 한다. 들풀을 소재로 하여 송별의 정을 읊었기 때문에 제목을 '

    草'라고도 한다. 황폐한 고원에 펼쳐진 들풀의 강한 생명력을 보고, 친구와 헤어져 섭섭한심정을 들풀에 비유하여 우정이 영원히 이어갈 것임을 노래했다. 들판의 풀은 가을에는

    말라죽고 봄에는 들불을 놓아 다 태워버리지만,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나는 강한 생명

    력이 있다. 작자는 다시 돋아난 풀이 멀리 허물어진 성곽까지 뻗는 왕성한 힘을 보고 ,먼

    길 떠나는 친구와의 우정도 들풀처럼 영원하다고 노래했다. 풍경묘사와 감정표현이 잘

    어우러져 있고 특히 3,4구는 풀의 왕성한 생명력을 표현한 명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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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원 러시아 역사탐방기

    러시아 역사탐방기 10회차

    답사 5일차(7월 2일) - 6일차(7월 3일)

    볼로차예프카 전투 추모 기념지를 뒤로하고 다시 하바로프스크 시내로 돌아 온 답사단

    은 향토박물관으로 향했다. 우리의 숙소였던 인뚜리스크 호텔 앞에 있는 향토박물관은 연

    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박물관으로 1894년에 만들어졌다. 자연, 민속, 고

    고학, 역사, 풍속, 자연에 관한 자료와 시베리아 메머드, 아무르 호랑이, 원주민 나나이족과

    우데게이족의 생활모습 등 고대 원주민의 생활 등 14만 4천여 종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

    다.

    답사단이 방문했던 날이 금요일 낮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시민들이 박

    물관과 근처 공원을 오가고 있었다. 구관과 신관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는 박

    물관은 자연, 생태와 역사를 각각의 주요 주제로 삼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는 거북이 석상이 있었는데 답사단이 우수리스크 시민공원에서 만났던 거

    북이 석상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이 석상이 발해의 유물인지 여진의 유물인지에 대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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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분하다고 하니 이에 대한 세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한 듯하다.

    박물관 1층에는 1975년에 발견된 맘모스가 박제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한편 이 박물관 역사관에는 러시아 혁명 전쟁이 끝난 후 1923년에 한인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를 기념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스탈린 시대에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다시 전시 공간이 확보되었으나 아쉽게도 십여 년 전부터 다시 전시물들이 창고에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우수리스크에서 1885년 2월 22일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김두서(金斗瑞)는 함경북도 경흥 사람으로 1869년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이주했다. 그 후 포시에트 근처인

    지신허에 잠깐 거주했다가 추풍(秋豊) 시넬리니코프로 이주했다. 김두서는 이 지역으로 이주한지 15년 만에 김 알렉산드라를 낳았다. 그녀는 5남매 중 3째였다. ‘알렉산드라 페

    트로브나’는 러시아 이름이며 조선 이름은 ‘애리’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여학교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 시절에 그

    녀는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민족의식도 고양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한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한인들이 우랄지역으로 가서 무기공장 또는 벌목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

    아는 각가지 이류를 들어 계약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임금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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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민회에서는 1914

    년 말 러시아어에 능통한 알렉산드라를 파견하

    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힘든 일이었음

    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남편

    이 있는 부인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는.

    그녀는 우랄로 가 조선인의 임금문제들을 해

    결하여 그 지역의 조선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고 그녀는

    예카체린부르크에서 볼셰비키가 되었다. 그리고

    당의 요청에 따라 극동지역의 공산주의화에 기

    여하기 위하여 극동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그녀는 1917년 10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

    비키당 전신) 극동지방 대표자대회에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크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곧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와 1917년 12월 25일에서 1918년 1월 2일까지 개최된 제3회

    극동지방소비에트 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아울러 1월 18일 극동지방

    노농병소비에트자치위원회(극동인민위원회)에서 하바로프스크시 책임서기 및 회계로 선출

    되었고, 그 후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장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18년 4월 그녀는 이동

    휘(李東輝)·김립(金立)·박애(朴愛)·오성묵(吳成黙)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단체 한인사회당을 창설했다. 한인들이 사회주의운동에 동참해야만 러시아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으며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을

    창설하게 된 배경에는 사실상 그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한편 1918년 9월 하바로프스크가 일본군과 백위파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1918년 하바

    로프스크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시에 있는 조선극장에는 홍범도의 초상화와 함께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그녀에 대한 연극, 시, 소설 등도 다수 간행될 정도로 그녀는 조선인 여성

    혁명가로서 재소한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현재도 하바로프스크 무라비예프 아무

    르스카야 22번지(구 마르크스 거리)에는 김 알렉산드라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

    은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이 일하였다. 그는

    볼셰비키당 시위원회 사무국원이며 하바로프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이기도 하였다.

    1918년 그는 영웅적으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혁명이 박제가 되어버린 시대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김 알렉산드라 관련 전시품들

    이 하루 빨리 빛을 보기를 바라며 박물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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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어 아무르 강변으로 향했다. 폭이 4Km에 달한다는 강물을 직접 보고 있자니 탄성

    이 절로 터졌다.

    금요일 오후 2시, 강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낚시와 일광욕을 즐기고 일부

    는 황토빛 강물에서 헤엄을 치기도 했다. 한국에서 휴가철이 아님에도 금요일 오후 2시

    에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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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르 강 전망대 근처에는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서 있었다. 러시아 극동

    지방 개척의 대표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무라요비프 아무르스키는 1847년부터 61년까지 러시아의 동(東)시베리아 총독이었다. 38세로 니콜라이 1세에게 기용되었는데 네벨스코이의 협력으로 아무르강 하구에 니콜라

    옙스크를 건설, 아무르강 탐험을 권하였였다. 크림 전쟁 때 영국, 프랑스군에게 공격당한

    캄차카 구원을 구실로 아무르 강 유역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혼란하던 청(淸)나라를 공략하여 아이훈 조약을 맺어 아무르 강 이북의 영유(領有)를 승인받았다. 결국 현제 러시아의 극동지방은 그의 역할이 없었으면 존재하기 어려운 영토였다고 볼 수 있다.

    그 공(功)으로 아무르스키 백작이 되었다고 한다. 2006년부터 러시아 5000루블(한화 약 9만원 상당) 정면에 그의 기념비가 새겨져 있다.

    동상 기단에는 라는 글

    귀가 새겨져 있다. 하바로프스크 중심가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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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대 근처에 무라비요프 동상이외에 특이한 동판이 있었다.

    2001년 8월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던 김정일이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

    운 동판이었다.

    동판이 서있는 아무르 강 전망대는 김 알렉산드라가 총탄에 쓰러져 숨을 놓은 후 시신을 던진 곳에 세워져 있다. 최후의 숨을 쉴 때 한반도 13개 도를 상징하는 13번 발자국을 뗀 뒤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는 김 알렉산드라가 아무르 강 어딘가에 지금도 있는 듯 했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두만강 철교를 건너 이곳 하바로프스크까지 열차로 달리는 그 먼 길을 올 체력이 있을 때 휴전선을 넘어 통일의 물꼬를 텄다면... 아마 지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를 관통하고 유럽까지 이어지는 명실상부한 유라시아 횡단열차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조명희, 최재형, 이동휘, 이범윤, 김성우, 안중근, 이상설, 김 알렉산드라... 답사 일정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가 쫓아다녔던 이들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섬이 되어버린 조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전망대를 내려와 아무르 강변을 따라 걷다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금요일 오후, 한가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유람선은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할 만큼 만원이었다. 기본 소득이 한국보다 낮을지 몰라도 러시아 사람들이 보여주는 즐기는 일상은 꼭 따라 배우고 싶은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공원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처음 보는 이와 스스럼없이 춤을 추는 모습이나 평일 오후 강변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가족끼리 손을 잡고 공원을 찾는 모습들 모두 다 배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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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람선을 내린 후 하바로프스크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는 러시아 사람뿐 아니라

    한국식품을 파는 고려인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듣고 방문한 중앙시장은 어수선하기 짝

    이 없는 상태였다. 6시 30분, 한국이라면 막 퇴근한 사람들이 시장을 찾을 시간이었는

    데... 이곳에서는 상인들이 영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녁 7시까지만 시장이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고 한다.

    부러웠다. 저녁이 있는 삶...

    문을 닫기 직전 보드카 몇병을 사서 쫓기듯 시장을 나섰다. 그리고 향한 곳은 중앙시

    장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레닌 광장이었다. 소비에트연합 최초의 국가 원수였던 블라디

    미르 레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레닌광장은 하바로프스크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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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 광장은 주 청사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은행과 공무원대학, 의과대학, 병원 등 공

    공건물들로 빙 둘러싸여 있다.

    광장에서는 늘 행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시민들은 연중 광장에 나와 편안한 시간

    을 보낸다고 한다. 실제로 중앙시장에서 만났던 철수하던 상인 가족을 얼마 뒤 광장에서

    만났는데 그들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한가로이 비둘기 모이를 주고 있었다.

    광장 분수대 한 쪽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봤다.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 나와 놀고 있는

    사람들, 데이트하는 연인들, 친구들과 함께 나와 춤을 추는 젊은이들...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삶의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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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에서 5분 가량 떨어진 곳에 김유청 거리가 있었다.

    김유천(김유경)은 1900년 연해주 수분하 구역 차삐고우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7년 볼

    셰비키혁명이 일어나 백군과 적군 간의 치열한 내전이 발생되자 1921년 적군에 가담했

    다. 조선인으로서 소련군 76여단에 소속되어 1929년 중국 동북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중동철도를 점령한 중동철도 사건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전사한 인물이다. 군 생활 중 김유

    천은 러시아인 지휘관 꼰스탄진 자빠린과 친해졌다. 두 사람은 공산당원이었고, 소대를

    지휘했다. 1929년 10월 2일 자빠린은 자기 소대를 이끌고 적의 요새를 공격하다가 전사

    했다. 이에 김유천은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도 심하게 부상당하

    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김유천과 자빠린의 무덤에는 기념비가 세워지고 붉은 별로

    장식되었다. 1930년 근로자대회 하바로프스크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도시의 한 거리

    는 김유천 거리로, 또 다른 거리는 꼰스탄진 자빠린 거리로 명명했다. 울리짜 김 유체나

    거리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하바로프스크 마르크스 거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김유천은

    女軍이었다.

    김유천 거리를 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하바로프스크 영웅광장으로 향했다.

    이 지역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산화한 3만7000여명의 이름이 돌판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숱한 이름 속에서 ‘김’ ‘리’ ‘박’

    같은 고려인들의 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광장 뒤편 언덕 위에는 높다란 영웅탑이 세워져 있다. 거기서 100m쯤 떨어진 곳에는

    러시아에서 3번째로 큰 정교회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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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시절 모두 문을 닫았던 교회들이 체제가 바뀐 이후 예전의 위치에 하나 둘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금빛 첨탑이 석양을 반사하며 영웅 광장 한켠에 있는 죽은 이들

    의 이름표를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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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르 강변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5박 6일의 여정을 돌아보며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인천에서 불과 2시간이면 날아올 수 있는 연해주.

    150여년 전 한반도에서 살기 위해 강을 건너 국경을 넘었던 이들이 뿌렸던 씨앗이 없

    었다면 지금의 모습을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치열하게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던 곳.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생기기 전

    대한 광복군 정부가 생겨 해외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소비에트와 공동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하였던 곳.

    그러나 이 땅은 이들을 1937년 강제 이주시켰고 반세기가 지나자 다시 이곳으로 돌아

    갈 것을 강제하였다.

    그 신산스런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해주 곳곳에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발 딛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애써 지우려했던 그들을 찾아 나선 2016년 답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올 해 답사의 종착지였던 하바로프스크를 시작으로 다시 시작될 2017년 답사

    를 약속한다.

    그동안 러시아 역사탐방 연재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회원들과 함께 하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