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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신춘편지 쇼 - 그 열흘이 소풍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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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신춘편지 쇼- 그 열흘이 소풍이었네 외

발행일 발행인 등록번호진행 프로듀서 방송 인터넷 주소방송중 열린전화 문의 주소편집·제작 월간지

.

2013년 5월호

전국 주파수 안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마산 •춘천•청주 •제주 •울산 •강릉 •진주 •목포 •여수 •안동•원주 •충주 •삼척 •포항 •울진 •울릉도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의 연애시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행복한 책 읽기

신춘편지 쇼 개요 및 수상자

신춘편지 쇼 심사평

신춘편지 쇼 수상작대상

금상

은상

동상

꽃 피고 새가 노래하는 계절, 잎은 날로 푸르러지고 사람들 얼굴에도 활기

가 넘치는 이 봄을 더 아름답게 하는 행사로 〈여성시대〉에는 ‘신춘편지 쇼’

가 있습니다.

신춘편지 쇼는 1979년부터 매년 봄에 진행되어 온 〈여성시대〉의 전통 깊은

행사입니다. 주어진 글제에 따라 사연을 보내면 유명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수상작을 결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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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글제는 ‘소풍’입니다.

어린 시절의 소풍 추억이나 특별했던 소풍, 앞으로 가고 싶은 소풍, 갈 수 없

었던 소풍, 혹은 소풍으로 상징될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사건까지 ‘소풍’에

대한 나만의 사연을 적어 주신 작품이 2천 통이나 도착했습니다. 소중한 작

품을 보내주신 전국의 〈여성시대〉 가족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귀한 작품을 놓고 소설가 성석제, 동화작가 황선미, 시인 함민복 씨가 심

사하셨고 대상, 금상, 은상, 동상을 가렸습니다. 수상작은 4월 29일 월요일부

터 5월 3일 금요일까지, 여성시대 3, 4부 시간에 방송되었고, 시상식은 5월 6

일 월요일에 MBC 본사에서 있었습니다.

글을 씀으로써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의 삶을 담

은 편지를 들으면서 위로와 감동을 나눈 ‘2013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는 오래

간직하고픈 특별한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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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 수상자

대상(상금 500만 원과 상패 및 부상)

_김경애

금상(상금 300만 원과 상패 및 부상) _황왕용

_김난영

은상(상금 200만 원과 상패 및 부상)

_신기자 _임현준

_장창훈

동상(상금 100만 원과 상패 및 부상)

_김수정 _김충근 _서명순 _송후남

_정연순

*2013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는 올리비아 로렌이 만든 아웃도어 브랜드, 비비올리비아와 함께 했습니다.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는 어떤 글제를 내걸든 주제는 ‘인생’이 될

것이다. 본선에 오른 50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명문장, 미사여

구보다 인생과 인간사, 우리 삶의 세부가 가지고 있는 절실함의 힘,

호소력이 강력하다는 것을 느꼈다.

편지는 대체로 지금, 여기의 일보다는 지나온 세월 동안 겪은 일

들에 대해 쓴 것이 많았다.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부끄러움이 더 오

래도록 우리의 마음에 남고 우리에게 남은 다른 시간을 공명하게

하는 것 같다. 특히 가난과 결손, 결핍이 그에 저항할 수 없는 어린

영혼들에게 가하는 폭력에 한숨이 나왔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현

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

이 눈물겨웠고 아름다운 추억과 가벼운 일탈, 학창시절의 악의 없

는 장난과 사건이 때때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지나간 시절, 여성과 딸에 대해 남자와 아버지들이 가지고 있던

무지와 차별로 고통을 겪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리를 얻기

위해 고투한 분들에게 경의를 느낀다. 장애를 극복하고 편견을 뿌

리치며 하루하루 자기 나름의 의미 있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분

들 또한 존경스럽다.

우리 삶의 세부가 가지고 있는 절실함의 힘 용기를 내어 풀어낸 이야기

본심 작품 모두가 가슴을 울리는 사연들이라 점수를 매기는 일

이 어렵고 송구스러웠습니다. 어떤 이의 지난한 삶을 감히 누가 어

떤 기준으로 우위를 정할지. 넉넉지 못한 시절 대가족 형태의 관계

속에서 살고, 상처받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들이 통틀어 이 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의 삶 혹은 우리 자

화상인지라 그저 글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삶이 있었

기에 지금 여기 우리가 가능했음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내내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소풍’이란 글제가 담아낼 이야기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응모작 대

부분이 회한에 집중된 것은 응모한 분들의 연령대와 상당히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중장년 층의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루다 보니 비슷비

슷한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게 놀랍고도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이는

심사에 참여한 사람의 감상일 뿐 ‘신춘편지 쇼’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참고 견디며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짊어지고 오늘 여기까지 온 모든 분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볼 기회를 열어주는 일. 그것이 서툴면 어떻고, 부족

한 게 어디 흠 잡을 일일까요. 용기를 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은 모든 분들이 아름다웠다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

교하여 순위를 매기는 일이 그래서 더 어려웠음을 고백합니다.

소설가 동화작가

심사평

수화기 너머로 숨이 차서 ‘휴우’ 하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번엔 꼭, 너를 따라나서야겠다. 딸내미 집에도 못 가보고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안 되겠다. 애미야, 네가 귀찮아도 나 좀

데리고 부산에 가라!”

서울에서 자란 내가 경상도 남편을 만나 부산에 터를 잡은 지

26년이 됐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댁을 바쁘게 오가며 살다 보니

친정에는 명절 때도 못 가고 일 년에 한 번 엄마 생신 때나 하룻밤

잠시 묵고 가는 참 무심한 딸이었다.

그러던 2년 전, 고3 아들을 뒷바라지하던 내가 자도자도 피곤한

게 이상했다. 그래서 아들의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건강검진을 했

고, 결과를 보는 날이었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김경애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4동

수상작

편지들을 읽으며, ‘사람 꽃’이란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각자 한

송이 꽃으로도 피어나고, 가족이나 이웃과 어우러지며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의 꽃잎으로도 피어났다. ‘사람 꽃’의 향기는 비릿하고 슬프

고 아름다웠다. 편지글로 그려지는 ‘사람 꽃’은 날 것이고 야생이라

더 진하게 마음에 다가왔다. ‘소풍’이라는 소재 하나가 봄꽃처럼 폭발

하며 서정의 분수를 뿜어주었다. 그 아래서 과분하게도 촉촉이 젖을

수 있게 감동을 선사해준 사연들에게 먼저 마음 낮춰 감사드린다.

동참할 수 없어 받았던, 참가해서도 음식과 복장차림의 초라함

때문에 받았던, 상처의 소풍. 새어머니, 장애우, 아버지 등과 화해의

장으로서의 소풍. 선생님의 입장에서 본 소풍. 이미 생애를 마감한

사람을 기리는 추억과 감사의 연결 통로로서의 소풍. 하루하루 살기

도 힘들어 엄두도 못 내보다 간신히 떠나보는 소풍.

소풍의 풍경이 다양한 만큼 그 느낌도 다르다. 구체적으로 그려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작품과 소풍의 의미를 통해 인생의 깊

이를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을 우선하였다.

사실은 감동적인 작품이 너무 많아 몇 번 우선순위를 바꿨음을

밝힌다.

심사평 대상

‘사람 꽃’의 향기

시인

간호사의 표정 없는 부름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모니터를 뚫어져

라 보고 있던 의사 선생님께 내가 뭐라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리

고 이어진 답변에 너무 놀라, 한동안 내 귀는 텔레비전 리모컨의 ‘음

소거’를 누른 양 들을 수도 없었고 선생님은 그저 입만 벙긋 벙긋하

셨다. 그렇게 유방암 판정을 받았고, 엄마가 계신 서울에서 2011년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하러 서울을 오게

됐고, 이제 막 내려가려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온 것이다.

내년이 팔순이신 엄마는 8년 전 내가 부산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했을 때 부실한 딸을 근 한 달간 몸조리시키고 올라가신 뒤로 몸이

계속 안 좋으셨다. 그것은 당신 나이 쉰둘에 내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근 십여 년간 하셨던 직업병이 도져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엄마는 지금도 부끄러워하시며 사위들한테 속이고 있지만,

그 일을 하신 덕분에 우리는 살 수 있었다.

결혼 전 엄마가 일하는 곳을 퇴근 후 들른 적이 있었다. 지하인

그곳은 큼큼한 물곰팡이 냄새가 입구부터 확 풍겨왔다. 시간이 늦

어서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탈의실 구석 한쪽에서 얼굴이

퉁퉁 불어 울퉁불퉁한 엄마만 보였다. 엄마는 내가 처음 보는 검

은색 속옷만 걸치고 허옇게 불은 손으로 숟가락을 바삐 움직여 뭔

가를 드시고 계셨다. 저녁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 가까이 가서 보

니, 물에 말은 찬밥 한 덩이와 시어터진 김치 몇 조각이 다 찌그러

진 냄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렇게나마 요기를 하시다 나를 보고 환히 웃으시며, “엄마, 돈

많이 벌었다. 이봐라, 오늘은 한술 뜰 시간도 없이 마사지 손님이 얼

마나 밀리는지…” 하시며 자랑스레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통을 꺼내

셨다. 거기에는 엄마에게 때를 밀은 손님들이 주고 간 꼬깃꼬깃한

지폐들이 축축한 물기를 간직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돌돌 말린 돈을 반만 남은 작은 검지로 하나하나 눌러가며 피셨다.

그랬다. 엄마의 왼손 검지는 6.25 때 다치셔서 반만 남았다. 마치

그 사실을 그때 알기라도 한 듯 그저 엄마의 검지 손에 안타까운

눈길만 보낼 뿐이었다. 목욕탕 습기에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쳐다

보며 겸연쩍게 웃으시던 엄마의 모습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렇게 끼니도 거른 채 습한 목욕탕에서 몸을 혹사하더니, 엄

마는 그 사이 크고 작은 수술도 여러 번 하셨다. 그러다 보니 부산

딸네 집을 한동안 올 수가 없었고, 하필 재작년 내가 암 수술까지

하다 보니 더더욱 우리 집에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

도 건강을 회복한 내가, 당신 말을 빌리자면 사람 구실을 하니 죽

기 전에 우리 집에 다녀가시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아직은 쌀쌀한 봄날에 엄마를 모시고 내려왔다. 부산역

에 마중 나온 남편을 보자마자 엄마는 “자네가 바다 꽃 구경시켜

준다기에 내 이렇게 왔네” 하셨다. 나는 남편 얼굴을 쳐다봤고, 알

고 보니 남편이 며칠 전 엄마한테 전화해서 이번엔 꼭 나를 따라

내려오시라 했단다.

그렇게 도착한 아파트 입구에 마침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아

래서 남편이 우리 둘 사진을 찍으려 했다. 엄마는 “쪼그라진 늙은

이 얼굴 찍으면 뭐하나?” 하면서도 옷깃을 단정히 하셨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부터 엄마와 하고 싶은 일을 생

각해냈다. 첫째, 엄마랑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극장 가기.

둘째, 엄마랑 찜질방에 가서 수건으로 양 머리하고 맥반석 계란 먹

기. 셋째, 엄마랑 백화점 쇼핑 가기 등등…. 그리고 엄마랑 목욕탕

도 같이 갈 거다.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가면, 수술로 찌그러진 내

오른쪽 가슴을 처음으로 떳떳이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언제나 나의 든든한 백이었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잠을 설친 다음 날, 감기 때문인지 아니면

두 달 전 요실금 수술 때문인지, 엄마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

다. 겨우 아침 한술을 뜨신 엄마가 가방에서 약을 꺼냈는데, 그 많

은 약을 보고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한 움큼의 약을 삼키

신 엄마는 부산의 바닷바람이 차다면서 집에만 계셨고, 다음날 나

는 걱정이 되어 동네병원에 엄마를 모시고 갔다. 그날 병원에서 돌

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유심히 보던 엄마

가 “애미야! 나한테도 그거 알려주라. 내가 감기 나으면 살살 혼자

산책하러 나갔다가 누르고 들어오게.”

“그래, 엄마! 이거 # 누르고 5252 누르면 돼. 엄마 이거 할 수 있겠어?”

엄마랑 비밀번호를 몇 번씩 눌러보고 있는데, 11층에 사는 혁이

엄마가 입구에 들어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한마디 했다.

“우리 엄마도 예전에 알려 드렸는데, 그걸 못 눌러 갖고 문 앞에

서 한참을 기다리다 다른 사람이 오면 그때 따라 들어오곤 했는

데…, 이젠 영영 우리 집에 못 온다 아입니꺼, 2년 전에 돌아가셔

서….” 뒤에 이어진 혁이엄마 얘긴 안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싸 해지는 그 자리를 엄마와 나는 어색한

눈웃음으로 때웠다.

그날 저녁, 남편이 “여보! 퍼뜩 와 봐라!” 하길래 달려갔더니, 어

제 엄마랑 찍은 휴대전화 사진을 보여주며 “당신과 장모님이 우째

이리 똑같노?” 한다. 웃으면 골이 길게 생기는 주름에, 약간 구부

정한 모습까지, 모녀는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열흘을 계시다 처방된 약이 다 떨어졌다면서 서울

로 올라가시려 했다. 열흘 동안 엄마와 내가 한 일이라곤, 집 앞 공

원에서 햇볕을 같이 쬐고,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그저 함께

웃고 운 것뿐이었다. 극장, 찜질방, 그리고 목욕탕은 결국 엄마랑

가보지 못했다.

겨우 지난 일요일, 한정식집에 모시고 가 난생처음 생선을 발라 엄마

의 수저에 올려 드렸다. 엄마가 예전에 나한테 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전날 밤, 남편이 엄마의 신발을 사왔다.

수상작

금상

저는 교편을 잡고 있는 서른 살의 교사입니다. 저는 스물다

섯 되는 해부터 학생들과 함께했습니다. 교사로서 생활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과 수많은 추억이 스쳐 갑니다. 수업, 체

육대회, 수학여행, 시낭송, 음악회, 토론회, 소풍 등 정말 많은 경험

을 함께하고 추억을 쌓았네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첫

학교에서 아이들과 4박 5일간 ‘소록도’에 봉사활동을 갔던 일입니다.

2008년 5월, 학교 교육과정에 의해 운영되던 소록도 봉사활동은

기존에 정해진 담당선생님께서 4박 5일간 가정을 비우기 어려운 젊

은 여자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규교사의 패기와 소록도

에 대한 호기심으로 담당선생님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인솔하겠다

고 했습니다. 그렇게 험난하지만, 가슴 뭉클했던 4박 5일을 술회해

봅니다.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의 도양읍 남쪽에 있는 섬입니다. 소

황왕용 | 전라남도 순천시 조례동

“장모님! 신발이 낡아 보여서…” 하며 엄마에게 신발을 신겨 드리

니, 엄마의 퉁퉁 부은 얼굴에 함박꽃이 폈다.

다음날 기차 시간이 점심때라, 부랴부랴 냉장고를 뒤졌다. 김 위

에 잔 멸치를 으깨어 넣은 밥을 깔고 김치를 쭉쭉 찢어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것과 계란, 취나물을 얹어 엉성한 김밥 몇 줄을 쌌

다. 이제 제법 감기가 나으신 엄마는 새 신을 신고 내가 난생처음

엄마를 위해 싼 소박한 도시락을 들고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기차

가 떠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엄마한테 더 잘 해드리지 못해서 안

타깝고, 또 엄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언제 다시 오실 수 있을까 하

는 생각과 나 또한 투병해오며 참고 참았던 서러움까지 한꺼번에

북받쳐 한참을 기차역에서 흐느꼈다.

집에 와서 현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엄마의 낡은 신발을 보고 또

눈물바람을 했고, 으스스한 몸살기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서울역에 마중 나온 동생이 전화해 엄마를 바꿔줬다.

“애미야! 네가 싼 김밥을 옆자리 총각과 맛나게 먹었다. 이 서방

덕분에 새 신도 신고…. 내가 꼭 소풍 댕겨 온 것 같더라. 내 딸, 이

제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많이 기도할 테니, 지금처럼 씩씩

하게 잘 있어라.” 그렇게 엄마는 전화를 끊으셨다.

생각해보니 나 또한 엄마와 지낸 이 열흘이 어릴 적 설렘 가득했

던 그 소풍은 아니었을까? 가기 전날부터 너무 좋아 잠까지 설치게

했던 그 소풍 말이다. 그냥 ‘엄마’를 부를 수 있어서, 이 나이에 ‘엄

마’라는 단어를 아직도 부를 수 있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며 언제까

지 나는 그 단어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다음 소풍을 기다

리며 엄마 말대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고 있다.

록도에는 한센인을 위한 마을과 병원,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둥병’, ‘나병’으로 알고 있는 한

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600명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올리는 ‘소록도’는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는 섬 정도였

습니다.

“소록도, 경치 좋지. 바람도 청량하고 소록도 공원에 있는 나무

들은 정말 값비싸 보이지.”

“그 나무가 10억 나무라며?”

소록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면서 관광객들이 하는 말을 듣

게 되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소록도에 가면 재미있겠구나. 학교 다

니느라 힘들었는데 푹 쉬다 와야지’ 하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배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소록도에 도착했고, 봉

사활동 계장님께서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자원봉사회관이라는

곳에 짐을 풀고,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의사선생님께서 봉사활동

에 대해 사전 교육을 하셨습니다.

“먼저, 소록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식사는 병원 밥을 드실

것이고, 밥 한 톨도 남기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4박 5일간 자원봉

사를 하면서 규정을 준수하시고~.”

아이들도 저도 아침부터 먼 길을 오느라 지쳐서인지 집중해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30분이 흐를 즈음,

우리는 의사선생님의 한마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하실 봉사활동은 단순히 봉사활동 확인서에 도장을

받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봉사입니다. 참된 봉사를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운다는 식의 생각을 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나가주십시오.

몇 달 전, 자원봉사자가 휠체어를 끌며 산책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휠체어에서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상처가 여기 계신 환자분께는 치명

적인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재미없는 봉사활동 교

육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도교사로서 아이들의 집중을 도와주기는커녕 함께 해이해

진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독려할 필요까지는 없었

습니다. 그 의사선생님의 한마디가 모든 아이의 잠을 깨웠으니까요.

“식사를 드릴 때에는 절대 숟가락을 함께 쓰지 마십시오. 어떤

자원봉사자는 뜨거운 음식을 식혀 준다며 밥을 입속에 넣었다가

주는 일이 있었는데 그러시면 안 됩니다.”

등등 당부 사항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게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소록도는 우리보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기에 점심

도 빠르고, 저녁도 빨랐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절대로 약속하지 마세요. 할머니, 할아

버지와 정이 드는 것은 좋지만, 여름방학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이 어르신들은 순진하신 분들이라 기다리십니

다. 왜 안 올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까지 하시니까 다시 오고

싶어도 말없이 다시 오십시오. 즐겁고 보람찬 한 주가 되십시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1시간 교육이었지만,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

져 나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학교에서 병동과 마을로 나뉘어 조 편성을 한대로

장기자원봉사자들을 따라나섰습니다. 떠밀려 온 아이들 표정은 약

간 지루한 표정이었고, 어떤 아이들은 많이 설레 보였습니다. 저는

사실 무척 긴장됐습니다. 교육시간에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코가 없는 분도 있고, 손가락이 없는 분, 토안을 하신 분, 하반신이

없는 분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비위가 약해서 똥

냄새도 잘 맡지 못하고, 남들이 토하면 저도 토했습니다. 그런 제가

병동에 가서 기저귀를 갈고, 밥을 드리면 절반을 흘리는 분들의 식

사 수발을 한다고 생각하니 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후에 마을에 따라갔습니다. 마을은 병동보다 상

태가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을

에 가보니 생김새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많이 없었습니다. 손가락도

없고, 코도 없고, 이도 없고, 팔도 없고,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하

지만 아이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습니다.

마을마다 마을 사무실 같은 것이 있어서 거기서 임무를 받아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첫 번째 임무는 각 집을 대청소하는 것이었

습니다.

뭐, 청소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첫 번째 방에 들어섰는데 들어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코를 자극하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먼저 환

기부터 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혼자 앉으

셔서 연신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하시면서 “내가 할 테니 그냥 쉬었

다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수라는 학생은 그럴 수 없다며

기어코 청소를 한다고 했습니다. “할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저희가

깨끗하게 해드리고 갈게요.” 방에 불쾌한 냄새를 맡고 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저는 그 아이에게 부끄러운 교사가 될 뻔했습니다.

구석구석 청소를 깨끗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냄새가 났습니다.

“선생님, 여기 밑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냉장고 밑이었습니다. 냉장고를 옮겨서 바닥을 청소하기로 했습

니다. 옆방을 청소하던 남자아이 한 명을 더 불러 냉장고를 옮겨보

니 냉장고 밑에 쥐의 시체가 두 마리나 있었습니다. 끈끈이가 냉장

고 밑에 놓여 있어서 그걸 밟은 쥐가 죽어있던 것이었습니다. 어른

팔뚝만 한 쥐는 제가 세상에서 태어나 본 쥐 중에 가장 큰 쥐였습

니다. 평상시 비위도 약하고 겁도 많았지만 눈 딱 감고 끈끈이 끝

을 잡고 돌돌 말아 가져간 쓰레기봉투에 넣었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우리에게 요구르트를 내주셨습니다. 그

렇게 몸도 피곤하고, 의사선생님께서 외로우신 분 말동무가 되어주

는 것도 봉사활동이라는 말씀을 핑계 삼아 할머니 방에 털썩 주저

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 어디서 온 학생들인가요?”

우리 아이들은 수업시간엔 볼 수 없었던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

성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광양에서 왔어요. 광양이요~.”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를 위해 두 번씩 말하는 센스도 있었습니다.

“공부하니까 좋지?”

“아니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공부 별로 재미없어요.”

“나는 어려서 이 병에 걸렸어. 부잣집에서 자라 국민학교를 다니

고 있었는데, 병에 걸리니까 마을 사람들이 알고 마을에서 쫓아냈

지. 학교에선 친구들이 돌팔매질했고, 선생님은 말리지 않으셨어.

정말 배우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5시가 되었고, 우리는 저녁

을 먹으러 가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밥도 주지 않고, 매점도

4시가 넘으면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과를 정리하기 위해 소강당에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병동으로 나갔던 아이들은 병동 아이들대로, 마을로

나갔던 아이들은 마을 아이들대로 허풍을 섞어 자랑을 늘어놓았

습니다.

“너, 똥 기저귀 갈아봤어?”

“야, 우리는 치매병동 갔었는데 장난이 아니야.”

“너, 내 팔뚝만 한 쥐 본 적 있냐?”

“우리는 봉사도 얼마 안 했는데 먹을 것 많이 주셨다. 하하하.”

저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너희가 늘어놓는 수다를 기록했

으면 좋겠다. 선생님도 여기 와서 뭔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

고 있어서 가슴이 벅차. 지금부터 나눠주는 종이에 오늘 기억하고

싶었던 일을 기록해보자” 하고 말했습니다.

물론 모든 아이가 내 맘과 같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

이 지나가면서 내 맘과 같은 아이들이 더 많이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병실에 가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휠체어를 끌고 산책도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할머니께서 시장에 가서 과일도 사고, 신발을 사

고 싶다고 했습니다. 소록도에서는 웬만한 물건들은 다 보급으로

나오기 때문에 굳이 밖에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명태, 쥐포, 과

자, 두부, 고기, 채소, 모기약 등 모든 것이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왔

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신발을 사러 나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신발이 보급품으로 나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예쁜 구두를

신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반 상식으로는 신발을 사고 싶으면 녹동 읍내에 나갔다 오면

될 것 같은데 어릴 적 사람들에게 얻었던 마음의 상처가 아직 아물

지 못했나 봅니다.

“나는 아픈데, 사람들은 나를 향해 더러운 년이라고 했지. 아픈

것도 서러운데 정 붙일 곳이 없어졌어. 그때 사람들에게 맞으면서

쫓길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주셨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지. 아

직도 그 까만 구두는 잊히지가 않아.”

사실 이분들은 세상으로 나가면 아직도 이상한 시선을 받습니

다. 그래서 혼자 다니시는 게 무서운 분들입니다. 저는 학생 한 명

과 동행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읍내에 다녀오겠다고, 정확히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락을 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허락해주

셨고, 우리는 다음날 배를 타고 읍내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치 소풍을 나온 어린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을 하셨

습니다. 햇살에 반사되는 바다 빛이 할머니 얼굴에 닿을 때 눈부

시게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창수와 저는 봉사활동 조끼를 벗어서 가방에 넣고, 지팡이를 짚

으신 할머니를 부축하며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선착장에서

내려 100미터 정도 떨어진 시장 입구로 향했습니다. 할머니는 창

수와 저를 바라보면서 흐뭇해하셨지요.

“오랜만에 나오는 소풍이야. 소풍 나왔는데 맛있는 거 사줄게.

붕어빵 먹고 가.”

할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운 것처럼 보였습니

다. 할머니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붕어빵을 얻어먹기

로 했지요. 붕어빵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신

발 가게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단아하고 깔끔한 검은색 구두를

고르시더니 그걸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삼만 원

을 받아 신발 가게 주인아주머니께 돈을 건네고 오천 원을 거슬

러 받았습니다. 다행히 신발 가게 주인아주머니께서는 싫은 내색

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생각이 참 이상하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신발을 사러 온 고객을 주인아주머니가 싫어할까봐 걱정 하다니.’

저는 잠깐 할머니와 같이 나온 소풍에도 이렇게 걱정이 많은데,

할머니는 평생을 얼마나 고단하게 사셨을까요? 갑자기 이런 생각

이 들었고, 할머니의 삶이 애달프게 느껴졌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그들

의 삶은 왜 그토록 이 세상에서 모질게 구박 당했을까요?

할머니는 신발을 신고서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아무래도 잃어버

렸던 신발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꼭 신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신발을 신고서 잃어버린 청춘과 인생을 회상하

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손가락이 남들보다 부족하고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운 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 손가락 사이로 눈물

이 떨어졌습니다. 조용히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손을 잡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제자는 그 모습을 보더니 뒤쫓아 할머니의 반

대편 손을 잡았지요.

그렇게 할머니와 저, 제자는 할머니의 지팡이를 잠시 치우고 걸

었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며 갈매기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할머니

는 바닷가보다는 이 시장을 걷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왠지 바다

는 창살 없는 감옥의 튼튼한 벽과 같다고 하면서 싫다고 하셨습니

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을 소록도에 갇혀 살면서 바다를 얼마

나 원망했을까요?

걷다 보니 과일 가게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참외와 수박을 사

수상작

금상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3이 된 아들과 아버지의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당신의 짜증으로 얼룩진 삶이, 당신의 신경질로 범벅된

삶이, 당신의 그 완전했던 배돌이 삶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고.

폐암 선고를 받기 전날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으셨던 내 아버지는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이라는 의사선생님의 시한부 판정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2년을 더 버티다 82세의 짧지 않은 고단한 삶의

끈을 놓으셨다. 병원의 어떤 화학적 치료도 마다하셨던 아버지의

그것은 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단 한번도 내게 그리움으로 다가오지 않는 아버지를 나는 지금

기억하려 한다. 아내가 있었고 버젓한 4남매를 두고 있었지만, 그

는 절대 그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으셨고, 늘 저만치 서 계셨고, 우

리에게 다가올 때에는 다만 화를 내기 위함이었다고. 자상하고 인

김난영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와동리

셨지요.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좋은 일 한다며 저희에게 오렌지를

챙겨주셨어요. 평상시에도 공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하며 자랑스러운 오렌지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배를 타

고 소록도로 향했습니다.

배를 타고 시내에 나가서 장을 보았습니다. 남들에게는 일상의

당연한 생활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늦봄의 소풍 같은 날이었다

고 하십니다.

“사실, 어제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 꿈만 같

구먼. 몸이 불편해서 누가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못 나가는데 학생

들 덕분에 잘 다녀왔어. 정말 고마워.”

할머니는 눈도 밝지 않아서 저를 학생으로 보셨습니다. 그런 할

머니에게 눈과 귀가 되어드린 그날이 저와 제자는 어린 시절 설레

던 소풍을 가던 그런 날처럼 흔연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날의 추억을 가슴에 아로새긴 채 다음 해, 다음다음 해

에도 제가 소록도 봉사활동 인솔을 자청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이 세상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시는 날 지켜드리지는 못했지만, 소풍

가서 샀던 구두를 신고 가셨겠지요? 저세상에서는 차별 없이 행복

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자한, 푸근하고 듬직한, 그런 아버지의 느낌이란 내게 있을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항상 이

마를 찡그린 채, 왜소한 체구에 비해 장비도 울고 갈 정도의 쩌렁

쩌렁한 목소리뿐이었다. 그 목소리에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은 밤을

깨어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빌고 또 빌었는지.

아버지 때문에 사춘기 어느 때는 차라리 고아여도 좋을 것 같다

는 생각도 했었다. 밥상이 엎어져 김칫국물이 벽이나 장롱 문짝으로

튀고 밥그릇이 엄마의 이마를 때릴 때는 나는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멀리 도망이라도 갈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엄마는 도망가지

않았고 “제발 애들 앞에서만은…”이라고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거

렸다. 나는 그런 엄마가 애처롭기도 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했다.

엄마는 절대 아버지에게 덤비는 법이 없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불명예제대를 했지만,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우리가 듣기에도 민망

한 욕까지 서슴없이 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

다. 그래서인지 선풍기가 박살 나고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는 이

유가 불분명한 부부싸움은 엄마의 진득한 침묵으로 싱겁게 끝이

나곤 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끝도 없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

리고 신경질을 냈지만, 엄마는 또 끝도 없이 들어주고 받아주고 있

었다. 세월이 흘러, 철이 좀 들었을 때 엄마에게 그때 왜 아버지와

맞붙어서 한번 싸워보지도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성난 개한테 덤벼 봐라. 물리기밖에 더하겠니? 그리고 너희 아

버지가 천하에 혼자가 아니냐. 나라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외로움

을 다 어따 삭이겠니…. 그리고 너희 때문에, 너희 보는 데서 나까

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1.4후퇴 때 혈혈단신 홀로 월남한 아버지에게 가족은 어쩌면 최

고의 울타리였을 텐데, 무엇 때문인지 아내에겐 밥상을 엎는 신경

질적인 남편으로, 자식들에겐 잔소리꾼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울

타리밖에 평생 서 계셨다.

어린 시절, 한두 번인가 아버지는 북쪽에 있는 형님 이야기를 하

신 적이 있었다. 만석꾼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대대로 내

려온 많은 재산을 모두 형님에게 내주시면서 동생들을 잘 돌보라

하셨는데. 형수라는 여자가 아주 못돼서 동생들 밥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다고. 그래서 천덕꾸러기로 옷 한 벌도 제대로 못 얻어

입고 눈칫밥을 먹었다고. 아마 놀부 심보를 가진 큰어머니였던 모

양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만석꾼 이야기를 우리 식구는 믿지 않았다. 아

버지는 소월의 시에도 나오는 고향인 영변을 그리워하지 않으셨으

니까. 그리워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 관한 모든 것을 병

적으로 싫어하셨다. ‘남북이산가족찾기’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울음

바다로 만들었지만, 아버진 절대 그 방송을 보지 않으셨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을 때 막내동생이 보내 드리려 하자, 당

신은 절대 가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빚을 지고 왔는갑네.”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아버지의 완강한 고집

에 한마디 하셨지만, 아버지는 더는 말이 없었다. 정말 빚을 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눈에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

의 ‘개인택시’와 우리의 ‘집’이었다.

내가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

은 아버지가 당신의 개인택시 ‘안’ 아니면 집 ‘안’에 계시다는 것이었

다. 아버지의 택시가 주차장에 있으면 그것은 곧 아버지가 집에 계

시다는 거였다. 세상 모든 것에 의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버지는 우

리 4남매를 키워 주고 엄마의 억척이 더해진 ‘집’을 사게 해준 ‘택시’

를 자식보다 더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꼈다. 그 당시 고급

승용차도 아닌 밥벌이 수단에 불과했던 ‘택시’를 주차장에 돈을 내

고 맡기는 사람은 아마 내 아버지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일로 짠순이 엄마와 아버지는 가끔 다투기도 했는데 주차장

이 따로 있는 집을 마련하기까지 아버진 당신의 손때가 묻어 반짝

반짝한 택시를 절대 아무 골목에나 세워 두는 법이 없었다.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피붙이라고는 아내와 자식 넷이 전부인 아버지에게

택시는 또 다른 ‘자식’이며 ‘아내’이며 또 ‘고향’이었을 거라는 생각

을, 나는 훗날에야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빈틈없고, 좀 나쁘게 말하면 꼬

장꼬장하고 쇠꼬챙이 같은 성격은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활달하

기 이를 데 없는 엄마와 잦은 다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마치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듯이 밥상을 엎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보는 데서 그런다고,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엄마의 한숨 섞인 넋두

리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그 ‘밥상 엎기’가 비로소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아버지의 ‘한시 택시’가 ‘개인택시’로 탈바꿈하고 나서부터

였던 것 같다. 그리고 1층엔 상가와 주차장이 있는 멀끔하고 좋은

2층집을 수완 좋은 엄마의 솜씨로 장만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낚시하러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 택시 ‘안’이

아니면 집 ‘안’에 계시던 아버지가 외출하기 시작한 것인데, 유소년

기의 아버지에 대한 끔찍한 기억이 있는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그

낚시 외출을 ‘소풍’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에게만 소풍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안 계신 넓디넓은 집은 우리 4남매의 편안한 놀이

터이자 또 다른 의미의 즐거운 소풍이었다.

아버지의 낚시 외출은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되었다. 밤

12시에 일을 끝내고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이시고는 새벽 5시쯤 낚

시 도구를 챙겨 나가시면, 오후 대여섯 시쯤에나 들어오시니 그때

아니라 아버지가 안 계신 넓디넓은 집은 우리 4남매의 편안한 놀이

까지는 아버지와의 데면데면한 시간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가 어디로 낚시를 가는지 어떤 낚시를 하는지 우리 식구

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엄마만이 “하루 쉬는 날 집에

서 쉬지… 땡볕에 무슨 낚시냐”고 타박했지만 아버지의 낚시 외출

은 비 오는 날을 빼고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낚시에서 잡아 오는 물고기는 어른 손가락만 한 작은

민물고기들이었다. 그것들의 내장을 빼내, 진간장만을 낙낙하게 부

어 마늘을 편으로 썰어 넣고 장조림처럼 조려 드셨는데, 아버진 그

것을 쇠고기 장조림보다 더 맛있게 드셨다. 그러나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아버지의 그 물고기 장조림을 먹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해서 낚시를 가지 못하는 날 아버지의 신경질은 우

리 4남매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의 공책을

일일이 검사하셨고, 숙제하는 걸 지켜보셨고, 책상 정리를 시키시

며 끝도 없을 것 같은 잔소리와 꾸중이 이어졌다. 그러니 아버지의

낚시 외출이 우리 4남매에게는 학교 소풍보다 더 기다려지는 소풍

이 되고 말았다.

스무 살이 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우아한 백조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딱 한 번 나는 아버지의 낚시를 따라나선 적이 있었다. 엄

마가 빈둥거리는 내게 바람이나 쐬자며 가자고 해서였는데, 별 할

일도 없었지만 내가 순순히 따라나선 것은 지금도 의문스럽다.

엄마는 전날 재어 놓은 불고기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흰 쌀밥으로

도시락을 쌌다. 방학 중이던 막내동생도 꼬드겨 같이 갔는데 이 단

출한 네 식구의 갑작스러운 외출은 생각해보니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제일 예뻐하는 남동생이 함께였고 엄마도 무척 즐거

운 듯이 보여 아버지의 무뚝뚝함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낚시터에 대한 설렘까지 생겼다.

서울에서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아버지의 낚시터는 물살도

세지 않고 수위도 깊지 않은 무릎이 닿을까 말까 한 맑은 개울이었

다. 아버지가 큰 물고기를 잡아 오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순

간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오실 때처럼 새벽에 나선 것은 아니었지

만,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개울가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햇살이 강

해지고 있어서 엄마와 나는 다리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아버지와 남

동생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습관이 돼 버린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준비한 통에 떡밥을 넣어 동생에게 물속에 담가 놓

으라 하고 당신은 물가에 들어가 견지 낚싯대를 드리웠다. 싸구려

삿갓 모자를 눌러 쓴, 쑥 들어간 아버지 눈에는 잠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나는 저런 아버지의 얼굴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멀

찍이 아버지를 주시했다.

내 아버지는 정말 어디에 내놔도 빠지는 초라한 양반이셨다. 왜

소한 체구에 살집조차 없는 비쩍 마른 몸뚱이에는 재활용 수거함

에나 쌓일 법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하는 그런 옷들을 엄마가 버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내 낚시 갈 때

입갔어” 하셨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멋도 모르고 유행 같은 건

더더욱 모르는 내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옷은 개인택시의 상징인

노란 셔츠뿐이었다.

“소풍이라고 온 건데…, 저게 머꼬!”

엄마도 아버지 모습이 좀 그랬는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직

하게 말했다. 평생을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살아온 아버지가 엄마가

꺼내놓은 옷을 입고 올 리 만무했다.

하늘 아래 누구보다 더 초라한 내 아버지를, 낚싯대를 드리운 낯

선 내 아버지를 나는 정말 처음으로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아버지

의 모습은 뭐랄까… 당신이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라는 것처럼 얼

굴에는 비장함까지 묻어났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그 찰나를. 그

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나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아버

지에게는 비장한 기다림으로 비쳤다.

어느 순간, 아버지가 탁!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파닥거리는 은빛 물고기와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그 희미한 미소를, 아니 강렬한 희열을 잠깐 보았던 것 같기도 하

고 아닌 것도 같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내 그 평상시의 짜증 묻

은 얼굴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으니까. 아버지는 낚싯대에서 익숙

하게 물고기를 떼어내고 다시 낚시를 드리웠다. 아버지는 아내와의

이 외출이, 막내아들과의 이 나들이가, 딸내미와의 이 소풍이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평생에 딱 한 번뿐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 한가운데에서 이 세상을 등지고 그는 홀로

청산에 계시는 듯했다고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점심을 먹을 때 아버지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 물줄기가 북쪽에

서 오는 기야”라고.

그저 밥 한술 뜨시며 던진 한마디에 나는 당신의 평생을, 그의

일평생을 다 본 것만 같았다. 아버지도 정녕 외로우셨던 거다. 만석

꾼 아버지도 그리웠고 심약한 형님과 놀부 심보를 가진 형수님까지

모두 다 그리웠던 거다. 포탄을 뚫고 주린 배를 움켜쥔 채, 공포에

떨며 홀로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향한 그 먼 길이 열아홉 청년에게

는 진정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괴로움이었으리라.

멀리서 바라만 보던 내 아버지의 모습이 짜증과 우울함이 섞인

모습이 아니라 비로소 연민이 가득한 외로운 피사체로 보이던 순간

이었다. 길지 않은 소풍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아버지

에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아버지는 몇 형제 중에 몇째 아들이었어요?”

아버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낚시 소풍 이후에, 비로소

나는 아버지가 잡아 온 물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내가 첫 아이를 가

졌을 때 물조차 삼키지 못할 때 유일하게 생각나던 아버지의 물고기

장조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살가운 딸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

다. 아버지 또한 당신의 그 짜증과 신경질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암이 가져다준 육체의 고통은 아버지를 몹시 힘들게 해서 참을

성이 부족한 아버지의 신경을 더욱 거칠게 만들어 마지막까지 씻지

못할 막말과 짜증을 내어 엄마를 지치게 했다.

그런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마침내. 염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낚시터에서의 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

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영이 떠난 아버

지의 얼굴엔 신경질도 없었고 이마에 문신처럼 따라다니던 짜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만석꾼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었던 내 아버

지가 거기에서 마지막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통곡하진 않았

지만 살아계실 제, 아버지의 저런 얼굴을 보았다면 나도 아버지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시인은 나 돌아가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하겠노라고 하

였다. 그러나 늘 세상의 언저리만을 뱅뱅 돌다가 벗 하나 두지 못하

고 떠난 배돌이 내 아버지의 즐거운 소풍은 이제 시작되었다고 나

는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따라올까 봐 도망치듯 달려간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난 당황해 하며 말아놓은 김밥을 얼른 썰어서 도

시락을 챙겨주며, “그래, 소풍 즐겁게 잘 다녀와”라고 했다. 아들내

미 소풍 간다고 직장에 휴가까지 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래, 휴가까지 냈는데 해성이 몰래라도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파트 복도 끝에서 쿵쾅거리며 급하게 달려오는 발

소리가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성이는 급한 숨을 몰아

쉬며 “엄마, 뚱뚱해도 괜찮으니 그냥 와. 다른 엄마들 다 왔어. 빨

리 오세요. 빨리요” 하고 말했다.

난 기분이 업되어 마치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해성이 손을 잡고

학교로 갔다. 운동장에는 울긋불긋 예쁘게 차려입은 학생들보다

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엄마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소풍 장소는

광주박물관이다.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다.

선생님은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학생들에게 줄을 맞춰 따라오

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서로 장난을 치며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모

르는 축구공 같았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게임을 하며 즐겁게 놀

고 있는 사이 엄마들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으로 화기애애한 모

습이다. 하지만 난 알고 지내는 엄마들이 없어 조금 낯설어하고 있

는데 너무 반갑게도 영주엄마가 다가온다.

“해성이 엄마, 직장에 휴가 내고 오셨군요? 저한테 해성이 부탁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휴가까지 내셨네요. 다음부터는 무슨 일 있

으면 어려워 마시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이따 점심 먹을 때 같이 먹

어요” 하며 아는 체를 해주니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영주엄마는 우리 아파트에 우유 배달을 한다. 하루는 영주를 데

해성이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소풍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날씨를 보려고 베란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파트 뜰에 피어있는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하얗게 휘날리며 소풍

하기에 좋은 날씨임을 말해주고 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풍을 가는 해성이는 신이 났는지 소

풍 갈 때 입고 갈 옷을 빨리 달라고 하면서 가방을 챙기고 있다. 기

억 저편에 가물거리는 즐거웠던 소풍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마음으로 김밥을 싸고 있는데, 해성이가 다가오더니 “엄마, 빨리 김

밥 싸주세요. 빨리 학교에 가야 해요” 하며 서둘렀다.

“응. 알았어. 도시락은 엄마가 싸 갈 테니까 너 먼저 학교에 가 있어.”

“엄마, 엄마도 소풍 따라 오려고요?”

“응. 엄마도 너 소풍 가는데 따라가려고 직장에 휴가도 냈는데….”

“엄마, 엄마는 뚱뚱하니까 따라오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혹시나

신기자 |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신기자 |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자

수상작

은상

성이 못 놀게 하세요. 초등학교 입학 전에도 아파트 앞 문구점에서

장난감 훔치다 들켜서 주인한테 맞기도 했다고 소문이 다 났어요.

그래서 다른 엄마들이 찬우가 3반이 된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

각하고 있어요.”

찬우, 나도 선생님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다. 어느 날 선생님께

서 드릴 말씀이 있으니 뵙고 싶다고 해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선

생님이 그러셨다. 반에 도벽이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와 해성

이가 가장 친하게 지내서 걱정스런 마음이 들어 조심스럽게 어머니

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잘 보살피며 돌보아

주겠지만 학교가 끝나고 학교 밖에서까지 친하게 지낸다면 조금 문

제가 될 수 있으니 어머니께서 밖에서는 함께 놀지 못하게 잘 지도

하라고 했다. 해성이는 참 착한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말씀

드린다고 했다.

해성이가 찬우 손을 잡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주엄마는 펼

쳐 놓았던 도시락을 주섬주섬 쌌다. 그리고는 돗자리를 걷어 영주

를 데리고 다른 엄마들이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너무 당황스럽고

썰렁한 이 기분을 아이들에게까지 나타낼 수가 없어 난 억지웃음

을 웃으며 “응. 네가 찬우구나 얼른 이리로 앉아라” 하고 두 아이에

게 젓가락을 주며 보온물병에서 따뜻한 물을 한 컵씩 따라주며 김

밥을 먹도록 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엄마들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등 뒤

가 날카롭게 느껴졌고,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해주셨는데

난 찬우를 데리고 점심을 먹고 있으니 선생님 얼굴 뵙기가 어색해

지고 말았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으로 가시가 되어

버린 김밥을 힘없이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을 때 찬우가 가방에서

리고 우유값 수금을 하러 왔을 때 영주가 우리 해성이를 보고 한

반 친구라고 해서 영주엄마와는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모르

는 엄마들만 있는 곳에서 영주엄마를 만나니 오래전부터 알고 지

내온 친구 같은 다정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즐거운 점심시간이 되었다. 영주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으

려고 은색 돗자리를 깔면서 영주엄마가 아니었다면 혼자서 참 난

처했겠다고 생각하니 영주엄마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난 아침부

터 정성스레 싸온 김밥과 딸기 음료수 등을 꺼내 놓았다. 영주엄마

는 검은 깨가 먹음직스럽게 솔솔 뿌려진 유부초밥과 누드 김밥, 참

치 김밥, 치즈가 들어있는 야채 쌈 등 다양하게 맛있는 것들을 많

이 싸왔다. 은색 돗자리에 잘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해성이와 영주

는 좋아하며 손뼉을 쳤다. 김밥 한 개를 입에 집어넣고 내 눈이 머

무는 곳은 잔디밭에 한 아이가 앉아 한 손은 입에 물고 또 한 손은

잔디를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는 엄마가 안 왔나 보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성이가 “찬우다. 엄마, 찬우 데려와도

되죠?”라고 말했다. 해성이는 내 대답도 들어보지 않고 찬우에게

달려갔다. 찬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도 놀라웠지만, 영주엄마 반

응이 더 놀라웠다.

“찬우라고요? 해성이 엄마, 찬우 알죠? 손버릇이 있는… 도벽이

아주 심한 아이요. 걔네 엄마는 오래전에 집을 나가서 없고, 아빠

는 있는데 덤프트럭 운전을 해요. 영세민 아파트에 사는데 술주정

이 심해서 그 아파트 사람들이 골치래요. 그 골치 아픈 아빠의 아

들이 찬우에요, 찬우. 그리고 해성이 엄마, 우리 영주가 돈을 잃어

버렸는데 그 돈이 찬우 가방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글쎄. 찬우랑 해

들이 싫어한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점심시간이 즐

겁지가 않았다. 서로 쫑알거리며 점심을 먹고 있는 두 아이들의 맑

고 고운 눈을 피해 돗자리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내 눈에

형광등 같은 불빛이 확 켜지면서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해성이 운동화 옆에 나란히 있는 운동화는 분명 해성이가 잃어버렸

다는 메이커 운동화가 분명하다. 해성이가 초등학교 입학했다고 서울

에서 이모가 사준 운동화인데 신고 다닌 지 며칠 되지 않아 잃어버렸

다며 헌 운동화를 신고 왔을 때 무척 아까워했던 그 운동화다.

‘저 운동화는 분명 우리 해성이 운동화가 맞는데 왜 찬우가 신고

있지? 영주엄마 말처럼 손버릇이 있어서 우리 해성이 운동화를 훔

친 걸까? 아니면 우리 해성이가 찬우를 주고 잃어버렸다고 했을까?’

온통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아니야 찬우도 찬우 아빠가 우리

해성이와 똑같은 운동화를 사줬을지도 몰라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찬우야 그 운동화 누가 사줬어?’ 물

어보고 싶어진다. 허나, 차마 그 말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닭싸움 게임이 있었지만 난 멍한 상태로 돗자

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힘들게 앉아 있는

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물 찾기 시간이 되었다고 선생님의 호루라

기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도 엄마들도 보물을 찾으러 우르르 몰려

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때 해성이와 찬우가 달려와 내 손을 이끌

면서 “엄마, 보물 찾기예요. 엄마도 보물 찾아요” 한다.

이곳 저곳에서 보물을 찾았다는 기쁨의 환호 소리가 들린다. 잔

디 사이에서 나무 위에서 돌 밑에서 눈을 크게 뜨고, 난 두 개의

보물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보물

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보물을 찾은 아이들은 기쁨의 얼굴이

부스럭거리며 빵을 꺼냈다. 팥빵 1개와 소보로빵 1개 그리고 콜라

한 병을 꺼냈다. 누가 싸줬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4학년인 누나가

사줬단다. 울컥한 마음이 되면서 애잔함이 느껴졌지만, 우리 해성

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게 너무 싫은 마음으로 강하게 다가왔다. 다

른 친구들이 싫어하는 찬우와 친하게 지낸 우리 해성이 마저 친구

되었지만, 보물을 찾지 못해 빈손으로 달려온 해성이와 찬우는 시

무룩한 표정으로 “엄마도 못 찾았어요?” 하고 묻는다. 난 해성이와

찬우에게 보물을 찾지 못한 대신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고 얘기하

니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의 즐거운 소풍이 끝나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짜장면

집으로 걸어가는데 해성이가 달려와서 내 오른손을 잡는다. 머뭇

거리고 있던 찬우도 달려와서 도시락 가방이 든 내 왼손을 잡는다.

순간 송충이 같은 벌레가 내 손에 닿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들

었다.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맑은 눈을 가진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

다고, 내가 이럴까. 누가 뭐라 해도 내 아들 해성이가 좋아하는 친

구잖아.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할까’ 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찬우는 잡은 내 손등을 다른 손으로 마구 부비면서 혼잣말로

“참 좋다”라고 한다. 사랑이 그리운 이 아이에게, 엄마의 정이 그리

운 내 아들 친구 찬우에게 운동화에 대해 어찌 물어볼 수 있을 것

인가. 난 내가 배 아파 낳은 아들 해성이를 믿고 싶고 또한 내 아들

의 친구 찬우도 믿고 싶었다.

두 아이에게 짜장면을 시켜주었다. 둘은 서로 쳐다보며 후루룩후

루룩 킥킥거리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너무나 예쁘고 천진난만하다.

짜장면을 다 먹고 난 두 아이 입가에 짜장면이 묻어 있어 물수건

을 주면서 입 주위를 닦으라고 했다. 다 닦았다고 하는 찬우 입가에

짜장이 조금 묻어 있다. 난 물수건으로 찬우 입가에 남아있는 짜장

을 닦아주었다. 찬우가 내 손을 잡는다. “해성이 엄마 손이 너무 좋

아요”라고 한다. 찬우가 우리 해성이 운동화를 훔쳤다면 다시는 찬

우와 놀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울컥한 마음이 든다.

찬우가 화장실에 갔다. 난 그 시간을 이용해 해성이에게 운동화

에 대해 물어야 했다.

“해성아, 찬우 운동화가 이모가 사준 운동화랑 똑같은데 혹시

해성이 네가 찬우에게 주었니?”

“엄마,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엄마, 난 아빠가 사준 새 운동화

랑 이모가 사준 새 운동화가 두 개나 있는데 찬우 운동화는 더러

운 운동화였어요. 찬우가 내 운동화를 신어보고 싶어해서 이모가

사준 운동화를 찬우에게 줬어요. 찬우는 엄마도 없고 불쌍하고 우

리 집보다 훨씬 가난해요. 친구들이 찬우 보고 거지라고 놀려요.

그래서 줬어요. 학교 친구들도 청소하러 학교에 온 친구 엄마들도

찬우를 싫어해요. 그래서 엄마도 찬우 보면 싫어할까 봐 소풍도 따

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 잘못했어요. 운동화 잃어버렸다고 거

짓말 해서요.”

온종일 걱정하며 머리 아파 했는데 내 바람처럼 찬우가 운동화

를 훔치지 않아서 안심이 됐고, 내 아들 해성이가 어른인 나보다

속이 더 깊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다. 내 아들 해성이와

친하게 지낸 찬우가 소문처럼 나쁜 아이가 아니길 간절한 마음이기

도 했다. 찬우가 왔다.

난 찬우의 손을 잡으며 “찬우야, 해성이 집에 놀러 오고 싶으면

일요일에 오도록 해라. 그러면 해성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

게.” 찬우는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

덕인다.

헤어지기 아쉬운 듯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는 해성이와 마지

못해 손을 흔들어주는 찬우, 두 아이 사이로 뽀송뽀송한 햇살이

내렸다.

수상작

은상 오늘은 태풍주의보가 발령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바다의 물결은 잔잔하겠으며….”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내 이불을 들치시며,

“자는 척 하지 말고 일 나거라, 가자” 하신다. 속으로는 오늘은 가

기 싫은데, 오늘은 안 되는 데를 수십 번 되뇌인다.

엄마는 언제 다 하셨는지 “준아 밥상 가져가 거래이” 하시고 나

는 “야” 하며 부엌으로 향한다.

“엄마! 아부지한테 말했나? 나 오늘 소풍 간다고.”

“그래. 어제 저녁에 니 오늘 봄 소풍 간다고 말했다.”

“아부지가 머라 카더노?”

“별말씀 없고, 금방 온다고 그물 걷어서 채리놓고 가도 된다 카더라.”

“엄마는 참, 그걸 믿나? 아부지 성격 잘 알면서 나 오늘 배 안 나

갈란다. 애들이랑 소풍 가는데 가고 싶다. 내 오 학년인데 제대로

소풍 한 번 간 적 있더나. 이번에도 바쁘다고 하고 뻔하다.”

그렇다. 나는 입학하기 전부터 노 젓는 일을 배워 아버지 일을

도왔다.

“준아! 일단 밥 묵고 야그할게, 밥상 들고 가라. 아부지 신경질 낸다.”

고깃국에 생선튀김, 하얀 쌀밥 한 그릇과 보리가 섞인 밥 두 공기….

쌀밥은 아버지 몫이다. 언제나 아버지 밥이 먹고 싶어 힐끗힐끗

쳐다만 보는 쌀밥, 고봉으로 올라온 흰 쌀밥 속에는 달걀 노른자가

숨어있다. 참기름을 넣고 숟가락으로 간장을 떠서 비비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눈치를 준다. 소풍 간다고 아니 바다일 안 나간다고 말

하라는 눈짓이다.

“저기요. 준이 아부지요.”

“와?”

임현준 |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3동

저는 동해안의 아주 작은 어촌에서 목선으로 고기잡이를

생계로 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신춘편지의 글제가 ‘소풍’이어서 떠오르는 고향과 저를 한 번 그

려 보렵니다. 바다, 학교, 신작로 그리고 부모님과 저와 사이다….

아버지의 머리맡에 놓인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는 오늘 새벽

또한 여느 새벽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알지도 못하는 북해

도며 러시아 등 그것은 일기예보다. 하루의 일과를 일기예보와 함

께 어촌의 시작, 아니 나의 시작이다. 아직은 이불 속이지만 귀를

쫑긋 세운다.

드디어 ‘동해 중부 먼 해상…’ 이불을 걷으며 살그머니 고개를 내

밀어 들어본다.

“제발… 제발….”

“어제 야그한 오늘이 준이, 봄 소풍인데 혼자 가믄 안 됩니꺼?”

“뭐? 뭐라카노 소풍이 뭔 대수라고!”

큰소리와 함께 밥상은 여지없이 날아간다.

“고기 안 잡으믄, 누가 밥 준다 카더나. 빨리 나온나!”

허겁지겁 엄마는 엎어진 밥상을 치우고 나는 울면서 고무신을 들

고 백사장을 달려 배에 갔다.

뭍에 올려놓은 배를 아버지와 나는 바다로 밀어 내린다. 저녁에

쳐놓은 그물을 다음날 새벽 5시쯤 걷으러 가는 것이다. 태풍주의

보가 발령되지 않는 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는 가야 한다.

나는 노를 젓고 아버지는 길게 쳐놓은 그물을 걷어 올린다. 크

고 작은 물고기가 걸려있다. 살아서 퍼덕이는 놈, 기절해 있는 놈,

벌써 누가 갉아 먹었는지 하얗게 뼈만 있는 놈 그리고 파래 미역

다시마 온갖 쓰레기들이 줄줄이 걸려 올라온다. 쳐놓은 그물이 열

필(그물 길이를 말하는 것, 한 필이면 약 오십미터)은 족히 된다.

바람이 부는 날은 더욱 힘이 든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바람

은 셋바람이라 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갈바람

이라 한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저어도 저어도 배는 가질 않고 바람을 맞아

뒤로만 흐른다. 이내 큰소리가 들린다.

“야! 니 지금 뭐하노? 빨리 저어라.”

“하고 있습니더. 아부지가 한번 해보소! 내가 올라가는지요.”

“이 자슥이. 밥 쳐묵고 그것밖에 몬하나?”

꽉 움켜진 손아귀에는 물집들이 잡히고 터져 바닷물에 젖은 손

이 쓰라려 온다. 아버지는 그물을 당기시던 걸 놓으시고는 바로 배

안에 물을 퍼내는 바가지를 집어 들고서는 머리통을 후려치신다.

얻어맞은 머리통은 상관없다. 내 손에서 노를 놓으면 더욱 세찬 매

가 올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엉엉 울면서 힘껏 저어본다. 어

느덧 수평선에는 붉은 해가 올라온다. 배 안에는 걷어 올린 그물

속에 고기와 온갖 쓰레기들이 한가득이다.

뭍으로 향한다. 이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 같은 공간에서 아버지

와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니면 언제 매질이 있을지

몰라 도망가기 쉬운 뭍이라서 좋은 건지 모르겠다.

배가 닿을 무렵 백사장 쪽에서 머리에 방태기를 이고 오시는 엄

마가 보인다. 뭍에 닿자마자 줄달음친다.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엉엉

큰소리로 울고 있는 나를 꼭 안아준다.

“그랴. 준아 엄마가 다 봤다.”

더욱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집에서도 바다에서 일하는 모습들

이 보인다.

“아이고 아를 또 때렸는교? 준이가 불쌍하지도 않는교?”

“자슥이 뭘 잘했다고 울고 지랄이고, 뚝 안 그치나. 얼른 그물 못

채리나.”

그물에 걸린 고기와 쓰레기들을 떼는 작업을 ‘그물 채린다’고 한

다. 말끔하게 그물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집 뒤 저만치 학교 지붕이 보인다. 눈치만 본다. 학교에 갈 시간

이 되어간다. 학교 종이 울리고 뛰어가도 지각은 아니다. 집 앞 바

로 학교 담장에 개구멍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그렇게 가고

싶던 소풍날이다. ‘봄 소풍.’

오늘따라 고기도 많이 잡혔고, 온갖 쓰레기들도 많다. 당연히 작

업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맘은 학교에 가 있다. 손은 더디다. 이

윽고 큰소리가 들려온다.

“니! 뭐하노 빨리 몬 하나?”

“하고 있심더. 내 이거만 하고 가믄 안됩니꺼 아부지!”

“준이 아부지요. 준이 그만 하라카소.”

엄마가 거든다.

“뭔 소리고. 소풍은 무신 소풍이고, 노는 날인데 그냥 일이나 해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전교생 백 명도 채 안 되는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부르는 노랫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출발한다는 신호음인 것이다.

“엄마! 빨리 가라고 말해봐라.”

마음은 급해진다. 엄마에게 다가간다.

“엄마! 도시락은?”

조그맣게 물어본다.

“응. 찬장 열어 보믄 책보에 싸놨으니까 가져가고, 앞집 점방에

말해 놨으니까, 사이다 한 병 달라 해서 가져가믄 된다.”

“알았다.”

눈치를 본다. 아부지가 안 보내줄 것은 뻔하다.

“엄마야! 반찬은 뭐 싸놨노?”

“메르치하고 후라이 넣었다.”

“달걀노른자 그거 아부지 먹는 거 넣으라 했자나.”

“그거 식으모 비린내 나서 못 먹는다.”

“그래도 그게 먹고 싶은데 됐다고마. 빨리 아부지한테 말해봐라.”

“준이 아부지요! 준이 고마, 가라하소.”

“허허. 뭔 소리 하노.”

“준아! 그냥 가거라.”

“갔다 오믄, 맞아죽는데 우찌 가노?”

“괜찮다. 얼른 가라카이.”

엄마가 걱정된다. 내가 그렇게 하고 가면 아부지의 화풀이는 엄

마에게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물쭈물 하는 사이 학교 스피커에서 “아아! 여러분 오늘은 봄

소풍 날입니다. 교장 선생님 훈시가 끝나고 출발합니다. 육 학년은

제일 뒤에 출발하고 저학년부터 오늘 봄 소풍장소인 학교 앞 높은

현종산으로 출발!”

‘꽃동네 새 동네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눈에는 벌써 눈물이 흐른다. 바닷물이 말라 소금기가 하얗게 핀

손으로 눈물을 닦는다. 눈은 따갑다. 번갈아가면서 엄마와 아버지

를 쳐다본다. 매정하시다. 그래, 늦어도 갈 수 있다. 목적지가 어딘

지는 안다. 학교에서 자주 가는 곳이니까.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물 채리는 일도 거의 마무리된다.

엄마는 고기 방태기를 머리에 얹는다. 휘청거린다. 혼자서는 들

기도 힘들다. 셋이서 들어 엄마 머리 위에 올린다. 올려진 방태기

밑쪽이 푹 들어간다. 앞도 간신히 보일 텐데 어떻게 십 리 길을

간다는 것인지…, 그것도 한 번도 머리에서 내려놓지 못한 채로

말이다.

“준아! 네 시쯤에 그물 놓기 전에는 꼭 온나.”

엄마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얼른 팔고 온나.”

아부지는 퉁명스레 한마디 던지고는 “니는 모하노? 그물을 배에

다 실어야지” 하고 내게 소리치신다.

“준아! 그냥 뛰어가라. 얼른 가라. 엄마 걱정 말고 얼른가.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뛴다. 고함 소리가

들린다.

“니, 이노무 자슥 거기 안 서나? 니! 오늘 들어오기만 하믄 다리

몽댕이 뿌사질줄 알그래이.”

아버지 소리를 뒤로하고 어느새 집 부엌에 들어섰다. 엄마 말대

로 책보에 싸인 도시락이 있었다. 나는 달리기 좋게 허리춤에 질끈

묶고, 엄마가 시킨대로 점빵에 갔다.

“영수엄마요?”

아무 소리가 안 들린다. 다시 큰소리로 “영수엄마 오데 있능교?”

잠잠하다. 뒤로 돌아 텃밭에 가본다. 거기 계신다.

“오! 준이 왔나? 오늘 고기 마이 잡았나?”

“야. 울 엄마가 사이다 가져가라고….”

“응. 그래, 사이다. 일루 온나. 우째 너거 아부지가 가라 카더나?”

“그냥 왔어요.”

이웃 분들도 아버지의 성격을 다 아신다. 내가 매 맞고 쫓겨나면

이웃에서 밥 먹고 아버지께서 주무실 때 살그머니 들어가는 일이

허다해서이다.

“아이고 오늘 또 난리 나겠다. 사이다 여기 있다. 학교 아들은 다

갔는데 인제 가도 되겠나?”

“야, 오데로 간지 아니까 그쪽으로 가믄 되요. 영수엄마요~ 이따

가 울엄마 오면 아부지 하고 싸울텐데 울 아부지 좀 말려주소.”

“그래. 어여 가라.”

한 손에 사이다를 들고는 텅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신작로로 뛴

다. 시골 신작로 길은 흙과 자갈로 되어있다. 가끔 지나가는 차는

누런 흙먼지를 나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래도 달린다. 한손에 쥔 사

이다를 쳐다보면서….

땀에 젖은 검정 고무신이 미끄러워서 벗겨진다. 느슨해진 도시락

책보를 풀어 바닥에 놓고 들고 있던 사이다와 같이 먹는다. 다시

달린다. 숨이 차서 뛰기도 힘들고 고무신은 자꾸 벗겨진다. 벗겨지

는 고무신을 아예 벗어서 양손에 든다. 맨발로 자갈길을 터덜터덜

걸어간다. 그러다 이내 달린다.

‘사이다 한 모금이 간절하다. 그러나 지금 먹어버리면 친구들에게

자랑할 게 없다. 아니 그래서가 아니다. 먹고 난 빈 병을 들고 가면

친구들이 빈 병을 주워 온 걸로 알 것이다. 지금 마시면 안 된다.

갈증이 나도 참아야 된다.’

이런 생각을 수십 번도 더 되뇐다. 달리고 달린다.

‘얼마쯤 갔을까?’ 생각하는데 발뒷꿈치가 뭔가를 내려친다. 이윽

고 ‘쨍’ 소리가 난다. ‘앗! 사이다.’

뒤를 본다. 깨진 사이다병 주위에 메마른 신작로의 흙들이 액체

를 빨아들인다. 주저앉아 깨진 병 밑에 고인 조금 남은 사이다를

입에 가져가 마시려는데 입술 옆이 따갑다. 손으로 닦아본다. 피다.

날카로운 병이 살짝 입술 옆을 스친 것이다.

사라져 버린 사이다를 뒤로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간다. 남은

건 도시락…. 꼬르륵 소리와 함께 하늘을 본다. 해는 벌써 중천이

다. 지금쯤이면 친구들도 도시락을 먹겠지. 나도 도시락 먹을 자리

를 잡으려고 신작로 비탈길을 내려간다. 찔레나무 밑에 앉아 도시

락을 열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없다. 아쉬운 대로 나뭇가지를 구

하려고 여기저기 찾는다. 찔레가 눈에 들어온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찔레부터 꺾어댄다. 어느새 한 움큼 꺾었다. 새순에서 올라오는 찔

레순을 간식처럼 먹는다.

달걀 후라이와 멸치와 밥을 욱여넣는다. 먹으면서도 엄마가 보고

싶다. 옷에서는 땀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난다. 엄마도 생선 비린내

가 많이 난다고 차를 안 타신단다.

나른하다….

잠이 온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꿈속인가 작게 들리던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벌떡 일

어나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다. 저 멀리 신작로를 따라 소풍

을 갔던 애들이 돌아오는 것이다. 찔레나무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다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지나간 애들 뒤에서 혼자 터덜터덜 신작

로 길을 거꾸로 집으로 온다.

이제는 걱정이다. 아버지에게 혼날 일만 남았다. 돌담 개나리 나

무 사이로 빼꼼 집안 동정을 살핀다. 아무 인기척이 없다. 그때 뒤

에서 “준아! 소풍은 잘 갔다 왔나?” 엄마의 목소리다.

“어. 엄마! 우짠 일로 이리 일찍 왔노?”

“오늘 어떤 식당에서 예약 손님 많다고 횟감하고 매운탕 거리로

다 사갔다.”

“우와! 진짜가? 근데 아부지는 오데 갔나?”

“너그 아부지 오늘 돈 많이 벌어왔다고 혼자 그물 놓으러 간다고

갔다. 근데 너 입술에 피 났나?”

“어, 이거 뛰다가 사이다병이 떨어져 깨져서 남은 거 먹다가 찔렸

다. 괜찮타.”

“점방 가자. 엄마가 사이다 한 병 사주꾸마.”

수상작

은상

장창훈 |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1동

제 고향은 김, 미역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완도의 작은 섬마

을입니다. 제 나이 6살 때, 아버지는 7남매 중 두 딸을 출

가시키고 많은 빚과 지독한 가난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

다. 처음에는 5남매가 같이 살다가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나가고

저와 3살 어린 남동생, 엄마만이 섬에 남아 지내게 됐습니다.

엄마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험한 일을 하시다가 나중엔 김,

미역 등을 화물 편으로 서울에 있는 창고로 보낸 후 근처 여인숙에

장기투숙하며 마을 아주머니 두세 분과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랬

기에 1년 중에 대부분은 서울에 계셨고, 물건이 다 팔리면 완도로

내려와 재구매 후 다시 서울로 가서 장사하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엄마는 장사를 떠나시기 전 밑반찬과 약간의 돈,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신신당부하고 가셨는데, 동생과 저만 살다 보니 늘 노는 것이

우선이고 학교 준비물도 안 챙겨가고, 지각이나 결석 횟수도 많고,

엄마와 나는 나란히 점방으로 향했다.

“영수엄마요, 사이다 한 병 주소!”

“어, 준이 왔나. 너그 아부지가 우짠 일로 화를 안 내더만 무신

일 있나?”

“지도 모릅니다. 히히히.”

“배 있는데 가보자.”

엄마 손을 잡고 한 손에는 사이다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데 저만

치서 벌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 모습을 보았다.

“벌써 다 끝났능교?”

“그래 오늘 파도도 잔잔하고 혼자 할만하네.”

아버지는 퉁명스런 한마디와 헛기침을 하신다.

“아부지요? 저 친구들하고 놀다가도 됩니꺼?”

“그래, 일찍 온나.”

“야. 일찍 들어갈 끼라예.”

“엄마, 아부지랑 먼저 가래이.”

그 길로 운동장으로 내달린다. 손에는 사이다병이 들려있는 채로….

그날은 오 학년 봄 소풍날이었다. 아득히 먼 40여 년 전의 봄 소

풍. 지금은 사라진 초등학교에는 큰 건물이 들어서고, 건물 뒤 뒷

동산, 동해바다가 한눈에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는 울 엄마 산

소가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밥을 해먹기보다는 주신 돈으로 빵이나 과자를 사 먹어 돈을 금방

다 써버리곤 했습니다.

6학년이 된 저는 성격이 점점 삐뚤어져 가고, 공부는 여전히 뒷

전이고 동생과 툭하면 싸우고 친구 녀석이 아버지 없는 애라 놀리

면 싸워 그 녀석이 다쳐 선생님께 불려 가 혼나고, 녀석의 부모님도

집에 찾아와 또 혼나고…, 점차 다른 친구들도 저와는 놀지 않으려

고 피하더군요.

그러던 하루, 봄 소풍날이 되어 전 학년이 명사십리로 갔습니다.

소풍 온 친구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같이 온 엄마와 김밥에 계

란에 사이다에 신이 났는데, 저희 형제는 쌀이 조금 섞인 보리밥에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이 창피해 산속에 들어가 밥을 먹었습니다.

철이 없는 동생은 이런 밥 먹기 싫다며 자신도 과자, 사이다를 먹

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고, 그런 동생이 안쓰러웠지만 화를 내며 동

생을 때려주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안 계신 것도 싫고, 우리 집은

왜 가난한 건지, 엄마는 왜 소풍날에도 함께 오지 않고 서울에 계

시는지 모든 것이 슬프고 반항심만 커졌습니다.

서럽게 우는 동생에게 “형이 내일 꼭 과자와 사이다 사줄게”라며

달래고는 다음날 개구리를 잡아 팔기로 결심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

습니다. 손으로 만든 2개의 강철 낚시바늘에 개구리를 묶어 문어

잡이의 미끼로 사용하는 어른들에게 개구리를 팔아 용돈을 벌 심

산이었습니다. 이렇게 용돈을 버는 애들이 저 말고도 몇 명 더 있

었습니다.

대나무로 낚싯대를 만들고 낚시바늘에 개구리가 곤충이라고 착

각할 수 있도록 호박꽃을 끼워 유인한 뒤, 개구리가 호박꽃을 삼키

면 잡아 그물에 넣기를 반복하며 온종일 잡아 큰 개구리는 30원,

중간 개구리는 20원에 팔았고, 그 돈으로 동생과 과자를 사 먹으

며 놀았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저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

느 날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지 않고 날이 어두워질 때쯤 개구리가

든 그물을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서울에 계셔야 할 엄마가 엄청

나게 화난 모습으로 서 계셨습니다.

저를 본 엄마는 제 손목을 잡고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리며, “이

놈아! 누구 땜시 내가 이 고생을 하는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

모냥이냐. 이딴 개구리 잡아서 어쩔라고. 도대체 커서 뭐 될래?” 하시

며 개구리가 든 그물을 마당에 내동댕이쳤고, 그물망을 나온 개구

리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망갔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내가 얼

마나 힘들게 잡은 개구리인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엄마의

매질은 계속 됐으며, 동생은 옆에서 울면서 “형아, 잘못했다고 어서

빌어!” 하면서 엄마의 팔을 잡았습니다. 이윽고 엄마는 저희 둘을

끌어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다음날 저와 함께 학교에 간 엄마는 선생님께 여러 번 사과를 하

시고 3일 후 다시 서울로 가셨고, 저와 동생은 예전과 똑같은 일상

으로 지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을 하기 며칠 전에 장사를 다녀오신 엄마는 서울에

사는 누나가 방학 때 올라왔다 가라고 했다고 서울에 같이 가자고 하

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남의 집 텔레비전으로만 몇 번 본적이 있는 서

울을 가게 됐다며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도

착한 서울. 많은 자동차와 빌딩들이 있는 모습이 무척 신기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저와 동생을 누나 집에 두고 장사를 가셨고, 며칠 후 수

척한 모습으로 오셔서 몸이 안 좋다며 장사는 어떡하느냐며 걱정이

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몸이 아프셔

서 늘 약을 달고 사셨습니다. 누나는 이런 엄마가 걱정스러워 저에

게 “넌 이제 많이 컸으니 엄마 일을 좀 거들”라며 다독거렸고, 다음

날 저는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저희는 어디인지도 모를 골목을 걸으며 목청껏 “완도 김이요~

완도 미역 사세요~!”를 외치며 장사를 했습니다. 사는 분도 몇 분

계셨지만 대부분의 아주머니들은 물건만 보고 집안으로 들어갔습

니다. 물건을 내리고 펼쳐 보였다가 다시 챙겨서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몇 번 반복하지도 않았는데 푹푹 찌는 날씨에 이마와 등,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하루종일 돌아다녔지만 물건은 그다지 팔리지 않았고, 팔도 아프

고 다리도 아파 오고… 저는 엄마에게 철없이 너무 힘드니 돌아가

자고 말했고 엄마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팔고 남은 물건을 가지고 어느 시장 모퉁이에 앉

아 팔기 시작했습니다.

“완도 김이요~ 완도 미역 사세요~!”

지치고 배도 고파 힘없이 외치고 있는데, 큰 덩치의 아저씨가 “우

리 가게 손님 못 들어오게 왜 앞에서 장사하느냐”며 김과 미역을

한 쪽으로 던졌습니다.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며 흩어진 물건들을

챙겨 그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수많은 자동차 불빛과 간판의 조

명들을 뒤로한 채 걸어가다 다리가 너무 아파 엄마에게 조금만 쉬

고 가자고 한 후 보도 위 경계석에 털썩 앉았습니다.

엄마는 저를 꼬옥 끌어안으시며 “아이고, 내 강아지~ 우리 강아

지 때문에 오늘 엄마는 힘이 하나도 안 들었어!”라며 씩 웃으셨습니

다. 그런 엄마의 몸에선 땀 냄새와 쉰내가 가득했습니다. 방에 도

착해 밥을 먹고 씻고 나와 보니 발바닥에 세 군데나 물집이 잡혀

쓰라렸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바늘에 실을 달아 물집을 터트려주

시곤, 자고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고단하셨는지 금방 잠이 드셨습니다. 저는 열대야의 날씨

와 시끄러운 경적소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명 불빛 때문에 잠 못

다 그런 엄마의 몸에선 땀 냄새와 쉰내가 가득했습니다 방에 도

들고 있는데 엄마가 어깨며 다리를 매만지며 아픈 소리를 내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역 사세요~ 김 사세요”를 외

치며 잠꼬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일어나 엄마의 다리를 주무르다 발바닥에 여러 개의 바느질

실이 꿰어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반대편 발바닥에도 물집이 잡혔던

자리에 피멍도 있었고, 일부는 하얗게 들떠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저는 물집 세 개만 잡혀도 이렇게 쓰리고 아픈데 엄마는 얼마나 아

플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빨리 커서 돈을

많이 벌어 효도해야 한다며 다짐에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어제와 다른 동네로 장사를 하러 갔습니다.

너무도 더운 날씨에 땀은 비 오듯 하고 다리와 물집 잡힌 부분이

아파 절뚝거렸지만 어제처럼 쉬었다 가자고, 다리가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해서는 안됐습니다.

나도 작은 목소리로 “완도 김이요~ 미역이요~”를 외쳤습니다. 그

러자 엄마는 힘이 나시는지 어제보다 힘찬 목소리로 물건을 팔았습

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제가 기특하다며 물건을 많이 사주셨고, 인

정이 많은 할머니는 아들 맛있는 거 사주라며 거스름돈을 받지 않

으셨습니다.

십여 일이 걸려 완도에서 가져 온 물건은 다 팔렸습니다. 발바닥

엔 물집이 남았지만 엄마는 제가 큰 몫을 했다며 많은 칭찬을 해

주셨고, 누나와 동생과 함께 짜장면 집에 가 생전 처음 짜장면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맛은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음식보다

도 최고였으며 환상이었습니다.

엄마는 내 강아지 고생했다며 내일은 남산으로 소풍가자고 하시

더니 신발하고 옷도 새로 사주겠다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엄마와 함께 소풍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리를 크

게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길거리 음식도 맛있

게 먹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누나는 계란을 삶고 보리차물을 얼

리고 밀가루와 소다, 계란을 넣어 빵도 만들고, 과자도 사왔습니다.

다음 날 새 옷에 새 신발을 신고 우쭐대며 남산으로 소풍을 갔

습니다.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동생과 저는 신이 나 뛰다가

걷다 사람들 구경도 하고, 놀이도 하고…. 길가에 있던 점을 보는

새가 부리로 물어 건네준 종이를 펼쳐보니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긴

다는 점괘가 나와 우리 가족 모두 만세를 외쳤습니다.

얼마를 더 올라가 팔각정에 도착해 서울 시내도 내려다보고, 계

단에서 멋진 모습으로 즉석사진도 찍고, 준비해온 빵과 과자도 먹

으며 모두 즐거웠습니다. 언제나 수심과 그늘이 가득했던 엄마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함박웃음과 행복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 이해하지 못할 광경이 제 눈앞에 보였습니다. 비둘

기에게 아까운 과자를 던져주는 이가 몇 명 있고, 바로 눈앞에 수

십 마리의 비둘기가 있어도 잡을 생각을 않고 그냥 보고 있는 모습

이었습니다. 완도에서는 비둘기를 잡으면 맛있게 고깃국을 끓여 먹

는데 과자까지 던져주고 잡으려 하지도 않다니….

제가 “아야, 동생아! 우리가 저 비둘기 잡아서 저녁에 국 끓여 먹

자” 했더니 동생도 “그래 형! 우리가 잡자!” 하며 일어서는데 엄마와

누나가 웃으며 여기서는 잡지 않고 보기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엄마는 저와 동생을 근처 아이스크림 박스에 데리고 갔는데 저희

는 그만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각양각색의 아이스께끼와 빙과류가

얼마나 가득인지. 하나씩 입에 물고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아껴 먹으려

수상작

동상

4년 전 저희 아버지는 대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셨습니

다. 다행히 1기였고, 항문을 살려낼 수 있다는 말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요. 그러나 암 덩어리는 예상과 달리 항문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잘라낸 부위가 제법 많았나 보더라고요. 그

후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배변 주머니를 차지 않는 것만 해도 다

행이다’라고 생각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은 점차 변하셨지요. 변의를

느낄 여력도 없이 수시로 변이 나오곤 했으니까요.

2년을 기저귀를 차고 계셨던 것 같네요. 지금은 작은 패드로 바

꾸시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 듯해도 여전히 느닷없이 닥치는 변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외출을 잘 못하세요. 매일 뒷산

을 등산하셨는데 다녀오신 후에는 씻기 바쁘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무릎수술 후에는 못 하시게 되었어요. 운동은 해야겠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자전거를 타시는데 이게 또 아버지를 힘들게

김수정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서천동

던 동생이 아이스크림의 일부를 땅에 떨어트리자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했습니다.

이어서 남산식물원으로 구경을 갔습니다. 유리로 된 구조물 안

에 처음 보는 식물들이 가득 심어져 있고, 특히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바나나 나무에 바나나 열매가 달려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신기

하고 먹고 싶은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여기저기를 구경했습니다.

소풍날의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엄마는 저희

들을 꼬옥 안으시며 우리 강아지들과 너무 행복한 소풍이었다며 흐

뭇해하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엄마와 동생, 누나와 함께

간 여름날의 남산 소풍이 나의 심장을 가장 빨리 뛰게 하는 신나

고, 행복했던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날 저희 모자는 완도로 내려왔습니다.

며칠 뒤 엄마는 다시 장사를 가셨고, 저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

로 생활했습니다. 동생과 싸우지도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

가 주고가신 돈은 꼭 학용품 사는 데만 쓰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

도 꾹 참았습니다. 이 돈을 벌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하시

는지, 저희들을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7년 전에 엄마는 힘들게 암으로 투병하시다 하늘나라로 영영 소

풍을 가셨습니다.

어렵고 혼자서 감내하기 힘든 현실에서 사력을 다해 자식들 뒷바

라지를 하며 당신의 삶은 없으셨던 나의 어머니.

정말 보고 싶고, 그립고,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이라도 이 찬란

한 봄 햇살 속에 유년시절로 돌아가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신나

고 즐겁고 행복했던 그날, 엄마와의 소풍을 가고 싶습니다.

합니다. 짧은 시간, 잠깐 타시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시고 항상 실

수를 할까 겁내시지요. 엘리베이터, 지하철, 버스 등 밀폐된 공간에

서 실수를 하신 적이 있어서 그런 장소도 꺼리십니다. 본인의 의지

와는 상관없이 정말 어이없이 변이 나오거든요.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작년 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꽃들이 만

개하고 햇살이 가득한 날이었는데, 아버지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공원길을 걸어오는 동안 여섯 살 제 딸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

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지요. 민망하고 서운해진 아버지가 이유를 물

으니 딸아이는 쭈뼛쭈뼛하며 말했습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대장암 판정을 받은 후 아버지는 손을 자주 씻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도 약한 강박증이 있었으나, 병원을 드나들고부터는 숫자나 의

미 불명의 구호들을 외치면서 손을 씻으셨지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잠갔다, 잠갔다 등 손을 씻는 내내 무언가 확인을 하듯이

동작을 반복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은 건조해지고 거칠

어졌고 이제는 핸드크림을 바르는 일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반복과 확인을 거듭하는 손 씻기가 끝나면 크림을 바르는 순서에

또 구호를 붙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 씻기와 크림 바르기가 반

복되다 보니 강박증과 결벽증이 심해져만 갔지요.

그런 할아버지와 다르게 덜렁대고 천방지축인 손녀의 중요한 일

과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동네 슈퍼에 과자를 사러 가는 일이었습

니다. 제 딸아이의 손은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끈끈함으로 뒤덮여

있었고 꼬리꼬리한 냄새까지 나곤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 손

을 꼭 잡고 동네 산책도 하고 과자도 사러 가곤했답니다. 그런 손녀

가 자신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자 아버지는 이제는 손을 좀 덜 씻어

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박증이 사라질 때쯤엔 일상생활이 편

안해질는지, 아니면 일상생활이 편안해질 정도로 완치 판정을 받

아야 강박증이 사라질는지, 바라보고 있자니 답답하기도 하고 안

타깝기도 하더군요.

돗자리를 펴고 김밥을 나눠 먹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내내 손을

비비셨습니다. 손을 씻고 싶으신 게지요. 눈치를 챈 어머니가 물티

슈를 꺼내 건네주었는데 글쎄 아버지가 손녀 눈치를 보는 것이 아

니겠어요? 그때 벚꽃잎 한 장이 아버지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할아버지 기분을 상하게 한 당사자인 딸아이

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습니다.

“와~ 할아버지 머리 위에 꽃이 폈어!”

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강박증이 사라질 때쯤엔 일상생활이 편

그리고는 팔랑이는 손짓으로 꽃잎을 떼어 할아버지 손에 꼭 쥐

여주었지요.

“소풍 오니 좋지? 할아버지 머리에 꽃도 피고. 할아버지 머리카

락색이랑 이 꽃이랑 잘 어울려.”

반백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하던 딸아이는 무슨 변덕인지 갑자기

할아버지 손을 잡고 과자를 사러 가자 조르더군요. 공원까지 끌고

왔지만, 줄곧 메어있던 자전거를 타고 가자는 통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타게 되었습니다.

꽃들이 지천에 널린 봄날, 손녀와 자전거 데이트를 떠난 아버지

뒷모습은 무척이나 앙상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낡은

바이올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끊어진 줄, 오래된 나무, 텅 빈

몸통. 씁쓸한 느낌이 들어 메마른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손녀를 등에 붙이고 과자를 사서 돌아온 아버지의

등은 뜨거워 보였습니다. 이마에 땀도 맺혀있더군요. 둘이 무슨 정

담을 나눴는지 아버지 얼굴은 해사하니 밝아 있었고, 과자를 잔

뜩 손에 쥔 딸아이도 신이 나 보였습니다. 덜컹거리는 자전거 뒷자

리에서 이미 젤리를 까먹었는지 끈적끈적한 빨간색 색소들도 보였

지요. 그 손으로 다시 아버지의 등을 끌어안고 문지르고…. 손녀의

손을 꼭 붙들고 자전거에서 내려 준 아버지는 어쩐 일인지 화장실

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돗자리에 앉아 손녀와 사온 과자를

나눠 먹으며 하하 호호 웃음잔치를 벌이더니 불현듯 저를 보며 그

러셨습니다.

“우리 이제 소풍을 자주 오자.”

“좋죠. 꽃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아버지도 좀 다니셔야 해요.”

아버지의 말씀에 신나서 대답하는 날 보던 딸아이가 박수를 치

더군요.

“할아버지는 엄청 많은 소풍을 다녔겠네? 이렇게 나이가 많으니

소풍도 엄청 많이 좋았겠다.”

그 말을 듣던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러시더군요.

“할아버지 소풍은 이제부터야.”

갸우뚱한 손녀의 입안으로 과자를 넣어주며 더러워진 손을 물티

슈로 꼼꼼히 닦아주고는 저를 바라보며 웃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소풍은 병에 걸리기 전과 병에 걸린 후로 나뉜다고 말

씀하시더군요. 병에 걸리기 전에는 인생이 소풍 같다는 놈은 대체

어떤 호사를 누리고 갔냐고 빈정거렸는데 병에 걸린 지금은 건강했

던 지난 시절이 모두 소풍 같다고 하십니다. 지나간 젊은 시절과 거

리낌 없이 누렸던 일상들이 소중한 선물처럼 느껴진다고. 그런 말

씀을 하시는 아버지 머리 위로 마치 팡 터진 축하 꽃가루 같은 벚

꽃잎들이 날리기 시작하더군요. 딸아이는 한참을 벚꽃잎으로 장난

을 치더니 어느새 한 장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첫 소풍 기념이야. 선물!”

딸아이의 작은 손에 담긴 벚꽃잎은 몇 장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

도 짓눌러져 진분홍 꽃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런 벚꽃잎을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계신답니다.

이 시대 이 나라 모든 가장이 그렇듯 늘 바쁘고 힘들고 뒤돌아

볼 여력도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께서 이제는 인생이 소풍 같다 하

십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라고 저희에게 말씀하시고 매일

을 즐기며 살라 하시네요.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피곤하게 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삶의 선물 같은 것이

수상작

동상니 감사히 여기며 즐기라고요.

일 년이 지난 지금, 저는 남편을 따라 경기도로 이사를 왔고 부

모님은 부산에 계십니다. 한두 번의 항암치료기를 거치고 나면 의

학적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시기임에도 아버지는 여전

히 배변에 어려움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소풍 이후 아버지는 자신의 몸과 친해지기로 결심하

셨다 합니다. ‘나는 왜 이럴까? 이럴 줄 알았으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인데’라며 자책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던 날들과 달리 그저 이런

것만으로도 어디냐,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도 많으니 이제 그만 받

아들이자 하신답니다. 그런 아버지의 변화로 가장 기쁜 사람은 어

머니지요. 건강식에 자연식에 아무리 신경을 써줘도 우울해하던 아

버지가 이제는 어머니 손을 붙잡고 동네를 산책하신다 하네요.

또다시 돌아온 봄, 지금 저는 부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부산은

천지가 꽃 몸살을 앓고 있네요. 일곱 살이 된 딸아이는 여전히 할

아버지 손을 붙잡고 동네 슈퍼에 과자를 사러 갑니다. 아버지의 강

박증은 다행히 어느 정도 완화되어 예전처럼 손을 많이 씻지는 않

으십니다. 소풍을 가자며 김밥 재료도 사고 음료수도 사며 즐거워

하는 표정이 할아버지와 손녀가 똑같아 신기하기까지 하네요. 자전

거를 가지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 아버지께 제가 먼저 자전거를 가

지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번 소풍에는 아버지의 뒷자리에 제가 앉아 보려고요. 아버지

의 등을 꽉 잡고 어린 시절과 다름없는 따뜻함을 느껴 보렵니다.

아버지의 마른 등을 어루만지며 뜨거운 체온을 느낄 때, 살아있음

을 증명하는 그 온기에 봄꽃까지 더한다면, 어쩌면 저에게도 소풍

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네요.

파란하늘 검둥산 검정길. 오늘은 탄광촌 소풍 가는 날입니

다. 그러나 아홉 살인 제 마음은 그리 편하질 못합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죠.

“오빠, 우리 내일 소풍 가는 거야?”

“응!”

“오빠, 우리 낼 뭐 싸갈까? 엄마 아빠도 없으니깐 우리가 돈 벌어

서 먹고 싶은 것으로 다 싸가자.”

“그래. 우리 그럴까?”

전 동생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사실 강원도 오지 탄광촌이라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시다 진

폐증에 걸려 태백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타

지에 나가 계셨기에 집에는 저와 여동생, 남동생 셋이서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 저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

김충근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났습니다.

“충근아. 이 아빠가 없으면 니가 이 집에 가장이다. 다시 말해 니

가 동생들의 아빠가 되는 거다. 알겠지?!”

아빠가 없어도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던 아버지 말씀을 생

각하고 나니 동생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빠, 우리 진짜로 소풍 가는 거 맞지? 진짜로 가는 거지!”

동생은 몇 번이고 해맑게 웃으며 저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저는 소풍 가기 전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곤히 자는 동생들을 뒤로하고 광에서 비료 푸대를

찾아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돌며 병을 줍기 시작했습니

다. 밥도 굶어가며 하루종일 마을을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지만 주

운 것이라곤 고작 병 몇 개가 전부였어요. 그래도 뭔가를 살 수 있

겠다는 기대감에 구멍가게로 달려갔습니다.

“아저씨, 병 갖고 왔어요.”

“그래.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음… 80원이네. 저기 사탕 있

으니 갖고 가렴.”

그러나 사탕보단 동생들이 먹고 싶다던 초코파이, 영양갱, 사이

다, 과자들만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저는

사탕 두 개만 받아들고 힘없이 집에 왔습니다. 동생은 저의 초췌해

진 모습을 보고 좀 많이 실망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오빠, 이것 밖에 없나?”

“아니다. 오빠가 많이 사왔어. 그런데 무거워서 못들고 왔다.”

“정말이지, 오빠!”

“당연하지!”

정말 행복해 하는 동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만 전 거짓말

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빠. 무거우면 지금 나랑 같이 가서 들고 오면 안되나?”

“아…. 안된다. 지금 너무 어두워서 호랑이가 나타나 우리를 잡

아 먹을 수 있다.”

전 얼떨결에 둘러댔지만 마음은 편칠 않았습니다. 얼마 후 동생

들은 들뜬 마음으로 잠이 들었지만,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

다. 낮에 병 팔러 갔다 가게에서 본 맛있는 과자들만이 제 눈에 아

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전 고민 끝에 해서는 안되는 결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나중에 돈 벌어서 갚으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며 도둑질

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불꺼진 구멍가게로 향했습니다.

시골이라 인적도 없고 많이 무서웠지만, 오직 동생들과 ‘과자’ 생

각뿐이었습니다.

살금살금 저는 가게로 향했고, 가게 앞 작은 개구멍에 다달았습

니다. 그리고 저는 작은 개구멍에 몸을 밀어넣고 가게 안으로 들어

가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 다음 전 낮에 본 과자와 음료수를 봉지

에 담아 집으로 왔습니다. 전 동생이 볼까봐 과자를 농안 깊숙히

꼭꼭 숨겨놓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디선가 나를 부르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충근아! 충근이 있니?”

구멍가게 주인아저씨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최

대한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아저씨 왜 절 찾으세요?”

“충근아. 사실 어젯밤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혹시 너희들

무슨 소리 못들었니?”

“네… 못들었는데요”라고는 말을 했지만 대답하는 순간 저의 심

장이 떨리고 온몸이 얼어 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진짜로 못들었니? 이상하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미안하다. 그래 쉬어라” 그러시

며 되돌아 가셨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또 밖에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

습니다.

“충근아.”

“네.”

“너 정말로 못들었니? 아저씨는 널 의심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혹시나 너나 니가 아는 사람들 중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으면

아저씨가 다 용서해줄꺼니깐 있으면 있다고 하라고 니가 이야기 좀

해주면 안되겠니?”

“….”

“그럼 내가 진짜로 다 용서해줄꺼니깐. 알았지. 충근아!”라고 말

씀하시면서 제 눈을 보는데 ‘난 니가 도둑놈인 걸 다 안다. 그러니

빨리 자수해라. 그럼 내가 다 용서해줄게’라는 표정이셨습니다.

전 이건 아니다 싶어 용서를 구하려는 순간 밖에서 가게 아주머

니가 가게로 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저씨는 가게로 돌아가

셨고 시간이 조금 흘러 아저씨는 또 다시 왔습니다.

“충근아, 미안하지만 아까 아저씨가 말을 다 못해서 그러는데 한

번만 더 물어보자” 하는 순간 제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눈물이 폭포수가 되어 흘렀습니다. 어느새 제

손은 저도 모르게 제 눈 앞에서 싹싹 빌고 있었고, 제 목으로는 연

신 “잘못했어요”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울면서 아저씨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

보니 아저씨는 웃고 계셨습니다.

“껄껄껄. 이놈들 과자가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을 하지. 껄

껄껄. 아침밥이나 먹었니?”

흐느끼며, “아니요”라고 하자 아저씨는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고

나가시더니 미역국에 밥을 한냄비 말아오셨습니다.

“이거 먹고 어여들 학교나 가거라. 맞다! 너희들 소풍 가지!”

“네! 아저씨.”

저는 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농 속에 꽁꽁 숨겨놓았던 과자들

을 꺼내 놓았습니다.

“아저씨, 이거요.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저는 울먹이며 어젯밤에 훔친 것들을 아저씨에게 내놓았습니다.

“어라. 요놈 봐라. 두꺼비 소주도 있네. 한잔 하려고 했냐? 껄껄껄.”

그렇습니다. 밤이라 달빛에 도둑질을 하려니 사이다와 소주가 구

분이 안돼 사이다를 담는다는 것이 소주를 갖고 오고 말았던 것이

었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니. 동생들과 맛있게 나눠 먹어라.”

“예? 정말요?”

“그래. 이놈아. 껄껄껄.”

아저씨는 한참 웃으시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제게 물으셨

습니다.

“그런데 충근아, 우리 가게 앞 개구멍에서 너희 집까지는 왜 빗자

루로 쓸었니?”

저는 아저씨의 미소띤 얼굴을 보며 저의 완벽에 가까운 도둑질을

솔직히 말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제가요. 어젯밤에 이것저것 훔쳐 개구멍으로 엎드려 빠

져나오는데요. 글쎄 석탄가루 위에 제가 들어온 발자국이 달빛에

비춰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발자국을 없애려고 제

가 가게 개구멍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쓸었어요.”

사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당시 저는 완벽했다고 생각했

습니다. 사실 석탄가루는 남들이 생각하기에 시커멓다고 생각하지

만 가끔 달빛에 비춰 반사가 되면 유리알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

다운 빛을 내기도 합니다. 달빛에 비췬 제 발자국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고 저는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개구멍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깨

끗하게 쓸었던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서 쓸었구나.”

그때는 완벽 범죄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

다. 어쨌든 가게 아저씨 덕에 아침밥도 맛있게 챙겨 먹고 과자에 빵

에 음료수에 어렵게 소풍 준비를 한 우리는 정말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걸 어쩐다냐. 어떡하면 좋냐” 하며 동네사람

이 학교 쪽으로 몰려가며 울고 있었습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

었습니다. 학교를 가는 길에 같은 반 친구를 만났습니다.

“안녕, 충근아. 그런데 오늘 소풍 못간다.”

“왜?”

“나도 몰라.”

전 동생들과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

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서 울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을 치며 울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

들은 우리가 소풍을 못 가게 된 것이 이렇게나 슬펐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동생에게 말했죠.

“인숙아, 이 사람들 소풍 가게 해 달라고 우는가 보다. 우리도 앉

아서 같이 울어버리자.”

“싫어, 오빠. 난 우는 거 싫다.”

“그럼 우리 소풍 못 갈 수도 있는데?”

동생은 소풍을 못 갈 수도 있다는 말에 금세 눈물이 흘러 내리

기 시작했고, 우리 삼형제는 그래도 주저 앉아 소풍을 가게 해달라

며 애절한 마음으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곤 얼마나 울었을까.

제 담임선생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어, 충근이 아니니?”

저는 흐느끼며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훌쩍.”

“그래, 대통령님 서거하신 걸 우리 충근이도 아는구나.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다 슬퍼하는데 왜 너라고 안 슬프겠니! 그만 울고 어여

동생들 데리고 집으로 가거라.”

“예? 선생님, 이거 소풍 보내 달라고 우는 거 아니였어요?”

선생님은 좀 황당해하셨지만, 곧 저희들을 보시며 빙그레 웃으셨

습니다. 제 나이 아홉, 아홉평생을 살면서 정말 제일 많이 울었던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습니다. 병원에 계셨던 아버지의 병세는 나

아지기는커녕 몸이 점점 말라가시며 악화되어 집으로 오시게 되었

습니다. 철이 없을 땐 몰랐는데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위해 일하시

다가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왔습니다.

“충근아, 미안하다. 엄마 아빠 때문에 소풍도 제대로 못 가보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힘들었지! 조금만 기다려라. 아빠가 보상

금 나오면 호강시켜줄게.”

“아니다. 아빠! 나, 아빠 없을 때 소풍도 갔다오고 친구들과 진짜

재미있게 많이 놀았다.”

“껄껄, 우리 아들 철 진짜 많이 들었네. 충근아, 너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아빠 아들로 한번만 더 태어나줄래? 그때는

아빠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진짜 많이 놀아줄게. 알았지!”

“헤헤헤. 아빠 정말? 그런데 난 싫다!”

“왜 싫어? 아빠가 싫어졌나?”

“아니, 그게 아니고 요번엔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렇게

많이 고생했으니깐, 다음엔 내가 아빠 할란다. 아빠가 나 해라.”

저는 어린 마음에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짜 진심이었습

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와 이별하고 벌써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저도 어느

새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빠, 언제 와? 많이 보고싶단 말이야.”

“오늘은 얼만큼 놀아줄껀데?”

“아빠, 오늘은 우주만큼 하늘만큼 놀아줘야 해.”

“아빠! 나 찾아봐.”

퇴근길에 집에 오면 제 아들은 꼭 저와 숨바꼭질을 합니다. 전

지금 매 순간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아버지도 저와 있었을 때 같

은 마음이었겠지요? 제 아버지의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을

지도 모를 우리 경준이. 네 할아버지와 약속했듯이 이번엔 이 아빠

가 널 행복하게 해줄 차례인 것 같구나.

경준아, 내년엔 초등학교 가면 우리 가족 다 같이 소풍가는 거다!

났으면 좋으련만, 아부지 나이 이십대 중반에 다시 6·25전쟁이 나

고 아부지는 또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목에 총탄을 맞고 겨우

숨만 이어붙인 채 남해로 돌아왔다고 했다. 모두들 한 달이나 사경

을 헤매던 아부지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

나, 아부지는 결국 살아났다. 덕분에 나도 생겨날 수 있었다.

그 뒤 아부지는 묵묵히 농사꾼이 되었다. 아부지와 함께 고등학

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학교 교장이 되고, 면장도 되고, 6·25전쟁을

용케 피해 갔던 사람들은 지역의 유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아부지는

땅을 갈고 지게를 지고 잡초 같은 농사꾼이 되었다. 자식 여섯을 거

느린 가난한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적 아부지는 늘 화

가 난 것처럼 보였다. 가끔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밥상을 엎기도 했고, 누군가를 향해 욕을 내뱉기도 했다.

아부지 가슴에 끌 수 없는 불이 붙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이 불은 ‘천식’이란 병이 되어 아부지를 30년 동안 괴롭혔다. 어릴

적 내게 아부지는 소처럼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 무뚝뚝하고 잔정

이 없는 사람, 밥상을 자주 엎었던 사람, 쌕쌕 턱까지 차는 숨을 겨

우 내뱉던 까만 얼굴로 기억된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인가 가을 소풍을 가는

아침이었을 게다. 아들을 유난히 챙겼던 엄마는 소풍날 아침에도

오빠 가방에만 사이다 한 병을 챙겨 넣었다. 딸들 몰래 아들 가방

에만 넣었을 것이고, 또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오빠

소풍꾸러미를 슬쩍 만져보고 볼록 솟아있는 사이다를 끄집어내서

는 떼를 썼다.

“맨날 오빠만 맛있는 거 사주고 우리는 뭐 입도 아인겨?”

고향인 남해에서는 아버지를 ‘아부지’라고 불렀다. 진주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아부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폼이 나

는 도시 아이들을 보면서 은근히 기가 죽었다. 아빠와 함께 외식을

했다든지, 아빠가 선물을 사줬다든지, 그런 이야기보다 야간자율

학습을 마친 시간에 딸을 데리러 온 아빠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걷

는 친구의 모습에 나는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은근히 시샘이 나

기도 했다.

1925년생인 아부지는 일제시대에 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 교장

선생님에게 항의하는 반일데모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퇴학

을 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비행장을

닦는 공사에 동원되어 2년을 꼬박 짐승처럼 일하다가 풀려났으나

한국으로 돌아올 차비가 없어 6개월을 일본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

다고 했다. 아부지의 청춘이 역사에 저당 잡힌 시간이 여기에서 끝

서명순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서명순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순

수상작

동상

돈이 어디 있느냐고 눈을 흘기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소풍을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미영이는 김밥도 싸오는디, 과자도 안 사줌시로 음료수도 안 사

주고. 무신 재미로 소풍을 가노? 지도 사이다 사주소. 안 그러믄

내는 소풍 안갈끼다!”

도시락 하나 달랑 들은 가방을 마루에 던지며 소풍을 안가겠

다고 달려들자 어머니는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내 등을

때렸다.

“이놈의 가스나야, 안 그래도 바쁜 아침에 와 생떼고? 퍼뜩 안가나?”

그 순간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솟구쳤다. 엄마는 오빠 도시락에만

계란후라이를 얹어줬으며, 라면도 오빠에게만 끓여줬고, 용돈도 늘

오빠에게만 넉넉하게 하사했다. 오빠 바로 밑에 있는 나는 오빠 옷

만 물려 입다보니 품이 크고 우중충한 색깔의 옷들뿐이어서 내가

남자애 같았다. 전과는 오빠가 쓰던 걸 써야했고, 어쩌다 올라오는

고기 반찬도 늘 아부지와 오빠 차지였다. 내 밑에 있는 막내 여동

생이 밥그릇을 돌리면 그나마 동생 밥 위에는 아부지가 얹어주는

고기 반찬 같은 것들이 쌓였지만, 나까지 밥그릇을 돌리자면 엄마

가 고함을 지르곤 했다.

그런 것들이 생각나자 나는 엄마가 혹시 계모가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자 더 서러워졌고, 갑자기 울음이 북받치며 나는

축담에 다리를 뻗고 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이놈의 가스나가?”

“엄마는 분명히 계모다. 오빠만 배 아파 낳은 자식이제? 엉엉엉.”

내 울음보가 터지는 사이 오빠는 사이다를 넣은 가방을 갖고 줄

행랑을 쳐버리고, 엄마는 ‘저 철딱서니 없는 걸 우야노’ 하는 표정

당황할 법도 하건만 엄마는 오히려 눈치가 빠른 내 팔을 꼬집으

며 사이다를 빼앗았다.

“이놈의 가스나가? 오라비 가방에는 와 손을 대노?”

“이왕 사는 김에 우리 것도 좀 사오지. 내도 사이다 묵고 싶다!”

“이놈의 가스나가?”

으로 쯧쯧거리며 아궁이 불을 마저 지피러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래도 어쩌랴, 이왕 터진 울음인지라 쉬이 그쳐지지는 않고 아직

소풍시간에 늦지는 않았으니 행여 용돈이라도 엄마가 주시려는가,

고집을 더 피우는 수밖에.

“엉엉. 내도 사이다 사주라!”

그렇게 떼를 쓰고 있는 사이 아래채 아궁이에서 소죽을 끓이고

계시던 아부지가 훠이훠이 마당을 건너오셨다. 엉엉 울면서도 아부

지 표정을 살피니 화가 나신 게 분명해보였다. 며칠 전, 남의 자전

거를 훔쳐 탄 오빠가 매질을 당하지 않았던가. 행여 아부지가 또 바

지게 작대기를 가지러 가는 건 아닌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부지는 마당에 서서 한참 나를 쳐다보더니, “퍼뜩 가거라. 소풍

늦겄다” 한마디했다.

나는 꺼억꺼억 흐느끼며 일어섰다. 내팽개친 도시락 가방을 둘러

메고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을 나섰다. 아부지도 밉고 엄

마도 미웠다. 일만하면서도 가난한 아부지가 미웠고,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사이다를 갖고 도망간 오빠 심부름

을 이제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렇게 간 소풍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기껏 해봐야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나 할 것이고, 장기자랑을 한답시고 까불이 경태가 ‘십

오야 밝은 달’을 부를 게 틀림없었다. 보물 찾기를 할 테지만 찾아

봐야 공책 한 권 정도가 고작일 테다. 모든 게 시들시들했다.

연옥이랑 순이랑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을 즈음, 저기서 아

부지가 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늘 그렇듯 아부지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은 허름하고 지게까지 지고 올라오는 걸 보는 순

간, 나는 재빨리 억새 속으로 숨었다.

“저 짝에 우리 아부지 온다. 내는 여기 없다 캐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으로 아부지가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계

신 곳에 오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아침나절의 그 쌀쌀한 눈초리가

원망스러워 아부지 얼굴을 보기도 싫었다.

억새밭에 엎드려 있는데도 아침나절처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

다. 김치볶음밥에 소풍날이라고 특별히 얹어준 계란후라이 도시락

을 먹지 않고 집으로 되가져 가서 끝까지 엄마와 아부지에게 악다

구니를 부리리라 이를 앙물었다.

“맹순아, 나온나. 너거 아부지 가셨다.”

잠시 후 연옥이가 내 등허리를 두드리며 내민 것은 아침나절에

내가 그렇게 사달라고 졸랐던 사이다였다. 그것도 한 병도 아니고

두 병이었다. 알사탕도 한 봉지 들어있었다.

“너거 아부지가 이거 니 주라고 하데. 우리하고 갈라 묵으라 카데.”

동네 여자애들을 불러 모아 병에 줄을 그으며, 한 모금씩 사이다

를 갈라 마셨다. 달짝지근하고 톡 쏘는 사이다가 식도를 타고 가슴

을 쏴아 하고 적셔주자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도시락

에 얹은 계란후라이를 보자, 배가 갑자기 고팠고 반 병 남은 사이다

와 함께 김치볶음밥을 후딱 비웠다. 공부벌레인 상태가 이번에는 ‘십

오야 밝은 달’을 불러서 친구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도 아버지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뒤 장면은 이랬을 것이다. 아버지

는 아들에게만 사이다를 사준 엄마를 향해 화를 냈을 것이며, 동

네 구판장에 가 딸들의 사이다를 사서 동생과 내가 가는 소풍 장

소를 찾아 사이다를 날랐을 것이다. 아부지는 돈이 없었으니 작은

집이든 어디든 돈을 조금 빌리러 갔을 것이다. 그리고 바삐 땔감을

수상작

동상

나는 딸들을 유난히 차별하는 가정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는 딸들(고모들)과 손녀 등 여자

들은 아예 사람대접을 안 해주셨다. 나는 딸들은 으레 그렇게 살

아야 하는 걸로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기를 못 펴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불평도 불만도 몰랐다.

아버지께서는 말단 공무원으로 박봉이었기에, 언제나 대식구 생

활은 빠듯했고 월급 날이면 엄마는 돈 쓸 일이 많아 돈을 쪼개도

부족하단 말을 많이 하셨다.

엄마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바짝 마른 채 자주 몸이 아프셨

고, 남동생 둘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거기에다가 열식

구 큰 살림에 밭농사까지 지으셨으며, 동생 둘을 잠깐씩 딸들에게

맡기고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푸성귀를 뜯어다 반찬을 만드셔

야 했다.

송후남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하러 산을 돌아다니느라 점심도 굶었을 것이다.

그때의 아부지 나이가 되니 모든 것들이 상상되고 짐작이 된다.

사이다 한 병에 아침부터 울음보를 터뜨렸던 둘째딸을 쳐다보던 쌀

쌀한 눈빛은 나를 향한 질타가 아니라 가난을 향한 아버지 스스로

에 대한 탄식의 눈빛이었음을, 부모가 되어서야 알 것만 같다.

재작년에 아부지는 팔십넷의 나이로 마늘을 키우던 땅에 고이

묻히셨다. 천식은 아부지 나이 50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꽃피는

봄과 찬바람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에 기침이 심해지고 숨이 가빠,

매번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녀야했다. 세 딸 중 유

일하게 운전을 했던 나는 봄과 가을이면 아부지를 모시고 병원 나

들이를 갔다. 20여 년을 꼬박 남해에서 대전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아부지는 남들은 꽃놀이 가고 단풍놀이 가는 때에 맨날 요리

숨이 차 우짜요?”

“허허 내는 딸이랑, 소풍 안가나? 요래 운전 날래게 잘하는 니

뒷꼭지만 봐도 기분 좋고, 니덕에 대천지 구갱하는 것도 괘안타.”

아부지는 대전으로 가는 3시간 동안 절대 잠을 자지 않았다. 늘

차장 밖을 구경하며 진달래가 피었구나, 단풍이 들었나를 읊조리

며 지나가는 풍경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아부지가 곁에 없는 지

금 진달래가 피고 소풍가기 좋은 날, 아부지를 모시고 대전으로 쌩

쌩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부지, 지금에서야 한 번 묻고 싶네예. 아부지는 도시락 싸들

고 소풍이나 한 번 가봤십미까. 아부지, 인제서야 고백함미더. 그때

사이다… 참말로 고마웠어예. 지는 지금꺼정 그래 맛있는 사이다

를 묵어본 적이 없네예. 아부지, 아부지, 보고싶어예!”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나는 소풍이란 단어는 어린 나이지만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같다.

1950년대 중반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 나는 대전 대흥국민학교

2학년 봄 소풍날을 60여 년이 다 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

학년에 이어 2학년 1학기 담임이셨던 이복자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종례시간에 “자 여러분 주목~. 기

쁜 소식이 있어요. 이번 주 금요일에 소풍을 갈 텐데, 장소는 보문

산이고 그날 만약 비가 오면 다음 주로 미룰 거예요” 하고 말씀하

셨다. 교실은 갑자기 시끌벅적 손뼉을 치며 좋아서 야단들이다. 옆

반에서도 그 소식을 들었는지 “야~” 하고 시끄럽다.

선생님께서는 막대기로 탁자를 ‘탁탁’ 치시며 “조용히, 조용히”

하시더니 “혹시 못 가는 학생 손 들어봐요” 하시는 것이었다. 아이

들은 고개를 돌려 누군지 살펴본다. 한참 후에 너덧 명이 손을 든

듯 만 듯 고개를 움츠린 채 반쯤 들었다. 가난했던 시절 그때는 끼

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많아 보리밥도 배불리 못 먹던 때다. 나도

소풍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손은 안 들었다.

하교 후 집에 와서 엄마한테 “엄마, 이번 금요일에 소풍 가는데

~.” 뾰로통한 채 남의 얘기하듯 한마디 던지고는 돌아올 대답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6학년인 위에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왔고 밝은 표정이다. 이웃 친구들 두세 명과 어울려 소풍 준비

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집에는 아예 기대도 않고 자기 스스로 해

결책을 찾은 것이다.

소풍 가기 전날 방과 후 집에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동

생들만 보시고 소풍 준비를 안 하시는 것 같았다. “낼 소풍 가는데

~.” 내가 입속말처럼 중얼거리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내가 정신

이 없어 죽겠다. 몸은 아프고 자 이걸로 눈깔사탕을 사 먹든, 번데

기 사탕을 사 먹든~” 하고 몇 푼인가 고쟁이 속에서 꼬깃꼬깃한 1

환짜리 지폐 몇 장을 손에 쉬어 주시며 “그깟 보문산은 우리 집에

서 빤히 보이는데 딴 날 동네 아이들하고 가라. 소풍은 가지 말고”

~.” 내가 입속말처럼 중얼거리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내가 정신

하시는 것이었다.

많이 섭섭했지만, 곧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언니는 뭐가 그리 바

쁜지 친구네로 집으로 들락날락 분주했다. 나는 번데기 사탕 한

줄을 언니한테 건네주며 소풍 가서 먹으라고 했다. 고마워 하는 얼

굴이다. 엄마도 할 수 없이 내 눈치를 보며 몇 푼인가 언니한테 쥐

여주시는 것 같았다. 이 저녁, 친구들은 과자 보따리를 풀었다 다

시 쌌다 하며 맘이 설레어 잠도 안 올 것이다.

드디어 소풍날,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나는 소풍은 못 갔지만

가는 코스를 알고 있기에 소풍 행렬을 보려고 길 한 모퉁이 전봇대

뒤에 숨어 보문산으로 향하는 그 광경을 부러워하며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발견하셨는지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오시는 게 아닌가. “어쩌지….” 나는 들키고 말았다. 부

끄럽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냥 선생님과 맞닥뜨리고 말았

다. 선생님은 내 손목을 꼭 잡으시며, “왜 여기 있어. 너도 같이 가

자, 어서~. 아, 참 엄마한테 말씀드려야지” 하시며 내 손을 잡은 채

앞장서서 우리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셨다. 선생님이 들어가시자

막내동생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엄마는 화들짝 놀라시며 어찌할

줄 몰라 하셨다.

“아이고 선생님, 죄송해서 어쩌지유~” 하시며, 아기를 안은 채

몇 번이나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안절부절못하셨다. 선생님은 “아,

아니에요. 얘 지금 소풍 데리고 가려고요. 바빠서 이만 갑니다” 하

시며 나를 재촉해 빨리 뛰어가셨다. 그리고 어느새 선생님 손에 있

던 조그만 가방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

만 어느 학부형이 정성껏 마련한 선생님 도시락이었다. 선생님은

빈손인 나에게 “이거 네 거야. 이따 애들하고 둘러앉아 먹어” 하시

며 나를 기죽지 않게 배려해주셨다.

빨리 가서 소풍 줄 맨 마지막 대열에 선 채 조금씩 빠른 걸음으

로 우리 반까지 다다랐고, 반 친구들은 나를 보자 “너 아까 출석

부를 때 없었잖아. 언제 왔어?”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주춤하자 선생님께서 “응. 좀 지… 지각, 늦게 왔어. 자, 어서 가자!”

하시며 얼른 난처한 내 입장을 대변해주셨다.

점심시간.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근사하고 호사스런 도시락

을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은 내 도시락을 부러운 듯 힐끔힐끔 바라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얻어먹는 도시락이었는데, 쳐다보는

친구들한테 하나씩 먹어보라고 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땐 너무 어려

서인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던 것 같다.

화려한 점심과 간식까지 맛있게 먹고 보물 찾기 시간이 있었다.

상으로 공책과 크레파스를 탔고, 이날이 나에겐 최고의 소풍날이

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특히 크레파스

는 꼭 사야 할 때여서 더욱 기뻤다.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소풍 때가 되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고소한 참기름, 깨소금에 밥을 비벼 가운데 노란 단무지를 넣고 김

밥을 싸셨다. 초라하지만 조그만 과자 봉지도 챙겨주셨다.

한참 지나, 중3부턴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남동생 소풍 때가 되면

나는 색을 맞춰 예쁘게 도시락을 싸고 가게에서 맛있는 과자랑 준

비해서 소풍 채비를 정성껏 아주 정성껏 챙겨주었고, 동생들은 좋

아라 했다.

나도 정말 기쁘고 흐뭇했다. 아마도 내가 받아보지 못한 걸 아니

그보다 내가 받아보고 싶었던 것을 동생에게 베풀어줌으로써 대리

수상작

동상

제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은 지금부터 40여 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소풍 가는 날이 오히려 즐겁지 않았습니다. 다

른 아이들은 예쁜 김밥이나 삶은 밤, 과자를 싸와서 펼쳐놓고 먹는

데 저는 시어빠진 김치쪼가리를 반찬으로 싸왔으니 창피해서 도시

락을 내놓기도 싫을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어머니는 학교에는 물론이고 소풍 한 번 따라오지 않으셨지요. 매

일 일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탓도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나이가 할

머니여서 저 자신도 어머니가 따라오는 게 싫었습니다. 아이들이

“누구 엄마는~ 할머니래요~” 하며 놀리는 것이 싫어서 오히려 제

가 못 오게 한 것도 있었을 겁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아예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된다며 그냥 소

풍을 갔습니다. 그 덕에 친구들의 도시락에서 김밥 하나씩을 얻어

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제게 소풍은 늘 외롭고 슬픈 날이었습니다.

정연순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2가

만족을 했던 것 같다.

엄마도 한껏 칭찬을 해주셨고, 나는 신이 나서 그 뒤로 부엌일을

가끔 돕게 됐고 음식 만드는 취미도 갖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

성껏 하는 습관이 생겼다. 부족했던 환경이 나에겐 오히려 득이 되

었고 선생님께 배운 대로 살면서 실천한 기회가 그래도 여러 번 있

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그 옛날 통치마 저고리를 입으신 그 모습

그대로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결혼

후에도 시어른을 모시고 남편과 두 아들을 비롯해 시댁 동기간들

이 다 같은 동네에 살아 우리 집에서 자주 모였고 나는 때마다 걱

정하지 않고 음식을 장만해 나눠 먹곤 했다.

아마도 맛있다고 칭찬하며 먹어주는 것으로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에서 기인

한 것이라 생각된다.

선생님께서는 올드미스로 가장 노릇을 하며 여러 명의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결혼도 못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3학

년이 되자마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1~2학년을 함께한 친

구들은 무척 서운해했다.

그리운 선생님!

저 어렸을 적 단골 소풍 장소였던 보문산은 세월이 많이 흐른 지

금도 여전히 거기 그대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봄기운 생기에 푸르

름을 더하고 온갖 꽃들도 차이를 두고 봉긋봉긋 꽃망울을 터뜨리

며 아름답게 그 산자락을 수놓아 가고 있겠지요.

선생님, 어디에 계신지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상당히 연로하실

텐데 뵐 수는 없어도 그 은혜 그 사랑 감사합니다. 많이 고마웠습

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만수무강하소서.

그 노랫소리가 어찌나 즐겁고 신이 났던지요. 그런데 마음 한쪽

이 시려왔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의 몸이 허망하고 세월이 무정한

것인가 탓을 했습니다. 조금만 세월을 돌려서 이 지경까지 안 되었

을 때 어머니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

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도 어머니와 즐거운 소풍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나이

여든다섯부터 3년간, 매년 저는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2005년 1월, 아버지가 아흔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골

에서 아버지와 거의 70년을 해로하신 어머니는 서울로 오시게 되었

지요. 기억력이 떨어져 혼자 사실 수 없는 형편이어서 아들과 딸이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입니다.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는 삶의 터전이 바뀌자 치매가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엔 어머니의 나이를 열 살 정도 까먹더니 일흔 살 정도의 기억에 머

물렀습니다.

“엄마, 몇 살이고?”

“아이고, 나 마이 묵었다. 하매 칠십이나 됐을긴데?”

그러던 해,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듯, 노인복지관 주

간보호소에 다녔습니다. 아침 10시에 가서 오후 4시면 집으로 오셨지

요. 물론 혼자서는 길을 몰라 모시고 가고 오고 해야만 했습니다.

학교라곤 다녀보지 못한 어머니가 기억을 잃고서야 학교 같은 곳

을 다녔습니다. 한글 시간도 있고, 노래 부르기 시간, 그림 그리기

시간, 만들기 시간 등 마치 어린아이들이 노는 것과 같았습니다. 좀

더 일찍 이런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긴 했지만 그

래도 이런 경험을 하신다는 게 저로서는 정말 뿌듯했습니다.

그해 가을, 어머니는 소풍을 가게 되었지요. 보호자가 바빠서 못

오실 경우를 생각해 복지관에서 봉사자 한 명씩을 붙였지만 저는

제 어머니의 보호자로 참여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어린이대공원으

로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팔청춘에~ 소년 몸 되어~서~~.”

그 노랫소리가 어찌나 즐겁고 신이 났던지요. 그런데 마음 한쪽

어린이대공원 팔각정에서 도시락을 펴놓고 점심을 먹었습니다.

어머니 한 입, 나 한 입, 이렇게 자연 속에서 젓가락으로 나누는 즐

거움을 그때야 느꼈습니다. 그날 식물원 앞에는 국화꽃이 만발했

었지요. 단체사진도 찍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꽃밭으로

첫 소풍을 간 것입니다.

이듬해 가을, 두 번째 소풍은 63빌딩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에

한강 다리 아래 고수부지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습니다. 마침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족관

으로 들어갔습니다. 산골에서 사신 어머니가 수족관 구경을 했습

니다.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물고기가 신기했던지 수족관 유리

를 쓰다듬으며 그날 작은 바다를 구경했습니다. 어머니의 두 번째

소풍은 환상적인 바다로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어머니의 소풍 장소는 일산의 ‘쥬쥬 동물원’이었

습니다. 차를 타고 좀 멀리 떠나는 소풍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

는 차 안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로 옛날 노래들이었지만 어머

니가 혼자서 부르던 노래는 늘 청춘가였습니다.

“이팔청춘에~~소년 몸 되어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은 뒤 악어 쇼를 구경했습니

다. 악어의 입속으로 조련사의 머리를 넣는 장면에서 경악했습니

다. 위험한 공연이었지만 재미있게 구경했습니다. 길거리에는 오랑

우탄인지 원숭이인지 사육사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

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그것이 사람인 줄 알고 악수

를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새와 동물들을 구경하시며 신기해했습니

다. 그것이 어머니와 저의 마지막 소풍이었습니다.

그 뒤로 어머니는 기억을 거의 잃게 되었고, 더는 소풍을 갈 수

없었습니다. 2년을 더 사셨는데, 어머니는 저와 떠났던 세 번의 소

풍을 기억이나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위해 한 번도 싸주

시지 못했던 김밥을 늙어 돌아가실 무렵에야 막내딸과 들판에 앉

아 나누던 그 시간을 말입니다. 팔각정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던

그때를 말입니다. 물고기들이 예뻐서 수족관 유리에 손을 대 보던

그 추억을 어머니는 기억하고 계셨을까요?

저는 소풍에서 보았던 꽃도, 물고기도, 동물들도 온전히 기억하

지 못합니다. 다만 어머니와 옆자리에 버스를 타고 손을 잡고 떠났

던 따스한 온기만이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오며 가며 부르던 그

노랫가락만이 머릿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쌀쌀한 가을날 김밥을

나눠 먹던 그 순간만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어린 날 소풍으로 얼룩진 상처가 치유되고도

남았습니다. 딸아이의 그런 투정에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 아팠을

까요?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들의 반찬 투정을 들으니 그

때 받았을 엄마의 상처가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제 가슴에 박힌다

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시간을 거슬러 아기가 되었다가 이제 다시 돌아왔던 세

계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치매로 헤매던 그 시간이 어머니에게는

행복했던 날들로 되돌아가는 긴 소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추억을

거꾸로 헤집으며 살아왔던 시간을 되짚어 여행을 가신 거겠지요.

어머니! 올해가 어머니 가신 지 3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도 전주

로 이사를 왔어요. 어머니가 가신 하늘나라의 소풍은 어떠신가요?

지금도 청춘가를 부르시나요? 저에게 어머니와의 멋진 세 번의 소

풍이 기억으로 남아있어 행복합니다. 어머니도 이 막내딸과의 소풍

이 즐거우셨겠지요?

(주)무한타올은 타올의 고급화, 차별

화 전략으로 타올, 가운, 매트, 슬리퍼

등의 제품을 생산·판매해 소비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기업이다. 기존

과 다른 전략으로 타올시장을 놀라게

한 (주)무한타올의 강형철 대표. 그는

여성의류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이 들어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사

업 아이템을 찾던 중, 타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일했던 여성의류 회

사는 아무래도 계절상품이 많아 항

상 재고관리가 어려웠다. 하지만 타

올은 색의 차이만 있을 뿐,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아이템이 아니었

다. 또한 과거에 비해 디자인이나 색

감이 예쁜 타올을 찾는 소비자들이

생기자 강 대표는 타올을 브랜드화

해서 고급화 전략으로 시장을 공략

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이에 1991년 회사를 설립,

타올시장에 뛰어들었다.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당시에

는 브랜드만 가지고 있어, 제조업체

에 생산을 의뢰하고 제품판매만 하

다 3년 전부터 기존 물류창고로 활

용하던 대전공장에 제조시설을 갖

추고 직접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 현

재 (주)무한타올은 연 매출 200억 정

도로, 매트와 슬리퍼 전문 자회사인

(주)카디날데코를 운영하는 등 눈에

띄는 성장을 이뤘다.

(주)무한타올이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끊임없이 변화를

끝없는 변신, 새로움으로 시장을 뛰어넘다IBK기업은행 신사동지점 거래고객

(주)무한타올 강형철 대표이사

글 | 유진아 (자유기고가) • 사진 | 윤상영

| 행 복 을 찾 는 사 람 들 |

일이 무척 짧게 느껴진다고 한다.

“직원들이 하나의 목표로, 한 뜻이

되어야 빠른 변화에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죠. 그러기 위해서는 직

원들과 같이 일하며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바로 회사가 발전

하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직원들과 늘

대화를 하려고 한다. 수직관계가 아

니라 수평관계로 직원들을 대하고

회사 내 분위기를 만들었더니, 혹 문

제가 생기더라도 직원들이 그 자리

에서 바로 대표에게 이야기해 문제

가 빠르게 해결된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약 22

년 동안 회사를 이끌면서 어려움도

있었을 터. 강 대표는 대전공장에 제

조시설을 갖춰 놓을 때 무척이나 힘

들었다며, “원사 구매부터, 제직, 염

색, 봉제, 자수, 포장, 납품까지 한 곳

에서 원스톱시스템으로 작업을 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제조 기계를 전부 외국 각지에서 사

와 공장에 설치하고, 또 원사를 구매

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정

말 어렵더라고요”라고 손사래를 친

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전 직원

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애쓴 덕분

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함께 힘을

모아 응원해준 곳이 있다. 바로 IBK기

업은행이다. 강 대표는 “대전공장을

지을 때 IBK기업은행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처음 이 공장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 꼭 내 것으

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IBK

추구하는 강형철 대표의 마인드에

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

이 고이면 썩기만 한다’인데, 이 말을

항상 명심하고 직원들에게도 강조합

니다. 현재 모습에 안주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발전할 수가 없어요.

쉴 새 없이 변화하면서 노력해야 발

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런 마인드 아래 끊임없이

변화하며 성장하는 회사를 만들고

자 새로운 계획을 많이 세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원사의 다변화다. 여

느 다른 회사들을 보면 생산성을 높

이기 위해 1~2가지의 원사로 제품을

만드는데 (주)무한타올은 대나무에

서 추출한 죽사, 오가닉사, 이집트 고

급 원사 등으로 제품을 만든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색으로 화려함까지

더하고 디즈니와 뽀로로 같은 캐릭터

에 로열티를 지급해 디자인에 활용하

며, 자체 개발한 캐릭터인 울리와 툴

리를 활용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

니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 특히 캐

릭터 울리의 인기가 높다고.

“저희 회사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합니다. 다른 회사와의 차별을 위해,

다양한 고객의 니즈에 맞추기 위해서

지요. 이것이 저희 (주)무한타올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객을 더욱

만족시키기 위해 항상 신경 쓰고 노

력하고 있습니다.”

다양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트렌드

에 민감하게,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

해야 한다는 강 대표. 그는 월, 화는

서울에서 수, 목, 금은 대전에서 일하

며 바삐 움직인다. 그래서 그는 일주

기업은행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고, 대

전공장을 사기 위해 필요한 금액을 전

적으로 IBK기업은행에서 지원해줬습

니다”라며 IBK기업은행 덕분에 지금의

(주)무한타올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IBK기업은행 신사동지점의

박미하 지점장은 “(주)무한타올 또한

저희 IBK기업은행 신사동지점에 얼

마나 많은 도움을 주시는지 모릅니

다. 이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필

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돕고 함

께하는 동반자의 인연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높은 곳으로 도약을 위해 새로

운 도전을 준비 중인 강 대표는 현

재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수출을 적

극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국내시장을

뛰어넘어 해외시장에서도 (주)무한타

올의 제품이 널리 쓰이는 모습을 기

대해본다.

TIP 강형철 대표의 성공 노하우

1. 변화 : 변화하는 자만이 발전한다.

2. 신뢰 : 신뢰를 통해 하나가 되어야 일이 잘 된다.

3. 목표 : 목표가 있어야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

(주)무한타올

대 표 이 사 강형철

본 사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6-8 무한빌딩 (02-548-7412)

공 장 대전시 대덕구 대화동 40-35 (042-638-4825)

홈페이지 www.moohantowel.com

IBK기업은행 신사동지점 박미하 지점장(왼쪽)과 (주)무한타올 강형철 대표.

중소기업 명품전IIBK기업은행 판교테크노밸리지점 거래고객

회 사 명 : ECCO KOREA (에코코리아)

대 표 : 신두철

주 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670번지 유스페이스 1B동 318호

문 의 : 031-628-4800홈페이지 : www.ecco.com/kr

ECCO(에코)는 ‘슈즈는 발에 맞추어져야 한

다’는 브랜드 철학으로 1963년 덴마크에서

시작되어 현재 전 세계 90개국에 약 4,000

개 이상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글로벌 슈

즈 브랜드이다. 가죽 공정부터 디자인, 개

발, 생산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 상위 5위권에 드는 고품질 생

산 회사로 ECCO만의 혁신적인 기술을 자

랑하고 있다. 최고의 슈즈를 만든다는 자부

심의 프리미엄 슈즈 브랜드 ECCO가 모두

의 발을 더욱 편안하고 스타일리시하게 만

들 것이다.

(에코)

“삶의 무게 앞에

당당한 당신을 여성시대로

초대합니다”

MBC 라디오매일 아침 9시 5분~11시

93.9

95.9/106.5

96.5

92.5/91.3

92.3/88.9 89.1

95.9

부산

대구

서울

춘천

목포

대전

광주

학년때혜숙이생각나정말예뻤는데천사가따로없었지

아…예참예뻤어요

우리와는다른나라에서온애같았어요…

와아예쁘다

천사다천사

안녕서울에서온김혜숙이야잘부탁해

얘랑사귄다고소문이자자했었지

안그래

정말그렇게예뻤어요 말해봐요 급장 오늘친구들하고

도서관정리좀해요

아 네

이거…

이거어디에꽂냐니까

어머

야 둘이뭐하는거야

혜숙이가바지를벗겼어 꺄 아

이거어디에꽂을까

흥누구야그게

동창회 모임

나와 혜숙이는 그해 어버이날 올릴 연극에

주인공을 맡아서 친해지게 되었다.

※ <여성시대> 가족 사연을 각색한 만화입니다.그림 | 김곡, 우영미

그후 소문이 잠잠해진 5학년 말… 나는 작은아버지가 계시는 광주로 내려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선배님! 제가 그 누님 연락처 가르쳐 드려요?

마지막으로 혜숙이를 보고싶었는데…

…아

벚꽃나무에 기대어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연극대사를 외우던 혜숙이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며 가슴에 묻어두고 싶다.

4학년…

청순한 그 모습으로….

소문은 순식간에 학교에퍼지고 말았고…

혜숙이는 정말 예뻤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벚꽃이 활짝 핀 어느 날….

둘이서사귄다며

혜숙이하고그렇고그런사이래

…쟤가걔야

바지벗긴애그냥 확 벗겼대

저기빈자리누구니

뭐정말

돼…됐어 이사람아이제만나뭐하게 하하하

왜한번만나보지그래요

혜숙이요

어디간거지혹시소문때문에속상해서

집에가버렸…

뭐야한가하게

야김혜…

숙…

수업시작했는데어디간거니

급장나가서찾아봐요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사줄 것인가?

글 |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아이디 @suhcs)

일러스트 | 조신애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면 어린이날은 무척 중

요한 날이 된다. 지금까지는 ‘모르겠지’ 하고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냥

넘어갔다가는 심각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엄마에

게는 괴로운 5월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엄마의 마음은 이왕 장난

감을 선물한다면 아이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장난감이 아이들에게 좋을까? 아무래도 나이

에 따라 다를 것이다.

네 살에서 여섯 살까지 이 시기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에 관심이

많으며 상상 놀이를 즐긴다. 부모들은 많은 돈을 들여 비싼 레고 블

록이나 퍼즐장난감을 사주지만 아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 놀

이에 빠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꿉놀이세트는 이 시

기에 좋은 놀이감이다. 다양한 창조적 상상을 즐기고, 이를 다른 아

이나 부모와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 무렵의

아이들은 소꿉놀이세트보다는 집에 있는 실제의 물건을 가지고 노

는데 더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장난감이 아닌

어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위험하거나 비싼 물건

이 아니라면 아이에게 실제 사용하던 중고 그릇이나 옷을 가지고 장

난감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다. 비록 헌 물건이지만 아이에게

잘 포장하여 너의 것이라고 선물하면 아이는 의외로 좋아할 수 있다.

상상놀이를 즐기는 나이답게 이 무렵의 아이들은 물이나 진흙, 모

래 등의 놀이감에도 흥미가 많다. 칼라밀이나 아이클레이는 색감이

좋아 인기가 있지만, 어른들이 붙어 있지 않으면 곧 모든 색이 합쳐

지는 비극을 맞게 되니 주의를 요구한다. 권하고 싶은 좋은 놀이도

구는 ‘모래놀이 상자’이다. 모래놀이 상자는 이 시기부터 매우 오랫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동안 가지고 놀 수 있는 일종의 상상력 장난감이다. 시중에서 파는

것도 있지만 아빠가 D.I.Y로 만들어주면 더욱 좋다. 가로 70cm, 세

로 50cm, 높이 12cm 정도의 상자를 바닥은 푸른색으로 칠하고, 겉

은 흰색으로 칠하면 된다. 이 안에는 고운 모래를 잘 씻은 후 말려서

넣어준다. 이제 모래는 아이에게 자신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세계

가 된다. 아이는 작은 인형이나 캐릭터, 소품 등을 이용하여 모래 상

자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만들기를 통해

아이는 정서적인 안정을 찾고 지능을 발달시킬 수 있다. 가족 모두가

여러 재료를 이용하여 나무도 만들고 풀도 만들고 강물을 따라 흘러

가는 배를 만드는 등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까지 이제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늘어났다. 여러 가지 두뇌 기능도 상당히 성숙해져 있다. 하지

만 이제부터 두뇌의 각 영역을 갈고 닦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시기

장난감 선택은 아이의 특정 능력을 향상시켜 줄 수 있는 것으로 맞

추는 편이 좋다. 예를 들어 글씨가 비뚤비뚤한 아이라면 미세 운동

기능이 덜 발달한 경우이므로 요요나 공기, 자석 놀이, 하모니카처럼

미세 운동을 촉진하는 장난감을 사주어 기능을 향상시킨다.

전반적으로 운동을 못하는 경우라면 대근육, 소근육의 근력과 각

종 조절 기능이 문제이다. 이때는 인라인스케이트, 자전거, 농구 게

임, 야구 게임, 연날리기와 같은 몸의 큰 근육을 사용하는 스포츠

놀이가 도움된다. 대개 아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매개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부분 역시 친숙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가 가장 좋다.

이 무렵의 상상력은 좀 더 수준이 높아진다. 아이는 자신의 정서적

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놀이감을 활용한다. 병원놀이 장난

감과 동물 캐릭터는 아이들이 자신의 아픔과 어려움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요즘은 포켓몬 등의 캐릭터에 대한 선호가 강하

지만 포켓몬만 사주는 것보다 현실적인 동물 피규어도 같이 사주는

편이 좋다. 너무 많은 캐릭터는 집안을 어지럽히는 부작용이 있지만,

캐릭터가 많을수록 아이가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는 더 많아지기 마

련이다.

장난감 선택에서 피해야 할 부분 지나치게 시끄러운 장난감, 너무

폭력적인 장난감, 과도하게 비싼 장난감, 너무 복잡한 장난감은 권하

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장난감은 궁극적으로는 즐거움보다는 어려

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런 장난감을 아이가 갖고 놀기

시작하면 분명 엄마들은 ‘좀 조용히 해라’, ‘그러다가 큰일 난다’는 식

으로 부정적인 언사를 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여러 조각으로 나뉘

는 장난감도 상당히 골치 아프다. 한 부분만 빠지더라도 전전긍긍하

면서 아이가 잃어버린 것을 결코 좋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난감은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사주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충

분히 가지고 놀 기회를 주자. 아이들의 장난감 개수는 현재 즐겨 가

지고 노는 장난감을 기준으로 5~7개 정도가 적당하다. 요즘 아이들

대부분은 이미 장난감이 충분히 있다. 문제는 새로운 장난감에 흥미

를 붙이기 이전에 그 장난감을 너무 오래 보아 질려있다는 점이다.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 엄마가 아니다. 장난감을 주었다고 엄마로

서 할 일을 다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장난감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장난

감을 사주고 함께 놀아줄 엄마이다. 값싼 장난감이라도 그것으로 함

께 즐겁게 노는 엄마가 비싼 장난감 뒤에 숨어 아이를 관찰하기에 급

급한 엄마보다는 훨씬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결국, 장난감은 문제가

아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아이와 함께 하려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

이는 그 마음속에서 자신을 열고 놀 수 있다.

집에서 남편과 아침밥을 같이 먹는 건 <여성시대> 녹음방송이 나

갈 때뿐이다. 일주일에 닷새는 따로따로 식사해야 한다. 난 나대로 아

침 일찍 개밥주고 남편의 도시락을 싸고 아침거리를 챙겨 여의도로 향

한다. 아침식사는 가래떡 구운 것 아니면 빵 또는 시리얼 그리고 채소,

과일, 샐러드하고 커피다. 4월 마지막 주는 평일인데도 남편과 아침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챙겨주고, 남편 출근 후에는 <여성시대>

방송을 들었다. 심신이 지친 내게 휴가는 정말 꿀맛 같았다.

일단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볼륨 높여 듣는 <여성시대>는

이상하게 멀고도 가까운 느낌이랄까? 거리가 느껴지다가도, 허수경

씨, 강석우 씨 옆에 내가 앉아있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남편과 동네 밥집에서 외식도 했다. 결혼기념일이었으니까! 병어 된

장 구이, 매생이전, 해물 된장찌개. 제법 맛나고 든든했다. 마지막으로

내온 숭늉까지. 남편은 배불러 못 먹는다고 손사래를 치더니만 갈치새

끼볶음이랑 먹는 맛에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순

천만의 여러 신선한 재료들을 공수해서 조리해주는 밥집이 있다는 건

복이다. 소박하고 흐뭇한 외식에 기운이 난다.

지난해 말부터 힐링 뮤지컬 <아름다운 것들>을 준비해왔다. 대본이

나오고 노래연습하고, 배우들 동선연습에 함께하고, 그사이 꽃샘추위

가 기승을 부리더니 어느 새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었고, 또 이젠 지고

있다. 연습에서부터 공연까지 올림픽공원 안의 봄꽃 축제를 즐기며 초

봄에서 초여름까지 오갔다. 이 근처 동네 분들은 좋겠네. 이렇게 아름

다운 산책로가 있으니…. 열심히 걷는 이들을 멀뚱거리며 바라봤다.

내가 집에 있으니 기르는 강아지 두 마리도 덩달아 늘어져 내 옆에

서 편안하게 낮잠도 잔다. ‘아하! 평일 오전의 텔레비전에서는 이런 것

도 보여주네’ 하며 쉬는 덕에 묵은 빨래들을 죄다 내다 몽땅 빨았다.

목욕탕 발깔개 등등 먼지도 털고 거품도 내고 빨아서 말리니 마음까

지도 개운하다. 우리 엄마가 예전에 외손주 봐주는 것도 65세까지라

더니 슬슬 나도 이젠 일이 무섭다. 겁 없이 일에 덤벼든 건 환갑 전까

지가 아닐까! 우리 일이 체력도 만만찮게 요하는 터라 공연 중에 나는

그야말로 초능력자가 된다.

목을 쓰는 이에겐 잠이 보약인데 공연 마치고 집에 와 화장 지우고

씻고 나면 새벽 1시. 그래도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하니…, 이

랬거나 저랬거나 막은 올랐고 6월 2일까지는 몸도 마음도 잘 지켜 어

찌하든지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 한다. 다들 올림픽공원으로 봄나들

이 오셔서, 내게도 기운 보태주시고 여러분들도 힘 얻어가는 공연이

면 좋겠다. 5월, 가정의 달에!

공연 1막 1장 첫인사는 “지난 1년 동안 보내주신 사연, 실시간으로

올려주시는 사연과 정겨운 노래 듣고 집으로 가시는 길에 ‘아! 인생!

아직은 살만하구나. 인생 참 아름답다. 오늘은 푹 잘 자겠네, 좋은 꿈

꿀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집에 가신다면 전 더 이상 바랄게 없겠네

요”이다. 라디오를 사랑하고 라디오 사연을 들으며 인생을 배워가는

우리에게 따뜻하고 푸근하니 뒷맛이 좋은 공연이었음 한다.

양희은 | 여성시대 진행자

아름다운 것들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같이 먹는 건 <여성시대> 녹음

짧다면 짧은 세월, 그러나 길다면 또 긴 세월을 보내고, 어린 시절

로부터 제법 멀리 왔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요즘의 내 모습은

세월을 한 바퀴 크게 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다.

어린 시절 퇴계로5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방과 후 시간, 그러

니까 야외활동의 무대는 거의 장충공원이었다. 나무로 만든 총을 들

고 옆 동네 아이들과 나름대로 큰 전쟁을 치른 곳도 그곳이었고, 봄

이 오면 쑥을 캐기도 했고, 배고픔 때문인지 장난삼아서인지는 기억

이 나지 않으나 아카시나무 잎을 따서 놀기도 하고 꽃잎을 먹던 곳도

그곳이다.

어린 시절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던 그 ‘아이스께끼’도 그곳에 가면

있었다. 박람회라는 이름으로 큰 행사가 열리곤 했는데, 우리는 그곳

에서 파는 신제품보다는 공포체험 할 수 있는 ‘귀신의 집’ 같은 곳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여름 뜨거운 날은 장충풀장에서 단돈 5원에 입

술이 파래지도록 시원하게 하루를 보내기도 했으며 내 어린 날 추억

의 절반은 그곳 장충공원에서였다.

올해 봄, 딸아이가 그곳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땐 정기 공연이 있다거나 특별한 일 아니면 학교에 그토록 늦게

까지 있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뭐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MT가서

할 짧은 공연 연습을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 연습을 하고 들어오는 횟

수가 적지 않다.

밤을 홀랑 새고 중간고사는 어떻게 치루며, 수업시간에는 어떻게

버텨내려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생고생해서 대학에 들어

갔으니 이제부터는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길 바랐던 우리의 바람은 무

참하게 부서져 버렸다. 예쁜 옷도 차려입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명랑

발랄하게 캠퍼스를 누비는 상상을 했던 것은 무지의 소치였다. 정보

의 부재랄까. 내 딸이어서 걱정이 되는 건지, 실제로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걸핏하면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에 끝나는 바람에 5분 대기조처럼

집에 있다가 호출하기 무섭게 장충공원 쪽으로 달려가곤 한다. 아내

얘기로는 고3 때보다 더 피곤하고 지친다고 한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이어 급히 달려가는 그곳 장충공원. 어릴 때하고는 도로도

달라졌고 공원의 모습도 변했지만, 그곳에서 먼지 폴폴 날리며 뛰어

놀던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다.

장충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먼발치에서 본 공원은

예전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애국가 연주 때인지 대한 늬우스인지 꼭

나오던 그 유명한 장충공원 분수는 멎은 지 오래고, 장충교회도 새롭

게 지어서 예전의 모습이 없다. 이제 장충체육관마저 공사를 하니 어

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만든 것들은 세월에 따라 낡아서 헐고 새로 만들게 되면

서 변해가고 있으나 내 마음속 그 시절, 그 풍경과 그 느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긴 세월 돌아 고향에 온 것 같다.

강석우 | 여성시대 진행자

내 마음의 풍경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세월, 그러나 길다면 또 긴 세

이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라는 고민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엄마 아

빠들에게 공통된 숙제일 것이다. 〈프랑

스 아이처럼〉의 저자 파멜라는 이 책에

서 프랑스 부모들이 육아법의 키워드

로 내세우는 핵심논의를 이렇게 정리한

다.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는 불행

하다!” 프랑스에서는 “댁의 아이는 앙팡

루아군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최고의

치욕이라고 한다. 앙팡루아(enfant roi)

란 프랑스어로 ‘왕 아이’, 즉 언제든 자기

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고, 떼만 쓰

면 뭐든 용인되며, 가족들 모두가 아이

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그래서 마치 스

스로가 우주의 중심이 된 듯 느끼며 행

동하는 아이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프랑

스에서는 이처럼 앙팡루아처럼 키워서

는 아이가 장차 절대 행복해질 수 없고,

아이 스스로도 혼돈과 자제력 부족으

로 고통받게 만드는 최악의 육아 방식이

라고 믿는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들도 어

른과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하며, 간

식도 하루 중 오후 4시경인 구테(gouter)

시간에만 허용된다. 식단도 어른과 동일

한 식단으로 구성되며, 아이 때부터 스

스로 포기할 부분과 가족의 일원으로서

동참하고 공유해야 할 부분을 배운다는

것이다. 프랑스식 육아는 프랑스의 기본

철학에서 출발해 루소에 이르러 꽃을

피우고, 프랑스 혁명과 시민사회를 거치

면서 다양한 사상가와 전문가들에 의해

체계화된 프랑스의 양육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가정이 1~2명의 아이

밖에 없는 핵가족시대의 정점에서 한국

가족의 육아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고민

을 던지는 책이 <프랑스 아이처럼>이다.

아이가 스스로 한 명의 책임 있는 사회

인으로서의 성장을 고민하고, 체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 그래서 자기 자

신보다 함께 살아가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기초를 이 책은

제시한다.

글 |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나와 내 아이가 조금 더 행복해지는 법

《프랑스 아이처럼》

행복한 책 읽기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ㅣ 2013년ㅣ북하이브

프랑스 아이들을 처음 식당에서 만나

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한

다는 책을 만났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의 경제 섹션 기자로 세계시장을 취재

하던 능력 있던 여류기자 파멜라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정리해고를 당하고 망연

자실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곧

이어 출산과 육아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

전하게 되면서, 남편을 따라 낯선 프랑스

파리에 오게 된다. 임신과 출산에 필요

한 여러 가지 정보를 찾고 모으며 첫아

이 출산을 기다리던 파멜라는 프랑스 파

리의 생경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레스토랑에서 얌전하게 소란 피우

지 않고 코스요리를 먹는 유아들의 모

습, 패스트푸드보다 삶은 부추와 파프리

카, 그리고 브로콜리를 웃으며 즐겨 먹는

프랑스 아이들, 생후 2~3개월부터 밤

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는 프랑스 유

아들, 놀이터나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 사달라고 떼를 쓰거나 징징대지 않

는 아기들, 이런 전혀 다른 모습에서 저

자는 우연성과 몇몇 가정교육이 잘된 사

례로만 치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자로

서의 직감으로 취재를 시작하고, 사례를

모으면서, 이러한 현상이 프랑스의 뿌리

깊은 휴머니즘 전통과 독특한 육아 철학

적 사고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

대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하는 부모들의 고민으로 부모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과 개념들이 최근 많

이 등장하고 있다. 미국 화교그룹의 철

저하고 무서운 엄마상을 보여준 <타이거

맘> 사례부터 국내 대치동 학원가 엄마

들을 표현한 <헬리콥터 엄마>, 그리고 최

근 새로운 소비현상으로 주목받는 <스칸

디맘>까지 엄마의 모습은 전혀 다른 형

태의 교육방식을 전제한다. 부모로서 아